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입양홍보회) 2021 수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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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기 회 로 꽃 피 운 행 복 ,

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기회로 꽃피운

행복, 입양

입 양

2 0 2 1 년 입 양 가 족 이 야 기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 한국입양홍보회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정을 필요로 하는 아동들이 가정을 찾을 수 있도록 국내입양을 홍보ㆍ장려하고, 아동이 건강하게 양육될 수 있게 입양아동 및 입양가정의 복지, 권리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기회로 꽃피운

행복, 입양


발간사

나와 나의 가족 이야기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나를 성찰하는 과정이자 다 른 이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큰 용기이기도 합니다.

글을 통해 입양에 대한 올바른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전하려는 응모자 여러 분들의 용기와 노력의 결실로 올 해도 6번째 입양가족 이야기, “기회로 꽃피운 행복, 입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입양을 경험한 나의 이야기는 온전한 개인적 기록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는 모든 입양가족들의 이야기일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 땅 모든 가정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입양가족들의 진솔한 삶이 축적되어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입양인 당사자, 입양부모, 입양인의 또 다른 형제자매의 희노애락(喜怒哀樂) 이 녹아 있습니다. Covid-19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삶을 꽃피우며 미래로 나 아가고 있는 입양가족 모두의 열정도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이 입양가족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되고, 입양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예 비입양가정에게는 입양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간접경험이 되며, 우리 사회 전반에 입양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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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입양수기 및 입양가족 사진 공모전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우리 한국입양홍보회도 입양가족 여러분과 함께 우리 사회의 입양인식개선과 입양가정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더욱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1월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 회장

기회로 꽃피운 행복, 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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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입양가족 수기 7

도윤정

다시 봄이 오면

12 김진형

입양으로 맺어진 우리, 다르지만 같습니다.

17 김부연

그대 ! 엠펙은 나의 기적입니다.

25 백송희

김은혜의 삶에서 백송희의 삶으로

30 조경래

아이와 농작물을 키우는 기쁨, 어려움

38 엄진경

예란이와 예빈이네 이야기

43 김혜령

나와 남편을 끌어당긴 아이들

48 김진영

“엄마 나 비밀을 알고 있어”

54 이은주

언제나 함께 있을 거야!!

59 남은총

네, 저 입양아 맞습니다.

64 정정조

“입양” 내 자존감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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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에게

권정임

76 장하영

안녕, 율아

80 오미옥

또 한 번의 축복

87 김정권

울보 아빠

94 이소영

잘 자란 아이, 덜 자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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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엄마야.

배지연

103 전명옥

하음이로 인해 완성돼 가는 우리 가족...

108 유삼례

10대는 외계인

111 이해란

너희들이 있어 참 행복하고 든든하다!

115 송경준

송가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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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가족 사진 122 신동필

하늘이 예쁜 날

124 김부연

수빈이는 수박이 좋아!

126 이성문

꼬마 신랑이 환하게 웃고 있네요

128 김은주

행복 유랑단

130 윤랑기

붕어빵 가족

132 최현양

나의 자랑, 나의 보물들

134 문 민

우리도 청춘

136 손선영

든든한 형제들

138 김기림

사랑해 고마워 축복해

140 진유연

한 배를 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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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1 수기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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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오면 도윤정

봄바람에 벚꽃 잎이 흩날리던 어느 봄날 나는 울었다. 햇살이 밝게 부서지던,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바람에 나부끼는 벚꽃 잎이 유난 히도 예뻤던 봄날, 나는 울었다.

지독한 한파에 몸을 움츠리던 날들의 연속이었는데, 우리 집의 막내가 될 너 를 만나러 갔던 날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다. 너에게 잘 보이고 싶어 밝은색 실 로 짜여진 니트를 입고, 네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사고, 가족들의 얼굴이 크 게 나온 사진을 넣어 만든 작은 앨범도 챙겼다. 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그날 은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렇게 너를 처음 만난 날, 너는 막 낮잠에서 깨어나는 중이었고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누워서 우리를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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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행복아, 잘 잤어?”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돌리고 이불속으로 숨으며 “가!”라고 말했다. 너의 이런 모습을 보고 너를 돌봐주던 선 생님께서 원래 너는 낯선 사람을 보면 가라고 소리 지르고 우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 나는 너의 그 도도함과 새침함으로 무장한 첫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또 한편 말로는 가라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같이 간 아빠와 오빠, 언니를 쫓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그 후로도 우 리 만남은 너의 “가”, “싫어”라는 거절의 말로 시작되었지만, 만나는 횟수가 많 아질수록 네가 우리에게 마음을 여는 시간은 짧아지고 있었기에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처음 만나는 날 가져갔던 작은 앨범에는 너와 함께 한 순간들이 더해 졌고, 앨범의 빈 장이 채워지면서 우리가 함께 살 날은 가까워오고 있었다.

너를 만나기 전, 나는 너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 마음먹었었다. 그것이 네 살 때까지 살던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겨 와야 하는 너의 삶에 대 한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우리를 안전한 사람으로 믿고,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때, 익숙한 그곳을 떠나 우리와 함께 하 겠다는 마음을 보일 때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 물론 네 마음의 변화 를 너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우리를 만날 때 불안 하고 흔들리는 눈빛이 아닌 편안한 얼굴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네가 지내고 있던 시설에서 4월에는 너를 집으로 데 려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설 내부 사정으로 아이들 방을 옮기는데 입양이 예 정된 아이들이 빨리 나가주면 남아 있는 아이들이 덜 혼란스럽고, 선생님들도 아이들 돌보기에 좋겠다는 말이었다. 1월에 처음 만나 일, 이주에 한번 씩 보다 가 외출 몇 번 하고, 외박은 고작 세 번 밖에 못한 우리더러 이제는 같이 살아야 한다고 등 떠미는 현실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사실 너와 만 나고 헤어지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처음엔 낯을 가리고 벽을 세우는 너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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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여느라 힘들었다면, 나중에는 우리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못하고 그러면서 확 다가오지도 못하는 너를 보는 것이 안쓰러웠었다. 외출 혹은 외박을 해서 가족 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돌아갈 때, 너를 몹시도 사랑하고 네가 몹시도 따르 는 선생님이 “행복아, 잘 놀다가 왔어? 선생님하고 들어갈까?”라며 팔을 벌리는 데 평소라면 얼른 그 품에 안겼을 텐데 그날따라 선뜻 선생님에게 안기지 않고 불안한 눈동자로 아빠와 나, 선생님 얼굴만 번갈아 보던 너의 표정이 잊히지 않 는다. 결국 그런 너를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그 밤 의 공기가 생생하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와는 상관없이 4월부터 우리는 함께 살게 되었다. 반 복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기에, 차라리 같이 살면 서 부대끼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마음 한 켠엔 있었다. 원래라면 휴직을 하고 너 의 적응기를 도울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내몰린 상황에 휴직은 할 수가 없었지 만, 네가 다닐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집을 정리하고, 네가 살던 곳에서 너의 살림 살이를 옮겨 오면서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게 되었다. 외출이나 외박이 아닌 같 이 살기 위해 집으로 온 그날, 박스 하나로 정리된 너의 4년이 얼마나 먹먹하던 지... 우리에게 옮겨 온 너의 삶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너와 함께 한 어느 봄날, 활 짝 핀 벚꽃 아래 온 세상이 설렘으로 가득할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일렁 임으로 눈물을 쏟아냈었다. 그때 나는 마음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1월에 만나 4월부터 함께 살았고, 5월에 법적으로 가족이 된 우리. 한 사람의 인생이 내 삶 깊숙이 들어오는데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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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입양 절차가 이렇게나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기뻐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네 살이 될 때까지 떨어져 지낸 우리에게는 비어버린 그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왔지만 여전히 온전한 신뢰를 보이지 않는 너에 게 나는 또 다른 거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무에게나 가서 안기고, 처음 어린 이집에 가는데도 전혀 낯설어하지 않고 배웅하는 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쌩 하니 어린이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모두에게 친절한 미소를 날리는 네가 낯설었 고 솔직히는 괘씸했다. 이런 순간들이 반복될수록 나는 조급해졌고, 우리가 놓 친 그 시간만큼의 애착을 빨리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욱 바빠졌고, 그러다 보니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네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분명 너를 만나기 전의 나는 너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 마음먹었었고,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상황에 대해 화가 났었는데, 어느새 내가 너를 조급하게 다그치고 있었던 거다. 4년을 떨어져 지냈으니 안정 감 있는 관계가 되기까지 최소 8년은 걸린다 생각하자는 다짐이 무색해지는 순 간이었다.

올해 나는 너와 세 번째 봄을 보냈다. 봄다운 봄을 온전히 누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제법 따스한 봄볕은 느낀 봄이었다. 여섯 살 너의 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마당에서 팔랑팔랑 날개 짓을 하는 나비를 쫓 고, 가볍게 뒷산을 올랐다가 꽃망울이 맺힌 진달래도 보고, 밭을 일구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께 지금 뭘 심고 있는 거냐며 간섭도 하고, 언니, 오빠랑 뒹굴 거리며 놀기도 하는 너의 봄날은 적어도 시리지는 않았으리라.

옆에 누가 없어야 더 편하게 잠들던 네가 혼자 자기 싫다고 한다. 어디 살고 있어? 라는 물음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언니 집’이라고 대답하던 네가 자연스 럽게 ‘우리 집’이라는 말을 한다. 누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그 사람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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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간다던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잔뜩 사준 이모의 같이 살자는 말에 싫다고 한다. 왜 싫으냐는 물음에 거기는 가족이 없어서 안 갈 거라고. 만나는 모든 사 람에게 밝게 인사를 건네던 네가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내 뒤에 숨는다. 여전 히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모습이 있고, 온 몸으로 부 딪혀 안겨오지 못하는 머뭇거림이 있지만 그런 너를 바라보는 내게 더 이상의 조급함은 없다. 너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나를 거절하고 밀어내는 것 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우리는 그 시간을 함께 쌓아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우리가 놓친 그 시간이 언제 다 채워질지, 온전히 채워지는 날이 오기는 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다시 봄은 올 것이고 우리는 그 봄을 함께 누릴 것이다. 다시 봄이 오면 지난 봄보다 더 행복한 우리를 만날 수 있으리라! 우리 집에는 행복이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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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으로 맺어진 우리, 다르지만 같습니다. 김진형

동생에게는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를 만나는 것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 동생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의 일입니다. 어머 니가 동생의 소원을 맞춰 보라고 하셨습니다. 질문을 들은 저는 동생이 갖고 싶 어 하는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닌텐도, 아니면 핸드폰?” 정답은 제 예상과 너 무나 달랐습니다. 동생의 소원은 낳아주신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래?”라는 말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저는 적잖이 당황했 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반응했지만,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습 니다.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까? 다른 주제를 던져야 할까? 아니면 소원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하나? 동생이 내 반응에 어떻게 반응할까?’ 저는 이미 자연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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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반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같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님과 길러주신 부모님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 어 떤 감정일지 생각해 봤습니다. 제 머릿속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누 군지 알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분을 만나고 싶어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이런 이유로 당황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동생이 입양에 대 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입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을 피해버렸습니다.

집에서는 동생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생은 입양 에 대한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동생이 점점 커서 유치원을 다니 게 되었을 때 동생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생이 힘들어했습니다. 동생의 마음을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사실을 동생이 건강하게 받아들여 갔음은 분명합니다.

소원을 처음 들었을 때, 제가 어떤 질문을 던져도 혹은 어떤 반응을 보였어도 동생은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마주하 기 힘든 사람은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저였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저의 관점에서 동생을 만난 순간부터 동생의 소원을 들은 순간까지 를 보면 이상하지 만은 않습니다.

제 기억 속에 동생의 첫인상은 이미 가족이 된 동생이었습니다. 제가 동생을 맞으러 간 것이 아니라, 동생이 이미 가족이 되어 저를 맞으러 나와 주었습니다. 동생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그때 저는 유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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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습니다. 저와 동생이 만나기까지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유학이 끝나고,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 게이트를 나왔을 때, 저는 기쁜 마음에 가 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공항에서 주저 없이 저에게 안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돌아왔지만, 집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기숙사 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방학이 되면 집으로 되 돌아왔습니다. 동생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할 만한 상황에 집을 떠나 있 었습니다. 동생과 제가 함께하는 시간은 평범한 ‘동생’과 ‘오빠’의 관계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이런 점이 저와 동생을 가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 이는 데 큰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떨어져서 지내는 점이 제가 집에 왔을 때 동생 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습니다. 동생과 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시간이 지나, 동생은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기숙사에 있었 습니다. 부모님은 통화를 하면서, 동생과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유치원 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생은 낳아주신 부모님이 따로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동생 은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바라봤다고 합니다. 그러다 동생은 입을 열었습니다.

“오빠는?”

이후 동생은 저와 동생의 다른 점을 잘 받아들여 갔습니다. 반면, 저는 그 차이 점을 몸으로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동생의 그 한마디가 머리를 맴돌기는 했습니 다. 그렇지만 동생이 어떻게 반응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보고 느끼지는 못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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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동생이 그 사실을 받아들여 가는 과정에 저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환경이 동생과 저의 다른 점을 외면하게 했습니다. 동생의 소원을 듣고 다른 점이 처음으로 몸으로 느껴졌을 때, 저는 그 대화를 너무나도 피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당황하거나 걱정을 하면 작은 사건도 크게 보기 마련입니다. 소원을 듣고 난 후에 여러 가지 걱정과 생각이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나 를 어떻게 생각할까?, 동생과 내가 모두 독립한 후에 어떤 관계로 남을까?’ 등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걱정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필요한 걱정들이 한 가지 가치 있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동생과 내가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동생이 입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 질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입양가족이든 아니든 이 질문을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혈육 관계가 주는 유대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혈육 관계 라고 그 관계가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가정사로 인해 명절에 모이지 않는 가족을 찾아보기 쉽습니다. 반대로 입양가족이라고 관 계가 쉽게 깨지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동생과 내가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찾은 결론은 좋은 오빠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추상적입니다. 좋은 오빠란 어떤 오빠인지 알 기 어렵습니다. 이 해답을 찾으면서 제가 떠올린 것은 부모님과 저의 관계였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모두가 그랬겠지만, 부 모님은 완벽해 보입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해주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알아 야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크면서 이 생각이 변합니다. 부모님의 약한 모 습이 보입니다. 또 부모님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됩니다. 부모 님은 결코 완벽한 사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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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부모님은 저에게 좋은 분이십니다. 부모님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 에 있든, 어떤 성품과 성격을 갖고 있든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이 좋은 분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사랑했고 앞으로 사랑할 것이라는 확 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 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가족과 함께 보냈던 시간과 쌓인 좋은 감정들이 너무나도 많습니 다. 저와 동생의 관계도 같을 것입니다. 저는 완벽한 오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오빠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생을 사랑하고 함께한 좋은 경 험이 쌓여간다면, 오빠와 동생의 관계가 좋게 유지될 것입니다. 그 좋은 감정들 을 동생에게 표현하고 공유하고 싶습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복귀할 때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기숙사 생활과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집을 떠나는 것은 저에게 익숙한 일입니다. 항상 집을 떠 날 때마다 동생은 마무 말없이 방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동생이 아쉬움을 표현 하는 방식 입니다. 군대로 복귀할 때는 조금 달랐습니다. “내일은 오빠가 없어서 기쁘지 않을 것 같아.” 이 말 한마디가 동생의 진심을 저의 마음 깊이 전달해 주 었습니다.

만약 동생이 다시 소원을 말하게 된다면, 이제는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동생이 소원을 통해 깊은 감정과 생각을 전달할 때, 좋은 오빠로서 경청해 줄 것입니다. 반대로 저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해 주고 싶습니다. 동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오빠가 될 것입니다. 또 동생에게 저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오빠 가 될 것입니다.

동생은 저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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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 엠펙은 나의 기적입니다. 김부연

방학이 끝났다. 지루한 여름방학이 끝나고 큰 애가 먼저 개학을 하였고, 일주일 뒤 둘째, 셋 째 까지 개학을 하였다. 긴 폭염과 기습 폭우로 쉽지 않았던 2021년 여름이 서 서히 물러가고 있다. 가을장마라는 복병이 숨어 있지만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에 우리 집에도 가을이 스며들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가지 변수가 숨어 있다 해도 교육부 방침 덕분에 격주 로 가던 학교를 이제 매일가고 있으니 다행이다. 2년간 지속되는 코로나19로 답 답한 집 생활을 많이 했으니 참 다행이다. 우리 집에는 고2 큰 딸과 초등학교 5 학년인 둘째 아들,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딸! 세 아이가 하루하루 야물게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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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이다. 아침을 힘차게 열어주기 위해 일어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최대한 부드 러운 목소리로 깨워주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학교를 가야하는 큰 애를 선두로 느림보 거북이 아들을 깨울 때는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다행인 것은 큰 애와 막내는 제 역할 을 충실히 한다. 자기표현이 정확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큰 딸, 낙천적이고 웃는 모습이 멋진 아들, 노래와 애교가 많아 우리 집 행복둥이 막내. 이렇게 세 아이 들은 나를 있게 하는 존재 그 이유 이상이다.

남편과 나는 결혼 10년 만에 부모가 되었다. 간절히 원하고 원하던 아이를 가 슴으로 낳았다. 큰 애가 내 품에 안기던 날, 그 날의 감동과 행복감은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8남매 중 맏이인 남편은 늘 우리가 좋으면 괜찮다 했지만, 동서들이 아이 에게 젖을 물리려고 방에 들어가고 혼자서 명절음식을 할 때는 나는 늘 좌불안 석이었다. 뭔가 죄인 아닌 죄인인 것 같고, 서울 살 때는 잘한다는 산부인과와 한의원을 다녔지만 나에게 아기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흑산도 사시는 시어머니에게서 가끔 인진쑥과 섬에서 나는 좋은 약초를 달여 정성들인 한약이 오는 날은 더 내 마음은 가시방석이었다. 불임. 지금은 난임이라고 부른다고 했나? 아무튼 나는 엄마가 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가는 부부를 보면 남편에게 더 할 수 없이 미안했다. 유난 히도 갓난아이를 예뻐하는 남편이 얄미웠다.

결혼 28년차. 엄마 경력 18년차가 된 나는 이제 엄마다. 행복한 엄마가 되었다. 태어난지 17일 만에 운명처럼 만나 이러저러한 복잡한 절차를 통과해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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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가 된 큰딸 수빈, 수빈이는 신생아 때부터 눈부시게 예뻤다.

큰 애 소망대로 둘째 현규가 집으로 왔다. 아들이지만 애기 때부터 순둥이었 다. 누나를 좋아해 누나와 너무도 잘 놀았고, 건강했다. 현규가 태어나고 한 살 터울 수연이가 태어났다. 사슴처럼 눈망울이 이쁜 수연이는 오빠와 쌍둥이처럼 잘 커 주었다. 이렇게 눈부시게 이쁜 세 아이들이 나의 품으로 왔다. 아빠의 품 에 안겼다. 수빈, 현규, 수연, 내 아이들이 부지런한 엄마로 살게 해주었다.

전남 영암에서 우리는 행복한 가족으로 삼호의 푸른 들판과 월출산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누리며 열심히 살았다. 현대중공업을 다닐 때 세 아이를 입양하 였기에 회사에서도 평판이 좋아 회사 입구 큰 외벽에 가족사진이 한 면을 장식 하기도 하였다. 서문으로 출·퇴근 하던 남편은 아침 출근길이 즐겁다 하며 좋아 했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행복을 가꾸어 나갔다. 이만하면 됐다. 잘 살아야 지...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우리는 너무 나 이가 많아. 그것이 이유였다.

15년간의 영암 삼호에서의 직장 생활이 마무리 되고... 2014년 겨울, 우여곡절 끝에 경남 진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 농장에서 새벽 첫 닭이 울기 전에 하루를 남편은 이미 시작 하였 을 것이다. 남편은 농장을 떠나지 못한다. 귀농은 쉽지 않았다. 3년간 더 직장을 다녀야 했고, 2017년 드디어 시설 하우스를 시작 하였다. 농장일은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시설 투자비는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은 큰 딸은 차츰 진로와 학업에 시간을 보내고, 성격이 좋 아 절대 거절이라는 것은 모르는 아들은 아들다움으로 여름내 아빠를 도와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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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일을 하였다. 마음이 아팠지만, 아픈 아빠를 돕겠다는 12살 아들을 말릴 수 는 없었다.

막내딸은 늘 웃음을 준다. 학원 한번 다닌 적 없지만 어디서 배웠는지 영어도 술술, 공부도 책읽기도 욕심이 많아 벌써부터 교대를 나와 교사가 된다고 당찬 포부를 밝힌다.

이만하면 나는 참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50대 아줌마임에 틀림없다. 이 만하면 되었다. 가끔은 이렇게 눈 빠지게 바쁠 수가 있나하는 생각과 희끗희끗 흰 머리카락과 우리 집 박씨 아저씨의 성격을 맞춰야 하는 것 빼고는 말이다.

가끔 순간순간 가슴이 멍하니 눈물이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힘든 시간을 잘 버텨준 우리 가족과 또 하나의 소중한 가족 엠펙 가족에게 글로나마 내 마음을 남기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버텨주어 고맙다. 3년이다. 3년만 잘 이겨내라. 힘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제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친구의 말대로 잘 이겨내어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우리 가족은 일어설 준비를 한다.

아픔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2019년 9월 8일 오후 3시 경... 그날은 딸기정 식 마지막 날이었다. 3일간 계속된 딸기모종 정식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우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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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은 아니 엄마인 나는 이 시간 전과 후로 삶이 나눠져 버렸다. 계획대로 순서 대로 차근차근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되던 삶과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잘 이겨내 는 삶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것이 예고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농사일로 너무 바빴다.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챙겨먹고 두 아이는 알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때쯤 11시경 모처럼 두 동생을 데리 고 시내 외출 하고 온다고 용돈을 받아간 수빈에게 시내버스 타고내릴 때 조심 하라! 동생들 잘챙겨라! 당부하고 나의 일은 계속 되었다. 동생들 떡볶이랑 이것 저것 사고 시간 보내고 온다는 기특한 생각에 까칠한 녀석이 오늘이 웬일인가? 하고 기분이 좋았다.

오늘까지 딸기 모종을 다 옮기고 나면 내일부터는 한숨 돌리고 조금 여유가 있 으려나 하는 뿌듯함에 남편에게도 사뿐 사뿐 다정하게 말했다. 며칠 동안 가을 태풍과 씨름하고 모종 옮기고 하느라 힘들었으니, 오늘밤에는 우리 다섯 식구 모 여 맛있는 밥 먹자 하며 오후 일을 이어 가고 있었다. “아이고 좋다. 여름내 모종 심을 준비하느라 고생했는데... 내일부터는 잠 좀 잘 수 있겠네.”

