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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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河集 서하집


<지식을만드는지식 문집>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작품만을 선정합니다. 오랜 시간 그 작품을 연구한 전문가가 정확한 번역, 전문적인 해설, 풍부한 작가 소개, 친절한 주석을 제공하는 고급 문집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문집

西河集 서하집 임춘(林椿) 지음 진성규 옮김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편집자 일러두기 ∙ 이 번역은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 ≪고려명현집(高 麗名賢集) Ⅱ≫에 실려 있는 ≪서하집(西河集)≫을 대본으로 삼

았습니다.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자료를 활용하되 오자, 탈자 등을 바로 잡았습니다. ∙ 번역은 원의(原意)에 충실을 기했고, 주석 중에 간단한 것은 ( ) 안에 간주(間註)로 붙였으며, 그 밖의 것은 각주로 붙였습니다. ∙ 이해를 돕는 데 필요한 한자는 ( ) 안에 병기했으며, 시에는 원 문을 함께 수록하고 번역했습니다. ∙ 이 책에서 인용문은 “ ”, 재인용은 ‘ ’, 책명은 ≪ ≫, 제목 등은 < >로 표시했습니다. ∙ 작은 글씨는 원주입니다. ∙ 시 제목에는 원래 일련번호가 없지만 활용의 편의를 위해 붙였 습니다.


99. 글을 대신 써서 김 수재770)에게 답함 지난번 편지에 밥 많이 먹으라고, 이별한 후 다시 만나기 어려웠네. 언제나 닭 삶아 대접하려 할 땐, 이를 잡으며771) 신산(辛酸)한 삶 말하더니. 요즈음 사귀는 법이 구름같이 엷다지만, 오직 선생은 세한의 지조772)가 있었구려. 가을 되면 형양에는 북쪽에서 온 기러기773)가 많다지,

770) 김 수재(金秀才): 미상. 771) 이[虱]를 잡으며: 문슬(捫虱). 주위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는 대범 함을 말한다. ≪진서≫ <부견재기(苻堅載記)> 하에 “환온이 관중으로 들어가자 왕맹은 갈옷을 입고 알현했다. 일면식에 세상 사를 논하는데 이를 잡으면서 말하는 것이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 럼 행동했다(桓溫入關 猛被褐而詣之 一面當世之事 捫蝨而言 旁若無人)”라 했다.

772) 세한(歲寒)의 지조(志操): 세한은 세한조(歲寒操)로, 역경에도 변 하지 않는 굳은 지조를 말한다. ≪논어≫ <자한>에 “공자가 ‘세 월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 다’고 하셨다(子曰 歳寒然後 知松栢之後彫)”라 했다. 773) 형양(衡陽)에는… 기러기: 중국 형산 남쪽에 회안봉(回雁峯)이 있는데 기러기는 여기서 남하하지 않고 봄이 되면 다시 북상한다. 고적(高適)의 시 <송이소부폄협중왕소부폄장사(送李少府貶峽 中王少府貶長沙)>에 “무협에서 원숭이 울자 몇 줄기 눈물 뿌렸

는가, 형양의 기러기 돌아가니 편지 몇 통 부치려네(巫峽啼猿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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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나를 위해 평안하다는 안부나 전해 주오.

代書答金秀才 昨傳書信勸加飡 一別堪嗟再會難 每欲烹鷄侍供給 因思捫虱話辛酸 近來交道如雲薄 唯有先生耐歲寒 秋入衡陽多北鴈 須應爲我報平安

100. 시를 지어 장원한 이미수774)를 축하함 늠름한 기봉775) 백승(百勝)의 위력으로, 이미 세 차례의 시험으로 현위에 뽑혔네.776) 함께 놀던 과거장엔 그대가 먼저 급제해, 나 홀로 연하(煙霞)를 향해 돌아왔네. 거센 바람 속에 붕(鵬)은 북쪽으로 날고,777)

行淚 衡陽歸雁幾封書)”라 했다.

