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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기획의 이해



드라마 기획의 이해 성준기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드라마 기획의 이해

지은이 성준기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4년 8월 25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commbooks@eeel.net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3F Cheongwon Bldg., 571-17 Yeonnam-dong Mapo-gu, Seoul 121-869,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하여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성준기, 2014 ISBN 979-11-304-0079-2 책값은 뒤표지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들어가는 말

텔레비전 제작 현장에서 일한 지 벌써 27년이 흘렀다. 제작 현장에서 선배들의 작업 방식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흥분과 사명감에 불탔던 말단 AD 시절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고참이 된 지 금까지, 항상 느끼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영혼의 고갈’이 더 심해진 다는 것이었다. 영혼의 갈증을 채울 방법이 없어 ‘다 때려치우고 유학이 나 갈까, 나도 누구처럼 워커 하나 사 신고 영화판에 뛰어들어 볼까’, 이 런 저런 궁리로 시간을 죽이며 잠 못 이룬 밤도 참 많았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이란 항상 샘솟아 나오는 것 이 아니고 얼마간 쓰다보면 이내 고갈 되고 마는 ‘지갑 속의 현금’ 같은 것이다. 뭔가 다시 채워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망감, 단지 느낌과 경험에 근거해 습관적으로 해 오던 작업 방식에 대한 회의와 자기혐오 에 빠질 때쯤 대학 강의를 제의 받았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가르치는 일이 곧 배우는 일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젊음을 바쳐 해 왔던 그 모든 작업들이 얼 마나 단편적이고 체계화되지 않은 경험의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나 하 는 부끄러움과,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고, 이제라도 뭔가 정리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위기의식에 생각나는 대로 몇 자씩 끄적거린 것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드라마란 무엇인가? 좋은 드라마와 그렇지 않은 드라마를 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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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은 무엇인가? 컷은 왜 나누는가? 연기자의 블로킹이나 카메라 워 크는 왜 필요한가?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현장에선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하루하루 주어진 방송 분량 을 채워 나가기도 벅찬 상황에서 이러한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감 상이고 사치인 것이다. 어린애가 엄마에게 하는 칭얼거림은 문법이 없다. 그저 애정만으 로도 어머니는 아이의 요구와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듣는다. 외국인이 서툰 우리말로 길을 물어올 때 친절이라는 정서적 매개물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사람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영상제 작물을 보는 관객이나 시청자는 감독에 대해 애정이나 친절을 갖고 있 지 않다. 난해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순간 그들은 가차 없 이 채널을 돌려버린다. 소리와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영상의 세계에서 감독과 관객이 적절한 의사소통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즉각 소통의 부재와 표현의 한계라는 불행한 현실에 부딪치고 만다. 이것이 영상의 세계에 있어 문법이란 것이 필요한 이유다. 영상 표현에는 나름 대로의 규칙에 따른 별도의 표현 방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소통 수단을 확보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영상 언어를 통해 익명의 다수인 시청자들에게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제작은 프리프로덕션(pre production)과 프로덕션(production), 포스트프로덕션(post production)의 세 단계로 나뉜다. 이 책은 제작의 3단계 중 프리프로덕션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 루었다. 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에 관한 것을 한 권의 책에서 모두 다루자니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날 뿐 아니라 다루어야 할 내용도 워낙 방대해서 자칫 욕심을 부리다가는 읽는 이들이 소화불량에 걸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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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도 되고, 또한 나 자신도 좀 더 이론과 체계를 가다듬을 시간이 필 요하다고 생각되어 나머지 부분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대학 강단에 서게 되면서 학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재로 쓸 만한 적당한 책이 있을까 하고 찾아봤으나 시중에 나와 있는 관련 서적은 대부분 기술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었다. 더구나 우려스러 웠던 것은 대다수의 학생들도 기술적인 지식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 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아무 런 고민도 갖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고 뛰쳐나갈 태세를 갖추고 있는 학 생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의 막막했던 심정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 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다. 강의실에서 텔레비전드라마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요긴 하게 쓰일 수 있는 교재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 때마침 교육부의 교육 역량 강화사업의 일환으로 국고 지원을 받아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 었다. 사실 교재 집필의 필요성을 느낀 건 오래전의 일인데 워낙 초보 교수라 이것저것 처리할 일들이 많고, 또 책을 쓴다는 게 두렵기도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은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내가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옳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도 없지만 지난 27년간 제작 현장의 경험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만으로 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용기를 내게 되었다. 여기에 담긴 내용들이 드라마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이나 배움의 길에 있는 후학들 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 이 기록되거나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끝으로 집필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흔쾌히 나누어 주신 이남기, 최상식 두 선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이 책의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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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텔레비전드라마 약사’는 최상식 선배가 개인적으로 수집, 정리해 둔 자료에 전적으로 기댔음을 밝혀 둔다. 이론이 부족한 필자에게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 명지대학교 디지털 미디어학과의 곽한주 교수와 동아방송예술대학교 극작과의 김애옥 교수, 그리고 소중한 대 본과 시놉시스를 후학들을 위해 선뜻 제공해 주신 노희경, 진수완 작가 와 KBS의 한옥금 편집감독께도 정중한 감사를 드린다.

2014년 7월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영상제작과 성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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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들어가는 말

1부 드라마의 이해 01 드라마란 무엇인가? 02 한국 텔레비전드라마 약사 03 드라마의 구조 04 드라마 제작과정 05 한국 드라마 산업의 현실

2부 기획 06 기획의 주체 07 프로듀서 08 드라마 기획과정 09 기획제안서 10 기획제안서를 보는 두 가지 관점 11 기획제안서 작성 시 유의할 점 12 기획제안서의 기능 13 대본 분해 14 제작 예산 15 상위라인과 하위라인 16 드라마를 실패로 이끄는 요인들


3부 작가 17 단순성 18 웃음 19 감동 20 도덕성 21 캐릭터 22 휴머니티 23 빛나는 조연

4부 감독 24 감독 25 감독의 역할 26 감독의 자질 27 대본 고르기 28 스케줄 29 콘티뉴이티 30 콘티연출 31 촬영현장 32 후반작업

5부 연기자 33 캐스팅 34 카메라 연기

부록: 실습 대본 나오는 말


1부

드라마의 이해


우리 일상의 삶은 늘 드라마에 노출되어 있다. 누구나 드라마

를 보고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품을 많이 소비한 경험이 제품의 생산 과정에 대한 이해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 중에 한 편의 드라마가 기획되어 전파를 타기까지의 과정을 자 세히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작업 과정의 복잡성과 작업의 난 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드라마를 전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제작에 참여하는 스태 프들에게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는 늘 드라마 제작 현장과 가 까이 지내며 이에 관한 기사를 쓰는 방송 담당 기자들도 제작의 디테일 에 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기사를 쓰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만큼 각 파트마다 작업 내용이 세분화되어 있고 각각 일의 특성이 판이하게 다를 뿐 아니라 거치는 공정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드라마의 제 작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이해하고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직종은 프로 듀서나 감독 정도에 국한될 것이다. 드라마는 제작 과정도 복잡하지만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드라 마에 대한 가치나 판단 기준도 각각이고 드라마를 보고 평가하는 시청 자들의 취향도 백인백색이다. 따라서 드라마 장르에 대한 전체적인 이 해는 개개인의 가치판단이나 취향보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대중 (Mass)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드라마의 최종 소 비자로서 불특정 다수인 시청자군의 시각에서 드라마를 전체적으로 개 괄하고 그 구조와 제작 과정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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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란 무엇인가?

드라마의 세계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 정동을 잇는 성수대교의 5번째 교각과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48m가 붕괴 되었다. 이 사고로 출근길, 등굣길의 시민, 학생들 32명이 죽고 17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떨어져 내리는 상판 바로 앞에서 사고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어느 자가운전자가 텔레비전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내 앞에 있던 모든 것이 떨어져 내리면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인터뷰에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라는 표현에 주목한 다. 그 남자는 왜 하필 이 상황에서 ‘영화’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우리 는 일상적으로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극적이다’, ‘한 편의 드라마 같다’, ‘드라마틱하다’ 이런 표현을 자주 쓴다. 즉, 도저히 현실에서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또는 일상적인 언어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현상을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쓴다. 여기에 드 라마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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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의 세계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 만들어 낸 이야기, 꾸며 낸 이야기, 가 공의 세계, 허구의 세계, 거짓말…. 그것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세계다. 한마디로 드라마는 꾸며 낸 이야기다. 이것이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비 실제성(impracticality)’이다. 드라마와 정반대 장르가 다큐멘터리다. 논픽션(Non-fiction), 즉 꾸며 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이 다 드라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픽션,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개연성의 세계

허구의 세계를 그린 이야기가 한편의 드라마로 탄생하려면 어떤 조건 을 갖춰야 할까? 한국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 흔히 ‘막장’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몇 년 전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 ‘막장드라마’란 용어가 우리 방송계에 일종의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뭐가 막장일까? 드라 마의 어떤 점이 막장과 막장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잣대가 될까? 일반인 들이 흔히 주장하는 막장드라마의 조건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 고 생각된다.

① 출생의 비밀: 사랑했는데 알고 보니 이복 남매다. ② 시한부 인생: 죽도록 고생해서 먹고 살만하니까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다. ③ 가족관계의 뒤엉킴: 딸이 며느리가 된다. ④ 과도한 불륜: 가정 있는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부인도 이에 뒤질세라 불륜을 저지른다. 주인공의 시댁 식구도 불륜에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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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친정 식구들도 불륜을 저지른다. 드라마는 온통 불륜의 왕 국이 된다.

보통 이런 종류의 설정이 나오면 막장드라마라고 한다. 그런데 이 는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소포클레스의 고전 󰡔오이디푸스 왕󰡕 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하고 결혼하는 이야기다. 막장 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 드라마에도 아직 이런 존속 살인이나 모자 근친상간의 이야기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햄릿’ 의 엄마는 ‘햄릿’의 작은아버지와 결혼했다. 이를테면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형부가 처제를 사랑한 이야기가 한번 그려 지기는 했지만(MBC <눈사람>, 2003, 이창순 연출, 공효진·오연수· 조재현 출연) 그 엇갈린 사랑이 명쾌하게 완결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 나고 말았다. 결국 인습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막장드라마가 판치는 우리나라에서도 감히 시도하지 못하 는 막장 중의 막장에 해당되는 설정이 󰡔햄릿󰡕과 󰡔오이디푸스 왕󰡕에 버 젓이 등장하지만 우리는 󰡔햄릿󰡕이나 󰡔오이디푸스 왕󰡕을 막장드라마라 고 하지 않는다. 왜일까? 막장은커녕 오히려 동서고금을 통해 불멸의 명작으로 칭송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바로 ‘개연성’의 문제다. 개연성 이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 질’이다. 다시 말하면 “아. 그럴법 하다, 그럴 수 있겠다”, “저 상황이라 면 나라도 그럴 것이다”하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설정과 이야기 전 개가 개연성을 확보해 준다. 이런 공감을 끌어내려는 노력 없이 자극적 이고 황당한 설정을 남발하는 드라마, 그것이 막장드라마의 기준이 되 어야 한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 중에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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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있는 설정이 갖춰져야 비로소 드라마는 성립한다. 그것이 개연성의 세계다. 다음의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서 개연성의 문제에 관해 좀 더 논의해 보기로 하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므로 드라마가 성립한다는 주장

어떤 신인 작가가 최루성 멜로드라마 대본을 한 권 써서 내게 보냈다. 일본영화 <러브레터>(1995, 일본, 이와이 슌지 감독)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러브레터>에서는 여자 주인공의 애인이 등산 중 사고로 죽 었는데 이 대본에서는 애인이 백화점에 갔다가 백화점 건물이 무너지 면서 깔려죽은 것으로 설정해 왔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서울 강남구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 점이 붕괴되면서 502명이 사망, 6명이 실종되고 937명이 부상당한 사 건으로 현재 이 자리에는 아크로비스타라는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나는 이 작품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작가는 실 제로 일어났던 일인데 왜 개연성이 없느냐고 항변했다. 작가의 주장이 무조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주된 이야기가 ‘홀로 남은 여 자의 새 삶 찾기’인 바에야 애인을 죽이는 수많은 방법이 있는데 굳이 백화점 붕괴사고를 드라마의 발단으로 설정할 이유가 뭔가? 이 작품은 사실을 기초로 구성되었지만 드라마로서의 개연성은 부족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드라마에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 지 않다. 그것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따져야 한다. 드라마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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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추구하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사실 같은 허구, 허구 속의 진실을 추구하는 장르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이므로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자칫 위험하게 들린다. 사실보다는 ‘그럴 법한 꾸며 낸 이야기’가 더 드라마적 진실에 가깝다.

토끼와 거북이

이솝 우화 중에 유명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자.

‘어느 날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토끼는 자만에 빠져서 중간에 낮잠 을 자고, 거북이는 쉬지 않고 열심히 기어가서 결국 거북이가 승리한다 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다. 물론 우화고, 그러니까 사람은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니만치 이야기 자체의 존 재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이들한테 대단히 유익한 이 야기임에도 틀림없다. 그런데 드라마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이야기 는 드라마가 성립될 수 없는 중대한 허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토끼 입장에서 보자. 거북이가 경주를 하자고 제안해 왔을 때 ‘그래, 한번 붙자!’ 하고 선뜻 수락할 토끼가 있을까? 토끼가 거북이하고 경주를 해서 이겼다고 해서 “야, 그 토끼 대단하다” 하고 칭송받을 일일 까? “당연한 거지 뭐 그걸 갖고 난리야?” 이런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게 다가 만에 하나 토끼가 이 게임에서 지면 토끼의 명예를 실추시킨 불량 토끼로 낙인찍혀서 토끼사회에서 매장될 수도 있다. 즉 토끼 입장에서 는 애당초 이 경기를 수락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거북이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토끼와 경주를 하면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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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거북이가 질 것이다. 이 경기에서 졌다고 해서 거북이의 명예가 실 추될 일은 없다. 오히려 “야, 거북이 주제에 토끼하고 한판 붙어보겠다 는 그 용기가 가상하다! 후배 거북이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이렇게 칭 찬 받을 것이다. 만에 하나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면 그 거북이는 거 북이 사회에서 영웅이 될 것이다. 기금을 모아 동상을 세워 줄 수도 있 고 대대손손 자손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교과서에 실릴지도 모른다. 거 북이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게임이다. 결국 이 게임은 애당초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토끼로서는 이 경 주를 수락할 동기가 전혀 없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날 토 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토끼 와 거북이 이야기는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연성의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드라마의 성립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이 틀 림없다. 개연성이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이다. 관객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도록 사전에 복선과 암 시가 제시되고, 앞뒤 상황에 맞는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지면 다소 극단 적인 상황설정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시청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개연성은 허구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성립되 는 첫 번째 전제조건이다.

당위성의 세계

당위성이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성질’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도덕, 관습, 문화, 제도, 법률 같은 것은 그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형성된 일종의 역사적 산물이다. 한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나 불문율, 도덕 등의 기준에 부합하는 정도를 당위성이라 한다. 대부분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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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 문화, 제도, 법률은 그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방 향으로, 또 그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전수되고, 확대 재생산 되어 간다. 당위성이란 ‘옳 다 그르다’ 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가? 해 악이 되는가?’ 또 ‘그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만일 드라마의 결말이 악행을 일삼는 자가 잘 먹고 잘 살게 되고 정 의로운 사람은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파멸로 끝나게 된다면 그 작품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당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그런 부당한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 도 드라마의 세계에서 당위성이란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앞서 언급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이 이야기가 가 진 강점은 분명하다. 게으른 자는 패배하고 성실한 자가 승리한다는 권 선징악적인 주제가 뚜렷해 강력한 당위성이 확보되어 있다. 성실한 사 람은 성공하고 게으른 사람은 실패하도록 귀결 지어지는 것. 이것이 토 끼와 거북이 이야기의 당위성이고 그래서 교육적으로 대단히 유용한 이야기다. 관객들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악한 자를 확실 하게 응징하지 않거나, 선량한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결말은 관객의 기 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게으르고 오만한 토끼에게 패배의 쓴 잔을 마시 게 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당위성을 확보한 것이다.

필연성과 의외성의 세계

이야기는 인류가 생존에 유용한 경험들을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발달 시킨 도구다. 날씨가 흐리면 비가 온다든가, 천둥이 치면 벼락이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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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자연법칙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고 그것이 오 랜 세월 후대에게 구전으로 전승되면서 스토리텔링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연법칙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설명되며 그것은 필연성으로 귀결된다. 필연성이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성질’이다. 인과율, 즉 원 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서 항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연법칙적인 것, 사필귀정으로 이어지는 원칙성이다. 다음은 2012년 9월에 방송된 KBS2의 월화드라마 <해운대 연인들> 의 어느 한 회의 상황이다.

“선상파티에서 준혁(정석원)과 소라(조여정)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남해(김강우)는 소라에게 화를 내고 소라는 남해에게 오해라고 말하 던 중 로프에 구두가 걸려 바다에 빠지고 만다. 소라를 구하려고 함께 뛰어든 남해. 소라와 남해가 없어진 사실을 안 준혁과 삼촌들은 구조 작업을 펼치고 한편 남해와 소라는 무사히 무인도에 떠밀려 와 탈출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와 같은 ‘주인공 불사의 법칙’이 남발되면 필연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유람선 갑판에 있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로 빠진 두 남녀가 해변으로 떠밀려 와 둘 다 무사히 깨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보고 즐거워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무것 도 남는 것이 없는 이유는 바로 필연성의 결여로 인한 공감 부족 때문이 다. 40층 빌딩에서 떨어져도 때마침 침대 배달 트럭 위에 떨어져 살아 나는 주인공을 보면서 관객은 “이번에는 무슨 방법으로 저 주인공을 살 려낼까?”를 생각하며 감독과 두뇌게임을 즐길 뿐이다. 다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게임의 예상치 못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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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가 토끼 사회에 널리 퍼졌다. 열 받은 제2, 제3의 분기탱천한 토끼가 나타나 “한 판 더 붙자!” 이렇게 도전장을 내기 시작한다. 두 번째 경주, 세 번째 경주에서도 계속 거북이가 이길 수 있을까? 아마도 한 번뿐일 것이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같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 다. 따라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에는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조작적인 설정을 남발하면 드라마의 개연성을 해치게 되고 이는 관객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그러 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한 필연성을 확보했다고 해서 항상 이야기 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역동성을 가진 상호작용과 충돌에 의 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뻗어 나갈 때 듣는 사람은 매료된다. 드라마가 관객을 사로잡으려면 스토리 전개에 예측 불가능성이 전제되 어야 한다.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는 필연성은 결여되어 있으나 예상 을 뛰어넘는 의외성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있다. 드라마가 가지는 본질적인 속성 중의 하나가 픽션의 세계라고 해 서 픽션, 즉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 드라마적인 진실의 문제일 뿐 만 아니라 개연성, 당위성, 필연성, 의외성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판타지의 세계

홍길동, 임꺽정, 일지매의 이야기는 모두 의로운 도적에 관한 이야기 다. 착취당하는 민중을 대신해 탐관오리들을 혼내주는 이야기다. 그 통 쾌함 때문에 항상 리바이벌된다. 빤한 이야기인데도 볼 때마다 재미있 다. 또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우리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얼굴은 예쁜 데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여자가 잘생기고 키 크고 성격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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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2세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 생산되 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전인 <춘향전>도 그 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 데렐라 스토리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침드라마가 불륜 일색인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주부들은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 되었지만 일상의 삶이 너무나 판에 박힌 틀 속에 갇혀 있어 판타지를 강 렬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한국의 30대 여성은 결혼과 육아, 남편 뒷바라지와 집안일에 치여 꿈 많은 소녀 시절의 판타지를 현실에 서는 구현할 방법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 세대다. 불투명한 미래와 유 보당한 꿈으로 현실에 대한 욕구불만이 큰 세대여서 판타지에 쉽게 노 출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드라마의 최대 고객은 30대 주부이며 30대 주부를 잡지 못한다면 시청률 올릴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인간이 처한 현실은 항상 누추하고, 나라는 존재는 왜소하고 초라 하다. 드라마는 이처럼 누추한 현실과 초라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 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불을 붙이며 그들의 정신세계를 황홀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정의로운 판타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관객은 드라마가 인도하는 판타지(fantasy)의 세계에서 아름답고 황홀한 세계, 강하고 정의로운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드라마의 기능 핍쇼머신을 통해서 본 타인의 삶

1894년, 에디슨이라는 미국의 걸출한 발명가가 ‘활동사진’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영화산업의 출발점이다. 정지된 사진이 아니라 움 직이는 사진을 만든 것이다. 그는 이 기계의 이름을 ‘핍쇼머신(P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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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 machine)’이라고 붙였다. 우리말로 ‘요지경 기계’, 또는 ‘훔쳐보 기 기계’쯤 되겠다. 에디슨은 이 기계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아 돈을 벌 고자 했다. 그래서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을 기계 안에 설치해서 팔았다. 제목은 ‘요염한 댄서들’, ‘젊은 여자들은 어떻게 옷을 벗나’ 등 등…. 이를테면 야동의 효시라고나 할까? 초당 46프레임이었고 러닝타 임은 15초 정도였다. 이 기계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돈을 벌지 못했다. 에디슨같이 머리 좋은 사람이 ‘활동사진’이 가지고 있는 상업적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훔쳐보기 기계를 만들어 파는 일에만 급 급했다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결국 공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 제에게 넘어갔다. 그 이듬해인 1895년, 뤼미에르 형제는 세계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을 만들어 파리의 한 카페에서 상영했다. 러닝타임 은 3분. 스크린에서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치여 죽을까 봐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심리학 용어 중 ‘피핑톰(peeping tom)’이란 용어가 있다. ‘관음증’ 이란 뜻이다. 실제로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성교장면, 나체를 보며 성적만족을 느끼는 성도착증을 말한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11세기 중엽 영국 코번트리 지방에 레오프릭이라는 악덕 영주가 살고 있었다. 그는 농노들에게 세금을 너무 가혹하게 매겨 농노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레오프릭 백작(당시 70대 노인)의 젊은 아내 고디바 (당시 16세)는 남편에게 세금을 내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으나 백 작은 거절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만일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깎아주겠다’고 빈정댔다. 그런데 정말 고디바는 그 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그 소문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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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에 퍼지자 사람들은 그날 창문과 커튼을 모두 닫고 바깥을 내다보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디바 부인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사와 존경을 표 하기 위해서였다. 젊디젊은 16세의 백작부인 고디바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던 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커튼을 닫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는데, 톰이라는 재단사가 약속을 어기고 몰래 바깥을 내다보며 백 작부인의 나체를 훔쳐보다가 눈이 멀었다. 그 후로 다른 사람의 나체 를 몰래 훔쳐보는 사람을 피핑톰( peeping tom)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19세기 이후에 심리학에서 이 용어를 차용했다.

에디슨이 활동사진기계를 핍쇼머신이라고 명명한 데서 우리는 드 라마의 본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즉, 드라마 는 ‘핍쇼머신을 통해 들여다본 타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의 경험세계를 확대하고자 하는 지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도구 다. 인간은 내가 가 보지 않은 길,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의사들은 어떻게 사나? 변호사들은 어떻게 사 나? 대통령은 부부싸움을 어떻게 하나? 대중스타 연예인들은 어디서 옷을 사 입고, 무엇을 먹으며, 연애는 어떻게 하나? 나는 이렇게 인생이 불안하고 우울한데 다른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저렇게 신 나게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며 사는 것일까?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며 사나? 전문직 드라마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을 깨고 근래에 많은 전 문직 드라마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이면에는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경험세계를 확대하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지적욕구가 도사리고 있 다. 에디슨이 발명한 위대한 발명품 활동사진은 핍쇼머신에서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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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텔레비전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스토리텔링이 지배하는 미디어 산업의 세 계에 살게 되었다.

카타르시스와 한풀이

한국의 중년남자들은 죽어라 일만 할 줄 알았지 노는 법을 모른다. 논 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들에게 논다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었다. 그런데 지금 노동 시장의 유연성 제고라는 명분하에 직장 에서 쫓겨나고 있다. 취미도 없고, 가족들과 소통하는 법도 배우지 못 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술 먹고 골프 치는 것뿐, 어디 마음 터놓고 얘 기할 데도 없다. 미래는 불안하고 앞으로 남은 삶은 창창하다. 그래서 우울하다. 그들은 1960년대의 춥고 배고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러나 그 고생담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가방 대신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싸서 메고 10리 길을 걸어 학교 다닌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비 하면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만족할 줄을 모른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며 호롱불에서 공부하던 얘기를 꺼낼라치면 자식들은 “또 그 얘기!”하며 피해 버린다. 필자가 연출했던 <옥이이모>(1995, SBS)는 시청층 분석에서 40∼ 50대 남성 비율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원래 드라마하 고 별로 친하지 않은 계층이다. 한국 남자들이 유일하게 빼놓지 않고 보는 프로그램은 <9시 뉴스>다. 9시라는 시간은 한국 남자들에게 일종 의 성역이며 오롯이 남자들만의 시간이다. 이런 한국 남자들을 9시에 뉴스에서 드라마로 뺏어온 드라마가 <옥이이모>였다. 가난했지만 열 심히 살아왔던 자기 삶이 다음 세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마음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분위기에서 정서적 억압을 받아온 한국 중년 남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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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드라마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 것이 이들이 뉴스를 포기 하고 드라마를 보게 된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되었다. 불황기에는 최루성 멜로드라마가 잘된다고 한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려 주는 식이다. 드라마는 관객의 감정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 기능 을 가지고 있다. 가슴에 맺힌 것, 드러내놓고 말하기 힘든 것, 말하고 싶 은데 치사해서 말 안 하고 있던 것 등을 텔레비전이 대신해 주니 꽉 막 힌 가슴이 풀리는 것이다. 관객이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울고 싶으니 뺨 좀 때려 달라는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남자 화장실에 가면 종종 만나는 문구가 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는 남자 들이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사회다. 그러나 남자도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한다. 억압하고 참으니까 한국 남자들은 감정의 정화 기능이 꽉 막힌 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의 밤 문화가 세계 유래 없이 질펀한 것 아닐까? OECD 국가 중에 중년 남자 사망률도 한국이 가장 높다. 오줌 누면서도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일상의 삶에서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춤추며 기뻐하고, 웃길 때 시원하게 웃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된다면 한국 의 드라마 시청률은 좀 낮아지고 제작편수도 좀 줄어들겠지만 그건 바 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인간 탐구

심리학의 목표는 인간 마음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측 정 가능하고, 지표로 환산할 수 있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반복 실험 을 통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탐구한다. 드 라마의 목표는 ‘인간의 탐구’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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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집중시킨다. 인간의 행동에는 동기와 목표가 있고, 행위자의 생 각이나 감정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Drama란 말이 ‘행동하다’라는 뜻 의 그리스어 ‘Dran’에서 유래된 것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관찰과 실험은 과학적 연구방법의 토대가 된다. 과학은 관찰, 측정 가능한 것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을 수치와 지표로 계량화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물과 현상의 인과관계를 밝힘으로써 결과를 예측할 수 있 어야 하고 반복 실험을 통해 누구나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탐구하는 방법도 역시 관찰과 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 눈물 젖 은 빵을 먹어 보지 않는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 가? 고통 받고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제대로 그 려내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무슨 인생의 향기가 느껴지겠는가? 삶의 진실은 ‘체험’ 속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체험과 관찰은 드라마를 공부하 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 펼쳐져 있는 모든 인간과 사 물이 우리에게 드라마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다. 거리에서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발걸음에서부터 가을바람에 떨어져 구 르는 낙엽 하나까지 우리에게 드라마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자기 가 듣도 보도 못한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이 느끼고 체험 한 만큼 표현할 수 있다. 관찰과 체험 없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늘 공허 하다.

재미와 감동

영국이 낳은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영화란 지루 한 부분이 커트된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영화란 인 생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것을 이어 붙인 것인데 사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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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인생의 대부분은 영화적으로는 필요 없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인 간이 90년을 산다고 하면 그중에 30년은 잠을 자고, 15년은 밥을 먹고 배설하느라 보낸다. 즉, 인생의 절반은 먹고 자고 싸는 데 쓴다. 우리 삶 은 대부분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일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인생 그 자체로 본다면 필요 없는 부분이 어디 있겠는가? 히치콕은 ‘드라마를 구성하는 데 있어’ 필요 없는 부분, 다시 말하면 재 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부분을 말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감독의 문제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고 말한 것은 대단히 일맥상통하는 발언 이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그래서 드라마가 성립되지 않는 부분 을 감독은 화면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 겠다. 드라마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미만을 추구하다가는 저질 막장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그 안에 감동이 더해져야 비로소 하나 의 완성도 있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감동이란 드라마 속에 삶의 진 실이 드러날 때 관객이 느끼는 영혼의 울림이다. 진실이라는 쓴 약을 재미라는 사탕발림으로 포장하는 기술, 이것이 감독의 능력이다. 더 나 아가 재미와 감동,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시청자는 웃음과 눈 물을 동시에 요구한다. 따라서 웃음과 눈물을 모두 다룰 줄 아는 연출 자가 진짜 실력 있는 연출자다. 시청자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이 야기를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권리는 시청자에게 영원히 보 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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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어디까지 왔나?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이 시작된 지금, 우리는 더 이상 드라마를 예술 의 한 장르로 분류하지 않는다. 한때 한국인에게 드라마가 문학이고 저 널리즘인 시대가 있었다. 1980년대에 방송된 KBS의 <TV문학관>이나 MBC의 <베스트셀러 극장>은 한국 소설문학의 걸작들을 영상화하여 시청자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고, 1990년대에도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 하고 사회비판적 색채가 짙은 고품격 드라마들이 다수 선보였다. 아쉬 운 일이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이제 드라마는 철저하게 엔터테 인먼트의 기능을 수행하는 오락 장르이고, 산업 생산의 한 측면으로 간 주되는 문화상품이며, 국제수지에 영향을 미치는 수출 품목이 되었다. 애당초 방송법에 규정된 편성상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드라마는 오 락프로그램의 한 종류임이 분명하고, 오늘날 지상파에 드라마의 70% 이상을 공급하는 외주제작사들이 세법상 ‘제조업’으로 분류되고 있는 점에서 보면 드라마 감독이 예술가나 저널리스트로 고개를 쳐들고 있 던 시대가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모든 변화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듯이 드라마에 대한 세간의 인식 변화도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의식구조를 바꿔 놓았다. 첫째, ‘무엇이 좋은 드라마인가?’에 대한 우리의 판단 기준이 달라 진 것을 꼽을 수 있다. 요즘 시대에 좋은 드라마란 단지 작품성이 있거 나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돈이 되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잣대가 된 것이다. 드라마의 작품성이나 완성도보다 매 출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태도는 드라마가 예술이냐 저널리즘이 냐를 가지고 논쟁하던 1980∼1990년대를 기억하고 있는 중견 감독들 에게 있어서도 뭔가 소중한 부분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만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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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낸다면 그리 나쁜 것도 아니다. 둘째, 드라마의 규모가 점차 커져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면 서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와 창의적인 작품이 끊임없이 만들어질 수 있 는 인적, 물적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를 보는 인식의 변화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다. 방송을 ‘돈 되는 사업’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방송의 꽃’인 드라마도 당연히 투자와 원금 회수, 수익의 창출과 이익 배분이라는 사업논리로 접근하게 된다. 드라마를 하나의 상품으로, 제작에 참여하는 작가, 감 독, 배우, 스태프 등을 각각 독립된 하나의 생산요소로 보는 시각은 보수 언론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 관계자나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러나 이는 굴뚝산업시대에 통용되던 경제논리와 프레임으 로 21세기 문화산업을 보려는 것이고 사실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드라마를 산업생산의 결과물로, 드라마의 제작과 시청을 산업시대 의 생산과 소비의 관계로만 보는 것은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무 지의 소치다. 이런 시각의 이면에는 돈의 논리가 숨어 있다. 다시 말하 면 돈 앞에 모든 가치가 고개를 숙이는 자본주의의 시장원리가 작동하 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21세기 문화산업을 진단하고 평가하고 예측하 려면 산업사회의 생산과 소비의 관계로서만 드라마를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프레임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방송은 문화이면서 산업이다. 그래서 ‘문화산업’이라고 부르는 것 이다. 드라마 역시 문화산업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문화와 산업의 특성 을 단순히 합쳐놓은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면서 이 둘 의 범주를 뛰어넘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기술적 맥 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당연히, 대중문화의 논리와 산업논리 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어떤 관점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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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드라마를 보는 시각에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드라마를 순수한 예술창작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 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산업논리로 드라마를 재단하고 있는 이 와중에도 누군가는 드라마의 예술적 측면을 고민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드라마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닌, 만드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주의, 주장, 사상이 담긴 철학적 사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잊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은 드라마를 공부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모두가 돈타령을 하고 있을 때, 드라마를 통해 세상을 바꾸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드라마를 보는 사람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 줌으로써,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하고, 그 결과로 보다 나은 세 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다. 드라마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고, 인생 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드라마를 공부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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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텔레비전드라마 약사

우리나라의 텔레비전드라마는 1956년 5월 12일 개국한 한국 최초의 상 업 텔레비전인 HLKZ-TV에서부터 시작해 1991년 12월 6일 개국한 서 울방송을 거쳐 2011년 12월 1일 개국한 종편채널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텔레비전드라마의 연대기 구분은 그간에 태어난 텔레비전방송사 의 출현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드라마 환경이 나 정책은 텔레비전방송사의 출범에 의해 상대적으로 변화해 왔고, 그 발전 계기도 텔레비전방송사의 위상과 채널수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의 태동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로 HLKZ-TV가 개국했다. 미국의 전자제품 제조사인 RCA사와 RCA 한국 배급사가 한국 판촉을 위한 교두보 마련 을 위해 합작으로 방송국을 설립한 것으로 호출부호는 HLKZ-TV, 정식 명칭은 KORCAD-TV이다.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선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4번째였다. 당시의 수상기 대수는 서울 시청 앞 거리 등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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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드라마

한국에 텔레비전드라마가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956년 5월 상업방송인 HLKZ-TV가 개국한 때부터다. 첫 작품은 같은 해 7월 단세니 원작 <천국의 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사자 - 연출자 최창봉, 주연배우 최상현 - 의 증언이 서로 엇갈려 명쾌하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최창봉은 자신 이 연출한 <사형수>가 최초의 드라마라고 주장하였고 최상현은 자신이 주 연한 <천국의 문>이 최초의 드라마라고 주장하였다. 최근까지도 이 두 사 람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는데 얼마전 최상 현의 타계로 이 문제는 미궁에 빠져 버렸다.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7월에 <천국의 문>, 8월에 <조국>, 9월에 <사형수>등의 순서로 드라마가 방송되 었다고 하니 최초의 드라마는 <천국의 문>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불 행하게도 당시의 HLKZ-TV는 1959년 원인 모를 화재로 건물, 장비, 자료 등이 모두 소실되어 이를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어 학계관계자들을 안 타깝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최근 한류 바람을 타고 한국의 방송 전문 가들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으로 진출하여 드라마 제작의 노하 우를 전수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처음에는 한국에서 간 PD들이 연출을 맡 는 것이 보통이다. 몇 편 제작하면서 현지인 연출자를 훈련시킨 후에 메가 폰을 현지인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천국의 문> 은 최상현이 주연한 것은 맞으나 연출자가 RCA사에서 파견한 외국인이 아 니었나 싶다. 그러므로 최초의 드라마는 <천국의 문>이 맞으나 한국인 연 출자(최창봉)에 의해 제작된 순수한 한국 최초의 드라마는 <사형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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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통행이 많은 31개소에 설치한 40대를 포함하여 모두 200여 대에 불과했다. 쌀 한 가마니에 1만8000원 하던 시기에 17인치 수상기는 37 만5000원으로 쌀 20가마니에 해당하는 고가품이었다(2014년 현재 쌀 한가마니는 80kg, 가격은 17만 원 조금 넘는다). 첫 프로그램은 <만파 정식지곡>과 <수제천>의 아악연주였고, 이어서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백설희, 현인, 장세정 등 인기 가수가 대거 출연한 쇼 무대를 2시간 동안 내보냈다. 세종로 네거리와 서울역 등에 설치된 40여 대의 대형 수상기 를 통해 이날 텔레비전을 처음 접한 시민들은 한결같이 신기하다는 반 응이었다. 시험방송을 거친 후 6월 1일부터는 격일로 밤 8시부터 2시간 씩 방영했다. 그해 7월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의 효시로 기억되는 <천국의 문>이 방송되었다. 단세니 원작의 단막극을 우리 정서에 맞게 번안한 것으로 두 명의 도둑이 죽어 천국에서 대화를 나누는 단순한 내용으로 최상현 과 이낙훈이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다. 8월에 유치진의 희곡 <조국>이 이 기하 연출로 방송되고, 9월엔 홀 워시 원작, 최창봉 연출의 60분 단막극 <사형수>가 방송됨으로써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의 한국 드라마 KBS-TV 개국

1961년 12월 31일에 KBS-TV가 개국하면서 본격 텔레비전시대의 개막 을 알렸다. 당시 텔레비전 수상기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2만 대 정도였 으며, 1963년에 3만4000대를 기록하고, 1968년에는 10만 대를 돌파하 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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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TV 최초의 드라마는 1962년 1월 19일 이기하 연출로 방송된 유치진 원작의 희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로 카메라 2대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텔레비전드라마라곤 하나 연극의 생중계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시청자들 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녹화기가 없는 당시로선 드라 마도 생방송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기자와 스태프는 피가 마 르는 긴장 속에서 마치 전쟁을 치르듯 드라마를 제작해야 했다.

TBC-TV 개국

1964년 12월 17일 민영방송 TBC-TV가 개국, 녹화기를 도입하여 드라마 를 제작하기 시작함으로써 텔레비전드라마의 생방송 시대가 마감된다. TBC의 개국 특집 드라마 <초설>(유호 극본, 허규 연출)이 녹화 테이프 를 통해 방송한 최초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이 녹화기는 편집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NG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녹화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 다. 개국 이틀 뒤 최초의 일일 연속극 <눈이 나리는데>(한운사 극본, 황 은진 연출)를 방송한 데 이어 그해 12월엔 최초의 사극 <민며느리>(이 서구 극본, 김재형 연출)를 방송함으로써 TBC는 드라마 경쟁의 기선을 제압한다. 이 시기에는 TBC가 주로 가족 멜로드라마로 인기를 끈 반면 KBS는 비교적 선이 굵은 역사 반공드라마로 시청자의 시선을 끌었다. 1964년 12월 5일 KBS는 반공 국책드라마 <실화극장>을 선보였다. 신금단 부녀의 만남과 이별을 주제로 한 <아바이 잘 가오>를 필두로 <돌무지>, <제3지대>, <사화산>으로 이어지며 대단한 인기를 끈 <실 화극장>은 향후 20년간 KBS 부동의 간판 드라마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으로는 반공을 주제로 한 내용, 중앙정보부의 현 역 간부 출신의 작가가 그려내는 박진감 있는 극본(김동현), 중정요원 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과감한 예산 지원, 최무룡·김승호·최남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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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황정순·최은희·문희·문정숙·황해 등 당대 최고의 배우를 동원할 수 있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1968년 방송된 KBS드라마 <탑>(김희창 극본, 허규 연출)과 <아로 운>(한운사 극본, 허규 연출)은 품격 있고 수준 높은 드라마라는 찬사 속에 지식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TBC의 <유호극장>시리즈는 <정두고 가지마>, <내 멋에 산다>, <짚세기 신고왔네>로 이어지며 삶 에 찌든 서민들에게 넉넉한 웃음을 선사하였다.

MBC-TV 개국

서울 인사동에서 새로 마련한 정동으로 사옥을 옮긴 MBC는 이를 계기 로 1969년 8월 8일에 텔레비전방송을 개시했다. 호출부호 HLKV-TV, 채널 11번을 부여받은 MBC의 등장으로 지상파 3사는 치열한 경쟁 체 제에 돌입하게 되었고 한국 드라마의 텔레비전 3국시대가 열리게 되었 는데 이는 그 무렵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벌어진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1970년대의 한국 드라마 1969년 8월 9일 MBC-TV의 개국특집 드라마 <태양의 연인들>(차범석 극본, 표재순 연출)이 방송됨으로써 지상파 3사의 드라마 경쟁은 불이 붙었는데 이 경쟁 체제는 1980년 제5공화국의 언론 통폐합으로 TBC-TV가 사라지기까지 10여 년간 지속된다. 이 시기의 특징이라면 텔레비전 3국이 경쟁하면서 텔레비전드라마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 하는 대중예술의 꽃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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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는 TBC에서 1970년∼1971년 방송한 일일연속극 <아씨>(월∼금, 밤 9:40∼10:00)를 꼽을 수 있다. 임희재 극본, 고성원 연출, 김희준 김 세윤 주연으로 당시 잠정 시청률 75%를 상회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KBS에서 1972년에 방송한 이남섭 극본 연출, 장욱제·태현실 주연의 <여로>와 MBC에서 1972년에 방송한 김수현 극본, 전양자 주연 의 <새엄마>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1980년대의 한국 드라마 1980년 12월 1일 컬러 방송이 개시되면서 흑백 텔레비전은 역사 속으 로 사라져 갔고,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흡수 통합됨 으로써 텔레비전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한국의 방송은 KBS와 MBC를 양대 축으로 하는 공영방송 체제가 시작 되었고 이 체제는 1990 년 SBS가 개국하기까지 지속되었다. 무릇 경쟁이 사라지면 담합이 이루어지기 쉽고 공정한 게임의 룰 이 손상되어 시장은 침체되기 쉽다. 이 시기에 KBS와 MBC 양대 방송 사가 각자 연기자와 연출자를 독점 운영하는 전속제를 도입하면서 두 방송사의 밀월시대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는데 드라마 시장의 확대와 다 양한 장르의 작품 생산이라는 측면에서는 정체, 혹은 퇴보기라고 생각 된다. 경쟁을 통한 발전보다는 서로의 영역에 안주하면서 시대의 변화 를 주도하지 못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던 이 밀월 체제는 1990년 민영방송인 SBS의 개국으로 깨지게 된다.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각 방송사가 여의도에 입주하면서 여의도 가 방송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언론 통폐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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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체제가 시작되어 명실 공히 공영방송의 개념이 정착된 것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 텔레비전 미술부문이 눈부 신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는데 KBS가 문학과 영상의 만남이란 기 치 아래 한국 근대문학을 영화적 영상으로 제작하여 방송함으로써 텔 레비전의 영상미의 구축에 앞장섰고, MBC는 <조선왕조 오백년>이라 는 장편 사극 시리즈를 장장 8년 동안 방송하며 드라마 주도권을 지켜 나갔는가 하면 농촌을 배경으로 한 주간 시추에이션 드라마 <전원일 기>로 한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990년대의 한국 드라마 1990년 11월 14일 민영방송 SBS-TV가 개국하면서 한국의 텔레비전은 다시 3국 경쟁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 9일 SBS TV는 개 국 드라마 <고래의 꿈>(최순식 극본, 공영화 연출)을 방송함으로써 지 상파 3사의 텔레비전드라마 경쟁은 유래 없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 했다. MBC와 KBS가 양분해 왔던 드라마 시장은 SBS의 가세로 출렁이 기 시작했고 작가, 감독, 배우 등의 전속제도 수명을 다하게 된다. 거액 의 스카우트 제의가 물밑에서 오가며 이들의 몸값을 높였고 정부의 외 주제작 확대 정책과 맞물려 상업자본이 드라마 외주시장에 가세하면서 한국 텔레비전드라마는 폭발적 활황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드라마 시장의 활황은 광고 시장에도 변화를 가져와 1990년 7월 한국갤럽이 자체 개발한 ‘피플 미터’를 통해 과학적인 시청률 조사를 시 작하게 되었다. 이는 방송사의 요구보다는 광고주들과 광고대행사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피플 미터란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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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슨사가 개발한 텔레비전 시청률 조사수단으로 과학적인 표본 추출 방식에 의해 뽑힌 일정 수 가구의 텔레비전 수상기에 이 장치를 달아 중 앙의 메인컴퓨터에 수상기 작동 방식, 채널 변환 등이 초단위로 자동 기 록되도록 고안된 것이다. 피플 미터를 통한 시청률 조사는 가족 구성원 의 개인별 버튼을 통해 시청자의 성별, 연령별, 직업별 집계가 가능해 광고주들의 타깃층 설정에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는데 드라마 제작자들 은 이 자료를 이용해 다양한 시청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드라마 기 획에 반영하는 과학적인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KBS는 일일연속극 <서울뚝배기>(김운경 극본, 김연진 연출)로 <여로>이래 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MBC 는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여 태국,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등지를 돌 며 2년여에 걸쳐 제작한 화제작 <여명의 눈동자>(송지나 극본, 김종학 연출)를 방송하며 대작 드라마 붐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감독은 여세를 몰아 대작 <모래시계>를 제작, SBS에서 방송하 며 명실공히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의 폭발적 활황세를 이끌어 갔다. 1992년 방송된 MBC의 미니시리즈 <질투>(최연지 극본, 이승렬 연출)는 트렌디 드라마라는 새로운 유형의 드라마 장르를 개척하였고 젊은 층의 열렬한 지지 속에 우리나라 전체 드라마의 지형을 바꿀 정도 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의 모작이라는 표절 시비에 휘말려 굴곡을 겪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이라면 방송3사의 치열한 시청률 경쟁으로 방 송의 저질화를 초래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막대한 예산을 들인 대 하드라마도 등장했고 시청률을 선점하기 위해 고액의 계약 작가를 자 사의 전속으로 묶어 두거나 연기자와 연출자를 비밀리에 스카우트하여 제작비의 급상승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SBS의 등장으로 KBS, MBC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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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월시대는 마감되었고 당연한 결과로 연기자 전속제도 폐지되었다. 1990년대 초반 MBC에서 미니시리즈 <질투>를 성공시키면서 이후 방 송3사에 트렌디 드라마가 양산되었고 이후 IMF 시대를 맞아 <옥이이 모>(김운경 극본, 성준기 연출), <은실이>(이금림 극본, 성준기 연출), <육남매>(최성실 극본, 이관희 연출) 등 복고풍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 다. 또한 MBC <베스트 극장>, KBS <드라마게임>, SBS <남과 여>등 단 막극이 인기를 끌면서 이를 통해 신인 연기자, 작가, PD 등이 대거 등장 하여 방송가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의 한국 텔레비전드라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KBS 미니시리즈 <가을동화>와 <겨울연가>는 윤석호 PD의 성가를 높이면서 한류 열풍과 함께 욘사마 신드롬을 몰고 와 드라마의 해외 수출이 본격화하게 된다. 또한 MBC의 <대장금>, SBS의 <여인천하>, KBS의 <태조왕건>등 대하사극들이 다시 안방극장 의 주요 시간대를 차지하면서 1990년대의 트렌디 열풍을 잠재우고 다 양한 장르의 드라마가 공존하는 편성의 다양화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시기에 한국 드라마는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주역이 되었으며 한국 텔레비전드라마가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쾌거 를 이루게 된다. 드라마가 돈이 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 부의 외주시장 활성화 정책에 따라 외주제작사가 난립, 역량 있는 연출 자들이 속속 방송사를 떠나 대거 외주제작사로 이동하여 프리랜서 PD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한류 드라마의 확산에 힘입어 트렌디와 대하사 극, 특별기획, 전문직 드라마, 연속극 등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가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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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아쉬운 점은 효율성을 이유로 방송3사의 단막극이 퇴조하면서 2008년 KBS의 <드라마시티>를 마지막으로 지상파 3사에 정규 편성 단 막극이 사라져 버린 점을 꼽을 수 있겠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은 작가료, 출연료의 급등으로 이어져 작가료 와 출연료가 전체 제작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시장 질서 교란으로 드라마 시장의 왜곡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전반적인 제작비 폭등으로 외주제작 시장 전체가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2010년대의 한국 텔레비전드라마 2009년 미디어 관련 법은 집권당인 한나라당의 단독 통과로 법적효력 을 갖게 되었고 2011년 12월 1일 드디어 신문재벌이 주도하는 4개의 종 합편성 채널이 출범하면서 무려 8개 채널에서 드라마를 방송하는 시대 가 되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시장의 확대를 의미한다. 수요의 확대는 일시적인 공급의 공백 현상을 불러왔지만 이는 시장원 리에 의해서 곧 균형을 잡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드라마 시장의 양 적 확대에 기여하게 될 종편채널 출범은 그 성패를 예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점차로 부정적인 전망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은 종편 출범(JTBC, A 채널, TV조선, MBN)과 뉴미디어(IPTV, 위성, DMB)의 약진으로 지상 파가 생존의 기로에서 상시 구조조정 체제에 돌입하는 등 지상파의 위 기가 초래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작가료와 출연료의 비정상적인 급등 으로 외주제작 시장질서가 교란되어 모두가 피해를 입는 상황이 벌어 지게 되었고 광고 매출 하락과 제작비 상승으로 방송산업 전반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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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악화가 초래되었다. 스타급 작가와 스타급 연기자를 앞세워 막대 한 제작비를 투입하는 대작 드라마는 축소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한 반도>, <아이리스>), 기획과 스토리로 승부하는 새로운 제작 방식이 모 색되기도 하였다(<응답하라 1997>, <막돼먹은 영애씨> 등). 이 와중에 결국은 콘텐츠가 살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콘텐츠에 대한 정부지원 은 확대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일본 의존도는 줄어들지 않고 있어 정책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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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구조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려면 그 구조를 알아야 하고 구조 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분해하고 잘게 쪼개보아야 한다. 드라마도 마 찬가지다. 드라마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대본을 분해하여 이야기를 잘 게 쪼개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확한 대본 분해를 위해서는 신과 시퀀스, 플롯 등 용어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이 장에서는 대본의 구 조와 영상의 구조를 들여다봄으로써 드라마의 전체 구조를 파악해 보 고자 한다.

영상의 최소단위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영상이라면 영상도 잘게 쪼개 보아야 한다. 영상 을 한없이 잘게 쪼개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답하려면 우선 컷과 숏, 프레임에 대한 개념이 잡혀 있어야 한다.

컷(cut)이란 편집점과 편집점 사이의 자르지 않는 연속된 화면을 말하 는 것으로 영상의 물리적 최소단위를 일컫는다. 한국 영화는 보통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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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이상의 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러닝타임 100분이라고 한다면 한 컷 의 길이는 평균 3초 정도다. 한국 영화에는 분당 20개 정도의 컷이 흘러 가는 것이다.

숏(shot)은 컷에 담긴 영상의 내용을 표현하는 영상적 단위다. 화면의 사이즈가 대단히 큰 것을 롱숏(Long shot)이라 하고 가장 작을 것을 빅 클로즈업숏(Big close-up shot)이라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숏이란 각 컷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프레임

프레임(frame)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첫째는 필름의 낱조각, 한 컴 마를 일컫는 화면의 최소단위를 일컫는다.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는 초당 24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고 텔레비전은 초당 30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로 프레임이란 화면의 경계를 이루는 사각형의 틀을 말하 기도 한다. 예를 들면 피사체가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프레임 인 (Frame in)이라 하고 화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프레임 아웃(Frame out) 이라고 하듯이 영상의 외곽 경계틀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① 컷(cut): 편집점과 편집점 사이의 자르지 않은 필름의 물리적 최 소단위 ② 숏(shot): 컷에 담긴 영상이 어떤 것인가를 내용적으로 표현한 영상적 단위 ③ 프레임(frame): 가) 필름의 낱 조각. 숏을 담은 화면의 최소단위 나) 화면을 이루는 사각형의 경계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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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신(Scene)이란 동일한 장소에서 일련의 연속되는 시간 속에 이루어지 는 행동이나 대사,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스토리의 최소단위라고 정 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장소’와 ‘연속되는 시간’이 모두 충족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황이 벌어지는 장소가 같아야 하고 시간의 단절이 없어야 하나의 신이 성립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장소, 연속되는 시간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열고 여자 주인공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교차해서 보여 준다고 하자. 긴박한 음악 속에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나이, 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여 자, 이 두 상황을 번갈아가며 보여 주고 싶다면 장소는 복도, 방, 복도, 방,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런 경우 시간은 연속되지만 장소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신을 각각 나눠 줘야 한다. 다음의 신을 예로 들어보자. 딸이 애인하고 술 먹다가 화장실 가는 척하고 밖으로 나와서 집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상황이다.

S# 어느 술집 앞거리(저녁시간)

딸, 술집 문을 열고나오며 전화를 건다.

엄마, 오늘 나 좀 늦을 거 같애.

엄마 (F) 야, 너 요즘 왜 맨날 늦게 들어와? 아빠한테 걸려서 한번 혼나

볼래? 딸

교수님이 보충수업 한다고 남아 있으랬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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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니네 학교는 왜 맨날 보충수업을 밤에 하니? 너 술 먹는 거 아냐? 딸

아니라니까? 공부하다 갈 거라니깐? 엄만 왜 딸을 그렇게 못 믿어?

엄마 하여간 열두시 넘으면 아빠한테 혼 날 테니까 알아서 해! 나도 책

임 못 져! (탁 끊는다)

딸, 전화기를 덮으며 전화기에 대고 혀를 날름 하고는 부리나케 술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런 경우에도 시간상으로는 연속되어 있지만 장소가 다르다. 딸 은 밖에서 전화하고 있고, 엄마는 집 안에서 전화를 받고 있으므로 시간 은 연속되지만 장소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신을 각각 다 나눠주는 것이 올바른 신 전개다.

S# 어느 술집 앞거리(저녁시간)

딸, 술집 문을 열고나오며 전화를 건다.

엄마, 오늘 나 좀 늦을 거 같애.

엄마 (F) 야, 너 요즘 왜 맨날 늦게 들어와? 아빠한테 걸려서 한번 혼나

볼래? 딸

교수님이 보충수업 한다고 남아 있으랬단 말이야.

S# 집 거실(저녁시간)

엄마, 저녁 준비하다가 전화를 받고 있다.

엄마 니네 학교는 왜 맨날 보충수업을 밤에 하니? 너 술 먹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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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어느 술집 앞거리(저녁시간) 딸

아니라니까? 공부하다 갈 거라니깐? 엄만 왜 딸을 그렇게 못 믿어?

S# 집 거실(저녁시간) 엄마 하여간 열두시 넘으면 아빠한테 혼 날 테니까 알아서 해! 나도 책

임 못 져! (탁 끊는다)

S# 어느 술집 앞거리(저녁시간)

딸, 전화기를 덮으며 전화기에 대고 혀를 날름 하고는 부리나케 술집 안으로 들어간다.

같은 장소, 연속되지 않는 시간

같은 장소라 하더라도 시간이 단절된다면 신을 나눠 주는 것이 정상이 다. 다음의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S# 술집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 남자가 문 열고 들어온다.

여자 (손을 들며) 자기야! 여기!

남자, 다가와 옆에 앉는다.

남자 오래 기다렸어? 여자 그래! 요즘 맨날 늦더라? 왜 그래? 남자 (픽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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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민다.

종업원 주문하시겠습니까? 남자 맥주 두 병하고 과일안주 주세요. 종업원 네, (간다)

맥주와 안주가 나오고 둘이 마시기 시작한다.

여자 요즘 문자도 자주 씹고, 연락도 잘 안되고...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남자 일은 무슨... 회사일이 좀 바빠서 그렇지. 여자 회사 일이 바빠도 전화 할 시간은 있을 거 아냐? 남자 그렇게 됐어. 술 더 마시자. (종업원을 향해) 여기요!

술을 꽤 마셨다. 테이블에 흐트러진 안주와 빈 맥주병이 즐비하다.

남자 야!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여자 ...무슨.. 소리야? 남자 솔직히 말할까? 나, 이제 니가 지겨워졌어. 그만 끝내자구. 여자 바보! 남자 ? 여자 용창이한테 들었어. 너, 입대영장 나왔다며? 그거 땜에 그만 만

나자는 거야?

남자의 눈이 젖어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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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 장소는 같지만 시간이 두 번이나 단절됐다. 안주를 만들 어서 가져오는 시간과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취할 때까지의 시간이 신 중간에 점프한 것이다. 이때는 신을 각각 ‘동 맥주 집(시간경 과)’ 이런 식으로 잘라 주어야 한다. 장소는 동일하지만 시간이 연속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이란 같은 장소와 연속되는 시간을 전제로 한다. 그 범위 내에서 행동이나 대사, 상황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의 신으로 묶어 줄 수 있게 된다. 신의 성립에 관해서는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 겠지만 대본을 많이 읽다 보면 차츰 개념이 잡힐 것이다.

신과 신의 구분

하나의 신이 끝나고 새로운 신이 시작되는 경우 감독은 관객에게 신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줄 필요가 있다. 관객은 특별한 장치가 없는 한, 컷이 바뀌어도 시간과 공간이 연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 이 있다. 신이 바뀌었는 데도 관객이 느끼지 못한다면 이건 일종의 연 출상의 실수에 속한다. 예를 들어 앞 신의 마지막 컷이 BS(Bust shot)였 는데 다음 신의 첫 컷이 같은 버스트(Bust) 사이즈로 시작되면 관객은 신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한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크게 두 가지의 경우에 우리는 의도적 으로 신과 신의 구분을 애매모호하게 하기도 한다. 첫째는 관객이 신이 바뀐 것을 의도적으로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다. 관 객이 눈치 채지 못하게 현실에서 갑자기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우 관객은 상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빠져 나올 때 비로소 그것이 상상 의 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이미지의 충돌을 위해 의도적으로 신과 신의 구분을 없애 버리는 경우도 있다. 영화 <졸업>에서 벤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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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호프만)과 미세스 로빈슨(앤 밴크로프트)의 반복되는 불륜관 계를 음악과 함께 몽타주 처리하는 장면은 시공간의 점프와 함께 신구 세대의 충돌이라는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상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편집으로 영화 편집 분야에 새로운 세계를 열 어 준 명장면에 속한다. 물론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흔히 쓰이는 편집 기법이지만 그 당시 60년대 중반에 이런 편집시 도는 대단히 실험적이고 파격적이어서 당시 고전적인 영화문법에 빠져 있던 할리우드 영화계에 던져 준 충격은 대단했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장면 전환을 시도하 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의도가 아니라면 통상적으로 감독은 신이 바뀔 때 관객에게 신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려 줘야 한다.

신과 신을 구분하는 방법

신이 바뀔 때,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에게 시간, 혹은 공간이 점프했다 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으면 관객은 혼란을 느끼게 되고, 이야기가 관객 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키게 된다. 이래서는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 고자 하는 스토리를 정확하게 이해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어떤 방식으로 신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인가? 신과 신을 구분하는 방법은 대략 네 가지가 흔히 쓰인다.

숏의 급격한 변화

완벽하게 이질적인 영상이나 급격한 사이즈 변화로 신의 전환을 알려 주는 방법이다.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밤에서 낮 으로, 실내에서 배경이 툭 터진 야외로, 클로즈 업에서 풀숏이나 롱숏 으로, 또는 풀숏에서 타이트한 숏으로 커트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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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을 알려 줄 수 있다.

오디오의 변화

이펙트(Effect), 소음, 대사, 음악 등을 사용해서도 신과 신을 구분해 줄 수 있다. 시끄러운 시장통에서 조용한 방안으로 장소가 바뀐다면 사이 즈가 비슷하거나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은 장소가 바뀐 것을 소 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는 음악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지점에서의 커 트는 신의 변화를 느끼게 해 준다.

내용적으로 이어지는 대사

앞 신의 마지막 컷과 다음 신의 첫 컷을 내용적으로 이어지는 대사로 맞 받아주는 방식일 경우 화면의 사이즈와 시선 방향을 오히려 연결감을 주 는 방식으로 편집함으로서 신을 구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 사실 3 일째 아무것도 못 먹었어...” 이런 대사로 어떤 신이 끝났다고 하자. 다음 컷에서 전혀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신이 전개되는데 첫 컷에 누군가가 놀 란 표정으로 “뭐? 3일을 굶었다구?” 이렇게 받았다면 이것은 시간과 공간 을 점프해 간 것이고 관객은 신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내 용적으로 이어지는 대사로도 신의 전환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인서트의 삽입

건물의 외경을 인서트(Insert)하고 그 내부로 카메라를 가져가는 것은 신의 전환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다. 그 외에 주변 풍경이나 특정 사물의 클로즈업을 인서트하고 신을 전환하기도 한다. 제3의 풍경에서 카메라가 무빙해서 인물로 다가가는 것도 일종의 변형 된 인서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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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퀀스 시퀀스(Sequence)란 ‘하나의 이야기(사건이나 상황)가 시작되고 마무 리 되는 독립적인 스토리의 구성단위’로 장소, 행동, 시간의 연속성을 가진 몇 개의 장면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 고 마무리되는 데까지의 일련의 신 덩어리를 시퀀스라고 하는데 여기 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종료되는 데까지가 아니라 ‘마무리’되는 데까지 라는 점이다.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서 접어두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는 것, 그것을 마무리라 한다. 시퀀스는 몇 개의 신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한 개의 신이 하나의 시퀀스가 되기도 한다. 시퀀스는 플롯보다는 작고 신보다는 큰 이야기의 덩어리다.

① 신: 동일한 장소에서 일련의 연속되는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행 동이나 대사,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드라마 구성의 최소단위. ② 시퀀스: 하나의 이야기(상황, 사건)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독 립적인 구성단위. 극의 장소, 행동, 시간의 연속성을 가진 몇 개 의 장면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플롯 플롯(Plot)이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을 간추려서 체계적으로 구성 한 것을 말하는데 기승전결, 또는 발단 전개 갈등 위기 절정 결말 등으 로 구분되는 큰 흐름에서 파악한 스토리의 단위를 말한다. 현대극의 일 반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이 찌그러진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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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 현대극의 일반적 구성 절정 위기 갈등 전개 발단

결말

오프닝 (프롤로그)

엔딩 (에필로그)

틀로 이야기의 단위를 분해하는 것을 플롯 분할이라고 한다.

이야기와 구성 스토리란 글자 그대로 이야기 그 자체를 말한다.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기술한 것을 말하는데 스토리 를 구성하는 3대 요소로는 인물, 사건, 배경 등이 있다. 구성이란 이 스 토리의 3요소가 유기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적절히 배열되는 것을 말 한다. 구성되지 않은 스토리는 아직 드라마가 아니다.

스토리의 3요소

스토리는 인물, 사건, 배경의 세 요소가 결합되면서 구체적으로 그 모 습을 드러낸다. 단, 그것은 서사적인 기술이다. 이를테면 일이 일어난 사실 그대로, 시간대별로 기술된 것이어서 아직 구성의 전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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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인물: 6하 원칙의 누가(Who)에 해당되는 요소로 인물 묘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격(character)이다. ② 사건: 무엇을(What), 또는 어떻게(How)에 해당되는 요소다. 드 라마 속의 사건을 전개함에 있어 가장 핵심 요소로 꼽히는 것은 ‘갈등’이다. 갈등이 없다면 관객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갈등이 야말로 스토리를 전진시키는 엔진이다. 갈등이란 대립과 충돌 을 말한다. 부딪치고 대립하고 충돌하는 갈등 속에 드라마가 있 다. 갈등이 없는 곳에 드라마도 없다. ③ 배경: 배경에는 시간적 배경(When)과 공간적 배경(Where)이 있다. 배경 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구체적이고 시각 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벌어진 일인 가? 이것이 작가나 감독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서사

드라마를 공부하는 우리를 가끔 스트레스 받게 하는 용어가 ‘서사(敍 事)’라는 단어다. 서사구조가 어떻고 서사적 진술이 어떻고 하는 말을 들으면 괜히 주눅이 든다. 이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한자의 뜻을 유 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서(敍)자는 차례 서(敍)다. 순서, 질서 할 때의 그 서자다. 사(事)자는 일 사(事)로 사실, 사건 할 때의 그 사자에 해당 한다. 풀어 쓰면 서사라는 단어는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라는 뜻이 다. 더 쉽게 말하면 ‘일이 일어난 시간대 순으로, 사실 그대로’라는 뜻이 다. ‘서사적으로 진술하시오’ 이런 말은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일어난 사실 그대로 이야기를 해 보라’는 뜻이다. 교과서 중 가장 서사적으로 기술된 책은 역사책이다. 역사책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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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난 순서대로 기술 되며 사실 그대로 기록된다. 순서를 뒤바꾸거나 사 실하고 다르게 저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되면 안 된다.

플롯의 구성

플롯을 구성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인과관계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결합 되어야 함을 뜻한다. 드라마의 내적 시간은 해체되고 개개의 사실은 전 체의 부분으로 재조립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의 3요소 인 인물, 사건, 배경이 ‘인과관계’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 다는 점이다.

① 인과관계: 하나의 행위나 상황이 그 후에 발생한 사실과의 사이 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 ② 유기적: 각 부분이 독립적인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 이 일정한 목적 아래에 하나로 통합되어 부분과 전체가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상태.

드라마는 인물과 사건, 배경이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큰 이야기 덩 어리를 이루고 있어서 이 중 어느 한 가지만 떼어내거나 변경하면 이야 기 전체가 바뀌거나 무너져 버리게 된다. 인물, 사건, 배경이 유기적으 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이야기(narrative)가 인과관계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을 플롯 (plot)이라 한다. 사건을 시간대별로 사실 그대로 기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과관계에 따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스토리가 작성 되고 나면 그것을 플로팅(plotting)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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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적 관점과 통일적 관점

<인간극장>에서 ‘여자’를 다루는 방식과 아침 드라마에서 ‘여자’를 다루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인간극장>에 등장하는 여자는 어머니로서, 아내로 서, 딸로서, 며느리로서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된다. 그러나 아침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자는 오로지 남편과 외간 남자 사이의 애정행각에 초점을 맞춘 다. 사랑과 불륜이라는 관점에서만 ‘여자’를 묘사하는 것이다. 스토리 형태의 내러티브 전개 방식에서는 전지전능한 작가의 시점에서 인 간의 내면세계를 넘나들며 인물과 사건을 묘사할 수 있지만, 플롯 형태의 내러티브 전개 방식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주제와 관련되어 주인공의 내면 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관객에게 보여 주는 일이 핵심 과제가 된다. 전자 를 다각적 관점, 후자를 통일적 관점이라 한다.

스토리와 플롯

조금 귀찮긴 하지만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내 러티브에 대한 개념적 정리가 다소 필요하다. 영화에서의 내러티브란

표 3-1 스토리와 플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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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story)

플롯(plot)

시간대별 나열

인과관계별 나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

유기적인 흐름에 따라 기술

평면적

입체적

다각적 관점

통일적 관점

단선적 구조

나선구조(시트콤), 복합구성


매우 많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보편적 문자기호는 물론, 영상의 미 장센, 명도나 색채, 번짐과 흐림과 겹쳐짐으로 전하는 영화적 관습에 따른 영상언어로서의 기호가 있으며, 음악과 음향이 전하는 기호 또한 포함된다. 이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수많은 사건의 집합이 말하 고자 하는 바를 ‘내러티브’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분석적으로 파고 들어 가는 영화이론의 세계에서 ‘내러티브’란 용어는 무궁무진하게 그 의미 가 확대되어 간다. 그러나 영화이론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깊이 들어갈 이유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그냥 ‘내러티브=이 야기’ 이렇게 바꾸어 이해해도 문맥상의 혼란은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스토리의 형 태로 전개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플롯의 형태로 전개하는 방식이다.

① 스토리 형태의 전개 방식: ‘내러티브가 서사적(敍事的)으로 결 합된 것’을 스토리라고 한다. 즉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사실 그 대로 기술되는 방식이다. ② 플롯 형태의 전개 방식: ‘내러티브가 인과관계에 따라 유기적으 로 구성된 것’을 플롯이라 한다. 플롯 형태의 전개 방식에서는, 이야기가 시간대순으로 기술될 필요도 없고, 사실 그대로 기술 될 필요도 없다. 이 단계에서 시간은 해체되고 재조립된다.

스토리가 플로팅되어야 하는 이유

이야기는 왜 플로팅되어야 하는 걸까? 그냥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것 일까? 다음의 두 가지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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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스토리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시간대 순으로, 죽었 다는 사실 그대로 기술했으니 스토리 형태의 내러티브 전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한번 바꾸어 보자.

“왕비가 죽었다. 사람들은 그 죽음의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왕의 죽음을 슬퍼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시간대별 기술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죽은 왕 비를 이야기의 전면에 배치한다. 또 단순히 왕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 술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힘으로써 인과관계 속에서 왕비 의 죽음을 기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플롯 형 태의 내러티브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재혼한 어머니가 딸을 남기고 죽었다. 의붓아버지는 딸을 어릴 때 부터 성폭행했다. 장성한 딸이 아버지를 죽였다.”

이건 스토리 형태의 내러티브 전개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 게 한번 바꾸어 보자.

“어느 날 딸이 아버지를 죽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인륜을 저버린 흉악범이라고 욕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그 아버지는 의붓아 버지였고 어릴 때부터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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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간대별 기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단순 한 존속살인사건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전후관계를 밝힘으 로써 인과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예에서 보듯이 플롯 형태의 내러티브 전개는 훨씬 더 임팩트가 강하고, 듣는 이를 궁금하게 만들며, 관객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우리가 스토리를 작성한 후에 그것을 가지고 다시 플로팅을 해야 하는 이유는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만드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주의, 주장,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플로 팅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첫 장면을 보고 나면 끝까지 안 보고 는 못 배기게 만드는 관객 유인책이 바로 플로팅이다.

드라마 구성이론 스토리가 전개되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하고 이를 도식화하려는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에 의하면 드라마는 3막으로 구성되었을 때가 가 장 효과적이다. 시작–중간–종말의 3단계로 진행되는 3막 구조는 1막에 서 주인공과 적대자가 소개되고, 주인공의 임무가 소개된다. 2막에서 는 주인공과 적대자가 대결해 주인공이 처절하게 패배하고 이를 계기 로 다시 힘을 기르게 된다. 3막에서는 최후의 대결에서 주인공이 승리 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러한 3막 구조는 오늘날 대부 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여전히 반복 답습하고 있는 방식으로 3막 구조의 틀 속에 자본을 앞세운 스펙터클과 스타를 활용한 멜로 코드를 뒤섞은 ‘관객 서비스’를 추가함으로써 세계 영화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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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들어 독일의 극작가 구스타프 프라이탁(Gustav Freytag)은 스토리가 단지 3막 구조로 평면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서 상승하거나 하강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희곡을 피라미드 구 조로 보고 발단, 상승, 정점, 하강, 대단원이라는 여러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3부 5단계론을 주장했다. 프라이탁이 내세운 5단계는 다음과 같다.

