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상담 2 죽음 그리고 자살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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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상담 2

죽음 그리고 자살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엮음 김선희 · 김성진 · 박병준 · 이영의 · 정세근 · 홍은영 지음

대한민국, 서울, 학이시습, 2015


철학과 상담 2: 죽음 그리고 자살

엮은이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지은이 김선희 · 김성진 · 박병준 · 이영의 · 정세근 · 홍은영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발행일 2015년 2월 13일 학이시습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46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learnignbooks@eeel.net www.commbooks.net Lifelong Learning Books 121-869 3rd F, 46 Worldcup north road Mapo-gu, Seoul,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학이시습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의 평생학습 전문 브랜드입니다. 저작권자와의 협의에 따라 발행했으므로,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 김선희·김성진·박병준·이영의·정세근·홍은영, 2015 ISBN 979-11-304-2107-0 94100 ISBN 978-89-6680-905-9 (세트) 책값은 뒤표지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머리말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가 2012년도에 ‘철학과 상담’이라는 제목의 총서 를 기획하여 1권 󰡔철학과 상담 1: 왜 철학상담인가?󰡕를 출간한 이후 주 위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학회의 여러 사정으로 우여곡절 끝에 총서 2권 󰡔죽음 그리고 자살󰡕을 마침내 출간하게 되었다. 한국철학상담치료 학회에서 이번 총서 2권의 주제를 ‘죽음 그리고 자살’로 채택한 이유는 죽음과 자살의 문제야말로 가장 오래된 철학적 물음이자 오늘날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긴박한 현안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예고 없이 운명처럼 다가오 는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또한 인간이 미리 앞당겨 자신의 죽음 을 예견함으로써 실존적 자각을 돕는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다. 죽 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은 그저 두렵다. 죽음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무(無)’ 처럼 다가와 모든 것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죽음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도 인간 곁에 머물면서 인간을 괴롭힌다. 자기 무화로 인한 허무와 절망, 소외와 고독, 그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어두움이다. 우리 는 어느 날 불현듯 찾아 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견디기 힘든 단절 을 체험한다. 죽음은 그렇게 예측 불가능하게 인간의 통제 밖에 서 있다. 이 통제 불가능성이 인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설적이지 만 죽음의 불안이 오히려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라너(K. Rahner)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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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처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빗대어 ‘죽음은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도둑처럼 다가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인간에 게 죽음 그 자체는 신비스러운 현상이다. 죽음이 인간에게 신비스러운 사건인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죽음을 자각하고, 죽음에 대처하는 존 재, 즉 인간은 죽음의 직접성에 놓여 있기보다 오히려 죽음을 자기에게 매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야스퍼스(K. Jaspers)는 죽음을 인간의 ‘근본상황’이자 ‘한계상황’으 로 규정한다. 인간은 죽음의 한계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 을 해야만 하는가? 죽음의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이 죽음의 불안을 극복 하고 삶의 의미 발견을 통해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 가? 그레스하케(G. Greshake)의 주장처럼 ‘죽음보다 강한 희망’은 신앙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죽음은 오래전부터 종교적 문제 요 철학적 문제였다. 그러나 오늘날 죽음에 대한 이해는 이 고상하고 경 건한 영역 안에 더 이상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과학기술과 현대 문명 의 발전과 더불어 이제 죽음의 이해 영역에 종교와 철학 대신 의학과 생 물학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죽음에 대한 이해로는 여전 히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실존적 어둠의 장막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역부족이다. 인간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의 불안을 해소하기에 는 자연과학의 지식이란 여전히 미소할 따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작정 종교에 의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삶 또 한 자신의 실존적 투신을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기에 죽음을 해결하고자 무작정 종교에 의탁하는 일은 오히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도전적 삶이 되어 버거움이 배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현 실 앞에서 철학에 눈을 돌리게 된다. 