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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 참가기
계절을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 참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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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민병진 / Instagram @bj_traces
지친 일상이 버거울 때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는 곳. 에 메랄드 빛 바다를 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곳. 추억 이 깃든 여행지,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안식처. 제주가 우리에 게 전하는 낭만과 위로는 물리적 이동의 편리함 만큼이나 분 명히 더 가까워졌다. 도심과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국적인 매력의 섬, 제주. 우 리나라 최고의 여행지이자, 전국의 걷기 열풍을 만든 올레길 이 있는 보물 같은 이 섬에서 피엘라벤 클래식이 열렸다. 자연 스러운 이유로 자연을 찾아 나서는 우리들. 어쩌면 제주도를 가장 잘 여행하는 방법 중의 하나도 트레킹이 아닐까. 더 많은 사람들이 아웃도어에서 자연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또 한 번의 큰 걸음이 이 가을, 제주에서 시작되었다.
출발 전일 야간 비행기 출발 시간에 쫓겨 배낭을 짊어지고 성급히 나서 는 퇴근 길. “오늘은 자연으로 퇴근합니다.”라는 인사를 남기 고, 공항으로 향한다. 출근 복장 그대로 탑승 수속을 마쳤지 만, 숨 가쁜 반복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사실에 절로 지어지는 미소는 감출 수 없다. 적당한 휴식과 적당한 삶의 밸런스는 일 상의 호흡과도 같은 것. 제주에서 피엘라벤 클래식을 만날 수
있다는 부푼 기대 속에, 늦게나마 마음먹은 대로 도착했음에 감사하며 배정된 숙소에서 노곤한 몸을 뉘어 본다.
1일차, 어리목 탐방로~윗세오름~돈내코 탐방로~돈 내코 원앙 캠핑장 ( 18km ) 새벽 5시부터 하루를 준비하느라 바쁜 트레커들. 정해진 시간 과 약속 따라 움직여야 하는 이런 긴장도 때로는 반갑다. 이번 대회를 함께하는 전 세계 13개국, 400여명의 참가자들. 조금 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를 살피며, 출발을 준비하면서 3일간 같은 길 위에서 이어질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로 버스 에 몸을 싣고 다다른 출발 집결지.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을 지 급받고 정돈된 대열에 맞춰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짜임새 있 게 진행되는 출발 준비에 괜히 더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게 홈 그라운드의 이점이겠지… 트레일이 시작되는 어리목 탐방안내소는 한라산 서북방면의 거점이다. 두 뺨을 스치는 아침 바람에 제법 선선함이 묻어난 다. 그래, 가을이구나. 잠시 이 계절에 머물 수 있다는 설렘과 안도감으로 트레킹 패스에 출발 확인 스탬프를 찍는다. 어리 목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하는 1일차 코스는 탐방로를 따라 어 리목 계곡, 사제비 동산, 만세동산을 거쳐 윗세오름으로 이어
지며, 이후 남벽 순환로를 거쳐 남별 분기점으로 향하는 루 트이다. 체크포인트인 1,700고지 윗세오름 대피소까지의 길 은 일부 경사가 가파른 구간도 있지만, 대부분 적당한 언덕 이라 걷기가 편하고 완만한 데크길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1시 간 가량만 힘차게 올라오면 큰 어려움은 없다. 그늘 없는 풍 경에 아직은 따가운 햇살이었지만, 산과 오름, 그리고 바다가 만나는 탁 트인 풍경에 도취되어 오르다 보면 이내 정상을 마 주하게 된다. 10월의 제주는 아직은 초록빛이다. 그래도 자연의 색상은 언 제고 신선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법.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 해 배낭에 묶인 주황색 플래그가 한라산의 나무들과 자연스 럽게 어우러져 흡사 단풍빛처럼 느껴진다. 