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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 추진기획단 시민문화네트워크 구축사업

문화시설활동가네트워크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추진기획단 시민문화네트워크 구축사업

문화시설활동가네트워크 “소소한 기쁨” 발행일

2007년 04월 14일

www.salim-culture.com 편집 · 디자인

데코디자인그룹 062 - 226 - 6602


언제부터인가 ‘네트워크’라는 좋은 말이 식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너무 많이 노래하는 동안 원래의 진정한 가치가 퇴색되거나 왜곡되어,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사랑에 굶주린 얼굴의 사회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과 같다. 시간과 공간, 사회, 하나의 공동체 등이 존재함은 이미 그 안에 ‘나와 너, 우리’의 관계망을 전제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에 ‘네트워 크’를 추구하지만, 역으로 고집스레 ‘각자’이기를 원하며 상대방이 나의 이익에 봉사하기를 요구 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꿈꾸는 창조적인 도시에는 표정이 살아있다. 생동하는 도시의 표정은 그 곳에 살 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갈등과 화해, 균열과 회복, 소소한 기쁨, 소소한 놀이 등이 마치 씨실과 날

여는 글; 문화시설활동가네트워크 “소소한 기쁨“ ”소소한 기쁨”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추진기획단 시민문화네트워크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고있는 문화시설활동가 네트워크의 명칭입니다.

실의 짜임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그 무엇과 흡사 유사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따 뜻한 情과 신뢰로 공동의 善, 바로 문화적 삶의 공동체에 대한 염원을 품고 녹아든다. 지역사회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과 함께 일상인이자 동시에 매개자인 활동가가 함께 소통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성될 새콤달콤 혹은 달콤 쌉싸름한 도시의 감정과 표정의 물결을 상상해보 자. 그 물결은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 또 다른 파장과 결합하고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고 삶 속에 스며들어가 지속가능함을 만들어간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네트워크 사업’ 실행이라는 단순한 접근 보다는 ‘네트워크’에 대한 본질적 의미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활동가들의 진정한 힘을 찾아가는 활동가간 신뢰수준 즉 의 식수준의 향상을 통한 문화적인 해결방법을 찾는데 있다. 즉, 네트워크의 진정한 의미와 방향성을 찾아가면서, 환경과 문화, 개별적 성향이 다른 타인들의 공동체일지라도, 공통의 방향을 공유하고 ‘네트워크 되어감’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서 생성된 관계망으로서의 ‘네트워크’ 가 자연스럽게 문화 활동가의 긍 정적 영향력과 가치를 새롭게 터득하며 성장함으로서 문화도시의 뿌리가 될 것을 기대해본다.


길잡이; 여는 글

문화시설활동가네트워크 “소소한기쁨”

01 광산구 오덕미(광산문화원 사무국장) 한송희(광산구청소년수련관 총괄간사) 임미숙(도깨비어린이도서관 사무국장) 김선(광산문화예술센터 기획공연 ) 김화순(문화예술공동체 ‘터’ 미술교사) 안영숙(월곡지역아동센터 신나는교실 책임교사)

02 동구

04 남구

김민경(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분관 학예사)

조민정(남구자원봉사센터 총무지원팀장)

이진상(의재미술관 학예사)

김선희(포엠콘서트)

홍상미(녹색연합 간사) 서정(광주청소년활동진흥센터 운영요원) 김주일(수상한교육공동체 ‘결’ 간사)

03 서구 김은영(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CT사업부) 오명란(신세계갤러리 학예사) 정린(5 · 18기념재단 국제협력팀) 배선현(광주여성의전화 정책부장) 이운기(서구문화센터 청소년팀장)

05 북구 장원익(북구청 남도향토음식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영신(광주국립박물관 학예교육사) 이윤정(문화중 지역사회교육전문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 실버문화학교를 하고 싶어요. “내생에 행적을 남기고 싶어” 라는 주제로 말이죠

문화원의 본래적 역할은?

광산문화원 사무국장, 오덕미

용 : 소개를 부탁합니다.

영광에서 광산구 소촌동으로 이사해 광주시민이 된 오덕미 사무국장은 문화원에서 활동한지 10년이라 했다. 초등 2,3학년 두 아이를 둔 어머니이기도 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문화도시를 향한 성숙한 열정이 흘렀다. 정말 맘이 통하는 인터뷰였 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하는 사람, 꽃샘추위를 뚫고 문화현장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였다.

// 인터뷰장소 : 광산문화원 // 인터뷰시간 : 2007.4.3. pm 11시 ~ 1시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김용재, 정우영

덕 : 광산문화원 사무국장이구요. 39살, 닭띠입니다. 작년 11월 1일부터 광산문화원에 들어왔어요. 방송 통신대 행정대학원에 다니면서 마을史를 1년간 수집하다 보니까, 이 일은 전문가가 해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03년 목포대 사학 과에 들어갔어요. 수료는 했고 석사 논문을 쓰고 있답니다. 문화관광해설가 하면서 교육도 받았고, 문 화가 뭔지 모르고 시작했지만 10년 동안 문화원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풍월을 읊을 정도는 됐지요. 용 : 광산문화원에 오시기 전에 어디에서 활동하셨는가요? 덕 : 영광문화원에서 10년간 활동했습니다. 영광군지 편찬을 준비하다가 광산문화원으로 오게 됐어요. 용 : 문화원이 주로 하는 사업은 무엇인가요? 덕 : 문화원은 7가지 사업목적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지역문화 개발, 보존, 전승을 위한 문화사업입니 다. 여기에 향토사 조사라는 게 있어요. 향토사료의 수집, 발굴을 포함한 조사, 연구사업 이지요. 이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못하는 부분입니다. 어르신들이 고문서 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호 구단자 같은 것도 가지고 계십니다. 옛날 주민등록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어 르신들이 돌아가시면 다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죠. 문화원이 해야 할 일이지요. 제가 영광문화원에 있을 때 마을史에 대한 조사사업을 했어요. 안타까운 건 영광에 염전 있잖아요. 염 전을 배경으로 찍은 어르신들의 사진이 하나도 없어요. 보존이 안 된 거지요. 그래서 옛 염전의 모습 을 찾기가 힘듭니다. 사라지기 전에 문화원에서 작업해서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용 : 문화원 시설 간의 연계사업은 있나요? 덕 : 연계사업은 없고 친목은 도모하고 있어요. 광주에는 서구, 남구 문화원을 비롯해서 총 다섯 개의 문화원이 있고 광주시 지회도 있어요. 서로 모임을 갖고 있지요. 용 : 광산문화원의 사업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은? 덕 : 향토사를 중심으로 문화적 접근을 해보고 싶어요. 문화원의 본래적 역할입니다. 광산구지 발간사업이 광산문화원 차원에서 진행되면, 광산區史를 위한 청소년 향토조사단도 조직하 고 자료도 모으고 해서 이것을 시디(CD)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어르신들이 많 은데, 그분들의 징용 경험담을 모아보고 싶어요. 송정역을 통해 다들 징용을 가셨다고 합니다. 여기 가 중심지인 셈이죠. 사라지는 것들. 송정역 발전과 관련 있는 떡갈비 등등. 많이 있어요. 일제치하 때 잘못 바뀐 마을이름들도 많구요. 다시 찾아야합니다. 징용史도 아이들이 알아야 해요. 향토자료를 모 으고 있어요. 교수님들을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게 하고 연구와 가르침을 병행하여 아이들에게 강연도 하고 청소년들은 직접 조사에도 참여시킬 생각입니다.


용 : 문화원이 향토사 사업을 통해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이야기네요. 덕 : 그렇죠. 광산구지 편찬위원, 문화관광해설사, 아이들 등을 묶는 거지요. 문화원도 지역네트워크를 형성해서 관심 있는 사람들을 조직해야 해요.

이름을 걸고 흔적을 남기는? 용 : 지역에서 문화원의 역할은 어때야한다고 생각하나요? 덕 : 문화원도 문화적 마인드가 있어야 제대로 사업할 수 있어요. 문화복지, 문화의 균등실현도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문화원이 뭘 하는 곳인지 몰라요. 한가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겉에서 짐작하는 것하고 다르게 매우 바쁜 곳입니다. 야근도 많이 하구요. 원장, 사무국장이 욕심이 있으면 바쁘고, 욕심이 없으면 안 바쁘다고 할 수 도 있지만요. 광산문화원 에 머무르는 동안에 “오덕미” 이름을 걸고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용 : 앞으로 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면...? 덕 : 실버문화학교를 하고 싶어요. ‘내 생에 행적을 남기고 싶어’ 라는 주제로 말이죠. 어르신들은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어 합니다. 토박이로 살면서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온 이야기들이요. 구술자료를 확보하고, 할아버지 할 머니들이 들려주는 옛 추억담을 중심으로 순회강좌를 하는 거죠. 주말체험프로그램으로 놀토에 월봉 서원 행사를 추진할 예정입니다. 초등4학년 교과서에 기대승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월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을 비교하는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어요. ‘종가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월봉서원 행사를 하면 아이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우리 차 만들기 ,풍물체험도 하 구요. 보통 서원에 가면 위패모신 곳 만 보거나 빈터, 전통가옥만 보고 나오는데 오래 머무를수록 배 워갈 것이 더 많아요. 예산이 허락된다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용 : 문화중심도시사업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덕 :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여기 와서 기대승선생님이 이 곳 광산구 출신이 란 걸 알고 놀랐어요. 월봉서원이 광산구에 있다는 거. 광산구의 특징을 잘 찾아서 광주를 잘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박용철 시인도 이 고장 출신이더라구요. 여기 와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된 것이 매우 뿌듯해요. 내 할 일이 있다는 거. 뉴스를 보더라도 예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영광에 살 때) 광주시민 이 된 뒤로는 관심을 많이 갖게 되더군요. 문화원도 중심축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문가와 외부인사가 많다는 느낌입니다. 사업에 광주시민들이 들어가야 광주의 목소리가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용 : 마지막으로 문화시설활동가 네트워크에 대해 한 말씀! 덕 : ‘문화’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문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구요. ‘문화’를 매개로 서로 연계될 수 있으면 좋지요. 문화사업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협조 할 수 있는 네트워크라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광주민속박물관에 대해 세세하게 몰라요. 만남을 계기로 광주민속박물관을 하나의 답사코스로 설정하고 방문할 수도 있겠지요.


“마중 물” - ‘청소년수련관’을 지역의 생활권역 내에 있는 문화시설로 규정하고 청소년 문화활동 을 매개하는 문화활동가의 고민과 전망

펌프 샘에 물 한바가지 넣고 새로운 물을 끌어올리는 마중물, 그런 사람

광산구 청소년수련관 총괄간사, 한송희 한송희선생님은 광주 YMCA 광산지회/광산구청소년수련관에서 총괄간사를 맡고 있다. 광산구청소년수련관에서 청소년들 과 만나면서, 청소년들 스스로가 자기결정권을 갖는, 진짜 민주시민(?)이 되길 원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의 힘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옆에서 지켜봐주는 데에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반 면 우리 사회는 그 기다림 자체에 지나치게 인색한 조건 속에서 우리의 청소년이 좀 더 자연스럽게, 자유스럽게 자라갈 수 있 는 방법들을 실천해보려고 한다.

// 인터뷰장소 : 광산구청소년수련관 청소년영상문화센터 // 인터뷰시간 : 2007.3.12 pm 3:00 ~ 6: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룡, 김수정

문답의 인터뷰가 아닌 상호 말트기 대화와 문화적 초대 정 : 관장님은 그 전에 이래저래 한번씩 뵌 적이 있다, 서구문화센터에 있다가 오신 경험. 비엔날레 워크숍에서도 오셨고, 문화예술교육쪽으로도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정 : 문화시설 생각할때, 시설을 어떻게 규정할까? 생각해보았는데, 문화시설에서 일하는 터전 이런 측면으로 다가가야 할 듯 하다. 한 : 내가 Y안에 있으면, 대외협력 같은 곳에서 일하지 않으면 10년을 일해도, 사람들을 못 만나는 경우가 있어요, 수련관으로 오니까, 관공서나 청소년을 만나는데, 그 안에서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을 하는 것이 중요한 듯 하구요. 정 : 무슨 일을 할때 건 어떻건 술 마시면서 이야기 하다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고, 은연 중에 스며들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데, 기관 대 기관이면 계약적이고, 그렇지 않도록 하면 좋 겠어요. 오늘의 대화 제목은 “초대” 라는 생각을 했는데, 문화적인 초대라고 하면 좋겠는데, 집들 이 하는 것처럼, 친구들을 사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대 화”청소년에 대해서, 지역에 대해서, 하이테크 컴플렉스(첨단) 사람들도 많이 살고, 청소년도 많 이 살고, 내가 일하는 곳은 문흥지구이고, 사는 곳은 첨단이고. 언제부터 일하게 됐나요? 한 : 99년 1월, 졸업하기 전에 취업, 과 동기들이 시민사회단체 찾아다니면서 일을 하려는 분위기였 는데 그때 나는 Y로 인턴으로 들어왔다.

청소년수련관의 새로운 이름달기 정 : 수련관하고 수련원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한 : 잠 자고 안자고의 차이? 생활권내에 있는 것이 수련관이고, 자연권에 있는 수련원이고 정 : 수련원 같은 경우는 광주시 수원지 쪽인가요? 한 : 호대 평생교육원 쪽 정 : 비슷할 수 있는데, 청소년들의 문화체험들에서 문화적 차별성이 있을 수 있겠다. 청소년 캠프를 갈 때도 특별한 것을 체험하러 가는데, 특별한 상황을 만들어서 가는 것이고. 일상 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체험하고 그러면서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 수 있다.


한 : 청소년시설도 자기들 성격에 맞게 바꿔라, 채영희 장관되면서, 바꿔라 하고 나왔는데도 이름을 못바꾸고 있다. 수시로 들락날락 하는 공간인데, 공부하는 애들은 잘 안다니고, 좀 노는 애들이 다니 기도 하고, 그 이름을 인지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이쁜 이름으로 바뀌고 있는 곳도 있어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이름을 바꾸도록 하겠다. 정체성이라고 해야하나? 집합되어 있고, 그것을 공식 화 해야 하니깐, 그렇게 하면 좋겠다. 이름 공모짓기 정 : 총괄간사라면, 자기 이름표를 이쁘게 바꾼다면 무엇이 좋을까? 한 : 관장 다음? 총괄간사가 머하는 것인지를 모른다. 관장님 밑에서 운영관리하고, 부책임하는 것이고, 이것저것 다 하라고 붙여준 것인 것 같아요. 부관 장이면 관리자만 한명 더 늘어나는 겪인데 적은 인원에 일할 사람은 필요하고. 그러다보니, 총괄간사 라는 이름으로 일괄적으로 명함으로 찍어서 나온 것이에요. 정 : 우리는 여자 샘이 많아서, 위원님 같은 경우는 대외적인 일을 하다보니, 우리는 시설관리 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또 수련관이랑 운영주체가 다르다보니, 때로는 전구도 갈 아끼워야 하고, 문화의집 일도 총괄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지요. 처음에 직장에 들어와서, 자기 일 자체가 명확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 일을 만들어 가는 것을 지속적으 로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정 : 수련원 같은 경우는 광주시 수원지 쪽인가요? 한 : 호대 평생교육원 쪽 정 : 비슷할 수 있는데, 청소년들의 문화체험들에서 문화적 차별성이 있을 수 있겠다. 청소년 캠프를 갈 때도 특별한 것을 체험하러 가는데, 특별한 상황을 만들어서 가는 것이고. 일상 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체험하고 그러면서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 수 있다.

청소년 ‘스스로 하기’에 대한 현실과 고민 정 : 고민 되었던 것이, 광산구 청소년수련관에서 포럼인가, 세미난가 했어요. 한 : 청소년운영위원회, 스스로 운영위원회,이것이 법으로 지원하고 있고, 두라고 권하는 것이에요.

정 : 그런 활동을 하고 있고, 애들이 사회도 보고, 몇 사람이 포럼도 하고. 거기서 저는 놀랬던 것이, 아이들이 진행하려고 했던 것이 이것이 제도적으로 훌륭하게 있는 부분 이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한 : 그것은 어느 수련관이나 다 있어야 하거든요. 정 : 그것이 어려워서, 명목상 두고 있지만 다 못할 것 같아요. 한 : 수련관마다 꾸려야하는 것도 있고, 이것이 올라가서 국가청소년위원회도 올라가야 되거든요.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을 보다 보면, 생각만큼 잘 안되는 것도 많아요. 아이들한테도 너희들이 하고 싶은 데로 해봐라 라고 하고, 스스로 회의록도 작성해보고, 무엇도 기획 해 보고 그렇게 하는데, 엄마들도 주말마다 애들 데려다가 뭐 하느냐고 그러시기도 한다. 정 : 스스로 라는 것에 담겨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것들. 과정상의 어려움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교육활동 할 때 니들 스 스로 해라 라고 하는 것이 자발성이라는 것을 자기 구조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인데. 한 : 그럴려면 아이들한테 시간이 많이 필요한거죠, 스스로 위원회도, 그렇고 후배 직원이 들어오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신입 애들도 내가 해왔던 것들 을 부여해주는 시간도 있고, 그런데 애들이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는데, 아이들한테는 시간이 너무 적 게 주어지는 것이 문제죠. 수련관에서 초등학교때부터 중학교까지 온 애들인데, 3년 동안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이죠. 또 집에서는 이것을 안하 면 1등이 될 수 있는 애인데, 그래서 고등학교 가면 좀 저조해지는 것 같아요. 정 : 우리 사회는 그런 것 자체를 배양하지 못하는 환경이다. 하려는 의지나 열정이 있으면 의지나 갈등이 생기는데, 갈등이 있으면, 청소년기는 위험하고 그러니깐 그 갈등의 요소들을 모르고 넘어 가다가, 대학사회로 넘어가면 그런 능력이 점차 줄어들고, 그것이 결국 직장생활에서 드러난다. 한 : 우리는 스스로 위원회라고 하고, 자기들도 고민하고, 선생님이 우리한테 무엇을 못했나. 등등 고민하고, 이번에 신입위원회 이야기 듣고 있노라면, 그 애들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자기활동 부분을 문제점을 알고 있고. 자기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제들을 가장 잘 알고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 다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또 힘들어하고. 일단 아이들은 스스로라는 뜻에는 본인의 책임감이 들 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요. 자기들이 결정하면 결국 자신이 해야하거든요.


정 : 애들이 자기 동력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선생님이나 저나 학교 선생님이 아니니까, 학교 선생님이 가르친다는 개념이 아니라, 외부적인 사람이고, 그런 범주를 벗어나니까 우리가 해 야 할 역할 같은 것이 있는것 같아요. 아까 직장인 이야기에서처럼. 한 : 요즘의 저는 스스로의 문제는 주체적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 혼자만이 있는 이기적인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구나 옳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 우리 후배나 애들한테 이야기 하는 것이 결혼해 서 살면서도, 그 갈등의 요소는 엄청 나고, 아이들이 선택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 드러나고, 애 들한테 그것을 바라고 길게 바라봐주고 싶은데, 그렇게 하고 싶구요. 정 : 스스로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 이야기인 듯 해요. 어른들도 그걸 잘 못하잖아요, 어른들도 못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한 : 그런 갈등, 어디를 갖다 올까? 그래야 좀 알아질려나?

청소년 문화 ! 그들만의 리그인가 ? 아니면 어른들이 만든 문화 상차림의 소비자인가 ? 정 : 청소년 문화 개념.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가 방금 한 이야기는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것이고 (청소년 문화 정의 혹은 범위를 읽어보면서, 청소년 문화란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까지 나옴.) 청 소년문화는 기성세대나 주류문화하고는 다른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면서. 청소년문화라고 하는 것 이, 딱 떨어지게끔 나오는 것은 아니고. 청소년 문화가 무엇일까요? 한 : 그들만의 특수한 문화를 형성하는. 우리 현실에서 청소년 문화가 있는지 좀 의문스럽다. 공부하는 것 이외는 선택의 권한이 없어, 부모님이 보내주면 오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는 애들도 소수 있고, 뭘 해놔도 애들은 잘 안오고, 아무리 예산을 많이 들여도 애들은 잘 안오고. 예를 들어서, 자기들이 만드는 것, 첨단지역의 중고등학교 애들이 동아리 축제를 하는데, 그때는 많이 오는데, 그 것을 일 년에 한 번 하는데, 그때만 많이 오고. 정 : 가면갈수록 애들은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개인적인 기회 같은 것은 축소가 되고 있고.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힘도 안나고 그렇지 않나요? 한 : 예전에는 청소년은 이런데 가면 안 돼!, 청소년 영화는 청소년만 봐야 되고, 어른들 영화는 어른만 봐야하고. 청소년들은 지금은 대중문화랑 섞여서 자기들이 섞어서 가고 있지 않나.일반 지역 주민들이 하는 행사를 해도, 애들은 청소년들이 하는 것에도 오고. 미래 청소년이 될 어린이는 끼면 안되나? 미래 할아버지는 이런데 오면 안오나?청소년문화예술강좌를 보기 좋게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좋지만, 청소년이 올 수 있는 시간이나, 청소년도 그 시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서로 섞이면 안될까?

정 : 통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이름부터 그 문제가 되어오고 있다. 청소년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히려 제약이 된다. 한 : 수련이라는 단어 자체도 좀 그렇죠. 정 : 청소년 문화 개념.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가 방금 한 이야기는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것이고 , (청소년 문화 정의 혹은 범위를 읽어보면서, 청소년 문화란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까지 나옴.) 청소년문화는 기성세대나 주류문화하고는 다른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면서. 청소년문화라고 하는 것이, 딱 떨어지게끔 나오는 것은 아니고. 청소년 문화가 무엇일까요? 한 : 기들만의 특수한 문화를 형성하는. 우리 현실에서 청소년 문화가 있는지 좀 의문스럽다. 공부하는 것 이외는 선택의 권한이 없어, 부모님이 보내주면 오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는 애들도 소수 있고, 뭘 해놔도 애들은 잘 안오고, 아무리 예산을 많이 들여도 애들은 잘 안오고. 예를 들어서, 자기들이 만드는 것, 첨단지역의 중고등학교 애들이 동아리 축제를 하는데, 그때는 많이 오는데, 그 것을 일 년에 한 번 하는데, 그때만 많이 오고. 정 : 가면갈수록 애들은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개인적인 기회 같은 것은 축소가 되고 있고.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힘도 안나고 그렇지 않나요? 한 : 예전에는 청소년은 이런데 가면 안 돼!, 청소년 영화는 청소년만 봐야 되고, 어른들 영화는 어른만 봐야하고. 청소년들은 지금은 대중문화랑 섞여서 자기들이 섞어서 가고 있지 않나.일반 지역 주민들이 하는 행사를 해도, 애들은 청소년들이 하는 것에도 오고. 미래 청소년이 될 어린이는 끼면 안되나? 미래 할아버지는 이런데 오면 안오나?청소년문화예술강좌를 보기 좋게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좋지만, 청소년이 올 수 있는 시간이나, 청소년도 그 시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서로 섞이면 안될까? 정 : 통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이름부터 그 문제가 되어오고 있다. 청소년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히려 제약이 된다. 한 : 수련이라는 단어 자체도 좀 그렇죠. 정 : 문화센터라는 측면이 강한 것 같고, 청소년이라는 것에 꼿힐 수 있는 것. 청소년들이 문화적인 활 동을 폭넓게 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만드는 것. 우리 같은 경우도, 대상을 먼저 두고 프로그 램을 기획하지 않거든요. 청소년의 개념 자체도 법정 청소년을 둬서 따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청 소년들은 학교에서 살아가는데, 학교에서 할 일이 많다는 것이죠. 청소년 수련관도 참 어렵겠다 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참, 청소년 인증제? 프로그램 단어가 들어가 있던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 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 : 청소년프로그램인증제는 취지 자체는 좋을 수도 있지만, 다양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부분에서 전 그렇게 환영하는 편은 아 니에요, 그런데 정책적으로 올해는 청소년프로그램인증제를 해야 할 듯 하기도 하구요, 사실 프로그 램이라는 것이 그때 그때 일어나는 상황에서 변화가 가능해야하잖아요, 인증제처럼, 단계별로 무엇 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좀 죽어있는 프로그램 같기도 하구요, 또 청소년위원회에 서 인증된 프로그램은 지역 학교에서 아이들이 와서, 오면 아이들이 점수를 딴다든가, 국토순례를 예 를 들면, 그 안에서 안전관리라든가, 그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안전장치를 하겠다는 거에요. 프로그 램 숙박 시설이나, 모든 프로그램에서 기준점을 두겠다는 것인데, 그 우리가 갖고 있는 프로그램도, 몇 백개까지도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을 사용자에 따라서 변경을 해야 하는데, 프로그램에 대한 관리 가 들어가는 것이죠. 안정된, 공인된 프로그램을 진행하자라는 것인데, 프로그램 인증도 내 주고, 받 으면 여러가지 홍보도 해주고 그런다고 하는데, 저희 Y 같은 경우에는 내부적으로 있는데, 그것을 인 증을 받아야 하나, 귀찮기도 하고,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또 인증받고 나면 다른데서 울궈먹기도 하고. 이런 점 때문에 그렇게 환영하는 편은 아닙니다. 정 : 정책이란 원래 취지는 참 좋죠, 그런데 실제적으로 하는 것은 그 닥 좋지가 못하죠. 한 : 그 우리도 현장에서 안전문제, 강사 채용 등 지침서 정도만 줬어도, 우리 내에서도 그런 것 자체를 하고 있는데, Y같은 곳에서는 좀 탄탄하니까. 좀 덜하지만 올해는 해야 할 듯해요.

일에 있어 자기의 발상적 생각 교류의 창고가 필요하다 ! 정 : 선생님은 항상 일을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얼개를 짜고, 판단하고, 점검하는 자리에 있잖아요 저는 기획이라는 단어를 잘 안 쓰지만, 기획이라 하면 좀 경영적인 단어같고, 아까 이야기 했던 딱 딱하고, 의도성을 갖고 있는 것 같고, 그런 활동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단어인 것 같고. 기획이라기 보다는 그 용어를 어드바이저, 매개자 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고, 일하는 사람인데, 매개를 어떻게 잘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죠, 또 프로그램 짜고, 아이템도 얻고 해야 하는데, 그런 자기만의 창고 있는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혈 받는게 있는지. 생각의 교류의 창고나 할까요? 한 : 직장 내에서 얻는다 이것은 좀 빼 놓고. 저 희는 Y경우는 인턴 6개월-1년 과정을 하면, 선배들 이 했던 것을 3-4년을 하면 간사가 되요, 그때부터는 맨땅에 해딩 하면서 해야 되는데, 저는 몇 년 동 안은 밑천을 썼죠. 학교 때 생각했던 것들을 시민단체 쪽에서 해보는 것이었죠. 그래서 지역의 네트 웍을 찾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 저기 찾아다니고 있어요. 개인적인 교류가 되는 것이죠.

정 : 나도 다 쓴 것 같아요. 아이템이나 아이디어라는 것이 개미처럼, 싹 모았다가. 채우다가, 쓰고, 또 채우고... 이런것이 지속적으로 채우고 쓰고 했는데, 비공식적이고, 더 문화적인 만남 이 런 것들에서 채우고. 계모임 성격도 아닌 것이, 교류가 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죠. 저도 이런 부분이 필요한 것이죠. 공식적이지만, 비공식적인것 같기도 한 이런 만남 말이죠. 한 : 아이템을 얻는 개념도 아닌 것 같고, 맨 날 만나는 사람만 만나면, 재미도 없잖아요. 특별히 밑천을 제공받는 것, 지금 일한 지 8년 정도, 1년 동안은 시민운동팀에 있었고, 사회교육팀 으로 해서, 평생교육 팀에 있다가, 청소년과 어린이 평생교육 프로그램쪽으로 운영하다가, 수련관으 로 오면서 청소년 문화교육을 하고 있는데, 크게 보면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유사한 일들은 한 것 같 아요. 정 : zone 문화적 개념에서 존 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 서로 도움이 될 수 잇을 것 같아요. 시설 연계 존을 설정해서, 북구 존, 남구존, 광산구존 등 이렇게 한 것 같은데, 시설 간의 존이 아 니라 문화적인 개념, 존에 대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한 이후에 바뀐 거 같은데. 존 느낌이 불곰 생 태를 봤는데, 먹이때문에 영역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선 긋듯이 그런 개념은 아닌 듯 하고. 구 역이라는 의미보다는 약간 유동적이면서, 거점스럽고, 그런 식으로 청소년들의 존에 대해서 생각 해보세요.

문화활동가들 ! ‘생태’의 원리인 유기적이며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 공동의 선을 향해 서로에게 흐르는 에너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있다. 정 : 제일 고민하고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고 있는 부분. 꺼내서 왔을때 저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댈 수 있는 부분이 뭐가 있나. 가장 맘에 두고 있는 고민. 저는 제일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앞서 이야기 했는데, 뭔 일을 하다보면 틀로도 안되고, 형식이나 이런 것도 중요하잖아 요. 실제적으로 일을 풀아가는데에 있어서, 틀은 필요 없고, 내용적인 것에만 합해야 하는데. 이 제는 프로그램 짜면 금새 짜거든요. 그런데 그 자체는 이렇게 해야하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공 부한다고는 하는데,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하나 등등등


한 : 개인적으로나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가 고민이고, 시민운동을 한다고 YMCA에 왔는데, 그동안 뭘 했나라고 생각하면, 처음에는 사회가 좀 바뀌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그때는 어린 생 각으로 사회를 조금은 바꿔보자. 어린 생각에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Y는 파 트가 나뉘면, 좀 매우 틀려져버리거든요. 그 파트를 넘어오면서 부터는 애들, 청소년들, 내가 낳아서 키울 아이가 내가 살아온 세상 보다는 더 좋은 세상이기를 만드는 것이 내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내 가 살았던 것처럼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자신이 선택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애들한테 그것을 심어줄 수 있도록. 예전에 제 명함에 제가 일부러 써 넣은 직함?인데요. 에코라이 프스타일리스트-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삶,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애들한테 그런 것 을 가르쳤어요. 5년 동안 했거든요. 다른 파트로 넘어가면서, 청소년 문화파트 쪽으로 넘어오면서, 애들이 문화든, 생태든 어떤 문화환경안에서든, 청소년들이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주체적인 삶 을 살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죠.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지침이 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 칸트가 그랬나, 루소가 그랬나. 자기 애가 닭장에 있더라도, 닭장에 넣어놔도 인 간이기때문에 인간적으로 자라날 것이다 라고 했다던데, 결과는 못들었지만. ^^ 애들은 문화교육이 든 뭐든 간에, 그냥 냅두면 깨벗겨서 밥만 먹여주면, 애가 이상적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인 가라는 의문이 들죠. 정 : 저도 아까 생태적 이런 것에 관심이 있거든요, 문화거리 조성 한다고 거리가 잘 조성이 되나요? 잘 안되요. 자연적인 질서가 만들어질 것인가? 그것을 조정하고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죠. 내가 선생님이라면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지만, 자연적인 것 속에서 원리를 발견하고 스스로 체화하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그래서 저는 여기에서 매개라는 개념이 계속 생각나는 것이죠. 문화 에 대한 정의를 홍어 쓴 작가한테 “문화는 만들어낸 모든 것이 문화다 동물은 냅 두면 아무것도 안 만들지만, 본능에서 살짝 벗어나는 것이 모든 것이 문화다” 라고 말하더라고. 본능이라고 하는 자 연에서부터 살짝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청소년도 살짝, 작용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 생 각하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그것을 건들어주고.. 어떤 사람이 저한테 너무 착하게만 활동 한다고 누가 그러던데. 때로는 그런 용기가 필요한 거죠. 갈등을 조장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안에 비 극적, 갈등을 포함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준다. 한 : 짧으면 4학년 좀 길면 6학년. 예체능으로 갈 애이거나, 공부에 관심이 없거나, 아주 잘해서 보상적 이거나. 이러 애들이 수련관이나 수련관 프로그램을 이용하죠. 캠프를 진행하다보면 이것이 일시적이 라는 것을 애들도 알고 있어. 애들도 일단 캠프 기간 내내 우울하거나, 제약된 조건 하에서 잘 살아가 는 애들도 있고. 이게 전체적인 변화없이, 생태교육을 한 들, 돌아가면 마찬가지인데, 뭔가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고, 그렇게 한 들 돌아가면 똑같아지는데. 그나마도, 안하면 안 될 거 같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있죠.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요. 우리처럼 하는 것보다, 문화의 종류? 문화존이나 뭐건 간에, 자 본이 있는 곳에 가면 선택의 폭이 넓다.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유스퀘어를 가면 특별하게 문화존을 만 들지 않더라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공간이 가능한 곳이 얼마든지 있다. 또 문예회관 공간에

영화관, 쇼핑몰, 등등을 설치하면 사람들이 모여들텐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매주 일요일마다 체험공간을 열고, 막노동하면서 무엇을 하고 할때는 나름 그 즐거움이 있고, 또 그 안에서 하는 아이 들의 재미 등을 생각하면 안할 수도 없는 것이구요. 정 : 어차피 일이니까. 또 한편으로 그러면서. 반복되기도 하고 한 :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하고, 차이가 있다면, 거기는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고. 여기는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메리트가 있으니까. 애들도 폭스존 가면 청소년들이 이번에는 몇 명이나 왔는지. 그 쪽에서 도 애들을 꼬셔요. 부스 하나만을 운영하면 되는 것도 있고. 결국 애들은 그런 곳에서 돌아오기도 하 고 그렇죠. 정 : 우리가 하는 일들은 비교해서 더 가치지향적이고, 더 공익적이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더욱 질적 인 고양을 누리고, 그것을 경험하도록, 그 이상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 어야 한다. 아이들이 소비활동을 통해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더 많이 할 수 있고. 그런 의 미에서는 혼자는 힘들어요. 그런 생각창고를 같이 공유해야 한다는 것. 공간을 떨어져 있지만 그 런 창고를 만들고 싶어요.

의무적 질문: 성장을 했는데, 그 성장을 한 8할의 바람?, 에너지? 에너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것을 공명심이라 해야 하나? 그것 때문에, 공익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 사는 것 더 나은 것, 다수를 사는 것.. 일반 공무원, 회사원이 안되고, 그것을 다 글쎄요 하고 내가 왔던 것.. 나는 아직 젊은데, 벌어먹고 사는데 연연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했지. 그 사람들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도 있고. 우리는 실무자지. 우리는 시민운동단체의 실무자 인 것 같고 이렇게 사는 것도 좀 죄스럽기도 하고. 폼나게 사는 것 : 자아도취지만, 남보다 벌어먹는 일에 골몰하지 않고, 사는 것. 에너지의 원천은 튼튼한 체력!! 인 생 의 8할 ? 그런 대답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비전, 정체성 등등 이 있는 내공 깊은 사람이 해야 될 것 같은데?


내가 마중물이 된다는 것은 마중갔다가 올라온 물과 섞여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안타까움 보다는 뽐뿌질로 만들어내는 물길에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마중물? 마중나가는 물, 시골에서 펌프 할때 마중물~ 내가 하는 일이, 스타일리스트, 코디네이터, 여러가지 생각해 봤는데, 애들한테 내가 똑같을 수 없지 만, 내가 지나온 것을 전달해주면서, 내가 해봤더니, 던져주고, 애들이 던져내는 것을 같이 끌어서 가 고... 본인은 한바가지 물이지만, 길잡이 하고...

“동심(童心)으로 동심(同心)되다” 도깨비어린이도서관 사무국장, 임미숙 임미숙(32세)씨는 광산구에 있는 도깨비어린이도서관에서 사무국장과 동화모임 강사를 맡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 이들에게 좋은 책을 골라 주어야 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보다 더 많이 배우는 것 같다고 얘기한다. 아이의 입장에 선다는 것,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바쁜 일상에서 까맣게 잊고 살았던 어릴 적의 자신을 동화 에서 발견하고 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또 세상과 소통한다. 그래서인지 항상 아이처럼 해맑은 눈으로 사람들을 대한 다. 절로 동심에 빠져들게 된다.

코디네이터는 펌프질 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 사이에서 애들 꼬시는 사람이고, 청소년한테는 그 이외는 어필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의도한 데로 청소년은 따라오지도 않고, 일단 던져주고. 그게 진짜 고수, 의도를 숨기고, 은연중에 나가는 것이죠. 애들한테도 오해사고. 문화계통에서는 경험 이상의 스승이 없다. 사람한테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의도를 앞세우면, 깨지잖아요. 두번째는 의도를 좀 숨기다 보면 개판이 되고. 세번째는 경험속에서 의도를 경험속에서 녹여내야 잘 할 것 같고.

스스로위원회는 좀 생각해볼만한 것 같아요. 청소년 동원 차원이 아니라, 더 넓은 차원에서 생각을 한단 말이죠. 그 내용을 만드는 부분은 거점을 만들 고, 연계도 시켜주고 싶고, 스스로회는 많은 것을 시키니까, 섭외 홍보 다 하다보니까 넘 힘든거야, 이거 이거 해 놓고, 우리가 자원봉사 운영하는 애들도 아니고, 문화기획단 해서 문화존만 해봐라 했더니, 지들 평가가 다양한 것을 하고 싶은데, 자기들은 차원 높은 것을 하고 싶다는데, 청소년축제를 해볼래 했더니 엄청 고민을 하더라고요. 길을 주고 그러면 애들이 하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3학년을 넘어가질 못하더라 고 꼼지락 문화기획단은 대학생들이에요. 그쪽까지 가게 되기가 힘들더라고요. 오랜만에 다른 곳에 계신 분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 인터뷰장소 : 도깨비어린이도서관 // 인터뷰시간 : 2007.3. 6 pm 3:00 ~ 5: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우영


아이와 부모가 함께 배우는 도서관 정 : 도깨비어린이도서관은 언제, 어떤 계기로 만들어졌나?

정 : 보람이나 느낀 점이 있다면?

임 : 광산구 지역 시민단체인 광산시민센터 회원들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는 바람에 자발적으로 만들게 됐다. 책 과 책장, 컴퓨터 등을 기증받아 도서관을 꾸미고, 지난 2004년 5월 처음 문을 열었다. 인근에 신가도서관(구립)이 있지만, 보다 가까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그런 곳 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책도 보고 놀이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동네도서 관이 필요했다.

임 : 동화를 보면서 아이와 함께 커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내 아이만큼은 책과 친해질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상에 묻혀 살다보면 자꾸 이런 생각을 잊고 부모로서의 입장만, 부모의 욕심만을 앞세울 때가 발생하게 된다. 내 아이의 연령대에 맞는 동화를 접하면서 ‘지금 내 아이가 생각하는 것, 관심 있는 것들은 이런 거구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대화하려고 노력하게 됐다.

정 : 도깨비’라는 이름이 특이한데

정 :아이들도 책을 좋아하나?

임 : 아이들한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를 생각하다 결정하게 됐다. 도깨비는 동화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임 : 큰 애는 책보다는 노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책을 자주 읽어주는데 스스로 책을 찾지는 않는다. 주변에서 엄마의 노력에 비하면 의외라는 반응도 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강요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언젠가는 ‘책이 재미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거라 믿고 있다.

