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께 여 는
전갑길이 걸어온 길 가야할 길
초판 2쇄 발행 2010년 2월 12일 초판 1쇄 발행 2009년 12월 21일 지은이 전갑길 펴낸이 허빛나 펴낸곳 인디비주얼발전소 책임편집 김창헌 디자인 허빛나
인쇄 대신인쇄
제본 삼우제책
주소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2동 1199-4번지 1F
전화 (062) 434-5860
팩스 (062) 236-3104
이메일 inv1ps@naver.com 출판등록 2009년 11월 24일 제 360-2009-000008호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ISBN 978-89-963638-0-4 03040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지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인디비주얼발전소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잘못 만들어진 책은 구입하신 서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함 께 여 는
전갑길이 걸어온 길 가야할 길
전갑길 지음
책 머 리 에
우리의’ 정치를 꿈꾸며
지금껏 살아온 내력을 갈무리한 책을 엮는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내 놓는 것이 두루 예의라고 생각되어 여러 차례 망설였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이렇듯 책을 선보이기로 작정한 것 은 지역민들과 보다 깊이 있게 소통하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여러 해 정치인이라는 명함을 내밀다 보니 내 이름 석 자 정도는 대 개 아는 듯 했다. 참으로 감사했다. 그 감사에 대한 가장 큰 답례는 건강한 정치행위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러기 위한 첫 번째 노력이다. 내 이름에 담겨 있는 지난 시절들을 소상히 알려 나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의견을 올곧게 받고 싶은 것이다. 이런 태도가 정치인이 가져 야 할 마땅한 의무이자, 지역민들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되었다. 책에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최근의 근황까지를 담았다. 너무 자세 하지도, 헐겁지도 않게 구성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만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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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셈이다. 다만 부끄럽다고 해서 감추는 글쓰기는 하지 않았다. 몇 꼭지는 광주와 광산의 발전에 대한 생각을 실었다. 정밀하지는 않 다. 철학적인 태도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이 태도를 많은 이들에게 검증받고 나면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리겠다고 약속드린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구청장을 역임하며 내가 추진했던 크고 작은 행정도 엮었다. 내 자랑으로 비칠지 모르나 직원들과, 그리고 광산구 민들과 함께 펼친 일들이고 성과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옛 시절을 끄집어내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 다.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내 열정을 발견하면서 스스로 즐거웠고, 그 달리기를 하는 동안 지혜롭지 못한 면면들을 발견했을 때는 먹먹 해지며 괴로웠다. 잘했든 못했든 화려하든 투박하든 모두 내 자산이 면서 부채일 것이다. 자산은 늘려가고 부채는 갚아야 하는 게 세상 의 상식이라고 알고 있다. 정치행위의 복잡성 때문인지 부채와 자산 구분이 쉽지 않았다. 나를 먼저 드러내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갚아야 할 부채와 쌓아야 할 자산 을 함께 가닥치기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할 많은 분들이 있지만 일일이 언급하지 않 는다. 혼자서는 결코 건너지 못할 강들을 여러 차례 헤엄쳐 왔다. 주 변의 힘이 있어서 가능했다. 나는 내가 아닌 ‘우리의’ 정치를 꿈꾼다.
2009년 12월
우리의’ 정치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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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우리의’ 정치를 꿈꾸며 /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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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자부심, 그리고 동지애 / 민주화추진협의회
12
한성슈퍼 사장님의 절대적 후원 / 아내 임형미
23
최고의 스승에게 배우기 시작한 정치 / DJ 수행비서
32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 광주시의원 진출
43
공부해야 할 나라 / 미국 공부
52
큰 정치를 위한 준비 / 공부 1 풀뿌리 힘으로 중앙 진출 / 제16대 국회의원
63 74
경제학사 과정에 편입한 정치학 박사 / 공부 2
84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 / 국회활동
93
모두가 함께 만든 대통령 / 노무현 1
103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 노무현 2
111
아픔·서운함·반성·책·DVD
/ 낙선, 그리고 자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 2006년 지방선거 전후 싸우지 못한 싸움 / 광주시장 경선
118 126 133
바른 변화만이 광산을 살릴 수 있다 / 광산구청장
139
154
미래 동력은 지식, 그리고 여성 / 정치·행정 철학 영산강 문화권이라는 프레임
/ 광산과 광주
문화도시 광주라는 말의 참뜻 / 삶의 질
162 167
해묵은 숙원 / 광주 공군전투비행장 이전 175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게 하는 글쓰기 / 늦깎이 등단
180
184
믿음의 실천 / 나의 종교 잃는 사람 따로, 지킨 사람 따로 / 아버지와 어머니
192
가난이 준 선물, 건강 / 유년시절
203
고등학교 진학의 기준은 등록금 / 광주농고
209
무너진 육군사관학교의 꿈 / 스무 살 안팎
217
태권도와 책에 전념했던 헌병 / 군대생활
223
운명과도 같은 그 해 전국체전 / 체육대학 입학
231
‘명품도시’를 향하여 / 민선 4기 광산구의 노력들 241
주민과 함께 미래를 여는 희망 광산
/ 화보
262
나는‘공론의 힘’ 을 믿고 지지하는 자이다. 서로 희망을 공유하고 미래를 찾아가는 함께 하는 힘’ 을 눈물겹게 따르는 자이다.
《김대중, 그는 누구인가》, 《행동하는 양심》 등 거물 김대중에 관한 책을 지하에서 출판해낸 금문당 출판사 김형문 씨가 나를 불렀다.
“ DJ를 모시게 해 주겠다.”
이번에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곧바로 세상과 뒹굴 수 있는 재야의 길이 훨씬 더 매력 있게 느껴졌다. 나는 주저 없이 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스물여덟 살 청년, DJ를 만나다
1985년 5월 어느 날 동교동에서 DJ를 만났다. 건널 수 없는 큰 강, 가늠할 수 없는 묵직함. 무슨 말을 나눴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곧바로 DJ를 모시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훈련과 검증이 필요했다.
DJ와 YS가 함께 만든 재야조직 민주화추진협의회 회기부 차장으로 들어갔다.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유인물을 만들고 거리에 뿌렸다. 민주주의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이 유일한 힘이었다. 살아남았다’는 80년 5월의 기억이 부채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힘겨움. 배고픔. 가족에 대한 그리움…. 이런 원초적인 감정조차 ‘사치’로 돌리며 스스로 부끄러워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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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자부심, 그리고 동지애 민주화추진협의회
1985년 5월 어느 날 동교동에서 DJ를 만났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무슨 말을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 도로 혼미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스물여덟 살 청년에게 DJ는 건널 수 없는 큰 강과도 같았다. 소리 없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 럼 그 내면을 가늠할 수 없는 묵직함이 DJ에 대한 내 느낌이었다. 강 의 빛깔은 청초했으나 뛰어 들면 익사할 것처럼 두려움이 생겨났다. 두려움에 수반되는 감정은 ‘무섭다’기 보다는 ‘설렘’이었다. 곧바로 DJ를 모시는 기회가 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훈련과 검증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맨 처음 맡은 일은 민주화추진협의회 회기 부 차장이었다. 민추협은 한 해 전인 1984년 5월18일에 광주항쟁 4 주기에 맞춰 서 창설되었다. 1970년대 신민당의 소장파로서 양대 기둥이었던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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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YS가 함께 만든 재야조직이었다. 결성 당시 DJ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고, YS 는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둘은 공동대표였음에도 세 상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공동대표를 대신해 민추협 직무대행을 맡았던 이는 후농 김상현 씨였다. 1985년이 되어서야 DJ는 국내로 들어왔는데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했다. 각종 성명서 및 기자회견 등을 통하여 민추협은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다. 재야조직의 형식을 띠고는 있었지만 재야를 지향한 건 아니었다. 출범 당시부터 민추협은 정치활동 재개를 목적으로 한 사 전 조직을 표방했고, 까닭에 비정치인은 구성원에서 제외되었다. 궁 극적으로 정당건설이 목표였기 때문에 규약이나 강령도 채택되지 않 았다. 민추협의 위상이 이런 식으로 설정된 이유는 당시 DJ와 YS가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기 때문이었다. DJ와 YS의 영향력 아래 있으 면서 향후 정당 건설을 예정하고 있어서 명시적인 운영틀은 의도적 으로 생략한 임의단체가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이 창설된 지 8개월째인 1985년 1월18일 신한민주당(신민 당)이 창당되었는데 창당 주도세력과 구성원이 대부분 민추협 관계 자들이었다. 같은 해 2월12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은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선거 직전인 2월8일 DJ가 귀국함으로 써 선거열기가 더욱 뜨거워지기도 했다. 총선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48 석을 차지하였고, 신민당이
67석, 민주한국당이 35석, 한국국민당이 20 석을 차지하였다. 그밖 에 무소속이 4 석, 신정사회당과 신민주당이 각 1석씩 차지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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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23살의 꽃다운 나이, 어린 청년이 죽었다 나는 울었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를 죽인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보다 그 어린 청년이 마냥 가엾어 하루 종일 울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울고 있을 수만 없었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1987년 1월에서 6월까지 민추협 동지들과 함께 거리에서 먹고 잤다 ‘아침이슬’을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다 마침내 그는 6월 항쟁으로 부활했다 이 땅의 민주화는 그로 인해 거대한 뿌리를 내렸다 당시 거리에서 본 추모시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빼앗긴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일어서서 말하리라 오늘의 분노, 오늘의 증오를 모아 이 땅의 착취, 끝날 줄 모르는 억압 이제는 끝장내리라
수백만 명의 대중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고 박종철 열사의 장례식 날. 두건을 쓰고 있는 이가 필자. 필자 옆에 있는 이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김형문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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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의 선거제도는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여서 지역 을 막론하고 여당인 민정당 출마자가 선출될 수 있는 구조였다. 광주 전남에서도 민정당 국회의원이 어렵지 않게 뽑혔으니 다른 지역을 생 각할 것도 없었다. 여당 입후보자들은 마음껏 돈을 뿌리고, 공직사 회를 제 손발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군 부재자 투표함을 열면 여당 에 압도적인 몰표가 나올 정도로 군사정권은 선거에 개입했고, 세상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늘 봐왔던 터라 그냥 그러려니 했다. 사정이 이러한 마당에 신민당의 원내 1야당 진출은 놀랄만한 사건 이었다. 신민당을 제외한 나머지 야당들은 ‘민정당 2중대’라는 소리 를 들을 정도로 제 존재 이유가 희박한 정당이었다. 실제로 민주한 국당이나 한국국민당의 구성원들은 군사독재정권에 협력함으로써 정치활동 규제를 피해갈 수 있는 이들로 이루어졌었다. 12대 총선이 있을 때까지 이 두 정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야당들은 국가정보기관 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아 움직였다. 신민당만이 유일한 정통야당이 었던 것이다. 민추협 활동과 신민당의 등장과 더불어 군사정권은 형식적으로 나마 정치활동 규제를 대부분 풀었다. 곧바로 민주한국당 소속 의 원 32명이 연쇄 탈당해 신민당에 입당했다. 또 다른 야당과 무소속 당선자 일부가 합류해 신민당 의석은 103 석으로 불어났다. 민정당 148석 대 신민당 103 석이라는 팽팽한 양당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신민당이 제12대 총선거를 통해 원내 제1야당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도 민추협은 원외에 남아 DJ와 YS의 활동기반이 되었 다. 민추협은 또한 재야단체와도 연합하여 ‘거리’에서 민주화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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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하게 전개했다. 신민당이 제도 안에서, 재야세력이 제도 밖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민주화운동을 헌신했다면, 민추협은 제도 안팎의 경계에서 자기활동을 하면서 양쪽을 연결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디딤돌이라고 해서 민추협이 지닌 독자적인 의미가 엷은 건 아니었 다. 한국정치사에서 민추협은 제도권 밖에서 제도정치 활동을 펼쳤 다는 독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제도권 밖의 민주화운동 세력 은 표면적으로나마 정치적 중립을 표방해야 자기 근거가 단단해지는 법이었다. 재야에 터를 잡고 제도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들 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경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치조직이었다. 1985년 귀국 당시 DJ는 성명서를 통해 “재야 민주지도자, 그리고 민주적 야당 인사들과 협의해서 국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를 다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에 민 추협의 역할이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추협 활동은 금문당 출판사 김형문 대표의 도움과 지도로 시작 됐다. 여수 출신인 김 대표는 용기와 지성을 겸비한 인생의 대선배였 다. 1981년에 출판사를 설립한 그는 《김대중, 그는 누구인가》, 《행동 하는 양심》 등 김대중에 관한 책을 펴내며 세상을 향해 발언했다. 광 주의 피를 머금고 출발한 철권통치 아래서 ‘내란음모’의 주인공을 세 상에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DJ는 김 대표의 용기를 높이 사 민추협 총무국장에 중용했고, 나는 그 밑에서 실무를 맡았다. 민추협은 DJ와 YS가 완벽하게 지분을 반반씩 나누어 만든 조직이 어서 모든 분야에 50:50의 안배가 되어 있었다. 총무국장을 동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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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맡으면 부국장은 상도동, 부장은 다시 상도동, 차장은 동교동인 식이었다. 편집국 체제도 마찬가지였다. 상도동과 동교동은 각각의 업무를 진행하는 한편 상호견제하면서 협력했다. 거리에 나가 눈물콧물 범벅이며 시위를 하는 것도 민추협 구성원 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위는 민추 협이라는 조직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당대를 살고 있는 의식 있는 시 민이라면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이기도 했다. 급여는 없 고 언제나 투쟁의 선봉에 서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끼니는 라면 으로 때우거나 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사람 은 없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곧 올 것이 라는 희망이 있었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자잘한 사익은 버린다 는 자부심으로 민추협 사무실과 거리를 오고갔다. 이때는 한마디로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했다. 동교동 사람들에게는 자의 든 타의든 80년 5월의 기억이 부채처럼 짓누르고 있어서 ‘살아남았 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 만 모두가 어떤 자부심이나 의무감에 움직였고, 여기에 수반되는 크 고 작은 고통들은 함께 나누었다. 이 같은 나눔을 우리는 ‘동지애’라 고 이름 했는데 실상은 동지애를 넘어선 무엇인가가 우리들을 지배 했던 것 같았다. 김형문 선배는 단순히 조직의 선임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많은 책을 권했고, 나는 권하는 대로 읽었다. 컴퓨터 통신도 인터넷도 없 는 시절에 세상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창구는 언론매체와 더불어 책 이 유일했다. 전두환 정권의 통제 아래 발행되었던 언론은 ‘좋은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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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이라 하더라도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지혜가 요구되었다. 행간을 읽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비판적인 안목으로 언론이 쏟아내는 정보 와 논평을 섭취하려면 분석적인 능력과 사전지식이 필요했다. 이 대 목에서 책의 역할이 컸다. 아마 내 일생에 가장 짧은 시간에 정치, 민 주주의 이념서적을 많이 탐독한 시간들이었으며 세상과 정치가 무엇 인가를 깨닫게 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김 선배와 나는 함께 일하고 ‘데모’하면서 수시로 대화했다. 내가 묻고 그가 대답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가끔씩 논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김 선배는 내게 책을 권했다. 신기하게도 그 가 권해준 책은 잘도 읽혔다. 대화와 논쟁을 통해 김 선배는 내 ‘갈증’ 을 파악했던 것이다. 약 1년 후 나는 민추협 편집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추협 기관지 《민주통신》의 편집부장을 맡았다. 바른 소리를 하는 언론이 드문 시절이었다. 국민들은 공식적으로 발행되는 신문보다 거리에 나붙 은 대자보를 더 신뢰했다.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안언론’이 나 올 수 있는 환경도 갖춰지지 않았었다. 군사정권을 향해 ‘직격탄’을 날리곤 했던 《민주통신》이 당시로는 거의 유일한 ‘정론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주통신》은 역, 버스터미널, 대학가, 지하철 입 구, 시위 현장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 광범위하게 뿌려졌다. 유 인물은 던지듯이 ‘뿌린 것’은 아니었다. 한 뭉치의 《민주통신》을 들 고 담당한 지역으로 이동해 나눠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손을 내밀곤 했다. 원칙적으로 합법적인 간행물은 아니었 다. 정권에 반대하는 행위는 대부분 ‘불법’이어서 ‘합법’이 오히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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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경찰 따돌리는 방법 민추협 총무국장이었던 금문당 출판사 대표 김형문 선배 밑에서 실무를 맡았다. 그는 많은 책을 나에게 권했고 나는 권하는 대로 읽었다. 정치, 민주주의, 이념 서적 등 짧은 시간에 비판적인 안목을 길러야했다. ‘갈증’은 그와의 대화와 논쟁으로 채워나갔다. 민추협 기관지 《민주통신》을 만들었다. 편집부장을 맡았다. 《민주통신》을 들고 거리에 나가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가져갔다. 《민주통신》을 나눠주다가 사복경찰의 낌새가 느껴지면 슬며시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미행을 따돌렸다. 버스를 탈 때는 맨 마지막에 타고, 맨 마지막에 내리는 등 미행을 따돌리는 방법이 있었다.
화순이 고향인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시위 도중 독재정권의 최루탄을 맞아 죽음을 당했다. 7월9일, 시청 앞 광장 에서 그의 노제가 열렸다. 6·29선언으로 사면·복권된 김대중 씨와 민추협 동지들이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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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했던 시절이었다. 《민주통신》을 나눠주다 사복경찰의 낌새가 느 껴지면 슬그머니 군중 속으로 파고들어 서너 차례 대중교통을 갈아 타면서 미행을 따돌리곤 했다. 사람 없는 곳이나 골목으로 움직이지 말고, 사람들 틈바구니로 파고들어야 하며, 대중교통을 탈 때는 맨 마지막에 타고, 맨 마지막에 내릴 것 등 미행을 따돌리는 방법을 배 우기도 했다. 신뢰받는 ‘대안언론’이라고 해서 《민주통신》을 만드는 과정이 마 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인쇄기술에 컴퓨터가 도입되지 않은 시절이 었다. 원고를 확보한 다음 가편집을 잡고 인쇄소에 식자를 맡겨 초판 을 출력하면 ‘싸움’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상도동과 동교동 사이 에 지면 배치를 놓고 때로는 내밀하게 때로는 고성이 오가면서 편집 싸움이 시작되었다. 원고의 양, 사진 크기, 톱기사의 배치 등에서 어 떤 식으로든지 1:1의 배분이 맞아야만 했다. 때로는 단어 하나, 문 구 하나를 가지고 치열한 공방이 오가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DJ 와 YS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만든 조직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는 ‘따로’였던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DJ와 YS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 해 많은 고민을 했다. 보안상의 문제도 큰 신경을 써야했다. 《민주통신》을 만들어 조직 과 지방에 보급하는 일은 엔테배작전을 방불케 했다. 인쇄소 주변에 는 늘 사복경찰이 잠복해 있기 때문에 보안 속에 인쇄를 하고 최대 한 빠르게 작업을 끝내야 했다. 사람 드문 야밤에 조직적으로 움직 이며 화물차에 인쇄된 《민주통신》을 싣고 지방으로 날랐다.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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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손에 《민주통신》이 쥐어지기까지 경찰의 수없는 감시체제를 뚫 어야 했다.
1986년 2월6일 YS가 전격적으로 신민당 입당을 선언하면서 민추 협의 형식적 역량은 YS의 지분에 가깝게 줄어들었다. 이듬해 6월25 일이 돼서야 DJ는 연금이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YS의 신민당 입당과 DJ의 연금해제 사이의 기간에 민추협의 활동은 훨씬 더 야성적이었다. 전부가 빠져나간 건 아니었으나 YS의 빈자리 는 그만큼 DJ로 메워졌고, 의사결정을 비롯해 서로가 꾸는 ‘꿈’의 동 질성이 더 강화되었다. 조국의 민주화가 큰 꿈이었고, 그 꿈의 현실적 형태가 DJ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함께 꿈꾸고 뛰었기 때문에 최루가스에 눈을 뜰 수 없어 도, 경찰서에 잡혀가 두들겨 맞아도,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까지 배 가 고파도 참아낼 수 있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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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슈퍼 사장님의 절대적 후원 아내 임형미
당초 서울에는 혼자 올라갔다. 대학 졸업 후 얼 마 안 있어 올라갔으니까 상식에 비추어 당연히 혼자여야 옳을 것이 다. 하지만 내게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에 따옴표를 붙인 까닭은 그 때까지만 해도 결혼식을 못 올렸기 때문이다. 딸도 있었다. 나와 아 내는 요즘 말로 ‘과속스캔들’의 당사자였던 셈이다. 6년이라는 세월 이 지나서야 아내와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대학 시절 친구 같았던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서로 가 한눈에 반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곧바로 가까 워졌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내는 동생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 면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여러모로 뒷바라지 해주었다. 나에게는 우 렁각시 같은 존재였다. 보성군 조성면 장흥 임씨 집안에서 2남4녀 중 큰 딸로 태어난 아내는 씀씀이가 넉넉했고, 사람과 세상을 큰 그림으
한성슈퍼 사장님의 절대적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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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볼 줄 알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홀로 상경하여 몇 개월 정도를 보내고 나니까 아내와 딸이 너무 도 보고 싶었다. 서울과 광주 양쪽에 마음을 둔 생활은 가끔씩 일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정치로 뜻을 펴보겠다며 혈혈단 신으로 세상과 부딪히는 모습이 겉보기에는 치열한 것 같지만 내면 의 쓸쓸함과 고독이 감춰진 치열함이었다. 이 치열함이 한계에 부딪 히면 다시 보따리를 싸서 광주로 가버릴 것 같은 불안한 마음도 들 었다. 궁극적으로 정치의 무대는 광주여야 하겠지만, 당시의 조건에서 출사와 학습의 무대는 서울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지라도 가족 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안정되고 마음이 약해질 때 보 따리를 싸고 고향으로 ‘유턴’하는 나약함을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았 다. 아내와 딸과 더불어 서울생활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집도 구하고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할 것인데 내 손아귀에는 말 그대로 땡전 한 푼 없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도 막막했다. 혼자서 민추협 활동을 할 때야 상관이 없지만 딸과 아내 와 함께 생활하려면 일상적인 수입이 있어야 했다. 선배들이 가끔씩 주는 용돈은 교통비를 하기에도 빠듯했다. 여기저기 사정을 말하자 한 선배가 마침 아는 사람이 내놓은 슈 퍼마켓이 하나 있다면서 생각이 있으면 인수를 돕겠다고 했다. 선배 와 함께 현장답사를 갔다. 종로 보신각과 조계사 중간 지점의 한 예 식장 옆에 붙어 있는, 손바닥만한 구멍가게였다. 구멍가게 처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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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한성슈퍼 사장, 나는 종업원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민추협 선배가 아는 사람이 슈퍼마켓을 내놓았다며 인수를돕겠다고 했다 천만 원이 필요했다. 한 친구가 내게 돈 빌리는 노하우를 가르쳤다 돈 빌려줄만한 사람의 명단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 내가 곧 죽게 생겼다 언제가 됐던 꼭 갚을 테니 50만 원만 급히 송금해주라. 계좌번호는 … 전화를 끊고 나니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결과적으로 1300만 원이 입금됐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너무나 작은 구멍가게 그러나 아내는 명실공히 한성슈퍼 사장이 돼 가게를 잘 꾸려나갔다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아침과 저녁에 일을 하는 종업원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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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슈퍼’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과연 저 구멍가게를 가지고 입 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는 현금장사니까 돈은 벌지 못하더라도 생활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선배의 설명이었다. 한성슈퍼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보증금 1,300만 원이 필요했다. (쌀값으로 환산하면 요즈음 돈으로 3,500~4,000만 원 정도 금액이다.) 막막했다.
그렇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막고 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 었다. 일단 인수할 뜻을 전달하고 이사를 추진했다. 형님들에게 약간의 돈을 얻었다. 집을 장만하고 가게를 얻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겨우 이사비용 정도에 불과했다. 늘 내게 베풀기만 했던 형님들이었다. 그나마의 돈을 받을 자격도 내게는 없다는 생각 을 했다. 당신들 살림도 어려운 처지에 꼬깃꼬깃한 돈을 봉투에 담아 건네는 마음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는 입장도 아닌 데다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민주화 운동’을 하 고 있는 막내를 형님들은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나보다는 아내 와 딸에게 격려와 안부말을 더 간절하게 전했다. 자리 잡지 못한 동생 의 가족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아프게 전달됐다. “서울에서 한집 살림을 할 생각입니다. 결혼 비용이라 생각하시고 집 얻을 돈을 좀 만들어 주십시오.” 장인어른께 읍소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었다. 예쁘고 귀한 큰 딸을 데려가는 것도 모자라서 돈까지 달라하니 얼마 나 기가 막혔을까.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 내 딸애와 함께 직장 도 없이 살고 있는 어떤 젊은 녀석이 나에게 돈을 달라 하면, 우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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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을 한 대 후려치고 나서 다음 수순으로 넘어갈 것 같은 심정이다. 아무튼 그때 장인어른에 대한 내 입장은 참으로 죄송하다는 것이었 지만, 내가 걷고자 하는 정치의 길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은 강했다. 그 강함을 인정해 주어서였을까. 장인어른은 흔쾌히 “그러마” 하 고 내 부탁을 받아 주었다. 약속된 미래가 아무것도 없는 사위에게 장인어른은 조건 없는 믿음을 보내 주었다. 그 믿음에 한없이 고마우 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마음을 크게 짓눌렀다. 장인어른이 내게 마련해준 돈은 1,000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작은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하는 데는 부족하지 않은 액수였다. 하지 만 한성슈퍼까지 인수해야 하는 계획을 달성하는 데는 부족했다. 한 성슈퍼에 가까운 종로의 ‘다세대주택’으로 이사해서 이런저런 살림 을 장만하고 나니 300만 원이 남았다. 다세대주택이라고 해서 요즘 집 같은 모양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독주택임이 분명한 집을 세를 놓기 위해 적당히 개조한 구조였다. 공동으로 쓰는 수돗가와 마당이 가운데 있고, 크고 작은 방 네댓 개가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한성슈퍼를 얻기 위해서는 1,000만 원이 부족했다. 경제적인 의미 에서 내 신분은 백수였다. 누군가 나에게 돈을 빌려 준다면 그것은 그냥 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냥 줄 만큼 돈을 넉넉히 가진 이도 없었거니와 설혹 재산가가 있다 하더라도 손을 내미는 것은 결례라고 생각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함께 활동하는 선배들에게 그냥 흘 리는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이러다간 한성슈퍼도 남에게 넘어가는 것 아닌가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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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내 하는 모습이 답답했던지 어느 날 한 친 구가 내게 돈을 빌리는 노하우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본인도 어려 울 때 써먹은 방법인데 통할 거라고 했다. 그 친구가 가르쳐준 방법은 간단했다. 우선 돈을 빌려줄만한 가능 성 있는 지인들 명단과 전화번호를 적는다. 필요한 돈을 지인들의 숫 자로 나눈다. 나눠서 나온 금액보다 약간 높게 빌릴 돈을 책정한다. 전화를 건다. 그 돈이 없으면 죽을 만큼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무조 건 보내 달라 말하고, 확답을 받지 않더라도 계좌번호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는다. 사업이 어쩌고, 구멍가게가 어쩌고, 하면서 말이 길 어지면 대부분 빌려주지 않기 때문에 이 방법이 제일 좋다는 ‘노하우’ 를 친구는 내게 전수해 주었다. 친구, 선배, 후배, 생각이 나는 대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다음 그 중에서 약간의 여유라도 있을 법한 이들을 추렸다. 30명 정도의 명단이 만들어졌다. 누구에게 맨 처음 전화를 할까, 한동안 망설였 다. 제비뽑기 하듯 사람 한 명을 정해 놓고 냅다 전화를 걸었다. 선배 가 가르쳐 준 ‘노하우’ 대로 시나리오를 읊었다.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곧 죽게 생겼다. 언제가 됐던 꼭 갚을 테니 50만 원만 급히 송금해주라. 계좌번호는 ….” 전화를 끊고 나니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사기를 쳐본 적은 없지 만 꼭 사기를 친다면 이런 식일 것 같았다. 한 번 저지르고 나니 두 번 째 세 번째는 더 쉬웠다. 사흘에 걸쳐 30명에게 전화를 했다. 휴대전 화가 없던 때라 귀가 시간에 맞춰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바로 받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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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있고 두세 번 전화를 걸어야 연결이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1,300만 원이 입금되었다. 인수자금뿐만 아니라 운영 자금까지 넉넉하게 확보가 되었다. 한성슈퍼 일을 시작했다. 아내 는 명실 공히 한성슈퍼 사장님이 되었고, 나는 종업원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항상 바빴던 종업원은 아침과 저녁에만 일을 했다. 아주 작은 가게였어도 장사는 아주 잘 되었다. 그냥 앉아서 물건 을 팔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던 구멍가게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 이 필요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문을 열고 가게 앞에 음료수나 과 일, 제과업체의 기획상품 같은 것들을 적당히 진열하고 나서 민추 협 사무실로 출근했다. 저녁에 돌아와서는 다시 그 물건들을 비좁 은 가게 안으로 들였다. 종업원인 나는 저녁에 가게로 와서 이런 일 들을 도왔다. 아내는 불평불만 없이 가게를 잘 꾸려갔다. 그냥 앉아서 오는 손님 에게 물건을 팔기만 하면 될 것 같아 보여 처음에는 아내 고생을 몰랐 다. 어쩌다 쉬는 날 종일 가게에 앉아서 아내의 일과를 엿볼 기회가 있었다.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다. 오십 원짜리 사탕을 사러 온 꼬마나 비닐봉지 가득 술과 안주를 사가는 어른이나 아내에게는 똑 같은 손님이었다. 어쩔 때는 앞뒤 없는 자존심 같은 게 발동하기도 해 차라리 내가 막노동판에라도 나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들 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가게 일에 전념해 주었다. 가족과 함께 서울생활을 시작한 지 10개월 즈음 되었을 때 동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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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연락이 왔다. 그 동안 민추협 생활의 성실성을 인정받은 것인지 정식 비서 자격으로 DJ를 곁에서 모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동교동 가 까운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그러려면 가게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 다. 갑자기 받은 연락이라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한 처지였다. 몇 군 데 분산해서 그 동안 저축해온 돈을 결산해 보았다. 신협이나 신용 금고 같은 데서 아가씨들이 날마다 가게로 찾아와 정기적금을 넣는 식이었다. 수기(手記)로 기록한 것이라서 일일이 계산해 봐야 했다. 놀랍게도 빌린 돈 1,300만 원을 갚고도 남는 돈이 저축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아서 다음날 은행에 가서 확인했는데 틀림이 없었다. 아내 와 나는 10개월 만에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가게 보증금에 빌리고 남은 저축금액이 고스란히 순이익으로 떨어졌다. 비록 아내가 사장 님이긴 했지만, 종업원 자격으로나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벌어본 돈 이었다. 한성슈퍼를 훌륭하게 운영해준 임형미 사장님의 절대적 후 원으로 나의 첫 번째 정치활동이라 할 수 있는 민추협 시절이 순조로 울 수 있었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한성슈퍼를 서둘러 정리하고 동교동 근처 에 반지하방을 전세로 얻었다. 동교동에서의 본격적인 정치활동은 한성슈퍼 사장님인 아내가 마련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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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내 아내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어려운 시기, 나를 믿고 내 옆에 있어준 아내 그때는 내 옆에 당신이 있어준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네 나를 믿고 기다려준 임형미 씨 “미안하고 고맙네
DJ 수행비서 시절,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와 함께한 우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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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스승에게 배우기 시작한 정치 DJ 수행비서
전두환 정권 시절 DJ는 한국 민주주의의 여정 에서 누구보다 정통한 길을 걸은 현실정치인이자 이른바 ‘3김’ 중 가 장 독보적인 지식과 철학을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거의 유일하게 한 반도를 넘어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지닌 당대의 정치지도자였다. 내게는 민추협활동의 동기를 제공해준 ‘오늘 이 자리’의 희망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인물의 수행비서가 된다는 건 그 자체로 벅찬 일 이었다. 하지만 내게 ‘DJ수행비서’는 직업이 아니었다. 일용할 양식 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차라리 한성슈퍼를 몇 년 더 운영하는 게 나았 을지도 모른다.
DJ는 나의 정치스승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유일했다. 그 분은 나를 고용했고, 나는 그분을 수행했다. 특별히 DJ가 나를 가르 치지는 않았다. 수행과정 자체가 배움이었다. 그의 말, 행동,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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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귀한 만남
DJ는 나의 정치스승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유일했다. 그의 말, 행동, 나아가거 나 물러서는 정치적 판단, 나는 시나브로 정치를 내 두뇌와 몸에 새기게 되었다. 내가 DJ에 게 받은 가장 큰 ‘사교육’은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다듬는 데는 지극한 원칙에서 출발하고 정치에 이르러서는 대중의 눈높이와 한국사회의 현 단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구체적인 행 동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산 현충원 행사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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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 조직운영, 나아가거나 물러서는 정치적 판단 등을 보조하면 서 나는 시나브로 정치를 내 두뇌와 몸 곳곳에 새기게 되었다. 대학 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지만, DJ를 수행하면서 부터는 차라리 안 배우기를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다 반듯하 게 ‘DJ정치’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선험이 없는 백지상태가 오히 려 낫다는 판단이 드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DJ는 내게 ‘직접’ 정치를 가르치기도 했다. “정치는 이 렇게 해라” 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삶의 큰 어른으로서 여러 차례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고는 했다. 외국인을 만나서 대화할 때의 매너, 회의를 진행하는 방법, 모든 일에서 준비가 갖는 중요성, 삶의 원동력으로서 책읽기의 의미 …. 정치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일 하더라도 갖춰야 하는 덕목들이다. 다시 말해 정치는 생활에서 동떨 어진 유별난 어떤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정치가 다른 게 있다면 세 상사의 여러 대목들을 궁극적으로 총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세 상의 여러 분야가 코끼리의 발목, 귀, 코, 꼬리 등으로 제 영역을 차 지하고 있다면, 정치는 그것들의 종합으로서 코끼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을 DJ를 통해 얻었다. 다른 정치 지도자들이 어떠한 태도와 철학, 습성을 갖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 하나, 적어도 DJ 만큼 완벽하지는 못해 보였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DJ가 천재적인 인물이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 한다. 이에 대한 대중적 수사가 ‘정치9단’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고 생각하지만, ‘천재적’이라는 말 속에는 ‘타고 났다’는 뜻이 내포되 어 있다. 이럴 경우 DJ의 재능을 선천적인 감각 속에 가둬버리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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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범할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좌한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면, DJ는 엄청나게 노력하는 인물이다. 일단 그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 하지 않았다. 준비 없이 일에 임하거나 처신을 가볍게 하는 사람은 결코 중용하지 않았다. 빼어난 두뇌를 가진 분이었음에도, DJ는 항 상 메모를 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머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지나간 일 모두를 통째로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DJ는 메모를 통해 매우 섬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국정치사에서 DJ는 최고의 연설가로 꼽힌다. 그의 연설 장면을 보면 아주 쉬우면서도 감각적이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겉으로 만 봐서는 즉흥연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즉흥이 아니다. 연습의 결과 다. 연설이 예정되어 있을 경우 DJ는 따로 마련된 장소로 가서 직접 연설문을 작성했다. 그러고 나면 비서들이 원고를 검토한 다음 반듯 한 정서로 대필해 DJ에게 건네줬다. 이때부터 DJ는 연습을 시작했 다. 30 분 연설이면 보통 세 번 정도, 약 두 시간 가량 연습했다. 연습 을 하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 DJ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연습을 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이 DJ 의 생각이었다. 연습을 한다는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머리에 담는 데 머무르지 않고 몸에까지 이식시킨다는 의미다. 머리가 아닌, 몸에서 나오는 말은 듣는 이에게 전달되는 호소력이 다르다. 완성도 높은 연설은 대중들에게 단단한 믿음을 준다. 연습이 뒷받침될수록 실제 연설은 자연스럽기 마련이어서 대중들의 감화, 감동 정도는 크 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회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회의가 잡히면 하루 전에 꼭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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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회의 안건과 관련된 자료를 검토하고, 가까이에 있는 비서들이 나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변 인물들에게 부담 없이 의견을 구했 다. 간혹 몇 마디를 더 주고받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준비과정이었 으므로 이때는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예정된 회의시간이 오면 어떻게 진행하고 결론을 이끌어 낼지 항상 궁금했다. 실제 회의과정을 여러 번 지켜본 결과 역설적인 상황이 자주 발생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충분히 민주적인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지 만, 결국 회의 결과는 DJ의 의중대로 끝이 나곤 했다. 민추협 회의이 든, 평민당 시절 국회의원들과의 회의이던 간에 DJ는 항상 구성원들 에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발언자의 말이 다소 엉뚱하고, 본류에서 벗어나더라도 그걸 막지는 않았다. 구성원들의 발언이 끝 나면 DJ는 마지막에 그 내용들을 종합했다. 차후로 미뤄야 할 내용 과 당장에 적용시켜야 할 제안들, 논리적으로는 맞더라도 현실적 결 함이 있는 주장, 현실적으로는 옳으나 좀 더 논리를 가다듬어야 될 사안, 사실관계가 잘못된 이야기 등으로 갈래를 친 다음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구분했다. 지켜본 입장에서 DJ 의 종합은 ‘숨이 막힐 정도’로 깔끔하고 정연했다. 당초에 엉뚱한 발 언을 했던 사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마련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이후 회의에서 침묵하기 일쑤였다. 간혹 DJ의 발언에 작심하 고 논쟁을 펼친 이들도 있었다. 이 경우 적어도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는 DJ를 이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런 식의 의사결정 과정을 몇 번 거치다 보면 참석자들의 말수가 줄어들었고, DJ의 발언에 동의만 해주는 모양새를 취하게 된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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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고 열망하는 희망의 눈빛들
1987년~1990년도까지 4년여 동안 DJ 수행비서로 일했다. 이 시기 나는 정치의 시작과 끝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독재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 야권 의 통합과 분열, 정치권의 이합집산, 야당의 탄생, 광주민중항쟁의 부분적 결실…. 나는 DJ와 함께 하며 DJ의 눈으로, DJ의 행동으로 이 모든 것을 경험했다.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군중이 운집했던 보라매공원 시국강연회 그 열기. 그 외침. 그 뜨거움. 그 간절함. 그날 모였던 사람들의 눈빛들. 갈망하고 열망하는 희망의 눈빛들. 나는 희망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그때 알았다. 희망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가를 그때 알았다.
