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Destinées 운명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의 ≪POÈMES COMPLETS−Poèmes antiques et modernes / Les destinées≫ (Éditions Gallimard et Librairie Generale Française, 1967)를 원 전으로 사용했습니다. ∙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아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했습 니다. ∙ 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 각주는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입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다. ∙ 뒤표지의 글은 옮긴이가 원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문장을 직접 뽑아낸 것입니다. ∙ 표지에 사용한 색상은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을 위해 개발한 고유 색상입니다. ∙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은 환경인증서를 획득했습니다. 표지와 본문에는 모두 친환경 재질을 사용했습니다.
늑대의 죽음
I 연기가 불길 위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듯 구름은 불붙은 것 같은 달 위로 달려가고 있었고 숲은 지평선까지 시커멓게 보였다. 우리는 말없이 젖은 잔디를 밟으며, 빽빽이 들어선 히스 숲, 키 큰 가시나무 숲을 걷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랑드 지방의 소나무 같은 소나무 숲에서 우리가 뒤쫓던 떠돌이 늑대들이 남긴 발톱 자국들을 발견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숲도 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파른 돌에 기댄 채, 팔꿈치를 베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독한 첨탑들과 그 아래의 떡갈나무 밑에서 땅 위로 높이 부는 바람이 스치고 있었을 뿐, 단지 애수에 잠긴 듯 바람개비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를 낮추고 늑대 떼를 찾고 있던 사냥꾼들 중 제일 연장자가
96
몸을 굽히고는 모래를 살펴보았다. 아직 한 번도 틀려 본 적이 없는 그는 방금 지나간 자국들은 두 마리의 큰 살쾡이19)와 살쾡이 새끼 두 마리의 발자국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단도를 잡고는 빛나는 총부리를 감춘 채 한 걸음 한 걸음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사냥꾼 세 명은 걸음을 멈추었고, 나는 그들을 찾다가 갑자기 이글이글 타고 있는 두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주인이 돌아올 때 사냥개들이 큰 소리로 반기는 것처럼 히스 나무 숲 한가운데서 춤추고 있는 네 마리를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흡사 춤추는 것 같았다. 그들의 적인 인간이 자기들 곁에서 잠든 척하면서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늑대 새끼들은 조용히 놀고 있었다. 그들 아버지는 서 있었고 멀리에는 그의 암늑대가 로마인들이 숭배했던 반신 레무스와 로물루스20)를 품었던
19) (원주) 일반적으로 스라소니를 가리킨다(여기서는 라틴어 어원에 근거해 사슴 을 공격하는 늑대라고 비니는 생각한다−옮긴이 첨가). 20)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들로 팔라티누스에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레무스는 나 중에 로물루스에게 살해당한다.
97
옆구리 털이 복슬복슬한 이리를 본뜬 대리석 상처럼 나무에 기댄 채 쉬고 있었다. 늑대는 와서 앉는다. 늑대는 다리를 들어 갈퀴 같은 발톱을 모래 속에 박았다. 뜻밖에 당한 일이라 퇴로는 막혔고 살길이 없다고 늑대는 판단했다. 늑대는 불타는 듯한 아가리로 헐떡이고 있는 가장 용감한 개를 물었다. 그는 자기 살을 꿰뚫은 우리의 총탄에도, 십자로 가로질러진 우리의 날카로운 단도에도 불구하고 강철 같은 턱을 벌리지 않았다. 목이 물린 개가 죽어서 늘어진 후에야 늑대는 개를 내려놓고 우리를 노려본다. 칼은 그의 허리 깊숙이 꽂혀 손잡이만 보였다. 칼은 피로 젖은 잔디밭에 그를 꼼짝 못하게 박아 놓았고, 총구들은 험상궂은 초승달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다시 우리를 노려보더니 눕는다. 쏟아지는 피를 핥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채 커다란 두 눈을 감고 말없이 죽어 간다.
98
II 나는 탄약 없는 총구 위에 이마를 올려놓은 채 암늑대와 그의 새끼들을 추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세 마리는 수늑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새끼 늑대가 없었다면 아름답고 슬픈 과부는 수늑대 혼자 그 큰 고통을 당하도록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의무는 자식들이 배고픔을 이기고, 인간의 앞잡이로 사냥하는 비굴한 동물과 인간이 맺은 도시의 협약 속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새끼들을 구출해 내는 것이었다. 숲과 바위의 첫 소유자들이여.