딸기는 뿌리를 내리기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 허리가 빠지도록 물조리를 들고 살아야 한다.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악을 써는 소리 가 들렸다고 했다.

“불이야”, “불이야”

나는 그 시간 한 10분쯤 인근 농협마트에 생수를 사러 가고 없었다. 운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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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다리를 건너는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지... 목이타 고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 불과 2~3분 거리의 그 거리를 운전할 수 없었 다. 잠깐 10분 정도 집을 비운사이 내 삶에, 나의 공간에, 나의 집에 불이 났다. 남편이 울부짖으며 호스를 붙들고 안간힘을 다해 불을 끄고 있었다. 남편이 너 무도 애처로웠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소방차가 오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정말 말로만 듣던 그 불구경이 났다.

남편이 울부짖으며 아이들을 찾는다. 남편은 수빈이가 두 동생을 데리고 외출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불길이 거세지고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무심한 경찰이 내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정신 차리라고 한다. 끄떡없다 해도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남편을 필사적으로 지켜야 했기에 온 힘을 다해 놓으라 했다. 원망스러웠다.

정신없이 남편은 집을 지키지 못했다 하며 호스를 부여잡고 있다. 소방관들도 힘을 합했지만 부질없다. 하늘이 도와 해질 무렵 외출한 아이들이 저 멀리서 둑 길을 달려온다. 맛있게 떡볶이 먹고 두 손 장난감 들고 달려온다. 이 상황을 본 내 아이들... 수빈이는 말이 없다. 아들은 말없이 한쪽으로 가서 운다. 수연이는 목 놓아 울고 있다.

무섭고 두렵고, 어둠이 몰려 와 인근 이웃으로 아이들을 보내려 하지만 아이 들이 곁을 지키며 떠나지 않는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아이들이 무사하고 우리 가 다치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됐다.

막막하다.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하지? 남편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저 깊은 침묵에 빠져 버렸다. 모든 것을 본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괴로워했다. 뒤에 남편은 아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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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있는 줄 알고 너무너무 괴로웠다고 했다. 그 증세는 1년간 병원치료와 심리 치료를 하였지만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일 년간 불안감과 무기력, 참을 수 없는 상실감 등이 남편을 따라 다녔다. 이 무렵 수빈이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였지만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농장 한 켠에 대충 몸을 의지하고 하룻밤을 보내고, 막막하고 답답하고 내손 에 남은 휴대폰으로 광주 박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찌된 일이냐, 이 무슨 일 이냐 깜짝 놀라며 박회장 내외와 엄회장님이 며칠 뒤 달려 오셨다. 엠펙 가족의 응원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기적이다. 박회장은 매일 전화로 우리 가족을 챙겨주셨고, 걱정하시는 엄회장님의 마 음이 느껴졌다. 3,700여만원의 후원금이 전해지고, 눈물겨운 이 후원금을 나는 한 푼도 사용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안전한 보금자리로 옮기기 위해 계약금으로 지불하고 보금자리를 마 련했다. 의정부에서 마음을 보내주신 그 분께는 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 다. 온정의 손길이 전해지고 아이들 옷, 책, 생필품이 우리 곁으로 왔다. 생업을 뒤로 미루고 우리 가족을 챙겨주신 박회장께는 할 말이 없다. 고맙고, 미안하다.

아이들의 소중한 추억, 남편의 애지중지 아끼던 소장품, 손 때 묻은 물건들 모 두 잃었다. 아니 잃은 것이 아니라 이제 미련 없이 보냈다. 그리고 수빈이 말처럼 “엄마, 우리가 이제 진짜 엄마 자식이 된 거야. 아빠 007 가방에 있던 우리 애기 때 물건들 궁금하긴 한데 이제 사라 졌으니 궁금해 할 필요도 없고...” 남편은 밤낮으로 복구에 힘을 다해 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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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가장이 더 힘든가 보다 이때 새삼 느꼈으니... 그리고 남자보다 여자가 더 독종이라 누군가 말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보였나 보다. 사실 나도 차안에 서 운전하며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그들이 몰라서일 것이다. 유 머 있고 아이들 친구 같은 아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농장을 벗어나지 못 하는 증세는 여전하다.

화재 후 나는 가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았다. 챙겨주고 마음을 주어야 가족이지. 새삼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벼랑 끝에 서보니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부질없는지 뒤돌아보게 한다. 어려움과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결코 녹녹 치 않는 삶인데...

멀리 진주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과 함께 해주어 그대 엠펙은 나의 기적임에 틀림없다. 하루하루 오늘도 쉼 없이 달려야 수빈이네가 살아갈 수 있지만, 아직 은 힘들고 잘 버텨야 하지만, 부모라는 이름으로 잘 이겨내고자 다짐해 본다.

그대가 보여주신 기적은 잊지 않겠습니다. 엠펙 가족 여러분,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엠펙, 그대는 우리의 기적입니다. 나의 아이들이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것이 기적이듯 내가 엄마가 된 것이 기적이듯 우리 부부가 부모가 된 것이 기적이듯 나의 아이들을 만난 것이 기적입니다. 그대는 나의 기적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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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혜의 삶에서 백송희의 삶으로 백송희

나는 백송희라고 하고 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백명기 목사님, 고혜정 사모님 의 큰 딸로 입양 되었다. 입양 사실을 알게 된 건 어렸을 적 부모님께 많이 듣기 도 했고, 부모님께서 입양모임도 많이 데려가셨고, 난 입양이라는 게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엄마, 아빠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 피아 노, 수영, 골프 이것저것 의민이 오빠(큰 오빠)와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피아노를 7년쯤 배우고 교회에서 반주도 하고, 그래도 제일 좋아하고 이거 할 때 만큼은 즐겁다 하는 게 피아노가 되었다. 지금도 혼자 자취를 하지만 전자피 아노를 방 한쪽에 두고 가끔씩 치곤 한다. 어릴 적엔 다른 아이들처럼 놀고 싶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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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마음에 피아노 힘들다 안하고 싶다 징징대며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며 포 기하려고 했었지만 다 큰 지금은 엄마 아빠께 정말 감사하다.

초등학생 때까진 입양이란 걸 정말 좋게 생각했다. 중학생 때 부터였을까 조금 씩 삐뚤어지기 시작하고 부모님께 대들며 엄마와 말다툼을 할 때면 “이럴 거면 왜 입양했어요? 그냥 나 친엄마 찾아주세요” 라는 말을 쉽게 하고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나도 이렇게 기억이 생생한데 우리 엄마는 가슴이 얼마나 미어졌 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이 구절을 쓰는 동안에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도 친엄마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해서 결국 흔적을 찾아 가게 된 곳이 입양되기 전 지냈던 ‘형제사’ 라는 곳이었다. 물론 가도 아무 기억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되게 기분이 묘하고 이상했던 것만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중학생 때부터 입양이 가끔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시골 학교다 보 니 다들 내가 입양 된 사실을 알았고 그게 너무 싫었다. 뭐 때문에 사춘기가 그 렇게 세게 왔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고 1때 엄마가 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 게 되어 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엄마가 아플 때 일수록 나 스스 로 잘 하고 더 믿음이 되고 힘이 되어 드렸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고 막무가내였 던 나는 할머니집을 나와 독립을 하고, 아빠와 얘기 끝에 비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학교는 소위 말하는 꼴통 중에 꼴통 학교였기에 그래도 중학생 때까진 나를 잘 케어해주신 부모님 덕에 공부를 잘 해왔었으니 비인문계 학교 에서 1, 2등을 먹자 하는 생각으로 전학을 간 거였는데 막상 가니 친구들과 놀 고 나쁜 길에 빠져 공부는커녕 결국 자퇴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부모님께선 많이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1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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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일이 터졌다. 아주 크나큰 잘못을 하여 소년원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검정고시도 합격하고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게 되었다. 소년원 에 있으면 일주일에 두통씩 편지를 쓸 수 있다. 매주 한 번씩 부모님께 한통, 피 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께 한통 이렇게 두통씩 6개월을 썼다. 우리 아빠도 자 주자주 서신을 써주시고 엄마께서는 아픈 몸을 이끌고 힘들게 손수 편지를 써 서 보내주셨다. 그것만큼 마음 아프고 죄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의 동생 어진이 또한 나에게 손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냥 가족들에게 내 가 못할 짓을 하고 있구나 싶고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한 달에 한번 아빠가 면회를 오시고 가끔 엄마도 같이 오셨다. 더 쇠약해진 엄마를 보자마자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내가 부모님이었다면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이 없구나!’ 라는 말을 안 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 잔소리는커녕 엄마께서는 살이 조금 더 올라서 예쁘네, 밥 은 어떠니? 바리스타 준비는 잘 하고 있니? 라며 나에게 힘을 주셨다. 면회 왔다 가신 그날 밤 취침시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총 육개월 반을 사회와 단절된 채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혼자 반성하는 시간을 갖으며 많은 것들을 다짐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 가족들이 있는 본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한 세 달쯤은 집에서 집안일도 착실히(?)까진 아니고 그래도 열심히 하고 옷 가게를 다니며 일을 하며 살았다. 일도 하고 집에서 지내며 더 이상 부모님 마음 아프게 하는 일 없게 해야지 했던 내 다짐들은 술로 인해 다 무너졌다. 지금 와 서 생각해보면 그깟 술이 뭐라고 7개월 동안 한 다짐들이 거품이 될 수가 있나 싶다. 일을 하다 보니 힘들고 회식 자리도 나가고 싶고 그러다보니 난 다시 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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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대기 시작하고 결국 본집에서 나와 친구들이 있는 광주에 내려가 혼자 자 취를 하게 됐다.

부모님 울타리 안에 있는 게 아닐뿐더러 그때까지만 해도 내 자신만 생각할 줄 알았던 나는 또 한 번의 사고를 치고 소년원이 아닌 감옥에 가게 되었다. 구 속돼서 혼자 독방에 가만히 앉아있으며 나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 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자책하고 있을 때 아빠가 서울에서 광주까지 면회를 오셨다. 고작 딸 13분 보시려고 오신 아빠께 너무 죄송스러웠지만 그 당 시에 나는 아빠가 합의 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보석 신청을 해서 빨리 나갈 생 각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면회를 오신 아빠한테 죄송하다곤 못할망정 합의는 도대 체 언제 되는거냐며 오히려 무례한 말까지 뱉고 짜증을 냈다. 정말 그랬으면 안 되는 건데 너무 한심하다. 우리 아빠는 결국 1,200만원이 넘는 돈을 피해자 분 께 드리고 합의서를 받아 제출해주셔서 세 달 반 만에 출소하게 되었다. 출소하 고 나서도 당장 집 갈 생각은 안하고 출소 당일 친구들을 만났다. 서울 집도 아 니고 가족들 다 광주에 내려와 계셨는데도 말이다. 늦은 나이 21살이 되서야 광 주에서 발을 떼고 서울 옆 인천에서 지내며 사고 안치고 일 하며 지내고 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난 정말 부모님께 못할 말과 행동들을 하고 몇 번의 아니 몇 십, 몇 백번의 못을 박은지 모르겠다. 아픈 엄마도, 혼자 돈 버시며 가족들을 챙기는 우리 아빠도 더 이상은 아니겠다 싶어 파양하기로 하셨었다. 법원 출석도 했지만 엄마 아빠께선 더 지켜보자고 기회를 주시고 이 건 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더 애틋한 사이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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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빠도 “파양”이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 줄 안다. 나와 동생을 입양한 게 절대 헛된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아빠가 엄마한 테 이런 얘기를 하셨었나 보다. 엄마한테 듣는데 눈물이 날 뻔 했지만 참았다.

23살이 된 나는 더 이상 우리 부모님께서 저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시게 한 것부터가 내 잘못이 크다. 그래도 지금 이라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고 있고 앞으로는 더 열심히 살며 떳떳한 딸이 될 수 있을 거라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입양이 참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땐 어린마음에 그 랬었지만, 가슴으로 낳은 사랑이니만큼 친 가족이 아니더라도 친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는 게 입양이고, 그래도 끝까지 남는 건 가족뿐이라는 걸 난 최근 들어 더욱 더 깨닫고 있다.

아직 어려서 본인이 입양됐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싫은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도 너희 나이 때 싫을 때도 있고, 친 엄마가 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끝 까지 우리 곁을 지켜줄 사람은 지금 곁에 있는 너네 가족들이라고...

김은혜의 삶에서 백송희의 삶으로, 백송희 곁을 지켜준 우리 엄마, 아빠, 오 빠, 동생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모든 가족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심하 게 엇나가던 나를 매번 바로 잡아주시던 우리 엄마, 아빠께 항상 미안하고 감사 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 입니다.

엄마, 아빠가 있었기에 이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서 떳떳한 송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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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농작물을 키우는 기쁨, 어려움 조경래

내 카톡 대문 사진에는 윤아를 입양하기 전 태몽에도 나왔던 커다란 호박이 장식되어있다. 이 사진의 누런 호박은 내가 모종을 심어 키운 호박이다.

연년생 아들 대학 입학 후 딸 입양을 가슴에 품고 있을 때 꾸었던 누런 호박 꿈이다. 늦가을 잎이 다진 허허벌판에서 크고 누런 호박을 버겁게 안고 걸어 나 오는 꿈을 꾼 후 ‘어! 내 딸 태몽인가보다’ 하고 직감적으로 느꼈었다.

그 큰 호박의 주인공인 윤아는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키와 몸집이 커 여대 생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책이 올려져 있어야 하는 딸 책상엔 거울, 빗, 화장 품, 눈썹연필, 메니큐어, 심지어 먹다 버린 아이스크림 껍데기 등으로 어수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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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침대 옆 방바닥엔 이것저것 입어 본 옷으로 발 디딜 틈 없는 난장판이다. 방 좀 정리하라고 매일 같이 이르건만 알았다는 말만 소리치며, 자기 방 들어오 지 말라며 문을 쾅! 닫아버린다. 윤아의 관심사는 잘생긴 아이돌, 게임, 화장품, 옷, 고양이, 유튜브이고 이 엄마가 원하는 공부는 안중에도 없다. 단지 윤아의 공부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 때는 “엄마, 하나밖에 없는 딸이 이것만 가지 면 왠지 공부를 열심히 할 것 같은데 엄마 생각은 어때?”하며 사달라는 물품 을 요구할 때만 쓰이는 단어이다. 매번 속으며 수십 가지 자잘한 물건을 클릭 해 주었지만 공부는 여전히 딴 나라 단어이다. 사실 속는 줄 알고 회유당하지 만, 어이없게 슬쩍 웃음 짓는 내 모습을 내 딸은 이미 간파하고 비슷한 작전을 계속 시도한다.

2020년도에 3월이면 시작되는 학교 부진아 지도가 코로나19로 5월 말에나 시작되었고 한식 때 풀 뽑으러 찾아간 친정 할머니, 친정 엄마 산소가 뒷동산에 있는, 할머니 사시던 농가 앞마당에 주말 텃밭을 가꾸기로 마음먹었다. 식물, 동 물에 관심이 많은 딸과 함께 비록 거리는 우리 집에서 100Km 떨어진 먼 양주 땅이지만 딸과 훌쩍 떠나 주말 휴식 겸, 아파트에서 화분 키우기를 좋아하는 나 였기에 더 넓은 자연 바람이 부는 땅에서 여러 가지 꽃과 농작물 생산을 꿈꾸 며 기대에 부푼 채 초보 농사가 시작되었다. 우선 10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엄 마가 아버지와 함께 봄나물도 따시고 할머니 산소 벌초도 하던 농가 정리부터 시작하였다. 버릴 물건은 쓰레기봉투에 담아 모아놓고 부엌 물건은 부엌으로 창 고물건은 창고대로 제자리를 찾아 정리하였다. 10년이 흘렀건만 엄마가 여벌로 갖다 놓으신 옷과 새하얗게 삶아 빨아 보관해 놓은 속옷은 그대로 하얗게 색도 바라지 않은 채로 소쿠리 비닐 속에서 찾아내고는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어린 시절 모래로 냄비를 반짝반짝 닦고 늘 속옷을 하얗게 매일 매일 삶으시 던 엄마를 추억하며 눈가가 축축해지는 혼자만의 시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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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책과 유튜브로 농사에 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삽으 로 흙을 돋구고, 큰 돌을 걸러내고 밭에 퇴비를 뿌리고 밭을 일구기 시작하였 다. 한 이랑 두 이랑 제법 밭다운 모습이 되어갔다. 상추, 치커리, 쑥갓 등을 시작 으로 고추 모종 한판을 사들이고 호박, 열무, 아욱, 알타리, 콩, 시장에서 사다 먹 는 야채 씨앗과 모종을 곳곳에 파종하고 심었다. 한식, 추석 때만 찾던 시골집 은 4월의 사랑까지도 설레게 한다는 개복숭아 꽃의 화려함을 알게 하였고, 5월 에는 빨갛고 하얀 철쭉꽃이 마당 가득히 피며, 여리고 여린 새순이 초록으로 깊 어감을 바라보며 나무의 한해살이가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봄의 새 순은 어린 시절, 여름의 짙푸른 초록은 청년 시기, 가을의 풍요롭고 완숙함은 우 리의 장년기, 겨울의 벌거벗고 눈밭 속 강인함은 인생의 경륜을 느꼈을 인생의 노년과 같다고 느꼈다.

윤아는 미혼모가 낳은 딸로 안양의 동방사회복지회에서 7개월 때 우리 집 셋 째로 입양되었다.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던 나는 오전에는 윤아를 데리고 살림하고 이른 점심을 먹고 날씨가 좋을 때는 유모차에 태우고, 날이 궂을 때는 업고, 걸어서 30분 거리의 학원 앞 영·유아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고 퇴근 때 찾아서 데리고 오는 바쁜 생활이 시작되었다. 윤아를 입양하고 내가 제일 먼 저 시작한 일은 혹 시설에서 7개월간의 단체생활에서 잠재적으로 사랑의 부재 를 느꼈을까 걱정이 되어 밤이면 온몸을 쓰다듬어 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 뽀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깜짝깜짝 놀라는 예민 반응을 보이며 깊은 잠을 자지 않더니 날이 지나면서 잘 먹고 쑥쑥 자랐다.

윤아 돌 지나 두 아들이 보름 차이로 군대를 갔고 남편, 나, 윤아 세 식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혹 우리 부부가 옆에 붙어 앉아 있으면 샘을 내며 떨어져 있 으라고 하고, 교회 유아 방에서 자기는 다른 부모 앞에 앉아서 간식을 받아먹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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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도 내 앞에는 다른 아이가 오는 것조차 싫어하며 자기 위주로 사랑을 독차 지하고 싶어 했다. 네 살 때 하루는 내 배를 만지더니 “엄마 나도 여기 있었지?” 하고 묻는다. 어린이집에서 임신과 출산에 대해 배우고 질문을 하는 것이기에 난 “아니 오빠들은 엄마가 낳아서 까맣고 못 생겼는데 윤아는 하나님께 기도해 서 이렇게 예쁜 엄마 딸이 되었어” 했더니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 후 하루는 어린이집 생일잔치를 하고 온 날 “엄마! 태림이 생일이었는데 너 는 엄마 배에서 나왔니? 하나님이 주셨니? 하고 물으니 글쎄 엄마 배에서 나왔 데~” 출생의 방법이 달라서 신기한 듯 또 묻는다. “엄마 하나님이 나를 병원에 밤에 갖다 주셨어? 낮에 갖다 주셨어?” 입양에 대해 말할 시기가 된 것 같아 나 는 “사실은 엄마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은 맞는데 너를 배에서 낳아주신 예쁘신 분이 있어. 엄마도 그 분을 본적은 없지만 분명히 윤아처럼 예쁘게 생기 시고 지금은 오빠들처럼 공부하고 계시고, 멀리 비행기 타고 미국에 가셨기 때 문 윤아가 커야지만 만날 수 있어” 이렇게 입양 인지교육은 시작되었고, 자라면 서 지역 입양인들과 놀이공원으로 같이 놀러다니고, 연말 파티, 입양 캠프를 같 이 다니며 입양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자랐다. 윤아 스스로는 이 렇게 자연스럽게 알고 있으나 주변 친구들을 윤아가 입양된 것을 알지 못한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집 식구들이 키가 다 큰 편인데 윤아 또한 큰 키로 당연히 우리 집 늦둥이 딸로 알고 있다. 윤아가 아기일 때 입양 부모교육 모임에 참여해 놀란 적이 있다. 입양된 아이들이 부모 중 한쪽과 너무 닮은 모습 을 하고 있어 역시 가족이 되는 인연임을 느꼈는데 나 또한 딸을 데리고 다니며 얼굴이 많이 닮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현재 우리 집은 산본이고 군포지역 공개 입양 5가족이 코로나 이전에 2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을 가졌었다. 아영이네는 복지공무원인 아영 엄마가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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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울 친생자녀 아영 언니를 위하여 반려동물을 알아보다가 동생을 만들어주 어야지 하며 아영이를 입양했고, 그 후 동생 윤아를 입양해 현재 딸 3명을 키우 고 있고, 수아네는 피아노 전공인 수아 엄마가 늦은 나이에 결혼해 수아, 지아 두 명의 입양아 딸을 키우고 있다. 수아 엄마가 음악 전공자라 지역 음악단원으 로 기타, 플룻 등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아는데 3년 전 가을, 지역 음악회에 서 수아와 수아 엄마가 플롯을 연주하는데 너무 멋있고 부러웠었다. 나도 내 딸 이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멋진 여자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어 저학년 때 피 아노학원을 보냈는데 금방 싫증을 내더니 한사코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결 국 그만두었고, 조카의 플릇 연주를 같이 듣고 온 날 “너도 언니처럼 저 악기 해 볼래?” 하고 물어도 “아니 싫어!”하며 거절해 학교에서 배우는 오카리나, 리 코더만 겨우 떠듬떠듬 간신히 분다. 영임이는 영임 엄마가 친생 아들 둘이 있고, 위탁모 활동을 하다가 어린 영임을 입양했고, 그 후 영임이 언니 벼리를 연장아 입양을 했다. 벼리는 야무지게 공부도 잘하고 동생 영임이도 끔찍이 챙기는 이 름처럼 별 같은 보배이다. 약간 우스갯소리로 휴가를 언제 갈까 하고 가족회의 를 했더니 아들들이 그냥 동생들 데리고 가족끼리 다녀오시라고 했단다. 딸 둘 을 데리고 늘 다니기에 오빠들은 마치 자기네들은 가족이 아닌 듯 가족끼리 다 녀오라는 이야기에 한참을 웃었다고~ 화희네는 똘망똘망 큰 눈을 가진 화희가 여행가이신 아빠와 붕어빵이다. 제일 늦게 우리 모임에 들어왔고, 우리 모임 중 막내인데 동생 입양을 진행 중이다. 화희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화희한 테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놀아주는 모습에 난 내 딸에게 그렇게 못 해 준 것 같 아 반성했던 일이 있다. 코로나가 빨리 끝나야 예전처럼 중화요리집 가서 탕수 육,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텐데, 이러다 아이들이 크면 이젠 부 모와 같이 나오는 것도 싫어할 텐데, 정말 마스크 안 쓰던 일상이 그립다.