프라이탁의 3부 5단계 구성

① 발단(發端): 사건과 구성의 전개가 예시되고 인물이 소개되는 단계. 시 간과 장소, 극적 분위기가 소개되면서 앞으로 있을 사건을 암시하며, 갈 등과 분규가 내포된다. ② 전개(展開): 발단에서 시작된 사건이 보다 더 복잡해지고 갈등과 분규 를 일으키며, 긴장과 흥분을 더해 주는 단계. 사건이 절정에 올라가는 극의 중심 부분이며, 관객의 흥미와 주의를 끄는 부분이므로 자연스럽 고 합리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③ 절정(絶頂, 정점): 발단에서 시작된 사건은 전개를 지나면서 몇 번의 위 기를 거쳐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심리적 갈등이나 의지의 투쟁, 주동 세력과 반동 세력 사이의 대결이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이다. ④ 하강(下降): 절정을 거친 뒤에 파국과 대단원을 향해서 가는 부분으로 절정에서 극적 긴장도가 최고조에 달한 뒤에 발전하여 극의 해결을 지 향해 가는 단계다. 이 단계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관객은 여기서 감정의 정화를 얻게 된다. ⑤ 대단원(大團圓): 극적 갈등과 투쟁이 끝나고 긴장감과 흥미가 끝나면서 사건이 종결되는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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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드라마 구성 오늘날에 와서는 드라마 구성에 있어 정점에서 대단원까지의 오른쪽 변의 기울기가 점점 가파르게 변해가는 추세다. 또 전반부인 발단 전개 의 과정도 점차 축약, 통합되어 보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형태로 발전 했다. 드라마 구성에 관한 이론들을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3-2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구조설(직선구조) 시작 The beginning

중간 The middle

종말 The ending

그림 3-3 프라이탁의 3부 5관점설(정삼각형구조) 정점

상승

하강

도입

파국

그림 3-4 연극적 구성(찌그러진 삼각형구조) 클라이맥스 갈등 전개 발단

대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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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 동양적인 구성(사다리꼴 구조) 승

그림 3-6 현대극의 일반적 구성(심하게 찌그러진 삼각형 구조) 정점 위기 갈등 전개 발단

결말

그림 3-7 영화적인 구성(지느러미 구조) 절정 위기 오프닝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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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도입

결말

엔딩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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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제작 과정

장르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프로듀서가 아이 디어를 수집하고 작가가 대본을 완성시키는 프리프로덕션(pre- production) 단계, 감독이 그 대본을 영상화하는 프로덕션(production) 단계, 그 리고 편집과 믹싱으로 대표되는 포스트프로덕션(post- production) 단계 를 거친다. 특히 드라마는 다른 장르보다 더 복잡하고 세분화된 제작 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드라마 제작 과정은 거의 모든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표준적 모델이 되고 있다. 여기에 서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제작과정의 3단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의 전 단계로 프로듀서나 작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상하여 기획안을 작성하고 대본을 완성하면 감독이 대본을 분해하여 녹화스케 줄과 예산계획표를 작성하는 단계다. 제조업에 비유하면 새로운 상품 을 기획하고 이에 맞는 생산라인이나 공정을 세팅하고, 필요한 원자재 와 기술, 인력을 확보하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시청자의 요구(Needs)를 파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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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다. 언제 어떤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가? 시청자들은 어 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가? 또 국민 들의 일상생활과 라이프 사이클, 텔레비전 시청 행태는 어떠한가? 등을 면밀히 분석하는 일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시대 적 요구와 문화적 트렌드 등 시청자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작품을 기획한다면 시청자는 낮은 시청률로 응징하게 될 것이다.

프리프로덕션의 작업 과정

프리프로덕션은 복잡한 프로덕션 과정에서 일어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사전에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응방안을 미리 세워두는 작업이기도 하 다. 계획이 철저하고 완벽할수록 시간과 예산을 절약할 수 있다. 드라 마의 프리프로덕션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 기획 ∙ 작가 선정 ∙ 시놉시스 작성 ∙ 연출자 선정 ∙ 예산 확보(표준제작비, 제작지원, 협찬, PPL) ∙ 스태프 구성 ∙ 세트 제작 협의 ∙ 대본 집필 및 수정 ∙ 촬영 장소 헌팅 ∙ 작곡 의뢰(타이틀곡, 주제가, 테마곡) ∙ 캐스팅(주연급) ∙ 계약(작가, 스태프,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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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 제작(사극의 경우에 한함, 현대물은 코디네이터가 담당) ∙ 분장 미용협의 ∙ 촬영 장소섭외, 계약 ∙ 조연 캐스팅 ∙ 대본 완성 ∙ 대본 분해 ∙ 촬영 스케줄 확정 ∙ 대본 연습 ∙ 콘티 작성

프리프로덕션의 핵심 업무

드라마의 기획자는 시대의 트렌드와 시청자의 요구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해 내고 방송사 또는 제 작사에 제안하여 승인을 받아야 한다. 드라마의 제작은 바로 승인된 아 이디어로부터 시작된다. 기획자는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자 료를 수집하고, 취재를 하고, 작가와 장기간의 토론을 통해 내용을 보 강해 나간다.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놉시스를 거쳐 대본을 완성하고 완성된 대본을 분해하여 작품의 구조를 파악한 후 이를 바탕 으로 제작스케줄을 정하고 예산을 확보, 배분하는 일이다. 요약하자면 프리프로덕션의 핵심 업무는 다음과 같다.

① 대본 완성 ② 대본 분해(breakdown) ③ 제작 스케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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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 프리프로덕션 단계 업무 흐름도 예산확보

기획안

작가 선정

시놉시스 작성

감독 선정

스태프 구성

대본 집필

트리트먼트작성 장소 헌팅

계약

오픈 세트 제작

음악 감독

작곡 의뢰(타이틀곡, 테마)

조연급 캐스팅

촬영 장소 섭외

의상, 분장, 미용 협의

미술 감독

주연급 캐스팅

수정

저작권 협의

계약

촬영 스케줄 확정

④ 예산 수립, 확보, 배분

기획자는 프로덕션 매니저(production manager)와 함께 대본을 분해하고 제작 일정을 작성하여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 배분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며 프로덕션 매니저는 제작에 필요한 장비, 인력, 시 설을 확보한다. 또한 각종 계약이나 보험 등에 관한 사항을 꼼꼼히 점 검해야 하고 각 부문별 스태프와 연기자 단체가 설립한 조합(union)과 의 협의를 통해 추후 법률적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는 부분을 체크해 야 한다. 프로덕션 과정에서는 때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며 각종 사고에 노출될 수도 있다. 따라서 완벽하고 치밀한 사전계획만이 제작 과정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예산을 절약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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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 콘티 작성


프로덕션 프로덕션은 감독에 의해 주도되는 제작과정이며 이 단계에서의 핵심인 력은 촬영, 조명, 음향, 기술, 미술 등의 스태프다. 프로덕션 작업의 가 장 중요한 목표는 연기자의 연기를 최상의 컨디션에서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영상과 음향의 질, 화면의 균질성, 연출의 테크닉 등도 중요하지만 프로덕션 단계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 장 큰 변수는 역시 연기 부분이다. 따라서 감독은 당연히 연기자의 연 기에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실제로 화면의 기술적 완성도에 지나치게 집중함으로써 연기자의 잘못된 연기를 잡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친 것을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현장에서 스태프와 연기자 를 지휘해서 블로킹을 설정하고 콘티를 구현하는 일은 연기자의 연기 를 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잊어서 는 안 된다.

프로덕션의 작업 과정

프로덕션의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세트 제작 ② 촬영 장비 확보 ③ 야외 촬영

그림 4-2 프로덕션 단계 업무 흐름도 로케이션 촬영

스튜디오 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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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세트 촬영 ⑤ 스튜디오 녹화

멀티 카메라 제작과 싱글 카메라 제작

스튜디오에서 두 대 이상의 카메라를 사용해서 녹화하는 멀티 카메라 제작은 부조정실에서 대부분의 작업이 지휘 통솔되며 기술감독, 조명 감독, 영상, 음향, 녹화 스태프들이 참여한다. 이 스태프들은 야외 로케 이션에 참여하는 스태프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멀티 카메라 제작만 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 스태프다. 싱글 카메라 제작은 야외촬영이나 세트촬영에서 한 대의 카메라를 사용해 제작하는 방식으로 스튜디오 스태프와는 별도로 촬영, 조명, 음 향 등의 스태프가 구성된다. 스튜디오 제작과는 달리 카메라, 조명, 음 향 스태프와 밀착해서 컷 바이 컷(Cut by cut)으로 밀도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어 화면의 균질성을 확보하고 연기자의 연기를 컨트롤하기 쉬운 장점이 있는 반면 연기자의 동선이나 감정선이 단절될 위험이 있고 오 디오가 스튜디오만큼 깨끗하게 픽업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스튜디오냐 야외냐?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감독들이 예산 아끼려고, 혹은 야외촬영 나가서 촬 영하는 일이 번거롭기 때문에 스튜디오 녹화를 선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스튜디오냐, 야외촬영이냐는 대부분 대본에서 결정된 다. 특별한 블로킹 없이 마주 앉아서 대사를 주고받는 대사 위주의 신 이나 상호 호흡이 중요한 멜로 감정의 신, 또는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중구난방으로 떠들거나 말싸움하는 신 등은 커팅의 타이밍이나 음향의 균질성, 연기자 감정선의 흐름에 있어 스튜디오 제작이 훨씬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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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은 편집감독에 의해 주도되는 후반작업이며 이 단계에 서는 편집, 음악, 효과, CG, 타이틀, 특수효과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발전된 디 지털 기술이다. 순서 편집과 러프 커팅을 거쳐 파인 커팅과 종합 편집 으로 최종 완성본을 만들어 내는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 있어서 디지 털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변화는 엄청나다. 여러 번 반복되는 편집에도 화질의 손상이 거의 없고, 영상을 수정 하고 덧입히는 특수효과에 기대어 카메라로 담아내기가 대단히 어렵고 난이도가 높은 장면을 안전하고 간단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향 부분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디지털 기술은 크 게는 인류의 삶의 방식과 문화산업 전반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지만 방송과 영화 등으로 대표되는 영상의 제작과정에 스피드와 유연성을 증대시키고 표현 영역을 확대하는 등 제작과정의 3단계에 미친 영향 역 시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프로덕션의 작업 과정

포스트프로덕션의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순서 편집 ② 러프 커팅 ③ 순서 작업 ④ 파인 커팅 ⑤ 음악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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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3 포스트프로덕션 단계 업무 흐름도 순서편집

러프커팅

순서작업(야외+ST)

파인커팅

오디오

음악작업

더빙(대사+효과)

비디오

특수영상

타이틀

CG

예고작업

종합편집

색보정

⑥ 더빙(대사, 나레이션, 마음의 소리, 전화 목소리, 편지, 메모, 기 타 음향효과) ⑦ 특수영상(CG, 3D, 특수효과) ⑧ 자막(모필, CG, 타이틀) ⑨ 컬러 콜렉션(색보정, 영화의 네가텔레시네 작업에 해당) ⑩ 믹싱 (Mixing, 종합 편집) ⑪ 방송용 테이프 이관(주조정실)

러프 커트와 파인 커트

촬영된 영상을 우선 거칠게 붙여 보는 1차 편집을 러프 커트(rough cut) 라 하는데 NG컷을 걸러내고 OK컷을 대략 붙여봄으로써 전체적인 흐 름을 파악하고 편집 플랜을 세우는 단계다. 파인 커트(fine cut)는 러닝 타임까지 고려해 거의 최종 편집본을 만들어 내는 단계로 컷의 흐름이 대단히 매끄러워진다. 파인 커트가 끝나면 음악이나 효과, 더빙, 특수 효과 등을 거쳐 종합편집실에서 믹싱(Mixing)을 함으로써 최종 완성작 이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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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편집감독이 되는 길

드라마 편집감독이 되는 길은 다양하다. 처음부터 편집실에 입사해 편 집보조부터 시작해서 도제 시스템 속에 성장해 가는 경우도 있고 연출 팀의 스크립터 일을 통해 현장과 편집실을 오가며 커트의 감각을 익힌 후 편집실 직원으로 직종을 바꾸는 길도 있다. 현재 지상파 3사 드라마 편집실의 경우 상당수의 편집감독이 스크립터 출신으로, 다양한 현장 경험과 연출자나 편집감독과의 밀착된 작업방식을 통해 드라마의 흐름 과 커트의 감각을 익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딱히 정해진 등용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양한 인간관계와 휴먼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의 미 래를 개척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능한 편집감독은 단시일 내에 만 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요구되는 것이 편집감독 의 일이므로 평소 드라마와 영화 등 영상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감 각을 익히려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스크립터

스크립터는 제작의 전 과정에 걸쳐 작업에 참여해야 하는 활동 영역이 대 단히 넓은 직종이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연출팀에 참여해 대본 분해 작업에 참여하고 프로덕션 단계에서 촬영의 전 과정에 걸쳐 감독과 밀착해 있으며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서도 편집실과 감독 사이를 오가 며 러프 커팅과 파인 커팅에 참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최종 믹싱까지 챙 겨야 하는 고단한 직종이다. 그러나 하는 일이 바쁜 만큼 비교적 짧은 시 간에 연출자나 편집감독으로부터 드라마의 흐름이나 커트 진행의 노하 우를 쉽게 전수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게다가 편집감독과의 밀착 된 작업 방식으로 편집실 직원들과 친해져서 결원이 생겼거나 보조편집 자가 필요할 경우 쉽게 기회를 얻을 수도 있어 드라마 편집감독으로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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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젊은 여성들이 주로 이 일에 뛰어들고 있다. 또한 스크립터는 프리프로덕션부터 포스트프로덕션까지 제작의 전 과정을 참 여하기 때문에 제작과정 전반에 걸친 시스템과 운영방식을 가장 폭넓게 배울 수 있는 직종이다. 따라서 스크립터 일을 하다가 외주제작사의 조 연출이나 기획PD, 제작PD로 발탁되기도 한다. 스크립터 출신으로 KBS 드라마제작국에서 일하는 한 편집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스크립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본 분석 능력이다. 배역의 감정 연 결이나 상황 연결을 놓치지 않으려면 대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제작 현장에서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평소에 드라마를 많이 보며 드라마의 흐름을 읽어 내는 훈련을 쌓아야 하고 대본을 항상 곁에 두 고 대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요즘은 스크립터를 거쳐 감독이나 작 가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고 FD나 조연출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시 편집감독이 되기 위한 교두보로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스크립터 생활을 잘 하려면 현장에 익숙해져야 하고 현장을 즐겨야 한 다. 경력 7∼8년차 되는 스크립터들은 대부분 스크립터 일 자체가 좋 아서 뛰는 경우가 많고 대우는 일반 기업체 연봉 수준은 된다.”

스크립터의 역할

현재 지상파 3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편집감독의 수는 40∼50여명 선인데 이 중 80% 이상이 스크립터 출신이다. 스크립터는 일정기간 OJT라고 하는 현장 직무교육(on-the-job training)을 거쳐 현업에 투입 되는데 주로 연출팀에 소속되어 감독이나 조감독의 업무지휘를 받지만 대부분 정규 직원이 아니고 프리랜서로 참여하게 되어 직업적 안정성 이나 업무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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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4 스크립터 대본 예 <넝쿨째 굴러온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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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일 자체도 고생스럽고 출장이 잦은 데다 야간작업이 많기 때 문에 결혼하고 나서 계속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문 편집감독을 꿈 꾸는 사람에게는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직종이라고 본다. 스크립터의 역 할은 다음과 같다.

① 녹화용 테이프 수령, 넘버링, 관리, 운반, 보관, 반납 ② 촬영순서, 콘티, 테이크 넘버, 감독의 전달사항 등을 기록하여 편집감독에게 전달 ③ 연기자의 의상, 코디, 더블액션, 시선방향 등 연결사항을 기록 ④ 자료화면 검색, 대출, 보관, 반납 ⑤ 스튜디오 리허설에 참여하고 콘티의 변경사항을 관련 스태프에 게 전달 ⑥ 마음의 소리, 전화 목소리, 편지, 메모, 내레이션 등 사전녹음 진행 ⑦ 러닝타임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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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산업의 현실

얼마 전에 한국 드라마계의 거장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백야 3.98>, <태왕사신 기>, <신의> 등 굵직굵직한 드라마를 연출해 온 김종학프로덕션의 대 표 김종학 감독이 강남의 한 고시텔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이다. 혹자는 김 감독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네, 가혹한 검찰 수사를 받고 자존감이 상해서 그랬네 말이 많지만 나는 김종학 감독의 죽음이 개인 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한국의 드 라마 산업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이 김종학 감독을 죽음으로 몰 고 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장에서는 김종학 감독의 죽음을 통해서 한국 텔레비전드라마 산업의 현실을 좀 들여다보고자 한다.

모순으로 가득 찬 드라마 외주제작의 세계 <태왕사신기>는 총 24부작으로 회당 제작원가가 18억 원 정도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애초 SBS에서 방송하기로 하고 제작에 착수했으나 제작이 완료될 무렵까지 해외 판권 등 저작권 문제 가 합의되지 않아 끝내 SBS 방영이 무산되었다. 결국 <태왕사신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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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감독의 친정인 MBC에서 방영되었다. 당시 MBC로부터 받은 회 당 제작비는 2억 원 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가 18억 원짜리 제품을 단 돈 2억 원에 팔았으니 <태왕사신기>는 드라마로는 성공적이었지만 제 작사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대표적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 드라마는 총 48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지만 알려진 수익은 2차, 3차 수익을 통틀어 400억 원을 조금 넘는 데 그쳤다. 흥행에 성공 하고도 제작사는 쪽박을 차는 이런 사례는 방송가에서는 너무도 흔히, 아주 오래된 관행처럼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와중에 많은 제작사들이 운영난에 허덕이며 아사 직전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이처럼 외주제작 의 세계엔 모순이 가득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비싼’ 드라마일수록 ‘싼’ 외주제작사에 맡겨진다

스타급 출연자가 많아 편당 제작비가 많이 드는 미니시리즈는 방송사 에서는 웬만해서는 자체제작을 하지 않는다. 스타급 배우 캐스팅에 돈 이 많이 들어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방송사는 대형 손실을 피하기 위해 제작을 외주로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체 제작을 할 경우 편당 제작비가 2억 원 이상 든다면 외주제작으로 돌려 편당 1억 5천만 원 정도만 주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방송사가 외주제작 사에 주는 돈은 제작원가의 60∼70% 수준이다. 이처럼 손실이 뻔히 보 이는데도 제작에 참여하겠다는 외주제작사들이 줄을 서는 이유는 무엇 일까?

제작사는 930여 개, 채널은 고작 4개

현행 법정 외주비율은 40% 정도 된다. 이 중 외주를 줄 수 없는 뉴스와 스포츠, 외화 등을 빼고 나면 실제 제작국 프로그램의 70%을 외주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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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야 정해진 외주비율을 맞출 수 있다. 드라마의 경우 이미 각 지상파 의 외주 비율이 70%가 넘은지 오래 되었고 SBS의 경우 드라마 외주비 율은 거의 80%에 육박한다. 종편은 아예 100% 외주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높아진 외주제작 비율은 군소 제작사의 난립을 가져왔다. 전국 에 외주제작을 위해 뛰고 있는 제작사는 900개가 넘으며 이 중 드라마 를 제작했거나 드라마 제작을 목표로 뛰고 있는 회사는 40개 이상이다. 신생 제작사들은 회사를 설립하고도 오랫동안 편성을 못 받아 실 적이 전무한 채로 편성을 따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몇 년씩 계속해 보 지만 방송사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믿을 만한 작가나 감독, 혹은 스타 급 배우가 사전에 확보되지 않으면 기획안은 검토조차 되지 않기 일쑤 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사무실 얻고 직원 뽑아 월급 주며 몇 년씩 버텨 보지만 매출은 전무하다. 몇 년씩 실적이 없으니 투자자들이 가만히 있 을 리가 없다. 자금난과 투자자의 성화 등 이런 저런 압박에 몰린 제작 사는 형편없는 제작비를 받고도 방송을 낼 수밖에 없는 절망적 상황에 몰리게 된다. 제작 경험이 없는 신생제작사는 방송사의 요구대로 스타 급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지급한다. 방송사들 은 실적 없는 이런 초보 제작사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거의 모든 손 실 위험을 제작사에 떠넘기고,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수익 모델은 거의 모두 독차지한다. 이것이 제작 경험이 전무한 제작사에 대작 드라마의 제작을 쉽게 맡기는 이유다. 그러니 어쩌다 드라마가 대박이 나도 결국 임금이나 출 연료 미지급과 같은 문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제작비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출연진이나 스태프들이 임금은 제대 로 받고 있는지는 방송사의 관심 밖이다. 스태프나 연기자의 임금 미지 급 사태가 벌어지면 방송사 쪽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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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작주체인 외주제작사와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다.

김종학프로덕션에 김종학이 없다

제작기간이 2년을 넘은 대작드라마 <태왕사신기>는 회사에 많은 손실 을 안긴 채 막을 내렸고 결국 김종학 감독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자 자신이 가진 회사 지분을 모두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회사를 떠난 것으 로 알려졌다. 그 이후 회사 운영은 김 감독의 후배인 박창식 씨가 맡아 왔으며 그는 지금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 이고 있다. 결국 <태왕사신기>는 제작사 대표이자 감독으로 김종학 PD 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마지막 드라마가 되었고 이후 김종학프로덕션 은 김종학 감독이 없는, 이름만 김종학프로덕션인 회사가 되어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김종학 감독은 <여명의 눈동자> 이후 외주제작시장에 뛰어든 외 주제작의 선구자다. 20년 넘게 거친 외주 시장에서 버텨온 베테랑이다. 특정 프로그램(SBS <신의>) 한 편의 실패나 금전적 손실로 좌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외주제 작 시장의 구조적 모순이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꼼수 ‘유한회사’

적자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제작을 주는 지상파나 이를 받아 제작하 는 제작사나 늘상 반복되는 ‘대박 드라마, 쪽박 제작사’의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자 결국 새로운 형태의 위험 회피 수단을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단위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가 제작 주체 가 되도록 하는 교묘한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이다. 듣기도 생소한 ‘문화 산업전문회사’라는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유)선덕여왕’, ‘(유)신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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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자막이 언젠가부터 엔딩 크레디트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제작사 파산 시 아무도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는 꼼수에 다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한회사란 자본금을 모두 잠식하고 나면 회사는 해산되고 운영 주체는 더 이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대 규모 손실로 회사가 부도나서 해산되면 그 피해는 미처 임금을 선불로 받을 입장이 못 되는 힘없는 스태프나 조, 단역급 연기자, 하청회사, 보 조출연자 등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지게 된다. 결국 문화산업전문회사 라는 이름의 유한회사는 이미 예견된 손실을 힘없는 약자들에게 모조 리 떠넘기고 손을 털겠다는 가진 자의 ‘먹튀정신’의 발로에 불과한 것이 다.

김종학은 출연료를 떼먹지 않았다

SBS <신의>는 김종학 감독이 연출자로 참여한 유한회사의 작품이다. 김 감독의 죽음으로 검찰 수사가 종결되어 정확한 경위는 덮여 버렸지 만 이 작품에서 김 감독은 법적으로 스태프나 출연자들의 미지급 임금 을 책임을 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은 유한회 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제작시스템이 법적으로 보장해 준 안전장치다. 이 작품에서 그는 연출료를 받고 제작에 참여한 디렉터의 자격이었을 뿐이다. 작가나 출연자나 마찬가지로 임금을 받고 제작에 참여한 연출 자로서 자신의 연출료만 챙기면 그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강직한 감독, 타협을 모르는 제작자로 살아온 그에 게 동료 연기자의 출연료와 스태프들의 임금 미지급은 견디기 어려운 자책과 좌절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드라마밖에 모르고 일 만 하며 살아왔고, 그토록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동료 들의 임금이나 떼먹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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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졌을 것이다. 그는 고시원의 좁은 골방에서 곱씹고 곱씹었을 것이다. “내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드라마밖에 모르고 열심히 살아온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까지 받은 김 감독은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 왔던 드라마제작자, 혹은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심각한 아노미 현상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는 고시원의 작은 방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심각한 상황에 이른 제작비 배분의 불균형 일반적으로 제작이라고 하면 그 과정을 3단계로 나눈다는 것은 잘 알려 진 사실이다. 프리프로덕션(pre production)과 프로덕션(production), 그리고 포스트프로덕션(post production)이 그것이다.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다. 드라마는 문화이면서 동시에 산업이다. 인생 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예술의 한 부분이지만, 또 한편 으로는 자금을 투자하고 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발생시켜야 하는 자 본주의의 산업논리가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제작의 전 과정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는 이유는 사업적 측면에서 제작 예산이 균형 잡 히게 배정되고 집행되었나를 알아보기 위한 필요 때문이다. 프리프로덕션에 투입되는 인력인 작가, 감독, 배우들에게 지급되 는 돈을 ‘상위라인(Above the line)의 비용’이라 한다. 그리고 촬영, 조 명, 음향, 기술, 미술, 편집 등 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 투입 되는 인력에 지급되는 돈을 ‘하위라인(Below the line)의 비용’이라 한 다. 전체 예산이 이 두 항목에 적절한 균형을 가지고 배분되었을 때 우 리는 제작사의 안정적 성장과 드라마 산업의 균형 잡힌 발전을 기대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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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문제는 우리 드라마 산업의 경우 상위라인이 비용이 너무 높 고, 그중에서도 배우 부문에 투입되는 비용이 지나치게 과다하다는 것 이다.

역대 최고의 출연료를 기록한 <태왕사신기>

2008년 배용준은 <태왕사신기>에 출연하면서 회당 2억5000만 원을 가 져갔다고 한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출연료로 1억, 지분 참여로 1억 5000 정도의 개런티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태왕사신기>가 MBC로 부터 받은 제작비는 회당 2억 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방송사로부 터 받은 제작비를 주인공 한 명에게 몽땅 쏟아부어도 부족한 상황이 벌 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수의 주연급 연기자가 제작비의 60% 이상을 가져간다. 작가와 주연급 출연자가 가져가는 돈이 전체 제작비 의 75%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돈으로 촬영하고 편집하란 말인가? 처 음부터 손실은 예견된 것이었다. 결국 제작사가 손실 부담을 떠안거나 그럴 능력이 안 되면 스태프나 조연급 연기자의 임금을 체불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작비 배분의 불균형이 원인

요즘 문화산업 분야에 진출하는 대졸 신입사원의 경우 초봉이 100만 원 수준이다. 회당 2억5000만 원씩, 주 2회 방영이니까 주당 5억, 다시 말 해 월 20억을 버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제작사 신입 프로듀서의 느낌은 어떨까? 그는 자신보다 2000배나 돈을 더 가져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그 럴 수 있다고, 그럴 만하다고 수긍할 수 있을까? 이런 극심한 상대적 박 탈감 속에 재능 있는 젊은이가 문화산업 종사자로 남아 있을 이유를 스 스로 찾아낼 수 있을까? 상위라인에 편중되는 제작비는 하위라인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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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의 삶을 옥죄인다. 그나마 걸핏하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면 실력 있는 사람이 붙어 있지를 않는다. 결국 제작비의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하위라인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는 것이 다. 기술적 스태프 부문의 질적 저하는 작품의 완성도 저하로 이어지고 초과된 제작비는 임금 지급 지연, 제작사 경영 악화, 연쇄 도산, 영상산 업 침체로 이어지는 것이다.

연기자 출연료 상승, 산업 규모에 비해 지나치다

2008년 12월 1일 한국드라마PD협회는 고액 출연료가 드라마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인식하에 “텔레비전드라마 위기와 출연료 정상화”라는 주 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여기서 제시된 자료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주연급 연기자의 출연료는 20배 이상 상승했다. 이제 주연급 배우들은 회당 5000만 원에서 7000만 원 정도를 받는다. 조연급 배우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뜰 것 같다, 괜찮다 하면 금방 1000만 원이 넘어간 다. 우리나라 외주제작의 경우 평균적으로 전체 제작비의 60%가 출연 료, 15%가 작가료에 투입된다.

표 5-1 외주제작 드라마 제작비 항목별 지출비율 (2006∼ 2007년 기준)

항목

실 제작비 대비(%)

출연료

60

극본료

15

스태프료

23

진행비 등

2

자료: 박창식(2008), 드라마제작사의 드라마제작, 유통, 현황과 과제, KBI 주최 “드라마 산업 현황과 과제” 세미나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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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2 전체 제작비 중 출연료 비율 <60분 기준> 일본

미국

한국

전체 제작비 (직접비)

2000만∼3000만 엔 (현 환율 3억∼4.5억 원)

300만∼400만 달러 (현 환율 45억∼60억 원)

1억5000만 원

스타급 출연료 비중

10%

10 ∼ 20%

50%

전체 출연료 비중

25 ∼ 30%

30%

65 ∼ 70%

출처: 하윤금(2008), 한국 TV연기자 출연료제도의 합리적 대안모색, 한국 드라마 PD협회 주최 “TV드라마 위기와 출연료 정상화” 세미나 자료집.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력 있는 외부 감독이나 프로듀서는 설 자리 가 없어지고 실력 있는 카메라맨, 조명감독, 미술감독, 음악감독도 쓸 수 없고, 장비도 마음 놓고 쓸 수 없다. 일본의 경우 출연료가 전체 제작 비의 25∼30% 수준이다. 작가료는 3% 수준을 넘지 않는다. 스타급 출 연자의 출연료 비중도 전체 제작비의 10%를 넘지 않는다. 표 5-2는 일 본과 미국의 전체 제작비 대비 출연료 비율을 비교한 것이다. 방송 시장의 규모로 보면 일본은 우리나라의 6배 정도 되고, 광고 시장 규모는 10배 정도 된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우리의 배우 출연료는 일본의 6분의 1 정도가 적정 수준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주연급 배우의 출연료는 일본의 두 배 가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 라 연예인의 70%가 연 소득이 1000만 원 이하이고 월 평균소득이 80만 원밖에 안 되는 연예인이 2천4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드라마 산업의 모든 부가가치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것도 스타급 배우라는 특정 직 업군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런 수치는 오 늘날 한국 드라마 산업이 갖고 있는 문제가 어느 개인의 문제이거나 특 정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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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편 출범으로 시장 환경은 좋아졌나?

미디어법 개정과 종편채널 출범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 다. 플랫폼이 늘어나면 미디어 산업의 숨통이 좀 트인다는 것이 종편 출범의 논리였다. 그런데 종편출범으로 드라마를 방송하는 채널이 두 배 이상 늘어났는데도 외주제작사의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그 이유 는 종편이 지상파에 맞서겠다고 과잉투자를 하면서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료를 이전보다 더 높여 놓았기 때문이다. 제작비는 지상파보다 적 게 주는데 배우들의 출연료는 더 높아진 것이다. 지금은 JTBC를 제외 하고는 드라마는 다 접었다. 채널은 늘었는데 드라마 외주 시장은 더욱 나빠져 버린 것이다. MB정권의 대표적인 방송 정책의 실패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종학 감독의 죽음은 개인의 문제인가? 2005년부터 시작된 영화산업의 침체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2007년 저점 통과, 2008년부터 회복 단계로 접어들어 지금은 다시 상승 모드다. 2012년에는 관객 1000만을 돌파한 영화가 두 편이나 된다. 반 면 텔레비전은 출연료, 작가료의 상승으로 상위라인의 비용에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다. 현재 외주제작사들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으며 문을 닫는 회사들이 늘고 있다. PD들은 이 상황을 폭탄 돌리기 게임에 비유한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들고 살얼음 판을 걷고 있는 것이 지금의 드라마 제작시장이다. 그리고 이미 드라마 산업은 붕괴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슈퍼 갑으로 불리는 지상파도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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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힘든 상황이다. 뉴미디어의 약진과 경기 침체로 광고 시장이 위축 된 데다 HD제작과 디지털화로 기술, 미술 부문에 지속적인 비용이 발 생하면서 경영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할수록 손해다

외주제작사 JS픽쳐스의 이진석 대표는 MBC 연출자 출신으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제작자로의 변신에 성공한 케이스다. 어느 해 연말에 그와 나눈 술자리에서의 대화를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해 JS픽처스는 지상파에만 5∼6편을 제작, 방송해 대부분 히트했으나 연말에 결산해 보니 30억 원의 적자가 발생했다. 차라리 아무 일 하지 않고 전 직원이 일 년간 팽팽 놀았다면 경상비 20억 원만 적자보고 끝났을 것이다. 결 국 뼈 빠지게 일하고 10억 원을 더 까먹었다. 그해 유상증자로 30억 원 을 못 메웠으면 아마 회사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는 이제 해외 판권 등 저작권을 보전 안 해주면 이 일도 곧 그만둘 수밖에 없다며 현행 외주제 작 구조에 대한 원망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종학 감독은 처음으 로 해외 판권을 지상파에 넘겨주지 않고 저작자의 권리를 수호한 최초 의 감독이다. 그리고 그 작품이 바로 <태왕사신기>였고, 해외 판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편성을 해 주지 않겠다는 SBS를 뒤로 하고 MBC로 방 송테이프를 들고 가는 용기를 발휘했던 것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생전에 계열사 임원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눈 올 때는 마당 쓸지 마라.” 시장 상황이 나쁠 때는 신규 투자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 드라마 시장에 관한한 한국은 눈 오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눈은 10년 전부터 내리기 시작해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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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은 없나?

세 가지 갈래에서 이 문제의 해법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제작사는 거액의 출연료를 주고 스타를 섭외해서 그에 의존 해 쉽게 가려는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보다는 드라마의 본질인 기획과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아이디어와 스토리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사례들은 속속 등장하고 있 다. 2012년에 방송된 tvN의 <응답하라 1997>이나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 같은 드라마는 스타에 의존하지 않고도 기획과 스토리텔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방송사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제작사와 불공정한 계약 을 체결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외주비율이 40%가 넘는 상황에서 외주 제작사는 단순 하청업체가 아니라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 파트너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저작권, 해외판권 등도 공정하게 배분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외주제작 시장을 보호 육성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 시절 2% 에서 시작해 현재 40%까지 높여온 외주 비율이 오히려 함량 미달의 제 작사를 난립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경험이 일천한 군소 제작사의 난립이 시장의 왜곡을 가져온 측면이 있으므로 이제 수요공급의 원리 에 의해 일정부분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도록 지나친 규제와 개입을 자 제하고 시장경제의 원리에 맡겨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거장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말자

예산을 확보하고 배정하는 과정에서 상위라인(A/L) 비용과 하위라인 (B/L) 비용의 균형을 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 일은 전적 으로 기획자의 몫이다. 노련한 기획자는 시놉시스만 보고도 대략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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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비를 계산해낸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모두가 피해자가 되느냐, 적절한 안배를 통해 파이를 키움으로써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게 하느냐는 전적으로 기획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 작가, 감독, 배우, 스태 프 등 제작 관련자들에게 있어서 좋은 기획자를 만난다는 것은 절반의 성공을 담보하는 일이다. 한국 영상산업은 기획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여름, 한국 영상 산업을 지탱해 오던 위대한 기획자를 한 사람 잃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드라마 산업의 문제가 특정 직종이나 조직, 혹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임을 모두가 인식하고, 이 모순투성이의 외주제작 구조가 극복되고, 한국 영상산업 을 다시 일으키는 공론의 장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 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만이 평생을 드라마에 몸 바쳐 온 한 거장의 죽 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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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기획


드라마의 기획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제작자, 기획자, 연

출자 등의 용어에 대한 정의부터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 로 ‘제작’과 ‘기획’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많은 데다 프로듀서와 연출 자를 구분하지 않는 오랜 관행으로 인해 제작팀 내의 역할 구분이 분명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혼동해서 쓰는 용어로는 제작자, 제작진, 제 작팀, 기획자, 기획팀, 프로듀서, PD, 연출자, 감독 등이다. 제작은 주로 돈과 관련된 것이다. 투자자들을 설득해 제작비를 마 련하거나 혹은 특정 조직의 예산을 배분받아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확 보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도록 관계자들을 관리 감독한다. 하여 주어진 기간 내에 작품을 완성하도록 제작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작품 이 완성되면 이를 판매하여 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배분하는 일을 맡 은 개인이나 조직을 제작자, 혹은 제작사라 한다. 투자자는 수익을 배 분받지만 제작자는 완성된 드라마의 저작권을 갖는다. 프리프로덕션 부터 포스트프로덕션까지 드라마 생산의 전 과정을 ‘제작 과정’이라고 표현한다면 이때의 ‘제작’이란 ‘만든다’는 의미의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 하고 있는 것이다. 기획자는 제작자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하면서 작품의 발상부터 최 종 완성까지 행정적으로 개입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작자와 구분될 뿐 아니라 연출자인 감독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드라마 연출자는 보통 연출, 감독 등의 용어로 부르는 것이 혼란을 줄일 수 있다. 감독을 ‘프로듀서’라고 부르면 프로듀싱(Producing)을 책임지고 있는 ‘기획자’와 혼돈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에서 관행적 으로 쓰고 있는 PD라는 용어는 기획자인 ‘프로듀서(Producer)’를 지칭 한다기보다는 연출자, 혹은 감독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프로그램 디렉 터(Program Director)의 줄임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2부에서는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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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작품의 구상단계부터 작가나 감독과 호흡을 맞 추고 최종 완성단계까지 제작의 전 과정을 행정적으로 책임지는 ‘프로 듀서로서의 기획’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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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주체

4장에서 언급했듯이 제작은 대개 프리프로덕션(pre production), 프로 덕션(production), 포스트프로덕션(post production)의 세 단계로 나 눈다.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 특히 드라마는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70∼80% 정도 성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상작품의 성패는 프리 과정에 얼마나 에너 지와 정열을 쏟아 붓느냐에 달려 있다. 프리 과정을 엉성하게 해 놓고 촬영이나 편집 과정에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은 마치 1층을 짓지 않 고 2층, 3층부터 올리려고 시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장 에서는 프리프로덕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획의 주체와 내용에 관 해 이야기해 보자. 매주 지상파 3사에서 쏟아내는 드라마는 20여 편, 한 해에 방송되 는 드라마는 타이틀 수로 계산하면 총 100여 타이틀에 이른다. 기획 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드라마의 수까 지 합치면 한해에 엄청난 수의 드라마가 기획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각 방송사의 드라마 국장 책상에는 늘 다양한 형태의 드라마 기획안이 쌓여 있다. 드라마를 만드는 외주 제작사, 작가, CP, 연출자 등 무수히 많은 제작 주체들이 보내 온 기획안이 편성 잡힐 날만 기다리며 대기하 고 있는 것이다. 이 많은 드라마 기획은 과연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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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1 국내 지상파텔레비전드라마 방송 현황 [2013년 9월 넷째 주(9.23∼9.29)]

방송사

주당 방영 작품 수 (편)

주간 방영 작품 편수 (편)

주간 드라마 방영시간 (분)

총 편성시간 중 드라마 편성비율 (%)

KBS1

2

6

585

5.95

KBS2

6

17

1335

15.9

MBC

7

23

1810

18.2

SBS

6

18

1325

13

합계

21

64

5,055

13.26 (평균)

∙ 타이틀 수 기준으로 보면 지상파에서 연간 100여 편 전후의 드라마가 방영됨. ∙ 총 편성시간 대비 드라마 편성시간은 평균 13% 수준. (재방 포함) ∙ 3사 중 MBC가 가장 많이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음. (방영시간 기준) ∙ 전체 편성시간 중 드라마 편성비율도 MBC가 가장 높음. ∙ 드라마 21편 중 15편이 외주제작으로 평균 외주비율은 71.4% 수준. ∙ 외주제작 비율은 SBS가 83%로 가장 높음.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편성팀에서 기획하는 경우 창사 특집극, 계기 특집(3.1절 특집, 6.25 특집, 추석 특집, 설날 특집 등 을 말함), 특별 기획 드라마 등을 직접 편성팀에서 기획하고 완성까지 맡아서 하기도 한다. 이 경우 같은 방송사의 제작국에 맡길 것인가, 외 주제작으로 넘길 것인가는 편성국에서 스스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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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기획하는 경우 소재, 아이템 등 최초의 발상이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경우다. 6개 월씩 가는 연속극은 대부분 작가가 기획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 작가 가 기획의 주체다 보니 캐스팅에 있어서 작가의 의견이 반영되는 경우 가 많다. 작가하고 의견 충돌이 생겨서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 우 데스크에서는 작가는 그대로 두고 연출자를 교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만큼 작가 의존도가 높은 것이 우리 드라마의 제작현실이다. 실제로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기획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작가가 이 야기 만들고, 플롯을 짜고, 직접 대본을 쓰기 때문에 전적으로 작가 책 임하에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장기로 가는 드라마는 이런 방식이 흥행 실패의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다.

프로듀서가 기획하는 경우 CP나 기획팀에서 기획하는 경우다. 가끔 프로듀서와 디렉터를 혼동하 는 경우가 있는데, 프로듀서는 기획자이고 디렉터는 감독이다. CP는 프로듀서의 우두머리로 방송사의 부장급 PD에 해당된다. 이 CP가 자 기가 맡은 드라마를 기획하는 일도 종종 있다. 한편 각 방송사마다 드라마 기획팀이 있어서 작가, 연출, 기획PD 등 인적자원을 활용하여 기획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기획팀에서는 신인작가를 발굴 육성하고, 새 드라마를 기획하고, 원작 리서치를 하고, 적당한 원작이 있으면 당장 방송화하지 않더라도 미래를 위해 미리 판 권계약을 하는 등의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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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터가 기획하는 경우 감독이 자기가 연출할 작품을 직접 기획하는 경우다. 대부분의 디렉터 기획은 감독이 자신의 예술적 욕구를 표출하려 들기 때문에 시청률의 논리, 예산의 논리에 눌려 성사되기 쉽지 않다. 또 감독이 아무리 천재 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기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대본화하는 것 은 작가이므로 작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지 못하는 기획은 사장될 수 밖에 없다. 결국 드라마를 쓰는 사람은 작가이기 때문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미니시리즈나 특집의 경우 디렉터의 기획이 성공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교적 단기간에 승부가 나는 장르다 보니 대 본이 다소 부실하더라도 끊임없이 수정해 가면서 드라마를 찍어 나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로 제작되는 드라마의 경우 디렉터 기획은 많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외주제작사가 기획하는 경우 우리나라의 외주 제작사 수는 900여 개 정도 되고 그중에서 드라마 제 작을 표방하는 드라마 제작사가 한 40개 정도 된다. 드라마를 방송할 플랫폼의 숫자가 워낙 적다 보니 개편 때마다 편성 따내기 경쟁이 치열 하다. 요즘은 이름 있는 작가나 스타급 주인공을 미리 물고 들어오지 않으면 논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는 경우도 많다. 외주사에서 작가나 배우뿐만 아니라 스폰서까지 물고 들어오는 경 우도 있다. SBS에서 김정은, 박신양이 주연으로 나온 <루루공주>라는 드라마는 동명의 비데회사에서 제작비를 댔기 때문에 제목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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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차피 화면상의 노출이 어려운 상품이 니 브랜드 인지도라도 높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외주사 에서 미리 스폰서까지 섭외해서 가져오는 경우, 방송사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미리 제작비를 일정 부분을 확보해 놓았으니 밑져야 본전 이기 때문이다.

기타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사내 공모를 통해 드라마 기획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극본 공모를 통해 확보한 신인 작가들의 응모작 중에서 골라 제작 을 하기도 한다. 방송사마다 매년 극본 공모를 하는데 여기서 새로운 기획안도 얻고 신인 작가도 발굴 육성하려는 취지다. 그 외에 아주 드 문 경우지만 시청자가 제공한 수기나 아이디어 등이 채택되어 드라마 로 기획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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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제작은 거의 대부분 프로듀서가 이끌어 간다. 프 로듀서는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송출에 이르기까지 제작의 전 과 정에서 계획을 수립하고, 조직하며 감독한다. 프로듀서의 임무는 첫째, 프로그램의 책임자로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둘째, 그 목표에서 벗 어나지 않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프로듀서는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데 작가 로 하여금 대본을 완성하게 하는 일부터 예산을 수립하고 확보하는 일, 대본을 분해하여 촬영스케줄을 정하는 일, 정해진 기간 내에 제작이 완 성될 수 있도록 일정을 관리하는 일, 그리고 연기자를 캐스팅하는 일 등 을 주도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제작과정의 모든 책임은 프로듀서에게 있고 사후정산 및 수익의 배분에 이르기까지 프로듀서의 역할과 책임 은 광범위하다. 프로듀서의 분류와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자.

프로듀서의 분류 과거에는 프로듀서와 디렉터를 통칭해서 PD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프 로듀서와 감독을 구분해서 부르지 않아도 될 만큼 프로그램이 단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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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규모가 크지 않아서 한 사람이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수행해 왔기 때 문이다. PD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프로듀 서(Producer)라는 용어에서 왔다는 주장, 프로듀서·디렉터(Producer & Director)의 줄임말이라는 주장, 그리고 프로그램 디렉터(Program Director)의 약자라는 주장 등이 있다. 명확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과거 에는 PD라는 직종이 프로듀서·디렉터(Producer & Director)를 의미 했다면 지금은 프로듀서(Producer)를 지칭하는 용어로 통일되어 가고 있다. 연출 부분을 담당하는 디렉터(Director)와는 업무의 성격이나 방 향이 달라 두 직종은 점점 분화되어 가고 있다. 프로듀서는 그 권한과 역할에 따라 총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책임 프로듀서(Chief Producer), 실무 프로듀서(Producer), 협력 프로듀서(Associate Producer), 공동 프로듀서(Co-Producer), 라 인 프로듀서 (Line Producer), 보조 프로듀서 (Assistant Producer) 등 으로 구분될 수 있다.

① EP(Executive Producer) 개별 프로그램의 제작에 세세하게 관여하지 않으며 전체 예산이나 인력 배치 등을 담당하며 조직을 이끌어 가는 높은 지위의 프로듀 서로 제작국의 국장급 프로듀서가 이에 해당된다. 방송사에서는 임원으로 승진하기 직전 단계에 해당되는 고위직이다. 투자자를 끌어 모으거나 자체 예산을 확보하여 자금 스케줄을 운영하며 이 익 창출과 수익 배분까지 책임지고 있다. 영화의 경우 제작사 대표 를 지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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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CP(Chief Producer) 책임프로듀서라고도 불리며 주로 경력 20년 내외의 부장급 프로듀 서들이다. 비교적 규모가 큰 대작 드라마에는 CP 휘하에 일반 실무 프로듀서들과 행정담당 직원이 배치되기도 한다. 연속극 담당CP, 미니시리즈 담당CP, 특집극 담당CP 등의 영역 구분을 두기도 하며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작가나 감독 선정, 캐스팅, 일정관리, 예산관 리 등 제작의 전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정 분야에 정통 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보다는 기본적 소통 능력과 리더십을 바 탕으로 전문가들의 능력을 잘 조화시키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의 소양이 요구되는 직책이며 의사결정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승부사 기질 또한 필요하다.

③ 코프로듀서(Co-producer) 두 개 이상의 회사에서 공동의 지분으로 제작에 참여할 경우 각 회 사의 업무를 조정하고 협의해 나가기 위해 회사에서 파견한 프로듀 서. 일반적으로 코프로듀서(Co-Producer)의 지위가 AP(Associate Producer)보다 높으며 제작 예산의 규모가 커지면서 각종 형태의 지분참여로 공동제작이 늘어나는 추세여서 코프로듀서의 업무 영 역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④ AP(Associate Producer) 제작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 투자사나 유명한 원작의 저작권을 제 공한 경우, 현물 출자로 제작의 파트너가 된 경우, 작품의 아이디어 를 공동으로 개발하고 도움을 준 경우 참여사의 입장을 대변하고 지원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해당 조직의 대리인이 협력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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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ociate Producer)로 임명된다.

⑤ 라인프로듀서(Line Producer) 주로 현장을 뛰는 프로듀서로 제작팀의 조연출과 긴밀한 협조관계 를 유지하여 예산이 과다 지급되지 않도록 조정하며 현장에서 소 요되는 전도자금의 수령과 집행, 정산, 제작일정, 촬영 준비, 섭외 관계 등을 담당한다. 제작의 전 과정에 걸쳐 회사의 입장에서 회사 를 대변하여 일하는 프로듀서로 본사에 있는 실무 프로듀서와 긴 밀한 협의를 유지하며 제작일정과 예산을 통제하는 일을 맡는다.

⑥ 보조프로듀서 (Assistant Producer) 글자 그대로 프로듀서를 보좌하는 역할이다. 라인프로듀서와 달리 현장보다는 내근을 위주로 하는 직종으로 프로듀서와 디렉터 사이 에서 완충 역할을 하기도 하며 각종 계약관계나 시설, 장비의 예약, 저작권 등 잡다한 법률적 문제들을 검토, 조정해 나가며 프로듀서 의 조수 역할을 한다. 감독(Director) 밑에 AD(Assistant Director) 가 있듯이 AP는 프로듀서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업무를 배워 나가 는 사람이다.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프로듀서 방송을 결정하기 전에 기획제안서를 충분히 검토하고 대본을 면밀히 살펴본다 하더라도 사전에 드라마의 성패를 예측한다는 것은 사실 쉬 운 일은 아니다. 프로듀서는 기획 단계에서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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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편성과 시대적 트렌드를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기획회의를 통해 여 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하 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프로듀서의 결단에 달려 있다. 제작을 할 것이 냐? 말 것이냐? 이 결정은 주로 프로듀서가 내려야 하고 방송사의 국장 급 EP가 의사결정의 키를 쥐고 있다. 좋은 프로듀서가 되려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흐 름을 앞서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유행에 너무 민감할 필요도 없 고 시청자의 기호에 너무 끌려 다닐 필요도 없지만 시대의 흐름은 정확 하게 짚고 있어야 한다. 자기중심을 분명히 가지고 시청자를 자기 세계 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최선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프로듀서가 되려면 어떤 특정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보다 다 방면에 걸친 지식과 소양을 쌓는 것이 좋다. 프로듀서가 좁고 깊게 아 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소 얕더라도 넓게 아는 것이 낫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다양한 지식의 섭렵이 좋은 프로듀서의 조건이다. 이를테면 오케스트라 지위자가 모든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아야 할 필요 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 악기의 특성과 음색, 다른 악기와의 하모 니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다. 멋진 연주회는 훌 륭한 연주자를 알아보는 눈과 이들을 섭외하는 능력만 있으면 해결되 는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기획은 평범한 기획이다 창조적인 작업의 세계에서 다수결 원칙은 통하지 않는다. 회의를 통해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모두가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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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기획은 평범한 기획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기획이란 위험도 많이 따르고 어느 정도 도박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프로듀서 가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정말 고독하고 막막할 수밖에 없다. 결 국 이 순간이 되면 최종 결정은 프로듀서의 감(感)에 의존하게 된다. 감이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 로 쌓이는 것이다. 무당이 점치듯이 어떤 예지력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 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다. 항상 성공 만 해 본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크다. 실패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위기가 왔을 때 이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늘 실패만 해 온 사람도 성공하기 어렵다.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로 듀서의 판단력이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쌓이는 것이다. 프로듀서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서 작품을 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다. 기획안을 볼 때 문득 성공에 대한 확신이 드는 순간이 간혹 있 는데 그 순간이 사실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모든 성 공의 비결은 자신을 부정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 독의 말이다. 철저하게 객관적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의 열쇠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영화를 만들 때 자기 자신의 100% 옳다고 판단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말이다. 영상의 세계에 천 재란 없다. 자기 재능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한두 번은 성공할 수 있어도 그걸로 끝나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확한 감을 가지려면 오 랜 세월을 성공과 실패를 거치면서 축적되고 쌓여진 것이 있어야 한다. 학생들의 경우 본인이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과 편집을 하는 상황 에 들어가게 되면 남의 얘기가 잘 안 들린다. 심지어는 지도교수가 얘 기를 해도 안 듣는 경우가 있다. 자기 세계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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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의 세계에서도 그런 경우는 흔하다. 한번 작품에 함몰되어 버리면 주 변의 충고가 귀에 안 들어온다. 그럴 때 다시금 마음을 열고 겸허한 마 음으로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가짐이 작품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프로듀서 이미 한국은 짧은 기간 내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마쳤다. 영상 분야에서의 디지털 기술의 도입은 제작 방식이나 시스템에 혁명 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우리 사고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 하고 있다.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스태프들은 아날로그 시대와는 전 혀 다른 업무 형태와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가장 혁명적으로 변한 것 은 포스트프로덕션 부문이다. 사운드와 영상 편집, 그리고 특수효과 기 술은 포스트프로덕션 작업의 흐름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디지털 시대의 프로듀서는 디지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프로덕션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지털 지 식을 이용한 스태프들과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익혀야 한다. 기술, 미술, 조명, 음향, 편집, CG, 특영, 음악, 효과 등의 분야에서 디지 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PT자료의 작성 과 오퍼레이팅에 능숙해야 할 뿐만 아니라 투자자들 앞에서 작품의 성 공 가능성과 수익성을 설득하는 프레젠테이션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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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기획 과정

한 편의 드라마가 크랭크 인(crank in)되기까지 기획자나 감독은 얼마 나 많은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워야 하는 걸까? 보통 일반인들은 촬영, 편집 등을 제작의 전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엄청나게 많은 노력과 예산이 제작 전(前) 단계에 투입되고 있다. 제 작 현장보다는 사무실에서의 사전작업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 이 드라마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의 드라마는 어떤 기획 과정을 거쳐서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되 는 것일까? 기획안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는지, 또 무엇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지, 왜 기획을 하는지…. 이런 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발상 발상(Motivation)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단 몇 줄로 요약된 이야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모티브(Motive), 발상, 아이템(Item), 전제 (前提, Premise), 아이디어, 콘셉트(Concept) 등등 뭐라고 부르든 ‘최초 의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상을 이야기의 종자(Seed of story) 라고 하기도 한다. 한 알의 씨앗이 싹이 돋고 줄기가 피어나고 꽃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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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

화장품 가게에서 공짜로 나눠 주는 샘플 화장품 같이 판촉을 위해 맛보기 로 나눠 주는 물건을 세일즈 후크(sales hook)라 한다. 세일즈 후크란 판촉 물을 뜻한다. 작가가 프로듀서에게 이러이러한 얘기가 있는데 어때? 하고 제안을 했을 때 프로듀서가 혹해서 빨려 들어오게 만들 수 있다면 이 역시 세일즈 후크다. hook란 미끼, 낚시바늘이란 뜻이다. 예고편이나 첫 장면을 본 관객이 끝까지 안보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작가의 올가미, 낚시 바늘인 셈이다.

듯이 스토리가 확장되고 뻗어나가 이야기가 꽃 피어날 수 있는 씨앗이 되는 그 무엇이다. 또 어떤 감독은 hook라고 하기도 한다. 낚시 바늘, 올가미, 미끼라는 뜻이다. 어떤 용어를 쓰던 ‘최초의 그 무엇’이이며, 단 몇 줄로 요약된 이야 기의 출발점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후크들을 살펴보자.

① 어느 날 파티에서 두 남녀가 만나 첫눈에 반했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원수 집안의 자 식들이었다. 자, 이제 이 두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② 신분사회였던 조선조 시대, 양반집 아들이 어느 날 술집 주모 딸 을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③ 꺼벙한 동사무소 직원이 어느 날 결혼을 했는데 부인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쭉 빠진 미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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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폭력배 두목이었다. ④ 삼십대 중반의 잘나가는 DJ가 독신으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애까지 하나 달고 나타나서 아버지라 고 부르기 시작한다. 어떻게 될까?

①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②는 <춘향전>, ③은 <조폭 마누라>, ④는 <과속 스캔들>의 모티브다. 이처럼 최초의 발상, 모티브, 후크는 한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좀 오래된 영화지만 영화연출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고전인 영 화로 <졸업>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후크는 흡인력이 강력하다. ‘장모될 여자가 사위될 남자와 자 버렸다. 어떻게 될까?’ 1967년 당시 35 세의 신예감독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가 만든 이 영화는 무명의 더스틴 호프먼(Dustin Hoffman)을 일약 할리우드의 주연급 스타로 만 들었고 그 영화에 삽입된 사이먼과 가펑클의 음악은 지금도 많은 올드 팝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이 영화로 그 이듬 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그 반대의 후크도 있다. ‘시아버지 될 남자가 며느리 될 여자와 자버 렸다. 자, 어떻게 될까?’ 프랑스의 루이 말(Louis Malle) 감독이 만든 <데 미지>다.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와 쥘리에트 비노슈(Juliette Binoche)가 주연을 한 이 영화는 스토리가 할리우드에 수출되어 할리 우드판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국내에서 개봉된 <데미지>는 할리 우드판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시아버지 될 남자(제레미 아이 언스)가 아들이 결혼할 여자라고 데리고 온 여자(쥘리에트 비노슈)에게 첫눈에 반했다. 여자도 물론 마찬가지로 시아버지 될 남자에게 강력하 게 끌린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운명처럼 이끌리며 함께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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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나눈다. 정말 흥미진진한 도입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단 몇 줄로 요약된 이야기의 출발점을 발상이라고 한 다. 기획은 이 발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 몇 줄로 요약될 수 있는 이야기인가?’ 라는 점이다. 내가 기획한 이야기가 단 몇 줄로 요약이 되지 않는다면 일단 나쁜 기획이 아닐까 의심해 보아야 한 다. 갈등구조가 선명하고 이야기의 출발점이 한두 줄로 심플하게 요약 될 수 있다면 명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명작일수록 심플 하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통해 진리다. 최초의 발상은 어느 날 책상에 앉아서 ‘자, 이제부터 발상을 해야지’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평소에 뭔가 미리 입력이 되어 있어야 한 다. 입력된 데이터가 있어야 출력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 다. 오랜 시간 이야기의 종자(seed of story)들이 머릿속에서 숙성이 되 었다가 어느 순간 감이 익어서 툭 떨어지듯 좋은 이야기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한 편의 멋진 작품으로 발전해 나가는 첫 단계가 발상이긴 하지만 좋은 발상을 위해서는 평소에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강의실에 앉아서 ‘드라마 기획하는 법’을 백 번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좋은 드라마를 기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평 소에 많은 독서와 연극, 영화 관람, 시, 소설,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드라 마로 발전할 수 있는 소재들을 모아 둬야 한다. 오늘날 드라마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찍고, 편집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영상관련 학과에 입학하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뛰쳐나가는 경 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조만간 벽에 부딪치고 만다. 찍고 편집 하는 기술은 익혔지만 그다음에 이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일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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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스스로 한계를 느끼게 된다. 따라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는 ‘드라마를 기획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데이터를 축적하는 법’ 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많은 이야기의 씨앗을 축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엔 반짝할지 몰라도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다.

메모하기

드라마의 첫 단추인 발상(Motivation)을 잘 하기 위해 평소에 이야기의 종자를 축적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미 많은 작가나 기획자가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 일을 일상적으로 해오 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방법은 현직 작가나 프로듀서가 공통적으로 추천하는 ‘이야기의 종자 축적법’쯤 되겠다. 이 방법이 유용하다고 생각 되면 한번 시도해 볼 것을 권한다. 그 첫 번째 방법이 바로 ‘메모하기’이 다. 메모장을 항상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술집에서 맥주를 한잔 하다가도, 뭔가 눈에 포착되거나 뇌리에 떠오르면 그걸 메모해 두자. 이 메모가 기획의 출발 이요, 창작의 시작이다. 얼핏 본 하나의 풍경, 그 풍경이 주는 하나의 이 미지가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이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독일 속담에 ‘명석한 두뇌보다 무딘 연필이 낫다’는 말이 있다. 메 모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것이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영상은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날아간 영상은 다시는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에 꾸준히 메모하는 습관, 그것이 최초의 발상과 모티브를 만들어 내는 유 일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메모하자. 그것이 기획의 시작이자 창작 의 출발이다. 미래에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오늘 당장 문구점에 가서 작고 예쁜 메모장을 하나 장만하기 바란다. 그 메모장 안에 앞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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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멋진 영상작품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최초의 그 무엇이, 깨알같이 적히기를 바란다. 노희경 작가는 메모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내 창작의 원천은 메모장이다.” 송지나 작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에게 글을 쓰는 비법 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메모노트에 적기다. 실천하기 전에 그것은 식상 하고 빤한 이야기지만, 일단 실천하고 나면 그것은 놀라운 비법이 된다. 수전노들은 통장에 돈이 쌓이면 행복해지겠지만 작가들은 메모 노트가 한 권 두 권 쌓여 가면 말할 수 없이 행복해진다. 작가에게 그 이상의 재 산은 없다.”

스크랩하기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매체를 읽다가 뭔가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들 을 발견하면 즉시 스크랩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스크랩을 해 두지 않으면 순간 떠오른 반짝하는 생각은 곧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피처 스토리 (feature story)

객관적인 보도기사가 아닌, 흥밋거리나 가십 등 스토리 위주의 토막기사를 피처 스토리라고 한다. ≪중앙일보≫의 ‘분수대’나 ‘황당 뉴스’, ≪조선일보≫ 의 ‘휴지통’ 등이 바로 피처 스토리다. 그 외에 신문, 잡지기사나 소설, 영화, 드라마, 시, 가요, 콩트, 동화, 우연히 주워들은 이야기 등등이 모두 드라마 나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런 걸 스크랩을 해서 모아 두면 그것이 그 게 나중에 큰 재산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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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사라진 생각은 다시 떠올리기 힘들다. 신문이나 잡지에 박스 형태 로 편집되는 피처 스토리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고다.

남편의 실종에 감춰진 거액의 보험사기

다음은 필자가 2009년 4월 21일 자 ≪중앙일보≫ ‘황당 뉴스’에 실린 기 사를 스크랩 해 둔 것이다.

[황당뉴스] “남편 실종” 허위 신고 11억 보험금 타 내

장례 치르고 제사도 지내 도피 남편 3년 만에 잡혀

경남 통영에서 카페를 운영하다 수천만원의 빚을 진(35)씨. 2006년 1 월 “바다에 낚시하러 갔다가 실종된 것처럼 속여 보험금을 타 내자”며 아내 손모(35)씨와 짰다. 결혼 전인 1998년 2개월 동안 보험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서씨는 선박 실종의 경우 법원에서 실종선고를 받 고 1년6개월 뒷면 보험금을 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씨는 1992∼2002년 6개의 보험에 가입한 상태였다. 서씨는 2개월 뒤인 3월 계획을 행동에 옮겼다. 통영시 산양읍에서 0.5t 모터보트를 빌려 인근 한산면 비진도로 바다낚시를 갔다. 거기서 보트 를 버리고는 어선을 빌려 타고 육지로 몰래 빠져나왔다. 부인 손씨는 남편을 찾는 척하며 같은 날 통영해경에 실종 사실을 신고했다. 해경 은 경비정 18척을 동원해 사흘간 수색했으나 모터보트만 발견했다. 손씨는 친지에게 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려 통영의 한 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문상객 앞에서 오열하며 실신까지 했다고 한다. 손씨는 이듬 해 4월 법원에 실종선고 심판청구 소송을 내 확정판결을 받았다.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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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판결문과 해경의 실종확인원을 6개 보험회사에 제출해 지난해 3월 까지 11억 1000만원의 보험금을 타 냈다. 도주한 서씨는 아내에게서 1억 원을 도피 자금으로 받아 3년 동안 부 산·대전·서울 등의 여관·찜질방을 전전했다. 손씨는 두 차례 제사 까지 지냈다. 이 때문에 초등학교 1, 3학년인 두 자녀와 친척들도 감쪽 같이 속아 넘어갔다. 손씨는 사망보험금을 받아 서씨의 형과 건설회사 를 공동 운영하는 빚을 갚는데도 일부 사용했다. (하략)

남편의 허위 실종으로 거액의 보험금을 타 낸 아내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발전시켜 보면 어떻게 될까?

“알고 보니 아내 손씨에게는 은밀히 만나던 정부가 있었다. 손씨는 정부와 짜고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다.”

어떤가?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발전할 것 같지 않은가? 첫 번째 방안은 치정극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자칫하면 막장 드라마가 될 수도 있겠다. 두 번째는 미스터리 물로 발전시키는 것이 다. 형사가 등장하여 치정사건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는 수사물, 또는 공포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방안은 자기도 모르게 인생이 제 로세팅되어 버린 한 남자가 죽은 자로 살아가는 동안 품게 된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주제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찰하는 수준 높은 예 술작품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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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냐 범죄냐?

몇 년 전에 <숏버스(Short Bus)>라는 영화가 국내에 개봉된다고 화제 가 된 적이 있다. 동성연애, 집단섹스, 그리고 연기자들을 실제 성행위 를 시키면서 찍은 촬영 방식,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서 수입금지가 됐던 영화인데 감독인 존 캐머런 미첼이 스스로 문제가 될 만한 장면들을 모 자이크 처리하고 잘라내고 해서 디렉터스컷으로 국내에 개봉하게 된 것이다. 다음은 한 일간지 문화부 기자가 감독을 인터뷰한 내용 중 한 대목이다.

기자 왜 섹스 장면을 찍을 때 배우들에게 실제로 성행위를 하도록 시

켰나? 감독 배우가 우는 연기를 할 때 배우는 실제로 울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

을 연기라고 한다. 또 배우가 밥을 먹는 장면이 있다면 실제로 배 우는 밥을 먹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배우가 밥 먹는다고 말하지 않 고 배우가 연기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배우가 섹스 장면을 연기 할 때 실제 섹스를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기사를 보고 나는 충격 받았다. 연기에 대한 대단히 급진적인 생 각도 그렇지만 그것이 타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논리적 시각이 존재한 다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반론의 여지는 있다. 그렇다면 살인 장면을 연기할 때 상대 배우를 실제로 칼로 찔러 죽여도 된단 말인가? 그건 촬 영이라 하더라도 현행법상 살인 범죄가 아닌가? 그러나 법적으로 성인 인 배우가 연기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본인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실제 섹스를 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도덕상 의 논란은 있을지 모르지만 법적으로 이를 규제하거나 단죄할 수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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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이런 사례는 종종 있어 왔다. <퐁네프의 연인들>을 만든 레 오 카락스 감독이 연출한 <폴라X>라는 영화도 촬영할 때 배우들이 실제 섹스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면이 굉장히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는 않지만 배우를 실제 상황으로 몰아넣고 찍은 영화로 유명세를 탔다. 감독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리얼리티의 유혹을 강하게 받는 경우 가 있다. 리얼한 장면을 찍고 싶은 욕망이 바로 리얼리티의 유혹이다. 이런 욕망이 계속 에스컬레이트 되다 보면 배우들을 실제 상황으로 몰 아넣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바로 이런 상황, 앞에서 말한 존 캐머런 미첼 감독과 같은 시각이 작품의 소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스크랩을 해 두었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서부터 범죄인가?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굴리다 보면 물 건 하나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주는 기사다.

발상의 생활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방은 창조의 씨앗’이라고 하지 않는가? 부지런히, 여기저기서 자료를 긁어모으는 게 평소에 습관화되어 있어 야 한다. 그것이 발상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멋진 작품을 기획하는 첫 출발은 오로지 평소에 좋은 기획이 될 만한 이야기의 씨앗을 축적하는 것밖에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 앞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풍경들이 모 두 다 우리에게 드라마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들이다. 살면서 마주쳤던 사람들, 이 삼라만상의 사물, 현상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라마를 가 르쳐 주고 있는데 우린 그것을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좋은 기획자가 되 려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걸 잡아채서 내 수중에 넣어야 한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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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씨앗을 잡아채서 내 주머니에 넣는 행위, 그게 바로 메모하고 스크랩 하는 것이다.

기획노트에 정리하기

메모든 스크랩이든 그냥 모아놓기만 해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 시간 날 때마다 분류 정리를 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씨앗으로부터 스토리가 뻗 어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기획노트라고 부른 다.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반드시 기획노트에 분류 정리하는 습 관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이런 노트가 라면 박스에 두 박스 정도 꽉 차 야 자기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왔을 때, 자 무슨 얘기를 할까, 발상부터 시작해야지. 이건 늦어 도 한참 늦은 것이다. 물론 운이 좋아서, 혹은 좋은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라서 한두 작품 은 성공할 수 있겠지만 그걸로 끝나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두 작품 남기고 이 바닥을 떠난 감독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회를 주지 않 는다고 세상을 한탄하며 허송세월하는 자칭 천재는 또 얼마나 많은가? 단언컨대, 영상의 세계에서 ‘세상이 알아 주지 않는 천재’란 없다고 생 각한다. 천재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어 있다. 세상이 알아 주지 않는 천재란 단지 게으른 자의 변명에 불과하다. 세상을 원망하고 선배들을 욕하며 소주를 먹는 그 시간에 차라리 영화라도 한 편 더 보고 소설이라도 한 권 더 읽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콘텐츠 다. 영상의 세계에서는 콘텐츠가 왕이다. 콘텐츠의 씨앗이 풍부하게 입 력이 되어 있을 때 그것이 5년이고 10년 후에 멋진 작품으로 꽃이 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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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좋은 발상이 이루어지려면 평소에 메모하고, 스크랩하고, 기획노트에 정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기획자가 가진 재산이요 인프라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조금 부족하다. 이렇게 긁어모은 정보들을 조 합하고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새로 운 관점에서 보기’다.

“왜?”라고 질문하기

새롭고 기발한 발상을 위해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왜 그런가? 하고 스스로 질문을 해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음은 2007년 3월 8일 연 합뉴스에 실린 기사다.