정 : 여느 도서관에 비해 책이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임 : 많지는 않지만 신간서적을 매달 구입하고 있고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선호하는 책들은 거의 대 부분 비치되어 있다. 보통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전집을 구매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도서관에서는 낱권구매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전집은 아이들에게 괜한 부담감을 안겨줄 수 있고 불필요한 책들은 묵혀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정 : 도서대출 외에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임 : 동화 읽는 엄마모임, 종이접기, 전래놀이, 동화 구연, 아빠와 함께 하는 별자리여행(천체관측), 엄마와 함께하는 놀이모임 등이 있다. 정 : 부모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많은 것 같은데 임 : 일반 문화센터나 학원처럼 단순한 기능습득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닌 아이와 부모가 함께 부대 끼면서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장을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아이들의 독서지도뿐만 아 니라 사회성 발달에도 도움을 준다. 또 부모들에겐 올바른 아이 지도에 관한 정보공유의 장이 되기도 한다. 가령 놀이시간에 아이들끼리 싸우면 엄마들의 대처방법에 대해 서로 얘기를 나누고 올바른 지 도방법을 스스로 찾아나가기도 한다.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와 소통하기 정 : 동화강사로 참여하게 된 동기는? 임 : 여섯 살과 세 살짜리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동화책을 선택하고 읽어줘야 하는데 스스로가 동화 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동화와 독서지도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

문화체험으로 책과 친해지기 정 : 좋은 독서지도 방법을 소개한다면? 임 : 아이들 키만큼 만한 전집을 안겨주며 ‘언제까지 다 읽어야해’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부담만 느낄 것 이다. 자칫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게 무엇보 다 중요하다. 가령 <신데렐라>를 읽기 전에 뮤지컬을 함께 감상한다든지, <자연관찰도감>을 읽기 전에 가까운 산이나 들에 나가 개구리와 곤충들을 보러 간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정 : 쉽지 않은 방법 같은데 임 : 물론 개개의 부모들이 혼자하기엔 쉽지 않다. 쉬이 지칠 수 있고 여러 가지 한계도 많다. 그래서 동 화 읽는 모임 등을 구성해서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아이들도 또래 친구들과 함께 경험하는 것을 더 흥 미 있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연이나 프로그램을 접 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가까운 문화시설에서 이러한 문화체험들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 : 문화시설활동가네트워크’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임 : 왠지 전문가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좋은 사례를 접하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한편으론 ‘네트워크’ 하면 나도 뭔가를 내어주고 공유해야 할 텐데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또 애 둘을 키우면서 혼자서 도서관 상근업무를 맡고 있어 잘 참여할 수 있 을까라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정 : 그런 고민도 함께 나누고 풀어나갈 방법도 함께 찾는 게 진짜 네트워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문성과 공공성 확대를 위하여”

지역주민의 생활문화 거점

광산문화예술회관 기획공연, 김선

용 : 광산문화예술회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포근한 얼굴로 광산문화예술회관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선 선생님. 그에게서 문화시설에서 일하는 공무원의 역할과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인터뷰 중에 여타 문화시설과 마찬가지로 광산문화예 술회관도 공휴일에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나름의 방식을 통해 문화시설 활동을 개척해온 김선 선생님의 노 력이 지역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인터뷰장소 : 광산구문화예술회관 // 인터뷰시간 : 2007.3.13 pm 3:00 ~ 4: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김용재, 정우영

선 : 우수 작품을 유치하거나, 대관사업을 주로 하는데, 학교축제, 세미나, 일반 행사, 어린이단체 뮤지컬, 초청 공연, 전시회가 이뤄집니다. 광산지역이 문화면에서 있어서 타 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어, 이러한 환경을 바꿔보자는 취지로 광산문화예술회관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2002년 8월 14일에 국비 20억, 시비 12억, 구비 38억, 총 70억을 들여 준공되었죠. 지어진지 5년이 됐습니 다. 광산문화예술회관이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는 영화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문화예술회관이 그 역 할도 대신하고 있어요. 정기적으로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에 영화를 상영하는데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특히 여름방학에는 특집으로 영화를 상영합니다. 전시의 경우 전시공간이 부족해 로비를 이용해 그림 전시를 하고 있고, 이 지역의 대표적인 미술전인 어등 미술전도 여기에서 개최됩니다. 용 : 기획공연은 하나요? 선 : 기획공연은 3~4천만 원의 비용이 드는 큰 사업이어서 실제적으로 힘듭니다. 수지타산이 안 맞기도 하고, 광산문화예술회관 공연장이 548석밖에 안되어서 규모면에서나, 또 지리 적 접근면에서나 힘듭니다. 예들 들어, 만약 5천만 원짜리 공연을 기획할라치면 입장료가 10만원을 넘게 됩니다. 지역민이 관람하기엔 어렵죠. 간혹 서울에서 공연문의 전화가 오는데 문예회관 좌석 수 만 물어보곤 바로 수화기를 놓는 경우가 많아요.. 용 : 타 문화예술회관과의 연계성은 있나요? 선 : 구체적인 교류는 없습니다. 온라인상으로 접촉은 하지만.. 광산문화예술회관과 비슷한 시설로 남구종합문화예술회관과 시립문화예술회관이 있는데, 이 두 곳이 전부입니다.

공공성과 수익성의 딜레마 용 : 주변에서 수익에 대한 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선 : 구의회에서 회관에서 일하고 있는 인력에 비해서 수입이 적다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관의 특성상 공공성이 강해 수익을 논하는 것은 무리죠 회관의 운영비대 수입 비율은, 좌석 500석 미만의 경우 2%대이고, 큰 도시의 800~1,000석 규모의 문예회관도 6~7%대에 불과합니 다. 시 문화예술회관의 경우 2005년 문광부 통계를 보면 7%이다. 수익률이 높은 수도권과 비교되는 수치이죠. 유치 등을 통해 수익을 내보고 싶어도 좌석수가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문화예술회관의 기획, 시책 등을 관장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마이너스 공연은 부담이고 운신의 폭은 좁고.


전문성 확보가 과제다

“미술교육은 생명교육, 역사교육”

용 : 문예회관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면...

문화예술공동체 터 미술교사, 김화순

선 : 문화 수도’, ‘문화수도’ 하는데 실질적으로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무원들은 문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아요. 전에는 문예회관에서 상영할 영화를 선 정하기 위해서 일이 밤 10시에 끝나도 영화관에 직접 가서 영화를 관람하고 선정했어요. 업무가 늦게 끝나다 보니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기 힘들기도 한데.. 여기서 일하다 보니 문화 프로그램과 활동에 대 한 관심은 늘었어요. ‘문화’와 관련된 지식을 공무원들이 자주 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화교육프로그 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전문인은 아니지만 3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느낀 점이 공무원들에게는 전문성 이 없다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예술전문인이 아니기도 하고, 순환보직 시스템으로 인해 노하우 축적 에도 한계가 있구요. 광산구가 직접 운영하는 문화시설로는 회관과 구립도서관 등이 있습니다. 인력 은 시설관리팀에서 나오는데 전문성을 위해서 문화전문 사업소를 따로 둘 필요가 있어요. 관내 공무 원 문화 인력이 시설관리팀이 아닌 문화관광팀에 소속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용 : 문화시설활동가 네트워크 사업에 의견이 있다면 선 : 문화시설의 인적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에 찬성합니다. 워크숍을 비롯하여 이후 모든 만남이 인적인 교류를 우선으로 진행해야 해요. 네트워크 안에서 우선 친숙한 정을 먼저 쌓아 야죠를 선정하 기 위해서 일이 밤 10시에 끝나도 영화관에 직접 가서 영화를 관람하고 선정했어요

사람을 만날 때면 사시사철 복사꽃처럼 환하게 웃어주는 이. 그래서인지 항상 만나고 나면 괜히 희망이 생기고 뭔가 절로 풍 성해지는 느낌을 주는 이를 만났다. 인터뷰는 일주일에 한 번 자원교사로 나가는 월곡지역아동센터에서 신나게 진행됐다. 미 술수업 시간 전에 잠시 짬을 내주셨다. 5살 때부터 화가를 꿈꿔왔던 그래서 너무나 당연히 화가로 살아왔다는 김화순 선생 님.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가는 발걸음이 오늘도 힘차다.

// 인터뷰장소 : 월곡지역아동센터 // 인터뷰시간 : 2007.3.29 pm 3:00 ~ 4: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김용재, 정우영


무엇을 얻어가는가 용 : 문화중심도시사업에 대해 한 말씀

용 : 주변에서 수익에 대한 말들이 있을 것 같은데...

화 : 광주에서 진행되는 많은 문화행사들이 광주의 색깔을 내야 하는데, 전혀 아닌 행사들이 많아요.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참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돼요. 여성미술가단체 등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모아서 의견을 제시하고, 이들의 힘을 모아 일을 진행하고 싶어요. 많은 프로젝트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기획력만 앞세워 추진되 는 경향이 있어요. 지역의 특성을 바탕으로 광주시민들이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참여해야 되거든요. 사람들을 모으고 지원해주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해요.

화 : 미술프로그램들은 굉장히 많은데 문제도 많다고 생각해요. 기획력은 너무 좋은데, 애들이 실제 얻어가는 것보다 결과물을 중시하는 것 같아요. 강사들은 대개 결과물에 대한 포장을 잘해요. 첨 에는 좋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참가하는 애들은 잠시 거쳐 간 것으로 생각해요. 실제 중요한 건 진행과정이거든요. 폭넓은 길을 제시하고 애들이 스스로 진행해 가는 과정을 지 켜봐야 해요. 애들이 여기서 ‘무엇을 얻어가는가’가 진정한 결과물이죠. 결과물을 과장해서 포장 하는 것은 교육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봐요. 어른들의 입장에서 바라는 결과물을 얻으려는 욕심.

용 : 미대를 나오신 걸로 아는데요.

용 : 앞으로 하고 싶은 기획 사업이 있다면...

화 : 다섯 살 때부터 꿈이 화가였어요. 그래서 당연히 화가의 길을 걷게 됐어요. 전남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당시 어린이미술교육이 획일화 돼 있다는 느낌을 가졌는 데 주변에 아이들을 상대로 자연스러운 미술교육을 시도했어요. 실은 작가적 목표가 있었지 만 오랫동안 미술교육을 하다 보니 사명감도 커지고 이것 자체가 이제는 목표가 돼버렸네요.

화 : 아이들과 함께 주변 돌아보기를 해보고 싶어요. 사람 돌아보기. 주변에 많은 사람의 삶을 들여 다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거든요. 저 는 환경운동을 볼 때 인권을 중심으로 생각해요. 어른들 욕심보다 애들이 얻어갈 것을 챙기고 싶어요.

용 : 타 문화예술회관과의 연계성은 있나요? 선 : 구체적인 교류는 없습니다. 온라인상으로 접촉은 하지만.. 광산문화예술회관과 비슷한 시설로 남구종합문화예술회관과 시립문화예술회관이 있는데, 이 두 곳이 전부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 미술 용 : 그동안 미술교육을 해오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선 : 졸업하고 지금까지 어린이 미술교육을 쭉 해 왔어요. 미술교육은 단순히 기능교육이 아니다. 교육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키울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애들이 이 교육을 통 해 문화를 아는 사람으로 될 수 있을까. 교육할 때 아이들에게 물어봐요. ‘화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놓고 왜 이런 작품을 그렸을까’, ‘조상들은 왜 이런 문화유산을 남겼을까’. 아이들이 좋은 질문을 가끔 해올 때가 있어요. 단순히 미술 실력을 늘리는 것이 아닌 문화에 대한 시각과 미학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해 줄 수 있어야 해요. 대개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림을 그리다 접는 경우가 많아요. 미술교육은 단순히 그림교육이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는 교육, 역사교육이 되기도 해요. 소중히 여기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이 생기죠. 작은 식물 세밀화를 그리다 보면 평상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아름다움을 깨 닫게 되 고 주변 친구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까지 발전하거든요. 여러 가지 방식을 연구하고 시도하고 싶어요.

용 : 마지막으로 문화시설활동가네트워크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은데요. 선 :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들은 다양하겠지만 우선 서로를 알아가는 게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잘됐으면 해요.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고 또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마다의 빛깔이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루듯”

지역에서 자라는 아이들

월곡지역아동센터 책임교사, 안영숙

김 : 월곡지역아동센터 신나는 교실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셨는지요?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아이들의 삶이 행복한 ‘신나는 교실’을 꿈꾸는 사람. 아 이들

안 :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의 생각이 살아 숨 쉬는 교육, 아이들 스스로 자기의 삶을 찾아가는 교육이란 자신의 마음을 맘껏 발산하고 표현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믿는 사람. 안영숙씨는 저마다의 빛깔이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루듯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교실

김 : 지역아동센터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을 키우고 있었다.

안 : 지역 아동센터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역 내 저소득 맞벌이 가정 자녀들의 방과 후를 책임지고자 지역 주민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 만든 공간입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돌보고, 아이들이 즐겁게 생활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요.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생활지도, 숙제, 독서 지도 등을 일상적으로 진행합니다. 매일 오후엔 간식을 함께 먹으며 한 식구처럼 따뜻한 사랑도 주고받는 답니다. 하지 만 우리 지역아동센터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이 사랑을 알고 사랑 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월곡지역아동센터 ‘신나는교실’이 문을 열 수 있도록 책과 책상, 그릇 등을 모 아 주었던 지역 주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잊지 않고, 작은 것부터 베풀고 더불어 나누는 삶을 자연스럽 게 배우고 익히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물품 후원, 간식 후원과 더불어 매월 정기 후원금 도 모아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들이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는 기쁨을 배우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 인터뷰장소 : 월곡지역아동센터 신나는교실 // 인터뷰시간 : 2007.4.2 월요일 pm 7:00 ~ 8: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김용재, 정우영

김 : ‘신나는 교실’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있나요? 안 : 현재 45명의 초등학생 아이들, 세 명의 실무교사 선생님, 그리고 자원교사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십 니다. 김 : 주로 어떤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는지요? 안 :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기초학습 프로그램과 종이접기, 동화읽기, 미술, 스포츠댄스 등 문화 프로그 램을 일주일 단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마다 마술이나 요리, 영화 보기, 천연비누 만들기, 황토 염색하기 등 다채로운 특별수업을 합니다. 또 한 달에 한 번 넷 째주 토요일, 놀토에는 자연을 만끽하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산이나 강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가고 있습니다. 김 : 놀이나 문화 체험활동 분야의 프로그램이 많은 것 같은데 이유라도? 안 : 아이들이 정말로 신나게 생활했으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옛날에 비 해 아이들이 많이 바빠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면서 놀 수 있는 문화활동, 놀이, 체험활동 등을 일상적으로 진행하면 좋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매일 자유시간이면 아 이들은 가까운 놀이터나 공원으로 뛰어갑니다. 정기적인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윷놀이, 칠교놀이, 공 기놀이, 산가지놀이도 해요. 뭐니 뭐니 해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요리 활동인 것 같습 니다. 요리 활동을 하는 날은 결석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거든요.


지역에서 자라는 아이들 김 : ‘신나는 교실’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안 : 아이들 글쓰기와 국어 수업을 담당하고 있구요, 아동 및 학부모상담, 급식, 간식 준비, 그 외 책임교사로서 구청이나 연계기관과의 여러 가지 실무와 회계를 맡고 있습니다. 김 : 하루가 매우 바쁠 것 같네요. 안 : 늘 그렇지요. 시간이 아주 잘 가는 느낌. 시간 감각이 없을 만큼 바쁜 날도 있어요. 하지만 언제라도 오시면 맛있는 차 한 잔 잘 대접할게요. 간식 시간을 맞춰서 오시면 더 맛있는 것도 드릴 수 있구요.

사람을 살리는 글쓰기 김 : 언제부터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안 : 문화 예술교육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글쓰기 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니까 약 5년 정도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학교 때부터 동아리활동, 대학문화운동을 해왔던 과정이 아이들 글쓰기 교육과 접목되면서 관심이 커지고 구체적인 활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신나는 교실’에서 직접 여러 가지 활동 프로그램을 짜면서 고민이 깊어졌지요. 누구든지 이런 환경에 있다 보 면 문화예술교육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 든 교육이 이뤄져야하는데 아이들의 생각이 살아 숨 쉬는 교육, 아이들 스스로 자기의 삶을 찾아가는 교육은 자신의 마음을 맘껏 발산하고 표현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 밖에 없거든요. 김 : 살아 숨 쉬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안 : 저는 이오덕 선생님을 좋아해요. 그분이 아이들과 함께 쓴 글과 시도 무척 좋아해요. 이오덕 선생님 의 글과 교육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는데, 특히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라는 책은 제게 큰 충격을 준 책 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자기의 삶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만 제대로 이뤄 져도 아이들이 쉽게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에 감명을 받았지요. 사람 을 살리는 글쓰기라... 갑자기 멍해진 느낌이랄까.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사람을 살리 는 글쓰기’ 라는 말이 내 글쓰기 교육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에 관한 글을 여기 보여드릴게요. “글쓰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데 있다. 곧, 아이들의 삶을 가 꾸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소박하고 솔직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할까? 풍부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할까?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게 할까? 사람다운 행동을 하게 할까? 창조하는 태도를 가지게 할까? 참된 사람, 민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을 기르는데 글쓰기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김 : 글쓰기 교육의 철학이랄까, 그런게 담겨있네요. 안 : 예. 이오덕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떤 생각이든 솔직하게, 아이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쓰기만 제대로 이루어져도, 나와 우리들의 삶이 소중해지고윤택해 지고 아름다워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신을 표현하는 모든 활동이 중요해졌지요. 글을 쓰 고, 내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또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 보고, 또는 그런 노래를 목청껏 불러 보고, 몸으로 표현해 보는 것. 이것 이 바로 행복의 원천이고, 그것이 또 살아있는 삶이고, 더불어 사람을 살 리는 교육 이지 않나 싶어요. 기쁨, 슬픔, 속상함, 부끄러움. 어떤 것이든 다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마 음이잖아요. 나를 표현하면서 나와 내 주변의 소중한 관계를 알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 는 아이들이 되길 바래요. 글쓰기를 바탕으로 행복한 문화예술교육을 하고 싶어요. 사람을 살리는 교 육이요. 아이들이랑 늘 실랑이 하면서도 내 마음 속 욕심은 일곱 색깔 무지개인 것 같아요. 무지개를 잡으려다 저물도록 산만 넘는 건 아닌지 김 : 개인적으로 문화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안 : 내 삶의 토대이자 자양분이 아닐까요. 동시에 또한 내 삶의 여러 가지 빛깔이 문화겠지요. 아이들과 지내며 만들어가는 내 일상이, 우리들의 모습이...우리들이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문화라고 생각 해요. 김 : 어떤 문화도시가 되기를 바라는지? 안 : 사이트나 정보는 많은데, 의외로 문화도시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것 같아요. 많은 시민들의 생각이 더 폭넓게 수용되어 펼쳐졌으면 하는데 아직은 먼 느낌이랄까. 어느덧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라는 말들 이 일상적으로 쓰이고 관련된 사업도 많이 펼쳐지는 것 같은데 아직 시민으로서, 문화활동가로서 가 까이 다가갈 구체적 ‘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문화 관련 사업 몇 개를 펼치느 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든지 문화중심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밑바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치 5 · 18의 경험에서 일구어 낸 공동 체 같은 그런 거. 민주화의 성지 광주라는 말에도 가슴이 떨리는 자부심과 같은 거요. 한 두 사람의 생 각이 아닌 많은 시민들의 생각을 모아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를 토대로 한 문화도 시를 건설한다면 머지않아 문화중심도시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향 광주, 아름다운 문화도시의 시민이라는 자부심과 더불어 민주화 성지의 시민이라는 자긍심까지 더해 져,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문화중심도시 광주를 꿈꿔봅니다.


경계가 없는 네트워크

“삶과 미술, 작가와 대중 사이에 다리 놓기”

김 : 문화시설활동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데?

광주광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김민경

안 : 여러 현장에 몸담고 있는 수많은 문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구성은 의미가 많다고 봐요. 여러 문화 활동가들이 스스럼없이 만나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서로 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 겠지요. 그렇게 함께 하면서 스스로가 깊어지고, 해볼 만한 문화 활동의 범위도 넓게 확산되겠지요. 하지만 우리 삶이 문화이지 않습니까? 네트워크 구성을 시설 활동가에 국한시키지 않고, 현장 곳곳에 서 열심히 문화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 하면 더 좋겠어요. 문화는 몇몇 시설 종사자뿐만 아 니라, 모든 사람이 하고 있고 또 해야 하는 거라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문화 시설이라는 표현이 마음 에 안 들어요. 네트워크의 경계를 넓혀갔으면 해요. 어느 자리, 어떤 곳에 있는 사람이든 가리지 말고 함께 아름다운 문화를 가꾸고 널리 펼치면 좋겠어요.

김민경 학예연구사는 광주광역시립미술관 금남로 분관에서 일하고 있다. 흔히 큐레이터라고불리우는 일로, 미술사나 작가, 작품, 문화담론 등을 연구조사를 토대로 전시기획 및 실행, 전시홍보, 기타 행정업무 등을 진행한다. 광주 지역 미술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갖고 작가 발굴 및 지원은 물론 전통화부터 새로운 영역의 미술까지 늘 문화예술의 흐름에 섬세한 촉수를 필요 로 한다. 동시에 공공 미술관으로서 보다 많은 대중이 미술문화를 향유하고 즐김으로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소통의 매개자로서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하며 실험하고 있다.

// 인터뷰장소 : 광주광역시립미술관 금남로 분관 // 인터뷰시간 : 2007.3.12 pm 3:00 ~ 5: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천윤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김 : 앞으로 신나는 교실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안 :이곳 에서 지내면서 여러 자원교사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힘을 모아 많은 활동들을 했는데, 함께 기획 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참 즐거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요. 하지만 시간에 쫓겨 많이 놓치고 살아요. 아이 들과 함께 연극을 해보고 싶어요. 사실 저는 초등 학교 학예회 때 외에는 한 번도 연극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데, 작년부터 아이들과 연극을 해 보고 싶 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연극 주제를 잡아 대본을 창작하고 역할을 나눠 연기 연습을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지각 대장 존>이라는 동화책으로 간단한 역할극을 해 보고 나서 제대로 된 연극을 해보자라는 생각. 예전 에 아주 간단한 걸 해봤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그리고 또 아이들이랑 동화책 쓰기, 책 만들 기도 하고 싶어요. ㅎㅎ 마음이 앞서네요.


생활인으로서의 그녀, 큐레이팅은 삶안에서 계속된다. 천 : 즘 어떻게 지내세요? 김 : 애 키우면서 산다. 하하. 벌써 5학년이야. 될 수 있으면 집에 일을 안가지고 가려고 하고, 야근 하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 집에 가면, 아이와 함께 밥 먹고 숙제 봐주고, 금세 일주일이 간다. 천 : 아이들 커갈 수록 부모들이 더 바빠진다고 하던데요. 김 : 생활에 잔손은 안 가는데, 엄마든 아빠든 부모가 바라보는 것에 따라, 애들 방향이 달라진다. 그 때 가 중요한 거겠지. 그래서 시간 있으면, 미술관 많이 데리고 다닌다. 될 수 있으면 나 혼자 가지 않고 서울 갈 때 나도 전시보고, 애도 데리고 다녀. 남자 아이라 관심이 덜하고, 이해 못하고 집중은 안하지 만, 이제는 전시를 보고 그럴 때 가기 싫다고는 안한다. 우리 아이 보면서 어릴 때 교육이 참 중요하구 나 생각 많이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보면 데이트를 해도 갈 때가 없다고 한다. 영화나 카페, 술집 정 도일까. 돈 안 주고도 올 수 있고 분위기 있고 예술이 있는 미술관은 데이트 할 때도 안 온다. 하하. 어 렸을 때의 경험들, 다르게 보고 또 다른 방식의 삶의 체험이 결국 좋은 교육이 되지 않을까한다. 천 : 제가 아는 분도, 항상 아들과 같이 미술관에 다니시더라구요. 아들이 엄마 보다 커서 농담처럼 애인 같다고 놀리는데, 둘이 대화하면서 작품을 보더군요. 김 : 크면 가능하다. 전반적인 흐름 같은 거, 지난번에는 여름에 서울 갈 때 차를 가지고 가서 내려오는 길에 대전에 있는 미술관이랑 여러 지역의 공간을 들리면서 광주에 내려왔다. 항상 바로 내려왔는데 중간에 모험처럼 타 지역에 들려 미술관 들렸다 오는 게 아들에게는 매우 재밌는 경험이었나 보더라. 난 미술관 종사자이지만, 일반인도 꼭 학교 숙제 때문이 아니더라도, 일반 사람들도 여행하듯 즐기듯 이렇게 돌아다니다보면 시각 많이 바뀌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음악, 미술, 다른 예술도 같아. 많이 접 하고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환경이나 부모가 자녀 자라는 과정에서 해주어야 할 몫 인 것 같아. 성인 이 돼서는 잘 변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러한 시각 역시 하루아침에 맘먹은 데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요즘 애들은 빨리 자기 스스로 목표 의식을 갖도록 해줘야 해. 공부를 해도 왜 공부를 하느냐, 그런 것들을 빨리 심어주어야지. 뭐가 되든지, 운동가든, 댄서이든. 요즘 부모들은 대부분 관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더라. 너 알아서 크라는 것이나, 공부만 하라는 분위기는 아니더라. 미술 쪽에 서도 관심 있으면, 만화 잘하면, 운동 잘하면 어려서 재능 발견하려 노력하고 그렇게 돕더라. 많이들 그런다.

레스 없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나. 이 일은 적성에 맞다. 앉아서 공부만 하기보다는 돌아다니는 것이 나에게 맞다. 지금의 광주광역시립미술관이라는 곳을 지역 광주라는 곳에 기반 한 시립미술관 이라고 할 때 이미 그 안에는 일종의 바운더리, 환경조건이 정해져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공무원 신 분에 따른 공무원의 규정들이 있을 것이고, 예산을 포함한 행정들도 광주시와 직접 관련되어있다. 시 립이기에, 공무원 사회 범주제약이 많고, 예산도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큰 것만 찾으려고 하면, 영원히 못하고 꿈만 꾸다 좌절하게 된다. 그것만 보면 일할 맘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주어진 환경 내에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보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고 보고,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한다. 이를 테면 개인적으로 작가의 조그마한 가려움 긁 어주고, 어려운 작가 있으면 전시하도록 만들어주고, 그런 목표를 둔다. 천 : 중요한 부분 같아요. 어느 곳이든 특히 예술의 경우 공적 지원과 연관되어있기에 그 안의 조건들 에 의한 한계에 대해 갈등을 느끼는 사례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부분, 뭐랄 까 그런 매개자의 태도나 시각이야말로 꼭 필요치 않나 싶은데요. 선생님께서 그동안 시도하셨던 그 소소하다고 표현하셨지만 중요한 사례들을 좀 더 말해주실래요?. 김 : 금남 로 분관은 본관(운암동 문화예술회관과 함께 있다)과 달리 전시에 융통성이 있다. 작년 < 미술 관 카바레 전> 같은 경우, 작가선정의 한계는 있다. 모여라 해서 전시를 했을 때, 작가들이 자발적으 로 나서더라. 작가를 선정해서 진행할 때와 “이거 해보자” 의기투합해서 해볼 때는 이미 시작하는 태 도부터 다르더라. 이벤트 전시가 될 수도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시립미술관은 작가 발굴 지원도 해 야 하지만, 시민을 위해서, 시민을 위한 시각, 정말 미술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전시를 할 필요도 있 다. ‘모여라’하는 전시, 이벤트적 이고 지나칠 수 있는 전시가 일반 대중에게 훨씬 친근하게 다가 설 수 있다. 미술하면 개념적이고 심각한 것도 많다. 물론 그런 미술담론은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 나 일반대중을 관객으로 하는 미술관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면 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해야한다. 한 편으로는 대중적 문화 코드에 부합하는 흥미 있는 전시도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층적으로 작 가를 탐구하고, 소외된 것들을 꺼내는 것도 필요 하다. 일반 사립미술관이 다른 점이라면, 돈을 벌기 위한 전시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그 조건 속에서 오는 것들 많다. 예를 들어 우리도 관객 수에 대한 통계를 낸다. 시립미술관은 공공성을 지향하는 미술관으로서 관객 수를 꼭 목표로 삼지는 않지만, 그 러나 보다 많은 이들이 와서 함께 누릴 수 있는 예술, 그것이 인간의 삶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의 무가 있다. 특히 이 사회에서 미술이나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인간 삶에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고, 미 술이라는 분야가 한 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런 것을 많이 느낀다.

외부 환경적 조건에 대한 좌절을 넘어서는 작은 꿈과 계획이 소중하다. 천 : 그렇군요. 선생님 개인적인 관심사는 어떤가요? 김 : 이 일은 나에게 적성에 맞다. 일에 스트레스 받지는 않는다. 물론 소소한 관계의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과정이라고 본다. 전시나 사람 만날 때, 일로 만났을 때, 스트레스는 별로 없다. 스트

시·공간을 넘어선, 끊임없는 말걸기가 사람의 맘을 연다. 김 : 최근 에는 특히 어떻게 하면 이 공간을 알릴 수 있나 고민한다. 엽서로는 한계가 있어서, 개인적으 로 메일링 작업하고 있다. 우리 미술관 한번이라도 온 사람들 리스트 작성하고 일반인들에게 종종


이메일을 보내준다. 관심 있든 없든 보내주는데, 그럼으로써 이 사람들 한명 한명씩 시각이 바뀌어 간다는 걸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한달에 한 두 번씩 답변이 와요. 한번 은 전대 학생인데,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이 곳 홍보하고 싶다고 했다. 재일 동포는 우연히 이메일 주소 적고 갔었는데 소식 전해주니 너무 좋다 그런 짧은 메시지가 왔을 때 너무 기쁘다. 작은 것 하나 하나가 길을 열어간다. 현재 이메일 3천통이 넘는다. 어제도 하루 종일 새로 하는 전시 소개 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 것들이 크다. 큰 꿈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게 생각하면, 그런 것들 로 인해 이 공간을 알리게 되고, 사람들이 시립미술관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후에는 사람들이 전시 회에 오고...이런 것들.. 김 : 여기서 일하면서 느낀 게, 작가들과 대화해 보면 밖으로는 거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안으로 매우 순수하고, 오히려 사회생활 하는 사람보다 그렇다는 것이다. 몇 번 대화함으로써 그 사람의 다른 면 을 볼 수 있고... 왜 그런거 있잖아요. 무엇을 주지 않아도 통한다는 것, 은연중에 느끼면. 그랬을 때 조그만 보람도 느낀다. 천 : 그 작지만, 통할 때의 큰 기쁨... 정말 소중하죠. 선생님의 노력이 업무 성과로 보이지 않을지 모 르지만, 그게 얼마나 큰 힘이자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인지요. 공감합니다. 김 : 겉으로 포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포장보다는 속이 알차고 한 명이 와서 감동을 받으면, 그로 인해 시작이지 않느냐. 속이 알차고 포장이 잘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 한 우리 직원과 갈등이 발생한 적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점은 연중 전시를 돌려야 한다는 점이 다. 그 점에서는 과연 잘하고 있는가하는 회의가 든다. 천 :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요? 안 : 전시를 하나 만들려면 구상부터 일 년 여 걸린다. 구체적인 시간도 필요한데 분관에는 학예연구사 한명, 일 년에 크고 작은 전시 10회 정도 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짜깁기 식으로 전시 될 때가 있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도 있고, 작가선정이나 전시 등을 깊이 연구해서 하지 못할 때가 있게 된다. 인력 이 많이 있어서 정말 깊이 연구해서 좀 더 알차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많다.

지역 작가의 삶과 현실을 깊이 들여다 볼 때, 매개자의 역할도 보인다. 천 : 개인적으로 특별히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이슈나 주제 의식들이 있을까요? 김 : 이미 젊은 광주 작가들의 경우, 표면화하여 활동하는 작가군이 정해져있다. 그들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면, 한편으론 신진작가들의 지속적인 발굴이 매우 중요하다. 20대 그룹 작가들이 아마추어가 아 니라, 진짜 작가다운 프로가 드문 것 같아 많이 안타깝다. 그리고 밖에서 하는 전시가 연중 많은데, 그와 달리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 끌어내주는 작업이 역시 중요하다. 그런 작가들을 매일 물어보며 찾 을 수 도 없고 개인의 한계가 있더라. 밖에 나와 활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하루하루 밥 먹고 살기 힘들고, 가정도 있고, 오늘의 밥을 걱정 해야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작업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광주 뿐 아니라 어디에서나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전업 작가들을 위한 무언 가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이야기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안타깝다. 그러면 서 전시는 해야 하고 작품을 만들어 하고, 작품은 팔리지 않으니. 그러면서 미술해라 작업해라해야하 는 것은 모순인거 같다. 저희 같은 경우는 작품제작지원비는 없다. 일부 미술관에서는 조금씩 생긴다 는 데, 공식화된 작품제작지원비가 없다. 옛날 미술관 처음에 생겼을 때는 작품이 팔리기 때문에 작 품제작지원비 안주어도 수익이 있으니, 괜찮으나 지금은 미술관 전시란 사고 파는 개념이 없으니 경 제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 의아한 부분들이 연극을 보거나 공연 보면 출연료를 받는데, 작가는 작 품 하고 전시하는데 액자 만들고, 비용을 전혀 못 받는 다는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 생각해봐야할 부 분이다. 안 타까운 것들은 광주 같은 경우, 옛날 전통 남종화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학 교 한국화라는 것도 문인화 하나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 배출된다. 현재 문인화가 아마추어 형태로 취 미 활동하는 작품은 있으나, 진짜 남종화나 전통 한국화 등의 맥이 끊겨 가고 있다. 십년만 지나도 사 라져버릴 것 같다. 천 : 흠. 중요한 문제인데, 현실은 무척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어떤 대안들이 있을까요? 김 : 작년 부터 전통화에 관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보통 전통화 하시는 그런 분들은 드러나지 않게 조 용히 작업한다. 전시회에서 드러내지도 않고 대학 출신도 아니고. 옛날 분이라. 전시 기회를 마련해 드려야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 밖에 없는데. 안타까우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외부로 드러내게 하는 작업이랄까. 작가의 경제적인 면은 제도적으로 작품제작 지원비 같은 것을 마련해야 한다. 시민의 세금이지만, 제도적으로 마련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요 즘 창작스튜디오가 생겨도 아직도 작업실 찾기 힘들다. 창작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유휴공간들이 마련 되어야 하고, 재정적 지원도 있어야 하고. 이런한 것들이 커져가야 미술 발전 있지 않을까. 광주광역 시립미술관의 양산동 스튜디오는 1년 단위로 계약하고 재계하면 2년까지이다. 장기적으로 맘 놓고 작업 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이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에는 타 지역과 연계할 수 있도록 추 천을 해주거나 또는 밖으로 나가서 활동할 수 있도록 길을 찾아줘야 한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타 지역 발표의 장들도 마련하고 기회제공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천 : 시립미술관도 다른 기관과의 네트워크를 많이 맺지요? 김 : 전시 하나를 할 때도 공동기획, 후원, 제휴할 수도 있다. 언론사에서 후원받는 경우, 방송사는 광고, 전시할 때 광고가 2-3천만원이다. 후원한다면 홍보방송, 미술관 같은 경우 서울은 기획사에 끼워서 전시한다. 서울 블록버스터 전시가 광주에 오려고 하면 광주는 열외로 한다. 수익 보기 위해 전시하기 때문에 광고도 많이 한다.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보통 아는 대규모 전시 는 자체기획전시가 아니다. 근데도 외부일반시민들이 그 미술관이 자체 기획했다고 보는데, 사실은 외부기획사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고는 엄청 한다. 많이들 보러간다. 우리는 광고나 홍보를 안 하 니까, 광주광역시립미술관 본관이 운암동에 있는지도 모른다. 문화예술회관이라 말해야 간다. 우 리 가 전시 예산 열악하기에, 타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과 공동주최 하기도 한다. 거기 있는 작품들을


리가 전시 예산 열악하기에, 타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과 공동주최 하기도 한다. 거기 있는 작품들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예산을 절감한다. 예를 들어 다음 전시는 헤이리 금산갤러리가 북경 다산쓰에 지 점에서 여는 데, 그런 것들로 인해 북경과 연결되어 거기 작가가 헤이리에 전시하게 된다. 그 중간에 광주를 거치는 방식, 우리는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협조 받아서 전시한다.

문화적 삶은 물질을 넘어 삶을 풍요롭게 누리는 또 다른 시각이다. 천 : 그런 얘기 들었다. 타 지역에서 크게 흥행한 대형전시나, 공연들, 인디문화 등도 기본 관객이 들 지 않는다고. 매니아층도 거의 없다고 표현하더군요. 김 : 광주 에 바로크 전시가 오려고 했는데, 10만 명이 와야 하는데 손익분기점 넘는데, 강매를 하지 않 는다면 광주에서 얼마나 오겠는가? 우리나라에서 못 보는 전시가 된다면, 서울, 부산에서 오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반 광주시민의 생각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문화에 투자하는 시간을 내기 힘들지 않나. 정서상의 차이 같다. 서울 가서 보면, 전시를 보거나 뮤지컬 라이온 킹을 봤는데, 가격 싸지 않 아도 이미 전시가 몇 달 되었는데도 좌석이 가득 찬다. 돈이 많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껴서 온다. 마인드, 생각의 차이이다. 여기 광주의 경우에는 제 주변에 있는 우리 애의 친구 엄마들 보면, 학교에 서 숙제를 내주어야 비엔날레 가고, 숙제 때문에 간다. 여유 있고 누리는 분들도 그렇다. 스스로 문화 를 즐기기 위해 어디를 가지는 않는다. 정말 광주가 먹고 사는 문제의 만은 아니다. 정서가. 예향의 도 시라 하는데, 그와는 많이 다르다. 문화를 등한시하고 사는 게 몸에 밴 것 같다. 그런 것 보면 안타깝 다. 충분히 바로 옆에 가까이 가면 문화적으로 즐길 것이 있는데 생각을 못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루 브르전도 아이 때문에, 교육프로그램 때문에 갔는데, 아침 10시, 400명 들어가는 강당이 꽉 찼더라. 지하철 타고, 이른 시간에, 꼬맹이들 데리고 설명해주려고 노력하는 부모들이 보이더라. 일부러 시간 내고 투자해서 이렇게 보는 구나. 오는 사람들을 보니까 여유 있어 하는게 아니구나. 광주 사람들이 문화도시 하는데, 그 생각,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천 :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꼭 물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텐데요. 김 : 삶을 충만히 누리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모두 바쁘고 할일도 많겠지만. 그런 것 들이 인생의 하나의 여유로움이고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많이 바뀐 듯하지만 여전히 문 화 향유의 방법이 좁다. 도서관 가는 문화는 좀 더 나아진 듯 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동네 도서관이 라도 가더라. 근데 문화공간에 오는 것은, 영화는 많이 보는데, 작품이나 공연, 오락 아니면 그런 것 도 자기 돈 내고 하기는 아깝다 하더라. 천 : 영화계 사람들의 말이 광주에는 예술영화도 못 들어온다고 하네요. 오직 흥행성이 담보된 블로버 스터만 된다고 문화의 편식성에 대해 심각하게 표현하더군요. 김 : 시민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옛날엔 단순히 남들 말처럼 먹고 살기 바빠서다 라고 했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숙제와 같이 강제일 때만 하게 되는 수준이라면, 문화도시 그 말이 무색 해질 것 같다.

천 : 선생님은 인간이 누려야 할 삶의 조건이랄까 문화적 삶의 입장에서 문화도시를 보시는데요. 또 다른 방향에서는 문화가 경제적 가치를 추구해야한다는 입장도 있다. 김 : 모든 것은 토양이 비옥해질 때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특별한 게 없으니 문화로 돈 버 는 것도 좋다. 다만 어떻게 돈을 버는가? 예를 들어 한국에, 혹은 전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최고의 공연장 있거나 미술관이 있거나 그런 것들이 들어왔을 때라면 가능하다. 여기 사람은 안 움직여도 타 지역에서는 올 수 있다. 여기 밖에 없다면. 그러나 구체적으로 잘 모르지만, 뭐든지 복합문화적 접근 을 하고 있는 듯한데, 개인적으로 복합문화는 애매하다고 본다. 문화로 돈을 벌려면 무언가 깊이와 기 초예술, 기초 분야가 성장하고 토양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과연 그러 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브로드 웨이 공연 하나가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작품이 올 수 있다면 비행기 타고라도 멀리서 올 테다. 과연 지 금 상황에서 문화로 돈을 벌수 있으려나. 시립미술관의 경우, 일차적인 목표가 누구나 미술관에 와서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공공성의 견지가 중요하다. 사립은 돈을 벌기 위한 투자도 하고 문화사 업도 하겠지만, 그럴 때 대중 접근성은 일부 계층으로 다시 좁혀진다. 공공영역의 견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100% 투자하더라도 문화적으로 소외되거나 등한시되는 것에 기회를 주고 새로운 관점들을 견지해내고 공공의 문화적 기여와 사회적 환원의 의무가 있다. 그러한 목적 하에 생존 가능 하다. 돈을 벌자하면 우리는 문을 닫아야한다. 관람객 수가 단순히 평가의 잣대라면, 문 닫지 않을 미 술관이 얼마나 될까. 문화예술의 가치가 너무 쉽게 경제적으로 정량화 되는 상황이 안타깝다.

재미있는 것에 몰입했고, 나도 모르게 길이 되었다. 천 : 흠, 어떻게 해서 이 분야에 관심 갖게 되셨어요? 김 : 원래 미술에 관심 있었는데, 미술을 처음부터 전공으로 하지는 안했을 것이다. 서울에 있었다면 디 자인전공을 했을 것이다. 관심은 많았지만,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예체능에 대한 편견이 있었 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는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에게 무용이나 미술을 시키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 금과는 많이 달랐다. “취미로 하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가정대학을 갔는데 실내디자인, 주거관리학을 하려고 갔다. 언뜻 생각하면 디자인 전공과 연계성을 가지려고 갔는데, 대학 다니면 서 홍대 산업미술대학원을 준비했다. 광주에서 방학을 보내려고 와서는 취미로 화실 다니고 유화 배우고, 서울에서 홍대 앞 세잔느 학원을 2년 정도 다녔다. 산미대를 시험 보려고 하니까, 내가 생 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그래서 대학원 생각을 접고 화실 돌아다니고 그림 그렸다. 처음부터 서 양미술사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남편이 나주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광주에 내려왔다. 화실 사람들 한테 “대학원을 가지 그랬냐” 라고 조언을 받기도 했고, 당시 박정기 교수가 막 내려와서 조대 초 빙 교수로 오셨을 때였는데, 교수님과 이야기하면서 이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너무 재 밌더라. 당시 공부할 때는 내가 큐레이터가 되겠다든지,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 없이 순수하게 공 부에 푹 빠졌다. 너무 재미있어서 일주일에 2-3일 동안 스터디, 칸트 책 읽고 했다. 그땐 스트레 스 없이 공부 했던 게, 그냥 순수한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던 같아. 그러다 어찌 어찌하다 보니 이렇 게 된 거지. 지금 와보니, 지금 일이 딱 적성에 맞는 것 같다. 항상 공부는 해야지요. 많이 부족하고.