분명 종교가 죽음을 이해하고 극복 하는 데 도움은 되지만, 인간의 실존적 삶을 해명하고 거기로부터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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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해하는 일은 철학적 작업으로 남겨진다. 왜일까? 인간은 진정 사유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죽음을 인간의 본래적 실존을 가능케 하는 계기요 ‘죽음의 인간화’를 촉구하는 삶의 본질적 요소로 본다. 인간은 실존의 본래성에 입각해 근본적으로 죽음 앞에서 불안한 존재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다. 죽음과 진정으로 대면하는 자는 결 코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죽음이야말로 자신을 성숙시키는 계 기이자 삶의 단절이 아닌 삶의 영원한 영속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 명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거듭 태어나는 존재다. 이러한 사 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죽는다는 사실이 종말론적 사건이 아니 라 아렌트(H. Arendt)의 말처럼 죽음을 탄생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긍정 적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은 ‘기다림’이 아니라 ‘맞이함’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죽음의 운명을 필연적 사실로 받아 들이면서도 부단히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거나 혹은 죽음에 무감각하다. 케이건(S. Kagan)의 주장처럼 우리는 죽음을 애써 망각하고 터부시하는 문화에 익숙하다. 이 죽음 망각의 문화 속에서 우리가 읊조릴 수 있는 자 기암시적 말은 그가 말한대로 고작해야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죽어! 그래서 잘 살아야 해!” 정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부해 보이기 까지 한 이런 자기암시적 읊조림이야말로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 는 인간의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문제 인식에서 출발한 총서 2권의 출간 목적은 자살 충동, 죽 음에 대한 공포,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 등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삶의 문제를 철학상담의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죽음을 앞둔 환자, 자살 충동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 그리고 사별 가족처럼 실제로 많은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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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하 는 데 있다. 철학상담은 죽음의 문제를 종교적 연관성보다는 실존론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내담자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책에 실린 죽음에 대한 철학상담적 해명이 독자로 하여금 죽 음이 절망만이 아니라 자기실현의 중요한 장임을 충분히 인식하게 해 줄 것이다. 이 책은 크게 2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3개 장으로 구성되 어 있다. 1장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우리 시대 죽음 담론이 만들어 내는 현상들을 푸코의 담론이론과 아리에스가 고찰한 죽음의 역사를 통해 탐색한다. 2장은 철학상담의 실천적 적용이 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상담의 기본 원리 10단계를 소개 한다. 3장은 고전으로 사랑받고 있는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분 석한다. 이를 통해 저자 자신의 고유한 철학상담 방법인 ‘초월적-3인칭 적’ 상담 기법이 소개된다. 2부 역시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죽음과 직접 관련되 어 있으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긴박한 현안인 ‘자살’ 문제를 다룬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자살사망률은 2013년에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하루 평균 39.5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다. 이런 사회 현실을 고려해 자살 충동으로 고통받는 내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 을 줄 수 있도록 구성했다. 2부의 시작인 4장에서는 인지치료의 이론적 구조와 자살 예방의 철학적 토대를 철학상담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5 장에서는 자살에 관한 세 가지 접근 방식을 소개한다. 정신분석이나 로 고테라피와 구별되는 ‘목적론적 철학상담 방법론’의 관점에서 논의한 다. 마지막 6장에서는 ‘심리부검’처럼 자살 예방 차원의 일환으로 철학 상담에서 죽은 사람의 내적 정보, 즉 자살로 죽은 사람의 세계관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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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 같은 철학적 요인들을 수집하는 ‘철학적 부검’의 방법을 제시하 며 그 가능성을 타진한다.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이 새로운 시작은 삶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영속성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의미한 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해석 앞에서 부정적 자살은 그 의미를 상 실한다. 이 책이 삶을 새롭게 가꾸려는 일반 독자들이나 철학상담에 관 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경자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출판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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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머리말 · v