774) 이미수(李眉叟): 미수(眉叟)는 이인로(1152∼1200)의 자다. 본관 은 인주(仁州)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한 사람이다. 그가 장원 (壯元)한 해는 1180년이다. 775) 기봉(奇鋒): 예리한 칼날. 여기선 빼어난 필적(筆跡)을 말한다. 776) 현위(賢闈)에 뽑혔네: 미수가 명종 10년(1180)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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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놀란 까치는 남으로 나네.778) 산처779)는 눈 같은 흰머리에 놀라지만, 난 아직도 일개 포의(布衣) 신세.

作詩 賀李壯元眉叟 凜凜奇鋒百勝威 已看三擅選賢闈 共遊場屋君先捷 笑指烟霞我獨歸 風急搏鵬從北起 月明驚鵲向南飛 山妻只怪頭如雪 猶着當年一布衣

777) 붕(鵬)은 북쪽으로 날고: ≪장자≫ <소요유>에 따르면, 북해에 사는 고기 곤(鯤)이 새가 되면 붕이 되는데 한 번 남쪽으로 날면 물 결치는 수면이 3000리고 높이는 9만 리나 치솟는다고 한다. 본문 에 북쪽으로 난다고 한 것은 대(對)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파한 집≫ 상에 경련(頸聯)이 “風急溟鵬從北徙 月明驚鵲未安枝”로 되어 있다. 778) 까치는… 나네: 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달 밝자 별 드문드문하고 까마귀 까치는 남쪽으로 나니 이것은 조맹덕의 시 가 아닌가?(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대현(大賢)이 나타나니 소인(小人)이 사라짐을 비 유해서 쓰는 말이다. 위(魏) 무제(武帝)의 <단가행(短歌行)>에 “달 밝자 별 드문드문하고 까마귀 까치는 남쪽으로 날고, 나무를 안고 세 바퀴 도니 어느 가지에 의지하리(月明星稀 烏鵲南飛 繞 樹三匝 何枝可依)”라 했다.

779) 산처(山妻): 산중에 사는 아내의 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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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법주사의 당두780)가 종이와 붓을 보냈으므로 사례함 우리 집 두 사람은 영특하고 현명해, 강락781)·혜련782)에게 부끄럽지 않았다네. 백의(白衣)로 한림원783)에 잇달아 들어가서, 형제가 당당하게 화전(花塼)784)을 걸었다오. 황조(皇朝)의 제책(制冊)은 대가(大家)에게 돌아가서, 금화전(金華牋)785)에 붓 휘둘러 윤색했지요. 이로부터 평생 동안 다른 장점(長點) 없이, 단지 문고(文藁)만 만들어 집에 전했다오. 3대가 저작(著作)이 있게 되어,

780) 당두(堂頭): 당두는 방장(方丈)의 딴 이름으로, 선사(禪寺)에서 한 절의 우두머리, 곧 주지(住持)를 말한다. 781) 강락(康樂): 남북조 때 송나라 사영운(謝靈運)을 말한다. 강락후 (康樂侯)에 봉해진 데서 비롯했다. 782) 혜련(惠連): 남조 때 송나라 사혜련(謝惠連)을 말한다. 어려서부 터 준수하고 문장에 능해 족형(族兄) 영운(靈運)이 글을 지을 때 마다 좋은 시구를 얻었다는 고사가 있다. 783) 한림원(翰林院): 국가의 문한(文翰)을 맡은 곳. 784) 화전(花塼): 무늬가 있는 벽돌로, 한림원 뜨락에 깔았다. 785) 금화전(金華牋): 금니(金泥)를 바른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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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명성은 선조(先祖)를 떨어뜨리지 않았네.786) 언제나 종이가 다하고 붓이 닳아도, 풍월787)이 삼천 수는 되었지요. 중간의 난리(亂離)로 집안이 파괴되어, 장서(藏書)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네. 조정의 시험에도 용장(勇將)을 중히 여겨, 글의 값어치는 한 푼의 돈도 안 되었네. 하루아침에 붓 던져 버리고 떠나서, 공로 이루어 능연각788) 도모하는 것만 못했네. 옛날 저작(著作)한 사람을 생각해 볼 때, 가의789)·굴원790)·사마천791)도 있었다네. 한때 뜻은 얻지 못했더라도, 명성은 천백 년을 떨쳤다오. 내 비록 떠다니지만 몸은 무사하므로,