새롭게 보게 될 때, 깨달음의 순간이 삶의 길을 바꾸어간다. 천 : 박사 논문 준비 중이라고 하셨잖아요. 주제를 물어봐도 되요? 김 : 석사 논문이 미국 추상표현주의였다. 추상미술 쪽으로 가능하면 한국 추상미술과 연관지어 볼까한 다. 자료만 사두고 못하고 있지만, 일단 우리나라 자료가 없다. 한국에서 만들어낸 자료가 미술사나 교양서적은 많으나 논문 쓸 수 있는 학문자료는 없다. 서구 자료들 받아서 봐야하고 원서..... 정말 집 중해서 시간 투자해야 진도 나간다. 그런 점이 힘들다. 우리나라 쪽 공부해도 대부분 근현대사도 일본 에서 나온 자료들로 공부를 많이 하더라. 어차 피 동양화하는 쪽은 중국미술하고, 우리 미술이 자리 잡은 게 오래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자료의 한계가 있다. 서점에 책이 많은 것 같지만, 대부분 미 술관련 교양서적이다. 논문 참고할 서적은 많이 부족하다. 번역서의 경우 미약하구.

천 : 마지막 질문 일수 도 있겠지만, 선생님이 살아오면서, 나를 키운 8할이라고 할까요? 김 : 박정기 교수를 만났다는 것이 내 인생의 반전이었다. 생활인으로 갈 나를 어찌되었던 공부를 할 계 기가 되었다. 그런 부분들이 제일 컸다. 그랬을 때, 그 때 공부시작했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가 있었던 것 같아. 같이 공부하는 분도 좋았고. 천 : 선생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 있다면,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 무엇이 있다면?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김 : 그런 거 물어보면 젤 루 어렵더라. 난 너무 메마른 사람 같다. 떠오른 것 없다.

천 : 개인적으로 나중에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한다면?.

천 : 아님 남들이 이건 김민경이네 하는 거는?

김 : 특별 하게 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라...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것은 시간이 나면 여행해보고 싶다. 지금은 오랫동안 여행 할 상황은 아니니까.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전시 만들어 보고 싶은 게 있 다. 최근 몇 년 동안 어린이 관련 전시가 많다. 항상 문제는 “맘대로 뛰어노세요” 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는 전시가 없다는 것이다. 실현하려면 정말 돈이 많이 드는 전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애들 불러놓고 망가져도 되는 그런 전시, 그러면서 얻어갈 수 있는 전시를 해보고 싶다. 책상에 앉아 체험 하는 전시 말고. 뭔가 애들 맘껏 떠들고 뛰어놀 수 있는, 막연하지만 언젠가 그런 공간 전시를 해보고 싶다. 그러면서 예술성도 있어야 할 테고.. 우 리미술관이 중외공원 쪽 교육홍보관을 어린이미술관으 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결국 사람들을 바뀌게 하는 것은 어린이를 중심으로 어른들이 따라가게 만드는 것 같다. 어른들은 이미 굳어져서 쉽게 변화하지는 않는다. 아이들도 저학년 일 때 해야 한다. 그래야 파급효과가 크다. 미술교육적인 차원에서 전시 만들고 싶고, 많이 발전해야할 것이다. 체험도 많이 부족하고 교육도 많이 부족하다. 그런 부분들이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김 : 글쎄, 없네. 어렸을 때부터 집착하는 게 없다. 친구도 그렇다, 딸만 셋이고, 여자 형제 끼리 노는 문 화. 밖에서 친구 사귈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내 아들은 혼자니 밖에서 친구를 잘 사귄다. 난 집에서 노는게 더 재밌었다. 충분히 만족하니까 밖이 필요없었다. 그래서 하나에 대한 애착 같은 것들이 없 다. 친구 사귀어도 두루두루 사귀고, 단짝 붙으면 거부감 생긴다. 지금도 집에서 놀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특별한 악세사리도 싫어하고,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오히려 내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얼 마 전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만나게 되었는데, 친구가 나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 거의 말도 안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타지역으로 대학가면서 바뀌었다. 내가 살아가야 하니 성격이 바뀌었겠지. 옛날에 본 사람들은 내가 많이 바뀌었다한다. 지금은 말도 많다. 하하. 그리고 예전엔 머리 속으로 무 어든 촘촘히 계획했다. 계산을 많이 했다. 이익이 아니라, 계획을 많이 한다는 말이다. 지금은 많이 없 어졌고 고치려고 노력했다. 단적인 예로 어디를 내일 간다하면, 머릿속으로 어떤 옷을 입고, 운전한다 면 머릿속으로 차 길을 그리고, 거기 들려 그 다음 어디 길로 가야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것 이다. 사전에 준비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심한 두통이 오더라. 그러나 문제는 실제적으로 그 사건 이 일어날 때는 내가 미리 생각해둔 1안도, 2안도, 3안도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거나 해결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쓸데없는 걱정이고, 그거 바꾸려고 노력해. 거꾸로 요즘은 될 대로 되라 하 고 산다. 하하. 그것도 일종의 좋으면 준비성이었겠지만, 스트레스였다고 본다. 살다보니 안 좋은 것 이구나 하는 생각에 지금은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때 가서 최선을 생각하자. 발등에 불 떨어져서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말이다. 하하하.

천 : 어디서 들었는데, 광주에 어린이 미술교육, 미술관 교육 전문가가 없다고 그러더라. 김 : 전영희 선생님이 미술치료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미술교육을 할 수 있는 전문 에듀케이터가 없다. 그런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대학에서도 학자나 이론가를 가르치겠지만,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없다. 최근 서구의 경향도 그렇지만, 보여주는 전시가 반이라면, 교 육이 남은 반일 것 같다. 전시에 투자하는 만큼 그 전시를 하기 위한 미술 교육이 반 정도 투자 되 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을 양성해낼 필요도 있다. 교육프로그램도 전시 기획할 때부터 함 께 기획하여 교육도 하고 전시에도 그런 개념들이 사인물 하나까지 반영되어야 한다. 단순히 작품 설명 도슨트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미술을 바라봐야 하는가 부터 시작해야하는 데 그 런 부분들이 없 다. 인력양성 프로그램들이 그런 것을 했으면 좋겠다. 지 금도 미술교과는 안 바뀌 었더라. 아직도 작품 나오고 누구 것인가 외우는 시험이 나오더라.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닌데, 그 것을 바라보는 방식, 시각, 비평적 관점과 감수성 등이 중요한 데 말이다. 미술교사나 교수도 바뀌 어야할 것 같다. 그런 이야기하는데, 처음 이런 문화를 접할 수 있는 5-6세부터 교육적인 것 프로 그램 만들어, 일반 대중화가 되어야한다. 극소수를 위해 만들어봤자 파급력은 없고 대중적으로 만 들어서 상시적으로 돌리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 부모는 아이들 따라 재교육 받게 된다.

천 : 진짜 마지막 질문이다. 하하. 문화시설활동가 네트워크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김 : 정말 모르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기대. 내가 아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런 것들을 내가 하는 일에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은 지금 정보가 중요하다. 단순히 일대일 정보의 도움 도 받겠지만, 기관 대 기관 도움도 받고,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으면 좋겠 다. 그런 경우 있지 않나? 미처 생각지 못한 것도 다른 사람 통해서 이거구나 할 때... 그런 부분들이 도움이 많이 되지 않을까.


“예술과 자연발생적 큐레이팅” 의재미술관 학예사, 이진상 이진상큐레이터는 한국화와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현재 의재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개인과 한명

“의재라는 미술관의 특성을 잘 살리는 것,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전시를 통해 서로 의미가 교류되고 전시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녹아내리도록 하는 것, 미술관과 주변 경관은 따로 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같은 맥락안에 놓여있으므로 이것 을 전시로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겠죠”

의 직업인으로서의 개인 사이에서 예술과 큐레이팅 작업이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고, 기획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또한 이진상은 젊다. 젊기에 자신이 경험해내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스스로의 열림으로 맞이하고 싶어한다.

// 인터뷰장소 : 얼씨구학당 가보세 // 인터뷰시간 : 2007 pm 8:00 ~ 10:3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룡, 김수정 // 소개: 장원익 학예연구사

정 : 왜 의재미술관에 있어요?. 이 : 외 부에서는 유동성도 없고, 찾기도 힘든 곳인데, 편하게 들나들 수 있는 공간도 아닌데... 그 자리가 의재선생님이 농업학교를 지었던 곳이고, 의재미술관 근처에 허백련 선생님이 농업학교를 세웠을 때 관련된 공간이거든요. 미술관이 그 주변의 흔적이 뭍어나는 전시가 된다. 사립미술관은 우재길미술관 은 현대미술적인 방식으로 가는데, 현대미술이 있기전 과거와 전통의 예술이 있는데, 전통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전시기획에서부터 전시가 전통에 기반하는 형태이고, 젊은 층에서 봤을 때는 재미없다고 도 할 수 있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다. 요즘은 서양화 한국화 등의 구분이 불분명하니까요. 정 : 元型에 가치를 쫒아가는 생각, 한국화를 하고, 전통적인 것, 예술의 원형에 대한 부분을 고민을 하다보면, 현대미술에서도 철학적인 문제들을 만들어갈 수 있고, 의재라는 원형속에서, 의재라는 원천 속에서 뽑아 낼 수 있지 않겠나.선생님은 전시를 기획을 하는데, 선생님이 몸담고 있는 부분 을 예술과 사람과의 소통을 하도록 하잖아요. 이 : 전시기획자가 기획한대로 추진해야하는 것도 있지만, 남들이 생각할때도 의재 허백련 선생님을 무 시할 수는 없어요. 남종화에 대가이기도 하고, 그 분을 기리는 의미도 담고 있고, 1차적인 목적이 그 분을 기리는 것이고, 2차적인 것은 그 전통적인 것을 잃지 않고, 전시가 중심적인 것이 수묵화 중심이 에요. 저런 그림(식당에 있는)같이 식상하지 않고, 장 : 내가 만일 의재선생님이라면, 나를 기린다고 케케 묵은거 가져오지 말고, 젊은 사람들이 활동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고, 이 : 전통이라는 것이 그 정신적인 부분에 방점을 찍고 전시를 하자는 것이지요. 정 : 스스로에게 던져지는 질문, 왜 내가 전시기획이라는 부분을 하면서 끊임없는 자기 질문이나 고민 꺼리는 무엇인가? 이 : 안 풀리는 것은 미술관의 특성상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어요, 의재미술관을 통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의재미술관을 통해서 내 생각을 플러스해서 할 수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것은 아닌데, 이렇게 하면 안된는데라고 생각하지는 않구요. 운영상 재정이 부족해서, 육체적인 부분이 좀 힘들어 서 그렇고, 배우는 단계라고 생각해서,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해보는 것이죠. 이런 저런 전시들을 통해 서, 제가 전시기획이라는 부분을 많이 접하고, 경험하는 것이죠. 지금은 저도 아직 배우는 단계이고, 그리고 제가 그런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좀 불만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편이죠.


정 : 기 획이라는 것이 처음과 끝, 구조를 만들어내고, 인력도 포함하는 개념이잖아요. 전시기획이라 는 점에서 전문성이 있는 것인데요, 기획이라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게요. 기획이라는 것의 특성 이나, 또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 기획이라는 의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미술이론을 공부하지는 않았거든요, 발로 뛰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거든요. 작가들이 모여서 대안공간 같은 곳에서 작업도 하고, 큐레이터도 하구요”

이 : 하긴 하죠. 지금 전시일정이, 미술관 같은 경우는 미술관 재정상은 하기 힘들고, 기금을 통해서 하는 것은 3개 있어요, 해마다 하는 행사가 3개 있어요. 한중수묵대전하고, 의재 허백련 미술상 있고, MBC수묵대전 있고.

정 : 선생님은 의재에서 몇 년?

장 : 대관은 안하나요? 이 : 대관은 안하고, 빈 실은 봄에는 좀 있고, 여름부터 준비해서 가을부터는 빈 공간이 없고, 봄에는 소 장품 정도만 전시를 하고 있거든요. 장 : 소장품보다는 젊은 작가들이 현대화시키려고 많이 하잖아, 젊은 사람들이 의재미술관에서 선생님의 생각도 느껴보고 작품 그 자체보다는 의재라는 분의 정신세계 같은 것을 전시를 보면서 느낄 수 있다 면 좋을 듯 한데요. 정 : 기획이라는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면서 작전을 짜는 것이잖아요.

이 : 선생님은 의재에서 몇 년? 정 : 오기 전에 생각? 이 : 저는 한국화를 전공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전시기획도 하고, 또 다행스럽게도 현재 작업도 하고 있 거든요. 정 : 공부하고, 창작하고 있는 부분하고 원천이나 계기가 될 수 있잖아요. 이 : 어렸을 때 꿈은 여군 되는 것이었거든요. 현장 가서 작가선생님들 옆에가서 움직이면서 설치하고 그 런거 좋아하거든요.

이 : 요즘 같으면 기획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것 같아요. 정 : 기획 은 이런 저런 상황을 모두 고려를 해서 진행을 해야하잖아요. 특히 여러사람들을 만날 수 있 는 상황이 아닌 미술관에서 있는 것이고, 의재선생님의 깊은 정신적인 부분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 금 그것을 깊이 느끼도록 하려면 상당히 어려울 것 같거든요. 의재 허백련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 아서, 이것을 알리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추상적인 정신을 사람들이 알수 있게끔 하는 것이죠. 북 구 문화의집은 전시공간은 아니지만 전시를 하는데 사람들이 의아해 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문 화의집 공간에 맞게 그 공간에 다양하게 변형을 가하는 것이죠. 문화의집의 정체성이나 방향성이 있으니까 이 공간에서 전시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죠. 이 : 의재허백련선생님 작품을 전시를 해야지, 봐도 모를 그림을 걸어놨느냐, 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도 있어요. 저희가 그래도 그런 분들한테 의도를 알려주고 그러면, 전시기획을 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좀 이해를 하기도 하구요. 전시 를 보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전달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관광객 들이 재미도 없고, 뭐라고 하신 분들도 있어서, 작년 10월부터 해서, 금호미술관의 금빛 봉사단이라 고 있어요,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 문화해설사분을 배치해서 이야기 해줄 수 있게 하고 있구요. 전시 에서 그림만 보고 가는거 아니잖아요. 시에 서 지원해주거나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술관 같은 경우는 그것을 다 체험도 시켜주고 그러면 좋은데 운영하는 것 자체가 의재미술관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죠. 사립미술관이니까 일반1000원 어린이500원 인데요, 사람들이 그래요, 시에서 지원해 주는 거 아니냐 라고 묻지만 실제로는 지원을 안해주거든요. 의재 허백련 미술상 지원해주는 것은 좋 아요. 그런데, 운영상에는 장기적인 지원을 해줘야 보통때도 전시하고, 좋은 프로그램 같은 것도 해볼 수 있고, 애들 교육도 바이올린 피아노, 크fp파스하고 물감 많이 쓰잖아요. 근데 정작 먹과 붓을 많이 안쓰잖아요. 그쪽으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홍보도 하고 그렇거든요.

정 : 그럼 예술가 인가요? 이 : 작업을 하시는 분들 앞에서는 작업 한다는 말을 못하죠, 나름대로 저의 작업의 방향성은 있는데, 그 런 분들 앞에 가면 이야기 못하죠. 저의 전시에 오시면 저의 색을 알 수 있을 거에요. 정 : 학예사 인가요? 이 : 학예사로 들어 간 것이고, 현재 전시를 기획하는 학예사로 일하고 있죠. 정 : 사람은 많이 만나세요? 이 : 저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만나요. 생긴 것과 다르게 인간관계가 좋지는 않는 것 같아요. 친해 지기 전까지 시간이 좀 걸려요. 정 : 저를 잘 모르시죠? 저도 선생님을 잘 모르시잖아요? 저도 그런 면이 많아요. ^^ 이 : 선생님네도 기획을 하면, 작가섭외에 있어서는 이사장님이 현재 작업을 하세요, 전시컨셉을 잡는 것 도 좋아요, 이사장님한테 기획을 내 놓다보면 이정도면 되겠다 하는데, 전시기획을 하기 위한 단계라 고 말씀 드린게, 작년에 복권기금에서 예산을 따서, 결과보고서까지 내야 하는 것이잖아요, 전시결과 도 웬만큼 해줘야되잖아요. 여기 저기에서 이름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걸게 되면 재미가 없잖아요.


정 : 그 자체를 드러내고, 성과있게 드러내려면, 선배들도 이야기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스스 로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의 생각은 또 묵히게 되고, 자기 생각이 또 묵히게 되고, 그러다보면 나이 들면 반복이 되고, 그런 것이 보이면서도 가우도 세우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 는 부분이 생기지 않는가, 그런 지혜가 생기지 않나.. 나는 경험이 없다보니까, 반대급부도 있잖아 요. 현실적으로 돈을 따서 성과보고도 해야 하잖아요, 그런 부분을 자기도 책임을 못 지잖아요. 저 도 그런 부분을 생각을 하잖아요. 젊으면 열정이나 에너지는 있지만, 사회에서 먹힐려면 그걸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있던지, 근데 나는 용기가 없으니까, 방편들을 만들게 되거든요. 대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까 놓고 실험이나 이런 것들을 신봉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길을 찾고 싶고, 나도 하고 싶으니까 욕구를 풀려고 해요.

정 : 예술 가는 직업 계념은 아닌 것 같고, 큐레이터는 직업인 것 같거든요. 또 한편 예술가도 직업 계 념으로 이야기를 하거든요. 선배들이 “너 작업하고 있냐?, 많이 하고 있냐?” 이렇게 이야기 하잖 아요. 본연의 근본으로 돌아가서는 무엇을 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지금 현재 선생님 같은 경우, 예술가가 안될 수도 있거든요, 큐레이터로 가다보면 예술을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요.지 금도 저는 책무처럼 사진이라는 것이 남아있거든요, 그것을 못한 것도 있으니까. 이 : 미술이론을 갔을 때 큐레이터를 하려고 간 건 아니거든요. 그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해요. 미술관에 있으면서, 전시 기획하고, 작가 섭외도 하고 그러면. 요즘에 대안공간이 많잖아요. 발로 뛰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거든요. 작가들이 모여서 대안공간 같은 곳에서 작업도 하고, 큐레이터도 하구요.

이 : 선생님은 어떻게 푸세요. 장 : 대관은 안하나요? 정 : 이런 걸 저는 잔머리라고 해요. 우리 같은 경우는 의재미술관의 특성이고, 우리는 주민이 스스로 만들어서 주체가 되어서 뭔가를 해야해요, 스스로 발동이 되어서 해야한다고 미션에 나와있어요. 발동이 되거나, 아니면 형식적으로 하는데... 대중이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일 반 주민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하겠어요. 주민이 스스로 한다고 하면 아마추어들이 하 려면 교육도 받고, 상당히 어려운 것이잖아요. 주민이 스스로 한다는 것과 실재와 충돌을 해요. 방 편으로 매개를 할 수 있도록 열어 놓자는 것이죠. 예술 은 기존의 관념에서는 자격을 갖춘 이가 하 는 것인데, 일종의 워크숍이나 교육의 형태를 가져가면서 주민들이 할 수 있도록 매개의 개념이 계 속 등장하는 것이죠. 안좋게 이야기 하면 꼼수고 좋게 말하면 지혜인 것 같아요. 공무원들과 함께 일하다보니, 공무원이기전에 그 사람도 사람이니까 그 여지가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봤을때는 사 람이기에 그런 마음을 갖고 있거든요. 이 : 선생님 이야기 하시는 것이 맞잖아요. 제가 주변에서 보면, 예술을 한다는 사람도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정 : 예술가 이지만, 모든 근원에서는 예술가지만, 선생님 갖고 있는 큐레이터라는 부분에서 선생님의 정신이나 영혼이 한번 더 재가공 돼서, 확장 시키는 것이죠. 이 : 제가 아는 분들 미술관에서 선배들이 있잖아요. 문화중심도시든, 무엇에서든 같이 해야한다. 저희 교수님이 제가 갤러리에서 일을 했는데, 돈이 필요하면 1-2만원 걷어서 리플렛 만들고, 미술관 소속 에 있다보니, 같이 일하다보니, 이곳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다음에 하고 싶은 전시를 해보자라고 이 야기 했죠. 지금 인지도있는 분들의 그림, 그런 고리타분한 그림 언제까지 할것이냐,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딴 곳에 가서 우리도 한번 저지르자, 문진금 기금 같은 곳에서도 기금이 많잖아요. 그런 이야 기를 하죠.

정 : 작업 을 전체적으로 기획도 하고, 짜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개인들의 작품들도 모아내고 전체 적으로 묶어주는 사람이 큐레이터 잖아요. 이것 자체가 창작물을 혼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아내 고 하는 개념이잖아요. 모으면 분류도 하고, 어떤 의미들도 끌어내야 하고 하는 것이 원천이 된다 고 하더라구요. 전쟁 때 전리품을 모아놓고 관리하는 사람이 큐레이터 였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자연스럽게 교육적인 부분도 나오는 것 같구요. 의재 안에서도 그렇게 지혜를 묶어 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예술가들보다는 선생님이 더 고민을 해야 하고, 만들어야 하는 역할 인것 같거든요. 제 일 하고 싶은 것은, 사진을 하면서 개인전을 해 보고 싶었어요. 너무 텀도 있고, 그래서 못하긴 하 지만, 삶에서 배우는 부분을 또 엮어 내는 것을 찾아서 했죠. 나이가 들어서는 그렇게 하면 원천을 갖고 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전시하고, 만들어 낸다는 것이 눈 에 보이는 작품이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죠. 보이는 것은 그림만 보일 뿐이죠. 그 의미를 알려주 고 만드는 것도 큐레이터가 되는 것이에요. 아직 젊으니까, 혼자서만 생각해야 하니까, 위로 올라 가면 틀이 있는 것 같으니까, 문화도시 그러면 무슨 개념처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직만 보이 는 것 같고. 그런 것들을 한번쯤 무시할 필요도 있고, 비공식적인 것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고. 사 업관계로 규정지으면 사람을 어떻게 만나게 되겠어요. “배우는 사람에게는 중간보스가 필요해요. 배움뿐만이 아니라, 의견을 조정하고, 이를 서로 흡수시키 고, 관철하는 데에는 서로가 합의의 과정이 필요한거죠. 그럼에도 날 이끄는 것은 다른 이들보다 상대 적으로 좋은 출발선상에 있었다는 것이에요” 이 : 두 분 선생님 사이가 참 좋아보이세요. 전 다이렉트로 바로 관장님과 이야기를 해야하거든요. 중간 보스가 필요해요~ 정 : 기업 조직이 가장 변화에 빨라, 조직도 마찬가지에요. 조직은 예전에는 콘트롤 하는 분위기가 강 조되었는데, 지금은 개인의 역량을 끌어내는 분위기가 중요하거든요. 선생님도 나중에는 리더의 역할이 되어야 하잖아요. 갤러리든 전시든 하다보면, 거기에 맞는 유동적이면서 끌어내는 역량이 필요하거든요. 파워를 키워야 하잖아요. 선생님의 장점? 역량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 역량, 힘... 말할 단계가 아닌 것 같은데요. 흠...

이 : 나름 젊다고 생각하죠.

정 : 예전에는 파워가 한 가지, 힘이었어요. 근데 지금은 모든 것이 파워가 될 수 있어요

정 : 저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이야기도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는 고집 있다고 하 기도 하는데, 나이가 들면 호르몬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여성화되는 것 같은데요. 저는 거의 인제 여자 됐어요.^^

이 : 이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큐레이터와 예술은 굉장히 밀접하다고 생각하구요, 이론과 오시는 분들은 굉장히 다양한데요, 같이 이론 수업을 하다보면, 텍스트를 만들고, 그 발표를 하고 그러면, 그 발표를 들어보면 그 그림에 뭔가를 받아서 글을 썼구나라는 생각은 별로 안들었어요. 전 아직 젊고 무 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와 똑같은 조건에서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 보다는 제가 좀 더 좋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분들보다는 제가 더 많이 갖출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분들보다는 더 나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 : 예술가 이지만, 모든 근원에서는 예술가지만, 선생님 갖고 있는 큐레이터라는 부분에서 선생님의 정신이나 영혼이 한번 더 재가공 돼서, 확장 시키는 것이죠. 이 : 제가 아는 분들 미술관에서 선배들이 있잖아요. 문화중심도시든, 무엇에서든 같이 해야한다. 저희 교수님이 제가 갤러리에서 일을 했는데, 돈이 필요하면 1-2만원 걷어서 리플렛 만들고, 미술관 소속 에 있다보니, 같이 일하다보니, 이곳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다음에 하고 싶은 전시를 해보자라고 이 야기 했죠. 지금 인지도있는 분들의 그림, 그런 고리타분한 그림 언제까지 할것이냐,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딴 곳에 가서 우리도 한번 저지르자, 문진금 기금 같은 곳에서도 기금이 많잖아요. 그런 이야 기를 하죠. 정리 : 것이 아주 중요한데, 그 원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이런 비 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아까 원천, 근원이라고 이야기 한 부분은 안 드러난 부분이거든요, 보 이는 것은 사업화하고, 글을 쓰고 이런 부분만 있거든요. 원천은 녹아나있어서 잘 안보이기도 하 지만 잘 보일 수도 있거든요. 기획전시가 있는데, 기획안이 급했어요. 결과로 본다면, 일반 사람들 은 모르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것이 보이거든요. 예술가들은 의도해서 뭔가를 하지는 않는데, 흉내 내고, 파는 그림 그리고... 저는 가장 잘하는 것이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거 든요, 어렸을 때는 고민을 상당히 많이 했는데, 보이는 것도 어술했을 것인데, 그때 했던 것들이 남 는 것이죠. 선생님은 한국화에 대해 고민을 갖고 있고, 그 안에 고민이 녹아있고, 큐레이터도 그 선 상에서 같은 맥락에서 남들과 다른 장점이자 파워로 역량으로 작용 할 것 같아요. 잘 못하면 그 상 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이 : 젊은 문화인력 양성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양성을 이라는 것은 뭔가가 발로가 되는 것이잖아요. 도시라는 것도 그런 것들이 통용되도록 하는 것이잖아요. 예술가들 지원한다고 하는 것도, 월급을 못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돈을 많이 준다고 하는 것도 아니구요. 정 : 인력에 관한 문제는 구조로 읽기 어려운 부분이 많잖아요, 시간 정해서 더 일한다고 훌륭한 인력 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선생님 같은 경우는 젊죠?

이 : 그냥 아름 아름으로 알았다면 이건 아니다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일은 하면서, 위에서 지시로 하면, 이게 맞지 않다라고 하더라도 의견이 반영이 안되니까 또 일단을 그렇게 하게 되고, 속으로만 그래 일 단 하긴 한다만, 하고 삭히고 또 일단 일은 하죠. 전부다 옳은 것도 아니고, 또 틀린 것도 아닌 상황에 서 조금은 제 자신을 다독이고, 배우는 과정이라 생각을 하죠. 정 : 예전에는 조직 맺는 방식이었지만, 실제로 네트웍크의 방식은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는 방식이거 든요. 예전에는 사업상 관계를 했었는데, 그것이 사적이라는 부분 때문에 그것이 공식화 안됐지만, 그런 고민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한 거죠. 내가 장원익연구사님이랑 맺었던 관계를 다 른 사람하고도 맺고, 맺고. 이런 것을 한번은 실험한번 해보자. 우리끼리 공유도 하고, 이 : 이것을 결과물로 내야 하는 거에요? 정 : 이것을 기사형식으로 내자는 것이거든요. 이 : 이걸 왜 개인적으로 하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보니 개인적으로 밖에 할 수 없는 것이구나라고 생각이 드네요. 정 : 내용적인 부분으로 설득을 하는 것이고, 덧붙여서 하고자 하는 것이 명함이라는 것이고, 이 : 수첩도 괜찮을 것도 같은 데요. 정 : 수첩도 좋은 것 같어요. 일단 만든 것이 1차가 명함이에요. 이 : 조직 안에 있으면, 또 조직의 방식이 있어서 또 갈 수 없는 것 같은데. 정 : 문화중심도시라는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1박 2일 워크숍에 오시라고 할때 는 꼭 공문형태로 보내야죠. 그리고, 그렇고 그런 워크숍으로 만들어가지 말자고 노력해야죠. 연구 사님 처음 맺었을 때, 오셔서 과자를 사오신거에요, 그러면서 갑자기 편해지는 것이 있더라구요. 공무원이었을 뿐인데 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얼마되지는 않지만, 그냥 과자 몇 개 사오신 것이 우 리랑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시는구나라는 진심이 전해진 것이지요. 저희랑 관계 맺을 부분이 많이 있어요, 안 찾을라고 하면 없는데, 서로 관심을 가져주는 관계가 되는 것이죠. 식당 에서 10시 영업 종료인데, 10시 30분이 되어서 가게 정리해야 한다고 해서, 인터뷰를 접었다. 나 오는 길은 조금은 더 편안해졌다. 한 사람 한 사람 알아가는 방식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 람이 우리의 진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일 때, 알 수 없이 뭉클함이 스멀거린다. ^^


“환경운동을 넘어, 환경복지를 실천합니다” 광주전남녹색연합 간사, 홍상미 사회복지를 전공했던 그녀는 도법스님과 함께 한 탁발순례에 동행하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순례가 끝나 갈 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광주전남녹색연합에 문을 두드렸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녹색연합에서 조직관리와 교육업 무를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꿈인 환경교육센터를 꿈꾸며 생활 속 환경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 인터뷰장소 : 충장로 소재 카페‘ 하얀풍차 // 인터뷰시간 : 2007.3.18 pm 10:40 ~ 00:00

정 : 올해도 지구의날 행사에 참여했는데, 녹색연합에서는 뭘 준비하고 있어요? 홍 : 자전거 정거장을 준비하고 있어요. 우리가 자전거에 대한 운동을 하고 있잖아. 대중교통에 대한 운 동. 더 나아가서는 지구 온난화나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대학생이나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지금의 역량으로는 자전거 타기 좋은 취지고 기회인것 같아. 기존의 행사의 경우 퍼포먼스 식으 로 자전거 묘기, 대행진 등이었는데, 일반인들이 참여하기에는 좀 어려운 행사였던것 같아. 그래서 이번에는 일반인들이 자전거를 가지고 와서 자전거 고장에 대한 대처법, 가격 등을 배우는 장을 마련 하려고 준비중이죠..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기, 강혜진

정 : 예전에는 환경적 컨셉의 지구의 날 행사로 진행되어왔잖아. 최근엔 생활문화운동 또는 문화적 컨 셉들로 행사를 구성해가고 있잖아. 지구의날 행사내용이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때? 홍 : 저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번에 생활단식을 하기로 했어. 작년부터 해봤는데. 저 나름대로는 좋 아요. 기존에는 인간중심의 소비문화 때문인지 지구의 날에는 차를 막아 놓고 쓰레기가 더 많이 나오 고, 돈을 더 많이 쓰게 되더라구요. 그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 생일날은 편하게 쉬었 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지구의 날에는 지구를 쉬게 하자고 생각을 한거죠. 인간들이 적게 먹고, 적 게 움직이면 지구가 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거죠. 그래서 우리 회원들을 중심으로 가까운 사람 들과 생활단식을 진행하려고 하는거죠. 정 : 그럼, 작년의 경우에 생활단식에 대한 사람들 반응은 어땠어? 홍 : 작년 참가자가 15명이었는데. 처음엔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시작을 한거죠. 역시나 인간중심의 생각을 가진거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외로 많은 효과를 얻었죠. 시간의 개념을 많이들 생각 하더 라구요. 점심시간이 짧아지면서 그만큼의 여유 시간을 책을 읽는다든지 각자의 의미에 맞게 시간을 활용하더라구요.

환경운동, 환경복지의 시작. 정 : 이정도면 인터뷰에 대한 부담감은 줄어들지 않았나 싶은데요. 자신에 대해 소개를 한다면? 홍 : 이름은 홍상미구요. 나이는 27살.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를 졸업하고. 일년간 놀다가 녹색연합 이라는 환경단체에 들어왔죠. 그러면서 삼년차를 맞이하는 활동가죠. 광주대 3학년 때부터 참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그러면서 내 운동을 시작하게 됐던 것 같아요. 지금은 녹색연합에서 교육파트와 조직회원관리를 하고 있어요.


환경운동, 환경복지의 시작.

아이들은 나와 녹색을 좋아해.

정 : 이정도면 인터뷰에 대한 부담감은 줄어들지 않았나 싶은데요. 자신에 대해 소개를 한다면?

홍 : 조직사업을 하고 있어요. 녹색연합은 회원가입을 통해서 회비로 운영되는 조직이라 회비를 낼 수 있 는 회원을 확장하는 일과 회원에 가입한 사람들이 어떻게 녹색연합에서 움직이게 할 것이냐를 일차적 으로 고민하고 있구요. 사람들이 가장 동의하고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들을 하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주부대상 교육을 많이 해요..

홍 : 이름은 홍상미구요. 나이는 27살.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를 졸업하고. 일년간 놀다가 녹색연합이 라는 환경단체에 들어왔죠. 그러면서 삼년차를 맞이하는 활동가죠. 광주대 3학년 때부터 참 좋은 사 람을 많이 만났고, 그러면서 내 운동을 시작하게 됐던 것 같아요. 지금은 녹색연합에서 교육파트와 조직회원관리를 하고 있어요. 정 : 전공이 사회복지 잖아. 왜 사회복지를 선택했어? 홍 : 큰언니가 사회복지사예요.(웃음) 저랑 8살 차이가 나는데. 대학진학을 고민할 때 할 큰언니를 비롯 한 가족들이 사회복지를 전공해서 공무원이 되길 바라며 권유를 했죠. 정 : 좀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일년간 놀았다는 표현을 했잖아. 그냥 놀지는 않았을테고. 1년 동안 뭐 하면서 놀았어? 홍 : 사실, 사회경험을 했다는게 청소년과 관련된 활동들이었어요.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대학 3학년 때 부터 그 전과는 다른 세상을 경험했죠. 광주대 이용교 교수님을 만나것이라든지, 오빠를 만난 것이라 든지. 그리고 5.18기념재단 자원활동을 했던 것, 서울에 있는 품이라는 청소년단체에서 실습을 했던 것 등등 모두 청소년과 관련된 활동들 이었죠. 정 : 내 이야기도 해주는 거야. 고맙네. ^.^ 홍 : 계속 이야기 할께요. 졸업 후 1년 동안 대안학교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책을 많이 읽었 어요. 이반일리치 공부모임에도 참여하고. 모임을 하다가 우연치 않게 생태와 관련된 자원활동 하면 서 환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결정적인 이유는 도법 스님과 함께 했던 생명평화탁발 순례를 3개월 정도 따라다니게 되었어요. 지리산, 제주도, 부산 이렇게. 그러면서 걷는 기간 동안에 농민도 만났고. 시민단체 사람도 만났고, 정치인들도 만났는데, 걸 으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울 었던 경우가 농민, 환경관련 시민단체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였어요. 내가 4년 동안 배웠던 사회복지 관 련 사람들이 아닌. 우연찮게 그러면 환경복지를 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죠. 환경복지를 생각하면서 사람들한테 환경도 권리가 있고, 우리 인간도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 환경 복지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녹색연합을 들어가게 된거죠.

아이들은 나와 녹색을 좋아해. 정 : 그럼, 현재 녹색연합에서 어떤 일을 하나요?

정 : 어떤 내용을 교육하는데? 홍 : 주부들은 환경해설사나 환경자원활동가 아니면 도시녹지나 하천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 양교육을 하고, 어린이는 생태기행, 캠프 같은 것들을 하죠. 정 : 아이들에게 있어 환경에 대한 생각은 생활적인 면에서 스며들게 하는게 중요하잖아. 금방 그 결과 가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캠프를 갔다 온 후 아이들이 변화한 사례가 있어? 홍 : 하다보니까 우리도 그런 기대라는 걸 하는데, 녹색연합에서 준비한 캠프나 기행에 2~3년 정도 참여 한 아이들에게 물으면 녹색연합에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온다고들 해요. 우리는 가급적 아이들을 자유 롭게 풀어 놓거든요. 물이 흐르듯이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아이들과 프로그램이 아닌 프로그램을 하 는거죠. 근데 차이가 나요. 처음 온 얘들은 자유롭게 운영되는 일정에 대해 적응을 못해요. 기존의 캠 프의 틀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거죠. 그런데, 몇 차례 참여한 아이들은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 요. 스스로가 프로그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녹색에서는 하루기행 같은 걸 하면 아이들 에 도시락을 싸오게 해요. 그러면서 녹색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일회용을 쓰면 안되는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되죠. 아이들도 어른들도 서서히 인식을 하죠. 그러면서, 아이들과 어른들은 녹색에 매력을 느 끼고 되죠. 물론 녹색에서 일하는 저도 그렇구요.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 정 :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자. 어떻게 자라왔어? 홍 : 아주 조용히 성장을 해왔어. 우리집에서 내가 막낸데. 언니 오빠들이 커가면서 사고를 많이 쳤거든. 그래서 생각을 했죠. 나는 최소한 엄마, 아빠한테 신경을 안 쓰게 해야겠다고. 그래서 조용조용히 중 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을 했죠. 지금은 아니지만... 정 : 개인적으로 관심있는게 뭐야? 홍 :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요즘 부러워하는게 문화적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음악도 하고 싶고, 사진도 찍고 싶고. 나 혼자만의 작업 공간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싶어.. 정 :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

어렵고 힘들어도 난 내 일터를 사랑해

홍 : 환경단체 활동가는 어느 정도의 의지나 소양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거잖아. 이 일을 3년차 하다보면 서 감각있는 디자인, 감각있는 사진 이런데서 부딪히더라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직접 하고 싶다는 욕 심이 들더라고. 그 동안 나만의 문화생활이 없었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싶고.

정 : 조직 때문에 개인을 희생한다. 그것에 대한 네 생각은?

정 :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어?

정 : 회피하는 거야?

홍 : 탁발순례가 가장 많이 남는 것 같고.

홍 :그러면서도 많이 배우는 것 같아. (웃음)

홍 : 음, 난 조직을 사랑해. (웃음)

정 : 탁발순례 말고, 일을 하면서 쉼을 위한 여행이랄까 홍 : 녹색연합 일을 하다가 제주도 여행을 간 것. 탁발순례 코스를 다시 가면서 순례 때 만났던 사람들을 만났죠. 홍상미 개인으로. 내가 갔던 흔적을 다시 가고, 그 때 만났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뭉 클했죠. 지금도 일하면서 여유가 생기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 나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을, 나를 되돌 아 볼 수 있는 여행을.

어렵고 힘들어도 난 내 일터를 사랑해

나의 꿈, 교사에서 활동가로 다시 활동가에서 교사로 정 :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홍 : 교사. 어렸을 때 참 순박했었는데. 외할머니집에 작은 칠판이 있었는데 칠판에 적는 것이 너무 좋았 어. 이쁘게 글씨 쓰는 연습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 거기에 글씨를 쓰면서 그런 꿈들을 꿨던 것 같아. 정 : 그럼, 지금의 너의 꿈은 뭐야?

정 :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환경복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잖아. 현재 일을 하면서 전공 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 같아? 홍 : 난 전공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뭐 특성있게 가져가고 있지는 않지만. 전공에서 배웠 던 상담을 한다거나 프로포절을 작성한다거나 그리고 지역사회 자원을 이용하거나 활용하는 방법들. 이런 부분에서는 많이 활용하는것 같아.

홍 : 모르겠어. 아직 갈등이긴 한데 이렇게 사는게 맞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마인드, 브랜드를 가지고 특성 있게 가져갈 수 있는 사람, 프리랜서로써의 당당함을 가지고 싶은 꿈이 있는 거 지. 환경운동을 하던, 문화운동을 하던, 사회복지운동을 하던. 내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고 싶어. 정 : 20년후의 너의 모습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홍 : 20년 후면 47살? 헉! 시집도 못가고 있으면 어떡하지.

정 : 그럼, 대학공부를 열심히 잘 한거네. 홍 : 그렇지. 나름 납부금이 아깝지는 않지.

정 : 그럼 우리집에 와서 밥을 해. 밥값은 쳐줄테니까.

정 : 조직안에서 느끼는 애로사항이 있을텐데. 운동을 하면서 부닥치는 것들이 있잖아. 그건 어때?

홍 : 내 몸 값을 그 정도 밖에 안 쳐준다는 거야!

홍 : 없었어. 내 조직에 만족해. (웃음) 정 :몇 점 줄 건데? 홍 : 100점. (웃음) 어디를 가서나 똑같을 것 같은데. 내 특성을 살려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학 습해서 꾸준한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데 현실이 받혀주지 못하죠. 그런 면에서 보면 지역의 활동가들 은 본부의 활동가들을 부러워하고 있죠. 물론 저도 그렇고. 지역은 특성화를 가져가기 보다는 모든 일 을 뭉뚱그려서 하고 있죠. 그러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나보다 조직을 많이 생각하 게 되고, 조직 때문에 개인을 희생하기도 하고.

정 : 어떤 모습이고 싶어? 홍 : 근데, 20년 후의 모습을 꿈꿔보진 않았지만. 지금 시민단체의 보편적 조직형태인 부장이나 국장, 처 장이나 그런 위치에 있고 싶지는 않아. 현장활동가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서 나름의 규율을 가지고 운영하는 그런 조직에서 일하고 싶어. 일종의 프로젝트팀 일수도 있고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일수도 있을테고. 내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 돈이 있다면, 작은 폐교를 운영해보고 싶은 꿈도 있고. 늙더 라도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있거든. (23시 30분경 홍상미 화장실을 다녀오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환경복지를 더욱 굳건히

“문화적 리더쉽을 가진 교육전문가 꿈꿔요!”