1부 죽음에 대하여 01

우리 시대의 죽음 담론에 대한 시론: 푸코의 담론이론과 아리에스의 󰡔죽음의 역사󰡕를 통하여 · 3 홍은영,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02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과 철학실천: 철학상담에의 적용을 위한 ‘초월적-3인칭적’ 방법론 모색 · 33 박병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03

철학실천에서 죽음 상담의 원리 · 64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2부 삶에 대하여 04

절망의 심리학과 철학, 그리고 자살 예방 · 93 김성진, 한림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05

자살에 대한 세 가지 접근: 정신분석, 로고테라피, 목적론적 철학상담 · 129 이영의,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HK교수

06

자살과 세계관: 염세적 세계관의 해독제로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 161 김선희, 강원대학교 철학과 교수

부록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소개 · 191 철학상담치료사 자격증 철학상담치료사 자격규정 개정안 및 시행세칙


1부 죽음에 대하여



01 우리 시대의 죽음 담론에 대한 시론: 푸코의 담론이론과 아리에스의 󰡔죽음의 역사󰡕를 통하여 홍은영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들어가는 말 우리 시대에 통용되는 죽음에 관한 담론은 다양한 영역에서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등장한다. 의학에서는 장기이식이나 안락사 등과 관련하여 생물학적 죽음 정의와 고투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인 층에서뿐만 아니라 청년층에서도 급격히 증가하여 사회적으로 문제 되 고 있는 자살 현상을 인간 삶의 문제로 이해하기보다는 정신의학이 마 련해 준 의학적 기반에 의거해 질병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자살을 예 방한다는 보건복지부의 명분 아래 무수히 양산되고 있는 자살방지센터 나 협회 또한 죽음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폭넓게 이해하기보다는 우울증 과 같은 질병 메커니즘에 묶어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제 우리 삶의 맥락에서 죽음은 멀리 치워진 지 오래다. 종교계에서도 교 리의 세속화 과정을 통해 윤회, 영생, 영혼의 문제 등을 매개로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거나 통찰하기보다는 현세를 통제하기에 바쁘다. 또한 점 점 비대해지는 의료 자본과 기업화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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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물질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반세기 전에, 아니 200 년, 300년 전에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했을까? 지금과 같 은 방식으로 이해했을까? 이 글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과정, 그리고 체험이 보편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 시대의 특수한 담론 에 불과한 것인지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담론이론과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ès)가 고찰해 온 죽음의 역사를 통해 접근해 본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 죽음 담론이 만들어 내는 현상들을 탐색하고자 한 다. 이러한 검토 과정을 통해 계몽주의 이념 아래 과학적 계량화와 의료 화 과정에서 죽음에 관련된 현상들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도 잘 드러 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차후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죽음에 대한 관념 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그리고 관련된 지식체의 출처를 분석하는 데 에도 기초 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아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 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과거의 지배적 관점에 동화되지 않고 현재를 바라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죽음 담론과 관련하여 ‘참’으로 받아들이는 지식과 절차 속 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문제점을 분석할 수 있는 토대가 되리라 생각 하며, 죽음 현상에 관해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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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죽음 관념 인간과 죽음의 역사에 관해 방대한 저작을 남긴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 리프 아리에스는 과거 공동체 시대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행 위가 아니라 개인과 그가 속한 혈족 혹은 공동체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 고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즉, 공적이고 사회적인 사실이었던 셈이다. 죽음의 의례를 통한 유대감은 개인을 종의 과거와 미래에 종속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 속으로 편입시켰다. 이때 의식의 마지막 절차는 늘 즐거운 축제의 성격을 띠었다. 이처럼 죽음은 개인적 차원의 비극이 아니라 종의 연속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책무를 안고 있던 공동체 전체의 시련이었던 것이다(Ariès, 1977:13∼35). 현대에 오면서 의학은 죽음을 감정이 추방된 병원이나 과학적 실험 실에 감금시켰다. 과거 공동체 사회에서 경험했던 죽음 문화가 사라진 오늘날의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이르기까 지 애도 행위를 존중하면서 죽음의 의식을 중요시 여기던 공동체가 어 떻게 해서 자신의 역할을 전복시켜 오히려 그것을 금지하기에 이른 것 일까? 아리에스는 공동체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의 강도가 점차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Ariès, 1977:80∼81). 즉, 기술의 진보, 특히 의학의 발달로 야생적 자연 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공동체가 스스 로 인식하게 되었고,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합체가 공동체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에 오면서 빠르게 진행된 현대 의학기술의 급진적 발전으로 의 학 지식의 차원에서 현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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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장비 덕분에 질병에서 죽음 그리고 장례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의료 서비스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가정의 임종은 시 골에서나 간혹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희귀한 현상이 되어 버렸다. 죽음은 의료 장비를 통해 연장될 수 있게 되었고, 마지막 순간은 의료 기기들에 둘러싸여 의료 관료의 행정절차를 통해야만 인증된다. 이처럼 병원에서 죽음은 통증 완화를 위한 의학적 기술의 진보, 제도적으로나 물리적으 로 그 기술을 가정에서 실시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멸균·청결과 위 생이라는 과도한 감수성이라고 하는 세 요소에서 비롯되었다(Ariès, 1977:577∼588). 아울러 이제 죽음의 시간은 연장되고 세분화되었다. 그리하여 죽음 은 기능 마비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고, 의사에 의한 외관적 소 견보다는 뇌 기능이나 뇌전도 측정을 통해 확인되는 시대가 되었다. 호 흡 보조 장치가 죽음의 순간을 연장시키며 이제 의료기술은 죽어 가는 환자를 회복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생명을 거의 무한정 존속시킬는지도 모른다. 의료기술뿐 아니라 의학과 병원, 다시 말해 일정한 절차와 엄격 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의료 생산 활동을 행정화, 기업화하는 모든 조 직과 기관이 여기에 참여하고 일정한 의미에서 생산적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 시스템에 개인의 선택 문제가 들어서며 그동안 공 들여 분리해 놓은 삶과 죽음이 격론과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치료를 중단하거나 연장하려는 권리의 문제인 안락사다 (Ariès, 1977:585∼586). 오늘날 죽음은 일정한 시기에 찾아오는 자연현상으로 인식되지 않 는다. 죽음은 일종의 실패한 사업이 된 것이다. 일단 죽음이 찾아오면, 이 죽음은 하나의 사고 혹은 무능력이나 서투름의 징표로서 곧 잊혀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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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어느 날 갑자기 의식하지도 못한 채 죽는 죽음은 옛 시대로 거슬러 올 라가 저주받은 죽음에 해당되어 급사나 돌연사,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 이에 이루어지는 죽음과 정확히 일치한다. 과거에는 좋은 죽음과 거리 가 멀었던 ‘모두를 난처하게 하는 품위 없는 죽음’이자 환자가 ‘자신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죽음’이 이제는 좋은 죽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 다(Ariès, 1977:50∼54).

