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특집인티3 장편소설 <원형의 전설>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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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圓形)의 전설(傳說)


第一章 이것은 세계가 自由와 平等, 이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싸우 고 있던 시절, 조선이라고 하는 조그만 나라에 있은 한 私生 兒의 이야깁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동양에 있은 나라였고 ‘자유와 ’ ‘평등’ 은 서양에서 생긴 물결이었읍니다. 이 自由와 平等이 核戰 爭을 일으켜 결국 人類 前史에 終焉을 고하게 하는데, 六· 二五動亂이라고 하는 그 前哨戰과 같은 전쟁이 벌어진 곳

이 바로 이 조선이라는 땅이었읍니다. 그런데 족보를 따지 면 르네상스를 어머니로 하는 프랑스革命이 낳은 男妹라고 할 수 있는 ‘자유와 ’ ‘평등이 ’ 어찌하여 생면부지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이라는 엉뚱한 나라에 가서 충돌하게 되었는가 하 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世界史라고 할 수 있는 西 洋史의 흐름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겠읍니다. 內陸的이고 같은 자리에서 春夏秋冬을 되풀이한 植物 的 季節性이랄까 ‘輪廻’的인 것이 동양사의 성격이었다고

한다면 西洋史는 海洋을 무대로 삼고 끊임없이 ‘西北에의 길을 ’ 더듬은 流動性이라고도 할 수 있는 ‘終末觀’에서 그 특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오리엔트에서 발원한 西洋文明은 페르샤, 그리이스를 거쳐 로마에, 로마에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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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 는 잉글란드에 머물렀다가 大西洋을 건너 아메리카로, 다 른 하나는 도이칠란트에 들렀다가 러시아로 흘러들었읍니 다. 러시아로 흘러든 그 흐름은 시베리아의 흰 벌판을 橫斷 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아메리카로 흘러들었던 흐름은 太平 洋의 푸른 파도를 넘어 필리핀에까지 당도했었는데, 이 이

야기의 싹이 트는 무렵이 되는, 第二次 世界大戰이 끝나서 조선 땅인 北緯 三十八度線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들 男妹는 서로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할 원수 사이가 되어 있 었던 것입니다. 自由와 平等이라는 이름으로써 그렇게 원수가 된 것인

데 이 ‘자유와 ’ ‘평등은 ’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르네상스에 있 은 ‘自我의 發見’에서 싹이 튼 것입니다. 그들은 自我를 發見했다고 했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 늘이 두려워 밤이고 낮이고 머리를 숙이고 祈禱만 드리면서 살다가 암만해도 재미라는 것이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그중 몇몇은 서로 짜 가지고 몰래 곳간에 들어가서 먼지 속에서 옛날 그림책을 찾아 꺼내다 펼쳐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기 들과 꼭 같은 모양을 한 인간들인데 祈禱를 하는 모습은 하 나 없고 모두들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거기서 그 들은 숲 속으로 찾아가서 그림책에 있는 것처럼 노래를 해 12


보았읍니다. 그랬더니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몸이 쭉 펴지는 것 같았읍니다. 이때까지 가슴에 十字를 그으면서 기도만 드리느라고 언제 가슴을 내밀고 살아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 읍니다. 마을에 돌아온 그들은 소리소리 외쳤읍니다. 우리 는 ‘人間’을 發見했노라고. 그 당시는 新大陸을 발견해 내 서 너도나도 하고 發見이라는 것에 들떴던 시절이었기 때문 에 그 소리는 마을에서 마을로 퍼져 나가 순식간 온 세상을 덮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發見이 아니라 發明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表現이 될 성질의 것이었고, 더구나 人間의 發見이 아니라 그것은 人間의 喪失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왜냐하 면 기도만 드리는 것이 인간 생활이 아니라, 노래도 부르며 살아야 완전한 人間 生活이다 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마 치 앞모습만 거울에 비쳐 보고 살던 사람이 뒷모습도 보아 야 완전한 내 모습을 알 수 있다 해서, 뒤에다 또 하나의 거 울을 세워 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과연 뒷모 습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無數의 내 가 줄지어 있어서 어느 것이 낸지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낸가 해서 그를 보면 그 뒤에 또 내가 있읍니다. 그래 서 그를 보면 또 그 뒤에 내가 있고… 결국 ‘自我’의 發見이란 ‘無數한 自我’의 발견이었고, ‘無 13


數한 自我’ 속에 ‘自我’를 상실하는 일이었읍니다.