III 위대한 인간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아! 아!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들이란 말인가! 어떻게 죽어야 하며 모든 악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다. 숭고한 동물들이여, 이 땅 위에 존재하는 것,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침묵만이 위대하고 나머지는 나약한 것이다.
99
아아, 야생의 방랑자여, 이제 너의 뜻을 깨달았으니 너의 마지막 눈초리는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그 눈초리는 말했다; “할 수 있다면 노력하고 심사숙고하여 너의 영혼이 숲 속에서 태어난 우리가 맨 처음 올랐던 고결한 지고의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하라. 신음하는 것, 우는 것, 기도하는 것은 모두 비열한 일이니, 운명이 너를 부르려는 길에서 너의 길고도 무거운 책무를 힘껏 다하라. 그러고는 나처럼 고통을 당하고 말없이 죽어 가라.”
100
플루트
I 나는 어느 빈자가 오래된 대리석 벤치 위에 가방과 모자를 놓아둔 채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서 검은 빵 한 조각을 급히 먹어 치우고는 몽상에 잠기기 시작하는 걸 보았다. 그는 길게 이어지는 오솔길에서 슬픈 노래를 듣기 위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었다. 행인들은 사방으로 바삐 가 버렸다. 행인들과 함께 동냥거리도 사라졌으니 좁고 딱딱한 침대와 더러운 숙소의 쓰디쓴 만찬 값으로 치르기에도 모자랄 것 같은 동전밖에 없다. 그는 천천히 순교를 준비하는 신도처럼 품에서 플루트를 꺼냈다. 그는 턱을 떨면서 리드에 입을 댔다. 숨을 불어넣으며 키를 눌러서 무릎을 구부린 채 플루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음색을 고르려고 했지만
101
그의 수고는 헛된 일이었다. 볼품없는 연주자를 이해하려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부드러우면서도 슬픈 그의 시선, 반항심과 오만함이 가득한 그의 시선을 기다리지도 않고 낡아 빠진 예술가의 모자에 한 손을 가져갔다. 그 모자는 보잘것없게 낡아 있었다.
II 그는 나에게 괴로운 삶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 언제나 우리를 부르는 악마에게 떠밀려서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무엇도 성공하지 못했다. 완전한 혼돈은 악마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건 갑작스러운 비약에 불과했으며, 광적인 야심에 불과했고 유산된 시도에 불과했고 말로만 위대할 뿐이었다.
처음엔 지나친 오만함으로 정면에 있는 거대한 게시판처럼 고상한 태도로 파리에서 산책하느니; 나폴레옹과 바이런, 시인과 대위 의원인 동시에 수도원장,
102
(그건 모든 초등학생들에게 퍼진 전염병과도 같다.) 여러 물신들로, 몇몇 황금기로, 불교의 윤회 사상으로 무장한 범신론의 교주, 그는 마음속으로 그 사상들을 만들어 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철학 속에 혁신을 도입하고 싶어서, 범신론을 모든 것에 적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밀수입자들을 의심하고 있느니; 결점은 우리의 검에 의해 드러나고, 단 한 번의 미묘한 논쟁으로 그의 공은 터져 버렸다.
곤돌라를 감아올리기 위해 그는 바람이 흐트러뜨리는 것과는 다른 공들을 팽창시켰다. 사도들 때문에 지친 그는 그들의 수도복을 벗겨 버렸다. (그 자신이 먼저 호탕한 태도로 쓸쓸히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에 그의 걸음에는 당당함이 있었고, 알 수 없는 싸움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갑옷을 입어 아주 느릿느릿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더 심각하고 이중의 섬광으로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빛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러나는 상식, 그것을 고백하는 순진함은 말을 하면서 그의 핏기 없는 뺨을 물들이고 있었다.)