독일 남매의 금지된 사랑

헤어져 자랐다가 어른으로 만나 연인이 된 한 남매의 소설 같은 이야 기가 독일 사회에 근친상간 금지 조항 폐지 논란을 촉발시켰다고 BBC 방송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논란의 당사자는 파트릭 스튜빙(30)과 수 잔 카롤레프스키(22). 옛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의 작은 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 는 이들은 평범한 연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친남매다. 파트릭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포츠담의 한 가정에 입양돼 자랐다. 파트릭 이 친모를 찾은 것은 23살 때인 지난 2000년. 친구와 함께 라이프치히 로 온 그는 다른 친척들을 만나기로 결심했고 처음으로 여동생인 수잔 과도 대면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사랑에 빠진 둘은 동거 에 들어가 지금까지 6년을 함께 살며 네 아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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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상간은 독일에서 범죄다. 막내를 제외한 아이 셋이 모두 위탁 가 정에 맡겨졌다. 파트릭은 근친 상간죄로 2년을 복역했고 형법 173조 가 폐기되지 않는 한 또다시 형무소로 들어가야 할 처지다. 실업 상태 의 자물쇠공인 파트릭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범죄로 보지만 우리들 은 잘못한 게 아무 것도 없다”면서 “우리는 평범한 연인과 다를 바 없 고 가족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막내딸만 키우고 있는 수잔은 “정부는 우리로부터 많은 것을 빼 앗아 갔다. 이젠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이 법이 폐지되기를 희망한다” 고 말했다. 두 사람은 법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 최고사법기구인 연방 헌법재판소에 근친상간 금지 조항을 폐지해달라고 항소했다. 논란이 많은 사안이었기 때문에 언론을 통해 찬반 논쟁에 불이 붙었 다. 남매의 변호인인 엔드릭 빌헬름은 “18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일 형법상 가까운 친척 간 성관계는 범죄이며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으나 이 법은 구시대적인 것이고 연인의 권리를 침해한 다”고 말했다. 남매의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근친상간을 통해 유 전학적 결함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위험이 높고, 근친상간 금지는 서 구의 오랜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며 법조항의 존치를 주장하고 있다. 실제 2개월 조산한 남매의 큰 아들은 간질을 앓고 있고, 딸도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빌헬름 변호사는 이에 대해 “그렇다면 왜 장 애인 부모, 유전 질환을 가진 사람, 40세 이상의 여성이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가?”라는 반문하면서 “이 커플은 아무에게도 해 를 끼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차별”이라고 맞섰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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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매는 결혼하면 안 되는가?

우리나라에서 히트한 수많은 드라마, 아마 절반은 출생의 비밀을 소재 로 한 이야기일 것이다. 사랑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복 남매였다. 이런 설정이 너무나 자주 반복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시청자들도 출생의 비밀만 나오면 관심 집중이다. 시청률이 쭉쭉 올라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번 짚어봐야 한다. 왜 이복 남매는 결혼하면 안 될까? 그냥 ‘당연히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말하지 말고 왜 안 되 는지 한번 생각을 해 보자는 거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내 놓을 수 있 는 답은 다음 몇 가지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첫째, 유전적으로 기형아가 나올 확률이 크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 다는 주장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근친상간을 하면 기 형아가 출생할 확률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만일 그런 논리라면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나 선천적 기형인 사람들도 결혼을 금 지해야 되는 거 아닐까? 만일 결혼까지는 금지하지 않더라도 애는 낳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해야 공평하다.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선천적 기형인 사람은 결혼은 할 수 있되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 어야 하고 이런 부부가 아이를 낳는다면 감옥에 집어넣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고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한 것은 불과 200년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남매혼을 금지한 인류 의 풍습은 그 역사가 3000년도 더 된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유전법 칙을 알았을까? ‘기형아의 출산을 막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일부 설명은 되지만 왜? 라는 질문에 근본적인 대답은 되지 못한다. 둘째, 족보가 꼬여 가족관계에 일대 혼란이 오기 때문이라는 주장 이다. 할아버지는 한 분인데 외할아버지도 되고 친할아버지도 된다. 그 래서 헷갈리니까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만으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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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문화권에서도 발견되는 남매혼 금지 제도가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독일 청년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 죄로 감옥에 간 것인가? 그것보다도 좀 더 근원적인 뿌리, 아주 오래되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세 번째는 금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가 이렇게 만물의 영장으 로 진화했고, 두뇌가 발달해서 이런 문명사회를 이룩하고 살게 되었다 는 결과론이다. 물론 남매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화에 성공하기 위해서 그 옛날부터 남매 결혼을 금지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결 과론에 불과하다. 네 번째 주장은 남매 결혼을 허용한 집단은 자연도태되고 남매 결 혼을 금지한 집단은 생존에 유리해져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는 자연 선택이론이다. 상당히 근접한 대답이긴 하지만 현대인류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여전히 진화가 부족해서 남매혼을 금지하는 법을 계속 유지시키고 이를 어기면 감옥에 보내는 걸까? 이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하자면 문화인류학적으로 더 광범위하 고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더 깊은 이야기는 이쯤에서 중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골자는, 대한민국 사람 이면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래서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 지 않고 있는 이복 남매의 금지된 사랑에 대해서 왜? 라고 질문을 던져 보자는 것이다. 왜? 라고 질문을 던지는 순간, 새로운 관점이 시작되고 뭔가 새로운 발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축적될 때, 출생의 비밀과 이복 남매의 엇갈린 사랑을 소재로 끊임없이 확대재생 산 되고 있는 한국산 막장 드라마의 폐해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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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북한에 식량 지원은 절대로 안 되는가?

1997년부터 3년간, 북한에서는 무려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자기들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던 시기다. 2009년, 2010년에도 식량 위기가 왔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황해남도, 황해북도에서만 대략 30만이 굶어 죽었다. 이 대기근은 북한 전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실제 로 아사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에서는 한해 음식쓰레기로 버려지는 돈이 15조 원이나 된다. 음식쓰레기는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음식쓰레기 처리 비용만 한해 4000억 원을 쓴다. 분명 반만년을 같은 민족으로 살아온 우리 동포인데 한쪽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고 한쪽에서는 음식이 지천으로 남 아서 처리하느라 골치를 앓고 있다. 왜 그럴까? 왜 이런 일이 매년 벌어 지는데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까? ‘북한에 식량을 보냅시다!’ 하 고 외치는 놈은 왜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될까?

고정관념을 넘어

나는 지금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근거도 없이, 내 눈으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너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 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왜? 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적어도 드라마 소재의 영역을 확장하고,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기획자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정관념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로막는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왜?” 라고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이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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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 예술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당연한 거지 그걸 뭘 물어봐!” 이렇게 말하는 순간 창조와 예술은 설 땅이 없다. 적어도 이 땅에서 드라마를 공부하겠다는 젊은이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눈을 가져야 하 고. 또 세상을 향해 “왜?” 라고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을 향 해 질문을 던지려면, 지금까지 당연시 해왔던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보다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기획자는 자기가 만드는 작품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왜? 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우리가 몸담 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 사람이 살 만한 세상으로 바꾸어 가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드라마는 인생을 걸어 볼 만한 가치 가 있는 작업이다.

구체화 구체화란 최초의 발상을 시각화(Visualization)하는 과정이다. 마치 눈 으로 보듯 최초의 발상을 이미지로, 영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구체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그것이 드라마로서 성 립하는가 하는 점이다. 드라마가 성립하는가를 따져 보기 위해 검토해 보아야 할 사항은 두 가지다. 리얼리티, 그리고 개연성이다.

리얼리티와 개연성

드라마란 본질적으로 픽션의 세계다. 꾸며낸 이야기, 가공의 현실, 허 구, 거짓말. 이것이 드라마다. 사실의 세계,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 현실에서 벌어진 이야기 등은 논픽션(Non-Fiction)에 속한다. 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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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대표적인 장르로는 뉴스와 다큐멘터리가 있다. 드라마는 사실이 아 닌 것, 즉 픽션의 대표적 장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보고 ‘아, 그럴 수 있다, 그럴 법하다’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드라마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것이 개연성이다. 실제 사례에서 취재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설정이 지나 치게 특수하다면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드라마의 영 역은 아니다. 드라마는 ‘사실’ 보다는 ‘사실 같은 허구’, ‘허구 속의 진실’ 을 추구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물론 허구의 세계를 그린 이야기라 해서 다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허구의 이야 기가 드라마로서 성립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리얼리티다. 드라마의 리얼리티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같은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리얼리티 확보를 위해 기획 단계에서 선결되어야 할 것이 바로 현장 취재다. 현장 취재는 최초의 발상에 뼈 와 살을 붙여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 준다.

현장 취재

꾸며 낸 이야기, 픽션의 세계인 드라마가 공감을 얻으려면 리얼리티가 확보가 전제되어야 하고, 기획 단계에서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유일한 단 한 가지 방법은 현장 취재다. 즉, 발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현장 취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은 드라마의 보고다. 최완규 작가는 ‘드라마를 발로 쓰라’고 조언한다. 상상력만으로 드 라마를 쓰려 하지 말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현장 취재를 한 후에 집필 에 들어가라는 뜻일 것이다. 드라마 작가는 글로 된 문장(writings)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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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만 그것은 ‘영상적 사고(Visual thinking)’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시 각적으로 구체화되지 않는 대사나 지문으로는 좋은 대본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또한 드라마 성립의 기본 조건인 리얼리티 확보를 위해서도 현장 취재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소재로 발전시키기 구체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면 이제 이야기를 소재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야기에 뼈대와 살을 붙이기 위해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모으 고 리서치해 가는 과정이다. 이야기의 얼개를 짜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 법들이 동원된다.

① 문헌조사: 참고서적, 신문기사, 인터넷 검색, 자료검색을 한다. ② 직업의 세계 취재: 등장인물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 체 험담을 듣는다. ③ 현장 관찰: 그 직장에 가서 작업현장을 직접 관찰한다. ④ 장소 답사: 등장인물의 행동반경 내에 있는 여러 장소를 가 본다. ⑤ 주변 인물 취재: 등장인물과 관계 맺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 나본다. ⑥ 자곤 수집: 자곤(jargon)은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특수 전문용어 다. 의사의 의학용어, 법률가들의 법률용어 등이다. 등장인물이 속한 세계의 풍속, 관습, 조직 문화, 관례, 불문율, 은어, 금기사 항 등 배경지식을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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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도출 주제(Theme)란 굳이 정의하자면 ‘작품의 중심이 되는 사상이나 주의, 주장’을 말한다. 소재가 될 만한 다양한 자료들을 취합해 이야기의 얼개 가 짜지면 이를 바탕으로 주제를 도출하는 것이다. 주제를 정할 때 염 두에 두어야 할 사항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체성, 단순성, 선명성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뭐냐?’ 이걸 분명히 해 야 한다. 애매모호하거나 장황하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주제는 좋은 주제가 될 수 없다. 주제를 애매모호하게 설정해 놓고 이야기를 풀어나 가면 드라마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한두 문장으로 요약이 되는 구체적인 주제가 좋은 주제라 할 수 있겠다. 주제는 구체 적이면서 단순하고 선명해야 한다.

주제부터 정해 놓고 이야기를 만들면 실패하기 쉽다

주제는 드라마 기획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주제부터 먼저 정해놓고 이야기를 구성하면 대부분 실패한다.

“우리나라도 이제 고령화 사회로 들어섰는데 노인문제를 주제로 드라마를 만들면 어떨까?”

이건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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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집에 어떤 할아버지가 살았는데 이 할아버지가 자식이 없 이 혼자 살다가 어느 날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모른 채 두 달이 지났 대. 나중에 연체료 받으러 온 신문배달원이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 했는데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는군. 이 얘기를 드라마로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제가 고령화 시 대의 독거노인 문제로 모아지고 ‘고령화 시대를 맞아 독거노인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운다’는 구체적인 주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 기획의 정상적인 접근 방식이다. 물론 주제부터 정해놓고 드라마를 구축해 가는 방식도 있다. 사회 주의 국가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는 혁명사상을 고취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기획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까지 이런 목적극이 제작되었다. 반공드 라마 <지금 평양에선>, <실화극장>, <113수사본부> 같은 드라마가 그 것이다. 그 외에 정부부처나 공익재단에서 만드는 홍보용 드라마 같은 것 도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이야기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드라 마다. 물론 드라마적인 재미나 감동은 떨어진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이야기를 구축해 가는 방식은 어렵고 실패의 가능성이 높다. 언제든 이야기가 먼저다. 스토리텔링이 주제보 다 앞서야 한다.

주제가 애매모호하면 작품도 애매모호해진다

기획제안서에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남녀들의 회색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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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주제가 있다고 해 보자.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짐작은 가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이 제안서를 본 제작자는 담당 작가 나 감독과 별도로 만나서 ‘우울하고 외롭고 드라이하고 쿨한, 또 서로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벌이는 단편적인 사랑’이 라는 보충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작품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뚜렷하게 뭐가 떠오르지 않는 주제 는 좋은 주제라 할 수 없다. ‘운명은 사랑을 구속한다.’ 이런 주제도 관 념적이다. 과도한 은유나 관념적인 주제도 좋은 주제라고 할 수 없다. 구체적이고 선명한 주제의 예로는 대부분의 잘 만들어진 반전영화 들이 내세우는 ‘전쟁은 미친 짓이다’라는 주제를 들 수 있겠다. 그 외에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나 롭 라이너 감독의 <버킷 리스트> 등에서 내세운 ‘절망은 없다’라는 주제도 구체적이고 주장하는 바가 분명한 좋은 주제라 할 수 있겠다.

단일화 주제가 선정이 되면 이제 단일화하는 과정이 남았다. 광범위하게 수집 된 자료들 중에서 주제와 맞지 않는 것들을 걸러 내는 작업으로, 단일화 란 ‘자료 걸러내기’의 다른 말이다. 단일화란 버리는 과정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모은 소재들 중에 주 제와 맞지 않는 것은 아깝더라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드라마가 산만해져서 통일성과 일관성을 놓치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면 버 리는 일이 참 어려워서 ‘모으기보다 버리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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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다. 절묘한 대사 한 마디, 재미있는 상황 하나, 기발한 영상 하나, 멋있는 카메라워크. 그걸 못 버리고 그냥 계속 끌고 가다가 드라마가 산만해지고 주제의식이 실종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일단 주제가 정 해지면 아무리 이색적인 것, 기발한 것, 재미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주 제와 관계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

스토리 작성 단일화까지 했다면 스토리 작성에 들어가야 하고 이것은 작가의 몫이 다. 본격적인 스토리텔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드라마의 힘이다. 정동진에 있는 일명 ‘고현정소나무’는 <모래시계>에 소개되기 전까지는 그냥 한적한 기차역에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소나무가 <모래시계>의 스토리텔링과 결합하면서, 조그마 한 시골의 간이역에 불과했던 정동진역은 이제 새해 아침이면 수십만 이 몰려드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스토리 텔링에 관한 어느 경영학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모든 예술은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스토리가 쌓인 것이 콘텐츠다. 콘텐츠가 경쟁력이요, 수익창출의 원천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이 곧 돈이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그 어떤 산업생산물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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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 구성 스토리가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시간대 순으로 기술한 것이라면, 이야 기를 인과관계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작업을 플롯구성, 플로팅 (plotting)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플롯이란 ‘내러티브가 인과관 계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을 말한다. 드라마에서 인물과 사건, 배경이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큰 이야기 덩어리를 이루고 있고 이 중 어느 한 가지만 떼어내거나 변경하면 이야 기 전체가 바뀌거나 무너져 버려 드라마가 성립되지 않게 되는 관계를 내러티브의 유기적인 결합이라 한다. 플로팅 과정에서 스토리의 시간 은 해체되고 재조립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효과 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대본 작성 플로팅까지 끝나면 대본 작성에 들어가게 된다. 대본 작성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감독이나 기획자는 여전히 대본 의 진행상황에 개입하고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소재를 제공하고, 격려 하고, 마감시한을 넘기지 않도록 적당히 독촉하며 대본작업이 순조롭 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단계에서 주의할 점은 대본작성 과정에 여러 사람이 개입하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 획자, 감독, 데스크, 주연 배우, 스폰서 등이 대본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면 작가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작품이 하나 의 일관된 관점과 분위기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기획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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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 감독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감독과 작가의 호흡을 유도하는 것 이 바람직하다. 대본 집필은 한 사람이 쓰는 것이 원칙이다. 작품의 통일성과 일관 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물론 여러 사람이 협업해서 초고를 완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대표 집필자가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수정 (Re-writing)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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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안서

기획의 방향과 대략의 스토리가 구성되면 그 내용을 제작에 관계된 모 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문서화하는데 이를 ‘기획제안서’라고 한 다. 줄여서 ‘기획안’이라고도 하는데 이 장에서는 기획제안서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져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제목 주인공이 드라마의 얼굴이라면 제목은 드라마의 이름표라 할 수 있다. 이름을 잘못 지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으므로 우선 멋진 제목을 멋있게 하나 붙여 놓자. 약간 겸손의 표현으로 제목 옆에 ‘가제’라고 덧 붙여 놓으면 결재 과정이 훨씬 부드러울 수 있다. 의사결정권자들은 사 실 늘 바쁘기 때문에 기획안을 꼼꼼히 읽어 볼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내 용은 전문 참모진에게 검토시키더라도 가장 눈에 띄는 제목을 가지고 시비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결재 과정에서 불필요한 논란의 여지를 줄이고 고위 간부들이 한마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위해 (가제)라고 덧붙여 놓는 것이 좋다. 제목을 붙일 때도 유의해야 할 사항 이 몇 가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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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간결한 것

1990년대 초 피플미터기를 사용한 과학적인 시청률 조사방법이 등장 한 이래 부동의 시청률 1위를 지키고 있는, 아직도 아무도 그 아성을 깨 지 못하고 있는 드라마가 1997년 KBS2에서 방송했던 주말 연속극 <첫 사랑>이다. 첫사랑. 듣기만 해도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들고, 발음하기 쉽고, 짧 고 간결해서 한 번 들으면 절대 안 잊어버릴 것 같지 않은가? <대학로에서 매춘하다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 27자다. 2000년에 남기웅 감독이 만든 60분짜리 단편 디지털 영화 제목 이다.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 24 자다. 1974년 김영호 감독이 만든 장편 상업영화로 신성일, 우연정 주 연이었다. 몇 번을 들어도 기억이 안 된다는 점에서 좋은 제목은 아니 라고 생각된다. 텔레비전드라마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장르다. 대중이 기억하기 쉽도록 제목은 짧고 간결해야 한다.

<첫사랑>

이응진 극본, 조소혜 연출의 드라마였는데 조소혜 씨는 시청률 스트레스로 2007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지인에게 이렇게 토로했 다. “간암 선고를 받은 것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괴롭힌 것은 저조한 시청 률로 인한 조기종영 스트레스였다.” 역대 드라마 시청률 베스트5에 두 편 이나 올린 베테랑 작가가 시청률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사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죽음은 많은 드라마 관계자들을 안타깝 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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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선명한 것

제목은 처음 들었을 때 영상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 이 좋다. <각시탈>, <다섯 손가락> 등은 제목 자체에 영상 이미지가 겹 쳐지기 때문에 쉽게 기억될 수 있다.

발음하기 쉬운 것

<그래도 당신>, <산 너머 남촌에는> 같은 제목은 발음하기가 쉽다. 구 강 구조상 파열음이나 겹모음이 들어가는 제목은 발음하는 데 에너지 가 많이 소모되어 왠지 편치 않다. 입을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제목이 좋다.

쉽게 기억되는 것

<흐르는 강물처럼>, <에덴의 동쪽>, <카인과 아벨>, <그대 그리고 나>, <그대 없인 못살아> 등은 기존에 널리 알려진 영화나 문학작품, 대중가 요 등에서 차용한 제목으로 한번만 들어도 쉽게 기억된다. 관념적인 단 어나 어려운 단어의 조합은 쉽게 기억되지 않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형식 단편영화, 단막 드라마, 특집 드라마, 주말 연속극 70분x50부작, 옴니 버스 드라마 등의 편성상의 장르를 적어 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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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드라마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감정, 주의, 주장, 사상이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가?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답이 주제에 해당된다. 주제를 도출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요건에 맞추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① 구체성: 듣는 즉시 시각적인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로 구체적인 것 ② 단순성: 장황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것 ③ 선명성: 주장하는 바가 분명한 것

기획 의도 왜 제작자는 돈을 들여서 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왜 투자자는 이 드라마에 돈을 대야 하는가? 왜 시청자는 이 드라마를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기획 의도다. 이를테면 제작의 당위성, 필요성을 적는 항목이다. 제작자와 투자자, 방송사 경영진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을 할 때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 다시 말하면 시청자에게 재미와 감동이라는 시청 유인 요인이 분명하게 있음을 적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사회현상이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과 분석이 있어야 하며 이를 근거로 이 드라마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 해야 한다.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에서 제작의 타당성이 기술 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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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제작자 입장: 시대적 요구, 필요성, 제작의 당위성 ② 투자자 입장: 성공 가능성, 원금 회수 및 수익 모델에 대한 기대감 ③ 시청자 입장: 재미와 감동, 시청 유인 요인

방송 일시(제작 시간) 방송 일시와 제작 시간을 적는 항목이다. 매주 일요일 아침 10시, 매주 수, 목 밤 10시, 또는 70분 단막, 70분x16부작, 60분x50부작 등으로 적는다.

작의 작가 의도의 줄인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입장에서 기획 의도와 주 제를 구현하는 방법론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항목이다. 이는 주제 (What)나 기획 의도(Why)와 달리 ‘전달하고자 하는 기획 의도와 주제 를 어떻게(How) 구현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우리는 부산에서 서울로 가야만 한다.’ 이것이 주제이고 ‘서울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 기획 의도라면 작의는 ‘어떻게 갈 것인 가?’ 에 대한 설명이다. KTX를 타고 갈 것인가, 고속버스로 갈 것인가, 비행기로 갈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좀 더 드라마적으로 말한다면, “이러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이러이러한 인물을 등장 시켜서, 이러이러한 사건을 전개함으로써 주제와 기획 의도를 구현하 겠다” 는 작가의 방법론이 표현된 것이 작의다. 굳이 정의하자면 작가 의도란 “스토리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구체화해서 개략적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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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의 진행 방향을 기술한 작가의 집필의도”라 할 수 있겠다. 기획 의도와 주제, 작의는 기획제안서 작성 단계에서 많이 혼동되 는 부분이다. 부록에 소개되는 짧은 단막극들을 읽고 거꾸로 역 기획안 을 작성해 보면서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명확하게 해 두기 바란다.

등장인물 한 인간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때 대략 세 가지 서류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자기소개서, 건강진단서, 은행대출신 청서가 그것이다. 등장인물 소개는 이력서를 작성하듯이 이런 서류의 항목들에 대해 세세하게 묘사해 주는 것이다. 이력서 만들기를 요약하 면 다음과 같다.

① 자기 소개서: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가족관계, 학력, 관심사, 취미, 특기, 상벌 사항 등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본 개인의 모습 ② 건강 진단서: 키, 몸무게, 건강상태, 혈액형, 시력, 청력, 과거병 력 등 생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개인의 모습 ③ 대출 신청서: 재산 보유현황, 월수입, 주거 형태, 자가용 유무, 채권 채무 관계 등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 개인

인물관계도 각 인물들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를 도표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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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낸 것을 인물관계도라 한다. 가급적 주인공을 중앙에 배치하고 홈드 라마라면 세대별로,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그리는 드라마라면 직위 별, 서열별로 도표를 만들면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9-1 <은실이> 인물관계도

배용태(임현식)

배신자(이주희) 낙천의 애인

양길례(김원희) 은실의 생모

배달구(주선웅) 은실의 친구

은실(전혜진) 첩의 소생

이강호(이희도) 은실의 담임선생님

성준기PD

강명화(반효정) 임청옥 생모

장낙도(이경영) 은실의 생부

임청옥(원미경) 은실의 계모

허맹순(이나리) 은실의 친구

허맹순(이나리) 은실의 친구

은철(최강원) 은실의 친동생

장영채(강혜정) 본처의 딸

정순자(이덕희) 이강호의 처

김병국(김창완) 개인병원 원장

이민재(김정우) 영학의 친구

공옥자(윤영주) 장낙도집 가정부

강인숙(권기선) 김병국의 처

김유정(이정윤) 은실의 친구


126 딸

종업원

(28세) 서미영

헬스클럽 안내원

여자 강지수 친구 (28세) 신주아

허정민 (7세) 김가람

김미향 (22세) 이영아

허무찬 (30세) 이찬

시동생

친구

양순지 (35세) 김여진 첫사랑

비서

장시화 (30세) 김현성

홍애리 (23세) 김진주

권달평 (38세) 권해효

친구

오종세 (38세) 김영호

부부

오명길 (7세) 이준혁

아들

부부

아버지

장인

시어머니 명개발본부장

사촌동생

명태걸 (60세) 남일우

명개발회장 장희분 (60세) 김지영

그림 9-2 <사랑한다 웬수야> 인물구성도

하조란 (35세) 지수원

명해강 (35세) 하희라

작은아버지

명호걸 (55세) 이재용

명개발사장

맹순금 (35세) 이경희

친구

종업원

문수진 (35세) 김나운

명호걸 (55세) 이재용

명개발간부(전무)

조아리 (22세) 민나영


전체 줄거리 드라마 전체의 줄거리를 개략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좁은 의미로 이를 시놉시스(Synopsis)라고 하는데 때로 기획안 자체를 시놉시스라 하기 도 한다.

세부 줄거리 시놉시스(전체 줄거리)보다 좀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기 술해 놓은 것으로 미니시리즈라면 회별 줄거리 정도가 되겠다.

자료 9-1 <해를 품은 달> 기획제안서

∙ 제목 <해를 품은 달> ∙ 원작 정은궐 <해를 품은 달> ∙ 제작 팬 엔터테인먼트 가. 극본: 진수완 나. 연출: 미정 다. 형식: 70분물 미니시리즈 24부작 (예정)

∙ 기획 의도

이 드라마는 ‘궁중로맨스’다. 조선의 가상 왕 시대. 스물세 살 젊은 왕의 연 애사. 즉, ‘과인(寡人)의 연모하는 이야기’쯤 되겠다. ‘궁중로맨스라....중 전과 후궁들의 살벌한 궁중암투 내지는, 권력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당파싸 움 정도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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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첫사랑에 순정을 바치고 사랑의 완성을 위 해 목숨을 거는 왕세자의 첫사랑, 그 시대 젊은이들의 순애보에 관한 이야 기다.

첫사랑? 순애보? 촌스럽다. 그것도 후궁들의 꽃밭에서 살아가는 왕이? 말도 안 된다. 하긴 요즘 텔레비전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은 쿨하고 세련됐다. 쿨하게 잊고, 세련되게 다음 사랑을 준비한다. 조폭쯤은 나와야 목숨을 건 사랑을 한다. 불치병쯤은 걸려야 비극이 완성된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첫사랑, 순정, 순애보, 희생 따위의 아날로그적인 단어가 등장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때는 사랑을 위해 순정을 바치고, 목숨을 걸었던 시대가 있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남을 위해 살던 사람도 있었다. 신하는 왕을 위 해, 왕은 백성을 위해,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부모를 위해,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 없는 자 는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바쳐,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아름답게 희 생하던 때가 있었다.

이 드라마는 그러한 사랑에 주목하고자 한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순수하 기에 비장한, 젊은 그들의 궁중 로맨스.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그들의 애 지애가(愛之哀歌).

또 하나, 이 드라마에서의 정치(政治)는 바로 정치(正置)이다. 정치(正置). 모든 것이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 자격이 없는 자가 남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뒤가 구린 그들이 정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들의 날개를 꺾어버릴 때, 자신들의 시커먼 속내를 위장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낼 때, 그 명분이 그들의 논리가 되고, 정치가 되고, 통치이념이 될 때, 세상은 혼란스러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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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거기서부터 인간들의 불행이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백성들의 시련이 시작된다. 해와 달이 제 자리를 벗어나면 위험해지는 것처럼, 정(正)이 궤 도를 벗어나면 세상은 위험해진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이 가장 높은 자리에, 백성의 근심을 끌어안는 자 가 왕의 자리에, 군주와 백성을 사랑하는 자가 왕후의 자리에, 학문과 인격 을 갖춘 자가 관리의 자리에,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옆자리에, 있 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만들어 주는 것. 만물이 있어야 할 제 위치에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조선의 젊은 왕, 이훤이 가진 정 치철학이다.

∙ 드라마의 키워드 & 제작 포인트 가. 궁중로맨스 -왕세자의 첫사랑 한 통의 연서(戀書)로 시작된 왕세자의 첫사랑. 예동(禮童)으로 입궐한 연 우와의 풋풋한 첫 만남. 아버지를 따라 궁궐 구경을 왔다가 우연히 만난 왕 세자 훤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보경. 오라버니의 젊고 아름다운 스승을 사 랑하게 된 민화 공주. 이 세상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염, 운, 양 명. 먼발치서 말없이 염의 수호천사가 되어주는 여비(女婢) 설. 궁궐을 배 경으로 펼쳐지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풋풋한 첫사랑이 드라마 초반을 밝고 상큼하게 장식한다.

나. 미스터리 -세자빈 시해 사건 세자빈 허씨(연우)는 분명 8년 전에 죽었다. 세자빈에 간택된 직후 별궁(別 宮)에서 병을 얻어 쫓겨나듯 출궁했다 들었다. 병이 있는 여식을 세자빈 후

보로 올린 죄로 삭탈관직된 홍문관 대제학의 품에서, 어느 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들었다. 그런데 8년이 지난 오늘, 죽어 무덤에 묻혔다던 연우 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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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아니란다. 연우 낭자가 아니라 무녀(巫女) 월이 란다. 얼굴도, 말투도, 향기도 똑같은데 연우 낭자가 아니란다. 훤은 어떤 계시처럼 문득, 8년 전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의문이 생긴다. 사람을 놓아 사건을 추적해가기 시작한다.

연우와 월은 동일 인물일까? 과연 흑막 뒤에 숨은 인물은 누구인가? 세자빈 시해 사건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는 과정을 흥미진진한 구성으로 그려 내 어 극의 흡입력을 높인다.

다. 기억상실증 -나는 왜 죽었는가? 어린 시절 신내림을 받다가 혼절했다 들었다. 워낙 큰 신을 몸주로 모셨기 에 전사(前事)를 모두 잃은 거라 들었다. 그리 기억할 것도 없는 전사였다 들었다.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부모 없는 고아였고, 하여 신분도 알 수 없다 하였고, 거리를 떠돌아다니던 나의 눈빛 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기(神氣)가 읽혀 내림굿을 해준 거라 들었다. 나를 거두어준 도무녀 장씨를 신모님으로 모시고 있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신기 (神氣)가 없는 듯하다. 신내림을 받은 기억도 나지 않으니 이상하다. 액받 이 무녀가 되어 입궐 하였을 때, 처음으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은월각 (隱月閣)에 들어서면 그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신기(神氣)일 까?

무녀 월(연우)의 정체를 알게 된 저들의 계략과 음모, 그리고 다시 시작된 죽음의 위기. 연우는 과연 기억을 되찾고 세자빈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까?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훤과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까?

연우가 기억을 찾는 과정을 훤의 추리와 함께 구성하여 극적 긴장감을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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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연우가 기억을 되찾는 시점을 드라마의 터닝 포인트로 삼아 카타르 시스를 제공한다.

라. 판타지 다른 이의 액을 대신 받아내는 액받이 무녀(人間符籍). 인간 속죄양처럼, 주인집의 재앙이나 질병을 대신 짊어지고 무당 집에 헌납되는 대명노비(代 命奴婢). 매흉(해골 등 흉한 것을 묻어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술법), 피병

(질병을 옮기는 귀신이 근접하기 어려운 무당집이나 장군의 집으로 병을 피하는 것), 구식례 (일식이나 월식이 있을 때 임금이 해나 달을 향해 기도 하며 자숙하는 의식), 휴지역, 결계, 정박령, 사독제, 기은제, 관상감, 성수 청, 소격서 등등. 판타지적 소재를 적절히 활용하여, 독특하고 신선한 내러 티브를 제공하고, 드라마에서 상징성을 갖는 공간이나 배경은 CG를 활용 하여, 판타지적이면서도 신화적인(혹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 왕실 문화 궁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 드라마인만큼, 우리나라 고유의 색감과 질감을 잘 살려 화면을 산뜻하게 장식하고, 궁중 나례 의식, 제천행사, 옥추 단제, 왕비의 친잠례, 구식례 등등….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우리의 왕실 문 화를 해외 팬들에게 소개한다. 또한 조선의 가상 왕 시대라는 설정을 역사 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활용, 상상력이 가미된 다양한 볼거리와 이야기를 제공한다.

∙ 시대 설정 조선 전기∼ 중기 가상의 왕 시대 (*별첨된 <왕실계보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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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설정 가. 궁궐(宮闕) 드라마의 중심 무대. 조선의 대표적인 法宮이었던 경복궁(景福宮)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 여 대전, 편전, 중궁전, 대비전, 대왕대비전 등 궁중사극에 기본적으로 등 장하는 공간 외에, 다음과 같은 공간을 궐내 적절한 곳에 배치한다.

가) 비현각: 세자시절 훤이 염에게 교육을 받던 전각. 나) 선전관청1): 운의 소속관청. 다) 관상감2): 지리학, 천문학, 명과학 교수들의 집무 공간. 라) 은월각: 세자빈에 간택된 연우가 임시로 머물던 별궁(別宮).

나. 사가(私家) 가) 북촌(北村) 사가(私家) 연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현재 염과 민화, 정경부인 신씨가 살 고 있는 곳. 나) 양명의 군저(君邸) 양명에게 뒷줄을 대려는 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다) 운의 본가(本家) 운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현재 정경부인 박씨가 살고 있는 곳. 라) 보경(중전 윤씨)의 사가(私家) 보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현재 윤대형이 살고 있는 곳.

다. 은월각(隱月閣) 드라마를 위해 창조된 궐내 가상의 공간. (*약간은 판타지가 가미된 공간.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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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위에 비친 달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달이 뜨지 않는 밤에 가만히 연못 위로 꺼내어놓는다’는 뜻을 지닌 전각으로, 8년 전 세자빈으로 간택된 연우 가 임시 별궁(別宮)3)으로 쓰던 곳이다.(*원래 별궁은 입출입이 까다로운 궁궐을 대신하여, 혼인을 준비하는 세자빈의 가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궁궐과 사가의 중간 위치에 따로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으나, 외 척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는 연우를 보호하기 위한 선대왕의 은밀한 배려로 궐내에 연우의 별궁이 마련된다)

이곳에서 병을 얻은 연우가 출궁한 후 죽게 되자,불길한 기운이 서린 곳이 라 하여 사용을 금하고 폐쇄시킨다. 그 어느 전각보다 꽃과 과실수가 많았 던 아름다운 전각이었으나, 지금은 무성한 잡초와 음산한 기운만이 깃들어 있고, 세자빈 허씨의 혼령이 떠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보태지자, 궁인들에게는 아예 공포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8년 후. 액받이 무녀로 입궐한 연우에게 이곳의 혼령을 위로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자신이 위로해야 할 혼령이 바로 자신의 혼령임을 모르는 연우 는(기억을 잃었으므로) 매일 아침 그곳에 정성으로 향을 올리고, 청소를 하 고, 장원서4)에서 얻은 꽃씨로 삭막한 정원을 가꾸어 나간다. 어느 날 연우 는 그곳에서 한 여자 아이의 환영을 보게 된다. 그것이 자신이 잃어버린 기 억의 파편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저 궁녀들의 소문 속에 등장하는 혼령이 자신의 신기(神氣)에 의해 보여진 것이라고만 믿는다. 어느 날, 늘 뒷모습 만 보이던 아이가 연우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연우는 잃어버렸던 기억의 끈을 잡는다.

“저 아이는..., 바로 나다! 이곳은..., 내가 죽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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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활인서(活人署)5) 드라마 중반, 연우가 궁에서 쫓겨나서 생활하는 곳. 조선은 유교적 통치이 념을 근간으로 했기에 무속과 불교는 좌도(左道)로 치부되어 배척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 국무(國巫)와 성수청6) 소속 무녀들을 제외한 무격(巫 覡)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도성 밖의 활인서나 각 지방의 관청에 소속

되어 병자의 치료를 도와야만 했다(이를테면 유배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서 무녀는 의원의 힘으로 안 되는 병을 주술로 치유하는 일을 했으나, 사실 무녀의 치병능력을 믿는 백성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정신적인 부분을 담당했다 볼 수 있다.

역병 환자, 기근에 허덕이는 빈민, 노숙자, 유랑민, 죄수 등등, 그 시대 가장 빈곤하고 천대받던 최 하층민들이 모여 있던 이곳에서, 연우는 신기(神氣) 가 아닌(실상, 그녀는 무녀가 아니므로) 그녀 특유의 따뜻한 심성과 유쾌함 으로 고단한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들의 상처와 포한(抱恨)을 치유 해 주게 된다. (*마치 ‘조선 최초의 여성 정신과 의사’처럼, 씩씩한 ‘나이팅 게일’처럼)

이곳에서의 시련은 그녀가 국모로서의 자질을 갖춰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수업의 장이 되고, 그로인해 연우는 민초들의 고단함을 직접 체험하고 국 모의 자리에 오르는 최초의 여인이 된다. 또한 활인서 무녀들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으므로 드라마적 상상력을 가미, 다양하고 독특한 에 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위기와 반전, 예측불허의 사건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공간으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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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등장인물 (1) 달을 그리는 해 - 이 훤(暄) (15∼23세) 7세: 세자책봉(왕의 유일한 적통이므로 별 문제없었음) 15세: 보경과 국혼(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결합) 16세: 갑작스러운 부왕(父王)의 승하로 왕위에 등극 (암암리에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음) 16∼19세: 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 기간(세도정권의 절정기) 19세: 친정(親政) 실시(왕권 VS 세도정권의 본격적인 대립 시작) 23세: 현재 개혁을 꿈꾸는 조선의 젊은 국왕

나는 이 나라의 왕세자다 (세자시절) 잘 생겼다. 영리하다. 고집 무지하게 세다. 근자감 죽여준다. (말 그대로 근 거 있는 자신감이다. 나는 왕세자니까!!!) 하루 일과를 떼쟁이 민화공주를 놀려먹는 것으로 시작한다.(민화공주는 질색하지만 나름의 애정표현이다) 군저(君邸)에 살고 있는 양명이 문후 차 입궐이라도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갈 만큼 형을 좋아한다(서열 1순위, 2순위? 그런 거 모른다. 적장자와 서장자? 이미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란 말이냐? 형님은 그저 내게 좋은 형 님일 뿐). 아직은 정치세계의 냉정함과 비열함을 모르는 훤은 노회한 정치가의 입장 에서 보면 ‘존재 자체가 위협’인 양명 앞에서 언제나 티 없이 밝게 웃는다. 그 티 없이 밝은 모습이, 양명에게는 곧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자 시절의 훤은 아직 모른다. 시강원의 스승들도 두 손 두 발 들게 하는, 못 말리는 악동에 개구쟁이다. 스승들 괴롭히기.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세자생활에 지친 훤이 개발한 유 일한 즐거움이다. 세자의 장난에 안 당해본 스승이 없었고, 더는 못 견디고 낙향을 한 이가 수십 명이었다. 야생마 같은 세자를 길들일 사람은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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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보였다. 이처럼 약간은 가볍고, 조금은 무책임하며, 아직은 왕재로서 미숙한 성정을 지닌 훤을 철들게 만든 이가 바로 염과 연우다. 훤이 염을 통해 학문의 즐거움과 군왕의 도리, 올바른 정치가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연우를 통해서는 자신이 다스려야 할 궐 너머의 세상과 첫사랑 의 설렘을 배웠다. 연우가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왕세자의 첫사랑은 결 실을 맺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외척 가문의 보경이 대신 세자빈의 자 리에 오르게 되고, 연우를 잃은 충격과 슬픔은 훤의 성격마저 변하게 만든 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귀엽고, 철없던 왕세자가 아니다. 정치가 무 엇인지, 권모와 술수가 무엇인지를 처절한 체험으로 배워나가는 스물세 살, 조선의 젊은 국왕이다.

과인은 조선의 왕이다 (현재) 차갑다. 시니컬하다. 별로 웃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까칠 냉미남이요, 솔 직히 말하면 재수가 좀 없다. 종묘사직을 보존해야 할 왕 주제에 후궁을 품 지 않는다. 후궁은커녕, 중전도 품지 않는다. 이유? 원자 생산을 목 놓아 기 다리는 외척세력에 대한 반항심도 물론 있다. 중전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첫사랑 연우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죽음이 남긴 아픈 상처가, 다른 이에게 마음이 가는 걸 허락치 않는 다. 왕에게도 순정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하는, 아니 아니, 상상조차 못 하는 궁인들 사이에 ‘어쩌면 왕이 남색가일지도 모른다’는 불경스러운 소 문까지 돌 지경이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의심을 받는 자가 바로 왕의 최측근인 운검(雲劍), 운이 다(미안하다. 오해했다). 운마저도 궁인들 사이에서는 빙운(氷雲)이라 불리 니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 세트로 춥다. 얼어붙은 태양과 얼어붙은 구름. 잘 어울린다. 그림은 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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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훤이 피식 웃을 때가 있는데 차라리 안 웃는 게 낫다. 그 웃음에 새 겨진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머리에 쥐가 나기 때문이다. (성심의 의중을 헤 아리기 위해 조정의 대신들이 빈청에 모여 회의를 열 정도다) 훤의 포커 페이스는 왕권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이자 위장술이다. 언제, 어디 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부왕인 성조 대왕의 독 살설이 암암리에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을 훤도 알고 있다) 3년간 대왕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 열아홉 나이에 드디어 친정(親 政)을 실시하였으나, 조정을 장악한 외척세력들의 견제로 훤이 품은 개혁

의 꿈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저들의 세도로 인해 민생은 피폐해지고, 언로 는 차단되고, 충신과 인재는 온갖 모반과 옥사에 엮여 줄줄이 사사되거나 위리안치 되었다. 이제 저들의 뜻대로 훤의 주변에 훤의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사방이 온통 적뿐인 고립무원 궐 안에서 훤은 날카로운 용의 발톱을 숨긴 채, 훤의 사람을, 훤의 군사를, 훤의 정치를 준비하고 있 다. 그러니 포커페이스가 필요할 수밖에.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이 너무 커서일까? 훤은 요즘 자주 아프다. 내의원의 권고로 온양행궁으로 피병을 갔다가 운을 꼬드겨 잠행을 나간다.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칠 때부터, 아니면 뒤이어 폭우가 쏟아 질 때부터라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했어야 했다. 비를 피해 들어선 집. 음산한 무녀의 집에서 훤은 월을 만난다. 첫사랑 연 우와 너무 닮은 사람! 그런데 아니란다. 자신은 무녀란다. 어떤 계시처럼 문득, 8년 전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의문이 생긴다. 사람을 놓아 사건을 추 적해가기 시작한다. 월과 연우는 과연 동일 인물일까? 밝혀진 진실 앞에서 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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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를 품은 달 - 월, 허 연우(煙雨) (13∼21세) 홍문관 대제학의 딸. 염의 누이동생. 훤의 첫사랑.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위기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신데렐라 아닌 신데렐라.

내 이름은 허연우 연우(煙雨).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안개비 또는 보슬비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의 성 정은 오히려 뜨거운 태양 아래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청량하고, 신 선하고, 쾌활하다. 산천초목,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비, 세상의 온갖 것에 호기심이 많고 잡학에도 관심이 많은 엉뚱한 소녀다. 사대부가의 여식답지 않게 나무도 탈 줄 알고, 새총도 쏠 줄 아는 말괄량이 아가씨다. 집안의 노비 설과는 하루 종일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며 동무처럼 지낸다. 아버지의 서가에서 책을 훔쳐 읽다가 걸려 회초리를 맞은 것도 수십 번이 건만, 하룻밤만 지나면 씨익 웃으며 다시 아버지의 서가를 기웃거릴 만큼 학구열도, 고집도 세다. 홍문관 대제학의 여식답게 영리하고 똘똘하다. 아버지에게 혼날 때마다 그녀를 위로해 주는 건 언제나 오라버니인 염의 몫이다. 오라버니가 세자 저하의 서찰을 처음 갖고 왔던 날, 처음 느꼈던 두려움은 서찰교환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설렘으로 바뀌었다. 민화공주의 예동 (禮童)7)이 되어 동무인 보경이와 함께 입궐하게 되었을 때, 공주와 함께 공 부하게 되었다는 기대감보다, 혹시라도 궐 안에서 마주치게 될 훤의 모습 이 더 기대되었다.(그때 보경도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연우는 몰랐다.) 섣달그믐, 궁중의 나례의식 때…. 그 날, 가면을 쓴 훤이 연우의 앞에 나타 났을 때, 달빛 아래 가면을 벗은 훤이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이자,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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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을 보낸 이훤이다” 하였을 때, 그렇게 훤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오 랫동안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설렘은 마침내 첫사랑이 되었다. 세자빈에 간택되어 별궁인 은월각에 머물렀을 때, 궁인들을 따돌린 훤이 은월각에 나타났을 때, 영리하고 똘똘한 이 아가씨, 짐짓 도도하고 새침한 모습으로 사랑의 밀고 당기기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훤의 반쪽 이 되어 행복한 날들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 버린다. 국혼을 얼마 안 남겨두고 사가로 돌려보내진다.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가 건네는 약을 먹으며, 연우는 어쩐지 죽음을 예감한다. 미리 훤에 게 마지막 편지를 써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연우는 눈을 감는다.

내 이름은 액받이 무녀, 월(月) 월(月). 비를 피해 잠시 내 집에 머물렀던 그 분이 지어준 이름. 추위에 얼었던 몸을 녹여준 술상에 대한 답례라며, 무심히 달을 보며 지어준 이름. 정말 연우가 아니냐고,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몇 번이나 내게 묻 고 또 물은 후에 탄식처럼 지어준 이름. 나는 연우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나는 무녀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대답한 후에 얻은 이름. 그 분이 떠난 후, 홀로 남은 술잔 위에 비친 달을 보며 나도 내가 무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내가 당신이 찾는 그 연우라는 사 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 이름. 어쩐 일인지 문득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아파왔던 그날의 만남…. 훤에게 월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아가씨, 자신이 연우라는 사실을 전혀 모 른다. 8년 전, 외척세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연우. 도무녀 장씨의 주술에 의 해(대왕대비 윤씨의 사주를 받은) 죽음의 문턱에 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도 무녀 장씨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나, 무덤 속에 갇혔던 그 순간의 공포와 고 통으로 전사(前事)를 모두 잃어버렸다. 8년이란 세월을 도무녀 장씨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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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되어 천한 무녀의 신분으로 살아가지만, 전사를 잃어버린 덕에 오히 려 밝고, 씩씩했던 예전의 성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다만 장씨의 말에 의하면 분명 신내림을 받았다는데(신내림을 받은 기억 도 그녀는 없다), 전혀 신기(神氣)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대신 그녀에게는 직관력과 통찰력,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유쾌한 매력 이 있다. 도무녀 장씨의 출타 중에 찾아온 몇몇 손님들을 본의 아니게 치유해 준적 도 있다. 신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외모와 말투, 행동, 그리고 무엇보다 상 대방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마치 셜록 홈즈처럼 그 사람의 아픔을 읽어내 고 충고를 해준 것뿐인데도 꽤나 용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걸 보면,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 듯 싶다. 하지만 비오는 날의 그 만남 이후…. 이유를 알 수 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지 고, 가슴이 아파왔던 그 날 이후, 어쩌면 자신에게도 신기가 있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분명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느낀 것이었기에…. 어느 날, 낯선 세 남자(관상감의 세 교수)가 월의 거처를 방문한다. 도무녀 장씨의 허락을 받았다며(거짓말!), 그들은 월을 가마에 태워 어딘가로 데리 고 간다. 인간 부적이 되어, 액받이 무녀가 되어, 누군가의 액을 대신 받아 주러 가는 길. 그 길이 낯이 익다. 또 다시 그날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 슴이 아파온다. 마침내 가마가 도착한 곳은 궁궐! 월이 지켜줘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나라의 지존! 액받이 무녀가 되어 왕의 침전에 들어선 월은 잠들어있는 왕의 얼굴을 본 순간 기겁을 하고 만다. 비 오던 날, 비를 피해 내 집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 나에게 연우가 아니냐고,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냐고 슬픈 표정으로 물 었던 사람! 밤새 잠들어 있는 훤의 머리맡을 지키며 월은 또 다시 누군가가 그리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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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또 다시 가슴이 아파져오는 것을 느낀다. (중략)

1) 왕의 침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관청으로 왕의 경호, 긴급한 군사 소집, 왕명 전달 등

의 업무를 맡았던 곳이다. 2) 조선시대 천문, 측우, 지리, 풍수,역학, 점복, 음양술등의 일을 관장하던 관청. 내관상

감(본감)은 경복궁 영추문 안에 있었고 외관상감은 북부 광화방(창덕궁 돈화문 밖의 서 쪽)에 있었다. 3) 삼간택에서 왕비나 왕세자빈으로 결정된 처녀는 본가로 가지 않고, 그 길로 별궁(別

宮)으로 가서 왕비 혹은 왕세자빈으로서의 교육과 가례를 위한 연습을 했다. 4) 대궐 후원의 꽃과 과일나무에 대한 관리를 맡던 관청. 5) 활인서(活人署)는 조선시대 서민을 위한 구료․구휼 기관. 동소문 밖의 동활인서와 서

소문 밖의 서활인서 두 곳을 합쳐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라 불렀다. 이 드라마에서는 서활인서를 배경으로 한다. 숙소, 병동, 한증소 등의 부설시설이 있었으며, 관원과 의관 외에 무녀(巫女)와 승려도 소속되어 병자들의 질병 치료를 보조하도록 하였다. 6)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의 무속의례(巫俗儀禮)를 주관하던 관청. 국무(國巫) 외에 도무

녀(都巫女)와 수종무녀(隨從巫女)를 두었다. 7) 공주의 예절교육을 위해 선발된 사대부가의 여아들. 낮 동안 궐에서 공주와 함께 또래

집단을 형성하며 예절교육을 받았음. (*원자의 교육을 위해 선발했던 배동(陪童)을 모 티브로 한 가상의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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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안서를 보는 두 관점

우리나라의 드라마 제작사는 현재 40개 정도 되는데 각 회사마다 기획 안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들을 고용하고 있다. 당연히 각 방송사 데스 크 책상 위에는 기획안이 수북이 쌓이게 된다. 이 많은 기획안 중에서 어떤 기획을 채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방 송사로서는 고민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좋 은 기획과 그렇지 않은 기획을 가려낼 것인가? 이 장에서는 기획안을 보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시청자 감각으로 보기 시청자도 나름대로 드라마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 매주 지상파 3사 에서 쏟아내는 드라마는 20편이 조금 넘는다. 이 많은 드라마 중에서 어떤 드라마를 볼 것인가를 결정할 때 각자의 기준이 있을 것으로 보인 다. 시청자는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보며 어떤 기준으로 드라마를 선택하는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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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오나?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볼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기준은 ‘누가 나오는 가?’다. 주인공이 내가 잘 아는 배우이고 호감을 가진 배우인가 하는 점 이다. 제작자나 기획자가 배우를 캐스팅할 때 기준으로 삼는 항목은 여 덟 가지 정도다. 이는 나중에 캐스팅에 관해 이야기할 때 더 깊이 논의 하기로 하고 일단 시청자들은 배우를 볼 때 세 가지 항목을 중요하게 여 긴다.

인지도

‘내가 아는 배우냐 모르는 배우냐’가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된다. 시청 자는 처음 보는 배우가 나오면 일단 거부감을 갖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신인배우가 캐스팅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배우를 알고 있나? 그것이 인지도다.

호감도

알기는 아는데 내가 별로 좋아하는 배우가 아니라면 채널이 돌아가기 쉽다. 인지도는 높은데 호감도가 떨어지는 경우다. 얼굴은 많이 자주 보아서 알겠는데 특별히 관심 가는 구석이 없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주인공의 인지도가 높다 하더라도 호감도가 떨어지면 흥행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현재성

현재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공백기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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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시청자의 관심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결혼 후에 활동을 접었던 김남주가 5년만의 공백을 깨고 처음 나온 드라마는 2009년 MBC의 <내 조의 여왕>이다. 물론 드라마는 성공을 거두었고 김남주는 오랜 공백 을 깨고 재기에 성공했지만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생각된다. 제작진 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모험이었을 것이다. 현재성의 측면에서 김남주 는 사실 대단히 위험한 캐스팅이었기 때문이다. 김남주의 성공은 그간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질펀한 아줌마 캐릭터로서 새로 운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활동하지 않더라도 간간이 오락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치는 것은 현재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무슨 얘긴가?

한마디로 말해서 재미있는 이야기인가?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인가? 이것이 시청자들에게는 중요하다. 드라마란 본질적으로 환상(Fantasy) 을 제공하는 장르다. 현실은 누추하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온통 우울한 일투성이인데 텔레비전드라마를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그 현실을 잊 어버리게 된다. 자신이 마치 저 예쁘고 발랄하게 생긴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라는 착각 속에 70분 동안 울고 웃는다. 그것이 바로 드라마가 제공하는 판타지다. 판타지는 중독성이 있어 한번 빠져들면 쉽게 벗어 나지 못한다. 또 하나, 드라마가 제공하는 즐거움은 ‘타인의 삶 엿보기’다. 1894 년에 에디슨이 활동사진(키네토스코프)을 발명한 이래 이 본질은 변하 지 않았다. 인간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의 경험세계를 확 대하려는 지적욕구가 있다. 재벌들은 평소에 뭘 먹고, 무슨 옷을 입고, 무슨 말을 하며 살까? 근엄한 판사나 대학교수들은 술자리에서 어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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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으로 술을 마실까? 이런 점이 궁금한 것이다. 평소 궁금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내 경험세계의 일부로 확장 시켜가는 것이다.

누가 쓰나?

주로 여자들이 생산하고 여자들이 소비하는 드라마의 세계에서 남성 캐릭터는 이분법적인 존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특히 주부들이 특정 작가의 작품이라면 배우 불문, 스토리 불문하고 시청을 결정하는 경향 이 있는데 이런 부류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딱 두 종류다. 한 부류는 나쁜 남자,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 여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남 자, 바람피우는 남자고 다른 한 부류는 여자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남자, 늘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힘들 때 나타나서 도와주는 남자, 외로울 때 다 가와 손 잡아주는 남자, 여자를 여왕처럼 떠받드는 남자, 아무리 예쁜 여자가 와서 유혹을 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자다. 이 두 부류 의 남자가 극단적으로 비교되면서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간다. 그게 소위 말하는 인기 작가들의 흥행코드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한국 사회는 아직도 유교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다. 유교는 대단히 도덕 적이고,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반영 한다. 이러한 유교적 분위기 속에 한국 여성들은 은연중에 억압을 받으 며 자랐다. 겉으로는 대단히 도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지만 안으 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향락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인 나라다. 돈만 내면 못할 게 없다. 그러면서도 여자들에게는 대단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이런 이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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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억압받으며 살 아왔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중년여성들이 앓고 있는 ‘화병’의 원인 중 하나다.

화병을 앓고 있는 한국의 중년 여성들

미국 정신 의학회에서 만든 질병분류표에 보면 한국 중년여성들이 앓 고 있는 ‘화병’이 신경정신과적 질병의 하나로 등재되어 있다. 화병 (hwa byung)이란 “한국의 중년 이후의 여성들이 앓고 있는 신경정신 과적 질병으로 억압된 분노가 원인이 되어, 식욕부진, 무력증, 소화 장 애, 우울증 등을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과거 산업사회 만 해도 한국은 여성들이 갖고 있는 분노, 상처, 한 등을 표출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는 글을 가르치면 안 된다’, 이런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주의적인 사고가 불과 얼마 전까 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했었다. 50년 전만 해도 돈 좀 있고 권력깨나 가진 남자는 부인 외에 두 번 째 부인을 맞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아예 당당하게 두 번째 부인을 집안에 들여놓고 사는 경우도 흔했고 이에 대해 질투를 하거나, 첩을 괴 롭히거나, 이 문제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으면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 되는 짓을 한다고 비난했다. 한마디로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고 억 압된 채 살아온 한국 여성들이었다.

드라마를 통한 자기 치유, 카타르시스와 한풀이

이런 한국 여성들에게 막장드라마 본다고 비난해 봐야 소용없다. 몇몇 인기 여류작가가 집필하는 드라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 한다. 남편 에게서 못 받은 사랑을 드라마 속에서 보여 주기도 하고 신나게 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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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남자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는 주로 여성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확대 재 생산되며 드라마의 주 고객인 중년 여성들을 사로잡는다. 그들에게는 거의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여성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남편 과 시댁식구를 향한 분노를 해소한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구조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드라 마는 나름대로 화병을 다스리는 자기 치유의 수단이 된다. 텔레비전 연 속극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몇몇 인기 여성작가들은 그런 자기 치유의 수단, 즉 카타르시스와 한풀이를 제공해 준다는 믿음 같은 게 한국 여성 시청자들에게 있다. 그래서 ‘누가 쓰나?’ 이것도 시청자 감각으로 보면 드라마를 선택하는 대단히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제작자 감각으로 보기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를 보는 세 가지 관점은 시청자의 감각에서 보는 수준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공부하고, 앞으로 드라마현장에 본격적으 로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보다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드라마를 보는 감각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드라마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관점에서 드라마를 보면 더 디테일하고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인가? 드라마는 분명 예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예술 중에서도 소수 의 특권층이 즐기는 특수한 고급예술이 아니라 대중이 즐기는 장르이 다. 그래서 드라마를 대중예술이라고 한다. 대중예술은 한 시대의 트랜 드와 시대정신, 그리고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따라서 대중예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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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르인 드라마도 그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적인 측면을 분명히 가지 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드라마는 투자 하고, 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적인 측면도 동시에 가지 고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드라마,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공연예술, 가요 등을 문화산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작자 입장에서 드라마를 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드라마가 문화인 동시에 산업적인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감독, 작가, 배우가 예술적인 관점에서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동 안, 제작자, 기획자, 프로듀서는 산업적 측면에서 끊임없이 드라마를 검토하고, 분석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돈이 얼마나 드나?

천군만마가 등장해서 황산벌에서 대 접전을 벌이는 드라마. 보기에는 멋있지만 돈이 엄청나게 든다. 따라서 순수하게 광고수입으로 유지되는 민영방송사에서는 가급적 사양한다. KBS는 시청료를 받아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니 만큼 돈이 들더라도 의미 있는 작품이라면 제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KBS가 꾸준히 대하사극을 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이 많이 드는 기획은 일단 좋은 기획이라고 볼 수 없다. 적은 비 용으로 높은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기획이 좋은 기획이라 하겠다. 그렇 다고 무조건 돈만 아끼면 채널이 위축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선택과 집 중’이 필요하다. 다른 데서 아끼더라도 될 만한 드라마에는 제작비를 몰 아 주는 것이다. 노련한 기획자는 기획안만 봐도 얼마짜리 드라마인지 대략 계산해 낸다. 이야기는 좋은데 돈을 많이 들여야 하는 기획이라면 일단 제쳐두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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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주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요소가 있나?

요즘 방송사마다 가이드라인으로 만들어 놓은 표준제작비는 무너진 지 오래 되었다. 출연료와 작가 원고료 부분이 급속도로 상승했기 때문이 다. 방송사 입장에서 드라마 만들고 원금을 회수하는 유일한 수단은 광 고다. 따라서 부족한 제작비를 조달하고 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광 고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기획제안서에 담긴 내용이 광고주들 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인가가 중요한 체크 포인트가 된다. 특히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시청률이 높다고 무조건 광고 붙이지 않는다. 주 시청층이 누구인가? 그 시청층은 구매력이 있는가? 이것이 광고주들의 주된 관심사다. 주부들은 구매력이 10대, 20대보다 떨어진 다. 따라서 주 시청층이 40, 50대 주부인 드라마라면 시청률이 높더라 도 10, 20대가 주 시청층인 드라마보다 광고가 잘 안 붙을 것이다. 광고 주들은 돈이 될 만한 곳에 관심을 갖는다.

시청 타깃은 누구인가?

한때 SBS 일산제작센터 로비에 이런 표어가 붙어 있었다. “30대 여성을 잡아라!” 우리나라 드라마 시장에서 가장 시청층이 두터운 것이 30대 여성이다. 30대 여성을 잡지 못하면 드라마는 힘을 받기 어렵다. 일일 극, 주말극 등 방송사가 간판으로 밀고 있는 드라마는 다 30대 여성을 겨냥하고 있다. 평일 밤 10시대에 방송되는 주중 드라마는 30대 여성보다는 20대 여성이 주 고객이다. 주말 심야 시간대에는 아예 남성들이 볼 수 있는 사극이나 석세스 스토리를 편성하기도 한다. 방학 때는 아이들도 좀 편 하게 드라마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초등학생도 볼 수 있는 납량물, 공포 물 같은 것을 편성하기도 한다. 10대 층에 어필하는 미니시리즈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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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여름방학 때 편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처럼 시청 타깃이 누구 냐? 이것도 제작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상대 편성은 어떤가?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에는 크게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이 있 다. 내적요인으로는 주제, 기획 의도, 스토리, 작가, 감독, 주인공, 예산, 장비, 인력, 제작기간 등이 있고, 외적요인에도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상대 편성이다. 아무리 기획이 좋고 스토리가 풍부하더라도 시청률에 불이 붙은 대박드라마를 만나면 방법이 없다. 방송 시기도 중요하지만, 상대편은 무엇을 들고 나오는가 도 잘 살펴야 한다. 자신 있으면 정면승부하고 자신 없으면 피해 가는 지혜가 상대 편성에 대한 적절한 전략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충분한가?

기획안은 그럴듯한데 막상 대본화하면 이야기가 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스토리가 단선구조일 경우에 더욱 그렇다. 이야기가 부족한 것은 정말 위험하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1차적 이유가 ‘이야기’를 듣고 자 하는 것인데 할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건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필자가 SBS에 재직할 때 당시 사장님이 신작 들어가는 PD들을 사 장실에 불러 놓고 늘 당부하는 말이 이것이다. “잔재주 부리지 말고 이 야기를 꽉꽉 눌러 담아!” 이는 결국 스토리텔링이 관건이라는 뜻이다, 감독의 스타일도 좋고 영상미도 좋지만 결국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 는 것은 이야기이니 연출력으로 승부한답시고 카메라 빙빙 돌리고 음 악 깔고 그러지 말고 스토리를 풍부하게 가져가라. 이런 뜻이다. 이 분 은 TBC 시절부터 쭉 편성 파트에서 근무한 편성통으로 오랜 경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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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 볼 때 드라마는 결국 스토리텔링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와 감독은 능력이 있나?

작가와 감독의 능력을 체크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전작을 훑어보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작품을 했고 그 성적표는 어떠했나? 이 런 것을 들춰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작가나 감독의 과거 작품을 조사 해 볼 때는 시청률과 함께 제작비 집행실적, 광고 판매율 등을 다 같이 따져 봐야함은 물론이다. 드라마는 저 혼자 먹고 사는 걸로는 안 되고 다른 프로그램도 먹여 살려야 한다. ‘시청률 높은 드라마에 광고를 붙이려면 심야시간대의 교 양프로도 하나 사라’는 식으로 끼워 팔기를 하기도 한다. 따라서 드라마 를 기획할 때는 작가나 감독의 과거 성적표를 보고 그 실력을 가늠해 보 는 것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그래서 기획안에는 작가, 연출자의 이 름을 반드시 명기하도록 한다.

주연급 캐스팅은 용이한가?

방송3사에서 매주 쏟아내는 드라마 수는 평균 20편 정도다. 물론 월, 화, 수, 목, 금 나가는 드라마도 하나로 쳐서 그렇다. 현실적으로 계산하 면 드라마 한 편에 주인공이 남녀 둘만 나온다 하더라도 40명의 주인공 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에 주연급 연기자가 그렇게 두 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배우가 드라마를 캐스팅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사마다 주인공 쟁탈전이 아주 치열하다. 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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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수는 많고 주인공감은 적다 보니 이제 배우들이 배역을 골라잡는 시 대가 되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배역만 골라서 할 권리가 배우에게 주 어진 것이다. 주인공 잡기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아예 기획안을 쓸 때 배우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배우 섭외가 용이하도록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들이 좋아하는 배역

남자 배우들이 주로 좋아하는 배역은 터프가이다. 가죽점퍼에 가죽부 츠 신고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배역…. 한마디로 고독 한 양아치다. 또는 한없이 여자한테 잘해주고 능력까지 있는 남자, 재 벌기업을 이끌어 가는 총수인데도 일보다는 오로지 여자에게 모든 것 을 바치는 남자. 이런 배역을 남자 배우들은 하고 싶어 한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줏대 없이 흔들리는 우유부단한 남자, 조강지처를 버리 고 바람피우는 남자, 파렴치하고 야비한 캐릭터 등은 기피 1호다. 여배우들의 경우는 한때 청순가련형 즉, 춘향이 같은 절개가 있는 여자, 오필리아나 줄리엣처럼 보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청순 한 여자, 창백한 얼굴에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련한 여자…. 이런 배 역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도시적인 세련된 여자,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 같은 역할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아예 악녀, 요부, 팜므파탈, 남자를 파멸시킬 것 같은, 관능적이고 요염한, 왠지 위험스러워 보이는 여자…, 이런 배 역도 매력 있다. 애 딸린 미혼모, 주책없고 멍청한 여자, 간사한 술집 마담…. 이런 역할은 피해 다닌다. 이유는 그 이미지가 CF 섭외에 영향을 미치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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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곧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절대 부족한 시대에 좋은 캐스팅을 하려면 주인공 캐릭 터를 잘 설정해 줘야 하고 이것이 기획안에 반영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PPL 협찬을 끌어올 수 있나?

전자제품, 장롱, 침대, 식탁, 식탁 위에 놓인 밥솥, 그릇들…. 이런 사소 한 소품들도 제작자는 놓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협찬을 받아서 부족 한 제작비를 좀 메울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한다. 의상이나 장신구도 마 찬가지다. 모피코트, 란제리, 반지, 목걸이, 팔찌, 핸드백, 선글라스 등 도 드라마 속에서 의미 있게 노출될 경우 PPL(Product Placement)의 대상이 된다. 때로는 촬영장소가 돈이 되기도 한다. 겨울시즌의 스키 장, 새로 오픈한 호텔, 백화점, 음식점 체인 등은 촬영장소로 선정되면 서 일부 협찬을 받기도 한다.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지상파 방송에서 PPL은 법적으로 엄 격히 규제돼 왔다. 그러나 제작사와 광고주는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눈 을 피해 교묘하게 PPL을 삽입해 돈을 챙겼다. 그러다가 2010년 1월에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됨에 따라 지상파 방송에도 전 면적으로 PPL이 가능하게 되었다. 2010년 개정된 방송법 시행령에 따 르면 PPL은 ‘오락,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에 한해 허용’되며 방송 프로 그램 시간의 5%, 전체 화면의 4분의 1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제한 적 허용인 셈이다. 그런데 워낙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니까 점점 더 정교하고 계획적으로 PPL을 늘려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10년에 44억2000만 원에 불과하던 지상파 3사 PPL 판매가 2011 년 207억7000만 원(전년대비 4.6배 증가), 2012년 344억3000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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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1 2010∼2011년 매체별(SBS, KBS, MBC) PPL 판매 실적 2011년 (단위: 백만 원)

2010년 (단위: 백만 원) OBS (1)

SBS (7,188)

SBS (1,760) MBC (12,356)

MBC (2,632)

KBS (1,556)

KBS (313) 총 판매액: 47.1억

총 판매액: 211억

년대비 1.6배 증가)으로 엄청나게 빠르게 증가했다. 2013년의 경우, 8 월까지 매출규모가 이미 지난해에 근접한 267억6000만 원에 달한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최재천 의원(민주당)은 방송통 신위원회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간접광고 제도가 도입된 지 난 2010년부터 2013년 8월까지 케이블을 포함한 지상파 3사 방송사의 간접광고 매출액 규모가 총 863억8000만 원으로 2010년 대비 6배 증가 했다고 밝혔다. 그중에서도 MBC가 특히 간접광고에 열을 올리는 방송 사로 지목됐다. 2012년 봄에 방송된 MBC 미니시리즈 <더킹 투하츠>는 북한 특수 부대 여자 장교와 천방지축 안하무인 남한 왕자가 서로에 대한 편견과 세상의 불신, 방해를 딛고 사랑을 키워간다는 이야기로 이승기와 하지 원이 주연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던킨 도너츠’가 협찬을 했는데 제목 부터가 발음구조상 ‘던킨 도너츠’를 떠올리게 하는 데다 방송 초반부터 이승기가 도너츠를 좋아한다는 설정 하에 수시로 도너츠를 화면에 클 로즈업시켜 ‘20부작 던킨 도너츠 CF’라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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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족한 제작비를 메우기 위해 PPL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수 단이 되었다. 그래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PPL을 염두에 두고 기획이 이 루어져야 하고, 기획제안서를 볼 때 PPL이 얼마나 가능한지를 꼼꼼히 살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픈세트가 필요한가?

현실에서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촬영장소가 필요할 경우 오픈세트를 지어야 한다. 그러려면 부지 확보를 해야 하고. 세트 제작비도 마련해 야하고, 제작기간도 충분해야 한다. 이게 다 제작비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므로 오픈세트 없이 그냥 찍을 수 있는 이야기면 상대적으로 제작비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또 호텔이나 백화점 등 고객 서비스를 생명으로 하는 업종은 아예 기획 단계에서 미리 섭외를 해 놓고 시작하지 않으면 프로덕션 단계에 서 낭패를 볼 수 있다. 촬영 팀의 작업 방식이 고객의 불편을 초래할 경 우 매출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어 업소 측이 장소 제공을 꺼리기 때문이 다. 또한 오픈 세트를 짓더라도 이동거리가 멀면 이동시간이 길어져 촬 영일수가 늘어나게 되고 이는 제작비 압박요인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 래서 가급적이면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방향으로 장소가 설정되었는지, 오픈세트가 필요하다면 제작기간과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거리는 어 느 정도인지도 기획 단계에서 꼼꼼히 검토해야 한다.