그로부터 人間의 歷史는 잃어버린 自我를 찾아 거울 속 을 헤매는 過程이 되었읍니다.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祈禱, 새로운 敎會였읍니다. 그 敎會에 이름을 붙여야 했읍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없다는 것이 되니까요. 그런데 이전과는 달라 교 회는 두 개였읍니다. 그래서 앞에 서 있는 교회에는 ‘自由’라 는 旗를 꽂고, 뒤에 서 있는 교회에는 ‘平等’이라는 旗를 꽂 았읍니다. 그리고서 學者들로 하여금 自由와 平等은 矛盾 되는 槪念이다, 라고 定議를 내리게 했읍니다. 바꾸어 말하 면 싸움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싸움을 노렸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本性은 破壞, 鬪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보다 즐긴 구경거리가 火災였고 무엇보다 열중할 수 있 었던 것이 勝負였읍니다. 戰爭에 가장 精力的일 수 있었다 는 것은 그들 자신도 인정한 사실이었읍니다. 그러면 왜 그 들은 그렇게 好戰的이고 파괴적이었던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해서 그들이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 ‘손과 ’ ‘말이었는데 ’ , 그 손과 말은 일치할 때 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왜 그렇게 일치 하지 않았던가. 14


그들은 인간이 파괴적이고 싸움을 좋아하는 것은, 어린 애가 손을 놀릴 수 있게 되면서부터, 하는 일이란 밀어뜨리 고 부수고 찢고 허비고 하는 것뿐으로서 건설이라든지 友愛 라든지 하는 것을 그 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하여, 生 來的인 것으로 돌려놓고 있지만, 어린애들이 부수고 찢고

하는 것은 어른들이 말하는 ‘부수고 찢고’ 以前의 단순한 動 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인간의 好戰性은 어린

애들의 그런 단순한 動作이 禁止된 데서 胚胎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어린애들의 그런 動作이 수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 른들의 사설에 접촉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부수지 말아 라’ ‘싸워선 못쓴다’ ‘정 말을 안 들으면 집에서 내쫓겠다’ 하 는 말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그런 動作을 못하게 한 것입 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들어 가 마음으로 昇華된 것입니 다. 승화해서, 마치 시어머니가 두려운 며느리처럼 표면으 로는 귀로 들어온 대로 行爲라는 것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란 바 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이 ’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읍니다. 15


그들이 最高의 책으로 쳤던 聖經이라는 敎科書에는 처 음에 ‘말이 ’ 있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엄살이고, 사실은 처음 에 行動이 있었고, 다음에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理論上으로 봐서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 ‘길이고 ’

길이란 ‘禁止’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말이 따로 存在해 있어야 할 理由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禁止에는 금지되 어야 할 行動이 먼저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이 順序가 아니 겠읍니까. 따라서 行動이 먼저 있고 다음에 말이 있게 되었 다는 것은 또한 發生的 事實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禁止하는 편과 금 지당하는 편은 서로 대립하는 反對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입 니다. 人間의 ‘손과 ’ ‘말이 ’ 일치할 때가 거의 없었다는 까닭 도 이로써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가령 어린이들의 그 動作을 禁止 하지 않고 그대로 둬 두었다라면 人類 歷史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둘에서 하나를 빼 면 하나가 된다는 셈보다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린이들의 動作을 禁止시킨 ‘말에 ’ 의하여 엮어진 歷史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非理와 矛盾으로 가득 찬 암담하고도 不吉한 博物館과 같은 것이었다면, 그 반대의 역사는 적어

도 밝고 順하고 싱싱한 植物園과 같은 것이 되었으리라는 16


것은 정한 이치라 하겠읍니다. 아뭏든 그 動作의 禁止야말 로 人間 形成의 因子였다고 할 수 있겠고, 人間의 苦惱와 彷徨은 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人間이 파괴를 즐기고 爭鬪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인간이 人間이기 위한 條件이었고, 人類 前史에 終止 符를 찍게 한 核戰爭은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條件을 淸算