103
범신론자이든 아니든 수녀들을 내버려 둔 채 그는 자기 이름을 선미(船尾)에 적는다. 그러고는 바다 위 위선적인 별을 향해 항해했다. 항해술이 부족한 그는 공중으로 깃발을 올렸지만 곧 돛대 아래로 침몰해 버렸다. 앞에는 시커멓고 삭막한 물결뿐 아무것도 없었다. 폭풍우로 인한 가혹한 노동의 대양 물결은 수많은 생명들을 싣고 와서 부수어 버린다. 며칠 동안 맥없이 물결치면서 그의 영혼은 굴곡 속에 떠올랐다. 자주 절망하는 뗏목은 펼쳐지고 굶주린 어선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도 거기서 익사해 버린다. 그는 말했다. “나는 여인의 영혼만큼이나 약하고 가엾은 영혼을 가졌음에 괴 롭다.” 여인은 자신이 시작한 것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쓰러졌다. 미래의 사상이 보이자마자 사상의 빛은 나를 압도하고 굴복시킨다. 나는 물리칠 수 없는 장애물 뭉치가 커지는 것을 본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가다가 쓰러지듯 나는 쓰러진다.
104
사랑하고 두려워해야만 할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나를 괴롭힐 수 없는 너는 왜 나를 따라오는 거냐? −그 빛이 나를 괴롭게 하고 그 목소리가 나를 멍하게 한다. 나는 눈이 멀어 저주받았음을 느낀다.
III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소리친다.
“아니다. 옛 신앙의 위대한 법칙 속에도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냉정한 교리에도 선생의 의자와 학생의 의자 사이에서 궤변론의 문서로 우리를 만드는 가짜 아테네인들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보다 정신이 눈먼 사람을 비난할 한마디도 발견치 못했다.”
“스스로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고통을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자유하고, 충분히 무능해질 수 있다. 강자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폭풍우 치는 물결 속에 허약한 팔을 던지고 어느 호수의 얼음 도가니 속에 잠기고 깊고 깊은 화산의 잉걸불을 괴롭게 할 용기 있는 약자를 사랑한다.
105
이 영원한 시시포스는 아름답고, 홀로이며 심한 상처를 입었고, 다급하지만 한마디도 외치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다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를 잡으려고 심한 고통을 당하며, 짓눌리고 있다고 결코 고백하지 않는다. 만약에 너희들보다 더 높이 오른 영광스러운 정신이 업신여겨진다면 그들의 멸시를 무시하라. 모든 영광을 지배하는 모든 것의 정상 그들이 정상에 있지 않듯이, 그 눈은 정상을 믿을 수 없기 때문 이다. 우리는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그들의 발자국 앞에서 강한 자들은 밑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산을 발견해 낸다. 우리가 완전하다고 믿고 있듯이 선생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지식을 부당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가 헛되이 손대는 위대한 목표는 그러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정신을 억제하는 벽을 보았다. “몸은 빈곤함을 드러내어도 영혼은 그리하지 말자. 못된 수단들은 지혜를 이용하고 관계를 꼬이게 하고 학대하면서 그들이 이를 수 있는 일에는 손을 대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에는 손대지 않는다. 어느 조물주의 변변치 않은 해설자들
106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녀는 노래하며 그 나머지를 원한다고. 그리고 여기서 그대에게 비교해 주기 위해서이니 그대의 플루트를 보시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어 보시라. 진정 그 입술이 내고자 했던 소리가 그 소리인가? 다소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러운 소리였던가? 자, 모든 결점은 낡은 플루트 때문이다. 그대의 숨결은 당연했으나 그대의 노래는 틀린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 의심에서 몽상까지 이른 나를 위해서라면 나는 죽고 난 후 결합이 이루어질 때 영혼은 시력을 되찾고 광명을 보게 되리라고 믿는다. 조용히 그의 작품을 판단하면서 어려움 없이 이해하며, 쉽사리 알아차리며 하늘의 선녀들처럼 그녀는 강한 여왕이라는 것을, 그녀는 진정한 무게와 힘을 겨루고, 그의 숨결은 잘못된 악기 때문에 틀렸으니 그의 숨결은 영예롭지도, 비천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을 그녀가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다만 그 육체가 균형을 방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이상적인 행복감에 잠겨서 여호와의 성스러운 평등을 다시 취한다.”
107
IV 그때에 빈자는 뜻밖의 기쁨으로 얼굴이 붉어져서 색다른 시선으로 플루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잘 알고 있기에 내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고 존경의 표시로 내 얼굴에 두 번이나 입을 맞추었고, 자기의 진부하고 슬픈 모습을 떨쳐 버리려 트라피스트회 수도사가 노래하는 <살베 레지나>21)를 연주 했다. 측은한 그의 시선은 영감을 받은 듯했고, 음정은 정확했으며 숨결도 분명했다.
21) 성모에 대한 찬가로, ‘안녕, 여왕이여’의 뜻.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