786) 집안의… 않았네: 진(晉)나라 부함(傅咸)은 자(字)가 장우(長虞)로 인품이 고상해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한다(≪진서≫ 권47, “長虞風格凝峻 弗墜家聲”). 787) 풍월(風月): 바람과 달에 부쳐 시가(詩歌)를 지은 것을 말한다. 788) 능연각(凌烟閣): 당 태종(太宗)이 643년에 공이 있는 신하 24인의 초상(肖像)을 그려서 걸어 놓은 누각. 789) 가의(賈誼): 주 231) 참조. 790) 굴원(屈原): 주 208) 참조. 791) 사마천(司馬遷): 주 28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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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웅이 ≪태현경(太玄經)≫ 초한 것792)을 배우려네. 중서군793)이 벌써 닳고, 나의 분수로 서까래[椽] 같은 몽수필794) 없음이여. 서울의 저생 값도 너무 비싸서,795) 글을 지을 때는 염계796)를 방문한다지요. 몇 년간 마음속에 새겨 둔 것 싫지 않아, 시험 삼아 글 지어 노선사(老禪師)께 요청했지요. 멀리서 뾰족한 서수필797)을 보내 주시고,

792) 양웅(揚雄)이… 초(草)한 것: 한(漢)나라 양웅이 ≪태현경(太玄 經)≫을 초한 고사. ≪전한서≫ 권87 하 <양웅전>에 “한때 양

웅이 ≪태현경(太玄經)≫을 짓고 있었는데 자신을 담박하게 굳 게 지켰다. 어떤 사람이 양웅의 ≪태현경(太玄經)≫이 공명을 이 루지 못한다고 조롱하니, 양웅이 해명하고 <해조>라 불렀다(時 雄方草太玄 有以自守泊如也 或謿雄以玄尙白 而雄解之 號曰解 謿)”라 했다.

793) 중서군(中書君): 붓의 호칭. 주 80) 참조. 794) 몽수필(夢授筆): 양(梁)나라 강엄(江淹)이 꿈속에서 신인(神人) 에게 붓을 받은 후로 문필이 크게 뛰어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795) 저생(楮生)… 비싸서: 진(晉)나라 좌사가 <삼도부>를 짓자 당 시 호귀(豪貴)한 사람들이 다투어 전사(轉寫)하므로, 낙양의 종잇 값이 올랐다는 고사. 저생은 종이의 별칭이다. 796) 염계(剡溪): 지금의 중국 저장성(浙江省) 차오어강(曹娥江) 상류 에 있는 염계(剡溪)에서 종이가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797) 서수필(鼠鬚筆): 쥐의 수염으로 만든 붓. 왕희지(王羲之)가 처음 으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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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내 준 견지798)도 색깔이 어찌 그리 고운지요. 상동의 삼품799)이라도 무엇이 귀하며, 익주의 십 양 만전800)도 공연히 자랑뿐. 은근히 깨닫고 보니 지필이 산총(山塚)을 이루었지만, 옛 학문 버리지 않고 깊이 연구하리. 때마침 한 고승전(高僧傳)을 편찬하고 있으니, 명덕 높은 남전선사801) 빠뜨리지 않으리.

798) 견지(繭紙): 생사(生絲)로 만든 종이. 왕희지가 잠견지(蠶繭紙)와 서수필(鼠鬚筆)을 사용해 <난정시서(蘭亭詩序)>를 썼다고 한 다. 799) 상동(湘東)의 삼품(三品): 상동은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헝양현 (衡陽縣)의 동쪽. 삼품은 세 종류의 붓으로 금과 은으로 장식한 것, 반죽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태평광기(太平廣記)≫ 권200, <한정사(韓定辭)>에 “옛날 양 원제가 상동왕으로 있을 때, 학문 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해 충신의사의 일이나 아름다운 문장 을 즐겨 썼다. 붓에 세 종류가 있는데 금은으로 장식한 것과 반죽 으로 만든 것이 있었다. 충효에 대한 글은 금자루 붓으로 쓰고, 덕 행에 관한 글은 은자루 붓으로 썼으며, 문장이 아름다운 것은 반죽 붓으로 썼다(昔梁元帝 爲湘東王時 好學著書 常紀忠臣義士及文 章之美者 筆有三品 或以金銀琱飾 或以斑竹爲管 忠孝全者用金 管書之 德行清粹者用銀筆書之 文章贍麗者以斑竹書之)”라 했