홍 : 오빠, 나 화장실에서 생각해봤는데. 글로벌시대에 맞는 제3세계의 소외계층을 위한 뭐 그런 답을 해야하는건 아닌가. (웃음)

광주청소년활동진흥센터 운영요원, 서 정

정 : 20년후에 난 빵집을 운영하고 싶거든. 빵이 나오면 종을 치고 그 종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와서 자 유롭게 빵을 먹으면서 허심탄회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눴으며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해. 홍 : 그러면 난 옆에서 소 가지고 우유를 짤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농촌에 서 황토집을 지어서 아이 5명을 입양해서 키우며 살고 싶어. 그 정도면 사회에 공헌하는거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 작아서 진솔하고 꾸밈이 없었던 단체활동을 경험했던 청소년이 이제는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통해 자 신의 파이를 조금씩 키워나가는 청년이 되었다. 얼마전까지는 광주흥사단에서 청소년부장, 총무부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 다고 한달전부터는 광주청소년활동진흥센터 운영요원이라는 직함을 갖게 된 서정 운영요원. 그는 21세기 청소년들은 문화 적리더쉽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정 : 아~~~주 큰 사회공헌이지. 난 도시를 떠나서 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요즘 사람들은 도시를 떠 나서 살고 싶은 생각들을 하잖아. 넌 어때?

// 인터뷰장소 : 농성동 울림정 식당

홍 : 글쎄. YES도 아니고 NO도 아닌데. 복잡하게 살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더 자전거를 타려고 한 건 아닌가 싶어. 무료하게 버스만을 바라보면서 기다리거나 싶진 않거든. 사실 자전거를 타면 사무실까 지 40분이 걸리지만 버스 탈 때 보다 기분이 넘 좋거든. 우리집에서 사무실까지 왔다는 것도 기분이 좋고, 바람을 쐬는 것도 좋거든.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기

정 : 27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녹색에서 일한지도 3년이나 되었고. 녹색연합을 통해 네가 해보고 싶은 있다면 뭐가 있어? 홍 : 어렵다. 단기적으로는 녹색연합이 재정적으로 안정되었으면 좋겠어. 정말로. 근데 사람들한테 돈을 받아 내는게 쉽지만은 않잖아. 만원 한 장을 받기 위해 내 시간과 버스비를 들여서 사람을 만나는 거지 만 그 사람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오히려 돈 만원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더라고. 그런 재미가 요즘은 솔솔 있어.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고. 장기적 으로는 내 꿈인 환경교육센터나 지역교육센터를 만들고 싶은 계획을 가지고 있어. 생활 속 환경운동 을 실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연결하는 그런 일을 만들고 싶어. 꼭! 하고 싶습니다!!!

// 인터뷰시간 : 2007.4.8 pm 8:00 ~ 9:30


환경운동, 환경복지의 시작.

<인터뷰....누구나 부담스러워하는 것이기에 소소한 기쁨의 인터뷰는 결코 어렵지 않음을... 그냥 편 하게 대화를 나누면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소소한 기쁨과 인터뷰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GO~~>

내가 선택한 길. 그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 정 : 대학에서 정보통신공학을 공부를 했는데. 흥사단에는 어떻게 발을 딛게 되었나요?

서 : 얼마 만에 일요일에 쉬어보는 건지.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낮잠을 잤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네요.

서 :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애증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청소년활동을 했었죠. 청소년열린 광장이라고 하는 작은 규모의 단체였는데. 작아서 너무 좋았죠. 진솔하고 꾸밈이 없어서. 그 때 경험 한 소중한 것들 때문에. 대학을 가서도 그 연장선 상에서 활동을 했죠. 그러다가 군대를 갔고. 군대 를 갔다온 후에 대다수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고. 의미있는 무언가를 갈구하면 서 그러던 차에 운좋게 흥사단에 자리가 생겼는데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배의 권유가 있어서 들어오게 된거죠.

정 : 좋겠다. 낮잠도 자고. 그럼 시작해 볼까? 먼저, 자기소개를 하다면?

정 : 그럼, 고등학교 때 경험한 청소년 단체활동이 지금까지 흥사단에 있게 만든 거라고 할 수 있겠네?

서 : 참, 부담이구만. 서정이라고 하구요. 카페닉네임은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광주광역시 청소 년활동진흥센터에서 청소년들 봉사활동꺼리 개발, 시스템 관리 등의 활동과 그 외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서른정도된 실무자로 일하고 있구요.

서 : 그렇죠. 그게 삶의 원동력이죠. 지금도 그 때의 경험들이 있어서 지탱하고 있는 것 같고.

정 : 눈이 많이 부었네.

<담배가 떨어져, 잠시 인터뷰를 중단하고 담배를 사가지고 오다>

정 :청소년활동진흥센터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청소년활동진흥센터가 어떤 곳인지 소개를 한다면? 서 :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10년전 교육부에서 청소년(학생)들에게 봉사활동이 필요하고, 이를 체계적 으로 관리운영할 수 있는 기관도 필요하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청소년자원봉사센터에요. 10년 정 도 운영을 하다보니까 봉사활동 이외에도 더 많은 더 폭 넓은 청소년활동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 하다는 생각에 작년 7월에 청소년자원봉사센터의 명칭을 청소년활동진흥센터로 바꾸게 된거죠. 소 속은 국가청소년위원회구요 전국 16개 시도에서 운영을 하고 있는데. 광주의 경우에는 흥사단이 운 영하고 있죠. 정 : 그럼, 일한지는 얼마나 된거야? 서 : 얼마 안되었는데... ^.^ 청소년활동진흥센터에 일한지는 한 달 정도 되었구요, 그전에는 흥사단에서 4~5년 정도 일을 했죠. 정 : 활동진흥센터에서는 완전 초짜네. 그럼 흥사단에서는 어떤 일을 했어? 서 : 두서 없이 이것저것 일을 했죠. 청소년 업무라는게 꼭 정리되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안문제에 대한 즉각대응을 하는 경우도 많고. 또, 흥사단이 시민단체이다 보니까 청소년 업무외 시민운동에 대한 지 점에서도 고민하고 실천도 해야 했고 조직의 요구에 따라 총무업무도 보고, 조직업무도 보고, 청소년 업무도 보고. 실무자가 많이 부족해서 이것저것 다양한 경험을 했죠. 참, 농성문화의집을 개관초기에 는 문화의집 업무를 보기도 했구요.

정 : 흥사단에서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들은?. 서 : 질문이 좀 어려운데. 내 식대로 그냥 이야기한다면 학교교육의 빈틈들이요. 가르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왔죠. 그래서 인문학적 요소들에 대한 끊임없는 접근을 해왔죠. 시대의 가치가 무엇인지, 청소년업무는 성과가 잘 드러나지 않거든요. 적지 않은 일들을 했었는데. 일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변혁의 과정에서 아이들과 소통하는게 어렵더라구요. 가치설 정의 문제라든지.지난 3월에 활동진흥센터로 넘어가면서 했던 고민이 있어요. 그 동안 이런저런 많 은 활동을 했지만 어떤 커다란 것들을 이뤘다는 것이 딱히 없더라구요. 이룬 것이 없어서 잘 못 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구요. 정 : 이뤘다는 표현을 하는데, 예를 든다면 뭘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서 : 내가 했던 어떤 것들이 정책화 되는 것 뭐 그런거죠.. 많은 활동들을 했지만 허무함을 느낄 때가 많았죠.. 성과가 안 들어난다는 답답함 때문에. 청 소년과 만나려면 사회적인 나의 깊이가 있어야 하 거든요. 예를 들어, 평화, 생태, 생명 등을 아이들과 이야기해야 하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이런 것들 을 풀지 못한 상태에서의 어려움은 커져가고, 결국 기존에 활동하던 단체생활을 일정정도 마감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렇다고 그만 둔 것은 아니고. 자리를 옮겨서 활동진흥센터에서 다시 일을 시작 한 거죠. 기존의 단체보다는 영역이나 내용을 더 구체화 할 수 있고, 또 청소년이라는 고민에만 집중 할 수 있게 된거죠.


내가 선택한 길. 그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

무엇을 꿈꾸는 가?

정 : 자원봉사로 아이들의 활동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잖아. 또 그걸 직업으로 해서 활동을 하고 있 고 실제 아이들의 반응은 어때?

서 : 그것이 마음 먹은대로 안되더라고. 지금은 헤어진 상태고. 요즘엔 결혼을 빨리 할 것인지 늦게 할 것 인지가 고민인데 그 중심에는 돈 문제가 있죠. 결혼과 사랑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건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모호한 상태라서. 이것저것 제 주위에 복잡한 일들이 많아서 쉽지 않 네요.

서 : 대단히 수동적이죠. 자원봉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원봉사가 아니예요 알잖아요. 20시간이라 는 의무시간을 채워야 하는 형식화 되고, 의무화된 봉사활동은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 도 있구요.그래도 희망적인 건,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청소년들이 있다는 점이죠. 자신이 가진 것 들을 타인과 나누려는 모습들. 아름답잖아요. 또, 최근에 대학에 “사회봉사” 교과목이 개설되었는데 여기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그 동안의 생활에 후회를 많이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봉사활동에 많은 의 미를 부여하게 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게 되고. 그런 점은 매우 긍정적이죠. 정 : 음, 좀 다른 걸 물어볼께. 궁금해서 그러는데. 청소년프로그램 인증제를 하고 있잖아. 내 개인적 으로는 청소년프로그램을 국가가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평가를 하는건 문 제가 있다고 생가하거든. 특히 종이 몇 장의 계획서로 평가를 한다는게 우습기도 하고. 그것에 대 해 어떻게 생각해? 서 : 활동진흥센터에서 일한지 한 달 밖에 안되서 뭐라 이야기 하기 좀 그런데. 일종의 평가시스템으로 보면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인증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죠. 센터에서도 뭐라 이야기를 못하고 있고, 뭐 전국센터들 거의 다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쉽게 정리되지도 않을 테고 쉽게 정착되지도 않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죠.

무엇을 꿈꾸는 가? 정 :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볼께. 개인적인 관심은 뭐야...

정 : 우리 모두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잖아. 그 속에서 쉼이 필요한거고. 넌, 그 쉼을 어떻게 찾고 있어? 서 : 아주 간단한데. 일하다 쓰러지는 거죠. 그럼 쉬는 거고. ㅋㅋㅋ. 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없는 일도 만들어 내서 하는 사람인데, 조건을 크게 바꾸거나 인생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쉽지 않잖아. 일하다 쓰러지는 것이 쉴 수 있는 명분도 되고. 정 : 그래서 쓰러져봤어? 서 : 그것이... 안 쓰러지더라고 ^.^ 쓰러지곤 싶은데 세상에 노력해서 안되는 일도 있더라고. 쉼 보 다는 충전을 고민해요. 쉼이나 충전이나 비슷한건가. 자기 개발을 위해서, 장기적 안목으로 자기시간 을 내는 방법을 찾죠. 예를 들어 해외연수를 간다든지 자기 연수를 만들어 낸다든지. 정 : 참, 작년에 해외연수를 갔다왔잖아 서 : 작년에 5.18기념재단 진행한 5.18아카데미라는 걸 통해서 10일정도 해외연수를 갔다 왔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필리핀, 네팔, 태국 등 3개국을 갔다 왔죠. 정 : 가서 뭘 느꼈어?

정 : 연예는..?

서 : 마음이 많이 아팠죠. 왜냐면,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경제적 우위에 있는 나라잖아. 그러나 우리나 라 사람들은 별로 행복해하지 않고. 근데 가서 보니까 그 나라 청소년들은 더 척박한 상황에서 살고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대단한 모델로 보고 부러워하고, 외국인 노동자로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고 싶어 도 하고. 어쨌든 작년에 외국을 나가서 보다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고, 쉼도 얻고, 좋은 경험이었죠. 또 언제 이런 기회가 나에게 찾아올 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죠.

서 : 해야죠.

정 : 흥사단에서 활동할 때보다 활동진흥센터에서 활동할 때 시간적 여유가 더 많잖아. 우리 같은 부류 는 일속에서 여유를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여유시간을 보내고 있어? 일종의 충전의 방법이랄까?

서 : “결혼과 사랑“이죠 뭐.

정 : 안하고 있는거야. 아님 안할꺼야.

서 : 기존에는 잠을 많이 잤죠. 일에 치여서 잠을 자는게 남는 거라는 생각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TV를 보거나 산책을 좀 했죠. 최근에는 체력에 대한 고민이 많이 들어서 운동을 하려고 하고. 체력이 좋은 놈이 오래 가더라. 참,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좀 더해서 개인적인 봉사활 동을 좀 해 볼까 생각도 하고.


네트워크는 의무 !!

“30대 중반에 섬 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

정 :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아주 중요하잖아.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그런 네트워크 말이 지. 실제로 그런 네트워크에 필요성에 대해 종종 이야기 하잖아. 서정씨가 생각하는 활동가들의 네트 워크에 대한 생각 또는 가치를 묻는 다면?

修相한교육문화공동체 결 운영요원, 김주일

서 : 연대와 소통. 알다시피 자유대학을 통해서 그런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나 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의지가 되기도 하고, 그러나 현실에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혼 자가 아닌 같이 만들어 내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죠. 특히나 우리 같은 활동가들은 다양한 입장들 그리고 여건들 속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합의하는 과정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데, 이것이 네트워크의 필요성이라고 생각하죠. 네트워크는 의무예요. 의무!

예전부터 이야기를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하다가 겨우 점심시간 즈음으로 해서 미팅 을 잡고 피자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청 부지런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김주일씨는 광주에서 대안교육 운동을 준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修相한교육문화공동체 결’에 상근자로 11월 달부터 일하고 있다. 일에 시작을 ‘우연한 인연’으로 말 하지만 사실 대학교 때부터 자원봉사 활동으로 ‘많은 인연’을 맺고 있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 은 청년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단체이다 보니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성실하고 묵묵히 사무실을 지키면서 미래를 준 비하고 있다.

// 인터뷰장소 : 상무지구 미스터피자 // 인터뷰시간 : 2007.4.3 pm 11:30 ~ 14:00

문화적 리더쉽을 가진 교육전문가 꿈꾸며 정 : 문화중심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잖아. 서 : 어려운 질문인데. 솔직히 문화중심도시에 대한 논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죠. 특히나 최근의 모습 은 지역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외부 전문가들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 같고. 대중적 괴리감이 크 다는 생각이 들죠. 지역사람들이 돌보고 가꿔나가야 하는데, 지역사람들의 이야기는 담겨있지 않 다는 안타까움이 크죠. 조금씩 나아져야겠지만... 정 : 문화적인 광주를 만들어야 가는 것이 활동가인 우리들이 해야하는 일이잖아. 그렇다면 너의 일터에 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서 : 활동진흥센터의 영역이 많이 넓어진 상황이라 청소년들과의 다양한 작업, 활동 속에서 제 역할을 찾을 수 있겠죠. 저는 21세기 청소년들은 문화적 리더쉽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특 히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사회에서 이 친구들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질테고. 그런 지점에서 청소년 들이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함께 노는 작업을 하면 되지 않을가 싶네요. 정 : 10년이 지나 마흔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고 싶어? 서 : 교육에 대한 실제적인 전문가, 활동가가 되었으면 하죠. 학교사회를 바꿔나가는 컨설턴트라든지 코디네이터라든지. 저 또한 문화적 리더쉽을 가져야겠죠. 그러기 위해서 엄청난 내공을 쌓아야 할 테고, 갈 길이 머네요.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모상근


인연’에 의해 이끌린 ‘修相한교육문화공동체 결’

학생과 교사가 수평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교감하고 공부할 수 있는 교육공동체를 꿈꾸며...

모 : 지금활동하고 있는 곳은 어디이고 주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김 : 원래 제가 여기에 내려오기 전에는 서울에 있는 보안업체(IT)에 근무했었습니다. 그때는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고 싶기도 했어요. 일도 아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일을 그만두고 보니, 주변에 의외로 많은 일들이 있드라구요. 특히 문화적인 내용을 고민하고 또 그 활동 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드라구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고 마음을 먹었습 니다. 비록 돈은 잘(거의) 안되지만, 의미 있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한번 살아보 려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활은 3년 정도를 기한으로 살고 있는데, 3년 동안은 아주 열심 히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예전에 일을 했던 보안쪽 관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하는데, 바램이라면 나중에 대안학교를 만들었을때, 관련을 맺을 수 있으면 좋 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김 :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修相한교육문화공동체 결’이고, 전체적인 회원 및 회의 연락과 홈페이 지 관리, 매월 소식지를 발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참, 그렇다고 항상 그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생길때마다 긴급히 투입되는 ‘리베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는 ‘결’ 일과 동 시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시범프로젝트인 에듀컬쳐의 교과연관프로그램 개발팀 중에서 ‘고물상학 교’에서 팀원으로 활동 중에 있습니다. 모 : 결은 무슨 활동을 하는 곳인가? 김 : 광주지역에 다양한 사람들(회원들을 보면 정말로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교사, 학원강사, 직장인, 전문활동가 등)이 모여서 궁극적으로는 ‘비인가형 대안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모임입니다. 모 : ‘결’과는 언제부터 같이 하게 되었나요? 김 : 작년 11월에 몸과 마음이 지쳐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와서 방황하던 중 민문식 선 생님의 권유에 의해 이 일이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참여하게 되었습니 다. 몰론 그 이전부터 활동하던 자원봉사활동에서 생각하던 ‘유목민의 삶(노마드)’적인 동경에서 참 여하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삶도 좋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살아 보는 것도 삶의 단면 으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 : 재밌게 사는 삶이란 어떤 건가요? 김 : 매일 놀고, 먹고, 자고, 술 마시고 하면 즐거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한 달이면 질리는 것 같아요. 제 몸을 움직여서 땀 흘리고 사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요.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살아가는 사 회가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 물론 경제력이 실제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 그래 서, 경제적인 문제에 많이 억매여 살지만,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살면 일상의 많은 짐들을 놓을 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참, 저에 삶에 이상향은 ‘섬’에 들어가서 사는 겁니다. 아마도 저에 나이가 30대 중반 쯤이 되면 (전라)남도 쪽에 아버님 명의의 섬 - 엄청나게 부자(?)인 것 같음 - 이 하나 있는데, 그 섬에 들어가서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어요. 예전에 아버님이 생 활을 하셨던 섬이었는데, 지금은 삼촌 한 분이서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그 섬에 들어가서 사는 거죠. 뭐 하나 풍족하지는 않겠지만, 나름 재미도 있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같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 금상첨화가 아닌가요? 나중에 마을이나 집을 만들게 되 면 언제든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마음만 맞는다면 언제든 대 환영입니다.

학생과 교사가 수평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교감하고 공부할 수 있는 교육공동체를 꿈꾸며... 모 : 결에서 활동하게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모 : 비인가 대안학교를 준비하는데, 대안학교라고 하는 것은 본인의 상이 나름대로 정확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경우도 많은데, 본인이 생각하는 상은 무엇입니까? 김 : 2006년 11월 달에 이 일을 한 번 해보자고 결정을 했는데, 저에게 있어 그 판단의 핵심은 ‘내 삶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인연이 닿아서 그 새로운 것이 바로 이 일이 된 것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안교육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주체가 동일한 수평선상에서 많은 이야기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어가는 교육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런 식의 규정은 ‘대안교육에 대한 정확 한 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상당히 구체 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꼭 완 결된 지향을 가지고 일을 하지는 않지 않나요? 큰 줄기의 방향만 있다면 구체적인 내용들은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충분하게 채워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을 선택하게 된 것 도 ‘인연’이듯이 아마도 저에게 다른 인연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모 : 그렇다면 지금 하시는 일들은 만족을 하시나요? 김 :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장단점이 하나씩 보이는데, 장점이라면 많은 사 람을 알게 된 것이 좋은 것 같다. 일을 해 나가는 과정이 사람과의 끊임없는 관계를 가지고 고민을 많 이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예전에 제가 경험할 수 없 었던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다보니 평소에 하지 못했던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좋고, 여유롭게 생활 하다보니 몸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예전에 일을 하면서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었는데, 이 일을 하 게 된 뒤로는 상황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아마도 게을러진 것이 아닌가 하는데, 하여간 저는 나름 만족하고 살고 있습니다. 단점이라면 이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느끼겠지만, 경제적으로 여 유롭지 않다는 것이죠. 제가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하다보니, 주변에 도움을 많이 주지 못하고 있 는 상황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원 강의를 해 볼까도 생각을 해 보고 있는데 그것도 해답은 아닐 것 같아 고민만 하고 있습니다.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이야기하 자면, 여전히 진행중인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괘가 ‘부모가 있는 고아’ 라나요. 그래서 집에서도 지켜보고만 있는 것...

“지금, 무엇이 중요한가를 함께 고민할 때, 네트워크의 길이 열린다. ”

모 :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이런(?) 일을 한다고 하면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 부모님 이랑 관계는 어떻하구, 혹시 문제가 있을때 푸는 방법은 있나요?

정보문화산업진흥원, 김은영

김 : 내라서 부담은 없습니다. 예전에 일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어머님이 답답하셨는지, 저 몰 래 점을 봤답니다. 그런데 그 점괘가 ‘부모가 있는 고아’라고 했다네요. 즉 풀이를 하자면 ‘그 애는 가 만히 놓아두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 라는 해석인데, 지금에 저에게는 아주 최고의 점괘가 나온 거 라고 할 수 있죠. 부모님이 그런 점을 아주 믿으시는 편은 아니지만, 점괘가 그래서인지 크게 머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아직은 하는 일을 이해하시는 편은 아니지만, 나름 제가 사는 것을 지켜보고는 계 시는 것 같아요. 이해가 되려면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집안 보다는 오 히려 주변에서 머라고 그러는 사람이 많습니다. IT쪽 일을 접는다고 했을때, 선배들이 말이 많이 했어 요. ‘그 동안 공부한 것이 아깝지 않냐.’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는 것이 어떻냐?’ 등 반응이 말리는 분 위기였죠. 아직도 자주 연락이 옵니다. ‘어디에 자리가 났으니 일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저도 처음에는 잠을 자다가 꿈을 꿀 정도로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 꿈의 결론은 기억이 안 나지만 말입 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안정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거의 그런 고민을 안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 히려 지금은 마음이 많이 편안합니다. 모 : 자기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키운 내 인생에 8팔은 무엇인가요? 김 : 있어도 생각하기가, 그리고 정확하게 규정을 해서 말하기가 어렵네요. 생각을 해 보면 있기는 있습 니다. 친 형님인 것 같다. 나이 차이가 10년 정도 나는데 조카뻘이라 어려서부터 많이 이끌어주셨습니 다. 제가 처음 술을 배운 것도 형님으로부터 이고, 군대를 갈때나 직장을 다닐때 많이 도움을 주었습니 다. 생각을 해보면 부모님과 거의 비슷한 무게를 가지는 것 같아요. 저희집 사람들의 성격들이 잔정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잔정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인 표현이 아주 약한 특징을 아주 잘 드러냅니다. 그렇 다보니 형님과의 기억도 아기자기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대화나 통화속에서 무한 한 관심과 애정을 느끼는 때가 많아요. 제가 살아가면서 인생이나 고민의 상담자 역할을 해 주시죠

나만의 색을 찾는 것이 앞으로 목표이다. 모 : 앞으로 하고 싶은 활동이나 관심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김 :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줏대 없이(?) 사는 것 같아요. 정확한 나에 색이 없다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뭐가 되든 간에 나만의 색깔을 찾는 것이 앞에서 말한 3년 동안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안이 되 었든, 아니면 문화활동이 되었든 간에 말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대안학교가 될런지도 모르죠. 모 :나에 색을 갖는다는 것은 뭐지요? 김 : 제가 생각해도 저에 성격이 물렁물렁한데요. 마치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합니다. 물론 이것 자체 가 저만에 색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그것보다 확실한 그 무엇을 잡고 싶습니다. 무엇일지는 위 에서 말한 것처럼 아직은 알 수가 없구요.

김은영 주임은 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한 문화컨텐츠를 제작 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지원하며, 동시에 컨텐츠의 유 통을 위해 제작자와 기업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좋은 컨텐츠의 소재는 일상과 지역 문화 속에서 찾을 수 있 고 최고의 사람들이 최선의 팀워크를 발휘할 때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또한 문화적 방식-축제나 전시-등을 통 해 홍보, 유통함으로써 시민과 대중에게 문화적 자산이자 가치로서 환원하는 방법들을 고민한다. .

// 인터뷰장소 : 도청 앞 카페 // 인터뷰시간 : 2007.3.17 pm 04:30 ~ 7:3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모상근, 천윤희


문화가 도시 공간에 스며있어 자연스러운 바로 그 곳, 열린 광장 문화를 상상하다.

조직의 비전을 창조적으로 실현해내는 매개자가 중요하다.

영 : 문화는 자유다. 각각의 자율성과 다양성이 인정되고 저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랄까. 오 스트리아 빈에서 경험했던 게 기억난다. 우리는 ‘왈츠’하면 클래식 음악이라고 우아하고, 혹은 고급 취향의 예술이라 생각하지만, 빈에서 왈츠는 길에서, 혹은 길을 지나다가 자연스럽게 만나고 춤출 수 있는 음악이다. 그날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왈츠에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어려웠 다. 한 발자국 내딛는 그 차이가 크다. 난 사실 그런 도시를 꿈꾼다. 열린 공간 안에 자꾸 접하면 언젠 가는 나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문화 속에 그렇게 되지 않을까.

영 : 아무래도 조직 내에서는 내 개인적인 견해들을 잘 말하지 않게 된다. 사업방향들도 저마다 다르니 까. 다만 난 정말 미약하나마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미래에 내가 어디에 속하고, 혹은 원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하지만, 오늘의 내가 나름 참 좋다. 오늘 같이 이런 이 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좋고, 또 나와 같이 그런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속 후련하게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장’을 만드는 것은 의미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계를 넘어 우리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지 등을 인식하고 서로를 자극한다 면, 새로운 세계로 넘어갈 것이다. 때론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그런 견제도 해 줄 수 있고, 인간적으 로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해주고 비판도 해줄 수 있는 건강한 신뢰관계가 필요하다.?

천 : 하하. 맞아요. 우리는 여전히 문화예술이 계층적으로 느껴지지, 일상과 맞닿아 몸에 스며들지 못한것 같아요. 유럽에 가서 저도 그러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태도에 놀랍고 부러웠지요.. 영 : 문화중심도시 사업이 비록 위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함인지 잊 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즉 그들이 ‘체감’한 것이 분위기를 바꾸어가는 것 아닐까. 일본은 1980년대 도시활성화마케팅이 활발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협의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예를 들어 기업체가 모여서 위원회를 조직하고 협찬도 만들고, 시는 공간을 지원하고. 이러한 과정 속 에서 민과 관, 시민이 모두 함께 공감하고 협의하며 같이 만들어갔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최근 일련의 문화중심도시 관련 기사들이나 여러 상황들을 보면서, 비록 공공재로 시작했으나, 그곳에 사는 사람 들, 즉 ‘동구’ 상권을 살리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재 발전을 위해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랄까. 예를 들어, 이런 사업에 동참하여 나도 얻는 것이 있어야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겠는가. 영 : 광주를 상상하면서 내가 꾸는 꿈은, 광주가 축제의 도시화가 됐으면 하는 것이다. 5·18, 5월은 커다란 이슈가 될 수 있다. 5·18을 경건하고 성스럽고 뭐랄까 그런 분위기로 상상들 하지만, 현재와 미래에도 광주 시민의 자긍심이 될 수 있도록 새롭게 승화된 축제들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천 : 5·18은 광주하면 떠오르는 상징적 요소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광주 하면 어떤 문화컨텐츠를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영 : 기존 에 있는 것을 잘 살펴서 ‘꺼리’가 될 만한 것을 찾고 상품화하고 제작해서 실제 돈을 만들게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광주에 콘텐츠 소재가 없다고들 하지만, 무엇이든 집중해서 깊이 파고들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단순히 예산이 있다고, 관에서 하자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시 민들이 원해서 단체에서 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즉 민간에서 자발적으 로 움직이고, 또 거기에 투자하고자하는 맘이 들 정도의 질이 갖춰져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은 모든 이익이 시민에게 간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 -긍지와 자부심-가 이 도시에 대한 자긍심과 맞물려있다. 광주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뿌듯하다는 맘이 들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주말에 시 간이 나서 어쩌다 밖에 나오면, 열린 광장에 다양한 문화 활동들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고급스런 레스 토랑이 비싸서 못 갈지 라도 소소한 가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광주, 열린 광 장에 문화가 가득한 광주가 되었으면 한다.

천 : 코드를 잘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 맞추되, 내용으로 신뢰감을 주는, 과정상의 지혜가 필요하다 조직 내에서는 여러 의사 결정 과정 중에 늘 일종의 조율이랄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나. 더 나 은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작업, 꼭 지켜야 할 것이나 반영되어야 할 것 들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한다. 처음 시작할 땐 내가 할 수 있는 범위가 아주 적었다면, 끊임없이 노력 하면서 점차 나의 의견의 반영지점이 넓혀져 간다. 일종의 인내심 있는 쌈질 과정인데, 포기하지 않으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데, 당장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면, 그 것은 정말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다. 몇 년 뒤를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지금 해야 할 것들을 늘 생각하며 산다. 그 기준은 내 일이 문화콘텐츠 제작과 유통, 즉 창작자 와 향유자의 다리가 되는 일이다 보니, 더더욱 내가 포기하면 그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없을 것 을 생각하면 늘 긴장하게 된다. 특히 이 지역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 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한 조직의 일원인 이상 조직의 비전과 방향이 가장 중 요하겠지만, 일하면서 느끼게 되는 건, 바로 그 자리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무척 달라진다는 점이 다. 조직의 비전과 나아가는 방향과 맞추어야 하지만, 그에 대한 실무자 나름의 그 내에서 자기만 의 가치나 명분을 찾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창조적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때론 비전을 이야기 하면서도 정작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잃어버린 상황들을 간혹 보게 된다. 항상 나는 이 기획이 ‘누 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위해 하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기획안을 짠다. 하하. 그대로 되는 건 아 니지만, 늘 안 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심 위안을 삼는다. 내 조그만 노력으 로 좋은 기업들이 일하게 되고, 또 그 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아 꿈을 펼치는 모습들을 보면 기쁘 고, 마음 뿌듯하다. 그런 것 많다.

사회복지를 찾아 나서다 만난 문화산업, 나의 일은 문화로 하는 기업복지다! 영 : 전대 일문과를 다녔는데, 4년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일본어도 못했다. 하하. 당시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자원봉사하면서, 사회복지가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일거라 생 각하고 3학년부터 고민했다. 내내 사회학, 철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결국은 다른 과를 선택했


조직의 비전을 창조적으로 실현해내는 매개자가 중요하다. 어도 일본어 정도는 하고 싶었을 것 같다. 갑자기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1년 동안 어학연수 다녀와서는 다시 일본에 들아 가 2년 정도 대학원 연구생 과정으로 있었다. 그 과정은 석사 입학하기 전, 시험 준비를 위한 과정인데, 내가 생각했던 학문이 아니었다. 사회복지사가 되려면, 주대상인 아 동, 미혼모, 노인 분야 등을 선택해야했는데, 나는 좀 더 포괄적인 것을 원했다. 고민 중에 내 길이 아 닌가 해서 그만두고, 영어도 배우고 싶고 여행도 하고 싶어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3년간 있었다. 여행 하고, 아르바이트하고, 영어 배우고 그러던 날이었다. 특별히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생각도 없었는데, 광주에 정보문화산업진흥원이 있다 길래, 나는 문화산업, 전통문화, 문화예술 산업 쪽으로 만든 건가 보다하고 지원했는데, 실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나는 지금 일이 좋다. 마케팅이 적성에 맞아서 업체들 도와주고 계약되면 엄청나게 기쁘다. 난 기업복지한다고 생각한다. 천 : 문화와 기업과 연결, 그것은 또 다른 영역일 것 같다. 어려운 점은 없나? 영 : 많이 부딪힌다. 이 행사 왜 하나?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업체의 욕구를 들어야 하지 않나. 위하고 자 하는 사람들의 어떤 성과나 보람을 생각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부딪힌다. 보통 사람의 수나 성 과로 사업들이 판단되지 않나. 어디나 그렇겠지만, 그 안에 보다 중요한 것이 간과 되지는 않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바로 그 때, 그 경험은 무엇일지라도, 지금의 일과 나의 삶의 자산이 된다. 천 : 문화 쪽에서도 특별히 더 애정을 갖는 부분이 있나요? 영 : 실은 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 면접을 보는데, 과장님이 “애니메이션 좋아하나? 뭔지 아나? ” 하고 묻더라. 그래서 “겁나 좋아합니다!” 했다. 아마도 과장님은 잠시 고민했던 것 같다. 질문의 의도를 알 고 잘 보일려고 하나, 아니면 진심인건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 질문이 좋아하는 감독과 작품 말해봐라 하길래, 조잘 조잘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해도 되는 면접은 처음이었다. 하하. 그 렇게 된 거죠. 난 정말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다 찾아보고, 줄줄 외울 정도였거든요. 일과 연계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가끔씩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을까? 가끔씩 심난할 때. 뒤돌아보면 지금 이때를 어 떻게 생각할까 스스로 깊이 성찰해본다. 진흥원 들어 온지 3년 정도 되었는데, 그동안 이 곳에서 경험 한 것 버릴 것 하나 없구나 생각한다. 아르바이트 할 때 고생스러움도 결국은 다 배울 것이 있었고, 지 금 조직의 일을 할 때, 때로 힘들어도 참는 것은 ‘인내하는 법을 가르치는 구나’생각한다. 천 : 후. ‘인내’를 배우는 것, ‘때’를 아는 것, 이 모든 것이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듯 보여도 중요한 배움이 아닌가 싶어요.

영 : 그렇 죠. 하하. 하고 싶은 말 그대로 하는 게 다가 아닌 것 같아. 꾹 참는 법도 배우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경험으로 배우고 있어요. 사실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가슴으로 느껴, 가 슴으로 담아둔 것들을 언젠가 펼치는 때가 있을 것 같아. 예를 들어, 벤치마킹 많이 나가는데, 여기 저 기 보고 들으면서 사실은 광주에 이런게 있으면 참 좋겠다. 이게 적절할 것 같다. 많이 생각하고 담아 두어요. 지금 나름대로 좋아요. 아쉬운 것은 외국에 있을 때, 좀 더 이 분야를 알고 있었더라면 여행하 면서 그 관점으로 봤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거에요. 건축이나 미술 전공하는 사람들은 유럽에 있으 면 건물 건축 보면서 감동하고 처마 밑만 봐도 감동하더라. 나는 모르니까, 수박 겉 핧기 식 아니었나 싶어요. 나도 전문적인 분야에 있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땐 나 에겐 딱 그 만큼 해야 할 이유가 있었겠지 생각해. 근 : 그 마음 알 것 같아요. 사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 과거의 나의 선 택과 생활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기에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나이 또래에 겪고 느꼈던 것들을 당시 의 나는 이해 못하다가 나중에 내가 겪으면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영 : 그래요.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난 딱 그 정도로 밖에 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나름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사람들은 내가 많이 돌아다니면서 살았다고 대단 하다고 들 하는데, 나는 행복한가? 내 삶에 만족한가? 뿌듯한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못하고 살면 서 불평불만만 하고 사느니 나는 맨땅에라도 해딩하며 살기를 선택한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욕심이랄까.

관계된 모든 요소 간의 ‘합의’의 과정 기획이 중요하다.. 천 : 앞에서 문화중심도시 이야기 하면서, 관계된 모든 인자 간의 ‘합의’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는 데, 무척 공감해요. 그러나 그것을 모두 알면서도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합의’의 비밀 이 있다면, 과연 그건 뭘까요? 영 : 객관이라는 것은 각자의 주관이 모여서 된다고 하더라. 완벽한 객관은 없는 것이다. 합의를 본다 는 것도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힌 건데, 그 내에서 합의를 본다는 것은 일종의 공통분모를 안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공의 선이든, 사명감이든, 어떻게 동기 부여 할 것인가가. 나중에는 ‘이렇게 할 수 있다’를 상상하며 공감을 만들어가는 것. 일종의 감동이랄까. 혹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있는 솔직함.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각자의 이해관 계,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모두가 잘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보통은 나


관계된 모든 요소 간의 ‘합의’의 과정 기획이 중요하다..

경험이 비로소 소중함을 발견케 한다.

영 : 개인적으로 난 기업체들을 많이 생각한다. 지원사업을 할 때, 사실은 각 분야별 전문영역이 있다 보니, 한 업체가 다 잘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각자 영상, 미술, 미디어 잘하는 파트가 있을 때, 더 잘할 수 있도록 파트너쉽을 맺어서 최선의 결과를 모색했으면 하는데, 질이 낮아져도 보통은 단 독 업체로 진행 하고 싶어 한다. 문화산업의 경쟁력은 결국 콘텐츠의 질이고, 우리는 최상의 질을 하는데 말이다. 지역 내에서도 이러한 현상에 큰데, 국내 경쟁력은 물론 해외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나 고민하게 된다.조금만 욕심을 버리고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만 들 것 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서로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들, 최고의 사람들이 팀을 짜서 뭔가 멋진 작업을 해내었으면 좋겠다. 광주 문화중심도시 사업도 보면, 분야별로 자꾸 분절화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공감각적인 시대이다. 정말 큰 그림 보려면 서로 협업해야한다. 끊임없이 관계 된 요소 간에 협의체를 구성해서 결국 어느 파트나 분야가 아니라, 전체적인 얼개에서 일관되게 할 수 있는 기획을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광주 전체 그림 안에서, 광주 비엔날레 연계 해서 시너지 효과 만드는 것도 구상되면 좋을 것 같고. 중요한 것은 보다 큰 비전을 갖고 공통의 그 무엇을 고민하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지금은 이상하게도 모아놓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그 이유가 뭘까. 하하

근 : 전 외지에서 오신 줄 알았어요. 하하

경험이 비로소 소중함을 발견케 한다. 영 : 왠 사진을 그렇게 찍어요? 근 : 아. 김은영 샘 명함도 만들어드리고, 웹사이트에 올릴 이미지이기도 해요. 참 이거 볼래요? 제가 몇 년째 매년 겨울이면 지인들과 지리산을 다니는데, 이번에 가서 찍은 사진이에요. 영 : 지리산엔 딱 한번 가봤어요. 대학 1학년 때, 지금 안가면 평생 산에 못갈 것 같아서 개강하고 오리 엔테이션 하는 기간 중 혼자서 아무 준비도 없이 지리산 갔다. 얼마 못가서 힘들게 가는데 우연히 만난 강원도 오빠 5명을 만나 동반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준비 못하고 온 나를 돌보아주고, 짐도 들어주고 해서 난 빈 몸으로 다녀왔다. 뭘 모르니 그렇게 갔지만, 넘 힘들어서 다음에는 다시 갈 엄 두가 안 난다. 난 운이 좋다. 좋은 사람 많이 만난다. 원래 맹물을 안 먹는데, 아무 맛이 없어서 대 신 우유를 마셨다. 그런데 그 때 지리산 가서 너무 갈증 나서 물 먹게 된 이후로 물을 마시게 되었 다. 그 때 물을 준 사람도 마시기에 부족하게 병에 물 아주 조금 밖에 없었는데 나에게 주더라. 물 맛이 이렇구나 그 때 알게 되었다. 근 : 산 사람들은 모두 선해요. 고향이 어디에요? 영 :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광주에서 나왔다.

영 : 림 출생, 구림초등학교 2년 다녔다. 사는 게 다 재밌다. 영랑생가 옆이 우리집이었다. 우리 집은 관사였는데, 나 재수 할 때 다시 한번 가보았다. 영암에서 버스 갈아타고, 아스름히 내려서야 겨우 알 수 있을 것 알았는데, 그 때 목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길 하나도 생각 안 나더라. 어릴 땐 정말 넓었는데, 정말 작더라. 언덕도 가파른지 알았는데, 낮은 언덕이고, 놀았던 냇가가 있었는데, 또랑이더라. 고향하면 강진은 넘 어려서 생각이 안나더라. 숙제 내주어서 나뭇잎 따가는 거, 비온 뒤 단 내 나는 거, 거기에서 기억하는 것 같아. 그래서 고향하면 구림리 생각이 나. 근 : 일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에요?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서로 공감해가는 작업이 네트워크의 핵심이다. 영 :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이것을 생각한다. 최상의 질이기도 하다. 최근 다음 DAUM 사이트랑 일하게 되었는데, 이건 나름의 큰 성과다. 콘텐츠 제작자로 선정된 사람들에게 어떤 기회요인을 줄 것인가,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했다. 2억 규모의 사업일 지라도, 업체 지원은 아주 적은 금액이다. 공모제이기에 사실은 어떤 사람이 오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좋은 작품이 나오 면, 판매를 할 수 있는 길도 뚫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난 일단 의지와 열정을 갖고 해보겠다는 업체 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관에서 지원해준다는 차원만으로는 자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기업, 업체 스스로 자신들도 문화콘테츠로 수입모델을 만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민관투자가 필요하 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들이 많이 끌어주어야 할 부분이다. 즉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것, 시스템 만들어주는 것, 바로 정보문화 진흥원이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한다. 내가 가진 돈은 없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주고 도움 주고받게 하는 거. 사람이 재산이지 않은가.결국 사람이더라, 주몽이랑 괴물 라이센싱하는 업체도 남들이 불가능하 다고 했을 때, 사람이 사람으로 푼 것이다. 콘텐츠가 있다 해도, 상품 만드는 과정에서 기획하고 마케팅 하는데, 저작권 부분이 가장 어려운데, 그 조차도 사람이 풀더라. 신일숙씨 작품이 게임화 되었는데 작가 쪽에서 나중에 거절하면서 게임버전에서 다른 사람이 작업하니까 효과가 떨어지고. 눈앞의 이익 때문에 중도하차하는 경우도 많다.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 만드는 데 제작비도 많이 드 는데 그럴 경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수익을 냈을 때 러닝 개런티 등 방법 있을 텐데 그 게 참 어렵다.실은 조금만 서로를 이해해주고 공통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가능한 부분들이 있고, 무궁 무진 할 일들이 많다. 이 지역에도 전통 공예나 손재주 있는 사람이 많은데. 무형 문화 재 등 광주의 브랜드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 상품화 시키려면 어떤 방식으로 든 판매, 유통, 포장, 전략적 이슈화가 필요해. 네임 브랜드 만든다든지. 그것을 해주어야 한다. 현재 광주를 대표할 관 광 기념품 하나 없다. 광주에 가면 여기 아니면 경험 할 수 없는 것들로 차별화시켜야 해. 할 일이 참 많다. 광주비엔날레든, 광주문진위 든, 디자인센터 도 모두 할 일이 참 많다. 각자 역할을 제대 로 할 때 시너지도 날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뿌리를 보여주는 전시를 꿈꾸며”

‘칭찬’에 날아간 무대디자인의 꿈, 하지만 미술사의 새로운 꿈을 얻다

신세계갤러리 학예사, 오영란

모 : 그림은 어떻게 시작을 하게 되었는가요?