지금이 타이밍인가?

지금 이 시대의 사회적 관심사, 이슈는 무엇인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 기가 요즘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점이 고려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타이밍이 맞는가를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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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통틀어 한 시대의 반영이다. 따 라서 드라마를 기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대적 관심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가 지금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이야기 인가?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볼 만한 소재인가? 이런 점을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경제적 상황

경제적 상황도 고려되어야 한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꼬이고 꼬이는 복잡한 이야기는 잘 안 된다. 안 그래도 울고 싶은 현실인데 우거지상 을 쓰고 머리 복잡하게 하는 드라마는 보기 싫은 것이다. 불황기에는 경쾌하고 밝은 이야기, 현실을 잊고 실컷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시트콤 등이 잘된다고 한다. 혹은 울고 싶을 때 뺨 때려 준다고, 아주 지독한 최 루성 멜로드라마도 불황기의 효자상품이다. 울고 싶은데 드라마 핑계 대고 실컷 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주인공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온 갖 어려움을 겪으며 성공하는 이야기, 즉 석세스 스토리도 자주 편성되 는데 이런 것들이 불황기의 편성 전략이다. 호황기에는 과거 못살던 시절, 가난했지만 정을 나누던 시절의 이 야기,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 등이 잘 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고 한다.

정치적 상황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등은 대선정국과 맞물려 히트한 드라마다. 이 처럼 정치적 상황도 드라마 기획에 있어서는 잘 따져 봐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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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트렌드

현재 우리나라 드라마의 주 고객인 30∼40대 여성은 1990년대에 대학 을 다녔다. 서태지에 열광했으며 재즈를 듣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 다. 이들은 쿨(cool)한 것을 좋아한다. 오버하지 않고, 고정관념을 싫어 하고, 큰 목소리로 외치고 부르짖는 정치적 주장을 혐오한다. 이 세대 는 이혼율도 매우 높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하려면 이런 30∼40대의 문 화적 패턴을 잘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 10대들은 다 긁어모아도 15%밖에 안 되지만 구매력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10대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산다. 40∼50대 주부들은 그냥 텔레비전을 보고 즐길 뿐이지 구매력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광고주 입장에서는 일일극, 아침드라마, 주말 연속극보다는 시청률이 낮더라도 10대들이 열광하는 드라마에 투자하 려 한다. 10대의 구매력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요즘 10대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주된 관심사가 뭔지, 어떤 문화적 트렌드를 가지고 있는지 조사해 보고 기획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기획자로서 요즘 사람 들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잘 살피고 기획안을 가려낼 때 이를 감안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기획 의도와 줄거리 사이에 속임수는 없나?

기획 의도는 그럴듯한데 줄거리가 온통 통속 멜로로 짜여 있다면 이는 방송을 스타트한 후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불륜과 출생의 비밀을 끌고 가서 시청률을 올려 보려는 그런 얄팍한 계산이 숨 어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방망이 들고 포도청 담장 넘는다’는 말이 있듯이 ‘일부 한국 주부들의 비뚤어진 성윤리를 고발하고 바람직한 부 부간의 모럴을 제시하고자 한다’ 는 그럴듯한 기획 의도를 제시해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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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온통 개연성 없는 극단적인 불륜사건을 전개해 나간다면 이는 기획 의도와 줄거리 사이에 속임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속임수를 잘 간파해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회사 고위경영자의 방송철학과 맞는가?

고위 경영자가 ‘꿩 잡는 게 매’라고 드라마는 무조건 시청률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시 청률 안 올라가면 작품성이 있어도 편성에서 걷어내 버리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시청률도 좋지만 방송이 가지고 있는 공공성, 공익성도 고려 해서 작품성 있는 드라마도 좀 만들자’ 이런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 는 최고 경영자를 만나면 또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편성권을 쥐고 있는 최고 경영자, 의사 결정권자의 방송 철학이 기획안 통과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고위경영자의 방송철학은 기획안을 판단할 때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위기 때 헤쳐 나갈 안전장치는 마련되어 있는가?

대부분의 50부작 연속극, 6개월씩 가는 연속극의 경우 대가족을 세팅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고모, 이모, 작은 아버지, 삼촌, 첫째아들, 둘째아들, 셋째아들, 큰딸, 작은 딸, 셋째 딸, 큰며느리, 작은 며느리. 거기에 애들까지 다양하게 포석을 해 놓는다. 이게 안 되면 저 리 가고 저게 안 되면 이리 가고 이야기의 중심을 옮겨 가면서 시청자의 반응이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만약에 남녀 주인공 한사람씩 투톱만을 내세웠다가 이들이 제 역할을 못해주거나 이야기가 지지부진 하면 드라마는 무너지게 된다. 위기에 빠졌을 때 헤쳐 나갈 수 있는 여 지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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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란 주인공이 힘을 못 받고 헤맬 때 사용하는 일종의 와일드카드다. 이처럼 드라마가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했을 때 최소한 파국은 막아줄 히든카드로 다양한 포석을 해 두어야 하고 기획안 에 이런 안전장치들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가를 잘 따져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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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안서 작성 시 유의점

기획제안서를 쓴다는 것은 건축가가 새로운 건축물의 설계도를 그리는 일과 흡사하다. 설계도는 창의적이고 새로우면서도 예산이나 공사기 간, 동원 가능한 자재와 장비, 인력 등을 고려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 한 구조물을 그려야 하고 또 그것이 사업적으로도 타당성이 있다는 점 을 입증해야 건축주나 투자자가 관심을 갖는다. 드라마의 기획제안서 도 마찬가지다. 새롭고, 재미있고, 주제가 선명하고, 주어진 여건과 정 해진 기간 내에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고 성공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작자나 방송사, 투자자들 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아무리 그럴듯 한 이야기를 공들여 쓴다 해도 전파를 타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기획제안서를 쓸 때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

제작 가능성 예산

천군만마가 등장해 벌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신이 자주 나오는 드라마 는 화면상으로는 멋있고 박진감 있을지 모르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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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부담스러울 것이다. 돈이 많이 드는 해외촬영이 자주 필요한 이야 기도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스토리 전개상 불요불급한 장면이 아니라면 해외 현지 로케이션이나 몹신(mob scene) 등을 억제하고 가 급적 제작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현명하다.

장비

현재 제작 여건에서 동원 가능한 장비로 찍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를 잘 고려해야 한다. 할리우드 장비와 기술팀이 와야 해결될 수 있는 고난도 의 액션장면 등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드라마는 어쨌든 현실과의 타협 속에 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외 잦은 항공 촬영이 필요 하다든가, 후반작업에 특수영상이나 전문 CG팀이 투입되어야만 구현 되는 장면들을 과도하게 삽입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 하는 것이 좋다. 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공간, 예를 들면 염라대왕 집무실이 라든가 천상의 정원 등은 미술비의 압박을 가져올 뿐 아니라 특수한 촬 영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돈을 들여서 세트를 지어야만 찍을 수 있는 장소의 설정은 추가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삼가야 한 다. 가급적이면 우리 주위에 있는 장소, 카메라만 가지고 가면 특별히 미술적으로 추가적인 세팅을 하지 않고도 바로 찍을 수 있는 장소들을 놓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력

할리우드의 폭파 전문가나 스턴트맨이 와야 해결되는 고난도의 신을 자주 등장시키면 곤란하다.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제작인 력이나 스턴트맨들의 상황은 아직 열악하다. 주인공이 탄 자동차가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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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라든가, 고속도로에서 10중 충돌이 벌어지는 이야기, 또는 수중촬영, 고속촬영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촬영 가 능한 장면 등은 우리 여건에서는 그리 쉽게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스토리 전개상 꼭 필요한 경우라면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지만 고 도의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데다 촬영의 난이도도 높은 편이라 아직은 우리 현실에서 빈번하게 구사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시간

제작기간도 고려해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영상이 필요한 이야기, 한 인간의 일생을 유년시절부터 노년까지 담아야 하는 이야기, 구한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을 담는 대하드라마 같은 것 은 예산보다도 제작기간을 확보할 수 없어 기획이 사장되는 경우가 왕 왕 있다. 기획은 항상 제작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가를 잘 살펴가면서 주어진 기간 내에 제작이 가능한 이야기에 한정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소재의 참신성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생각해 내는 이야기들 은 대부분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은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사람 의 생각이 다 비슷비슷하고, 또 우리의 경험 세계가 제한적이기 때문이 다. 그래서 항상 참신한 소재가 필요하고, 또 기획이 참신해 보여도 과 거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기획 안을 읽는 사람이 “어 이거 못 들어본 이야긴데? 아이디어가 아주 참신 하네?” 이런 반응이 나온다면 그 기획은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되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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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할 것이다. 제작자는 항상 새롭고 참신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주제의 선명성 주장하는 바가 분명하고 한두 문장으로 명료하게 표현될 수 있는 주제 가 좋은 주제이고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한 기획이 좋은 기획이다. 주제가 애매모호하면 당연히 작품도 애매모호하게 나오게 마련이다. 주제는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단순해야 한다. 한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고, 주장하는 바가 분명한 주제를 잡아야 한다.

관점의 새로움 소재가 참신하지 않고 다소 때 묻었다 해도, 또 주제가 좀 애매모호하다 해도 관점이 새롭다면 신선한 작품이 될 수 있다. 같은 소재라 하더라 도 바라보는 시각이 새롭다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춘향전을 예 로 들어보자. 사실 춘향이는 늙은 작부의 딸이고 과거시험을 공부하는 양반집 자제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여인이다. 이몽룡의 아버지 입장 에서 보면 이몽룡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만 하는 불량아들이 고 혼을 내서라도 이런 연애행각을 바로 잡는 것이 아버지로서 당연하 다. 이처럼 이몽룡 아버지의 관점에서 춘향전을 풀어 가면 전혀 다른 춘향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리바이벌 되는 고전 명작이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새로운 관점과 시각이 필요하다.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 고전을 현대에도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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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새로운 해석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이 것이 새로운 관점이 가지는 힘이다. 낡았더라도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구성력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플롯을 짜느냐에 따라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빤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구성 방식에 따라 흡인력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관객의 심리를 앞질러 가면서 꼼짝없이 끝까지 보도록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바로 작가의 힘이고 구성력 이다. 구성이란 이야기의 서사적 진행을 해체하고 사건을 인과관계별 로 재구성하여 입체화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그저 순서대로 늘어놓은 단순구성을 최대한 피하고 나선구조나 복합구조를 도입하여 관객의 관 심을 지속적으로 흡인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형식보다 내용 기획안을 쓸 때는 주제나 기획 의도, 작가 의도를 잘 구분해서 명확한 언어로 써야 하고 보는 사람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을 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거기 에 담긴 이야기가 무슨 내용이냐 하는 것이다. 괴테는 ‘문예비평에 있어 던져야 할 세 가지 질문’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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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② 그것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② 그것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나?

이 세 가지 질문의 틀을 가지고 스스로 검증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 다. 몇 번을 봐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기획은 관객도 무슨 이야 기인지 모른다. 읽는 사람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기획안은 관객도 설득 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가?” 이런 의문이 생기는 기획안은 괴테가 제시한 세 가지 질문 중 앞의 두 가지 질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세 번째 질문은 무 의미해진다. 그런 기획안은 아무리 형식적으로 완벽하고 내용이 정교 해도 무가치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획안을 쓸 때는 형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이나 감정, 주의, 주장, 사상 등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작성해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주의사항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이야기를 만들지 말 것

작품의 기획 과정에서 주제부터 정해놓고 이야기를 찾는 것은 좋은 방 법이 아니다. 이야기가 생경하고 흐름이 부드럽지 못한 드라마가 나올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주제보다는 항상 이야기가 먼저다. 주제는 저 절로 자연스럽게 도출되도록 일단 뒤로 미뤄 두고 최초의 발상이나 아 이디어,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후크(hook), 이야기의 종자, 모티브 등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한두 문장으로 요약되는 이야기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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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그 무엇을 먼저 생각해 내야 한다. 주제나 기획 의도가 앞서면 드라마는 어려워진다. 프랑스의 영화이론가이자 감독인 알렝 레네(Alain Resnais)는 “좋 은 영화란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영화”라고 말했다. 내가 기획한 이야 기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없다면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제작자를 혹하게 하는 미끼,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 끝까지 안 보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낚시 바늘은 항상 스토리텔링에 있다. 초보자일수록 드라마를 기획할 때는 주제나 기획 의도를 거론하기보다 이야기부터 찾아야 한 다. 주제를 먼저 정해놓고 이야기를 만들면 대부분 실패한다.

드라마를 발로 쓸 것

모든 예술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영상제작물은 앉아서 머리만 굴 려서는 아무것도 안 나온다. 발로 뛰어다니면서 소재를 찾아 다녀야 한다. 신문기자들은 수습기자 시절에 선배들로부터 ‘기사는 발로 쓰는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아무리 빤한 기사라도 일 단 사건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기사를 쓰라는 뜻이다. 현장 취재를 하지 않고 전화 취재만으로 쓴 기사는 어딘가 공허하게 마련이다. 특 종이란 부지런히 발품을 팔다 보면 얻어 걸리는 것이다. 드라마도 마 찬가지다. 드라마는 발로 쓰는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만화든, 남이 만든 단편영화든, 신문이나 잡지든, 아니면 지인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든 가리지 않고 이야깃거리를 찾아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다녀야 한다. 우리의 뇌는 컴퓨터와 같아서 입력된 게 없으면 출 력될 것도 없다. 입력된 것 없이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봐야 머리만 아 프게 된다. 좋은 드라마를 기획하려면 먼저 발품을 팔며 이야기를 찾 아 다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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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기획 의도, 작의를 명확히 구분할 것

기획제안서에 표현되어야 할 이 세 가지 항목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사 전적 의미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 차이점은 확실하다. 주제는 작품 의 중심이 되는 사상이나 주의, 주장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주제란 “무 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감독의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주제 는 가능한 한 구체적이고 명쾌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며 주장하는 바 가 선명해야 한다. 기획 의도는 제작의 당위성, 시대적 필요성, 성공 가능성 등을 담는 부분으로 “왜 만드는가?”에 대한 기획자의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이 드 라마가 제작되어야 할 타당한 근거와 시대적 필요성을 역설해야 한다. 따라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규정과 진단, 그리고 해결 방안 이 적절하게 기술되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고 투자자나 광고주의 입장에서 이 드라마에 자본을 투입해 원금을 회수하고 수익 을 창출할 수 있다는 신뢰를 줄 수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작의(作意)는 “주어진 주제와 기획 의도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에 대한 작가의 방법론과 집필 의도가 기술되어야 하는 항목이다. 이 대목에서 개략적인 이야기의 전개 방향이 드러나게 된다. 스토리의 3 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앞으로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주제와 기획 의도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복안이 담겨야 한다. 누가(Who), 무엇을 (What), 언제(When), 어디서(Where), 어떻게(How) 등의 요소들이 구 체적으로 드러나는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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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작품을 기획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 드라마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일단 짧은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시작 하는 것이 좋다. 짧은 이야기, 이를테면 단막 드라마나 단편영화를 기 획할 때는 인물 중심의 이야기보다 사건 중심의 이야기가 좋다. 이야기 를 전개할 때 인물 중심으로 드라마를 풀어가는 방식과 사건 중심으로 드라마를 풀어가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면 초보자에게는 후자가 더 유 리하다는 뜻이다.

인물 중심의 이야기 전개

인물 중심의 이야기 전개라 함은 극 초반에 인물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구축하여 그 캐릭터로 하여금 이야기를 끌고 가게 하거나, 또는 인물과 인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말한다. 멜로드 라마, 가족드라마, 우정과 사랑을 그린 휴먼드라마 등이 주로 이런 전 개방식을 택한다.

사건 중심의 이야기 전개

인물보다는 인물이 겪는 사건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구축해 나가는 방식을 사건 중심의 이야기 전개라 한다. 미스터리, 호러물, 수사물, 전 쟁물, 액션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해 보면 워 크숍 작품이나 졸업 작품으로 멜로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실패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가급적 말리는 편이다. 멜로물은 인물 중 심의 드라마의 대표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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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보다 사건에 집중하라

인물 중심의 이야기가 불리한 가장 큰 이유는 첫째, 그것을 짧은 시간에 담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하거 나 인물과 인물과의 관계를 뚜렷하게 설정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 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인물 중심의 이야기는 인물의 캐릭터가 이야 기의 전반부에 드러나야 한다. 또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를 관객에게 제 대로 알리려면 축적된 에피소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모녀 간의 애증 을 그리는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다면 일단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엄마와 딸의 에피소드가 축적되어야 하는데 역시 분량이 길어질 수밖 에 없다. 관객이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기까지 이 야기의 많은 분량을 할애해야 하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인물이 그 에피소드를 관통하면서 일관되게 반응하는 모습을 통 해 캐릭터를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물 묘사에 숙달되지 않은 초보자 입장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 대부분의 인물 중심, 또는 인물과 인물과의 관계 중심인 이야기는 호흡이 긴 장편드라마에 적합하다. 짧은 시간에 승부해야 하는 단편에 서는 오히려 임팩트 있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인물이 징검다리를 건너 듯 그 사건들을 관통해 가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따라서 경험이 많지 않은 초보자의 경우 인물 묘사에 많은 시간과 노력 을 할애하는 것보다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 이 훨씬 수월하고 결과도 좋다. 두 번째로 인물 중심의 드라마가 갖는 위험성은, 캐릭터가 드라마 의 전면에 나오기 때문에 연기를 아주 잘하는 배우가 필요하다는 점이 다. 즉 배우 의존도가 높은 것이다. 캐릭터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드라 마에서 배우의 연기가 능숙하지 못하면 드라마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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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연기가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드라 마는 아동극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 위험이 있다. 인물 중심의 드라마는 배우의 연기력이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가급적 비싸더라도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써야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워크숍 작품에서 연기력 있는 배우를 쓸 형편은 못 되기 때문에 가급적 배우 의존도가 낮 은 방식, 즉 사건 중심의 스토리 진행 방식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사건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는 배우가 연기를 좀 못해도 사건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티가 나지 않아 저예산 작품이라 하더라도 크게 불 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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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안서의 기능

드라마나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영상제작물의 첫 출발점은 기획안이다. 기획안을 쓰지 않고는 제작이 시작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획 기적인 아이디어와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 하더라도 기획안에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제작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자기 돈으로 제작을 할 경우 투자자를 설득할 필요가 없으니 기획 안을 안 써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도 기 획안은 필요하다. 100% 내 돈으로 제작한다 하더라도 제작은 혼자 하 는 것이 아니므로 스태프나 연기자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 하다.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기획안이다. 기획안은 어떤 기 능을 가지며 왜 필요한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프레젠테이션 자료 기획안은 제작자나 투자자에게 이 작품이 제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투 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된다. 방 송통신위원회나 콘텐츠 진흥원에서는 매년 많은 예산을 들여 영화나 텔레비전드라마에 대한 제작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군소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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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외주제작사에 좋은 기획이 있는데 제작비가 없어서 콘텐츠가 사 장되는 일이 없도록 국비로 제작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런 경우 제작 비 지원을 받으려면 기획제안서가 첫 출발점이다. 응모한 작품은 1차 적으로 기획제안서만을 가지고 심사를 한다. 따라서 기획제안서는 제 작의 출발점이자 작품의 1차 평가 기준이 된다. 기획제안서가 기본적 으로 갖추어야 할 요건을 살펴보자.

형식

기획안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일단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야 하 며 특히 주제와 기획 의도, 그리고 작가 의도가 선명하고 일목요연하게 기술되어 있어야 한다. 일관성이 없이 왔다 갔다 하거나, 애매모호하거 나, 장황하게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기획안은 아예 1차 평가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획안은 무엇보다 형식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 한다.

내용

또 형식이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담긴 내용이 뭔가 신선하고 새 로운 것이 없다면 경쟁력 있는 기획이라 할 수 없다. 기획안만 보고도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을 주거나 제작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느낄 수 있 도록 수요자 중심으로 작성해야 한다.

적절한 분량

형식과 내용이 다 좋다 하더라도 기획안이 너무 장황하면 곤란하다. 몇 시간을 읽어야 다 읽을 수 있는 두툼한 기획안은 아무래도 읽는 사람이 부담스럽다. 대부분의 제작자나 투자자, 심사위원들은 기획안을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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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각 방송사 제작 책임자 책상 위에는 항 상 드라마 기획안이 수십 권씩 쌓여 있다. 너무 방대하면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어찌어찌 해서 본인은 다 읽었다 하 더라도 의사결정을 내리려면 상위 결재라인에 있는 사람도 읽어야 한 다. 하지만 그 많은 분량을 읽게 할 수가 없으니까 요약해서 보고를 하 는데 이 요약하는 일도 대단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기획안 이 너무 장황하면 여러모로 불리하다. 또 기획안이 너무 간단해도 곤란 하다. 성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분량으로 내용을 요약, 정리 해서 써야 한다.

스태프, 연기자와의 의사소통 수단 기획안이 있으면 스태프나 연기자를 섭외할 때 일일이 만나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의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연기자

요즘 연기자를 섭외할 때 처음부터 다짜고짜 직접 만나서 작품을 설명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일단 기획안을 보내면 본인이나 소속사의 매니저 가 먼저 읽어 보고 뭔가 끌리는 요소가 있어야 만나자고 연락이 온다. 따라서 기획안이 없으면 아예 배우를 만날 기회가 차단되어 버린다. 요 즘은 기획안과 대본 두세 권 정도는 보내야 검토 단계에 들어간다. 이 정도의 준비도 없으면 캐스팅 작업은 아예 시작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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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스태프들은 여러 작품에 관계하기 때문에 늘 바쁘다. 그들은 내 작품만 을 위해서 시간을 비워두고 기다리지는 않는다. 이일 저일 하면서 먹고 살기 바쁜데 무조건 만나서 일일이 얘기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사람 만나기도 어렵지만 만나서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느라 시간을 뺏을 형편 이 안 된다. 그래서 스태프들에게도 일단 기획안을 먼저 보내서 내용을 숙지할 수 있도록 한 후에 적당한 때 만나면 이야기가 훨씬 더 심도 있 게 진행될 수 있다. 물론 스케줄이 안 맞거나, 내용에 대해 확신이 없을 경우 거절하더라도 서로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피할 수 있어 여러모로 효과적이다. 이처럼 의사결정의 전 단계로써 기획안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된 다. 이를테면 본격적인 협의에 들어가기 전 예비접촉의 단계에서 꼭 필 요한 것이 이 기획안이기 때문에 자비로 제작하든 투자자를 구하든 반 드시 기획안은 필요한 것이다.

대본의 전체 구조 파악 수단 대본을 읽기 전에 미리 작품의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면 대본 읽는 일이 훨씬 수월하고 이야기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안은 대본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유용한 수단이다. 간혹 기획안 없이 대본을 먼저 가져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에 대본을 두 번 읽어야 한다. 한 번은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 읽 어야 하고 세부적인 스토리를 파악하기 위해 또 한 번 읽어야 한다. 단 막극이라면 큰 문제없겠지만 24부작이나 50부작이라면 보통 시간 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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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아니다. 데스크는 작가의 작품을 읽기 위해 시간 비워놓고 기다리 지 않는다. 만일 데스크가 50부작 대본을 받았다면 일단 부하 직원에게 검토를 지시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말단 PD 시절에 이런 일을 많이 해 보았다. 이런 경우 일단 대강 읽는다. 사과가 썩었는지 안 썩었는지 다 먹어봐야 아는 것은 아 니라고 스스로 강변하면서 대충 몇 군데만 읽어 본다. 그리고 보고서 올릴 때 일단 부정적인 의견을 낸다. 긍정적으로 보고서를 올렸다가 작 품이 망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작품 보는 안목 이 없는 감독으로 낙인찍히고 그만큼 비난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 나 제작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니까 비난 받을 일도 없다. 그래 서 기획제안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대뜸 많은 분량의 대본을 써서 제출 하면 부정적인 검토 의견이 나오기 쉽다. 기획안을 먼저 보내고, 관심을 가지고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이 차로 대본 두세 권만 보내고, 그중에 계속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대본 절반 보내고, 그리고 방송이 결정되고 계약서에 서명한 다음에 계약금 받고 나서 나머지 대본을 보내는 전략을 쓴다면 대본부터 다짜고짜 보 내는 것보다 제작 가능성이 훨씬 커질 것이다. 방송사를 상대할 때는 기획안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접근해 가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PT 제작의 기본 자료 기획안이 먼저 완성되면 이를 바탕으로 PT 자료를 만들게 되는데 기획 자가 PT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면 직접 만드는 것이 최상이 다. 또 제작자나 투자자들 앞에서 기획안이 마음에 들도록 설득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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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광고회사로 치면 AE에 해당하는 일을 드라마 PD 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PD가 인기 도 높다. 이제 PD나 감독은 PT 작성능력과 자기 표현력까지도 요구되 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처럼 기획안이 중요한 시대가 되다 보니 기획안을 잘 쓰는 사람 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다. 또 제작사에는 기획안만 계속 쓰면서 월급 받는 ‘기획 작가’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났다. 대개 극본 공모에 당선 되었거나 단막극 한두 편 쓴 정도의 경력을 가진 신인작가들이 이 일을 한다. 이런 경우 기획안이 통과 되더라도 대본 집필은 기획 작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경력이 풍부하고 실력 있는 작가가 투입된다. 기획안은 제작의 첫 출발점이다. 기획안 작성능력 여하에 따라 제 작은 쉽게 시작될 수도 있고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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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분해

작가가 완성한 대본은 연출자의 손에 넘어오면 제작팀에 의해 다시금 분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신 분할로 시작해서 컷분할까지 대본 전체 를 분해하는 작업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을 작은 단위로 분해해서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듯이 드라마도 전 체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은 단위로 분해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대본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대본 분해다. 분해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신 분할 ② 시퀀스 분할 ③ 플롯 분할 ④ 컷 분할

3장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현대극의 일반적인 구성은 오른쪽 변의 기울기가 가파른 삼각형 모양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이 신이 전체 구성 중 어느 부분에 해당되는지를 알고 있어 야 연출의 리듬과 템포를 결정할 수 있다. 이런 구조가 감독의 머릿속 에 미리 입력되지 않으면 드라마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잃고 토막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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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1 현대극의 일반적인 구성 절정 위기 갈등 전개 발단

결말

끊어지게 된다. 드라마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하려면 매 커트마 다의 리듬과 템포가 콘티뉴이티(Continuity)에 반영되어야 하고, 그러 기 위해서는 대본 분해 작업이 우선되어야할 필수사항이다. 하긴 콘티 뉴이티라는 단어 자체가 ‘연속성’, ‘계속성’이라는 뜻이다. 드라마를 하 나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이어가기 위해 잘게 쪼개는 것이 콘티라는 것 을 단어의 의미로 이미 알 수 있다. 이런 연출상의 필요에 의해서 대본을 분해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 도 대본을 분해하는 이유는 많다.

드라마의 전체 구조 파악 작가들이 극본을 쓰는 작업 스타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철저하게 신별 구성안을 미리 짜놓 고 그 계획표에 의해 써 나가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대략의 흐름을 머 릿속에서 구상한 후에 첫 신부터 바로 써 나가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 은 디테일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순발력과 느낌으로 써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느낌으로 써 나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좋은 대본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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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신별 구성안 에 따라 써 내려간 대본이 훨씬 완성도 면에서 바람직하다. 대본을 분해 해 보면 이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드라마의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본을 디테일하게 들여다보 아야 하는데 개별 신이 나무라면 드라마 전체는 숲이다. 연출자는 숲을 염두에 두고 나무를 보는 사람이다. 대본을 분해해 보면 숲에 해당되는 전체 구조가 파악된다.

각 신의 기능, 중요도, 존재이유 파악 대본을 분해해 보면 첫째, 각 신이 무슨 이유에서 설정 되었으며 또 전 체 드라마 속에서 무슨 기능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둘째, 이 신이 얼마 나 중요한 신인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시간이 오버해도 빼서는 안 되 는 신인지, 아니면 시간이 오버되면 잘라내도 되는 신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각 신의 존재이유를 알 수 있다. 왜 이 신이 필요한가? 스토리 전개상 꼭 필요한 신인가? 아니면 쉬어가는 신인가? 이런 것들을 파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쉬어가는 신도 필요하 다. 드라마가 너무 급박하게 달리기만 하면 시청자는 금방 피로감을 느 낀다. 시청자도 가끔 쉬게 해주어야 한다. 드라마가 한참 진행되다가 갑자기 건물외경이 툭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한 호흡 쉬 어가는 것이다. 쉬면서 다음 상황이 벌어질 장소에 대한 공간적인 설명 도 겸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본 분해를 통해 각 신의 기능, 중요도, 존재 이유 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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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인력, 시간, 예산의 합리적 배분 각 신의 기능, 중요도, 존재이유 등을 파악하고 나면 장비, 인력, 시간,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신 에는 돈을 많이 쓰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신이나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전체 스토리를 진행하는 데 큰 지장이 없는 신에는 가급적이면 에너지 를 아껴둘 수 있게 된다. 필자의 경우 스케줄을 짤 때 이런 중요하지 않 은 신은 보통 촬영 첫 날에 배치한다. 첫 날은 아무래도 워밍업이 안 되 어 있어서 촬영효율이 많이 떨어지고, 또 스태프들도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 촬영결과가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연기자 스케줄이 맞지 않거나 현지 사정으로 인해 촬영 분량이 비교적 적은 날 이런 중요하지 않은 신을 남겨 뒀다가 처리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본 분해를 통해 제 작팀의 에너지를 안배할 수 있다.

드라마 전체의 흐름 파악 드라마는 강물처럼 흘러가야 한다. 강물은 심산유곡에서 발원하여 시 냇물이 되어 흐르다가 계곡을 만나 굽이치고, 물길 따라 소용돌이 쳤다 가, 절벽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먼 바다를 향해 끊 임없이 흘러간다. 강물이 결국은 먼 바다를 향해서 끊임없이 흘러가듯 이 드라마도 이야기의 종착지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야 한다. 완급은 있지만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 흐름이 드라마에서는 대 단히 중요한데 대본을 분해해 보면 그 흐름을 파악해 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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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스케줄 작성의 토대 신 분할을 해서 엑셀 같은 프로그램에 순서대로 입력해 놓으면 그다음 에는 장소별로, 출연자별로, 필요한 장비별로 뽑아낼 수 있고 그것을 바 탕으로 촬영스케줄, 녹화스케줄을 짤 수가 있다. 각 시트에는 출연자, 스태프, 세트, 주요 내용, 소도구, 의상, 분장, 미용, 장비 등 촬영에 필요 한 여러 요소들이 기록되므로 시간과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 게 된다. 이처럼 대본 분해는 것은 최적의 제작 스케줄을 짜는 토대가 된 다. 제작 스케줄에 관해서는 28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등장인물의 동선, 감정선 파악 1960년대에 한국 영화의 대부분은 배우 신성일 씨가 주인공이었는데 그가 어느 텔레비전프로에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창 일 많이 할 때는 하루에 10편의 영화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그 럴 때면 지금 내가 뭘 찍는지도 모르고 연기를 했다. 현장에 와서 의상 입고 분장하면서 대사를 외웠다. 카메라 앞에 서면 조감독이 불러 주 는 프롬프트(Prompt)를 듣고 대사를 한다. 프롬프트라는 게 뭐냐 하 면 옛날에 영화를 후시녹음 하던 시절에 배우의 대사를 옆에서 읽어주 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우가 대사를 꼼꼼하게 외울 필요가 없었다. 현 장에서 읽어 주니까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프롬프트 잘 쳐주는 조감독이 인기가 좋았다. 너무 앞서가도 안 되고 너무 늦어 도 안 된다. 배우가 감정을 잡고 따라가기 좋게 적당히 앞서가면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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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게 딱딱 끊어서 대사를 쳐주면 배우들이 무척 좋아했다.”

하루에 열 편씩 찍느라 대사 외울 시간도 없는데 앞뒤 상황을 생각 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럴 때는 감독이 잡아주어야 한다. 그러려 면 감독이 배역의 감정선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이는 대본 분해를 통 해 가능하다. 다음의 사례를 통해 ‘대본 분해를 통한 감정선 이어가기’ 에 관해 좀 더 살펴보자.

어떤 남자가 건강진단을 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말기암 선고를 받았다. 3개월밖에 못산다는 것이다.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지 만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집에 가기도 좀 그렇다. 아내에게 말해 야 하나? 그냥 숨겨야 하나? 사실대로 말하면 가족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애들은 아직 어린데, 벌어 놓은 돈은 없고, 앞으로 우리 가족 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도무지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그래 무작정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유원지가 있는 바닷가에 가서 밀려오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지나온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는데 마침 초등학교 때 무척 친하게 지냈던 여자 동창생을 만났다. 30년만 의 만남이다. 아주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야! 반갑다!” 서로 악 수하고 껴안고 난리가 났다.

이런 몇 개의 신들이 모인 시퀀스가 있다고 쳐 보자. 첫 신은 병원 에서 진단을 받는 신이고 두 번째 신은 병원을 나와 길거리에 멍하니 서 있거나 어디 걸터앉아 있는 신일 것이다. 세 번째 신은 기차타고 어디 론가 가고 있는 신이고 네 번째가 바닷가 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스케 줄을 짜다 보니까 바닷가 신을 먼저 찍게 되었다. 그래서 주인공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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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동창생을 만나 “야, 너 아무개 아니냐?”, “야, 이 게 몇 년 만이야?”, “삼십 년 만이지?”, “하나도 안 변했네?” 등등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며 반가워하는 신을 찍었다. 그리고 나중에 병원 신 찍 고, 길거리 신 찍고, 기차타고 가는 신 찍었다. 그런데 편집실에 와서 붙 여 보니 말기암 선고 받은 사람이 동창생 만났다고 너무 반가워한다. 그 앞 신에서 자신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바닷가 신 만 충실하게 연기를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 ‘감정선이 튄다’고 말한 다. 내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는데 아무리 친한 친구를 만났더라도 그 반가움을 표시하는 가운데 가슴 속에 뭔가 묵직한 응어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 병원에서의 상황을 감 정의 밑바닥에 깔고 연기를 해야 감정선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인물의 감정선은 배우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만 간 혹 놓치는 경우 감독이 잡아 줘야 한다. “당신은 이 앞 신에서 사형선고 를 받았어요, 그 감정을 깔고 연기를 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연기자의 연기를 컨트롤해 가며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 대본 분해다. 신 리스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신 분할표’를 대본 표지 뒤에 붙여 놓고 수시로 보면서 촬영을 진행하면 등장인물의 동선 이나 감정선이 한눈에 들어와 드라마의 전체 흐름을 통제하기가 쉬워 진다.

포스트프로덕션 작업의 토대 편집, 음악 등 후반작업을 할 때 대본을 분해한 신 분할표를 놓고 작업 을 하면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스태프들과 소통할 때 대단히 유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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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쓰인다. 두꺼운 대본을 이리저리 뒤적여 가며 낑낑댈 필요 없이 A4 용지 한두 장에 요약된 전체 내용을 보면서 후반작업을 지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정산의 근거자료 제작이 끝났으면 정산을 해야 한다. 돈을 어디에 얼마나 썼고 또 어떤 용도로 썼는지 증빙할 수 있는 것은 증빙하고 세금계산서나 영수증을 첨부해서 결산을 해야 한다. 대본 분해는 정산의 근거자료로도 아주 유 용하게 쓰인다. 요즘은 제작행정 담당자가 현장에 나와 제작경비 집행 을 대신 해 주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에는 조연출이 이 일을 맡아서 했 다. 정산할 때 영수증 첨부할 건 하고, 세금계산서나 기타 증빙자료를 첨부해서 결산서류를 만들어 결재를 올리게 되는데 그 뒤에 스케줄표 를 반드시 첨부하게 되어 있다. 노련한 데스크는 스케줄표만 보아도 뭐 가 가짜고 뭐가 진짠지 금방 알 수 있다. 스케줄표상에 이 촬영팀이 움 직여간 동선이 다 나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이상한 증빙자료가 하나 끼 어 있다면 바로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연기자들은 기본 출연료 외에도 야외촬영을 하게 되면 야외수당과 숙식비를 별도로 받는다. 대부분 사후 지급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잘 기 억해 두어야 한다. 스케줄표를 보면 이 배우가 촬영일수가 며칠이고 현 장에서 식사를 몇 끼 했고 몇 박을 숙박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의 기억 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산할 때 이 스케줄표가 없으면 아주 곤란 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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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재가공의 참고자료 우리나라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대부분 16부작이다. 시청자도 두 달씩 끊어서 방송하는 드라마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해외 시 장에 나가면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중국 사람들은 10의 배수로 딱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해서 20부작, 40부작, 80부작, 100부작처럼 아귀가 딱 맞아떨어져야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미니 시리즈를 중국에 팔려면 10의 배수로 재편집을 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미니시리즈가 일주일에 한 편씩 나가는데 대부분 길어봐야 13부작이고 보통 9부작, 6부작 정도 다. 러닝타임도 45분 정도로 우리보다 훨씬 짧다. 드라마를 일본에 팔 려면 그 나라 규격에 맞게 재편집을 해 줘야 한다. 16부작을 9부작으로 편집하기 위해 드라마 전체를 다 모니터링하 고 편집계산을 세우려면 준비작업만 한 달이 걸릴 것이다. 그럴 경우에 대본을 분해한 신 리스트가 쭉 있다면 작업이 훨씬 용이해진다. 필요한 신만 뽑아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각 신별로 제작시간을 체크해서 일 목요연하게 보면서 편집될 드라마의 러닝타임을 이리저리 시뮬레이션 해볼 수도 있다. 중요하지 않은 신부터 걷어냈을 때 남은 시간이 얼마 고 이걸 9개로 나누면 회당 몇 분이 나오는지 계산하기가 쉬워진다. 이 처럼 대본 분해는 사후에 드라마를 재가공할 때 참고자료로 유용하게 쓰인다. 이처럼 여러 가지 용도로 대단히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에 콘티를 짜기 전에 대본 분해는 필수다. 이렇게 분해를 해 놓고 나서 마지막에 컷을 분할하는 것이다. 촬영대본이란 컷 분할이 완료된 대본을 말한다. 컷 분할이 완료되면 프리프로덕션 과정은 끝이 난 것이다. 이제 촬영 나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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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예산

모든 영상물 제작은 카메라를 대는 순간부터 돈이 들어간다. 엄밀히 말 하면 촬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비용이 지출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돈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요즘은 아이디어와 열정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작품을 만드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제작과정 이 복잡해지고, 다양한 장비와 여러 분야의 인력들이 투입된다. 물론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발상은 여전히 중요하다. 제작의 첫 출발은 돈이 아니라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와 발상이 없다면 돈이 아무 리 많아도 작품은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창의적인 아이 디어와 발상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제작에 착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영화나 텔레비전드라마가 후시녹음이었다. 현 장에서는 그림만 찍고 대사, 효과, 음악, 내레이션 등 모든 오디오는 포 스트프로덕션에 와서 해결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동시녹음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과거에 없던 비용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후반작업에 와서는 여전히 녹음실, 더빙실, 믹싱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디오 는 돈 들인 만큼 나오는 것이다. 실력이나 열정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또 요즘같이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화면의 상당 부분을 커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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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는 비디오 부분에서도 후반작업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CG, 특수효과, 타이틀, 자막 등등, 아예 기획 단계부터 후반작업할 것을 미 리 염두에 두고 작업에 임하지 않으면 완성도 못 해보고 제작이 중단될 수도 있다. 이렇게 돈이 작품을 만드는 시대가 되다 보니 자본을 효율적으로 조달하고 집행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게 되었다. 감독이나 프로듀서 는 기획 단계부터 돈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야 한다. 어떻 게 하면 최소의 예산으로 최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를 항상 염 두에 두고 제작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예산 계획은 작품 구상 단계부터 대략적으로 세워져 있어 예산 규 모에 따라서 작품의 스케일이 결정된다. 촬영이 임박했는데 아직 예산 계획이 디테일하게 서 있지 않았다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런 경우는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 일정이 늦춰져야 정상이다. 예산에 관해 언급하는 순간, 우리는 많은 제작자들이 항상 직면해 왔던 오래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작품이냐, 돈이냐?”, “대본에서 요 구되는 만큼 예산을 확보할 것인가? 아니면 예산에 맞게 대본을 고칠 것인가?”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만큼이나 우 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돈 문제에 관한 한 해 답은 없다는 것이다. 작품마다 처해진 상황과 조건이 다르고 이야기에 따라 필요한 예산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 는 것은 예산은 가능한 한 정확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산 계획서와 결 산 보고서 간의 차액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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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계획서상의 항목들 제작 예산은 크게 상위라인(A/L)비용과 하위라인(B/L)비용으로 나누 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상위라인에 투입되는 비용을 창조적 스태프 비용, 하위라인에 투입되는 비용을 기술적 스태프비용이라 하기도 한 다. 제작 예산안의 세부 항목들을 살펴보자. 대본과 제작 일정을 꼼꼼히 살펴보면 대략의 예산을 산출해낼 수 있다. 동원되는 장비와 시설, 인력 등을 예측하고, 반드시 지출해야 할 항목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면 실제 들어가는 비용과 거의 오차 없이

표 14-1 제작 예산안 항목 A/L

프리프로덕션 ∙ 기획료 ∙ 연출료 ∙ 원작료 ∙ 원고료 ∙ 출연료(성우료 포함) ∙ 기획진행비(회의비, 자료조사비, 헌팅비, 교통비, 숙박비, 식대 ∙ 인쇄비(시놉시스,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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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프로덕션 ∙ 촬영비 ∙ 조명비 ∙ 동시녹음비 ∙ 음악비(작곡료, 편곡료, 연주료,녹음료) ∙ 미술비(세트, 소품, 의상, 분장, 미용, 특효(폭발, 화재, 눈, 비)) ∙ 장비임대료(지미집, 스테디캄, 수퍼팬더, 달리, 크레인, 렉카) ∙ 스튜디오 사용료 ∙ 차량임차료 ∙ 보조출연료 ∙ 출장비(숙박, 식대, 항공료) ∙ 제작진행비(장소사용료, 유류비, 통행료, 주차비, 음료 등 간식비, 통신비, 기념품비, 재료비 (Tape, 문구 등))

포스트프로덕션 ∙ 편집비 ∙ 녹음비 ∙ 종합편집비 ∙ 특수영상비 ∙ CG, 타이틀비 ∙ 진행비(편집, 녹음, 종편) ∙ 음악효과료 ∙ 음향효과료


작성할 수 있다. 표 14-1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일반관리비나 홍보비, 예비비 등 도 사전에 책정해 두어야 하고 이것들을 포함한 전체 예산을 직접제작 비라 한다.

① 일반관리비 ∙ 경상비: 사무실 임대료, 복사비, 전화비, 팩스, 공과금, 보험료 ∙ 저작권료, 법률비 ∙ 통상 제작비의 10% 계상 ② 마케팅비: 광고, 홍보비 (메이킹 필름, 스틸, 포스터, 제작발표회) ③ 예비비: 통상 3∼5%

간접비 그 외에 프로덕션 인건비, 각종 수당, 퇴직금, 제세공과금, 감가상각비 등을 간접비라 하는데 외주제작의 경우 이 간접비가 포함되기 때문에 자체 제작에 비해 납품 단가가 올라간다. 이 간접비에 프로덕션 이윤까 지 포함하면 전체 제작비가 산출되는 것이다. 보통은 전제 제작비의 10% 정도를 프로덕션 이윤으로 계상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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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프로듀서 영화나 드라마를 문화산업이라고 한다. 문화이면서 동시에 산업인 것 이다. 사랑과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한 영역에 속하는 것 이 틀림없지만 자본이 투자되고 원금 회수와 수익의 분배라는 자본주 의의 사업논리도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제작과정의 상위라인 스태프가 기획 부문과 감독 부문으로 나누어 져 있는 이유는 돈 문제는 돈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전담하고 감독은 작 품의 완성도에 전념하라는 배려가 담겨 있다. 프로듀서가 작품의 사업 적인 측면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감독은 작품의 예술적 측면을 책임 지는 사람이다. 감독이 너무 돈의 논리에 함몰되어 작품이 위축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자칫 예술적 측면이 소홀이 다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 다. 결국은 ‘무슨 얘기냐?’ 이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작품의 성격과 방향이 정해지는 프리프로덕션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작품 의 완성도를 높이는 길인 것이다. A/L 부문의 예산을 억제하고 지나치 게 B/L부문, 즉 프로덕션이나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 돈을 쏟아 붓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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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라인과 하위라인

드라마 제작의 프리프로덕션 단계에 참여하는 인력을 창조적 스태프라 하고 프로덕션 단계와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 참여하는 인력을 기술적 스태프라 하는데 이런 구분은 주어진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그 집행실적을 비교하기 위한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 구분은 프로듀서, 작가, 감독, 연기자 등 창조적 스태프들에게 책정된 예산을 상위라인(A/L, Above the Line)비용에 계정하고 장비와 스태프의 인건비 등 기술적 스태프들에게 책정된 예산을 하위라인 (B/L, Below the Line)비용에 계정하여 예산 책정이 창조적인 부분과 기술적인 부분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A/L비용과 B/L비용 스태프를 창조적 스태프(A/L) 부문과 기술적 스태프(B/L) 부문으로 나 누는 것은 제작비의 균형과 밸런스를 비교해 보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 되었다. 창조적 스태프로 분류되는 인력은 주로 프리프로덕션에 투입 되는 PD, 작가, 감독, 배우 등을 말한다. 그리고 기술적 스태프로 분류 되는 인력은 주로 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 투입되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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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5-1 상위라인과 하위라인의 스태프구성 상위라인(Above the line) 프리프로덕션 기획(Producer) 작가 감독(Director) 배우 <연출부> AD (조연출)* FD (Floor Manager)8 진행* 섭외* 스크립터* 제작행정* 미술감독(Art director) 음악감독(Music director)

하위라인(Below the line) 프로덕션 <Location> 촬영감독 조명감독 동시녹음 장비 진행반장 차량기사 발전차

포스트프로덕션 편집 작곡 음악효과 음향효과 녹음 (더빙) 특수영상 색보정 타이틀 (CG) Mixing (종합편집)

<Studio> 기술감독 조명감독 오디오 Video (영상) VTR (녹화) Studio Camera <Location + Studio> 대도구 소품 의상 분장 미용 코디

*표는 예산상으로는 상위라인에 포함되지 않으나 작업 과정에는 상위라인에 포함되는 직종임

조명, 음향, 기술, 미술, 음악, 편집 등을 말한다. 표준제작비상의 배분으로 보면 우리나라 현실에서 A/L비용 대 B/L 비용의 적정 규모는 60 : 40 정도다. 만일 이 균형이 무너지면 많은 문제 가 발생한다.

192


A/L비용 상승 드라마 제작과정에 참여하는 창조적 스태프에게 지나치게 많은 예산이 배분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텔레비 전드라마에 출연하는 주연급 연기자의 출연료는 표 15-2, 15-3과 같다. 대학에서 영상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외주제작사에 입사하면 첫 해 연봉이 2000만원이 안 된다고 한다. 톱클래스 배우와 외주제작사 계약 직 PD와의 급여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른다. 이런 격차는 프로덕션과 포 스트프로덕션에 투입되는 다른 하위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임금과도 크 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적 스태프에게 양질의 작업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난센스다. 우선 열심히 일할 의욕이 떨어지게 되고, 실 력 있는 사람이 현장에 붙어 있지를 않는다. 물론 사명감과 예술가적인

표 15-2 스타급 연기자 출연료 비교(2007년∼2008년) 주연 연기자

신인연기자

배용준

25000(?) <태왕사신기>

윤계상

1800 <누구세요>

송승헌

7000 <에덴의 동쪽>

장근석

1200 <베토벤바이러스>

권상우

5000 <못된 사랑>

이수경

1000 <대한민국 변호사>

박신양

5000 <바람의 화원>

김지훈

1000 <연애결혼>

이정재

5000 <에어시티>

이진욱

1000 <유리의 성>

최지우

4800 <스타의 연인>

지현우

1000 <내사랑 금지옥엽>

송일국

4000 <바람의 나라>

고아라

950 <누구세요>

고현정

3500 <히트>

고주원

800 <내 여자>

송혜교

3500 <그들이 사는 세상>

이동욱

800 <달콤한 인생>

손예진

3000(?) <스포트라이트>

이하나

800 <태양의 여자>

출처: 드라마PD 협외 내부자료, < >: 출연드라마, (단위: 만원)

193


표 15-3 일부 신인급 배우들의 드라마 출연료 이름

방송사

드라마

출연료

흥행여부

윤계상

MBC

미니시리즈 <누구세요>

1,800만원

×

장근석

MBC

미니시리즈 <베토벤바이러스>

1,200만원

이수경

MBC

미니시리즈 <대한민국 변호사>

1,000만원

×

김지훈

KBS

미니시리즈 <연애결혼>

1,000만원

×

이진욱

SBS

주말특별기획 <유리의 성>

1,000만원

×

지현우

KBS

주말연속극 <내사랑 금지옥엽>

1,000만원

고아라

MBC

미니시리즈 <누구세요>

950만원

×

고주원

MBC

주말특별기획 <내여자>

800만원

×

이동욱

MBC

주말특별기획 <달콤한 인생>

800만원

×

이하나

KBS

미니시리즈 <태양의 여자>

800만원

×

출처: 드라마PD협회 내부자료

근성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늘 상대적인 박탈감 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기술적 스태프의 임금 저하는 곧 기술적 스태 프 부문 작업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고 작품의 완성도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 작품의 수준이 떨어지고 흥행이 저조해지면 임금 지급 지연, 제 작사 경영악화, 연쇄 도산, 영상산업 침체 등의 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한국드라마PD협회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주연 급 연기자의 출연료는 20배 이상 상승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드라마 시 장 전체로 보면 외주제작비의 60%가 출연료, 15%가 작가료다. 실력 있 는 스태프를 비싼 돈 주고 쓸 여력이 없다. 심지어는 A/L비용에 표준제 작비 100%를 투입하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배우 부분에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이것은 결국 소수의 스타급 연기자가 한국 드라마 시장 대부

194


표 15-4 외주제작사 크리에이티브 리더스그룹 에이트의 직원규모 및 급여 예 구분

임원

사무직 직원

계약직 직원

합계

성별

인원(명)

1인당 평균 급여액(원)

2

-

2

76,500,000

153,000,000

12

25,700,000

308,000,000

18

15,900,000

287,000,000

30

19,800,000

595,000,000

3

8,000,000

24,000,000

2

8,000,000

16,000,000

5

8,000,000

40,000,000

17

28,500,000

485,000,000

20

15,200,000

303,000,000

37

21,300,000

788,000,000

76,500,000 -

총 급여액(원) 153,000,000 -

출처: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http://dart.fss.or.kr)의 법인등록보고서(2007년 8월 현재)

분의 부가가치를 독식하고 있는 구조라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된 원 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지나친 외주 비율 규제와, 한탕주의에 사로잡혀 작품의 성공보다는 주가 상승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불건강한 외주제작사의 난립에서 시작되었다. 외 주제작 시장에 정상적인 시장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고 정부가 지나치 게 개입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초래한 것이 오늘날 드라마 산업 붕 괴 위기의 주원인이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 드라마 산업이 처해 있는 위기가 어느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표 15-5는 일본 최고 여성 연기자들의 출연료 등급표다. 시장 규모로 보면 우리나라 방송 산업의 규모는 일본의 6분의 1 수

195


표 15-5 일본 여자 연기자의 드라마 출연료 등급표 랭크

여배우

출연료(만엔)

요시나가 사유리

300∼

SA

마츠시마 나나코

300

5A

야마구치 도모코, 고이즈미 쿄코, 나카야마 미호

200∼250

4A

시바사키 코우, 타케우치 유코, 나카마 유키에

200

3A

칸노 미호, 토키와 타카코, 츠루다 마유, 료, 코유키, 마츠 타카코, 야다 아키코

180

2A

쿠로키 히토미, 마츠모토 아키코, 스기타 카모루, 이시다 유리코 키쿠카와 레이, 코노 코토미, 쿠니니카 로코, 이토 미사키, 히로스에 료코, 후카다 코코, 후지와라 노리카, 사쿠라이 준코, 후지타, 토모코, 코바야시 사토미, 미무라

100∼150

A

우에토 아야, 하세가와 쿄코, 마츠우라 아야, 유카, 사카이 와카다 오토하, 이시하라 사토미, 야마구치 사야카

80∼100

B

코이케 에이코, 시라이시 미호, 하라다 나츠키, 메구미, 시토에리코 야마다 유, 나가와시 마사미, 호시노 마리, 미우라 미에코, 나카지마 토모코

50∼100

2B

아오키 사야카, 벳키, 사카시타 치리코

∼50

출처:하윤금(2008), 한국 TV연기자 출연료제도의 합리적 대안모색, 한국 드라마 PD협회 주최 “TV드라마 위기와 출연료 정상화” 세미나 자료집.

준이다. 그런데 톱클래스 연기자의 출연료는 일본의 두 배 가까이 된 다. 이에 대해 한국드라마제작자협회는 ‘70분 미니시리즈 평균 회당 제 작비가 1억 원 안팎이라고 했을 때, 스타 출연료는 1500만 원 선, 출연 료 총액은 3000만∼4000만 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 하기도 했다.

196


B/L비용 상승 기술적 스태프에게 배분되는 B/L비용의 지나친 상승도 마찬가지로 심 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A/L 부문 자금압박 ② 유능한 작가, 감독, PD 등의 확보에 어려움 ③ 스타급 연기자의 부재 ④ 작품 인지도, 완성도 저하 ⑤ 시청률 저하, 흥행 실패 ⑥ 장비, 기술의 고급화로 제작기간이 늘어남

표 15-6 주요 드라마제작사의 경영성과 (단위:억 원) 외주제작사

주요제작 드라마

2006

2007

2008*

김종학프로덕션

베토벤바이러스 / 이산 / 하얀거탑 / 풀하우스

3.8

-381.6

-74.6

삼화네트워크

엄마가 뿔났다 / 조강지처클럽/며느리전성시대

13.5

-23.4

25.9

스타맥스

가문의 영광 /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

-6.9

5.5

-38.1

싸이더스HQ

누구세요/고맙습니다

-54.2

14.4

-9.3

예당엔터테인먼트

떼루와/로비스트

-324.9

-220.5

-209.5

옐로우엔터테인먼트

연애시대/섬데이

-141.7

102

-8

올리브나인

왕과나/주몽/마왕/황금신부

-109.2

-43

-48.2

초록뱀미디어

바람의 나라 / 주몽 / 올인 / 거침없이 하이킥

-86.6

-186.3

9.1

팬엔터테인먼트

사랑해 울지마 / 태양의 여자 / 신의 저울

35.8

3.9

1.8

JS픽쳐스

워킹맘 / 식객 / 궁S / 꽃보다 남자

10.9

14.6

--

출처: 드라마PD협회 내부자료

197


⑦ 제작비초과 및 대량손실발생: 임금지급 지연, 제작사 경영악화, 연쇄도산, 영상산업 침체

제작비의 합리적 배분이 관건 제작비 배분에 있어 균형을 잃게 되면 그 어느 쪽으로 치우치든 영상 산 업은 침체일로를 걷게 된다. 드러난 현상은 서로 반대이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 예산 계획 수립에 있어 균형을 잡 는 일이 중요한 이유이다. 현재 한국 드라마 산업은 A/L 비용과 B/L 비용간의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놓여있다. 출연료, 작가료의 상승으로 A/L비용에 엄청난 압박 을 받고 있는 중이며 현재 외주 제작사들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최근에 문을 닫는 회사들이 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반증해 준다. 현재 한국 드라마 산업은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드라마 제작과정에 있어 기획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있다. 제작과정을 굳이 3단계로 나누고, 인적 구 분을 창조적 스태프와 기술적 스태프로 나누는 것은 제작비의 합리적 배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체크해 보기 위한 것이다. 상위라인, 즉 창조적 스태프에 배정된 예산 항목으로 대표적인 것이 ‘원고출연료’다. 원고출연료는 작가와 배우가 가져가는 돈이다. 하위라인, 즉 기술적 스 태프에 배정된 예산항목은 ‘지급수수료’가 대표적이다. 좀 더 세부적로 말하면 촬영, 조명, 동시녹음, 편집, 특수장비, 차량, 미술, 음악 등에 사 용되는 돈이다. 표 15-8과 표 15-9를 보면서 올바른 제작비 배분과 그렇 지 못한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198


표 15-7 SBS수목드라마 <태양을 삼켜라> 제작비 내역서 (2009. 7.1∼9.17 에이스토리 제작, 단위: 원)

항목

제작 예산

전체 제작비 대비 (%)

기획료

48,000,000

0.47

극본료

889,000,000

8.72

연출료

913,000,000

8.95

제작PD외 인건비

188,000,000

1.84

출연료

3,161,000,000

30.99

헌팅료

98,000,000

0.96

촬영(카메라외)

570,000,000

5.59

조명

404,000,000

3.96

동시녹음

104,000,000

1.02

미술

846,000,000

8.29

특수효과

128,000,000

1.25

해외촬영

871,000,000

8.54

제작진행

40,000,000

0.39

촬영진행

197,000,000

1.93

CG

120,000,000

1.18

운송

172,000,000

1.69

편집

142,000,000

1.39

타이틀/예고

18,000,000

0.18

홍보

62,000,000

0.61

일반관리

1,229,000,000

12.05

총계

10,200,000,000

100.00

총 제작비(24부작)

10,200,000,000

회당 제작비(70분)

425,000,000

A/L비용

5,199,000,000

B/L비용

5,001,000,000

제작비 배분 비교

A/L : B/L = 51 : 49

199


표 15-8 어느 학생 작품1의 경우 (단위 : 원)

제작비 내역

200

소품

35,200

장비 (조명)

15,000

차비 (학교-->안성)

7,700

배우차비 (학교-->남부터미널)

17,600

배우간식

3,000

배우배웅 차비

8,100

현장소품

14,800

점심 (한솥도시락)

36,400

스태프간식

8,100

저녁

30,000

아침/점심

27,000

여배우 차비

2,000

음료

6,200

스태프 식사 (회의)

20,000

수퍼 전기사용료

30,000

음향

100,000

기타

24,000

총액

385,100

총 제작비(13분)

385,100

A/L비용

0

B/L비용

385,100

제작비 배분 비교

A/L : B/L = 0 : 100


표 15-9 어느 학생 작품2의 경우 (단위 : 원)

구분 인쇄비

PREPRODUCTION

세부항목

금액

스크립용지 인쇄

13,200

수량 단위

비고 학교 서점

500

1,000

스크립터용

이태경

50,000

50,000

재희

배우

최종학

50,000

50,000

성훈(유류비포함)

출연료

김충호

30,000

30,000

노숙자

강다영

20,000

20,000

강다영

2개

합계

164,200 오예스

3,600

3

10,800

제작

식수

1,100

6

6,600

진행비

포카리스웨트

1,400

2

2,800

(간식)

캔커피

500

14

7,000

쿨피스

1,200

4

렌트카 유류대

150,000

1일차 점심

2,500

15 명

37,500

한솥(치킨마요)

1일차 저녁

980

3병

2,940

감독님 부모님 제공

2일차 점심

1,000

13 명

삼각대

50,000

1

2일

모니터

25,000

1

2일

50,000

TV Logic 7HD

렌즈

100,000

1

2일

200,000

Zeiss ZF Lens SET

35mm어댑터

125,000

1

2일

250,000

LETUS35

반코팅장갑

400

7

2,800

아이스크림

700

2

1,400

소품

디스(담배)

2,000

3

6,000

구입비

라이타

300

3

900

캔맥주

1,800

1

1,800

검은봉지

20

1

유류대

식대

PRODUCTION 장비대여

후반 PRODUCTION

합계

통행료 포함

13,000

김밥천국(김밥)

100,000

SIGMA Head Set

20 848,360

음료

진행비

4,800 150,000

합계 POST-

합계 13,200

500

4

2,000

커피

2,000

PRE-PRODUCTION

164,200

PRODUCTION

848,360

POST-PRODUCTION

2,000

합계

1,014,560

총 제작비(15분)

1,014,560

A/L비용

164,200

B/L비용

850,360

제작비 배분 비교

A/L : B/L = 16 : 84

201


에이스토리에서 제작한 <태양을 삼켜라> 의 경우 제작비 배분이 대 단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두 학생 작품의 경우 학생이라는 특수성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B/L 부문에 지나치게 예산이 편중되어 있어 제작비가 적정 규모로 배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합의 출현 오늘날 지상파 방송사에서 방송하는 드라마의 70%가 외주제작이다. 현행법상 지상파는 전체 편성 시간의 40% 범위 내에서 외주를 주도록 되어 있다. 물론 지역 방송사나 케이블 PP는 외주 비율이 80%를 넘는 다. 이는 법적인 규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자체 제작 능력이 많이 떨어 지기 때문이다. 지상파의 경우, 뉴스나 스포츠 중계, 등은 외주를 줄 수 없는 프로 그램들이다. 따라서 40%라는 이 외주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는 제작국 프로그램, 즉 드라마, 예능, 교양 프로그램을 외주를 줄 수밖에 없다. 그 래서 제작국 프로그램의 외주 비율이 70%가 넘는 것이다. KBS2 TV 같 은 경우 드라마의 외주 비율이 80%가 넘는다. 드라마 외주제작이라 하면 팬엔터테인먼트나 삼화프로덕션, 김종 학프로덕션 등 직접 제작을 담당하는 회사가 전부인줄 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래 수많은 하청회사들이 존재하고 있다. 조명회사, 음 향회사, 장비대여회사, 미술회사, 외주 카메라맨회사, 엑스트라회사, 음향회사, 종편회사 등 하청회사들이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도 요즘은 이런 외주회사와 하청회사들이 조합을 결성하는 추세다. 심지어는 섭 외, FD등의 직종도 조합을 만드는 추세에 있다.

202


이들 외주제작사와 하청회사들은 상호 출혈을 해 가며 단가를 덤 핑치지 않고 최저 가격을 보장받는 방법을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유니온, 즉 조합을 결성했다. 요즘은 하청회사의 경우 지상파나 외주제 작사와의 계약 업무는 조합에서 대신 해 준다. 덤핑 경쟁을 막기 위해 서다. 업체를 선정하는 것은 제작사의 권리이지만 계약은 조합을 거치 게 해놓았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출혈 경쟁을 막고 최저 가격을 보장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조합이 만들어지면 기술적 스태프 부문은 힘을 발휘한다. 정 부나 국회에 압력을 행사해서 정책수립이나 입법 활동에 영향을 미치 기도 한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바로 앞 건물에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있 다. 작가들이 낸 회비로 운영하는 사단법인 형태지만 회원들의 권익이 나 방송 정책에도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저작권을 확보해 수익금을 회원들에게 배분해 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저작권 을 인정받고 있는 분야는 작가와 음악 부문이다. 아직 연출이나 연기, 스태프 분야는 저작 인접권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영화감 독 이두용의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감독도 아직 저작권의 보호를 못 받습니다. 영 화 만들어주고 감독료 받으면 끝이에요. 모든 권리는 제작사에서 다 가져갑니다. 나는 평생을 바쳐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내 영화가 TV에 나가건 외국에 팔리건, 연락도 없어요. 왜? 조합이 없어요. 조합이…. 협회가 있긴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요. 협회가 친목단체, 또는 학 회 비슷하게 운영되다 보니 구속력이 없고 따라서 회원들의 권익보호 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미국의 경우 감독 은 저작 인접권을 인정받는데 전체 저작권의 6% 정도 됩니다.”

203


소수의 특정 직업군이 제작비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구조 속에서 한 나라의 문화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 나라 드라마산업이 처해 있는 문제가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문제가 아 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더 이상의 시장붕괴를 막기 위해서 제작사, 방송사, 정부기관 등 3자가 머리를 맞대고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한 진지하고 심도 있는 논의의 장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대 해 본다.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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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실패로 이끄는 요인들

드라마 PD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은 작품이 성공하는 것이다. 시 청률도 높고 작품성도 있고 오래 기억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작 보다는 실패작이 더 많다. 지상파 3사에서 매주 쏟아내는 드라마는 20여 편 정도 된다. 연간 합산해 보면 거의 100 여 편의 드라마가 매년 제작되어 허공으로 쏘아 보내진다. 그런데 수많 은 드라마들 중에 우리의 기억에 남는 성공한 드라마는 항상 손으로 꼽 을 만큼 적다. 왜 그럴까? 좋은 대본, 좋은 배우, 좋은 스태프, 좋은 편 성, 좋은 감독…. 이런 것들을 몰라서 그럴까? 흔히들 말하길 드라마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대본과 배우가 좋아 야 하며 그 외에도 연출, 스태프, 예산, 장비, 인력, 제작기간 등 모든 여 건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건 모두 다 아는 이야기다. 이처 럼 드라마 성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성공한 드라마보다는 실패한 드라마가 더 많은 것은 왜 일까? 위에 열거한 요인들 외에, 드라마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 른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에 열거한 것들은 주로 드라마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내적요 인들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포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성패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외적요인들이 작용을 하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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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인이란 이를테면 상대편성이라든가, 시대적 상황, 계절적 요인, 문화 적 트렌드, 시청자의 텔레비전 시청행태, 국민 생활패턴 등 프로그램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인 요인들을 말한다.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그 불행의 원인이 각 각 다르다”

사실 결혼생활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요소들이 모두 성공 적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성격, 성생활, 돈, 자녀, 종교, 친인척 관계, 건 강, 가치관의 통일 등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이들 중 하나만 어긋나 면,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충족되었더라도 그 결혼생활은 실패할 수밖 에 없다. 우리는 보통 성공의 조건에 대해서 쉽고 간단한 단 하나의 단답형 대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중요한 일이 성공을 거두려면 수많은 실패의 요인들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드라마의 성공과 실패에도 이 ‘안나카레리나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즉, 드라마를 성공하려면 성공의 비결을 찾기보다는 수많은 실패 요인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실패 요인을 미리 감지하 고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능력, 이것이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요구되는 능 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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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성공에는 좋은 대본, 좋은 배우, 좋은 스태프, 좋은 제작 자, 좋은 편성, 좋은 감독. 이 모든 요소들이 골고루 갖춰져야 함은 당연 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문제의 핵심이 이것보다는 좀 더 깊은 곳에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 대본인가, 좋은 배우란 무엇 인가, 좋은 스태프란 무엇인가, 좋은 제작자란 무엇인가 등 보다 더 근 본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 들은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각자 서로 다를 수밖 에 없는 가치와 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판단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문제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논의해 보기로 하고 이 장에서는 내적, 외적 요인 외에 드라마를 실패로 이끄는 또 다른 중 요한 요인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지나치게 특이한 소재 195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텔레비전드라마 작가 패디 차예프스키 (Paddy Chayefsk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TV가 연극이나 영화와 구분되는 두 가지 특징은 리얼리티와 일상성 이다.”

텔레비전드라마는 강력한 스토리텔링보다는 ‘내 얘기다’, ‘우리 가 족, 우리 주변의 이야기다’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그 러려면 보편적인 세팅 위에 이야기가 구축되어야 한다. 특히 일일극, 주말극 등 연속극이나 시츄에이션 드라마, 시트콤 등은 가장 보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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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팅위에 인물과 사건이 배치되어야 한다. 리얼리티와 일상성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특이한 소재와 설정으로 드라마를 세팅하면 초기에 반짝할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할 확률이 크다. ‘내 얘기’라는 느낌이 안 들기 때 문이다. 그래서 성공한 드라마들이 다 설정이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 이다. 텔레비전드라마는 보편성 위에 특수성이 곁들여져야 한다. 특수 성만 가지고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그러므로 지나치 게 특이한 소재는 피하는 것이 좋다.

홈을 벗어난 드라마 드라마의 진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신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혼자서 진행되는 신도 있지만 대부 분의 신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시작 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게 하려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 는 공간을 세팅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공간 중에서 가장 보편적 이고 일상적인 공간이 바로 가정이다. 이 홈(Home)을 버리고서는 드 라마가 성립되기 어렵다. 시트콤의 세트 구조를 보면 대개 많은 사람이 들락날락 하면서 만 나고 대립하고 충돌하기 좋은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KBS 드라마를 보면 집은 한옥 구조인데 마루에 반드시 낮고 기다란 식 탁을 갖다놓는다. 우리나라 개량한옥의 구조에서는 가족들이 마루에 서 만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기왕에 만났으면 뻘쭘하게 서서 이야 기하는 것보다는 앉아서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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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하기도 좋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기다란 식탁을 갖다놓는 것이 다. 이런 식탁은 일반 가정에서는 보기 힘들다. 사람들이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 없이도 수시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 그것의 대표 격이 가정이다. 그래서 시트콤들을 보면 대부분 거실이 주 무대인 것이고 그것도 부족해 단골 카페까지 세팅해 놓는 것이다. 만일 가정이 안 나온다면 그것을 대신해 줄 사랑방 역할 을 하는 사회적 공간이라도 세팅을 해 줘야 한다. 이처럼 드라마에는 항상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들락거리면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절 대적으로 필요하다. 패디 차예프스키(Paddy Chayefsky)의 말대로 텔 레비전은 일상성으로 승부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드라마는 안방극장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 족들이 보는 드라마다. 따라서 가정 또는 가족이 최소한 하나 이상 세 팅되어야 한다. 홈베이스(Home base)를 벗어난 아웃도어 드라마, 거 리의 드라마는 성공하기 어렵다.