1987년 12월16일에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유세. 기호3번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차량 연설. 그가 가는 곳엔 언 제나 사람들이 운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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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다 회의에 참석하는 외부인사가 보기에 회의는 마치 ‘DJ의 뜻대로’ 만 진행되는 과정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짙었다. 몇몇 재야인사들이
DJ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재야인사 들의 발언이 이해는 가지만, 그것은 DJ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확실한 것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DJ는 특정인사나 논리를 결코 배제 하지 않았고, 또 누구보다 사전에 준비를 많이 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DJ는 모든 부분에서 치밀했고, 완벽을 추구한 사람이었 다. 함께 일하는 비서진들이 DJ를 ‘신처럼’ 모실 수밖에 없는 이유이 기도 했다. 누구든지 비서로 입문할 당시에는 제각각 나름의 목적이 있었겠으나 하루이틀 DJ를 겪다 보면 모신다는 그 자체가 자랑스럽 고 보람찼다.
1987년 ~1990년까지 약 4년여 동안 한 차를 함께 타는 DJ의 수행 비서로 일했다. 내 일생에 최고의 영광인 셈이다. 최측근에서 한 차 를 타고 모신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물론 경호원들이 따로 있었지 만, DJ를 모시면 007가방, 민중의 지팡이, DJ의 커피통을 한꺼번에 들고 다니며 챙겨야 하기도 했다. 아침 조찬 참석에서부터 저녁식사까지 DJ 옆에 있어야 했다. 일요일 도 없었다. DJ는 천주교 신자로 일요일 미사에 내가 동행해야 했다. 내 입장에서 이 시기는 백지상태에서 현실정치를 배우는 과정이었 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와 겨루어 ‘투표에서 이기 고 개표에서 졌다’는 1971년이 DJ 제1의 전성기라고 본다면, 87~90 년의 시기 또한 DJ 제2의 전성기라고 할만 했다. 미국 망명생활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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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모내기 봉사.(위) 군부독재정권이 가장 두려워했던 김대중. 가택연금 당시로 ‘벽 속에 갇힌 민주주의 지도자’와 동지들은 담장 너머 로 민주주의를 외쳐야 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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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 1985년 2월8일 귀국한 이후 곧바로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고, 같은 해 3월6일 해금되었으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사면복 권이 이뤄지지 않아 여전히 대외적인 정치활동은 할 수 없었다. 공교 롭게도 내가 수행비서로 일하게 될 즈음부터 DJ는 당국의 탄압에 맞 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수행비서 일을 그만 둘 때까지 의 활동내역을 대략 정리해 보았다.
•YS와 신당창당을 선언 [1987. 4.8] •두 번째 가택연금 [1987. 4.10] •가택연금 해제 [1987. 6.25] •6·29선언 [1987. 6.29] •사면복권(‘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 등) [1987. 7.9] •17년 만에 광주 방문, 망월동 묘역 참배. 28년 만에 목포, 하의도 방문. [1987. 9.8] •13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1987. 10.] •평화민주당 창당대회에서 총재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87. 11.12]
•13대 대통령 선거 낙선 [1987. 12.16] •13대 총선, 평화민주당 제1야당 부상, 사상 최초 여소야대. [1988. 4.26]
•야 3당 총재 회담, 광주학살 진상규명 등 5개항 합의 [1988. 5.18]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합당 ‘민주자유당’ 출범 [1990. 1.22] •지자체 전면 실시 등 4개항 요구하며 13일간 단식 [19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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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동안 나는 DJ를 보좌하면서 정치의 시작과 끝을 압축적 으로 경험했다. 국민의 힘에 의해서 독재 권력이 무너져 내리는 과 정, 야권의 통합과 분열, 제도정당과 재야세력의 역동적인 관계, 정치권의 이합집산, 힘 있는 야당의 탄생, 광주항쟁의 부분적 결 실 등 마치 춘추전국시대처럼 많은 사건과 숱한 말들이 만들어지 던 때였다. 스스로 축복이라고 느낀 점은 이러한 시대를 DJ의 눈으로, DJ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배 움이었다. 대중의 언어로 널리 알려진 DJ의 정치철학은 아마도 ‘서 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다듬고 나아갈 좌표를 설정하는 데는 지극한 원칙에서 출발하되 실제 정치 에 이르러서는 대중의 눈높이와 한국사회의 현 단계를 충분히 감안 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정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지금도 나는 공부와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 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서 즉흥을 배격하고 준비를 중요시한다.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고, 복잡한 정책 용어를 대중의 언어 로 ‘번역’하는 일의 중요성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는 편이다. 또 내 정치적 인맥의 저변 확대를 돈이나 힘이 아닌 논리와 설득, 실현 가 능한 비전을 통해 이루려 애쓰고 있다. 이 같은 내 행동에 대한 평가 는, 정치에만 한정 짓는다면 궁극적으로 유권자가 내려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나의 노력들은 적어도 내가 나를 평가하고 채찍질 하는 기준들로서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기준들은 DJ에게 직간접적으로 ‘사교육’을 받은 것들이다.
최고의 스승에게 배우기 시작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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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밴, 정치인을 판단하는 ‘선입견’ 중 하나가 최초의 입문과 정에서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다소 문제 가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여전히 버릴 수 없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내가 DJ에게 받은 마지막 ‘정치수업’은 풀뿌리민주주의, 곧 지방 자치에 관한 것이었다. 지방자치는 당시 DJ의 정치역정과 일치했고, 현실정치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내 목표와도 다르지 않았다. 1991 년 DJ와 평민당의 힘으로 만들어낸 지방자치 선거에 나는 내 정치 인생의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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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광주시의원 진출
1987년 대선 패배, 제1야당으로 평민당의 원내 진출, 3당 합당으로 인한 호남 배제 등의 정치일정을 겪으면서 DJ는 지방자치제도를 ‘승부수’로 띄웠다.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저변의 논 의는 있었으나 중앙정가에서 깃발을 든 세력은 DJ를 중심으로 한 평 민당이 유일했다. 당시 DJ의 입장에서 지방자치제도의 도입은 명분 과 실리 모두를 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카드였다. 지방자치제 도입을 주장하는 DJ의 언어는 간결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 현할 수 없다. 시장, 군수, 도지사도 직접 뽑아야 하고, 또 이들을 견 제할 수 있는 시의원, 군의원, 도의원도 지역민들의 손으로 선출해 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전진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방자치제 도가 뿌리를 내리면 중앙정치에 만연한 줄세우기 같은 정당의 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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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의회 의원선거 신민당 기호2번 전갑길 만 34살. 지방선거에 도전하기로 했다. DJ 비서일을 그만둬야 했다. 말을 꺼내는 것이 쉽 지 않았다. “총재님 말씀대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싶습니다. 광주시의원에 나가겠습니다.” “생각 좀 해보겠네. 다시 부름세.” 며칠 뒤 나를 불렀다. “내려갈 준비 하게.” 그러나 지방의회 공천권을 쥐고 있는 조홍규 의원이 DJ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 의원이 생각해 둔 공천자가 있었다. DJ는 조 의원에게 “그 동안 자네가 나한테 신세를 지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자네 신세 좀 지면 안 되겠는가. 전 비서를 받아 주게 나” 라고 말하며 나를 추천하는데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23명의 초대 광주직할시의회 의원 중 최연소 당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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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도 차츰 엷어질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 치고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사실 이 같은 논리가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었다.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범국민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합의사항이기도 했다. 다만 3당 합당으로 거대한 기득권이 된 민자당은 이런저런 핑 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DJ는 즉시 도입을 밀어 붙였던 것이다. 지방자치제도의 도입은 한국정치에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게 분명했 다. 그 당시 공무원들의 정치성향은 100% 여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정치 판단이야 따로 있었겠지만 선거 때마다 공 무원들은 여당의 나팔수, 여당의 부정선거에 조직적으로 동원되었 다. 선거가 시작되면 관권선거, 금권선거가 판을 치곤했는데, 이는 대부분 여당의 선거행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금권선거도 관권의 도 움이나 묵인 하에 이뤄지는 것이어서 사실상 금권선거는 관권선거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어 단체장이나 지방의회에 서로 다른 정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진출하게 되면 여당의 동원체제로서 공직사회의 역할이 현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았다.
1992년 대통령 선거를 내다보면서 공무원을 ‘내 집안’으로 꾸리려고 했던 민자당은 당연히 지방자치제 도입을 미뤘고, 여기에 균열을 내 야 했던 DJ는 지방자치제 도입이 시급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양 측 다 대통령 선거라는 정략적인 계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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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제도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대의명분은 DJ가 틀어쥐고 있었고, DJ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지방자치제도의 도입 은 시대적인 과제였다. 국민들 대다수도 DJ의 주장에 동의했다. 문 제는 민자당이었다. 민자당이 움직이지 않으면 지자체 도입은 사실 상 불가능했다. 어떻게 민자당이 움직이게 할 것인가. 민자당의 태도에 변함이 없 자 1990년 10 월8일 DJ는 지자제 실시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 어갔다. 단식 13일째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면서 정국은 급 반전했다. 마침내 민자당은 지자제 도입에 동의했고, 선거일정은 이 듬해 1991년 6월로 잡혔다.
1991년 당시 내 나이는 만 34 살이었다. 세상의 나이로 보면 젊다 는 게 맞겠지만, 정치의 나이로는 한참 어리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 었다. 정치에 대한 꿈을 한 단계 더 뒤로 미룰 것인지, 지금 도전할 것 인지가 고민됐다. 당시의 정치 목표는 국회의원이었다. 오랫동안 DJ 를 모시면서 더 배우고, 정치인맥을 더 넓히면 좀 더 안정적인 길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지금 도전하자’로 모아졌다. 동시에 시의원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결심이 섰다. 처음부 터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는 게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 었다. 설혹 국회의원이 된다 해도 의정활동을 올곧게 하려면 밑에서 부터 한 단계씩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올라와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 것이 DJ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지방의회에서 지방행정을 공부하고 주민들에게 충분히 인정을 받은 다음 국회에 진출해도 늦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주민은 나를, 나는 내 스스로를 검증해볼 수 있는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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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야 무슨 일을 하던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1991년 지방선거에 도전하기 위해서 우선 거쳐야 할 관문은 DJ의 비서일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큰 어른에게 ‘그만 두겠다’는 말을 꺼 내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DJ는 내게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을 맡 겨 놓은 터였다. 당시 나는 DJ의 수행비서를 그만 두고 국회총재실에서 자료담당 홍보비서일을 했다. 그 즈음 DJ는 본인이 정치를 그만둘 경우 자서전 을 쓰고,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집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DJ는 내게 관련 자료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 다. 일종의 특명이었다. DJ는 한국 현대정치의 거물이었다. 자신과 관련된 숱한 기록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 터였다. 자료의 범위를 어떻 게 잡느냐에 따라 일의 성격이 달라졌다. 단순히 부지런하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세련된 판단력도 필요했다. 1990년 겨울부터 1991 년 봄이 될 즈음까지 약 6개월 동안 DJ 홍보비서라는 직함을 지니고 자료를 모았다. 국립도서관, 언론사 자료실, 국회도서관, 국회속기 록 등을 참빗으로 머리카락을 훑어 내리듯이 뒤졌다. 요즘처럼 인터 넷이 있거나, 전산화가 되어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주요 단어를 검 색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없었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서 파일로 작성하는 일은 저수지 물을 ‘막고 품는’ 것과 다름없는 중 노동이었다. 중노동 후에는 일정한 체계에 따라서 분류한 다음 의미 있는 자료들을 추출하는 작업을 했다. 부지런하면서도 동시에 명석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리된 자료를 중간 중간에 보고 드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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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짜 시의원의 긴장 정치의 출발. 초짜 시의원인 나는 하루하루가 긴장이었다.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 다. 각 분야 전문가들을 만나 식견을 듣고 듣는 것이 초짜 시의원에게는 큰 공부였다. 무조 건 현장으로 뛰었다. 주민들의 민원 해결, 내 의욕은 온통 거기에 있었다. 지역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을 의제화했다. 연말에 열리는 나의 의정보고회는 늘 주민들이 함께 했다. 가장 큰 기쁨이었다.
93년 12월 열린 의정보고회. 나의 손님은 주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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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나보다 DJ가 더 뿌듯해 했다. 나로서는 모았을 뿐이었지만, DJ 에게는 자신의 역사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예컨대 스스로도 까 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연설문들이 내 손을 거쳐 전달되면 DJ는 크게 즐거워하면서 내 노고를 치하해 주었던 것이다. 어딘가에 DJ 관련 자 료들은 더 숨어 있을 터였고, 그런 자료들을 좀 더 찾아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사정이 이런 마당에 DJ에게 ‘그만 두고 지방정치에 도전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꺼내는 것이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말을 꺼내 자마자 단박에 거절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주변 여 건을 조성한 다음 DJ에게 말을 꺼내야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보따 리만 싸면 될 수 있게끔 조건을 확보해 놓으면 DJ도 나를 내려 보내 줄 것으로 보았다. 지방의회 공천권을 쥐고 있는 조홍규 의원(1988~2000 : 13·14·15대 국회의원, 광산구)에게
공을 들였다. 하지만 조 의원은 내가 요청한 시
의원 공천을 받아 주지 않았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당시 초 선의원이었던 탓에 행보를 조심스럽게 가져갔던 것도 같고, 나의 목 표가 국회의원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서 경쟁자로 인식하는 듯도 했 다. 사실 지방선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내 요청은 약간 무리가 있는 대목도 있었다. 이미 광산구의 공천자는 정해진 것으로 도 보였다. 주변 여건을 먼저 만들겠다는 내 작전은 ‘실패’했다. 난감했다. 뾰 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달리 방법이 없는 이상 정면 돌파를 해 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용기를 내어 DJ에게 내 뜻을 알렸다. 간명하 게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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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님 말씀대로 풀뿌리 민주주의부터 공부하고 싶습니다. 광주 시의원으로 나갈 수 있게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DJ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곧이어 “생각 좀 해보겠네. 다시 부름 세”라고 말했다. 며칠 뒤 DJ는 국회 총재실에서 나를 불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뜻을 꺾어야 하나, 한 번 더 요청 해야 하나,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치 DJ를 처음 만날 때의 마 음처럼 혼란스러웠다. “내려갈 준비 하게.”
DJ의 말은 매우 간결했다.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무슨 말을 꺼 내야 할지 허둥대고 있는데 DJ는 인터폰을 누르고서는 총재실 비서 에게 조홍규 의원을 부르라고 전했다. 무언가 더 나눌 이야기가 있을 까 싶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DJ는 “내려갈 준비하려면 바쁠 것인데 뭐 하고 있나 …”라면서 내게 나가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다른 말 을 찾지 못했다. 그저 인사만 꾸벅 하고 총재실을 나왔다. 얼마 뒤에 조홍규 의원이 나를 불러서 지역구 공천을 확정지었다.
DJ와 조홍규 의원은 내 문제를 놓고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DJ가 조 의원에게 나를 지방의회 후보자로 받으라고 말했을 때 조홍규 의 원이 정면에서 거절을 했던 것이다. 당시 조 의원은 “나 역시 갑길이는 아끼는 동생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에게 추천권을 주십시오. 다 음에 꼭 갑길이를 내 보내겠습니다”라면서 DJ에게 반대의 뜻을 분명 하게 했다. 그러자 DJ는 조 의원에게 약간 화를 내는 듯한 목소리로 “그 동안 자네가 나한테 신세를 지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번에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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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자네 신세 좀 지면 안 되겠는가. 전 비서를 받아 주게나”라고 말 하면서 나를 추천하는데 물러서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시 두 분 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당직자 중 한 명이 내게 말해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로서는 약간 충격이었다. DJ의 비서진들에게 DJ는 한없이 큰 인물이었다. 누군가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던 것도 아니 었는데 모시다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느껴졌다. 때문에 내 문제를 놓 고 이처럼 어색한 대화가 오고갈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더불 어 나를 챙겨주는 DJ의 깊은 마음까지도 읽혀 여러모로 송구스러웠 다. 정치이력이 쌓이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시의원 이든, 국회의원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공천과 관련해서 이른바 ‘나 중’은 공천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DJ와 조 의원의 이견은 대략 9년 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와 조 의원의 당내 경쟁으 로 재현되었다.
1991년 6월20일 제1대 광주직할시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이 때는 의회만을 구성하는 선거였다. 단체장 선거는 4년 뒤로 예정되 었다. 지방의회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 놓은 4월9일 평민당은 재야 및 구 야권 출신의 인물들을 영입해 신민주연합당으로 외연을 확장 시켜 재출범했다. 선거 결과 광주에서는 모두 23명(신민당 19명, 무소속 4명)의 시의원이 뽑혔고, 지역별로는 동구 4명, 서구 9명, 북구 7명,
광산구 3명이었다. 23명의 초대 광주직할시의회 의원 중 나는 최연 소 당선자였고, 광산구 하남, 첨단, 비아, 월곡 1·2동의 주민들을 대 표하는 지방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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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야 할 나라 미국 방문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1999년 가을이었다. 미문화원이었다. 당시 광주미문화원은 민주화 시위로 없어지고 서 울미문화원 소속 광주지역담당자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미문 화원으로 한번 방문해 주라는 것이었다. 용건을 물었다. 한국과 미 국의 상호 발전을 위한 미국 방문을 요청한다고 했다. (차세대지도자 초청프로그램, International Visiting Pro이른바 ‘IVP’
gram)이었다. 미국무성에서 진행하는 사업으로 각국의 차세대 지
도자를 초청해 한 달 동안 미국의 각 곳을 견학시켜주는 프로그램이 다. 방문자의 요청에 따라 미국 어느 기관이든, 단체든 방문이 가능 했다. 일정 가운데 일부만 미국 측에서 잡는다. 경비 또한 미국 측에 서 제공한다. 집에서 나올 때 택시비부터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 올 때까지 모두 미국무성에서 알아서 한다. 당시 미국무성에서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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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우리가 다스린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이만한 기회도 없었다. 무엇보다 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200년이 넘은 미국의 지방자치, 홈룰(Home Rule, 우리 동네는 우리가 다스린다)의 핵심정신을 구현해 내고 있는 곳이 미국이었다. 책과 논문을
통해 미국의 지방정부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지만 직접 보고 듣는 내용은 부럽고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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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한국에서 10여 명을 초청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광주전남의 경우 한 명 꼴이었다. 들뜨지도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나는 광주광역시의 회 3선 의원이었다. 미국무성의 ‘차세대지도자 초청프로그램’ 참여 요청은 미국이 한국 사회에서의 내 위치를 확인하고, 앞으로 내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칠 인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차세대지도자 초청프로그램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여했던, 그 선정 기준이 철 저하다는 것을 들어온 터였다.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다. 프로그램 진행 의도에는 미국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반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한국 현대사 과정을 비롯한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비판적 사고를 견 지하고 있었다. 미국무성의 프로그램 의도에는 분명 방문자에게 미 국의 위력을 보여주고 과시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시선을 긍정 또는 호감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미국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사회 안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넓히고 확고히 하려는 데 있었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이만한 기회도 없었다. 분명 미국 은 공부해야 할 나라였다. 전 세계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자, 한 달 동안 작심하고 미국 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자, 미국 전역을 살피며 한국과 미국과의 발전 성 있는 관계 설정, 균형에 대해 고민해 보자, 이런 생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나는 시의원으로 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깊이 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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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책과 언론을 통해 접한 미국의 지방자 치제도는 시의원으로써 부럽고 부러웠다. 이에 관한 논문을 모두 찾 아가며 읽을 정도였다. 한국 사회가 분명 배워서 적용시켜야 할 부분 이 적지 않았다. 서울미문화원으로 갔다. 관계자와 인터뷰를 했다. 놀라웠다. 나 에 대한 너무 많은 것을 그들은 ‘입수’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도 갖고 있지 않을 자료를 그들은 확보하고 있었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내 가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까지 그들은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로 유감을 표했다. 한국 사람으로서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고 인권 문제이기도 했다. 관계자는 “우방관계에 있는 미국과 한국이 서로 발전적인 방향으 로 나가기 위한 사업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의견교환 차원”이라고 설명하며 분위기를 누그러트렸다. 나는 ‘내 견해에 따 라 미국 사회를 둘러볼 수 있는지’ 다시 확인하고 인터뷰를 끝냈다. 일정을 짰다. 11월6일부터 12월4일까지. 미국 측의 공식 5일 일 정을 빼고 25일. 막상 일정계획에 들어가니 둘러볼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먼저 다녀온 사람을 수소문 해 의견도 물었다. 내가 짠 일 정은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시의원을 세 차례 맡으며 그만큼 사회 에 대한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 정치 · 행정 · 환경 · 문화 · 경제 ·시민 단체 ·도시계획 등 놓치지 말아야 할 게 끝도 없었다. 다시 일정을 짰다. 빡빡한 일정으로 대충 훑어보는 것은 도움이 되 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방문 기관을 줄였다. 그 기관에서 빼놓지 않고 살펴봐야 할 것을 정리했다. 만나봐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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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볼 사항, 요청할 자료 등을 정리했다. 내 메모는 공책 한 권 분량으 로 가득 채워졌다. 워싱턴 공항에 내렸다. 피곤기가 몰려왔다. 장기 탑승에 따른 것도 있었지만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서 펴낸 《미국 대도시의 지방자치》 와 서정갑 교수의 《미국정치의 과정과 정책》, 이 두 권을 비행기 안에 서 소화해 냈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노암 촘스키의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일정 기간에 읽기로 했다. 출구에서 나오자 미국무성 담당자와 한 한국인이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한국인은 한 달 동안 나를 안내할 통역사였다. 이들과 함께 IVP 일정을 총괄하는 ‘메리디안 인터내셔널 센터(Meridian International Center)’로 향했다.
1790년 미국의 수도로 지정된 워싱턴은 계획도시답게 깔끔하다는 것이 첫 인상이었다. 모든 거리와 건물이 정확히 배치되고 정돈된,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진 도시였다. 겨울인데도 나무들이 우거진 공원들이 시원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환경을 배려한 도시계 획에 눈이 갔다. 메리디안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내가 방문할 단체의 안내문건을 받고 미국무성 담당 국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공식일정을 시작했다. 미국무성이 정한 공식 일정 5일은 워싱턴에 집중됐다. 펜타곤(미국 국방부, 건물 외형이 오각형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백악관, 국회의사당,
상공회의소를 둘러봤다. 미국 정책의 수립과정, 미국의 안보 정책 등 의 브리핑이 있었다. 내가 관심 있게 들은 것은 상공회의소에서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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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미국의 재계 흐름을 설명한 브리핑이었다. 미국 기업의 사회공헌 이 주 내용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본산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미국이지만 이들의 기업문화에는 변치 않는 전통이 있었 다. 즉 미국 기업들의 사회 환원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제아무리 돈을 벌어도 사회에 기여한 게 없으면 존경받지 못하는 분위기는 물 론이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다하느냐가 기업의 엄연한 생존 조건이 되고 있었다. 아니,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은 더 많은 돈을 벌 기 위한 투자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정상적인 기업 활동의 한 분야 로 자리 잡고 있었다. 기업이 불황일 때에도 사회활동을 축소하기보 다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기업들의 사회 환원 활동을 보면 금액 면에서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돈의 액수에 비해 효과를 제 대로 내고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당시 미국 상공회의소 브리 핑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던 것도 이 부분이다. 미국 기업들은 전략적이고 차별적으로 사회공헌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 기업들처럼 별반 차이 없이 이것저것 다 하는 식이 아니라, 제 품 혹은 기업 이미지와 맞는 어떤 사회공헌 활동을 전략적으로 찾 아내고 집중하고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수준까지 이르고 있 었다. 또 하나는 지역사회에 대한 기업의 관심이었다. 지역사회의 가장 필요한 분에에 집중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지역사회에 대한 기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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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 못 잔 보람 비행기에 오를 때 내 예상치보다 미국은 훨씬 많은 것을 안겨줬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최 대한 활용하려 밤잠 설치며 자료를 뒤지고 주말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논문을 보느라 살다 시피 한 보람이 있었다. 방문할 기관에 관한 자료뿐만 아니라 그 기관에서 만날 사람까지 조사해 온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관계자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주위 사람 들을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내 완벽주의 성격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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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일자리 창출과 싸고 좋은 상품을 제공하는 이상으로 받아들 이고 있었다. 큰 재정지원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기관들의 수요를 세 밀히 파악하고 지원하고 있었다. 뉴욕, 애틀랜타, 일리노이, 시카고, 콜로라도 등을 돌았다. 도시 개발과정, 다민족정책, 행정체계, 공원녹지정책 등을 살피고 카터 센터, 시카고역사박물관, 실리콘밸리, 링컨생가 등을 방문했다. 미 국 방문은 비행기에 오를 때 내 예상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안겨줬다. 톡톡한 공부가 됐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 밤잠 설 치며 자료를 뒤지고 주말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논문을 보느라 살다 시피 했는데 좀 더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 나 방문할 기관에 관한 자료뿐만 아니라 그 기관에서 만날 사람까지 조사해 온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짧은 시간임에도 관계자와 깊이 있 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의 자료요청에 관계자들은 큰 호감을 가지며 성실히 준비해 줬다. 한 시민단체모임 단체장은 주소를 남겨 달라고도 했다. 한국에 돌아가도 참고 될 만한 자료를 계속해 보내 주겠다고 했다. 미국 방문에서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하와이주에 있는 미 태 평양사령부(U.S. PACOM)를 방문했을 때다. 오하우섬 중심부 산정 꼭 대기에 위치한 이곳은 태평양과 동북아시아를 담당하고 있는 사령 부다. 미국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 하나가 초 대형 상황판이었다. 크나큰 작전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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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닌 태평양 전체를 모니터하고 있는 상황판이었다. 태평양에 떠 있는 모든 배들이 붉은 점으로 표시돼 있었다. 각자의 임무를 맡 은 전문가들이 줄줄이 앉아 분주하게 태평양의 상황을 체크하고 분 석하고 결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태평양에 있는 배들의 이동경로와 배에 실은 물자 등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군사강대국, 미국의 힘을 인정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방문 중에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미국의 지방자치제 도였다. 풀뿌리민주주의의 꽃이 그곳에 만발해 있었다. 미국의 지 방자치제도를 살피려 일리노이주와 시카고주 그리고 콜로라도주 ‘지방주의회 컨트롤타워’를 돌았다. 이번 내 미국 방문의 핵심이었 다. 책과 논문을 통해 미국의 지방정부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지만 직 접 보고 듣는 내용은 사뭇 다르게 내게 다가왔다. 홈룰(Home Rule, 우리 동네는 우리가 다스린다),
지방자치 핵심정신에 다시 한번 감명 받
았다. 지방자치의 본래 의미는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이 다. 200년이 넘은 미국의 지방자치는 이것을 충분히 구현해 내고 있 었다. 200년 넘은 역사와 더불어 각 주마다 정해진 형태 없이 다양하 게 발전했다. 보통 인구 5천명~ 5만명 수준의 풀뿌리 자자체가 주민 의 참여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위 힘 있는 자리는 모두 선거를 통해서 뽑아 서로 견제한다. 지 방법원의 판사, 유언 검증 판사, 검찰총장 혹은 검사장, 감사원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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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로 뽑는다. 교사도 경찰도 소방원도 지역에서 뽑고 봉사로 이뤄 진다. 한국이 중요한 행정 서비스의 인사권과 재정권이 모두 중앙에 있는 반면 미국의 공무원은 지역의 책임이다. 지역이 권리행사를 한 다. 한국의 공무원이 지역을 단순한 근무지로 받아들이며 항상 중앙 을 의식하고 있는 반면 미국의 공무원은 그 지역 사람의 일원으로 생 활하며 자기 일처럼 지역에 관심을 쏟아내는 것이다. 지방정부가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도시계획에서부터 마을에 주유소가 들어서는 작은 부분까지 주민들의 의견을 묻고 그 의견이 반영된다. 무엇보다 ‘한 동네’라는 작은 단위에서 시작되는 행정은 그 처리 과정이 인간적이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를 키운 것도 지방자치라 할 수 있다. 오바마는 24 살 때 시카고 남부로 건너가 풀뿌리운동을 시작했다. 시 카고는 미국 현대 풀뿌리운동의 고향이라 할 만한 곳이다. 다양한 풀뿌리조직들이 활발하게 지역을 움직이며 훌륭한 풀뿌리운동가를 배출했다. 오바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바마는 시카고 지역 안에서 민주주의 핵심 가치를 몸으로 체득했다. 지역 내에서 수많은 정책 수립에 고민하며 미래의 미국을 생각했다. 미국 국민을 규합해 낼 수 있는 지도력을 그 안에서 갖추게 된 것이다. 상대를 무조건적 으로 비방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며 설득하는 오바마의 스타일도 시민운동가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기질에서 나왔다 하겠다. 시민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자연스레 스민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콜로라도주 ‘지방주의회 컨트롤타워’였 다. 이곳은 50여 명의 연구원이 상주하며 지방자치를 고민하는 연구
공부해야 할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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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할 수 있는데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50개주 지방정 부가 운영자금을 거둬 운영되고 있었다. 가령 한 지방정부가 어떠한 법안 조례 등을 검토하고 있다면 이곳 연구소에서 세밀하게 검토해 이에 따르는 문제점과 효과, 지역에 미 치는 영향 등 모든 것을 분석해 그 지방정부에 보내주는 식이다. 다 른 지방 정부의 새로운 법안, 조례가 나오면 그것 또한 철저히 분석해 각 지방정부로 내려 보낸다. 지역 정책 사례를 모아 발전성 있는 방향 을 모색하고 각 지방정부가 추진할 수 있도록 권한다. 실패한 정책에 대해서는 원인을 분석하고 그 내용을 또 각 지방정부에 전달한다. 지 방주의회 컨트롤타워는 지방정부가 성급한 사업 추진으로 인한 예 산 낭비를 줄이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 는 것이다. 미국의 지방자치제도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 지방주의회 컨트롤타워에 있었다. 한국에도 앞으로 꼭 필요한 기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회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나로서는 지방자치의 힘이 한국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임을 의심치 않는다. 한국은 95년 민선 자 치단체장을 선출한 이후 아직 갈 길이 먼 것이 사실이다. 국민의 정 부 시절 옛 동사무소를 ‘주민자치센터’로 전환하고 주민의 자치적 기 구인 주민자치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그 위원회라는 것이 법적 지위와 권한이 불문명하여 대부분 요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 실정 이다. 더 많은 연구와 시도가 필요하고 진정한 지방자치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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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치를 위한 준비 공부 1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1949년 7월4일 ‘지방 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시작됐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선 거는 뒤로 미뤄졌고, 1952년 4월25일에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후 1956년, 1960년에 각각 2대, 3대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나 지방의회에 주민참여를 바탕으로 한 정책결정권과 시행권을 부여하 고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지방의 문제는 그 지방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라 할 수 있다. 이 때 문에 국가권력, 즉 중앙정부를 장악한 세력들은 한사코 지방자치제 도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 첫 번째가 무장경관 300명을 국 회 내에 진입시켜 야당의원을 내쫓고 지방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전환시킨 1958년 이승만 정권의 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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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으로 부활한 지방자치제도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다시 좌초됐다. 그 해 6월 박정희 군사혁명위원장은 포고 령 제4호를 반포하여 지방의회를 해산시켰고, 9 월1일에는 ‘지방자 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자치기능을 완전히 정지시켜버 렸다. 임시조치법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지방자치 기능을 사실상 없앴다. 유신 헌법 부칙 제10조에 “이 헌법에 의한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 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지방자치 기능이 헌 법이 보장하는 제도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박정희 정권의 이 같은 조치 는 ‘헌법 파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의 부칙 제10조는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 이후 대통령 직선 제를 골자로 헌법을 개정하면서 삭제되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은 헌법 개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뒤따라야 할 ‘지방의회의원선거법 개 정’을 지연시키며 실시기한을 넘겼다. 이에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 가 13일간의 단식농성을 하면서 조속한 실행을 촉구한 끝에 지방자 치제도는 부활했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지방의회만 구성되었고, 김 영삼 정부 들어서 단체장으로까지 선거가 확대되었다. 실로 30년 만에 지방선거가 부활했고, 지방의회가 꾸려졌지만, 아 쉬운 대목이 많았다. 상당수 입후보자들은 풀뿌리민주주의 실현이 라는 본연의 역할을 꿈꾸기보다는 ‘명예’를 목적으로 선거에 뛰어들 었다. 실제로 지방의원은 무보수명예직이기도 했다. 이 또한 자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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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확대를 최대한 막으려는 중앙정치권의 의지가 작동된 결과였다. 지방의원의 명예직은 지방자치가 정착된 많은 선진국가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제도였다. 지방자치의 모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전통에 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많은 선 진국가의 지방의원들은 적지 않은 보수를 지급받는 실정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거전에 뛰어든 이들은 대부분 돈이 많은 사 람들이었다. 신민당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게 공식처럼 받아들여지 던 시절이었다. 돈을 가진 이들이 명예를 좇아 지방의회 선거에 몰 려드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피선거권을 가진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그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 에 선거에 뛰어드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을 터이다. 문제는 무보 수명예직이라는 지방의원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직무를 수행하는 데 서 지방자치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의 회진출도 쉽지 않거니와 설혹 의회에 진출하더라도 안정적인 생활기 반을 갖지 못하면 제대로 된 의정활동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다. 일 반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그러나 돈이 없는 전문지식인 이 자신의 목적을 지방의회로 설정하는 것도 원천적으로 곤란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지방의원에 대한 보좌 기능이 전혀 없는 것도 문제였다. 방만한 시 정 예산과 업무량을 의원 혼자서 감시·감독하는 데는 한계가 컸다. 또한 폭주하는 지역주민의 민원, 시정 질의를 위한 자료준비, 분야 별 상임위 활동 등을 의원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 다. 보좌기능 지원이 어렵다는 행정부의 논리는 ‘예산이 부족해서’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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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부’ 너무 젊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정활동을 힘들게 했다. 그럴수록 나는 지역구 민원을 해결 하는 데 온 힘을 썼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참으로 열심히 뛰었던 시절이었다. 못 다한 정치 학 공부 계획도 잡았다. 학력란에 ‘대학원’을 넣을 요량으로 들어가곤 하는 특수대학원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진짜 공부’였다. 박사과정은 석사과정과 비 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직장인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현직 광주시의원 인 내게는 오히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역차별’이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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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보좌기능이 제대로 갖춰지면 보좌에 들어가는 돈보다 몇 배에 달하는 예산낭비를 잡아낼 수 있고, 좀 더 활발한 의정활동으 로 주민의 욕구를 해소할 수도 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광역)은
제도적으로 국회의원의 1/3에 해당하는 지역성과 인구비
례로 구분되어 있는데 국회의원은 보좌기능이 4급, 5급, 6 급, 7급,
9 급 등 5명을 두고 있는 반면 시·도 광역의원은 단 1명도 없는 셈이었 다. 형평성에 어긋난 조치임이 분명했다. 민선 4기인 2006년 들어 지방의원들에게도 보수를 주는 유급화가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지방의원 보좌기능은 아직도 없다. 초대 지방 의회로 진출하면서 정치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열심히 뛰었다. 월급 도 보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회 제도에 대한 일천한 인식 탓에 활동하는데 여러모로 힘이 들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활동 이었지 명예가 아니었다. 활동이 주민들에게 이로운 성과를 냈을 때 ‘좋은’ 의원이라는 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방의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명예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너무 젊 다는 것도 여러모로 의정활동을 힘들게 했다. 시청 집행부를 향해 하고 싶은 말, 주장을 하더라도 좀 더 엄정하게 예의를 갖춰야 했고, 동료 의원들과 논의를 할 때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집행부에 도, 의회에도 나보다 어린 사람은 없었다. 시의원이 되면서부터 9년 뒤인 2000년에 있을 16대 국회의원 선거 를 목표로 삼았다. 광산구의 인구수 등을 감안해 그 즈음 되면 선거 구가 갑과 을로 분할될 것으로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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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회 의원으로서 나름의 지위를 ‘즐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 었다. 그러나 목표가 뚜렷했던 내 입장에서는 ‘즐길’ 생각도 시간도 없었다. 지역구 주민들을 만나 민원을 듣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해 결해 갔다. 기자들을 만나 시정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지 역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을 의제화 시키는 데 힘썼다. 각 분야 전문가들과도 자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이 가진 식견을 들었다. 스스 로 생각해도 참으로 열심히 뛰었던 시절이었다. 우선적으로는 시의 원으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나아가 이 모 든 활동들은 국회 진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 았다. 단순히 인지도를 높인다는 정도가 아니라 열심히 뛰고 부단히 노력한다는 진정성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못다한 정치학 공 부 계획도 잡았다. 아무리 내가 잘 해도 정치권에 있는 이상 경쟁 상대는 나의 ‘약점’ 에 대해서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인 경쟁상대가 아니더라도, 언제 어느 자리에서 나와 우열을 가리는 기회가 올지 알 수 없기 때문 에 많은 현역 정치인들과 정치지망생들이 내 ‘약점’을 거론했다는 사 실을 알고 있다. 그 약점이 진술되는 구조는 대개 이러했다. “실업학교 졸업하고 체대 나온 녀석이 어쩌다 DJ 잘 만나 그 줄로 정치인생이 탄탄대로야 ….”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만, 현실은 악의적으로 이런 말을 되풀이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악의 는 없다 하더라도 세상의 상식적인 어법으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 도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말들에 대해 나는 대응 논리를 만들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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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다. 굳이 만든다면 “DJ도 노무현도 상고 나왔고 대학공부는 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면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진 정성과 실력, 노력하는 자세다. 내면이 중요하다”라고 말했을 것이 다. 하지만 이런 논리도 나는 제시하지 않았다. 우선은 내 스스로 농 고를 나오고 체대를 다닌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지 않았다. 당초에 꿈꾸었던 육사를 들어가지 못하고, 정치학 공부를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두 번째로 나는 DJ에게 현실정치를 배웠 고, 못다 한 학교공부는 앞으로 해나갈 생각이었다. 실천으로 보여 주면 될 것이었다. 구구절절 말해봐야 구차한 자기변명으로밖에 받 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이 런 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능력을 나 자신 스스로 믿고 살 아왔기 때문이다. 현실정치를 다각도로 경험했어도 체계적으로 정치학 공부를 접하 지는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치학과 학사편입을 계획했다. 담당 교수님을 만나 상의했는데 교수님은 곧바로 석사과정을 밟아 보자고 나를 설득했다. 현대정치가 전문화·세분화의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 에 일정한 틀의 연구주제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부족 한 기초공부는 관련 서적들을 꼼꼼히 읽는 것으로 보충하자는 제안 이었다. 교수님의 조언과 제안을 나는 받아들였다. 학력란에 ‘대학원’을 넣을 요량으로, 혹은 인맥을 넓히기 위한 방 편으로 들어가곤 하는 특수대학원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내 게 필요한 것은 ‘진짜 공부’였다. 어느 정도 사회경력이 있는 이들에 게 주어지는 ‘특채’도 고려하지 않았다. 영어시험과 전공시험을 정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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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거쳐서 일반대학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시의원 당선과 동시에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연구과제는 크게 ‘지방자치’와 ‘한반도통일문제’ 두 갈래로 잡았 다. 외형상 다르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두 주제는 다르지 않다고 보았 다. 지방자치는 풀뿌리민주주의 정착이라고 하는 당면한 문제였고, 한반도통일문제는 우리 민족의 장기적인 숙제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 었다. 민주주의의 정착과 확대가 통일의 선결과제라고 한다면, 그 민 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열쇳말이 지방자치라고 생각했었다. 교수님들 도 이 부분에 동의해 주었다. 교수님들은 문제의 해법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과제를 내게 주었고, 나는 그 과제를 성실히 수행했다. <한반도 통일문제와 주변 4대강국간의 역학관계>로 1993년에 정 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때를 전후해서 <지방자치 정착과 활성 화 방안>(1992), <지방자치 발전을 위한 제도개선 방향> 등과 같은 소논문도 발표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내 부족함이 더욱 절실히 느껴졌다. 석사 공부로 갈증만 더 커져버린 형국이었다. 내 스스로 정해 놓은 정치시간표를 보니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기 전까지 박사학위를 따는 것 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곧바로 박사과정에 도전했다. 그런데 그 만 첫 번째 도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영어와 일본어를 외국어로 선 택했는데 필요한 점수가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외국어에 특히 집중 해서 박사과정 재수에 들어가 어렵게 합격했다. 박사과정은 석사과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3년 동안의 박사과정 중에서 두 학기는 매우 촘촘하게 짜인 교수님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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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들어야 했다. 직장인들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현 직 광주시의원인 내게는 오히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역차별’ 이 있을 정도였다. 연구 분야는 석사 때와 동일하게 ‘지방자치’와 ‘한 반도통일문제’였다. <신국제질서의 형성에 따른 한반도 통일환경에 관한 연구> 로 1998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ISDN과 GIS 구축에 입각한 행정정보공개제도와 옴부즈맨 제도 에 관한 소고>(1994), <지방의원의 자세와 역할>(1995), <지방의회 와 집행부간의 갈등해소 방안 연구>(1996), <신국제질서와 국제외 교>(1997)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난 이후에도 <한 국 지방자치제도의 개선 방안>(1998), <행정적 측면에서 본 지방인 재 육성 방안>(1998) 등의 논문을 학회지에 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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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 기차를 탄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원한다면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거대한 동체를 멈춰야 한다 그것이‘희망’ 이라는 도착점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풀뿌리 힘으로 중앙 진출 제16대 국회의원
1991년 ~2000년 세밑까지 약 9년 동안 3선 광 주광역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내 선거를 세 번 치렀고, 당원으 로서 1992년, 1996년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를 경험했다. 1992년에 는 DJ의 세 번째 대통령선거 도전 실패와 이에 따른 정계은퇴 선언의 슬픔을 함께 겪었다. 1997년 대망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당 시에 나는 제15대 대통령선거 새정치국민회의 광주시지부 상황실장 으로 활동했다. 나라 전체의 일로나, 개인적으로나 참으로 역동적인 시절이었다. 한국정치의 숱한 별들이 뜨거나 졌고, 한 때 대통령이었던 이들이 철 창신세를 졌으며, 절대로 될 것 같지 않았던 ‘대통령 김대중’이 실현 되기도 했다. 정치는 생명체라는 말을 눈앞의 현실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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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원없이 정치학 공부를 했고, 한 국동북아학회·한국정치학회·한국행정학회·한국지방자치학회 등의 이사직을 역임하면서 전문가 그룹과 깊이 있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 를 가졌다. 박사학위를 받고 난 직후인 1999년에는 광주경실련 정치 행정개혁특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아 시민사회단체 활동에도 열 정적으로 임했다. 3 선의 시의원이 유력한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모습 은 매우 이례적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좀 더 치열한 전투의 장,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의 심장부로 나아가고자 한 내 계획이기도 했다. 어떤 일을 맡던 지 성실한 자세로 접근했다. 다양한 현장경험이 정치활동에 크게 도 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감투만 둘러쓰는 식은 아니었다. 단지 ‘표’만 염두에 두었다면 사회단체나 학회 활동을 할 시간에 지 역구를 더 도는 게 나았을 것이었다. 제3대 광주시의원으로서 상반기 부의장직을 맡아 2년 동안 일했 다. 2000년부터 시작되는 하반기 의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해
4월13일에 치러질 국회의원 총선거에 뛰어 들기 위해서 전반기를 마 칠 무렵 시의원직을 내 놓았고, 곧이어 공천을 받았다. 광산구가 갑과 을로 분구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광산구에 속했던 대촌동과 서창동이 각각 남구와 서구로 흡수되는 통에 2000 년이 되어서도 광산구 국회의원은 한 명만 뽑을 수 있었다. 광산구는 조홍규 의원이 내리 3 선을 하면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3선의 현역국회의원과 경쟁하는 것은 그가 아무리 흠결이 많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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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심사, 조 의원 1등 나는 2등, 그러나 끊임없는 도전이 정치의 숙명.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광산구는 조홍 규 의원이 내리 3선. 새천년민주당 광산구 공천경쟁률은 13:1. 현직 국회의원에 대한 여론 이 호의적이지 않아 광산구에 집중적으로 몰린 것. 공천심사위원회는 13명 중에서 4명을 선출해 1차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첫 번째 조사에 서 내 성적은 2등. 1등은 조홍규 의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과반을 넘지 못해 두 번째 여 론조사를 실시했다. 조 의원을 앞질러 새천년민주당 광산구 제16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장 을 받게 됐다.