연이은 오르막길 에 허기가 느껴질 무렵, 체크포인트에 다다랐다. 한라산은 국 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기에, 점심식사는 건조식량 취사 대 신 김밥으로 제공되었다. 길쭉한 김밥 포장을 신기한 듯 쳐다 보다 이내 능수능란하게 맛보는 외국인 참가자들. 맛이 어떠 냐는 나의 물음에 맞은 편 스위스 청년이 엄지 하나를 치켜 세운다. 함께하는 다양한 이들이 있어 즐겁고 감사한 길. 식 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남벽 분기점까지의 발걸음에 다시 힘 을 실어 본다. 한라산의 남쪽 벽, 남벽분기점. 병풍을 이룬 벽면 자체도 장관 이거니와, 엄청난 크기의 바위들이 박혀있어 멀리서 봐도 아주 웅장해 보였다. 다채로운 한라산의 아름다운 풍광에 연신 카 메라 셔터를 눌러보다, 렌즈가 아닌 두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이내 시선을 멈췄다. 분기점을 지나 이어지는 돈내코 탐방로. 오름과는 다른 너덜길에 발목과 무릎이 조금씩 아파오지만, 동백나무와 조릿대를 비롯한 수많은 식물들이 피곤한 몸과 마 음을 위로해 준다. 3km가량의 도로 구간까지 따라오면 만나
게 되는 1일차 캠프사이트, 돈내코 원앙 캠핑장. 정돈된 시설 과 넓은 공간, 그리고 특별히 준비된 제주 흑돼지 불고기가 하 루를 마친 우리에게 편안하고 푸짐한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
2일차, 돈내코 탐방로~동백길~하원마을 캠핑장 ( 19km ) 새들의 지저귐에 알람 없이 눈 뜨는 아침. 일행과 함께 부랴부 랴 식사를 챙기고 길을 나선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빛 과 함께, 숲이 만들어 준 그늘 속에서 걷는 2일차 여정. 무언 가 여유로운 이 길도 참 좋다. 어제가 경사진 길을 오르는 등 산이었다면, 오늘은 한라산의 둘레길을 걷는 날이다. 동백길 에는 이름에 담긴 동백나무 군락지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계 곡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항일운동의 성지였던 무오법정 사와 제주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주둔소도 자리하고 있다. 곳 곳에서 나타나는 기념비와 묘비들이 궁금했는지, 외국인 참 가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다시 산길에 접어들 무렵, 일행과 함께 익숙한 사람들을 만났 다. 해외 클래식에서 이미 몇 차례 인사를 나눴던 지긋한 독일 인 아저씨와 매년 클래식에 참가하는 싱가폴 친구들. 핸드폰 에 저장된 지난 여정의 사진들을 꺼내보며, 반가운 인사를 나 눈다. 다른 이해관계 없이, 서로를 응원하며 길 위의 도전을 함 께한 인연들. 살면서 각국의 자연을 찾아 사서 고생을 하며, 며 칠을 같이 보내는 경험은 흔치 않을 터. 피엘라벤 클래식을 통 해 계속되는 인연과 만남에 감사하며, 자연과 길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마음도 차츰 영글어 가길 바라본다. 풀냄새와 흙냄새를 맡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 속 깊은 걱 정까지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다부 진 매력을 전하는 제주의 꽃과 돌, 풀과 나무들. 바람에 흔들리 면서도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그네들의 다부진
매력처럼 지금 길 위에 있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삶의 꽃을 피 우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거겠지… 두 다리가 고단해질 무렵마 다, 노란빛 한라산 둘레길 리본이 우리를 다독여 준다. 곧이어 마주한 하원마을 캠핑장. 이튿날 여정을 마무리하는 곳이다. 무오법정사에서 도로구간을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이 캠핑장 은 한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산길 못지 않게 제법 근사한 풍경을 선사한다. 돌담과 돌하르방, 초가집 등 캠핑장 곳곳을 이루는 제주만의 풍경을 신기한 듯 즐기는 외국인 참가자들. 덕분에 나 역시 제주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담담 하게 찾아오는 가을밤. 그리고 계절을 함께 겪으며 켜켜이 쌓 아가는 이야기와 우정. 길 위의 인연들과 추억을 만들고 나누 는 행복에 심취하며 또 하루를 보낸다.