드라마가 종합예술임을 망각한 작업 방식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드는 함정이 ‘이 분야에 서 만큼은 내가 최고다’ 라는 일류의식이다. 특히 음악, 미술, 문학 등 순수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런 경향이 더 심하다. 드라마 감독이나 작가도 이런 함정에 곧잘 빠진다. 내가 최고이기 때문에 미술감독보다도 미술을 내가 더 잘 알고, 음악감독보다도 내가 음악을 더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이나 작가가 아 집과 독선에 빠지는 순간이 바로 드라마가 망해 가는 순간이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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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드라마 제작은 협력시스템이 가동되어야만 비로소 굴러가게 되어 있는 종합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협력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종합예술이고 각 분야의 전 문가들이 자기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의 성공적인 작품이 탄생 할 수 있다. 나 혼자 다 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감독은 스태프들의 자 발성을 이끌어 내고, 그들이 최대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 경과 동기를 만들어 주는 데서 역할이 끝나야 한다. 드라마는 공동 작업이다. 작가는 대본을 잘 쓰고, 연출자는 연출을 잘 하고, 배우는 연기를 잘 하고, 음악감독은 음악을 잘 만들고, 편집자 는 편집을 잘 할 때 그 작업들이 합쳐져서 한편의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작곡자는 훌륭한 지휘자를 만나면 되고, 지휘자는 훌륭한 연주 자를 섭외하면 된다. 작곡자가 지휘도 하고, 연주도 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드라마의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기획자, 작가, 배우, 연출자 중 어느 한쪽의 주장이 강해지거나 한쪽으로 모든 권력이 집중되면 그 드 라마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아집, 독선이 강한 작가나 감독, PD 가 드라마를 만들면 실패하기 쉬운데 이는 드라마가 공동 작업임을 망 각하고 제 혼자 다 하려들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종합예술이다.

시대의 트렌드를 읽지 못하는 드라마 사상 유래 없는 경제 침체기를 맞아서 우리 방송사는 어떤 편성전략으 로 이 불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분석해 놓은 보고서다.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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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①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 불황기에 성공을 거둔 드라마를 분석해 보니 몇 가지 범주로 나눌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 사례 들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② 불황기에는 코믹드라마, 최루성 멜로드라마, 석세스 스토리 등 이 잘 된다. ③ 호황기에는 시대물이나 향수를 자극하는 전원드라마, 또는 정 통사극이 잘 된다.

돌이켜보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분석이기도 하다. 현실이 너무나 도 고달프고 힘들기 때문에 텔레비전 보면서는 좀 웃고 싶을 것이다. 또 지금은 고생되더라도 나도 저렇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드라마가 불황기에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호황기에 잘 되는 드라마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을 돌아보고 추억에 잠기는 것은 지금이 먹고 살 만하기 때 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삶이 팍팍하고 힘든데 가난했던 과거 시절을 되 돌아보고 싶겠는가? 또 사람이 먹고 살만 하면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하는 법이다. 호황기에 정통 사극이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서 그 트렌드를 따라잡아야 한다. 특히 영화는 더 그렇다. 찍다가 제작비 조달에 문제가 생겨서 창 고에서 필름이 한 일 년 썩고 있다면 상황은 대단히 어려워진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가?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이미 낡은 기획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드라마를 기획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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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 분야는 무엇인가? ② 그들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나? ③ 그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이런 점들을 잘 살펴서 기획해야 한다. 이미 너무 다루어서 식상해 져 버린 광주민주화운동이나 남북 이념 대립, 6·25 전쟁, 독립운동 이 야기 등은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한국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지겨워한다. 같은 이야기라도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나가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지나치게 무난한 캐스팅 다른 감독이 다른 작품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기대 배우를 캐 스팅하는 것은 안일한 캐스팅이다. 캐스팅이란 ‘주사위를 던진다’는 뜻 으로 단어 자체가 이미 도박성을 암시하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 도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캐스팅에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는 돌발변수, 히든카드가 있어야 한다. 드라마에 있어 히든카드란 주로 ‘빛나는 조연’을 의미한다. 히든카 드는 위기 때 써 먹는 보험 같은 것이다. 히든카드 두 세장을 쥐고 있다 면 위기가 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힘을 잃고 제 역할 을 못할 때,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수습할 시간이 필요할 때, 조 연은 위기에 빠진 드라마를 구출해 내는 와일드카드 같은 존재다. 그래 서 ‘잘 키운 조연 하나 열 주연 안 부럽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캐스팅을 너무 상식선에서 무난하게만 가져가면 실패할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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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 또 남이 만들어 놓은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차용하는 캐스팅은 화를 자초한다. 이미 시청자들에게 익숙해진 기존의 이미지에 의존해 서 웃기는 배우, 순정파, 터프가이 등으로 나눠 놓고 배우를 캐스팅하 면 아무리 연기파를 끌어 모았더라도 실패하기 쉽다. 위기 때 쓸 수 있 는 해결사, 즉 히든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 보따리를 너무 늦게 푸는 경우 몇 년 전, 한 작가가 제작사를 설립했다고 명함을 주는데 회사 이름이 <S#2>였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봤더니 두 번째 신에서 갈등, 캐릭터, 스토리 구조를 다 드러나게 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이 름이라고 했다. 질질 끌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5 분 내에 승부 보겠다는 어떤 결연한 의지가 반영된 회사 이름이다. 그 래서 내가 “기왕이면 <S#1>으로 하시죠?” 그랬더니 “아이고, 그 생각을 못했네”라고 아쉬워했다. 요즘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방영 첫 주에 이미 결판이 나 버린다. 연속물도 옛날에는 두 달 안에 자리 잡으면 성공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3주 안에 시청자를 잡지 못하면 어렵다. 그만큼 세상이 빨라졌다. 기다 려 주지 않는다. 초반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야기 보 따리를 빨리 풀어 놓는 것밖에 없다. 드라마 초반에 질질 끌며 이야기 를 진전시키지 않고 주변 상황 설명만을 길게 늘어놓거나 갈등관계를 빨리 제시하지 않으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려버리게 되고 결국 회복 불 가능인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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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 전략이 없는 드라마 요즘은 방송사마다 정보 전쟁이다. 주로 매니저들이 정보의 전달꾼들 이다. 매니저들은 캐스팅 협의를 위해 방송3사 제작국을 수시로 드나 들며 기획제안서나 대본을 받는다. 그래서 매니저들은 정보의 보고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다. 작가가 누구냐, 무슨 얘기냐, PD는 누구고 주인공은 누구인가를 미리 알고 이에 맞는 전략 을 세워야 한다. 자신 있으면 정면승부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피해 가야 한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는 시청 타깃이 전혀 다른 드라마를 기획해서 틈새시장을 노리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저쪽이 멜로면 더 강 력한 멜로로 가든가, 아니면 아예 코믹이나 무협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편성 전략이다. 상대 채널의 전략을 알고 이에 대한 대 응책을 세워 두어야 한다. 해볼만 하다면 정면승부를 하지만 어렵겠다 면 피해 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편성국의 송출 부서인 운행부에는 ‘붕어꼬리 전략’이라는 말이 있 다. 5분 먼저 시작해서 5분 늦게 끝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MBC가 타이 틀 끝나고 전 CM 내보낼 때, SBS 드라마는 이미 본편을 시작하는 식이 다. 또 MBC가 본편 끝나고 후CM 나갈 때, SBS에서는 임팩트 강한 엔딩 신을 집어넣어 떠도는 시청률도 잡고,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다음 회 에는 SBS를 보게 하자는 전략이다. 이때의 분당 시청률을 도표로 그리 면 붕어꼬리 모양이 된다. 그래서 붕어꼬리 전략이라고 한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방송3사의 주중 드라마, 그러니까 월화드 라마, 수목 미니시리즈는 편성시간이 50분이었다. 물론 주말연속극도 마찬가지로 50분 편성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60분이 되었다가, 요 즘은 70분이 되어 버렸다. 바로 저 붕어꼬리 전략 때문이다. 5분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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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1 붕어 꼬리 전략 분당 시청률 SBS

드라마 본편

MBC 전 CM

드라마 본편

후 CM

시작해서 5분 늦게 끝내자는 작전은 처음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경 쟁사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우리도 붕어꼬리 전략이다. 길 게 만들어서 경쟁사보다 먼저 내고 늦게 끝내자!” 이렇게 서로가 앞뒤 로 시간을 늘리다 보니 50분 편성에서 60분으로, 60분 편성에서 70분으 로 자꾸 늘어나게 된 것이다. 요즘 주중 드라마는 편성표상으로는 70분 인데 실제 방송 나가는 러닝타임을 계산해 보면 80분 제작인 경우도 많 다. 이대로 가다가는 100분 드라마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 와중 에 죽어나는 것은 제작팀이다. 일주일에 70분짜리를 두 편씩 찍어 낸다 고 생각해 보라. 노동 강도로 치면 한국의 드라마 제작진들은 정말 살 인적인 환경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청률 경쟁이 지나치면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 물론 경쟁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경쟁을 통해 양질 의 프로그램이 생산되고, 그 결과 방송이 질적으로 향상되어 그 혜택이 시청자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시청률 경쟁에 만 매달리다 보면 방송사와 시청자, 광고주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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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묘수를 찾기보다 실패의 위험을 줄여라 드라마 성공에 대한 단답형의 해답은 없다. 제작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그 과정에 개입되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사지선다형 문제에서 정답 을 알 수 없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아닌 것부터 지워나 가는 것이다. 다음은 필자가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준비할 때 학원 강사 에게 들은 한마디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합격하는 비결은 네 문항 중에 문제가 ‘∼ 인 것 은?’ 할 때는 제일 긴 것을 찍고 반대로 문제가 ‘∼ 가 아닌 것은?’ 할 때 는 제일 짧은 것을 찍는 것이다. 그러면 60점은 나온다. 필기시험 100 점 받았다고 장학금 주는 거 아니다. 어쨌든 합격하면 되는 거 아닌 가?”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공을 위한 단답형의 대답을 찾기 보 다는 실패의 요인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공을 향해서 가는 길은 계단 오르기와 같다.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이 다. 대박에 대한 욕심은 접어 두고 차근차근 실패의 위험을 제거해 나 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성공에 가까이 와 있게 될 것이다.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 최선의 투자다. 실패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 고 이를 피해 가는 사람만이 성공하고 돈도 벌 수 있다. 드라마의 세계 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드라마를 실 패로 이끄는 요인들’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통찰력과 실행 능력이 있 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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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작가


기업 활동의 최종 목표는 이윤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

시하는 일부 분위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돈을 열심히 벌어 이익을 남 기는 것이 기업의 가장 큰 목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 극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 권력, 명예를 꼽는다. 또 사랑, 건강, 일 등을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 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요즘은 수단 그 자체가 목적 이 되어 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열 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을 확 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작가에게 궁극적인 목표는 뭘까? 그들은 과연 무 엇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자기만족, 예술적 가치 추구, 혹은 돈, 명예를 꼽는 사람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좋은 드라마’를 쓰는 것이 목표이 지 않을까? 내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아직도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고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드라마 작가에게는 최고의 보람일 것이다. 그런 데 과연 무엇이 좋은 드라마일까? 좋은 드라마는 어떤 드라마일까? 꿩 잡는 게 매라고 시청률 높은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일까? 광고를 많이 팔아서 돈을 많이 벌어오는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일까? 방송국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는 좋은 드라마의 기준은 시청률, 광 고 판매율, 제작비 집행 실적 세 가지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시청 률 높고 적은 제작비로 광고 많이 팔아 수익을 남기면 막장드라마라도 괜찮은 걸까? 이 세 가지 외에도 결코 수치화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일까? 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르는 건 사실이다. “그것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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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시청률, 광고판매율, 제작비 집행실적 등은 좋은 드라마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 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이 좋은 드라마인지 대답해 야 한다. 시청률과 광고 판매율, 제작비 집행 실적 외에 무엇이 더 필요 한 걸까? 그 해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과 관련이 있을 것 이다.

① 왜 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가? ② 드라마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③ 어떤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철저하고도 진지한 자기 성찰이 있은 다음 에야 우리는 ‘좋은 드라마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을 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기획제안서의 기획 의도와 주 제, 작가 의도 항목에서 충분히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좋은 드라 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시원한 대답을 내려 줄 수 있는 건 아 니다.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나 방식, 가치관이 다르고 드라마를 보는 안목이나 기대도 다르기 때문이다. 달리 방법이 없을 때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은 구체적인 팩트(fact)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사례를 수집, 분석하고 그 로부터 일반론을 도출해 내는 방식이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지 금까지 좋은 드라마라고 이야기되었던 그런 많은 작품들을 끌어 모아 서 그 작품들이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 이다. 다소 주관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 리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좋은 드라마’들을 떠올려 보고 그 드라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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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공통점들을 추려내다 보면 좋은 드라마에 대한 몇 가지 단 서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스물다섯 살에 방송사에 입사해서 이후 26년 동안 제작 현 장을 떠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작품을 지켜보면서, 또 숱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아, 이런 정도면 좋은 드라마라고 할 수 가 있겠구나” 하는 안목 정도는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드라마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한번 꼽아 보았다.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 주는 좋은 드라마는 대략 다 음에 열거하는 7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 특징들을 하 나하나 살펴보면서 “좋은 드라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 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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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성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왠지 어린애 낙서같이 느껴진다. 어떤 사람이 피 카소한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그림을 이렇게 그리십니까?”

아주 단순무식한 질문이지만 누구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을 것이 다.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그리는 데 60년이 걸렸습니다.”

뭔가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답이다. 복잡하고 화려하게 그리는 것 은 쉬운 일이지만 사물을 단순화시켜 그것을 화폭에 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음악가들이 젊고 창작에너지가 넘칠 때 만든 곡들을 보면 Am7, Bb7, C#m 등등 코드 진행이 화려하고 리듬도 기교가 넘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다시 다장조로 돌아간다. 높은음자리표 옆에 플랫(b)도 없 고 샵(#)도 없는 것이 다장조다. 우리 어릴 때 불렀던 동요들이 대부분 그렇다. 다시 심플한 음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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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들도 마찬가지다. 배우가 나이 들어 원숙해지면 연기가 단 순해진다. 나이든 배우의 고도로 절제된 연기는 어린아이의 연기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필자가 1995년에 연출한 <옥이이모>라는 드라마는 초반에 아역 배우들이 끌고 가다가 어느 정도 드라마가 진행 되면 세월이 뛰어서 성인 배우들이 나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역 배우 들이 워낙 리얼한 연기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끄는 바람에 시간을 건너 뛰지 못했다. 사실 아역 배우들이 뜨면 시간을 건너뛰기 어렵다. 아역 배우들이 한창 시청률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데 다 버리고 성인 배 우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결국 50부작 드라마에 50부까지 아역 배우들이 계속 나왔다. 마지막에 회사에서 두 달 연장하 라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서 성인 배역으로 바꾸 었고 성인 배우 나오고 두 달 후에 드라마는 끝났다. 1998년에 연출한 <은실이>는 더했다. 어린 은실이가 처녀가 되면 전도연, 아줌마가 되면 최명길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호소력 있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바람에 연장해서 70 회까지 가는데도 시간을 건너뛰지 못했다. 결국 아역 배우만으로 그 긴 드라마를 끝냈다. 아역 배우는 얼굴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서 표정연기 가 거의 없다. 어찌 보면 무표정하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아역 배우의 연기를 보는 어른 시청자들은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기쁨. 슬픔, 분노, 사랑, 연민 등을 아역 배우의 얼굴에서 스스로 읽어내 는 것이다. 아역 배우들은 연기를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연기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더 호소력이 있게 다가갈 수 있다. 연기를 조작한다는 말은 뭔가 보여 주기 위해 작위적으로 표정이나 액션을 꾸며 내는 연기 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역 배우의 연기하지 않는 연기, 꾸미지 않는 연기가 성인 배우들의 조작된 연기보다 훨씬 더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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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는 나이가 들면 다시 어린아이처럼 꾸밈없고 심플한 연기를 하 게 된다.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망한 작품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복잡 다단하다. 갈등구조도 복잡하고, 인물 간의 관계도 복잡하고, 캐릭터도 복잡하다. 그리고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무슨 얘긴지 모르겠 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일단 심플해야 한다. “명작일수록 심플하다” 는 말이 있듯이 좋은 드라마는 일단 심플하다. 그런데 무엇이 어떻게 심플한 것일까?

스토리 구조 좋은 드라마는 우선 스토리 구조가 심플하다. 우리가 이야기의 구조를 논할 때는 몇 가지의 틀을 사용한다.

① 기승전결: 동양적인 구성, 우리 시조가 기승전결로 이루어져 있다. ② 발단 전개 갈등 위기 정점 결말: 현대극의 일반적인 구성 ③ 오프닝 도입 갈등 위기 정점 결말: 엔딩 영화적인 구성

좋은 작품은 한 번만 봐도 스토리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 여기 까지가 도입이고, 이제 갈등이 시작되는구나. 여기까지가 위기고, 이제 클라이맥스로 들어가는구나. 이제 파국을 맞는구나. 이런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플로팅이 완벽한 작품일수록 스토리 구조는 심플해진다. 이 세 가지 틀에 딱딱 끼워 맞춰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토리 구조가 선 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면 일단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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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드라마 기획의 여러 단계 중에서 첫 번째 단계는 ‘발상’이다. 모티브, 스 토리의 씨앗, 후크(hook) 등등…. 뭐라고 표현하든 간에 ‘단 몇 줄로 요 약된 이야기의 출발점’을 발상이라고 한다. 좋은 드라마는 발상, 또는 전제가 아주 심플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①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어느 날 전신 성형하고 나서 엄청 예뻐 졌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미녀는 괴로워> ② 여자 스파이가 적군 대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떻게 될까? <색계>

프랑스 영화감독 알랭 레네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영화란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 영화다.”

캐릭터 단순무식하고 저돌적인 사람을 보면 우리는 돈키호테 같은 인간이라고 한다. 우유부단한 사람의 전형을 햄릿에 빗대기도 한다. 이처럼 좋은 드라마가 내세우는 인물의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심플하다.

① 효녀의 대명사 - 심청 ② 불쌍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배 다른 언니 - 팥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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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이중인격자 -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이처럼 좋은 드라마는 두 마디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캐릭터 가 선명하다. 캐릭터 구축에 실패했다는 것은 드라마 구축에 실패했다 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다양한 캐릭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단순무 식하다고 해서 항상 단순무식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대단히 감성 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을 보여 주기도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 어느 순 간에 대단히 과감한 결정을 내리기고 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통일 적 관점’, 즉 많은 캐릭터 중에서 일관되게 어느 한 관점에서만 인물을 묘사함으로써 어떤 전형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텔레비전 연속극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드라마가 어느 정도 탄력을 받아서 굴러가기 시작하면 작가는 아무 할 일이 없다. 극중 캐릭터가 불러주는 대사를 작가는 받아 쓸 뿐이다.”

주찬옥 작가의 말이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캐릭터 중심의 드라 마를 잘 설명해 준다. 철저하게 캐릭터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갈 때 6개월씩, 1년씩 드라마를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강 수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SBS <여인천하>는 무려 1년 6개월간, 151 회를 방송했다. 그 긴 시간을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선명한 캐릭 터에서 나오는 것이다. 캐릭터가 복잡하면 드라마도 복잡해진다. 복잡한 드라마는 호소력 이 떨어지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명작일수록 캐릭터는 심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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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다. 따라서 캐릭터가 심플한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가 될 가능성 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갈등 구도 좋은 드라마는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 즉 갈등 구도가 심플하다. 영화 <살인의 추억>, <추격자> 등은 연쇄 살인범과 그를 쫓는 형사와의 끊 임없는 추격전, 심리게임으로 성공한 영화다. 여기에는 연쇄 살인범과 형사라는 단순한 관계가 전부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진짜와 가짜 가 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사실 이런 구도는 흔하다. 우리가 어 렸을 때 읽었던 동화 ‘왕자와 거지’가 바로 이런 구도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알고 보니 이복 남매였다.’ 대부분의 한국 드 라마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설정이다. 이복 남매라는 하나 의 설정만으로도 드라마를 6개월씩 끌고 가는 힘을 얻는다. 이복 남매 라는 설정이 좋은 구도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심플한 갈등 구도와 단순한 인물관계가 좋은 구도라는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도 심플한 갈등 구도의 대명사다. 드라마 PD들 사이 에는 연속극이 망하려고 할 때 쓰는 극약처방이 몇 개가 있는데 고부간 의 갈등은 그중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런 경우,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에 벌어지는 강력한 갈등 구도가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다. 못된 시어머 니와 학대받는 며느리면 충분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작품이라 고 꼽는 것들은 대단히 심플하고 선명한 갈등 구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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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연기 아역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아역 배우들의 연 기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연기를 단순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연기 경력이 오래된 원로 배우들도 연기가 매우 단순하다. 그런 점에서 아역 배우와 원로 배우들의 연기는 공통점이 많다. 다른 점은 아역 배우는 단순하게 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원로 배우는 의도적으 로 단순한 연기를 하는 것이다. 필자가 SBS 드라마부장 시절에 신인 연기자들을 교육시키는 워크 숍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다. 한 달 정도 단기 교육을 시켜서 바로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도록 기초 훈련을 시키는 프로그램인데 신인연 기자들에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입하는 것이 바로 ‘연기를 단순하게 하기’다. 불필요한 자세나 움직임, 표정을 일체 배제하고 대본에 주어 진 대사만 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킨다. 연기를 단순하게 한다는 것 은 뭔가를 표현하려는 욕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성인 배우들이 연기를 통해 뭔가를 표현하려면 표정이나 동작, 대사 톤 등을 조작하기 쉬운데 조작하지 않은 무채색의 연기를 요구하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연기 를 단순하게 하기’ 훈련에서는 대략 다음의 다섯 가지를 요소를 단순화 하도록 요구한다.

① 자세 ② 행동 ③ 대사 ④ 표정 ⑤ 감각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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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연기’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토니 바의 책 󰡔영화 연기󰡕 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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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캐스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좋은 배우’ 에 대한 토니 바의 견해가 종종 인용되곤 한다. 토니 바에 의하면 좋은 배우란 다음과 같다.

① 대본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 ②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③ 관객을 감동시키는 사람

나는 이 중 두 번째 항목에 주목한다.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은 어떤 사람일까? 관객을 웃길 줄 아는 사람, 유머가 있는 사람이 아닐 까? 타인을 즐겁게 해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웃음’이야 말로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웃음은 그 누구도 상처주 지 않고,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타인의 마음을 열게 하고, 구 성원들 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고취시키는 대단히 훌륭한 소통의 도구 이다. 명작이라고 꼽는 작품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유머 코드가 숨어 있 다. 유머는 궁극적으로 관객을 감동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대단히 유용한 정서다. 관객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먼저 웃음이라는 밑밥을 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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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놓는 것이다. 왜 웃음을 좋은 드라마의 여러 가지 조건 중에서 두 번 째로 꼽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

안방극장에 적합한 정서다 텔레비전의 무차별성

텔레비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 중의 하나가 ‘무차별성’이다. 상 대가 누군지 가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전파를 쏘아 보내는 매 체가 텔레비전이다. 요즘은 텔레비전도 시청 지도가 필요하다고 해서 19세 이상 가, 15세 이상 가, 12세 이상 가, 전체연령 가 등으로 방송사 에서 자율적으로 시청 가이드라인을 정해서 고지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어떤 조사에 의하면 ‘19세 이상 가’라는 딱지가 붙으면 오 히려 19세 이하의 사람들의 시청을 부추긴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못 보게 하니까 더 본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별 효과가 없는 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텔레비전이 가 지고 있는 무차별성 때문이다. 텔레비전은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매체 다. 더군다나 텔레비전은 가정의 중심인 거실 한복판에 놓여 있다. 그 래서 텔레비전은 가족의 정서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매체임이 분 명하다.

폭력이나 섹스는 반가족적

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폭력, 섹 스, 웃음 등이 대표적인 시청 유인 수단이다. 시청률이 떨어진다 싶으 면, 또는 막강한 블록버스터가 상대 편성에 등장한다 싶으면, 그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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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구책으로 필요 이상의 액션 장면을 삽입하거나 성적 감성을 자극 하는 선정적 장면을 끼워 넣거나, 조연배우를 활용해 코믹한 장면을 끼 워 넣는 전략을 종종 쓴다. 이 중에서 폭력이나 섹스는, 텔레비전에 자 주 등장하기는 하지만 가족적인 정서는 아니다. 오히려 반가족적이라 고 보야야 한다. 반면에 웃음은 가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해치지 않는 다. 웃음은 안방극장에 잘 어울리는 정서인 것이다.

긴장을 완화시킨다. 사전MC

생방이든 녹화든 공개방송을 할 때는 막 올리기 한 15분 전쯤에 바람잡 이를 올려 보낸다. 본방 시작되기 전에 관객을 미리 좀 웃겨놓아 분위 기를 풀어놓자는 것이다. 주로 막내 개그맨들이 대중 앞에 서는 훈련도 할 겸해서 이 바람잡이로 동원되기도 하고 요즘은 아예 사전MC라는 신 종 직업이 생겨나 이 일을 전담하기도 한다. 사전에 방청객을 미리 많 이 웃겨 놓으면 본방이 시작된 후 객석의 반응이 확실히 다르다. 반응 이 살아 있다. 미리 웃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예능PD 시절 생방송을 일 년 정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사전에 바람을 잡은 날과 무대 준비가 덜 돼서 바람을 잡지 못한 날은 객석의 반응에서 확실히 차이가 난다. 웃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 고, 정신적 긴장상태를 이완시켜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방송용이 아니기 때문에 소재의 제약에서도 자유롭다. 때로는 이 사전MC의 개 그나 와이당이 본방보다 더 재미있는 경우도 있다. 와이당(외담, 猥談, わいだん)은 일본말인데 우리말로 음담패설, 성적인 농담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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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담패설의 완충 효과

조선왕조 때 당시 지배계급 사이에 사색당파가 갈라져서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에는 고급 관리들이 사석에서 나누는 대화의 거의 대부분이 ‘외담(猥談)’이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피하고 음담패설을 주고받음으로써 당파 간의 충돌을 좀 완화시켜 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한가할 때면 대신들이 국사를 논 하기보다 음란한 이야기로 시간 보냈다는 이야기가 고금소총(古今笑 叢)에 실려 있다. 지금도 점잖은 사람들의 모임에는 농담이 자주 등장한다.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모임을 이끌어 가려는 것이다. 그래서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그 모임에서 주도권을 잡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골프는 주로 비즈니스 때문에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이 많이 치는데 서로 서먹서먹한 사람들끼리 만나 라운딩을 하려니 어색 하기 짝이 없다. 그럴 때 농담이나 음담패설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 아주 특효약이다. 그래서 어떤 회사 중역은 아예 수첩에 웃기는 이 야기를 적어가지고 다니다가 분위기 썰렁하면 그 수첩의 레퍼토리를 하나씩 풀어 놓기도 한다. 이런 경우 별로 안 웃겨도 다들 신나게 웃어 주게 마련이다. 분위기도 어색한데 농담을 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신나게 한바탕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성적 농담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 외설죄를 적용해 형법으로 처벌했지만 지금은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피로를 풀 어주고 정신적인 청량감을 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기능을 인정하는 추세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례집에 이런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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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기준에 비추어 외설하지 않는 한 예술, 문학, 과학, 문학 연구 등에서 섹스의 취급은 언론, 출판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를테면 현대사회에서 적당한 섹스의 취급은 무죄라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포르노는 성적 흥분을 유도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귀로 듣 는 성적 농담은 지나치지만 않으면 긴장된 정신세계를 이완시켜 주는 정온(定溫, 체온 조절) 기능을 한다.

슬픔을 증폭시킨다 웃음과 감동과의 관계

웃음은 그 반대의 정서인 슬픔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처음 부터 바로 슬픈 이야기를 들이대는 것보다 사전에 좀 웃겨놓고 슬픈 이 야기를 꺼내 놓으면 관객이 슬픔을 느끼는 강도는 훨씬 커지게 되고 그 결과로 감동으로 이어가기가 훨씬 쉽다. 그 이유는 웃음이 가진 감정의 정화작용 때문이다. 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맑고, 밝고, 가볍게 만들어 준다. 웃음으로 마음이 백지와 같이 순수해졌을 때 뒤따라 이어지는 비 극은 슬픔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비극을 훨씬 더 비극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웃음 → 감정의 정화 → 공감능력 증대 → 슬픔의 증폭 → 감동

이런 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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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역성

웃음이 감동으로 이어져 가는 이 과정은 순방향으로 갈 수는 있지만 역 방향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 먼저 울려놓고 웃기려면 더 어렵다. 이처 럼 한 방향으로는 갈 수 있지만 반대 방향으로 갈 수는 없는 성질을 비 가역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달걀을 물에 넣고 물을 가열하면 70도 정도부터 이 달걀이 익기 시작한다. 노른자와 흰자가 단단해지다가 100 도 넘으면 삶아진다. 생달걀이 삶은 달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은 달걀을 끓는 물에 넣고 다시 물의 온도를 낮춰서 섭씨 0도로 떨어뜨린 다고 해서 삶은 달걀이 생달걀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생명체의 삶과 죽음의 과정도 비가역적이다. 한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방법은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삶과 죽음은 비가역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이처럼 ‘변화의 조건을 거꾸로 하여도 그 변화가 다시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성질’을 비가역성(非可逆性)이라 한다. 웃음에서 슬픔으로, 슬픔에서 감동으로 가는 과정은 비가역적이 다. 웃음이 슬픔을 증폭시킬 수는 있지만 슬픔은 웃음을 증폭시키지 못 한다. 슬픔을 먼저 들이대면 웃음마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대부분의 멜로 영화나 드라마가 처음에 웃기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명작일수록 처음부터 슬픔을 내세우지 않는다. 처음엔 이게 코미딘가 싶을 정도로 발단과 전개 부분에 유머를 많이 배 치해 놓는다. 또 좋은 영화일수록 클라이맥스로 상승해 가는 길목 길목 마다 웃음을 배치한다. 이럴 경우 관객은 정신없이 웃다가 어느새 작품 의 주제와 만나게 된다. 완전히 무장해제 당한 채, 무방비 상태로, 감독 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맞닥트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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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사람을 웃길 줄 안다는 것은 휴머니티를 갖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 통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남을 잘 웃기지도 못 할 뿐더러 남을 웃기는 데 관심이 없다. 유머는 인간에 대한 애정, 즉 휴 머니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필자는 신작을 들어갈 때 연출노트 첫 장에 항상 써 놓는 말이 있다.

“웃어라, 세상이 그대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홀로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을 연출노트 맨 첫 장에 써 놓고 드라마 끝날 때까지 노트를 펼 때마다 볼 수 있게 해 둔다. 사실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것은 스트레스 많이 받는 작업이다. 시 간에 쫒기고, 잠 못 자고 하다 보면 사람이 일에 치여 금세 찌들어 버린 다. 감독이라는 사람이 찌든 얼굴로 촬영장에서 우거지상을 쓰고 있으 면 배우들도 기분 안 좋을 것이고 스태프들도 우울해진다. 사람은 본능 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것을 피하고 밝고 유쾌한 쪽으로 다가가려는 속 성이 있다. 혼자 우거지상 쓰고 있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 버리게 된다. 주변에 사람이 없이 감독 일을 잘 수행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웃음이 행복을 가져온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과 주연을 한 1999년 작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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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아들만이라도 살려보려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는 처절한 이야기 인데 그 과정이 너무 웃겨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웃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천 포인트를 먼저 따는 사람에게 상품으로 네 가 좋아하는 탱크를 준다. 우리는 지금 탱크 타기 게임을 하는 중이다.” 이렇게 거짓말을 한다. 이 아들은 탱크를 타기 위해서 사과박스에 숨어 서 1박2일을 지내기도 하고,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게임을 고안해 내며 위기를 넘긴다. 이 모든 게 다 아들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이다. 결국 이 아버지는 독일군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마 지막에 독일군들이 철수한 수용소 정문으로 아군의 탱크들이 막 들어 오는데 아들 혼자 수용소를 걸어서 나오다가 탱크하고 마주친다. 그 탱 크가 게임에서 이겨서 받는 선물이라고 생각한 아들은 두 손을 뻔쩍 들 면서 “우리가 이겼다!”고 외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감독 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말, “우리는 600만이 가스실에서 목을 움켜 쥐고 죽어갔지만 삶에 대한 희망과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우린 이겼다”는 메시지와 마주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거 아닐까? ‘시청률 높여서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목표도 괜찮지만 그런 인생 은 재미없지 않은가? 내가 쓴 드라마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희망과 기쁨을 깨닫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이 거야 말로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건 작가가 책 임져야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그 렇지 않아도 복잡하고 스트레스 많은 현대사회에서 드라마를 보는 시 간만큼은 편안하고 행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청자의 행복’을 위해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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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를 만들고자 결심한 사람이라면 ‘웃음’에 관한 깊은 연구와 고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웃음과 행복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다. 행복해서 웃는 것 이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또 웃음이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준다는 연구 결과는 많이 나와 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수의 세균 이 살고 있어 그 무게를 다 합하면 3Kg 정도 된다고 한다. 엄청나게 많 은 미생물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질병에 걸린다는 것은 우리 몸에 있던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 다. 물론 외부로부터 침입해 오는 인플루엔자 같은 것 때문에 병에 걸 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우리 몸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웃음 은 인체의 면역기능을 높여 줘서 우리 몸속의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웃음은 질병억제력 이 있다는 것이다. 웃으면 건강해진다는 것은 그런 원리다.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며 웃을 권리가 있고 작가는 웃겨 줄 의무가 있다. 그것이 드라마를 통해 모두가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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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어느 강연에서 감동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감동이란 느낄 감(感)과 움직일 동(動)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에게 뭔가를 느끼게 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행동하게 하는 힘이다.”

아주 적절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관객으로 하여금 감동 을 느끼게 하고, 그 감동이 보는 사람의 삶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 면 그 이상의 보람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컬러 방송이 막 시작되던 1980년대 초반 무렵, 드라마가 예술(Art)이냐 언론(Journalism)이냐 라는 주제를 놓고 작가, 감독 등이 모여 밤을 새 워가며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철없 던 시절의 객기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일부 사 실인 측면도 있었다. 인터넷도 없었고 휴대전화도 없었고 케이블TV도 없었다. 사람들은 오직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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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이 시기에 텔레비전드라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국민들의 정 서와 생활리듬을 지배했었다. 한마디로 드라마는 한국 국민의 의식과 삶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그 당시 국민 여론을 지배하던 신문 은 광고 시장의 다변화로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고, 지상파도 케이블과 위성방송, IPTV, DMB, 인터넷, 종편 등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전락해 버렸다. 더 큰 변화는 시청자의 변화다. 한국 영화 <도둑들>은 이정재, 김 혜수, 전지현, 김윤석, 김수현 등 톱스타들을 다 끌어 모았지만 그저 ‘태 양의 눈물’이라는 다이아몬드 하나를 훔치기 위한 도둑들의 활약이 전 부다. 스토리 진행이 밑도 끝도 없는 데다 사건의 개연성도 부족하고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뚜렷하지 않아 시사회 후 필자는 이 영화의 흥행 실패를 예언했었다. 그런데 이 개봉 후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관객 수 1300만을 넘어 역대 한국 영화 흥행순위 1위다. 이 영화를 보고 “뭐 이 따위 영화가 다 있어?” 라고 욕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그냥 두 시 간 재미있게 때웠네” 이런 반응이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제 한국인은 드라마를 통해 뭔가를 얻으 려는 생각이 없다. 그저 킬링 타임용 엔터테인먼트 장르 중 하나로 간 주한다. 이제 드라마는 더 이상 세상을 바꾸는 이데올로기적인 도구로 서의 기능을 상실한 시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드라마는 처음부터 세상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도구는 아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여러분 중 드라마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은 분 이 있다면 그 생각을 좀 바꾸시기 바란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를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고취시키고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체제 유지의 도구로 활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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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한계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는 그 태생이 엔터 테인먼트적인 발상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에디슨이 자신이 만든 활동 사진 기계를 핍쇼 머신(Peep show machine)이라고 명명한 데서 그 단 서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는 있을망정 세상 을 바꾸지는 못한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면 다큐멘터리나 보도 쪽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드라마는 세상을 바꾸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는 아니지만 드라마를 보는 개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변화시켜 긍정 에너지와 삶의 활력을 제공하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 고 있는 이 세상이 그래도 살 만한 곳이고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면 드라마는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 히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본다. 바로 이런 점이 드라마에 ‘감동’이 필요한 이유다. 드라마를 통해 뭔가를 느끼게 하고 그 결과로 보는 이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려면 ‘감동’이 있어야 한다. 사실 감동이 없다면 일찌감치 좋은 드라마의 반열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버려야 할 만큼 감 동은 드라마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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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는 마약, 그 끝은 도타바타 물론 드라마는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미만 추구하다 보면 드라마는 스스로 자멸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종국에는 드라마로서 존 재 이유를 상실하고 만다. 재미라는 것은 마약이나 항생제 같아서 약효 를 유지하려면 자꾸 단위수를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반복 되는 자극에는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관객이 드라마를 통해서 느끼는 재미는 내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 보면 둔감해지고 더 이상 재미를 못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꾸 더 재미있는 것, 더 강력한 것을 계속 찾게 되고 그래서 드라마는 끊임없이 보다 더 재미있 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곧 외면당하게 된다. 그래서 재미만을 추구하는 드라마가 막판에 가는 곳이 ‘도타바타’ 다. 도타바타(どたばた)란 일본말인데 직역하면 ‘쿵쾅쿵쾅, 우당탕탕’ 이런 뜻이다. 코미디에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 관객을 웃기는 막 장 코미디를 말하는 것으로 영어의 슬랩스틱(slapstick)에 해당된다. 매 회 독한 대사를 날리고, 걸핏하면 따귀를 올려붙이고, 뭔가가 깨지고 부서지지 않으면 엔딩을 잡을 수 없는 정도가 되면 드라마는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결국 저질 드라마로 낙인찍히며 시장에서 퇴출되게 된다. 재미만 추구하다가는 이렇게 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재 미와 더불어 감동이 필요한 것이다. 재미와 감동, 이 두 가지만 갖추어 도 일단 좋은 드라마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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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네 가지 요소 그런데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우리는 드라마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마주 치게 된다. 무엇이 관객을 감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솔직히 관객을 감동시키고 싶지 않은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문제일 따름이다. 사실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감동을 주는 일이다. 감동이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는 지금 좋은 드라마란 무엇이냐를 논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 게든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솔직함

≪동아일보≫에 ‘부자아빠 만들기’라는 칼럼을 오랫동안 써 온 ‘세이노 (sayno)’라는 필명의 재테크 전문가는 그의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보통 유능한 세일즈맨에 대해 그릇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 다. 영업 분야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가 알 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이노의 주장에 따르면 유능한 세일즈맨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 며 성실한 사람이며, 세일즈맨에게는 솔직함이 고객을 감동시키는 최 대의 무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삶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솔직함이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작가 송지나는 ‘극작의 세계에서 솔직함이야말로 최대의 권모술수’ 라고 주장했다. 권모술수란 ‘목적 달성을 위하여 동원되는 온갖 수단과 방법’이며 내 의도대로 일을 끌고 가기 위해 상대를 조종하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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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태도를 변화시켜 내 의도대로 행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솔직해 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드라마에서 솔직함이란 것은 한마디로 겉멋 으로 인간을 포장하지 않고, 스토리를 위해서 인간을 조작하지 않는 것 이다. 드라마가 겉멋으로 인간을 포장할 때 관객은 외면한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솔직해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 는 일이다. 김운경 작가는 사석에서 “작가가 자기가 쓴 글을 타인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팬티를 내리는 일이다”라고 주장 했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 사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 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내 영혼이 들키는 일이기도 하다. 감독 또한 마찬 가지다. 내가 만든 작품을 시청자라는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한다는 것 은 정말 식은땀 나는 일이고 김운경 작가의 말대로 ‘광화문 네거리에서 팬티 내리는 일’이다. 그 정도 각오로 솔직하게 작품을 만들어야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다. 작가의 정신세계를 관객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이야말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최대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인류 보편의 가치

두 번째로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들 수 있겠다. 보편의 가치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고정불변의 가치를 말한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또는 문화에 따라서 달라지는 가치는 보편의 가치라고 볼 수 없 다. 현대에 살든 과거에 살았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소중하 다고 생각해 온 가치,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사람들이나 뉴욕 한복판에 사는 문명인들이나 인간이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이나 정서 등을 인류 보편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제 시되는 인류의 보편적인 생각이나 감정, 주의, 주장, 사상 등은 관객에 게 감동을 준다. 대표적인 인류 보편의 가치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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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정의의 승리

나쁜 사람은 벌을 주고 좋은 사람은 상을 준다. 이것이 정의다. 특히 한 국인들은 정의감이 대단히 강하다. 나쁜 놈이 잘 되면 그 꼴을 못 본다. 나쁜 놈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하고 좋은 사람은 잘 돼서 해피엔딩 으로 끝나야 한다. 인류 보편의 가치인 정의의 승리를 작품의 주제로 내세울 때 작가들이 쓰는 전략은 대개 이렇다.

① 착한 사람을 죽도록 고생시킨다. ② 불의가 거의 세상을 집어삼킬 것같이 득세하고 그 힘에 짓눌려 서 정의는 거의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③ 관객은 분노한다. ④ 그 분노의 감정이 거의 막바지까지 지속되도록 고삐를 단단히 쥐고 관객을 끌고 간다. ⑤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의 승리를 갈망하게 한다. “저 나쁜 놈을 벌 주고 착한 주인공을 잘 되게 해라!” 이런 강렬한 갈망을 갖게 한다. ⑥ 마지막 순간에 그 갈망을 해소시켜 주고 드라마를 끝낸다.

정의가 승리하고 불의가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 그 속 시원함 속에 인류 보편의 가치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고지순한 사랑

드라마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케이트 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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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Kate Winslet)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얼음조각을 버리고 차가운 바 다 속으로 사라져가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란 조건이 붙지 않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나 붓다가 보여 준 인류에 대한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의 대표 격이다. 드라마에 묘사되는 ‘조건이 붙지 않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객을 감동으로 이끄는 것은 그것이 인류 보편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열정

불가능에 도전해 인간승리를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근래에 들어 한국 영화 중에 ‘삶에 대한 열정’을 주제로 내세우는 작품이 많아졌다. <슈퍼스타 감사용>, <우리 생애 최고의 순 간>, <킹콩을 들다>, <국가대표>, <퍼펙트게임> 같은 영화가 그렇다. 역경을 딛고 인간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동 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공통의 정서다.

이타적인 자기희생

어려움에 처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내 삶을 던지는 사람들의 이 야기는 우리를 감동으로 이끈다. 인도 여행의 첫 관문인 캘커타공항에 내리면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들러보는 곳이 테레사 수녀가 설립한 ‘죽 음을 기다리는 집’이다. 인도 각지에서 모여든 떠돌이 노인들을 수용해 죽는 순간까지 보살펴주는 행려병자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내무반 막사 같이 길게 만든 침상에서 담요 한 장씩 뒤집어 쓴 노인들이 퀭한 눈빛으 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꽤 충격적이다. 평생을 노인 행려병자 들의 안락한 죽음을 위해 삶을 바친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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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준다. 스필버그 감독 작품인 <쉰들러 리스트>는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에 서 가스실에 붙들려가서 죽을 운명에 처한 유태인을 1100명이나 구해 낸 쉰들러라는 독일인의 이야기다. 간첩 누명을 써가면서까지 유태인 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려 애쓰는 쉰들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감 동을 느끼게 된다. 스필버그는 아카데미하고는 인연이 별로 없는 감독 이지만 이 작품으로 제 66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편집상 7개 부문을 휩쓸었다. <타이타닉>은 재난영화이지만 사이사이에 감동적인 장면이 많다. ‘배와 함께 죽겠다’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선장, 제한된 구명보트 에 노약자, 아녀자, 어린아이들을 먼저 태우는 남자들의 모습, 죽음의 순간에도 승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 연주자들의 모습…. 이런 이타적인 희생들을 보면서 관객은 감동 을 느끼게 된다. 굳이 문화와 종교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이런 이타적 인 자기희생을 보며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인류 보편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공감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세 번째 요소는 ‘공감’이다. 공감이란 대상과 내 가 심리적 동일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비련의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우 리는 주인공이 느끼는 가슴 아픈 사랑의 통증을 같이 느낀다. 사랑하지 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두 남녀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내가 이별하는 것처럼 가슴이 뻐근해져 온다. 이것이 공감이다. 시대물을 보 면서 ‘맞아, 저땐 저랬었지’ 한다든가, 젊었을 때 시집살이 혹독하게 경 험한 여자가 구박받는 며느리를 보면서 ‘그래, 그 심정 내가 알지.’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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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대상이 느끼는 감정을 나도 함께 느끼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은 그 대상이 꼭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주만물 삼라만상 이 드라마의 공감 대상이다. 중년 남자들은 가을에 낙엽이 지는 모습을 보면 가슴에 찬바람이 분다. 여자들이 봄을 타듯 중년 남자들이 가을을 타는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에도 이제 겨울이 다 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낙엽과 공감하는 것이다. 관객이 드라마를 보 면서 공감을 한다는 것은 곧 감동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눈물

한국에서 감독을 하려면 남을 웃길 줄도 알아야 되지만 또 울릴 줄도 알 아야 한다. 앞 장에서도 얘기했지만 웃음은 슬픔을 증폭시킨다. 먼저 웃겨 놓으면 그다음에 제시되는 슬픔은 몇 배로 증폭된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좋은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앞부분에 웃음부터 시작한다. 웃 음으로 인해 증폭된 슬픔이 감동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웃겨놓고 나중에 제대로 울리겠다는 계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드라마에 눈물과 웃음을 골고루 배치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웃음은 재미를 주고, 눈물은 감동을 준다. 눈물과 웃음을 잘 버무릴 줄 안다면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고, 좋은 드라마 작가, 명감독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가 세상을 바꾸는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될 수는 없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삶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일으켜, ‘우리 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그래도 살 만한 곳이고,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가 치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데는 대단히 유용한 도구가 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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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이다. 그 희망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가슴에 전해지고 사람들이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느끼게 될 때, 드라마를 쓴 작가나 만든 감독도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은 작가나 감 독에게도 일종의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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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

지금은 없어졌지만 KBS에서 내부결재용으로 쓰는 약식 프로그램제안 서 양식에는 MBC나 SBS와는 다른 독특한 항목 하나가 더 있었다. ‘덕 목’이라는 항목인데 이 프로그램이 어떤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가를 묻는 항목이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보니 KBS는 특히 도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방송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의 시청자도 대단히 도덕적이다. 나쁜 놈이 잘되는 것을 보면 난리가 난다. 그만큼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도 덕적인 잣대는 엄격하다. 한국의 시청자는 해피엔딩 못지않게 권선징 악을 요구한다. 우리나라 드라마 작가들 사이엔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불문율이 있다. 바로 해피엔딩과 권선징악이다. 착한 사람은 반드 시 상을 주고 나쁜 놈은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으로 현대인들의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에 찬물 을 끼얹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그의 저 서 󰡔만들어진 신󰡕에서 도덕이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 역사의 결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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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했다. 많은 진화생물학자들은 ‘도덕이란 한 집단의 생존과 재생산 을 가능하게 했던 본능과 직관이 하나의 규칙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말 한다. 정리하자면 도덕이란 구성원 대다수의 이익에 부합하고, 그 사회 가 유지, 발전, 확대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 규범이 오랜 기간 동 안 후대에 전파되면서 하나의 가치체계로 굳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전파는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물이나 공기, 햇빛처럼 국민 공유의 자산이다. 방송사는 그런 공유 자산을 잠시 임대 받아서 공공사업을 하는 공공기관이다. 당연히 방송은 국민 대다수의 이익이라는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우리 사회의 유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이처럼 구성원 대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는 점에서 도덕성은 방송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윤리이기도 하다.

왜 관객은 도덕을 요구하는가? 영국의 심리학자 콜린 머레이 파크스(Colin Murray Parkes)는 우리의 현실 세계를 제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근본적인 심리적 원리를 ‘가정적 세계’라고 불렀다. 이 세계는 항상 선하고 유의미하며, 이 세계에서 나는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우리의 심리적 평정은 이러한 규범적 믿음 을 원천적으로 전제한다. 이런 믿음이 교란될 때, 가정적 세계가 상실되 어 우리는 마치 삶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트라우마 상태에 빠진다고 한 다(Jeffrey Kauffman 편, Loss of the Assumptive World, Routledge, 2002).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희망의 원리󰡕 (MIT Press, 1986)에서 ‘인간은 항상 현재보다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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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피아적 충동을 지닌다’고 했다. 인간은 현실을 미흡하게 느끼며 좀 더 완벽한 상태를 희망 또는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문화, 종교 등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스토리텔링은 궁극적으로 권선징악 또는 도덕성을 추구하도록 수용자들로부터 요구받는데 그 이유는 위에 서 설명한 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도덕률이 존재하 며 항상 인과응보적인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가지 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가정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다. 현실은 늘 불공평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정의와 도덕률이 항상 작동하는 이상적인 상태의 세상, 즉 유토피아적인 상태 를 무의식적으로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청자가 드라마를 향해 정의롭기를, 도덕적인 결말을 내리기를 요구하는 이유다.

무엇이 드라마를 도덕적으로 만드는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은 이 세상이 이상적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믿고 싶어 하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불의에 대한 응징과 정의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다. 이 세상이 그런 인과응보적인 원리에 의해 유지 되기를 바라는 다수 대중의 무의식적 갈망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며 이는 드라마 작가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 관객의 이러 한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며 그 결과로 차디찬 방관, 혹은 냉소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드라마는 이 세상에 높은 수준의 도덕적 원리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어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덕성을 추구하는 성향은 인종과 지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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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덕성의 극치는 ‘악한의 구원’이 다. 나쁜 놈마저도 미워만 할 수 없는, 나름대로 이유와 사연을 가진 자 로 묘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도덕성의 수준을 높은 경지까지 이끌어 내는 드라마가 있다면 좋은 드라마가 틀림없을 것이다. 나쁜 놈을 혼내 주는 것도 좋지만, 나쁜 놈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금상첨화 다. 악한마저도 구원하는 도덕성, 그것은 좋은 드라마의 여러 가지 특 징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매국노의 구원

필자가 아주 어릴 때 본 드라마 중에 <34인>이라는 작품이 있다. 삼일 절 특집드라마였는데 왜 제목이 <34인>인지 궁금해서 끝까지 보았던 기억이 난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지도자는 33명인데 사실은 한 명 더 있다는 것이 그 드라마의 모티브였다. 그 또 한 명은 바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한국인 순사다. 이 순사는 일제에 앞장서서 동포를 괴롭히던 대표적인 매국노였는데 어느 순간, 어떤 계기에 의해 한국인 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독립선언문 에 서명하기 위해 민족지도자 33명이 태화관에 모인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도 이를 모른 척한다. 그래서 삼일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괴롭히던 그 나쁜 순사 를 민족 지도자 33인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오명의 지옥으로 부터 구원해 낸다.

살인자의 구원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는 주인공이 모차르트지만 이 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는 살리에르다. 그는 모차르트 생존 당시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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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악장을 지냈던 사람인데 나름 대단한 음악가였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는데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음악세 계를 보면서 인간적인 고뇌에 빠지게 된다.

“왜 신은 나에게 천재를 알아보는 재능밖에 주지 않았는가?”

결국 살리에르는 천재를 알아보는 평범한 재능밖에 주지 않은 그 의 신을 배신한다. 그리고 스스로 ‘모든 평범한 자들의 신이 되리라’고 다짐하며 벽에 걸린 나무십자가를 떼어 내 벽난로에 던져 태워 버린다. 모차르트가 경제적으로 굉장히 궁핍해져 있을 때 살리에르는 자기 신분을 숨긴 채 <레퀴엠>을 의뢰한다. <레퀴엠>이란 진혼곡인데 우리 나라로 치면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연주하는 장송곡이다. 퇴폐적인 생활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모차르트는 여러 가지 악조건 속 에서 자신의 건강을 해쳐가며 진혼곡을 작곡한다. 진혼곡을 다 만든 모 차르트는 결국 과로와 질병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죽게 된다. 직 접살인은 아니지만 결국 모차르트를 죽게 만든 건 살리에르였던 것이 다. 밀로스 포먼 감독은 살리에르 입장에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인간적인 고민과 번뇌,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열등의식 등을 디테 일하게 보여 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살리에르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게 하여 살인자 살리에르를 영화를 통해서 구원해 낸다. 천재를 알아보는 재능밖에 없었던 한 평범한 예술가의 인간적인 고뇌를 보면 서 관객은 살리에르를 이해하게 되고 마지막 순간 그를 용서하게 된다. 이것이 지옥에 있던 살리에르를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순간이다. 이것 이 ‘악한의 구원’이고,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도덕성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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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캐릭터란 무엇인가? 캐릭터란 등장인물을 통해 드러난 독특한 개성이나 사고방식, 태도, 행 동 등의 지배적인 특성을 말한다. 갈등이 드라마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 라면 캐릭터는 드라마를 끌고 가는 엔진에 해당된다. 이야기를 목표지 점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게 하는 힘은 캐릭터에서 나온다. 앞서 제9 장에서 언급했듯이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은 기획 단계 에서 설정된다. 등장인물 소개는 자기소개서, 건강진단서, 은행대출신 청서 등을 작성하듯이 각 항목들에 대해 세세하게 묘사해 주어야 하고 이렇게 일단 설정된 캐릭터는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스토리 전개상 필요하다고 인물의 캐릭터를 이리저리 바꾸는 것은 사건을 위해 인간을 조작하는 것으로 드라마의 주제를 흐리게 하고 일 관성과 개연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야기 도중 캐릭터가 바뀌려면 그에 합당한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일대 사건을 겪거나,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의 예기치 않은 죽음, 또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겪은 후 등장인물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 게 된다면 이는 시청자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납득할 만한 계기 없 이 인물의 캐릭터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극작 과정에서의 중대한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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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해당된다.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인물에게 부여된 캐릭터가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변경되면 안 되는 이유는 인간의 성격 자체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 문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 트를 탈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 내라는 지시를 받은 모세는 무려 400여 년 동안 이집트 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한다. 이 대 탈주극(Exodus)은 마지막 부분이 꽤 흥미진진하다. 바다가 갈라져 탈주로가 열린 덕에 무사히 홍해를 건넌 모세 일행은 마지막에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사막에서 무려 40년간의 유랑생활을 한다. 약속 의 땅이란 지금도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말 하는 것인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광야에서 40년 간 기다리며 유랑생활을 했다는 것은 드라마를 공부하는 우리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오랜 노예생활로 노예근성이 몸에 밴 사람들로 는 하나님의 계시를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세의 입장에서 는 노예세대들이 다 죽고 애당초 사막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 다음 세 대가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예를 자 유인으로 만드는 것은 자유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이 것이 40년간 계속된 이스라엘 민족의 사막에서의 유랑생활을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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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고정변수라 할 수 있다. ‘성 격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의 캐릭터는 삶 전 체를 지배하는 고정변수다. ‘인간의 성격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는 사실은 인간이 겪는 최대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드라마 작가에 게 있어서는 사막에서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은 계시만큼이나 희소식이다. 변하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는 이야기의 일관성과 정 해진 목표방향으로의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활용 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 떠다니는 귀신 허깨비 SBS 사장을 역임하고 동아종편을 출범시킨 안국정 씨는 여의도 방송가 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이 분은 다큐PD 출신 으로 지상파방송사의 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분이 SBS에 사장으로 취임할 때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요즘 SBS 드라마엔 귀신 허깨비만 둥둥 떠다닙니다. 나는 앞으로 사 장으로서 우리 SBS 드라마에 둥둥 떠다니는 귀신 허깨비를 잡으러 다 니겠습니다.”

드라마에 귀신 허깨비가 둥둥 떠다닌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살아 있는 사람, 사람 같은 사람,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안 보이고, 스토리 운반을 위해 조작된 인간들만 우글거린다는 뜻이다. 그걸 귀신 허깨비 라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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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방송3사에서 신인작가들을 대상으로 극본 공모를 하는데 응 모작 중 상당수가 위의 안국정 사장이 지적한 것처럼 귀신 허깨비만 둥 둥 떠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토리 운반을 위해 캐릭터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인간이 스토리에 함몰되었다’고 한다. 사건 운반을 위해 그때그때 캐릭터를 바꾸기 때문에 인간이 박제되고, 밀랍 인형 같은 죽은 인물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첫 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는 인천공항이다. 비행기가 공항 에 착륙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트랩이 열리고 초로의 중년 남자가 감 회 어린 표정으로 공항에 내린다. 20년 만의 귀국이다. 귀국의 이유는 첫사랑의 여인을 못 잊어서다. 직업은 화가나 시인, 교수, 또는 노벨상 을 받은 천재 과학자 등이다. 두 번째 신은 영종대교를 건너는 차 안이 다. 거기서 깊은 회상에 잠기면서 20년 전 그녀와 처음 만났던 어느 따 뜻한 봄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센티멘털리즘으로 뒤범벅된 멜로드라 마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자는 당연히 시집 안 가고 아직 처녀로 있다. 아직도 그 남자를 못 잊어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이다. 직업은 디자이너, 잡지사 기자, 라디오 PD,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등이다. 상당히 많은 작품들이 이런 식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인천공 항에 착륙하는 비행기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심사할 때 첫 신이 인천공 항이면 일단 기대를 접고 건성건성 읽게 된다. 이런 소녀 취향의 멜로 드라마들은 대부분 스토리를 위해 인간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사람 냄 새 나는 인간, 캐릭터가 살아 있는 인간이 사건 전개를 통해 드러나는 게 아니라 스토리 진행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 조작된 인간, 귀신 허깨 비 같은 인간들이 우글우글한 드라마를 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인물이 스토리 운반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려서야 어떻게 좋은 드라마가 될 수 있겠는가? 동서고금을 통해 좋은 드라마라고 불리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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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인물이 화면에서 곧 뛰쳐나올 것처럼 캐릭터 가 살아 있다. 인간이 살아 숨 쉬는 드라마. 이것이 좋은 드라마의 조건 이다.

인물에 집중해야 한다 드라마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겪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겪고 있는 인 간’이다. 시청자의 주된 관심도 어디까지나 인간에 집중된다. 관객은 사 건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인간을 따라간다. 그것은 드라마의 본질이 인 간을 탐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감독이나 작가가 그려내는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 어떤 캐릭터의 인간이냐? 이것이 일차적인 관심사다. 텔레비전드라마는 영화보다 훨씬 더 인물묘사에 집중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텔레비전이 영화보다 몰입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영 화는 본편 시작되면 실내등을 다 꺼 버린다. 관객은 깜깜한 극장 안에 서 엄청나게 큰 화면에 압도된다. 중간에 나가기도 힘들고 다른 짓을 할 수도 없다. 두 시간 동안 꼼짝없이 스크린을 보고 있어야 한다. 거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쿨쿨 잠드는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다 르다. 집에서 텔레비전드라마를 볼 때 전등을 끄고 보지는 않는다. 또 집중해서 보는 게 아니라 전화도 받고, 설거지도 하고, 가족들과 이야 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본다. 게다가 영화에 비하면 화면이 상대적으로 너무나 작다. 화면의 크기가 작으니 몰입도 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드라마는 스펙터클이나 액션, 베드신 등이 호소력이 별로 없다. 오로지 스토리텔링이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힘을 발휘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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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릴 것은 캐릭터밖에 없다.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그래도 좀 관심 있게 보게 된다. 둘째로 영화는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극장에 가야 볼 수 있는데 반 해 텔레비전은 집에서 공짜로 본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광고를 보 는 대가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물론 시청료를 내지만 시청료는 KBS를 보든 안 보든 내야 한다. 공영방송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령 으로 정해진 규정에 따라 준조세의 형태로 국민들에게 징수하는 돈이 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KBS를 안 보니까 시청료 못 내겠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어쨌든 텔레비전은 돈을 안 내고 보는 데다 필요 하면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다. 게다가 화면이 작아서 스펙터클한 영 상도 별로 효과가 없고, 액션이나 베드신도 한계가 있다. 결국 인간이 다. 텔레비전은 인물의 캐릭터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종종 캐릭터보다는 사건 위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인 물 보다는 스펙터클한 영상, 액션, 베드신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당기기도 한다. 그것은 돈 내고 보는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서비 스 같은 것이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극장까지 왔는데 텔레비전을 보면 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을 줘야 할 것 아닌가?

스케일보다는 디테일로 승부해야 텔레비전은 가족이 가정 내에서 즐기는, 국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착되 어 있는 매체다. 따라서 하드한 것보다는 소프트한 것, 사람을 긴장시 키는 것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한 것 등 보다 더 가정적인 정서를 반영하 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결국 텔레비전은 스케일보다는 디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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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는 매체다. 텔레비전 시청자는 박진감 있는 사 건보다는 디테일한 스토리텔링을 더 원한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끌 고 가는 것은 역시 인물의 캐릭터다. 드라마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다. 캐릭터를 일단 선명하게 구축하 고 나면 드라마는 스스로 굴러간다. 개성 있는 캐릭터가 드라마를 끌고 가는 중요한 에너지원이자 동력이 되는 것이다.

영상이 그림엽서 같다? 캐릭터 구축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영상미만 추구하는 작품은 관객에게 외면당하기 쉽다. 사실 감독에게 ‘영상이 그림엽서 같다’는 표현은 칭찬 이 아니다. 오히려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구축은 등한히 하고 예쁜 그림 만 찍으러 다녔다’는 비난의 의미일 수도 있다. 젊은 여성에게 ‘인형 같 은 여자’라고 하면 칭찬일 수도 있지만 또 뒤집어서 보면 ‘얼굴은 예쁜 데 머리에 든 게 없다’는 냉소적 표현일 수 있듯이 감독에게 영상이 그 림엽서 같다는 말은 ‘그림은 예쁜데 인간이 안 보인다’, ‘캐릭터가 죽어 있다’는 뜻이다. 캐릭터가 죽어 있는 영화는 관객이 좀 들었다 하더라도 텔레비전 에서 방영하면 시청률이 잘 안 나온다. 영화의 컷 컷은 그야말로 그림 엽서같이 예쁜데,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스토리 운반을 위해 조작 된 밀랍인형 같은 인간이라면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 텔레비 전 시청자는 영상미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텔레 비전라는 매체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다. 텔레비전드라마가 영상보다는 스토리텔링, 사건보다는 인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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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물에 집중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캐릭터에 소홀할 때 관객은 싸늘하게 외면한다. 좋은 드라마는 캐릭터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극 초반에 캐릭터 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는다. 먼저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 캐릭터가 드 라마를 끌고 가는 동력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캐릭터가 살아 있는 가?’ 이것이 좋은 드라마의 다섯 번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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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티

휴머니티란 무엇인가? 스필버그의 영화 <A.I.>는 인간의 감정을 가진 로봇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가 없는 가정의 입양아 역할을 하기 위해 인간을 사랑하게끔 프로 그래밍된 최초의 로봇소년 데이빗은 냉동된 친아들이 혼수상태에서 깨 어나면서 쓸모없어져 폐기처분된다. 인간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인간에 의해 버림받은 꼬마로봇 데이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끝없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해나간다. 이 영화 를 보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휴머니티의 허구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 게 된다. 휴머니티란 무엇이며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인간은 온갖 애정을 쏟으며 기르던 애완동물도 병들어 쓸모없어지면 고속도로 한복 판에 내다 버리는 존재다. 한반도의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 더 우울해진 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죽 였는가?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세상은 가짜임이 밝혀진 지금도 우리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로 서로를 헐뜯으며 증오하고 있다. 만일 인간에게 휴머니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드라마 작가는 주인공의 행적을 통해 그가 스스로 인간다움을 증명해 보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어떤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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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신뢰를 끝까지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상은 살 만한 곳이고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드라마 작가가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궁극의 가치, 즉 휴머니티라 할 수 있겠다.

유머와 휴머니티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을 ‘관점획득(perspective taking)’ 능력이라고 한다. 관점획득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말귀를 못 알아 들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으며 유머감각이 없다.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이 있어야 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남을 웃길 수 있다. 그것이 유머 와 휴머니티를 한데 묶어 주는 작동원리다. 유머를 잘 구사하려면 관점 획득 능력이 있어야 한다.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타인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을 객관 적으로 바라볼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일은 자 기합리화나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해 주기 때문에 인격 수양에도 도움이 된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휴머니스트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목이며 유머와 휴머니티는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유머가 뛰어난 사람은 남의 마음을 잘 읽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기 분과 감정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어야 상대방의 예 상을 뛰어넘는 유머를 던질 수 있다. 유머와 휴머니티는 한 가지에서 뻗어 나온 잎사귀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휴머니티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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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남을 웃기지 못한다. 우리가 명작이라고 부르는 좋은 작품들은 풍부한 유머로 관객을 웃기고 마지막에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한다.

안방극장에 가장 적합한 정서 텔레비전 안방극장이라고 한다. 안방이란 온가족이 지친 하루를 끝내 고 돌아와 둘러앉아서 맛있는 것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따뜻한 공간이다. 시청자는 드라마를 통해서 그런 따뜻함, 그런 온기를 전달받기 원한다. 드라마가 따뜻하다는 것은 곧 휴머니티가 살 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인간에 대한 희망 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태도가 휴머니티일 것이다. 휴머니티가 살아 숨 쉬는 따뜻한 드라마라면 좋은 드라마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교양, 다큐, 예능프로 중에서도 따뜻함 을 콘셉트로 내세워 성공한 프로그램들이 꽤 있다. <세상에 이런 일 이>, <TV동물농장>같은 프로그램이 그런 따뜻함을 무기로 성공한 프 로그램이다. 올가미에 걸린 채 살아가는 버려진 개를 치료해 주는 사람 들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공감과 감동을 느낀다. 자기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말 못하는 짐승에게 못할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동물을 데려다가 치료해서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아름다운 마음씨 의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말 할 수 없이 따뜻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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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은 신기루 같은 것 사실 시청률이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잡으려고 쫓아가면 갈 수록 그만큼 멀어져 간다. 차라리 시청률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드라마를 만들다 보면 저절로 따 라오는 것이 시청률이라고 생각한다. 돈도 마찬가지 아닐까? 돈만 죽어 라 따라가면 돈은 오히려 달아난다. 돈은 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 심히 하다 보면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는 것이 돈이다. 온갖 흥행코드를 삽입한다고 시청률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묵묵히 좋은 드라마를 만 드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다 보면 시청률은 스스로 알아서 올라가 준다 는 것이 내 경험에서 얻은 결론이다. 설령 시청률이 따라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따뜻하고 휴머니티가 살 아 숨 쉬는 좋은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은 드라마 감독으로서 큰 보람이다. 저조한 시청률로 국장실에 불려가 야단을 맞더라도 돌아 나 오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는 자기만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률 높은 드라마보다는 따스하 고 온기가 있는 드라마, 휴머니티가 살아 숨 쉬는 진솔한 드라마를 만드 는 것은 감독으로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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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조연

조연의 조건 조연이란 ‘주역을 도와 극을 전개해 나가는 역할 또는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을 말한다. 배역의 중요도가 크지는 않으나 스토리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단역이나 게스트(Guest)와는 다르다. 주인 공은 늘 젊고 건강하고 아름답다. 시청자들이 자신과 동일시할 만한 매 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연은 잘 생길 필요도 없 고 풋풋한 젊음을 과시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연기력으로 승부해야 한 다는 점에서 조연의 역할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좋은 드라마에는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뛰어난 연기력과 개성을 가지고 주인공을 받쳐주 는 조연배우들이 포진해 있다. 성공하는 드라마가 되려면 이들의 존재 는 꼭 필요하다. 빛나는 조연은 좋은 드라마의 7번째 조건이다. 요즘은 연기자들의 예능프로그램 진출이 보편화되어 명품 조연이 오히려 대접받는 세상이다. 주인공은 촬영기간 내내 현장에서 살아야 하고 엄청난 대사량을 소화해야 하는 반면 조연은 치고 빠지는 존재라 서 일정상 겹치기 출연도 가능하고 여기저기 얼굴을 나타내도 시청자 들이 별로 식상해 하지도 않는다. 개성 있는 외모와 튀는 이미지로 광 고모델로 픽업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따라서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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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잘생긴 주인공을 부러워할 필요 없이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조연 배우로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스릴러영화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는 걸로 유명하지만 그야말로 깜짝 출연 정도이고 엑스 트라 이상의 역할을 욕심내지는 않는다. 관객에 대한 팬 서비스 차원이 기도 하고 제작비 절감 차원이기도 하리라.