푸코의 담론이론과 계보학적 방법 이 절에서는 우리 시대 죽음 현상에 연관된 담론들을 이해하기 위한 하 나의 통로로 푸코의 담론이론을 살펴본다. 푸코의 담론이론에 따르면, 담론은 규범화된 언어적 표현의 집합체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 다는 다른 언어적 표현들과 함께 예측 가능한 형태로 결합되어 존재한 다. 담론은 일련의 규칙들의 통제를 받게 되는데, 이 규칙들을 통해 특정 한 발화와 언표들은 사회적으로 유통되며 복잡한 사회적 관행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존재하게 된다(Foucault, 1970:32). 이 관행을 통해 어떤 담론은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반면, 이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 른 담론은 유통이 억제되거나 아예 배제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담론은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을 구조화하는 시스템이라 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인식하는 틀로서의 규범은 우리가 현실에 부과하 는 담론의 익명적 규범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담론이 우리의 지각을 구속한다고 주장한다. 푸코에 따르면, 일정한 사회에서 유통되는 담론의 실질적 가치는 권력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잘 드러난다. 푸코가 말하는 담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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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달리 제도적 권위를 부여받고 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 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강화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의 토대를 흔들 기도 하며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폭로함으로써 권력을 약화시켜 권력 의 작동을 방해할 수도 있다. 세라 밀스(Sara Mills) 또한 언급한 바 있듯 이 담론이란 단순히 언어의 등가물이 아니며, 또한 담론과 현실의 관계 는 대응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따라서 담론은 단지 현실을 언어로 번역 하는 매체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을 구조화시키는 시스 템이라고 할 수 있다(Mills, 2003:55). 푸코는 󰡔담론의 질서(L’ordre du discours)󰡕에서 담론의 표면과 내 용이 일치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래서 언제나 의미 해독이 가능하다고 상 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며 담론에 선행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Foucault, 1970:59). 예컨대, 다양한 형태의 죽음에 해당하는 명칭과 분류가 존재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역에서는 죽음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은 채 ‘죽음’이라는 용어 하나만 존재한다고 할 경우, 후자의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구분하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단지 그 지역에서는 그러한 구별이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 뿐 아 니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실을 인식하는 틀로서의 규범은 우리가 현실에 부과하는 담론의 익명적 규범 과 다르지 않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담론이 우리의 지각을 구속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신체는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질병에 걸리기도 하며 사고 가 나면 다치기도 하는 물질적 대상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담론 을 매개로 해서만이 지각되고 인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상적인 몸 매가 어떤 것인지에 관한 담론을 통해 각자의 몸을 날씬하다 혹은 뚱뚱 하다 등으로 평가하며, 정신과 육체의 연관성에 대한 담론을 통해 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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