그리 크지 않는 키에 아직 대학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미리 얼굴을 알지 못하면 그가 미술관의 큐레이터임을 쉽게 알기 어렵다. 그가 일하는 곳은 광주에 소재하는 백화점 갤러리 중에 하나인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학부때 전 공은 회화를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서 미술이론 및 행정을 전공하고 우연히(?) 갤러리에 인연이 닿아 대학원을 마칠 즈음부 터 지금까지 약 2년여 가량 인연을 맺고 있단다. 백화점 갤러리의 특성상 많은 일반인들이 찾는 까닭에 “미술작품의 전문성 과 일반 대중들의 접점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 지낸다고 한다. 앞으로 일반인과 전문적인 예술 작품의 거리를 좁히는 다양한 활동들에 대해서 고민을 가지고 있단다.

// 인터뷰장소 : 1차 인터뷰 (상무지구 그랑비아또) 2차인터뷰 (신세계갤러리 안) // 인터뷰시간 : 1차 인터뷰 (2007.3.6 pm 11:30 ~ 13:30) , 2차 인터뷰 (2007.3.10 pm 18:30 ~ 20:30) 2차 인터뷰만 수록함.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천윤희, 모상근

오 : 어렸을 때부터 잘 하던 것이 그림이기는 했는데 한 번도 학원을 다녔던 기억은 없었다. 처음에는 하 고 싶다거나 이것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은 안 해본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내가 더 잘하거나 흥미 로운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하고 싶은 일은 방송국 피디 나 이런 것을 하고 싶기는 했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뭐 다 어릴적 꿈 이야기지만 하여간 어찌되었건 미대를 진학해서 지금은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모 : 그림을 그리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 오 : 첫 번째는 인생에 있어서 좌절을 경험했던 아픈 추억이 있다. 원래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로 진 학을 하는데 있어, 예고를 가려고 잠깐 준비를 하려고 상황을 알아보는데,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 동안 한 번도 학원을 안 다녀서 예고에서 요구하는 기본적인 상황을 충족할 수가 없 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그냥 포기했어야 했어요. 그때 나름대로 인생에 있어서 좌절을 경험했던 것 같 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원래 그림을 시작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장르는 디자인 영역이었어요. 하지 만 결국은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방향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아마도 자존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때문이 아닐까 해요. 고등학교 학원을 다닐 때, 원장선생님이 디자인을 되게 기술적인 것으로 치부 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디자인을 잘하려면 지금 상황은 ‘미적인 기본’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강조했던 기억도 있구요. 아마도 그 영향으로 디자인이 아닌 순수미술 쪽으로 방향이 결정 되어버린 것 같아요. 또 대학을 입학할 때부터 관심은 무대디자인을 전공하고 그 쪽 일을 해보고 싶었 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무대디자인과는 2개 밖에 없어 경쟁이 엄청 심했어요. 그 경쟁에서 성공 (?)하지 못하고 일반미대인 조선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대디자인의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1학년 때부터 편입을 준비했어요. 원래는 입시를 다시보기 위해서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집과 주변에서 반대가 심해, 어쩔 수 없이 일단 학교를 다니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떤 사회이든 간에 그 사회로 편입되면 그 나름의 생활이 존재하듯이 1학년 때부터 과대표를 하면서 학교 생활에 아주 잘 적응을 하고보니, 무대디자인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갔어요. 아마도 확실히 무대디자 인을 전공하는 것이 나에게 꿈으로서 가치를 잃어버린 것은 2학년 2학기부터 듣기 시작한 복수전공 (미술이론)을 하면서 부터인 것 같아요. 그때는 교직도 받고 있었던 시절이라 시간적으로 엄청 힘들 었지만 나름 재미있게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 거죠. 3학년 2학 기에 가서 너무 힘들고 도저히 시간표(전공과 교직과 복수전공)를 맞출 수가 없어서(생각해보면 내가 미대에서 처음으로 복수전공을 하다 보니 행정적인 시스템이나 인식에 있어서 많은 피해를 보았던 것 같다.) 교직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주변에서 만류가 많았으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피해를 주면서 막 연한 미래를 위해 교직을 이수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별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거든요. 모 : 그렇다면 대학교 2학년 2학기부터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싶었다는 말인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 던 것인가요?


‘칭찬’에 날아간 무대디자인의 꿈, 하지만 미술사의 새로운 꿈을 얻다 오 : 1학년 2학기때 서양과 동양 미술사를 들었는데 흥미가 있었다. 단순히 그림이나 유명인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알고 배경도 알고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름 열심히 했고 칭찬도 듣고 되고, 그래서 결국은 또 열심히 하고 되는 구조가 발생한 거죠. 그랬던 기억 이 제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정말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 또한 공부가 재미있다보니 도서관에 많이 다니게 되었는데, 특히, 도서관에 미술관련 책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1학년 겨울 방학과 2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시골 집인 여수에 내려가지도 않고 거의 도서관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화보집과 미술책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아 행복해 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모 : 예전에 학부때 기억으로는 작업도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거의 작업하지 못할 것 같다. 솔직히 미련 같은 것은 없나요? 오 : 대학 다닐 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복수전공을 하다 보니 4학년 때 많이 힘들었던 기억 이 있네요. 시간적인 이유도 이유이겠지만, 보다 큰 이유는 그림 그리는 사고와 공부하는 사고가 연결 이 잘 안 되어 많은 혼란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외국의 미술사가들을 보면 그림도 곧잘 그리는 데 나는 잘 안되는 것 같아요. 미술사적(이론적) 입장에서 그림을 보는 것과 실제 내가 직접 작업하는 것의 괴리감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느꼈죠. 하지만 그래도 졸업을 해야하기에 작업을 안할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대학원 가서 하나(공부)만 하니 살 것 같았어요. 공부만 하니까 시간이 남 아도는 느낌이 드는게 처음에는 또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대학원 1학년 때 는) 미술관 돌아다니면서 작품을 굉장히 많이 봤어요. 작품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스타일도 있고, 왜 작업을 저렇게 하지? 라고 생각이 드는 작업도 있더라. 아마도 낮은 수준이지만 작품을 보는 시각 이 생긴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어요. 그래도 가끔 좋은 작품을 보면 붓을 들고 싶은 욕 구가 1년 넘게 가더라구요. 물론 이후로는 미술 이론쪽 공부가 많아지고 집중하다보니 작업과는 차 차 멀어지게 되었어요. 하여간 지금은 작업을 안하지만 그래도 이런 경험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그 림을 보는 두 가지 시각이 생겼던 것을 느끼겠더라구요. 비판적인 입장, 즉 평론가적인 입장과 순수하 게 작업을 하는 입장. 새삼, ‘작업하는 사람들과 평론하는 사람들과는 정말 큰 차이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정리가 조금은 되는 것 같더라구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머리로만 느끼던 문제를 마음으로 끌어안다. 천 : 미술관에서 어떻게 일을 하게 되었고, 혹시 하시는 일에 전시를 기획하는 것도 포함이 되어있는가요?

오 : 대학원 마지막 학기때 논문이 한 학기 딜레이 되었는데, 발표하는 중에 자리가 생겨서 시험을 봤는 데 합격이 되었어요.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 해봐야 시립미술관에서 잠깐 전시 설치하는 일을 해 본 것이 전부였는데 - 제가 뽑히게 된 것이, 이 자리 자체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뽑아서였기에 가능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 일을 시작할때는 아무것도 모르니 처음에는 그냥 배웠어요. 전시를 만 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밑바닥에서부터 알이죠. 거의 6개월 정도는 글(보도자료 등) 쓸 때도, 단어 하 나 까지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초창기에 내가 쓴 글을 보고 (수석 큐레이터가) 초등학생도 알 수 있 는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 아마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 들이라 전혀 새롭게 배웠던 것 같아요. 하여간 3개월 동안 기초적인 것을 배우고, 3개월은 전시기획 하고, 겨우 1년 지나서야 독립적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곧 2년 되어 가는데 이제 일들이 제법 손에 익 숙해져서 적응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여기와 일하면서 배운 것 많아요, 공부하면서 전혀 몰랐던 것도 많구요. 마치 이론과 현실의 차이랄까요. (신세계 백화점)갤러리 자체 가 매우 대중적인 공간이다 보니, 처음에는 전공을 하고 미술 작품을 보고 공유한다고 했지만 말 그대 로 예술을 위한 예술만을 생각하다보니, 처음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대중과 공유할 수 있 는 이 공간에서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너무 심난했어요.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많이 오고, 또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한마디로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사실 작품을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백화점을 오기 보다는, 쇼핑을 하기 위해 백화점에 왔다가 잠깐 지나가는 쉼터 로 생각하고 오시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 솔직히 그림을 그렸던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더라구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거죠. 모 : 현장에서 다양한 사실들과 충돌하다보면, 학교에서 이론적으로 배우는 ‘좋은 예술’이라는 개념 등 다른 지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오 : 그런 사례들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마도 ‘좋은 예술’도 그 중에 좋은 예가 될 거 같네요. 여 기 와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예전에 생각하던 이상적인 예술과 실제적으로 현장에서 경험하 는 예술 - 물론 시립미술관 등에서 일했다면 다를 수도 있겠지만 - 의 차이가 상당하거든요. 지금 이 곳은 일 년에 40여회의 전시가 이루어지고 관람객 수(유명 전시 일 때에는 관람객이 평일에도 몇 만 명 정도 되니. 상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도 광주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 - 물론 이것을 보기 위해 특별히 오는 경우는 좀 드물다 싶을 수도 있지만 - 일거예요. 바로 이 점이 우리 갤러리와 미술관과의 차이, 즉 또 다른 그 무엇의 가치와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공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바 로 보다(?) 일반인과의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인데요, 작품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해 주는 역할도 가지고 있고 그림에 관심을 그리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우연을 가장하여 그림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거든요.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이 성격에 맞는 의미와 맥락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 아요. 따라서 전시기획 자체를 좀 더 쉽고 재밌는 것을 종종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문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즉, 대중적인 것만 보여주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 니까 쉽지는 않았어요. 전시라고 하는 것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인데, 작품들에 그 무엇이 있어야 하


전문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즉, 대중적인 것만 보여주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

오 :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면 작년에 했던 전시 중에 “섬 역사문화 기행전”을 함께 진행했었는데. 이와

니까 쉽지는 않았어요. 전시라고 하는 것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인데, 작품들에 그 무엇이 있어야 하

같은 방향의 전시가 나름대로 기억에 남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문화적인 것과 연결이 되는 전시로,

고 또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작품을 보고 무엇을 안고 집으로 가야할 것인가? 등의 고민들이 떠나

꼭 여행은 아니더라도, 인간들의 삶에 뿌리를 찾아서 그것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작가들이 그곳에

지 않았어요.

서 받은 영감을 작품화하거나, 또는 작가가 기존 자신들의 작품들과 매치시켜서 보여주기도 등, 하여간 이 러한 시도를 통해 직접 참여한 작가들이나 작품을 보는 관객들도 매우 흥미로워 했던 기억이 있네요. 하여

실제로 내가 전시 디스플레이를 하다가 작가들 작품을 볼 때, (내가)뭔가 알 것 같은 작업이면 대중들

간 아쉬운 점도 몇 가지는 있었지만 이렇게 한 지역의 일상의 문화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들이 결합되는 전

이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때로는 그림 보는 눈이 상당히 높은 매니아들도 있더라구요. 이야기를

시를 해 보고 싶어요. 즉, 기존의 역사체계에 해당하는 맥락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섬 자체가 가지고

잠깐 나눠보면 그분들은 그림을 보러 백화점에 오기도 한다고 하더라구요. 실제로 전시하면 항상 들

있는 삶의 역사를 대상으로 전시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일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변에 것들에 대

리는 단골손님도 많이 있는 것 같아요. 하여간 미술관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조

한 관심이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 남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남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금이라도 진지해지는 것을 보면 이 일에 자부심도 느끼고 기분이 좋아져요.

것처럼 예술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착만 존재하지 현재적 재해석 작업은 그리 많이 일어나는 것 같지 않거든요. 중앙이 아니 여기, 남도에서 잘 할 수 있는 것은 바

사실 구상 계열이나 서정적인 작품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좋아들 하시는 것 같아요. 전시 내용이 그런

로 그런것 아닌가요? 서울과 달리, 발을 딛고 서있기에 더 잘 할 수 있는 것 말이예요.

작품들이 있으면 사람들이 확실히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확실히 관람객이 들어나는 거죠. 입구에

모 : 맞는 말 인 것 같다. 최근에는 지역의 문제가 각광 받기 시작했다. 거대 담론 중심으로 흘러가던 시대에서 미시담론이 이제는 사회에서 중요한 흐름이 되어있는 것 같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가 아 닐까? 지역성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사회적인 흐름과 무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것은

서 보고 호감을 가지면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일반인들이 좋아한다고 항상 그런 작 품들만 전시할 수는 없어요. 옳은 방향도 아닌 것 같구요. 해서 하는 고민이 그 중간을 잘 걸어가는 거 예요. 대중적인 작품과 실험적인 작품들 그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잃지 않고 외줄을 타는 듯한 기획을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표현할 수 있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하는 거죠. 이런 고민을 항상 하면서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작가와 관객의 소통을 위한 고민을 진행하다. 사람들의 삶의 뿌리를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다. 모 : 미술관에 들어와서 본인의 인생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모 : 그렇다면 1년 정도는 작은 전시라도 안 쉬고 계속 큐레이팅을 한 것 같은데, 본인이 생각할 때 가 장 대표적인 전시라고 할 만한 전시는 있었는가요? 오 : 많은 전시를 했지만 나에 기억에 길이 남을 전시는 아직 없는 것 같아요. 대중적으로 일반인도 좋아하고 작가들도 고려한 ‘테마전(즉 가을, 크리스마스, 신년 등)’을 많이 기획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이러한 테마전은 뭔가 주제를 잡고 하기 보다는 시기에 맞게 하다 보니 마음에 남는 다기 보다는 일로 느껴질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모 : 그래도 100% 만족할 수는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거나, 앞으로 해보고 싶은 전시는 있을 것 같은 데요?

오 : 직히 나는 처음부터 미술관에서 일을 할 생각이 없었었기에 여기 들어와서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무 조건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어요. 생각해보면 ‘뭔가 아닌 것 같다!’ 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던 것 같지 만, 처음이고 잘 모르다보니 비판이 사라지면서 그냥 모든 것을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간 후부터는 우리 갤러리의 장점들과 특징들 살려낼 수 있는 것을 고민해보게 되더라구요. 그 중에서 특히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은 작가들과 미술관객의 관계였던 것 같아요. 사실 현실을 보 면 일반 관객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인데, 작가들의 작품에 직접


노출이 되다보니, ‘소통’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이 발생하는 것 같았거든요. 이러한 양자 간 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큐레이터인 나의 역할과 임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 해답은 무엇일 까? 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솔직히 현대미술에 와서 작가와 관객의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쪽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서 올해부터 박사 과정에 진학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미술계에 서는 고전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당장은 어떻게 답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고민에 끈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중요할 거라 생각이 든다. 그래도 최근에는 일반인들이 와서 이야기도 가끔 한다. 본인이 가진 작품을 자랑(?) 삼아 이야기에 슬 쩍 끼워 넣는 분도 계시지만, 전시를 보고 받은 느낌이나 다양한 생각들을 시작으로 생활의 이야기까 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가 있는 날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래서 처음에는 그 기분에 휩싸여 내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는데, 조금 후에 느낀 거지만 그러면 안되겠 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하여간 이 런 사람과의 만남들은 다음 전시 또는 이후 전시를 기획할 때 많은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의 수자가 아직도 많지 않다는 점이기는 하다. 모 : 그렇다면 현재에 벌어지는 전시들은 주로 어떤 전시들을 하는가? 오 : (미술관 직원)두 명이서 40개의 전시를 돌아가면서 하게 되는데, 크게 구분해서 대관전과 초대기획 전이 있는데, 4대 6정의 비율로 일이 많은 초대기획전이 많다. 정말 끊임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느 낌이 들 때가 있다. 일정에 쫓기다 보면 생각을 하고 무언가를 준비할 여유가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 시립미술관에서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해 보면 이렇게 전시를 안 쉬고 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한다. 물론 시스템적으로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미술관은 3-4개월은 기본인데, 우리는 정말 길어야 한 달이고, 물론 미리 설계된 전시계획은 있으나, 매우 유 동적이고, 전시가 계속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쉼 없이 달리 다 보면 ‘소진’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만족스러울 만큼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하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다. 조금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이 된다면 훨씬 다양한 시도와 다른 고민들을 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아쉽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전시는 전시기간이 10여일 정도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더라. 백화점 에서 생각하는 미술관은 다양한 측면이 있겠지만 고객에 대한 서비스적인 측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 는 것 같다. 따라서 백화점에 오시는 고객들을 중심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백화점에 자주 오 는 사람들에게 항상 다른 전시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전시 일정이 이리 돌아가는 것 같더라. 가 끔 전시장을 돌아본 사람들 중에 ‘왜 전시가 바뀌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경우도 있다. 즉 ‘항상 오면 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왜 같은 거 하느냐.’라고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근무하는 곳 에 특징을 새삼 깨달게 된다.

모 : 직설적인 어법을 사용하면 백화점 문화마케팅의 도구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겠네. 그러나 그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경계해야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문제를 인정하 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 현실을 부정해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 심은 ‘그 안에서, 즉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개인들은 어떤 생각들을 갖고 행동하고 살아가 는가!’라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현대 사회는 이미 고도화되고 조직화되어 있다. 하지만 고도화와 조직화도 결국은 사람에 의해서 유지되고 운영이 된다는 것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 같다. 역시나 그 조직 안에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일반적인 조직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 조직에 누 구와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서 많은 느낌의 차이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그 한 사람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일을 해가냐에 따라서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 ‘틈’에서 의미가 있는 것 아 닐까? 구조적인 문제라고 해서 거기에 안주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최근에 나에 고민 도 구조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되,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곳에 누 가 있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고 일도 많이 달라지더라. 문화시설 활동가 네트워크라는 것도 지 금 내가 말하는 것에 기반을 두는 것 같다, 광주 문화시설들의 개인 활동가들에 창조성을 최대한 발 현하게 하고, 공공적인 성격을 강화하면서 대중을 만나는 것을 최우선 두고 일하는 곳이 얼마나 될 까? 구조적이고 이해관계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 많다보니, 활동가들 개인의 창의성이 발현될 여지 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미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각 문화시설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지만 묵묵히 현장에서 ‘고군분투’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한 방향을 보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 람들을 알고 지내는 것, 당장은 아니지만 일상에 부분부터 교감하면서 관심과 고민을 공유하다보 면 무언가 함께 만들어갈 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러한 ‘관계’, 즉 네트워크는 사람들 관 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않을까? 천 : 작가들과의 관계나 네트워크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요? 오 : 이 공간은 많은 작가들이 오고간다. 개인전이나 단체전이나 이런 식으로 연관되다보면서 서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우리 미술관에서 주관하는 신세계 미술제를 바탕으로 지역의 젊은 작가 중심으 로 알아간다. 그 작가들을 바탕으로 기획전도 진행해 간다. 하지만 아직 내가 몰라서 일수도 있겠지 만, 일을 해나가다 보면 광주에 작가가 아주 많은 것 같지만, 항상 그렇지 많은 않다. 기획전의 특성상 전체 기획에 맞는 작품들이나 작가를 선정하여 작업을 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을 일치시킨다는 것이 어려운 일 인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작품들의 다양성이 조금 부족한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 을까 한다. ‘정말 다양한 작품들이 있으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산다. 그나마 다행스러 운 것은 최근에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우리 미술 관에서 가끔 좋은 작품이나 좋은 전시를 가져오거나 하고자 하는 이유는, 또한 광주 지역에 현재적인 작품 경향. 새로운 시도들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경우도 있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젊은 동양 화 관련 작가들의 전시는 아직 일정 조정이 안되 잠시 접어두었지만, 조만간에 꼭 전시를 오픈하려고 한다. 이 지역 작가들에게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내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사는 삶이 나를 존재케 한다..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면 OK!!”

모 : 오명란씨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면서, 밑바탕에 깔린, 나를 지탱하게 해준 근본적인 힘 같은 거는 무엇인가요?

5·18기념재단 국제협력팀, 정린

오 : 정말 항상 이걸 하면 즐거웠다. 다른 사람의 영향보다는 내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 는 것을 일한다는 것 그 자체.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라. 전공 70-80%가 전공에 대해 잘 모르고 들어 가는데, 나는 좋아한 곳에 들어왔고, 하는 일에 스스로 만족하고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어 떤 것을 많이 해내도 소득이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데도 나는 열심히 한다. 사람들이 밥 만 먹고 살지는 않는다. 예술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부수적인 것일지 모지만, 나에게는 중요 한 것이었기에 열심히 했다. 너는 밥만 먹고 배부를 수 있느냐? 그러면서 만족한다. 내가 하는 일로,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고, 주변의 관계없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나는 온통 생각이 여기에 빠져 있는데. 그런 건 상대방에게 재미없겠지. 천 : 오명란의 삶의 목적이나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평생의 이루고픈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 : 내가 하는 일을 즐겁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도 연관되겠지만. 전문가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것 보다는 전공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기회가 되서 이것에 관심 갖게 하는 것에 더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 것 들을 문서화한다든지 해서 시간이 많이 지나면 책을 써서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일반인들과 미술로 교감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대중과 가까워질 수 있는 미술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이러한 지 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앞으로 길게 보아서 그런 것과 관련된 뭔가를 하고 싶다. 물론 나중에 어찌될 런지는 모르지만, 지금 현재의 생각은 그렇다. 미술사적인 책이 아니라, 신변잡기처럼 쉽고 재 밌는 그런 요소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미술책을 써보고 싶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릴거라 생각은 한다. 하여간 늘 맘속에만 그냥 두고 있던 것을 새삼스럽게 말하자니 부끄럽네요. 마지막으로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은 것이 희망사항이다. 여행이 저에게는 그런 역할을 한다, 보는 시각을 열어주고 개인적인 생각 정리하는 나름의 의미가 존재한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 지금도 생각은 아주 많지만 예전같이 다니질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현재의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네트워크’ 천 : 문화시설 활동가 네트워크가 맺어지게 된다면 가장 바라는 것 혹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앞으로 이 글을 읽게 될 분들에게 말을 걸어주세요. 오 : 이게 미술 분야만이 아니잖아요. 사실 기대가 되요. 솔직히 제가 목말라 했던 것일 수도 있는데, 같 은 예술 영역 안에서 다른 것도 같이 연결되고, 그쪽 이야기 들을 기회가 없는데 그런 기회가 된다니 기대가 되다. 직접적인 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한다. 아까 처음에 말했듯이, 그 구조 안 에서만 돌다보니 답답하고 발전(?)을 쉽게 생각할 수 없었던게 사실인데, 막힌 곳이 이런 식으로 다양 하게 열려지게 되면 뭔가 나에게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 현재는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으니 까. 그래서 맨 처음 ‘네트워크’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매우 관심이 갔던 것이기도 했다.

‘봄’이건만 눈발 날리는 상무지구 <하늘보임> 카페에서 5·18기념재단 국제협력팀의 정린씨를 만났다. 5·18기념재단과는 2002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당시는 대학생이었고, 자원활동가의 일원으로 재단의 국제사업에 일조하였다. 2006년 문 화홍보팀 공채로 재단의 직원이 되었으며, 현재는 국제협력팀 소속이 되어 있다. 현재는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 NGO단 체 및 활동가들의 네크웤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해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사업, 인권상 수상, 광주아 시아 인권학교 등의 행사를 진행한다.

// 인터뷰장소 : 상무지구 <하늘보임> 카페 // 인터뷰시간 : 2007.3.5 pm 07:00 ~ 10: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주문희


긍정적인 마인드로 삶을 바꾸고 싶다. 정 : 지금 분위기가 타로카드 이런 분위기 얌..심령적인 분이기.. 쫌 구래. (서로 폭소를 터트림) 주 : 아니거든... 무서운거 아냐.. ㅡㅡ;; 정 : 긍정적 마인드. ㅎㅎ 주 : 어떤 의미에서 정 : 많이 변했지..많이.....1월까지 많이 힘들었고.. 주 : 긍정적 마인드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은데.... 정 : 항상 나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상황이 안 된다는 생각을 접기로 했어. 너무 조급했어. 조급하게 살아 온 거 같아. 내가 23살까지 인턴 갔다 오고, 유럽 갔다 오면서 1년을 외국생활 하다가 4학년 되니까 너무 정신이 없었어. 스스로 나는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4학년을 쉽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 같아. 회사에서 원하는 자격증이랑 요건이 부족했던 거지. 나는 나 를 너무 믿었던 거야. 어떻게 보면 내 스스로 방심한 거지.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어야 했는데... 작년 에 재단 들어와서.. 올 1월에 그런 일이 생기니까 공황상태에 빠진 거지.

것은 많이 다른 것 같아. 처음에 자원활동가로 일할 때는 ‘가치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많은 비중을 뒀었어. 이런 활동들이 내겐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했었지. 그때는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에 대해 대개 많이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일에만 너무 매달린 것 같아. 좀 더 즐겁게 해 냈으면 좋았 을 텐데.... 주 : 사람의 문제인가? 일의 문제인가? 정 : 둘 다인 것 같아.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기엔 다른 조직보다는 치열하게 고민을 못하는 것 같아. 재단만의 특수성을 살려갔으면 좋겠는데... 항상 고민하고 있어.

‘기획’하는 것도 좋지만, 기획을 서포터 하는 것도 좋아..... 주 :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주 : 우울하지는 않어?

정 : 내가 하는 일이 뭐지? 본래는 문화홍보팀에서 문화관련 된 행사를 기획하고.. 그런 것은 아니고, ㅎ ㅎㅎ 5·18관련된 기념사업을 하는데, 문화관련 해서 행정적인 일을 했지. 전시 하는데 도움을 줬었 고, 이벤트, 공연 등이 있으면,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고 조율하고 그랬지. 근데 창의적인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 왜냐면 우리가 해오던 방향이 있으니까. 그런 방향에서 벗어나 지 않는 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5·18관련 된 공연이나 전시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했어. 지금 은 국제협력팀에서 해외 행사나 또 아시아 지역,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인권이나 민 주주의 관련된 운동이나 활동을 하는 단체, 시민들의 네트웤을 만드는 일을 해주고 있지.

정 : 이제 그런 생각 안하기로 했어. 긍정적 마인드를 갖자.!!!!

주 : 원래하고 싶었던 일은?

주 : 긍정적 마인드를 갖자 하면서 나이 들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정 : 내가 좀 허황되어 있었던 것 같아. 내가 잘 몰랐기 때문에 허황되었던거 같아. 전시 기획하는 것을, 누구나 다 하기 때문에 나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근데 5·18이라는 한정된 소재나 주 제를 가지고 내가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던 것 같아. 사람들이 문화나 공연 같은 것을 편하 고 즐겁게 즐길 수 있도록 여러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싶었지.

주 :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방식이 체념인 것인지? 아니면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는 방식인지? 정 : 둘 다 인거 같아. 예전이었으면 후자였을 텐데. 지금은 내가 그렇게 현실을 돌파해 나가지는 못 할 것 같아. 어떤 상황에선 체념하고 어떤 상황에선 돌파하고.

정 : 나이 들었지. ㅎㅎㅎ 나이를 먹어서 더 신중하게 하려는 거야.. 체념할건 체념하고..신중함이 필요 한 거지..신중함을 갖게 되면 목표를 확실히 할 수 있어. 뭐가 되어야지가 아니라, 뭔가가 되고 싶다면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가는 거지. 예전에는 내가 하고자 하면 다 되었던 것 같아. 내가 일하 면서 느끼는 건데, 프로가 되가는 게 좋은 것 같아. 내가 기분 좋고, 내가 생활이 좋아야 좋지.. 주 : 재단 들어오게 된 계기는?

‘가치’를 생산해내는 일을 하고 싶었지..... 정 : 대학 4학년 졸업할 때 쯤,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했었어. 정말로. 편하게 맘먹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았어야 했는데.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은 기자나, PD였는데...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방향을 튼 거지. 현실에 조급해서 재단을 택했다는 것은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정 : 이제는 내 방향은 이것이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를 생각해야 될 것 같아. 주 : 재단에서 자원 활동가로도 있었는데, 자원 활동가일 때와 실무자일 때의 차이점은? 정 : 책임감 부분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어. 내가 학생일때와 사회인으로 재단의 조직원이 된다는

주 : 지금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 : 지금도 쉬울 것 같진 않어 문 : 다른 곳에 가서 했다면? 정 : 비슷했을 듯 해. 국제협력팀에서도 문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 않지만, 인권 관련된 전시나 공연이 있으니까,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즉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을 달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 로 뭔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주 :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정 : 나는 꿈이 많어. 원래 외교관이 되고 싶었고, 그러면서 정치인도 되고 싶었고. 대학 들어와서는 기자 가 되고 싶었어. 도전 해보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였지. 결국 하고 싶은 것은 글 쓰는 것을 해보고 싶어. 늙었을 때 까지 놓고 싶지 않은 것이야. 사람들하고 소통이 가장 잘 되는 방식이 글쓰기 인 것 같아.


주 : 자신감이 가장 넘쳤을 때는?

주 : 그렇지만 누구나 갈림길에 직면하게 되잖어. 갈림길에서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

정 : 23살 때, 인턴으로 나갔을 때. 그해 가장 활기 왕성했어. 대학교 3학년 때는 뭐든 됐어. 내가 10개 도전하면 5개 이상은 되었던 같아. 엄청난 거지.

정 :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길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내가 원하는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내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런 것을 생각하지.

주 : 재단 들어와서 활기가 떨어진 건가? 정 : 재단 들어와서 인간관계가 확 줄어들었어. 사람들은 나를 잘 기억해. 내 목소리가 바로 각인이 되나 봐. 사람들은 나를 나서는 애, 시끄러운 애로 봐. 그 뭐랄까..... 주 : 본인이 생각했을 때 장점이 뭔 것 같아? 정 : 내 장점이 뭐지? 내가 조용하면 아무도 나를 기억 못해. 난 극과 극인 것 같아. 난 장점이 별로 없고 단점이 많아. 나는 살아오면서 두려움이 많았던 거 같아. 난 리더를 해본 적이 없어. 리더의 경험은 필수 인거 같아. 내가 뭔가를 끌어가는 리더력을 갖는 것은 필수적인거 같아. 조그마한 동호회 회장 이라도. 정 : 대학 때는 이것 저것 다 하고 다녔어. 대신 얕어. 취업공부 이런 거 말고, 자기가 책을 얼마나 읽고 얼마나 생각해서 뭔가를 찾아내는 가, 이런 것이 중요한거 같아. 수업도 얼마나 연구를 하고 생각하 고,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 근데 난 대학 때 많이는 못한 거 같아. 지금은 뭔 가를 맡아서 하고 싶어. 정 : 난 워낙 관심이 많어. 이것저것. ㅋㅋ 주 : 요즘 활동을 많이 안하는거 같은데 정 : 작년에 인간관계가 많이 끊겻어. 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연락을 잘 못해. 누군가에 쉽게 연락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편하게 전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불편하면 사람들 만나기 가 싫어. 요즘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잘 못해. 예전에는 거리낌 없이 잘하고 좋아했는데, 지금 은 잘 못해

활동가는 직접 몸으로 느껴야지.. 주 : 문화가 좋은 것 같아? 뭔가를 만들 어내는게 좋은 것 같아 정 : 잘 모르겠어. 솔직히 나는 아직도 ‘문화’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 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알까 생각하거든. 문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문화 잖어. 삶의 방식 역시 문화의 한 패턴이라고 할 수 있잖아. 예전에 문화라고 하면은 음악, 영화를 본 다는지, 자신의 일 상생활 스트레스를 풀기위해서,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을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것만이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니까 혼란스럽고...현재는 과도기 인거 같아. 이 시기가 지나면 문 화가 뭔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가닥을 잡아 갈수 있을 것 같아. 주 : 선택의 갈림길이 있을 때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것은? 정 : 나는 항상 말하는데, 폭발적이게 나를 이끄는 사람도 없었고, 폭발적으로 내 인생을 바꿀만한 일도 없었어. 내가 내 길을 가다보면 방향을 잡아서 가는 거 잖어.

정 : 살면서 폭발적인 일이 발생했다면, 예를 들어, 영화를 봤는데 감명을 받아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거 나, 뭐 그런...나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이것저것 재보고 이것이 나한테 좋을까? 안 맞을까? 그런 생 각을 많이 한거 같아. 주 : 그럼 가닥을 잡았나? 정 :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항상 인생을 생각하는 거고. 어차피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해보고 싶다 면,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살 필요 없이, 하나씩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자. 편안히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어. 나는 내가 해보고 싶은 다양한 것을 해보고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문화기획도, 국제관 련 사업도, 영화관련 일도 해보고 싶어. 정 : 나는 창조적인 일에 대한 동경이 많은데, 내가 부족하니까. 영화를 만든다든지 그림을 그린 다는지 하는 것은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 그런데 그 밑에서 서포터를 해주는 것은 생각하는 것 같아. 문 : 활동가로서 고민은?, 네트워크에 있어서.. 정 : 나는 우선 어떤 집단 모임은 싫은 것 같아. 어떤 모임에 갔을 때, 내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행사가 잘 못 되었다기 보다는 아는 사람끼리 와서, 아는 사람끼리 분위기 주도하고 그런 분위기가 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 지금은 내가 국제일을 하니까, 아시아의 인권이나. 문화 관련 일을 하는데... 그런 일이 잘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고 싶어. 그리고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활동가는 직접 몸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못하는 거 같아. 정 :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항상 인생을 생각하는 거고. 어차피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해보고 싶다 면,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살 필요 없이, 하나씩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자. 편안히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어. 나는 내가 해보고 싶은 다양한 것을 해보고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문화기획도, 국제관 련 사업도, 영화관련 일도 해보고 싶어. 정 : 나는 창조적인 일에 대한 동경이 많은데, 내가 부족하니까. 영화를 만든다든지 그림을 그린 다는지 하는 것은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 그런데 그 밑에서 서포터를 해주는 것은 생각하는 것 같아. 문 : 활동가로서 고민은?, 네트워크에 있어서.. 정 : 나는 우선 어떤 집단 모임은 싫은 것 같아. 어떤 모임에 갔을 때, 내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행사가 잘 못 되었다기 보다는 아는 사람끼리 와서, 아는 사람끼리 분위기 주도하고 그런 분위기가 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 지금은 내가 국제일을 하니까, 아시아의 인권이나. 문화 관련 일을 하는데... 그런 일이 잘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고 싶어. 그리고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활동가는 직접 몸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못하는 거 같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노력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모든 일에 우선이다.

광주여성의전화, 배선현

모 : 지금 일하는 곳은 어디이고 무슨 일을 하시나요?

광주여성의전화’에서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을 일했던 배선현(27)씨는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다소 엉뚱한 이력을 가지고 있 다. 그렇다고 그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게되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대학교 시절의 운동권(?) 경험도 전무 하단다. 오 히려 그래서일까? 기존의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관성 같은 느낌은 없고 오히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이런 새로운 느 낌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에 필요한 새로운 활동가들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요일 늦은 저녁 즈음에 허브 향 진한 시내에서 그녀를 만났다

// 인터뷰장소 : 시내 허브차 전문점 ‘비움 // 인터뷰시간 : 2007.4.1 pm 02:00 ~ 22:3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천윤희, 모상근

배 : 광주여성의전화’라는 단체이구요, 작년 2월부터 일을 했으니 만 1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사무실에 서 저는 주로 여성관련 프로젝트 사업을 기획 및 진행하거나 시민단체나 여성단체 연대활동 일을 하 고 있습니다. 천 : 국어교육학과를 나왔는데 사범대를 나와서 사회단체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주 특이한 이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거죠? 배 :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교사일을 하면서도 정말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리고 시민운동에 자체 에 관심이 많이 있었구요. 그래서 교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희진씨가 쓴 ‘페 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읽고, 많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여성단테에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 각하게 되었죠. ‘광주여성의전화’는 그런 기회가 닿은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는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어요. 앞에서 말한 책의 경험이 많은 변 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죠. 천 : 단순히 책을 읽는다고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 특별히 그 책에서 영감을 받은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배 : 여성들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요? 20대 중반의 여자의 삶에서 생각하고픈 게 많았어요. 천 : 20대중반의 공기는 어떤가? 배 : 예전엔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그리 달갑지 많은 안았다. 하지만 단체에 들어와서 연대활동 많이 하 다보니 나이의 한계가 많이 느껴진다. 내가 너무 어리니(여성단체 상근자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여 성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말이 안 먹힌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이런 상황이다 보면 ‘30대가 되어도 내가 기대한 만큼 편안하지는 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20대 후반(현재 나이 27세)에 가까워 질수록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연대의 시작입니다. 천 : 말하는 연대활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배 : 정례적인 활동과 사안별 시기별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대응들이 있는데요. 518이나 세계여성 의날 등은 정례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고, 지방선거나 얼마전의 인화학교 교사 장애학생 성폭행 사 건 등은 사안별로 발생하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은데요. 최근의 광주광역시청의 청소용역 직원 관련 문제 등도 사안별 연대활동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연대활동의 핵심은 하나의 사업이 나 행사에 전체 구성원의 단체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가 함께하려고 합니 다. 물론 사안이나 내용에 따라 단체별로 집중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열심히들 해 주 십니다. 행사 같은 경우는 초기 기획에서부터 진행의 구체적인 준비과정, 그리고 행사의 실행에까지 아주 세세한 것 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주여성의전화’ 상근자들은 목숨 걸고 일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지난 ‘세계여성의 날’(3월 8일) 행사의 경우 ‘광주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주 된 고민이죠. 광주 여성단체 실무자들이 모여서 그런 고민을 하면서 행사를 잡아갑니다. 특히 올해의 경우는 광주시청의 청소용역 직원들 문제가 특히 우리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광주에 있는 여성단체 및 회원들이 시청앞에 모여서 기념식과 항의집회를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천 : 그러한 활동들은 사회적 공감대 확산하는 건가요? 배 : 어떻게든 참여를 이끌어내는 노력이라고 보아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천 :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배 : 여성단체 사람들이나 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모 : 여성단체들도 각각 성격이 다르잖아요. 연대활동도 많이 하는데, 시기별로 내용별로 결합의 지점 들 다양할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힘든 점은 없나요? 배 : 사안별로 하는 것은 목적이 명확하니 특별하게 힘든 점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615나 518 같 은 사업은 성격에 따라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단체 협의회라는 기구가 있는데 그 단체에는 성격이 많은 단체들이 소속되어 있다. 예를 들면 새마을 부녀 회 등과 같은 시의 보조금을 많이 받고 있는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단체들과는 아무래도 공유의 지점 자체가 작기 때문에 활동 내용에 있어서 아무래도 제한이 따른다. 그럴 경우에는 상황에 맞게 각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으로 일을 진행한다. 예를 들자면, 작년 615 행사에는 새마을부녀회에 서 민원이나 안내 부분을 그분들이 담당해 주셨다. 사업 기획에서의 역할보다는 실무적인 일을 책임 져 주시는 것이다. 다른 예로는 우리 단체의 경우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 등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상담소나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지만 다른 단체의 경우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번 탈북여성 이금순 사건 터지면 우리 단체는 바로 장례식장 달려가서 그 자리를 지켰지만, 다른 데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한다. 사실 각 단체들도 일상 사업들이 있기 때문에 여력이 그리 많 지 않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 : 왜 물어봤냐면, 여기서 일하게 된 계기가 여성작가의 책을 보고 관심 많아져서라고 했는데, 책에 서 느끼는 현실의 문제랑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느끼는 문제들 안에서는 또 다른 벽이 있지 않나 싶 어서입니다. 어떤 사안 발생함에 따라 사업을 펼쳐나갈 때 단체의 성격 등에 따라 많은 차이를 가 질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혹시나 그런 갈등이 없는가 해서입니다. 배 :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만 제가 쉽게 바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또한 그러한 상황도 현실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저희 단체는 많이 싸우는 편이니 까. 다른 단체들에 비해서 말입니다. 활동가들 성향 자체도 대표가 말했다고 해서 옳지 않으면 그래 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떤 사안에 있어서 내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 서 바로 다른 의견을 말을 할 수 있으니 말이죠. 닫혀진 구조가 아니다, 열린 구조라고 보시면 이해 가 되시리라 싶네요 모 : 인정해야할 일인데, 인정하지 않으면 협의체 깨지는데,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인정 안한다 또는 틀렸다고, 원칙만을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협의체는 상대적 존재를 인정하 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할 듯 싶습니다.