하기 위한 豫定調和였다고 할 것입니다. 自由와 平等의 대립은 고양이 한 마리도 죽을 필요가 없

는 대립입니다. 그것은 男妹라기보다 하나로 결합해서 서 로 자기를 完成시키는 夫婦와도 같은 것이었읍니다. 그런 데도 그들은 自由를 취하려면은 平等을 버려야 하고, 平等 을 취하려면은 自由를 버려야 한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平等이라면 우리 속의 돼지에게 더 있을 것이 고, 평등이 없는 自由라면 산에 사는 늑대를 따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人間은 돼지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고, 人間이어 야 하는 것입니다. 自由 안에서의 平等, 平等 안에서의 自 由라야 참다운 平等이고 참다운 自由일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운 自由나 平等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이 아니었 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수 있 었다고 하겠읍니다. 이 자유와 평등의 싸움은 뒤집어서 말하면 民族과 階級 17


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自由 陣營 에도 階級이 있었고 한편 平等 陣營에도 民族이 있었읍니 다. 그렇다면 그들이 서로 높이 쳐든 깃발은 푸른 바탕에 붉 은 점이 군데군데 박힌 것과, 반대로 붉은 바탕에 푸른 점이 군데군데 박힌 것이어야 正直한 旗라 할 것인데, 그렇지 않 고 말쑥하게 푸른 旗와 말쑥하게 붉은 旗였읍니다. 그들은 거짓말의 旗를 들고 싸운 것입니다. 정직한 旗를 들면 싸움 이 되지 않으니까요. ‘民族이냐, 階級이냐?’ ‘自由냐, 平等이냐?’ 하고 다투는 것은 마치 ‘圓形이 더 크다. 아니다, 四角形이 더 크다’ 하고 싸우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겠읍니까. 이 이야기를 ‘圓形의 傳說’이라고 이름 한 것은 쑥스러운 時節에 있었던 이야기

라는 것이고 무슨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인간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쑥스럽게만 산 것이 아니었읍니다. 마치 地球가 겉으로 보기에는 딱딱 한 죽은 껍질이지만 그 地殼 속에는 불덩어리가 이글거리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밖에서 보기에는 쑥스러운 껍질로 싸 여 있었지만 그 속에는 불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지구의 어 떤 부분에서 가끔 불덩어리가 지각을 뚫고 噴出하듯이 어떤 인간에 있어서는 그 속에 꼭 싸여 있던 불이 그 쑥스러움을 뚫고 튀어나오는 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正史에는 기록되 18


지 못하고 野史의 한구석에 겨우 끼일 수 있었을 뿐이었읍 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私生兒의 이야기도 그 러한 野史의 한 토막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사생아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인지 모를 것이지만 아버 지가 없는 아이를 私生兒라고 하였읍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그것은 細胞 動物이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 르겠지만 아무렇기로 그런 것은 아니고, 아버지가 정말 없 달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고 했읍니 다. 戶籍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어머니에게는 아무 權利 도 없는 父系時代였는데, 戶籍이라는 制度가 있어서 거기 에 오르지 못하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읍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야 그 호적이라는 데에 올릴 수 있게 되었읍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이 ‘아버지 두 모르는 자식이라는 ’ 말이 제일 쓰라리고 분한 욕이기도 했읍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李章이라고 하는 私生兒는 그런 욕을 듣지 않고 자랐읍니다. 자기가 사생아라는 것을 스스 로도 모르고 자랐으니까요. 자기가 사생아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위에서 말한 六·二五動亂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서였으니까,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되던 때입니다. 六月이라고 하면 그 당시에는 전쟁을 하기에 알맞는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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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쳐졌읍니다. 雨期도 끝날 무렵이고 삼사 개월 후면 추 수를 할 수 있으니까, 싸움을 거는 측으로 보면 꿩도 먹고 알 도 먹을 수 있는 時期라 하겠읍니다. 그 六월 二十五일, 半 島의 북반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共産軍은 새벽 네 時를 기

하여 일제히 三八線을 돌파하고 파도처럼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왔읍니다. 그것은 탱크와 裝甲車와의 전쟁이었읍니다. 나흘도 못 가서 수도 서울에는 공산군의 붉은 기가 휘날 리게 되었읍니다. 시민들은 무슨 惡夢을 꾸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했읍니다. 一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國軍은 전쟁 이 일어나기만 하면 一주일 만에 공산군의 수도인 平壤을 점령하고, 그리고 며칠 만이면 鴨綠江에 도달한다고 장담 했고, 또 무슨 紀念日 같은 때 장갑차를 앞세우고 市街行進 을 하던 국군의 모습은 참으로 씩씩하고도 믿음직스럽게 보 였던 것입니다. 서울이 이렇게 간단히 공산군의 手中에 들 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은 악몽이 아니고 날이 갈수록 굳어져 가는 現實이었읍니 다. 국군에 대한 幻滅과 공산군에서 받는 恐怖에 싸여 그들 은 그날부터 두더지와 같은 생활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이장의 아버지가 되는 李道武는 공산군이 서울 에 입성한 지 스물네 시간도 안 돼서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 20