2000년 4월3일 열렸던 16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 전남매일에 실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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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내 계획 대로, 정치시간표대로 출사표를 던졌다. 끊임없는 도전이 정치의 숙 명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 또한 없는 법이었다. 국회의원 3 선, 그 러니까 현역의원 12년이라는 시간은 가장 강력하게 자기 아성을 구 축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이 시간 동안 유권자들의 피 로감도 그만큼 늘기 마련이었고, 세월이 누적되는 만큼 어쩔 수 없이 해당 국회의원의 문제점들이 좀 더 크게 부각되기 일쑤였다. 조홍규 의원이라는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정치의 속성이 그랬다. 조홍규 의원도 이러한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 의원의 네 번 째 공천은 어렵다는 말이 중앙정가에서 떠돌아 다녔다. 12년 동안 국 회의원을 하다 보니 지역구 여기저기에서 볼멘소리들이 나왔다. 현 역 국회의원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은 탓에 총선 입지자들이 광산구에 집중적으로 몰렸다. 공식적으로 경쟁률은 13:1이었다. 자 신을 노출시키지 않고 무기명으로 공천을 신청한 인사가 두 명 더 있 었다. 실제로 공천경쟁률은 15:1이었던 것이다. 광산구의 공천경쟁 률이 전국에서 가장 높았던 셈인데 다수의 거물급 인사들까지 뛰어 들어 공천결과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집권여당인데다 농촌인구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광산구는 공천이 곧 당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천은 청와대와 새천년민주당, 지역구, 이 세 군데서 여론조사를 받아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속 정 당의 총재나 현역의원들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했었는데 DJ가 집 권한 이후로 정당민주화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되어 공천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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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다각화됐다. 기득권이 없는 도전자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 다. 세 번에 걸친 시의원 활동과정을 통해 광산지역 내 여론도 괜찮 았다. 광산구의 시의원은 3명이었다. 그 중 내 지역구인 하남, 첨단, 비아, 월곡 1·2동은 광산 전체 인구의 2/3에 육박했다. 공천자 전부 를 놓고 여론조사를 하면 현역인 조홍규 의원에게 밀릴 수도 있겠으 나 조 의원과 나, 이렇게 둘만 놓고 경쟁을 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 다는 판단이 섰다. 새천년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공식적인 후보 13명 중에서 4명만 을 선출해 1차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여론조사 대상자로 4명을 선택 하는 기준은 정당기여도, 인지도, 참신성, 경쟁력 등이었다. 물론 이 러한 기준들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는 ‘고무줄’과 같은 것이었다. 정당이 가진 일종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 특권은 4명이 선발된 이후로는 작동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는 기 준과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러한 선발 시 스템을 지지하는 편이다. 다수의 후보군 중에서 여론조사대상자를 뽑는 과정에서는 정당의 전략적인 기준이 제시되고, 일단 여론조사 대상자가 뽑히고 나면 정당 외부의 범 지지세력에게 후보를 묻는 방 식이었다. 선거를 책임져야 하는 정당의 의중과 민의의 담당자인 유 권자의 뜻이 더불어 반영된다는 면에서 합리적인 공천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다.
4명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조사에서 내 ‘성적’은 2등이었다. 1등 은 조홍규 의원이었다. 순위는 공식적인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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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지 않았다.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비공식적으로 나 돌았다. 만약 이 성적을 가지고 공천을 결정했다면 나는 국회에 들어 가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도 과반을 넘지 못해서 이제 1, 2등만을 대 상으로 두 번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나는 조 의 원을 앞질러 새천년민주당 광산구 제16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장을 받게 되었다. 공천장을 받는 순간 지난 시절의 기억들이 차창 밖 풍경처럼 스쳤 다. 민추협 활동, 한성슈퍼, DJ 비서, 광주시의원 …. 정치의 꿈을 안고 도전한지 10여년 만에 꿈의 실현을 눈앞에 둔 것이었다. 공천경쟁을 할 때도, 공천장을 받을 때도 나는 그다지 힘들어하거 나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함께 뛰었던 동지들은 어느 때고 간에 표 정에 별로 변함이 없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물론 어 느 정도는 힘들었고, 내 꿈의 8 부 능선을 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게 기분이 좋기는 했다. 중요한 것은,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예측 했고, 선거운동의 흐름이 그 예측 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의 ‘정당한 보람’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젊음의 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당했고,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던, 그런 때였다. 세 번에 걸쳐 시의원을 하고 국회의원 공천까지 받고 나니 좋지 않 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동교동이 힘을 쓰지 않고서는 나이도 젊은 전 갑길이 저렇게 잘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초대 시의원 공천은 분명하게 DJ가 챙겨줬다는 점이다. 나에 대한 DJ의 배려가 정치에 뛰어 드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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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밤낮없이 뛰었던 민주화투쟁의 경험을 제도 안에서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했다. 기회를 얻은 뒤에 나는 누구보다도 의정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돈이 없어서 몸으로 뛰었고, 더 잘 하기 위해서 늦깎이 공부를 마다하지 않았다. 초대 시의원 공천, 그 이후의 길들은 모두 내 힘으로 개척해 왔다. 내가 아는 한 동교동은 시의원까지 챙길 만큼 한가하지도 가벼운 곳 도 아니다. 나 또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고, 좀 더 당당하고자 노력 했다. 통상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 이상으로 동교동과의 인연을 엮 어나가지는 않았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광산구에서 새천년민주당 의 공천을 받으려는 인사들 중에는 학력이나 경력에서 나보다 빼어 난 이들이 많았다. 동교동까지를 포함해서 그들의 인맥은 결코 나에 게 뒤지지 않았다. 아니, 나를 훨씬 능가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거느 린 사람들이었다. 뒷심이나 활용해서 정치를 한다는 식의 음해에 씁 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 양심에 거리낄게 없었으므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국회활동을 잘 하면 그런 생각은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즈음 허물없이 지내는 고향 선배가 위로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내게 툭 던졌다. “그래도 자네 욕하는 사람은 없데.” 처음에는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자꾸만 그 말이 머릿속을 간질 거렸다. 무언가 생각해볼만한 대목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게 무언 지 잡히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다시 떠올랐다. 욕하는 사람은 없다 …. 무슨 뜻일까.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말일까. 선배를 다시 만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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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군부독재정권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넘기며 오로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온 야당 지도 자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됐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생 각해오던 그의 수행비서는 제16대 국회의원이 됐다.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는 흐뭇한 표정 으로 나를 안았다. 나의 정치 스승은 “기대하는 바가 많네” 라는 짧은 말로 또 다른 가르침 을 주었다. 스승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는 게 내 스스로의 자긍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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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나는 그 뜻을 물었다. 선배는 이미 잊어먹고 있었던 듯 한 참을 생각하다 껄껄껄 웃으면서 나무라듯 내게 의미를 풀어줬다. “동교동이 도와줘서 자네가 잘 나간다는 말을 비난이라고 볼 수는 없네. 자네가 변명을 할수록 구차해질 뿐일세. 자네가 일을 잘하면 오히려 동교동에서 배운 가락이 어디 가겠냐고 긍정정인 말이 들려 올 것이네. 똑같은 경력을 두고도 하기에 따라서 나쁜 말이 뒤따를 수도 있고, 좋은 말이 뒤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 경력이란 게 그래. 그런데 욕은 달라. 실제로 확인된 행동을 가지고 개인에게 퍼붓는 것 이 욕이라네. 저놈 싸가지 없다, 건방지다, 이런 거 있잖은가. 욕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직 자네가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네. 인 심을 먹고 사는 것이 정치인인데 욕먹지 않은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 겠는가.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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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에서 배운 가락? “동교동이 도와줘서 자네가 잘 나간다는 말을 비난이라고 볼 수는 없네. 자네가 일을 잘하 면 오히려 동교동에서 배운 가락이 어디 가겠냐고 긍정적인 말이 들려올 것이네. 똑같은 경 력을 두고도 하기에 따라 나쁜 말이 뒤따를 수 있고 좋은 말이 뒤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 그래도 자네 욕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자네가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네. 인심을 먹고 사는 것이 정치인인데 욕먹지 않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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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사 과정에 편입한 정치학 박사 공부 2
국회의원에게는 시의원과는 견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나라공동체가 나아갈 길의 기준점 이 되는 입법 활동을 기본으로, 국가예산을 다루고 정부부처를 감 시해야 했다. 이 같은 업무들은 양적으로 거대할 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했다. 일의 진행과정에는 상대정 당이라는, 결코 낮지 않은 산을 타고 넘어야 하는 곤란함이 항상 따 라 붙었다. 초선인데다 오랫동안 광주에서 생활한 탓에 중앙무대에서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은 넉넉하지 못했다. 내가 쓸 수 있는 최대의 자원은 ‘나’ 였다. 나의 준비상태에 따라 주변 자원의 범위와 깊이도 정해지는 법 이었다. 또다시 공부 병이 도졌다. ‘나’라는 자원을 업그레이드 시키 는 방법으로써 공부 말고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야는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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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을 선택했다. 정치와 경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년)나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년)로 대표되는 고전경제학의 학명이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인 것은 단순한 관용어법이 아니었다. 정치체제와 경제체
제의 긴밀한 연동을 살피는 게 경제학의 기본적인 역할이었다. 경제학(economics)은 고대 그리스어 oikos(집)와 nomos(관습 혹은 법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집안의 살림살이를 뜻하는 ‘가계의
법칙’이 경제학의 어원인 셈이다. 우리 문화권에서 경제학은 경세제 민(經世濟民)에서 나왔다.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 미로 장자(莊子)가 한 말이다. 경제학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는 “상 품, 재화에 대한 생산, 교환, 분배, 소비의 법칙을 연구하는 사회과 학”이다. 한편으로 경제학의 근원적인 관심사는 “한정된 자원의 분 배”이기도 하다. 경제학을 둘러싼 이 모든 언어들은 국회활동과 매우 밀접하다는 특성이 있다. 국가예산을 다룬다는 것은 희소한 자원의 분배에 다름 아니었고, 법을 만드는 행위는 자원배분의 기준을 정한다는 뜻이기 도 했다. 경세제민 역시 국회 제1의 의무이기도 하다. 경제학을 공부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도 매력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경제적 이념 이나 정책을 글과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결국 나는 국회의원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학문의 하나가 경제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야간 3학년에 편입했다. 조선대 대학원에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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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학을 공부할 당시 기초가 부족해서 학부과정의 학생들과 함께 정 치학 관련 전공 4과목을 따로 공부한 경험이 떠올랐다. 내게 중요한 건 학위가 아니라 제대로 경제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학부과정에 서부터 기초를 차근차근 다져갈 생각이었다. “정치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 굳이 경제학 학부과정을 공 부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편입학 심사를 위한 면접에서 한 교수님이 내게 물었다. 의례적인 과정이겠거니 생각하면서 경제학을 공부하려는 나름의 입장을 간략 하게 말했다. 교수님은 다시 내게 물었다. “경제학은 수학적인 도구가 많이 쓰입니다. 수학에 대한 이해 없이 는 전공을 마무리 짓기가 어렵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 형식적인 면접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질문은 “쉽지 않은 공부 이니 그만 두라”는 식으로 깐깐하고 차가웠다. 내 신분이 국회의원 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 같지도 않았다. 특별대우를 바란 건 아니었지 만, 그래도 조금 부드러울 줄 알았는데 여느 지원자와 다름없이 나 를 대했다. 출석과 시험, 과제물 등에서 예외는 전혀 없다는 식의 ‘협 박성’ 발언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왕에 하려던 공부이니만 큼 이런 교수님들 밑에서 배우면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 이 들었다. 나는 그저 잘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말을 반 복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Paul Anthony Samuelson, 1915~ 2009)은 경제학을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철저하게 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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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설명방법을 동원하고, 인간행위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는 이 유 때문이었다. 객관적인 설명방법이 경제학에서는 ‘수학’을 의미했 다. 경제학의 모든 개념과 설명체계는 수학적으로 논증된다는 특성 이 있다. 수학적으로 논증되지 않으면 그 개념이나 설명체계는 성립 할 수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경제학과에는 ‘경제수학’이라는 교과 목이 따로 있다. 경제 관련 일반 서적은 몇 권 읽어본 적은 있지만 경 제학 공부는 장난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경제학과 3~4학년 과정은 전공과목이 심도 깊게 다루어지는 기간 이다. 거시경제이론, 미시경제이론, 화폐금융론, 계량경제학, 경제 통계 등이 강의된다. 단 한 과목도 쉽지 않았다. 우선은 기초가 부족 했다. 1학년 교과목인 경제원론도 공부하지 못한 터에 미시나 거시 를 공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체험했다. 첫 페 이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페이지로 나아갈 수 없는 게 경제학이 었다. 수학은 차라리 둘째 문제였다. 개념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수 학적 도구를 동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면접 당시 교수님들의 ‘협 박’이 이해가 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야간에 수업을 받는데 정말로, 정말로 힘들었다. 더욱 힘든 것은 그럼에도 경제학에 대한 내 이해는 별로 나아지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원생활도 초짜여서 정신없는 마당에 밤이면 밤마다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경제학 공부를 하려니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 은 짜증이 밀려왔다. 실제로 경제학 공부를 그만 두는 것에 대해 진 지하게 검토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그만두지 않았고, 졸업장까 지 땄지만 공부를 시작할 당시의 사정은 참담했다. 자존심 때문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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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신입생 내가 쓸 수 있는 최대의 자원은 ‘나’이다. 나의 준비상태에 따라 주변 자원의 범위와 깊이도 정해지는 법이다. ‘나’라는 자원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법으로 공부 말고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 나는 ‘공부병’에 도져 산다. 공부는 마치 숨을 쉬고 밥을 먹듯 평생 동안 거느리고 가야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50평생이 넘도록 나는 아직 신입생이다.
2009년 9월 미국 컴벌랜드대학교에서 명예 행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회의원 시절 행자위에서 활동하며 한국 행정발전에 기여했고, 구청장으로 재직하면서 행정혁신과 개혁을 통해 지역을 변화·발전시킨 점이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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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경제학 공부라 하더라도, 어깨 너머로나마 익힌 몇몇 개념들이 매우 흥미로웠고, 좀 더 제대로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서 경제학 공부를 마치기는 어렵다는 점을 내 스스로 시인했 다.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이든 집중해서 열심히 하면 못할 일은 없다고 믿어왔던 터였다. 4년에 걸친 DJ비서 업무를 수행할 때 의 마음가짐이 그랬고, 정치학 박사과정도 노력과 열정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이르러, 그것도 학부과정의 벽 을 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게 경제학 은 실질적으로 필요한 학문이기도 했거니와 일단 벽에 부딪히니 기어 코 넘어서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겨난 것이다. 이즈음 정치학 공부를 하면서 탐독했던 《논어》 ‘위정편’의 한 대목 이 곱씹어졌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안다는 것이다.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공자가 제자인 자로에게 한 말이었다. 앎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한 명언으로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을 확실히 모르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만 앎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 을 수 있다는 점을 공자는 자로에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경제학에 대 한 나의 무지, 그리고 그 무지를 쉽게 건너뛸 수 없는 내 지적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경제학이 결코 내게 오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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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말과 한 가지인 소크라테스 가르침도 있다. “진정한 앎은 무지를 아는 데 있다. 그리고 무지를 아는 자는 가장 현명한 자이리 라. True knowledge exists in knowing that you know noth-
ing. And in knowing that you know nothing, that makes you the smartest of all.” 사실 이런 말들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는데 내 고민을 간단하게 ‘제압’해 주는 힘이 있었다. 공부 하는 일의 어려움과 기쁨, 그 의미 등에 대해서 아주 오래 전의 선인 들도 여러모로 검토했고, 더불어 지금 세상과 다르지 않은 태도를 가 졌다는 점에서 크게 위안이 됐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을 찾아 가 ‘과외공부’를 요청했다.“내 힘으로는 학부 3~4학년 수업을 흡수 하기가 어렵다, 지도가 필요하다, 도와 달라” 고 말했다. 대학원생은 흔쾌히 동의했다. 일주일에 2~3회씩 8개월이 넘게 개인교습을 받았 다. 그러고 나니 다음 공부는 내 스스로 따라갈 수가 있었다. 개인스 승이었던 대학원생은 내가 정치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고 많이 놀랐다. 경력으로 내세울 학력이 없어서 경제학과 학부과정 을 다니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었다. 많은 정치인이 ‘부족한’ 학력 을 메우기 위해 이런저런 수를 쓰기 마련이어서 대학원생의 짐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사회의 고질병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학력주의 세태, 그리고 그 벽 앞에서 쉬운 방법으로 학력을 취득하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용기 없는 태도가 부 끄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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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공부 성균관대 경제학과 3학년 편입. 정말로, 정말로 힘들었다. 경제학 공부는 산 하나 넘으면 산이었다.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을 찾아가 ‘과외공부’를 요청했다. 일주일 에 2~3회씩 8개월 넘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대학원생은 내가 정치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 는 것을 알고 놀랬다. 경력으로 내세우려 학부과정을 다니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경제학이었다.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나선 정치인이라면 공부 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어느 필부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그 한 사람의 오류로 끝나겠지 만, 어느 정치인이 잘못된 길을 가면 나라가 흔들리고 국민이 힘들어진다.
의정활동을 정신없이 하고 나서 나는 또 경제학 공부를 해야했다. 사진은 국회본회의에서 대정부질문을 하고 있 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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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내게 필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경제학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필요에 따라 ‘계속’ 학교를 다녔다. 고백하자면 광주대학교 사 회복지학과에 편입했는데 마치지는 못했다.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
2009년 현재 방송통신대학 중국어과 4학년 졸업반이다. 하반기에 는 전남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에 등록해 재학중이다. 공부와는 지 독한 인연인가보다. 50평생이 넘도록 쉬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고 있 으니 말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나는 나만의 공부하는 노하우도 생겼 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가 거시적인 안목에서 중요한 흐름을 파악해 야 하는 게 우선이라면, 단체장은 세세한 부분에 대한 실무적 역량 까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익혔다. 만약 내가 그러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공부해서 습득하면 된다. 권 위의식에 젖어 몰라도 아는 척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면서 국민과 지역민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다. 공부 는 어느 한 시절에 하는 게 아니고, 마치 숨을 쉬고 밥을 먹듯 평생 동 안 거느리고 가야한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더군다나 세상의 역동적 인 변화에 앞장서 길을 개척하겠다고 나선 정치인이라면, 공부는 선 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필부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그 한 사람의 오류로 끝나겠지 만, 어느 정치인이 잘못된 길을 가면 그가 책임지고 있는 유권자 전 체의 오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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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 국회활동
우리 나이로 42살에 제16대 국회의원이 됐다. 선거는 2000년 4월13일 치러졌고, 당선자들의 임기는 5월30일 ~
2004년 5월29일까지였다. 당선과 동시에 곧바로 성균관대학교 경제 학과 야간학부에 편입해서 2002년에 졸업했다.
16대 국회에는 나처럼 지방의원, 혹은 단체장으로서 경력을 쌓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15대 국회에서는 지방정치무대 출 신 국회의원이 6명에 불과했으나 16대는 나를 포함해 25명이 지방의 풀뿌리 경력을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여야를 막론한 이들
25명의 국회의원들은 지방정치 관련 입법정책을 연구하는 의원연구 단체 ‘지방자치포럼21’을 조직했다. 지방자치포럼21은 참다운 지방자치가 정착될 수 있는 방안 마련 에 역점을 두고 다각도로 고심했다. 중앙정부의 권한 이행 확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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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원 유급제, 지방의회 사무처 자율성 확보, 지방자치단체장 소환 제, 주민청구징계제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간의 권한조정 문 제 등이 주요 의제였다. 물론 이런 의제들이 특별하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지방자치제가 출범할 때부터 꾸준히 제기된 사안이었다. 다만 문제제기에 그치느냐, 국회 내 논의로까지 발전하느냐는 부분 에서 16대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있었다. 앞서 말한 의제들 중 지방 의원 유급제나 지방자치단체장 소환제 등은 불완전하나마 지금 제 도로 정착되어 있다. 지방자치포럼21의 노력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 고 자부하는 편이다. 지방정치 경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지방자치를 바라보는 국 회의원들의 성향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 성향은 여야를 떠나 형성되었다. 지방에 지역구를 두었다 하더라도 지방정치 경력 없이 곧바로 국회의원이 된 이들은 중앙정부의 시각이 강했다. 반면에 지 방에서부터 올라온 이들은 늘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 대해 숙고했고, 통상적인 의정활동에서도 열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과도 좋았다. 실제로 NGO 같은 곳에서 우수의원을 포상할 때 지방정치 출신 의 원들이 상을 많이 받곤 했다.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공천을 받을 정도라면, 당연히 지역민과 정당의 신뢰가 함께 엮어져야 한다. 빼어난 자질을 갖추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당시 여의도 정가에 서는 지방자치포럼21이 국회를 주도한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광주시의원을 거쳐 초선의 40대 초반 국회의원으로서 나 역시 지 방자치포럼21의 구성원이었다. 활동했던 국회 상임위원회는 행정자 치위원회였다. 시의원 시절, 대학원에서 정치학 공부의 연구주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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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행정자치위원회 활동, 이 셋을 하나로 꿰는 언어는 지방자치제도 였다. 어느 자리에 있던지 간에 지방자치제도가 나의 변함없는 관심 사였던 셈이다. 이 시기 내가 국회의원으로서 집중한 또 하나의 일은 우리 근현대 사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의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었 다. 알다시피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국민은 인권 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한국의 군·경, 그리고 미군에 의해서 숱 한 학살이 진행됐고, 이 학살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명령에 따른 계획적인 살인’이었음이 기밀해제된 미군 문서들과 참전 미군들의 증언을 근거로 여러 차례 입증되었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문민정부 막바지에 ‘거창사건특별조치법’(1996) 이 제정되었고, 국민의 정부 들어서 ‘제주4·3 특별법’(1999)이 만들어 져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하지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전 국토에 걸쳐 광범위하 게 자행됐다는 특성이 있었다. 거창과 제주라는 특별 지역의 ‘개별입 법’만으로는 근현대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상처를 치유하는데 한계 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거창과 제주 사건의 특별법 제정은 여타의 민간인 학살 관련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바라는 관련 유족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어 그들의 입법청원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정통 민주화세력 의 집권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의 정부에 대한 기대감도 작용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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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유족들의 입법청원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발생 한 국가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genocide)의 진실을 규명하고 억울 하게 죽어간 이들의 명예회복, 그리고 그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는 일은, 내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중대한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을 방치해 온 결과 20년 전 광주에서 ‘학살이 반복됐다’는 게 내 생각이 었다.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잊혀진 역사’를 ‘기억해야 할 역사’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통합특 별법’이 필요했다.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개별입법화로는 조직적인 명 령체계를 통해 자행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의 본질과 실 체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다. 또한 통합특별법을 마련하기 위해서 는 유족들의 주장만으로는 부족했다. 객관적인 자료들을 발굴해 학 살의 실체를 알려야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정부기록보존소와 국회기록보존소를 통하여 광범위 하게 자료를 취합하였다. 우선은 4·19혁명 직후 4대 국회 ‘양민학 살사건진상조사특위’(이하 양민특위)의 피해실태 조사 자료를 찾았다.
4·19혁명의 바람을 타고 양민특위가 구성되어 1960년 5월31일∼ 6 월10일까지 약 11일간 조사 작업을 진행하고 같은 해 6월21일 제35 회 임시회에 보고된 자료였다. 이미 40여년 전에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을 추진했었는데 1년 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자료는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창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하 더라도 4대 국회에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가 있었다는 점만 알려졌 을 뿐 보고서가 존재하는지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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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역사 ‘잊혀진 역사’를 ‘기억해야 할 역사’로 만드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마침내 국회 의안과 지하 문서고에서 양민특위 보고서를 찾아냈다. 언론 인터뷰가 쇄도했고 그 인터뷰를 통해 역사 바로세우기의 중요성과 법 제정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행정부처의 기록물을 뒤졌다. 2002 년 4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집단학살에 관한 자료와 분석결과를 발 표했다. 구전으로만 주장되던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행됐는지를 확연히 증 명해 주는, 행정부처의 첫 국가기록물이라는 의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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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존재를 알면서도 꺼내지 않으려 했다는 게 옳을 것 같다. 자 료가 나올수록 입장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수구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세력 또한 그 뒷감당이 만만치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정부기록보존소와 국회기록보존소의 자료만으로는 부족했다. 조 사를 했다면, 그 조사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현업부서가 있을 터였 다. 자료취합의 범위를 정부 각 부처로까지 넓혀 마침내 국회 의안과 지하문서고에서 양민특위의 보고서를 찾아냈다. 양민특위가 본회 의에 보고한 ‘현황자료’에는 민간인 학살의 규모가 8,715명이었다. 양민특위가 본회의에 보고한 ‘건의안’에 따르면 8,522명으로 집계되 어 있었다. 경남북·전남북·제주도 3개 지역에 걸쳐 인명·가옥·식량· 가축· 의류 등 피해상황도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양민특위의 활동 기간은 극히 짧았고, 조사대상도 한정적이었다. 때문에 양민특위 는 건의안을 통해 “계속적으로 신고가 접수되고 있다”고 전제하였 다. 당시의 진상규명이 미완이었다는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16대 국 회가 미완의 양민특위를 복원해 우리의 현대사를 올바르게 정립해 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됐다. 이때가 2001년 상반기였다. 같은 해 6월2일 나를 포함해 17명의 의원발의로 ‘6·25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했고, 45명의 의원이 참여해 9 월6일 제출 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등에 관 한 법률안’ 발의에도 함께 했다. 동시에 나는 9 월에 《한국전쟁 전후 의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 보고서-학살 실태조사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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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본 한국현대사의 재정립》이라는 긴 제목으로 그간의 조사실적과 현재 관련 법안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다룬, 약 120여 쪽에 달하는 정책자료집을 발간했다. 자료집은 ‘연구의 목적과 의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의 개요와 실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 한 노력과 실천과제’ 등으로 구성됐고,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 진 상조사결의안과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보고서, 코리아 국제전범법정 판결문,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 등 참 고자료들을 보탰다. 이 밖에도 20 세기 집단학살 통계,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례, 민간인 학살사건 관련 16대 국회 법률안과 국회 청원 현황 등도 실었다. 광범위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한 첨예한 사안이었다. 여야 동시입 법의 형태로 추진했고, 민주당에서는 내가, 한나라당에서는 이병석 의원이 국회 행자위 간사로서 머리를 맞댔다.