위에서 소개한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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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하지만 나는 매번 느낀다. 난 딸 하나 키우는 것도 일이 많은데 어떻게 저렇게 둘씩이나 입양할 생각을 했지? 사실 모이면 자매들이 똘똘 뭉쳐서 하나 인 우리 윤아는 처음에는 외로워한다. 지금은 고양이 사달라고 조르지만 몇 년 전까지도 동생 입양해 달라고 했다. 자식을 낳은 사람들은 키우는 게 사실 힘들 지만 대부분 후회는 하지 않는다. 흔히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지만 그 안에 희로 애락이 있고 가족의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배로 낳은 아이와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조 금 다르냐고. 난 내가 낳은 아이를 분만실에서 잠깐 보고 이튿날 신생아실 앞에 서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는 까맣게 더부룩하고, 피부는 빨갛고, 이목구비는 완 전 못 생겨서~ 아무리 뱃속에서의 태동을 느꼈던 아이이지만 낯설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키우면서 닦이고 먹이고 같이 웃으며, 아프면 안타깝게 돌봐주며 무 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자식이라는 혼연일체를 느꼈고,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되어 줄 뿐 내 소유가 아니고 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를 가르쳐 주려 애썼다. 그 아이만의 기질을 관찰하면서~

내리사랑이라고 첫째보다는 둘째가, 둘째보다는 셋째가 더욱 사랑스럽고 같은 나이라도 더 어리게 보이고 염려스럽다. 친생자냐 입양자냐는 이렇게 입양 행사 에서나 느끼는 말일뿐 그냥 내 자식이고 내 가족일 뿐이다.

아들 둘을 연년생으로 정신없이 키웠기에 딸 하나는 예쁘게 원피스 입혀서 조근조근 이야기 나누며 공주처럼 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 아니다. 야뇨증 이 있어서 초등 3학년까지 오줌을 싸서 일주일에 최소 한 번씩은 이불 빨래를 해야 했고, 결국은 냄새 때문에 침대를 새로 사야했다. 최근에는 사춘기 앓이가 시작되어 친구와 놀다 밤늦도록 안 들어와 컴컴한 밤눈을 부릅뜨고 찾아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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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한다. 농작물도 마찬가지이다. 봄에 모종 뿌리고 주말에만 들여다보며 관 리하면 되는 줄 알았다. 천만의 말씀이다. 봄에 바람에 날라가는 비닐 씌우며 흙 으로 옆을 막아주는 것도 힘들지만 비닐 씌운 옆이랑 사이로 내 키만큼 크는 잡 초를 일주일에 한 번 가서 관리하기가 어렵다. 지금 고구마 밭 사이의 잡초가 너 무 커서 고구마 줄기가 안 보일 정도이다. 봄에 씨감자 사서 심고 힘들게 6월에 캐었는데 감자 풍년이 들어 씨감자 값이면 감자 4상자를 집까지 배달해준다. 그리고, 시장에서 손쉽게 사다 먹는 열무, 파프리카, 고추, 토마토 등 가꾸어주 는 방법과 좋아하는 토양도 다르고 벌레도 안 생기게 신경 써 주어야 한다. 작 은 텃밭 가꾸기에 사용된다는 겨자가루액, 소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충제로 써 보았지만 파는 것만큼 성과도 없었다. 농작물을 키우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노고에 비하면 정말 농작물이 저렴하고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농부들이 존경스럽다.

사실 내가 농사짓는 이유는 남동생과 같이 사시는 친정아버지와의 시간을 그 곳에서 갖기 위함이다. 코로나로 노인정, 수영장도 못 가시는 아버지는 토요일이 면 그곳에 오시는 것을 즐기신다. 예전 엄마와 같이 그곳에서 이곳저곳을 손보 시는 취미를 내가 농사 핑계로 가니 이젠 토요일 하루 오셔서 잡초도 뽑으시고, 호박 넝쿨 지지대도 만드시고, 때론 숯불고기, 토종닭도 드시며 큰 딸과의 시간 을 즐겨하시기에 시장에서 사먹는 것 보다 비싼 농작물이라도 아버지와의 시간 갖는 것의 가치를 생각하여 이번 주 토요일도 갈 예정이다. 처음 내 딸과 같이 다닐 예정이었는데 시골의 풍경은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벌레 모기가 극성을 떨고 무엇보다도 와이파이가 없어 딸은 그곳 가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은 나 혼자만의 주말여행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쉽지 않고, 농작물 키우는 일도 쉽지 않다. 가정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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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를 쳐주고 그 안에서 안정과 사랑을 느끼며 아이들이 자라고, 지지대를 기대고, 토마토, 늙은 호박이 자라듯 우린 하나라도 더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 어 주고 작물의 잡초를 뽑아주듯 정성을 들이며 노력하는 삶이 우리의 인생을 가꾸는 일이고, 소풍 끝내는 날 즐거웠노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아이들 이 아직도 가정이라는 울타리 기다리고 있고 그에 걸 맞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못생겨도 빨갛고 싱싱한 토마토를 따서 입에 넣는 맛은 사 먹는 맛에 비교가 안 될 만큼 맛있고 싱그럽다. 곧 중학생이 되는 내 딸이 맨 꼴지의 성적만 아니 기를 바라지만, “엄마 내가 손톱에 메니큐어 발라줄게”하며, 정성스럽게 발라주 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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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란이와 예빈이네 이야기 엄진경

입양가족으로 살아 온지 25년째.

큰 딸 예란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기관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고, 작은 딸 예빈이는 대학생이 되어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참 세월이 많이 지나 버렸다. 결혼을 하고 11년째 되던 해 입양을 하자고 무식하게 들이대 었는데 아이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어버렸다.

우리 가족을 소개하자면, 아빠 고경석(한국입양홍보회 前 회장), 엄마 엄진경(한국입양홍보회 운영위 원, 반편견입양교육 강사), 큰 아들 고상한(35세, 회사원) 큰 자부 정찬미(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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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결혼해서 딸 1명 둠, 작은 아들 고귀한(33세, 회사원) 작은 자부 박윤미(34 세, 교수) 결혼해서 아들 1명 둠, 큰 딸 고예란(25세) 사회복지기관 근무, 막둥이 고예빈(20세) 대학 2학년, 이렇게 우리 가족은 전남 담양 땅에서 살고 있다.

15개월 된 큰 딸을 입양할 때 아무런 정보 없이 사회에 좋은 일을 해보자는 가족들의 생각이 계기가 되어 광주영아일시보호소에 자원봉사를 나갔던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두 아들이 초등학생 시절이었는데 운동을 좋아하는 두 아들은 운동장에서 공차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 어지기 시작했고,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봉사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통해 가족을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된 것이다. 물론 10개 월을 몸에 품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 때의 생각으로는 하나 님은 참으로 쉬운 방법으로 가족을 만들어주셨다.

우리 가족이 입양할 당시는 지금처럼 복잡한 서류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 았던 시절이었다. 딸을 보내주셔서 두 아들을 키우는 맛보다 달콤할 것 이라는 생각은 물 건너가고 셋째 아들로 성장하는 큰 딸과의 밀고땅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던 큰 딸 예란이를 우리 가족의 양육방식 으로 키우면 잘 커 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당당하게 키 워보기로 가족들은 한마음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입양이라는 말이 우리 가족의 앞을 가로막는 일이 많아졌다. 확대가 족 안에서부터 가족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행동과 말투가 마음을 아프게 했었 다. 우리 조차도 입양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우리 가족이 아이에게 어떤 역 할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기에 어떤 대처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가슴앓이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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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하면서 공개입양을 하는 것이 편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라는 조언을 해주셔서 입양을 공개하기로 하고, 가족과 친인척, 교회와 지인들에게 오픈을 하고 아이에게도 어리지만 입양됨을 이야기하며 입양가족모임을 시작 하여 서로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이, 우리 가족만이 입양을 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삶을 사는 가족들 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같은 고민들이 있음을 알아가게 되었기에 입양가족모임 은 더욱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광주·전남지역모임을 맡아서 오랜 세 월을 입양가족들과 함께 교육도 받고, 캠프 참석도 하고, 입양 관련 여러 행사들 을 통해 입양을 알리며 전국입양가족모임인 한국입양홍보회의 회원으로 당당 한 입양가족으로 서가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을 입양이라는 단어를 너무도 입에 달고 살아왔기에 어쩔 때는 도 망가고 싶은 때도 있었다. 입양을 홍보해야 했기에 방송출연도 해야 했고, 전국 의 모임에도 참여를 해야 했었고, 다른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나눠야 했 으며, 우리의 아이들이 사회의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학교를 찾아다니며 반 편견입양교육도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또, 입양가족들에게 먼저 입양했다 는 이유로 사례발표를 하러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큰 딸에게는 친생부모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뿌리 찾기를 한 경험도 있었다. 돌아보면 한국입양홍보회의 역사를 써 갈수 있었던 것이 이런 조그마 한 일들에 열심을 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성인이 된 큰 딸 예란이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노인복지를 하고 있다. 사춘기에 있는 입양가족의 아이들을 만나 상담도 해주고, 파양을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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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방향을 잡는 일들도 하고 있으 며, 어린아이를 둔 입양부모들 앞에서 입양아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 이 아이를 양육하면서 느끼는 두려움과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 다.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당당함과 시원한 말투의 매력에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아이들도 명랑하게 잘 커주기를 바라 는 마음들이었다. 한 가지 자랑을 더 하자면 대학에서 성적이 과top을 하여서 우리를 놀래키기도 했었다. 대학에서 정신 차리고 공부에 전념을 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작은 딸은 재주가 많다. 피아노 연주도 잘하고, 악기 다루는 일도 잘하며, 장 래 희망이 후식 음식을 만드는 쉐프란다. 그런데, 대학 공부는 행정학을 전공하 고 있어 아이러니 하지만 주어진 일에는 열심히 하는 아이여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잘 찾아가리라 생각한다.

우리가족이 또 가족을 맞이하게 된다. 두 딸을 맞이할 때와 사뭇 다른 기분이랄까? 큰 아들이 짝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작은 아들 또한 결혼을 하여 며느 리를 가족으로 맞았다. 나는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낯설지가 않지만 29년 을 서로 다른 가정에서 생활하다가 결혼을 통해 가족이 되는 아이들은 얼마나 기대가 될까?

입양 할 때의 첫 마음 보다는 덜 설레이지만 행복한 마음은 같은 것 같다. 두 가정에 또 손자, 손녀가 태어나 우리가족들을 더 기쁘게 해주어 가족이 늘어가 는 것은 참으로 축복 된 일인 것 같다. 두 딸을 입양하는 일과 동생으로 맞아준 두 아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때로는 엄한 오빠로, 축하 일을 챙기는 자상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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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로, 뒹굴며 격이 없이 지내준 4남매에게 지금처럼 밀어주고 당겨주는 모습으 로 살아가주길 바란다.

가족이 된다는 것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인 것 같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입양가족이어서 특별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입양을 통해 우리 가족이 여러 모로 많이 성장했다는 것이 남는 일인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직도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시설에서 커가는 아이들이 가족을 만나야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의 법이라는 테두리에 막혀서 엄마의 손길이 100% 필요할 때 케어를 받지 못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가슴이 아프다.

입양을 통해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즐거운 일도 있 지만 힘든 일도 있다. 그러나 가족이기에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살아간다. 이 땅에 가족을 만나야 할 아이들이 없어질 때까지 입양은 계속 되어 질것이고, 입양가족들의 업그레이드 된 삶을 위해 우리의 활동은 지속되어져야한다.

입양은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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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편을 끌어당긴 아이들 김혜령

안녕하세요? 경북 김천에서 누나 해인이와 동생 해성이를 키우고 있는 해인 해성맘 김혜령입니다. 아들과 딸을 처음 만난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7년, 그리 고 6년이 흘렀네요.

처음 볼 때부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서...

오랜 기간 난임 시술로 힘들어 하다가 입양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까지 많이 망설였던 것 같아요. 마음은 지치고 외로웠지만 직장 일만 하면서 나름대 로 편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로 인해 생길 엄청난 변화를 두려워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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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입양신청이 되기까지 복잡한 서류준비, 절차, 입양 기관의 부모검증 등으로 지쳐가고 있을 무렵, 아이를 만났습니다. 선보는 날이 잡히고 양가 어머니들까지 아이를 보시겠다며 지방에서 올라오셨는데 약속한 시간에 기관에서는 갑자기 시간을 늦추자며 다른 아이를 만나보라고 했답니다. 예정된 아이가 사경과 사시가 있어 보인다면서요.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남 편은 다음 아이를 보자면서 발을 돌리는데 갑자기 저도 모르게 ‘원래 예정된 아 이로 보겠다.’고 단호하게 말을 했어요. 그 당시 사경, 사시가 무엇인지, 어떤 심 각한 장애인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겨났을까요? 애를 키워본 적도 없는 제가, 4개월 그 시기에 아이가 목을 처음 가누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거라고, 만약 장애가 맞다면 치료하고 재활시키고 내가 품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해서 만난 아이가 해성이랍니다.

처음 만난 제 품에서 우유도 먹고 잠도 자고 엄청난 순둥이였어요. 처음 만난 날부터 눈에 쏙 들어온 이 녀석이 저를 엄마로 삼겠다고 끌어당긴 것 같아요. 입 양전제 위탁과 동시에 휴직을 하고 시작된 육아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지만 아 이 덕분에 정말 사람 사는 집,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라주면서 뒤집고, 기고, 앉고, 서는 온갖 재롱을 다 봤습 니다. 아이가 평생 할 효도를 그 시기에 다 한다지요.

경기도 안양에서 그렇게 살다가 몇 달 후 김천으로 이사를 해야 할 일이 생겼 습니다. 아이와 아이 주변에 입양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비밀입양을 검색해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세상엔 비밀이 없다는 생각으로 결국 입양가족 자조모임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회사를 복직하고 그 대신 남편이 육아를 전담하면서 부지런히 입양가족 모임을 참석하며 살아가는데 남편이 먼저 두 번째 입양을 제안했습니다. 젖 떼고, 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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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뗀 큰아이로 해성이 누나를 입양하자고 하더군요.

나와 판박이 같은 딸을 만나서....

큰아이를 키우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여러 입양가족들의 경험담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의 망설이지 않았어요. 힘든 육아를 남편이 전담하겠다고 해주니 내 사랑 해성이에게 누나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 음에 고민 없이 입양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방에서는 큰아이 입양 을 찾을 길이 거의 막혀있었습니다. 김천에 있는 보육원으로 직접 연락해보니 입양기관이 아니라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받았습니다. 입양기관들은 신 생아들만 있으니 큰아이는 없다고 했고요. 할 수 없이 대구의 입양기관을 찾아 가 큰 아이를 찾아달라고 사정을 해서 한 보육원을 소개받았습니다. 보육원으 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는데 김천에 있는 아동복지시설이었고 집에서 도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며칠 후 약속을 잡고 구비 구비 산길을 따라 도착 했습니다.

4살이지만 이제 두 돌 반이 되는 조그만 아이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김천으 로 이사오리라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남편은 우리 딸이 첫 눈에 들 어왔답니다. 저와 닮았다고요. 그렇게 시작된 만남으로 6개월 동안 매주 보육원 을 찾아가 딸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눈치가 빠른 아이여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곁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매주 찾아 가는데도 한 시간 가 까이 곁에 오지도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지요.

보육원에서는 에세이 쓰기, 매주 원장 상담을 요구하고, 행정기관 책임을 핑 계로 5개월이 넘도록 서류진행이 되지 않아 입양신청을 하기도 전에 지쳐갔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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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런데 막상 법원에 서류를 접수하고 나니 한 달 만에 입양허가가 나서 우 리 딸은 만 세 살이 되자마자 우리 가족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보육원 엄마(이곳에서는 모든 여자는 엄마, 모든 남자는 아빠로 지칭합니다.) 들은 모두들 해인이가 저랑 똑 닮았다면서 입양을 축하해주고 헤어짐을 서운해 했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예상외로 너무 빠른 법원의 판결에 당황하면서 아 직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못했었지요. 과거의 파일을 정리하다가 아래의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2017. 4. 20.

해인이와 해성이가 동시에 큰소리로 부른다 “엄마!”, “엄~마~~!” 나도 모르게 해성이를 쳐다보고 “응?” 대답을 한다.

요즘 조잘조잘 말을 잘하는 해인이가 호기심도 많아지고 질문도 많아졌다. 같은 질문을 다섯 번도 넘게 물어본다.

세 번째쯤 똑같이 대답해주면서 짜증이 몰려온다.

더듬더듬 누나 말을 따라하는 해성이가 같은 질문을 한다. 언제 짜증이 났는지 잊어버린다.

가족에 가장 늦게 합류한 해인이가 온지 4개월이 지났고,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자연스럽게 적응해가고 있다.

이렇게 해인이 엄마로 턱없이 부족하게 시작했고, 부딪히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엠펙의 큰아이(연장아)지원 모임과 여러 입양가족들 교류 를 통해 많이 배우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모뿐만 아니라 행동과 성향이 제 어릴 때와 많이 비슷해서 역시 우리는 모녀가 될 운 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3년을 지내고 보니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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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 엄마이고, 제 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랑스러운 제 딸이 되었답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엄마’라는 이름... 많이 울기도 했고, 원망 도 했었지요. 그리고 입양을 통해 스스로 엄마 되기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답니 다. 하지만 돌아보니 해인이와 해성이가 나와 남편을 엄마, 아빠로 끌어당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입양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이 또한 하느님이 준비하고 마련해 놓으신 일이 아니었을까요.

엄마 판박이 해인아~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어 고마워. 사랑해. 많이, 많이 사 랑해. 초등학생이 된 내 사랑 해성아~ 밥 많이 먹고 더 씩씩해지자. 사랑해. 많 이, 많이 사랑해.

입양부모님들, 우리 입양아이들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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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비밀을 알고 있어” 김진영

“엄마 나 비밀을 알고 있어” 중학교 2학년 사춘기의 시작을 알리며 학원도 빠지고 학교 운동장마다 돌아 다니며 축구만 죽자고 하고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우리 가족 엄마, 아빠, 사랑 이가 있는 자리에서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매일 반항기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잠을 못 이루던 나날이었다. 2019년 3월 어느 날 그렇게 우리 가족의 비밀입양은 끝이 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가 비밀입양 가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믿음이는 생후 2 주, 사랑이는 18개월 때 입양을 하였고, 당시 대구의 대형교회에서 전도사로 사 역하던 아빠 덕에 우리는 자동으로 공개입양가정이 되었다. 결혼 후 8년간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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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의 유산을 경험하면서 아픔을 느꼈던 우리 부부가 새로운 생명이 정말 귀하 게 느껴졌던 그때 입양을 결심하였고, 시어머니의 적극적인 응원으로 믿음이를 만나러 동방사회복지회로 가는 날은 17년 전이지만 기억이 생생하다.

3월 초였지만 하늘은 맑고, 바람도 잔잔한 따듯한 날 만난 믿음이를 2주간 돌 보시던 위탁모는 “잠을 잘 자는 아기예요”라며 믿음이를 안겨주시는데 지금까 지 살아왔던 날 중에서 가장 기쁘고 감격스럽고 행복한 날이었다. 날 엄마가 되 게 하고 엄마로서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알게 해준 믿음이는 내 품에서도 새 근새근 곤히 자며 안겨 있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집에 와서도 울지 않는 아가가 너무 신기하고 예쁘게 느껴진 그 날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 는 기분이었다. 육아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좋았던 순간이 많은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 믿음이를 키우면서 생긴 기쁨과 용기로 우리 부부는 둘째도 입 양했다. 돌이 지나서 만난 둘째 사랑이는 연장아여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낯가리 지 않고 잘 먹는 사랑이를 교회 성도님들 또 가족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고 도 와주셔서 날마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자라갔다. 연년생인 믿음이와 잘 놀고 싸 우고 재미있게 지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우리가 남매를 입양했을 때 긍정적인 면도 많이 피드백 받았지만, 편견 어린 시선들도 있었다. 교회의 몇몇 어른들이 입양에 대해 부정적 사실을 이야 기하거나 목회자 가정이 기도를 해서 아기를 낳지 않고 입양을 했다고 하시는 비난도 고스란히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가정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다른 사역자 가정도 남매를 입양하게 되는 큰 기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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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의 공개입양과 동시에 우리는 한국입양홍보회에 가입을 하였고, 대구 입양 가족 모임의 대표이신 진경도 회장님의 권유로 입양가족 자조모임도 참여 하게 되었다. 아기를 키우느라 기쁘기도 했지만, 정신이 없고 바쁜 초보 엄마, 아 빠를 회장님과 선배 입양가족들은 따뜻하게 감싸주셨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도 철없이 사랑을 받기만 한 그 시절이 참 죄송하고 감사하다.

그 후 수년이 흘러 우리는 믿음이 7살, 사랑이 6살에 대구를 떠나 경상북도 영 주라는 소도시에 오게 되었다. 아무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없는 소백산 아래 아 름답고 작은 도시에 오게 되니 우리 아이들이 입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고, 경상북도의 작은 이 도시에서 입양 사실을 먼저 알릴 일도 누가 물어볼 일도 없으니 그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입양이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멀다는 핑계를 대며 대구지역 입양가족 자조모임도 빠지며 그렇게 우리는 점 차 비밀입양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간사하게도 이 상황이 싫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까지 비밀입양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들 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얄팍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은 점점 자라서 추억이 가득한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 교에 입학을 하여 믿음이 중2, 사랑이 중1이 되었다. 사춘기의 시작을 알리며, 결 국 믿음이, 사랑이가 입양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람과 어려움의 시간이 있었지만, 아이들과 우리 부부의 관계는 입양 사실을 알기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다시 2년 반이 흐르고 2021년 3월 아이들은 사랑이 중3, 믿음이 고1이 되었다.