모 : 여연 같은 연대활동을 하다보면 다른 상근자들에게 이쁨을 받을 것 같은데요? 배 : 보통 단체, 여성 30대 거의 없다, 30대가 없고, 40-50대 애들 컷을 때, 제가 말을 거침없이 하는 편 이라 싫어하는 분도 있겠지만, 귀여워한다. 특히 본인들은 결혼생활하고 살아보고 체험하니까 부당 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아서 이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결혼도 안하고 젊은 나이에 여성 운동 한다는 것에 대견하게 보는 것 같아요. 모 : 이쪽 일을 계속 하고 싶은가? 장기적으로 길게 생각했을 때. 본인의 30대를 상상해보면 어떤지. 3년 후 또는 4년 후에는? 배 : ‘여성의전화’라는게 처음 어떻게 생겼나면, 가정폭력 많이 당하는데 그 사람들 이야기 들어줄 곳 없 고 해서 활동가들이 스스로 자비를 모아, 마이너스 통장으로 만들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가정폭력, 성폭력이 사회적으로 끊이질 않는 것이 현실이다보니 앞으로도 그런 일들을 해보고 싶어 요.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을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는 것도 재미있는데, 그런 걸 모르면 말 뿐인 여성 운동이 아닌가 싶네요. 모 :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들어줄 곳을 만들어준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체만 생각하자면 소극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궁극적인 해결을 위해서 다른 활동들을 하는 것은 없는가? 배 :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지금 당장 억울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 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의 이야기 들어야 방법이 나오는 것 아닌가? 피해자의 이야기 없이 는 실질적인 운동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담업무만 하는 것은 아니고 여성인권과 관련 한 다양한 홍보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하신 분들을 위해서 쉼터도 운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법률 입안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들도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가정폭력특별법 같은 것이라든가, 성폭력 가해자 처벌 기준 강화 운동 등이 그러한 내용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인식이 아직은 조금 더 성숙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일을 하 다보면 가끔 섬뜩섬뜩 할 때가 있는데, 얼마전에 가정폭력특별법 법안 마련을 위한 행사를 하고 프랑 카드가 남게 되어 버리기가 뭐해서 우리 단체 앞쪽에 걸어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없어 졌는데, 가까이서 가보니 재만 남아있더라. 아마도 누가 태워버렸던 것 같다. 그것을 보고 우리 단체 상근자들끼리 ‘몸조심하자고 했다.’ 우리 사무실에는 가스총도 있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의 가해자 도 우리 사무실에 와서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들도 자기는 억울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흥 분을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말이다. 사무실에 여자들 밖에 없다보니 나름의 대책이 필요해서 준 비를 해 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흔한 말로 ‘목숨 걸고 하고 있다.’ 가정폭력 가해자(쉼터 주부의 남 편)가 자살한 경우도 최근에 있었다. 우리한테 매일 편지 보내고 팩스 보내던 사람이었는데, 자기 집 에서 자살했다더라, 섬뜩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살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여자들은 싸워야만 얻어낼 수 있다.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천 : 지금 27살 배선현의 화두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모 : 혹시 ‘우리학교’ 영화보고 어땠어요? 생각의 지점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요? 즉, 다른 친구들에게 ‘우리학교’라는 영화를 소개한다면 뭐라고 추천하고 싶나요?

배 : 주위에서 결혼은 언제 하냐? 사귄 기간도 길고 하니, 그런 말도 많이 하는데. 개인적으로 구속되기 싫은 것도 있고, ‘여성의전화’에서 일하다보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든다. 선배 활동가들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다!’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가끔 그러면 ‘왜 그렇게 사느냐!’ 라고 이야기 하면, ‘너도 결혼해봐라 똑같다!’ 라고 말씀들 하신다. 대학때 운동을 했던 것도 아니라서 이쪽에서 일 하시는 분들과 관련이 없다보니 일을 하다보면 쉽게 할 부분도 많은데 불편한 경우가 많아요. 하여간 최근의 고민은 내가 대학에서 공부했던 거랑 내가 지금 하는 것이랑 많이 달라서, ‘아는게 많이 부족 하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아무래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천 : 난 개인적으로, ‘내 사람은 내가 만들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데, 기존에 있는 체제로 들어 가려면, 나를 잃어버리기 쉽더라구요. 있는 그대 새롭게 해보려면, 뭔가를 해보려면, 내가 주체 가 되어서 주변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배선현씨 나이에는 새로운 방식이 나왔으 면 좋겠어요. 해야할 일이 진짜 많아 보이는데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내용을 만들 수 있으면 좋 을 것 같네요.

배 : 보면서 먼저 든 생각은, 그런 사람들은 소수자이죠. 우리가 여성으로서 소수자로서 사회에서의 경험 을 전혀 다른 맥락이겠지만, 그들도 그들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남의 일 같지는 않더라구요. 다 수자의 입장에서 서면 그들이 안 보이는데, 그동안 우리가 못보던 것이 얼마나 많은가! 새삼 깨달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학교를 볼 때,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도 의미하는 바가 크구요. 그들에게 절박한 민족문제도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았어요. 사람이 사는데 대게 복합적인 문제들이 발생하잖아요. 가정폭력 피해자들도 말했지만 가장 절박한 것은 잠잘 장소(‘여성의전화’는 그래서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해요. 대부분 가정폭력에 노출되어있는 여성분들 대부분은 잠잘 장소가 없어서 집을 못나오고 버틴다고 하더라구요. 아마도 ‘우리학교’라는 영화는 감독이 그곳에서 3년여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고민에 아주 맞닿아 있는 ‘절박함’ 같은 것을 잘 포착해서 관객과 함께 느낄 수 있 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모 : 남자친구가 많이 바빠서 어쩌나? 사귄지 얼마나 되었나요?

천 : 저도 재네들은 나보다 어리지만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 : 5년째 사귄다. 뭐 바쁜 것은 어쩔 수 없죠. 천 : 남자친구가 결혼 고민하는 것 같던데 어떤가요? 배 : 저는 어려서부터도 내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한테도 안되고, 성격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중요한 일을 알아서 하고 부모님에게는 통보해주고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의지할 수 있 는 대상이 있으면 삶이 좀 편하잖아요. 근데 그게 안되니 늘 불안한 상태인 것 같아요. ‘여성의전화’에 서 일하는 매력이 뭐냐고 물어봐줘요. 모 : 왜 ‘여성의전화’에서 일하세요? 매력이 있나요? 배 : 매주 월요일마다 여성학 공부를 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나라에서, 아니 이 나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여성은 여전히 소외 계층이라고 할 수 있죠. 소외받는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일한다는 것, 서로 알기 때문에 맘 통하지 않 겠는가. 모여서 함께 일하는데 신나는 일이다. 아마도 남자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거다.. 담배하나 피는 것도 여전히 시선들이 힘들다, 다른 여자들이 내가 이렇게 담배 피우는 것을 통해서 당당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당당하게 피우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가끔 내가 담배 피우면 남자들이 피하더라. 여자로서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그런 것 같다. 남자들은 살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여자들은 싸 워야만 얻어낼 수 있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 현실인것 같아요 천 : 선현씨가 싸우는 방식이나, 아님 본인만의 비법은? 배 : 선생님하고 저하고 일하는 방식이 많이 다르지 않나요? 저는 여성활동가들을 많이 만난다. 그런 말 들 많이 한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모른다.’ 그게 당연한 자기 삶이었기에, 그런 것을 자꾸 알려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싸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알려주는 것’이죠. 물론,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말해도 가슴으로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질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끊임없 이 이야기 해주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천 : 그래, ‘끊임없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배 : 여성운동이 늘 여성의 문제로 머무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여자들 사회활동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육아잖아요. 그런 것들은 사회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여자만의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적인 풍 토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여성들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자기를 사랑 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삶 자체도 문화적이 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천 : 치유적 활동이나 프로그램은 없나요? 배 : 치유프로그램들 꾸준히 하고 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게 가장 필요하다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 사람들 마음을 치유하지 않고는 자기가 맞으면서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런 의식에 젖어서 사시는 분이 많은 것 같다. 결국은 자립을 할 수 없는 거죠. 따라서 그런 것들을 풀어주고, 보여주고, 자아를 찾아갈 수 있는 등의 프로그램들 주로 진행합니다. 천 : 결국 ‘치유’라는 것이, 자기표현 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말을 하거나, 글로 표현하 거나, 그림을 그리든지 자기표현, 말하기 시작하는거, 여러 매개로. 최근 그래서 문화예술 영역이 많이 결합한다, 또한 문화예술 안에서 결국 사람의 문제이기에 치유적 문제, 또 자기 정체성과 당 대 문화속의 갈등 등 결국 여성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문화를 이루는 것이고, 결국 모두 문화 안에 결합된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성의전화’에 근무해도 문화활동가들과 많이 만나고 좋은 사 람들과 같이 작업하구 그랬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배 : 문화를 하는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너무 강하더라구요. 이런 건 문화가 아니라고 하는데, ‘정말 대단 한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 했어요. 자기들은 특수화시키고 고급화시켜서 엄청 거부감이 생길 때가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사람들과 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더라구요.


사람과의 관계가 모든 것들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낸다. 모 :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문화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시설에 근 무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문화 등 ‘매개’한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천 : 선현씨 같은 생각 많이 들 하는 것 같아요. 근데 말이죠, 진짜 모든 영역, 그것이 과학이든, 예술 이든, 철학이든, 어떤 영역이든 고수들은 모든 것에 열려있다, 진정으로 대상을 이해하려하는 마 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소재만이 문화가 아니라 삶 자체도 문화적이 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 같아요.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모 : 선현씨 삶을 살아오면서 중요한 지침이나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현재의 자신이 존재하게끔 해준 8할은 무엇이었는지? 배 : ‘나 자신’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한테 의지를 거의 한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 한 적은 없는데,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 최소한의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모 :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배 : 인생이 짧아서 그런게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대학교 친구들을 보면 거의 다 교사로 생활을 하는데, 저는 그 교사생활을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는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하 지만 지금의 삶은 평소에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넘어서지 못한 한계들을 넘어서고 있 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은 좋아요. 아마도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시민단체에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시기가 아닌가 싶은데요. ‘여성의전화’에서 앞으로 얼마나 일을 계속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해 왔 던 시간이나 앞으로 일을 해갈 시간들이 내게는 아주 소중할 것 같아요. 그 시민단체에 일을 하고, 여 성단체로 결정이 내려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정희진씨가 쓴 ‘폐미니즘의 도전’ 이라는 책을 읽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되게 유명한 책인데, ‘여성의전화’에서 상근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정 리한 책입니다.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분인데, 되게 재미있습니다. 최근에는 강의 록을 묶어서 또다른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책도 되게 재미있어요. 현장에서의 경험이 살아있는 책이 다 보니 많은 감동과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함을 겸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남자들은 되게 어 렵다고도 하는 경우를 보기는 했는데,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많이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 : 앞으로 가진 꿈이 있거나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또는 5년이나 10년 후에 꼭 하고 싶거나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배 : 추상적으로 이야기해도 되죠. 개인적인 꿈이라기보다 세상에 대한 꿈인데요. 여성들이 집안일이나 육아 때문에 사회활동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활동을 통해 자기실현, 자아를 찾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네트워크도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그 소중함을 바탕으로 일을 해 갔으면 한다. 모 : 마지막으로 우리 네트워크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배 : 저에 최근의 일 중에 하나가 한미 FTA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입니다. 하지만 일이 많다 보니, 되게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많이 안가고 싶기도 하고 그러는데, ‘반미여성회’에서 활동하시는 어떤 분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 분을 생각해서 힘들지만 가급적 안빠지고 가려고 그럽니다. 이것처럼 개인적 인 관계들이 모여서 일이 되는 것 아니가 싶어요. 결국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죠. 그 사람과의 관계 같은 것들이 모든 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네트워크도 사 람의 소중함을 알고 그 소중함을 바탕으로 일을 해 갔으면 한다.


“희망... 그 희망을 실천하기 위해 지역으로 찾아가야지 “

삶 속에서나 일 속에서 참 삶을 찾고 싶은 사람 ‘피키’

서구문화센터 청소년팀장, 이운기

정 : 먼저 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형이 누군지 소개를 해주면 좋겠어.

YMCA 에서 가장 오랫동안 청소년업무를 담당해온 서구문화센터의 이운기 청소년팀장. 그는 고등학생 운동의 경험을 시작 으로 계속해서 청소년이라는 한 길을 걸어오고 있다. 엉뚱함과 순수함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그는 ‘희망’ 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또 다른 도약을 꿈꾸고 있다.

// 인터뷰장소 : 서구문화센터 // 인터뷰시간 : 2007.3.24 pm 04:30 ~ 07:0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기

이 : 내 예칭이 피노키오거든... 이솝우화인 ‘양치는 소년’ 이야기에서 양치는 소년이 거짓말을 계속하다 가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했잖아.. 근데 사람들은 이 말을 안 믿었잖아. 사람들 이 한번만 더 믿어줬으면 모두다 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텐데... 결국 양도 죽고, 양치는 소년도 죽었 자나. 아쉽게도... 그동안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삶도, 하는 일도, 고민도 그렀고... 참 많 은 거짓말을 하고 살더라는 생각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거짓말쟁이 하면 피노키오를 연상 하자나... 근데 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피노키오가 아닌가 하는 문득 생각이 들었어. 피노키오는 거짓 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자나. 그건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거지. 결국 거짓말을 하지 않 아서 목각인형인 피노키오가 사람이 된거자나... 참사람의 의미가 무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더 이 상 삶 속에서 일 속에서 거짓말을 하며 살지 말자... 그러면서 피노키오라는 예칭을 갖게 되었거든... 정 : 근데 뭐 이리 장황해... 머리가 아플라고 하네.. 이 : 그럼. 음. 삶 속에서나 일 속에서 참 삶을 찾고 싶은 사람. 서구문화센터 청소년팀장 피노키오 이운기 라고 소개를 하면 될까? 줄임말로 ‘피키’ 라고 해. 정 : 여기가 서구문화센터자나. 이곳에서 형이 하고 있는 일이 뭐야? 이 : 주 업무는 서구청소년수련관의 청소년수련활동팀 일을 하고 있고. 더 구체적으로는 저소득 청소년 을 대상으로 하는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고. 부가적으로는 일천개의 얼굴을 가진 문화 마을 만들기 사업팀에 참여하고 있고. 서구공공도서관의 북스타트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향토문화 마을에 참여하고 있고. 정 : 일이 엄청난데... 그 일이 주어진거야 아니면 하겠다고 한거야? 이 : 당연히 다 주어진 거지. 여기 있으니까 하는거지... 어느 미친놈이 그걸 다 한다고 하겠어... 서구문화센터에서 보면, 문화체육과 사회체육을 제외한 사업들 대부분이 나를 비롯한 우리팀의 업무 지. 흔히 하는 이야기로 돈 안되며 몸망가지지는 사업들 인건지... 훗... 정 : YMCA에 들어온 계기가 있을텐데.. 이 : YMCA에는 1999년 10월에 입사를 했어. 대학을 졸업할 쯤 4학년때였는데. 너도 알다시피 당시 우 리가 활동하던 젊은모임을 키워보고자 많은 노력을 했었잖아. 그런데 여러 가지 고민들로 힘들어 도 했고. 조직의 기반이 튼튼하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YMCA에서 함께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해서 들어오게 된거지. 그리곤 쭈욱 YMCA에서. 청소년팀 실무자로는 최장기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 YMCA의 청소년업무를 안해본게 없으니까. 정 : YMCA는 순환근무제를 하잖아. 다들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는데. 근데 형은 왜 계속 청소년팀에 있는거야?


어쨌든 인권의 도시, 평화의 도시 광주에서는 청소년들이 우리사회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 이 : YMCA의 순환근무제는 지회를 순환하거나 팀을 순환하는거야...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운동을 경험 하게 하여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 그것이 YMCA 순환근무제의 의미야... 근데 YMCA 내부에서도 여 러 이야기 많지... 간사가 되기전 지도직일 경우는 순환이 많아... 간사가 되고 지회의 관장이 되면 그 때부터 자기 전문분야를 키워갈 수 있는거지... 결국 간사가 되기 위해서 통합적인 사고와 경험이 필 요해서 팀을 순환하고 있다. 정 : YMCA에 들어오기 전 이야기를 해봤으면 해. 고등학생 운동을 하게 된 계기라든지.. 이 : 처음 활동을 시작한 건 1989년이야. 1989년에 전교조 운동의 좌절로 교사운동과 학생회 운동이 어 려워 졌거든... 그러다 보니까 활동을 공개적으로 들어내지 못한채 소모임 활동을 많이 했었거든... 그 때 학내에서 소모임 활동으로 시작을 했지... 그러면서 91년 철수의 분신으로 분신대책위나 참교 육선봉대 활동을 했고, 자주적 학생회 건설에 대한 논의와 고민으로 자건회 활동을 했고... 1996년 에는 5.31 교육개혁안의 발표로 봉사활동을 통한 청소년들과의 사회참여를 위해 청소년열린광장을 만들어 활동했고... 그 뒤에 이웃사촌이던 참사랑배움터의 지도자들이랑 함께 만든 청소년을 사랑하 는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활동을 해왔지. 젊은모임에서는 첫 맡았던 게 청소년참여기획단 일이였어. 당시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청소년참여기획단 업무로 만든 청소년포럼으로 청소년인권에 대한 논의 를 많이 했었지.. 당시에는 청소년인권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던 시기였잖아... 청소년포럼을 통해 청소년인권센터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그 일을 YMCA가 했으면 하는 논의가 있었고... 그러던 참에 YMCA에 들어가 청소년인권센터 일을 맡게 된거지...

청소년들이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자치역량이 커져가는 것, 학교와 만나는 것 정 : 젊은모임을 비롯한 고등학생 운동이 일자릴 만들어 준거네... 그럼 형이 생각하는 청소년들의 문화는 어때? 이 : 우리가 주의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청소년들이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자치역량이 커져가는 것이라 고 생각해. 근데 실상 관련 프로젝트들이 늘어가고 있으나 이것들이 우리 지역의 청소년들의 문화역 량을 강화시키는것 같지는 않아... 과거에는 학교내외의 다양한 동아리 및 모임들의 활동으로 기본적 인 역량이 구축되어 왔잖아... 네트워크도 되고... 그 힘으로 청소년들이 주도하는 문화가 활성화 되 었는데... 지금은 청소년단체들이 이것을 독점하게 되면서 학교 안팎의 청소년문화 역량을 강화시키 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실상 학교로 보면 동아리 활성화 안되고... 또, 시간적 제약으로 활동도 어 렵고... 그렇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도적 장치들이 많이 필요하잖아. 단체들의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고... 근데 안타깝게도 청소년단체들이 보조금을 따서 그 예산으로 사업을 진행하려는데만 노 력하는 것 같아 보여... 이건 아닌데 말이지... 정 : 그럼, 형이 말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구문화센터에서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데? 이 : 그런 몇 가지 과제를 풀기 위해 청소년문화기획단을 운영하고 있어. 청소년들이 활동 가능한 토, 일 요일을 활용해서... 틈새학교나 방중활동으로 활동역량을 강화시키고... 청소년축제 기획자 아카데 미 등으로 학교와 연계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고... 결국 고민의 중심은 학교를 이대로 둘 수는 없 다는 거라 학교에 접근하기 위한 고민과 다양한 실천방안을 준비중이야... 이것이 그 동안의 서구문 화센터에서의 청소년활동과는 다른 점이야. 어쨌든... 학교와의 작업에 집중하여 청소년들을 만나자 는거지..

어야 돼. 광주는 청소년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 정 : 청소년들의 사회참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잖아... 청소년들의 참여활동에 대한 생각은 어때? 이 :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의 과정에 청소년들의 힘이 엄청 컸거든... 광주학생독립운동이나 1960년 4.19... 1980년 5.18...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1989년 참교육운동...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되 는 청소년들의 인권에 대한 자기 목소리 내기 등 많았잖아. 그런데... 인권의 도시, 평화의 도시라 말 하는 광주의 실상은 그러한가에는 의문이 많아. 5.18의 경우에도 당시 수많은 고등학생이 참여를 했 잖아. 근데 이들의 활동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채, 성인들만의 공으로 돌아가 버렸잖아. 어쨌든 인 권의 도시, 평화의 도시 광주에서는 청소년들이 우리사회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 각해. 광주는 청소년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난 생각해. . 정 : 그럼 문화중심도시에서의 광주 청소년들은? 이 : 문화수도가 만들어 지는 2023년에 광주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게 될 사람들은 결국 지금의 아동·청 소년들이잖아. 근데, 광주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 청소년들의 목소리와 참여는 빠져 있다는거지. 지 금이라도 문화중심도시 관련 프로젝트들이 청소년들 속으로 들어와야하고, 또 청소년단체들도 요구 해야 한다고 생각해. 청소년들의 역량을 강화와 문화시민으로서의 살아가기 위해서 이건 매우 중요하 거든. 이를 위해 청소년단체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지. 정 : 근데, 서구청소년수련관이 아니라 왜 서구문화센터인거지? 이 : 관에서 만든 것이라 위탁시설인 YMCA에서 뭐라 말하긴 어려운데. 서구문화센터는 수련관, 문예회 관, 공공도서관, 민방위교육장 등의 복합시설이야. 구에서는 하나로 모아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생색 내기도 좋고, 또 One-Stop서비스도 되고. 예산절감 등의 의미가 있었을 것야. 그래서 결국 여기는 모두다 조금씩 인거야. 근데 청소년업무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문화센터로서의 입지가 강해서 청 소년수련관으로 기능이나 목소리를 내는데 어려움이 많아. 평일은 주로 성인, 유아, 어린이가 중심으 로 사용하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청소년들이 중심으로 사용하는 거지. 정 : 그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거야? 이 : 공간 사용문제로 엄청 고민을 하는데 쉽지 않아. 토요일 일요일은 청소년 프로그램을 우선으로 진행 하고 있어. 아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댄스연습실 등은 아이들 전용으로 사용하는거지. 대신 평일에는 방과후 아카데미 전용실로 2공간을 사용하고 있어. 현실적인 문제의 해답을 위해 이용하는 대상의 특 성에 의해 정리를 해. 그러나 충분치 않은게 현실이고. (이때 당직을 서고 있는 이운기 팀장을 위해 팀원들이 치킨을 싸서 지지방문을 옴)

우리가 사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 천국이란건 평화라고 생각해. 정 : 어렸을 때 꿈은 뭐였는가?


이 : 고등학생 때는 국어선생님이 꿈이었어. 무등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국어선생님의 담배 피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고독을 씹는 듯 한 모습 멋있더라고. 근데 국어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 다리를 떠는 버 릇이 있었어. 내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다리 떠는 모습을 계속 봐왔는데. 우습게도 나도 다리를 떨게 되는 버릇이 생겨버렸지. ^.^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는 직업이 아닌 어떤 게 살아야 참된 삶을 살아 가는가를 고민을 했고. 그래서 이렇게 살고 있지. 정 : 그럼, 지금 꿈이 있다면? 이 : 꿈이라기보다는 소망이 하나 있는데. 난 평화운동에 관심이 많아. 그래서 YMCA 안에서 평화운동 의 지평을 열어가고 싶어. 정 :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을텐데? 이 : YMCA에 들어올 때 YMCA의 이념을 생각하며 들어온 게 아니라 일감을 보고 들어왔거든. 근데 YMCA 일을 하면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 YMCA는 천국가자는 것을 설파하는 것 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는 것이거든... 천국이라는 것을 난 평화라고 생각하 거든. 그래서 우리 사회에 평화적인 영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될지 안될지 잘 모르겠지 만 현재 YMCA 안에서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꾸려가고도 있고. 정 : 지금, 문화중심도시 사업의 일환을 시민참여네트워크인 ‘일천개의 문화마을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잖아. 그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면? 이 : 그동안은 YMCA운동이 사회적 중요한 이슈에 YMCA의 의견과 생각을 표출하는 것이었어. YMCA 목적문에 새문화창조라는 것이 있는데, 새문화라는 것이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말하거든. 이 를 위해 지역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하게 된거지. YMCA에 그동안 진행한 좋은동네만 들기운동은 실천모델이 아닌 교육모델이었어. 이를 진행하면서 구체적인 실천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 이 되었어. 좀 더 구체적으로 주민속으로 다가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지. 실제로 그 동안의 마을만들 기는 작가중심의 마을만들기라 주민들은 동원되는 식이었거든. 그래서 이 사업을 하면서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전문가들의 도움 등 이것을 고민하고 있어. 마을만들기 사업이 끝나면 주민들의 자 치모임이 활성화 되는것, 그래서 향후에도 다양한 모양의 마을 만들기가 진행되는 것. 이것을 꿈꾸 고 있지...

수첩, 상상력과 엉뚱함 정 : 형의 정보력, 정보망, 프로그램 기획에 있어서 원천은 어디서 나오거야? 이 : 생활 그 자체^.^ 아이디어 수첩을 젊은모임 시절부터 가지고 있어. 민기 너도 그런 것처럼. 길을 걷 다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으면 일단 수첩을 빼서 끄적거려. 그림으로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 들에게 물어보고. 마지막으로 관련자료를 찾아보는데. 음. 상상력이라고나 할까. 내가 가끔 엉뚱하 자나. 정 : 그럼, 요근래 그런 상상력과 엉뚱함을 가지고 있는가?

이 : 솔직히 사람들의 삶이 지루하고 무료하자나. 무언가 코믹적인 작업을 해보고 싶어. 누가 나에게 돈 을 준다면 말이지. 정 :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줘. 이 : 청소년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활동가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어. 우리의 현실과 한계 그리고 고민을 나 눌 수 있는. 그동안 우리가 함께 진행해온 OKYOUTH를 넘어 청소년활동가포럼이 필요하다는 생각 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지. 그러면 뭐 할꺼냐라고 묻겠지. 땡그랑축제 ‘10원짜리 축 제’를 하고 싶어. 대단위 규모의 행사가 아닌 지역의 자원을 모아서 하는 축제. 저예산으로. 자발성 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축제. 이런 것들이 지역을 활성화시키고 청소년문화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믿 거든. 정 : 형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삶의 원천은 뭔가? 이 : 희망. 정 : 그게 끝이야...? 넘 짧잖아... 말을 좀 늘려봐... 이 : 옛날에는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희망’이야... 해도 안된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지... 일의 성과를 통해서 나에게 피드백 되는 거 지...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거지... 열심히 살아야지... 열심히... 정 :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봐... 이 : 나를 비롯한 우리 활동가들은 서구문화센터를 통해 지역민들과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커. 시설중심이 아닌 주민들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 지역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실천을 고민하고 있어... 그리고 국고보조가 아닌 시민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을 하고 싶고... 서구문화센터는 주민들 의 문화활동 거점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시설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만이 아닌 지역으로 찾 아가는 문화프로그램을 만들어 낼꺼야... 정 : 형의 앞날에 평화와 희망이 있기를... PEACE...


“문화중심도시의 중심은 자원봉사!!”

남구자원봉사센터, 조민정 처음 사람을 만날 때면 늘상 느껴지는 낯설음과 설레임으로 남구자원봉사센터에서 근무하는 조민정씨를 만났다. 퇴근 직후 라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오래 만난 친구처럼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데이트는 상무지구 <하늘보임> 카페에 서 시작!!. 조민정씨가 남구자원봉사센터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0년부터이다. 당시는 대학생이었고, 자원활동가의 일원 으로 남구자원봉사센터에 참여 했는데, 2005년 공식 채용이 되었다. 센터의 회계부터 시작해서 대학생자원봉사단, 청소년 자원봉사단 그리고 재해교육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업무를 맡고 있다. 남구자원봉사센터의 한 중심에 일을 하고 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인터뷰장소 : 상무지구 <하늘보임> 카페 // 인터뷰시간 : 2007.3.20 pm 08:30 ~ 10:3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주문희

주 : 소개부탁해요!! 조 : 명함 드렸는데... ^^. 남구자원봉사센터에서 근무하고 있구요. 업무는 행정업무, 회계, 대학생 자원 봉사단, 청소년 자원봉사단, 가족 봉사단, 재해교육하고 있어요. 또 실적관리, 전산시스템 관리, 센 터 자산관리도 하구요. 주 :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조 : 자원봉사센터 업무자체가 총괄적이라서요. 나이는 27이에요 주 : 무슨 띠죠? 닭띠? 조 :네. 주 : 전 뱀띠인데..닭띠와 뱀띠는 사이가 안 좋데요~~ ㅋㅋㅋ 조 : 닭띠는 소띠와 용띠를 만나야 좋아요. 주 : 자원봉사센터에서는 몇 년 근무했어요? 조 : 정식직원으로 근무 한 것은 2005년 이구요. 그 전에 2000년, 대학 1학년 때부터 자원봉사활동을 했어요. 그때 남구자원봉사센터와 인연을 맺었죠. 2002년 말, 3학년 때 노동청 직장체험 프로그램 있잖아요? 그것 신청해서 일하다가, 상근 근무자, 간사로 1년 동안 일하고, 2005년 직원으로 일하 게 됐어요. 주 : 남구자원봉사센터 체계는 어떻게 되요? 조 :복무나, 급여체계는 공무원과 거의 비슷해요. 주 : 사회복지사이기도 한데, 대학 전공 살린 거에요? 조 : 네. 주 : 몇 급이에요? 조 : 1급이에요... ㅋㅋ 3급까지 있어요.

‘사람’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 하는 사회복지 주 : 사회복지 자격증 준비할 때 ‘사회복지사’가 되면 어떻게 해야지 하는 바람 같은 것 있었어요? 조 : 저는 이론보다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책에서 배우는 것 보다 현장 경험을 통 해 얻은 게 더 많아요


주 : 보통 ‘사회복지’ 하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조 : 어디 가서 “저 사회복지일 해요”라고 하면, 자원봉사자 대하듯이 해요. “참 좋은 일 하네...., 고생하 네...” 보통 인식이 그래요. 월급을 받긴 하겠지만, 박봉이라서 생활하기 힘들거다... 예를 들면, 어르 신네들 대소변 가리는 일까지 하면서, 정말 힘들게 일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복지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사회복지사도 하나의 직업인데.. 월급이 많든 적든, 직 업으로서 일을 하거든요. 뭐 못 먹고 살 정도 아니구요. ㅋㅋ

청소년들이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자치역량이 커져가는 것, 학교와 만나는 것 주 : 웬만한 사명감 없이는 못할 것 같은데요?

조 : 요즘에는 거의 자원봉사가 붐이죠,.. 갑자기..그런 것 같아요. 직업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언론에서 자원봉사에 대해 많이 홍보를 해서 그런지... 아무튼 ‘자원봉사’가 굉장 히 이슈화가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자원봉사’ 하면은 사회복지시설에서 일하는 것으로 많이 상상 했어요. 예를 들면 고아원이나 양로원,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요, 쉽게 말하면, 뭐..애들 돌봐주고 빨래해주고, 그것을 아주 쉬운 봉사활동의 개념으로 그림을 그려요. 상담을 하다보면 10명중의 9명 정도가 이런 그림을 그려요. 조 : 자원봉사 자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10명중의 10명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번이라도 자원봉사를 접해 본 사람은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요. 아이들 학습지도라든가..내가 영어를 좀 하는데 영어 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봉사가 없을까요 하고..아주 전문적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주 : 힘들죠?

조 : 평생 자원봉사를 생각도 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고, 자원봉사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 들이 필요에 의해서, 뭐..실업급여 때문에 또는 사회봉사명령을 받아서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 사람 의 경우 아주 생소하잖아요. 그래서 아주 당연하게.. 우리집 하고 가장 가까운 고아원이 어디에요? 그렇게 접근해요..그것도 청소년이냐, 대학생이냐, 성인이냐에 따라 약간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 로 보면 그래요.

조 : 꼭 힘들지만은 않아요.

주 : 실제로 자원봉사 상담비율이 늘었나요?

주 : 사람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희망을 느끼는 직업이네요.

조 : 자원봉사가 정말 활성화되고 있구나 하고 느끼는 첫 번째 부분이 기업의 변화에요. 점점 기업들이 자원봉사를 선호하는 그러한 변화 속에서. 그리고 미미하지만 시민들의 변화에요. 시민들은 차츰 차 츰 늘어가고 있으니까. 그것도 하나의 변화이고. 다음은 공직자들의 변화에요. 남구청의 경우가 그러 해요. 자원봉사점수가 인사발령에 반영되고 1주일마다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구요.

조 : 그렇죠. 첫 번째는 직업이고. 그 다음에 꼭 받쳐줘야 할 것이 사명감인거 같아요. 보람을 느껴야지만 할 수 있거든요. 사회복지 자체가 인간을 대하는 학문이라서, 사람들을 대할 때 굉장히 조심스럽고 신경이 쓰여요.

조 : 전,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사회복지사이지만, 사회복지 시설에서는 근무해 본적이 없어요. 자원봉사 만 해봤지. 그래서 사회복지 자체만 놓고는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요. 그렇다고 이론적인 부분만 말 할 수도 없고. 다만, 자원봉사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생각하면 문화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의아 해 할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같아요. 자원봉사도 ‘문화’라는 틀로 생각 하고 포커스를 ‘문화’에 맞춰서 시민들에게 다가서면 훨씬 접근하기가 쉬울 거 같아요. 조 : 자원봉사를 시민운동으로 접근할 것인지, 사회복지적인 측면으로 접근할 것인지..이 양자 사이에서 항상 고민을 하는데, 그에 대한 뚜렷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시민운동과 사회복지는 함께 가야할 분야이긴 한데, 많이 다르기도 하잖아요?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사회복지적 측면으로 다가가야 하 는지, 시민운동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헷갈려요. 조 : 복지냐? 시민운동이냐 이것에 대해 상당히 고민이 많이 들어요. 실무자들 중에서도 굉장히 운동적 인 성향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복지적인, 인간적인 측면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있 거든요. 아주 다른 것 같아요. 주 : 자원봉사와 자원활동가가 다른 것 처럼 그런 건가요?. 어느쪽을 더 선호해요? 조 : 둘 다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필수적이기도 하고, 다만 시민들에게 다가갈 때 ‘문화’라는 개념으 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원봉사’에 대한 인식변화 주 : 자원봉사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어떤 것 같아요? 자원봉사에 대한 수요가 엄청 많은것 같던데요.

조 : 이러한 변화들을 보면서, 자원봉사가 정말 옛날과 다르구나 하고 느껴요. 옛날에는 자원봉사라는 상 품을 들고 세일즈맨처럼 “자원봉사 하세요” 하고 그랬거든요. 이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공급과 수 요가 불균형이에요. 센터의 경우 그래서 직원이 점점 늘어나고 있죠. 주 : 이러한 변화 분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좋은 건가요? 조 : 좋은 일이죠..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 좀 힘들어요. 주 : 중고등학생 자원봉사 수요가 많긴 하지만 의무적인 형태인 것 같은데.. 어떤가요? 조 : 의무시간이 정해져서 성적에 반영되죠. 제가 청소년 업무를 맡고 있다 보니까. 할 말이 많아요. 제가 주 5일 근무를 지키지 못한 이유입니다. 자원봉사센터라는 것 자체가 자원봉사를 하려는 사람과 자 원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간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인데, 구청과의 관계맺음 속에 있다 보니,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해요. 그래서 직접사업을 하게 되구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직접사업이 필 요하기도 해요. 시민들이 봤을 때 “봉사활동이라는 것이 저렇게 하는 것이 구나” 하는 하나의 모델 이 필요하니까. 조 : 청소년 의무시간 봉사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에 맞는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이들도 힘들어해요.


조 : 그래도.. 조금 학교장의 마인드라든가..자원봉사 담당 선생님의 마인드가 좋은 경우 전일제 봉사시 간을 만들어서 한달에 한번 전교생이 한꺼번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해요. 우리 자원봉사센터랑 협력을 맺어 위탁교육을 하기도 하구요. 저희 같은 경우, 이런 방식이 훨씬 수월하죠. 조 : 제일 바쁠 때가 행정적으로는 9월,10월이고, 가장 당황스러울 때는 개학한 첫 주에서 그 다음주 까 지에요. 저희 센터가 무진 중 바로 앞이라서, 그때가 되면 애들이 사무실을 꽉 매워요..수업 끝나기가 무섭게 와서..울면서..난리에요..정말 망막해요. “안 해가면 맞는다.” “점수 못 맞는다” 하는데... 처 음에는 너무 당황했어요. 확인서 끊어달라고 난리인데..정말.. 그렇다고 미리 끊어줄 수도 없고. 애들 교육상 안 좋잖아요..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안 되고...근데..그런 경험을 한두번 하니까 노 하우가 생겨서... 해결책이 생기더라구요. 가장 좋은 방법이 교육장으로 다 불러서 자원봉사 교육을 해요..여러 프로그램을 접목시켜서... 최대한 한 3시간정도 해요. 그룹작업도 하고..브래인스토밍도 하고, 영상도 보여주고.. 오는 시간 가는 시간 다 포함해서 4시간정도 인정해주고 구래요. 그리고 남 은 시간은 선생님한테 허락을 맡고 와서 다시 하라고 하면서 보내줘요. 그래도 안 되는 애들은 학교 를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 통화로 해결하죠.

주 : 취미에요? 얼마나 활동 했어요? 조 : 이제 10개 산 갔나.. 주 : 나오세요..제가 친절히 대해 줄께요..ㅎㅎㅎ 주 : 주말에는 주로 산에 가나요? 조 : 네. 정기산행..벙개 산행 있어서. 한 달에 2-3번 정도 가요. 일요일에 당일 코스로 일찍 가요. 아침 에 5시에서 5시 30에 가서 저녁에 와요. 주 : 힘들지 않아요? 조 : 처음엔 힘들었는데, 다니니까 잼있어요... 주 : 하고 싶은 것이 뭐에요? 앞으로 계획이요.

조 : 청소년들 시각에서 바라보고 판단해 주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조 :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나이 때문에 힘들어요. 지금 딱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직업을 바꿔 보고 싶어요. 아주 다른 성격의 일을 하고 싶어 요. 산을 전문으로 탄다거나, 미술을 전문적으로 한다거나. 그런거요..

주 :정말 잘 해결하시네요.. 저 같으면 못 할 거에요.. ㅎㅎ

주 : 그럼 전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요?

조 : 처음에 대학 입학 때 사회복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조 : 경제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여유가 되면 해보고 싶어요. 3개월 어학연수라도...여행도 중독인 것 같 아요...여행가기전에 준비하고..계획하고..다녀와서는 후기들 정리하고.. 그런데 직장인으로서 3개 월 휴가내서 가기가 힘들죠.

주 : 애들한테 소리 안 질러요?

조 : 대학 때 RCY(대한적십자사)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나주..장애인 시설까 지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면서..고2, 2학년때는 학교 부단장, 임원도 하면서.. 자원봉사에 굉장히 가 까워졌어요. 전문적으로는 잘 모르지만..사실 그 당시에는 사회복지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개념이 없 었어요. 나이도 어렸고. 원래..유아교육과를 꿈꿨어요..아이들을 좋아했었고..막연한 환상도 있었고. 지금은 안가길 잘한 것 같아요. ^^;; 조 : 대학 때 보육교사 수업도 듣고 했는데..정말 유아교육과 안가길 잘했다 생각했어요.. 주 : 고등학교 때 RCY활동이 계기가 되어서 막연하게 사회복지를 생각하고. 유아교육과와 사회복지 학과 둘 다에 원서를 썼는데..부모님의 영향이 컸어요..부모님이 사회복지를 더 선호했죠. 어차피 저도 사회복지에 관심이 있었구요. 조 : 잘 결정했다고 생각해요..다만 더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미련이 있지만요. 주 : 더하고 싶은 분야는요? 조 : 직장을 옮기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주 :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조 : 정식으로 사직서 낼 정도는 아니고요... 난 그만 둘 거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화가 나고, 성질이 나도... 사직서를 직접 낼 것이 아닌 이상...그건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일적 으로 타협이 안 되서 도망간다고 생각해요..일적인 부분에서..윗사람과 맞지 않아서.. 내말을 들어주 지 않아서 그만두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아요..그 사람은 어딜 가도 똑같을 것 같아요

일 속에 ‘쉼’이 있다 조 : <생활 속에서 여유를 찾자>가 제 신조에요...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일속에서 쉼을 찾아야 한다 고 생각해요.. 일을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이고, 일을 하는 것이 쉬는 것 일수 있죠. 최대한 재미있게 일을 하려고 해요.. 하루 종일 장부 쓰고.. 전산 하다가 아이들이 오면 정말 좋거든요.. 주 : 결혼 후에도 계속 하실 건가요?

‘전화통화로 잠시중단’ 주 : 산에 다녀요? 동호회에요 조 : 산악회에요...

조 : 네.