3일차, 서귀포자연휴양림~돌오름길~표고 재배단지~ 천아숲길~피니쉬 ( 23km ) 제주의 가을을 짊어지고 걷는 트레일의 마지막 여정. 오늘은 가장 긴 구간이라 1시간 일찍 출발했다. 클래식 3일차는 크고 작은 오름들을 끼고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로, 울창한 편백 림과 삼림욕장이 포함된 코스이다. 특히 돌오름길은 여러 곳 의 표고버섯 재배장, 숯가마터 등 곳곳에서 자연에 스며든 우 리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자연 속의 삶이라는 조금은 낯선 명제를 우리나라, 제주의 숲을 통해 이방인들에 게 소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우쭐함이 느껴졌다. 연이어 이르게 되는 천아숲길. 돌오름길에서 이어지는 이 숲 길에는 단풍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나무들이 트레커들 을 이끈다. 한라산 둘레길 중 가장 높은 해발 1,000 고지를 통 과하며 조릿대 군락을 지나는 이 구간도 나름의 운치가 있어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한라산 둘레를 발자국과 숨소리, 땀
방울과 응원으로 물들인 클래식 참가자들. 그 모습들을 품어 준 산과 길은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했을지… 깊고 고요 한 가을 숲의 정적 속에 멈춰 서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숲길을 벗어나면 이어지는 포장도로. 4km에 이르는 막판 구 간이 고비처럼 느껴진 순간, 트레일의 깜짝 이벤트에 묵은 피 로가 싹 풀렸다. 위트 있게 적힌 응원 메시지와 함께, 지친 트 레커들을 갈증을 달래 준 쉼터에서의 시간. 작은 성의와 관심 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행복으로 물들게 한다. 이윽고 힘을 내어 포장도로를 내려오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이정표. 무심한 듯 제주스런 돌틈 사이의 이 이정표를 지나 면, 3일간 트레일의 피날레에 접어들게 된다. 애먼 옷 매무새 를 다듬고 크게 걸음을 내딛으며 마주하는 피니시라인. 뜨거 운 박수 갈채와 응원 속에 이렇게 또 한 번 나의 클래식 여정 이 끝을 맺는다. 몇 차례 트레일을 거치면서 쌓인 내공이랄까. 오늘은 분주한 기념 촬영에 시간을 들이는 대신, 차분한 마음으로 자축하며 결승선 풍경으로 눈을 돌려 본다. 하산 코스의 어려움 때문이 었을까, 해가 저문 늦은 시간까지 완주 릴레이가 계속되었다. 첫 국제 행사임에도 앞에서 또 뒤에서 끝까지 애써 준 스텝 분 들, 주최국 참가자로써의 성숙한 면모를 보여 준 대한민국 트 레커들. 그리고 낯선 여정과 환경 속에서도 어울림을 만들어 준 외국인 참가자들까지... 모두가 격려와 감사의 마음으로 뜨 겁게 뭉쳐진 밤을 보낸다. 모닥불 한 켠에서의 푸짐한 저녁 식 사, 신명나는 밴드의 공연과 행운권 추첨 이벤트까지. 여느 해 외 클래식에 견주어도 손색 없는 애프터 파티는 모두의 흥을 돋워 주었고, 특히 음악에 맞춘 기차놀이와 하이파이브 행렬 은 파티의 백미였다. 모든 것이 결국 힘든 일정을 함께 마쳤다 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즐거움이었으리라...
에필로그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제주. 전 세계 트레커들의 축제인 피엘라벤 클래식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화산섬 제주도에서, 그 리고 대한민국 최고봉인 경이로운 한라산에서, 우리는 하늘 과 바다가 맞닿은 풍경을 오르고, 깊고 고요한 원시림 숲길을 걸었다. 10월의 제주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초록의 느낌 이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고,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와 무수 한 발자국들이 그 안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제주의 숨은 매 력을 한껏 느끼며, 이 땅에서의 지속 가능한 트레일의 가능 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 이곳은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겠지... 어쩌면 제주의 진정한 매력은 새로운 장소에 대한 신기함과 놀라움이 아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익숙함과 편안함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광 명소를 찾는 여정에서 벗어나 숨 은 숲길과 산 속에서 느끼게 된 오롯한 평화로움. 제주가 건 네 준 위로와 응원은 그렇게 참 든든했다. 오래 머물지 않는 탓에 더 애틋한 이 계절. 가을이 시작되는 계절의 원숙함 속 에 자연과 길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조금 더 성숙해져 있길 바라며 다음 여정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