다. 800) 익주(益州)의 십 양 만전(十樣蠻箋): 익주에서 생산하는 열 종류 의 종이. 심홍(深紅)·천홍(淺紅)·행홍(杏紅)·명황(明黃)·심 청(深靑)·천청(淺靑)·심록(深綠)·천록(淺綠)·동록(銅綠)· 담운(淡雲) 등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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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住寺堂頭 惠紙筆 因謝之 吾家二公俱英賢 不慚康樂與惠連 白衣繼入翰林院 弟兄高步入花塼 皇朝制冊歸大手 揮毫潤色金華牋 自是平生無長物 秪得文藁爲家傳 因期三葉居著作 家聲不欲墜吾先 每窮穀皮禿兎毫 不減風月賦三千 中遭喪亂先廬毁 藏書盡作劫灰然 朝廷試士重勇爵 文欲不直一銖錢 不如一朝投筆去 功成可得圖凌烟 飜思昔日著書者 亦有賈屈洎馬遷 雖云一時不得意 猶振聲名千百年 我今流落身無事 欲効揚雄草太玄 却歎中書君已老 分無夢授大如椽 都下楮生價亦貴 爲文自弔剡溪邊 年來未厭彫肝腎 試爲貽書乞老禪 遠寄鼠鬚鋒正利 兼分繭紙色何鮮 湘東三品何足貴 益州十樣徒誇前 殷勤坐覺成山塚 不廢舊學窮覃硏 會當一撰高僧傳 無使名德遺南泉

801) 남전선사(南泉禪師): 당(唐) 지주(池州) 남전산(南泉山)의 보원 선사(普願禪師). 성(姓)이 왕씨(王氏)이므로 왕노(王老)라고도 한다. 대혜선사(大慧禪師)에게 수업하고 마조 문하에서 깨달았 다. 남전(南泉)에 선원을 짓고 30년간 학인을 지도했다. 세수 87 세, 법랍 58세로 834년에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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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술 마시는 모임을 노래한 서1202) 6월이 끝나고 7월이 시작되면 서늘한 기운이 알맞게 된다. 그러므로 8월 보름에 달구경에 대한 일을 닦아 온 지가 오래 되었다.1203) 이백과 친구 장위는 낭관호1204)에서, 임온과 구 양첨(歐陽詹)은 장안에서 달구경을 했는데1205) 건원1206),

1202) 서(序): 한문 문체의 하나로 사물의 발단과 끝맺음을 적은 글로 서문(序文) 또는 서(敍)라고도 한다. <이아>에는 “서(序)는 실 마리이니, 글자를 서(敍)로도 쓴다”고 했는데, 즉 사리(事理)를 잘 서술해 차례의 정연함이 마치 실의 오리와 같음을 말한 것이 다. 이 서는 ≪동문선≫ 권83에도 수록되어 있다. 1203) 8월 보름에… 오래되었다.: 당 현종 때 기록인 ≪개원천보유사 (開元天寶遺事)≫에는 중추 저녁에 현종이 양귀비와 장안(長 安)의 건장궁(建章宮) 태액지(太液池)에서 달맞이를 했는데 이

를 관민들이 모방하면서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는 습속이 생겼다 는 기록이 있다. 1204) 낭관호(郎官湖): 호수의 이름으로 지금의 중국 후베이성(湖北 省) 한양현(漢陽縣) 성내(城內)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 당(唐)의