정인이 사건으로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많은 뉴스가 쏟아지는 올해 유난히 마음이 아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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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엄마는 왜 입양 했어?” “정인이 엄마는 어떻게 입양할 수 있었어?” 뉴스의 여러 가지 보도를 보고 상처받은 믿음이, 사랑이는 질문을 했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어떻게 아이들에게 답을 해주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마침 그때 한국입양홍보회에서 반편견입양교육 강사를 모집했다. 교육내용이 알고 싶었고, 아이들에게 해줄 답이 거기에 있을 것 같아서 강사 모집에 신청했 다. 그렇게 진행된 교육내용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고, 기존 강사님들 의 강의내용과 수준은 기대 이상이어서 진작에 반편견입양교육을 받지 못한 것 이 아쉬었다. 코로나로 대면 교육은 아니었지만 알차게 이루어진 줌 교육에 보 내주신 각 학년별 시연 동영상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떨리고 긴 장되는 강의 시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랑이는 같이 강의도 듣고 시연에 들어갈 가족 소개 동영상도 만들어 주었 다. 내 딸이지만 정말 자랑하고 싶고 대견하고 고마웠다. 가족 동영상에 들어갈 사진도 고르고 자막도 써나가는데 생후 2주부터 사진을 찍어준 믿음이와 달리 돌이 지나서부터 사진을 찍어준 사랑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고르던 나에게 사랑이가 “엄마 나도 아기 사진 넣고 싶어”라고 말하더니 방에서 오빠와 비슷한 생후 2주 시기의 아기 사진을 들고 나왔다. 사랑이가 입양될 때 사회복지사 선생 님께 부탁해서 받은 사진들이다. 사랑이가 그 사진들을 들고 나와서 고르는 모 습을 보니 마음이 찡했다.

몇 해 전에 사진 속에 자신을 안고 있는 손은 누구의 손이냐고 궁금해 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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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에게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언젠가는 누구의 손인지 알게 될 날이 올 까?

사랑이와 동영상을 만들며 엄마가 반편견입양교육 강사를 하면 이 동영상을 여러 사람이 보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중3이면 꺼려하거나 반대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사랑이는 놀랍게도 영주시는 물론 자기 학교에서의 반편견입양교육도 찬성이라고 했다. “사랑아, 친구들이 너의 입양 사실을 알게 되는데....” “친구들도 입양이 뭔지 좀 알아야 해 너무 몰라” 사랑이는 친구들이 입양에 대해 무식하다며 알려줘야 한다고 해서 오히려 물어본 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입양이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라 는 자신의 생각도 말했다.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고등학생의 반항적인 포스를 온몸으로 내뿜고 다니는 아들 믿음이. 그날 저녁 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한 믿음이에게 조심스레 엄마의 반편견입 양교육 강사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의견을 물으니 “좋은 일이면 하세요.”하고 어렵지 않게 답변을 해준다. ‘이렇게 선선하게 대답을 해주다니’ 내친김에 고1 아들에게 가족 동영상을 보여주며 네 사진을 써도 되겠냐고 물 어보니 다른 장소에서는 되지만 본인 학교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래도 입 양에 대해 좋은 일이라고 말해준 아들이 고마웠고 기특했다. 반편견입양교육 강 사 준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준 딸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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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는 강의를 같이 들으면서 입양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나의 시연을 응 원했다. 물론 낳아주신 분을 보고 싶다고 말할 때도 있고, 입양에 대해 말하기 싫어할 때도 있지만, 입양이 영구히 가족이 되어 같이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남 매는 정확히 알고 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간을 보내며 사랑이, 믿음이는 다른 아이들이 있는 집 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호르몬이 넘치는 못생긴 오리의 시기를 지나가는 중이 고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예측하지 못하는 사건이 우리 앞에 있을 것이다. 그래 도 우리 가족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기쁘고, 슬프고, 힘든 모든 시간을 함께 할 것이고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입양을 더 많이 자유 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영주에서 반편견입양교육의 필요성을 홍보하며 2번의 시연과 3번의 참관 수 업을 마친 나는 이제 믿음이, 사랑이, 항상 지지해주는 남편의 응원을 받으며 반 편견입양교육 강사로 힘 있게 한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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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함께 있을 거야!! 이은주

나이 38살에 결혼하기로 했다. 좀 늦어진 결혼. 결혼 후 6개월이 지나서도 아 기가 생기지 않아서 의사의 권고로 산부인과를 다녔다. 2011년부터 2016년 1월 까지 시험관아기시술을 시도했다. 첫 번째 시술에서 임신 판정을 받아서 너무 기뻤으나, 그 기쁨은 일주일이 지나 염려가 되었다가, 결국 자연스럽게 유산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 시험관아기시술의 결과는 점점 좋지 않았지만, 아기를 갖 고 싶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다.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2016년에 입양을 결심하고,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남편은 바로 대답을 주기보 다는 좀 생각해 보자고 했다. 바로 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우리 나이 도 있는데 빨리빨리 진행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졌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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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나 자신도 입양에 대하여 근 1년 정도 고민했었다.

“우리 입양하자.” 드디어 남편도 동의했다. 기다리던 남편의 동의에 난 뛸 듯 이 기뻐질 줄만 알았다. 하지만 예상 밖의 느낌이었다. 분명히 들었다. 내 마음이 떨어지는 소리를. ‘쿵!!!’ 나는 기쁘지 않았다. 큰일 났다. 정말 입양이 현실이 된 다고 생각하니, 기쁨보다는 걱정이 크게 다가왔다. 내가 늦은 나이에 정말 아이 를 잘 기를 수 있을까? 출산 경험 없이 입양 자녀를 잘 기를 수 있을까? 육아는 마라톤이라던데, 끝까지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걱정거리 하나, 내가 정말 걱정하고 자신감이 없었던 것은 ‘입양’ 자체가 아니었다. 입양이어 서 고민되었던 것이 아니고 ‘육아’가 자신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육아는 단기간 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남편이 잘 도와주더라도 육아의 주체자는 나라는 것. 그 큰 책임감을 과연 즐기면서 기쁨으로 지속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걱정거리 두울, 출산이 아닌 입양으로 얻는 자녀에게 같은 마음으로 기를 수 있을까? 고민하 던 중 어느 잡지 속 글을 보고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 어릴 적 프랑스로 입 양된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가업인 포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프랑스 입양 부 모에게는 친생자녀도 있었지만, 입양 자녀에게 가업을 물려준 것이다. 기자가 물 었다. 어떻게 입양 자녀에게 가업을 물려줄 수 있었는지. “가문은 혈통을 물려주 는 것이 아니고 가문의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다.”라고 프랑스 부모는 대답했다.

걱정거리 세엣, 입양하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일까? 나와 남편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나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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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사랑함으로 결혼을 선택하고 가족이 되었다. 하지 만, 입양 자녀도 사랑함으로 입양하여 가족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선 택은 우리의 선택이었지, 입양 자녀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아주 큰 마음의 짐이었다. 이 걱정은 오랫동안 고민이 되었다. 쉽게 결론이 나지 도 않았다. 그냥 이 부분은 무시하고 입양 절차를 밟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던 중 어느 날이었다. 그날이 너무도 생생하다. 주말이었고, 나는 다림질을 하면서 TV를 켰다. ‘명견만리’... 탤런트 신애라씨가 출연하여 강의를 하고 있었다. 순간 입양에 대하여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고민에 종 지부를 찍는 사례를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거주하시는 어느 한인 가정. 일곱 자 녀를 한국에서 입양하여 기르고 계셨다. 현재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 기 전 둘째 딸이 물었단다. 아빠는 왜 우리를 입양하셨나요? 아버지는 ‘내가 입 양한다고 해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너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 까.’ 바로 이거였다. 부모라는 울타리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나의 미래의 입양 자녀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는 거였다. 남편과 나를 울타리 삼아 우리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은 확신에 찼고 이 모든 고민 에서 헤쳐 나올 수 있었다.

또 다른 아픔, 기다리던 딸아이와 선을 보고 입양을 진행하기로 했다. 법원에 서류를 제출 하고 기다리는 동안 두세 번을 서울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만났다. 백일 기념 옷 을 사고 사진을 찍었다. 근 5~6개월을 기다려야 했지만, 딸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쁨과 설렘으로 내 마음은 꽉 찼다. 그러던 7월 어느 날,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딸아이가요…….” 끝나지 않은 문장이지만, 홀트 소장님의 목소리 뉘앙스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왜요? 많이 다쳤나요?”, “아니요.” 다치지 않았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으나, 이후 소장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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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입양을 진행하던 딸아이를 생모가 데려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입양을 취소하고. 순간 하늘이 무너졌다. 심장은 급 하게 뛰고 얼굴을 붉어지며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크고 강한 소리로 “안돼요!!!!!”를 외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아 기를 생각하면 너무나 잘된 일이기 때문이다.

서연이 생일파티 아침부터 서연이는 신났다. 2021년 7월 6일, 우리 딸 서연이의 세 번째 생일파 티!! 서연이 생일을 축하하러 큰고모와 큰오빠가 오셨다. 서연이는 주황색 원피 스를 입고, 분홍색 뽀로로 파티 모자를 썼다. 너무 너무 즐거워 생일 케이크 앞 에서도 어쩔 줄 몰라 한다. ‘하하 호호’ 제대로 신났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서연이,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 는 듯이 촛불을 껐다. 기념사진 촬영!! ‘웃어야지, 서연아!’라는 말에 환한 미소 천사로 변신. 그리고 방방이로 출발!! 서연이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이 거 보세요!!”, “엄마, 아빠, 이거 보세요!!” 힘차게 외친다. 어느새 정확해진 발음 으로 동요를 부르고 리듬에 맞춰 율동한다. 방방이 위에서 쉬지 않고 점프를 하 며 사랑의 윙크도 날린다.

우리 서연이 참 많이 컸구나!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난 3년간 서연이와 함께 했 던 시간이 지나간다.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자율성이 강해도 너무 강한 우리 서연이, 자연을 좋아해서 길에 떨어진 열매와 나뭇잎은 보이는 대로 줍고, 비 온 뒤 고인 물에서 첨벙첨벙 물놀이하고, 움직임이 빨라서 놀이터에서 더욱 빛나고, 물감 놀이를 시작하면 거침없이 손으로 색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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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날, 겨울 코트 입고 씩씩하게 어린이집 가고, 아빠 구두 신고 아빠 되었다며 신나게 현관문을 나서고, 엄마 하이힐 신고 똑똑똑 구두 소리에 즐거워하고, 서연이는 엄마라고 설거지하며 주방을 물바다로 만들고, 싱크대 열어젖혀 냄비와 그릇 꺼내 맛있게 저녁 한 상 차려놓고, 음악가가 되어 튀김 젓가락 드럼 스틱 삼아 신나게 ‘두구두구두구’ 연주하고, 7개월에 기기 시작하더니, 금세 의자 짚고 일어나 옆으로 게걸음을 걷더니만 뭐가 급한 지 9개월에 걷고, 얼마 안 되어 미끄럼도 혼자 타고, 엄마 손 뿌리치고 계단 오르기 도전하고, 처음 이유식 하던 날부터 스스로 먹겠다며 숟가락 달라고 조르고, 치카치카는 어떻게 해줘야 하나 걱정했는데 이는 너무도 천천히 나서 돌이 지나도록 여전히 앞니 몇 개로, 엄마 걱정 덜어주고,

오늘도 하원하는 서연이는 하하 호호 즐겁다. 엄마를 반갑게 맞이하며 만나 자마자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는 하늘이 좋아.” “나는 나무도 좋아.” “나는 열매도 좋아해.” “나는 비행기도 좋아해.” “나는 …….” “엄마!! 엄마도 나처럼 길게 말해봐.” “그럴까?” 하하하, 오늘도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서연이와 함께 행복한 하루를 보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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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입양아 맞습니다. 남은총

저는 현재 22살 성인입양인입니다. 저희 가족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 와 2살 터울의 여동생과 5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습니다. 저희 3남매는 다 입양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서로 장난기가 많아서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도 아버지와도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동생들 또한 저에게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이야기까지 나누기도 합니다.

어릴 때 저희 3남매가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너무 싸워서 저희가 살던 동네에 들어서기 전에 차에서 3남매 모두 강제로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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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내리게 한 다음 진짜로 출발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생들은 떠나가 라 울기 시작했고, 해가 진 후여서 서로 안은 채로 차가 지나간 방향으로 인도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내릴 때부터 한 번도 울지 않고 동생들에게 “엄마는 우리 절대로 안 버려, 진짜 엄마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우리를 절대 버릴 수 없어. 그니까 울 필요 없어”라고 말을 해주며 걸었고, 저희가 내린 곳에서 거 리가 조금 있던 샛길 코너에서 어머니는 차를 세워 두고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 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발견하기 전에 막내가 어머니를 가장 먼저 발견했고, 저 희는 다시 어머니의 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차에 타면서 저는 동생들에게 “봐, 엄마는 우리 절대 안 버려. 내가 말했지?”라고 하며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희 3남매는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우리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양아들의 모임의 부재가 미친 영향에 대해, 우리의 입양사실을 모르는 친구들에게 입양 모임을 갈 때 어떻게 말하는지 등 입양된 친구들과도 나누는 이야기지만 가족이기에 더 편안하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낳아준 부모가 부자여서 너 보고 이제 자신들과 같이 살자고 하면 넌 어떻게 할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날에는 이것저것 사는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셋의 결론은 똑같았습니다. 그 어떤 좋은 것들이라도 지금의 가족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가족과 계속 함께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올 해 성인이 된 여동생과는 낳아준 부모를 찾을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저는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여유가 된다면 언제든 찾고 싶지만 굳이? 라는 생각이 들다 가도 생김새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서 보고 싶긴 하지만, 만나 는 건 아직 부담스럽다”라고 말했더니, 여동생도 공감하며 “입양이 안 되었다면 이런 느낌이 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라고 웃으며 말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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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란 저희 3남매는 몇 달 전, 어머니가 여신 편의점을 돌아가면서 일 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편의점 일을 도우면서 기분 상할 수 있는 일이 생기거 나 일반 손님들과 다르게 더 힘든 요구를 하시는 손님들이 가게에 왔을 때들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동 생들은 서로 일을 미루다가 다투기도 했지만 지금은 각자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함께 서로를 도우며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약속이 생겨 일을 하 지 못할 때는 서로의 시간을 나누어 일하기도 하고, 서로 약속이 겹치지 않게 잡아서 편의점을 한 사람에게 전가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선 안에 서 서로를 배려하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원래 무뚝뚝하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장난을 좋아하셔서 저 희와 자주 놀아주셨습니다. 표현을 안 하셔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줄 알았 었던, 어릴 때인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학교가 살던 아파트 에서 멀지 않아 학기 초에는 어머니가 베란다에서 등교하는 저를 지켜보는 것 을 저는 보호받는 기분과 어머니와 함께 등교하는 기분이 들어 즐겼습니다. 등 교하는 것이 익숙해지고 어머니도 베란다에서 저를 보시던 것이 드물어진 어느 날, 아무도 저를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문득 집 베란다를 보았는데 런닝 차림의 아버지가 저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언제나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저에게 관심이 딱히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저를 얼마나 사랑하 고 계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아버지가 하지 못하는 애정표현까지 제 가 아버지에게 더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애정표현을 하면 아버지는 귀찮다고 말 씀하시면서 입은 찢어질 듯이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버지가 무릎 뼈를 다쳐 입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원 침상 에서 움직이지 못 한 채로 계십니다. 병원이 집과 가까워 편의점 일을 도와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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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이나 끝난 후에 들려서 아버지가 무료하시지 않도록 수시로 들리고 있습 니다. 지금 코로나라서 병문안 인원이 1인으로 제한이 되어 어머니와 저희가 서 로 교대하며 방문하고 있습니다. 근데 아버지가 저에게 흘려가며 “내가 여기서 무슨 낙이 있겠노, 그냥 집 가서 느그들 보는 게 낙이지(내가 여기에 어떤 즐거 움이 있겠어, 그냥 집 가서 너희들 보는 게 즐거움이지)”라고 하셨는데 너무 진 심이 느껴지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제가 들렸을 때는 제 얼굴을 보더니 제 어릴 때 이야기를 해주었고, 손도 계속 잡고 얼굴 봐서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마취가 덜 깬 것 같았지만 애정표현을 받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입양아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한 번도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입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저는 지금의 부모님과 지금의 동생들과 지금의 반려동물, 지금 제 곁에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저는 저여서 정말 행복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입양기관에서 주최하는 활동들을 하면서 겪은 많은 경험들과 그 과정을 통해 친해진 같은 입양 친구들은 입양아로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양아로 살아가는 것은 입양아 자신이 입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는 입 양 사실을 사회가 알게 되었을 때 그 사회의 시선이 어떤지에 대해 그 관념이 생 기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제 동네 친구들이 입양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부모님 근처 에 입양가족이 많았기에 입양 사실을 주위에 말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 았습니다. 그렇지만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족의 형태에 대해 배우게 되면서 저 의 입양 사실을 알고 있던 몇몇 친구들이 제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저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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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실을 말하고 다녔고, 입양가족에 대해 고아, 가짜 가족이라고만 알고 있었 던 나이였고, 학교에서 가르쳐주었던 것보다 드라마로 배운 것이 전부였기 때문 에 그런 악의적인 이야기들이 저의 꼬리표가 되었습니다. 물론 상처가 되었지만 저를 태어나게 해준 분들이 저를 키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각자만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라서 제가 버림을 받았다기보다는 보다 나 은 가정을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가족을 만났다는 것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꼬리표들이 나의 탓이 아닌 그 들의 무지라고 생각되어서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진 상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될 때마다 입양이란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님을 그저 방법이 달랐을 뿐 그냥 가족 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가 알려주었을 때 많은 분들이 잘못된 입양 지식 으로 입양아를 바라보고 편견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는 반응이었습니 다. 그들이 잘못된 입양 정보를 알게 된 것들은 대부분 아침 드라마에서 나오는 입양아의 숨겨진 비밀이나 가정불화의 원인이 입양아라서였던 반전 스토리의 소재를 단순히 드라마적 요소가 아닌 입양아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 습니다.

부정적인 시선을 받을 때 같은 시선을 받더라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 입양 된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입양아를 상처 입히는 시선과 편견들이 입양이라는 사실이 정말 부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무지 때문임 을 입양아들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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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내 자존감의 근원 정정조

저는 입양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관련도 없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러던 제가 입양을 실체적으로 처음 접한 사건은 제 청년시절 교회 주일학교 여 름캠프 교사 강습회에 있었던 어느 강사 목사님의 발언이었습니다. “우린 입양 가정입니다. 우리는 한 아이는 낳고, 한 아이는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친구 목사 님들도 한 아이는 낳고, 한 아이는 입양해서 이렇게 모두 잘 자라고 있습니다.”

입양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저에겐 입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본인이 입양가정임을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그 목사님의 태도에 약 간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가진 입양에 대한 생각은 입양은 숨겨 야 하고, 누군가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그런 일로 생각했는데 그런 저의 편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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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에 한발 더 나아가 “나도 결혼하면 하나는 낳고, 한 아이는 입양하겠다.” 다짐하는 순간이 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번의 에피소드로 지나간 그날의 사건은 몇 년 후 아내를 만나 교 제를 하고 아내와 결혼 약속을 하면서 제가 그때의 감동을 이야기했습니다. ‘아 이는 둘이나 셋이 좋은데 하나는 낳고, 하나는 입양하는 순서로 했으면 좋겠다. 아내는 빙그레 웃으며 ‘그러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그러나 본인의 어릴 적 산부 인과 치료가 늦어진 상황이 있어서 우리가 난임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는데 난 그때 아내의 어떤 모습도 예뻐 보이기만 해서 그 말은 그냥 흘려듣고 말았습니다.

행복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결혼생활, 신혼의 달콤함도 아이의 빈자리는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린 결혼 8년이 되도록 자녀가 없었습 니다. 아이가 없는 8년이란 시간은 정말 길고도 힘들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새벽 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고, 간절히 아이를 원하는 마음으로 교회 집회를 빠 지지 않고 참여하면 할수록 아이를 원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때 저는 결혼 전부터 성남 천사원에 자원봉사를 했었습니다, 결혼하고도 주말이면 늘 방문하여 아이들과 놀아주고 방학이면 아이들 데리고 함께 여행을 다니곤 하였습니다. 원장님이 저를 신뢰하셔서 방학엔 아이들을 단체로 저희 집 에 보내 주셔서, 함께 먹고 자며 여행도 하는 그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천사 원 아이 중 저와 아내가 귀여워하는 여자아이를 원에서 집에 며칠간 보내주겠 다 함께 지내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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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우리 집 왔을 때 우리는 그 꼬마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하고, 다음 날 공원에서 여느 가정처럼 함께 놀기도 하면서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이가 있다는 것이 이런 마음이구나, 그러나 조금 더 함께 하고픈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아이를 다시 원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다시 시설을 방문했을 때, 아이의 생각지 못한 행동에 너무 놀라 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 아이에게 선물한 인형과 그토록 좋아했던 모든 선물 꾸러미를 우리 차에 다시 놓고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도 우린 아이가 가지 고 가도록 설득했고, 마지못해 아이는 짐 가방을 가지고 내리더니 엉엉 울면서 우리 차에 선물 보따리를 던지는 겁니다. 아마 모든 아이들과 그 선물을 공유하 는 게 너무 싫어서 자기 혼자만의 공간과 혼자만의 장난감, 혼자만의 부모가 필 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그 사건 후 우리 부부는 20여 명의 다른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그 아이가 너무 예뻤지만 그 아이만 편애할 수는 없었습니다. 천사원 총무님은 그 아이 입 양을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린 아직 준비가 안 된 탓인지 선 뜻 입양 할 용기 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만 보다가, 시설에서 입양을 간 아이를 찾아보기 힘 든 그 시기에 그 아이는 어느 가정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입양 갔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부부는 왠지 모를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득해, 혹 어떤 말이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봐 서로 뭐라 말은 못하고 우리의 결단 없음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사건 이후 우리에게 자녀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 는지도 모릅니다. 우린 결혼하고 신혼 때부터 늘 새벽 기도를 통해 “하나님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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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녀를 주셔야 우리가 둘째를 입양합니다. 빨리 자녀를 주세요.” 그렇게 기 도하며 8년이란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 기도는 우리의 일상적 생활이 되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면서... 자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오래도록 기도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첫아이는 낳고, 둘째를 입양해야 한다는 공식 에 늘 집착했습니다.