잘 키운 조연 하나 열 주연 안 부럽다 텔레비전연속극의 경우 조연이 시청자의 인기를 얻으면 조연의 지위를 버리고 스토리의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이런 조연이 세 명만 있다면 대단히 안정적으로 드라마를 끌고 갈 수 있다. 아무리 스토리가 탄탄하 고 스타급 주인공이 버티고 있더라도 조연이 부실하거나 제 역할을 못 한다면 드라마가 힘을 받기는 어렵다. 그래서 드라마감독들 사이에는 ‘잘 키운 조연 하나 열 주연 안 부럽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조연의 개성은 캐스팅 단계에서 작가와 감독, 연기자가 치밀하게 계획해야 하지만 때로는 전혀 예기치 않게 조연배우의 개성이 만들어 지기도 한다. 여러 명의 조연이 함께 출연하는 경우 서로의 역할 분담 도 필요하다. 무식하고 저돌적인 캐릭터가 있다면 잔머리 굴리는 약삭 빠른 캐릭터도 필요하다. 여기에 너무 순진해서 멍청해 보이는 캐릭터 까지 합세하면 환상의 조연 군단이 구축되는 것이다.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에서 대단히 웃기는 조연을 산마이메(三枚 目)이라 한다. 가부키 공연을 할 때 무대 위 한쪽에 출연배우의 이름을

적어 게시하는데 여자에는 별 관심이 없고 충성심과 의리로 똘똘 뭉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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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인 성격의 주인공 이름을 첫 장에 쓰고 여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꽃미남 배우 이름을 두 번째 페이지에 쓴다. 세 번째 장에는 웃기 는 캐릭터로 극의 감초역할을 하는 배우의 이름을 적어 두는데 요즘도 그런 관행에 따라 일본에서 니마이메(二枚目)라 하면 잘 생긴 사람, 산 마이메(三枚目)라 하면 엉뚱한 언행으로 주위 사람을 웃기는 사람을 지칭한다. 산마이메 배우는 조연이지만 뛰어난 연기력과 개성으로 관 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비장의 히든카드 SBS <모래시계>의 주인공은 고현정, 최민수, 박상원이지만 또 한 명의 빛나는 스타가 있다. 바로 이정재다. 이정재는 이 드라마로 빅 스타가 되었다. 이정재는 작가와 감독이 쥐고 있던 히든카드였던 것이다. 히든카드란 이를테면 빛나는 조연을 말한다. 드라마가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주인공이 힘을 못 쓸 경우에 구원투수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조연배우다. 굳이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이 끌고 가는 스 토리에 재미와 감칠맛을 더해 주는 존재가 바로 조연이다. 필자가 연출 했던 드라마 <은실이>는 원미경, 이경영, 김원희 등이 주인공이었지만 성동일이나 정웅인 등 숨어 있는 조연배우들이 시청률의 견인차 역할 을 한 것도 사실이다. 성동일은 ‘빨간 양말’이라는 별명으로 세상에 알 려지면서 10년 무명배우의 설움을 벗었고 정웅인은 첫 텔레비전출연이 었지만 이 드라마를 계기로 주연급 배우로 성장했다. 감독이라면 누구나 이런 비장의 히든카드 한두 장쯤은 쥐고 시작 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히든카드가 없으면 왠지 불안하다. 잘된 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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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수록 주인공 뒤에 조연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명작일수록 ‘빛나는 조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맺는 말 지금까지 프리프로덕션의 작업내용 중 극본과 관련해서 좋은 드라마의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 일곱 가지를 다 갖춘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작품은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다. 만일 누군가 가 나에게 이 중 꼭 필요한 것 두 가지만 꼽으라면 나는 웃음과 감동을 꼽겠다. 웃음은 재미를 주고, 감동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삶 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킨다. 최소한 이 두 가지만 있다면 시청률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본다. 웃음과 감동, 이 두 가지만 잘 버무려낼 수 있다면 유명작가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 고 명감독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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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감독


프리프로덕션 과정이 끝나면 프로덕션 단계로 넘어가게 된

다. 프로덕션 과정의 핵심 인력은 감독이다. 그러나 사실 감독은 제작 의 전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으로 프로듀서가 작품의 사업적 측면을 담 당한다면 감독은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적 측면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프리프로덕션 과정 중에서도 프로듀서와 작가, 배우들과 끊임없이 소 통하며 작품의 방향을 잡아야 하고 그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작업 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서도 편집감독과 음악감독, 녹음실이나 더빙실, 종편실의 엔지니어들과 작업을 하면서 작품의 마무리 과정을 조율한다. 그러므로 감독은 제작의 전 과정에서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역시 감독 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은 프로덕션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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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프리프로덕션의 마지막 단계에서 감독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기획 된 프로그램의 제작 방향을 숙지하고 주어진 예산, 인력, 장비,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대본을 영상과 사운드로 전환할 계획을 짜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의 역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프로덕션 과정의 핵심 프로덕션 과정을 제조업에 비유하자면 공장의 제품 생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제품을 생산하려면 먼저 기획하고 개발하는 부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제품에 대한 설계도를 만들고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일,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기획 파트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나면 그 프로젝트는 생 산 공장에 넘겨진다. 생산 공장에서는 공장장의 관리 감독하에 주어진 설계도 대로, 주어진 기간 내에, 주어진 예산 한도 내에서 제품을 생산 해 내는 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은 프로그램의 제작과정과 매우 흡사 해 감독은 종종 생산 공장의 공장장에 비유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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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화 작업 지휘 작가가 쓴 대본은 글(writing)로 표현된다. 그것을 소리(audio)와 그림 (video)으로 전환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감독이다. 대사, 효 과, 음악, 내레이션 등이 오디오의 영역이고 화면에 등장하는 피사체의 모든 것, CG·컬러 그레이딩·특수영상·자막 등이 비디오 영역이다. 이 모든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계획하고 수집하여 적절히 배열하는 일 을 하는 사람이 감독이다. 이처럼 대본을 영상작품으로 전환하는 작업 을 영상화(Visualization)라고 한다. 공장장이 제품 생산을 책임지고 있 다면, 감독은 영상화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적절할 것 이다.

단일 목표를 위한 작업의 통합 주도 프로덕션 단계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원된다. 촬영, 조명, 음향, 미술, 음악, 기술 등 각 분야의 전문 스태프 조직이 제작에 참여하게 된 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작업내용이 하나 의 목표를 향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감독은 스태프들 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어 주고, 자 신의 전문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하며, 또 서로 다른 전문 스태프 조직 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커뮤니케 이션을 활성화하는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감독은 예술가이자 동시에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예술적 상상력과 함께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 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분야에 능통할 수는 없지만 다방면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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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폭넓은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 직업이다. 종종 감독은 오케스트라 지 휘자에 비유되곤 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모든 악기를 다 연주할 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각 악기의 특성과 사운드, 그리고 각 악기들의 역할과 조화를 이해하고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다만 최고의 연주자를 가려내는 안목과 그들을 섭외할 능력만 있으면 지휘자로서는 충분하다 고 본다. 그런 점에서 감독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이자 제너럴리스 트(generalist)이고, 예술가이자 동시에 기술자다. 감독이 출연자나 스태프와 정확하고 빠른 의사소통을 하려면 같은 언어를 써야 한다.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의사소통은 불가능하 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정확하고 의미가 명확한 용어를 사용해서 소통 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용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프로듀서와 감독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프로듀서와 감독을 합쳐서 그냥 PD라 고 불렀지만 이제 매체도 다양해지고 제작 시스템이나 테크놀로지도 복잡해졌다. 지금은 프로듀서와 감독의 업무 영역이 점점 세분화되고 또 서로 분리되고 있다. 프로듀서가 제작을 관리한다면 감독은 작품의 질을 관리한다. 다시 말하면 프로듀서가 작품의 사업적 측면을 담당한 다면 감독은 작품의 예술적 측면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작품을 놓고 접근하는 관점이 서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가 끔 의견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이런 경우 대개 프로듀서의 의견이 관철되게 마련이다. 감독은 고용된 사람이고 프로듀서는 사용자 입장 을 대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프로듀서가 갑이라면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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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은 을이다. 을이 말을 안 들을 때 갑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대 응책은 계약 해지다. 물론 능력 있고 프로의식에 철저한 제작자는 극단 적인 방법을 취하기보다는 어쨌든 감독을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프로 듀서와 감독이 서로 호흡이 맞고 하모니가 잘 이루어질 때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연출과 프로덕션 매니저 프로듀서에게도 AP, 즉 조프로듀서가 있듯이 감독에게도 AD, 즉 조감 독이 있다. AD는 기획에서부터 최종 완성본을 주조정실에 넘기는 일까 지 제작의 전 과정에서 디렉터를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프로덕션 과정 에서 대부분의 실무적인 일은 AD가 맡아서 하고, 감독에게 검수 받고 프로듀서의 결재를 받아 집행한다. 방송사나 제작사에 PD로 입사하면 처음에 AD부터 시작한다. 과 거에는 AD가 뭐의 약자냐고 물어보면 ‘에이 더러워’의 약자라고 했다 고 한다. 그만큼 하는 일이 많고 또 일 자체가 궂은일들이다. 입사해서 한 4∼5년 이 일에 치이다 보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회사 다니기도 싫어 진다. 그래도 참고 견디는 이유는 언젠가는 내 이름을 걸고 작품을 만 들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그 날을 위해서다. 요즘은 외주제작이 대단히 활성화되어 있어 지상파 드라마의 70% 가 외주제작이다 보니 AD, 즉 조연출 업무의 상당 부분을 외주제작사 에서 가져갔다. 그래서 프로덕션 매니저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났다. 전통적으로 조감독, AD가 하던 업무를 프로덕션 매니저가 하게 된 것 이다. 아직은 감독이 프로덕션 매니저를 겸하거나 경험이 풍부한 고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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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가 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효율적인 제작 시스템을 위해서는 프로덕션 매니저가 필요한 시점이다. 프로덕션 매니저는 제작의 전 과 정을 통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하는 토털 코디네이터(Total coordinator)다. 프로덕션 매니저의 역할과 업무는 다음과 같다.

① 대본 분해 ② 촬영 스케줄 작성 ③ 예산 배분 및 집행 ④ 시설, 장비, 인력 예약 ⑤ 제작 스케줄 관리 ⑥ 예산 관리 및 정산

이런 정도의 일을 한다고 이해해 두면 되겠다. 아직까지는 조연출 (AD)이 대부분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디렉터의 길을 가고 있는 AD가 하 기는 좀 무리가 있어서 앞으로는 전문적인 프로덕션 매니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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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역할

감독은 제작의 전 과정에 걸쳐 작업의 일관성과 목표를 유지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이다. 감독은 프로듀서에 의해 선임되며 대본을 소리와 그림으로 전환하는 영상화(Visualization)작업을 책임지고 있 다. 그리고 일단 크랭크인(Crank-in)이 되면 영상화 작업에 관한 한 모 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서 감독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핵심 업무를 수행한다.

콘티 작성 콘티는 콘티뉴이티(Continuity)의 줄임말이다. 스태프나 연기자와 빠 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콘티다. 콘티는 본인만 알아볼 수 있게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써야 한 다. 그래서 스태프나 연기자가 콘티를 보고 감독이 뭘 요구하는지, 원 하는 영상이 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서 작 성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 용어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콘티작성이 완료된 대본을 텔레비전에서는 콘티대본이라 하고, 영화에 서는 촬영대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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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분해

콘티대본을 만들기 전에 먼저 선결되어야 할 일은 대본을 신별로 분해 하는 일이다. 신별 분해 작업을 지칭하는 ‘신와리’라는 일본식 용어가 아직도 현장에서 쓰이곤 하는데 이는 신(scene)이라는 영어와 ‘자르다’ 는 뜻의 일본어 와루(わろ)의 명사형 와리(わり)의 합성어다. 간혹 ‘시 너리’라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사용되곤 하는데 여기에 아무 관계도 없 는 ‘scenery’라는 영어까지 잘못 붙여서 사용하고 있다. 정확한 우리말 로는 ‘신 분할표 만들기’, 혹은 ‘신 리스트 작성하기’이다. 대본 분해의 이유와 필요성에 관해서는 13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감 독의 입장에서 분해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대본을 분해하는 데는 네 가지 큰 틀이 있다. 신별 분할, 시퀀스별 분할, 플롯으로 분할, 컷별 분할 등이다.

신 분할 →시퀀스 분할 → 플롯 분할 → 커트 분할

대개 이런 순으로 진행된다. 각 단계별 작업 내용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신 분할

신이란 “동일한 장소에서 일련의 연속되는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행동 이나 대사,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스토리의 최소단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신 분할은 각 신 별로 신 번호, 낮과 밤, 대본 페이지, 세트, 주요 출연자, 주요 내용, 소품이나 의상, 분장, 미용 등 미술적으로 필요한 것 들, 특수 장비나 시설 등 촬영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을 기록해 놓은 시 트다. 이 신 분할표는 대본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려는 목적 외에 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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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용도로 제작 현장에서 활용되기 때문에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시퀀스 분할

시퀀스(Sequence)란 “하나의 이야기(사건이나 상황)가 시작되고 마무 리되는 독립적인 스토리의 구성 단위”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건이 ‘종료’되는 데까지가 아니라 ‘마무리’되는 데까지라는 점이다. 또 다른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 기존의 사건 전개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 끝난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마무리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시퀀스는 대 개 복수의 신으로 이루어지지만 때로는 하나의 신이 하나의 시퀀스가 될 수도 있다. 시퀀스 분할은 드라마의 ‘흐름’과 관련이 있으며 연출의 리듬과 템포를 결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된다. 드라마 전체가 하나의 큰 흐름 속에 유기적으로 구성된 완결체라면 시퀀스는 구간별로 나누 어진 ‘작은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각 시퀀스에도 나름대로의 흐름이 존 재하는 것이다. 감독은 큰 흐름과 작은 흐름을 함께 보고 있어야 한다.

플롯 분할

기승전결, 또는 발단 전개 갈등 위기 절정 결말 등으로 분해를 해 보는

그림 25-1 플롯 분할 절정 위기 갈등 전개 발단

오프닝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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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엔딩 (에필로그)


것이다. 3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현대극의 일반적인 구성은 찌그러진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단위로 이야기를 분해해 보는 것을 플롯 분할이라고 한다.

컷 분할

대본을 가장 잘게 쪼개는 것이 컷 분할이다. 콘티뉴이티를 작성하는 단 계로 촬영대본 혹은 콘티대본을 만드는 과정이다. 콘티에 관해서는 29 장과 30장에서 자세히 언급하려고 한다.

분해 순서

대본 분해는 ‘신 분할 → 시퀀스 분할 → 플롯 분할 → 커트분할’의 순서 로 진행된다. 어떤 경우에도 신 분할부터 시작하고 제일 마지막에 컷을 분할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신은 드라마 구성의 최소단위이 자 이야기를 가진 작동 모듈(Module)이므로 대본 분해 작업의 중심이 된다. 모듈이란 시스템이나 제품 생산 등에서 ‘개별적인 기능이나 역할 을 가진 부품, 요소 등’을 말한다. 시스템을 부분이나 기능별로 나눈 다 음 나중에 통합하는 것이 생산이나 유지, 관리 면에서 이익이기 때문에 모듈화가 필요한 것이다. 드라마 역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최소 단위로 서 신을 나누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전체 흐름을 관리하기 용이하다. 이것이 대본 분해에서 신 분할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은 ‘개별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전체 스토리 진행 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신을 더 잘게 쪼갠 개별 컷은 스스로의 이야기 를 가지지 않는다. 건축물로 치면 컷은 벽돌이나 목재, 철근 같은 것이 다. 이런 것들이 모여 각각의 기능을 가진 지붕이나 창문, 담장 등이 되 듯이 개별 컷들이 모여 나름대로 스토리에 기여하는 신을 만들어 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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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마지막에 커트분할을 하고 이를 세부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을 콘티라고 한다.

콘티에 표현되어야 할 것들

대본 분해의 마지막 단계인 커트분할에서는 다섯 가지 정도의 요소가 표현되어야 한다.

① 화면의 사이즈(size) ② 블로킹(blocking) ③ 앵글(angle) ④ 시점(point of view) ⑤ 음악과 효과(music & effect)

사실 콘티에서 이 다섯 가지 요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커팅 포인 트, 즉 어느 지점에서 자를 것인가이다. 개별 컷의 내용은 커팅 포인트 가 정해진 다음에 결정될 것이다. 커팅 포인트는 앞서 얘기한 ‘드라마의 리듬과 템포’와 관련이 있다. 신과 시퀀스의 분할에 의해 각 장면의 흐 름을 파악하고 나면 그 흐름의 강약과 빠르기에 따라 컷의 내용뿐만 아 니라 커팅 포인트도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이 콘티를 짜기 전에 대본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화면의 사이즈

화면 사이즈(size)란 한 숏에 담긴 시계(視界)의 범위를 말한다. 감독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 화각 등 피사체를 어느 정도의 범위로 화면에 담 을 것인가를 사전에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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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킹

드라마의 영상은 연기자와 카메라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동감 있는 화면을 만들어 내고 이런 화면들이 모여 스토리의 흐름을 구현한다. 콘 티상의 이런 움직임(blocking)들은 감독에 의해 계획되고 조직되는 것 이며 이러한 감독의 계획을 디테일하게 적어놓은 것을 콘티대본이라 한다.

앵글

앵글(angle)이란 본래 카메라의 각도나 높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제작 현장에서는 구성(framing)이나 구도(composition)를 지칭하는 보 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며 카메라맨의 작업세계 전반을 일컫는다. 콘티 작업에서의 앵글은 카메라 렌즈의 높이나 헤드의 각도를 말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며 보통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앵글이 주로 구사된다.

① 부감(high angle) ② 앙각(low angle) ③ 표준각(normal angle) ④ 사각(canted angle)

시점

시점(視點, point of view)이란 카메라 렌즈가 누구의 시각을 대변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으로 ‘피사체를 보는 관점’을 지칭하는 말이다. 주로 화면 속의 배우의 관점인가, 화면 밖에서 보고 있는 관객의 관점인 가에 따라 주관적 시점과 객관적 시점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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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주관적 시점(subjective point of view) ② 객관적 시점(objective point of view)

음악과 효과

위에 열거한 사이즈, 블로킹, 앵글, 시점 등이 비디오와 관련된 것이라 면 음악과 효과(music & effect, M&E)는 오디오의 모든 것이다. 오디오 에는 대사, 음악, 현장음, 효과음, 내레이션, 마음의 소리, 전화 목소리 등이 있는데 주로 후반작업에서 가다듬고 재배치하는 일을 하게 된다. 최근 들어 고가의 텔레비전수상기가 보급됨에 따라 초고화질에 5.1채 널의 고급 사운드로 시청이 가능해짐에 따라 후반작업은 한층 복잡하 고 정교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그만큼 추가비용이 투입되게 되어 제 작비 압박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콘티 작성 예

콘티에는 스튜디오 작업을 위한 멀티 카메라 콘티와 야외 로케이션 작 업을 위한 싱글 카메라 콘티가 있다. 스튜디오 녹화는 한 대의 카메라 로 진행되는 야외촬영과는 달리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원되기 때문에 각각의 카메라 넘버까지 적어 주어야 한다. 이처럼 사이즈, 블로킹, 앵글, 시점, 음악과 효과 등을 기록해 놓은 대본을 콘티대본이라 한다. 스튜디오 콘티가 야외 콘티와 다른 점이 있 다면 카메라 넘버가 추가된다는 것이다. 콘티에 관해서는 29장에서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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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2 스튜디오 콘티 작성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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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3 야외 콘티 작성 예시

스태프 구성 감독은 창의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이지만 창작의 수단이 주로 ‘사 람’이다. 따라서 사람을 다루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각 분야의 전 문가들로 스태프를 구성하고, 이 이질적인 전문가 집단을 통합시켜 단 일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과 이 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실제로 이 일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기 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무능력해 보이면 스태프는 바로 마음을 닫는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하늘이 무너져도 눈썹하나 까 딱하지 않는 두둑한 배짱 등이 스태프들의 신뢰를 얻는 비결이다. 자신과 호흡이 맞는 스태프를 구하는 것은 감독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촬영, 조명, 음향, 편집, 음악, 미술 등 각 분야에서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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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을 가진 감독급 스태프는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늘 바쁘다. 내 작 품을 위해 시간을 비워놓고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가 부르면 하던 일 을 중단하고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 니다. 때로는 원하는 스태프와 일하기 위해 촬영일정을 미루거나 당기 는 일도 있을 정도로 스태프의 구성은 감독에게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 평소에 그들과의 인간관계를 잘 유지, 관리해 둘 필요가 있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 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스태프로부터 최선의 결과를 얻어 내려면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능력을 믿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뢰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인간 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감독은 리더이기 이전에 휴 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태프 회의 주재 어느 조직에서나 정보의 공유는 중요하다. 촬영 팀이 ‘소통하는 조직’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목표나 목적을 공유할 수 있는 스태프 회의가 유용 한 수단이다. 감독은 스태프와의 회의를 통해 자신의 연출 의도를 전하 고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촬영을 시작하 기 전에는 주로 연출팀, 프로듀서, 미술감독, 음악감독 등과 회의를 갖 지만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촬영감독, 조명감독과 거의 붙어 산다고 할 정도로 밀착해서 작업에 임해야 한다. 매일 촬영이 시작되기 전 10분간의 티타임을 갖는 것도 훌륭한 회 의다. 대단한 것을 의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촬영 현장의 소소한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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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세부 사항 등을 사전에 점검하고 일정을 공유함으로써 불필요한 시간과 예산의 낭비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태프 회의가 꼭 필요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정보 공유: 프로그램의 목표를 공유하고 제작 일정 숙지하여 작 업 효율을 높인다. ② 연출 의도 전달: 회의를 통해 연출 의도를 스태프들에게 주지시 켜 시설, 장비, 인력을 미리 준비하도록 할 수 있다. 연출 의도는 사전에 미리 전달이 되어야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다. ③ 스태프의 창의성 유도: 사실 감독은 두루두루 많이 알지만 카메 라맨보다 촬영을 잘할 수 없고 조명 감독보다 더 조명을 잘 할 수도 없다.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이 알고 모든 작업에 관여하지 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만큼 잘 알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만큼만 요구해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 내가 요 구하기 전에 먼저 스태프들이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해서 베스 트를 할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시키는 일을 이 스태프 회의를 통 해서 할 수 있다.

멋진 컷을 원하는 대로 찍고 나서 스태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 어 보이거나

“당신 최고야! 이번 작품에서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야. 우리 다음 작품도 꼭 같이 하자!”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툭 치는 순간 그는 내 사람이 된다. 내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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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처했을 때 만사 제쳐 놓고 달려와 줄 수 있는 내 인생의 최대의 조 력자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유능하고 호흡이 잘 맞는 스태프를 확보 하고 있다는 것은 감독으로서는 대단한 즐거움이다. 이처럼 스태프의 전문성을 최대한 이끌어 낼 줄 아는 감독이 유능한 감독이다. 스태프 회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아이디어와 조언을 이끌어 낼 수 있 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전문가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분출되어 나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일을 스태프 회의를 통해서 할 수 있다.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내고 그것이 내 작품에 용해될 수 있도 록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하고, 동기를 유발하는 일이 스태프회의를 통 해 이루어진다.

캐스팅 캐스팅(Casting)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본 분석이다. 감독은 대본에 표현되어 있는 각 인물의 성격이나 역할에 대해 명확하 게 분석하고 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최적의 배우를 찾아내는 일, 그 배우를 섭외하는 일도 감독으로서는 중요한 일이다. 사실 대본 분석보다 더 어려운 일이 섭외일 수도 있다. 또한 사소한 배역 하나가 드라마를 망치는 일도 종종 있으므로 조, 단역 배우의 캐스팅도 신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길고도 지루한 오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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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주로 간단한 질문과 대답, 대본 읽기, 그리고 필 요한 경우 카메라 테스트를 거치게 된다. 사람을 면접하고 테스트하는 일은 대단히 피곤하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하루 종일 사람 을 만나고 오디션을 했는데도 적합한 배우를 찾지 못하면 짜증도 난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주의해야 한다.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 이나 행동을 함부로 해서 그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고 많은 준비 를 해 왔다. 감독의 사소한 반응에도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것이다. 게 다가 나중에 그가 큰 배우가 되었을 때를 가정해 보라. 무명배우 시절 에 오디션장에서 자신에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었던 감독과 일하고 싶은 배우는 없을 것이다.

연기 지도 촬영 현장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 이다. 연기자의 연기가 좋으면 조명, 오디오, 앵글, 카메라워크 등이 다 소 나쁘더라도 그날 촬영은 성공한 것이고 연기자의 연기가 나쁘면 나 머지 작업 내용들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그날 촬영은 실패한 것이다. 따 라서 촬영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의 연기를 잘 이끌어 내는 일 이다. 다시 말하면 촬영현장에서 배우의 연기를 잘 이끌어 내고 배우가 최선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감독에게 있 어서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감독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대비책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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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현장에서 배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② 어떻게 하면 최선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 ③ 연기 지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촬영의 성패는 배우에게 달려 있다. 배우는 화면 밖에서 일하는 스 태프와는 달리 화면에 뛰어들어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이기 때문 이다. 감독이 배우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 도록 조심하고, 또 최선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은 배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다. 따라 서 배우를 잘 다루는 것은 감독의 능력 중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다. 그 리고 배우를 잘 다루는 비결은 배우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관심과 애정을 쏟고, 존중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배우를 잘 컨트롤 하는 비결이다. 캐스팅과 연기 지도에 관한 것은 31장과 33장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뤄 보려고 한다.

리허설 진행 리허설은 보통 드라이 리허설이라고 하는 대본 읽기부터 동선과 액션 을 결정하는 카메라 리허설, 그리고 모든 의상과 분장을 마치고 완성된 세트에서 촬영 직전에 하는 드레스 리허설 등이 있다.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멀티카메라 제작 방식은 훨씬 더 많은 연 습이 필요하다. 녹화와 동시에 편집이 완료되는 멀티카메라 제작은 실 수했을 경우 신 전체를 다시 녹화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뿐 아니라 편 집 과정에서 복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런 위험을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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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 각 카메라마다 별도의 VTR을 설치해 각각의 카메라에 촬영 된 신의 전 과정을 녹화하기도 한다. 야외에서 제작되는 싱글카메라 제작 방식에서 연기자는 때로 자신 이 찍고 있는 컷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작업 의 편리성 때문에 카메라나 조명이 한번 세팅되고 나면 같은 방향의 숏 은 몰아서 찍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독은 연기자에게 편 집 과정에서 이 컷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미리 알려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화면의 사이즈나 움직임 등 콘티의 내용을 알려 주어 연기자가 자신의 연기의 크기와 강약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연기 자는 감독에게 콘티를 알려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고 감독은 알려 줄 의무가 있다.

블로킹 설정 카메라의 위치나 앵글, 사이즈 등이 결정되기 전에 연기자가 어떤 방향 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가 먼저 결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연기자와 충분히 상의를 거쳐야 하며 스태프들은 이 과정을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카메라 워킹이나 조명플랜, 오디오 픽업라인 설정 등은 연기자 블로킹이 정해진 후에 결정되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신이 다 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촬영되어 편집 과정에서 비로소 연결되는 경우 도 있기 때문에 스크립터는 이 모든 사항을 대본에 일일이 기록해 두어 야 한다. 기본적으로 감독은 사전에 정확한 콘티를 짜서 작업에 임하는 것 이 원칙이다. 콘티는 현장 상황에 따라, 연기자의 동선에 따라 수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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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사전 콘티가 있어야 혼란이 발생하지 않는 다. 아무런 계획 없이 현장에 나가 이런 저런 시도를 하며 현장 콘티를 짜는 경우는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스태프와 연기자의 신뢰를 잃게 될 수도 있고, 또 편집실에 와서 엄청나게 후회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후반작업 주도 촬영을 마치고 편집실에서 진행되는 후반작업은 감독에게 있어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다. 육체적으로 고달픈 현장 촬영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소수의 인원이 편안한 소파에 앉아 일하는 작업 분위기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다. 때로 시간 여유가 충분한데도 후반작업이 늘어져 마지막 순 간에 완성 테이프를 들고 뛰는 경우가 있는데 작업 분위기가 편안한 만 큼 긴장이 풀어져 작업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지도해보 면 촬영을 일찍 마친 팀이 오히려 후반작업이 더 늦어지는 경우가 비일 비재한데 그 이유도 동일하다. 후반작업은 편집실에서 시작되어 종합 편집실에서 끝난다. 러프커팅(Rough cutting)과 파인커팅(Fine cutting)이 끝나면 음악과 효과 등 사운드에 관한 부분과 특수영상, 색 보정(Color collection) 등 영상효과에 관한 작업이 주로 이루어진다. 후반작업의 작업 흐름은 다음과 같다.

① 순서편집 ② 러프커팅 ③ 파인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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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음악작업 ⑤ 더빙(대사, 내레이션, 마음의 소리, 전화 목소리, 편지, 메모, 기 타 음향효과 보강작업) ⑥ 특수영상(CG, 특수효과) ⑦ 자막(모필, CG, 타이틀) ⑧ 컬러 콜렉션(Color collection, 색보정, 영화의 텔레시네 작업에 해당됨) ⑨ 믹싱(Mixing, 종합편집) ⑩ 방송용 테이프 이관(주조정실)

앞 장에서 말한 대로 감독은 예술가이자 동시에 기술자다. 평소에 글쓰기, 음악과 미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뿐더 러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지식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관 객이나 스태프와 소통할 수 없다. 다양한 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아야 하지만 적어도 한두 분야에서는 전문가 이상의 지식과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특화된 장르나 소재를 개발하지 않으면 살아남 기 힘든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 이라고 생각한다. ‘왜 만드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유와 가치가 올바로 서 있지 않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 을 정도로 작업량과 작업 강도가 과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독에게 주어진 책임은 막중하다. 실패했을 경우 핑계를 댈 수단도 대상도 존재 하지 않는다.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기꺼이 스스로 지되, 모든 영광 은 작가와 스태프, 연기자에게 돌리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감독 으로서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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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자질

한국방송PD협회에서 몇 년 전에 현직 PD들을 대상으로 ‘감독이 갖추 어야 할 자질’에 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현직 PD들은 좋은 PD 가 되기 위한 자질로 무엇을 꼽을까? 감독이 되고자 하는 후배들은 무 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런 질문이었다. 모두 13개 항목을 꼽았는데 중 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서대로 나열해 보았다. 감독의 자질을 이야기하 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창의성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성세대는 항상 젊은 세대들에게 자신들이 짜 놓 은 매뉴얼대로 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대로 살지 않으면 불온, 불 순, 불량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만든다. 물론 한 세대가 이룩한 지식과 경험이 사장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전달되려면 매뉴얼대로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나 인류 문명은 사실 매뉴얼대로 살지 않고 옆길로 샌 사람들에 의 해 발전해 왔다. 만일 모든 인간이 앞 세대가 전해 준 매뉴얼대로만 살 아왔다면 우리는 지금도 원시시대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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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발전을 위해서는 매뉴얼대로 사는 사람도 필 요하고 옆길로 새는 사람도 필요하다. 창의성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옆길로 새는 행위다. 기존의 매뉴얼 을 거부하고 길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가 마침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창의성의 핵심이다. 인류문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들은 하나같이 옆길로 샌 사람들이고 그 시대의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대가로 박해를 받았다. 창의적 발상은 그래서 때로 위험하다. 코 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찰스 다윈 등이 그런 사람이다.

① 코페르니쿠스 폴란드 생,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 지동설을 주 장했다. 출간해가 그가 죽은 해다. 그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이 보다 훨씬 전인 1510년이었다. 무려 34년을 원고를 감추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 책을 출간한 이유는 이 이론이 인간중심주의의 세계 관이 팽배했던 그 시대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의 초판을 받아들고 두 시간 만에 죽었다. 이 후 이 책은 가톨릭 교단에서 300년간 금서였다.

②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탈리아 사람으로 코페르니쿠스 바로 다음 세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립한 인물. 당시 가톨릭 교황청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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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찰스 다윈 영국 사람으로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 창조론에 맞서 진화론 을 주장했다. 이후 10여 년간 그는 유럽 사회에서 ‘다윈의 할아버지 는 원숭이다!’ 라는 식의 조롱을 당했다.

우리나라는 매뉴얼대로 사는 사람보다는 옆길로 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또 매뉴얼대로 착실하게 사는 사람을 은근히 비웃는 경향도 있다. ‘범생이’, ‘엄친딸’ 등의 속어가 그런 심리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 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은 대단히 창의적인 민족이다. 오늘날 한류 문 화가 세계 시장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옆길로 새는 사 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창의성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때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능력이 다. 의심해 보고, 뒤집어 보고, “왜? 그래야 하지?” 라고 질문해 보는 비 판정신, 기성의 매뉴얼을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모티브를 찾 아내려는 노력, 이것이 창의성이다. 현직 PD들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자질 중 첫 번째로 창의성을 꼽았다.

도전의식 기존의 권위에 맞서 보겠다는 용기다. 누구나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진짜 그런가? 한번 검증해 보자는 것이 도전정신이다. 선배들이 쌓아 놓은 기성의 가치관,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안주하지 않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파고 들어가 보는 반항아적인 저항정 신, 즉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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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리더십이란 다른 사람을 이끌어 가는 지도력이다. 리더십은 타인의 지 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힘이나 강압에 의한 지도력은 진정한 리 더십이라고 할 수 없다. 구성원들의 지지 없이 발휘되는 카리스마를 독 선(獨善)이라고 한다. 독선이란 홀로 독(獨) 착할 선(善), 즉 나만 홀로 선하다는 뜻이다. ‘다 틀렸고 나만 옳다!’ 이것이 바로 독재다. 독선, 혹 은 독재는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리더십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카리스마는 구성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 제작 현장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로 연기자와 스태프를 진두지휘하 는 잔다르크형 감독이 있다. 실력이 있으면 모두가 고개를 숙이지만 실 력이 없으면 단지 ‘성질 더러운 감독’에 불과할 뿐이다. 후자의 경우 스 태프의 자발성이나 창의적 참여를 기대할 수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이런 감독 아래서 스태프나 연기자는 그저 감독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단순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건강 연속극을 연출하다 보면 집에 가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날이 일주 일에 이삼 일 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어딘가에 처박혀서 새우잠을 자 야 한다. 그렇게 6개월이나 1년을 버티려면 체력은 필수다. 다시 말하 면 ‘체력이 곧 연출력’이다. 대학에서 영상을 전공하고 외주제작사에 입사해 3개월도 못 견디 고 그만두는 사람이 꽤 많은데 그만두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체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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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서’이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고생을 몸이 못 견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이 못 견디는 것은 아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일은 하고 싶은데 체력 달려서 못한다는 건 좀 과장된 측 면이 있다. 몸을 이끌고 가는 것은 마음이다. 사실은 마음이 못 견디는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하면 못 견딜 것은 없다. 몸이 약해 빌빌하던 남학 생이 군대 가서 잘 견뎌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몸이 건강하 면 버티는 힘이 좀 더 강해진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래서 육체 적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도 중요하다. 어쨌든 제작 현장에서 일 하려면 육체적인 건강과 강인한 정신력이 모두 필요하다.

인간미 같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벼워지는 사람이 있다. 쉽게 말 하면 그런 사람이 인간미 있는 사람이다. 왠지 옆에만 가면 기분이 나빠 지고, 볼 때마다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진 사람처럼 우거지상을 쓰고 있 는 사람이라면 그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주변에 사람이 안 모인다. 좋은 감독일수록 일이 없어도 항상 주변에 사람이 들끓는다. 겸손 하고 남을 배려해 줄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그를 좋아는 것이다. 왠지 그 사람 옆에만 가면 기분이 즐겁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늘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다. 오만하고 자 기 과시가 심한 사람은 능력이 있어도 옆에 가기가 싫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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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시청률은 안 나오고, 배우들은 개선될 여지가 없고, 대본은 허구한 날 늦는데 받아보면 앞뒤도 안 맞고 스토리가 직직 늘어진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이럴 때 감독은 대본 딱 덮어놓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아 예 지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방송은 시 청자와의 약속이므로 어떻게든 끝을 내야 한다. 그게 바로 책임감이다. 되든 안 되든 끝까지 자기 맡은 일을 해 내는 책임감, 이것이 감독에게 필요하다고 현직 PD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표현력 연속극을 연출하면서 일주일 동안 만나는 사람의 수는 스태프, 연기자, 미술팀, 보조출연자까지 포함해서 200∼250명이다. 이 사람들을 매주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만나게 된다. 만나서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해야 한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얼마나 짧은 시간에 내가 원하 는 바를 정확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그리고 제작 팀 내에서 신속하고 정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표현 력이 필수다. 감독이 자기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평소에 표현하 는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스태프나 연기자들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 해를 입게 된다. “컷!” 해놓고 감독이 손으로 이마 짚은 채 눈감고 한참을 있어 보라. 촬영장 분위기가 얼마나 싸해지겠는가? 그러고 나서는 어정쩡하게 기 다리고 있는 스태프와 연기자에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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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시다.” 이런다면 밤새 찍어도 오케이 못 건지는 경우도 생긴다. 왜 다 시 가는지,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설명하지 않고 자꾸만 다시 찍다 보면 앵글이 좋으면 조명이 나쁘고, 조명이 좋으면 오디오가 나쁘고, 다 좋 았는데 배우가 다시 가자고 하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뭐가 마 음에 안 드는지 말을 해야 다시 찍더라도 원하는 컷을 찍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밤 신을 밤새 찍었는데 결국 다 못 찍고 아침 해가 밝아오는 경 우도 드물게 있다. 밤새 찍고도 한 신도 못 건지고 철수하는 것이다. 이 런 경우에 스태프들은 ‘날 샜다’고 한다. 해가 떠서 날 샌 게 아니라 그 감독의 앞길이 날 샜다는 은유다. 이런 경우, 사실은 감독이 자신이 무 엇을 원하고 있는지 본인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 가 뭔지를 스스로 분명히 알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자기 표현력이다.

희생정신 한겨울에 나룻배를 타고 내리는 장면을 찍으려면 강가로 가야 한다. 강에서 촬영할 때는 간혹 강 쪽에서 육지 방향으로 카메라를 향하고 찍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럴 때 감독이 강물 한복판을 가리키면 서 “카메라 저기!”라고 외쳤다면 카메라맨더러 물속으로 들어가라는 얘기다. 문제는 카메라만 가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조명도 가 야 하고, 오디오도 가야 한다. 스태프들은 물속에 빠뜨려 놓고 자기는 물 밖에 편하게 앉아서 “자 갑시다. 레디!” 이러고 있으면 다들 속으로 얼마나 욕하겠는가? 이럴 땐 감독이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서 카메라 위치를 지정해 주어야 스태프들이 군소리 없이 따라올 것이다. 감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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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운 겨울에 강물 속으로 먼저 들어가는데 스태프들이 안 따라 올 수 있겠는가? 연속극의 경우 어떤 장소에서 한번 찍기 시작하면 주인공이 이사 가지 않는 한 6개월간 계속 그 장소에 가서 찍어야 한다. 다음 주에 또 찍으러 와야 하기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 뒷마무리는 정말 중요하다. 그 래서 촬영이 끝나면 감독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쓰레기나 담배꽁초를 주워야 한다.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면 스태프들도 함부로 쓰레기, 담배 꽁초 함부로 안 버리게 된다. 밤 촬영이 끝나고 촬영 팀이 철수할 때 가장 오래 걸리는 팀이 조명 파트다. 조명 팀은 본선과 지선 케이블을 다 수거해서 조명기구하고 같 이 차에 실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팀보다 철수하는 데 30분 내지 한 시 간이 더 걸린다. 이때 감독이 혼자 버스 안에 올라가서 자고 있거나 심 지어 빨리 가자고 재촉까지 해 댄다면 속으로 뭐라 하겠는가? 피곤하긴 다 마찬가지다. 현장에서 모든 팀이 철수할 때까지 감독은 끝까지 현장 을 지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이 희생정신이다. 또 촬영 끝나고 스태프들은 다 버스 탔는데 방향이 같다고 여배우 차를 타고 감독이 휭하니 먼저 사라지면 스태프들 가슴 속에는 찬바람 이 분다. 그럴 때는 반드시 같이 버스를 타고 철수하는 동지의식도 필 요하다. 연출팀에서 일하려면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연출부는 항상 다른 스태프들보다 잠을 덜 잘 수밖에 없다. 촬영 끝나고 숙소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다 씻고 잠드는 시간에도 연출부는 다시 감독 방에 모여 서 내일 찍을 신을 협의해야 하고 연기자나 장비, 스태프 등과 연락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또 다른 사람들 보다 30분 먼저 일어 나서 스태프들을 깨워야 하고 오지로 출장 갔을 경우 식사 준비까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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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당연히 항상 잠이 부족하다. 이처럼 희생정신이란 남보다 조 금 더 손해를 감수하는 마음이다. 다소간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고 즐 겁게 일하는 마음, 이것이 감독에게 필요한 희생정신이다.

친화력 친화력이란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나서 얼마나 빨리 친해지느냐 하는 것 이다. 학생들은 신학기가 시작되면 새로운 과목에 복학생과 타과생이 뒤섞여 있어 서로 서먹서먹하다. 그 서먹함이 중간고사 때까지 간다. 그래서 학기 초에는 항상 강의실이 조용하고 수업 분위기가 좋다. 그런 데 중간고사 치르고 나면 좀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서로 친해졌기 때 문이다. 이 시간이 한 달 반쯤 간다. 촬영 팀도 마찬가지다. 6개월짜리 드라마를 스타트하면 처음 한 달 반 정도는 서로 서먹서먹해서 작업이 많이 삐걱댄다. 영화나 특집극 단막극 같은 드라마는 친해질 만하면 끝나 버린다. 이럴 때 감독이 얼 마나 빨리 사람들하고 친해지느냐, 또 감독을 둘러싸고 있는 스태프, 연기자들을 얼마나 빨리 서로 친해지게 만드느냐가 작업의 질과 효율 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독이 하는 일 중 아주 중요한 일이다. 스태프들하고 친해지는 가장 좋은 기회가 헌팅출장 기간이다. 앞 으로 촬영할 장소를 촬영감독, 조명감독 등을 대동하고 미리 가 보는 것 이다. 보통 한 2박 3일이나 3박 4일 정도 지방으로 돌면서 촬영장소를 답사하는데 해 떨어지면 특별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술 한 잔씩 하면서 서로가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연기자들은 주로 첫 연습을 마치고 식사하면서 친해진다. 작가,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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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프로듀서, 연기자들이 한데 모여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실수도 한다. 그러고 나면 서로 간에 경계심이 없어져 현장에서의 소통과 협력 관계가 빨리 이루어진다. 이처럼 서로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 해서 나부터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고, 또 다른 사람들도 서로 친해질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친화력이다.

사고력 사고력이란 어떤 현상을 보고 그 의미를 읽어 내는 분석력과, 드러난 결 과를 보고 그 원인을 파악해 내는 추리력, 복잡한 주장들이 난무하는 와 중에서 문제의 본질을 간파해 내는 통찰력 등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창시절부터 다양한 방면의 책 읽기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학이나 심 리학, 철학, 역사 등의 분야에 남다른 투자가 있어야 하고 문학적 상상 력도 필요하다. 요즘은 인문학을 위한 길잡이 책들이 많이 나와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인문학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어찌 보면 촬영이나 편 집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책읽기 아닌가 싶다.

건강한 가치관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더불어 사는 이웃들을 긍정적이고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 각,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올곧게 견지하는 주체성…. 이런 것들이 건강한 가치관이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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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는 것이다. 인문학의 대표적인 학문이 문학(文學), 사학(史學), 철학(哲學)이다. 대 학에서 신입생 시절부터 인문학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는 이유 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건강한 가치관이 형성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영상 관련 학과에 입학해 처음부터 다짜 고짜 카메라 들고 뛰쳐나가 촬영하고 편집하는 기술을 익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항상 변하는 것이 다. 더군다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변화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성급하 게 기술이나 테크닉을 익히기보다는 오랫동안 나만의 자산이 될 수 있 는 인문학에 투자하기를 권한다.

결단력 감독은 매 순간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직업이다. 그 결정은 최종적 으로는 혼자 내릴 수밖에 없고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늘 고독하다. 주 어진 상황에서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감독에게는 승 부사 기질이 필요하다. 고민은 할 만큼 해야 되겠지만, 최종 결정을 내 릴 때는 냉정하고 과감하게 내려야 한다. 감독이 우유부단하면 주변사 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쓸데없이 새나가는 제작비도 많아진다. 결정을 내릴 때는 결정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타이밍도 중요하다. 시간이 돈인데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놓치면 호미로 막을 거 가래 로 막게 된다. 결정을 내려야 할 최적의 시기가 있는 것이다. 의사결정 이 너무 빨라도, 또 너무 늦어도 손해를 보게 된다. 요즘은 워낙 주인공 섭외가 힘드니까 기획 단계에서 일찌감치 주인공을 캐스팅을 해 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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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도 있다. 그런데 막상 대본이 나왔을 때 선약해 둔 배우가 작품의 이미지와 좀 안 맞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더 좋은 캐스팅이 생각났다 면, 그런데 미리 약속해 놓은 배우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배우 하고는 원수 질 각오를 한다면 교체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다시는 그 배 우를 내 카메라 앞에 세울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의사결정이 너무 빨라 손해를 보는 경우다. 또 주인공이 너무 늦게 결정되면 계약 단계 에서 대단히 불리해진다. 더 이상 대안도 없고 대안을 마련할 시간도 없기 때문에 출연료를 달라는 대로 줘야 한다. 이처럼 결정을 내려야 할 최적의 시기를 놓치면 원하지 않는 배우와 일하게 되거나, 서로 원수 가 지거나, 불필요한 개런티를 지출하게 된다. 결정은 과감하게 내리되 최적의 시기에, 타이밍에 맞게 결정을 내리는 승부사 기질이 감독에게 는 필요하다.

경영 마인드 감독이라면 이 신을 찍는 데 돈이 얼마나 들것인지, 또 돈을 어느 정도 써야 적절한지를 따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가 개념이다.

① 이 정도 분량의 시간, 장비, 인력, 예산 등을 투입해 찍을 만큼 중요한 신인가? ② 투입한 만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인가? ③ 투입한 만큼 방송을 보고 시청자가 공감을 해 줄 것인가?

이처럼 투자 대비 효율성을 따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돈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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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쓰고 아낄 때는 아끼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맺는 말 위의 열세 가지 자질을 갖춘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인간은 본질적 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서 한 발 한발 나아가는 존재가 인간일 것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이라 는 표현이 더 맞겠다. 모든 것을 이미 갖추고 있는 존재라면 그건 인간 이 아니라 신일 것이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말이다. 본래부터 이런 사람이 있어서 감독이 되는 건 아니다. 감독 일을 하 다 보니까 이런 성격과 태도를 가진 인간으로 변해 간다는 표현이 더 맞 을 것이다. 사실 필자는 고등학생 때까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남 앞 에 나서는 거 싫어하고, 남하고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더 좋아하 는, 눈에 잘 안 띄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성격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것 같다. 대학에서 방송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또 졸업하고 지 상파의 예능PD로, 드라마PD로 일하면서 나도 모르게 적극적이고 외향 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격은 노력 여하에 따라 변화시킬 수 있다. 자 신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해서 그런 틀 속에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다. 필요에 따라서, 또는 환경이 바뀌면 성격도 바뀌기 때문 이다. 물론 이 말은 내성적인 게 나쁘고 외향적인 게 좋은 것이라는 뜻 은 결코 아니다. 필요에 의해 나를 스스로 바꿔 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 간다. 그게 진리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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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당연히 세상의 일부인 인간도 변화하는 존재 다. 그래서 자기를 어떤 틀 속에 가두지 않고 항상 새롭게 스스로를 가 꾸어 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실현하고, 새로운 자 신을 발견해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멋지고 풍요롭 게 변화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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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고르기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대단히 많다.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 많은 요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본이라는 것. 대본이 결정되고 나면 이미 드라마의 성패는 반 이상 결정된 것이나 다 름없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렇게 말 했다.

“좋은 시나리오로 나쁜 영화를 만들 수는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로 좋 은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도 같은 말을 남겼다.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좋은 시나 리오 둘째, 좋은 시나리오 셋째, 좋은 시나리오.”

부실한 대본을 가지고 현장에서 연출력으로 어떻게든 커버해 보겠 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 현장은 단지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 는 과정일 뿐, 현장에서 부실한 대본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불가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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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럴만한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 능하지도 않다. 현장에서 촬영하면서 대본을 고치는 것은 적군들하고 총격전을 벌이면서 동시에 한쪽에서 작전 계획을 짜고 있는 거나 마찬 가지다. 그 전쟁은 이미 진 거나 다름없다. 일반인들은 감독의 일이 ‘레디고’를 외치는 크랭크인(crank in)부 터 시작인 줄 알지만 드라마를 공부하는 전공자라면 돼지머리 놓고 고 사 지내는 크랭크인 이전에 무수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운 프리프로 덕션과정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감독이 감당해 내야 할 엄청난 작업량과 고민, 거기에 쏟아 붓는 에너지 등을 이해한다면 신문에 ‘모모 감독이 무슨 작품을 크랭크인 했다’는 기사가 나오면 “아, 저 감독. 지금쯤 완전히 지쳐서 힘이 하나도 없겠구나.” 이 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시간과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는 대단히 중 요한 과정이 프리프로덕션 과정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대 본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다. 드라마의 성패에서 대본이 차지하는 결 정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독의 업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 한 업무는 좋은 대본을 확보하는 일이다. 드라마나 영화감독들은 좋은 대본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좋은 대본을 확보했다면 이미 절반의 성공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좋은 대본을 가려내는 일, 좋은 대본을 확보하는 일은 제작자나 감독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 다. 이 장에서는 대본 고르기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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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본 확보가 성패의 관건 대본 완고가 나오고 캐스팅이 끝났다면 이미 작품의 성패는 80% 이상 결판이 난 것이다. 프로덕션이나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은 프리프로덕 션에 비하면 단순노동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방송가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감독, 프로듀서, 방송사 간부들은 대본 잘 쓰는 작가에게 껌벅 죽는다. A급 작가의 경우에는 PD나 CP보다는 국장이나 본부장이 상대한다. 특A급 작가는 사장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다. 그만큼 대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신인작가의 경우에 60분 기준으로 받는 원고료는 회당 165만 원이 다. 이 중에서 기본 고료는 135만 원이고, 나머지 30만 원은 자료비다. 일종의 취재비라고 보면 된다. 이것이 특A급으로 가면 회당 5000만 원 이상이 된다. 무려 30배다. 대개 연속극은 50부작으로 기획되니까 회 당 5000만 원이면 25억 원이다. 6개월에 25억 원을 번다면 엄청난 고소 득 직종이다. 드라마가 잘나가면 두세 달 연장하는 건 보통이니 70부작 까지 연장했다면 고료만 35억 원이다. 물론 기본고료 재방료는 별도니 까 다 합치면 한 40억 원정도 된다. 매년 한 편씩 집필한다고 하면 연봉 40억의 고소득 직종인 셈이다. 사실 이런 고액작가가 받아가는 돈이 연기자 출연료와 함께 전체 예산에서 상위라인(A/L) 비용을 상승시키는 주원인이다. 바람직한 현 상은 아니다. 그 이유는 5장과 15장에서 이미 상세하게 언급했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거액을 들여서라도 A급 작가를 섭외하려고 애 쓰는 것은 그만큼 대본이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감독들은 좋은 대본을 확보하는 일에 많은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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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지를 쏟는다. 신인작가라 하더라도 앞으로 큰 작가로 성장할 가능성 이 있다고 생각되면 미리 미리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두려고 노력한다. 몸값 높아지기 전에 잘 사귀어 두자는 거다.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만 나서 밥 먹고 술 먹고 같이 영화 보러 다니면서 평소에 친분관계를 쌓아 두려고 노력한다. 잘 모르는 처지에 돈 보따리만 싸들고 간다고 좋은 작가가 섭외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발 빠른 감독은 언젠가 그 작가 로부터 나올 수 있는 좋은 대본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 미리 비즈니스를 해 둔다.

좋은 대본 감독이 좋은 대본을 확보하려면 일단 좋은 대본을 가려내는 안목이 있 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대본인가?’, 그리고 ‘어떤 방법 으로 좋은 대본을 가려낼 것인가?’ 이런 질문이 당연히 뒤따르게 된다. 좋은 대본과 그렇지 않은 대본을 가려내는 일은 사실 감독의 가치관이 나 정신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어차피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좋은 드라마에 관한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이 분명하게 서 있다면 이 일 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쉬운 일일 수도 있다. 좋은 드라마에 대한 관점은 3부에서 이미 거론한대로 대략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를 꼽을 수 있다.

① 단순성 ② 웃음 ③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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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도덕성 ⑤ 캐릭터 ⑥ 휴머니티 ⑦ 빛나는 조연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는 지난 26년간 연출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마음에 드는 대본을 만난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 럴 수도 있겠지만 요즘 와서는 ‘세상에 완벽한 대본이란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만일 완벽한 대본이 존재한다면 감독이 필요 없지 않을까? 누가 연출해도 결과는 같을 테니까. 불완전한 가운데 완전을 추구하는 직업 이 감독이다. 완벽한 대본을 기다리기보다는 좋은 드라마가 될 가능성 이 있는 대본을 찾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그리고 좋은 드라마가 될 가 능성이 있는 대본을 찾는다는 것은 좋은 드라마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좋은 드라마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이 바로 감독의 스타일이자 연 출관이다. 필자는 위의 일곱 가지 중에서 웃음과 감동, 두 가지를 꼽았 는데 최완규 작가는 ‘이웃과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 즉 휴머니티를 꼽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각자가 작업을 해 나가면서 자기의 스타일 을 찾아야 할 것이다. 좋은 드라마에 대한 나름대로의 명확한 입장, 가 치관을 뚜렷이 세워 놓으면 좋은 대본을 골라내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대본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은 어떤 요소를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갈등구조

드라마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갈등이 있는 이야기’다. 더 줄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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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드라마는 곧 ‘갈등’이다.

“드라마는 갈등이다. 만나고 대립하고 충돌하는 곳에 드라마가 있 다. 갈등이 없는 곳에 드라마도 없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리고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주장은 보편타당하다. 드라마의 핵심은 갈등이다. 좋은 대본에는 갈등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 것도 극 초반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① 갈등구조가 얼마나 선명한가? ② 그것이 얼마나 빨리 (극 초반에) 제시되는가?

이것을 꼼꼼히 체크해 보면 좋은 대본과 그렇지 않은 대본을 쉽게 가려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캐릭터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건 중심으로 전개하 는 방식과 인물, 혹은 인물과 인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방 식이다.

사건 중심의 진행

스토리를 먼저 구축하고, 그 스토리를 플로팅하고, 그 플롯에 맞게 인 물들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이런 경우 드라마는 당연히 사건 중심이 되 고 인간의 캐릭터는 보조적인 장치로 전락해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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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로 보면 액션, 모험, 스릴러, 추리물, 수사물 등이 주로 사건 중심으 로 구성이 되는 드라마다. 나름대로 괜찮은 방식이지만 인물이 스토리 에 함몰될 위험이 따른다. 스토리 운반을 위해서 인물이 조작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인간이 스토리에 함몰됐다’고 한다. 스토리 가 전면에 나오고 그 스토리를 위해서 인물이 작위적으로 짜 맞춰질 우 려가 있는 것이다. 스토리를 위해서 조작된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 결과적으 로 드라마는 실종되고 스토리만 난무하게 된다. 21장에서 잠시 언급했 지만 “드라마 속에 귀신 허깨비만 둥둥 떠다닌다”는 표현이 바로 그런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다. 스토리에 파묻혀 캐릭터가 실종되어 버리는 경우다. 주로 짧은 이야기, 단막극, 특집극, 영화적인 구성을 가진 짧은 미 니시리즈 등 비교적 호흡이 짧은 드라마에는 그래도 이 방법이 꽤 유효 하다. 만일 학생들이 10분 내지 15분짜리 단편영화를 만든다면 당연히 이 방식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다. 사건이 전면에 나오지 않고서는 짧은 시간에 기승전결을 갖춘 스토리를 담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물 중심의 진행

또 하나의 전개 방식은 인물의 성격을 먼저 구축해 놓고 그 성격을 바탕 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캐릭터를 먼저 구축하고 캐릭터가 드라마를 끌고 가게 만드는 것이다. 장르로 보면 휴먼 드라마, 가족 드 라마, 코미디, 멜로 등의 장르가 이에 속한다. 이 방식도 나름대로의 위 험은 있다. 스토리가 산만해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드라 마가 에피소드 나열에 그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트렌디 드라마라 고 말하는 그런 종류의 드라마가 이런 함정에 잘 빠진다. 전체를 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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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어떤 큰 줄기가 있는 게 아니라 신 바이 신(scene by scene)으로, 시퀀스별로 에피소드를 나열하고 그 에피소드들을 주욱 이어 붙여서 드라마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인물 중심의 이야기 구성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물의 성격을 드 러내기 위해 에피소드를 축적해야 하고, 그 인물과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도 세밀하게 묘사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이야기에는 이 런 인물설정이나 관계를 디테일하게 그려 낼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 는다. 그래서 주로 6개월씩 가는 연속극이나, 두 달 이상 가는 긴 미니 시리즈가 이 방식에 적합하다. 호흡이 긴 드라마는 인물 중심으로 가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인물 중심의 드라마가 유리하다

15분 내외의 단편물을 만들면서 인물 중심으로 가겠다는 것은 사실 대 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의 졸업 작품은 대부분 사건 중심으로 구성하도록 권하고 있다. 짧은 이야기일수록 인물 중심으로 가면 대단히 어려워진다는 점을 누누이 설명한다. 물론 짧은 이야기임 에도 인물 중심으로 가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임 팩트가 강한 사건을 먼저 터뜨려 놓고 인물이 그 사건을 관통해 가면서 캐릭터가 드러나게 하는 방식도 있다. 사건을 겪는 과정에서 인물이 그 사건에 반응하는 태도를 통해 성격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전제는 그 사건이 대단히 강력하고 임팩트가 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난이 도가 아주 높아서 오랜 경험과 필력을 필요로 한다. 노련한 작가일수록 첫 번째 방식보다는 두 번째 방식, 즉 인물 중심 으로 끌어가는 드라마를 선호한다. 그런 드라마가 훨씬 품이 덜 들고 고생도 덜 하면서 좋은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사건 중심의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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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힘대로 들면서 노력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미미하다. 그 래서 많은 작가들이 먼저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 캐릭터가 드라마를 끌 고 가도록 하는 방식을 택한다.

캐릭터가 전면에 나와야 한다

드라마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인간이 전면에 나와야 한다. ‘인 간이 스토리에 함몰됐다’거나 ‘드라마에 귀신 허깨비만 둥둥 떠다닌다’ 는 지적은 드라마 감독으로서는 정말 수치스럽고 뼈아픈 것이다. 스토 리 운반을 위해서 인간을 조작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먼저 캐릭터를 구축하고 캐릭터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방식을 권하는 것이다. 아무 리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사건이라도 거기에 인간이 보이지 않으면 감 동은 없다. 성격이 구축되지 않은 채로 사건만 나열되는 드라마는 죽은 드라마다. 드라마는 사건보다는 캐릭터다. 스토리보다는 인물의 캐릭 터에 집중하는 대본이 좋은 대본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얼마나 캐릭터가 살아 있는가? ② 그 캐릭터가 얼마나 빨리 (극 초반에) 구축되는가?

이 두 가지를 꼼꼼히 살펴본다면 좋은 대본과 그렇지 않은 대본을 쉽게 가려낼 수 있다.

원고를 발로 썼는가?

드라마가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탐구의 방법을 규정해 봄으로서 드라마 작법에 관한 몇 가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가 연구 과제를 탐구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관찰이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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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이란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다음이 실험이다. 같은 조건에서 매번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실험해 보는 것이다. 인간을 탐구하는 극작 의 세계에서 관찰은 ‘취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험은 ‘체 험’에 해당된다. 내 몸뚱이로 직접 겪어보는 것이다. 체험에서 우러나 는 살아있는 이야기야 말로 좋은 대본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천재적인 시인은 있어도 천재적인 드라마 작가는 없다. 많이 보고 많 이 읽고 철저히 취재하라. 그 방법 밖에 없다.”

최완규 작가의 지론이다. 대본이 현장 취재를 하고 쓴 것인지, 가 만히 앉아서 상상력만 가지고 쓴 것인지는 찍어보면 금방 드러난다. 현 장 취재를 하지 않고 쓴 대본은 어딘가에 허점이 있다. 읽을 때 이미 앞 뒤가 안 맞거나 또 촬영과정에서 왠지 아귀가 잘 안 맞는다.

체험의 중요성

결혼 안 한 작가와 기혼 작가가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할 까? 같은 조건이라면 결혼한 작가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본 다. 결혼생활을 해 본 작가가 남녀관계에 대해서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 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혼 작가들이 쓴 멜로드라마는 왠지 남 녀관계가 조작적이고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다. 동화적인 상상력이 충 만하고 그 센티멘털리즘이 아름답기는 한데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현실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극작의 세계에서 체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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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의 임신

신혼부부가 병원에 갔는데 ‘임신 3개월입니다’ 이런 진단을 받으면 보 통 드라마에서는 신랑의 반응이 정해져 있다. 눈물을 글썽이며 내 아이 를 가져줘서 고맙다고 손을 꼭 잡든가 부인을 껴안고 세 바퀴 돌며 기쁨 과 환희를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겪은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부담 백배였다.

“내가 무슨 권리로 한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거지? 잘 키울 수 있을까? 아, 이제 부장님이 호통 쳐도 대들지 말아야지. 돈 열심히 벌어야겠다. 적금이나 하나 들까?”

나만 이런 느낌이 들었나 싶어서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공통적으 로 하는 말이, 기쁜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마음 한편에 엄청난 부 담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애를 낳아 보지 않은 사람이 어 떻게 알겠는가?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애를 낳아 본 사람이 ‘여자에게 있어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성이란 무엇인가?’를 온 몸으 로 느끼며 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상상력과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많은 노력을 전제로 한다. 내 몸뚱이로 직접 겪은 체 험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커다란 재산이 된다.

잡히면 끝이다

류승완 감독이 만든 영화 <죽거나 나쁘거나>를 보면 세 번째 에피소드 에 형사와 조직폭력배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형사 가 이런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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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들이 왜 스포츠머리를 하느냐... 범인하고 싸울 때 잡히면 끝이 다 이거요. 머리끄덩이 딱 잡히면 싸움은 이미 진 거나 다름없죠, 그래 서 머리를 짧게 자른다 이겁니다.”

또 조폭 대사 중에도 이런 대사가 있다.

“왜 우리들이 양복을 입고 그 안에 넥타이를 안 매고 라운드티를 입고 다니는지 아십니까? 넥타이 잡히면 끝이다 이거에요. 우린들 뭐 이렇 게 입고 다니고 싶어서 입고 다니는 거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런 디테일은 취재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얘기다. 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들어야 얻을 수 있는 살아 있는 대사 들이다.

건달들은 후진주차한다

아주 오래전에 전국구 조직 두목이라는 사람하고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조연출 시절이었는데 이 술자리에서 그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며 이런 말을 했다.

“건달들은 어느 장소에 가든 차를 댈 때 전면주차하지 않는다. 비상시 에 항상 도망가기 좋게 차 앞부분을 길 쪽으로 향하게 후진주차한다. 그게 건달세계에서는 상식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차타고 오는 건달들이 하나같이 차를 전진주차 딱 해 놓고 내리는 거보면 되게 웃 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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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나는 건달들이 차대는 장면 찍을 때 항상 후진주차하게 한다. 이게 살아 있는 드라마다. 그 세계에 있는 사람을 만나 취재하고 써야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한 살아 있는 대본이 나오는 것이다. 대본을 읽을 때는 현장을 취재하고 그 취재를 바탕으로 대본을 썼는가를 꼼꼼 히 따져 봐야 한다. 취재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대본은 좋아진 다. “현장 취재를 통해서 리얼리티를 확보했는가?”가 좋은 대본과 그렇 지 않은 대본을 판가름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인간에 대한 애정 “드라마 작가는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을 가져야 한다.”

최완규 작가의 말이다. 즉, 드라마 작가는 휴머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이 다. 필자는 이 말에 정말 공감한다. 드라마는 좀 본다 싶으면 시청률 20%는 쉽게 넘어간다. 시청률 20%라는 수치는 영화로 치면 매일 밤 관 객 1000만을 돌파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 중 관객 1000 만 넘은 영화는 고작 10편 남짓이다. 드라마 작가는 매일 밤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신의 생각을 피하주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작가 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품성 등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특히 시청률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황당한 인간관계와 독한 대사를 남 발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의 입장에서 배려해 주는 것이다. 사랑이란 ‘배려’에 다름 아니다.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서, 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자 휴머니티다. 대본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 다. 바로 이런 휴머니티가 드라마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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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화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 군이나 독일군은 영혼이 없다. 그냥 총알받이일 뿐이다. 쏴 죽여서 없 애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들도 집에 가면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서 자 식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고, 부인이 있고, 자식 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조 건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살상의 대상으로만 묘사된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월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도 종종 인간은 대상화된다. 베트콩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다. 월남전 은 사실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민족 독립운동이었다. 여기에 미 국이 개입해서 전쟁을 확대시킨 것이고 거기에 한국군이 미국의 요청 에 의해 참전했다. 월남인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처절한 생존 투쟁 을 벌이고 있는 중인데 어찌 보면 아무 관계도 없는 한국 군대가 와서 독립운동을 방해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우리하고는 아무런 원수를 진 일이 없다. 그런데 월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보면 이런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베트콩을 전쟁의 대상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을 대상화하는 대본에는 휴머니티가 개입 할 여지가 없다.

도구화

포르노나 에로무비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영혼이 없다. 그저 섹스에만 탐닉하는 성적 도구일 뿐이다. 틀림없이 누군가의 딸이고 누 군가의 언니고 엄마일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무시된 채 오로지 성적인 역할만 강조된다. 이처럼 인간을 도구화하는 대본에 서 휴머니티의 향기를 느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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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본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을 갖고 있고 그 인간이 처 해 있는 ‘인간의 조건’을 바탕에 깔고 묘사한다. 인간을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인간을 대상화, 도구화했다는 것은 휴 머니티의 부재를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는 대본을 어떻게 좋은 대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반전

드라마를 보는 재미는 ‘반전의 묘미’에 있다. 반전이 있다는 것은 대본 이 제대로 구성(Plotting)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반전이 준비되어 있는 가?’ 는 좋은 대본과 그렇지 않은 대본을 가려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반전은 관객의 허를 찌르면서 드라마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간다. 반 전이 없다면 드라마는 김빠진 콜라처럼 밋밋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반 전은 스토리를 플로팅하는 과정에서 준비된다. 반전이 준비되지 않았 다는 것은 스토리가 제대로 플로팅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의 영화적인 구성은 두 번 이상의 반전을 필요로 한다. 그림 27-1에서 보듯이 도입에서 갈등까지를 1장, 갈등에서 위기까지를 2장, 위기에서 정점까지 가는 과정을 3장이라고 한다면 2장에 첫 번째 전환 점(turning point)이, 3장에 두 번째 전환점이 배치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나에게 너무도 훌륭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는데 알고 보 니 아버지가 폭력조직의 두목이었다. 이것이 2장에 제시된 첫 번째 터 닝 포인트라면 3장에 가서 터닝 포인트가 한 번 더 있어야 한다. 이를테 면 그런 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더라, 이런 새로운 국면이 또 한 번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스팅>, <태양은 가득히>, <식스센스> 등은 결말 부분에 강 력한 반전을 배치해 놓은 영화로 유명하다. 얼마나 강력한지는 각자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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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7-1 영화적인 구성 3장 2장

정점 위기

1장 갈등 Opening 프롤로그

도입

결말

화를 보면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쏘우>라는 영화는 이 반전이 무수히 계속된다. 영화 전체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관객과 두뇌싸움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반전(turning point)에는 개연성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개연성이 없는 반전, 반전을 위한 반전은 관객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시청 유인 요인

좋은 대본이라면 일단 시청자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주제나 기획 의도는 그다음 문제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다면 거기에 황금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단은 관 심을 끌어 놓고 볼 일이다. 시청 유인 요인으로는 첫째, 임팩트가 있어 야 하고 둘째,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

임팩트

내가 임팩트(impact)란 용어를 쓰니까 학생들이 가끔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임팩트란 살인, 강간, 대형사고, 낭자한 피, 폭력, 섹스 등 ‘큰 사 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의 흐름을 출렁이게 하는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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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설정, 입장의 변화, 긴장과 텐션 등을 모두 뭉뚱그려서 임팩트 라고 한다.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충돌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또는 집단과 개인의 부딪침을 말한다. 힘과 힘, 세력과 세력, 정의와 불의, 가치와 가치, 이념과 이념, 이 해관계와 갈등 등에서 비롯된 부딪침이다. 드라마는 갈등이다. 만 나고 대립하고 충돌하는 곳에 드라마가 있다. 이 충돌은 갈등의 폭 발이며 클라이맥스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 관객이 느끼는 진정 한 임팩트는 충돌 직전까지다. 충돌의 순간은 사실상 임팩트가 끝 나고 결말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② 긴장과 텐션 드라마에서의 긴장과 텐션(Tension)은 대립하고 있는 두 힘 사이 에서 발생한다. 이 갈등 상황이 팽팽하게 지속될수록 시청자의 주 의력은 집중된다. 긴장과 텐션은 코미디에도 존재한다. 웃음이 터 지기 직전, 관객의 주의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적당한 긴장이 필요하다.

③ 새로운 국면 스토리 전개상 새로운 국면은 드라마에 임팩트를 주는 효과적인 수단이며 이야기를 훨씬 더 강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사실은 내가 친엄마가 아니란다” 또는 “너흰 사실 남매야” 하는 식으로 드 라마를 전혀 다른 국면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새로운 국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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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치밀한 구성에 의해, 미리 깔아둔 복선을 통해 제시되어야 하며 개연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막장드라마라고 비난하는 연속극들은 새로운 국면을 제시할 때 개연성이 너무나도 결여되어 있어 시청자의 공감을 사기 어려운 것이다.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드라마의 물줄기를 너무나도 쉽게 바꾼다. 그래서 막장이라는 소 리를 듣는 것이다.

④ 눈물과 웃음 웃음 후에 제시되는 눈물은 강력하다. 웃음이 슬픔을 증폭시킨다. 먼저 웃기고, 나중에 울리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고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을 비가역성이라 한다. 실컷 울려놓고 웃기 면 안 웃는다. 그래서 최루성 멜로영화는 처음에 코미디영화 못지 않게 웃음에 치중한다. 웃겨 놓고 울리면 몇 배 더 슬프기 때문이 다. 웃음과 눈물은 관객의 관심을 끄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야기는 충분한가?

간혹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다 이야기가 복잡해져서 관객이 스토 리라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건 그리 흔한 경우도 아닐뿐더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대단히 간단하다. 스토리 중 일부 곁가지들을 들어내면 되니까.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이야기가 부족한 경 우다. 이럴 때는 대본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굳이 빈약한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에 매달릴 것 없이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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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의와 당위성

초고를 받으면 스스로 이런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①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② 그것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③ 그것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괴테가 제시한 문예 비평의 세 가지 원칙이다. 대본 작업 과정에서 늘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할 질문들이다. 그래서 스스로 끊임없이 반문해 보고, 돌이켜 보고,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작업을 게을리 하다 보면 자칫 집필 과정에서 대본에 함몰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함 몰되었다’는 것은 대본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익숙해져서 좋아 보이 는 상태를 말한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그래서 항상 처음 보는 것처럼 대본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살인사건을 저지른 흉악범들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면 하나같이 이 런 반응을 보인다.

“저 착한 아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믿을 수 없다. 뭐가 잘못 되었다. 그럴 리가 없다.”