이백(李白)이 야랑현(夜郞縣)으로 옮겨 와 있었는데, 그때 당나 라 하남(河南) 사람 장위(張謂)는 강성(江城)의 남호(南湖)로 이 백을 불러서 잔치를 열었다. 이백이 그때 남호를 낭관호로 불렀 다고 한다. 명(明)의 정덕(正德, 1506∼1521) 이후 거의 호수가 말라 버렸다고 한다. 1205) 임온(林蘊)과… 했는데: 구양첨(歐陽詹)이 쓴 글에 8월 15일 보 름에 장안에서 달구경을 하고 그 과정을 정리한 기록이 보인다. ≪당문수(唐文粹)≫ 권96, <완월시서(翫月詩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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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1207) 지난 이후로는 달구경 하는 것이 폐지된 지 거의 500∼600년이 되었다. 지금 중추(中秋) 하루 전날 이담지가 나에게 글을 보내 “내가 오늘 저녁 술을 빚어 밝은 달에 권하 고 다시 우리 집 고사(故事)를 닦을 것인데1208) 자네는 제남 (濟南)의 후손이 아닌가.1209) 어찌 서로 그 정을 잊을 수 있 겠는가?” 했다. 나는 즐겁게 달려가 그와 함께 높은 누에 올 라가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으면서 회포를 풀고, 재미있 는 문구를 농(弄)하면서 인간사를 말하지 않고 오야1210)가 되어서 파했다. 슬프다, 우리 두 집 자손은 유락(流落)한 지 오래되어 맑 은 가을 저 밝은 달처럼 이미 버린 물건이 되었으나 이제사 옛일인 달구경을 이어받았으니 만약 이 모임을 기록하지 않 는다면,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우리 집안이 달구경을 즐겼다 는 것을 알겠는가? 이에 각각 시 한 편을 지어서 옛일을 노 래하게 되었다.

1206) 건원(乾元): 당 숙종(肅宗)의 두 번째 연호(758∼760). 1207) 정원(貞元): 당 덕종(德宗)의 세 번째 연호(785∼805). 1208) 내가 오늘… 닦을 것인데: 이 말은 이담지가 이백과 같은 성(姓) 이므로 이백이 임온과 같이 팔월 보름날 달구경하던 옛 풍속을 임춘과 함께 다시 재현하겠다는 말이다. 1209) 자네는… 아닌가: 임온(林蘊)은 당(唐)의 제남(濟南) 사람인데, 임춘 당신은 임씨(林氏)이니 임온의 후손이 아니냐고 한 것이다. 1210) 오야(五夜): 오경(五更). 오전 3∼5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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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가일 명자 서1211) 사람은 기(氣)를 의지해 살고 기는 숨을 의지해 존재하는 것이니, 자오1212)를 따르고 음양1213)에 순응해 호흡한다면 기식(氣息)이 그침이 없을 것이다. 성색(聲色)과 취미(臭 味)가 외부를 좀먹고 사위(思爲)와 지려(智慮)가 내부를 막

으면 어찌 옹색(壅塞)해 위태롭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군 자는 사물(事物)에 그 정신을 지나치게 쓰지 않으며 그 기 (氣)를 포악하게 쓰지 않으며 편안히 해서 기다릴 뿐이다. 옛날 사람들은 고요와 침묵으로 병을 낫게 하고1214) 안마로 늙음을 그치게 하려 했으나 이는 고단한 자의 일이고, 편안 한 자는 움직이지도 않는데 어찌 고요하려 하며, 번잡하거 나 격렬하지도 않은데 어찌 안마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담