“작은 문화활동들이 많아지면 커다란 문화의 숲이 되요” 조 : 언제까지 하겠다고 정한 것은 없지만,..내가 진짜 불가피한 일이 생기지 않은 이상 하고 싶어요. 자 원봉사 분야 중에서 한 분야를 정해서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현재 대학원 가려고 생각도 하고 있구 요.. 전문가가 되고 싶고, 지금까지는 일을 배우는 단계였다면, 아제는 공부도 깊이 있게 하고..후배 들에게도 전달하고 가르쳐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주 : 네트웍에 대한 생각은? 조 : 정말 네트웍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명이에요..일을 하면서도 가끔 어려움에 부딪히는 일 중에 하나가 뭐나면 실무자들 간의 정보공유가 안되어 있다는 것에요. 사회복지는 보건복지부 시 스템을 쓰고, 저희 같은 경우는 행정자치부 시스템을 따라요.. 자원봉사 인증자체도 다르고... 보이 지 않는 벽이 있어요.. 조 : 정책으로 바뀌는 것을 기다리기는 날 샐 것 같고..우리 젊은이들 특히 이쪽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젊 은 활동가들 부터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자주 만나고 이야기 하고 정보공유하고 하면서, 이렇게 해야 해결책도 만들죠. 힘이 모여야 정책도 변화 시킬 수 있구요. 주 :구마다 자원봉사센터 있던데 모임 안 해요? 조 : 예전엔 팀끼리 모이고 했는데..지금은 소장님들 끼리 모이기도 하고 구래요. 주 :연령대가 어떻게 되나요? 조 : 제가 어린 나이에 속해요. 주 :그러면 트러블 안 생겨요? 조 : 갈등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것 같아요..다만 갈등이 좋은 결과를 가져와야 하잖아요..그래서 많은 대화를 하게 되고..싸우는 만큼 좋은 대안도 나오고 그런 것 같아요.

‘문화중심도시의 중심이 자원봉사다’ 주 : 마지막으로 문화도시에 대한 상은? 조 : 전 그 자체를 모르겠어요.. 문화중심도시라고 하는데, 이것을 시에서 내세워서 브랜드로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문화적, 정책적으로 만들어져서 문화중심도시라고 하는 것인지..제가 물어보 고 싶어요.. 조 : 문화라는 것이 아주 광범위하잖아요..자원봉사도 문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어디서부터 어 디까지를 문화라고 말하는지..일단은..문화중심도시가 뭔지는 지켜봐야 될 것 같구요. 대신, 문화중 심도시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은 해봐야 된다고 생각해요..문화라는 것이 좋은 거잖아요. 특히 자원봉사 를 문화화적인 의미로 확산시켜야 일반 시민들에게 파급시킬 수 있을 것 같고.. 주 : 자원봉사 문화라..뭐죠? 조 : 자원봉사 문화란 말 그대로, 자원봉사를 활용해서 자원봉사 음악제를 할 수도 있고. 자원봉사라는 주제가 무궁무진하거든요..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어요..문화중심도시의 중심도 자원봉사인 것 같 아요..예를 들어서. 문화중심도시 관련 행사를 진행하더라도 자원봉사가 빠져서는 안 되거든요. 자원 봉사는 어딜 가나 빠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주 :직업에 대한 애정이 많네요.. 조 : 네..애정이 많아요..ㅎㅎㅎ

포엠콘서트 활동가, 김선희 백개의 손을 가진 사람을 백수라고 생각하는데, 불교에서 천수천안에 있는데 거기에는 못 미치겠지만 백수가 되어서 하고 싶 은 일도 하면서 다른 일도 할수 있고, 또 다른 꿈도 꿀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도고 싶다.

// 인터뷰장소 : 호남신학대학교 내 카페 T BROWN // 인터뷰시간 : 2007.4.12 am 10:45 ~ 12:20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기


정 : 자기 소개를 한다면...? 김 : 이렇게 있으니까 취조하는 분위기인데요. 저는 김선희구요. 지금 포엠콘서트라는 공연에 참여하고, 살림을 맡고 있어요. 정 : 포엠콘서트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포엠콘서트가 뭔지 소개를 해주면 좋겠는데 김 : 포엠콘서트는 2003년에 시작했어요. 시인들의 시를 음악으로 만나는 것, 영상이나 다른 매체들과 손잡고 만나서 한 몸이 되는 이런것들을 만들어가는 콘서트인데요. 처음에 포엠콘서트는 중앙문단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깊은 성찰감이나 깊은 생각들을 담고 있는 좋은 시와 시인을 중심으로 열 어갔어요. 처음에는 한달에 한번씩... 2년정도 지나고 나니까, 지역에서 지역시인들의 시를 다루지 않는다거나 또는 이런 시인들의 시를 다루어야 한다는 등의 말들이 많아서 한때는 선정위원회를 구성 해서 포엠콘서트를 준비하기도 했어요. 김 : 그런데 좋은 시인들, 깊이 있는 시인들을 숨겨져 있는 보물찾기처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선정위원 회를 통해 시인들을 찾다 보니까 명망 있는 사람들, 이름난 시인들, 유명한 사람들이 선정이 됐어요. 그러다 보니 초기에 포엠콘서트를 만들던 사람들과 포엠콘서트를 아끼던 팬들의 마음과 정신에 맞지 않는 거야. 때로는 유명한 시인이 주인공으로 참여하면 포엠콘서트를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이 붙기도 하고... 포엠의 특징은 항상 짜여있는 사람으로만 작업을 하는게 아니라 늘 열려있었고, 누구 든 작업을 함께 해보고 싶은 사람이면 음악, 미술, 춤, 연극 등 자신이 역할을 가지고 다양하게 참여 했어요.. 좋아하면 자기가 작품을 골라서 이건 이렇게 하겠다 해서 준비해서 공연에 올라오고 유기적 인 관계로 포엠콘서트를 만들어 갔었는데... 유명한 시인이 끼어들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간섭 을 하고 끼어들어서, 포엠을 처음 시작했던 사람들이 조금 소홀해지게 되고. 최근에는 포엠콘서트가 많이 가난해졌어요. 지원도 못 받고... 뭐, 처음에도 지원받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도 많이 포엠콘서트에 대해서 지루해졌다고 하고.. 정체되었다고 해야 할까? 같이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런 느 낌을 받았어요. 포엠콘서트도 작지만 나름대로 예술인네트워크 잖아요... 여러 장르에서 활동하는 예 술인들이 같이하는 작업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정 : 지역의 요구가 있어서 선정위원회가 만들었잖아. 그럼 지금도 선정위원회가 존재 하는거야? 김 : 지금은 있기는 하지만... 선정위원회가 지역요구에 의해 만들었지만 선정위원들에게 무명으로 설문 조사를 하고, 가장 표가 많이 나온 시인들 중에서 선정을 했죠. 약 1년 정도 이렇게 진행을 했어요. 그런데 선정위원들이 소극적이라 선정위원회가 잘 돌아가지 못했고... 시인 선정도 명망가 위주로 선 정이 되었고... 이런식으로 할 바에는 선정위원회가 필요 없는 거예요. 대한민국 대표시인들 리스트 를 뽑아 놓고 하나둘씩 그냥 돌아가면서 선정하면 되니까... 그래서 최근에는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어요,

냥 공연을 만들어 가는 과정과 결과, 네트워크를 통해 준비한 사람들이 더 깊어지는 예술인들의 학습 이나 워크샵 같은 느낌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그런 창구로 만들어졌어요. 나희덕 선생님이 4번째인가 5번째 포엠콘서트 주인공이었는데 포엠 진행을 맡고 계시는 박양희 선생 님이 담양 지실마을에 텃밭을 가꾸면서 살고 계셨어요. 나희덕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모시면서 공연중 간에 포토에세이 같은 꼭지로 나희덕 선생님의 글과 삶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그 때 박양희 선생님을 화자로 사진을 찍는 거였는데... ‘이것 좀 켜봐라’ 해서 카메라를 켜고... ‘이것 좀 찍어봐라’ 해서 카메 라로 찍고... 그 다음부터는 ‘니가 알아서 해봐라’ 이런 거죠... 이렇게 하다가 코가 끼인거죠. ^.^ . 정 : 켜봐라.. 찍어봐라... 만들어봐라... 김 : 그렇죠... 그러다가 니가 맡아서 진행해봐라가 된 거죠... 사진 찍고, 원고 쓰고, 편집하고... 5년째 계속하고 있는거죠... 그래서 영상도 배우게 되었구요... 정 : 그럼... 지금 포엠콘서트에서는 영상파트를 맡고 있다는 거네.. 김 : 그렇죠... 정 : 우연인 것 같지만 결코 우연하게 포엠콘서트에 결합한 것 같지는 않네... 나름의 성격이나 성장과 등으로 인해 포엠콘서트에서 잘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거든... 성장과정은 어땠어? 김 : 아침에 잠을 되게 많이 자는 편인데... 일어나서 학교 가는게 되게 싫었어요... 밖에서 그 냥 놀고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매일 지각하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주로 땡땡이 치는거 좋아했어요... 정 : 학교를 어디 나왔는데...? 김 : 나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옆에 저수지가 있어서 봄날 여름날 가을날 저수지에 맨날 앉아 있었어요. 산책도 하고... 그리고 나서 제가 고3때 신문에서 간디학교라는 걸 처음 봤어요. 그래 서 거기 가겠다고 떼쓰고 하루종일 울었던 기억도 있는데... 정말 억울했어요. 세상에 그런 학교가 있 는데 내가 이렇게 3년을 보내고 있다니... 괜히 분통터지고 억울하고 그러더라구요... 정 : 시 좋아하지? 김 : 예, 좋아해요. 정 : 좋아하는 시인이나 즐겨 읽는 시 또는 분위기 뭐 그런게 있을까? 김 : 장르 구분 그런거 딱히 없어요. 그냥 어떤 책을 만나게 되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인연의 꼬리를 무

정 : 그럼 선희는 포엠콘서트에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된 거야?

는 것처럼 책도 그렇게 만나요. 이 책을 보다보면 이 책과 연결 된 다른 책을 만나게 되는거고...

김 : 2003년에 포엠콘서트가 시작됐어요. 그때 저는 다른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포엠콘서트를 진행하려고 오물조물하게 꾸미고 있던 단계였어요. 자주 만나서 많이 맞장구 쳐주고 ‘그런게 있으면 정말 좋겠다’ ‘나도 뭔가 특별한 건 아니지만 내가 할 일이 있겠구나’라고 생각 을 했죠. 포엠콘서트 원칙이 NO갤런티, NO페이...였어요 돈이 한 푼도 들어가지 않는 그런 공연...

정 : 좋아하는 시인이 있을까?


김 : 고등학교 때는 이형기 시인을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 말하라면 끝도 없어요... 그리고 포엠콘서트를 하면서 이름도 몰랐던 시인들인데 시를 읽고... 포엠콘서트를 한 번 할때 마다 그 시인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돼요. 그래서 좋아하는 시인을 말하라면 포엠콘서트가 30번째이니까, 그러면 30명 다 말해야 해요. 처음부터.. 시들은 다 좋아요... 읽을수록... 포엠콘서트를 하면 시집 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요. 어떤 흐름을 발견하게 되고, 시를 보는 새롭게 또 깊게 볼 수 있게 되 는 것 같아요. 나희덕, 천양희, 황인숙, 가장 최근에 만난 김선우 시인까지...(그러고 보니 다 여류시 인이네요). 그 중에서 김선우 시인은 정말 멋있어요. 다른 포엠콘서트를 했던 시인보다 젊고 아름다 웠어요. 김선우 시인의 시가 여성성이 강한시들이에요. 그러면서도 사회에 대한 할 말들을 숨기지도 않고 너무 감성적이거나 물르지도 않고... 참 입성 바른 시인인 것 같아요... 당차고 강하고 그러면서 도 여성적으로 부드럽고... 이런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어서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 이예요... 정 : 포엠코서트가 5년 정도 지나왔는데... 포엠콘서트에 대한 사람들 반응은 어때?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관객들의 반응들... 김 : 설문조사를 안해 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유행가에도 자기상황에 들어맞으면 가끔 가슴찡 해지거나 쉽게 동화되거나 그렇잖아요. 사실 유행가 가사라는 게 막상 글씨로 써보면 약간 유치하거 든요... 근데 시를 노래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감성이나 꼭 그 감성이라는게 여리고 내부에 있고 약 하고 깨지기 쉽고 그러잖아요...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다른 자기를 만나고 또 다른 세계 에 가는 문을 발견하고 나오는 것 같아요... 포엠콘서트에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왔던 사람들은 대개 팬이 되고 포엠콘서트를 아껴주고 그런분 들이 되게 많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주에는 관객 이 별로 없어요. 정 : 어린시절 부터 우리는 꿈을 꿔 오잖아... 그리고 항상 조금씩 변해가잖아...선희의 꿈은 어땠어? 김 : 제가 돈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즉, 부자가 되고 싶다는 해본 적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 병이있 어서 몇 년간 병원을 꾸준히 다녀서인지... 그때 꿈이 간호사! 어렸을 때 설문조사하는데 장래희망이 라고 적잖아요. 간호사라고 썼다 고교장실에 불려갔어요. ‘너가 여자라고 간호사 이런 꿈만 꾸면 안된 다’...‘ 너는 의사도 될 수 있다’. 교장선생님은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어렸을 때 3~4년 매일 병원 다니며 만난 사람 중에 간호사가 제일 예뻐 보였어요. 그래서 간호사를 꿈꿨어요. 고등학교 때는 도서관 사서가 꿈이었어요... 책을 대여하고, 돌려받으며 하루 종일 책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학을 문헌정보학과를 갔어요... 그런데 도서관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도 하고 했는데... 정작 도서관에서 사 서는 책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학교를 그만뒀어요. 아예 자퇴를 한 거죠...물론 다른 이유도 있 었지만...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녹생평론이라는 잡지를 봤는데... 저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거였어 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니까 왜 이리 세상이 넓던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모임도 많고... 생태모 임 ‘물에산에’ 라는 모임이 생겼어요. 모임에 함께하다가... 나중에는 녹색연합에 들어가서 활동을 했 어요. 3년 정도 협력 간사로 활동을 했죠...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저의 궁극적인 꿈은 백수예요... 백수가 아무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지만 저는 백 개의 손을 가진 사람을 백수 라고 생각을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불교에 보면 천수천안이 있잖 아요. 거기까지는 안 되겠고 못되겠지만 백수가 되어서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다른 일도 할 수 있고, 또 다른 꿈도 꿀 수 있고, 이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전 백수라고 봐요.

정 : 백수로 지내기 때문에 여유가 많을 수 있는 반면에 없을 수 있잖아. 그러면 나만의 시간 이라는게 존재해야하는데 나의 문화적 행동을 위한 개인적 움직임, 개인적 취미. 개인의 문화적 활동 등은 어떻게 해? 김 : 보통 대부분의 문화적 욕구나 활동은 포엠콘서트를 통해 일어나고 해소되고 그러거든요. 포엠콘서 트안에 모든 것들이 들어있으니까... 시집을 읽는다거나 작업으로 저에겐 힘도 되고... 쉼도 되고... 그리고 또 다른작업들을 해야 하니까 또 다른 생각을 풀고서 일기를 쓰거나 글을 쓰는것... 또 하나의 취미고 휴식이고, 에너지의 원천이고...작년 일년 동안은 같이 작업하는 한보리 선생님이 무등일보에 일주일에 두 번씩 공연을 보고 난 느낌을 칼럼으로 쓰게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한보리 선생님이랑 일주일에 두 번 이상씩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공연을 많이 봤어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어서 여유도 생각고... 좋은 공연도 보고 그러죠... 정 : 그럼 포엠콘서트로 모든 것을 해결 하는 거네... 출퇴근이 있는 거야? 기 : 출퇴근은 있어요... 정해진 시간을 없지만.. 근데 자기 일이 없으면.. 안 나와도 되는거죠... 정 : 혹시 작년에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느낀점이 있을텐데... 좋았던 공연과 우리들의 공연문화에 여 러 생각들을 해 봤을 것 같은데... 어때? 김 : 공연장을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느끼는 거는요... 서울에서 내려온 대규모 공연들이 한 달에 두 세 번 정도씩 있는데... 그런 날은 공연장 주차장이 꽉 차요... 그러지 않은 날은 보통 일상적 풍경인데 작년에 공연장에 이상한 기운을 감지 했었요... 사람들이 초대공연에 많았어요... 그런 공연에 들어가 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는데... 학생들이 수행평가 때문에 때거지로 왔다 가는 거죠... 그럴때 짜증 이 많이 나요... 공연장에서 큰 공연이나 작은 공연이나 내용에 따라 감동을 받는데... 아이들은 그냥 수행평가로만 인식하는 거죠.... 정 : 그럼... 그 연극의 내용적인 면을 감동 받았다는 거야...? 김 : 내용도 그렇고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고... 아주 기본적인 무대 셋팅 등. 물고기 그림이 단순한 선으 로 그려져 있는 큰 걸게그 림이 걸려있고... 단순한 박스 대 여섯 개.. 그리고 조명도 기본조명 이었던 것 같은데... 그 안에서 공간을 활용하는 상상력이 좋았어요. 그게 연극의 힘일 수도 있었겠죠... 정 : 포엠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잖아... 포엠을 준비하는 사람들 안에서... 또는 시민의 반응 이라든지...? 김 : 저도 그렇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구... 가난한게 조금 힘들구요. 여러 사람이 같이 모여서 작업하다보 니까... 경제력이 없어서 사람들을 구속할 수 없어서 모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아쉬운 점이죠. 그 리고 작업에 경제적 한계가 있다는 것.. 뭐 그런것 들이죠... 정 : 평균 포엠콘서트 1회를 준비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얼마나 돼?


김 : 대관료, 음향, 사전작업비(사진, 영상촬영, 카메라대여, 테입 등), 연습하는데 드는 비용 등... 음향 은 음향회사에서 후원받는 셈이고.. 아주 타이트하게 진행하면 간신히 100만원 정도 드는 것 같아요. 100만원으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시와 노래 그리고 추억과 희망을 주는 거죠. ^.^. 정 : 작년에는 광주문진위의 지원을 받았잖아... 올해는 외부지원금이 어떻게 되었어? 김 : 올해는 없어요... 공모를 하긴 했는데... ㅠ.ㅠ...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어요.. 공모에 대한 정산 을 제때 못 한거죠... 그래서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정 : 광주에는 두 개의 아주 정적인 분위기의 공연이 있다고 생각해. 포엠콘서트와 무등산 풍경소리... 내 경우에도 두 개의 공연을 가끔 보는데... 공연들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공연이잖아... 김 : 그거는요... 사람들이 느끼기에 자발적이고 정기적인 면에서는 비슷하게 생각할 수 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것 같아요... 풍경소리는 무등산에 위치하면서... 무등산이 주제인거죠... 환경단체 나 무등산 관련단체들이 중심적으로 결합하고... 사회를 목사님, 스님이 본다는 종교적 화합의 의미 나 모여서 다듣고 포용한다는 의미와... 보통은 가수들을 초청하잖아요.. 원래 있는 노래들을 부른다 라는 점... 원래 하던 것들을 다시 한다는 점... 근데, 포엠콘서트는 늘 새롭고 처음 보는 것을 하죠... 포엠콘서트는 전에 했던 걸 절대로 하지 않아요. 전부 새 거예요. 새롭게 만들고 처음 보여지는것들... 사람들은 유명한 노래를 좋아하고 듣는거에 익숙하잖아요. 늘 새롭다는 것이 포엠콘서트의 장점이기 도하고 단점이기도하고 약점이기도하죠... 정 : 포엠콘서트를 준비하니까... 문화중심도시 광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개인적 으로 문화중심도시 광주에 대한 생각과 포엠콘서트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선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 김 : 사실은 저는 왜 광주가 문화중심도시인지 잘 모르겠어요. 도올 선생님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오히려 전주가 문화중심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요... 문화중심도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사업들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직 공감이 되지는 않아요. 저번에 “리하우” 라는 창작공연을 하는 걸 봤어요... 물위에서 사는 소수민족들의 이 야기였는데... 사기극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걸 만들려고 그렇게 오랜시간 동안 그렇게 해야 했 을까? 문화중심도시, 아시아문화교류라고 하면 공통적으로 아시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전통적이 고 역사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공유하는 정서 라는게 있잖아요. 서로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아시아 문화교류, 아시아를 묶는 건 또 다른 자본주의 중심의 서구세력간의 다른 정신적인 것 같은 냄새가 나기도 해요... 요새 그런 다양한 것들을 추진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산만하다고 해야 할까? 그 런 생각이 들어요... 정 : 어쨌든 광주에 문화중심도시를 만든다는 건 기정사실이잖아... 김 : 제 생각에는 문화중심도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웃겨요. ‘이 도시에 문화를 넣어라!’ 이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문화라는 것 자체를 이식하려 하고 이런 식으로 정책화 되어서 엄청난 자본과 인 력이 외부로 부터 투입되어 문화중심도시를 만든다는 발상자체가 자본주의적이고... 문화라는 말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문화’와 아시아중심도시에서 말하는 ‘문화’가 다른 말인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 지고 이식된 문화는 광주사람들것이 아니잖아요. 아시아 문화중심도시가 어쩌다 광주 가 된건지, 광주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닐거라는 생각을 해요. 남도라는 곳이 한국을 대표할 만큼 굉장 히 다양하고 풍부한 해학과 멋과 맛 을 지닌 지역이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문화중심도시가 광주 라고 한다면 그럴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은 드는데 세계화해서 그것을 광주에 풀어라는 것이 올바른 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정책을 제안할 사람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니고... 많이 몰라서 이렇게 얘기 할 수밖에 없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관심 갖고 이해하려하겠습니다. 정 : 문화중심도시 광주가 아닌 문화도시 광주라는 말로 내가 다시 물어볼게.. 문화중심도시와 문화도시는 다른 의미일테니까... 김 : 그래요... 문화에는 중심이 없어요... 정 : 그럼 마지막으로 포엠콘서트가 문화수도 광주에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네 생각은..? 김 : 포엠콘서트가 할 일은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멈추지 말고... 새로운 곡을 쓰고, 새로 운 영상을 만들고, 새로운 춤을 추고... 끊이지 않는 것 자체가 포엠콘서트가 가야할 이유이고 역할 인 것 같아요. 정 : 마지막 질문... 문화수도 광주에 바라는 네 생각을 이야기 한다면...? 사람들이 실험적이고 도발적이고, 더 창작적인 것들을 더 신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그리 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을 하고, 춤을 추는 사람은 춤을 추고 그게 공연장이 든 아니든 공원의 놀이터에서도 얼마든지 춤을 추고 노래할 수 도 있잖아요... 작은 활동들이 많아지 면 그것들이 자라서 숲이 될 것 같아요. 학벌이나 족보 같은게 있잖아요. 그게 예술사회에도 아주 심 한데. 화가들이 전시도 못하고.. 춤추는 사람이 무대에 올라갈 수 없고... 노래하는 사람이 공연장에 가지 못하고...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이라도 내 꿈을 화가야 하 면서 그림을 열심히 그려서 공원 한쪽 벽에 전시를 하고... 이런 활동이 가능한 광주. 아무나 자기의 문화활동이나 창작활동을 공유하고 전시하고, 공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김 : 저도 그렇구 다른 사 람들도 그렇구... 가난한게 조금 힘들구요. 여러 사람이 같이 모여서 작업하다보니까... 경제력이 없 어서 사람들을 구속할 수 없어서 모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아쉬운 점이죠. 그리고 작업에 경제적 한계가 있다는 것.. 뭐 그런것 들이죠... 정 : 그래... 그럼 참 아름다운 광주의 모습이 될꺼야....


“wisdom server, 문화시설 활동가들 간의 네트워크 방식에 대한 고민을 중심으로”

네트워크 당위적 목적에 의한 필요성 보다는 네트워킹의 과정과 내용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남도향도음식박물관 학예연구사, 장원익

장: 문화시설 활동가 네트웍을 하는 이유가 뭐야?

장원익 학예연구사는 현재 얼마전 개관한 향토음식박물관의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다. 북구청 내에 있는 유일한 학예연구 직으로 향토음식박물관 시설의 프로그램운영계획에서부터 기타 행정업무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을 하고 있다.학예연구직의 전문성(문화콘텐츠 발굴 및 연구조사)을 기초로 하여 기타 다양한 행정업무와의 연계성을 갖춘 새로운 사업영역을 발굴하여 구립박물관내에서 향토음식문화와 관련한 문화서비스를 계획, 조정하는 매개자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인터뷰장소 : 용봉동 얼씨구학당 // 인터뷰시간 : 007.3.05 pm 1시30분~4시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룡, 김수정

정: 두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내가 그것을 답해줘야 하잖아, 이유가 타당한 것인가를 확인 해봐 야 하고, 공식적인 문서화 된 말을 해 줄 수는 있지만, 하는 목적 자체가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과정을 같이 나누고 하는 것이지 장: 이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거기서 작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현재 문화시설 이라고 하는 것이,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기획단 같은 곳에서, 문화시설 네트웍이 문화시설만의 네트웍이 아니거든, 그 안에는 온갖 잡다한 것이 다 있거든.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그것을 네 트웍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무서운 말인 것 같아. 서로 통하게 하기 위해 네트웍을 한 것이 말이지. 문 화를 하나의 매개로 해서 네트웍을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올해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 서로 자주 만나고 하는 것은 네트웍이 아니라고 봐.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야. 그런 사람들은 만나서 일을 하면 되는 것이고. 인간관계라는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하는 것이, 서로 친해지는 관계 속에서 서로 오고가는 것이 있잖아. 지금의 네트웍은 모르는 사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 끼고, 그런거잖아. 공무원도 이런 것이 필요하거든, 이런 것이 나중에는 더 필요할 수 도 있거든. 정: 나한테 물어본 것이 연구사님이 이미 알고 있는거 거든요. 사람간의 네트웍이 소소한것 같기도 하고, 크지도 않은 것 같고, 만약 장원익연구사님이랑 나랑 그동안 네트웍을 맺어왔잖아요. 이것이 공공의 선, 조직과의 관계 등을 맺고 있는데, 이것이 핵심은 아니잖아요. 결국 핵심은 공통이든 공동 이든, 공유하는 부분에서건, 마음적인 편이 되어주는 것을 넘어서, 공동으로 넘어서는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장: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뭐냐하면, 공무원하고 민간인하고 나누자면, 문화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무원들과 어떻게 네트웍하는가, 이게 궁금하거든. 어떤 행사할 때 참여해주고, 기자제 같은 것 도 필요하면 빌려주기도 하고. 이런 것이든가..기획팀에서 자꾸 연락이 왔었어. 기자재도 빌려주고, 이렇게 해 달라고 하더라고, 선뜻 도와주려고 했던 것들을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더라고. 기존에 했던 것은 너무 어려워했었고, 그중에 한 팀이 라디오방송하는 팀이 있는데, 나를 인터뷰하고 싶어 하더라 고, 근데 나를 하지 말고, 당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주민자치위원회도 만나고, 행정조 직도 있고, 거기를 관할하는 의원도 있고, 그곳에는 북구청에 와서도 한번 해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깐 이 친구들이 왔어. 점을 봐주는 사람들을 섭외해서 북구청에 와서 점도 봐주고, 이렇게 알려 주니까 하더라고. 정작 작가들 사이에는 조율하는 부분이 안된 것도 있었는데, 일단 뛰어보니까 일단 부딪쳐봐야 되는 것이니까, 찾다보면 되는 것이 있으니까 자꾸 네트웍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해. 자꾸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들였으면 좋겠어. 그게 바로 네트웍이고, 처음에는 상대방이 거부하는 것도 네 트웍이고, 그것이 자체가 네트웍이고, 그런 것들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정: 네트웍 방식이 형식이나 틀 간에 맺는 관계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 관계, 내용성들을 가지고 하

장: 전체적인 큰 방향만 설정하고, 사람들이 들어와서 세세한 것은 채우고 그래야지, 구체적인 것을

는 하나의 과정 중심이고 내용 중심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갈등이 있더라도, 그 사

만들고 틀을 만들고 하면 그 사람들이 흡수되기 힘들거든.

이에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을 드러내고, 생각하는 차이나 이런 것들을 이끌어 내고, 이런 것들을 공

정: 자기만의 네트워크 방식을 만들려고 하잖아요. 이것은 직업이라는 관점에서, 북구청 소속의 학예

감하고. 기존의 공무원도 민간영역에 대해 선입견이 있고, 앞으로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기쁨을 줄

연구사라는 점에서 자신만의 네트웍 방식, 일하면서 어떤 방식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수 있고.

의 네트웍은 솔직함, 모르는 것을 아는체 해서도 안되고, 네트웍의 출발점인 것 같다. 솔직히 인정하

“ 네트워크 ! 갈등과 차이를 솔직히 드러내는 과정유희(科程 遊戱) ”

장: 내 방식

고, 밝히고, 이러면 상대방한테 진심이 통하게 되어있거든. 접근하는 방식이 허심탄회하게 접근해야 장: 조직 내에 있어서 껄끄러운 이야기, 하지 못한 이야기도 끌어내서 스트레스를 끌어낼 수 있고 해

지, 가식이나 꾸밈이 있으면 한계가 드러나는 것 같아.

소할 수 있거든. 어느 미술관이든 학예연구사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처한 상황

정: 연구사님!!

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는 견뎌낼 수 없는 상황일 수 있거든, 자기들 나름대로 어

장: 이혜영기자가 뭐 물어보고 했는데, 나는 솔직히 부담스럽거든. 내가 뭐 특별하게 알아야 하고, 부

려운 상황을 공감하고 있어.

족하고 배워야 할 것도 사실인데,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좀 그렇거든. 내가 하는 방식이 좀 어 설프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판단하겠지. 내 입장을 분명히 이야기를 해줘야지, 그 사람에 맞춰서 이

정: 조직의 질서나 환경변화에 따른 어려운 점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관계까지도 가야하지 않을까 요?

야기를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정: 연륜인지, 장점인지. 연구사님이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하셨잖아. 자신의 정체성, 가오를 세우는 것, 이런 것들을 고민을 했잖아요.

장: 그런 것들을 활동가들 사이에서 이야기 하다보면, 풀릴 수 있거든. 연구직 규정이 있더라. 자꾸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평소에 관심 있었는데, 자기 안에서도 모르고 있었던 것인데, 자기는 그런 것

장: 예전 어느 화가가 그러더라고, 서로 불꽃 튀기는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고. 아직도 준비하고 있는

에 대해서 의문시 하지도 않고 그랬단 말이야. 당신은 대학원 졸업하고 3년간 근무하고 나오면 그동

데, 갖춰지지 않았는데, 상대방이랑 서로 의견을 갖고 부딪치고 그런 입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안 자기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야. 내가 거기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까 서로 알아가는 것이

그런 시점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렇다고 하는 일이 그런 건 아니고. 내 자신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야. 내가 가면 의례히 학예연구실장 소개시켜주고, 박물관장 소개시켜주고, 결국엔 사람 사이의 관계

하잖아. 그래야 상대방이 나를 알아야 하는 거잖아. 지금은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내 나름대로

가 네트웍이더라고, 그게 안되있으면 그게 힘든 것이더라고.

갖추기 위해 고민하고, 그런 가운데, 내 네트워크라는 것이 도움이 되지, 지금 내가 오픈을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기회라는 것도 생겼고. “ 때론 돌아가고픈 박하사탕과도 같은 순수

정: 왜 네트웍을 하는가? 목적이나 당위성으로만 답을 찾으려고 하거든,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과정

에 대한 상호 확인의 과정 ”

에 의한 필요성이거든, 과정에 의한 필요성을 도출하다보면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의 여지들이 많을 것 이고,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이든.

에피소드 1. 예전 소빈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남원에 있는데, 저녁에 남원을 찾아갔어. 저녁에 나오라고 했더니

“ 네트워크의 기술1 - 상생에 대한 접근 기술 ”

후배들이랑 나왔어. 흐르는 물 옆에서 밤새 노래하면서 보낸 적이 있거든,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주

장: 네트웍의 기술이라고 표현하고 싶거든, 인간관계에서 두 사람이 완전히 달라, 결국에 봤을 때 네

고 받으면, 그렇게 되더라고.

트웍의 방식이 각각이 서로의 네트웍 방식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전고필은 기술적으로 너무 잘하

상 대방이 나한테 접근할 때에 치장한다던가 그러면 나는 순수하게 접근하거든. 그 한지공예하는 친

는 사람이야. 그렇게도 할 수도 있겠다 싶거든, 상대방이 부담 안갖으면서, 자기가 요구하는 것도 충

구가 있어서, 나의 고향 멱감고 놀던 곳에서, 그 친구를 만나면서 난 옛날을 생각했거든. 그 안에서

분히 요구하고. 그 반대도 있거든. 그때 상황에 따라 어떤 것이 필요한가는 결국 목적을 생각하면, 결

는 사업이야기, 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든지, 그런 것들이 다 녹아들어가. 마지막 종착역은 인간관계

국 상생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의 입장도 헤아려야 하거든. 요즘 문화권력이라고 하잖아. 좌우

의 본연의 순수한 본질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종착역이지 않나. 내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녹아나면

간 앞서가는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권력이라고 볼 수 있거든. 네트워크를 새롭게 바라보는 입장

그러면 되는 것이다.

에서는 이게 두렵기도 하거든. 이것을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거든. 어떤 입장인지 알 아주고, 친절한 안내도 필요하고..


지 식이야 노력하면 얻을 수 있거든, 지식 이면의 것들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은 아니거든, 넓게 봤을 때 는 그런 것이 아니거든. 그것이 편하고, 부담 없고, 어색하고 어려우면 그건 네트웍이 아니라고 생각 하거든. 또 그런 것을 해쳐가는 것도 부작용이 생기고, 그런 것도 하나의 방식인 것이지. 정: 이것도 하나의 사업이잖아. 과거 어렸을 때부터 오는 것이잖아. 추억이나, 심성이나, 그런 것들, 도덕적 이상이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나는 이해가 되, 근데 네트웍이 사업적인 것이잖아. 체계적이고 질서가 있는 것 같고. 그런 것을 사람들이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제. 이것이 맞는 이야기라고 알고 있지만, 자기만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지만, 더 나가서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이지. 장: 중간에 끼어있는 것들을 빼자고 하잖아. 전화에서 ARS를 빼 내자 이거잖아. 중간에 시스템이라 던가, 옭아 메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지. 공무원이 들어온다면, 너는 공무원이다, 나는 문화적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생각 이 바뀌어야한다 이런 것을 싹 빼고 시작하잔 말이지. 이런 것들을 빼야 네트웍이 되는 것이지. 정: 많은 사회 사람들, 틀이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못하고 있잖아. 문화시설가 안에 네트웍을 토론 을 해봤는데, 대안을 이야기하더라고. 기관이나 시설은 각자 살길이 따로 있는 것이거든, 그러니 네트웍을 할 필요가 없잖아. 그러다보니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이 나올 수 밖에 없거든. 협의체계나 협력체계라든가. 장: 옛날에는 네트웍이 없었어. 옛날에는 ARS가 없었어. 옛날에는 언제든지 가가지고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순서를 기다려야하고, 지금은 기계랑 이야기 하는 것이 편안한 세상이 되어버렸고. 네트웍의 필요성!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우리의 마인드로, 시 각으로 질서에 길들여져 있던 것들을 새롭게 보자는 것이지, 그동안 못 봤던 것들을 보자는 것이지. 장: 아까 사업이야기를 했는데, 네트웍 자체를 많이 하면 일이 안되거든, 그래서 이것을 하는 것이 중 요하거든. 나는 항상 공부할때도 좋아하던 말이: 에플비 행정학자, 비사인주의 -공무원이라는 사람들은 공공성을 담보한 사람들은 절대 개인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항상 가운데 입장에서 감정개입없이 일을 잘 처리해주고, 합리적으로 일을 해주는 사람이다. 네트웍의 방향성을 잘 잡아야 하잖아. 네트웍이 앞서고 일이 뒷전일 수 없거든, 인간관계에서 항상 문 제가 되고, 그런 것이지. 중용! 정: 본인 소개를 해주신다면? 어린이한테 소개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장: 향토음식박물관, 장원익 학예연구사 소개. (가장 어려운 질문인데... 풀어서 소개하세요)..

공 무원이고, 조직에 몸담고 오랫동안 있어본 적이 없거든. 특정한 조직에서 일한 적이 없었는데. 그 전에 추구하는 것은, 처한 환경에서 개선하고 싶어 하는 자유를 갈망했다고나 할까? 현재의 나의 모 습이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시간이었어. 지금 나의 현재의 모습이 나중의 나의 모습 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지 않았고, 앞으로 몸을 담을 것이고, 여기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지. 애들이 나를 보면, 비춰지기는 안내자, 길잡이? 자기들이 앞으로 많이 겪게 될 경험들을 맞닥드린 스 쳐지나가는 이정표? 지혜? 박 물관에서 주워진 것/학식이라던가 이런 것들은 교수거든, 지혜를 심어주고, 구루/지금은 지식이 더 어울리는 것 같고, 뭔가 알아가는 것도 중요한데, 여기와서, 많이 느끼고 가고, 색다른 공간 와서 스치고 지나간다는 거, 거기에 내가 있고, 사뿐이 밟고 지나가는 가운데 내가 있는 것이지, 내가 앞길 을 열어주는 선지자 입장은 아니고.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요런 길에 가는 곳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몸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와 닿는 것이 한 사람으로 느끼는 것이지. 여기는 가시밭, 오솔길 등등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니지. 정: 박물관에 대한 개념, 향토음식박물관을 기본적으로 깔고, 박물관에서 일하는 장원익을 이야기 해주세요. 장: 미래의 나의 모습일 수 있는데, 남도향토음식박물관에서, 남 도향토음식이니까, 남도지역의 문화, 음식문화와 관련해서 연구/발굴, 지역별 피가 되고 살이 되 었던 음식-독특한 재료들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내고, 그 지역의 사람들의 문화 속에 녹아있는 것이 거든, 오랫동안 생명이 되어왔던 피잖아. 그런 음식들이 매우 소중하고,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 그 지역을 답사하고, 부대끼며 이야기도 해보고, 남도의 구석구석을 몸으로 체험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일을 제대로 하려면 미치지 않으면 그 게 안 되잖아. 사명감이 있다면 1년이고 몇 달이고, 이것을 쭉 파고 들어가야 하잖아. 그 사람들하고, 현지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랑 네트워크를 맺어야 하는 것이고. 단 순히 내가 컴터나 치고, 두드려서 알아내고 가만히 앉아서 행사나 할 것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을 막연한 것들에 관해서 고민하고 있제. 그림을 그려본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는게 있잖 아요. 음식이 만들어진 환경, 문화, 삶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보려면 맛도 보고, 특징도 보고, 이것 이 다시 전시형태로 가고, 학습시키기고 공유시키는 과정이고. 맛 기행, 음식문화기행이 음식물에 관한 기행이잖아. 이게 문화기행은 아닌것 같더라구요. 혼자서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음식문화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이랑 같이 네트웍을 맺어야 하잖아. 프로그램 만든 다면 나도 이런 것을 만들고 싶어. 이것을 프로그램화 시켜서 과정으로서 진행 할 수 있는.


“ 자신의 정체성, 열망에 대한 확장으로서 네트워킹 ”

네트워크의 개발-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네트워킹의 필요성 ”

장: 남도에 내가 미치지 않는 한 이것이 하나의 허상일 뿐이제, 일을 효율적이고 편하게 하더라도 충

장: 향토음식에 대한 네트웍에 대한 필요성이 있고, 풀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그런

분히 결과를 낼 수 있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냐 하면, 내 스스로 결국 해야 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난

식으로 아이템을 발전 시킬 수 있는 상황을, 네트웍을 개발해야 하는 입장이지.

다는 것이지. 내 몸 구석구석에 심어놓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순간순간 지나가게 되어 있고, 내가 꼭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공격적인 네트웍이 필요하는 것이지. 자기 주변에 있는 네트웍이 아니라 자신

지켜야할 정체성이라는 것이 몸소 체험하고 느끼지 않으면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 흘러 지나가 버리

과 차단되어 있는 네트웍을 찾아내고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지. 공무원조직도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

는 것이지.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고, 내 스스로의

서 끌어내야 하고

정체성을 심을 수 있는 것이고, 주변에 끌려다닐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고, 내 스스로 해야 할 것을

장: 끼리끼리 모이는 것을 뛰어 넘는 것이 네트웍이 될 수 있지. 망이라는 것이, 사방으로 연결되는

해야 하는 입장이고, 흑산도에 가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문헌상의 지식을 볼 뿐, 내가 제

것이잖아.

대로 일을 하려면 본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내 스스로 하는 일에 만족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내 스스

나 는 계속 그런 시도를 통해 생존할 수 있거든. 시에서 운영하는 관광해설사가 3명이 오거든. 그 사

로 그 동안 해오면서 정체성을 가져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

람들이 일을 무엇을 하고 있고, 그런 시설이 있으니까, 문화관광해설사들을 보내주겠다라고 시청직

정: 대동문화에서 음식기행 했잖아. 나는 화가입장에서 그림으로 풀고. 박물관에서 했을 때는 그 언

원한테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지. 그 상황에 내가 필요로 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있다는 말

어가 있잖아. 그 언어로서 만들어 내는 것이 있잖아. 자기 요구에 의해서, 시설에서 요구에 의해서 해

이야. 농촌진흥청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500만원을 지원해줬잖아. 나도 이것을 알아봐서 주어진 것

야되잖아

과 진보적, 적극적 네트웍이 앞으로의 방향이고, 자신을 오픈하고 취할 것은 취하고 이런 것이기 때문

장: 네가 말한 네트웍을 하다보면, 어떻게 하든 같이 할 수 밖에 없어,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

에, 나는 기존의 박물관뿐만 아니라, 민간인 음식단체가 있거든, 다른 지역에도 음식관련축제가 있는

길 수 밖에 없거든. 동아리든, 여행을 간다던지, 이런 것으로 나올 수 있어.