내 몸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낳아서 애지중지 키운 저 아이가 흉 악한 살인범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된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든 거다. 이렇게 논리를 확대해 나간다. 드라마를 쓰 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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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불후의 명작이다. 만약 이 작품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이 세 상이 너무나 혼탁해 작품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드는 순간이 대본에 함몰된 순간이다. 그리고 실제로 작품이 실패로 판명이 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나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천재다.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더러 운 세상….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행한 예술가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몰아간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가? 당사자를 제외한 온 세상이 실패의 원인을 잘 알고 있다. 감독의 세계도 같다고 생각한다. 영상의 세계에서 천재란 없다. 세 상이 알아 주지 않는 천재란 게으른 자의 변명에 불과하다. 스필버그가 천재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필버그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부모님이 생일선물로 사준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놀 았다. 어린 시절부터 찍고 편집하며 영상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 영상의 꿈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천재란 어느 날 갑자기 대중 앞에 모 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럴만한 시간과 노력이 선행 되어 온 결과다. 영상의 세계에서는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찍고, 많이 편집해 본 사람을 못 당한다. 위에 언급한 괴테의 세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는 것은 끊임 없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지려는 노력이다. 문화나 예술 분야에 종사 하는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특히 ‘자기 자신의 진실’에 귀를 기울 여야 한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영상을 다루는 일을 한다 면, 항상 이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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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획제안서에서 제시한 거창한 기획 의도가 대본 작업 과정 에서 마음먹은 대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기획을 한다는 것과 대 본을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 대본을 쓴다는 것 과 연출을 한다는 것도 전혀 다른 세계다. 그래서 기획자가 따로 있고 감독이 따로 있고 작가가 따로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영화계에는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보편화 되어 있다. 물론 한두 편 그렇게 해서 성공할 수 있지만 그것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만다. 한 인간이 기획 하고 시나리오 쓰고 연출까지 할 수 있는 경험의 세계가 한계가 있기 때 문이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를 100편 넘게 만들었지만 본인이 시나리 오 쓰고 감독도 하는 작업 방식이었다면 오늘날의 임권택은 없었을 것 이다. 기획과 대본 집필, 그리고 연출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러나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위의 세 가지 질문이다. 이 세 가지는 질문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피 해 갈 수 없는 질문이다. 대본 집필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대단히 좋은 방법이다. 잘된 작품이라면 굳이 이런 질문이 필요 없다. 대본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 기 때문이다.

대본 수정 초고가 그대로 제작되어 방송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대본은 여러 차 례 수정된다. 대본 수정 작업은 연출자나 프로듀서, 혹은 배우의 의견 을 반영해 이루어지기도 하고 요즘은 협찬사나 PPL의 요구가 반영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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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초고를 읽을 때는 가급적 연필을 들고 읽는 것이 좋다. 연필은 왠지 잠정적이고 유보적인 느낌을 준다. 스스로 사고가 고정되지 않도록 경 계하는 측면에서 연필을 잡는 것이다. 대본을 받자마자 한손에 빨간 사 인펜 들고 뭐 고칠 데 없나 눈을 부릅뜨고 읽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 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연필을 들고 읽으면서 뭔가 미심쩍은 부분, 이해 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체크해 두고, 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옆에 메모해 가며 읽는 것이 좋다. 또 초고를 읽을 때는 집중해서 한 번 에 끝까지 읽는 것이 좋다. 주변이 산만해서 집중이 되지 않으면 한 번 읽은 신을 다시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대본에 함몰될 수 있다.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한 번만 읽어 야 하는 것이다.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어차피 시청자는 드라마를 한 번만 본다. 미리 예습하고 보지도 않는다. 관객 이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알려면 반복해서 읽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일단 다 읽으면 며칠간 대본을 덮어 놓고 전체의 윤곽을 머릿속에 서 숙성시키는 기간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 객관화하는 기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 후에 작가를 만나 이런 저런 아이디어와 의견을 제시하고 의견을 조율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를 설득하고 작가로 하여금 스스로 대본 수정을 하게 하는 것은 감독의 기술이다. 작가가 스스로 대본을 수정하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감독이 직접 대본을 수정할 경우 작 품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체의 흐름 속에서 개별 신을 구상하고 이를 대본화한다. 감독이 아무리 대본 분석을 철저 히 했더라도 작가만큼 전체의 흐름 속에 분석할 수는 없다. 섣불리 손 을 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앞뒤가 안 맞거나 논리구조가 뒤 틀려 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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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않기 때문이다. 프로덕션 과정에서 엄청난 작업량이 기다리고 있 기 때문에 대본까지 직접 손대기 시작하면 금세 지치게 된다. 이런 두 가 지 이유로 대본 수정은 작가가 직접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초고에서 완성고로 가는 대본 수정 작업은 험난하다. 초고는 초안, 밑그림에 불과하다. 이것이 완성고로 갈 때까지는 작가와 감독, 프로듀 서가 서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팀워크가 깨지기도 쉽고 서로 상 처받을 수도 있다. 또 수정 과정에서 이야기가 변질되어 작품이 산으로 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제작의 여러 단계 중에서도 대단히 힘들고 위 험한 과정이다. 그러나 어쨌든 거쳐야 할 단계다. 그래서 서로 간에 지 혜를 발휘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작가의 창작정신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사실 자신이 쓴 글을 남한테 보여 준다는 것은 얼마나 창피하 고, 민망하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일인가? 감독이 작가가 써 온 글을 처음 읽으면서 빨간 펜으로 마구 그어대 는 모습을 그 작가가 본다면 심정이 어떨까? 대본작성 과정에서 작가에 게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집필과정에서 지치지 않도록 도와 주고 격려해 주며, 정해진 기간 내에 탈고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것 이 감독과 기획자가 할 일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주고, 소 중하게 여겨 주는 관계가 반복되면 신뢰가 쌓이게 된다. 이럴 때 ‘작가 와 감독이 호흡이 맞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호흡이 맞는 작업 파트너로 서 작가의 창작정신과 작품 의도를 존중해주는 감독, 작가가 써 온 대본 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감독이 진정으로 노련한 감독이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 힘이 들 뿐 아니라 나중 에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조력자들의 의견에 마음을 열고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 감독은 대본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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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담아서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좋은 점을 칭찬하고 보완되어야 할 점을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도 기술이다. 작가는 초고 쓰고 이미 어 느 정도 지쳐 있다. 이럴 때 문제점을 심하게 지적하면

“그럼 네가 써 봐, 이 인간아!”

이런 마음이 올라오게 되어 있다. 감독이라면 작업의 파트너로서 작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싸 안는 지혜가 필요하다. 초고에서 완성고 로 가는 과정에서 프로듀서는 작가의 편에 서서, 애 낳는 산모 돌보듯이 작가를 보살펴 줘야 한다. 또 이 과정에서 감독과 작가가 서로에 대한 애정, 긍정적인 마인드, 즐겁게 작업하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이끌 어 갈 책임이 있다. 어쨌든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대본을 만드는 것이다. 대본 수정과 정에서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따져 보고 검증하면서 완 성고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서 이 작업이 가장 힘들고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다.

감독과 작가 감독과 작가는 같은 작업공간에 놓여 있지만 작업의 내용이나 방식이 너무도 달라 자칫 오해와 감정적 대립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서로 이 해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최완규 작가는 좋은 감독을 이 렇게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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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작가에게 영감과 도움을 주는 감독이 좋은 감독이다.”

SBS 감독 출신으로 지금은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장수 대표 는 이상적인 작가와 감독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상호 보완해 주는 관 계가 가장 이상적인 관계다.”

이처럼 작가와 감독의 관계는 대립관계가 아니다. 서로 밀착해서 공동 운명을 걸머지고 가는 관계인 것이다. 요즘 작가 교육원에서 강의 를 하는 선배 작가들은 젊은 후배작가들에게 연출자에 대한 적대감을 은연중에 고취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교육원을 갓 졸업한 젊은 신 인작가와 작품 협의를 시작하려면 우선 팔짱부터 끼고 앉는다. 시작부 터 아예 싸울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화가 될 리가 없 다. 작가의 권위, 저작권 수호, 표현의 자유 침해, 이런 거 따지다 보면 작품은 산으로 가게 마련이다.

“성 감독! 저작권 침해로 고소하겠습니다. 법정에서 봅시다.”

드라마가 막 방송이 끝났는데 전화벨이 울려 받았더니 수화기 저 편에서 들려온 작가의 목소리였다. 대사 몇 줄 고쳐서 찍은 게 방송 나 갔다고 이런 전화를 한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현장에서 블 로킹을 만들어서 찍다 보면 대사와 블로킹의 길이가 안 맞아서 대사를 조금씩 줄이거나 늘이거나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고 이건 대본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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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라 연출 행위에 속한다. 그걸 작가의 동의 없이 고쳤다고 저작 권 침해니 뭐니 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나 이가 나보다 연배여서 일단 사과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올라오는 화를 누를 수가 없어서 다시 전화했다.

“오케이! 꼭 법정에서 봅시다. 제 연출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방송 사에 연출자 교체를 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연출의 기 본을 다시 공부할 테니 선생님은 부디 앞으로 연출자를 아껴주는 작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는 짓을 했지만 당시 혈기왕성한 시절이다 보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것이다. 작가는 나름대로 시청률은 안 나오고, 살인적인 작업량에 지치고, 데스크는 수시로 전화 걸어 잔소리 를 해대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작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감독에 게 투정 좀 부린 것인데 너무 독하게 받아쳤다는 후회가 앞선다. 하여 간 관계가 이쯤 되니 작품이 잘 될 리가 없다. 감독이 컷에 애정이 없으 면 화면이 화장 안 한 배우의 얼굴처럼 건조해진다. 드라마에 기름기가 없고 드라이하고 푸석푸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이 드라마는 망 했고 예정된 횟수를 채우지 못하고 조기종영 되었다. 이래서는 안 된 다. 좋은 작가가 좋은 감독을 만들지만 또 좋은 감독이 좋은 작가를 만 들어 가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작가와 감독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보살펴 가며 상호 협력, 보완하는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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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줄

촬영 스케줄을 짜는 일은 대개 조연출의 몫이다. 외주제작의 경우 프로 덕션 매니저가 이 일을 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부분 외주제작사는 프로덕션 매니저가 감독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조연출이나 FD에게 이 일을 떠넘기고 있다.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어느 정도 연출 경험도 있 는 프로듀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스케줄은 곧 돈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조연출에게 일임한 다는 것은 그만큼 예산 낭비를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을 수 있다.

① 연기자의 개인 사정에 따라 촬영스케줄이 조정되는 경우 ② 스태프의 소속 회사의 일정에 따라 촬영스케줄이 조정되는 경우 ③ 촬영팀이나 조연출, 프로덕션 매니저가 개인적인 사정을 스케 줄에 반영하는 경우

이 모든 경우에 불필요한 경비지출이 초래된다. IMF 사태가 터진 후 각 방송사에서는 구조조정에 돌입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경비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진행비, 업무추진비, 제작 비 등을 30%씩 삭감했다. 심지어 월급 80만 원 받는 연출부 3rd, 4th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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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괄적으로 해고했다. 그러나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보이지 않는 곳에 서 돈이 새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경영자가 제작 현장 경험 부족으로 경비 절감을 위해 뭐가 더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를 모르 고 있기 때문이다. 스케줄을 효율적으로 짜서 촬영일수를 하루 줄인다 면 평균 800만 원 정도의 제작비가 절감된다. 따라서 유능한 조연출자, FD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그렇다면 조연출이나 FD의 임금을 조금 인상해서라도 유능한 조연출이나 FD를 확보하는 것이 효율적인 예산 집행을 위해 더 유리하다. 최적의 스케줄을 작성하고 이에 의거해 촬영일수를 줄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훨씬 더 효과적인 예산 절감 방법 인 것이다. 그러나 IMF 시대에는 이런 논리를 편다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당시 제작국의 분위기는 전시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국장 을 포함한 제작국 PD들은 일괄 사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고, 그중 일 부가 임의적인 선별 수리를 통해 회사를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합리 적인 사고가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작 현장의 프로세스와 디테일을 이해하고 있는 경영자라면 합리적인 예산절감 방안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케줄을 짜는 일은 대단히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이다. 그러나 제 작과정에서 절대로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다. 대학에서 영상 관련 학과 를 졸업하고 제작 현장에 조연출로 입사하면 가장 먼저 이 스케줄 짜는 일부터 하게 될 것이다. 조연출의 1차적인 능력은 스케줄 짜는 데서 판 가름 난다. 스케줄에는 야외로케이션 스케줄과 스튜디오 녹화 스케줄 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 두 가지가 짜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스 케줄의 최종 목표는 항상 최단 시간에 주어진 대본 분량을 카메라에 담 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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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케이션 스케줄 카메라가 스튜디오를 벗어나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아진다. 촬영팀 이 어떻게 움직여 가느냐에 따라 일정이 늘어날 수도 있고 신의 효율적 인 안배에 따라 촬영일수를 줄일 수도 있다. 연기자의 스케줄이나 낮과 밤, 고가장비의 동원 여부, 일출시간과 일몰시간, 심지어는 날씨나 도 로의 교통상황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야외 로케이션(location) 스케줄 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 촬영팀 동선 ② 연기자 스케줄 ③ 자연광선의 활용 여부 ∙ 낮(day) ∙ 밤(night) ∙ 새벽(twilight) ∙ 해질녘(skyline) ∙ 석양, 또는 황혼(evening) ③ 야간 신의 안배 ∙ 야간: 저녁 6시 이후 밤 12시까지 – 인건비 50% 추가 지급 ∙ 철야: 밤 12시 이후 종료 – 인건비 100% 추가 지급

실제로는 새벽 1∼2시 촬영 종료인 경우 제작비 절감을 위해 프로 덕션 매니저로부터 12시 종료로 처리해 주도록 요구받기도 한다. 철야 로 계산했을 때의 인건비와 24시 종료로 계산했을 때의 인건비가 많이 차이 나기 때문이다. 또 낮 시간이 길어지는 여름철 촬영의 경우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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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30분까지 낮 신 촬영이 가능하다. 이런 경우도 야간작업으로 계산하지 않고 6시 종료로 처리해 추가근무 수당을 계산하지 않도록 요 구받기도 한다. 이런 요구는 하청 형태로 일하는 스태프나 보조출연 회 사의 경우 거절하기 힘들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스튜디오 제작의 경우 새벽 3시를 넘기면 철 야로 계산된다. 철야근무를 했다는 것은 다음날 낮 시간을 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2시 30분에 녹화가 종료됐다면 스태프 들끼리 담합해서 제작일지를 3시 30분 종료로 기록하기도 한다. 그렇 게 하지 않으면 집에 가서 두 세 시간 자고 다시 나와 다음날 근무를 해 야 하기 때문에 이를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분명히 규정 위반이다. 제작 현장에서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규정이 잘 못되었다면 규정을 고치도록 요구해야 하고 규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이의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작스태프가 비정규직 인 현실에서 이런 요구사항을 회사 측에 제기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 운 일이다. 그래서 편법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현행 노동법상 밤 12 시를 넘으면 철야수당을 지급해야 하고 다음날은 쉴 수 있도록 규정하 고 있다. 그 외에도 고려할 사항은 또 있다.

① 고가장비(킹 크레인, 지미 집) ② 보조출연자의 숫자와 현장 대기시간

이 모든 것이 돈과 직결된다. 따라서 스케줄은 곧 돈이다. 자본을 투입하고 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배분하는 드라마 산업에서 돈은 대 단히 중요한 생산요소다.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최선의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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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인 스케줄을 짜는 것이다.

스튜디오 녹화 스케줄 야외제작과 스튜디오(studio) 제작은 완전히 다른 시스템으로 진행된 다. 제작 방식도 다르고, 제작에 참여하는 스태프들도 대부분 다르다. 한 작품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스튜디오와 야외 스태프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채 작품을 끝내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마 만날 일이 있다면 마 지막 회를 완성한 후 열리는 쫑파티쯤에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야외촬 영 스케줄과 스튜디오 녹화 스케줄은 각각에 작업 방식에 맞게 작성 방 법을 달리해야 한다.

대본 순서대로 짠다

스튜디오 녹화 일정은 대개 신 분할표에 기록된 순서대로, 다시 말하면 대본 순서대로 짠다. 특별한 경우 일부 신을 사전에 먼저 녹화하거나 사후에 녹화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필자 의 경우 사전 녹화나 사후 녹화는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첫 연습 때 공 지하고 끝까지 이 원칙을 고수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연기자가 자신의 출연 분량을 감안하여 연기의 호흡 조절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서다. 특정 연기자가 등장하는 신을 쉬지 않고 몰아서 녹화하면 당사자 의 연기도 부실해지지만 상대 배역과 그 외의 연기자들도 피해를 본다. 연기자는 플랜을 세워 한 신 한 신 차분히 준비해 가며 녹화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녹화 당일 날은 연기자에게 안정된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 방송사에서는 아늑하고 외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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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된 연기자 대기실을 마련해 두고 있다. 둘째로 배우들 간의 위화감 을 조성할 수 있다. 인기가 높거나 연장자라고 해서, 또는 감독과 친하 다고 해서 미리 녹화를 마쳐주고 그렇지 못한 배우가 남아 밤늦은 시간 까지 녹화를 해야 한다면 팀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다. 배우도 인간이 기 때문에 생체리듬이 중요하다. 밤 12시가 넘어 새벽에 하는 연기가 좋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가급적 대본에 의거해 신 순서대로 스튜디오 녹화스케줄을 짜야 한다. 주요한 배역일수록, 감독과 친한 배우일수록 이 원칙은 더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가피하게 순서가 바뀌는 경우

어쩔 수 없이 대본 순서를 벗어나 녹화 순서를 바꿔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의상이나 분장, 미용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녹화 도중에 변경 해야 하는 경우 기다리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 혹은 사후에 녹 화를 진행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연기자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을 경우, 울기 전 신을 모두 녹화하고 나서 마지막에 우는 신을 녹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우 는 장면을 연기하고 나면 분장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장뿐만 아니라 연기자가 눈이 충혈되어 다른 장면을 녹화하기도 어 렵게 된다. 또 한 배우가 젊은 시절과 노역을 번갈아 연기하는 경우는 노역 신을 먼저 녹화하고 나중에 젊은 시절을 녹화하는 것이 시간을 절 약할 수 있다. 노역 분장을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지우는 건 금방이기 때문이다. 연기자 얼굴에 상처가 나는 신은 아무리 분장이 오 래 걸리더라도 순서대로 찍을 수밖에 없다. 액션에 따라 어떤 부위에 어떤 형태로 상처가 날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또 상처는 조금씩 순차적 으로 아물기 때문에 순서를 바꿔서 찍다가는 분장이 튈 우려가 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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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 불가피하게 순서를 바꿔서 찍을 수밖에 없다면 분장 담당자는 별도로 사진을 찍어 상처의 크기와 각도 등을 세밀하게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 외에 잠자는 장면, 머리감는 장면, 목욕을 하거나 화장을 지우 면 장면 등은 보통 본 녹화 후 별도로 사후 녹화를 한다. 화장을 지우기 는 쉽지만 다시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스케줄은 촬영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작 현장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스튜디오 녹화와 야외 촬영 일반적으로 스튜디오에서 녹화할 것인지 야외 로케이션으로 촬영할 것 인지는 대본에 이미 정해져 있다. 작가가 이를 미리 감안해서 대본을 쓰기 때문이다. 스튜디오는 크기와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이 제한되어 있 다. 따라서 스튜디오 분량을 모두 배분하고 나면 넘치는 부분은 야외로 돌려 찍을 수밖에 없다. 야외촬영 분량이 많을수록 제작비는 늘어난다. 대규모의 인력과 차량, 장비 등이 동원되고 숙박비나 식비가 별도로 지 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녹화는 보통 하루에 작업 분량을 모 두 마치도록 되어 있다. 다음 날은 다른 프로그램이 잡혀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자정이 넘기 전에 녹화를 마쳐야 세트를 철거하고 새로운 세트를 세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야외촬영은 한 대의 카메라로 한 컷씩 촬영하기 때문에 감독이 컨 트롤하기 쉽다. 그러나 스튜디오 녹화는 연기자와 기술스태프, 카메라 등이 서로 호흡을 맞춰야 하고 녹화와 동시에 편집이 거의 끝나기 때문 에 잘못되면 신의 첫 부분부터 다시 녹화해야 하는 등 컨트롤이 쉽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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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래서 초보 감독일수록 스튜디오 메이킹(studio making)을 피하 고 자꾸 야외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야외 로 케이션은 비용이 많이 들뿐 아니라 신의 특성에 따라서 야외보다 스튜 디오가 훨씬 더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스튜디오 메이킹에 익숙해 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표 28-1 스튜디오 메이킹과 야외 로케이션 STUDIO

야외

카메라

2 ∼ 5대

기본적으로 1대

조명

평면적, flat

입체적

오디오

상태 좋음, 깨끗함

거리소음 등 노이즈 발생

Angle

제한적

무제한

녹화속도

빠름

느림

연기자

감정흐름 좋지만 컨트롤 어려움

감정흐름 단절, 컨트롤 쉬움

미술

제한적, 인공적

무제한적, 자연적

편집

녹화와 동시에 완료, 수정 어려움

가변적, 수정 쉬움

러닝타임

짧아짐

길어짐

Blocking

연기 : 제한적, 카메라 : 어려움

연기 : 자유로움, 카메라 : 쉬움

제작비

추가비용 없음.

스태프출장비, 인건비, 연기자 야외수당 등 추가비용 발생

제작기간

거의 스케줄과 동일

스케줄보다 늘어나기 쉬움

촬영환경

안정적 (날씨, 낮과 밤의 전환, 위험도, 외부소음)

불안정

장르별 선호도

연속극(일일, 아침, 주말)

미니시리즈, 드라마스페셜, 특집

스태프의 근무형태

매일 다른 프로그램 제작

한 프로에 전념

스태프의 소속

주로 정규직원 (봉급생활자)

주로 외주형태의 비정규직 (프리랜서)

강점

감성선, 오디오 흐름 부드러움

영상미 추구 가능

342


요즘 젊은 감독들이 스튜디오를 기피하고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하 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인데 첫째, 스튜디오 스태프는 대부분 방송 국 정규직원인 데다 나이 많은 고참 직원이 많아 통솔이 쉽지 않다는 것 이다. 반면 야외촬영에 참여하는 스태프는 외부 업체의 비정규직 직원 들이 대부분이어서 감독이 장악하고 작업을 끌고 가기가 훨씬 용이하

표 28-2 야외촬영 스케줄 작성 예시 <사랑한다 웬수야> 야외촬영스케줄 2005년 7월15일(금) 출발시간 05:00

촬영지

S#

P#

D/N

장소

등장인물

내용

미술/비고

신촌 로터리 5번 출구

5

41

126

D

어학원 강의실

종세, 선생님, 수강생들

회화 공부하는 종세

6

10

19

D

어학원 안

종세, 수강생들

지수에게 연락하는 종세

핸드폰, 시계

6

1

1

D

어학원 안

무찬, 수강생들

종세를 기다리는 무찬

시계

6

3

8

D

어학원 안

무찬, 수강생들

종세를 기다리다 화가 난 무찬

시계

6

7

14

D

어학원 안

무찬, 수강생들

종세에게 바람 맞고 욕하는 무찬

시계

5

46

137

D

어학원 앞

종세,순지, 무찬, 종세기사

순지를 발견하고 뒤쫒는 종세

순지차, 종세차,시계

6

9

18

D

어학원 앞

종세

급하게 무찬과 약속을 지키러온 종세

종세차

5

19

60

D

미장원 앞

순지,미향, 40대 신사

신사와 교습 받으러 출발하는 순지

순지차

5

23

72

D

순지 순지,무찬 머리방 앞

운전하고 돌아와 무찬과 만난 순지

순지차, 핸드폰

6

50

107

D

순지 순지,달평, 정민 머리방 앞

달평과 마주친 순지와 정민

조란차

신촌학원 (진흥빌딩)

일산 문촌 6단지

아쿠아 미용실

343


표 28-3 스튜디오 녹화 스케줄 예시 <사랑한다 웬수야> 녹화스케줄 2005년 8월23일(화) 리허설 11:00

녹화 순서

S#

P#

D/N

장소

등장인 물

미술

1

15

6

N

조란 거실

조란,달평

가방

2

15

7

N

종세 오피스텔

종세,달평

3

15

8

N

종세 오피스텔

종세,달평

소주

4

15

9

N

해강 안방

해강

잠옷

5

15

10

N

조란 거실

조란

가방

6

15

13

아침

해강 주방

해강,순금,명길

아침식사,반창고

7

15

14

아침

해강 거실

해강

8

15

16

아침

해강 거실

해강

9

15

24

N

종세 오피스텔

종세,달평

소주,신문지

10

15

25

N

조란 거실

조란,달평

11

15

26

N

조란 주방

조란,달평

와인,잔,꽃

12

16

7

N

조란 거실

조란

13

16

8

N

조란 주방 (회상15회#26)

조란,달평

14

16

9

N

조란 거실

조란

15

16

11

N

조란 거실?

조란

16

16

16

N

조란 거실

조란,달평

여행가방

17

16

18

N

조란 안방

조란,달평

18

16

19

N

해강 안방

해강,명길

19

16

20

N

종세 오피스텔

종세,해설F

344


다. 그래서 젊은 감독일수록 야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 여 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컨트롤하며 녹화하는 일은 상당기간의 경험 과 숙련된 테크닉이 필요한 작업으로 섣불리 시도했다가 실패하기가 쉽다. 그래서 경험이 부족한 신인 감독들이 스튜디오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 이유는 스튜디오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어 화각이 답 답하고 배경이 단조롭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스튜디오 작업을 기피하는 경향이 점점 많아짐에 따 라 스튜디오 메이킹 능력을 갖춘 감독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스튜디오 작업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로케이션 촬영이 따라올 수 없는 강점들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스튜디오 작업을 기피하 거나 겁을 내서는 안 된다. 유능한 감독이 되고자 한다면 스튜디오와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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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콘티뉴이티

연출자의 일은 대부분 콘티에서 시작해서 콘티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연출자에게 콘티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이며 그 누구 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오로지 연출자 자신이 혼자 해야 한다. 많은 연출 자들이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콘티 작업에 지쳐 버리기도 하는데 그만큼 많은 시간과 정신에너지가 소모되는 작업이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며 연출 행위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일이다. 콘티를 짜는 과정에서 대본의 해체는 불가피하다. 드라마의 흐름 을 끊어내고 토막 내어 최소단위로 나누고 그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콘티는 궁극적으로 유연한 흐름과 연결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으로 전환될 때 드라마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선상에 있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 하나하 나의 연출 과정에서 장면은 수없이 단절되고 많은 컷들로 시간과 공간 이 분할되지만 시청자들이 그 단절을 느끼도록 해서는 안 된다. 드라마 를 보는 내내 다양한 극적 요소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되도록 해야 한다. 콘티의 최종 목표는 극의 유연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따라 서 관객으로 하여금 ‘누군가 화면 뒤에서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면 그것은 좋은 콘티라 할 수 없다. 시청자가 극의 흐름에 몰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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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출이 보이는 연출’은 실패다.

콘티란 무엇인가? 콘티뉴이티(continuity)란 사전적 의미로는 ‘연속, 계속, 연속성’이란 뜻 이다. 작가가 쓴 대본은 글(writing)로 이루어져 있다. 콘티는 이를 소 리(audio)와 그림(video)으로 변환하기 위한 일종의 계획표 같은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콘티 작업은 스토리의 영상화 과정에서 유연하고 연 속성 있는 장면의 흐름을 만들기 위해 영상과 사운드의 수집 및 편집에 관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컷과와 컷 사이에, 신과 신 사이에,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연속성을 잃어버리면 드라마 는 일관성과 균질성을 잃고 산만해진다. 여행자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 기 위해 지도를 가지고 다니듯이 콘티는 드라마가 길을 잃지 않고 연속 성을 유지하면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지도 같은 것이다.

연출용 대본

콘티를 짠다는 것은 영상화(visualization) 작업을 위한 연출자의 사전 준비과정이다. 따라서 콘티에는 연기자의 액션, 카메라 앵글, 음악효과 와 음향효과 등 연출과 관련된 세부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고 이 같은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는 연출용 대본을 콘티 대본이라 한다.

347


스토리 보드

각 컷의 화면구성을 간단하게 스케치해서 그려 넣은 것을 그림콘티라 한다. CF촬영은 대부분 그림콘티를 사용한다. 쉽게 말하면 만화의 컷 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그림콘티를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것을 스토리보드라 한다. 스토리보드(storyboard)란 영화나 텔레비전 광고 또는 애니메이션같은 영상물 제작에서 영상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장면의 구성요소, 카메라의 포지션과 앵글, 화각, 연기자의 블로킹 등 필요한 정보들을 미리 약속된 기호에 의해 장면별로 간단히 스케치한 것을 말한다. 스토리보드에는 촬영 및 편집 시에 필요한 전체적인 정보 가 담겨 있기 때문에 제작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는 데 유 용하게 쓰이며, 촬영 및 편집을 하는 데에도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좀 더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영화에서는 대부분 크랭크인 전에 그림콘티를 작성하며 이 작업에 는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이란 화 면에 나타나는 영화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토털 디자인하는 일로, 색채, 소품, 세트, 의상, 분장, 로케이션 등 영화의 모든 시각 요소를 망라하는 작업을 말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영화의 시각적 요소를 중시하는 요즘의 추세와 맞물려 점차 그 역할과 활동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텔 레비전드라마에서는 미술감독(Art Director)이 화면의 모든 시각적 요 소를 통괄하고 있는데 텔레비전드라마의 특성상 많은 작업량과 빠듯한 일정 등으로 스토리보드를 따로 작성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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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티에 표현되어야 할 것들 사이즈

사이즈(size)란 한 숏에 담긴 시계(視界)의 범위를 말한다. 넓게는 익스 트림 롱숏(Extreme long shot)부터 빅클로즈업숏(Big close-up shot) 까지 감독은 다양한 화면 사이즈를 조합해 가며 이야기의 흐름을 매끄 럽게 이어 준다. 드라마에서 흔히 쓰이는 사이즈는 다음과 같다.

롱숏(long shot), 풀숏(full shot), 타이트풀숏(tight full shot), 그룹 숏(group shot), 니숏(knee shot), 웨이스트숏(waist shot), 바스트 숏(bust shot), 타이트바스트숏(tight bust shot), 클로즈업숏(close up shot), 빅클로즈업숏(big close up shot)

위에 열거한 사이즈는 편의상 대개 다음과 같이 약자로 기록한다.

LS, FS, TFS, GS, KS, WS, BS, TBS, CS, BCS

사이즈의 핵심은 관객과 피사체와의 거리다. 카메라는 관객의 눈 을 대신해 피사체를 바라본다. 연극배우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와 서 초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이 사이즈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 다. 사이즈란 무대연기로 치면 배우와 관객과의 전달거리에 해당한다. 무대연기는 모든 관객에게 공평하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대사도 힘차고 액션도 크고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카메라 연기에서는 연기자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에 맞게 대사의 크기와 액션의 강도를 조 절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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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연기에서는 카메라 렌즈가 곧 관객의 눈이기 때문에 렌즈 가 가까이 있다면 연기도 그만큼 작고 디테일해져야 할 필요성이 대두 된다. 영상메시지의 전달에서 피사체와 관객의 눈을 이어주는 것이 카 메라이고 따라서 카메라의 사이즈는 피사체와 관객의 눈 사이의 거리 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전달거 리의 차이, 즉 사이즈 변화에 대한 개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움직임

드라마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 움직임이 없다면 그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자연스런 모습이 아니다. 연기자와 배경, 카 메라의 위치와 높이, 사이즈, 포커스 등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동감 있는 화면을 만들어 내고 이런 화면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구현하 고 있는 것이다. 콘티상의 이런 움직임(Blocking)들은 감독에 의해 계 획되고 조직되는 것이며 이러한 감독의 계획을 디테일하게 적어놓은 것을 콘티대본이라 한다. 콘티에 있어서의 움직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다.

① 카메라의 움직임: 팬(pan), 틸트업/다운(tilt up/down), 붐업/ 다운(boom up/down), 달리인/아웃(dolly in/out), 트래킹 (tracking), 아크(arc), 크레인업/다운(crane up/down) ② 카메라맨의 움직임: 들고 찍기(hand held), 픽스(tripod), 스테디캠 ③ 렌즈의 움직임: 줌인/아웃(zoom in/out), 포커스인/아웃(focus

in/out) ④ 피사체의 움직임: 프레임인/아웃(frame in/out), 폴로(follow, 다가오기, 멀어지기, 옆으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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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 이래로 마치 스틸사 진 같은 정지된 화면만으로 구성하는 영상 표현에 한계를 느낀 감독들 은 화면의 내용물의 움직임 말고도 화면 자체가 움직여 가며 찍는 방식 을 원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카메라를 장착해 자유로운 움직임을 줄 수 있는 부속 장비가 발달하게 되었다. 트라이포트 헤드 위에 롤러를 달아 카메라가 상하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기술은 물론이고 페데스탈 (pedestal)을 이용해 앵글의 변화를 주거나 크레인, 달리, 트래킹 등 별 도의 촬영 장비를 활용해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촬영기술이 발 달했고, 이에 따라 역동적이고 속도감 있는 연기자의 블로킹도 가능해 졌으며 카메라 콘티를 활용한 영상연출기법도 다양하고 무한한 표현의 세계로 그 영역을 확장해 왔다. 피사체나 카메라 바디(Body)의 움직임 외에도 헤드에 장착된 렌 즈를 이용한 줌인이나 줌아웃, 포커스 이동 등의 기법은 영상예술에 혁 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가장 자유롭고 돈이 안 드는 카메라 블로킹은 역시 들고 찍기(hand-held)이다. 들고 찍기는 빠르게 스쳐지 나가는 피사체를 좌우로 폴로(follow)하거나 액션이 격렬하고 빠른 격 투 장면 등을 찍는 데 대단히 유용한 카메라 블로킹이다. 또한 들고 찍 기는 생동감, 급박함, 현장감 등을 표현하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다. 들 고 찍기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영상적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일부 감 독들이 꺼리는 이유는 카메라맨의 발걸음이나 호흡 등이 만들어 내는 흔들림이 영상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카메라맨이 마음대로 움직여가 며 촬영하더라도 흔들림이 없는 장비에 대한 열망이 커짐에 따라 스테 디캠(steadicam)이라는 혁신적인 장비가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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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

앵글(angle)이란 넓게는 ‘화면의 구조와 미학적 지향성’이라는 의미로 종 종 사용되곤 한다. 이를테면 연출자와 카메라맨의 표현 스타일이나, 취 향, 영상의 질적 완성도 전반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그 감 독은 앵글이 예쁘다”든가, “앵글이 왜 이렇게 엉성해?” 등등의 표현에서 사용되는 앵글이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드라마 제작 현 장에서 주로 쓰이는 좁은 의미의 ‘앵글(angle)’로 그 의미를 한정하고자 한다. 앵글은 좁은 의미로 ‘카메라의 각도나 높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① 표준각(normal angle, eye level) 보통의 숏에서 카메라 렌즈의 높이는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는데 가장 흔히 쓰는 앵글이라는 뜻에서 노멀 앵글(normal angle)이라 하고 배우의 눈높이에 렌즈를 맞춘다고 해서 아이레벨(Eye level) 이라고도 한다.

② 부감(俯瞰, high Angle) 아이레벨보다 위쪽에서 내려찍는 앵글. 전통적으로는 고독, 외로 움, 인간의 왜소함 등을 표현하는 앵글로 알려지고 있지만 요즘에 는 자연의 웅대함이나 운집한 군중의 집단적 움직임, 또는 영화의 오프닝이나 라스트 신에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에 새로 운 촬영장비가 속속 개발됨에 따라 큰 의미 없이 흔히 쓰는 앵글이 되었다.

③ 앙각(仰角, low angle) 아이레벨보다 아래쪽에서 올려 찍는 앵글. 인물을 다소 위압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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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느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인물의 신체 구조 가 왜곡되게 보일 위험이 있어 흔히 쓰는 앵글은 아니다.

④ 와이드 앵글(wide angle) 광각렌즈 또는 어안(魚眼)렌즈를 사용하여 피사체로부터 가까운 위치에 카메라를 배치하더라도 넓고 전체적인 배경을 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앵글. 원근감이 과장되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피사체 를 실제보다 더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효과는 조그 만 스튜디오 무대를 상당히 넓게 보이게 하고 심지어 대단한 규모 인 것처럼 착각하게도 한다. 와이드렌즈를 사용하여 촬영할 때 피 사체를 아주 가까이 접근해서 촬영하는 것은 금물이다. 화면에 가 득 찬 사람의 얼굴은 왜곡되어 징그럽고 심지어는 괴물처럼 보이 게 한다. 비좁은 방 안이나 엘리베이터 내부, 또는 내용상 꼭 와이 드 앵글 효과가 필요한 경우 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 심도가 깊어 화면에 담기는 거의 모든 피사체의 포커스가 모두 잘 맞아 특정 피 사체에 대한 집중도는 다소 떨어지는 반면 롱숏(long shot)이나 풀 숏(full shot)에서 전경을 세밀하고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장 점이 있다. 야간에 와이드 앵글을 사용할 경우 배경이 넓어진 만큼 더 많은 조명량이 필요하게 되어 시간과 비용이 늘어나는 단점이 있다.

⑤ 내로 앵글(narrow angle) 망원렌즈를 사용하여 카메라 앞에 있는 피사체의 한정된 부분만을 보여 주는 앵글. 카메라가 피사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근접 해서 촬영한 것 같은 효과를 얻는다. 심도가 얕기 때문에 포커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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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예민하다. 더운 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도로나 철길에 서 망원렌즈를 사용하면 뜨거운 공기의 흐름에서 발생한 회절(回 折, diffraction) 현상 때문에 아지랑이가 화면 전체에 아른거리는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촬영할 수 있다. 오후 광선에서 역광을 받 는 인물을 망원렌즈로 촬영하면 고스트 이미지(ghost image)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숏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멜로물에서 즐겨 쓰는 앵글이다.

⑥ 사각(斜角, canted angle) 카메라를 수평 상태에서 벗어나 기울여서 촬영하는 앵글. 역동적 이고 아슬아슬한 긴박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앵글이지만 안정감은 없다. 극영화나 텔레비전드라마에서는 인물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 태를 표현하기 위해 가끔 사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리얼리티를 떨 어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거의 쓰지 않는다. 요즘은 교양이나 예 능프로그램에서 지루함을 덜고 관객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끌기 위 해 이런 앵글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너무 가볍고 진정성 없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화면은 시청자 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너무 자주 사용해 서는 안 될 것이다.

시점

시점(視點, Point of View)이란 화면을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를 결정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시점이라면 이는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 보는 것이다. 전형적인 객관적 시점의 숏은 오버숄더(over shoulder) 숏으로 듣는 사람의 어깨를 걸쳐서 카메라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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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숏이다. 이보다 더 완벽하고 철저한 객관 숏이라면 롱숏이나 풀숏을 들 수 있겠다. 이와는 달리 화면 안에 있는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바라 보는 풍경이나 사람이라면 주관적인 숏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연 기자가 어느 특정한 지점을 바라보는 바스트숏 다음에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보여 준다면 이는 그 연기자가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숏이므로 주관적인 숏이라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교차편집 되며 진행되는 바스트숏은 객관 숏 중에서도 가장 주관적인 특성을 가진 객관 숏이라 할 수 있겠다. 간혹 학생들이 POV숏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아마 주관적 시점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POV란 단순히 Point of View의 약자로 주관과 객관을 표현하는 적합한 용어는 아니다. 제작 현장에서는 주로 ‘시선 컷’, 또는 ‘시야 컷’이라고 표현한다. 콘티 작성 시 주관 혹은 객관의 시 점도 필요한 경우 적어 주어야 한다.

주관적 시점

주관적 시점(Subjective point of view)에서 카메라는 등장인물의 눈이 된다. 인물이 카메라 렌즈를 직접 보거나 등장인물의 시선에 보이는 풍 경을 카메라가 보여 준다. 한마디로 등장인물의 눈에 비친 세상을 카메 라가 대신 보여 주는 것이다.

객관적 시점

객관적 시점(Objective point of view)에서 카메라는 관객의 눈이 된다. 투숏(2S)의 경우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연기자의 어깨너머에서 마주보 고 있는 연기자를 찍는 것을 오버숄더숏(over shoulder shot)이라고 하 는데 대표적인 객관적 시점의 숏이라 할 수 있다. 원숏(1S)에서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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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렌즈 바로 옆, 또는 상대역의 눈을 바라보고 연기한다. 이 경우 카메 라는 상대역의 어깨 옆에서 찍는다. 이는 제3의 관찰자, 즉 시청자의 관 점을 카메라가 대변해 주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가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금물이다. 관객과 시선이 마주치기 때문이다. 간 혹 배우가 화면 속에 설정된 카메라를 보고 연기하는 경우 화면 속의 카 메라의 시점으로 표현되는 숏은 렌즈를 직접 보고 연기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극 중 배우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관객과 직접 시선을 마 주하게 되는 상황은 그리 흔치 않다.

음악과 효과 음악(music)

감독의 콘티에는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촬영할 때 음악을 사용할 것 인지의 여부에 따라, 혹은 어떤 리듬과 템포의 음악을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카메라워크나 연기자의 연기 및 편집의 리듬 등이 달라지므로 콘 티에는 음악적 고려가 반영되어야 한다. 감독은 사전에 어느 부분에 음 악을 사용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사용할 것인지를 음악감독이 나 작곡자와 충분히 협의해서 결정해야 하고 멜로디와 리듬, 템포 등 음 악적 흐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효과(effect)

음악과 대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운드는 효과의 영역이다. 효과음의 표현영역은 거의 무한대라 할 수 있으며 때로는 영상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훌륭한 표현도구다. 영상을 잘 다루고자 한다면 사운드에 대 한 정확한 개념과 다양한 활용법을 경험을 통해 익혀야 한다. 영상 이 전에 사운드가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사운드를 이용해 영상의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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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영역을 확대해 나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콘티에 표현 되어야 할 효과음은 크게 다음 네 가지 정도다.

① 오프(off) 대사: 화면에 배우가 보이지는 않지만 대사를 해야 하 는 경우 ② 마음의 소리: 배우의 마음속의 목소리. 현장에서는 들리지 않지 만 관객의 귀에는 들린다. 연극의 ‘방백(傍白)’ 같은 것이다. ③ 전화 목소리(filter):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 ④ 효과음: 천둥치는 소리, 전화벨소리, 자동차가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 등 현장에서 픽업하지 못하는 효과음

콘티 대본에는 위의 다섯 가지가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어야 한 다. 이는 주로 스태프나 연기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콘티란 촬영 직전까지 끊임없는 수정을 거치며 최적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 노력의 일환이며 그런 점에서 감독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콘티에 관한 몇 가지 오해들 콘티는 쪼개는 것이다?

우리가 대본을 분해하고 시간과 공간을 분할해 하나의 컷 단위로 촬영하 는 것은 영상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콘티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극의 흐름을 유연하게 이어가는 데 있다는 것을 잊어 서는 안 된다. 콘티는 쪼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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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티는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감독의 문제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 라 무엇을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앨프리드 히 치콕 감독은 “영화란 지루한 부분이 컷된 인생이다”고 했다. 이처럼 콘티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 보여 주지 않아야 될 것, 지루 한 것들을 화면에서 배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연출자는 무엇을 화 면에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드라마의 흐름에 장애가 되는 것 들을 화면 밖으로 쫒아내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보여 주기 위해 애쓰 기보다는 불필요한 것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뭔가를 화면에서 배제하 려는 노력이 콘티 작업의 핵심이다.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짠 콘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드라마가 누군가에 의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연출자의 존 재가 느껴지는 연출은 좋은 연출이라 할 수 없다. 시청자가 극의 흐름 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있도록 연출은 화면 뒤에 숨어 있어야 한다.

콘티는 사전에 완벽하게 짜서 촬영에 임해야 한다?

콘티는 촬영 현장에 가면 틀림없이 달라진다. 현장 주변의 상황이 상상 속에서 짠 콘티를 그대로 구현할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실제 연기자 를 배치하고 리허설하는 과정에서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 의 콘티는 연필로, 그다음은 검정 펜으로, 그다음은 빨간 펜으로…. 이 런 식으로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여지를 두어야 한다. 이 세상에 완 벽한 콘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콘티는 수정을 거듭할수록 좋아 진다. 콘티는 현실과의 끊임없는 타협이다. 아무리 이상적인 콘티를 짰 더라도 촬영 현장에는 항상 돌발변수가 생길 수 있고, 더 좋은 아이디어 가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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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이 완벽하게 좌우대칭인 경우는 드물다. 연기자의 얼굴 도 좌우의 각도에 따라 조금씩 느낌이 달라진다. 따라서 배우의 얼굴이 더 아름답게 보이거나, 본인이 자신 있어 하는 방향으로 카메라 위치를 조정해 촬영을 해야 할 경우가 종종 생긴다. 또 화재 장면이나 대형 폭발 장면 등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며 두 번 찍기도 힘들다. 따라서 당연히 두 대 이상의 카메라를 동원해 NG없이 촬영을 마칠 수 있도록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감안해 콘티의 일정 부분을 여백으로 남 겨 두어야 한다. 새벽 신이나 석양 신을 과도하게 쪼개서 제한된 시간 에 촬영을 끝내지 못한다면 재촬영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처럼 주어진 현실과 여건에 맞게 콘티를 가변적으로 운용하는 것도 감독의 역량에 속한다.

연기자의 블로킹은 콘티에 맞추어야 한다?

간혹 감독의 콘티가 현장에서 배우의 연기 플랜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 다. 예를 들어 배우는 몸을 움직이면서 연기를 해야 자연스럽다고 주장 하고, 감독은 배우가 움직여 버리면 신 전체의 콘티가 흐트러져 버리니 제자리에 서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 감독이 라는 지위를 내세워 배우의 의견을 묵살한 채 촬영을 강행하게 되면 반 드시 뭔가 손해를 보게 된다. 배우의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을 가로막은 대가를 편집실에 와서 톡톡히 치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항상 배우의 의견이 옳은 것은 아니다. 한 작품의 블로킹 설정 과 감정선에 관해서 감독만큼 깊이 고민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감독의 콘티가 연기자의 감정선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는 경우가 대부 분이지만 만일 현장에서 연기자가 어색해 한다면 콘티에 맞추라고 강 요하기 보다는 재빨리 콘티를 수정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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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적으로 유리하다고 본다. 만일 끝내 자신이 옳다고 생각될 때는 두 가지 버전으로 찍어 보는 것도 권할 만한 일이다. 배우의 감정선을 중 시한 콘티와 감독의 블로킹 플랜을 중시한 콘티 두 가지를 모두 찍어 두 는 것이다. 그리고 편집실에 와서 결정하면 된다. 이런 경우 결과적으 로 배우의 감정선에 따른 콘티가 훨씬 더 부드러운 흐름을 이어가고 있 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콘티는 감독 마음대로 짜는 것이다?

콘티는 돈과 직결된다. 고가의 특수 장비가 동원되고 많은 보조출연자 필요한 몹신의 경우 롱숏이나 풀숏을 원 없이 찍고 싶은 마음이야 어느 감독인들 없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시간과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니만큼 신의 중요도에 따라 욕심을 내려놓는 것도 감독이 해 야 할 몫이다. 효율적인 예산 배분을 위해 콘티를 조절하는 것은 연출 의 기본에 속한다.

콘티는 매 컷마다 임팩트와 텐션이 느껴지게 짜야 한다?

드라마는 강물이 흐르듯 흘러가야 한다. 강물이 때로는 굽이치고, 격류 를 이루거나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도 하지만 잔잔한 흐름도 분명히 있 다. 콘티 역시 강력하고 힘 있는 영상으로 몰아치기도 하지만 쉴 때는 쉬어갈 줄 알고 버릴 것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시종일관 힘을 주는 콘티는 보는 사람을 긴장시켜 피곤한 느낌을 주고 쉽게 지치게 한다. 콘티는 드라마라는 강물을 타고 떠가는 나룻배처럼 물살의 강약과 완 급을 타고 흘러가야 한다. 콘티는 매 신의 기능과 중요도에 따라 리듬 과 템포가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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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티 연출

예술은 규칙이나 법칙을 혐오한다. 그러나 어느 예술 분야에서든 초보 자들이 배움의 과정에서 숙지하고 지켜야 할 기초적인 원칙들은 있다. 영상의 세계에서도 구성(framing)이나 구도(composition), 혹은 넓은 의미로 앵글(angle)이라 하는 ‘화면의 구조와 미학적 지향성’을 특정 짓 는 기본 원칙들이 존재한다. 앵글을 구성하고 화면의 구도를 잡는 데 일반적으로 많은 연출가들과 카메라맨들이 경험적으로 체득한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 물론 초보자들이 반드시 이를 따라 할 필요는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여기서 벗어나 규칙을 파괴하고 나름대로의 영상을 구현 하려면 이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원칙을 충분히 이해하고 여기 서 벗어나는 것과 모르고 벗어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장에서 는 감독이 콘티를 구성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 기본 원칙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헤드스페이스 배우의 머리 위로부터 프레임 상단 부분까지의 공간을 헤드스페이스 (head space), 또는 헤드룸(head room)이라고 한다. 마이크맨(또는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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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터)과 카메라맨의 끊임없는 마찰의 원인은 바로 이 헤드스페 이스에 있다. 오디오 맨은 조금이라도 더 음원과 가까운 위치에서 집음 (集音)하려고 마이크를 내려뜨리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카메라맨이 화면의 사이즈를 좁혀 주어야 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카메라맨은 가급 적이면 넓고 시원한 앵글로 영상미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오디 오의 정밀도와 앵글의 사이즈는 수시로 부딪치기 마련이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의 해결책은 세 가지다. 첫째는 와이어리스 마이크(wireless microphone)를 사용하여 연 기자의 옷 속에 집음 장치를 숨기는 것이다. 그 결과로 화면은 자유로 워진다. 그러나 연기자의 움직임에 따라 옷과 마이크가 스치는 소리가 함께 픽업되거나 붐 마이크가 픽업한 사운드와 음질이 달라져 오디오 의 균질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둘째로는 오디오의 픽업을 위해 사이즈를 좁힌 별도의 테이크(only audio take)를 촬영해 두는 방 법이다. 이 경우 연기자는 같은 연기를 두 번 해야 하고 대사의 스피드 나 톤을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 세 번째는 아예 동시녹음을 포기하고 영상만 찍는 방법이다. 대사는 포스트프로덕션에서 후시녹음으로 입 힌다. 이 경우 연기자의 스케줄과 녹음실의 스케줄을 한 번 더 조율해 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화면의 사이즈에 따라 헤드스페이스의 비율은 달라진다. 다음의 그림은 각각 TFS와 KS, WS, BS의 예다. 사이즈가 타이트해질수록 헤드 스페이스가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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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1 TFS의 헤드스페이스

그림 30-2 KS의 헤드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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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3 WS의 헤드스페이스

그림 30-4 BS의 헤드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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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분할선 화면을 가로 3등분과 세로 3등분한 선을 황금분할선이라 하고, 각 선이 교차되는 4지점을 교점이라 한다. 화면에 배치되는 모든 주제와 부제 를 황금분할선 또는 그 교점에 위치시키면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얼굴은 대표적인 부위이고, 얼굴에서도 대표 적인 부위는 눈일 것이다. 실제로도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근 접해 있는 상대방을 볼 때 눈을 가장 먼저, 가장 빈번하게 본다. 화면에 서도 마찬가지다. 눈은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대개 의 카메라맨은 인물을 찍을 때 포커스는 당연히 인물의 눈에 맞춘다. 가장 텔레비전적인 사이즈로 일컬어지는 BS 화면에서 눈의 최적 위치 는 화면의 중심선과 프레임의 3분의 2가 되는 선의 사이가 된다. 즉 황 금분할선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림 30-5 황금 분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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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숄더숏(over shoulder shot) 에서도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인 물의 뒷모습을 어느 정도 비율로 프레임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결정할 때 황금분할선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루킹룸 루킹룸(looking room)이란 피사체가 특정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 는 장면에서 그 방향으로 비워지는 화면 공간을 지칭한다. 연기자가 특

그림 30-6 자연스러운 루킹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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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7 부자연스러운 루킹룸

정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바라보는 방향으로 적당한 여백을 남겨야 안정감 있는 화면을 얻을 수 있다. 시선 방향 쪽으로 공간을 조금 더 비 워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비슷한 용어로는 노즈룸(nose room) 이 있다.

리드룸 카메라가 피사체의 움직임을 따라갈 경우 피사체의 진행 방향으로 공 간을 조금 더 비워 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일 진행 방향과 반대되는 쪽에 공간을 많이 비워 두면 시청자는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각각의 피사체가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가고 있으므로 피사체의 진행 방향인 오른쪽에 여백을 조금 더 두어 화면의 안정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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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8 리드룸을 확보하며 따라가는 화면

얻을 수 있다. 루킹룸이나 리드룸은 카메라 워크에 따른 구분이다. 정지된 화면 (fix)이냐 움직이는 화면(follow)이냐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지 는 것일 뿐 ‘피사체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비워지는 여백’이라는 점 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스크린스페이스 화면 중앙이 비지 않도록 인물과 인물의 간격을 알맞게 좁힘으로써 화 면이 꽉 찬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보는 사람의 몰입을 흐트러뜨리지 않 을 수 있다. ⓐ의 위치에서 카메라를 잡았다면 그림 Ⓐ와 같은 화면이 나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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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9 스크린 스페이스

그림 30-10 적당한 스크린 스페이스

이다. 화면의 중앙이 비어 있어 뭔가 허전하다. ⓑ의 위치라면 그림 Ⓑ 처럼 빈 공간이 적당하게 느껴진다. ⓒ의 위치에서 잡으면 빈 공간이 너무 없어 답답할 것이다. 이럴 때는 그림 Ⓒ처럼 화면의 사이즈를 좁 혀 여백의 불균형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처럼 화면에 배치되는 인물들 사이의 공백을 적당하게 조절하면 안정감 있는 화면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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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라인 시점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에 그어진 가상의 선을 이미지라인(image line)이라고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 하고는 카메라는 이 선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 선을 넘어가 면 관객은 공간과 공간 속에 배치된 인물 간에 만들어진 균형을 잃게 되 어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두 사람 이상이 배치된 화면에서 그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미지라인도 급격하게 변해 간다. 이때 연출자는 이미지라인을 잃어 버리기 쉽다. 이미지라인이 헝클어지면 배우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신 전체가 엉망이 되는 수가 있다. 연출자에게 이미지라인은 연출능력과 직결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액션 축(axis of action)’ 혹은 ‘동작 축’ 이라 하고 이러한 이미지라인의 원칙을 ‘180도 법칙(180 degree Rule)’ 이라고도 한다. 카메라가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의 위치에서 잡으면 그림 30-11 Ⓐ와 같은 숏이 나올 것이다. 이후 이미지라인을 넘지 않으면 그 림 30-11의 Ⓑ와 그림 Ⓒ처럼 자연스럽게 마주보는 시선방향으로 커트 편집이 이루어질 수 있다. 만일 이미지라인을 넘어가서 ⓓ의 위치에서 잡으면 30-11의 그림 Ⓑ와 그림 Ⓓ처럼 두 인물이 같은 방향을 보게 되 어 관객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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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11 이미지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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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라인을 넘어가는 방법 이미지라인은 때로 연출자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촬영현 장의 구조상 카메라가 이미지라인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고 특정 인물의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피하고 싶지만 이미지라인 때문 에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몇 가지 원칙만 지키면 이미지 라인을 넘어서 커트를 진행할 수 있다. 이미지라인은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고정 불변의 장벽은 아니다.

그림 30-12 공간적 제약으로 인한 이미지라인 변경

사무실 소파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고 한 사람이 들어와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진행되는 신이다. 첫 컷을 FS로 ①의 위치에서 찍었다면 ②OS-2S의 위치에서 다음 컷을 찍어야 한다. 그러나 벽체 가 가로막고 있어 카메라가 들어갈 수 없다. 이런 경우 ②OS-3S의 위치에서 찍기 쉬운데 이것은 이미지라인을 넘어가기 때문에 잘못된 컷 진행이다. 해결책이 있다면 사무실의 가구를 출입문 반 대편으로 밀고 카메라가 들어갈 공간을 확보하든가 사전에 디자이너와 협의하여 소파 뒤 벽체에 카메라 구멍을 뚫어 놓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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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킹에 의한 이미지라인 이동 카메라 블로킹에 의한 방법

피사체의 움직임을 계기로 카메라가 움직여 가면서 이미지라인을 넘어 갈 수 있다.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등장인물의 강한 긴장이나 갈등 관 계에 편승해서, 또는 강렬한 감정의 흐름이 표출되는 상황에 부응하여 카메라 워킹을 시도하면 이미지라인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 이 경우, 관객은 정서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므로 효과적인 연출이 될 수도 있다.

그림 30-13 카메라 블로킹에 의한 방법

마주 보고 있는 연기자를 비스듬한 각도에서 촬영할 경우 커트하지 않고 카메라가 ①의 위치에서 ②의 위치로 이동하면 자연스럽게 이미지라인을 넘어갈 수 있게 되어 이후 컷들은 이미지라인의 오른쪽에서 촬영을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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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체의 블로킹에 의한 방법

화면에 있는 연기자가 연기 도중에 움직임으로써 이미지라인을 끌고 가게 할 수 있다. 카메라에 가까이 있는 연기자의 움직임이 이미지라인 을 변경할 수도 있고 카메라에서 멀리 있는 연기자가 움직여서 이미지 라인을 변경할 수도 있다.

그림 30-14 피사체의 블로킹에 의한 방법1

카메라에 가까이 있는 연기자가 ①의 위치에서 ②의 위치로 이동하면 카메라는 이미지라인의 오 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간 것이 된다.

그림 30-15 피사체의 블로킹에 의한 방법2

374 카메라에서 멀리 있는 연기자가 연기 도중 ①의 위치에서 ②의 위치로 움직여 가면 카메라는 이미 지라인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간 것이 된다.


카메라와 피사체가 동시에 움직이며 넘어가는 방법

피사체의 움직임을 받아 카메라가 함께 움직여 가면서 이미지라인을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그림 30-17 카메라와 피사체의 블로킹에 의한 방법

①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고 곧 이어 ②가 따라 움직이면서 ①,②의 위치가 변경되었다. 그 사이 에 카메라도 역방향으로 이동을 하면 자연스럽게 이미지 라인을 넘어갈 수 있다. 이 경우 카메라가 어느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블로킹을 시작할 것인지는 신의 내용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 로 카메라는 감정의 진폭이 큰 쪽의 영향을 받게 되므로 누가 이 신의 감정선을 주도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여 카메라 움직임의 계기를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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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 의한 이미지라인 이동

일단 마스터숏(주로 풀숏)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타이트한 숏으로 이 어 붙임으로써 이미지라인을 넘어가거나 컷어웨이(cut away) 편집을 통해 두 장면 사이에 새로운 장면을 하나 끼워 넣음으로써 이미지라인 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림 30-17 편집에 의한 이미지라인 넘기기 (1) FS으로 빠지기(master cut) 컷진행 : ① BS → ② BS → ③ FS

(2) 컷어웨이

③ FS(뒷모습)

바닷가를 향해 놓여있는 벤치.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앉아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② CS

여자가 손목시계를 본다.

① BS

여: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② BS

남: (놀라며) 벌써 가시려구요?

① OS-2S follow

여: 네, 호텔방에서 남편하고 아이들이 기다려요. (일어나며) 죄송합니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남: (어정쩡하게 따라 일어선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반대편으로 가는 여자.

②BS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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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숏으로 빠지기

편집이 까다로울 것으로 예상될 때, 신 전체를 FS이나 TFS로 찍어두는 경우가 있다. 이런 컷을 마스터컷(master cut)이라고 하는데 간혹 이미 지라인을 넘어가고 싶을 경우 마스터 컷을 인서트하면 자연스럽게 넘 어갈 수 있다.

컷어웨이

클로즈 업 숏이나 빅 클로즈 업 숏 등 타이트한 숏을 인서트하여 이미지 라인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인물이 손목시계 를 보는 컷 다음에 손목시계를 클로즈업(close up)으로 인서트하면 이 미지라인을 넘어가도 무방하다. 이처럼 제3의 피사체를 컷과 컷 사이 에 끼워 넣는 컷어웨이 편집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미지라인을 넘어갈 수도 있다.

이미지라인을 넘어도 좋은 경우 극단적으로 가까이 있는 인물들을 찍을 때

한 데 엉겨 붙어 싸우고 있는 두 사람, 또는 두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상 황이거나 키스신, 베드신 등은 이미지라인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지킬 필요도 없다. 두 사람 사이에 빈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미지라 인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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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18 이미지라인이 무시되는 키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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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적인 이해가 충분할 때 그림 30-19 공간적인 이해가 충분할 때

야구 중계의 경우 투수와 타자의 이미지라인이 형성되지만 시청자가 이미 야구장의 공간 배치를 충 분히 이해하고 있어 좌타자와 우타자가 번갈아 나오더라도 카메라를 옮겨 다닐 필요가 없다.

통유리 카페의 창가에 앉은 두 인물을 유리창 너머 길거리에서 먼저 찍고(①) 이후 커트를 내부에 서 찍는 경우(②,③) 시청자는 이미 첫 컷에서 두 사람이 있는 장소와 위치를 이해하고 있어 계속 길 거리에서 찍을 필요 없이 내부로 가져갈 수 있다.


화면을 관통하는 강력한 힘이 있을 때

화면 중앙으로 강력하고 스피디한 피사체의 움직임을 관통시키고 그 운동하는 힘의 동적인 액션에 편집점을 맞춤으로써 보는 사람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이미지라인을 넘어갈 수 있다. 예 를 들어 건물 내부에 있는 특공대원이 유리창으로 돌진해 건물 밖으로 튕겨나가는 장면에서는 유리창이 깨지는 중간 부분을 편집점으로 하면 특공대원의 스피디한 움직임과 유리창의 강력한 폭발이 두 컷 사이를 관통하는 힘이다. 이처럼 화면을 관통하는 강력한 힘(영상이든 오디오

그림 30-20 화면을 관통하는 힘

엎드려 있는 인물이 서 있는 인물을 공격하면서 커트와 커트 사이에 강력한 힘이 관통하고 있다.

주먹으로 때리는 인물이 거의 카메라 렌즈를 향해 주먹을 뻗고 있다.(왼쪽) 주먹으로 맞은 상대방 이 카메라 렌즈에서 급격하게 멀어지며 뒤로 넘어지는 액션을 하고 있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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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이 있는 경우 이미지라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격투 중인 두 사람, 차량 전복 사고, 폭발 장면, 건물의 붕괴 등 격렬한 액션이 있는 장면은 화면 사이즈의 변화를 주기만 한다면 이미지라인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스튜디오 카메라 배치 스튜디오 작업은 야외 촬영과는 달리 멀티 카메라를 사용해 녹화를 한 다. 드라마의 경우 적게는 2대의 카메라로, 많게는 5∼6대의 카메라를 사용해 녹화하기 때문에 각각의 카메라 번호를 콘티에 적어 주어야 한 다. 드라마 전용 스튜디오의 경우 보통 3대의 카메라가 기본적으로 세 팅되어 있다. 카메라 창고에는 항상 벽을 마주보고 오른쪽부터 1, 2, 3, 4, 5 이런 순으로 카메라가 달려 있다. 이 순서를 지켜야 케이블이 꼬이지 않는

그림 30-21 스튜디오 카메라 배치의 예 ③

③ ② ①

③ ② ①

② ①

① 구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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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따라서 스튜디오 콘티는 세트를 바라보고 선 위치에서 왼쪽에 항상 낮은 번호의 카메라가 배치되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높은 번호의 카메 라가 배치된다. 이유는 카메라 케이블이 엉키지 않기 위해서다. 케이블 은 다른 카메라 앞을 지나가서는 안 되고 뒤로 돌아가야 한다. 오른쪽 공간이 카메라 창고다. 카메라가 벽을 마주보고 오른쪽부 터 ①, ②, ③ 순으로 부조정실과 연결되어 있다. 왼쪽의 세트들이 어떤 방향으로 서 있든지 녹화 시 세트를 마주 보고 낮은 번호의 카메라를 왼 쪽에 배치하면 케이블은 서로 꼬이지 않는다.

스튜디오 콘티와 야외 콘티 스튜디오와 로케이션은 근본적으로 다른 제작 시스템에 의해 진행된 다. 가장 큰 차이점은 멀티카메라 제작과 싱글카메라 제작의 차이라고

표 30-1 스튜디오 콘티와 야외 콘티의 장단점 비교 스튜디오 콘티

야외 콘티

화면의 사이즈

제한적(LS, FS, BCS 불가능)

무제한적

블로킹

제한적

무제한

앵글

제한적

무제한

시점

정확한 위치선정 불가능

정확한 위치선정 가능

TR 음악과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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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백 가능, 연기자의 감정이나 플레이백 불가능, 초 계산으로 연기의 타이밍 잡기가 용이 타이밍을 잡아야 함

오디오 픽업

상태 좋음, 깨끗함

각종 noise 발생(거리소음)

사운드

균질성 유지가능, 흐름 부드러움

균질성 유지가 어려움, 흐름의 단절


할 수 있겠다. 표 30-1에서 보듯이 스튜디오는 음향(audio) 작업에서 대단히 유리한 반면 야외 로케이션 제작은 영상(Video) 부분에서 많은 장점이 있다. 영상이 다소 제한적이어도 연기자의 감정선이나 대사 픽 업이 중요하다면 스튜디오가 유리할 것이다. 스튜디오는 멀티카메라 를 사용하기 때문에 녹화속도가 로케이션에 비해 월등히 빠르고 녹화 와 동시에 편집이 완료되어 후반작업의 시간을 줄여 준다. 따라서 장기 적으로 방영되는 연속극은 스튜디오 위주로 제작된다. 반면 영상의 질 을 중요시하는 단막극이나 미니시리즈 등은 스튜디오를 벗어나 시원한 로케이션 영상을 보여 줄 수도 있고 때로는 동시녹음을 포기하더라도 다양한 장소에서 과감한 로케이션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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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현장

길고도 지루한 프리프로덕션 과정이 끝나면 드디어 촬영이 시작된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프리프로덕션이 끝나고 크랭크인 되기까지의 시간 이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아무리 세심히 준비한다 하더라도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한 완벽한 준비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작품이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은 집중되는데 별로 할 말도 없고 머리만 깨질 것 같다. 그래서 혹자는 촬영 앞둔 감독 을 ‘새끼 밴 암고양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만큼 예민해지고 긴장과 불안으로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고 일단 촬 영이 시작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 돌이킬 수도 없고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 정해진 분량을 찍는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촬영 현장의 두 가지 특징을 들라면 첫째는 이 일이 육체노동이라 는 점이다. 잘 모르는 사람은 촬영기간에 감독이 고도의 정신노동을 한 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육체노동의 성격이 짙다. 대본 완성됐고 캐스 팅 끝났고 콘티가 끝났다면 이제 정해진 스케줄과 콘티에 따라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현장에서는 모든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 이다. 정해진 계획대로 촬영을 진행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들이 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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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 곳이 현장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애초의 계 획대로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준비가 미흡하고, 일이 스케줄대 로 진행이 안 되고, 콘티대로 찍을 수 없는 수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 다. 그래서 촬영 현장에 나가기 전에 어느 정도 정신적인 준비 과정이 필 요하다. 필자의 경우 프리프로덕션이 끝나면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2∼ 3일 정도 시간을 내서 절에 다녀온다. 절에 가서 마음을 깨끗이 비운 다 음, “욕심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받아들이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래도 역시 현장에 서면 욕심 부리게 되고, 화내고, 스태프나 배우를 원망하고, 회사를 원망하고, 날씨를 원망하는 마음이 수시로 올라온다. 물론 시간이 없어 이런 마음의 준비 과정을 갖지 못하 고 촬영을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가능한 한, 약간의 무리를 해서라 도 시간을 내서 마음을 가다듬는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장에서는 촬영 현장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 각 각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적절한지, 그리고 현장에서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현장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촬영 현장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감독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 를 받으니까 화를 내고, 짜증을 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화내고, 짜증내고, 스태프를 미워하고, 배우를 원망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 내고 짜증내는 동안 그만큼의 시간만 더 까먹게 되고, 손실은 점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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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진다. 주식 투자 기법 중에 <손절매>라는 것이 있다. 주가가 폭락하는 장 세가 시작이 되었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 손해보고 파는 것이 손절매다. 어차피 손실이 발생했으니 가능한 한 손실을 최소 화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 더 큰 손실을 막고 작은 손실로 마무리 했으니 이익 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도 이 손절매 전략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준비가 제 대로 되지 않았거나 돌발 상황이 발생해서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면 짜증이 올라오더라도 얼른, 손절매 하듯이 마음을 바꿔 먹어야 한다. 이를테면

① 배우가 늦게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다. 배우가 늦었을 때는 절대 로 ‘어제 술 먹었다’, ‘늦잠 잤다’, ‘다른 프로 찍고 오느라 늦었다’ 이렇게 말 하지 않는다. ‘연락을 잘못 받았다’, ‘오다가 접촉사고 가 나서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다’ 이렇게 변명한다. 거짓말인 거 빤히 안다 하더라도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은 배우한테 성질 내 봐야 아무 소용없다. ② 현장에 도착해 첫 신을 찍으려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스크 립터가 테이프를 사무실에 놓고 안 가져왔다고 한다. ③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온다. ④ 의상을 잘못 가져왔다. ⑤ 소품이 준비가 안 되어 있다. ⑥ 지나가던 행인이 계속 시비를 걸며 촬영을 방해한다. ⑦ 장소 제공자가 사전의 약속과 달리 사용료를 더 내라고 버틴다. ⑧ 카메라 감독이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차로 이동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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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0분이 걸리는 곳에 화장실이 있다. ⑨ 술 취한 사람이나 노숙자 등이 카메라를 막아선 채 돈을 달라고 한다. ⑩ 스태프들 간에 싸움이 나서 촬영장이 난장판이 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겠는가?

“현장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현 장이다.”

이렇게 마음을 딱 고쳐먹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현장이 뜻대로 되 지 않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은 세 가지 정도다.