40년 전 양민학살특위의 자료를 찾아 내 발표하면서 언론의 관심 이 증폭되었다. 언론 인터뷰가 쇄도했고, 그 인터뷰를 통해 역사바 로세우기의 중요성과 법 제정의 시급한 필요 등을 강조했다. 유족들 의 입법청원 및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주장도 갈수록 강해졌다. 객 관적인 자료를 발굴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행정부처의 기 록물을 뒤졌고, 각 형무소에 남아 있는 명부 및 통계자료들을 추적 했다. 4대 국회 양민특위 보고서에 나오는 대구교도소 수감자에 대 한 학살도 관련 자료들을 종횡으로 덧붙여 분석했다. 2002년 4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집단학살에 관한 자료와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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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국회의원 왕성한 의정활동으로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상 3회 연속 수상, 경실련 선정 의정활동 최 우수국회의원, 한국유권자운동연합 선정 의정활동 최우수국회의원 등에 선정됐다. 사진 은 2000년 국정감사 최우수국회의원상(법률연맹국감모니터단)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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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당시 부산형무소와 대구형무소 등에서 작성된 자료에는 재소자의 이름·형명·형기·처리현황 등이 기록되어 있어 각 개인의 신상변동 상황을 도출해 낼 수 있는 매우 귀한 자료였다. 당시 내가 발굴한 자료들은 그 동안 구전으로만 주장되던 수감자들에 대한 집 단학살 사실을 구체적인 공식문서로 뒷받침해주고 있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는지를 확 연히 증명해 주는 행정부처의 첫 국가기록물이라는 의의가 있었다. 자료 분석 결과 부산교도소 414명, 대구교도소 2,574명, 마산교도 소 1,681명 등 모두 4,669명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또 이미 미 국문서를 통해 공개된 바 있는 대전교도소 1,800명을 합하면 6,469 명이라는 인명피해 숫자가 나왔다.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다만, 내 발표가 의미 있었던 것은 객관적인 자 료를 통해 밝혀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언론은 관심을 갖고 여 러 각도로 보도해 주었다. 통합특별법 제정에 대한 여론의 요구는 다 시 한번 급물살을 탔고, 무성의로 일관했던 한나라당도 마냥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나 통합입법 노력은 무산되었다. 2003년
6월19일 행자위 회의에서 간사 역할을 맡았던 한나라당 의원이 당초 의 합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채 권한과 역할이 모호한 ‘무임소 특별위원회’에 법안 처리의 책임을 떠넘겨 버린 것이다. 이틀 전인 17 일 나와 만나 명예회복을 제외한 진상규명 중심의 학살규명법 수정 안을 마련했고, 이 법안을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는 데 약속을 어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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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넘겨 통합특별법안은 2004년 3월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쳐졌으나 찬성 72 표, 반대 96표로 부결되었다. 통합특별 법을 반대하는 정체불명의 인사 30여 명이 한나라 당사를 점거해 농 성을 벌인 것을 구실 삼아 당시 홍사덕 한나라당 총무가 통합특별법 반대를 당론으로 결정한 결과였다. 참으로 엉뚱한 구실이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통합입법 노력이 무산된 건 아니었다. 2005 년 5월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국회에서 의결 되었다. 이 법은 항일독립운동사, 일제강점기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해외동포사, 광복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과 폭력·학 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 은폐된 진실을 밝혀 과거와의 화해를 통 해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한다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제17대 국회 의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 법’이 제정될 당시 나는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노력이 반영 되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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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함께 만든 대통령 노무현 1
2002년은 한일월드컵 ‘4 강 신화’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했던 매우 뜨거운 시기였다. 민주당 국회의원의 한 사 람으로서 나 역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당시 대통령 후보 노무현을 대하는 민주당내 지형도는 크게 셋으 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뽑아서는 절 대 안 된다는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어느 당 소속이냐를 떠나서 근 본적으로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하나는 민주적인 절 차를 통해 뽑혔기 때문에 후보로는 인정하지만 선거를 이기기는 어 렵다고 보는 측이었다. 여기에 속한 이들이 나중에 무소속 정몽준 후 보와의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를 구성하는데 이는 그들의 입장에 서 이길 수 있는 대안을 찾는 한 방법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노무현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쪽이었다. 이 세 흐름에서 내가 직접 속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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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후보 ‘공격수’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 민주당이 내게 준 임무는 매우 직접적으로 이회창 후보를 공 격하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정치적인 공세를 하거나 네거티브전을 펼치려 하면 가능한 한 국회의원들은 그 역할을 피하려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회창 후보 ‘공격수’를 맡을 수밖 에 없었다. 관행이 있었다. 모두가 회피하는 일은 부총무가 맡는 상례였다. 당시 나는 민주 당 원내총무단의 부총무였다. 거절할 수 없었다. 이회창 씨를 만날 기회가 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마음에 상처를 주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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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없었다. 굳이 분류하지면 노무현을 지지하면서도 후단협의 노력 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야인시절 노무현이 광주를 찾으 면 허물없이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었다. 나는 그의 정치철학을 지지 했고, 소신에 찬 행보를 존경했다. 다만 나는 가능하면 많은 이들을 함께 아우르는 게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DJ의 가르침이기도 했 다. 사회운동과 제도정치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 드느냐와 관련이 있었다. 사회운동은 옳은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세력을 꾸려야 하는 제도정치는 옳은 것을 옳다고 할 때도 시기와 방법을 저울질해야만 하고, 법안이나 정 책을 다루는 데서도 반대하는 당을 설득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필요 했다. 오직 나, 혹은 우리 당만이 옳다고 접근하면 되는 일보다는 안 되는 일이 더 많았다. 제도정치는 무언가를 ‘되게’ 만드는 장이었다. 이 대목에서 노무현과 나는 약간 달랐다. 일상적인 정치행위에서 이 다름은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다름이 민주당이라는 정당문제 에 이르러서는 확실하게 견해차가 드러났다. 여하튼 나는 후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많은 역 할을 찾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 개인적으로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바랐지만, 그보다 먼저 나는 정당인이었다. 민주당원으로서 정권재창출에 뛰어드는 건 당연했다. 민주당이 내게 준 임무는 매우 직접적으로 이회창 후보를 공격하 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당에서 정치적인 공세를 하거나 네거티브 전을 펼치려 하면, 가능한 한 국회의원들은 그 역할을 피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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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공격이라 하더라도 정치적인 사안은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툼이 있기 마련이었다. 대선 정국에서는 구체적으로 대선 후보와 그 주변 인물들이 실명을 거론하면서 공격하기 마련인데, 아무리 상 대 당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에 총대를 멘다는 것 은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남을 비방하고 남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내 성격과도 맞지 않았다. 선거에 임할 때마나 나는 유권자에게 직 접적으로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곤 했다. 경쟁후보가 문제가 있다는 식의 방법을 선거 전략으로 삼은 적은 없었다. 네거티브선거 전략은 내 방식과 멀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회창 후보 ‘공격’이라는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 다. 국회활동에도 관행이 있었다. 모두가 회피하는 일은 부총무가 맡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 나는 민주당 원내총무단의 부총무였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단순히 고사하는 것보다는 ‘공격’의 내 용을 확인하고 나서 내 소신을 정하기로 했다. 민주당이 내게 건네 준 자료들은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측에 기양건설의 비자금 이 최소 80억원 이상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자료는 매우 구체적 이었고 치밀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모름지기 칼이란 잘못 쓰면 내가 다치는 법이었다. 또한 확인하지도 않고 상대 를 공격하는 것은 정치 도의상으로도 옳지 않았다. 자료에 드러난 인물들을 음으로 양으로 전부 만나 사실을 확인했 다. 경리부 직원, 이사 등 기양건설의 공식적인 관계자들을 만나 자 료의 허위조작 여부도 점검했다. 주변 인물들도 탐색했다. 당에서 건네준 자료는 완벽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내가 직접 확인해본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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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확실히 그랬다. 스스로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소신을 갖고 ‘터뜨 리기’로 했다.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든다는 불편함이 여전히 있었지 만,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평가하는 문제였다. 내 개 인의 정서적인 동요는 잠재웠다. 그 해 10 월 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기양건설 건’을 폭로했다. 이 즈음 주간지 《시사저널》도 자체 취재를 통해 ‘기양건설 건’을 보도했 다. 내가 폭로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누군가를 공 격한다는 내 불편함은 조금 수그러들었다. 내 폭로와 언론의 보도는 곧바로 선거 재료로 쓰였다. 노무현 후 보는 TV토론이나 유세현장 등에서 기양건설 건을 가지고 이 후보를 ‘부패후보’로 공격했다. 천정배 의원은 이후보측을 고발했고, 특검 수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기양건설 건을 당보에 실어 홍보 하고, 대변인단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 하는 방식으로 이회창 후보를 전방위 압박했다. ‘기양건설 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회창 후보는 적지 않은 타격 을 입었다.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 측은 발칵 뒤집혔다. 곧바로 반 론이 나왔고, 정국은 급격히 경색됐다. 결과적으로 이 후보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이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기양건설 건으로 5% 정도 떨어졌다는 게 한나라당의 공식 주장이기도 했다. 대선을 불과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4월 검찰은 기양건설 비자금의 이 후보 측 유입설이 근거 없다고 밝혔고, 법원의 판결도 검찰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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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회창 씨를 비롯해 관련자들 대부분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 로서는 충격이었다. 비록 정치적인 공세를 위해 터뜨린 사건이었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교차검증을 통해 증거를 충분히 검토했고, 관계자들의 증언도 확보했다. 내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고 확인한 사안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복합적인 감정이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내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법원은 내가 틀 렸다고 말했다. 진짜로 내가 틀린 것일까. 그렇다면 그 많은 자료들 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회창씨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준 내 행동은 스스로 어떻게 갈무리해야 한다는 것일까. 애시 당초 부총무를 그만 두더라도 이 건을 맡지 않았어야 했을까. 정당인으로서 궂은일이라 고 해서 일을 회피하는 것은 바른 태도일까. 온갖 질문들이 내 자신 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화살이었다. 법원의 판결문과 대조하면서 나는 사건 전체를 꼼꼼히 검토했다. 판결의 핵심은 ‘증거의 신뢰성’이었다. 증거가 부분적으로 조작되었 다는 것이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었다. 한마디로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혹은 물증이 허위인 사건으로 사법 당국은 기양건설 건을 규 정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원의 판단은 분명히 존중해야 옳을 것 이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증거의 신뢰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 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보적인 판단’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대 한민국에서 가장 유력한 정당의 총재를 상대로 한 재판이라는 성격 도 있었다. 재판이 미칠 파급력을 감안할 때 사법당국은 훨씬 더 신 중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재판이 진행될 당시 이회창 씨는 정계은퇴 를 선언한 ‘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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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제는 내게로 돌아왔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증거와 사실들 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부분적으로는 틀렸을지라 도 진실의 일부분은 담고 있음이 분명했다. 중요한 것은 강조점이었 다. 부분적으로 ‘틀렸다’는 데 의미를 둘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옳 았다’는 게 중요할 수도 있는 셈이었다. 법원의 판단이 무엇이었던 간 에 내 나름의 진실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법원은 법원이 할 수 있 는 최선의 판단을 했고, 나 또한 그러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전부가 진실인 것 같지는 않다는 쪽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부분적 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틀렸다는 결론인 것이다. 듣기에 따라 매우 싱거운 소리일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모든 자료들을 검토한 뒤 혼신 의 힘을 다해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정치를 할 수 있는 동력의 가장 밑바닥에는 ‘양심’이 있었다. 양심이 흔들린다면 정치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누구나 알 듯이 사람은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는 생명체이다. 실수했을 때 그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양심 있는 처신이라고 알고 있다. 기양건 설 건과 관련해서 나는 부분적으로 실수를 했고, 그 실수를 내 스스 로는 인정했다. 그렇지만 아직 이회창씨에게 이런 내 마음을 전달하 지는 못했다. 그분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다른 자리에서 그 분을 뵈었지만, 자리의 성격상 미안한 내 마음을 전하지 는 못했다. 어느 때인가 기회가 오면 나는 그에게 “내 확신과 양심에 따라 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상 처를 주어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노무현 ‘후보’는 그 해 12월19일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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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당선됐다. 당내에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세칭 1등 공신까지는 아니더라도, 2등 공신 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 이기고도 민주당의 분위기 는 좋지 않았다.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둘러싼 여러 입장차들이 선거에 이긴 후 다시 불거졌다. 모두가 함께 만든 대통령임에도 그 역 할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이후 정치 운명이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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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 중 하 나는 ‘정치개혁’이었다. 한국정치가 보다 건전한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과 폭이었 다. 노 대통령은 먼저 민주당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의지 였다. 대통령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삼권분립이 제도 화되어 있는 정치시스템에서 그 의지의 상당 부분은 국회를 통해 실 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권여당이 대통령과 호흡이 잘 맞아야만 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노무현 대통 령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앞서도 언급했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해서 민주당 내에는 대략 세 갈래의 기류가 있었다. 내 방식으 로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비토층·후보단일화협의회그룹·지지층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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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구분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민주당 외곽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에 힘을 보탠 개혁국민정당(이하 개혁당)이 있었다. 개혁당은 2002 년 8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그 해 11월16일 창당하면서 노무현 후 보를 지지했었다. 당시는 야인이었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을 주축으로 창당됐고, 김원웅 한나라당 의원이 당적을 개혁당으로 옮 기는 등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개혁당은 노무현 후보 절대지지층이 라고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치를 지향하고, 진보적인 정치체제를 만들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뜻에 나는 동의했다. 그러한 노력이 있다면 당연히 따르 고 힘을 보탤 작정이었다. 단 하나 내가 생각한 전제조건은 ‘민주당 의 범위 안’에서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생각하는 정치개혁의 방향은 ‘분당’이었다. 민주당 내 대통령 지지층이 빠져나가고, 개혁당이 당 을 해체한 후 두 진영이 제3의 정당을 창당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나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민주당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체질 개선을 통해 변화해야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버려야 할 만큼 문제가 심각한 정당은 아니었다.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심정으로 깔끔하게 새 옷차림을 한 정당이 더 나아보 일 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국민정서는 이해가는 바가 있었다. 그러한 국민들의 정서를 이해하면서도 통합의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노 대통령은 승자였고,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으로 믿었다. 실상은 달랐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었을지라도 노 대통령은 분당 쪽을 지지하는 것 같았다. 발언이나 태도 등에서 그러한 의중이 짐작됐다. 결국 민주당 내 노 대통령 절대지지층과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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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당 세력은 2003년 11월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은 승자로써 민주당 내 비토층까지 포용했어 야 옳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후보에서 대통령으로 지위가 바뀐 이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설혹 비토층까지 끌어안지는 못할지라도 중 도성향을 가진 후보단일화협의회(이하 후단협)까지는 대통령의 정치적 동력으로 삼아야 했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대선 당시 후단협 인 사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어떻게든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회창-노무현-정몽준’으로 형성된 삼각구도 하 에서는 ‘필패’라는 게 후단협의 판단이었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도 그런 방향으로 나왔다. 이길 수 있는 길은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가 한 명의 후보로 압축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정치공학은 1997년 대 선에서 이른바 DJP, 즉 DJ가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연합하는 구도 와 동일했다. 그렇지만 노무현 후보 측은 후보단일화 요구를 거절하 면서 한나라당에 지더라도 끝까지 간다는 입장이었다. 노무현 후보 가 떨어져서 장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스스로에게는 의미가 있 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면 참으로 어렵게 얻은 수평적 정권교체의 성과들이 허망하게 무너질 수도 있었다. 노무현은 원칙을 지키려 했고, 후단협은 실질적 인 성과를 내려했을 뿐, 지향은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후단협이 정몽준을 후보로 내세우려 했겠느냐는 것이었 다. 방법이야 어떻든 후보단일화 노력의 결과는 ‘노무현 후보’일 것으 로 후단협은 확신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40년이 넘는 정통야당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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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 정권교체의 경험을 가진 정당이었다. 무소속이나 다름없는 국 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에게 ‘밀릴’ 만큼 허약한 조직이 아니었던 것 이다. 결과적으로 후보단일화는 ‘노무현’으로 성사됐고, 대통령 선 거에서 민주당이 두 번째로 정권을 창출했다. 후단협은 스스로 ‘큰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문제는 대선 승리 이후 노무현 후보측 에서 후단협의 역할을 인정해주지 않은 데 있었다. 선거에 이기고도 민주당은 삐걱거렸다. 대통령이 후단협을 인정하지 않고, 분당의 방 향으로 정치일정을 가져가려 하자 후단협도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신당 창당 논의가 나왔을 때 광주전남지역 국회의원들 중 김효석· 이낙연·이정일 의원과 나, 이렇게 네 명이 많은 고민을 했다. 대선 때 김효석 의원은 정책을 담당했고, 이낙연 의원은 대변인이었다. 이정 일 의원은 선거자금 부분에서 많은 기여를 하기도 했다. 나 역시 기 양건설 비리 등을 폭로하면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었다. 신당참여 요 구가 높았고, 가게 된다면 어느 정도 기득권을 가지고도 있었다. 하 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민주당은 내 정치이력의 시작과 끝이었다. DJ의 수행비서에서 시 의원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나는 민주당을 떠나본 적도 없었 고,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것이 권력이건, 시대흐름이건, 유행이건 간에 충분한 대의명분 없이 당적을 옮긴다는 것은 정치적 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으로 알고 있었다. 후단협 세력까 지를 포괄하지 못한, 대통령을 위한 정당창당은 ‘충분한 대의명분’ 이 못 된다는 게 당시 내 판단이었다. 나는 민주당을 지키는 방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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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마음을 굳혔다. 김효석·이낙연·이정일 의원도 같은 생각으로 민 주당에 남았다.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여당에서 갑자기 ‘야당’이 되어버린 민주당 은 적지 않게 흔들거렸다.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 대선승리를 이끌었던 민주당은 열린우리당이 창당된 이후 40억원이 넘는 부채 를 떠안아야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민주당은 내게 조직위원장 역할 을 맡겼다. 흔들리는 조직을 재정비하라는 거였다. 국회의원으로 활 동하던 시절 내 지역구는 중앙당에서 평가하는 최우수 지구당에 4 년 동안 3년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자부하건데 지역구 관리를 나처 럼 열심히 한 사람도 드물었다. 국회가 끝나는 금요일 저녁이면 무조 건 광주에 내려와서 일요일 저녁이나 월요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갔 다. 매주 2박3일은 지역구에서 보낸 셈이었다. 그래서 중앙당에서는 지역구 관리를 잘못하는 이들에게 “광산구에 한번 가보라”고 권하기 도 했다. 실제로 내 지역구 관리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광산구를 방문했다. 내 노력과 더불어 주위의 도움, 특히 정치선배들의 애정 덕분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직관리 이력을 높이 사 내게 조직위원장을 맡겼던 것이다. 제17대 국회의원 총선은 2004년 4월15일로 잡혀 있었다. 선거를 다섯 달 정도 남겨 놓 고 야당이 된 민주당은 여러모로 어수선했다. 조직위원장을 맡고 나서 광주전남지역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정당 지지율이 전남은 6:4 로 민주당이 열린우리 당에 앞섰고, 광주는 5 : 5 정도로 나왔다. 후보지지율은 광주의 민 주당 후보들이 대체적으로 열린우리당에 비해 조금 앞섰다. 전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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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우 훨씬 더 큰 차로 민주당 후보들이 열린우리당 후보를 압도했 다. 조사결과 나타나는 수치들은 정치개혁에 대한 광주전남 시도민 의 열망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분열’은 용납하지 않 는 복합적인 내용이었다. 진정성을 가지고 착실하게 조직을 관리하 면 여론은 민주당을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두문불출 민주당 조 직관리에 온 힘을 쏟았다. 결과적으로 조직을 굳건히 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니, 실패라기보다는 무의미한 노력이 되고 말았 다. 이른바 ‘탄핵사태’ 때문이었다.
2004년 1월5일 민주당의 조순형(趙舜衡)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 핵을 언급하면서 본격화됐다. 이어 같은 해 3월5일 대통령이 선거중 립의무 위반과 측근비리 등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하지 않을 경우, 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는 특별기자회견을 가졌다. 대통 령이 사과를 거부하자, 3월9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공동으로 탄핵 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저지를 위한 국회 본회의장 농성에 들어갔다. 3월11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상정되었고, 다음날 오전 11시 5 분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고, 헌 법재판소에 소추의결서가 접수되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총선을 한 달 정도 남겨 둔 시점에서 이뤄진 탄핵 사태는 정국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탄핵 직후 여론조사를 해 보 았더니 정당지지율은 3배 차이로 열린우리당에 민주당이 밀렸다. 열 린우리당이 60% 정도, 민주당이 25% 미만으로 지지율이 나온 것 이다. 후보 지지율도 광주에서는 전부, 전남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이 역전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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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 나는 처음으로 ‘낙선’했다. 김효석·이낙연·이정일 의원 은 당선됐다. 이 결과는 개인차라기보다는 전남과 광주의 정서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역구 활동에 대한 합리적 인 판단보다는 ‘정서’가 가장 중요하게 표심을 작동시킨 결과였다. 의 정활동과 지역구 관리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는데, 그것 과는 다른 이유로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의 상 처를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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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삶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실패다
17대 총선에서 나는 졌다. 공황상태 같은 것이 찾아왔다. 당장에는 사람 없는 광장을 찾았 다. 그곳은 산이었다. 오직 내 눈으로 나를 점검해볼 수 있는 공간이 산이었다. 산에서 나 는 얻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삶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실패다’. 실패 자체는 문제가 아니 었다. 실패의 갈무리가 중요했다. 실패를 교훈으로 미래의 동력을 찾아내는 것. 그렇지 못 하면 그것이 진짜 실패라는 것을. 지리산에서 나는 다시 사람의 광장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17대 총선의 실패를 즐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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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서운함·반성·책·DVD 낙선, 그리고 자유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2004.4.15)에 임하면서 사실 나는 ‘낙선’을 예상했었다. 탄핵의 후폭풍으로 여론조사에서
20% 를 앞서다가 오히려 20% 뒤처지게 됐으니 당선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지만 나를 도와주는 분들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고 독려하면서 선거를 치렀다. 당락 여부에 상관없이 열심히 뛰었다. 정치는 내 삶 그 자체였고, 앞으로도 많은 세월이 내게는 남아 있었 다. 일희일비는 소인배나 하는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여겼 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선거에서 한 번도 진적이 없었다. 작게는 학창시절 반장선거에서 크게는 국회의원 선거까지 매번 ‘승리의 길’ 을 걸어 왔었다. 스스로 조직의 명수라고 생각했고, 선거기획에 탁월 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선거기획이나 조직을 다른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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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맡기지도 않았다. 정치컨설팅이나 조사팀을 따로 두고 선거를 치 르지도 않았다. 모두 내가 했다. 발품을 팔아가면서 현장을 돌아다 니면 거기에서 민심이 읽혔다. 하루하루 일과를 정리하면서 이 민심 을 종횡으로 엮으면 공약이 나왔고, 선거 전략이 도출되었다. 그 결 과 실제 선거에서 나는 ‘무패행진’을 거듭했다. 정치의 모든 면이 내 적성에 맞았다. 선거를 할 때마다 나는 즐거웠다. 당선을 위해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그런 체질이 아니었다. 각종 데이터를 통해서 치밀 하게 준비한 선거에서 즐거운 자신감은 내 정치의 원동력이었고, 늘 당선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당락여부보다는 당선 이후의 정치행위 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정치행위의 기준이 정직함, 새로움 두 글자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는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졌 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떨어지고 나니 정신의 공황상태 같은 것 이 찾아왔다. 지난 세월들이 가로세로로 긁힌 영화필름처럼 반추되 었다. 우선은 원망이 앞섰다. 지역을 위해서, 광주와 호남을 위해서, 그 리고 국가의 대소사에 사심 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사람들은 몰라주 는구나, 라는 회한의 감정이 들었다. 본래 선거란 이성적인 행위라기 보다 정서적인 작용이라는 게 정치학의 주장 중 하나이다. 또 그 정 서의 밑바탕에는 이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어진다. 그러 나 17대 총선은 철저하게 정서적인, 감정적인 투표로 일관했다는 생 각이 들었다. 대통령 탄핵에서 비롯된 그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못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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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들에게 서운하기만 했다. 그 서운함이 심해져서 잠시 동안이 나마 대인기피증 같은 것도 생겼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슬렀다. 여건을 탓해서는 내 미래가 없다. 문제는 언 제나 ‘나’일 수밖에 없다. 시대의 흐름을 잘못 판단한 내 잘못이 그대 로 내게 돌아온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반성과 휴식의 시간 을 갖기로 했다.
4월 선거 이후 여름을 넘기고 가을이 무르익을 때까지 약 6개월 동 안 나는 칩거했다. 서울, 광주, 지리산 등을 오갔지만 외부에 알리지 지 않은 채 나 혼자였다. 이 시기는 어떤 면에서 보면 내 인생에서 처 음으로 맛보는 자유의 시간이기도 했다. 한번도 쉬지 않고 앞으로만 흘렀던 시간이 잠시 멈춘 때이기도 했다. 이 자유와 휴식을 맘껏 누 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에는 사람 없는 광장을 찾았다. 그곳은 산, 그 중에서도 지리 산과 소백산이었다. 지난 세월들의 흔적이 도도한, 그러나 육중한 무게로 말이 없는 사람 없는 광장이 산이었다.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오직 내 눈으로만 나를 점검해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 산이었 다. 산장에서, 혹은 비박을 하면서 지리산이라는 광장에서 지난 시 간과 다가올 시간을 응시했다. 사람이 없었으므로, 언제나 사람으 로 넘치는 정치라는 광장이 새롭게 조망되었다. 연대와 투쟁으로 점 철된 정치의 광장이 나를 이만큼 키웠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삶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실패다.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적기 때문이 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그 실패의 갈무리에 있다. 실패를 교훈으 로, 내 미래의 동력으로 삼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짜 실패, 곧 몰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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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고 보니 DJ는 국회의원 도전에 연거푸 세 번 실패했고, 대통 령 선거도 세 번째 실패한 이후 네 번째에 성공했다. 내 실패가 오히 려 하찮게 생각되었다. 비록 잠시였을지언정 사람들에게 서운해 했 던 내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웠던 오랜 친구가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것처럼 이런저런 깨달음들이 가슴 벅차게 나를 찾아왔다. 산에 가지 않은 시간에는 방에 틀어박혔다. 용산전자상가에서
DVD 50개를 샀다. 세계명화, 역사다큐, 동물의 세계, 지구의 환경, 종교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사서 온종일 들여다 보았다. 내가 여태껏 왜 이런 것들을 놓치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영상물들은 새로우면 서 매우 깊이 있는 깨달음을 주었다. 영화에서는 일본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작품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웅장한 서사 시처럼 느껴졌다. <라쇼몽>, <란>, <꿈>, <카케무사> 등의 영 화들은 희망과 절망, 권력과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거기에 맞서는 집단의 투쟁들을 빼어난 영상 속에 담아 놓았다. 일본 NHK 가 만든 <세계4대 문명>, KBS가 만든 <몽골리안 루트>, 내셔널지오그래 픽의 여러 자연다큐도 감동적이었다. 나의 고민, 우리 민족의 숙제들 은 새로운 게 아니라 오래 전에 잉태되고 진화해 온 매우 ‘고전적인’ 것들이라는 인식이 싹텄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인데, 이는 진부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홀로이지 않고, 고독 하지 않다는 가르침의 다름 아니었다. 내 가슴을 가장 크게 설레게 한 영상물은 ‘예수’와 관련된 것들이 었다. 주로 미국의 히스토리채널이나 영국BBC 가 만든 것들이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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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예수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 방식 이었다. 예수의 행적, 성경의 기록들은 종교와 역사 두 가지 맥락에 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나는 역사적 해석에 주목했다. 예수 는 민중을 사랑한 당대의 ‘행동하는 양심’이었고, 그의 숭고한 실천 이 종교로까지 승화되었다는 게 내 나름의 결론이었다. 적어도 예수 의 행적만으로 볼 때 종교는 신비롭고 절대화된 어떤 것이 아니었다. 종교는 인간의 삶에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 가장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과 더불어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자식 이었다. 이상적인 삶(하나님의 아들)과 현실의 고통(사람의 자식)을 함께 보듬고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지혜롭고 순정한 한 사내의 삶이 예수의 행적이었다. 그 행적은 개인에게도 의미 있지만 정치로 세상 을 경작하려는 이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는 텍스트였다. 예수의 삶에 많은 감동을 받았던 탓인지 책을 읽는 데도 주로 ‘위 인전’ 쪽으로 머리가 쏠렸다. 내 스스로도 흥미로운 것은 ‘위인’들 중에서도 여성들에게 많은 관심이 갖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진단 해 보았는데, 그것은 ‘마이너리티’와 관련이 있었다. 나는 체육대학 을 나온 전라도 정치인이었다. 광주에서도 도심이 아닌 외곽의 도농 복합형 공간이 내 근거지였다. 소수자, 주변인의 특성이 내 몸속에
DNA처럼 박혀 있는 셈인데 세계를 놀라게 한 인물들 중에는 여성 들이 내 정서적 코드에 더 맞았던 것 같았다. 히틀러 치하에서 세계 사에 걸작으로 남는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제작한 레니 리펜슈탈, 고 졸의 학력으로 침팬지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옥스퍼드에서 박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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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받은 제인 구달, 할리우드의 대스타이면서도 폐허의 전후 이탈 리아로 간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과 영화 작업을 한 잉글리드 버그만, 차별과 배고픔 속에서 유년을 보낸 아픔을 딛고 흑인의 가슴을 어루 만지는 음성으로 재즈를 노래한 빌리 할리데이, 젊어서부터 지금까 지 통기타 하나로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노래한 조안 바에즈, 일제강 점기라는 엄혹한 환경에서도 밑바닥 기층민중의 삶을 생생한 언어로 형상화한 목포의 소설가 박화성 …. 참으로 많은 여성 선각자들이 ‘발견’되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심하게는 유색인종이라는 점 까지 겹쳐서 이중삼중의 차별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세상에 출사표 를 던졌던 여성인물들의 삶은 나를 부끄럽게 했고, 동시에 커다란 용 기를 주었다. 지리산에서, 그리고 골방에서 성찰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다시 사 람의 광장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17대 총선의 실패는 이제 즐 기기로 했다. DJ를 비롯해 민주화의 선배들은 감옥에서 독서와 사 색을 통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가진 것이 너 무 많았다. 변함없이 나를 지지해주는 이들이 있었고, 조건 없이 끌 어주고 도와준 선배들 그리고 조건 없이 나를 따르는 후배들도 그대 로였다. 나만 잘하면 되는 일이었다. 감옥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 스스로 나의 감옥을 만들어야 했 다. 유학을 결심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정도를 계획했다. 미 국에 있는 여러 대학에 타진을 했는데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과 워싱 턴의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입학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조지워 싱턴 대학은 세계정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워싱턴에 있다는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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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는 대학이지만 순수하게 공부를 목적으로 한다면 콜롬비아 대 학보다 못했다. 공부에 열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라 할 수 있는 뉴욕을 경험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으로 콜롬비아 대학 2년 코 스를 준비했다. 서류절차를 모두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갈 비행기편 과 날짜를 잡는 일만 남겨 두었다. 유학 계획도 알릴 겸 주변의 지인 들을 만나려고 계획하고 있던 차에 민주당 한화갑 대표에게 전화 연 락이 왔다. “자네, 나 좀 보세. 할 얘기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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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2006년 지방선거 전후
“자네가 광주시당을 좀 맡아줘야겠네.” “뉴욕 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올 생각입니다.” “지금 민주당의 처지를 잘 알 지 않는가. 자네 같은 사람들이 다 유학을 가면 누가 당을 책임질 것 인가.” 총선 참패 이후 민주당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있 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여당이자 원내 제2당이었던 민주당은
9석(지역구 5석, 비례대표 4 석)을 얻는 데 그쳐 10 석의 민주노동당 에 이어 원내 제4당으로 전락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민 주당을 떠받치고 있던 사람이 동교동계의 ‘맏형’이라 할 수 있는 한 화갑 대표였다. 당을 재건하고 어려운 살림을 이끌어야 할 중진들은 대부분 칩거하거나 나처럼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을 지킬 사람 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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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갑 대표는 내가 DJ를 모실 때부터 나를 가르치고 챙겨주었던 큰 선배였다. 나 또한 한 대표를 존경했고 항상 따랐다. 한 대표의 제 안을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덥 석 광주시당 위원장 자리를 받을 수도 없었다. 유학 계획 말고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한 대표의 의중대로 따라가면 당시 시당위원 장을 맡고 있던 정치 선배를 내가 억지로 밀어 내는 모양이 될 터였 다. 그 선배는 내가 존경하고 호형호제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사 이였다. 한 대표에게 나는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라고만 말하고 답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고사하고 있었다. 회신이 없자 한 대표가 다시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명확하게 “맡을 수 없다”는 의사를 전 달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한 대표가 언론에 이미 전갑 길이 위원장을 맡기로 했다고 발표를 해버린 것이다. 빠져나갈 방법 이 없었다. 나는 그 선배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이해를 구했다. 애시 당초 시당위원장은 그리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권한은 없 고 잡무만 챙겨야 해서 서로 회피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지역 국회의 원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당은 형식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중앙당과 각 지구당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지휘체계 가 작동했다. 시당은 절차상 필요했을 뿐이었다. 시당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면 비용도 발생하기 때문에 시당위원장을 맡은 지구당에서 시 당 간판을 하나 더 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17대 국회 때부터 지구당 제도가 폐지되면서 시당에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정확히 내가 시당위원장을 맡게 되면서부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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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언이 항명으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민주당 광주시당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당이 어려운 시기였다. 어려울수록 나는 ‘원칙’을 강조했다. 정당민주주의의 확대와 민주당의 미래를 위한 내 나름의 원칙이었다. 그것이 민주당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당은 나의 직언을 항명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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랬다. 이때부터 모두 시당위원장을 하려고 했다. 권한이 생기니까 사 람이 몰려든 것이다. 2004년 총선에서 참패한 민주당이 재기의 발판 으로 삼고자 했던 선거가 2006년 지방자치 선거였다. 이 선거를 대비 하면서 시당위원장의 권한은 더 커졌다. 어쨌거나 나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시당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유학은 포기하지 않았다. 2006년 지방선거를 대비한 과도기적인 위 원장 직이어서 유학에 필요한 공부를 겸하면서 시당위원장 직을 수 행했다. 한 대표가 내게 기대한 것은 자신의 의중을 충실히 따라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많 은 고생을 하면서 한 대표가 민주당을 이끈 건 사실이지만, 그분이 당을 이끄는 방식과 내 스타일은 좀 달랐다. 한 대표의 방식에는 공 조직보다는 사조직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한 대표의 이러 한 방식은 독재정권 시절을 헤쳐 온 습성과 어려운 당 살림을 꾸려가 는 데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한 대표의 방식대로 가 면 민주당의 미래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나는 내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나와 한 대표는 몇 차례 이견을 달리하며 논쟁이 있을 수밖 에 없었다. 당 대표에게 도전하고 항명을 한 것이었지만 정당민주주 의의 확대와 민주당의 미래를 위한 내 나름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었 다. 자주 의견이 엇갈리자 한 대표는 시당위원장을 바꾸려 했다. 한 대표의 뜻을 따랐다면 좀 더 편하게 정치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한 대표의 조직 운영 방식이 당 시 거세게 일어났던 정당민주주의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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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정서와도 거리가 먼 것으로 판단했다. 이것은 한화갑 대표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 문에 과거의 인연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한 대표에 직언을 하면서 맞 서기로 마음먹었다. 내 지지자들은 어려운 시기에 시당위원장을 맡겼다가 특별한 이유 도 없이 시당위원장을 바꾸려 한다고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상식적 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더군다나 한 대표의 뜻을 받아 광주시당위원장 출마를 선언한 이는 유종필 대변인이었다. 유 대변 인은 나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 사이였다. 그는 서울시의원을 했고,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홍보처와 KTV 등에서 일한 ‘중앙통’이었다.