데, 하나의 내가 부분으로 들어갈 수 있고, 네트웍을 개발하고 소스를 개발해야 만이 진정한 네트웍을

일 반 주부들로 해서, 북구청에 향사회가 있거든, 향사연을 만들라고 해(향토사랑음식연구회) 순수한

할 수 있거든. 그것은 하나의 침목의 성격이고, 소소한 기쁨에서 하는 것이. 각자의 망구조에서 꼭지

모임이지, 일년에 한번이든 두 번이든 그 지역의 향토음식을 맛보고, 음식체험 하고, 이야기 발굴하

점에서 각 자의 네트웍을 맺고 있어야지. 그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고, 그런 것들을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정보도 얻고,

off) 희미하고 넓은 네트워크를 맺었다. 관계망이지, 네트웍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자기조

주 변 사람들도 알아가면서, 사람들을 통해 알아가고, 프로그램을 넓혀 갈 수도 있고. 또 넓혀가는 방

직의 핵심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나서지 않더라도 오는 네트웍이 많이 있거든요. 그것도 물론 한계

식 중에 초등학생 비만아들이 많은데, 그 애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드셨던 것을 건강식이라는 것을

가 있지만요. 그 것이 또 허무할 수도 있거든요. 튼튼한 조직, 네트웍도 문제가 있고. 본질적인 문제

좀 보고. 각 학교의 영양사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한테 건강한 몸을 물려줘야하지 않겠냐. 우리는 음

는 자기 내용성에 뚜렷한 지표가 아니라, 그물처럼 애매하게, 촘촘하게 그물에 걸려들 수 있도록 하는

식은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선인들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사회과나 음식문화에 대해 공유할 수 있

것이지. 연구사님의 이야기를 90-100프로 공감도 하고.

는 것들도 생각하고 있거든.

장 원익: 자신을 겸손하게 바라보면 좀 통하게 되어있거든, 작가회의 회원 될려면 등단해야 하는데,

내 나름대로 준비기간, 네트웍을 하기 위한 준비기관이라고 할 수 있지.

난 준회원이라고 이야기 하거든. 내가 부담스러우면 안되. 내가 그것을 힘들어하고, 내가 힘들어하면

정: 저는 이게 네트웍 사업이거든요. 본인의 필요한 요구가 네트웍이잖아. 이것을 좀더 확장하자고 하

네트웍이 안되거든. 그 사람들도 그런 것을 원하거든, 상대방이 부담을 갖고 하면 힘들거든, 행사 때

는 것이지. 네트웍을 하고자 하는 프로포즈를 먼저 할 수 있잖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력 자체를 만

도 한번씩 가고 그러니까 사람들이랑 좀 서스럼이 없어지고.... 인간관계가 학연, 지연 등에 얽매이다

드는 것을 문화활동가들이 할 수 있거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가, 기본적으로 그런 서로의 호감이 되어야 하잖아. 그런 곳에서 찾게 되는데, 그것을 악용하지 않고,

장:네트워크가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주변의 활동들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렇게 해야겠잖아. 똑 같은 일을 하는데, 그 사람을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끌어주는 방식

서 출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자신은 내가 중심에 서고 싶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것이

이 되고, 그러면 되잖아. 서로 끌리고 호감이 가는 것이 바탕이 되어서 네트웍이 되는 것이지, 사업적

중요하기도 하고.

으로 맺어지는 것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맘이 안드는 사람이랑은 네트웍은 안되는 것이거든. 아주 안

그것이 섞여 있어,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네트웍을 해야지 그게 잘 맺어지는 것이

맞는 사람이랑은 일하기도 힘들어지지.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개선하고 굳건히 하는 것도 매우 필요하

지.

잖아. 학교문화예술교육에서도 그런 관계들이 형성되고, 이것을 지속적으로 맺고 가야해. “


네트워크! 금방이라도 없어질 수 있는 운동장위에 막대기로 긋는 희미하지만

정: 젊음 문화시설활동가들에게 한마디 한다면?젊은 활동가들한테는 희생의 시기가 되지 않겠나, 활

촘촘한 그물낙서와도 같은 것 ”

동가들의 활약에 기반하여 설립이 되지 않겠는가. 힘든 시기를 겪어야 만이 건립이 될 것이고, 그 결

정: 연구사님이 맺고 있는 방식이 공무원들하고 좀 다르다는 것이 있는거 같은데... 조직내에서 지위

과가 담보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나 정체성이 강조가 되다보니 그런 것인지, 일하는 방식이나 그런 것이 기본이 되어야 만이 그 이상으 로 나가는 것이지,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지 않느냐...

본 인도, 나이만 많았지, 시작하는 입장이니, 그것에 일조하고 도움이 되려면 더 힘든 시간을 겪어야

장: 4년 일했는데, 너가 말한 방식 때문에 고민도 했고, 네트웍에서도 이게 중요한데 서로 구속하지

하고, 더 많은 역할을 해야 조성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예를들면, 서포터즈라고 해서, 간접

않는거, 같이 가더라도 손을 놓을 수도 있는 것. 너랑 나랑 네트웍이 됐으니까 억메이는 것이 있는데,

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도 있고, 벌리는 방식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어느 순간에 과감하게 놓아줄 수 있는것, 그것이 지금은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이 그런 불안감 을 좀 놓아준 것이지. 나이드신 분이 젊은 사람한테 세상사가 너 맘대로 안된다는 것을 알때가 있다는 것에 얽메이게 되면 힘들다는 것, 부담감을 좀 덜었어. 그러면서 진정으로 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진정으로 내 일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지. 정: 상대방으로 인한 부담감이 줄어들고, 오히려 자기부담감이 커진 것이 오히려 발전할 수 있는 가 능성이 있다는 것. 자기가 잘났을 때는 가장 잘 났을 때가 아니더라고, 자기도취에 빠져서 힘을 얻고 그러잖아. 결국 자 기 잘난 것이 잘난 것이 아니더라고. 장: 그런 부담감들이 예산이 있어야 일을 한다, 그런 부담감이 줄어들었어. 주변 사람들이랑 네트워 크를 맺으면서 또 그런 일을 벌릴 수가 있거든. 마음 언저리에는 공무원이라는 부담감도 있지만, 일을 하면서 줄일 수가 있거든. 완화시킬 수 있거든. 경 쟁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서기보다는, 그런 과정에서 정체성이 세워지기도 하거든. 그것이 큰 부 담으로 작용하면 힘들고, 인정하는 수준에서 일을 하는 것이고, 그런 부담감이 있다면 일을 하기 힘들 잖아. 주변의 여건들이 있지만, 한편으로 무시도, 인정도 하고 하면서 오히려 자유롭게 넘어갈 수 있 는 것.정: 동시적 발전, 상생,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들을 네트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지. 진정한 자유, 나를 갈구는 사람이 있을 때 진정한 자유가 있다, 비극과 예술은 대비시키는 갈등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내재적으로 발전요소로서 갈등요소로서 발전 적으로 있을 때... 장: 박물관의 비전은 박물관이 처음 시작할 때, 건립시작할 때, 체험을 중시했고, 전망은 아이들이 언제든지 음식을 만들어가고, 시식하고 만들 수 있는 박물관이 목적이지.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음식과 관련한 강의, 체험, 부대 행사들도 해 낼 수 있는 것이 내 방향성이라 할 수 있지.부가적으로 남도향토음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우리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개발하 고, 토대로 해서 아이들이 직접 접해볼 수 있도록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지. 정: 젊음 문화시설활동가들에게 한마디 한다면?젊은 활동가들한테는 희생의 시기가 되지 않겠나, 활 동가들의 활약에 기반하여 설립이 되지 않겠는가. 힘든 시기를 겪어야 만이 건립이 될 것이고, 그 결 과가 담보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박물관은 나의 태양, 삶을 비추는 박물관을 꿈꾸다.”

알 수 없는 목마름, 결국 나의 길로 부르다.

국립관주박물관 학예교육사, 이영신

천 : 광주에 언제 발령났어요?

춘삼월, 활짝 핀 홍매화, 백매화가 무색하게 눈비가 내리던 날, 전대 후문 근처에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교육사 이영신씨를

이 : 12월 27일이요. 진짜 초짜다. 근데 박물관에 목매단 건 2003년이다.

만났다. 남원 출신인 그녀는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과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박물관 교육을 전공했다. 서울민속박물관을

천 : 계기가 있나요? 이 : 경제학과 다니다가, 중간에 편입했다. 너무 하고 싶어서. 원래 미술 쪽으로 대학교를 가고 싶었는

비롯하여 다양한 박물관 교육 업무를 진행한 바 있는 그녀는 최근 중앙박물관 공채에 지원, 국립광주박물관 최초의 교육사가

데 부모님이 반대해서 홍대 경제학과 갔다. 대학 가서도 인테리어 업체들을 찾아가서 일하게 해달라

되었다. 학예사가 박물관의 유물을 연구조사, 전시 기획하는 일을 주로 맡는다면, 교육사는 관람객이 박물관을 보다 생생하

고 간청하다시피 하며 일했다. 그 곳에서 디자인 배우면서 혼자 열심히 박물관, 미술관 찾아다니다가

게 경험할 수 있도록, 사람과 유물, 혹은 전시, 박물관과의 소통을 돕는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 인터뷰장소 : 용봉동 얼씨구학당

.

내가 어느 정도 부모님한테 말해도 되겠다 할때 쯤, 고대 고고미술사학과로 편입했다. 천 : 부모님이 뭐래요?

// 인터뷰시간 : 07.3.07 pm 7시~10시

이 : 엄마 한 달 동안 말 안하더라. 내 맘대로 자퇴해버렸다. 그때 우여곡절 참 많았다. 참 많이도 울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천윤희

었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되는 것인가 보다. 경제학과 다닐 때는 무척 힘들었다. 남원 부모님한테 매일 전화해서 학교 다니기 싫다고 했다. 편입하고도 정말 힘들었다. 막상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했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나 싶다. 저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 요. 하고 말하구. 경제학과였지만 학교가 홍대이다 보니 미술 쪽 많이 접하고 지나면서 보면 모두 미 술이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무척 힘들었지만, 재밌고 마냥 좋았던 때이다. 관련학회나 박물관 등 여기 저기 다 찾아다니면서 자원 봉사도 하고 그랬다. 그 때 내 생각에 박물관 학예사 분야는 주로 자기 전공 위주로 파고드는데 그것 을 관객에게 보이고 소통하는 것은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전시 하거나 책 같은 거 만드 는 작업은 잘하는데, 대중과의 소통 그것에 대해 나는 의문을 가졌다. 학교 다니면서 누구한테 그런 목마름을 채우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되어서 매우 아쉬웠다. 보통 고고사학과 전공이면 대부분 대 학원을 사학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나 역시 모교 대학원을 들어가라고들 말했지만, 내가 실무에서 하고 싶은 그런 게 없어 안타까워서 찾아다니다보니 현재의 학교에 가게 되었다. 현재 학교는 박물관 교육을 적극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지금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당시 정말 힘들었다. 학부 교 수님은 학문을 중시하는 분이셨다. 학교 다니면서 따로 아르바이트, 인턴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난 그 게 아니라 생각했고, 학교 다니면서 궁중유물전시관에서 인턴하고, 여기저기 정말 많이 돌아다니며 일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인 것 같다. 천 : 전공 돌리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 예술 경영 내에서도 자기 영역 찾을 때 힘들지 않았나? 이 : 박물관 교육은 석사 전부터 생각하고 들어갔다. 그래서 헤매지는 않았다. 대학원에서, 박물관 교 육 가르치는데 거의 없다. 2학기 때에 이 분야 전망 없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다른 학교도 알아보려 했는데, 교수님들 얼굴 아른 거리더라. 선배들과도 이야기해보다가 결국 맘 잡았다.


특히 궁중유물전시관에서 어른들 대상으로 문화공개 강좌 할 때 도와드렸는데 이런 프로그램들이 많 이 있으면 아이들도 좋아할 텐데 왜 이거 하나만 할까 생각하면서, 박물관에 들어가게 되면 교육을 해 야지 생각했다. 그러니까 편입하고 학교 다닐 때부터, 2004년부터이다. 천 : 파란만장하네요. 이 : 우리 과장님 농담으로 그러신다. 얘 대단한 애라고. 저희 교수님은 미워했을 거다. 공부만 하라 는데 자꾸 왔다 갔다 한다고. 고대 교수님도 도예가 쪽 유명한 공방 아들이었는데, 서울대 물리학과 갔다가 결국은 대학원 때 전공을 도자로 바꾸셨다. 그렇게 방향을 바꾼 것도 대단하잖나. 그런 경험을 하셔서 그런지 나를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냐고. 근데 난 이걸 하기 위해서 이 렇게 온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다. 희망을 주는 박물관, 박물관 교육 천 : 박물관 교육 기획할 때 본인이 좀 더 관심 갖는 부분 있다면 무엇일까. 이 : 소외계층 쪽으로 논문 준비하고 있다. 또한 현재 광주박물관에서 준비 중인 소외계층 대상 프로 그램이 있는데, 우리는 ‘희망계층’으로 바꾸어 부른다. 희망계층에 대해 애착이 간다. 가지려고 노력 한다. 소외라는 단어가 더 소외시키는 것 같다. 나는 박물관이 희망을 주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었다. 작은 언어의 차이지만, 모두가 밝아지는 것 같아 다른 분들도 좋아하시더라. 소외계층이 아 니라 희망계층이 되었으면 좋겠다. 천 : 그 부분에 관심 갖는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이 : 서울민속박물관에서는 박물관교육 중에서 여러 분야를 모두 돌아가면서 다양하게 맡게된다. 다 양한 계층 중에서도 나는 특히 장애인, 노인들 웃는 거 보면 너무 기분이 좋더라. 그분들이 더 순수하 고 흡입하는게 더 빠르더라. 그 분들을 교육하다보면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 나려 하는 거 있 잖아요. 가슴 찡하는 거. 천 : 그게 중독성이야. 이 : 하하하. 지금도 눈물 나려 해요. 하다보면 애착 가는 거 있죠. 그 분들 하면 한번이라도 더 가게 되는거. 내 담당이 아닐지라도 가보고 도와주고 그랬지요. 천 : 지금은 행복해요? 이 : 네. 남자친구만 있으면 좋겠어요. 하하. 다만 일이 빨리 능숙해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서... 아직 멀었잖아요. 그거만 풀리면요. 천 : 뭐가 제일 힘든 가요? 일은? 이 : 기존 박물관에서 교육 기능이 있었다 하더라도, 박물관 교육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던 사람들은 없 었잖아요. 또한 행정적인 것이 강한 것이 사실이구. 일하면서 윗분들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나와 다른 부분 들을 맞춰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요.

천 : 어떤 부분에서 잘 안 맞던가요? 이 : 박물관 교육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다르다고 할까요. 저는 박물관 교육을 유물 한 번 만들어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로 돌아가 보는 타임머신 타 본 느낌처럼 연극(역할극)도 만들어서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 경험하고 체험하게 해보고 싶은데 이해를 못해주신다. 연극을 왜 박물관교육 에서 해야하는가 하신다. 결국 결재 해주시긴 했지만, 아직도 수긍 못해하신다. 성공해야하는데. 하 하. 일로 특별히 힘든 건 없다. 아직 까지는. 2007국립광주박물관의 교육프로그램이 새로워졌다. 천 : 지금 기획 한 게 어떤 프로그램에요? 좀 더 설명해줄래요? 이 : 기존 광주박물관에서 했던 프로그램은 다 바뀐다. 저는 우선 대상별로 틀을 4개로 잡았다. 가족, 청소년, 소외계층 (희망계층), 문화전문가 4그룹이다. 가족 프로그램은 2주와 4주 토요일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하는 것이고. 유치원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유치원 갔다 오면 엄마랑 혼자 있 거나. 다른 유치원 가는 데 평일 중 엄마랑 아이 함께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름도 다 바꾸었다. <쑤 욱 ~ 문화><신나는 토요일>등 등 많다. 천 : 2007년도 사업이죠?. 이 : 제가 오면서 새롭게 기획했어요. 기존에 해왔던 게 아니고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솔직히 두려워 요. 부담도 많이 가구요. 어린이 청소년 같은 경우는 학교 연계 프로그램이고, 교육청과도 이야기 많 이 하고 있다. 박물관 <교사를 위한 강좌>도 연계해서 프로그램 만들까하고, 희망계층은 박물관으 로의 초대이다. 찾아가는 박물관(전국 모두 한다)도 한다. 특별하게 10월 국군의 달에는 <밀리터리 뮤지움>이라고 3주간 목요일마다 프로그램도 한다. 군부대 군인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다. 그 때 박물관에 <하서 김인후> 전시를 하는데, 그게 시서화다. 묵향으로 빚어내는 붓글씨 같은 거 전시하 는 건데, 군인들이 부모랑 애인들에게 편지 쓸 때, 그냥 편지 쓰는데, 그걸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 해보는 것이다. 서한집같이 말이다. 옛날 서한집 같은 거에 편지 써서 보내주면 부모나 애인들이 보 면 좀더 색다른 기쁨을 주고 전통문화를 느낄 것 같다. 파생 효과까지 누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서한 집 만들어 편지 써 보내는 거다. 기존 예책 만들기 하면 책 만들고 끝나는데, 붓 펜이나 펜 써서, 편지 를 쓰고 발송하면, 교육받지 않은 사람도 그걸 보면 전통문화에 대해 호감을 느낄 것 같다. 제3자까 지 생각하는 것이다. 하하 <문화전문가 과정>은 초중고 선생님 대상으로 교사를 위한 박물관 강좌, 유치원 선생님 박물관 강 좌를 한다. 전국적으로 어린이 박물관이 유치원 관람객을 꺼려한다. 아이들 통제하기도 힘들고 선생 님이 애들 풀어놓고 보게 하고, 사진만 찍고 간다. 그래서 <유치원 교사 대상으로 한 박물관 아카데 미>를 해서 유치원 선생님 먼저 교육시키고, 관람예절, 사전교육하게 하고자 한다. 박물관 관람할 때 어떻게 하는지. 돌아가서 박물관 유물 활용해서 교육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다. 다음 주 토요일과 일 요일에 할 건데, 사람이 안오고 있다.


초중고 연수는 연수를 마치면 점수를 준다. 반면 유치원 선생님은 특별히 그런 게 없다. 교육청 연계

천 : 이렇게 시작했잖아요. 한 사람 한사람씩 모이면 그게 인력풀이 되는 거지. 하하. 그리고 광주에서

해서 할만한 게 없고, 메리트가 없는지 잘 온다, 어린이박물관 예약 우선권을 줄까 생각도 해 본다 아

도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등이나, 앞서 말한 문화시설활동가 네트워크 등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많이

직도 윗분들은 부정적이다. 유치원 선생님 대상으로 한 교육에 대해서 윗분들은 부정적이다. 유치원

만나게 되고, 또한 멋진 문화적인 사고들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머지 않았네요.

아이들이 뭘 배우냐하는 것이 주된 생각이다. 나는 그 생각부터 깨보고 싶다. 솔직히 어릴 때 일수록 교육적 효과는 높다.

박물관 교육사의 철학은 ‘소통’이다. 살아있는 박물관을 위한. 천 : 본인에게 있어서 박물관 교육 철학이 있다면?

윗분들에게 말한 건데. 실현 가능성은 모르지만.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게 있다. 청년 작가 활용해서 박

이 : 철학? 어려운데. 예를 들면...

물관에서 일요일마다 청년 작가들이 가족이나 애들 대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작가들이니 체험 공예

천 : 박물관 교육도 기획이 필요한데, 본인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쪽으로 해서, 청년 작가도 살리고 일반 사람들도 작가랑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게 있는데 관장님

이 : 생각나는 단어는 딱 하나, ‘소통’이다. 박물관 유물과 사람과의 소통이기도 하고, 박물관 사람과

은 박물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기에 학예사가 일선에 서서 해야한다고 보신다. 그 생각은 아직 갈

일반사람과의 소통 일 수도 있고, 박물관 책과 읽는 사람과의 소통이기도 하다. 연결고리라고 할까.

등중인데. 그 이후에야 상황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청년 작가들과 이야기는 하고 있고, 프로필 등 나

그런 거. 박물관 교육이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거 같다. 솔직히 전시물만 보면 나도 잘 모른다. 누

누고 있다. 맘 같아서는 4월부터 하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다. 청년 작가들도 자신의 이름 걸고 하

군가에게 들었을 때, 아는 사람에게 한마디라도 들었을 때 기억 나고 알게 되잖나. 그런 연결고리 역

면 좋은 것 아닐까요? 설득할 방법 없나요?

할하고 있다. 전시물만 있는 곳을 죽어있는 박물관 이라 하잖아요. 살아있는 박물관 그런거. 너무 거 창한가요? 하하하

이 : 선생님 사진 하나 찍어도 되요? 선생님이 저만 사진 찍으시니까 이상하네요. 사실은 선생님께서

천 : 하하하. 학예교육사라고 했죠? 그게 뭐냐고, 또는 앞으로 그런 쪽으로 지망하는 사람들이 궁금

저한테 본인에게 소중한 물건 가지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잘 생각이 안나더군요. 어려워요. 실은 몇

해 할 것 같다. 특히 이번이 국립 첫 번째인가요?

년전에 사진기를 산 뒤로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하필 오늘 깜빡 잊고 안가져왔어요. 항상 사진 찍는

이 : 두 번째이다. 전주에서 몇 년전에 한명 뽑고, 이번에 4명. 그때는 비공식적이었고. 국가차원에서

것을 주로 해봤지, 찍히는 건 이상한 것 같아요. (열심히 노트북을 보고 있는 나를 찍었다.)

문광부 중앙박물관에서 뽑았다. 지역에서 한명씩이다. 11개의 지역 박물관이 있는데, 현재 교육사 있

천 : 처음 발령 난 사람인데, 박물관에서 엄청난 사고들?!을 친 것 같다.

는 곳은 5곳- 광주, 전주, 김해, 대구, 청주- 이다.. 나머지 6군데- 제주도나 그런 곳에서-도 앞으로 교육사를 뽑을 계획이 있다 들었다. 숫자상으로 한명씩은 뽑을 것 같다.

이 : 하하하. 박물관에서 사고쟁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무슨 사고니? 실은 광주교대에서 교육인턴 실

천 : 프로그램 기획에 대해서는 들었는데, 박물관 내에서 보편적인 본인의 업무나 역할이 뭐에요?

습 관련하여 중간에 관장님이 바뀌시고, 중간에 행정적인 것을 잘 풀지 못해 한참 해맸다. 학교와 연

이 : 박물관 문화교육하고, 오월에 어린이 문화재 표현하기 등 있는데 광주전남 초등학생 대상으로

계해서 하는 것 좋을 것 같았고, 특히 교대 같은 곳은 박물관에서 인턴 실습 가능하다. 하지만 절차

유물 보고 그리고 찰흙으로 만든다든지 그 행사하고, 어린이 박물관 운영하는 것 등이다. 교육관련

까다롭더라. 그거 하나도 어려웠다. 하하. 광주를 보면 문화예술관련 기관은 많은 거 같다. 나름대로

홍보도 한다.

교육 하고 있는 곳도 많고, 다만 그걸 연결하는 고리가 없는 것 같다. 나중에는 그런 것도 했으면 좋 겠다. 광주전남 강사 인력풀 같은 것 말이다. 문화예술교육분야 강사 교류도 하고 그랬음 한다. 저 혼

천 : 어린이 박물관 개관 한게 얼마 안 되었지 않았나요?

자 생각하는 거에요.

이 : 12월 6일에 개관했다. 천 : 광주에서는 첫번째 어린이 박물관이라 의미있다고 본다. 어린이 박물관은 어떤가?

아까 말한 가칭 <작가와 함께하는 박물관>이라 내가 지었는데, 그 작가 작품들과 교육생 작품을 함

이 : 맞다. 처음이라 그런지 많이들 오시고 좋아하신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어린이 박물관을 짓기 전

께 전시해도 재밌을 것 같다. 작가는 자기 생각으로 이런 작품 만들었는데, 교육생들은 나름의 생각이

에 사전 기획을 교육사와 같이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같이 체험할 수 있는 것에

다르잖아요. 생각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어도 재밌을 것 같아. 진짜 하고 싶은데, 결재가 나야지. 하

대한 연결고리- 주제 선정하고 표현하는 것들-이 아쉽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간 안에서 학예직 말

하. 저도 광주 오기 전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들리잖아요. 기대 많이 했다.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문

고 교육사가 풀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미 완성된 후에 왔기에 짜여진 틀 안에서만 교육을 생각해

화 중심도시 답지 않은 뭐랄까 분위기에 다소 놀랐다. 그래서 문화교육하고 있는 분들 만나고 싶고 그

야하니, 조금 어렵다.

래요. 지금 우리 인터뷰하는 게 완성되면 되는 거겠지요?


천 : 지금 말하는 게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통합기획적인방식이 필요한 것 같다. 이 : 현재 보편적인 경향이 어린이 박물관 짓고 난 후에 교육사를 뽑는다. 이번 교육사들간의 워크샵

모두를 위한 박물관, 그날까지

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아쉬워하는 지점이다. 어린이 박물관 건축 전에 뽑았다면, 같이 풀어나갈게 많

천 : 좀 유치하지만, 난 꼭 묻게 되는 게. 너의 꿈이 무엇이냐 더라구요.

을 텐데 말이다. 김해 같은 경우는, 1층에 어린이박물관. 2층 보존과학실, 3층 모임방이 있어 3층에

이 : 꿈?

서 교육하라는 것이다. 2층이 보존과학실로, 보통은 통제된 곳이다. 이곳을 어린이들이 오고가며 교

천:네

육하기가 난감하다. 통제된 곳을 거치는 것이라니. . 이 : 박물관 들어오기 전에는 박물관에 들어오는 게 꿈이었다. 지금은, 지금은 말이죠. 이왕 시작했으 천 : 주변에서 보면 어린이 미술관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도 있는 것 같고, 일각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니 정말 잘하고 싶어요. 박물관 교육 쪽에서 잘하고 싶다. 다 혜택 받는 그날 까지. 하하. 그리고 그런

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지금 말 하는게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고 봐요. 비단 교육문제만 그런 게 아니

것도 하고, 솔직히 제가 외국어가 약하긴 하지만 국제적으로 우리 박물관 교육과 해외박물관 교육과

라, 보편적으로 수장고, 관람객 서비스공간, 전시공간 등도 그러하다. 건물 먼저 건축하고 운영방안

교류도 해보고 싶다. 근데 박물관이 정말. 옆집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 정말. 그런 날이 오는거. 하

을 고민할 때는 이미 한계가 있다.

하 말도 안되는 꿈이야. 하하. 박물관이 딱딱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여기는 청와대라고 한다. 하하.

이 : 서비스 공간, 사무 공간 따로 모여 있는게 최상인데... 광주는 공간은 나누어져서 그나마 다행이

버스도 안오고, 박물관을 가깝게 느끼게 하는 그런 일을 해야죠.

다. 전시물이 부족하지만. 다만 주제별로 되어있으면 보다 재밌을텐데 하는 생각이다. 어린이박물관 도 만들어진 이 상태로 그대로 가는 게 아니라, 색션 중에서 일 년에 하나씩은 개선하고 보완해가면서

천 : 갑자기 질문하고 싶다. 왜 박물관을 좋아해요?

할 계획이다. 한 코너 조금씩 바꿔가려고해요. 그래야 새로 또 사람들이 오게 되겠지요.

이 : 필 꽂힌거죠! 인테리어 하면서 제가 구체적으로 인테리어 파고들어 공부한 건 아니지만 경제학 과를벗어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매달리게 되었는데, 한국적인 소재를 갖고 인테리어 하는 거 좋아해

천 :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이네요. 좋아보여요.

서 제안하고 했는데, 한국적 소재 찾기 위해 박물관 다니다보니 그런 거 알려주는 사람이 없더라. 난

이 : 진짜 많아요. 하하.

그 자리에서 알고 싶은데,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한국적인 소재 좋아서 찾다보니 박물관에

천 : 혼자하기에 인력 부족하지 않아요?

서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하게 되었다. 말이 안되긴 하지만, 모든 이력서에 꼭 이 항목이 나

이 : 예산은 그 예산에 맞추어 교육 기획할 수 있다. 할 거는 많은데 인력이 없으니 힘들다.

오는데 늘 하는 답이다.

천 : 교육 담당자의 어려움이. 기관에서 보통 교육담당자는 두는 것도 큰 도전인데. 교육이라는 게 사

천 : 하고 싶은 것들 안에 잘 스며들게 품고 있어요. 때가 되면 모든 조건들이 그것을 하게 만들어가

람에 관한 일이라 준비할 게 많고 행정적 일도 많아진다. 그래서 인력이 더 필요한데, 또 예산 때문에

는 것 같아요.

어렵고 그게 현실이다.

이 : 5년은 그냥 잘 기다리라고 하시더라구요. 작가와 함께하는 박물관 꼭 하고 싶은데 안 되어서 마

이 : 끝이 없는 문제 같다. 교육사 없는 박물관도 많잖아요. 거의 학예직들이 자기업무 말고 떠맡아 하

음이 안 좋아서 꽁하고 있었더니, 회식자리에서 어른이 말하시길,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하시더라,

는 경우도 있고 기능직이 하기도 하는데, 그런데 비하면 교육사라도 있는게 어디인가. 민박에서 일할

5년은 잘 기다리라고. 그래서 가다듬고 있어요. 하하.

때는 섭외교육과 인원만 28명 되었다. 28명이 하던 일을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려다 보니 솔직 히 난감하더라. 민박은 교육 쪽에 틔인 사람이 뭉쳐있는 곳이 섭외교육과인데. 여기서는 저 혼자 있 고, 기존 사람들 생각들과 갈등하는 것도 어려움이 있고, 교육하는 것보다 문서 처리하는게 더 힘들 다. 오히려 교육은 더 쉽고 재밌는데 문서처리가 더 힘들다. 하하 천 : 그죠? 이 : 요구하는 형식이 다 다르니까.


“지역사회교육전문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다. ” 지역사회교육전문가, 이윤정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청소년복지를 꿈꿔오던 그녀가 학교로 들어갔다. ‘교사’라는 친숙한 단어가 아닌 ‘지전가’가 라는 생소한 직함으로 그녀는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학교의 행정업무 지원부터 지전가 고유의 업무까지... 아이들과의 만남

정민기 : 일하고 있는 학교는 어때? 이윤정 : 학교는 항상 좋지. 정 : 지난번에 2007년 예산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어? 이 : 예산이 증가하기 했는데,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오버가 돼서 줄였어. 공부방 강사를 3명 신청해 야 하는데 1명만 했고. 만만치 않더라고. 학교에서 교육복지 사업을 하다보면 개개인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많아. 협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

에서 큰 힘을 얻는 다는 그녀는 아이들과 싸움을 통해 매일매일 성장한다.

이 없고, 단순히 갔다가 오는 프로그램이고, 어딜가도 각자 놀고. 공동작업이 없는것 같은데 그게 아

// 인터뷰장소 : 대인동 맞은편 산호바다

쉬워.

// 인터뷰시간 : 2007.3.18 pm 2:30~4:35

정 : 그럼, 개인의 경험으로만 남는다는 건가?

//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정민기, 나지아

이 : 그렇지. 정 : 그래서 고민을 해? 이 : 요즘은 고민을 해. 프로그램 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재작년 문화존에 아이들이 자원봉사로 참가 를 했잖아. 아이들이 또 원하더라고. 문화존 스텝으로 들어가서 활동해 본 아이들은 재미있고 또 하고 싶어 해. 당시 대상자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정 : 올해도 문화존 프로그램에 아이들과 함께 해야겠네. 프로그램 꼭지 하나를 주고. 말그대로 지역 사회참여이니까. 교육복지에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있을텐데. 아이들의 참여한 프로그램 중 만족도중 가장 큰 것은 어떤거야? 이 : 공부방과 문화체험활동. 주로 캠프나 놀러가는것. 그런쪽으로 만족도가 가장 커. 정 : 연결고리 없이, 단발적인 프로그램이네. 이 : 그런셈이지. 공부방 경우, 보상의 개념으로 보내고 있어. 공부방 대상 아이들을 두고 ‘출석율이 좋으면 데리고 가겠다’는 식의 보상으로. 일반 애들한테는 바랄수도 없어. 정 : 공부방 애들은 몇 명이나 되지? 이 : 작년 60명, 올해는 45명 정도. 정 : 학업이 낮은 아이들도 포함? 이 : 모두 포함하고 있어. 모두 대상자들이야. 이 : 근데, 인터뷰하면 그 자료는 어떻게 해? 정 : 문화시설활동가들 중 50명 정도를 인터뷰를 할거야. 인터뷰 과정 중 너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내고, 4월 둘째주에 파티(캠프)를 할꺼고, 인터뷰했던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그들을 찾았지만, 그 사람들이 서로간의 네트워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인터뷰내용도 공유하고. 현장이야 기, 문화중심도시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상호간의 네트워크로 사람과의 관계 를 통해 서로간의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수 있는 자리가 될거야. 캠프는 4. 14~15일이니까. 갈 수 있지? 이 : 그 다음주 시험봐야 하는데, 청소년상담사. 학교에 남기위한 방법이야 정 : 학교에 남기위해? 미래를 위해?


이 : 맨날 이렇게 살수는 없잖아. 아.씨~ 떨어지면..쪽××

이 :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자기집의 경제사항상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

학교로 들어간 사회복지사, 지역사회교육전문가로 새 출발하다

고. 그래서 그 상황을 즉시 하는게 먼저라 생각했어. 또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의논 해 가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고민 없이 다닐 수 있을까 돈 때문에 공부에 영향

정 : 자신을 남들에게 소개한다면?

을받지 않고 신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말야. 교감이

이 : 난감. 흐흣. 뭘 하라는거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나와 교감을 하고. 다른 사람하고도 교감할 수 있도록 말

정 : 말 그대로 남들에게 너를 소개한다면?

이야. 일방적으로 이것해라, 저것해라 하지 않고. 학교에서는 나를 의지할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좋 겠어. 학교 안에서 누군가 의지할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담임선생님도 계시지만 아이들에게 의지할

이 : 그냥,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고.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과 불량함을 가르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애들을 망치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사람이랄까?

정 :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

정 : 그럼 중학교에서 지금하고 있는 일은 뭐야?

이 : 열심히 아이들과 놀고 있어. 해봐서 좋았던 것. 경험했던 것. 수련관서 했던 프로그램. 일방적인

이 : 지역사회전문가라고 하는데. 학교 안에 있는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학습, 그 외의 다양한 신체정

것. 3차년도에는 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싶어. 요즘에는 애들의 말을

신적인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 교과서적인 이야기네.

귀담아 듣고 있어. 그들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스스로 말 하게 할 수 있겠 하고 있어.

정 : 교과서적으로 하지 않고 너의 방식대로 한다면? 정 : 차를 좀 빼달라고 하네. 나갔다 올테니까. 지아가 계속 진행해요. 이 : 애들을 망치고 있어. 선생님들이 본다면 애들을 데리고 뭘하는지. 걱정을 하시지. 정 : 2004년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졸업 했지? 사회복지를 하게 된 계기는?

지아 :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이 : 특별하게 생각한 적은 없고, 원서 쓰면서 친구의 권유로 인해 선택을 했어. 전공을 못 정하고 있

이 :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아이들이 연습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돼. 다른 교

어서 친구가 나에게 딱 맞는거라고 해서. 그 선택에 후회는 없고, 대학교 2학년때 청소년복지를 하

과시간에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하면 얻어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워. 예를 들어 ‘가위

고 싶다는걸 생각했고.

요’ 하면 ‘가위가 어쨌는데?’식 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거지. ‘너가 원하는게 뭔지 정확히 말을 하라는거지. 근데 아이들은 거절을 당할까 봐 잘 못해. 뭐, 인내심을 갖고 함께 해야 하는거지.

정 : 그럼 어떻게 문화중학교에 지전가로 들어오게 된건데? 이 : 청소년복지를 하게 된 결심은 중고등학교때 했던 단체활동 덕분이었어. 그 활동을 하면서 대학교

정 : 그동안의 과정 중. 가장 뿌듯하게 느끼는 건?

때까지 자연 스럽게 활동하게 되었고, 활동을 하면서 활동에만 그치는게 아니라 아이들과 부딪히면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우연하게 청소년수련관에서 일했지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었는데, 만

이 : 음... 별루 없네.^^ 쉬는시간마다 내 주변에 와서 주절주절 애기하고., 수업시간이나 집에서 있

남이 지속적이지 않았고, 답답함을 느꼈지. 기회가 와서 학교에 오게 된거야.

었던 이야기를 해주는 것 등 소소함에서 뿌듯함을 느껴. 정작 내일은 한도 끝도 없는데... 대상자 관 리부터 지역사회자원관리도 해야 하고, 아이들과 마주하는게 주 업무지만, 갑자기 보고공문도 쏟아

근 데, 정작 교육복지사업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어. 단순히 수련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학

져 나오고. 기타 등등의 일이 많아서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아이들이 와서 자기 이야기

교에서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을 했지. 비슷하지만 더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 정식명칭도 지역사회교

들을 해주면 괜히 나 혼자 뿌듯해서 잊어버리지.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간다고.

육전문가지만 자세하게 알고 들어온 건 아니고. 일단 학교에 들어와 보니 이 일은 이렇게, 저렇게 하

정 : 재미있어?

는 거라고. 그렇게 하면서 확립해 가는 거야. 뚜렷하게 이 일에 헌신해야 하는 건 아니었어. 학교에

이 : 응. 재미있어

들어온 계기는 단순했어. 정 : 지금 문화중학교에서 교육복지와 관련해서 프로그램 하고 있는것 중에서 네가 관심있는 것과 아 정 : 지금 하고 있는 지역복지교육전문가를 조금 더 소개한다면?

이들의 감수성이나 심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들 어떤게 있는지 말해주면 좋겠다..


이 : 교육복지 사업이 5개 영역이 있어. 학습, 심성수련, 문화체험, 복지, 기타영역 등. 사업계획서 준 비할때마다 고민하는 것이 문화체험이야. 과연 문화체험이 무엇인지? 문화가 무엇이어서 체험까지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고,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찾아봤는데 예 술, 미술에 대한 부분만 문화라 하고.... 문화라는게 그것만 있나? 고민도 하고. 쉽지 않더라고. 그래 서 지금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아이들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는지 고민하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공연들 아이들과 함께 보고싶다. 정 : 화제를 좀 바꿔서. 지금 하고 있는 일 말고.,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영역이나 다른 일 있나? 이 : 지금 현재로서는 학교가 주 관심이야. 내가 하고 있는 학교일이 주 관심이고 그 안에 여러 영역 이 있어. 현재로선 새로 해보고 싶은 것은 없어.

정 : 올 1년의 계획은 어때?

이 : 개인적으로는 하고 있는 일 제대로 하는 것말고 별 생각이 안 들더라고.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 참, 기술이나 특기를 연마해서 아이들과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어. 공동창작물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어. 특기적성활동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하고 싶은게 있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원서 강사를 찾기가 어렵더라고.

정 : 인간 이윤정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영향을 준 사람이나 너를 지탱한 좌우명.

이런게 있니? 이 : 내가 사는데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사람은 엄마야. 여기까지 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오기. 그런데 망설임 때문에 2%부족하지. 맘먹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데, 몇 단계 거치 면서. 이제 다시 숨겨둔 발톱을 펼칠때가 올거야... 아이들과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정 : 문화중심도시와 관련해서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문화는 뭘까? 이 : 문화라.... 생활의 방식이라고 생각해. 특별하게 이것은 문화다 저것은 문화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잖아. 내가 현재 하고 있는게 모두 문화잖아. 그래서 문화중심도시를 특별하게 만들게 아니라고 봐. 자꾸 텔레비전이나 언론에서 광주를 문화중심도시로 만든다고 하지만 예술중심인 것 같아. 문화 란 크고 거대하게 볼 게 아닌데. 근데 뭐가 이리 복잡한지. 그냥 생활의 방식으로 물 흐르듯이 가는게 문화가 아닐까? 정 : 만약 문화중심도시 관련하여 아이들과 할 수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어? 니가 말한 것처럼 일상의 문화로 아이들과 하고 싶은 것은? 이 : 기록작업을 하고 싶어.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닌데. 아이들은 단순히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순간순간 지나가 버린 것들. 이 모습을 남 겨두고 싶어. 순수했던, 순진한, 가끔 말썽피우는 모습들... 소중한데 흘러가 버리는 것들을 기록하고 싶어. 아이들도 기록하고 지금 이 순간을 추억하고 싶은 많은텐데.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을 해보고 싶 어. 정 : 그럼. 아이들하고 직접 해보자. 우리 식구들이 결합해 줄테니까. 기록하고 싶은 것들을 기록 해서 아이들이랑 포토에세이를 만들어 볼 수 있도록. 이 : 약속한거야... 진짜... 추진할꺼야... 정 : 그래, 하반기에 진행해보자.. 이 : 자료 정리할 때 사진은 뽀샵처리 필히 요망. 모른다고...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천상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활동가이다. 막혀있는 학교에 여기저기 숨구멍을 만들고 있는 당당한 모습에 지지와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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