첫아이를 낳고 둘째를 입양, 그렇게 해야만 제가 아이들을 편애하지 않고 잘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만약 먼저 입양하고 친생 자녀가 생긴다면? 그 럼 사랑은 내리사랑인데 작은 아이에게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큰 아이가 소외 감 느끼지 않을까? 이런 사고가 제 안에 가득해 쉽사리 입양을 결심하지 못하 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입양도 하나님이 자녀를 주시는 한 방법이라는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뭘 주저하고 있지? 어차피 우리는 입양을 예정하고 있었잖아” 하고 아내에게 말하니, 아내도 제게서 그 말이 나오기를 그토록 기다렸다는 듯, 너무 기뻐하며 입양에 동의해 우리는 일사천리로 입양 상담을 하고 입양 신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8년이란 긴 세월의 기다림을 뒤로하고,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서류 와 면담, 그리고 가정방문까지 모두 마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어느 날 홀트아 동복지회 성남사무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입양대상 아이가 춘천에 있는데 함 께 가 보겠냐’ 물어서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 가겠습니다.’ 말씀 드리고 부부가 함께 휴가를 내고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는 장인, 장모님도 모시고 설레 는 마음으로 춘천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장소에 가서 초조한 기다림...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상황이 눈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사무실 문이 덜컥 열리고 인상 좋은 아주머니의 품에 안긴 천사가 눈에 보입니다. 너무 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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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저와 아내의 입에서 말은 나오지 않고 부르르 떨리는 느낌으로 몸이 먼저 반 응합니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감동 또 감동입니다. 그리고 말 대신 우리 부부의 눈에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고입 니다.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뭐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긴 시간의 기다림, 그 애태움을 한 번에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혼자 속으로 말해봅니다. “네가 이토 록 우리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게 한 그 천사니? 널 만나려고 그 많은 시간을 우 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 했구나”

처음 보는 아이인데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티비에서 보던 이산가족 상봉의 그 장면처럼 정말 오랜 세월의 기다림 속,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냥 기쁘기만 합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이 미 그 아이에게 빠져 계십니다. 할머니는 아이를 이리저리 보시며 뭐라고? 뭐라 고? 하시고, 아이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시는데 그마저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날 저는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아빠가 되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옹알이하는 아이를 안고 아이에게 엄마, 아빠 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이 처음이라 너무 어색하고 쑥스럽기도 했지만 전혀 싫지 않고, 오히려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비로 소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부모가 되었고, 우리는 이제 가족이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8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 부부는 친구들 자녀 의 돌잔치에 간 경험이 없습니다.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봉투만 보 냈습니다. 아내가 불편해 할까 봐, 그리고 그 가정이 부럽기도 하고, 만나면 우리 에게 돌아오는 질문이 불편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가급적 피했습니다. 교회 행 사에서 가족이 함께 하는 상황이면 우리만 가족이 항상 둘이었습니다. 자꾸 다 른 가족들과 비교가 되어 교회에서 가족행사 하는 모임이 있으면 우리는 왠지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어 슬그머니 빠지곤 했습니다. 우린 아직 완전한 가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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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란 생각이 늘 스스로를 위축되게 했습니다. 교회 어버이날 행사에 주일학 교 교사인 저는 학생들과 교회 입구에 서서 교회 오시는 부모님들께 어버이 은 혜를 부르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 느 해 한 아이가 “선생님도 꽃 다세요” 하며 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줍니다. 그러나 저는 그 꽃을 그 아이가 보고 있을 때까지만 달았습니다. 아직은 제가 어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서, 그리고 누군가 제 모습을 본다면 ‘자녀도 없 는 사람이 어버이날 카네이션 달았네’ 할까 봐...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누가 우리 가정에 손가락질 하지도 않고, 누가 우리 가정을 비난하거나 흉보거나 뒷 담화 한 것도 아닌데, 우린 늘 그렇게 위축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당당한 아빠입니다. 제 아내는 당당한 엄마입니다. 저는 지금도 제 아내를 수아 엄마로 부르는 게 제일 좋습니다. 저는 지금도 누가 수아 아빠로 불러주는 게 제일 좋습니다. 제 활동하는 모든 커뮤니티 닉네임은 수아를 만난 순간부터 수아 아빠로 바 뀌었습니다. 모든 집안 행사도 당당하게 수아를 대동하고 참석합니다. 수아를 앞세운 저와 수아 엄마의 어깨는 하늘보다 더 높게 올라가 있습니다. 수아가 우리 가정을 그렇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수아가 우리를 그렇게 자존감 가득한 엄마, 아빠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수아와 세상 모든 것 다 얻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3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내는 쌍둥이를 잉태 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에 이모님께 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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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전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이모님은 그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기다릴 걸 하는 말씀을 하셔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 하시는구나. 나 중에 쌍둥이 낳고 나면 과연 내 마음도 그렇게 변할까? 나도 먼저 입양하고 나중 에 아이를 낳으면 내리사랑으로 그 아이에게 더 정이 갈까 봐 걱정했잖아.”

그렇게 쌍둥이를 낳아서 정신없이 키우던 어느 해 수아와 쌍둥이 동생이 모 두 한 침대에 누워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잠자 는 아이들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 머리를 뭔가가 쿵 치 면서 하는 말 “뭐가 다르니?” 그 질문은 수아와 쌍둥이 동생 뭐가 다르냐는 질 문인데 순간 “이게 무슨 말일까?”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 안에 가지고 있던 걱정 뭐가 다르니? 모두가 내 소중한 자녀입니다. 수아는 귀한 큰 딸, 쌍둥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내 딸들입니다. 그제야 저 는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오늘도 여지없이 아침은 소란합니다. 세 딸이 등교를 준비하는 그 시간은 항상 분주합니다. 옷, 머리끈, 양말, 학교 준비물, 그렇게 분주한 아이들 사이를 저는 비집고 다 니며 양팔과 함께 큰 가슴을 벌립니다. 그렇게 오늘도 한 명, 한 명씩 제 품에 안 깁니다. “사랑해~~” 하고 안아줍니다. 저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얘들아 고마워 내 딸이 되어 주어서...

저는 오늘도 세상에 나가서 늘 그런 것처럼 당당하게 살아갈 겁니다. 제 뒤엔 제 자존감의 근원 사랑하는 수아 엄마와 수아, 하늘, 나라가 있기에... 오늘도 저는 외칩니다. 세상아 덤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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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에게 권정임

은희야,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구나. 어리고 예쁘 장한 생모의 품, 이불 속에 돌돌 말려 새하얀 피부에 눈이 방실방실 커서 울지 도 않고 순했던 여자아이. 은희였단다. 사실 그 때 이 엄마는 조산으로 아주 작 은 미숙아를 낳았었고, 또 한달 보름 만에 그 아이를 잃어 넓고 깊은 슬픔의 바 다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었단다.

원망스럽게도 시간은 흘러갔고 한 달이 지나버려 떠나버린 아이의 사망신고 를 하였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어린이재단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 게 되었단다. 갑자기 부모의 사정으로 일반가정에서 위탁이 필요한 아이가 발생 했고, 대기하고 있던 가정 중에 우리가 선택되어 위탁이 가능한지 여부를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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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얘기하셨단다.

헤어지는 걸 예감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가 뱃속에 품었던 그 아이가 떠나기 전날 병원 인큐베이터에서 어째서인지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었고, 그것 을 지켜보던 엄마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추지 못한 채 꺼이꺼이 울며 꼭 “다 시 와달라고 꼭 다시 만나자”고 마음에 새겼었는데 그 때 혹시 누군가가 들어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단다. 몇 년 전 위탁가정을 하기 위해 위탁부모자격을 받아두긴 했지만, 그것이 이런 시기에 이렇게 우리 가정과 연결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고, 지금 여기까지 와서 뒤돌아 생각하면 우리는 무언가 운 명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차분하고 내성적이라 한 번도 내 눈을 쳐다보며 얘기를 못하던 은희의 생모. 그 어린 엄마는 갑작스런 임신과 출산으로 아직은 가정에서 환영받을 수가 없 었고, 너의 외할머니께서도 홀로 가계를 꾸리시느라 너를 돌보실 형편이 되지 않으셨던 것 같아. 그래도 그 여린 어깨로 너를 키워보려고 대학을 가서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 꼭 다시 데려가겠다고 말했던 생모를 이 엄마는 너무나 감사 하게 생각한단다. 나는 지키지 못했던 아이를 그 어린 생모는 지켜내주었던 것 만으로도.

백일 정도 된 은희가 우리 집에 온 첫 날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 단다. 내 생애 그렇게 당황스럽고 설레고 우왕좌왕 했던 하루가 또 있을까 싶기 도 해. 아이를 안 키워 본 것도 아닌데 준비가 안돼서 그런지 모든 것이 서툴렀 고, 그래도 울지도 않고 정말 분유만 먹으면 예닐곱 시간을 내리 꿀~잠자던 너 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단 다. 거짓말이 아니고 아빠랑 저녁을 먹고 치울 때까지도 인기척이 없어서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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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것이 아닐까 놀라서 같이 방문을 열어보기도 했단다.

그렇게 하루하루 너를 바라보며 너는 나를 닮아가고, 나는 너의 웃음을 닮아 갔단다. 넓고 깊었던 슬픔의 바다 속에서 나를 꺼내준 것은 바로 은희, 너였단 다. 그런 나를 너는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너의 보드라운 살결을 내 얼굴에 부빌 때마다 너무나도 위로 받았고, 너를 품에 꼭 안고 감싸면 다른 약이 필요 없이 치유가 되는 것을 나는 몸소 경험했단다. 은희야, 우리가 인간으로 이 세상 에 태어나 어떻게 이렇게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을까.

물론 언젠가는 생모에게 돌아가야 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너를 내 딸처럼 키 울 수밖에 없었고, 그 방법 외에는 아이를 키우는 법을 따로 몰랐다는 것이 맞 는 것 같다. 그저 은희가 행복하기를 바랐다고 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상 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네가 잘 회복되어 질 수 있는 마 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단다.

엄마는 동생 준희를 출산하고 위탁기간이 끝나가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좀 복잡했단다. 셋을 키우는 것이 몸도 지쳤던 것 같고, 또 은희와 헤어짐을 준비하 는 것에 마음도 힘이 들었단다.

기억나니? 너와 헤어지는 연습해주려고 ‘우리가 이제 헤어지게 될 것이고, 은 희는 생모와 같이 살게 될 거야. 그리고 은희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 어’라고 몇 번씩 얘기 나눴던 것. 그 대화의 끝에 언제나 눈물을 짓던 너. 엄마는 그때는 그 사실을 네가 알아야 조금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서 했던 것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편으로 너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헤어짐의 슬픔은 연습된다고 해서 무뎌지는 것이 아닐 건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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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는 조금 더 위탁을 연장할 수 없는지 얘기했었지만 은희가 이미 많이 자 랐고, 더 이상 생모와 떨어져 지냈다가는 나중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어렵지 않 을까 엄마는 걱정되었단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은희만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결정하려다 보니 사실 다른 것들을 잘 살펴보지 못했던 것 같아. 정작 예쁜 너 를 키워줄 생모는 아직 준비를 다 못했던 것이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그때도 너 를 포기하지 않았단다. 다만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었겠지.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네가 생모와 있었던 시간과 그룹홈에서 지냈던 얘 기들을 엄마가 물어보면 언제나 즐거운 추억이 가득하다는 거야. 물론 이 엄마 가 보고 싶어서 많이 울었다고, 엄마한테 데려가 달라고 얘기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어. 만약 그렇지 않고 행복하기만 했다면 조금 배신감이 들었을 것 같 기도 해^^

은희야, 사실은 원가정으로 돌아가면서 헤어지던 날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그 여자아이가 엄마의 가슴속에서 단 하루도 떠난 적이 없단다. 아마 네가 자라서 성인이 되어 혹여 시집가 예쁜 손녀를 안겨주는 날이 오더라도 엄마는 얼굴이 터질 듯 소리치던 그 조그마한 여자 아이를 잊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아. 며칠 전 에 너 역시도 그 날의 기억을 말하며 눈물짓는 것을 보면 너에게도 씻을 수 없 는 아픔이 되어있으리라 짐작된단다. 미안하다 딸아... 미안하다 엄마가...

그래도 엄마는 이렇게 네 곁에서 너와 함께 너를 아프게 했던 상처를 만져주 고, 씻어주고, 안아주고, 보듬어 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나를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는 나에게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고 사랑을 주니 너 는 도대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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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을 결정하고 나서 너를 데리러 간 그룹홈에서 처음 만났던 날을 너도 기 억하고 있지? 엄마가 왔다는 소식에 유치원에서 돌아와 거실에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머뭇거리다가 이름을 부르자 와락 달려와 안겼었지. 스스로 손도 씻 고 알아서 척척 하는 모습이 놀랍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짠했단다. 같이 가는 차 안에서 그동안 쪽잠 잤던 아이 마냥 내내 밀린 잠을 자던 너. 아마 도 긴 여행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었겠지.

은희야, 엄마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너를 입양하기로 한 것은 우리 모두의 결 정이었다고. 너의 생모도 은희, 너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얘기해 주었어.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입양을 택해주었단다.

그리고, 엄마는 전에 네가 그룹홈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어. 아빠도 마찬가지였고. 너를 데려오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단다. 엄마는 사실 엄마의 행복을 위해서 너 의 입양을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5살의 꼬맹이 은희도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해주었단다. ^^ 물론 지 금도 그렇게 얘기하지만... 시집도 안가고 평생 같이 살겠다고 하는 것을 믿을까 말까 고민스럽긴 하구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예쁜 내 공주, 은희야! 그동안 우리가 함께 열심히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우리 앞에는 수많은 이야기 가 펼쳐지겠지. 이제는 다시 잡은 그 손을 놓지 않고 그 길을 같이 나아가보자꾸 나. 사랑한다.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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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율아 장하영

“만약에 너희 집이 입양하게 된다면, 넌 대학도 가지 말고 낮에는 애만 보다 가 밤에는 야간 알바하면서 그 애 네가 키워” “넌 도대체 철이 든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아니야. 개척교회 목회자 집에 서 입양? 너 돈이 그렇게 많아?” “입양 그거 쉬운 거 아니야. 괜히 어린 마음에 함부로 생각해서 온 가족들 힘 들게 하지마. 어린 마음으로 덤비는 건 거기서 멈춰”

보기만 해도 자극적이고, 눈살 찌푸려지는 위의 세 문장은 안타깝게도 내가 입양 기도를 한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 TOP3 이다. 가 족, 친척, 지인, 심지어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저런 말은 숱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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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면서 입양기도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들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들으면서 기도를 계속했는지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왜 이렇게까지 입양기도를 해야 하지. 됐어. 안하고 말지!’라고 생각해서 홧김에 입양기도를 잠깐씩 멈출 때가 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때마다 우리 집에 누군가가 아이를 맡기는 꿈을 꾼다거나, 우리가 입양을 결 정하는 꿈을 꾸거나 우리 집에 이미 입양된 아이가 와 있는 꿈을 꾸었다. 그래 서 다시 기도를 시작하면 욕 한 바가지였던 것들이 욕 세 바가지가 되어서 나에 게 돌아왔고, 화가 난 내가 기도를 다시 멈추면 그 때마다 희한하게도 완강했던 부모님의 마음이 돌려져서 입양을 결심하시곤 했다. 그렇게 기도해온 시간이 6 년. 드디어 나에게도 동생이 생겼다.

2016년 9월 9일 금요일. 그 날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왜냐하면 그 날 처 음으로 하율이를 만난 날이다. 하율이는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하얗고, 작았다. 아기를 본 순간 우리 가족은 마음에서 기쁨이 차오르는 한편, 너무 벅차 서 눈물이 나기까지 했다. 하율이는 8개월 된 아기였고, 우리를 처음 봤을 때 심 하게 긴장을 한 상태였다. 그 조그마한 아기가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우리는 아 가를 보는 시간동안 아기의 소리도, 어떤 미세한 신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기는 긴장해서 손을 펼 줄 몰랐고, 미간은 한껏 성나 있었고, 꽉 다물어진 입술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영특한 아기는 울지 않고, 우리를 돌아가면서 관찰하고, 살피기까지 했다. 아기를 보기 직전까지도 입양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엄마, 아빠가 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입양을 굳이 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어 요.”라고 했던 오빠는 아기를 보고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열심히 살아야 되 는 이유가 하나 생겼다. 예쁘다”라며 아기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율앓이를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아기 사진이 먼저 왔을 때부터 이미 하율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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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시작되었었다. 그렇게 나는 19살에 18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 생겼다.

하율이는 생각보다 빨리 우리 품에 안겼다. 2016년 6월에 입양 최종 서류를 넣 었고, 9월 23일에 위탁으로 왔고, 10월 25일에 입양 확정이 되어서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완전한 가족이 되었다. 같은 지역모임 입양가족 분들도 입양 가족들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라며 아이가 정말 빨리 온 것이라고 말해주셨다.

하율이는 오자마자 온 가족, 친척, 교회 사람들, 지인들 모든 사람들에게 사 랑을 받았고, 가족과 생긴 것도 닮았다며 모두 신기해했다. 아직까지도 입양가 족 중에서 이렇게 똑같이 생긴 가족은 우리 가족이라며 놀라워하는 분들도 있 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생김새부터 말투, 표정, 생활습 관 등등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부분까지 닮아가고 있다.

서로 닮아가서인지 하율이와 살면서 우리가 입양가족이라고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다만, 우리가 매달 챙겨가는 안성·평택지역모임에 갈 때(요즘은 사회 적 거리두기로 인해 줌 모임 진행)와 누군가 입양을 물어볼 때, 그리고 우리 가 족을 보면서 “어떻게 입양할 생각을 하셨어요. 정말 좋은 일 하시네요. 대단 하 세요”라고 말할 때 우리가 입양가족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지막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굉장히 불편해진다. 사람 들은 아직까지도 입양을 대단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선행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다시 말씀 드린다. “감사해요. 가족이 되는 일이 대단 한 일은 맞죠. 그런데 선행은 아니에요. 가족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다른 한 가지 방법으로 왔을 뿐 인거지 우리는 다 가족이에요.” 겉으로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고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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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생각 중 하나는 ‘하율이가 커서 이런 말을 듣고 이해하는 날이 온다 면 어떡하지’, ‘하율이가 다른 사람들의 편견에 계속해서 부딪힐 때 얼마나 힘들 까’이다. 그리고, 다시 다짐을 한다. 하율이가 밖에서 아무리 편견 가득한 소리를 듣고 와도 담담하게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아이로 클 수 있도록, 넓고 든든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서 하율이 혼자만 이겨내야 할 문제가 아닌, 우 리 가족 모두가 함께 이길 수 있게 견고해지도록 말이다.

하율이가 우리와 가족이 된지 벌써 6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하 율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고, 감격스럽다. 어떻게 이런 작고 귀여운 생명체 가 우리 집에 존재할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하율이에게 “안녕 율아, 여전히 너무 귀엽네. 오늘도 가장 행복한 하루 보내”라고 인사를 하고, 매일 밤에는 “안녕 율아, 오늘도 하율이랑 지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언니랑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오늘도 세상에서 제 일 예쁜 꿈 꿔”라고 인사한다.

그러면 하율이는 어김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안녕 언니, 오늘 하율이랑 놀아줘서 고마워. 사랑해”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소중함을 아는 가족이다. 그리고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는 입양가족이다. 한 가지 소망하기로는 하율이가 자라나면서 ‘입양’이라는 단어 때문에 하율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특별함이 가려지지 않았으면 좋겠 다. 입양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율이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아이이 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각자의 특별함과 존귀함이 ‘입양’ 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지 않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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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축복 오미옥

나와 남편은 동갑내기 부부다. 43살이란 늦은 나이에 만나 서로 좋은 감정을 안고 결혼을 했다. 늦은 나이지 만 결혼 후 몇 달이 지난 후 자연임신이 됐다. 하지만 늦은 나이인 만큼 계류유 산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후 아이를 갖기 위해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지만 우리에게 찾아온 난임은 쉽게 우리 품에 아이를 안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입양 기관에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첫째 아이를 2019년 6월에 축복처럼 오롯이 우 리 딸로 맞이할 수 있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던지...

나의 친정은 8남매다. 누구 하나 녹녹히 살지는 못해도 형제 많은 게 늘 위로 가 됐다. 그래서 나는 첫째를 입양하고 아니 입양 전부터 늘 둘째를 염두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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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적어도 자식은 하나가 아닌 둘이 있어야 한다는 바람이 컸기 때문이 다. 그래서 첫째 입양의 모든 절차가 끝나기가 무섭게 둘째 입양을 서둘렀다.

둘째 입양 신청까지는 첫째보다 어려움이 컸다. 그 이유 중 첫 번째는 가장 내 편 이 돼주어야 할 남편의 결정 때문이었다. 솔직히 첫째 엄마의 타이틀로도 많이 늦 은 나이인데, 둘째 엄마의 나이로는 꽤 많은 나이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 나이 지금 53살! 그래서 무엇보다도 남편의 찬성이 아닌 반대가 컸다. 우리 의 걸림돌 같은 많은 나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나이가 문제 되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인지 나는 둘째를 입양해도 잘 키워나갈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론 살다 보면 우리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서도 많은 자식들을 보란 듯이 잘 키 워내는 사람들도 있고, 또 때론 혼자 살아가기도 힘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이 낳고 버리듯 떠맡긴 손자, 손녀를 억척스럽게 정성으로 키우는 걸 보 면 적어도 내가 처한 형편은, 적어도 내 나이는, 아직은 아이 두 명은 거뜬히 키 워낼 여력은 된다고 늘 생각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우리 친정만 해도 그렇다. 8남매를 우리 친정어머니 혼자 키우셨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예전에는 물론 모든 아버지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두 집 살림 을 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우리 친정아버지 또한 그런 경 우였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친정어머니는 우리 8남매를 혼자서 키우셨다. 나는 8남매 중 넷째다. 내 밑으로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 넷이나 더 있 다. 그렇다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재산도 없는데 제사는 또 왜 그렇게 많았는지... 우리 아버지가 종갓집 독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으며 자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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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런 여건을 지닌 집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 철부지 딸은 혼자서 힘들어하시는 어머니의 고생은 늘 뒷전이었고, 어서 제삿날이 와서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싶다는 생각에, 제삿날이 늘 기다려졌고 제사 많은 게 늘 내겐 고마움 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혼자서 그 모든 살림을 하며 이런 철부지 8남매를 건강하 게 다 키워내셨다. 그리고 8남매 중 밑으로 자식 셋은 없는 형편에도 4년제 대학 까지 시키셨다. 또 그 중 한 명은 우리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대학원까지 졸업시 켰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보고 자랐기에 나는 늘 억척스럽고 알뜰한 편이다.