2005년 11월 광주 정가는 광주시당위원장을 놓고 ‘전갑길과 유종 필’의 대결로 뜨거웠다. 실상은 나와 한 대표의 대결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한 대표는 자신이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조직을 동원해 유 대 변인 지지를 ‘명령’했다. 외관상으로는 광주의 모든 지역구가 유 대 변인을 지지하는 형국이었다. 박광태 광주시장의 경우 처음에는 나 를 돕겠다고 약속했다가 나중에 유 대변인 쪽으로 돌아설 정도의 분 위기였다. 한편 시당위원장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던 김동신 전 국 방장관은 “고민 끝에 유 대변인이 시당위원장에 출마하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해 출마의사를 접기로 했다”고 밝혔다. 언론을 비롯해 관심 있는 이들이 보기에 나와 유 대변인의 대결은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중량감 있는 민주당 인사 대부분이 한화갑 대표 입김에 의해 유 대변 인을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이 경선의 성격을 다윗 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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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은 11월26일∼12월1일 일주일 간 2만여 후원당원 중 15% 를 표본 추출, 전화여론조사를 통해 광주시당·전남도당·전북도당 위 원장을 함께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전북도당위원장은 정균환 최고 위원 단독 출마여서 여론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론조사 결과 유종필 후보와 최인기 후보가 각각 광주시당위원 장과 전남도당위원장에 선출됐다. 놀라운 것은 민주당이 발표한 여 론조사 결과였다. 광주시당위원장 경선에서 한국갤럽과 한길리서치 여론조사 결과 오차 범위 안의 유종필 후보 승리였다. 시당위원장 선 거 그 자체에서는 패했지만 내용에서 내가 승리한 것으로 나와 내 지 지자들은 경선의 의미를 평가했다. 중앙당에서 일방적으로 실시했 을 뿐만 아니라 중앙당의 노골적인 개입과 박 시장의 조직이 총동원 된 여론조사였는데 오차범위 안에서 유 대변인이 겨우 이긴 것이다. 지역정가와 언론에서는 시당위원장 선거의 진정한 승리자로 나를 꼽 았다. 전갑길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경선이었다는 것이 중 론이었다.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깨끗이 승복했다. 그러나 지지자들 생각은 달랐다. 불합리한 경선이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잔뜩 화가 나 있었으면서도, 이긴 거나 다름 없는 결과에 고무되어 광주시장 경선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나는 지지자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정치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 다. 나는 독립적인 개인이면서 동시에 지지자들의 뜻과 이념의 대변 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바람대로 광주시장 경선을 준비했다.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석 달 정도 남겨 놓은 2006년 3월에 광주시 장 경선 참여를 공식화했다. 김영진 전 의원과 강운태 전 의원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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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참여를 저울질하다 불출마를 선언한 시점이었다. 이 분들은 박광 태 시장의 만만치 않은 조직력, 현직 프리미엄 등으로 인해 승리를 낙 관할 수 없어 출마를 포기한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도전장을 냈다. 다시 한번 지역정가는 ‘골리앗과 다윗’ 싸움으로 내 도전을 바라보았다. 시당위원장 경선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때와 같은 불공정한 방식만 아니라면 나도 해볼만하다는 판단이었다. 당 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가 가미된다면 충 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시당위원장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지 자체 선출직인 시장 후보는 일반인 여론조사가 필수적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TV토론이 일반인 여론조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 칠 수 있다고 보아 상당한 시간과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TV토론을 준비했다. 재임시절 박 시장에 대한 공과 분석, 나의 의지와 광주시 정의 미래 비전, 지방자치와 지역정치의 개혁과제 등 모든 분야에 걸 쳐 철저하게 준비했다. 공정한 ‘게임의 법칙’만 작용해 준다면 승산 이 있을 것으로, 나와 내 지지자들은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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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못한 싸움 광주시장 경선
2006년 3월13일 광주시당 사무실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역인 박광태 시장을 제외하고는 광주시장 민 주당 경선에 도전한 이는 나뿐이었다. 기자회견을 통해 나는 “젊음 과 함께 변화와 개혁을 수행할 마인드가 있을 뿐 아니라, 모범적인 광주시의원 3 선 경험이 있고 16대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간사로서 전 국의 행정을 봐왔다”고 강조했다. 박 시장과 차별화할 수 있는 선거 전략이 있음을 공표하고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는 점도 말했다. 공정한 경선 규칙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TV토론과 함께 몇 천 명 이 직접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 당 분위기 상승과 지지도를 제고할 수 있는 ‘체육관 경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체육관 경선은 후발주자 들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고, 후보자 검증에도 꼭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TV토론을 통해 광주시민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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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들의 직접투표와 여론조사를 부분적으로 병행해 당심과 민심 을 모아야 공정한 경선이라는 게 내 주장의 핵심이었다. 특정인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떠나 TV토론은 진행되어야 옳 다는 게 상식이다. 광주시장 선거는 140만 광주시민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시민들은 좀 더 상세하고 입체적인 정보를 기초로 누구를 민 주당 시장 후보로 뽑을 것인가를 판단할 권리가 있었다. 탄핵 후폭 풍으로 인한 ‘열린우리당 거품’도 완전히 빠진 상황이어서 민주당 후 보는 곧 당선이라는 현실을 감안하면 민주당 시장후보 경선은 유권 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현직이어서 상대적으로 인지도 가 높은 박 시장은 나와 함께 TV토론을 하는 것이 나에게만 유리하 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던지 TV토론은 성사되지 못했다. 남은 것은 경선이었다. 경선은 중앙당에서 결정할 문제였다.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 궤도에서 경선 그 자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앙 당이 결정해야 할 것은 경선 규칙이었다. 하지만 중앙당은 아예 경선 을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경선을 하게 되면 두 후보 다 상처를 입 는다는 설득력 없는 논리였다. 진짜 싸움은 열린우리당 후보와 해야 하는데 민주당 내에서 경선 열기가 과열되면 민주당은 공멸할 수 있 다는 식으로 말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한 때 천하를 호령했던 민주 당은 아주 왜소해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럴 때 일수록 경선을 통해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서 세상의 관심을 민주당으로 돌리는 게 옳았다. 관심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정당민주주의의 측면에서 경선 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중앙당이 일방적으로 후보를 결정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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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인도 굵직한 선거에 제 이름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멋진 경 선을 통해 대외적으로 민주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대내적으 로는 경쟁력 있고 참신한 후보를 선출하는 것이 민주당의 밝은 미래 를 담보하는 방법이었다. 호불호를 떠나 합리적인 많은 이들이 내 입장에 동의해주었다. 하 지만 중앙당은 경선 불가방침을 고수했다. 실제로 광주시장, 전남도 지사 경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경선준비위원회나 공천심사위원회의 삼분의 일이 직간접적으로 나를 응원해줘 경선국면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 그리고 부대표인 광주시 장과 전남도지사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경선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끝내 경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화갑 대표는 대신 나에게 광산구청장 선거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 전략공천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대표의 제안을 거절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 는 내 스스로 광주시장 경선을 강력하게 주장해 놓고 전략공천을 받 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이율배반이었다. 둘째는 지구당위원장을 하면서 내가 공천을 주고 키워낸 정치인이 여러 명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구청장의 꿈을 갖고 열심히 일한 사람 들이 있었다. 내가 광산구청장 공천을 받으면 그들의 길을 막는 거나 다름없었다. 국회의원을 했던 내가 구청장에 출마한다는 사실이 자 존심 상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정서가 그렇다는 것이지, 국회의원과 구청장 일 중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는 것이 내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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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한 대표는 일방적으로 전략공천을 밀어붙였다. 거듭 거 절했는데 어느 날 중앙당 간부가 자료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여론조 사를 포함해 지방선거판도를 예측해 본 문건이었다. 당시 중앙당의 과제는 적어도 광주에서만큼은 민주당이 5개 구청장과 광주시장 자 리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여론조사 분석 결과에 따르면 4개 구청장 과 광주시장 자리는 민주당이 앞서는데 오직 한 군데 구청장 자리만 밀리고 있었다. 그곳이 광산구였다. 어쨌거나 3월 즈음에 가장 유력한 열린우리당 후보는 송 청장이었 고, 나를 제외한 다른 민주당 후보군들은 예측 시뮬레이션에서 모두 송 청장에게 밀렸다. 두 차례에 걸쳐 구청장을 역임해서 그의 인지 도, 조직적인 작업은 상당히 치밀했다. 여론조사 결과는 나와 송병 태 청장이 경합했을 때만 오차범위를 넘어 서서 송 청장이 열세인 것 으로 나왔다. 나는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한화갑 대표의 당 운영 방식에 는 반대했지만 나는 철저하게 민주당 사람이었다. 당의 어려운 사정 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시장 경선은 물 건너 간 시점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덥석 광산구청 후보 공천을 받아 쥘 수는 없었다. 정치 후배들의 도전을 막아서는 곤란했다. 공천을 받 아들일 경우 유학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내게 유학은 단순한 바깥나들이가 아니었다. 세계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에서 미 래를 준비하는 것은 분명 내게 필요한 과정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중앙당에 생각할 여유를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지리산 모처로 들 어갔다. 닷새 정도의 시간 동안 혼자서 고민에 고민을 해봤으나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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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른 길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나 를 따르고 지지해주는 이들과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분들 이 어떤 결론을 내던지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정치적 당원 동지들과 많은 토론을 했다. 결국 일반지지자 와 당원지지자, 그리고 기초 및 광역의원급 인사들 모두 유학보다는 구청장 출마가 낫다는 의견을 주었다. 안팎으로 정치지형도가 급변 하는 추세이므로 당을 지키는 한편 근거지를 갖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가 가장 많이 나왔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합리적인 판 단으로 생각됐다. 다양한 의견들을 청취한 다음 마지막으로 구청장 출마에 뜻을 세운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구청장 후보자들 또한 내 가 구청장으로 나서기를 희망했다. 약간의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누구든지 데이터 상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민주당의 승리가 중요하고, 그 승리를 발판으로 내일을 준비해야 한 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려면 내가 구청장 선거에 나가야 한다 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을 하다 구청장을 한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지지자들도 있었지만, 광산구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기도 했다. 우리의 힘과 지혜로 광산구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국회의원 역할 보다 못할 게 없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다. 나는 지지자들의 뜻을 수용했다.
4월3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광산구청장 후 보 수용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문을 통해 나는 “시장이든 구청장 이든 목표는 오직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해 향후 정계개편 과 정에서 호남이 중심이 되는 전국정당이 되고 다시 한번 정권을 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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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하는 것이다”는 수용의 근거를 밝혔다. 전직 국회의원으로서 구청 장 출마가 격에 맞지 않는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광산구는 지정학 적, 사회경제학적 측면에서 광주발전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국회의원이 할 일과 구청장이 하는 일은 성격이 다른 것이지 우열을 가릴 것이 아니다”고 답변했다. 시장경선 과정에서 외부로 비쳐진 갈 등 양상에 대해서도 마무리를 지었다. 나는 “당의 어려운 여건을 잘 아는 입장에서 구태청산과 정치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부담이 되었으나 그 입장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당장에는 민주당 심장부인 광주에서 5개 구청장을 석권하는 것이 민주당 재건과 관련 해 시급하다고 판단해 살신성인의 심정으로 광산구청장 전략공천 제 의를 수용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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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변화만이 광산을 살릴 수 있다 광산구청장
어렵지 않게 선거전을 치르고 이겨 민선4기 광 산구청장에 취임했다. 광산구를 지역구로 한 광주시의원 3 선과 국 회의원 경험이 있었으므로 내게는 광산을 살기 좋고 의미 있게 변화 시킬 수 있는 나름의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복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로 나는 혁신정책을 내놓고, 공직사회 의 식을 개혁해야만 했다. 업무 시작과 함께 나는 광주 최초로 팀제를 도입해 행정조직을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학습동아리 구성을 독려하고, 선진지 벤 치마킹 등 공무원 마인드 전환과 업무능력 향상프로그램을 진행 시켰다. 또 감사부서를 팀으로 격상시켜 독립적 업무 환경을 조성해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차단시켰다. 또한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광 산구청 언제라도 민원지원센터’를 열었고, 납세자 보호관제,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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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이 사사롭게 비추지 않듯이 크고 작은 반발이 있었다. “우리도 충분히 변했다. 얼마나 더 변해야 하느냐”였다. 그때마 다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과 주민들의 변화가 우리를 앞서고 있다. 행정이 앞서 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발이라도 맞춰야 한다. 더 변해야 한다”고 답했다. 연중무휴로 운 영되는 ‘언제라도 민원지원 센터’를 열었다. 감사부서를 팀으로 격상시켜 부정부패를 원칙 적으로 차단했다.
한국언론인포럼 주최 ‘2006 지방자치 대상’을 수상한 광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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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정보제공자 보상제도, 직소민원실 등을 운영해 주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주민들과 소통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이 중 행정 불 만 정보제공자 보상제도는 전국 최초로 시행된 제도였다. 혁신행정의 예시 하나만 든다면, 취임 이후 나는 공무원들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기관이나 사람을 찾아가 배우고 와서 발표하기를 다그쳤다. 그렇게 하면 성공사례를 문서로 파악해 흉내내는 것과는 다른 결과들이 나왔다. 소속 부서별로 열심히 배 우고 와서 발표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워온 것이 보완, 업그 레이드 돼 광산구에 맞는 최고의 가치를 창출해 내곤 했다. 사실 내가 추진한 이런 정책과 공직사회의식 변화 등 강도 높은 혁신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전의 구청장, 타 지역의 단체장들이 기득권의 저항을 겁내거나 지나치게 표를 의식해 실행하지 못한 것 들일 뿐이었다. 혁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변화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사람이고, 나머지 하나는 시스템이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완재인 셈인데 이 중에서도 우선적인 것을 꼽으라면 역시 ‘사람’이다. 때문에 시스템의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나는 중점적으로 공직사회 의식 변화를 꾀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 이다. 《주식회사 장성군》이라는 책이 있다. 국회의원 시절 정독했던 책으로 한 기업인 출신 군수의 변신과 개혁 이야기다. 한 해에만
29개 업체가 몰려든 지방자치단체 장성군의 경영 혁신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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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았다. 혁신을 통해 성장을 이뤄낸 장성군의 변화 과정이 생생했 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직원이 거의 없었다. 아쉬움이 컸다. 공 직자라면 들춰보고 고민해볼만한 책이라 생각했다. 톱니바퀴처 럼 돌아가는 행정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라도 혁신교육이 먼저였다. 장성군 또한 10년 동안의 꾸준한 교육이 군민과 공무원의 변화 를 이끌어 내고 놀랄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난 전 직원에게 《주식 회사 장성군》을 읽게 했다. 내가 내세운 것은 감성행정과 창의행정이었다. 감성행정은 기업 마케팅으로 따지면 고객만족을 넘어선 ‘고객감동’ 마케팅이다.고 객만족이 주민 불만이 없는 서비스라면 고객감동은 주민이 칭찬하 는 서비스라 할 수 있다. 감성행정은 도덕성과 청렴성을 바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행하는 행정이다. 주민을 내 부모처럼 형제처럼 생각하고 주민을 위해 헌신을 하는 행정이다. 그것은 단순히 친절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삶 의 질’이 포함된다. 환경 · 문화 · 경제 · 복지 등 전반적인 사항이 아 우러져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느끼는 생활의 영역이다. 구체적인 밑그림과 능동적인 실천이 받쳐줘야 하는 행정이다. 창의행정은 새로운 행정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정책과 기존의 행정시스템 개선 등으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행정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공직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설거지론’을 거론하며 직원들의 참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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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론
공무원에게 있어 도덕성과 친절은 기본이다. 지금은 그 기본으론 안 된다. 설거지를 하는 사람만이 그릇을 깬다. 그릇이 깨진 것은 모두 내가 책임진다. 그릇이 깨지는 것이 두렵다 고 가만히 있지 말자. 시도하자. 도전하자. 광산구를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만 들어보자.”
학습동아리 활동을 독려했다. 2008년 꾸려진 회계관리팀 학습동아리 ‘웃기는 뚱딴지들’ 발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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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들에게 청렴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조선시대 ‘청(淸)·예(例)·탁(濁)문’을 재현한 구조물을 청사 입구에 설치했다. (위) 광산구 보건소 옥상 4층 휴게공간에서 전 직원이 참여한 가운데 ‘런치타임 콘서트’를 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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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려했다. 공직사회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면이 있었다. 일상적인 업무에 바빠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는 면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이라도 변화와 혁신은 필요했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사람만이 그릇도 깬다. 그릇 깰까 무서워 밀린 설거지를 그대로 둘 것인가. 그릇 깨진 것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시도부터 하자”고 주문했다. 일정한 통과절차를 밟아 공직사회에 들어온 공무원들이 훌륭한 집단인 건 분명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나친 안정추구는 창의성의 실종으로 이어지는데 창의력이 없는 공동체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는 법이고, 이는 곧 도태를 의미했다. 광산구를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게 내 포부였다. 그러려면 공무원집단이 시대변화를 앞 서거나, 최소한 그 변화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의 행정조직은 오히려 시대에 뒤쳐지고 있었다. 뒤쳐진 조직과 마인드를 가지고서는 주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고, 결국 광산구의 발전 동력을 확보하는 일은 멀어지고 만다. 예전에 공무원은 지식인그룹에 속했고, 누구보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전 반적으로 높아졌고, 정보통신과 민주주의의 발달로 공무원들의 정보독점 체제는 깨졌다. 더 이상 주민들은 계몽의 대상일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그 문화가 자유로운 일반인들이나 기업 조직이 공무원들을 앞서는 시대가 왔다. 공무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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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높이지 않으면 ‘리더’로서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혁신운동가, 전문가들을 초청해 교육프로그램을 진행시켰고, 나 역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혁신에 대한 입장과 이론을 정밀화시켜 공무원 교육에 앞장섰다. 전국 지자 체 우수사례를 수집해 벤치마킹 했고, 워크숍이나 발표회 등을 수시로 열어 의식개혁의 방향과 내용을 구체화시켰다. 이런 일을 진행시키다 보니 크고 작은 반발도 있었다. 반발의 대체적인 내용은 “우리도 충분히 변했다, 얼마나 더 변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과 주민들의 변화가 우리를 앞서고 있다. 행정이 앞서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발이라도 맞춰야 한다. 더 변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노력은 곧바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광산구의 노력에 대 한 첫 번째 외부 평가는 2006년 하반기 광산구가 국가부패방지위 원회로부터 ‘청렴도 우수기관’(전국 8위)에 선정된 것이었다. 이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동안 하위권의 청렴도가 갑자기 상위권으로 오르자 전국의 많은 자치단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일순간에 구청 공무원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이전까지는 상을 받는 영예 같은 것은 남의 일로 생각해왔던 터였는데 전국 253개 지자체 중에서 8등을 해버린 것이다. 특히 8 위의 내용이 ‘청렴도’라는 점에서 크게 고무되었다. 공무원들을 믿지 않는 것이 한국사회 전반의 분위기이기도 하거니와, 광산구민 역시 행정조직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혁신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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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가 쇄도했고, 지역민들이 공무원들을 믿고 따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내부의 교육과 외부의 긍정적인 평가, 주민들의 신뢰에 힘입어 공직사회 변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변화의 굵은 방향은 군림하는 공직자가 아니라 서비스를 통해 주민들에게 진정으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행정조직이었다. 흔히 서비스라고 하면 민원창구에서 밝게 웃으면서 주민들을 대하는 정도로 한정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또한 매우 중요한 덕목인 게 사실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주민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그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행정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정의 습성이 현장밀착형이어야 하고, 시대정신을 잘 짚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가난한 시절 주민들의 행정수요는 상하수도 정비, 가로등 설치, 버스 등 대중 교통체계 조정, 도로 확대와 같은 것들이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이 행정의 핵심인 것으로 알고 있는 공무원들이 많다. 하지만 국민소득 2만 ~3 만불 시대인 지금의 경우 사례로 열거한 요구들은 이미 99% 정도는 달성됐다고 보는 게 옳다. 이를테면 스포츠시설, 공원, 녹지공간, 문화시설 등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요한 인프라 요구가 훨씬 많은 것이 지금의 사정이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주민들의 실질적 요구를 파악하지 못하면 적지 않은 예산과 조직이 수반되는 행정력을 옳게 쓸 수 없는 것이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10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 행정의 역할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2만불 시대의 행정정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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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하면서 동시에 5만불 시대에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도시계획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행정수요를 예측해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저출산 세계 1위인 지금 우리나라에서 펼쳐야 하는 기초지자체 차원의 출산장려 정책은 어떤 방향이어야 할까.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출산장려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약 간의 현금 지원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효과적일 수 없다. 100만 원 남짓한 현금이 소모되는 것은 금방이다. 당장에 기분만 좋을 뿐 출산을 장려하는 매력 있는 인센티브는 아니다. 출산장려 정책의 열쇳말은 안정적인 육아환경이다. 어릴 때는 건강이 중요하고, 자 라나서는 교육이 크게 부각된다. 공적 자원은 이 부분에 투여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광산구의 경우 조례를 만들어 셋째 자녀를 낳을 경우 10년 동안 구청이 건강보험료를 납부해 주는 정책을 시행 했다. 첫째 둘째 아이에게도 혜택을 주고 싶고, 건강보험뿐만 아니 라 교육 등 다른 영역까지 확대시키고 싶지만 구청 살림으로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패러다임,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 이 되는 게 무언가를 파악하는 것일 터이다. 기초지자체가 본질을 꿰뚫는 정책을 시행하면 광역-국가로 이어지는 단위에서도 참고하 기 마련이다. 기초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기획하고 집행하되, 충분히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광주가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해 광주시가 생산과 관련된 백색가전, 자동차부품산업 등 공장시설 유치에 ‘묻지마’ 정책을 펴오고 있는 중이다. 그 정책의 대상 지역이 늘 광산구여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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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광산구는 광주 산업의 80% 를 책임지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앞으로 광산구에 공장시설을 늘리는 것은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태도다. 공장 숫자가 충분하니까 그만 들어와도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니다. 유치를 계속 하되 입지에 대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현재 동-서-남-북 4개 구청이 있는 광주 땅은 포화상태다. 미래가치로서 삶의 질을 따지는 도시로 광주시가 거 듭나기 위해서는 결국 광산구 땅을 활용해야 한다. 그런데 당장 급하다고 광산구로만 공장시설을 유치하다 보면 수십 년 뒤에 가 서는 후회할 게 뻔하다. 녹지와 생태, 아름다운 수변공간이 있는 광산의 자연자원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제 공 장시설 유치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있다는 사정까지 감안해 갈수록 공동화되어 가고 있는 전남지역과의 연관 속에서 입지를 결정해야 한다. 광역도시로서 위상을 갖추고 있는 광주는 교육과 문화 인프 라가 빼어나고 생태환경 여건이 훌륭한 명품도시로 미래를 설계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간단한 예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이런 마인드들이 내가 생각하는 50년, 100년 앞의 미래를 내다보는 행 정의 태도들이다. 나는 아낌없는 열정으로 광산구의 변화를 시도했고, 초기의 적 응기를 거치고 나서 구청 공직자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입장 에서 나의 시도에 함께 했다. 공무원들의 변화상을 확인한 주민들도 내가 시행하는 여러 정책에 힘을 보태 주었다. 그 결과 3년도 못 되는 기간 동안 100여 차례 이상 상을 받았는데 모두 행정혁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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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성과 있게 추진해서 받은 상들이었다. 광산구청 공직자들과 주민들이 함께 일궈낸 성과여서 서로 격려하자는 뜻에서 그 중 특히 의미 있는 수상 내역 몇 개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는 상들은 대체적으로 2008년도에 집중 되었다. 좋은 상일 수록 몇 년간의 성과를 입체적으로, 꼼꼼하게 파악하는 경향이 강한 때문이다. 한국전문기자클럽과 한국일보가 주최하고 지식경제부 등이 후원 하는 ‘2008 존경받는 CEO 대상’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도 한 인사를 선정해 그 업적을 널리 알린 다는 취지로 제정된 상이 다. 역시 2008년에 한국능률협회가 주는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 경영대상(이하 GS경영대상)’을 받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일반
기업을 물리치고 대상을 수상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 상은 기업과 단체의 경쟁력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라는 점 때문 에 내로라하는 기업과 지자체들이 해마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2008년도 역시 많은 기업과 지자체가 경쟁 했는데 광산구가 지자체로는 유일하게 품질경영 분야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한편 ‘어메이징 클린시스템’이라는 친환경 음식폐기물 시스템 구축사 업으로 UN행정네트워크(UNPAN)가 주관하는 ‘2008 유엔공공 행 정상’ 최종심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또한 광산구는 2008년 보건 복지가족부의 지자체 복지종합평가 최우수기관에 선정됐으며 기초 생활보장분야 대통령상도 받았다. 2009년에는 전국 지자체로는 최초로 ‘지역산업정책대상’을 받았다. 문화 방면에서도 두각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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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냈다. 광주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활용 프로그램을 운영해 2년 연속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고 지원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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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 드세요. 오리고기 드세요. 축산농가가 많이 어려워요. 모른 척하면 안 돼요. 외면하면 안 돼요. 우리 모두가 힘들어져요.
미래 동력은 지식, 그리고 여성 정치·행정 철학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맨 먼저 시작한 강의는 여성학이었다. 구청장이 된 후에도 여성학을 강의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구청장이 왠 여성학 강의?’ 라 는 식으로 의아해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막상 강의를 진행하면 ‘여성’을 이야기하는 내 태도가 사뭇 진지하면서도 경쾌하다는 데 다 시 한번 놀라곤 한다. 실제로 나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매우 깊이 있게 공부하고 고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의 경쟁력은 여성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최근까지 세계의 중심은 남성이었다. 곧 세계를 지배하는 바탕은 ‘힘’이었다. 국가 시스템으로 이야기하면 강대국 중심으로 세계가 재 편되었다. 여기서 강대국은 ‘선진국’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선진 국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서 고루 진일보한, 삶의 질이 높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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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강대국은, 삶의 질은 낮을지라도 땅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군사적 수단이 강하게 확보되어 있는 그런 나라를 말 한다. 소련이나 중국이 강대국이라면, 유럽의 여러 나라는 선진국이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갈수록 강대국의 특성을 강화 시켜 나가는 모습인데, 미-소 대립 시기에는 강대국의 특성과 선진 국의 성격이 결합된 나라였다. 소련, 즉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동 유럽에 불어 닥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 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개방 정책 등으로 냉전체제가 해체됐다. 이와 동시에 정보·통신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세계는 지식정보 화사회로 진입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에 따르면 세계를 지배하는 세 가지 근원은 힘·돈·지식인데 시대정황에 따라 ‘중심’이 달라진다. 힘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돈과 지식이 보조 역할이었고, 지식이 중심역할을 하면서 부터는 돈과 힘이 하위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21세기가 지식과 정보 를 중심으로 돈과 힘이 엮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지식과 정 보가 돈과 힘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21세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즈음에서 여성의 활동이 매우 중요해진다. 힘과 돈이 세상의 중 심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여성이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힘과 돈을 남 성들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 독점력으로 지식 면에서도 남성이 우 위를 확보했다. 가난 했던 시절, 힘과 돈에 접근하기가 더 유리하다 는 이유로 ‘아들’들이 부모들의 교육 투자를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 었던 이치와 같다. 하지만 경제력이 상승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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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장이 왠 여성학 강의?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의 경쟁력은 여성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맨 먼저 시작한 강의도 여성학이다. 선거운동을 하다 남성 지지자들이 “부인과 어머니, 여동생의 표는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긴 하지만, 속으론 ‘쉽지 않을 텐데요’ 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역할이 괄목할만하게 증 대된 시대다. 그 남성 지지자가 부인, 여동생 표를 가져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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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좀 더 안정적으로 확보되면서 남성적인 힘의 필요성은 점점 줄어 들고 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 또한 충분히 교육받고 있으며,
IT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에서도 남성의 우 위가 무너졌다. 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사회교육 등에서 선진 국가 일수록 남녀평등이 더 확고하게 확립되었다는 것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조금 엄격히 논의한다면 여성시대가 먼저 온 게 아니라, 세상이 지식정보화 시대로 바뀌면서 여성시대가 될 수 있는 조건이 확보됐 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건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데도 여성시대의 도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시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여성의 권리, 사회적 역할 증대가 자 동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지식정보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조건의 평등’이 확보되었다는 것이 여성시대를 정의하는 바른 방법 이다. 여성이라 해도 지식과 정보에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자기 시대 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여성학 강의를 하면서 강조하는 대 목도 이것이다. 아무리 조건이 성숙되었다 하더라도 여성이 적극적으 로 그 조건을 활용하지 못하면 자기 시대를 열 수 없다는 이야기다. 사회의 깊숙한 곳까지 여성시대의 효과가 퍼진 것 같지는 않지만, 주요한 부분의 지표에서는 이미 여성의 역할이 괄목할만하게 증대 하고 있다. 예컨대 교육계의 70 ~80% 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그 러다보니 여성의 과점유가 문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동안에는 여 성이 차별을 당한다고 해서 모든 사회활동에 여성 할당제를 부여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적어도 교육분야에서만큼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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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할당제가 적용되고 있다. 현재 교육대학의 20% 를 남성의무할당 방식을 적용해 남성교원 확보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공직사회에 서도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대략 10년 전까지만 해도
30% 미만이었는데 최근 9~8급 신규 공무원의 경우 여성 점유 비율 이 70%에 이르고 있다. 사법고시 합격자와 판검사 임용비율에서도 여성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고, 전체 대학생의 비율은 이미 몇 해 전 부터 남녀 균형을 이루었다. 두뇌로 승부하는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질 이유가 없어진 것을 반증하는 사례다. 반면에 정 치권은 과도하게 남성 비율이 매우 높은 상태인데, 이는 정치의 바탕 이 여전히 힘과 돈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성들은 서운해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흐름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성들이 여성시대의 도래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 게 삶을 설계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성시대를 인지하 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선거운동을 하다 보니 남성들의 그런 ‘착각’ 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남성 지지자들이 내게 고생한다고 격려하면 서 따로 도울 수는 없어도 부인과 어머니, 여동생의 표는 책임지겠다 고 약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긴 하지 만, 속으로는 ‘쉽지 않을 텐데요∼’라고 생각한다. 요즘 여동생과 부 인 가운데 남편 말 듣고 자기 표를 결정하는 분들은 없다. 어머니라 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지식과 정보를 남성들이 독점하다시디 하 니까 여성들이 남편의 말을 듣곤 했다. 남편은 바깥출입을 하고 여성 은 가사일에 얽매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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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은 여성 가사노동이나 육아, 부모님 공양들은 최대한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조직이 보조해줘야 한다. 여성들이 마음 놓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조직이 그 몫을 나눠야 한다. 공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맞게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 질 수 있도록 행정이 제 역할을 해내야 한다.
보육시설 종사자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성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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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여성들도 충분한 정보를 접하고 있다.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마
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이 훨씬 앞서기도 한다. 남성들이 신문이나 TV뉴스도 볼 틈 없이 바깥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 을 때 여성들은 한결 간편해진 집안일을 마치고 신문을 본다. 아이들 숙제를 도와줄 양으로 컴퓨터를 켜고 나서는 인터넷 뉴스를 자연스럽 게 훑어본다. 학부모로서 학교 운영에도 참여하고, 공과금을 내거나 각종 세금을 관리하기 위해 관공서도 여성들이 더 많이 출입한다. 직 장 동료에 한정된 남성들과는 달리 훨씬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여성의 판단에 남성들이 따라야 옳 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은 자신들도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점을 알 아차리고 적극적으로 세상과 접속해야 할 것이다. 남성들 또한 여성의 시대, 곧 새로운 경쟁체제가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른 각도에서 자기계발을 서둘러야 한다.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은 이러한 시대조건 이 공동체의 경쟁력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을 정비해야 한 다. 여성이 지식사회에 접속해 얼마만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많이 하느냐가 경쟁력을 기르는 척도다. 이 대목에서 국가경쟁력, 기업경쟁 력, 행정 및 문화경쟁력이 샘솟는다. 문제는 한 개인으로서 여성의 노 력만으로는 사회활동 증진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문화적 지 체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변화했으나 아이를 낳아 기르 고 부모를 공양하는 문제는 여전히 여성들 몫으로 남겨져 있다. 세상 은 여성에게 열려있는데 그 열린 세상으로 여성들이 나아갈 수 있는 길 이 막혀있는 셈이다. 세계의 절반, 지구의 절반, 국가의 절반, 우리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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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절반이 여성이다. 그리고 이 여성들 대다수는 지적 수준이 높 고, 잠재력도 크다. 이런 고급인력들이 가정에 갇혀 있다면 공동체 의 경쟁력은 높아질 수 없다. 가사노동이나 육아, 부모님 공양을 낮춰 보는 태도는 아니다. 그런 일들은 최대한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조직이 보조해주어야 한다. 여성들이 마음 놓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육대책을 마련하고, 안전한 탁아시설 등을 확충하는 몫은 공조직이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들을 위한 의료혜택, 쉼터, 요양시설 등을 확보하는 것 도 행정의 역할이다. 노인공양의 첫 번째 덕목은 건강관리라고 할 수 있다. 공적 시스템을 통한 건강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여 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사회적 비용도 절감된다. 이러 한 노력들을 행정의 목표로 삼고 성과를 냈을 때 여성들의 활발한 사 회진출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출산율이 높아지는 것도 기 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맞게 여성의 사회 적 활동이 활발해질 수 있게끔 뒷받침하는 것을 행정의 매우 중요한 역할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맞춰지면서 인 적자원이라는 저수지의 물이 가득 찰 테고, 이 가득함은 곧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지역의 경쟁력이 높아지면, 지역 간 경쟁을 자 극하기 마련이고, 결국 국가경쟁력의 상승이라는 궁극적인 효과를 낸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돕는 것이야말로 정치와 행정이 확고히 가져 야 할 철학이고, 이 철학에서 각종 정책을 도출해야 우리 사회가 건 강하게 발전할 것으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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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문화권이라는 프레임 광산과 광주
현재 광주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인 45% 가 광 산구의 땅이다. 시계를 조금 뒤로 돌리면 광산구는 광주면적의 75% 를 차지했다. 면적으로만 볼 경우 광주는 광주시가 아니라 광산시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조그마한 행정도시가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전남의 중심도시로 성장한 게 지 금의 광주다. 성장 과정에서 광주는 광산의 넓은 땅을 조금씩 잠식 해 오늘에 이르렀다. 광주라는 지명의 유래는 고려 태조(918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 이때 광주는 지금의 광주까지를 포함한 광산군을 의미했다. 백 제 때 지명이었던 무진주 또한 광산군을 지칭했다. 이후 역사에 기록 된 광주의 변화는 곧 광산의 변화를 뜻한다고 보면 된다. 조선왕조의 막바지 단계인 고종 때 광주군은 곧 광산군이었다. 이 광주군에 속 해 있었던 광주읍이 지금의 구도심이있고, 구도심이 팽창함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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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광산군과 광주부로 나뉘어졌다. 이후 광산과 광주는 각자의 길을 가다가 1988년 1월 통합되었다. 광산구는 광주 산업의 80% 를 담당하고 있다. 평동산업단지, 하 남산업단지와 같은 시설들 때문이다. 광주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는 산업단지와 더불어 광활하게 형성된 농토와 미개발지가 많은 곳 또한 광산이다. 도농복합형 자치구가 광산인 셈인데 아직까지는 광주의 외곽으로 인식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지금 광주의 발전 축은 동구에서 상무지구로까지 이동되었다. 이 이동이 지닌 의미는 광주의 미래가 차근차근 영산강 쪽으로 옮겨 오고 있다는 것이다. 광주에 근대화 프로그램이 작동된 이후부터 광주의 ‘젖줄’은 광주천 으로 인식되었다. 알다시피 광주천은 영산강 본류로 흘러드는 작은 지류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 4대강 중의 하나인 영산강을 두고 광 주천이라는 ‘또랑’을 젖줄로 삼고 도시의 미래를 검토했던 것이다. 이 런 표현은 다만 상징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광주가 확대 되는 방향은, 마치 물길을 찾아 뻗어 가는 나무뿌리처럼, 영산강 본 류 쪽이었다. 상무·첨단 지구가 그 사례다. 모두 광산구에 포함된 지 역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주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터가 광역도시 를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인 탓이다. 실제로 광산을 제외한 광주 도 심의 80% 는 지금 개발이 완료되었다. 개발의 여지가 20% 정도 남 아 있긴 한데, 새로운 시대는 이 20% 를 근대적인 방식의 개발이 아 닌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할 수 있는 녹지로 가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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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미래 광산구는 광주의 미래를 위해 아껴 놓고 남겨둔 땅이다. 광산구를 제외한 광주 도심의
80%는 지금 개발이 완료되었다. 개발의 여지 20%는 근대적인 방식의 개발이 아닌 도심 의 허파 역할을 할 수 있는 녹지로 가꿀 것을 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광산구는 개발 잠재력 이 80%에 이른다. 광산구를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따라 광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틀 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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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여지가 더 이상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재개발의 길 이 있기는 하지만 고비용을 감당해야 하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 시킬 가능성이 커 좋은 방법으로 볼 수 없다. 예컨대 광주 구도심의 개발 비용은 지가보상에 70% 가 들어간다. 매우 비효율적인 것이다. 반면 에 광산구는 개발 잠재력이 80%에 이른다. 단순히 넓은 땅이 많다 는 차원이 아니라 기존의 도심과 연결되는 도로구조, 택지개발이 완 료된 곳 등을 감안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광산구를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따라 광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 다. 광산이 광주의 희망인 것이다. 광산구는 광주의 미래를 위해 아 껴 놓고 남겨둔 땅인 셈이다. 나는 이러한 광산의 역할을 ‘영산강문화권’이라는 틀로 설명한다. 알다시피 세계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큰 강을 끼고 있다. 황하문명, 인더스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 등 세계 4대 문명의 발 상지는 모두 넓은 강이 있어서 가능했다. 강은 농경과 어로, 마을 형 성, 물류이동 등을 가능케 해 문화를 꽃 피우는 젖줄이다. 세계 4대 문명이라는 프레임은 시차와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지역과 시 간대의 문명을 설명하는 데도 유효하다. 서울-한강, 대동강-평양, 낙동강-부산, 금강-공주 등 한반도 안에서도 강과 문명의 호응관계 는 쉽게 관찰된다. 그런데 이러한 짝짓기에서 광주-광주천은 매우 어색하고 왜소하다. 당초에 나주 -영산강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 치면서 나주가 쇄락하고 광주가 상대적으로 흥했다. 광주가 전라남 도의 ‘수도’로 정착되었는데 도시발전 전략에서 영산강이 ‘파트너’로 설정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가까이에 광주천이 있어서 그것으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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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강은 스스로 흐르는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 문명을 통합하는 특성이 있다. 영산강은 광주에서 멀 리 있지 않다. 바로 광주 안에 있다. 서쪽 황룡강과 동쪽 극락강이 Y 자 형태로 합류하는 지점 양편에 평동산단, 호남선, 전라선, 서해안 고속도로에 연결되는 12번 고속도로가 있다. 광주전남공동혁신도 시도 영산강 본류와 지석천이 합류하는 전남 금천면 지역에 조성되 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든 그러지 못하든 간에 광주의 미래는 늘 강 과 더불어 설계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치밀한 개발전략을 세우기 위 해서는 이제 강을 확실하게 개발전략의 중심에 놓고 일을 꾸며야 한 다. 그리고 그런 일을 꾸밀 수 있는 광주의 땅은 광산구이다. 광산이 내 고향이고, 내 정치적 바탕이어서 이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면 곤 란하다. 당장에 스스로가 광주시장이거나 자본이 튼튼한 민간투자 자라고 가정해 보라. 광주광역시라는 행정구역 안에서 스케일 큰 사 업을 벌일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 광산 말고 투자가치가 높은 매력 있는 공간을 제시한다면 나 또한 거기에 따를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 대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엉뚱하게도 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소유하 고 있는 이라크를 떠올렸다. 세계 5대 산유국인데다 로마 못지않은 고대문명의 유산을 갖고서도 이라크는 현재 폐허 상태에 있다. 아무 리 자원이 풍부해도 지도자를 포함해 그 사회의 엘리트가 건강하지 못하면 모두에게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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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 광주라는 말의 참뜻 삶의 질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영화나 연극 한편을 포기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한 끼니라도 건너뛰면 누구든지 고통스럽다. 그래서 경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선결과 제’로 분류된다. 이를 부인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경 제냐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경제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이 경제냐고 물으면 대답은 망설여진다. 간단하게 경제는 ‘돈’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이 때 돈의 의미 는 ‘구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돈이라는 수단으로 끼니를 마련하고, 입을 옷을 사고, 집을 짓는 것이다. 생활 을 영위하기 위해 구매 수단으로서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가 극도의 가난에 처해 있을 때 ‘돈’을 버는 일이 가장 중 요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가난해서 가난한 시절의 돈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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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쥐고 있는 돈이어야만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 다. 우선 우리는 극단적인 가난에서 벗어났다. 국가도 어느 정도 부 강해졌다. 이 경우 돈이 있고 없음에 대한 판단은 조금 복잡해진다. 예컨대 똑같이 월 100만 원을 벌더라도 의료보험이 있는 나라와 없 는 나라의 개인 실질소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무상교육이 얼마만큼 확대 되었느냐에 따라 동일한 개인소득이라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이제는 단순하게 내 통장의 잔고만 중요한 게 아니라 공적 자금의 쓰임새도 내 소득과 연관되는 지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광주는 지금 도시발전의 전략으로서 ‘문화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진행된 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이 직 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문화도시는 세계의 선진국이 지향하는 미래도시의 개발전략이기도 하다. 우리가 꼼꼼 히 점검해야 할 것은 어떤 도시가 문화도시냐는 것이다. 문화도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전시나 공연이 풍성해지는 곳이 문화도시인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이다. 예술창작물과 행위가 문화의 중심부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문화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문화는 좀 더 넓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아주 오래된, 그러면서도 여전히 권위 있는 문화에 대한 정의는 E.B.타일러의 저서 《원시문화
Primitive Culture》(1871)가 밝힌 “지식·신앙·예술·도덕·법률·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가 될 것이다. 이 정의에 따라 문화도시를 도출하면 “지식·신앙·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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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법률·관습 등이 매우 높은 수준에서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세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돈이 많다 하더라도 그곳의 관습에 여성이나 아동 등 사회적 약자 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문화도시가 될 수 없다. 전시와 공연이 수시 로 열리더라도 구성원들이 항상 다투면서 법률적 송사가 끊이지 않 는다면 그곳 또한 문화도시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논 의를 확장시켜, 삶의 조건이 모든 분야에서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강 물과 대기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면 그곳 역시 문화도시라고 부 를 수는 없다. 서울이 많은 면에서 앞서고 있지만 입이 있는 사람이 라면 누구나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이야기하는 데서 광주가 지향 하는 문화도시가 어떤 것인지 짐작해 보는 방법도 있을 것 같다. 결 국 문화도시란 정치·경제·예술·생태·환경·교육 등 삶의 모든 조건 들이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모습을 갖춘 곳을 일컫는다. 그래서 문 화도시로 광주의 미래를 설정하는 것은 가장 원대한 꿈을 꾸는 행위 라고 할 수 있다.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필요조건으로서 ‘월등한 경제력’이 요구되 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경제력은 필요하지만 경제력 그 자체가 자동으로 ‘삶의 질’까지 담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문 화도시라는 말 속에는 통장잔고는 넉넉하더라도 집 주변에 작은 공 원이 하나도 없다면 과연 행복지수가 높아지겠느냐는 질문을 담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경우 아주 살기 좋은 계획도시인데 외지사 람들은 그냥 ‘공단도시’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창원하면 전 국민 이 공단을 먼저 떠올릴 뿐 살기 좋은 도시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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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로 나아가는 조건
결국 문화도시란 정치·경제·예술· 생태·환경·교육 등 삶의 모든 조건들이 합리적이고 균 형 잡힌 모습을 갖춘 곳을 일컫는다. 돈이 많다 하더라도 그곳의 관습에 여성이나 아동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문화도시가 될 수 없다. 삶의 조건이 모든 분야에서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강물과 대기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면 그곳 역시 문화도시라고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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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시장이 볼멘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창원시 입장에 서는 억울하겠지만,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의미는 더 이상 사람들이 ‘경제=삶의 질’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울산의 개인소득이 국 내 최고 수준이어도 거기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이 치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광주의 미래전략으로서 문화도시는 이런 꿈을 꾼다. 광주천이 맑 게 흘러 새벽이나 방과 후면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를 하고, 나들 이 나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더운 여름에는 아이들이 강 속으 로 들어가 물장구를 치며 논다.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장애인 A 씨가 집을 나와 저상버스를 타는 데까지 가더라도 그의 ‘걸음’을 방 해하는 턱이 하나도 없다. 그 A씨가 충장서림에서 책을 사고 예술의 거리에서 그림 전시를 보려고 금남로를 횡단하는 데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현재 구도청 앞 도로 구조에서 A씨가 예술의 거리로 갈 수 있 는 방법은 없다.)