1211) ≪동문선≫ 권83에도 수록되어 있다. 1212) 자오(子午): 정북과 정남. 여기서 자오를 따른다는 이야기는 방 향을 설정할 때 남북의 위치만 확정되면 모든 방위는 모두 결정 되므로 어떤 기준점을 말한다. 1213) 음양(陰陽): 태극(太極)의 두 가지 기운으로 성질이 상반된 것을 말하는데, 우주의 질서는 음양 조화에 따라 운행한다고 한다. 1214) 고요와… 낫게 하고: 발병했을 때 안정하면 회복된다(靜然可以 補病)는 기록이 있다(≪장자≫ <외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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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히 무위하면 참된 기를 지켜서 사물에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씨(李氏)의 아들 중에 속세를 떠나 승려 된 자가 있었 는데 천성이 너무 날카로워 길들지 않은 방금 태어난 망아 지 같았으므로, 그가 불법을 짊어질 재주는 뒷날을 쉽게 헤 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구도가 너무 간절하고 마음 쓰는 것이 너무 급하니 음양의 해침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워 했다. 이제 그 이름을 바꾸어 주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 일 을 들어서 “가일(可逸)”이라 일러 주었다. 또한 나는 편안함 [逸]이 지나치면 해이해질까 해서 자(字)를 “법탐(法耽)”이 라 했다. 학문을 하는 데 탐(耽)을 내되 기(氣)를 드러내는 경지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거의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수 이인로를 보내는 서1215) 옛날 우리 성인(공자를 가리킨다)이 쇠퇴한 주나라 말에 나 와서 노담씨1216)와 더불어 시대를 같이하면서 서로 스승이

1215) ≪동문선≫ 권83에도 수록되어 있다. 1216) 노담씨(老聃氏): 노자.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며 자는 백양 (伯陽)이다. 시호는 담(聃)이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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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으나, 후세 학자에 이르러서는 서로 헐뜯는 폐단이 생 겼다. 하물며 우리 성인이 떠난 지 무릇 1100여 년이 되어 석씨(釋氏)가 나타나 공자, 노자와 더불어 삼교1217)가 되었 으나 서로 뒤틀려 합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것이다. 석씨(釋氏)는 자인(慈仁), 광박(廣博), 적멸(寂滅), 무 위(無爲)를 도로 삼아 그 뜻이 ≪주역(周易)≫과 합치된 것 이 있고, 진실로 통합되고 융화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 으니, 우리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배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치고 빼앗아 생명을 잔해(殘害)하는 것을 구원할 것 같으면 석씨가 교화에 도움이 될 것이고, 유자(儒者)의 무리도 그 교화를 즐거워해 뒤따라갈 것이나, 오직 한유(韓 愈)가 힘써 배척해 서둘러 비판했으니, 대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배우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어서 공자도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유·불의 무리를 보면 그들의 도를 해롭 게 하지 않는 자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지금 몸에는 의관을 걸치고 입으로는 인의를 말하면서 “나는 공씨(孔氏)의 무리 다” 하지만 천천히 훑어보면 도를 의지해 불의(不義)만 증 가시키고 가끔 어리석고 무식한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행하니, 이것은 진실로 시서발총1218)으로 우리 성인에

1217) 삼교(三敎): 유교, 도교, 불교. 1218) 시서발총(詩書發塚):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거짓 군자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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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죄를 얻음이 큰 것이다. 머리 깎고 검정 옷 입은 자까지도 부부와 부자도 없고 황 탄1219)하고 부허1220)해 함부로 빈말[空語]을 취하고 사람을 꾀어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찌 서로 다르 다 하겠는가? 군자가 끝내 그것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칭 찬해 부추기면 되겠는가? 내가 석씨를 배척하는 것은 대개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 도를 더욱 존중하기 때문이다. 미수(眉叟)는 나와 함께 잘 지내면서 석씨를 기뻐하니 내가 또 좋아서 상종했다. 의심되는 것은 일 만들기를 좋아 해 석씨의 무리를 보기만 하면 합장을 해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진정으로 석씨를 좋아하는 사람이겠는 가? 내가 항상 그를 위해 말했으나 조금도 막지 못했고, 나 를 석씨를 배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 도 는 즐거워하면서도 황탄하고 부허(浮虛)하게 된 무리에 대 해 분개할 줄을 모르고 있다. 나를 버리고 남쪽으로 떠나가 게 되었으니 그 떠남이 중요하기에, 이런 말로 고해 그 뜻을 바꾸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유하는 말. ≪장자≫ <외물>편에 “선비가 시와 예를 주장하 면서 남의 무덤을 판다(儒以詩禮發塚)”라고 했다. 1219) 황탄(荒誕): 말이나 하는 짓이 근거 없고 허황함. 1220) 부허(浮虛): 마음이 들뜨고 허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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