그런데 솔직히 첫째 하나도 우리에게 버거울 때가 많다. 첫째가 처음 우리 집 에 올 때부터 지금까지 잠 한 번 제대로 자 본 적이 없다. 첫돌도 아닌 두 돌이 지나서까지도 매일 밤마다 울고, 매일 밤마다 먹을 것을 얼마나 찾던지... 정말이 지 단 하루도 아이가 깊은 잠을 자본 적이 없다. 우리 부부는 당연지사 잠을 못 이뤘다. 또 자기 성질을 못 이겨 떼쓰며 울 때면 꼭 먹을 것을 토해내곤 했다. 나 는 아기니깐 자주 토한다고 생각했는데 둘째를 키우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는 먹을 것을 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첫째처럼 악을 쓰며 울지도 않는다. 이렇듯 첫째는 좀 유별났다.

우리는 서로 방도 따로 썼다. 우리는 귤 농사를 짓는데 11월부터는 정신없이 바쁘다. 수확 한철 벌어서 1년을 먹고 사는데 아이가 밤마다 하도 울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편하게 자야 일을 할 거라며 방도 따로 썼다. 나는 아기가 어리고 육아 경험도 없어 다른 애들도 당연히 다 그렇게 밤이면 울고, 먹을 것을 수차 례 찾고, 공갈 젖꼭지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입양가족 자 조모임을 나가고 주변에 물어보니 내 아이가 유별난 것임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첫돌만 지나도 대부분의 아기들이 거의 통잠을 자고 먹을 것을 안 찾는다는 것 을 그때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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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첫째로 인해 우리 부부는 밤마다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남편은 둘째 를 극구 만류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또래의 부부보다 체력도 좋고 건 강하다고 자신했었는데, 육아가 안겨주는 체력은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첫째가 이제 10월 중순이면 만 3세가 된다. 그런데 지금도 이른바 통잠을 못 하고 거의 매일 밤을 이유 없이 깨서 울고, 우유를 찾고 그런다. 우유를 끊어 볼 려고 많은 노력도 해봤다. ‘몇 번 울다 지치면 잠들겠지’하고 안 주기도 몇 번을 시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안 주면 한참을 울다 지쳐 잠들다가 또 어느새 깨서 울고, 안 주면 또 깨서 울고, 정말 줄 때까지 “맘마, 맘마” 그러면서 자다 깨다 울다를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서서히 커가면서 요즘은 횟 수가 한 두 번으로 줄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나의 육아는 솔직히 많이 힘들다. 좋은 게 3개라면 힘든 게 7개 정도 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렇게도 힘든데 아이가 “엄마”하고 웃으며 달려와 내 품 에 안기며 입맞춤 해 줄 때면, 언제 그렇게 힘들었나 싶게 모든 힘듦이 아이의 웃는 표정 하나에서 봄눈 녹듯 다 녹아내리고 만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엄마다. 내 아이가 아무리 힘들게 해도 엄마라는 이름 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그런 자신감이 있기에 나는 둘째를 고집 했고 육아에 지친 남편은 많이 반대했다. 그것 때문에 다툼도 번번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해법을 찾을 수도 있었으나 나는 얘기를 안했다. 물론 입양가족 자조모임이야 다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둘째를 계획 중 이라는 얘기는 했었다. 그런데 입양가족 자조모임에서 조차 나의 둘째를 만류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우리 부부의 나이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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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 가족, 내 지인, 물론 시댁이나 남편의 지인들한테도 둘째에 대한 아 무런 언급조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신념은 굳건해서 아무리 만류해도 둘 째를 입양 했을 것인데, 남편은 안 그래도 둘째 입양이 못 미더운데 주변에서 나 이도 있는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대답이라도 들으면 다잡은 마 음 어디로 가고 금방이라도 돌아설 사람임을 알았기에 둘째 입양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함구했다.

그런 남편을 첫째 핑계로 설득을 하고 또 설득을 했다. 요즘은 외동아들이다 외동딸이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첫째를 외동으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 론 아이가 둘이 아닌 혼자면 더 정성들이고 더 애지중지 키울 수도 있으나 형제 많은 가정에서 자란 나이다 보니 둘째의 필요성을 몇 번을 각인시키며 남편을 설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에 모르게 둘째를 선보고 아이를 데리고 오기 며 칠 전에야 내 친정과 시댁에 알렸다.

친정 식구들은 모두 찬성했지만 시어머니는 영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하지만 키우는 건 우리 몫! 그 누구의 자식도 아닌 우리의 자식이니깐 시어머 니의 못마땅함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축복처럼 둘째가 우 리 집에 온 건 올해 5월 11일 입양의 날이었다.

둘째가 우리 집으로 오는 데는 첫째보다 더 험난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계획 한 것처럼 모든 게 잘 풀리는 듯싶었다. 하나하나 즐겁게 퍼즐조각이 잘 맞춰져 나갈 즈음 정인이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게 올스톱이 되었다. 둘째를 간절히 바 라고 바라던 터라 예정보다 늦어지는 진행 과정은 우리를 힘들게 했다. 하루하 루가 더디기만 했다. 이러다가 둘째를 영영 입양하지 못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다는 오래지 않게 둘째가 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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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우리 품에 안겼다.

이제는 예전보다 입양절차가 많이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지면서 아이를 여럿 손 보는 절차가 생겼다. 그렇게 처음 선보는 날도 1시간 내내 우리 부부를 보며 유일 하게 웃어주던 아이였다. 어떤 아기는 보기도 전부터 울음보가 터지는 아이가 있 는가 하면, 또 어떤 아기는 멀뚱멀뚱 표정 없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둘째만큼은 유일하게 우리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선 보는 내내 웃어주었고 기관에서도 그런 둘째의 모습을 보고 우리 부부의 아기 가 맞다고 꼭 데리고 가셔야 하겠다며 웃음으로 답해주셨다.

우리 집은 제주도다. 그러다 보니 아기를 안고 집에까지 오는 여정도 길었다. 기관에서 공항까지, 또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려서는 우리가 사는 집까지 또 한 시간의 여정이 있었지만, 아이는 첫째와는 달리 크게 보채지 도 않고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 그렇게 첫째와 둘째가 서로 언니 동생 사이로 처음 만났는데 첫째는 “신기해” 라는 첫마디를 던지며 동생을 보며 웃어주었고, 둘째는 언니를 보면서 늘 봐왔 던 사이처럼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보통 둘째가 생기면 첫째가 많이 질투하고 그런다는데 우리 딸은 동생이 생 긴 게 마냥 신기하고 좋기만 한지 틈만 나면 뽀뽀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동생 먼 저 찾고, 우리가 동생에게 뭐 좀 할려고 하면 하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한다고 나 선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엄마로서 너무 흐뭇하고, 둘째를 입양하길 잘했다는 생 각을 하고 또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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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법적 절차가 많이 남아있어 위탁모 신분으로 둘째를 양육하고는 있지 만 곧 좋은 소식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째를 극구 반대했던 내 남편 도 이제는 첫째보다 오히려 둘째에게 더 정을 주는 것 같다. 그리고 둘째를 탐탁 지 않게 여기신 시어머니는 둘째가 온 바로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기력도 없 는 몸을 추스르며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우리를 나무라며 둘째를 서울로 데려 가라고 험한 말을 퍼붓기도 하셨다. 그러시던 시어머니도 차츰 마음을 여시고는 지금은 둘째를 제법 예뻐하신다.

그때의 시어머니가 얼마나 밉고 야속하던지... 나는 둘째를 안고 서럽게 울고 또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도 솔직히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안 그래도 다들 마음에 상처 하나씩 지닌 가슴 아픈 아이들인데, 다독이지는 못할 망정 그런 몹쓸 말을 해대시는 시어머니가 너무도 야속했다.

그래도 지금은 한 가족으로 다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의 두 딸을 얻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이 아이들은 나에게 엄마라는 훈장을 가슴에 달아 준 자랑스런 아이들이다. 만약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 살며 “엄 마”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에게 “엄마”와 “아빠”라는 호칭을 만들어준 이 아이들을 나는 평생 보듬고 살아갈 것이다.

웃을 때면 살짝 입가에 작은 보조개가 패이는 모습이 너무 이쁜 첫째 딸 아람 이, 그리고 누구나 안아주면 마다않고 안기며 웃어주는 우리 이쁜 둘째 딸 다온 이, 비록 나이 많고 많은 것이 부족한,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이 늘 부족한 엄마 아빠 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 엄마 아빠는 그 누구보다도 너희들을 사랑하고 있단다. 그리고 내 딸들이 되어주어 고맙다. 사랑한다, 내 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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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아빠 김정권

안녕하세요. 저희 가족을 소개합니다. 가족으로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 셋, 아 들 셋, 여섯 자녀로 대가족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큰딸이 2019년 7월 결혼해서 사위까지 포함 총 9명이랍니다. 한국입양홍보회하고는 2004년 인연을 맺어 경 기인천지역대표도 지냈습니다.

저는 다른 입양부모하고는 약간은 다른 계기로 인해 입양부모가 되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1학년 교회중·고등부 임원으로 봉사하던 중 아들만 4형제였던 저에게 예쁜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잘 따르면서 “집에 한번 놀러 가도 되냐” 고 해서 “그럼 오라”고 했고, 놀러왔던 날 저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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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아이는 우리 집에 와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입에 거품 을 물고 심한 발작을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놀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다행 인지 집에는 부모님이 안계셨습니다. 수십 분 지난 후 정신이 깨어났지만 축 늘 어진 여자아이는 “오빠 나 발작했어?”하고 물어보며 “오빠 나 4살 때부터 일주 일에 두세 번 발작해” 하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데 그 순간 저는 그 아이 손을 잡고 “오빠가 지켜줄게” 하고는 “오빠랑 나중에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저도 그 여자 동생에게 너희 집도 가보고 싶다고 하고 갔는데 오남매 중 오빠 셋과 언니, 그리고 막내였던 여자아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심결에 소리 나는 쪽 문간방문을 열자 갓난아이 3명이 누워있었고, 잠시 후 부엌에서 후에 장모님이 되신 어머니께서 젖병을 3개 가지고 오셔서는 아 이들에게 하나씩 물리고는 제 손을 잡고 “정권아 이 아이들 미국으로, 유럽으로 입양될 아이들인데 외국 보내지 말고 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데려다 키웠으면 좋 겠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전율이 흐르면서 “그래 꼭 이 여자아이랑 나중에 결 혼해서 입양해야지”하는 꿈을 품게 되었고, 여러 우여곡절과 심한 반대도 있었지 만 제가 27살 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장모님께서는 마포에 있는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20여년 간 자원봉사를 하셨는데 입양가기 전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다가 외국으로 입양될 때 너무나도 많이 마음이 아프셨던 것이었습니다.

결혼 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중 아내는 나 몰래 어릴 때부터 매일 먹던 약 20알을 조금씩 조금씩 쪼개 어느 날에는 19알 반, 어느 날에는 19알, 이런 식으 로 줄여나가다가 결혼 후 9개월째 되던 해 “오빠 나 약 안 먹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하며 오빠가 너무 좋아하는 아이 갖자고 하는데 좋으면서도 두렴과 걱 정이 앞섰지만 아이를 기적처럼 갖게 되고 의사선생님에게조차 가지고 있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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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 함구한 채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첫째 아 이로 딸을 낳고 그 후 아들, 그리고 둘째 딸도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았지만 여전 히 아내의 몸은 아팠고, 그럼에도 세 명의 아이들을 정성껏 키우던 중 나는 다니 던 직장을 그만두고 1997년 초 사업을 시작했다가 생각과 기대와 달리 IMF를 만나 큰 어려움을 겪는 아픔의 시간도 있었지만 열심히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 으로 빚을 갚고 나자 무언가 모르게 공허하면서도 제 마음속에서는 고등학교 1 학년 때 다짐하고 소원했던 입양이라는 두 글자가 생각이 났고, 온갖 마음이 입 양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2004년 13개월 된 남자아이, 2005년 2달 된 여자아이, 2007년 3살 된 남자아이를 입양하여 여섯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다가진 것 같았고, 행복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 내와 여섯 아이를 데리고 전국여행을 다니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라면 다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입양홍보회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그러던 중 TV출 연을 자주해서 우리가족 이야기가 방송되다가 우연하게 우리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알게 되어 신학기만 되면 전교생이 우리가족 입양스토 리 방송을 시청하게 했습니다. 공개입양이면서 입양가족 자조모임에 자주 다녀 그런 줄 몰랐는데 큰아이들이나 입양아이들이나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도 받고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하는 거라고는 막상 우리 여섯 아이들이 힘든 것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서 활동도 멈추고 너무 아이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울보가 되었습니다. 착하기만 하고 아빠 껌딱지처럼 똑똑했던 넷째 첫 입양자녀가 초등학교 3학년 경 잘못을 저질러 꾸지람을 주었더니 집을 나가 몇 시간 만에 찾은 것을 시작으로 중학교 2학년 가출을 해서 자의반 타의 반으로 일주일 만에 들어왔다가 또 가출. 그리고 아이는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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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파 많이 울었습니다. 또한 아이도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3살 때 연장아로 입양된 표현이 서툴고 늦된 남자아이는 유치원을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2학년 까지 하루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사 고의 연속이었습니다. 친구하고 싶다는 표현이 옷 잡아당기고, 식사음식 빼앗 고, 쉬는 시간 길 막고 자기는 친해보자는 제스쳐였다고 하는데 학폭이 열리고, 열리고 나면 이 아이는 왜 내가 뭘 잘못했어? 하며 분노를 표출하고, 그래서 화 난다고 아파트 옥상에서 물건을 던져 경찰서로 신고 들어가고, 경찰서 출두해서 조서 쓰고 나오면 며칠 있다가 길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 타고 나서 아무데나 놓 고 갔다가 신고 되고, 이것을 하고나면 아픈 아내와 아들은 기관에 가서 며칠간 교육받고, 그것도 집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라 뺑뺑이 돌리듯 여러 기관에 보내 이수해야만 하고 이런 연속이었습니다.

아내는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밖에서 일하는 남편 힘들까봐 다 나에게 말할 수 없어 벙어리냉가슴 앓고, 나중에 일이 커져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갔다 온 날은 정말 다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내가 강력하게 밀어부쳐 한 아이도 아 니고 세 아이를 입양했으니 아내도 힘들고 배 아파 낳은 위로 세 아이들도 힘들 고, 가슴으로 낳은 세 아이 중 중간에 낀 막내딸은 위로 오빠, 아래로 동생의 일 로 눈치 보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된 것 같았습니다. 한때는 넷째아 들과 여섯째아들 둘만 데리고 집을 나갈까도 생각했습니다. 모두 다 내 탓이라 는 생각을 하며 울었습니다.

아빠의 축 쳐진 모습과 자책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로 큰아이들 셋은 절대로 우리 동생들 포기 못한다고 우리 여섯 아니면 안된다고 큰아이들도 많이 울었 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동생들하고 놀아주고, 동생들 좋아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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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라면 다 같이 해주고, 학교마중도 가고, 동생친구들 만나 맛있는 거도 사주고, 같이 축구도 하고, 영화도 보고, 배드민턴도 치고, 오락실도 가고, 당구장 한번 가고 싶다고 하면 같이 가서 놀아주고, 부족한 공부도 가르쳐주고, 시간 나는 대로 도서관도 같이 다니면서 많은 책을 같이 독서하면서 차츰 차츰 조금씩 변 화가 되었고, 지금은 정말 육남매 중 누구하나라도 없으면 어쩔 줄 몰라 하고, 어디 있냐고, 언제 오냐고 찾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저에게 입양을 처음 알려준 가장 존경하는 장모님 홍경의 어머님 께서 2014년 7월 소천 한 것을 계기로 2008년부터 장모님께서 약 7년간 계셨 던 요양원에 온가족을 데리고 찾아가 우리 어머님 잘 모셔주셔서 너무 감사해 서 온가족이 봉사하고 싶다고 자청한 후 “가족봉사단”이라는 이름을 걸고 매월 2째주 찾아가 2시간 동안 아이들은 각종 악기 연주로 찬양 6곳, 트로트 1곡을 하면 어르신들과 선생님 중에는 따라 떼창하기도 하고, 모두 할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해 각종게임도 하고, 춤추며 율동도 하고, 각 방 청소, 약 100인분 이상의 식사, 설거지 도움, 그리고 어르신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이 사고(?)도 치고, 부모를 힘들게 하는 기간 중에도 끝까지 한 번도 거 르지 않고 봉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봉사하러 간다고 간 우리 온가족은 거 기에서 힐링을 했고, 저를 사장님, 단장님하고 부르다가 매번 설교와 성경암송 을 하고 교회 유치부 찬양율동을 하는 저의 모습에 어느 날부터인가 목사님 안 수해 달라고, 지금 세상에 있는 살기 바쁜 자녀들 위해 기도해 달라고 너무나도 간청을 해서 계속 손사래 치다가 그래 목사가 되어 맘껏 기도해주자, 축복해주 자,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하자는 큰 감동을 받아 학창시절부터 목회하겠다고 서 원했지만 오빠가 목사님되면 본인 몸이 아파 도울 수 없다는 생각에 반대를 한 아내를 이번에는 끝까지 설득하고 기도의 결과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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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약 4~5년 봉사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아이들도 조금씩 치유되었고, 요양원 어르신들과 선생님들도 우리가족 봉사단을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그리 고 2019년 12월 말 인천사회복지협의회에서 주는 자원봉사부문 대상을 가족봉 사단 이름으로 받는 뜻깊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방황했던 넷째아이는 지금 대학교 1학 년이 되어 휴학하고, 자기는 프랜차이즈점을 운영하는 세프가 되겠다고 대형체 인점 고깃집 직원으로 들어갔고, 막내아들은 코로나19가 무조건 나쁜 것만이 아닌 게 한번 찍혀서 여러모로 손해를 본 면도 있었는데 아이들하고 예기치 않 는 부딪침이 많이 사라져 무사히(?)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현재 고등학교 1학 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찌 보면 오랜 간만에 입양가족들에게 인사하며 다시 나타난 것은 우리 주변에서 알고 있고 교류했던 입양가족을 만나거나 소식을 들으면서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았던 이 입양부모님들은 제가 볼 때 천사였고, 최고의 엄마, 아빠였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에 서 힘든 과정,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으면서 내 잘못이라는 생각과 왜 ‘나에 게 이런 일이?’ 하는 자책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희망 잃지 마세요. 우리 입양부모의 잘못도 우리 입양아동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 이제 입양가 족으로서 먼저 많이 울고, 많이 아팠던 아빠로서 다시한번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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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울보 아빠였고, 지금도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합니다. 너무 행복한 아빠이고, 우리 아이 여섯이 있음으로 가장 인생을 멋지게 잘 산 아빠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시 이런 환경에 처해 진다해도 저는 입양부모, 입양 아빠가 될 것입니 다. 또 울 수 있겠죠. 가슴 아파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겠죠. 그러나, 이 아이들로 인해, 이 천사들로 인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말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내가 포기하는 게 아니에요. 포기는 김장담글 때 한 포기 두 포기 셀 때만 쓰는 표현이랍니다. 우리 만나 허물없이 터놓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같이 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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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란 아이, 덜 자란 엄마 이소영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을 가끔 각인해야 하는 건 내가 성인이 된 이후 선택 하고 결정한 내 삶의 주요 순간들에 적용된다. 대학교, 직장, 결혼, 그리고 입양. 자연 출산은 하늘의 섭리지만 첫 아이가 탄생한 순간은 잊을 수 없고, 엄마가 된 첫 마음은 큰 아이가 자랄 때마다 다시 꺼내 돌아보게 된다. 입양은 입양에 대한 관심 유발 → 입양기관 검색 및 신청 → 입양 상담 → 입양준비와 첫 대면 → 가족으로서의 맞이와 이후 생활 등 매 순간순간 마음을 다잡게 된다.

불임이었던 직장 선배분의 입양과 그 아이의 돌잔치 참여를 계기로 우리 부 부와 큰 아이는 입양에 적극적으로 관심이 생겼고, 출산의 고통이 없는 가족 구 성원의 증가는 이론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큰 축복이고 기쁨이 될 거라 기대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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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녀 양육에 따르는 당연한 어려움은 감안할 자신이 있었고, 직장 선배처럼 우리도 건강한 비장애아를 입양하면 기본적인 어려움 외에는 큰 어려움 없이 보통의 가정처럼(?) 지낼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본인이 감당할 만큼 어려움 만 주신다는 생각이 있었으니까...

백일 경 입양된 둘째는 자기 전에 먹은 우유를 토하는 걸 제외하고는 그냥 존 재 자체가 사랑스럽고, 이쁘고, 귀여운 아이였다. 까칠한 7살 큰애가 동생을 살 갑게 대하는 걸 보면 역시 물고기 키우는 것보다 입양이 훨씬 잘한 선택이었고, 입덧으로 힘들었던 임신기를 모르고 마냥 귀여운 아이를 돌보는 게 내가 살면 서 가장 잘한 일 같았다. 아이가 칭얼대고 보채는 것도 울집 애교쟁이 둘째니까 최대한 받아주었다. 왜냐하면 가끔 칭얼대는 것(칭얼대는 표정도 왜 그리 귀여 운지) 외에 대체로 애교 많고, 붙임성 있고, 잘 웃는 건강한 아이였고, 외부 모임 에 가도 적응을 잘해서 걱정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서도 야무지게 잘 지내고 어울리던 아이가 좀 다르게 생각된 건 7세 가 되면서부터다. 이름을 써서 한글도 빨리 깨우칠 줄 알았는데 7살이 되어도 한 글을 나 몰라라 해서 슬슬 걱정되었고, 시립어린이집에서 또래 여자아이들과의 그룹 놀이에 끼지 못하는 걸 어린이집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자 아이들 몇몇 이 자유시간에 뭔가 조직적으로 구성하여 노는데 둘째는 끼어 놀지 못하고, 가끔 친구들이 끼워 놀게 해주면 좋아하지만 그 아이들은 늘 그렇게 노는 게 익숙한 패 턴이고, 그 아이들이 워낙 야무져서 좀 (수준이) 안 맞는 것 같아 놀이에 못 낀다 고 했다. 그래도 둘째는 활발한 막내랑 같은 어린이집에 다녀서 주눅이 들진 않았 고, 직장 일로 종일 보육을 해서 저녁 시간엔 막내와 다른 동생들과 같이 저녁식 사 하고 지낼 땐 동생들을 잘 데리고 놀면서 낮에 느꼈던 불편함을 해결했던 것 같다. 회사 일에 피곤한 나는 퇴근 후 아이들 태워 집에 와서는 잠자기 바빴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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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하루 열두 시간을 지내도 자매가 함께 있었으니 하며 위 로를 했었다. 단순한 둘째는 그래도 입양은 좋은 거라고 말하고 다녔고, 어린이집 에 둘째랑 셋째만 입양아인 거 알고 놀랐지만 입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학습이라는 난제가 우리 앞에 있는 줄 모르고...