하남산단의 어느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B 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에게 ‘노동자’라고 이야기한다. 아들은 아빠 의 직업을 적는 숙제를 하는 참이어서 ‘무어라고 써야 되요?’라고 아 빠에게 물었던 것이다. 광주에서는 직업에 따른 차별의식이 없어서 노동자들이 굳이 자신의 직업을 ‘회사원’이라는 식으로 우회할 필 요가 없는 것이다. 평동산단에서 근무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D씨 의 경우 일은 힘들지만 광주에서 사는 데 어려움이 없다. 각종 도로 표지판과 식당이나 영화관과 같은 곳에 영어 표기가 되어 있고, 편 안한 복장으로 상무지구를 활보하더라도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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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이 없기 때문이다. 본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기 위해 은행 을 찾더라도 직원들이 친절하게 응대해줘 말이 잘 안 통하더라도 부 담이 없다. 방금 열거한 문화도시의 ‘꿈’ 중에 개인이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항목은 하나도 없다. 모두 지자체가 공적 자원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고, 광주공동체의 관용도가 높으면 가능한 일들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시민의 삶을 고민하는 지 혜와 여유 있고, 아름다운 시민의식만 형성되면 되는 것들이다. 개 인소득이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더라도 공적 영역이 받쳐 주면 실질소득은 늘어날 수 있는 사례들이다. 무더운 여름에 부모들 은 따로 수영장이 있는 놀이공원의 입장권을 끊지 않아도 되고, 장 애인 A씨는 콜택시를 부를 필요가 없다. 노동자 B씨 또한 이직을 생 각하면서 불안정한 살림을 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들이 돈 벌기를 게으르게 하자는 권유가 아니 다. 좀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일이다. 광 주시와 각 구청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인프라를 확충해 같은 돈 을 벌더라도 실제로는 그 돈의 가치를 더욱 크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도시 전략이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가 ‘간접적’인 것만 은 아니다. 타도시에 비해 월등한 문화도시로 광주가 발돋움하면 기 업 유치도 쉬워진다. 비용절감이 중요한 기업의 입장에서 직원들에 게 같은 월급을 주는데도 그 월급에 대한 만족도가 광주에서 특별히 더 높다면 광주로 오게 되는 것이다. 땅값도 더 싸고, 물류기반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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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적으로 확충되고 있는 마당에 굳이 수도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일의 성격상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야 하는 기업의 경우에도 부담 이 없다.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광주가 근무여건이 좋다는 게 금세 소문 나 지원자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전입인구의 증가 로 광주 경제의 다른 분야도 동반 상승하게 된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 같지만,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 면 뉴욕의 많은 기업들이 부동산 비용이 적게 들고 거주환경이 좋은 외곽으로 빠져 나가고 있는 중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기업들도 굳 이 땅값 비싸고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높은 뉴욕 복판에 붙박여 있으 려고 하지 않는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이처럼 문화적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 없이 과도한 혜택을 주면서 무작정 기업을 유치하려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소치이다. 하 남이나 평동산단에 직접적으로 기업을 끌어 오려는 노력보다 그 주 변을 멋진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 제안의 논리가 여기에 근거한 다.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물류여건이 갈수록 개선되고, 굴뚝 높은 공장이 경쟁력을 잃어 가고, 인적 자원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기업유치’라는 개념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 서 검토되어야 옳다. 기업은 이익을 좇아온다. 분양가를 낮추고 세 제혜택을 주는 식으로 전략을 짜면 엄밀히 말해 재정건전성이 좋지 못한 기업이 올 확률이 높다. 설혹 괜찮은 기업이 오더라도 더 나은 조건이 다른 곳에서 제시되면 그리로 가버릴 것이다. 그보다는 장기 적인 안목에서 기업경쟁력, 곧 인적 자원의 활력을 높일 수 있는 방 향으로 기업유치의 인센티브를 개발해야 한다. 이른바 문화전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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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문화전략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고, 국내에서는 활발하게 시도되지도 않고 있다. 타 시도와 광주의 출발선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도시로서 광주의 미래 그림을 ‘문화도시’로 설 정하는 것은 먼 미래를 내다보는 바른 방향이다. 무엇이 경제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간단하게,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문화가 경제다, 라고. 그것은 너무 먼 미래의 일 아니냐고 다시 물을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당장의 일은 능 력 있는 공무원과 안정된 시스템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지도자를 자임하는 정치인은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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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숙원 광주 공군전투비행장 이전
전남은 광주공항 국내선 노선을 무안공항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이에 절대불가 입장을 취하며 난색을 표했다. 되레 이미 무안공항으로 옮겨간 국제선 노선 을 다시 광주공항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밝혔다.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 동안 상생을 강조해왔던 전남과 광주광역시가 이 문제로 적 대적 관계로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그러나 이 논란에 앞서 분명 살펴야 할 문제가 있다. 유감스러운 면 이 없지 않다. 극심한 소음으로 지역민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는 광 주 공군전투비행장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가 절대적 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안공항과 광주공항의 국내선 이전 공방 은 지역 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논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보 다 앞서 논의가 진행되고,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문제가 다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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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전투비행장 이전 문제인 것이다. 광주 공군전투비행장 이전은 광주시민의 생존권 차원에서 다뤄지 고 있는 지역민의 해묵은 숙원이다. 비행장 인근 주민들은 전투기 소 음으로 한 여름에도 맘껏 창문을 열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다. 학교 수업에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TV 시청도 불가능하고 전 화 통화도 어렵다. 비행기 이·착륙 때 생기는 최고소음에 많은 이들 이 정신적 스트레스와 수면방해 등 정서장애를 호소하고 있다. 40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고통이다. ‘살아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현장 의 목소리가 절절하다. 피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축산농가 피해 는 물론 고도제한 등에 따른 지역개발과 재산권 행사 제한, 지가 하 락 등 유·무형의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21세기, 안락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생활권과 행복추구권은 당연 한 권리다. 지극한 상식이다. 전남과 광주광역시의 국내선 노선 논쟁 의 유감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군전투기비행장 이전이 결코 쉽지 않는 난제이긴 하지만 지역민의 고통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그 어떤 논의보다 서둘러 진행하고 결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 다. 시급함을 인식하고 하루 빨리 공론을 모아야 한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부다. 공군탄약고를 지금의 공군 전투 비행장으로 옮기려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 전투비행장 이전 논의는 커녕 지금 이대로 고착화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 다. 오랜동안 극심한 소음에 고통 받아온 주민에게 앞으로도 ‘감내 해라’는 무책임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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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판결도 있었다.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4 부(임채 웅 부장판사)는 공군 제1전투비행단 근처 주민 1만3936명이 국가를 상
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주민들의 소음 피해 사실이 인정된 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배상 금액이 그 동안 시달려온 피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정부도 비행기 소음에 따른 신체적·정신 적 피해를 인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비행장을 존속시 키려는 정부의 의도는 상식 이하의 태도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국방을 위해 군사시설이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사 작 전 수행의 절대적인 이유도 없는데 도심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을 필 요도 없는 것이다. 공군 기지의 특성상 광범위한 면적을 차지한다는 점에서도 도심 속 전투비행장 이전은 설득력을 얻는다. 무엇보다 선 진국과 달리 군 소음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나 소음 피해에 대한 대책 등이 마련되지 않은 현실에 주민들은 거의 무방비로 피해에 노출돼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에 항공기 소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시행하 고 있다. 소음피해 적용 범위부터 지원 대책은 물론 피해 지역의 토 지매입과 이전 보상, 손실 보상까지도 규정하고 있다. 독일은 항공기 소음방지법을 군용 비행장에까지 적용하고 있는 등 군용 비행장 소 음에 따른 피해 보상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공법과 소음진동 규제법이 전부다. 그마저도 군 용 항공기는 제외돼 있다. 현재 국회에 군용 비행장 소음 피해와 관 련된 법률안 ‘도심 공항기지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군용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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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소음피해 방지 및 보상에 관한 법률안’ 등 3개가 계류중에 있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계류돼 있는 법률안 통과에 온 힘을 모아야 한 다. 전남은 국내선 쟁취에 열을 올리기에 앞서 광주 공군전투비행장 이전 적지가 어디로 낙점됐는지 확실하게 공개해야 한다. 전남과 광 주광역시는 무안공항 국내선 논쟁을 접고 우선적으로 광주 공군비 행장 이전 해법을 찾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군비행장 이전 사업 은 국가가 나서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정부는 전 남과 광주광역시가 합의해오면 이전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전남과 광주광역시는 상생의 길을 어서 모색해야 한다. 해 묵은 지역민의 숙원을 조속히 실천에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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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지 않고는 모른다” 안락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행복추구권은 당연한 권리다 국방을 위해 군사시설이 필요치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사작전 수행의 절대적인 이유도 없는데 도심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을 필요도 없다 4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비행기 소음의 고통, 현장의 목소리는 절절하다 “살아보지 않고는 모른다
2009년 9월 CMB 방송 집중토론 ‘이슈 광주전남’ 프로그램에서 광주공항 이전 문제가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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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게 하는 글쓰기 늦깎이 등단
“… 세상이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해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 그런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하는데 간 혹 차가운 이성과 냉철한 사고만을 고집하며 허우적거리는 내 자신 의 앙상한 모습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안 되겠다며 스스로를 추슬러 보기도 하지만 ….” (졸작 수필, ‘꿈속에서 깨어나 희망 찾기’ 중에서)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몇 편 안 되는 수필을 문예지에 보냈는데 추천이 됐다. 심사평을 읽고 더욱 놀랬다. “많은 글을 써왔음이 분 명한 전갑길 씨는 이미 훌륭한 수필가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 다. 심사평을 읽어 내려갈수록 부끄러웠다. “문장력과 더불어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역사 인식이 돋보인다.” “문학의 자아가 개체에 머 물 수 없고 필연코 사회적 자아로 확대되어 역사의 벌판으로 나아간 다는 점에서 이 수필은 오늘 우리 서정수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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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도 한다.” 솔직히 등단의 기쁨이 이 정도일지 몰랐다. 당장 구청 직원들에게 그리고 아내와 딸들에게 내 글에 대한 심사평을 또박또박 읽어주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올해 9 월 나는 ‘수필가’라는 새로운 명함을 얻었다. 《현대문예》에 수필부문 신인문학상에 선정된 것이다. 선정된 글은 지난 초겨울에 쓴 것이었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거리를 걷다가 문득 교실 난로 가 에 둘러 앉아 재잘거리던 학창시절이 생각났다. 어려운 시절이었지 만 정겨웠던, 그립기만 한 시절. 그러면서 50대 나이에 들어선 지금 의 나를 떠올렸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 뭐에 그리 급했던지 아등바 등 살아왔다. 멀지 않아 또 한 살 먹게 될 나. 이런 감정들을 글로 옮 겼었다. 다른 몇 편과 함께 문예지에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실제로 남 에게 말은 안 했지만 사는 내내 잠깐 잠깐 써왔다. 생각을 글로 쓰면 하나하나 정리되는 것도 있었고, 마음이 추슬러지기도 했다. 또한 세상이 더욱 넓게, 깊게 바라봐지기도 했다.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하 게 되고 내 가족도 돌아보게 된다. 광산구청장의 소임을 맡고부터는 주민들과의 만남에서 여러 가지 애환을 만나게 되는데 자연스럽게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글로 써 진다. 글을 쓰며 그분들의 상황과 아픔을 가슴 깊게 받아들인다. 그 러다보면 주민들의 애환을 살필 수 있는 해결책이 나오기도 한다. 실 질적으로 그것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음 날 회의를 열기도 했다.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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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입돼 진행된 사안이 몇 가지 있기도 하다. 바쁜 일정에 차분히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 지만 틈틈이 써내는 글은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정신없는 생활에 잊 고 있었던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생각나고, 나는 생각난 김에 전화 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옛 얘기에 빠져들기도 하고 서로의 앞날을 걱 정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통화하다보면 답답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더 잘해보자’는 기운이 난다. 글을 쓰면 그냥 스쳐 지나갔던 단풍잎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가 로수도 보인다. 내 스스로 여유를 찾는 것이다. 여유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강점을 발휘한다. 그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게 된다. 특히 지금 구청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나로서는 가장 필요한 덕목의 하나가 여유다. 내가 생활하는 광주에 대한 고민, 우리 사회에 대한 고민, 이러한 글은 정책 자료집을 작성할 때와 다른 또 다른 묘미를 가지고 있다. 정책 자료집이 냉철한 사고를 바탕으로 한 고민의 연속이라면 내가 개인적으로 쓰는 글은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게 해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평범한 서민들 삶에 다가서게 하고 나 를 선택해 준 이들임을 다시 마음 깊이 새긴다. 이런저런 정책을 세우 며 나의 이런 마음을 담아내려 애쓰게 된다. 심사평 마지막에 “수필문학에 대성하리라. 기대하는 바 크다”고 했다. 지나친 과찬이다. 문학의 길로 들어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 지만 ‘수필가’라는 것을 핑계로 바쁘더라도 계속해서 글을 써내볼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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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이다. 정치, 행정과 다른 방향에서 세상을 고민하고 살피며 희망 찬, 힘찬 세상을 열어가는 데 내 가슴의 폭을 넓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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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실천 나의 종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성경 구절이다. 기독교 신 자인 나는 이 말씀을 가장 사랑한다. 마음에 새기며 살고 있다. 무 의식중에 나는 이 말씀을 자주 되뇐다. 믿음의 말씀을 실천하려는 데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흔히 ‘황금률’로 통한다. 예수님의 여러 가르 침 가운데 가장 빛나는 황금과 같다는 의미에서다. 영국의 신학자 윌 리엄 바크레이는 “예수님의 모든 윤리적 교훈에서 에베레스트 봉우 리”라 하기도 했다. 저명한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 말씀을 행동관으로 여기며 실천하 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사람살이의 기본이 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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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해야 한다는 덕목이다. 또한 이 세상에 뿌리내려야 할 사상이기 도 하다.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과 공생의 철학이다. 이윤 추구 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도 이 말씀을 따를 필요가 있다. 고객을 대접 할 수 있어야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고객만족마케팅이고 고객을 속이지 않는 윤리경영이며 사회 환원으로 아름다운 기업을 만들어 가는 경영철학이다. 환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중한 자연유산을 후 대에 영원히 남겨주려면 그만큼 환경을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섬기며 살고 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내가 이 말씀을 섬기는 데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이 시대 정치 인은 권력자라 할 수 있다. 대접 받기에 물들어져 있다. 어떤 정치인 이 설령 권위주의를 멀리하려 애쓴다 해도 권력의 자리가 만들어낸 분위기는 무시하기 어렵다. 젖어들게 마련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오랜동안 이런저런 자리에 있으며 나도 모르게 권위주의가 배어 있 을 터다. 이것을 의식하지 않고 ‘누리며’ 생활했다면 내 주위에는 아 무도 없을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나와 진정으로 대화하는 사람은 없 을 것이다. ‘남을 대접하라’는 하나님 말씀은 내 스스로 나를 낮추고 대중을 상대하는 정치가로서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한 내 주문이다. 이 말씀은 정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이란 무릇 세상에 이로움을 대접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세상에 대접 받기를 원하는 순 간, 타락이다. 정치인의 타락은 개인의 몰락을 넘어서 사회 병폐와 직결되고 손해 보는 이들은 결국 대접 받아야 할 국민이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하서 김인후, 노사 기정진, 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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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 곤재 정개청, 동암 이발 등 16 세기 조선시대 사림파 선비들 을 마음에 두고 있기도 하다. 유교관념에 입각한 이들의 정치적 사상 이 오늘날 현실과 맞을 수는 없지만 힘겨운 시대에도 지켜온 이들의 바른 정신은 분명 큰 가르침이다. 어쩌면 마태복음 7장 12절의 말씀 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제 몸의 사사로 움에서 벗어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두었던 재 야 정치인이었다. 사회적 굴곡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 를 올리고 불의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성과 나라를 대접하 는 바른 정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이웃을 제 가족처럼 여기며 섬겼 다. 향촌을 조성하고 마을 사람들이 올곧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 도록 지혜를 쏟아냈다. 마태복음 7장 12절은 나눔의 말씀이다. 미래를 열어 가는 열쇠이 고 단 하나의 전략이다. 예수님이 행한 기적 중에 ‘오병이어의 기적’ 이 있다. 해 저문 벳새다 광야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리떡 다 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배불리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겼다는 이 야기다. 나눌 수 있는 사회만이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열어갈 수 있 다. 어릴 적 내게 있어 교회는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였다. 대부분 그랬 을 것이다. 부활절에 주는 계란과 크리스마스에 주는 과자봉지. 그 러나 계란과 과자봉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시골 작은 교 회에서 열린 성탄축하는 험난하게 지내는 동네 꼬마들에게 커다란 안식이었다. 찬송가 내용 그대로 평상 시 느끼지 못한 ‘고요한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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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는 큰 축복이었다. 시골 에서 유일하게 접하는 문화 경험이었다. 교회를 정식적으로 다닌 것은 대학교 4학년이었다. 한 선배의 전 도로 한빛교회에 나갔다. 한빛교회는 1981년부터 지금까지 광주민 중항재 희생자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는 곳으로 당시 시대의 고통을 시민들과 함께 감내하며 독재권력에 맞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교회다. 여기에는 1980년 11월 담임목사로 부임한 윤기석 목 사가 있었다. 당시 윤기석 목사의 설교는 부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발 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믿음으로 희망을 포기 하지 않는 호소력이 절절했다. 어두운 시대, 한 걸음씩 나갈 수 있도 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크나 큰 사랑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윤기석 목사의 동기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윤 목사 는 육사 11기로 전두환과 같이 육군사관학교에 다녔다. 전두환이 최 고 권력을 쥔 국보위 위원장에 오르는 사이, 윤 목사는 육군사관학 교를 그만 두고 한신대학에 들어갔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광주 한빛교회로 내려와 광주 시민의 죽음과 상처를 알고 동기 전두 환을 향해 서슬 퍼런 발언을 쏟아내며 독재정권에 항거한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광야의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 과 윤 목사는 철장에 갇혔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윤 목사가 출옥한 후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노 태우가 광주를 방문해 기관장 모임을 열었다. 육사 11기 노태우도 윤 목사와 동기였다. 노태우는 윤 목사를 모임에 참석시키고 사람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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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소개한다. 윤 목사는 자리에 일어서마자 “현 정권은 지금 민주화 에 역행하고 있다. 구속된 양심수를 석방하고 정의의 편에 서라”고 소리 치고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나는 한 교회의 안수집사로 있다. 정치인은 주일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찾아봐야 할 행사가 주일에 많이 잡혀있다. 교회에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쁜 일정으로 성실하게 다 니지 못할 게 사실이었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내 성격에 망설임이 컸 다. 무엇보다 “정치인이라 표를 의식해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의 오해가 싫었다. 내 진실이 왜곡되는 게 못마땅했다. 그러나 내 믿음 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으로 자연스레 흘렀다. 성경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는 기쁨을 얻고 싶었다. 2001년부터 교 회에 나갔다. 세상은 인간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 기독교인 나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참여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돕는다고 믿는다. 절망적 인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절대자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많 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꿈과 비전을 주시지 않았던가. 빌립보서 2장 7절에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다른 사람을 섬기 라’는 말씀이 있다. 사랑은 내가 가진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는 말씀으로 나는 이해한다. 사랑은 통째로 주는 것이라고 나는 받 아들인다. 마태복음 7장 12절과 함께 나는 이 말씀을 정치인인 내가 실천해야 할 믿음으로 새긴다. 믿음을 실천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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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빌립보서 2장 7절에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말씀이 있다. 사랑은 내가 가진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나는 이해한다. 사랑은 통째로 주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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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있는 사회만이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나눔은 즐거움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늘 같이 살고 있다는 위안이고 의지다.
잃는 사람 따로, 지킨 사람 따로 아버지와 어머니
침묵은 금이라 했다. 말을 아까는 것이 미덕이 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주절주절 말이 많은 사람보다는 과묵한 이 가 어딘지 모르게 더 성숙한 인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말을 많 이 하면 실수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는 점에서 침묵을 금에 비유 하는 방식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어렸을 적 내게 침묵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말없는 침묵은 아버지와 동의어였다. 아버지는 참으로 조용하셨다. 말을 아끼는 정 도가 아니었다. 워낙 조용해 답답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주 어 렸을 적, 숟가락질을 잘 못하니까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서는 “이렇 게 해봐라”라고 몇 말씀 하신 것이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 을 정도다. 화도 거의 내지 않으셨다. 산으로 들로 부잡스럽게 돌아다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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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저질렀어도 아버지에게 엉덩이 한번 맞은 기 억이 없다. 조용한 가운데 아버지는 항상 책읽기에 몰입하고 계셨다. 그래서 이런저런 말보다는 한문으로 된 책의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도 없는 책이 얼마나 재미있어서 저렇게 쳐다보고 계실까 의아했다. 아버지 가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일도 하지 않으셨다.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집안 살림은 어머니 혼자서 이끌어 나갔다. 형제들이 어머니를 도와 이런저런 일들을 했 다지만 자잘한 대목에서 거드는 정도였지 굵직한 부분까지 어머니에 게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한 사람이 식구 아홉 명의 생 계를 책임진 셈이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처럼 아버지는 꾸 준히, 변함없이 책을 읽었고,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들 일, 밭 일, 집안 일 등 ‘진짜’ 일을 했고, 막내둥이였던 나는 산에 오르고 들을 달리고 장독을 깨면서 뛰노는 게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너무 조용해서 그런 가 보다 짐작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2~3일에 한 번씩은 동네 사람 누군가가 아버지를 찾아왔고 아버지는 그이들과 길지 않 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지급 인물들이 마을의 대소사를 어떻게 치 를 것인지를 문의해 왔고,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 놓으며 적절한 처신 을 묻는 이도 있었다. 그들을 맞아 아버지는 조용하고 짧게 몇 말씀 씩을 하셨고, 그들은 뭔가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다 돌아갔다. 그러니까 마을에서 아버지는 격식과 처세의 기준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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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그리고 아버지 쌀이 부족해 밥의 절반은 잘게 썰어 넣은 무가 차지했다. 아버지는 하남 면장으로 있었지 만 그것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면장이란 직책은 이런저런 특혜를 이용 해 개인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게 당시 사회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돈이 들어가야 하 는 면 사업이 진행될 때마다 면장으로서 개인 재산을 희사했다. 사정이 딱한 사람이 면장 실에 찾아오면 아버지 성품에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글을 깨우친 자로서 이웃과 지역의 헐벗음을 남의 일로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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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카운슬러였던 셈이다. 말이 없으신 대다가 일도 하지 않으셨고 오직 책만 들여다보는 와중에 이웃들에게 훈수를 두었으니 여러모 로 아버지는 욕심 없는 선비와도 같았다. 아버지는 원래 집에만 있던 분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하남 면장을 역임했다. 해방 이후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선비 같았던 아버지는 면장 일을 하면서도 깨끗한 성품을 그대로 내비췄다. 해방 직후만 하 더라도 면장이라는 직책은 이런저런 특혜를 이용해 개인 재산을 늘 릴 수 있는 게 당시 사회 분위기였다. 그러나 우리집은 그 반대로 살 림이 점점 어려워졌다. 정부 지원이란 게 전무했을 때, 아버지는 돈 이 들어가야 하는 면 사업이 진행될 때마다 면장으로서 개인 재산을 희사했다. 사정이 딱한 사람이 면장실에 찾아오면 모른 체할 수 없 었다. 아버지가 면장을 그만둔 것 또한 성품 탓이었다. 자유당 쪽에서 아 버지를 불렀다.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 아버지를 찾아왔고, 그 국 회의원은 함께 일하지 않으면 면장직을 비롯해 아버지가 갖고 있는 지역사회의 모든 직책을 박탈할 것이라고 암암리에 협박했다. 아버 지는 아무말 없이 술만 마시더니 가족과 의논 없이 면장직을 사퇴했 다. 아버지의 정치적 성향은 김구 선생의 계열로 민족주의자 입장에 서 이승만 쪽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로만 짐작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의 교육에 남다른 기준을 갖고 있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책 읽는 선비 치고 교육을 소 홀히 한 경우는 드문 법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그 분의 속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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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만 본다면 아 버지는 자식들의 교육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마라 참견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학교를 보내는 것에도 아주 무심했다. 8 남매 중 상당수가 공부에 빼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정작 학력은 그리 화려하지 못한 까닭도 아버지의 특이한 ‘교육관’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나의 누님 중 한 분은 학교생활을 하면서 전교에서 1, 2등을 놓치 지 않을 정도로 수재였다. 어렸을 때 내가 놀러 나가려고 하면 누님 은 나를 앉혀 놓고서는 자기가 외운 책 내용이 틀리지 않은지 봐 달 라곤 했다. 밖으로 나가 뛰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앉아 있으면 누 님은 내 앞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책 내용을 외워서 읊 곤 했다. 누님은 시골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광주의 명문 중학을 합 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날벼락과도 같은 아버지의 결정에 누님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며칠 동안 울기 만 했다. 이런 아버지의 결정에 어머니도 별 참견을 하지 않으셨다. 일에 바 쁘고 살림에 치여 참견할 여유조차 없었는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힘든 생활을 일구어 가는데 아버지가 악역을 자처한 것일 수도 있겠 다. 진짜 속내가 무엇이든 책만 읽는 아버지가 자식들의 공부에 그토 록 무관심하고 무정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아버지의 성격이 내게 꼭 나쁘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공부에 한이 맺힌 형과 누님들은 자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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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못다 한 공부에 대한 열정을 내게 쏟아 부었다. 덕분에 나는 공부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지는 않았다. 공부와 관련해서 내게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고 스스로 진단해 보 는데 하나는 목이 몹시 마른 사람처럼 나이에 상관없이 공부라는 우 물을 계속해서 판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학위가 주어지는 ‘정 식 공부’와는 별도로 늘 책을 읽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다는 점이다. 짐작컨대 이 둘은 내 공부에 대한 형제들의 도움과 책만 읽었던 아버 지의 습성 양쪽에서 비롯된 듯싶다. 어머니 혼자서, 순전히 농사로 이끌어 가는 살림은 넉넉할 수 없었 다. 고향이었던 당시 광산군 하남면은 광산에서도 발전이 가장 더딘 외곽에 속했다. 그렇다고 광주와 가깝지도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6 학년 되던 1970년에 이르러서야 전기가 보급됐다. 어머니와 고향마 을 사람들은 농사가 아닌 다른 부업에 손을 댈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밥상은 가벼웠다. 쌀이 부족해 밥의 절반은 잘게 썰어 넣은 무가 차지했고, 그나마도 자주 건너뛰었다. 늘 배가 고팠으면서도 나 는 절망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 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어려움과 한숨은 형님과 누님들에게 머물렀 고 나에게로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그저 즐거웠다. 아버지는 나이 쉰에 나를 낳았다. 위로 형이 3명 누님이 4명 있었고, 그 중 큰 형은 나와 20 살 차이가 났다. 집은 가난했어도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늘 배가 고팠지만 사람이라 면 누구나 그런 줄로만 알았다. 막내의 ‘특권’으로 아버지와 한 상에 서 밥을 먹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배려로 다른 형제들보다 입 속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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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라도 더 떠 넣을 수 있었다. 유년의 나는 집안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 으로는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쌀밥 먹기 힘든 시절,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하나 있 었다. 거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내가 한번 씩 우리집에 찾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 는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그 사람은 찾아왔다. 아버지 는 늘 거하게 음식을 대접했다. 사연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형무소에 갇힌 적이 있었다 한다. 그 당시 열 댓 살이었던 큰누님이 매일같이 유치장에 다니며 아버지 뒷바라지 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장에 다녀 온 큰누님이 말을 못하고 엉 엉 울기만 했다. 아버지가 내일부터 오지 말라고 했다고, 이제 오더 라도 얼굴 못 볼 것이라 말했다고 엉엉 울며 아버지 말을 전했다. 집 안은 울음바다가 됐다. 어머니도 누나 형들도 넋을 잃고 울었다. 아 버지가 전한 말은 아버지의 처형소식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유추해보면, 아버지의 수감은 ‘보도연맹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보도연맹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1948년 시 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대국민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어 사상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이곳에 가입시키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입된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보도연맹 가입 대상은 원래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의 사상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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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였으나 실제로는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보도연맹에 등록된 경우가 많았다. 지역 할당제가 있 었다. 면사무소 직원을 비롯해 정부 아래서 일한 사람들은 한 사람 당 몇 명씩 보도연맹에 가입시켜야 하는 강제성이 있었다. 또한 보도 연맹에 가입하면 식량배급이 원활하게 이뤄진다는 말에 따라 사상 에 관계 없이 등록한 사람도 많았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 입된 사람들이 북한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해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 람들을 대량학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강이남 지역에 있는 대부분 의 형무소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살이 이뤄졌다. 아버지의 옥살이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는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김구 선생 계열의 민족주의 입장을 일 제강점기에도, 해방 이후에도 고수했던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사회 적 위치는 당시 시대상황에서 충분히 보도연맹에 가입될 수 있는 여 건이었던 것이다. ‘이제 찾아와도 얼굴 못 본다’는 아버지 말은 형무소에 수감돼 있 던 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을 얘기한 것이었고 우리 가족 또한 떠도는 소문으로 그런 짐작을 했을 것이다. 가족 모두가 잠도 못 자고 울던 그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한다. 새벽 두 시 정도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나타났 다. 아버지는 맨발이었고 발이 온통 부르터 있었다. 아버지는 죽어 가는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고 바로 마당에 쓰러졌다. 아버지는 형무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트럭에 태워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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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를 곳으로 트럭은 달렸다 한다. 죽으러 간다는 것을 아버지 도 알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감시하려고 트럭에 탔던 한 경찰이 아버 지에게 눈치를 주더니 아버지를 트럭에서 떨어트렸다 한다. 아버지 를 몰래 풀어준 것이다. 우리집에 찾아온 거지는 다름 아닌 그 경찰이었다. 그 경찰은 아버 지 같은 사람은 죽어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한다. 그 경찰은 해방직 후까지 직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나 어수선한 현실에 직위 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사람이 됐고 이러한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애시 당초 우리 집안이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때 집안 은 매우 부유했다. 아버지는 2남1녀 중 막내였고, 할아버지는 큰아 버지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해주었다. 아버지 몫은 없었다. 하지만 재산을 상속받은 큰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 을 정도로 재산을 나눠주었다. 이 시절 재산은 논이나 밭, 임야와 같 은 토지였다. 다른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책만 보는 아버지가 걱정스 러워 재산을 나눠줬다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큰아버지는 스 스로가 배움이 부족해 유별나게 자식들 교육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인지 사촌형제들은 모두 대학 정규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반면에 자 기 공부가 더 중요했던 아버지는 자녀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집 안 살림에도 보탬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집안 살림을 축내기만 했 다. 어머니 혼자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8남매를 건사하기에는 무 리였다. 그럴 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땅문서 한 장을 내 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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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이 정도 선에서 머물렀다면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 지는 욕심이 없을 뿐더러 남에게 베푸는 성격이었다. 문중출입을 하 거나 가까운 지인을 만나 무언가를 도모할라 치면 꼭 당신이 먼저 호 주머니를 열고는 하셨다. 마을에 필요한 길을 내려는데 우리집 논이 걸리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논을 내 놓아 버렸고, 동네에서 치르는 크고 작은 일에도 남들보다 먼저 봉투를 준비했다. 큰아버지에게 나 눠 받은 재산이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발목을 함께 묶고 뛰는 시합에서 서로 다른 길 을 가려고 하는 주자들과 한가지였다. 아버지는 잃기만 했고, 어머니 는 지키려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지키려 해도 잃는 사람을 따라 잡 을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의 경험칙이다. 쓰기는 쉬워도 벌기는 어려운 게 재물인 법이다. 화가 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싸움을 자주 걸었던 것도 같은데 부처 같은 아버지의 침묵 앞에서 어머니가 ‘원했던’ 싸 움은 성사되지 않았다. 가세는 금방 기울었고, 내가 태어나 자랄 때 즈음에는 가세랄 것도 없었다. 혹자는 어머니가 옳고 아버지는 틀렸다고 판정내릴 지도 모르겠 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두 분 다 옳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집안의 가장과 안주인으로 보낸 시절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해방정국의 혼란, 전쟁, 숨 가쁜 개발주의 시 대를 두 분은 가장 왕성한 나이에 아이들을 놓아기르면서 겪었다. 어머니는 눈앞에서 헐벗고 있는 자식에게 먼저 손이 갔고, 아버지는 글을 깨우친 자로서 이웃과 지역의 헐벗음을 그냥 남의 일로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시절이 좀 더 나았다면 두 분은 그렇게 극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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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양극화’되지 않고 서로의 성격을 1/2씩 나눠가졌을 지도 모른 다. 확실한 것은, 아버지의 잃음은 누군가에게 더 큰 얻음을 주었다 는 것이고, 어머니의 지킴이 있어서 나와 내 형제들이 엇나가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간에 어머니는 개별에 충실했고, 아버지는 전체를 아우르려 했다. 어 머니와 아버지의 장점만을 취하고 싶은 게 내 욕심이고, 이 욕심이 틀리지 않다는 게 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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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준 선물, 건강 유년시절