기다리기

첫 번째 방법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인내력 테스트다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방법도 없을 땐 기 왕이면 즐겁게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갑자기 비가 온다고 조연출을 붙들고 왜 일기예보를 확인 안 했느냐고 화를 낸다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이 화를 내면 스태프들도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 니까 스태프들까지도 마치 비가 오는 것이 조연출의 책임이라는 듯이 모두들 조연출을 원망한다. 조연출이 스태프들한테 욕을 먹기 시작하 면 현장은 날 샌 것이다. 더 이상 통솔이 되지 않는다. 조연출의 일은 감 독의 업무를 일정 부분 위임받아 대행하는 것이고, 따라서 조연출의 지 시는 감독의 지시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스태 프들한테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지휘체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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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래서 현명한 감독은 절대로 스태프나 연기자가 보는 앞에서 조연 출을 야단치지 않는다. 어쨌든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첫 번째 방법은 기다리는 것이 다. 그리고 기왕 기다리기로 했으면 즐겁게 기다릴 필요가 있다. 현장 분위기가 다운되지 않도록 뭔가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조금만 기다리 면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음담패설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낄낄거리고 웃기에는 음담패설이 아주 좋다. 조금 시간 이 걸리는 상황이라면 현장에서 간단한 게임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전 에 필자가 모시던 김재형 PD는 이런 경우에 동전치기를 했다. 상궁들 의 머리 가발을 방송국에 놓고 안 가져와 촬영이 1시간 정도 지체되었 는데 정전(임금님의 집무실,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을 말함) 앞에서 스태프들과 동전치기를 하다가 문화재 관리 위원한테 들 켜서 욕을 바가지로 먹은 적도 있다. 들켜서 욕을 먹는데도 웃음을 멈 출 수가 없어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예 시간이 많이 걸 린다 싶으면 스태프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각 파트 책임자를 불러 모 아 차 한 잔 하면서 다음 촬영에 관한 스태프 회의를 하는 것도 좋은 방 법이다. 어차피 기다리는 거 즐겁게 기다리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좋 다.

대안 찾기

기다려서 해결이 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대안을 찾아 야 한다. 현장에서 감독이 세울 수 있는 대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스케줄을 변경해서 다른 신부터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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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콘티를 일부 수정해서 현장 상황에 적응한다. 일기예보에도 없 던 비가 계속 온다면 아예 신 전체를 비가 오는 상황으로 바꿔서 찍는 것도 방법이다. ③ 현장 상황에 맞게 대본을 수정한다. 이런 경우는 필히 작가와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 작가는 이미 다음 회를 집필하고 있는데 작가가 모르는 상황에서 앞의 내용이 수정된다면 드라마는 커 다란 혼선을 빚게 될 수도 있다.

포기하기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서 찍고 편집실에 와서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다소간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일단 철수하고 나중에 다시 찍는 것이 후회가 없 을 수도 있다. 비가 오고 있는데 상황을 보니 그칠 비가 아니라면 스태프들을 불 러 모아 상황을 설명하고 철수하는 것이 현명하다. 집에 가서 하루쯤 푹 자든가 콘티를 다시 점검해 볼 수도 있다. 하늘을 원망하면서 몇 시 간씩 스태프를 현장에 대기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장에서 감독의 태도 현장에서 감독이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스태프나 배우를 불 안하게 한다. 스태프를 불안하게 하는 감독은 신뢰를 잃어버려 리더십 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은 전쟁터로 치면 야전사 령관이다. 사령관이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면 전쟁은 해보나 마나다.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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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침착하고 여유 있게 대응해야 한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말라

달동네나 재래시장, 노숙자가 많은 기차역이나 공원 촬영에는 술에 취 해 시비 거는 주정꾼이 자주 등장한다. 왜 길가는 사람을 가로 막느냐 고 시비 거는 행인에서부터 돈 뜯으러 오는 노숙자까지 수많은 방해꾼 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외에 장소사용료를 더 내라고 배짱부리는 업소 주인, 동시녹음을 방해하는 구경꾼이나 폭주족들, 시끄러운 소음을 내 며 끊임없이 날아가는 비행기, 여름철에 끊이지 않는 매미의 울음소리, 그 외에 크고 작은 사고들…. 이런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 다. 설사 흔들리더라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포커페이스란 내 가 들고 있는 패가 킹카인지 물카인지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들키는 순간 돈을 잃게 된다. 현장에서 감독이 화를 벌컥벌컥 내거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황은 더 꼬이게 된 다. 이럴 때일수록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현장 분위기를 연출하라

우리 선배들 중에는 크랭크인부터 손·발톱 안 깎고, 머리도 안 감고, 면도도 안 하는 감독이 있었다. 심지어는 잘 때 양말도 안 벗고 옷을 입 은 채 자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깎고 씻어내고 하면 재수 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종의 징크스다. 이런 사람은 촬영 시작되 고 삼 일만 지나면 완전히 거지꼴이 된다. 근처에 가면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스태프나 연기자들이 그 옆에 잘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 는 그때 ‘입봉하면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다. 촬영기간 중에도 손톱 바짝바짝 깎고, 아침마다 머리 감고, 면도 깨끗이 하고,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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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깨끗이 빨아서 다려 입고 현장에 나갔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의상도 분위기에 맞게 입고,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일하는 것이 현장 분위기를 위해 좋다. 말이나 행동도 부드럽고 매너 있게 해야 한다. 감 독이 감독답게 멋있고 돋보이면 스태프나 배우도 기분이 좋아지고, 현 장 분위기가 밝아지고 일도 잘 풀린다. 거지꼴을 해 가지고 세상 고민 혼자 뒤집어쓴 듯이 우거지상을 쓰고 있으면 스태프들도 기분이 우울 해지고 똑같은 일을 해도 훨씬 더 힘이 든다. 이런 태도는 작품에 아무 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디게 만들기도 한다. 현장 분위기를 항상 밝고 명랑하게 연출하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다.

필요할 때는 스태프와 연기자를 긴장시켜라

위험한 신 찍을 때 현장의 분위기가 산만하면 사고가 나기 쉽다. 이럴 때는 스태프들을 다소 긴장시키는 것이 사고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 다. 특히 밤에 전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 신을 찍는다거나 교통사고 나 는 장면, 화재장면 등을 찍을 때는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대형사고가 날 수가 있다. 이럴 때는 의도적으로 화를 내서 스태프를 긴장시키는 것이 현장 집중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간혹 가장 만만한 연출부 막내 가 희생양이 되는 수도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스태 프나 연기자들을 긴장시키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촬영 마 치고 연출부 회식비 좀 깨지더라도 그게 한결 낫다. 영화감독의 경우 베드신 찍을 때 여배우가 좀 부끄러워하는 기색 이 보이면 일부러 다른 스태프들에게 소리를 막 지르며 화를 내 공포분 위기를 조성한다고 한다. 그러면 여배우는 너무 무서워서 부끄러워 할 겨를도 없이 잽싸게 옷을 벗는다고 한다. 배우가 감정을 잡아서 연기해야 할 때는 스태프들을 조용히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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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배우는 감정을 잡고 있는데 스태프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잡담을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몰입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런 경우에도 촬영 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현장을 다소 긴장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감독 은 드라마도 잘 연출해야 되겠지만 현장 분위기도 잘 연출해야 한다.

배우를 대하는 세 가지 원칙 촬영 현장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 이라 하겠다. 아무리 카메라 워크가 매끄럽고, 조명이나 오디오가 깔끔 했다 하더라도 배우가 연기를 잘 못했다면 그날 촬영은 실패다. 결국 화면에 나가는 사람은 배우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카메라가 조금 흔들리고 조명이 다소 어두워도 배우가 최선의 연기를 했다면,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연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면 오케이 사인을 낸 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작품의 성패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어떻게 배우로부터 최선의 연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인지, 연기에 관한 의견 대립이 생겼을 때 어떻게 조정하고 타협 할 것인지가 감독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된다. 감독에 따라 연기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방임하고 카메라 앵글만 신경 쓰는 경우 도 있는데 배우의 연기가 작품의 완성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런 태도는 곤란하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를 대할 때는 다음의 세 가 지 원칙을 가지고 임하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에 도움이 된다.

관심과 애정

배우는 화초 같은 존재다. 화초는 물만 준다고 자라지 않는다. 주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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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애정을 먹고 자란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감독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대할 때 베스트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감독이 관심과 애 정을 보내 주지 않으면 배우는 시들어 버린다.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이 배역에 가장 적합한 배우다. 당신을 캐스 팅할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다.”

이런 마음이 전해지면 배우는 정신적 에너지가 충만하게 된다. 이 것이 출연료 몇 푼 더 주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것들은 사소하지만 현장에서 배우를 내편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들 이다.

① 아침에 배우가 현장에 나타나면 조감독 시켜서 커피 한잔 뽑아 주 게 하라. 멋진 하루가 시작되게 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② 현장에서 배우를 30분 이상 기다리게 할 경우, 반드시 상황을 설 명하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라. ③ 레디 고를 외치기 전에 배우가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라. 만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 인내심을 갖고 조용히 기다려 줘야 한다. ④ 장소를 이동할 때, 식사를 할 때, 간식을 먹을 때도 항상 배우를 직접 챙겨야 한다. 감독이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안 챙긴다. 조 감독을 시키는 것보다 직접 챙기는 것이 더 좋다. ⑤ 카메라 포지션 정할 때 어느 각도가 좋은지 배우에게 물어보라. 배우들은 카메라 각도에 민감하다. 배우마다 특성이 다르므로 이런 점을 잘 살펴서 기왕이면 배우가 좋아하는 각도에서 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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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도록 콘티를 수정하라. 그러면 배우는 감독에게 무한한 신 뢰를 갖게 된다. ⑥ 하루의 촬영이 끝나면 반드시 칭찬하라. 그것도 구체적으로. “오늘 연기 참 좋았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어느 장 면이 이러이러 해서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조감독을 불 러서 다음 스케줄을 알려주도록 지시하라. 감독이 자신을 각별 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하라. ⑦ 그 배우가 등장하는 모든 신을 다 찍었다면 이제 배우를 또 만날 일이 없게 된다. 그럴 때 직접 배웅하라. 손을 잡고, 그동안 수 고 많았다고, 감사하다고, 다음 작품에서 또 만나게 되길 바란 다고 말하라. 그 다음번에 그 배우를 또 캐스팅을 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고, 그와 친한 배우를 캐스팅할 수도 있다. 대부분 의 배우들은 감독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하며 또 친한 배우들 끼리 감독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 기왕이면 배우에게 좋은 이 미지를 심어 주면 다음 작품의 캐스팅이 훨씬 수월해질 가능성 이 있다. ⑧ 시사회가 있거나, 방송이 나갈 때 고맙다고 전화해 줘라. 그리 고 DVD 하나 구워서 보내 줘라. 직접 만나서 식사 한 끼 하면서 전해주면 더 좋고, 혹시 아는가? 정말 다급할 때 바람처럼 달려 와 나를 도와줄지도.

이런 식으로 배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작품의 완성도에 보이지 않게 기여한다.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배우에게 관심과 애 정을 쏟을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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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하지 말고 제안하라

배우라는 직업은 자존심을 먹고 산다. 특히 연기에 관한 한 스스로 전 문가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 특히 현장에서는 더 그렇다. 그래서 현장에서 배우가 NG를 냈을 때 스태프 들이 다 듣는 데서 직설적으로 연기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자존심의 상처를 받는다. 현장에서 배우의 자존심을 건드려 득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라고 명령하기보다 “그것도 좋 은데 이렇게 한번 해 보면 어떨까요?”하고 제안하면 훨씬 부드럽게 촬 영이 진행된다. 특히 경력이 오래된 배우, 인지도가 높은 배우일수록 자존심이 세 다. 이런 경우 연기에 관해 주문을 할 때는 가급적 가까이 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 혹시 내 생각과 다르게 연기를 했다면 “아 주 좋네요. 혹시 모르니까 살려놓고 다른 버전으로 한 번 찍어보면 어 떨까요? 편집실에 가서 골라 쓸께요.” 이렇게 유도하는 것도 방법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안 주면서 내가 원하는 연기를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편집실에 가서 붙여 보면 배우의 생각이 옳은 경우가 더 많다.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라

현장에서 배우가 연기를 잘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 일은 감독이 직접 나서서 해야 한다. 긴장 풀어주기

배우가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거나 작품에 첫 촬영을 하러 온 경 우, 또 신인배우인 경우는 긴장하게 마련이다. 그 긴장은 현장에 도착 해서 분장하는 동안 최고조에 달한다. 분장할 때 가서 농담도 걸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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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이야기도 나누면 한결 긴장이 풀린다. 프로야구에서 투수가 포볼을 내주거나, 홈런을 맞으면 심리적으로 당황하게 된다. 이럴 때 감독이 마운드로 걸어 들어가는 풍경을 유심히 보라. 걸음걸이가 아주 느리다. 투수에게 마음을 수습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다. 그럴 때 감독이 다가가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가 늘 궁 금했는데 전에 하일성 해설위원이 토크프로에 나와 그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야, 이번 일요일 날 낚시나 가자. 강화 쪽에 요즘 잉어가 좋대.”

이런 쓸데없는 말 한마디 던지고 나온다고 한다. 촬영 전에 감독이 배우에게 던지는 실없는 농담 한마디가 신인배우에게는 긴장을 풀 수 있는 특효약이 되기도 한다.

망원렌즈의 활용

배우의 몰입을 도와주기 위해서 일부러 망원렌즈를 쓰는 경우도 있다. 망원렌즈는 카메라 공포증이 있는 배우에게 아주 효과적이다. 카메라 가 멀리 있으니 자기 연기에 몰입하기가 더 수월하다. 그리고 가급적이 면 상대 배우를 앞에 세워서 대사를 받아주게 하면 몰입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상대의 눈을 보고 하는 연기와 카메라 감독의 주먹보고 하는 연기는 천지 차이다.

배우들 간의 호흡을 유도하라

아무리 배우라고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다. 따라서 감독이 배우끼리 호흡을 맞추도록 유도해 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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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찍기 전에 배우들을 조용한 장소 에 데리고 가서 차 한 잔 하면서 인사 시키고, 대본 리딩도 미리 한 번 해 보고 슈팅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빨리 친해지 는 비결이다. 배우들과 함께 식사하고, 같이 술 한 잔 하면 더 쉽게 친해 진다. 필자는 주로 남자 주인공에게 책임을 지운다. “여자 주인공이 당신 을 좋아하게 만들어라. 같이 밥 먹고, 같이 술도 먹고, 집까지 바래다주 고, 현장 올 때 픽업해서 같이 와라.” 이렇게 과제를 준다. 이렇게 되면 두 주인공 간의 연기 호흡은 최고가 된다. 두 사람을 한 화면에 잡아 놓 으면 아지랑이가 폴폴 피어오른다. 이러면 멜로는 성공이다. 감독이 배우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도 록 조심하고, 또 최선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은 배우가 예뻐서가 아니다. 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다. 배 우를 잘 다루는 것은 감독의 능력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다. 그리고 배우를 잘 다루는 비결은 배우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관심과 애정을 쏟고, 존중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최선의 연기를 뽑 아내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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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작업

프로덕션 과정이 끝나면 감독의 일은 거의 다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이 제 편집자의 몫이다. 러프커팅은 가급적 편집감독에게 모든 권한을 이 양하고 파인커팅 때 한번 보고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로만 개입하는 것 이 좋다. 후반작업은 씨 뿌린 것을 수확하는 과정이다. 뿌린 대로 거두 는 것이다. 현장에서의 실수를 편집과정에서 복구하려 애쓰는 것은 무 의미한 일이다. 디렉터스 컷이 극장판보다 더 재미있는 경우는 거의 없 는데 이는 감독이 편집에 과도하게 개입해서 좋아지는 경우가 거의 없 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믿을 만한 편집감독이 있다면, 그리고 그 와 호흡이 맞는다면, 이쯤에서 손을 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가 능하다면 후반작업을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감독은 차라리 다음 작품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감독은 조금 편안한 마음이 되어 긴장이 풀린 다. 그래서 후반작업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자꾸 게으름을 피우며 편 집실을 멀리하게 된다. 많은 경우 후반작업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진행하기보다는 이리 저리 미루다가 결국 마지막에 시간에 쫓겨 방송 직전에 믹싱(mixing)하게 된다. 내 경험으로는 촬영이 끝나면 하 루 정도 쉬고 바로 편집을 시작하는 것이 여유 있는 포스트프로덕션을 진행하는 비결이다. 편집은 순서작업, 러프커팅, 파인커팅의 순으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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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된다.

포스트프로덕션의 작업 흐름 러프커팅에서 파인커팅까지의 편집 작업이 끝나면 이제 작업은 오디오 부문과 비디오 부문으로 나눠서 진행된다. 오디오는 녹음실에서, 비디 오는 종합편집실에서 하게 된다. 특수효과나 CG, 음악은 또 다른 곳에 서 별도로 진행된다.

① 순서편집 ② 러프커팅 ③ 파인커팅 ④ 음악작업 ⑤ 더빙(대사, 내레이션, 마음의 소리, 전화 목소리, 편지, 메모, 기 타 음향효과 보강작업) ⑥ 특수영상(CG, 특수효과) ⑦ 자막(모필, CG, 타이틀) ⑧ 컬러 콜렉션(color collection, 색보정, 영화의 네가텔레시네 작 업에 해당됨) ⑨ 믹싱(mixing, 종합편집) ⑩ 방송용 테이프 이관(주조정실)

순서작업

야외 로케이션에서 촬영한 컷들의 OK컷만 순서대로 모으는 일, 또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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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편집 후에 러닝타임을 계산하기 위해 로케이션 촬영분과 스튜디오 녹화분을 신 순서대로 붙이는 일 등을 순서작업이라 한다. 주로 스크립 터나 보조 편집자가 순서작업을 하는데 제작 일정이 촉박한 경우 이 과 정은 생략되기도 한다.

러프커팅과 파인커팅

편집 감독이 감독과 상의 없이 먼저 OK컷들을 이어 붙여 드라마의 전체 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1차 편집을 러프커팅(rough cutting)이라 하고 감 독과 함께 세밀한 부분까지 밀도 있게 편집하는 2차 편집을 파인 커팅 (fine cutting)이라 한다. 때로는 종합편집실에서 진행되는 최종 완성 단 계인 믹싱(mixing) 과정에서도 편집은 이루어진다. 감독과 편집자의 성 향에 따라 한두 번의 편집으로 완성되는 경우도 있고 세 차례 이상의 편 집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심의실이나 운행팀의 요청에 의 해 완성 후에도 방송 직전까지 편집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장면 전환이 고민일 때

디졸브(dissolve)냐 컷이냐, 페이드아웃(fade out)이냐 컷아웃(cut out) 이냐의 판단이 잘 안 서는 경우가 있다. 디졸브도 좋은 것 같고, 페이드 아웃은 뭔가 있어 보이고 블랙으로 컷아웃하는 것은 왠지 예술영화 분 위기가 나고, 이것저것 다 버리고 담백하게 컷으로 처리하는 것도 깔끔 해 보인다. 내 경험으로 보면 이럴 때는 대부분 컷으로 가는 것이 정답 이다. 그 이유는 가장 보편적인 장면 전환이 가장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제작 현장에서 몸으로 겪으면서 체득한 결론은 ‘컷 이냐 디졸브냐 고민이 될 때는 가장 보편적인 장면 전환인 컷이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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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은 리액션이다

드라마 진행에 있어 중요한 장면, 결정적 상황, 강렬한 텐션이나 임팩 트가 있는 신, 이야기의 터닝 포인트 등에는 반드시 풍부한 리액션 (Reaction)을 넣어줘야 한다. 리액션을 통해 그 상황으로 인해 등장인 물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를 관객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기 때문 이다. 코미디에서는 모든 웃음이 리액션 컷에서 터진다. 리액션 컷의 위치와 컷의 타이밍에 따라 관객을 웃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 다. 드라마에서도 리액션은 대단히 중요하다. 리액션은 드라마의 흐름 을 부드럽고 세련되게 만들어 주어 궁극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준다. 그래서 노련한 감독일수록 현장에서 리액션을 많이 찍어둔다. 어 떻게 쓰일지는 모르지만 그 어떤 컷보다 감동을 줄 수도 있고 촬영의 미 진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에 리액션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두는 것이다. 드라마 편집은 리액션을 얼마나 살려 주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효과 후반작업의 절반은 오디오다. 오디오는 크게 대사와 음악, 그리고 효과 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 대사는 이미 현장 촬영 과정에서 품질이 어느 정 도 결정되어 버려 후반작업에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물론 마스터 링 과정을 거치며 약간의 품질을 높일 수는 있다. 여기서는 음악 (music)과 효과(effect)에 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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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넣을까 말까

콘티를 짜다 보면 음악을 넣을 것인가 뺄 것인가 망설여지는 경우가 많 다. 그냥 사일런트(Silent)로 가도 뭔가 있어 보이고, 음악이 있으면 분 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경우 음악을 넣어서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넣는 것이 좋다. 음악은 항상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굳이 가사를 붙인 노래가 아니더라도 멜로디나 리듬만으로도 음악은 자기만의 스토리텔 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이런 나름대로의 정서와 감흥이 드라마의 스토리텔링과 결합하여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해 주 는 경우가 많다. 음악에 내포되어 있는 정서는 가사, 멜로디, 악기 구성, 편곡, 사운드 등을 통해 표출된다. 이것이 드라마의 정서와 결합하여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 내면 결과적으로 극의 분위기를 훨씬 더 살려내 게 된다. 따라서 음악을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좋은 장면이라면 기왕 이면 음악이 있는 것이 좋다. 음악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스토리텔링과 정서가 드라마와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음악의 역할 시공간적 배경에 관한 정보를 준다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음악도 그것이 생산된 특정 시대를 반영한다. tvN에서 방송했던 <응답하라 1994>는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 악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0년대를 기억하는 관객들이 그 시대의 음 악을 들으며 자기만의 추억과 사연을 반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 럼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드라마의 시공간적 배경에 관한 정 보를 준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작품을 50년이나 100년 후에 누군가가 본다면 작품에 삽입된 음악만 들어도 ‘아, 2014년 무렵 만든 거구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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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알 수 있다. 카페나 레스토랑 장면에 삽입된 배경음악이 제작년도를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음악을 통해 어느 지역, 어느 나라 의 이야기인지도 알 수 있다. 음악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여러 가 지 요소들 중에 대단히 강력한 요소다.

인물의 심리 상태를 대변한다

아역 배우들은 표정이 없다. 얼굴에 표정을 만들어 내는 근육이 발달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연기경력이 오래된 노련한 배우들도 크게 표정 연기를 하지 않는다. 굳이 표정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 관객에게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역 배우들의 ‘표정 없는 연기’나 노련한 배우의 ‘표현하지 않는 연기’는 관객에게 훨씬 더 호소력 있게 다가간다. 이러한 연기에 음악이 덧입혀지면 그 음악이 주 는 정서가 배우의 심리상태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사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나 지금 슬퍼”, “나 충격 받았어” 등 인물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 는 감정을 직접적인 대사로 표현하는 것은 저차원적인 방법이다. 음악

아침드라마와 소프오페라

간혹 KBS의 <TV소설> 같은 아침드라마는 내레이션으로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를 알려 주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NHK 아침드라마의 구성 방식을 본 뜬 것이다. 원조는 미국의 아침 연속극. 지금도 미국에서는 통속적인 텔레 비전연속극을 소프오페라(soap opera)라고 부르는데 비누회사가 주로 스 폰서로 참여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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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을 비언어적으로 표현할 때 대단히 강력하고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극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의 도입부는 나무꾼이 도끼를 메고 산에 나무하러 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런 일상적인 상 황에 음악을 맡은 하야사카 후미오(早坂文雄)는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의 관현악곡 <볼레로(Boléro)>를 응용하여 삽입하였다. 주로 타 악기를 사용한 낮은 음률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멜로디는 앞으로 그 숲 에서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음산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효과 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음악은 극의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 면서 관객의 감정을 앞서가기도 한다. 극의 분위기 묘사를 위해 음악을 사용할 경우에는 악기 구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쓸쓸함이나 애절함을 표현할 때는 주로 현악기나 목관악기를 사용하고, 신나고 활기찬 분위 기를 표현할 때는 브라스(금관악기)와 리듬악기, 베이스를 동원한 템포

라쇼몽(羅生門)

구로사와 아키라(

)의 이름을 일약 세계에 떨친 1950년 작품으로 베

니스영화제에서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랑프리를 받았다. 플래시백 (flashback) 기법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의 시각으로 재현하여 인 간의 ‘기억의 주관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궁극적으로 ‘진실이란 무 엇인가?’라는 철학적 주제를 도출해 내는 독특한 구성이 서구 평단의 호평 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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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관악기와 금관악기

색소폰,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등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목관악 기로 분류된다. 옛날 연금술이 발달하기 이전엔 이런 악기들을 나무로 만 들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목관악기는 금관악기에 비해 음색이 부드럽고 따 뜻해 실내악 연주에 많이 사용된다. 금관악기는 금속을 재료로 만들기 때 문에 브라스(Brass)악기라고도 하며 목관악기와는 달리 굉장히 남성적이 며 큰 소리를 낼 수 있다. 금관악기의 종류로는 대표적으로 트럼펫, 트럼 본, 호른 등이 있다. 금관악기는 실내악보다는 행진용이나 마칭용 등 실외 악 연주에 많이 사용된다.

빠르고 비트가 강한 음악을 주로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드라마의 템포와 흐름을 주도한다

드라마는 긴장과 이완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강물이 흘러가듯 어떤 흐 름을 만들어 낸다. 음악은 스토리와 더불어 이 흐름을 이끌어 가는 양 대 축이다. 음악은 영상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이끌어 갈 수도 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라면 강한 리듬, 빠른 템포, 비트가 강 한 음악이 주로 사용될 것이다. 재즈음악은 나른하고 흐느적거리는 분 위기,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청각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 준다

별도의 음악을 삽입하지 않더라도 화면 속에 이미 음악이 흐를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 선곡을 통해 대사와 대사 사이, 효과음과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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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시스(Diegesis)

극작법에서 나오는 용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처음 사용 했다. ‘드라마의 외연적 요소(연기, 대사)에 의해 구성되는 허구의 시간과 공간’을 말하며 무대장치나 의상, 소품 등 드라마의 내연적 요소에 의한 것 과 구별된다.

과음 사이에 배경음악(back ground music)을 삽입하여 청각적으로 비 어 있는 공간을 채워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카페, 레스토랑, 카바레, 길 거리에 설치된 스피커 등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드라마의 중요한 표 현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화면 속에 이미 음악이 들릴 만 한 원인이 제공되는 경우, 여기에 사용되는 음악을 디제시스(Diegesis) 음악, 또는 소스(Source) 음악이라고 한다. 극 중 라디오나 전축에서 나 오는 음악소리, 등장인물이 직접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음악소리 등 드 라마 속에 소스가 제공되는 음악이 이에 해당되는데 연출자에 의해 강 제로 삽입된 ‘비(非)디제시스 음악’과 구별된다.

음악을 쓰지 않는 것도 콘티의 일부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정신병동의 비정하고 냉혹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영화 전반부에 음악을 전혀 사 용하지 않았다. 또한 차이밍량 감독의 1994년 작품 <애정만세>는 특이 하게도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총 컷 수 196개의 고집스런 롱테 이크로 구성된 이 영화는 타이페이를 배경으로 방황하는 세 젊은이의 외로움과 고독을 극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대사와 음악을 극단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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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한 영화로 유명하다. 이처럼 ‘의도된 청각적 공백’은 종종 화면을 수많은 대사와 음악으로 채우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콘티가 될 수도 있다.

음악사용의 원칙

드라마 음악 사용에서 원칙이란 없다. 당연히 감독이나 음악감독의 감 (感)에 의존해 작업이 진행된다. 예술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규칙이나 법칙이 생기는 순간 예술은 떠나버리고 무성한 이론만 남는다. 여기서 는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을 전제로, 음악을 사용할 때 지켜야 할 몇 가 지 공통분모를 거론하는 선에서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절정의 순간에는 자제한다

텐션이 아주 강한 장면에서는 긴장의 최고점에 도달하기 전, 또는 지 난 후에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는 순간에는 오 히려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절정의 순간으로 치 닫는 도중에 음악을 사용하는 경우, 오히려 음악이 텐션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극의 흐름에 편승해서 사용한다

시청자들이 의식하지 못하게, 어떤 계기를 잡아서 인(in)점과 아웃(out) 점의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그 계기가 카메라 워킹이든, 대사든, 감정 이든, 연기든, 인물의 블로킹이든 상관없이 극의 흐름속에서 어떤 포인 트를 찾아야 한다. 이 계기가 없으면 시청자는 감독의 의도를 눈치 채 게 된다. 음악이 언제 들어갔는지 모르게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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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고 빠질 때도 음악이 언제 빠졌는지 느끼지 못하도록 대부분 스닉 아웃(sneak out)한다. 신 중간에 특별한 계기 없이 음악을 시작하거나 빼면 관객은 ‘의도된 연출’을 느끼게 된다. 때로 신 중간에 음악을 의도 적으로 컷아웃(cut out)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는 특히 드라마의 흐름과 함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생뚱맞게 들린다.

대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삽입되는 음악의 게인(볼륨)이 대사보다 크거나 악기의 음색이 대사와 충돌하면 음악이 대사를 방해하게 된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오디오 게인(Gain)의 문제는 녹음실에서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악기의 음색이 배우의 대사와 충돌하는 경우는 정서와 느낌의 문제이 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현악기와 타악기는 대사를 잡아먹 는다. 기타는 예외인데 기타의 음역이 인간의 음역대와 비슷하기 때문 이라고 한다. 목관악기(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는 대사와 부딪히지 않는다. 또 대사가 한창 진행되는데 가사 있는 노래가 함께 가는 경우 도 대사를 잡아먹는다. 간혹 음반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 무분별하게 주 제가 삽입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하 는 것으로 좋은 방법은 아니다.

통일성,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음악의 리듬과 템포, 각 인물들의 테마곡 등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 이 좋다. 기본 멜로디를 변주하여 다양한 분위기의 곡을 만들어 씀으로 써 멜로디의 통일성을 줄 수도 있다. 악기 구성에서도 일관성과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편곡되어야 한다. 현악기 위주의 구성이라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피아노, 기타 등의 악기를 조합하여 전체의 흐름에 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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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줄 수도 있고 그 외에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색소폰, 피리 등 목관악기 위주로 구성하는 방법도 있다.

저작권을 고려해야 한다.

음악 저작물에 관한 권리는 지적재산권에 해당된다. 이 권리는 50년까 지 보장되며 유럽연합(EU)은 2014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회의 에서 보호 기간을 현행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하는 안건을 통과시켰 다.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음악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국내 지상파 방송의 경우 음악저작권협회와 연간 계약하여 사후 정산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 되지만 해외에 판매될 경우는 별도의 허가를 일일이 받아 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해외 수출용 드라마의 음악과 효과를 재 (再)제작하는 회사가 몇 개 있는데 이런 회사에서 드라마의 M&E 작업 을 다시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저작권 때문이다.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고 사용할 경우 동의서를 서면으로 받아 두 는 것이 좋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음악 사용 계약서를 쓰고 사용의 범 위를 한정하는 것이다. 학생 작품의 경우 음악 저작권을 너무 신경 쓰 지 않아도 된다.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콘테스트에 출품할 경우에는 조금 상황이 달라진다. 입상하면 상금을 받기 때문에 저작권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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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효과 영상이 시각적 정보라면 음향은 청각적 정보다. 청각정보는 나름대로 독립적인 전달체계를 갖고 있어서 영상에 종속되지 않으며 시각 정보 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다. 드라마의 청각 정보는 크게 대사, 음악, 그 리고 효과(effect)다. 효과음의 기능을 살펴보자.

청각적 정보 전달

드라마의 진행상 꼭 전달해야 하는 스토리지만 굳이 카메라를 대고 싶 지 않은 경우, 신의 일부, 또는 전체를 이펙트(effect)로 처리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방법이다. 드라마의 전체 톤과 괴리된 화면을 직접 보여 주기보다는 청각 정보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학생이 교무실에서 선생님한테 종아리를 맞고 있고, 한 학생은 복도에서 이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하자. 친구 가 매 맞는 소리를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바깥의 학생의 감정이 더 중 요하다면 종아리 맞는 장면은 이펙트로 처리하고 카메라는 복도의 학 생만 보여 주는 식으로 콘티를 짜면 효과음이 스토리를 전달하는 수단 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 경우 관객의 감정이입은 배가된다. 청각 정 보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영상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수단일 뿐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경우 더 강력한 전달 수단 이 되기도 한다.

영상 해석 능력을 돕는다

영상에 음향이 적절히 추가될 때 시청자의 영상 해석능력은 배가 된다. 새벽에 호텔방에서 잠이 깬 중년 남녀에게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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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브레이크 소리

사실 요즘 자동차는 ABS 시스템이라 급브레이크 조작 시에도 바퀴 밀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교통사고 장면에는 바퀴와 아스팔트 사이의 마찰음을 강조해서 넣는데 이 역시 사운드가 영상 해석력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이 들린다면 이곳이 바닷가이고, 비일상적인 공간이며, 도시 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며,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의 장소라 는 것을 소리만으로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굳이 바닷가 호텔을 찍으 러 카메라를 들고 멀리 가지 않아도 밀월여행을 떠나온 사람이 느끼는 판타지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자동차가 운전 중에 어디 선가 급브레이크 소리가 크게 들린다면 뭔가 교통상황이 급박하게 돌 아가고 있다는 것을 소리만으로도 효과적으로 알려 줄 수 있다.

영상을 리드해 간다

자고 있는 남자의 귀에 탁상시계의 벨소리가 울리면 관객은 연기자가 깨기도 전에 탁상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또 방에서 책을 읽 고 있는 남자에게 노크소리가 들리면 관객은 배우가 돌아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문 쪽으로 간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남자가 급브레 이크 소리에 놀라 돌아보는 표정을 클로즈업(close-up)해서 보여주면 굳이 달려오는 차가 안보여도 시청자는 교통사고의 위험을 느끼게 된 다. 이처럼 효과음은 영상보다 한 발 앞서 스토리를 리드해 나가는 기 능이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이야기 전달에 조금도 손상이 가지 않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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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제작비를 절감할 수도 있다.

장면의 일관성을 유지해 준다

레스토랑의 음악, 공연장의 노래 소리, 바닷가의 파도소리, 음식점의 소음 등은 컷이 여러 장소로 옮겨 다녀도 효과음만 동일하게 유지하면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관객이 알 수 있게 해 준다. 카 페 같은 장소에서 시간 경과를 표현하려면 굳이 별도의 편집을 하지 않 아도 음악을 바꿔 주기만 하면 된다. 영화 <보디가드>의 클라이맥스 부분에는 공연장 주변에서 벌어지 는 쫓고 쫓기는 장면, 테러범과 보디가드의 대결 등이 긴박하게 진행되 는데 휘트니 휴스턴의 공연 음향이 전체적으로 깔림으로써 이 신들이 공연장 주변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클럽에서 시 끄러운 음악에 맞춰 춤추는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 경우 실제로 현장 음악이 나오는 상황에서 촬영한다면 NG다. 현장은 사일런트(Silent)로 유지하고 무대의 연주자와 보조출연자의 액션을 배경으로 대사만 찍은 후 추후 편집 과정에서 현장 음향을 신 전체에 깔아 줘야 한다. 음식점 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진행되는 장면이나, 시냇가에 앉아 대화하는 신 등은 촬영 시 오디오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하면 컷과 컷 사이에 단절감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경우도 사운드만 별도로 픽업하 여 편집할 때 신 전체에 입혀 주면 컷과 컷 사이의 오디오 불일치를 어 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 이처럼 현장의 사운드가 신의 일관성을 유지 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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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오디오는 영상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독립 분야다. 때로 오디오는 영상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드라마적 도구이자 장치다. 필자는 선배들에게 “영상을 알기 전에 오디오를 먼저 배워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 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디오는 콘티 연출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 는 점을 깨달아 가고 있다. 앞으로 영상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학생이 라면 오디오, 특히 음악과 효과에 좀 더 관심을 갖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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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연기자


기획안이 통과되고 작가가 대본 집필에 들어가면 기획자와

감독에게는 예산이나 스탭 구성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 바로 캐스팅 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성패는 캐스팅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제작에 돌입하려면 이 부분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단막극, 영화 등은 캐스팅이 결정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 르는 분수령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상파 3사에서 매주 쏟아내는 드라마는 20여 편쯤 된다. 물론 월 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되는 아침드라마나 일일 연속극도 한편으로 계산해서 그렇다. 또 연간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평균 100여 편 정도 된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드라마, 영화 합쳐서 120편이니 최소한 남녀 주인공 240명이 늘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주인공을 할 수 있는 배우는 240명은 고사하고 아무리 따져 봐도 20∼30명 안팎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배우층이 그리 두텁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 공급 배우들의 개런티가 천정부지로 높아진다. 또 주인공을 잡기 위해 방송사 PD나 영화감독, 제작자들이 들이는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주 인공을 확보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 편성이 결정되기도 하고 엎어지기 도 한다. 요즘은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높아져 있어서 상위 라인(A/L)비용과 하위라인(B/L)비용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주연 급 배우 몇 명이 가져가는 돈이 방송사에서 주는 전체 제작비보다 더 높 은 경우도 있다.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료가 이렇게 거품이 끼다 보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외주제작사들의 몫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때로 는 손실 발생을 미리 예견하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제작에 돌입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에 관해서는 5장에서 충분히 거론한 바 있다. 어렵게 배우를 선정하고 섭외까지 했는데 막판에 얼마 안 되는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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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캐스팅이 어그러지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런 경우, 돈보다도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저 배우보다 연 예계 선배인데 어떻게 내 출연료가 더 적으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 우 배우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현재 내가 얼마나 연기력과 인지도와 호감도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데뷔 몇 년차냐가 배우의 가치를 결 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배우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일을 성사시키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사실 당신이 훨씬 선배 고 연기력도 좋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요즘 회사가 정말 어려 워요. 이번에는 정말 죄송한데 내 얼굴 봐서 이 정도에 계약을 해 주시 면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출연료를 정상화시켜 드리겠습니다. 대신 자 막을 저 배우보다 더 위에 넣어 드릴게요.” 이런 식으로 설득하면 배우도 인간이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돈은 적게 주더라도 자존심만큼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배우 는 대중의 인기를 먹고 자라며 자존심으로 스스로를 지탱하며 산다. 그 러므로 기획자는 연기자를 대할 때 특히 자존심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 해야 한다. 만약에 고지식하게 “당신은 저 배우보다 인기가 떨어지잖 아? 이 바닥에 데뷔한 지 오래 됐다고 출연료 더 주는 게 말이 돼? 여기 가 뭐 공무원 조직이야?” 이러면 대화는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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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캐스팅의 첫 단계는 캐스팅의 우선순위표를 만드는 것이다. 1순위부터 라인업을 해서 해당 역할에 적합한 배우의 순위표를 만드는 것이다. 이 순위표를 만들 때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물론 감독마다 제작자마다 가치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비교적 수치화된, 객관적 데이터로 뽑을 수 있는 기준들이 여덟 가지 정도가 있다.

인지도 인지도란 얼마나 많은 대중이 이 배우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 중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호감을 갖는다. 인간은 태 생적으로 아는 사람의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그것이 확대되면 혈연, 지 연, 학연이 되는 것이다. 매번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면 아나운서, 앵커, 기자, 텔레비전토론 회 사회자, 탤런트한테 각 정당에서 암암리에 공천 섭외가 온다고 한다. 이계진, 변웅전, 한선교 의원 등은 아나운서 출신이다. 앵커 출신 중에 서도 박성범, 맹형규, 이윤성 의원 등이 인지도를 업고 국회에 진출했 다. 탤런트 중에도 강부자, 이순재, 이덕화, 정한용의원 등이 있고 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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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언 이주일도 국회에 진출했었다. 인지도를 활용해서 승리하겠다는 선거 전략의 일환인 셈이다.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조금 더 애정을 갖는다는 것 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단 경계심을 갖는다. 시청자나 관객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배우가 나오면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의 편이 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신인이 나오면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갖게 된다. “어? 못 보던 배우가 나왔네? 얼마나 잘하나 한번 볼까?” 이런 식 이다. 신인배우에게 관객은 차디찬 방관자, 냉담한 비판자의 입장이 된 다. 그래서 인지도는 영화든, 텔레비전이든, CF든 캐스팅할 때 가장 먼 저 따져 보는 항목이다. 많은 감독들이 신인배우를 기피하는 이유도 이 인지도 때문이다. 처음 보는 배우를 스크린의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감독으로서는 엄청난 모험이다.

호감도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자기 기준을 가지고 배우를 보고 드라마를 선택한 다. 배우인 줄은 알겠는데 달려가서 사인 받기는 싫다든가 심지어는 그 배우만 보면 짜증이 나서 채널을 돌리게 된다면 인지도는 있지만 호감도 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비호감(非好感)이 된다. 인지도는 높은데 호감도가 낮으면 캐스팅 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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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배우의 이미지란 실제 그 배우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 이 없다. 대중이 그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배우가 대 중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도 캐스팅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배우들은 이미지를 굉장히 중요시한다. 한국의 많은 여성들, 일본의 많은 아줌마 팬들이 좋아하는 배용준 같은 배우는 ‘여자한테 한없이 잘해 줄 것 같은 따뜻한 남자’의 이미지 를 갖고 있다. 심은하, 이영애 등은 한때 수많은 한국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청순가련의 여인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배우의 이미지는 대중에게 강력한 힘을 갖는다. 광고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기 존의 이미지를 자사의 상품에 덧씌워 판매량을 높이자는 전략이다. 이 미지가 곧 돈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터프가이, 팜므파탈, 도시의 세련 된 커리어우먼 등도 대중에게 곧잘 어필되는 이미지다. 캐스팅이 성사되려면 배우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내 작품에 제시된 캐릭터가 맞아야 한다. 배우는 나름대로 자기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있 어서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배역이 배우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상 반되면 그 캐스팅은 성사되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계에서는 배우를 미 리 정해놓고 기획에 들어가는 일도 종종 있다. 그 배우가 하고 싶어 하 는 캐릭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배우가 원하는 이미지를 시나리오 집 필 과정에서 반영하는 것을 특정 배우를 ‘놓고 쓴다’고 한다. 요즘같이 주인공 캐스팅이 어려운 시기에는 아예 배우를 ‘놓고 써서’ 일찌감치 출 연을 확정지어 놓고 기획에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 이미지 변신을 한다는 것은 배우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를 버 리고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는 것인데 실제로는 자기의 내면에 잠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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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던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캐릭터가 드러나는 것일 뿐, 자기가 가 지고 있지 않은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내면 어딘 가에는 그런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다가 어느 계기로 발현되는 것이다. 20대 때 청순가련, 비련의 여주인공을 하다가, 30대 후반이 되면 푼수 연기를 하는 것은 푼수라는 이미지메이킹에 성공한 것이 아니고 원래 자기가 마음 한구석에 갖고 있던 푼수 캐릭터를 끌어낸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지 않은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억지로 만들 어 내면 연기하는 사람도 불편하고, 연출하는 사람도 힘들고, 보는 사 람도 몰입하기 힘들다. 이처럼 이미지 변신이라는 것은 본래 그 사람에 게 내장되어 있던 캐릭터 하나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 시트콤 PD들은 기존에 코믹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배우들은 웬만 하면 캐스팅하지 않는다. 점잖고 듬직한 남자배우, 청순가련한 여자배 우를 시트콤에 캐스팅하는 이유는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망가뜨리기 위해서다. 그래야 캐스팅에 성공하는 것이다. <순풍 산부인과>의 박영 규부터 시작해서 노주현, 신구, 이순재, 김용림, 나문희까지 모두 코믹 이미지라곤 전혀 없던 배우들이었다. 시트콤의 대가 김병욱 PD는 늘 ‘이번에는 누구를 망가뜨리나’를 고민한다고 한다. 이미지를 변신하면 항상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 배우라는 직업이다. 감독이 배우의 이미지를 변신시키려면 평소에 그 배우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실패가 없다. 그래서 감독은 배우와 친하게 지내며 평소에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관찰하는 일도 해 야 한다. 학생들이 작품 만드는 과정을 보면 배우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경우 가 많다. ‘당신은 배우고 나는 감독이니까 연기는 당신이 알아서 하고 나는 찍기만 하겠다’ 이런 식이다. 이러면 현장에서 배우를 컨트롤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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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출연료도 겨우 기름 값 정도만 주면서 너 무 무신경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여러 번 만나서 그 사람의 주변 취재도 좀 해 보고 그 배우의 본래 성격은 어떤지, 어떤 특기가 있고 어떤 말투를 잘 쓰는지, 또 얼굴은 어느 각도에서 찍어야 예쁘게 잡히는지 등등 다양하게 취재를 하고 나서 촬영에 들어가는 것 이 올바른 방법이다. 한마디로 배우한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뽑아 먹을 것이 있다. 배우의 숨어 있는 캐릭터나 재능, 특기를 발굴해서 작 품에 반영하는 것은 드라마를 풍성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성실성 텔레비전 연속극의 경우 드라마가 한번 시작이 되면 좋으나 싫으나 6개 월 동안은 공동 운명체다.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배우는 일정 기간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가끔 개인적 인 사정으로 배우가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비록 조연이라 하더 라도 이처럼 중간에 배우가 사라져 버리면 작가나 감독은 커다란 혼란 에 빠지게 된다. 가끔 술 취한 채 연기하는 배우들도 있다. 새벽까지 술 을 먹고 방송국에 나와서 술이 덜 깬 채로 연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이 너무 취해 촬영을 펑크 내는 경우도 있다. 알코올 중독 때문이라 고는 하지만 그런 전력을 갖고 있는 배우를 자기 작품에 캐스팅하는 감 독은 없을 것이다. 이런 배우는 기피 대상 1호다. 감독들은 이런 불성실 한 태도로 연기생활을 하는 배우들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 유한다. 캐스팅할 때 중간에 잠수 탈 위험이 있는 요주의 인물들은 일 단 배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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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내 교통상황 때문에 새벽 6시 대본 연습, 7시 촬영 출발이 보통이다. 아침 일찍 미용실 가서 머리 하고, 의상 다 챙겨가지고 5시 40분에는 연습실에 도착해야 한다. 나이가 70이 넘어 80세에 이르기까 지 왕성하게 현역으로 연기 활동을 하는 배우들의 공통점은 지각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약속 잘 지키고 자기 대사 철저히 외워서 카메라 앞에 서고 연기 플랜 정확하게 세워서 촬영에 임하는 배우들이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주인공급 배우들은 녹화 전날은 어떤 약속도 잡지 않는다. 오로지 대사 외우고 연기 플랜을 세우면서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주인 공은 주인공이 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얼마나 성실하게 작업에 임해 왔는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인가? 이것이 배 우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스타성 배우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대중의 별이라 불리는 스타와 직업배우, 즉 연기자다.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은 스타와 연기자의 차이에 대 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기차가 오고 있는데 모르는 여자를 레일 위에 세워 놓았 다면 관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이구 저런, 저 여자 곧 죽겠네….’ 만일 당신이 똑같은 상황에 스타를 놓아둔다면 관객은 이렇게 말하며 울부짖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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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멈춰요! 그녀를 구해줘요! 너무 잔인해요. 어떻게 좀 해 봐요!’ 그리고 이 불행의 순간에서 그녀를 구해 준 당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스타는 대중에게 직업배우와는 다른 어떤 힘을 발휘한다.

카리스마

첫 번째가 카리스마다. 오래된 영화 중에 안성기가 거지로 나온 <고래 사냥>이란 영화가 있었다. 비록 거지로 나왔지만 거지같지 않은 그 무 엇이 안성기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몇 년 전에 개봉 했던 <크로싱>이라는 영화에는 차인표가 노숙자로 나왔다. 비록 노숙 자로 연기를 하지만 노숙자 같지 않은 그 어떤 기운이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카리스마다. 관객을 압도하는 어 떤 힘, 에너지, 기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배우를 스타라 하는 것 이다. 직업배우는 카리스마 보다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감과 익숙 함이 있을 뿐이다.

매력

스타는 흡인력이 있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 매력 등이 있다. 직업배우는 호감도는 있지만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 는 강렬한 흡인력은 부족하다.

흥행성

스타는 대중을 몰고 다닌다. 대중 동원력이 있는 것이다. 어떤 기획자 가 지금 한창 잘나가는 톱 가수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운 다면 이 기획자는 그 가수가 갖고 있는 대중 동원력을 노리고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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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스타는 대중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돈이 된다. 광고계에서 스타의 대 중 동원력을 이용하여 스타 마케팅을 시도하는 경우는 너무도 흔하다. 연기자는 대중 동원력이 없다. 다시 말하면 인지도는 있는데 대중 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게 스타와 연기자의 차이점이다.

배역이 배우를 따라온다

스타를 캐스팅 할 때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캐스팅한다. 그 사람의 연기 력이나 작품 소화력, 이런 것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느 냐를 더 많이 고려한다. 배우가 캐릭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캐 릭터가 배우를 쫓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배우가 자기를 버리고 배역 을 열심히 연구해서 그 배역이 요구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배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에 배역이 맞춰져 버린다는 것이다. 영화 <실미도>에서 안성기가 특수부대장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 부대장이 안성기화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안성기는 뭘 연기해도 안성기 일 수밖에 없다. 배역이 배우를 따라간다는 말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스타를 캐스팅할 때는 배역이 배우를 따라가는 현상을 감수해야 한다. 연기자를 캐스팅할 때는 연기력 중심으로 캐스팅을 한다. 이처럼

표 33-1 스타와 연기자 스타

연기자

영향력

카리스마(우상)

친근감(이웃, 친구같은 느낌)

매력

흡인력 높음

호감도(강렬한 흡입력 부족)

대중성

대중 동원력 높음

인지도는 있으나 대중을 끌어내는 힘 부족

캐스팅 기준

이미지 중심 배역이 배우를 따라간다

연기력 중심 배우가 배역 속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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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연기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중요한 것은 지나친 스타 의존은 작품의 완성도를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캐스팅에서는 스타 와 연기자를 골고루 안배하는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

스타보다는 연기자가 되라

해마다 수만 명의 연기자 지망생들이 연기 관련 학과, 연기 아카데미, 배우 학원 등을 통해 배출된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타의 꿈 을 안고 방송국이나 영화사, 기획사, 모델 에이전시의 문을 두드리지만 실제로 스타가 되는 사람은 극소수다. 스타는 탄생하기도 어렵지만 유 지하기는 더 어렵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

“스타는 짧고, 연기자는 길다. 스타가 되기보다는 연기자가 되라”

스타는 말 그대로 밤하늘에 뜬 별이다. 그냥 별이 아니라 유성이다. 자기 자신을 불태워 밤하늘에 밝게 빛나다가 이내 스러져 버리고 만다. 스타의 반열에 올라설 때는 구름 위에 뜬 것 같지만 생명력이 대단히 짧 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추락할 때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중의 인기는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맛들이면 끊기 힘들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스타 로부터 멀어져 갈 때, 마약 중독자가 금단현상을 겪는 것보다 더 큰 고 통을 겪게 된다. 일본 가부키계에 “고목에 핀 꽃이 아름답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 다. 나이 든 배우의 절제되고 원숙한 연기가 젊은 배우의 힘이 넘치는 연기보다 훨씬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요즘 드라마를 보 며 그걸 느낀다. 노년에 이른 배우들이 그저 화면에 병풍처럼 앉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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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해도 화면이 꽉 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사가 많지 않아도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화면의 중심을 딱 잡아준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다. 그것이 바로 고목에 핀 꽃이 아름답다는 말의 참뜻이다. 그래서 역 할이 크지 않아도 출연료 비싼 중견 연기자를 쓰는 것이다. 나이 먹어 도 여전히 제 몫을 해내는 중견 연기자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 아름 답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연기가 좋아서 이 길에 들어섰다면, 짧은 순간 왔다가 사 라지는 밤하늘의 별 같은 존재인 스타를 좇지 말고 꾸준히 오랫동안 연 기자로 살아갈 수 있는 연기자의 길을 가기를 권한다. 별은 떴다가 지 지만 연기자에게는 정년퇴직이 없다. 내 두 다리로 설 기운만 있으면 연기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전원일기>에서 최불암의 어머니로 나왔 던 정애란 씨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다. 이 분의 꿈이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얼마 나 행복한 일인가? 스타가 되겠다는 허황된 생각만 버리면 직업인으로 서 연기자의 삶도 괜찮다고 본다.

연기력 대학로에 가면 연기 잘하는 연기의 고수들이 참 많다. 무대 위에서 펼 쳐 보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와 발성, 동작에 압도된다. 그런데 때 로 연극무대에서 날고 기는 배우가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해 형편없는 연기로 관객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연기력은 좋은 배우 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대 연기와 카메라 연기의 특성에서 찾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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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신선도 007 시리즈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23편까지 나왔다. 2014년 현재 24 편이 제작 중이다. 제목은 <데블 메이 케어(Devil May Care)>다. 주인 공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대니얼 크레이그가 맡았고 2015년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시리즈물은 전통적으로 남자 배우는 잘 안 바뀌고 여자 배우는 매번 바뀐다. 지금까지 23명의 본드걸이 탄생했고 현재 24번째 본드걸 이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선도를 중시하는 캐스팅이다. 연기력은 남자 배우한테 맡기고 여자 배우는 예쁜 얼굴과 섹시한 몸매 를 책임지라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는 신선도만 갖고는 안 된다. 인지도가 없는 신선도는 때로 위험하다. 어쩔 수 없이 신인을 주인공으 로 캐스팅해야 할 경우에는 주변에 연기 잘하는 관록 있는 배우들을 대 거 포진시킨다. 그런 안전장치 없이 신선도만으로 캐스팅하는 것이 얼 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련한 배우의 인지도와 연기력, 신인배우의 신선도가 조화를 이뤄야만 캐스팅은 성공할 수 있다.

현재성 현재성이란 현재 활동 중이냐, 공백 기간이 있었느냐의 문제다. 대중은 그만큼 빨리 잊는다. 특히 가요계는 더 하다. 몇 달만 안 보여도 잊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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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조연급 배우들은 여기 저기 나올 수 있지만 주연급 배우들은 항상 공백이 있다. 연속해서 주인공 배역을 맡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일정 기간 좀 쉬어야 한다. 그 공백 기간에도 예능 프로에 간간이 얼굴을 비 치는 이유는 바로 현재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배우가 현재 활 동하고 있는 배우냐 아니냐? 이것도 캐스팅할 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다.

맺는 말 이상의 여덟 가지 항목들은 대부분 수치화할 수 있는 항목들이다. 아쉽 게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항목들에 대한 계수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광고계에서는 인지도, 호감도, 이미지, 현재성 등에 관 한 정보를 정량지표화해서 비교적 과학적으로 모델을 선정하고 있다. 이제 영화나 텔레비전드라마 캐스팅에도 과학적인 방법이 도입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텔레비전에서는 배우의 비(非)호감도를 똑같은 비중으로 고려한다고 한다.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점 에서는 같다는 것이다. 나름 일리 있는 판단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필 자의 경우 호감도, 성실성, 연기력, 신선도 이 네 가지를 중시하는 편이 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다. 위의 여덟 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 배우는 세상에 없다. 그중에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볼 것이냐가 감독의 스타일 이자 연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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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연기

할리우드에서 오랫동안 연기 아카데미를 운영해온 토니 바는 그의 저 서 󰡔영화연기󰡕에서 좋은 배우를 이렇게 정의했다.

“좋은 배우란 첫째, 대본의 내용을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 둘째,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셋째, 관객을 감동시키는 사 람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 항목,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이란 다시 말 하면 호감도를 말한다. 왠지 그 사람만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즐거 워진다, 그와 계속 같이 있고 싶다, 이것이 호감도다. 인지도는 높은데 호감도가 떨어지는 배우도 있다. 세 번째 항목이 관객을 감동시키는 사람인데 이는 배우가 가지고 있 는 흡인력, 매력, 카리스마 등을 말한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을 가진 배우를 좋은 배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항목으로 꼽은 호감도나 세 번째 항목인 카리스마는 어느 정도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연기자 자 신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경우도 없는 건 아니지만 본래 그 사람이 가지 고 있는 품성 속에 저런 것들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첫 번째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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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즉 대본의 내용을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은 대부분 연기 자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배우는 전달자 어쨌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첫 번째 항목, 즉 대본의 내용을 관객 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배우라는 점이다. 이 첫 번 째 항목에서 핵심은 ‘전달’이다.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바로 배우의 연기력의 핵심이고, 표정이든 액션이든 정확하게 연기할 수 있는 능력 이 좋은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결국 배우는 감독이나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 주의, 주장, 사상 등 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사람이고, 이를 정확하게 잘 전달할 수 있는 배우 가 좋은 배우다. 그러므로 좋은 배우의 첫 번째 조건은 ‘전달력’이다.

카메라 연기와 무대 연기 연극 무대에서 나름대로 좋은 배우로 실력을 인정받은 연극배우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출연해 초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 는 사례를 종종 보게 된다.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라든가, 대사 톤, 표정 연기, 블로킹과 액션 등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따 로 놀든가, 과장된 연기로 관객에게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토니 바의 말대로라면 연극 무대에서는 대본의 내용을 정확하게 잘 전달하던 배 우가 카메라 앞에서는 잘 전달하지 못하는 배우가 되어 버린 경우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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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된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데 있다. 첫째로는 무대 연기와 카메라 연기 의 전달 방식, 다시 말하면 배우의 연기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사 용되는 메커니즘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설혹 그 차이를 이해하고 있더라도 거기에 맞게 연기의 크기와 강약을 조절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전달 방식의 차이 이해하기 이 문제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카메라 연기에서의 전달 메 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카메라는 배우의 연기를 화면 에 담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의 도구를 사용하는가 하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감독이 영상화 작업을 할 때는 어떤 법칙을 가지고 원하 는 영상을 담아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감독은 글로 된 대본을 소리 와 그림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번역가가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는 문법을 알아야 하듯이 글이라고 하는 하나의 언어를, 소리와 그림이라고 하는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는 일정한 문법이 필요하다. 배우가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영상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문법을 알 필요가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드라마의 연출가는 콘티에 의거해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현장 촬영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배우의 연기를 카 메라에 담는 과정’이고 이 작업에는 반드시 콘티가 필요하다. 따라서 배 우는 감독에게 콘티에 대해 질문할 권리가 있다.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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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가 배우에게 있기 때문이다.

콘티에 표현되는 다섯 가지 요소들 감독이 짜는 콘티(continuity)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들 이 표현된다.

① 화면의 사이즈(size) ② 블로킹(blocking) ③ 앵글(angle) ④ 시점(point of view) ⑤ 음악과 효과(music & effect)

콘티를 구성하는 이 다섯 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감독은 자신 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기획 의도,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구현해 나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요소들 중에서 무대 연기 출신 배우들이 특히 주목 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첫 번째 항목인 화면의 사이즈다. 화면의 사이즈 란 대상을 얼마만한 크기로 화면에 담을 것인가를 기록해놓은 감독의 작 업계획서라고 할 수 있겠다. 콘티의 다섯 가지 요소 중 이 사이즈의 변화, 즉 화면 크기의 변화와 관련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대에서 아 무리 훌륭한 연기력을 쌓았다 하더라도 카메라 앞에서는 초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럼 화면의 사이즈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가 있고, 그것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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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관객에게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화면 사이즈의 종류

넓게는 롱숏(LS, long shot)부터 좁게는 빅클로즈업숏(BCS, big closeup shot)까지 카메라는 다양한 사이즈의 숏을 구사하여 눈앞의 현실을 화면에 담는다.

롱숏(long shot)

빌딩 옥상이나 높은 산 등 멀리서 보는 풍경.

풀숏(full shot)

아주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교적 멀리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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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트풀숏(tight full shot)

인물의 머리부터 발까지 화면에 꽉 차게 보이는 풍경.

미디엄숏(medium shot)

인물의 무릎 부분까지 보이는 숏. 니숏(Knee Shot)이라고도 한다.

웨이스트숏(waist shot)

인물의 허리부분까지 보이는 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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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트숏(bust shot)

머리 윗부분 헤드스페이스가 살아있고 어깨와 팔 윗부분이 일부 보이 는 정도의 숏.

타이트바스트숏(tight bust shot)

헤드스페이스가 제외되고 어깨선까지만 보이는 숏.

클로즈업숏(close-up shot)

어깨선이 제외되고 머리와 턱 부분까지 꽉 차게 보이는 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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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클로즈업숏(big close-up shot)

눈이나 입 등 얼굴의 특정 부위만 잡거나 작은 물건을 화면에 꽉 차게 잡는 숏.

사이즈 변화가 관객에게 주는 의미

인간의 눈의 집중도는 중심 되는 피사체에 70%, 그 외의 부분이나 배경 에 약 30% 정도 할애된다고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중심 되는 피사체 중에서도 어떤 특정 피사체에 더 관심이 있어 더 정확하게 보고 싶다면 그 대상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관찰자가 대상을 보다 집중해서 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서는 행위가 영상에 있어 카메 라의 사이즈 변화에 해당되고 이 사이즈의 변화를 통해서 관객이나 시 청자는 가만히 앉아서도 관심이 있는 피사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카메라가 대신 다가가 주기 때문이다. 사이즈의 변화가 관객에게 주는 의미는 ‘다가가서 보기’다.

다가가서 볼 수 없는 무대 연기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하는 연기는 카메라 콘티로 환 산하면 FS에 해당되는 사이즈다. 연극을 보는 관객은 항상 무대 위의 배우를 풀숏(full shot)으로 본다. 배우를 자세히 보고 싶다고 무대 위로 올라가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따라서 연극배우는 객석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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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객에게 골고루 대사와 액션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FS에 해당하는 연기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무대 연기는 풀숏 연기라고 할 수 있다. FS은 가장 인간의 눈에 비친 실제상황과 가장 가까운 사이즈이므 로 현실적이다.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눈은 롱테이크(Long take)의 방식으로 배우의 연기를 본다. 인간의 눈은 편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풀숏에 롱테이크, 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인간의 실제 관찰과 가깝다. 연극의 관객은 배우의 연기를 커트하지 않고 지속된 풀숏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카메라가 이처럼 관객이 다가서서 보지 못하도 록 커트하지 않은 채 계속 FS으로 화면을 두는 것을 롱테이크라 한다. 때로 FS에 롱 테이크로 찍은 영상은 무한한 영화적 상상력과 힘을 발휘 한다. 관객은 주인공의 표정도 보고 싶고, 그 상대의 얼굴도 자세히 보 고 싶다. 그러나 감독은 냉정하게 버틴다. 마음의 눈으로, 상상력의 힘 으로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은 이러한 FS의 힘을 대단히 강렬하 고 효과적으로 구사한 영화다. 특히 <터널>편에서의 FS은 연기자의 블 로킹도 없는 정지된 화면에 아주 길게 롱테이크를 함으로써 전쟁의 참 혹성과 비인간성을 가슴 저리게 전달해 준다. 간혹 신인 감독들이 영화의 예술성을 과시하고자 풀숏의 롱테이크 를 남발하는 경우가 있다. 분명한 것은 충분한 이유나 정당성 없이 남발 되는 롱테이크는 단지 관객을 지루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풀숏에 정지된 화면, 그리고 롱테이크는 강렬한 내러티브를 전제로 했을 때 빛 을 발한다. 스토리가 탄탄히 구축되지 않은 채 어설픈 롱테이크를 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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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구사하는 것은 다소 심하게 표현하면 관객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다.

언제든지 다가가서 볼 수 있는 카메라 연기

연극 무대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항상 풀숏이다. 그러나 영화나 텔레비 전드라마를 보는 관객은 얼마든지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 있다. 카메라 가 이를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관객이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얼마든지 사이즈를 좁혀 타이트하게 영상을 잡아낼 수 있다. 따라서 텔 레비전이나 영화의 관객은 연극 무대와 달리 얼마든지 가까이 가서 배 우를 볼 수 있다. 사이즈가 타이트해지면 관객의 눈과 귀는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카메라가 다가가면 마이크도 다가선다. 즉 시청자는 가까이 다 가서서 보고, 듣는 것이다. 보고 듣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배우 가 계속 풀숏 연기를 하게 되면 보는 이는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사이즈에 맞는 연기의 크기와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

흔히들 말하기를 가장 텔레비전적인 사이즈를 바스트숏이라고 한다. 시청자가 가장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사이즈라는 것이다. 사실 요즘 같 은 디지털 시대에 가장 텔레비전적인 사이즈는 웨이스트숏 정도로 넓 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고화질 화면으로 보는 BS는 좀 부담스럽 다. 피부의 잡티나 땀구멍까지 다 보여 줌으로써 드라마적인 상상력이 개입할 소지를 막아 버린다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가장 텔레비전적이라고 하는 사이즈인 바스트숏은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일까? 바스트숏에서 관객의 눈은 배우에게 얼마나 다가 가 있을까? 필자는 카페에서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정 도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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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위해 얼굴을 서로 바짝 당겨 앉은 거리고, 빅클로즈업은 앞의 사진에서 보듯이 키스하는 정도로 가까운 상태의 거리다. 이쯤 되면 특별한 대사가 필요치 않게 된다. 연기자는 미세한 떨림으로, 호흡으로, 심장박동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카메라 연기 카메라는 넓게는 롱숏(long shot)부터 좁게는 빅클로즈업숏(BCS)까지 다양한 사이즈의 숏을 구사하여 주어진 현실을 화면에 담는다. 인간의 눈의 화각은 대략 45∼50도 정도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 는 현실은 언제나 풀숏(Full shot)이다. 인간의 눈을 본떠 만든 카메라 렌즈는 초점거리 50mm 렌즈가 표준이 된다. 이를테면 표준렌즈는 인 간의 화각에 가장 근접한 사이즈를 잡아내는 렌즈라고 할 수 있겠다. 렌즈의 화각을 기준으로 하면 대개 초점거리 35∼50mm 정도면 표준 렌즈 군에 속한다. 물론 인간의 눈은 두 개이므로 우리가 육안으로 보 는 화각은 훨씬 넓어진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화각이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평균으로 인간의 화각은 160도 정도 된다. 초점거리가 35mm 이하이면 와이드렌즈 군으로 분류되며 초점거 리가 짧아질수록 화각은 넓어지게 된다. 초점거리가 70mm 이상이면 망원렌즈 군에 속하며 초점거리가 길어질수록 화각은 좁아진다. 초점 거리가 길어진다는 것, 다시 말하면 화각이 좁아진다는 것은 카메라가 보다 집중해서 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서는 행위다. 즉 카메라의 사이 즈가 타이트해지는 것이다. 사이즈가 타이트해지면 심도가 깊어지면 서 화면의 중심 되는 피사체에 대한 관객의 집중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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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러한 사이즈의 변화를 통해서 시청자는 관심이 있는 피사체를 가 까이에서 집중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것은 관객과의 거리가 수시로 변함 을 의미하며 이런 전달거리의 변화에 맞게, 즉 카메라의 사이즈에 맞게 연기의 크기와 강약을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연기자는 카메라 연기와 무대 연기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하며 이 둘을 구분해서 연기 플랜을 세워야 한다. 이 전달거리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숙 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연극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가 사이즈를 변화시키는 것은 배우와 관객 간의 전달거리를 이리저리 바꾸어 주는 것이고, 따라서 연기자도 매 컷마다 연기의 크기 와 강약을 이리저리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즉 콘티에 맞는 연기플랜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전달거리의 변화를 감안한 연기플랜을 세우지 않 고 무대연기에서 몸에 밴 풀숏 연기를 계속하게 되면, 다시 말하면 카메 라 렌즈를 통해 관객이 바짝 다가와서 보고 있음에도 풀숏에 해당되는 커다란 액션과 표정, 블로킹, 대사를 하고 있다면 관객은 당연히 괴리 감을 느끼게 된다. 이를 극복하려면 연기자는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 워야 한다. 어떤 연기자는 의도적으로 연기의 크기를 작게 하기도 한다. 연기 의 크기가 작다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가가서 보고 싶게 만드는 연 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이 다가가고 싶다고 느낀다는 것 은 다시 말하면 카메라가 다가가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고 이는 감독 의 콘티가 타이트해져야 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연기자가 스스로 하나의 화면 속에서 지배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작고 섬세한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는 ‘낮은 목소리의 카리스마’다. 절제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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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연기로 강력한 전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프랜시스 포 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편이나 <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런 브랜도가 보여 주는 연기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배우가 관객 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먼저 카메라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고 있는 경우다.

전달력의 핵심은 콘티에 대한 이해 사이즈가 타이트해지면 관객의 눈과 귀는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온 것 이다. 카메라가 사이즈를 변화시키는 것은 배우와 관객 간의 전달거리 를 이리저리 바꾸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달거리의 변화를 연기플랜 에 포함하지 않아 카메라의 디테일한 포착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면 그 연기자는 효과적인 전달을 할 수단을 잃게 된다. 이처럼 전달력이 떨어 진 배우의 연기는 관객에게 호소력을 잃게 된다. 따라서 연기자는 카메 라 연기와 무대연기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연기에 임해야 한다. 그 차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카메라 연기와 무대연기의 본질적인 차이는 콘티에 있다. ② 그 콘티 중에서도 사이즈에 있다. ③ 사이즈 변화의 핵심은 다가가서 보기다.

이것이 카메라 연기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진출하고자 하는 연극배우가 세울 수 있는 전략은 대략 세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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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전달거리의 차이를 이해한다. ② 전달거리에 맞게 연기의 크기와 강약을 조절하는 법을 숙달한다. ③ 감독의 콘티를 이해하고 콘티에 맞는 연기 플랜을 세운다.

이에 대한 사전 지식과 훈련을 쌓고 난 후에 카메라 연기에 임해야 대본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토니 바가 말하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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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기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에서 연극영화 석사학위를 받 았다. 1981년 KBS에 입사해 예능국과 드라마제작국에서 일했고 1995 년에 SBS로 옮겨 주말극장 <옥이이모>, 1998년 월화드라마 <은실이>, 2002년 일일극 <소문난 여자>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1996년 백상예술 대상 연출상(<옥이이모>)과 1998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달팽이>), 1999년 한국방송PD협회상(<은실이>)을 수상하였다. 현재 동아방송예 술대학교 영상제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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