7살 그해 겨울, 둘째는 학습지를 시작했다. 샘플 수업을 해준 학습지 교사마 다 너무 늦게 시작했다면서 아이가 야무지니까(야무져 보이니까) 빨리 따라갈 수 있겠거니 하였지만 주 1회 10분 수업도 아이는 힘들어했고, 선생님이랑 노는 건 좋아하는데 수업만 시작하면 도망가려고 했고, 학습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 니 숙제는 최소한으로 하도록 했지만 아이는 쉽게 한글을 익히려 하지 않았다. 어린이집 졸업식 날. 아이는 가장 분량이 적은 걸 낭독하게 했지만 그마저 아이 는 참 어려워했고, 선생님은 아이의 자신감 회복 등등을 위해 학부모 감사 인사 를 내게 부탁했다. 그때부터인지 아이는 본인이 발표하는 건 가급적 피했지만 부모가 발표하는 건 꽤 즐겼다. 졸업식에 우리 아이의 모습을 봤지만 그게 큰 문 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어느 세상에나 늦게 깨치는 아이는 있으니까, 우리 아이도 그런 아이 중 한 명일 수 있으니까, 큰애랑 셋째가 야무지니 자매 들을 보며 아이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는 게 생길 거라 기대했으니까...

초등학교 입학식 날,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내 눈엔 우리 아이가 제일 똘똘하 고, 귀엽고, 이쁘게 보였다. 일상생활이나 소통에 어려움이 없는 건강한 아이여서 학교 생활하면서 뒤늦던 아이도 깨쳐서 따라가리라 기대했던 내 맘과 달리 아이 는 일주일이 지나면서부터 학교 안 간다고 울거나, 교실에 안 들어가서 도우미 할 아버지가 교실까지 데리고 가거나, 교실 밖에서 우는 아이를 담임선생님이 달래 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아이의 학교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학습이 아닌 미술이나 역사나 경제 수업을 몇몇 엄마와 의기투합해서 그룹수업을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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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는데 아이의 호감 있는 첫 인상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또래 안에서 부정적 모습이 표출되었다. 서로가 좋은 감정일 때는 하하호호 잘 지내지만 뭔가 불편한 상황에서 말로 풀면서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본인 감정에 충실한 채 대응하여 분 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본인도 위축되어 말을 않거나 회피 하려는 자세로 둘째와 친하게 지내려던 아이들이 거리를 두고, 아이는 그에 따른 불편함을 가정 안에서 표출하고, 아이를 타이르고 다그치고 혼내면서 내 감정도 극에 달해서 할 말과 못할 말, 할 짓과 못할 짓을 아이에게 퍼부었다. 초등학교 저 학년이면 끝나서 뒤늦게 깨쳐서 일반 학교생활에 어려움 없이 밝고, 맑고, 건강하 고, 지혜롭게 지낼 줄 알았던 아이는 지금도 집 밖으로 나가서 룰루랄라 하다 좀 만 어렵고 힘들어지면 울고불고 힘들다 하니 이 상황은 언제 종지부를 찍을까!

아이의 타고난 복인지 그동안 만난 개인 수업 선생님이나 학교 담임선생님은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에게 도움 주는 방법을 생각한 분이 많았다. 물론 아이에 게 주입 외에 다른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개인 수업은 다른 사람으로 교체 하거나 수업을 끊기도 하였다. 아이에게 사회성과 도덕성 발달을 위해 지적 자 극이 필요하지만 아이와 좋은 관계 형성이 안 될 것 같은 곳에 돈과 시간을 쓰 려 하지 않았고,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에게 관심을 갖도록 끝없이 교류하려고 했다. 아이는 지금도 또래보다 더디게 생각하고 자라지만 아이가 집 밖에서 어 려움과 상처를 덜 받고, 자기 자신의 장점과 강점을 발휘하여 자유롭고 건강하 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입양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가족을 힘들게 하지만 가족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는 둘째는 현재 기숙대안학 교를 다니고 있다. 학교 그만두고 집에서 살고 싶다, 학교에서 배우는 게 딱히 없 으니 돈도 아낄 겸 집에서 조용히 지내겠다, 코로나로 집에 2주마다 와야 하니 너 무 힘들다, 엄마가 나 때문에 힘들겠지만 나도 힘들다, 엄마는 내가 얼마나 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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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알아 달라, 어차피 검정고시도 안 볼 거라 내 학력은 초졸인데 왜 학교를 보내 려고 하냐, 여기 나온다고 내가 뭐 달라지냐, 선생님은 이해한다고 말만 하고 이해 안 해준다, 학교가 장점이 없다, 친구들도 다 싫다, 난 숙제도 싫고 수업도 너무 싫 다면서 전화기에 대고 울고, 학교 가는 버스를 안탄다고 고집 부려서 왕복 5시간 을 종종 데려다주기가 2년째. 어제도 전화기에 대고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아이.

그래도 우리 가족들은 종종 초등학교 때 비하면 지금은 그래도 ○○가 많이 좋아졌지, 정말 옛날 생각하면 집 나가고 싶었지, ○○ 때문에 우울증 걸렸지, 입 양한 거 잘한 건가 고민되었지, **는 뭔 잘못으로 ○○ 같은 언니를 만난건지 얘 기를 나눈다. 본인도 자기 입양 안 했으면 어땠을까 물어본다. “글쎄, 몸과 마음은 편했겠지만 ○○가 없으면 심심했겠지?”, “그렇지? 내가 있어서 우리 집이 좀 재 미있지?”, “근데 좀 덜 버라이어티하게 해줬으면 좋겠어. 엄마가 좀 딸려...”, “그래 도 엄마, 내가 잘 자란 건 알고 있지? 내가 잘 자란 거야. 알아?”, “야, 너 혼자 자 랐냐? 너한테 몇 명이 달라붙었냐? 지금도 선생님들이 너한테 제일 마음 쓰시 지? 친구들도 그렇고?”, “그건 그래. 내가 복이 많잖아” 당연하듯 말하는 ○○.

15년 전 예측할 수 없었던 장면이 나를 하늘로 띄우다가 땅에 곤두박질 시 킨다. 앞으로 15년 후 둘째가 나를 어떻게 땅에 패대기 시키고 무지개 구름 위 로 올라가게 할지 기대가 되면서 걱정도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나는 아이 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만 엄마의 마음이 되어 기도한다. 평소엔 친구 같이 아웅다웅 지내고, 마녀 할멈처럼 잔소리 하지만 아이가 어렵다고 할 땐 엄마가 되어 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입양을 준비할 때 뜻대로 되길 기도한 것처럼, 아이가 신의 뜻대로 자라길 기도하게 된다. 엄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 외에 없기에 밝게 웃는 아이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두 손을 모은다. 나를 사랑 하는 아이,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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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엄마야. 배지연

은선이를 안고 있는데, 은선이가 “엄마아~” 라고 부르며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녹아내리며… 그래, 그래... 엄마야, 은선이 엄마야… 저, 은선이 엄마예요. 라며 그저 눈물만 흘렀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너무 고마워서, 너무 먹먹해서.

2020년 7월 16일 예쁜 딸 은선이가 제 품에 쏘옥 들어왔습니다. 결혼 13년 동안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 입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매번 재정의 문턱에서 아웃 당했지만, 그럼에도 또 두드리며 가슴으로 품은 생명을 놓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작고 소중한 천사가 찾 아왔습니다. 부족한 엄마인데 얼마나 사랑해 주는지요... 저는 제가 온 마음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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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사랑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고 소중한 아가가 부족한데 아주 많이 부족한 사람인 이 엄마를 그토록 사랑해주고 전심으로 사랑해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와아, 세상에 제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은선이에게 얼마나 미안 한지, 얼마나 감사한지... 저를 엄마로 만들어준 은선이에게, 한없이 부족한 저에 게 그렇게 찾아온 사랑이 은선이였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시간시간, 순간순간이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아쉬 운지 모릅니다. 더 사랑해주고 매일 더 사랑하자고 그랬지만 늘 부족한 것만 같 아서 미안하기만 한 엄마입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는 뚱뚱해서 아이가 안생기니? 너는 왜 입양 을 안 하니? 사랑이 없니? 다둥이 엄마의 속옷도 선물 받아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저에게 입양이란 차선책이 아닌 최고의 방 법, 최고의 선택임을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깨닫고 알아가고 있습니다. 입양은 사랑이란 걸요.

그 많은 이야기를 지금도 여전히 듣고 살아가고 있지만요, 그 많은 이야기가 묻힐 수밖에 없는 건 이미 제 마음에 입양이란 씨앗이 자라고 있었고, 그것이 열매 맺기까지 13년 이란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는 건… 제가 아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가정이란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엄마, 아빠의 품이 얼마나 큰 건지, 저는 여전히 엄마, 아빠가 그립고 엄마, 아빠가 좋 습니다. 그 엄마, 아빠를 경험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를 선물해 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은선이 엄마입니다. 은선이가 밥을 먹으며 장난한다고 밥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기쁜 거예요. 너무 행복한 거예요. 어디 가서 누구 앞에서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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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던져보겠어요. 엄마 앞이니까, 엄마 품이니까 밥을 던지고 놀겠죠. 그냥 그 모 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너무 아까워서 그래, 그래, 신나게 놀아. 엄마 앞에서 엄마 안에서 맘껏 하렴 은선아~ 라고 던져 지저분해진 식탁과 방을 치우며 너 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은선이가 밤낮이 바뀌어 밤에 자기 싫어 울었습니다. 우는데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 울음소리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은선아, 엄마가 들어줄게 울어 맘껏 울어 아가야. 어디에서 이렇게 울면 울음소리 들어줄까요? 엄마니까, 엄마 품에서 맘껏 짜증도, 화도, 울음도 그렇게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 라는 거... 아가도 알고 있으니까요. 엄마라는 기쁨을, 엄마라는 감사를 누구 보 다 더 알게 해주는 사랑둥이 아가 은선이가 있어서 매순간 너무 감사하고 기쁩 니다. 정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목사 신랑을 둔 사모라는 것보다, 은선맘, 은선엄마, 은선아~ 로 불리는 이 삶 이 영광스럽고 감격이고 감사입니다. 둘만 살아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좋았습니 다. 그런데요, 입양을 하고 아이가 생기니 둘만 살았던 시절이 아주 생각이 안날 정도로 와아! 상상이상으로 그저 사랑 이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가정을 내어준 것뿐인데, 저는 한 아이를 통해 온 세상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은선이가 밤에 잠을 안자요. 그런데 이 기분이 그냥 막 재미나요! 와! 은선이 가 물을 엄청 마셔요. 그래서 기저귀를 굉장히 많이 사용해요. 그런데 우와! 그 냥 신나요! 기저귀 갈이 시간이 왔구나! 너무 신나요! 사람들이 물어봐요, 아이 키우기 힘드시죠? 저는 지금도 그 질문에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알아요. 알죠. 무슨 의미이고 어떤 느낌인지는 아는데, 아직은 힘들다는 것을 모를 정도 로 그냥 은선이가 가족이 된 그 순간부터 와아! 너무 행복하고 신나고 재미나 요! 그렇게 살고 있는 은선 맘입니다. 은선이 엄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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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신랑이 그러더라고요. 우리 가정이 더 기쁨, 감사가 많아졌다고. 정말 그래요, 은선이를 통해서 저희 가정이 새로워졌어요. 감사, 기쁨, 사랑 와! 모든 부 분에서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재정 부분만 아니라면 나라에서 제발 그만 쫌 하 세요! 할 정도로 저희는 입양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숫자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 녜요. 한 아이가 와서 배가 되었다면 두 아이로 인해 곱하기가 될 것임을 압니다.

엄마바라기였던 적이 있습니다. 엄마 엉덩이만 떼도 앵~ 하고 울고, 그때는 화 장실에 가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이 지나는 것도 아쉬운데 엄마 바라기 시간이 지나가면 얼마나 그리울까?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기는 성 장하는데 엄마는 늘 그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서 은선이에게 오늘 더 사랑 해 아가야, 오늘 더 사랑하자 아가야라고 이야기 해줍니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 고 있는 게 아니라, 오늘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고 합니다. 은선이 가 온 마음 다해 사랑을 쏟는 것처럼 은선맘도 그렇게 살겠노라고 오늘도 활짝 웃음 짓는 아가를 보며 다짐합니다.

인식, 문화, 편견, 시선들이 다 다양합니다. “버려진 거 주워 와서 키우는데 너 는 엄마에게 잘해야 한다. 감사한줄 알아라” 라고 아이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 들은 그것이 당연한줄 압니다. 그분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선이에게 더더욱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평생에 감사하는 자로, 좋은 어른으로, 바른 어른으로 커가기를 알려줍니다. 이런 경험 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좋은 어른이 되라고, 그래서 은선이 엄마 로 세워진 것 같습니다.

그래, 엄마야. 오늘도, 내일도, 나는 은선이 엄마야. 고마워 내 딸, 사랑해 내 딸. 은선이 엄마로 살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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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음이로 인해 완성돼 가는 우리 가족... 전명옥

“엄마 차…. 아빠 차….”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말문이 트여 여러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고집도 세지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진 우리 집 막둥이입니다. 9월이면 두 돌이 되는 하음이는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자라는 아이입니다. 어떨 때는 너무 허용되어 버릇이 없어지면 어쩌나 걱 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집에 처음 온 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동네 인기스타입니다. 성탄절 전야 에 선물처럼 온 하음이는 집이 아니라 교회에서 여러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습 니다. 목사님 사모님께서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눈물의 축복기도를 해 주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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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교회학교 선생님들과 전야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언니 오빠들의 관심과 사 랑을 받으며 아기 예수님의 생일 파티에 참여하여 같이 축하를 받는 시간이었 습니다. 외할머니는 어린 하음이가 사람들의 손길 때문에 아프거나 힘들까봐 아기 하음이를 딱 지키고 앉아 눈으로만 보라시며 시끄러우면 아기가 놀란다 고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하셨습니다. 추웠던 겨울이지만 그날의 감격과 감동이 얼마나 따뜻했던지 모릅니다. 그날부터 인기스타 하음이 는 보는 사람들마다 사랑과 축복을 해 주십니다.

특히 아랫집에 사는 언니들과 아주머니, 아저씨는 거의 매일 하음이의 안부 를 물으며 퇴근하면 하음이를 데려가서 놀아주고 저녁도 먹이고 목욕도 시켜 잠잘 때 데려다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두 돌이 다 되어가는 하음이는 어린이집 에 다녀오면 자연스럽게 아랫집에 들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음이의 열렬한 팬이자 지원자인 큰오빠는 하음이가 법원판결이 완료되던 날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군 입대로 인해 슬픔보다는 하음이의 판결에 기뻐하 고 감사해 하며 하음이에게 “큰오빠 잊지 마. 잘 기억해 큰오빠 군대 빨리 다녀 올게” 울면서 입대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면서 “큰 오빠 영호오빠” 하면서 하음이에게 알려주고 보여주며 지냈는데 지금은 만나 보지도 못한 큰오빠의 사진을 가리키며 “우빠 우빠” 합니다.

고3이었던 작은 오빠는 틈틈이 공부하면서도 형이 없는 자리를 잘 메꾸며 동생 하음이의 건강을 늘 걱정하고 안무를 물었습니다. 고3인 오빠에게 미안 할 정도로 코로나로 집에서 수업하며 공부하던 오빠에게 하음이를 잠깐씩 맡 기고 마트에 다녀오기도 하고 요리를 하기도 했지만 오빠는 마다하지 않고 하 음이를 잘 돌봐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중앙대에 입학하여 1학기를 비대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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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하다가 자원하여 지난 7월 말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작 은 오빠도 군 입대보다 하음이의 건강과 행복을 염려하며 입대하였습니다. 엄 마, 아빠보다도 막둥이 하음이가 우리가족 1순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도 그 럴 것이 법원 판결 중 판사님께 친필로 쓴 편지에 부모의 부재시 하음이를 끝 까지 책임지고 돌보며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싸인까지 했으니까요. 그 렇게 하음이는 우리가정에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빠들이 말하길 하음이로 인해 완성된 우리가족이라고 말입니다.

‘입양’이란 두 글자가 우리가족과 아무 상관없는 단어였고 생각지도, 생각 할 수도 없는 단어였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입양’이란 단어가 가슴에 새 겨지는 순간 아주 뜨거운 소망이 되었고 입양의 문을 두드리고 찾아 하음이를 만났을 때 그 뜨거운 소망이 이루어졌고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하음이가 첫 돌을 맞이하고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주제는 하음이에게 한명 의 가족을 더 만들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찬성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 리 오빠들은 반대였습니다. 지금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한 동생이 있는데 다른 동생을 생각한 적도 없으며 하음이가 사랑을 나누는 일에 상처를 받게 될까봐 걱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둘이 의지하고 잘 자라지 않을까라는 부모의 의견과는 달리 혹시라도 아기인 동생이 오게 되면 하음이가 받게 될 상처, 또 는 첫 정이 무섭다고 새로 오게 될 아이에게 정이 가지 않아 하음이만 예뻐하 게 된다면 그 아이가 받게 될 상처까지 걱정하는 의견이었습니다. 엄마인 나는 너희 둘을 키워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며 키웠는데 우리는 그렇게 키 워낼 수 있다는 주장에도 아직은 안 된다는 아들들의 의견으로 좀 더 생각을 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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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가족입니다. 이미 가족이고 더 단단한 가족이 되어져 가고 있 습니다. 우리 가족이 젤 잘한 일 “입양” 그리고 입양 때문에 가지게 된 넓은 시 선과 마음, 이 모든 게 하음이로 인해 가지게 된 선물입니다. 편견 아닌 편견 속 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던 평범한 우리가족이 이렇게 커다란 선물을 가지 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많은 가족들에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특별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또한 엄청난 것도 아님을... 그저 한 아이를 출산하듯이 한 아이가 자녀로, 동생으로, 손자손녀로 우리에게 온 것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이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세상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평안 과 기쁨 그리고 만족감 또한 생명의 소중함까지 귀한 선물을 더 많이 받고 살 고 있음을 당당히 말해 주고 싶습니다.

하음이가 이제 두 돌을 맞이합니다. 하음이와는 많은 기념일이 있습니다. 하 음이랑 처음 만난 날, 하음이가 처음 집에 온 날, 법원 판결나던 날, 가족관계가 정리된 날, 사후관리가 끝난 날, 그리고 생일입니다.

두 번째 생일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감동인지 모릅니다.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줄 생일축하답례품을 손수 포장하고 새 옷도 준비했습니다. 인싸 하음이를 좋 아하는 동네 팬들은 한복을 사 보내기도 하고 케이크는 자기가 사준다고 하고 같은 라인에 사시는 이웃 할머니는 예쁜 가을 구두를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용돈을 미리 챙겨 주시기도 하고 원피스도 사주신 분들도 계십니다. 하음이 생 일이 온 동네 잔치입니다. 두 돌을 맞으면서 하음이가 받은 많은 사랑들을 잘 적어 놓고 사진 찍어 놓고 영상도 만들어 간직하고 있습니다. 너는 사랑받기 위 해 태어난 소중한 우리 가족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서입니다. 아마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 떼가 늘어 안아 달라고만 하고 바닥에 누워 버리기 도 하는 미운 세 살이라서 엄마는 허리가 매일 아프지만 그래도 바닥에 내려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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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기 아까운 내 딸 하음이입니다.

현재 위탁부모교육을 이수하고 한명의 아이라도 가정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군에 있는 오빠들에게도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크게 반대할 것 같았던 오빠들은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민하고 준비하셨을지 이해가 된다면서 어떤 동생이 올지 기대된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나는 지... 오빠들도 1년 사이에 많이 자랐습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가족이 생각지도,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 하음이로부터 시작하여 더 넓은 가지들을 펼 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아이의 세상을 만들어 주는 일 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먼 훗날 참 잘했다 할 날이 오겠지요.

오늘도 하음이 생일잔치 구상에 푹 빠져 있는 엄마입니다. “하음아 사랑해. 멋진 두 아들들도 사랑해 그리고 우리가정에 찾아올 아기 도 사랑해” 매일매일 용기 내어 한 걸음씩 내딛는 하음이네 가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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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는 외계인 유삼례

저는 친생자녀 아들(40세), 아들(33세), 아들(31세)을 두었고, 입양한 딸(16 세), 딸(14세)을 둔 엄마입니다. 입양 당시 큰 아들은 군대에 갔고 둘째아들은 고1, 셋째아들은 중2였습니다. 큰딸은 생후 2주 되었을 때 입양을 했고, 2년 후에 둘째딸을 입양했는데 생후 48일째 가족이 되었습니다. 당시 두 명을 입양하고 보니 세상을 다 얻은 듯 남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고 정말 기뻤고 행복했습니다. 아들만 키우던 집안 분위 기는 온데간데없고 늦깍이에 두 딸을 키우게 되니 집안은 핑크색으로 변해 있 었고 집안 분위기는 전에 맛보지 못했던 애교와 웃음꽃으로 활짝 피어 있었습 니다. 하루하루 딸 자랑에 힘들다는 생각은커녕 만나는 이들에게 행복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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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약 6개월 지내던 중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둘째아이가 우유를 먹이면 먹는데 손에 쥐려고 생각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럴까 무엇이든 손에 쥐려고 하는 시기인데... 뒤집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뒤집 지 못하고... 모든 것이 의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 결과 뇌병변 1급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이 캄캄해지기 시 작했고 이 사실을 가족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 남편과 아들들이 어떻게 반응 하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할수록 제 입은 닫혀서 아무 말도 하고 싶 지 않았고, 먹고 싶지도 않았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검사하 고 결과 보러간 줄 알고 있는 남편에게 어떻게 안 알릴 수 있겠습니까? 고민하 다가 버스 안에서 폰을 꺼내어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이 뇌에 이상이 있대요.’ 라는 글만 남기고 퇴근하여 돌아온 남편을 만났는데 서로 침묵만 남았었지요. 다음날 고1 둘째 아들이 집에 왔길래 이 사실을 말을 했더니 아들은 아무렇지 않게 맡길만하니 맡겼겠지요. 하더니 아기를 덥썩 안으면서 열심히 운동하자! 하는 거였어요.