전라남도 광산군 하남면 338번지에서 태어났 났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이 된다. 가까이에는 정광산이, 조금 멀리 남서쪽으로는 어등산이 고향마을 의 오랜 동무가 되어 앉아 있었다. 동으로는 극락강, 서로는 황룡강 이 마을을 크게 에돌았고, 그 사이에 아담한 넓이로 풍영정천이 들 을 적시다 극락강과 몸을 섞었다. 천안 전씨 57대손, 동학혁명을 이끈 54대 전봉준 장군의 후손이 다.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7년, 이른바 ‘베이비붐’의 한 복판에서 태어났다. 나고 자란 터전은 개발시대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말을 깨닫고 사물을 부지런히 두뇌 속에 입력할 즈음 ‘4·19’와 ‘5·16’이 터졌다. 초-중-고-군생활을 보 낸 시기는 박정희 시절의 시작과 끝에 거의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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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뛰어 노는 게 좋았다. 아 버지는 공부의 ‘ㄱ’자도 꺼내지 않으셨고, 어머니는 살림살이에 바빠 내가 무엇을 하던지 그다지 참견이 없으셨다. 형제들 또한 어린 막내 를 챙겨주고 예뻐해 주기만 했다. 대다수 또래 애들은 논농사 밭농사 에 손을 보태야 했다. 나는 달랐다. 일도 공부도 그 밖에 다른 걱정 은 하나도 않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쏘다니며 오직 뛰어 놀고 골목대 장 노릇만 했다.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할 듯이 제법 비장한 마음으 로, 막대기를 칼 삼아 휘두르면서 정광산을 오르내렸고, 풍영정천에 서는 물고기를 잡았다. 가끔씩 하남역으로 가서는 꽥애액∼ 꽤애액 ∼ 굉음을 울리는 기차 소리를 훔쳐 듣기도 했다. 이 시절, 가난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떠안은 짐이었다. 잘 사 는 것이 지상의 과제였고 공동선이었다. 잘 사는 것의 다른 이름, 공 식적인 용어가 ‘근대화’였다. 국가는 근대화를 삶의 좌표로 제시했 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의심해서도 안 됐다. 어린 아이들에 게 가난의 구체적인 징표는 배고픔이었다. 어차피 집에는 밥이 없을 터였다.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가 냄새를 피우는 면소재지 거리로 나 가본댔자 동전 한 푼 없는 처지에 속만 더 뒤틀릴 게 빤했다. 산천에 널린 주인 없는 식물들이 우리들의 간식거리였다. 배가 고프면 동무 들과 산에 나가 냉감, 다래를 따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질겅질겅 오물거렸다. 들에서는 띠뿌리, 삐비 속 따위를 뜯고 벗겨 껌처럼 씹으 면서 하루 종일 돌아 다녔다. 남의 밭에 심어진 무나 고구마처럼 주인 있는 식물들도 우리들의 목표였다. 몰래 뽑아 먹다가 들키기라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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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치면 냅다 줄행랑을 쳤다. 작물의 주인들은 “저런 호랭이가 물어 갈 놈들이 있나 …” 큰 소리 치며 좇아오는 듯하다가 이내 포기해버 렸다. 집에 앉아 있어본들 넉넉하게 밥 한상 내놓기 어려웠던 어머니 는 강아지마냥 온 종일 쏘다니다 흙먼지가 절반인 옷차림으로 해가 진 다음에 들어와도 크게 타박하지 않았다. “머 하다 인자 오냐 빨랑 빨랑 다녀라.” 한마디뿐이었다. 초등학교 때 공부는 중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신경 써서 공부 하는 동무들은 반에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그 애들이 항 상 상위권을 점유하고 있었고, 나머지 친구들은 공부를 하는지 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에게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을까봐 공부 하는 시늉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선생님 또한 마냥 공부를 다그칠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어린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거의 모두 집안 농 사일에 지쳐 있었고, 중학교 입학을 기약하지 못한 이들도 태반이었 다. 꼭 필요한 내용을 주지시킬 때가 아니면 적당히 호통치고 알밤 정 도 먹이는 선에서 그때그때의 진도를 갈무리해 나갔다. 송정중학교와 정광중학교가 광산군을 대표하는 두 중학교였다. 송정은 공립이었고, 정광은 사립이었다. 광산에 살더라도 진학 대상 중학교로 광주에 있는 학교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중학 진학 년부터 광주로 진학하는 길이 차단되었다.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광주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기존의 교육시설은 날로 불어 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정권에게 근대화는 ‘공장’과 동의어였다. 도시마다 크고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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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공업시설들이 들어섰다. 광주의 경우 1965년에 설립된 아시아자 동차(現 기아자동차 광주공장)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1953년에 설 립되어 60 ~70년대를 거치면서 고속 성장한 전남방직도 광주에서 확 인할 수 있는 ‘근대화’의 예시라 할 수 있겠다. 농사 외에는 다른 꿈을 꿀 수 없는 시골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희망 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빚과 가난에 쪼들린 일가족 전체가 밤 봇짐을 싸기도 했다.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도시로의 ‘엑소더스’로 표현되는 이촌향도(移村向都)의 시기였던 것이다. 고향을 떠난 그이들이 택한 도시는 거의 서울 아니면 광주였다. 나 라 땅 전체의 성장속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졌던 게 사실임에도 광주 역시 근대화, 곧 공업화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예컨대 1969년 광주시의 주민소득은 한 해 전인 1968년에 비해 101.8% 로 두 배가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해에 준공된 광주공업단지가 본격적으 로 가동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공업단지의 다른 말이 ‘아 시아자동차’였다. 지금의 기아자동차광주공장을 중심으로 한 광천 동 일대가 ‘광주공업단지’였다. 1965년에 설립된 아시아자동차 공장 을 모체로 그 연관 산업의 계열화를 추진할 목적으로 1966년에 착공 하여 1969년에 완공됐다. 이 때문에 광주공업단지의 75% 는 아시아 자동차공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전통적인 촌락마을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1964년부터 1970년 초까지 전국 제조업 부문의 연평균 성장률은 20%에 달했으나 농림어업부문은 연평균 2.7%에 그쳤다. 근대화 는 전통사회의 해체를 기반으로 ‘도시’와 ‘공업’을 부양시켰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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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같은 경제구조의 작동은 특히 뿌리 깊은 농도이자 대다수 시 군들이 바다에 접해 있는 전남에 가혹했다. 실제로 1970년에 전남의 농림어업 부문은 4.7% 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록 전국적인 추이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광주는 근대화의 바람을 타 고 있었고, 광산을 포함해 전남은 그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 었던 것이다. 전통사회의 해체와 도시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매우 짧은 시기에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제도적인 대응책 중 하나가 광주 바깥 지역 학 생들의 광주유입을 막는 것이었다. 중학교 진학 즈음한 어린 시절에 이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을 알지는 못했다. 다만 많이 아쉬웠다. 공 부는 우등생이 아니었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적지 않아 서 내심으로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아버지의 무관심 과 가난 때문에 못다 한 공부에 상처를 받고 있었던 형과 누님들은 내 공부만큼은 책임지겠다는 언질을 주고는 했었다. 그 언질에는 더 큰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광주로 가지 못하고 송정중학교에 진학했다. 송정이냐, 정광이냐의 고민은 전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립인 송정중학교의 등록금이 더 쌌다. 중학교 생활도 초등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통의 아이들 과 다름없이 동무들과 어울리면서 성실하게 학교에 다녔다.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시험을 앞두면 벼락공부하는 게 일쑤였다. 수업은, 집중해서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되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 이었다. 간혹 시험공부에 집중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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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올랐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항상’하는 게 아니라 필요하면 ‘그 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집안의 경제사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몸은 건강 했다. 쌀밥을 배불리 먹지는 못했을 뿐 ‘자연밥상’이 산과 들에 지천 으로 널려 있었고 나는 그 밥상을 수시로 비웠다. 맘껏 뛰어 노는 것 으로 운동은 늘 ‘과잉’ 상태였다. 생태주의를 강조하는 요즘의 시선 으로 보면, 어린 시절 배가 고파 먹었던 ‘음식’들은 모두가 한약재 같 은 매우 균형 잡힌 영양분을 내게 공급해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영양분들은 운동과 더불어 내 몸 속에 스며들었다. 나이가 조금 든 요즈음에도 건강을 자신하는 편인데, 유년의 들판과 놀이들이 건강 의 밑거름을 제공해주었다는 게 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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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진학의 기준은 등록금 광주농고
실업계와 인문계 고등학교를 구분하여 우열을 논하는 게 세상의 ‘상식’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에 세상 속에 서 제각각 쓰임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와 특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서열을 매겨 차별을 두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내 입장을 ‘농고’ 출신이 갖는 일종의 콤플렉 스로 해석하려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분들의 생각까지 고치 려는 뜻은 없다. 다만 세상의 ‘상식’은 늘 가변적이었다는 점은 말하 고 싶다. 우리 사회의 숨 가쁜 변화 속에서 실업계와 인문계 고등학교 의 구분은 매우 상대적이었다.
1973년에 광주농업고등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 교평준화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이었던 당시, 고등학교 진학 풍경은 요즈음 대학 진학 열기와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명문고에 진학하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공부경쟁이 치열했다. 목적했던 고등학교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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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떨어지면 재수를 하기도 했다. 나 역시 명문고를 가고자 했지만 뜻 대로 되지 않았다. 내내 놀기만 하다가 중학교 3학년을 맞이하면서 부터 공부에 집중했다. 남들이 알아주는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 고자 하는 욕심이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공부에 집중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성적이 올랐다. 하지만 원했던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데는
5~6개월 남짓한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당시 고등학교에 대한 구분 방식은 인문계와 실업계가 아니라 전기 와 후기, 그리고 국공립과 사립이었다. 전기에도 인문계와 실업계가 배치되어 있었고, 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명문’이라는 수식어는 특 정 인문계와 실업계가 공유했다. 전기 모집에 떨어지면 후기 모집에 응시했다. 전기 응시에 떨어진 나는 후기모집 고등학교 한 군데를 들 어가야만 했다.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공부뒷바라지를 부모님 이 하셨다면 억지를 쓰면서 졸라서라도 봤을 테지만, 학비를 대주겠 다고 준비하고 있던 이는 부모님이 아니라 누님과 형님들이었다. 사 정이 이렇다 보니 후기 중에서도 등록금이 싼 곳을 찾아야만 했다. 싼 등록금은 ‘공립’과 동의어였다.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 등록금 차이는 곱절에 가까웠다. 후기모집 고등학교 중에 공립은 ‘광주농 고’가 유일했다. 광주농고는 등록금이 싸다는 장점과 함께 오랜 전통을 지닌 유서 깊은 학교로 공무원을 많이 배출하는 특성도 있었다. 1909년에 고 종황제의 칙서에 의해 도립농림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개교했고,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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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이 100 주년을 맞이하는 학교이다. 내가 입학할 당시 광주농고는 오전에는 공통수업을 했고, 오후에는 진학반, 취업반으로 나눠 진로 에 맞는 개별지도를 했었다. 진학반은 농대나 농협대학에 특채로 들 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일반대학 진학도 적지 않았다. 취업반은 공 무원 수험준비로 행정직·농림직·임업직·토목직·축산직 공무원이 인 기가 좋았다. 광주시 공무원 중에 어느 나이대 이상으로 가면 광주 농고가 제일 많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농도 전남의 영역권에 있 었던 광주전남의 공직사회에 끊임없이 인적 재원을 공급한 근거지가 광주농고이기도 했던 것이다. 농고·공고·상고 등 실업계 고등학교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일치한 실무형 인재들의 산실이었다. 학비마련도 어렵거니와 당장의 배고픔 해결이 중차대한 과제였던 시절이었고,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때여서 기업이나 국가에서는 지속적으로 현장형 인재들을 요구했다. 나라 에서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특혜를 주어 우수한 두뇌들을 유인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은 전남지역의 학생들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도 농고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지금과는 달리 실업계고등학교는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분 명하게 가지면서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과 사람을 쓰고자 하는 세상 사이에 의미 있는 가교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실업계고교의 역할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는 광주와 전남 의 교류가 끊기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교진학과 관련한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한 해 뒤인 1975년에는 대구·인천·광주로 확대된 고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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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태권도
태권도는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가쁘게 호흡하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정신이 훨 씬 맑아졌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공부’의 어원을 ‘쿵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순히 지 식을 머리에 넣는 게 공부가 아니라 그 지식을 몸으로 육화시키는 것이 공부라는 논리였 다. 배워야 익힐 수 있는 게 태권도였다. 태권도에 임하는 자세, 예의와 절도 등이 마음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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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화 정책이었다. 평준화 대상 학교는 인문계에 한정됐고, 실업계는 여전히 시험을 봐서 들어가는 학교였다. 이때부터 고등학교를 보는 틀이 인문계와 실업계로 양분되었다. 이전에도 양분된 시각이 없었 던 것은 아니지만, 지배적인 시각은 개별 고등학교를 독립적으로 인 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평준화정책이 시행되면서부터 고등학교를 말하는 방식이 인문계와 실업계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곧 고등학생들을 대학에 갈 학생과 이유야 어떻든 간에 대학 갈 계획이 없는 학생으로 나누는 걸 의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이 나눔은 차별 을 발생시켰다. 가난으로 인한 취업선택의 성격이 짙었음에도 실업 계고교는 대학에 갈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의 학교인 것인 마냥 오 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평준화가 시행될 당시만 하더라도 이러 한 인식은 두껍지 않았다. 실업계와 인문계의 학력격차, 이로 인한 ‘실질적’인 차별이 발생한 때는 광주와 전남의 교육교류가 끊기면서 부터였다.
1986년 직할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던 광주 시는 전남도민 모두에게 개방된 곳이었다. 전라남도 어디에 살던지 간에 광주시 권역 내 고등학교 선택은 자유로웠다. 일정 수준 이상 의 성적이 나오는 전라남도 학생들에 한해 광주시 권역 고등학교 진 학의 기회를 주는 식으로 진입 장벽이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문제가 됐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제한이 점점 엄격해졌고,
1990년대 초반에 즈음해 전라남도 출신 학생들의 광주권역 고등학 교 진입이 원천 봉쇄되었다. 인문계나 실업계를 막론하고 전남지역 출신들은 광주로 올 수가 없었다. 전반적인 소득 향상은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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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과 함께 취직을 해야 하는 절박함을 줄였고, 여기에 학력차별이 라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보태져 모두가 대학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제 고등학교는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인문계와 그 ‘나 머지’로 분할되어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실업계와 인문 계 고등학교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여하튼, 당시 내게는 상대적으로 부담 없는 등록금을 내면서 공립 의 안정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처지에 맞게 공부를 할 수 있 다는 장점이 있어 별다른 망설임 없이 광주농고를 선택했다. 학교는 임동에 있었다. 1976년에 졸업을 하고 나니 현재의 오치동 으로 교사를 옮겼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와 다르게 고등학교 시절 에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에 집중했다. 뛰어 놀고 싸우는 ‘재미’ 는 다만 예전 일이 되어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른들 말씀에 ‘다 한 때’ 라는 표현이 있는데 꼭 그런 것 같았다. 고등학교에 오니까 노는 일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모범생처럼 지내다 고등학교 와서야 ‘노는 재미’에 푹 빠진 친구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들 었던 생각이, 누구나 무언가에 집중하는 ‘한 때’가 있나 보구나, 이었 다. 나는 ‘미리’ 놀아버렸고, 그들은 ‘이제야’ 노는 모습이었다. 물론 나 또한 ‘놀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좀 더 그럴싸한 놀이 를 찾았는데 다름 아닌 운동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체계 적으로 운동을 경험할 수 있는 구조나 기구가 학교에 갖춰지지 않았 었다. 하지만 광주농고에는 다양한 분야의 운동반들이 활동하고 있 었고, 오랜 전통이 있어서인지 거기에 맞는 도구들도 맞춤하게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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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었다. 그냥 심심풀이로 축구를 하거나 배구를 하더라도 실력 이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만능스포츠맨이라는 별명이 자연스레 붙 었다. 몸을 쓰는 운동은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가쁘게 호 흡하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정신이 훨씬 맑아졌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공부’의 어원을 ‘쿵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넣는 게 공부가 아니라 그 지식을 몸으로 육화 (肉化)시키는 것이 공부라는 논리였다. 무술의 일종인 쿵푸가 간단하
게 동작을 외우고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동작을 기 억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공부’와 ‘쿵푸’는 같은 것이고, 이 때문에 쿵 푸에서 공부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명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설명하는 두 가지 열쇳말은 공부와 태권도였다. 진학반에서 공부하다가 방과 후가 되면 교우들과 어울려 한두 시간 씩 아무런 운동이나 했다. 축구 배구 농구 테니스 수영 등 …. 특별히 누군가로부터 배우지 않고 그냥 뛰어들어 익혔다. 다만 태권도는 체 계적으로 배웠다. 배워야만 익힐 수 있는 게 태권도이기도 했다. 동 작을 체화시키는 과정도 즐거웠지만 태권도에 임하는 자세, 배우는 과정에서의 예의와 절도 등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 때 처음으로 문 (文)과
무(武)의 겸비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는 확신
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즈음 태권도 3단을 획득했다. 태권도 3단은, 보통사람이라면 최소 5년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10 년이 걸리는 수준이었다. 학교성적은 지방대학에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좋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 소재 대학이 지방대학보다 좋다고 말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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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대학의 숫자 자체가 적었고, 고도성장기여서 지방대학을 나와 도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서울로 가게 되면 막대한 생 활비가 들어간다는 사정도 서울 쪽 진학을 꺼리는 큰 이유였다. 문제 는 지방대학 들어가기도 어려운 지독한 가난이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나에게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권했다. 하나에 서부터 열까지 전액 국비지원이라는 점, 내가 가진 기질 등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나 또한 육사를 희망했다. 육사는 문과 무를 겸비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육사라는 목표가 생기면서부터 공부에 더욱 집중했다. 공부에 집중하는 만큼 방과 후 운동에도 체계적으로 임했다.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다방면에서 열심히 했고 모교에 대한 추억과 애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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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육군사관학교의 꿈 스무 살 안팎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려면 고시공부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육사 졸 업생에게 공무원 특채와 국영기업 특채라는 특혜를 주었다. 육사를 졸업하면 고시합격에 준하는 사무관급 대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가 난했던 시절이라 ‘공짜’로 공부할 수 있고, 높은 신분이 보장되는 육 사에 우수한 학생이 특히 많이 몰렸다. 졸업하던 해에 치른 육사 시험에 떨어졌다. 육사 시험이 있고 나서 대학 시험이 있어서 육사에 떨어지면 다시 대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 다. 하지만 집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일반 대학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차라리 재수를 해서 육사 시험 을 다시 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서울 천호동에 있는 큰형님집을 근거 삼아 종로의 한 학원에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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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했다. 잠은 도서관에서 자고 밥만 형님집에서 먹었다.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없어서 조금 답답했지만 공부 는 즐겁게 열심히 했다. 입시 분야에 좀 더 전문적인 학원 강사들의 도움이 있기도 해서 붙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육사의 벽은 두터웠다. 두 번째로 시험에 떨어졌다. 며칠 동안 암담했다. 처음 떨어졌을 때에는 경험이라 생각했다. 붙 을 것이라는 희망보다 시작한다는 의지가 더 강했었다. 두 번째 낙마 는 달랐다. 붙을 것이라는 희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주변에서 도 그렇게 기대했다.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합격자 명부에 이름 이 없는 것을 보고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거듭 확인하기도 했다. 내 이름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형님의 헌신적인 도움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가장 컸다. 형님께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형님은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드 려 주면서 “니가 더 힘들 것인데 …”라고만 말했다. 낭보를 기다리고 있을 시골 부모님께도 한없이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나 대신 형님이 전화로 부모님을 위로해 드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진로에 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이번에도 가족들은 일반대학 진학보다는 육사시험을 선택했다. 가난한 살림살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한번 더 도전해보고 싶 다는 내 의지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두어 번에 걸쳐 공부하는 요령도 익혔으니 정말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났다. 마음먹은 바는 꼭 이루고 말겠다는 오기도 작용했다. 이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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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강한 성취 욕구를 처음으로 느낄 수 있는 기 회이기도 했다. 한 가지 장애요인은 군입대였다. 삼수를 하게 되면 만으로 20세가 되는 때여서 군대 영장이 나올 예정이었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연기 를 해보자고 말했고, 마침 병무청 계통에 지인이 있어 입대 영장을 1년 정도 연기할 수 있었다. 육사시험을 보고 난 이후로 영장을 연기 하는 방식으로 공부할 기간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굳이 학원에 다 시 다닐 필요는 없을 것으로 판단됐다. 두 번에 걸친 경험을 따져서 부족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충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 방 식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하던 중 아버지께서 옷가지며 공부하던 책 등 짐을 몽땅 싸서 집으로 오라는 기별을 보냈다. 고향에 머물면 서 공부하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짐을 싸 보니 옷가지 한보따리와 책 두어 박스로 단출했다. 서울역에서 통일호 표를 끊었고, 자다, 깨다 를 반복하다 하남역에서 내렸다. 핼쑥해진 얼굴로 부모님을 뵈었다. 어머니는 따뜻한 저녁밥을 마 련해 주었고, 아버지는 내일 갈 데가 있으니 잠을 푹 자 두라고만 말 씀하셨다. 도대체 무슨 속내일까 궁금했지만 왠지 죄인이 된 심정이 어서 여쭈지 못하고 잠을 잤다. 공부하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려나 보 다고 짐작만 했다. 아무리 허술해도 집은 집이었던지 어느 때보다 아 늑하고 달콤하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새벽에 아버지가 깨웠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아버지를 따라 나 섰다. 하남역에서 대전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영문을 알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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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대전역에서 내려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버스를 세 번 정도 갈아 탄 듯 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이었다. 풍기읍은 소백산 남동쪽 자락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소백산을 경 계로 충청북도 단양군에 접해 있는 산골 소읍이었다. 낯선 곳이라 그 런지 첩첩산중으로 들어선 것만 같았다. 완행버스가 비포장도로를 툴툴거리며 달렸다. 읍내권을 지나고 나니 버스는 산중을 달렸다.
1시간이 조금 못돼 어딘가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걷기 시작했다. 걷 는다기 보다는 산행에 가까웠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두 시간쯤 걸어 서 도착한 곳은 ‘희방사’라는 이름의 절이었다. 이 절에서 공부하라는 말인가, 나쁠 것도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경내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아직 남았다”는 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 리가 들려왔다. 30 분 정도를 더 걸었다. 희방사의 암자인‘서전사’ 라 는 곳이 나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소백산 주능선인 연화봉 에서 불과 500m 남겨 놓은 곳에 있는 암자였다. 조용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여기 저기 빨래가 널려 있었고, 서로 다 른 신발들도 많았다. 고시원을 겸한 암자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 다. 아버지가 인기척을 하자 주인인 듯한 사내가 반가운 얼굴을 하고 서는 서둘러 나왔다. 사내의 아내인 듯한 아낙도 곧이어 뒤따랐다. 그때서야 내 머리 속에서는 전광석화처럼 어떤 기억이 튀어 나왔다. 어렸을 적 외삼촌이 스님이 됐다는 소리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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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굳이 숨길 사실은 아니었겠지만 유별 나게 내놓고 말할 거리도 아니었던지 아주 가끔씩 어머니와 아버지 는 외삼촌 소식을 서로 나누곤 했었다. 어린 나는 한귀로 듣고 한귀 로 흘리는 식이었다. 나도 외삼촌이 있구나, 한번 보면 좋을 텐데, 라 는 생각 정도를 했던 것도 같았다. “인사 드려라, 외삼촌이시다.”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꾸벅 인사를 드렸다. “니가 갑길이구나, 내가 인제사 너를 보는구나.” 외삼촌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처음 만나는 데도 외삼촌은 어딘 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외숙모에게도 인사 드려라.” 아버지의 말씀에 잠깐 멈칫했다. 스님이 됐다는데 외숙모라니 ….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물을 겨를이 없었다. 인사를 드리니 외숙모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스님이었다가 파계해서 결혼을 하고, 이곳에 암 자를 지어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암자에는 열 명 남짓한 고시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 혼 자서만 입시생이었다. 고시생들은 엄격하게 자기 시간을 관리했다. 철봉이나 아령, 줄넘기 등으로 몸을 추스르면서 한번 방에 틀어박히 면 하루 종일 나오지도 않고 책장을 넘겼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 아야 해서 잠깐 쉬더라도 이야기 나누기를 자제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침묵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함께 밥을 먹는 시 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고,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얼핏 그이들의 방을 구경할 기회도 있었는데, 문짝과 벽, 천장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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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암기내용들을 적은 쪽지들이 가득했던 어느 고시생의 방이 인상 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외삼촌과 외숙모의 배려 속에 방 한 칸을 얻어 공부에 열중할 수 있 었다. 함께 공부에 열중한 고시생들의 분위기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 었다. 앞뒤좌우가 온통 산이어서 한 여름도 그다지 덥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짙은 녹음이 맑은 산소와 그늘을 만들어 주어 공부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두 번의 낙방을 통해 공부요령을 터득한 나는 이번에는 정말로 붙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공부는 순조롭 게 진행되었고 열심히도 했고 자신도 있었다.
1977년 9 월초 나는 체력장 시험을 보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 그런 데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 영장이 집에 도착해 있는 것이었다. 무거운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한동안 정신을 차 릴 수 없었다. 연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대 략 보름 뒤에 군대를 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연기를 약속했던 이를 만나 수습책을 찾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깊은 산중에서 도인 처럼 생활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대한 꿈을 키웠는데 모든 게 허사 가 되고 말았다. 이후의 삶까지를 포함해 돌이켜보면 어떤 운명의 신이 내 길을 따 로 정해 놓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육군사관학교를 포기할 당시 까지 그 길이 ‘정치의 길’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모든 게 무너 졌다는 참담한 심정으로 1977년 9 월 나는 31사단에 훈련병으로 입 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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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와 책에 전념했던 헌병 군대생활
훈련을 마치고 안동 36 사단에 보병으로 배치 받았다. 표면적인 차원에서 군대의 조직 문화 그 자체는 내 체질에 맞았다. 효율적인 의사결정, 일사불란한 일처리, 끊임없는 몸의 각 성 등이 그렇다. 육사를 꿈꿔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 다. 하지만 이 같은 긍정성은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 다.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 반인권적인 집단주의, 신체적 약자에 대 한 배려의 부족 등이 어두운 그림자였다.
1970년대 말 군사정권의 불안심리는 평범한 보병에게도 영향을 미 쳤다. 장교들은 세상 전체를 군대로 인식하는 듯 했다. 국민의 군대 가 아니라 군대의 국민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직접적으로 그 런 말을 한 장교는 없었지만 일상적인 훈시나 정훈교육 시간에 들은 그들의 강조점에서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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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받고 공을 차고 풀을 뽑고 보초를 서는 그렇고 그런 군대 의 일상이 계속되었다. 따분했다. 울진에서 대략 3개월 정도 해양경 비를 설 때는 그런대로 심심하지 않았다.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좋았 고, 맑은 날 쏟아질 듯한 별들이 아름다웠다. 오래도록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수없이 많은 별똥이 지상을 향해 궤적을 그어댔다. 그 무모 한 추락이 내 젊음인 양 슬펐다. 당시의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게 나 역시 군생활에서 기다렸던 것은 제대 말고는 없었다. 다만, 기왕에 보낼 시간이라면 좀 더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헌병대 특별채용 기회가 와서 자 원했고, 어렵지 않게 특채되었다. 헌병대는 그 업무가 비교적 명확하 고 규칙적이어서 무언가를 계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견상 ‘폼’이 난다는 점도 젊은 내게는 매력 있어 보였다. 업무가 군대 내 경찰이라 할 수 있는 헌병대는 보여지는 시선을 중 요하게 여겼다. 헌병대는 권위와 위엄을 느낄 수 있는 몸을 찾았다. 크고 균형 잡힌 몸이면 일단 합격이었다. 여기에 태권도 3단이라는 이력이 보태졌다. 아주 쉽게 헌병대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헌병대 생활은 늘 ‘대기중’이어야만 했던 보병 업무와는 달랐다. 근무와 근무 사이 시간을 요령껏 자신을 위해 쓸 수 있었다. 그 시간들 대부분을 나는 책을 읽는데 사용했다. 자신을 잊고 조직 의 일부분으로서만 기능해야 하는 곳이 군대였다. 하지만 군대에도 우리 사회 일반의 풍속이 작동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일은 충분히 보장받았고, 상급자나 장교들은 책읽기를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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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책장 속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몰입은 정 신을 놓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긴장이 계속되는 병영생활 특성상 위 험한 일이었다. 좀 더 많은 시간, 몰입이 가능한 분위기에 늘 갈증을 느꼈다.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군에서는 수시로 태권도 대회 를 열었다. 태권도는 대한민국 국군이 연마해야 하는 공식무술이었 다. 군 안에서 벌어지는 태권도 대회는 복싱이나 레슬링처럼 인기가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태권도 대회가 격투기는 아니었다. 품새, 시 범, 겨루기 등을 종합적으로 측정하는 대회였다. 부대에서는 내가 태권도를 ‘조금’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나 또한 태권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주 위에서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전국체전 예선시합에도 나가본 경 험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태권도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국기(國技) 였다. 수준급 유단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 거라는 짐작이 갔고, 나 는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뿐, 경쟁적인 환경에서는 어느 정도 실 력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공식적으로 내 태권도 실력은 3단이 었다. 내 태권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태권도 시합에 나가 좋 은 성적을 거두면 군 생활을 좀 더 여유롭게 하면서 내 시간을 보다 넉넉하게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군대에서 사병들 개인에게 요 구하는 가장 큰 덕목은 ‘무(武)’였다. 공식적인 무기를 다루는 무가 가 장 중요했고, 일상의 무는 축구와 같은 스포츠였다. 태권도는 스포 츠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몸을 무기화 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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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결국 태권도를 잘한다는 것은 ‘훌륭한 군인’이라는 것과 한가지 였고, 훌륭한 군인에게는 허용 가능한 특권이 주어지는 법이었다. 사단장기 시합을 앞두고 연습에 몰두했다. 모든 근무가 열외였다. 중대장은 연습과 휴식 모두 내가 알아서 조절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격투를 전제로 한 무술임에도 태권도는 어느 무술보다 자기수양의 성격이 강했다. 중대장은 그 점을 잘 알았다. 달리기, 줄넘기, 철봉, 스트레칭 등으로 가볍게 몸을 푼 품새, 기술시범, 겨루기 연습 순으 로 한동안 놓았던 태권도를 다시 했다. 처음에는 몸도 무거웠고 동작도 굼떴다.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 다. 틈틈이 연습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가벼운 경직 정도로 느껴졌다. 놀라운 것은 몸의 기억이었다. 품새들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 디에 숨어 있었는지, 품새들은 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몸속에서 자 연스럽게 밖으로 흘렀다. 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저절 로 생겨났다. 인간의 모든 문화적인 동작들은 뇌의 판단을 거쳐 나 온다는 ‘상식’이 믿겨지지 않았다. 인체는 그 자체로 뇌인 것처럼 생 각됐다. 돌이켜보면 군대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태권도 연습을 할 때 인 것 같다. 시합을 앞 둔 연습이라 약간의 긴장이 있었지만, 불편하 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시합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던 육군사관학교에 대한 미련 도 연습을 거듭하면서 차츰 걷혀갔다. 태권도 시합을 준비하면서 연 습했던 시간 동안 나는 헌병대 안에서 즐거운 열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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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선수는 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준비하던 중,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군대 영장이 날아왔다 헌병대에서 근무하며 시간만 나면 책을 읽었다. 허망하게 날아가 버린 ‘육사의 꿈’을 책으로 보상받으려 했다. 그러다 사단장기 태권도 시합에 출전하게 됐다. 육군사관학교에 대한 미 련도 태권도 연습을 하며 차츰 걷혀갔다. 연습하는 동안은 나를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세상을 살며 가장 힘든 상대자는 결국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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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예정된 시간이 왔고, 나는 우승했다. 사단 내에서 최고의 태권도 실력자가 된 나에게 동료들은 미친 듯이 환호했고, 사단장은 악수를 청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한 성취감이 나를 압도했 다. 우승과 동시에 사단대표가 됐다. 1개 사단이 7~8 천 명 정도의 군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영예였다. 사단대표 출전을 앞두고 또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군인이라기보 다는 태권도 선수가 된 듯싶었다. 사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오직 연 습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출전이 목적이었지만 연습하는 동안은 나 를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사단우승이라는 성과도 있었던 터라 시간 을 쓰는 재량이 온전히 내게 있었다. 연습과 연습 사이에 책을 읽었 다. 서점에서 양서를 고를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없었다. 내무반에 있 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무반의 책은 영어단어를 공부하는 《Vocabulary》에서부터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까지 다양 했다. 내무반 생활을 하는 ‘전우’들 각자의 취향이 고르게 반영된 탓 이었다. 책은 이상하리만치 잘 읽혔다. 운동이 만들어준 맑은 정신, 귀한 시간을 낸다는 생각 등으로 집중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책은 시간이 ‘나서’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한다 는 깨달음도 얻었다. 사단대표로 출전해 군사령관기에서도 우승했다. 스스로도 놀라 운 결과였다. 몸을 이용한 우열가리기는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 는 법이다.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그저 내 자신에게 충 실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내게는 태권도가 ‘운명’이었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후에 태권도와의 질긴 운명은 제대 후에 거듭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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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된다. 태권도 덕분에 군 생활을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깥세 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제대를 몇 개월 남겨 놓지 않은 병장시절, 군은 극도로 긴장상태에 놓여 있었다. 박정희 대통 령 서거, 12·12군사반란, 민주화의 봄 등으로 이어지는 ‘혼란’이 계 속됐다. 물론 박 대통령의 서거를 빼고는 세상에 나와서 안 사실이 었다. 제대를 코앞에 두고 ‘광주에 큰일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대 특명을 받아 놓고도 대기해야만 했다. 큰일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 었다. 계엄 하에서 민간인과 군인이 충돌해 사상자가 났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있었지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고향마을로 기별을 해 보 았지만 닿지 않았다. 지인들을 통해 소식을 알아보려 했으나 전화가 끊겨서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라면 제대의 설렘을 알 것이다. 설렘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다 고향 쪽의 불안한 소식이 보태져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날들이 며칠 동안 계속됐다. 마침내 군부대를 뒤로 하고 고향 쪽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됐다. 부 대를 빠져나온 때는 1980년 5월28일이었다. 해방공동체 광주가 다 시 계엄군의 손에 넘어간 5월27일 바로 다음날이었다. 부대에서는 사람들에게 공수부대로 오해받을 수 있다면서 예비군복을 입지 말 고 사복을 입고 가라고 지시했다. 정상대로라면 광주 31사단에 가서 제대 신고를 해야 했지만 전북 35 사단에 가서 신고했다. 버스는 장성 갈재를 넘어 광주권역으로 접어들었다. 무겁고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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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뒤척이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 지, 그때는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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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도 같은 그해 전국체전 체육대학 입학
1980년 여름, 광주의 공기는 무거웠다. 경험하 지 못한 이들에게 ‘그날’의 이야기들은 소문처럼 떠돌았고, 대개는 소문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분노와 치욕을 안고서 세끼 밥 을 먹어야 했던 광주사람들은 크게 상처받고 웅크린 거인과도 같았 다.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 세상을 향해 포효할 것만 같은, 그러기 위 해 준비하고 있는 …. 민중항쟁의 포연이 가신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그때 내가 광주와 함께 할 수 있는 장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막 제대한 내게 주어진 과 제는 대학이었다. 10 월에 있을 학력고사를 준비하는 게 발등에 떨어 진 불이었다. 당시 유동 고속버스터미널 부근(현재 현대백화점 건너편)에 세 살 터울의 바로 위 누님이 살고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는 커 다란 사설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잠을 잤다. 누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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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는 밥을 신세졌다. 집중해서 공부를 했지만 좋은 점수를 자신하기는 어려웠다. 육사 는 포기했지만 명문대학은 꼭 가야겠다는 결심을 군에서부터 했다. 군에서도 태권도 연습을 하는 짬짬이 영어공부를 놓지 않았다. 남 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짧은 시간이 주는 압박은 예상보다 컸다. 그 래도 불살라야 한다. 공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있겠는가, 생각했다. 아마도 6월 끝머리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함께 태권도를 했던 후 배들이 찾아왔다. 안부 차 찾아 왔으려니 짐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후배들은 공부계획이나 건강상태를 물었고, 나는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라는 식으로 그렇고 그런 대답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 흉도 보고,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후배들 소식도 나누 면서 얼마쯤의 시간이 흘러 다시 공부할 채비를 갖췄다. 그런데 눈치 껏 자리를 정리해야 할 후배들이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는 듯 머 뭇거렸다. “어려운 일 있어? 할 말이 있으면 해봐∼.” 마음이 답답해진 내가 물었다. “실은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한 후배가 작심한 듯 또박또박한 말투로 답했다. “그래, 말해봐.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후배들은 내게 전국체전 태권도 미들급 선수로 뛰어 달라고 부탁 했다. 그 해 전국체전은 전북에서 10 월 8~13일까지 치러질 예정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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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후배들은 현 미들급 출전선수가 약하다면서 7월에 있을 예선에 뛰어 달라고 당부했다. 예선을 통과하면 전남도 대표가 되는 일이었 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대입 시험을 준비하는 처지에 곧 바로 “어렵다”고 거절했어야 옳을 것인데 그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았 다. 생각 좀 해보겠다고만 답하고 후배들을 돌려보냈다. 내 몸 속에서 이성과 감성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공부만 생각한다 면 체전에 나가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대학시험 준비 도 걱정이었다. 승리의 짜릿함과 관중들의 함성, 뿌듯한 성취감 등 을 이미 군대에서 맛 본 터인지 몸은 다시 그 경험을 되찾고 싶어 했 다. 군대에서 인정받은 실력이지만 세상 속에서는 어느 정도인지 스 스로 궁금하기도 했다. 막상 후배들의 권유가 있고 나자 공부가 더 아득하게 느껴졌고, 책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결국 체전에 참가 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선은 가볍게 통과했다. 태권도 미들급 전라남도 대표가 되어 본 선을 치렀다. 기왕 주어진 무대인만큼 공부와의 갈등은 접고 태권도 연습에 온 힘을 쏟았다. 전국체전 성적은 동메달이었다. 금메달을 따 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동메달까지 가는 여정이 쉽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은 명색이 태권도 종주국이었다. 이기고 지는 실력 차는 종 이 한 장처럼 엷었다. 나름대로 동메달에 만족하면서 다시 책을 집 어 들었다.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가 시원치 않으면 1년을 더 투자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태권도에 집중했던 정신과 몸이 다 시 책으로 옮겨오는 데는 적지 않은 ‘힘’이 필요했다. 분명, 공부도 힘 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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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조선대 체육대학에서는 내게 입학을 권유했다. 체 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건대 이때의 갈등이 내 인생에서 가장 컸던 것 같다. 세 상은 태권도 실력으로 나를 호명했다. 두뇌로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다는 각오였는데 세상은 내 손발과 근육을 먼저 알아봤다. 다시 이성 과 감성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번에는 양쪽이 팽팽했다. 전 인생을 놓고 본다면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이번에 좋은 점수를 맞지 못하더라도 한 해 더 공부하면 된다. 산 속 공부의 경험 도 있으니 머릿속 깊숙이 가라앉은 예전의 기억을 잘만 되살리면 어 지간한 대학은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 이다. 내 이성은 이렇게 판단했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운동에 소질이 있고, 스스로 즐기기 까지 하는데 체육대학이라고 해서 왜 내 길이 아니겠는가. 가서 한번 체계적으로 배워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대학이 제시한 장학혜택 이라면 집안에 부담을 거의 주지 않고 대학공부를 할 수가 있다. 1년 이라는 세월을 투자하는 것도 좋지만 그 동안 보살펴 준 부모형제들 에게 또 다시 짐을 지우는 것도 마땅한 도리가 아니다. 내 감성은 이 렇게 나를 체대로 몰고 갔다. 감성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이성의 판단이었다. 한 가지 변수가 새롭게 개입했다. 일단 체육대학에 들어가서 전과(轉 科)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궁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의 사립대
학 학제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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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체육대학의 리더가 되어 있었 다. 그러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도 훨씬 더 많은데다 군 대까지 다녀온 탓에 학우들은 나를 처음부터 윗사람으로 대했고, 그 런 분위기는 ‘학번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거 나, 중요한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면, 마치 결재를 맡는 것처럼 꼭 내 게 의견을 타진하곤 했다. 캠퍼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그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이렇다 할 역경을 경험하지 못한 스무 살 언저리의 나이 대에서는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들이 실제로 있기 도 했다. 그런 대목에서 내 ‘나이’와 경험은 적절한 역할을 했다. 조 선대학교 총예비역서클모임인 메트릭스서클 회장도 역임하면서 전 교생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나 전과는 쉽지 않았다. 옮기고자 하는 과는 정치학과였다.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체질적인 리더십이 내게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서는 정치에 대 한 호감은 더욱 커졌다. 마음을 굳히고서는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 울였다.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그 문제를 우회하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해도 거쳐 야 할 관문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관문이 많다는 것과는 별도로 당시 조선대학의 여건까지 좋지 않았다. 시간은 금세 졸업을 향해 흘러버렸다. 체대 졸업생이 선택할 수 있는 취업문은 좁았다. 졸업 한 해 전까지 모든 체대생에게는 교직 이수 자격이 주어졌다. 내가 졸업하던 때부 터 교직 이수 자격은 50% 로 줄었다. 최소 의무 기간인 1년 동안만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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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 하고 나머지 3년 동안은 이론과 전과에 신경을 더 많이 썼었다. 당연히 해야 되는 공부로 나는 교직 이수 과정을 밟았고 자격이 주어 졌다. 몇 군데 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교직을 이수했다고 해서 쉽게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주위의 부러 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교사의 길로 나가지는 않았다. 좋은 직업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도 머리도 반응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를 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교사는 내게 맞지 않다는 확신이 서 있었다. 검찰직 공채시험을 보고 싶었다. 좀 더 역동적이고 치열한 삶의 현 장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고시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 다. 주로 법률공부였는데 매우 재미있었다. 법률을 익히고 다루는 일이 나에게 ‘딱’인 듯 싶었다. 3개월 정도를 아주 즐겁고 활기차게 공부했다. 공부, 혹은 시험과는 인연이 없는 운명인지 이번에도 검찰직 공채 시험을 볼 기회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육군사관학교 꿈이 물거품이 된 경우나 전국체전에 출전해 일반적인 대학 입학시험을 포 기한 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사람 덕이 많았던지 주변에서는 나를 도와주려는 분들이 많았다. 그때 한 선배가 금문당출판사의 김형문 대표를 알고 있었는데 이 분 에게 나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정치에 뜻이 있다는 내 의중을 읽 고서는 정치의 길로 나를 안내한 것이다. 김형문 대표는 《김대중, 그는 누구인가》, 《행동하는 양심》 등 당시 정치인이자 재야세력의 거물 김대중에 관한 책을 지하에서 출판해 베스트셀러로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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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김형문 씨에게 내 이력서를 보냈고, 곧이어 김형문 씨는 나 를 불렀다. 부른 이유는 “DJ를 모시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번 에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복잡한 제도와 공모절차를 거쳐야 하는 검찰공무원보다는 곧바로 세상과 뒹굴 수 있는 재야의 길이 훨씬 더 매력 있게 느껴졌다. 이 느낌은 거의 동물적인 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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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막 입문했을 때, 나는 시장에서 노상 좌판을 하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은 적이 있다. 울 어머니의 손이었고, 우리 동네 할머니의 손이었고,내가 정 치를 할 수 있게 나를 뽑아준 유권자의 손이었다.나는‘내 정치의 시작도, 내 정 치의 끝도 그 늙은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어야 한다’ 고 늘 마음 깊이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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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도시’를 향하여 민선 4기 광산구의 노력들
살고 싶은 도시. ‘살고 싶다’는 말 안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경제, 복지, 문화, 환경 ….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을 때 ‘살고 싶은 도시’는 탄생한다. 지난 2006년 광산구청장으로 첫 발을 들여놓으며 나는 그 꿈을 꿨다.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4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나 는 감히 그만한 일들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지역민들과 함께 부단히 노력해왔다. 지역민이 없었다면, 의지로 뭉친 직원들이 없었다면 결 코 이루지 못했을 일들을 우리는 해냈다. 광산구의 변화와 혁신 성과가 나의 자랑도 치적도 될 수 없는 이유 다. 함께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구청은 그 야말로 민원의 현장이다. 지역민의 생활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현장 이다. 그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지역 현안도 해결책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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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주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혁신은 혁신이 아니다’라고 주 문한다. 지역민과 함께 하고, 지역민이 직접 참여하는 혁신만이 좋 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관과 민의 합심만이 ‘살고 싶은 도시’를 만 들어낼 수 있다. 광산구는 지금 살기에 쾌적한 ‘명품도시’를 향해 달 려가고 있다.
주민 곁으로 간 혁신행정 지방행정의 기본은 주민의 생각을 먼저 읽고 실천하는 맞춤형 서 비스일 것이다. 주민이 있기에 행정이 존재할 근거를 얻기 때문이다. 주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광산구의 행정 프로젝트들은 늘 파격, 그 자체였다. 2007년부터 광산구는 주민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크리스탈 행 정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투명한 행정을 선보이겠다는 의도였는데 주민 불편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효과를 낳았다. 특히 ‘전화친절 도 모니터링’부터 시작해 ‘행정불만 정보제공 보상제’, ‘민원교감 서 포터제’를 실시해 늘 민원처리의 척도를 진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 들었다. 전화 친절도 모니터링은 전문 용역기관에 의뢰해 공직자들의 전화 친절도를 조사하는 방식이다. 매월 구 홈페이지를 통해 자료가 공개 되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행정불만 정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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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혁신정책들을 발표하고 성과에 대해 토론하는 혁신보고회’.
공 보상제는 쌍방향 소통의 방식이다. 민원인이 제기한 민원 중 개선 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상품권을 지급하는 형태로 보상을 해주는 제 도인데 전국 최초로 시행됐다. 광산구는 이 제도를 안착시키기 위해
2007년 1월 보상금 지급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민원교감 서포터 제는 공직경력 10년 이상, 6 급 이상의 베테랑 공무원 109명이 순번 제로 현관 안내 데스크에 근무하는 형태다. 민원인과 더 가까운 곳 에서 만나 상담이나 안내를 실시하는데 해마다 평균 1,100건의 민원 처리 성과를 냈다. 광산구는 ‘민원전문 무료상담실’도 운영한다. 매주 화요일이면 주 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나선다. 지자체 사무와 관련된 민원인들 의 궁금증을 전문 상담위원들이 해결한다. 첫째 주는 부동산 상담, 둘째 주는 법률, 셋째 주는 세무, 넷째 주는 건축과 관련된 상담이 진행된다. ‘광산구청 언제라도 민원지원센터’는 ‘명품 민원’의 자랑이다.
2007년 11월 하남지구 한 마트매장에 문을 연 이곳은 주민들이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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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도’ 민원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연중무휴로 민원서비스 가 제공되며 매일 자정까지 운영된다. 달라진 주민 생활을 반영해 운영시간을 조정했다. 실제로 오후 6 시 이후 방문한 고객이 전체의
60.5% 를 차지했다. 센터가 시민들의 변화된 생활방식을 제대로 반 영한 것이다. 센터에서는 인감증명 등 제증명 18 종의 발급이 가능하 고, 납세증명 등 팩스민원 320 종, 부동산 등기부등본 등 실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서류가 발급된다. 광산구가 펼친 ‘청소행정’은 혁신의 정점이다. 청소의 방식을 바꾸 면서 이룬 변화는 광산구가 3년 연속 지방행정혁신 우수기관(행정 자치부 선정)에
선정되는 바탕이 됐다. 특히 창의적 아이디어 상품인
음식물쓰레기 자체처리장치 ‘어메이징 클린 시스템(Amazing CleanSystem)’은 ‘혁신명품’의 반열에 올랐다. 어메이징 클린 시스템은
전국 56개 혁신브랜드 중 하나로 선정돼 2008년 1월 혁신명품으로 지정됐다. 혁신명품은 전국 246개 지자체 중 13개 지자체만이 보유한 최고 중의 최고 상품이다. 광산구의 ‘재활용품 거점 수거 시스템’은 환경과 지역경제를 모두 살리는 방법이다. 주민의 분리배출과 행정의 분리수거를 통해 재활 용의 방식을 체계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독주택이나 상가 지역의 재활용쓰레기를 배출하기 편한 장소 400여 개를 거점으로 선 정해 재활용 분리수거함을 설치했다. 그 결과 확보된 재활용품을 매 각해 연간 2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 돈은 다시 주민들을 위한 청 소서비스 비용으로 환원됐다. 발상의 전환이 쓰레기로 수입을 올리 는 ‘1석2 조’의 효과를 낳은 것이다. 광산구는 또 첨단1동 소재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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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 6700 세대에 미생물을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를 양질의 퇴비로 변 환시키는 자체처리단지(ACS)를 조성했다. 이 시도는 2008년 UN공 공행정상 최종 결선까지 올라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혁신’과 함께 광산구가 지향하는 또 하나의 가치는 ‘열린행정’이 다. GSiTV 인터넷 방송국의 운영은 쌍방향 소통을 통해 구정을 주 민과 공유하기 위한 장치다. 뉴스와 어등골 소식, 참여 &UCC, 기 획특집 등 20여 개의 콘텐츠로 생생한 구정현장을 신속하게 전달한 다. 주민 참여 코너도 적지 않아 상시적 소통이 이루어진다. 특히 인 터넷 방송국을 통해 제작된 구정소식들은 3만7000여 명에게 뉴스레 터 웹메일로 한 달에 두 번씩 배달된다. 주민의 부름에 언제라도 응답하는 광산구의 행정은 지금 전국에 서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른 지자체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 으며 각종 민원행정 평가에서 높은 성적을 내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부모님과 함께하는
음악이 있는
신규공무원
구청의
임용장 수여식
정례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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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하는 민원행정 종합평가 전국 최우수기관에 선정되면서 광산 구의 정책들은 전국으로 전파됐다. 행정안전부가 펴낸 ‘민원서비스
100선’에 광산구가 시행한 언제라도 민원지원센터와 개방형 주민고 충 상담창구가 선정된 것이다. 수요자 중심의 민원행정을 구현한 전 국 자치단체의 우수 사례를 모은 ‘민원서비스 100 선’은 전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에 배포된다.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복지’ 광산구의 복지정책은 나눔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구민 들과 함께 뛰는 나눔이다. 지역 내의 사람과 물적 자원을 발굴해 복 지 수혜자와 직접 연계한다. 광산구는 2008년 1월부터 ‘희망광산 나눔 운동’을 시행하고 있다. 주민들이 현금과 현물을 기증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는 운동이다. 지금껏 460여 명이 참 여해 5억 원을 모금했고 2,900여 세대의 수혜 계층들에게 전달했다. 가장 아름다운 나눔이다. 고령화 사회에 미리 대비한 노인정책. 광산구는 2007년 8월 시니 어클럽을 발족시켰다.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조치인데 노인 인력개발원이나 한국산학협동연구원 등과 협약을 맺고 다양한 직종 의 노인 일자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노력이 결실을 맺어 두부 제 조 및 판매, 도시락 배달, 작물 재배 등의 다양한 직종의 노인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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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게 첨단점에서 열린 행복나눔 장터’
리를 만들어냈다. 특히 100명의 노인이 동시에 일할 수 있는 공동작 업장을 개설해 가동시키고 있다.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장기적으 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인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광산구 노인정 책의 핵심이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광산구는 그 동안 장애인 전동휠체어 배터리 무료 충전소, 여성장애인 운전면 허 취득비 지원, 중증 장애인의 외출을 돕는 장애인 서비스기동대를 운영해 장애인들이 집 밖을 나설 수 있게 했다. 특히 10억 원의 예산 을 투입해 장애인 보호 작업장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관내 산업단지 에 입주한 기업들과 연계해 운영되는 보호 작업장은 장애인들의 자 립 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한다. 광산구 복지정책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은 ‘출산 장려 운동’이다. 다른 지자체들이 출산률을 높이기 위해 출산장려금을 높이는 데 주력할 때 광산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 을 했다. 돈은 받을 때는 좋지만 금방 사라진다. 광산구는 2007년 7 월부터 셋째 이상 신생아들의 무료 건강보험 가입을 지원했다. 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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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질병, 사고 등 20개 항목에 대해 생후 10년 동안 보장받을 수 있 게 했다. 2009년 9 월 현재 497명의 셋째 이상 신생아들이 건강보험 에 가입돼 있다. 건강보험을 통해 106건, 1200만 원의 치료비를 지 원하기도 했다. 지난 2009년 4월 광산구 도산동과 송정 1·2동에 사는 저소득층 주민들은 오랜 시름 하나를 덜었다.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 문화활 동을 책임질 ‘드림스타트센터’가 개소했다. 저소득층 주민과 아동들 에게 맞춤형 통합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 층 가정, 취약계층 임산부, 0 ~12 세 아동 258 세대 374명을 위한 드 림스타트센터는 맞춤형 복지의 공간을 지향한다. 시범지역 안에 사 는 아동들에게 가정방문 보건서비스를 제공하고, 영·유아 발달지원 서비스를 통해 학습능력을 키워준다. 아동의 권리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실시하고, 문화체험과 부모가 참여하는 가족 지원사업도 운영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광산구의 복지정책을 이목집중의 대 상으로 탈바꿈시켰다. 광산구가 보건복지부에서 시행한 2008 지방 자치단체 복지종합평가에서 기초생활 보장분야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 이 상은 2008년 5월부터 두 달 동안 전국 232개 지자체의 복지업 무를 서면과 현장 방문을 통해 평가한 것이어서 더욱 의미 깊었다. 생 활 속의 나눔이 실현되고 있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구는 더 나아가 복지종합평가 전국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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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속에서 ‘미래’ 를 읽다 환경을 생각하는 ‘녹색성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지구는 날로 뜨거워지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기상이변들이 발생 한다. 앞만 보고 달려온 개발의 욕구들이 심각한 역풍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인데 해결책은 ‘녹색’ 안에 있다. 망가져 가는 지구 를 살리는 게 인간을 살리는 방법인 것이다. 광산구의 환경정책들은 독보적이라고 자신한다. 자전거 활성화 정 책만 해도 그렇다. 2000년 광주 최초로 자전거 이용 활성화 조례를 제정했으며 녹색동력을 통한 도시 가꾸기에 많은 것을 걸었다. 광산구가 꾸준히 펼친 자전거사업의 하나는 ‘공용 자전거 확충작 업’이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만들기 위한 조 치로 관내에 414대의 자전거를 배치했다. 구청이나 동주민센터에 배 치해 주민들이 쉽고 편하게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자전거 관련 시설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점지역 110
‘푸른 광산 가꾸기’ 나무 나눠주기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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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에 2500여 대에 달하는 자전거 보관대를 설치했다. 대중교통과 자전거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다. 광산구가 자전거를 통해 궁극적으로 꿈꾸는 지향점은 자연과 문 화, 관광이 결합하는 생태도시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광산구는 지 난 2007년부터 ‘영산강·황룡강변 자전거도로’를 개설하고 있다. 송 산유원지부터 임곡교까지 8.4km 구간으로 2011년 12월 완공 예정 이다. 자전거도로가 열리면 광산구는 호남 최고의 자전거 관광도로 를 보유하게 된다. 자전거 생활화의 안착에는 광산구의 야심작 ‘기초질서 열열주부 단’이 막대한 역할을 했다. 각 동마다 주부 10명이 자전거를 타고 지 역을 누빈다. 매주 수요일이면 오전 10시부터 하루 10회에 걸쳐 광산 구 구석구석을 돌며 기초질서 지키기 활동을 펼친다. 이 활동을 통
명품 광산의
내가 만든 전기로
원동력,
불 밝히니 신기해요.”
열열주부
광산구 녹색에너지
발대식.
체험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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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자전거가 구민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동수단으로 각인된 것이다. 특히 열열주부단은 무질서 현장을 계도하고, 정비 취약지역을 순찰 해 구민들의 힘으로 구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내는 성과를 냈 다. 열열주부단은 현재 5기까지 활동을 마쳤다. 특히 매회 모집정원의
3~4배가 넘는 인원이 몰려 심사를 통해 주부단을 선정할 정도로 지 역 주부들의 참여 열기가 뜨겁다. 열열주부단에 참여한 700명은 지 금껏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불법쓰레기 2.5 톤을 수거했고, 도시 미 관을 해치는 불법광고물 1만3000건을 수거했다. 또 불법주정차 계 도 1400건, 노상적치물 정비 850건의 성과를 냈다. 주민들 스스로 가 광산구를 녹색 명품도시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광산구의 자전거 이용 인구가 급속히 늘면서 구는 지난 8월 에너지 관리공단 호남지역센터, 광주YMCA 빛고을 바이크 사업단 등과 함 께 협약을 맺었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전거 이용 교육을 실시하며 수리센터도 운영한다. 자전거 활성화를 위한 광산구의 오랜 집념은
2008년 행정안전부 주관 공모전에서 1등급에 선정돼 13억 원의 교 부세를 받아내는 이중의 성과를 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은 어른들만의 몫이 아니다. 아이들이 함께 참여 했을 때 장기적인 힘을 얻게 된다. 광산구를 이끌어 갈 미래 사회의 주인공은 어린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녹색 환경’의 소중함을 심어주는 일은 미래를 위한 가장 빛나는 투자다. 광산구는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녹색 에너지 체험전’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 다. 아이들은 환경의 소중함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삶의 길을 찾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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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난 7월에는 관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녹색에너지 체험교 실을 운영해 지역 사회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한국과학창의재단과 함께 추진한 녹색에너지 체험전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형태 로 진행된 ‘에너지와의 만남’이었다. 5개 초등학교 453명의 학생들 이 자가발전기와 태양열 조리기, 수소연료전지 등을 직접 손으로 작 동시키며 신재생에너지의 소중함을 알아갔다. 유치원을 위한 ‘녹색에너지 실험교실’도 운영된다. 조선대학교 산 학협력단 WISE 광주·전남지역센터에서 파견한 강사의 지도로 실험 세상이 열린다. 배터리 없이 태양빛으로만 소리를 발생하는 스피커 와 용수철 자동차 등을 직접 만들어 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실체를 배우는 자리다.
지역 특성에서 경제 ‘길찾기’ 광산구는 광주 경제의 새로운 ‘중심’이다. 광산구의 내재된 역량은 ‘복합’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광산구는 도시와 시골이 한 곳에서 복합 적으로 만나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땅이다. 첨단이나 수완지 구처럼 재단된 도시지구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남이나 평동 등 5개의 산업단지를 품고 있다. 광주의 제조업은 광산구를 통해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 전체 제조업체의 80%에 해당하는 1,600 여 개의 회사가 광산구에 터를 잡고 있다. 특히 광산구는 땅이 넓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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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시골의 모습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본량이나 임곡마을 은 여전히 살아있는 전통의 마을이며 광주 자연생태의 큰 축을 담당 하고 있다. 시설 하우스 재배 또한 많이 이루어져 태극애호박, 흑토 마토, 미나리, 우리밀 등이 생산된다. 주민들이 느끼는 생활경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전통시장 과 대형마트의 생필품 가격을 조사해 일주일 단위로 공개함으로써 주민들의 쇼핑 편의를 돕는다. 특히 전통시장을 소비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장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 자했다. 그 결과 송정5일·매일시장과 비아5일시장은 시장 보기 편한 곳으로 광주에서 손꼽히는 전통시장이 됐다. 사업비 68억 원을 들 여 주차장 286면을 확보했고, 전기용량을 증설했으며, 화장실도 증 축했다. 비아5일시장의 경우 2010년 상반기까지 아케이드 설치를 완
제63회 광복절 기념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한
재래시장
‘fun-fun한
이벤트.
장날 만들기’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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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할 계획이다. 광산구는 옛 것을 파괴하는 대신 살뜰히 복원해 지역 특성에 맞는 경제 자산을 탄생시킨다. ‘맛·멋의 남도난장 송정골’ 계획은 그 범주 안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국토해양부가 주관한 ‘살고 싶은 도시 만 들기’에 선정됐다. 침체된 송정권을 활성화 시킬 코드는 과거의 복원 이다. 우리밀은 광산구의 대표상품이며 농업경제의 희망이다. 광산구는 전국 자치단체에서 가장 많은 양의 우리밀을 생산해 내는 지역이다. 매년 5월에는 송산유원지에서 ‘우리밀 축제’도 개최한다. 현재 광산 구의 우리밀 재배면적은 350ha다. 광산구는 밀재배 면적을 2011년 까지 2배로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미 2007년 농림수산식품부 의 국산밀 시범단지로 선정돼 기반을 갖춰 놓은 상태다. 2,500 톤 규 모의 우리밀 건조 저장 및 가공시설도 건설하고 있다. 광산구가 지향하는 경제의 또 다른 한 축은 ‘그린에너지’다. 환경 에 도움을 주는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광산구의 미래다. 아직 자연의
기업 애로사항 해결을 위한 업체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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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많이 살아있는 광산구의 지역 풍토와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경제정책이기 때문이다. 광산구는 지난 3월 하루 40 톤의 가연성 폐 기물을 해결하는 처리시설을 전액 민간자본으로 유치했다. 전문업 체 두 곳과 투자협약을 체결한 것. 가연성 폐기물 열분해 사업은 에 너지 함량이 높은 폐기물을 열분해해 고체연료, 액체연료, 가스연 료, 폐열 등을 생산하는 재생에너지 사업이다. 협약의 성사로 광산 구에는 9000㎡의 공간에 70억 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처리시설이 만들어지게 됐다. 광산의 농촌지역에서 발생하는 가연성 폐기물을 열분해해 또 다른 자원을 얻는 이중의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가축 분뇨를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사업도 추진된다. 바이오매스 (Biomass) 자원화 사업을 통한 ‘제로 에너지 타운’ 구축이다. 광산구
는 지난 6월 바이오매스 발전사업자인 정림산업과 협약서를 교환했 다. 관내 축산업체인 봉림축산, 동산농장, 칠성농장 등과 함께 40억 원 규모의 사업비를 투자해 농촌지역에서 발생하는 유기성 폐기물을 활용한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협약서의 교환은 2012년
외국인근로자 민속문화 체험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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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11일 광산문예회관에서 열린 재독한인여성 합창반 공연. 40여년 만에 고국땅에서 여는 공연이었다. 이완순 단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부터 적용되는 가축 분뇨 등 유기성 폐기물 해양투기 금지에 미리 대 비하기 위한 발 빠른 조치였다. 아파트 단지의 조경수 부산물을 무료로 수거해 일반 땔감보다 열 효율이 높고 탄소배출량이 월등히 적은 팰릿으로 제조하는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연간 173 톤의 생산량을 갖춘 설비시설을 가 동시켜 8 만 6500리터의 경유 대체 효과를 창출해 내고 있다.
2009년 광산구는 ‘제2회 섬김이대상’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 했다. 섬김이대상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중소기업 애로해소 및 기업하기 좋은 환경조성에 기여도가 높은 현장 공무원 및 단체를 대상으로 2008년부터 실시하는 평가다. 광산구는 생활과 기업경영 에 장애를 초래하는 각종 규제 완화,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모델 정립, 저탄소 녹색성장 동력 확보 등 그 공로를 인정받았 다. 특히 ‘불편 주는 규제, 먼저 찾아 해결하겠습니다’ 라는 규제개혁 태스크포스팀을 창설하고 각종 분야의 규제항목을 재검토 실시했 다. 건축법상 용도변경 관련, 공장설립 간소화 등 49건을 발굴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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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에 건의하였다. 불편했던 인허가 절차 등 각종 제도들이 개선되고 택지개발지구 건축규제완화, 농공단지 건폐율 완화 등 지역경제 활 성화를 위한 기업 환경조성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광산구는 노사상생 문화 정착에도 앞장섰다. 지난 1998년 지방자 치단체로는 전국 최초로 노사정 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해왔다. 그 동안 축적된 성과와 신뢰를 바탕으로 지역 특성과 부합한 맞춤형 노 사상생 문화 확산 및 정착을 적극 추진했다. 6급 이상 공직자들이 뭉쳐 ‘1기업 1공무원 담당제’도 실시하고 있 다. 그 결과 지난 3월에는 부문별 경제주체들이 노사상생과 경제 활 성화를 약속하는 ‘노사민정 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경제주체들 이 대립 대신 상생의 길을 찾은 것이다. ‘노사민정협의회 운영조례’를 개정해 시민사회 등 모든 경제주체 가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실무협의회와 행정지원반 등 중층적 협의시스템을 구축해 다양한 계층의 의견이 수렴, 절충되는 장치를 마련했다. 또 노사민정 협력실천 선언, 노사 한마음 워크숍, 윈-윈 톱니바퀴 포럼 등 이론과 체험이 병행된 교육 프로그램으로 노사상생문화 정 착에 기여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은 각 경제주체들의 자각과 참여로 이어지면서 광주에서 유일한 외국인 근로자 민속문화체험행사 개최 와 금호타이어 노사갈등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및 중재 단 구성, 권문 발표 등 다양한 성과를 낳고 있다. 이와 함께 GS혁신 산단지원센터 등 기업지원 인프라 구축과 광산구 여성경제인협의회 발족 등으로 지역 고용안정과 기업성장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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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에서 실시한 ‘2009 지역 노사민정 협력 활성화 자치단체 평 가’에서 광산구는 국무총리 표창과 함께 5천만원의 인센티브를 받 는 영예를 안았다. 노사민정 화합으로 경제성장과 고용창풀에 노력 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노사상생협력대상은 노동부가 지역 노 사관계 발전 및 일자리 창출을 적극 추진한 지방자치단체를 발굴해 그 성과를 전파하기 위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매년 실 시하는 평가다. 광산구는 지역 파트너십 활성화, 노사관계 성과, 노 동시장 성과, 지역 파트너십 향상 사업 등 4개부문 20개 항목에서 높 은 평가를 받았다.
멈추지 않는 배움, 희망을 열다 광산구는 지난 4년 동안 주민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직 장인 평생학습 프로그램인 ‘주경야평(晝耕夜平)’은 이미 광산구 배움 의 상징이 됐다.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 평생학습에 매진한다는 의 미를 담은 ‘주경야평’은 광산구 소재 근로자 20명 내외의 직장을 대 상으로 하며 비용은 무료다. 주경야평은 수요자 맞춤형 강좌이며 비 즈니스 잉글리쉬, 생활 중국어, 독서지도자, 성공 조직을 위한 자기 계발 전략, 원예치료, 한지공예 등으로 이루어진다. 교육과학기술부 의 평생학습 도시사업 공모에 선정돼 전액 국비로 운영되며 2008년 부터 900여 명의 근로자가 혜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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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광주 최초로 개설한 ‘e -평생학습센터’는 영화에서 외 국어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2009년 9 월부터는 주민들의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영어 과목을 대폭 보강했다. 토익과 토플, 영문법 강좌 등이 신설됐다. 학습 콘텐 츠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현재 유아·어린이, 외국어, 컴퓨터, 능력 향상, 논술, 한국어교육, 교양·문화, 자격증·고시 분야 등 98개 교육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으며 광주 최고의 인터넷 평생학습센터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2529명의 주민이 e -평생학습센터의 회원으로 가입 해 있으며 2009년 11월3일 현재 누적 접속자수는 5만7700명에 이 른다.
2008년 12월18일은 광산구 어린이들의 꿈이 열린 날이다. ‘운남 어린이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모든 공간이 어린이 중심으로 설계됐 다. 열람실은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구분해 층을 달리했고, 아이와 함께 오는 보호자를 배려, 수유실과 유아방도 마련했다. 특히 읽는 것보다 듣는 것에 익숙한 어린이들을 위해 전자책 구독을 할 수 있는
동곡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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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자료실을 갖췄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2007년 광산구가 제31회 국가생산성혁신대 회에서 인재개발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주민 평 생학습도시 기반을 구축하고, e -평생학습센터를 개설한 그 동안의 노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수상이었다. 대회를 주최한 산업자원부 는 명문 교육도시를 꿈꾸는 광산구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높이 평 가했다. 광산구는 교육과 결부된 폭넓은 문화활동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특히 발로 현장에 찾아가는 탐방 프로그램들은 박제처럼 굳어있던 문화유적들을 시민들에게 환원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8 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문화재 생생(生生)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문화재청으로부터 2년 연속 ‘지자체 문화재활용 우수사업’에 선정돼 국비를 지원받아 월봉서원, 무양서원, 월계동 장고분을 찾아다니며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 인물들의 철학세계를 이해하는 자리 도 자주 마련한다. 2009년 4월에는 퇴계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 성리학을 완성한 고봉 기대승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월봉 서원 관광자원화를 고민하는 포럼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각 종 의견을 취합해 문화정책으로 바꾸는 작업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지역 역사에 대한 세밀한 기록은 자기 안에서의 정체성 찾기 일 환이다. 광산구는 현재 하루가 다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급변의 세상에서는 과거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자기’를 보존하는 길이다.
2007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광산구사(光山區史) 편찬 작업은 도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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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에 닿아 있다. 석기를 쓰던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유·무형 문화 재들을 기록 속에 올곧게 남기는 작업이다. 광산구는 자기 땅의 역 사와 문화, 마을, 인물, 경제 등의 변천을 세밀하게 기록한 구사를
2011년까지 편찬할 계획이다.
‘2008 존경받는 대한민국 CEO 대상’수상. 공공행정·열린경영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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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과 함께 미래를 여는 희망 광산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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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 발언! 발언! 주민들의 오랜 시름을 해결하기 위한 발언! 지역 사회의 발전을 깊이 있게 모색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발언! 책임 있는 발언! ‘우리’ 를 위한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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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주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혁신은 혁신이 아니다’ 라고 주문한다. 지역민과 함께 하고, 지역민이 직접 참여하는 혁신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민과 관의 합심만이 살고 싶은 ‘명품 도시’ 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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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점심식사를 끝내고 광산보건소 옥상으로 오라. 그곳에는 음악이 흐른다. 문화가 흐른다. 2. 광주 최초로 개국한 인터넷방송국 GSiTV 는 생생한 구정소식과 지역뉴스를 신속하게 전한다. 주민과의 쌍방향 소통으로 즐거움을 전송한다. 3. 부모님과 함께 받은 공무원 임용장. 주민을 어머니, 아버지처럼 여기겠습니다. 자랑스러운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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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유익한 광산구. 광산구청은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어등자치포럼 21)으로 유명 인사를 초청해 그들의 삶과 열린 생각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열찬 강의를 했던 연기자 전원주,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도 광산구민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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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의 기본은 주민의 생각을 먼저 읽고 실천하는 맞춤형 서비스. 주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광산구의 행정프로젝트는 늘 파격,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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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쌍암공원에서 열리는 대보름 행사 광주에서 유일한 외국인 근로자 민속문화체험행사 용아 박용철을 기리는 문학축제 등 광산구의 다양한 행사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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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나의 동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광산구청에도 분향소가 마련됐다. 민주주의 지도자를 잃은 슬픔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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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 화합과 향토 사랑을 위해 매년 10월 경에 열리는 어등축제는 광산구의 가장 큰 행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