사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하네요. 그 이후로 재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렸을 때 재활이 너무 중요하다는 정보에 큰 딸은 건강하니까 이 모집에 맡기기를 반복하면서 성남보바스 병원부터 시작하여 대전, 전주병원에 2개월, 3개월, 1개월씩 입원하면서 둘째 딸에게만 집중 재활에 몰두했었죠. 어떻 게 해서든 일상생활을 가능케 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14살이 된 지금도 서지 못 하고, 침 흘리며 언어, 연하 장애까지 중복돼 있습니다.

저는 엄마로써 네 옆에 있어줄게. 이런 마음 초심을 잃지 않고 내가 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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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지켜줄게~~ 사회의 한 일원으로 당당히 살라며 매일 학교 등하교와 병원 재활, 센터에 이동을 위한 운전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큰딸에 게는 차별화 된 부모 관심에서 상처받고 동생이 입원 할 때마다 엄마와 떨어져 서 이모 집에 가있어야 되고 어린이집도 옮겨 다녀야 되는 3~7세 동안 겪어야 했 던 것들로 인해 성격, 심리, 정서가 불안하여 초등학교 생활에서 친구관계나 행 동들에서 더더욱 힘이 들었으나 내가 선택하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준 아이들로 인해 주어진 환경이라서 언젠가는 큰 보람으로 보답이 있겠지 하며 나 름 묵묵히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요즘 중3이 된 큰 딸은 내년에 예고를 가겠다며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겠냐고 자꾸 걱정을 하며 물어 봅니다. 그럴 때마다 돈 때문에 네 앞길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니 걱정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하라고 했고 돈은 하나님 이 너를 위해 다 준비해 놓으셨을 거고 부모가 책임져야 할 일이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가고 싶은 예고 선생님을 소개 받고 만나게 되었는데 입학 설명을 들으니 돈이 거의 안 들어간다는 말씀을 듣 고 너무 놀랬습니다. 특히나 저희 큰딸은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피아노 치는 것 을 좋아합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가족을 만드셨으니 그 책임을 져주신다는 확 신이 있어서 그저 아옹다옹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빠 엄만 갱년기에다 두 딸들의 사춘기에 장애까지 겹친 다양한 세대들이 모여서 때론 시끄럽기도 하고 천둥소리, 소나기 소리, 가랑비 소리, 햇빛과 바람 과 추움과 더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큰 어려움 없이 범사 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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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있어 참 행복하고 든든하다! 이해란

저는 중국에서 시집온 다문화 가정입니다. 2001년에 한국 사람과 결혼하였 고요, 결혼 3년째 어렵게 임신을 했는데 자연유산 되었고, 그 후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 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명절 때 시댁 부모님께 세배할 때마다 어머님께서 “올 해에는 꼭 애 낳아라!”라는 부담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애기를 갖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인가 갑자기 내 마음속에 입양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 습니다. “내가 낳지 않았지만 함께 살고 내 손으로 직접 키우고 돌보고 커가는 모습을 본다면 그것이 가족이지 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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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을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그러자고 동의하더라고요. 홀트아동복지회 를 인터넷으로 검색 후 연락하여 방문했고, 그 때가 2006년 이었습니다. 상담 하고 교육을 받고 기도하는 가운데 아들을 입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어머 니 반대가 좀 있었지만, 친정어머니는 항상 내 편이 돼 주셨습니다. 기도해주시 고 축복해 주시며,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처음 아들을 보게 된 날은 2006년 7월로 갓 태어난 지 2주 정도 되었는데 “우리 아들, 세상에서 그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 봐!”라는 말이 속으로 떠올랐 습니다. 자고 있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한눈에 반했어요!

얘는 내 아들이야!! 내 아기야!! 신기하게도 내가 낳은 것처럼 당장 집에 안고 가고 싶었지만, 절차상 며칠 후 아기를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데려오기 전 며칠 동안이 정말 몇 년 같았어요. 내 아이를 남에게 맡긴 것 같아 불안하고 안절부절 힘들고, 드디어 데리고 집에 오는 날은 잔칫날이었어요.

동네 분들, 교인들, 다 아이를 보러왔습니다. 모두가 응원해 주시고, 안고 사진 찍고, 기쁨과 축복이 넘치는 날이었어요. 그 후 우리 집 빨랫줄에 아기 옷이 널 리게 되었고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없었습니다. 내 눈에 사랑하는 우리 아들 이 커가면서 혼자라 외로우면 어쩌나,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에 아들이 8살 되던 해 동생을 입양하기로 하고 결심한 김에 바로 아들과 아빠와 동행해서 교육을 받으러 홀트아동복지회 인천사무소에 갔는데 온종일 교육을 받으면서, 아들이 “아빠! 나두 여기서 데려온 거야?”라며 물어보더라고요.

가슴이 철렁했고, 아빠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 어쩌면 지금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고, ‘이제 입양 사실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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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아, 넌 여기서 데려온 것 맞 아!”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아들아, 하나님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엄 마가 하나님께 아들 달라고 기도했더니 그 많은 아이 중에 너를 주셨어! 우리 가 가족이 되어 엄마, 아빠가 너로 인해 얼마나 행복했고, 우리 교회 식구들도 너를 너무나 예뻐해 주고 자랑스럽게 대해 주는지 몰라! 가족들 할머니, 고모, 큰아빠 다 너를 얼마나 예뻐하고 사랑하는지, 너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어!” 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사연을 알고 있는 데로 전부 얘기해 주었 고, 어린 시절 우리 아들과의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들을 얘기해주었습니다. 아 들은 “엄마 또 얘기해 줘” 하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입양을 받아들임으로서 공 개입양을 하게 되었고,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하나 우리 아들 놀라지 않아야 할 텐데, 당황하지 않아야 할 텐데, 늘 기도하고 고민했지만 하나님의 때 가장 좋 은 시기에 알리게 되었고 우리 아들은 조금의 상처나 어색함 없이 잘 받아주었 고, 지금은 벌써 중3이 되었습니다.

너무 든든하고 씩씩하고 착한 우리 아들은 보기만 해도 든든하고 사랑스럽습 니다. 집안의 사소한 일에 나는 당황해도 아들은 나를 위로해 줄줄 알고, “엄마 우리 예배하자! 기도하자!” 하면서 힘든 상황에서도 잘 극복하는 아들입니다.

우리 딸은 아들이 8살 때인, 2015년 초에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동생이 생겼으니 엄청 좋아하였고, 둘이 같이 노는 모습만 봐도 너무 행복합니다. 시어머님은 처음에는 반대하셨지만, 지금은 애들을 너 무 좋아하시고 예뻐하십니다. 지금은 우리 딸이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 고, 학교생활을 아주 재밌어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주 옷을 좋아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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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에도 몇 번씩이고 옷을 갈아입어 보면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만족해합 니다. 애교도 많고 아이돌 춤을 혼자서 잘 따라 하며 놀던 딸은, 아들이랑은 참 느낌이 다릅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딸도, 아들도 잘 키워 볼 수 있는 축복을 받았고, 친한 친구들은 저한테 이렇 게 말합니다. “넌 참 착하다. 남 애 데리고 키우고, 내 애처럼 그 애들 참 복 받았 다.” 저는 그 말을 참 듣기 싫어해요. 남의 애가 아니고. 내 아기들이야! 내가 마 음으로 낳은 거고, 우리 부부가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사랑을 쏟는 것으로 보이 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우리 부부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있어 너무 행복한 가정이 되었고, 자녀들 덕에 부모가 될 수 있었 고, 아이들로 인해 삶에 힘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자선활동 하려고 아이를 키우 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가족이고, 서로를 위합니다. 사실 아이들이 우리에 게 더 큰 힘이 됩니다. 없으면 안 될 존재입니다. 아들, 딸 덕분에 삶의 이유가 생 겼고, 부모의 마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이 놀라고, 걱정하고, 힘들고, 고민될 때도 있었지만 그 래도 기쁨이 더 크고, 감사가 더 많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아 이들에게 우리 아들, 딸이 되어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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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네 이야기 송경준

저는 군 제대 후 사회복지학으로 학업을 마쳤고 27세의 나이로 사회복지시설 에 사회복지사로 입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고향인 전라남도 지역보다 수도권의 사회복지사 급여가 좀 더 많았기에 막연하게 구인정보를 검색하던 중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장애인거주시설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거 동이 어렵거나 중증 발달장애가 있는 이용인 7명을 케어 하는 업무를 담당하였 습니다. 꼬박 7년을 같은 이용인과 동거동락 하였습니다. 제 아내도 같은 업무를 하는 사회복지사였습니다. 여성 장애인을 케어 하였는데 제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멋져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얻고자 계속 노력하였습니다. 작은 키에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닌 저였지만 제가 하는 일에 만족감과 자신감이 컸고 왠지 모르게 부부가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생겨 포기하지 않고 구애를 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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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마침내 지난 2009년, 28세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아내의 성 격은 달랐지만 대화가 꽤 잘 통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가감 없 이 나누면서 사회생활의 지혜도 얻고 조언도 나누었습니다.

제 형제들은 모두 28세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자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 지셨던 부모님의 성화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혼을 미루지 말라셨습니 다. 아마도 옛날 분들이라 직장생활하면서 자녀의 만혼으로 걱정하는 주위 동 료들을 보면서 내 자식은 30세를 넘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 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짝이 있었기에 28세에 결혼하여 모두 가정을 이루고 있 었고 저도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을 것 같다는 저만의 확신이 있었기에 되도록 해를 넘기지 않아야겠다고 판단하고 지금의 아내에게 집에 인사가겠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교제 후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던 때였 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방문한 처가(경북 포항), 처음 뵙는 장인장모님과의 식사자리 에서 저의 결혼의사를 전하였습니다. 장인장모님은 모두 놀라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의 아내 형제관계가 3녀1남인데 아내는 그중에 셋째, 그러니까 위 로 두 언니가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는데 아직 혼사가 없었던 상황이라 위에서부터 혼인이 이뤄졌음해서 서두르지 않았으면 하는 게 당시 장모님의 생 각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식사자리에서 말씀을 아끼셨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버님과 독대로 약주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아버님께 그동안 제가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 그리고 삶에 대한 비전 등을 말씀 드리게 되었고 마음에 변화가 있으셨던지 그 자리에서 결혼을 승낙해 주셨습니 다. 위로 혼인 전인 언니가 2명이 있었지만 마음을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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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를 물으시기에(당시 3월경이었음) 올해를 넘기지 않고 가을쯤이면 좋겠다 고도 말씀드렸습니다. 한번 계획이 설계되자 결혼준비는 일사천리였습니다. 제 장인어른의 성격이 이러셨습니다. 워낙 꼼꼼하시면서 사고도 깊으셨지만 한번 결정이 나면 추진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2009년 가 을 그러니까 9월 13일에 경북 포항의 모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신혼집은 서울의 중랑구 상봉동에 차리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게 되면서 아내는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보육원으로 이직하였습니다. 14년 전엔 한 직장에서 부부 가 근무하는 것이 관례상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저는 아내를 꽤 많이 사랑합니다. 내성적이었지만 제 고민을 나누고 대화하 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늘 공정하고 이성적인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대화가 잘 통하고 남녀로 사랑하니 더 이상 바랄게 없었지요. 지난 2001년엔 첫째를 얻었 습니다. 그러면서 전라남도에 계시던 부모님을 서울로 모시게 되었고, 6년 동안 맞벌이로 일하였습니다. 한편으론 사회복지사 급여가 생각보다 적어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맞벌이를 하고 싶어 하는 것 이 아니라 서울 생활을 하려다 보니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첫 째 아이를 출산하고서도 충분히 쉬지 못하고 3개월 출산휴가 후 바로 복직하여 근무하였습니다. 그만큼 14년전 만에도 사회복지계 근로여건이 지금보다도 많 이 열악하였습니다. 남편으로서 부족하고 미안한 마음에 괴로워도 하였지만 내 가 더 열심히 살고 더 열심히 사랑하자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힘내자고 했던 지 난 14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첫째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저희 부부는 결혼을 계획할 때 대화하였던 당시의 초심을 떠올렸습니다. 다름 아닌 입양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해외로 입양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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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동에 대한 측은지심이 있었고 아동인권 측면에서도 저희 부부가 할 수 있 는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 오던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것 이 지난 2016년이었습니다. 출산 후 심장수술이 있었고 후유증 등으로 장애가 발생될 수 있다는 상황을 접하였지만 더욱 더 저희 부부가 역할이 있다 판단되 어 둘째 아이를 입양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나라 나이로 7세, 그러니까 만 6세가 되었습니다. 저희 둘째는 선천성분열뇌증이란 진단으로 현재 뇌병변장애 경증 (舊 4급 해당)에 등록되어 있으며, 장애아동통합 어린이집과 국립재활원, 장애 인복지관, 대학병원, 아동재활센터 등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재활과 회 복 운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맞벌이를 할 수 없었으나 제가 감당 할 수 있었고 국가의 사회복지망도 점점 더 강화되었기에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것이 힘든 부분도 물론 있지만 한 번도 입양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둘째는 첫째보다 성격이 더 밝습니다. 오빠를 너무 사랑하고 엄마와 아빠를 너무 좋아해 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1주일 내내 어린이집과 국립재활원, 대학 병원, 재활센터, 장애인복지관에서 재활과 운동으로 가장 바쁜 스케줄을 소화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씩씩하고 밝게 운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초기재활 운동과 개입이 적절하여 처음 주치의가 우려했던 인지능력, 학습능력과 시각능 력, 언어능력이 비장애인의 그것과 비교해도 잘 체화되고 있어 힘든 가운데도 열심 내어 주는 둘째가 대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2018년 가을 무렵 저희 부부는 한번 더 가족회의를 하였습니다. 바로 삼형제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2009년 결혼에 대한 이야기 가 오갈 때 저희 부부는 3명의 자녀를 양육하는 어른이 되자고 약속했었는데 둘째의 회복운동에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다보니 자연스레 셋째에 대 한 생각이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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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첫째아들과 함께한 몇 차례의 가족회의 끝에 저희 부 부는 셋째의 입양을 추진하기로 하였고 입양기관에 의사를 전하였습니다. 두 번째의 입양은 입양기관이나 법원에서도 절차가 까다로웠습니다. 면접과 심사 과정에서 부모로서의 역할에 대한 무게감이 느껴졌었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 을 다해 심사에 임하였고 마침내 2019년 지금의 셋째를 만났습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2021년입니다. 어느덧 세 살이 된 저의 막내는 저희가정 의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족은 독수리오인(독수리오형제 패러디)이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대화가 오가고 다양한 감정이 오갑 니다. 그야말로 ‘체험! 삶의 현장’입니다.

11살인 첫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고, 7살인 둘째는 어린이집의 맏이가 되 었고 이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3살인 셋째는 가정어린이집의 마 스코트가 되어 오빠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루 에피소드가 없는 날이 없을만큼 다채롭고 숨가쁜 하루하루지만 반대로 아이들이 있기에 저 희 부부도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낍니다.

누군가는 사서 고생을 한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차별의 시선을 저희 가족에 게 보내기도 했던 지난 세월이었지만 장애도, 입양도 저희 가족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 해 보호자역할을 하겠노라 다짐했던 마음도 변함이 없습니다.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아이들이기에 언제나처럼 든든한 울타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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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줄 것이며, 당당한 한 성인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약속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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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2 사진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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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예쁜 날 신동필

코로나로 집콕하다 날씨가 너무 좋아 완주둔산공원으로 고고~

하늘이 예쁘다한들 우리아이들의 웃음보다 예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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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는 수박이 좋아! 김부연

해맑은 수빈이는 수박을 아주 좋아 했다.

캠핑을 즐기던 아빠는 수빈의 밝은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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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신랑이 환하게 웃고 있네요 이성문

첫 돌을 맞이한 둘째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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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유랑단 김은주

2021년 1월 단양으로 가족여행을 갔습니다. 재미 삼아 흑백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처음엔 어찌나 포즈가 어색하던지 사진작가가 괜찮다고 무한 칭찬을 해주었어요. 다행히 재미있는 사진이 나왔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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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 가족 윤랑기

점점 닮아가고 있는 완전체 붕어빵 가족. 코로나로 집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낮에 수원 팔달문에 가서 정자에 앉아 간식도 먹고 소소하게 몸 게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물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꽉 차게 인물 사진을 찍고 나면 뿌듯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점점 커가는 모습도 매년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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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나의 보물들 최현양

올해 5월에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3박 4일 전남 신안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리조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다 같이 잠자리에서 찍어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힐링도 하고 유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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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청춘 문민

순천 영화 세트장에서 맨발의 청춘 영화 간판을 보고 우리도 청춘이라고 엄마는 큰 딸을, 아들은 아빠를 업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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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형제들 손선영

사이좋을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지만

우리는 서로 힘이 되어 주는 든든한 가족~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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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고마워 축복해 김기림

희엘이에게 아빠와 엄마가 사랑을 가득 담아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존재만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귀한 희엘아 사랑해! 우리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너의 모든 순간을 축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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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배를 탄 우리 진유연

결혼으로, 출산으로, 입양으로 서로 달리 가족이 되었지만 다름이 틀림이 아니기에,

즐겁게 행복하게 한 배를 타고 함께 나아가는 가족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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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입양홍보회 소개 | 설립목적 합국입양홍보회(MPAK : Mission to Promote Adoption in Korea)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정을 필 요로 하는 아동들이 가정을 찾을 수 있도록 국내입양을 홍보-장려하고, 아동이 건강하게 양육될 수 있게 입양아동 및 입양가정의 복지, 권리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 주요사업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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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가족 자조 모임 운영 각 지역별 입양부모 중심의 자조모임 운영 입양가정 지원 사업 영유아가정 기저귀 지원, 건강기능식품지원, 입학아동 물품 지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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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관련 각종 상담 예비입양부모 및 입양부모들을 위한 입양 관련 상담 및 입양자녀 양육 상담 입양홍보사업 각종 언론매체를 통한 언론보도, 캠페인 활동, 입양정보제공, 전국 입양 가족대회 개최 등

04

교육 및 연구사업 입양아동 및 입양부모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각종 교육기관 및 단체를 대상으로 한 반편견입양교육 실시, 입양관련 연구 실시

| 회원가입안내 회원이란?(회원가입은 개인을 원칙으로 합니다.) 입양부모 또는 만 19세 이상 성인 입양인 중 매월 1만원 이상의 회비를 납부하는 자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는 교부금 사업을 제외한 모든 사업 및 기관 운영에 필요한 제반 경비는 회원들 의 회비와 후원금을 통하여 충당되고 있습니다. 회비 납부는 회원의 의무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입양문 화 발전을 추구하는 한국입양호보회의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입니다. 입양가족들의 보다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 가입안내 TEL 031-246-8301

FAX 031-246-8351

WEB http://www.mpark.org

▶ 자동이체 (예금주 :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 국민은행 516801-01-040123 신한은행 140-007-061820 우리은행 167-364235-13-101 농협 377-17-00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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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CMS 후원·회원 신청서 자택 전화번호 이

름 핸드폰

소 소식지 수령여부

□예

□ 아니오

직업·직장

이메일

후원회원

□ 후원회원 (본 회의 사업과 활동을 돕기 위해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납부하는 회원)

후원·회원 가입 신청 (해당칸에 V 표시)

입양가 족 회 원

입양 가족 회원 □ 부(父)만 가입(CMS 회비 1만원 이상) □ 부/모 모두 가입(CMS 회비 2만원 이상)

□ 모(母)만 가입(CMS 회비 1만원 이상) □ 기타

1) 정 관 제6조에 의거, 회원가입은 부모님이 각각 따로 가입하셔야 하며, 입양자녀(만19세 이상) 도 개인 가입을 원칙으로 합니다. 2) 입양 가족은 정관에 의거, 회비를 개인단위로 납부하며, 가족 합산하여 납부 가능합니다. CMS 후원/회원 납부 정보(금융결제원-CMS 자동등록) 생년월일(주민등록상) 예금주명 사업자등록번호(사업자의 경우) 은행명

계좌번호

이체 희망일자 월 이체금액 이체결과 문자 수신여부

□예

□ 아니오

본인은 위의 내용을 허위 사실 없이 성실히 기재하였으며,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의 CMS 후원·회비 납부를 신청합니다. 신청일 : 20   년    월    일

신청자:      (서명)

CMS(Cash Management Services) - 금융결제원이 후원자님의 거래은행 지정계좌로부터 약정하신 금액을 인출하여 (사)한국입양홍보회 계좌로 입금해 주는 방식입니다. - 위의 양식을 작성해주시면 은행에 가시는 불편없이 자동납부이체신청이 됩니다. - 취소를 원하실 경우 사무실(031-246-8301)로 연락주시면 바로 처리해 드립니다. - 보내주신 후원금 및 회비는 연말정산시 세금공제 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기부영수증은 이체 신청하신 예금주 본인의 명의로만 발급됩니다. 기부금영수증 이중발급 및 허위 발급에 대한 제재 강화 및 투명성 확보를 위해 명의를 변경하여 기부금영수증을 발급 받는 것은 불가능하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립니다.

신청방법

① 이메일 : mpakorg@naver.com     ② 팩 스 : 031-246-8351 ③ 우 편 : 16435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덕영대로 693 풍성프라자 604호 ④ 사무실 방문 등 편리하신 방법으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기회로 꽃피운 행복, 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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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기회로 꽃피운

행복, 입양 발 행 인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회장 : 이관훈)

주    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덕영대로 693, 604호(화서동, 풍성프라자)

전    화

031-246-8301

팩    스

031-246-8351

홈페이지

www.mpak.org

초판인쇄

2021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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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격

비매품

이 책은 입양인식개선을 위하여

의 지원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기 회 로 꽃 피 운 행 복 ,

2021년 입양가족 이야기

기회로 꽃피운

행복, 입양

입 양

2 0 2 1 년 입 양 가 족 이 야 기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 한국입양홍보회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정을 필요로 하는 아동들이 가정을 찾을 수 있도록 국내입양을 홍보ㆍ장려하고, 아동이 건강하게 양육될 수 있게 입양아동 및 입양가정의 복지, 권리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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