고 길에 나선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저 오십 을 넘는 뚱뚱보가 공산당의 秘密 黨員이었구나 하고 깜짝 놀랐읍니다. 그런 완장을 두르고 그는 어디에 가서 어떤 民 主 事業을 하는지 아침 일찍 나갔다가는 밤늦게서야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읍니다.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라기도 할 것이 그는 바로 며칠 전 까지만 하더라도 빨갱이를 잡는 民保團1)이라고 하는 단체 의 분단장 노릇을 했고, 帝政 때는 꺼먼 전투모를 눌러쓰고 警防團2) 지부장인가 하는 일을 부지런히 했던 위인이었읍

니다. “아버지…” “뭐야?” 했다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이었읍니다. “아니, 이놈아! 아버질 보구 그래 뒤에서 말 걸기냐! 엉!” “…” “그래 말해 봐. 들어 보자.” “그만두겠읍니다.”

1) 민보단(民保團): 향리의 재산, 생명,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역별로 조 직한 단체. 2) 경방단(警防團):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치안을 강화하기 위하여 소방대와 방 호단을 통합한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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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둘 것 없다. 뭐지? 재미있는 말일 게다.” “아까 公園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敵이 상륙해 오면 부 젓가락으로 두 눈알을 찌르라구 하시던데…” 이것은 第二次 世界大戰이 두어 달 후면 끝나는 어느 날 오후 그들 父子 사이에 있게 된 대화입니다. “했다. 그래 어쨌단 말이냐?” “들으면, 미군은 화염 방사기라는 것을 내두르면서 진격 한다는데 그 불은 어떻게 하고 부젓가락으로 두 눈을 찌릅 니까?” “너는 必勝의 신념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우찌데시야 맘3)(臨戰無退)을 모르느냐 말이다!” “제 생각 같아서는요, 여럿이 그럴 것 없이 부젓가락을 모아서 긴 칼을 하나 만들어 내는 것이 得策이 아닐까 합니 다.” “못난 소릴 그만 그만 해라. 적이 당장 쳐들어오는데 무 슨 여가에 그런 걸 만들고 앉아 있겠나. 아니 그보다 이 못난 놈아, 그래 부젓가락 따위로 칼이 만들어지나 말이다. 하 하… 대학 다닌다면서 그따위 이치두 모르구 앉아 있어.”

3) 우찌데시야맘: 우치테시야만(うちてしやまん). ‘쳐서 무너뜨려 주마라는 ’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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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은 京城帝國大學이라고 하는 학교의 豫科 一학년 에 적을 두고 있었읍니다. “칼이면 한 사람이 메구 나가면 되거든요.” “알았다. 그래 누가 메구 나가지?” “필승의 신념을 가진 사람이 나가야겠지요.” “알았다. 똑바루 말해 봐라. 그 사람은 누구지?” “내일부터는 좀 그런 말씀을 마시라는 것뿐입니다.” “네놈의 간섭을 받을 이 내가 아니다! 바른대루 대답해 라. 그 한 사람이란 누구지?” “아버지지 누구겠읍니까.” “네 입에서 고 소리가 나올 줄 알았다!” 이렇게 화가 치미는데 옆방에서 마누라의 소리가 들려왔 읍니다. “그런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는 놈을 그대루 두우?” 그 소리에도 자극되고 해서 주먹을 만들어 가지고 아들 의 머리를 쥐어박았읍니다. “그래 이놈아! 지 애비가 아니라구 그따위 아가리냐!” 쥐어박았더니 화가 더 치밀었던 모양입니다. “여보!” 그때 어머니가 당황한 얼굴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이장은 그 말을 자기가 잘못 들었는가 했을지도 모릅니다. 23


“그게 무슨 소리우! 분명히 우리가 난 아이를 가지구, 벌 써 노망이 났우?” “…?” 李道武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 얼

굴이었읍니다. “빨리 이젯것은 잘못 말한 것이라고 잘 타일러 줘야 하 우.”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 래 아버질 보구 불타 죽으란 놈을 어떻게 내 친자식이라구 할 수 있겠느냐구 한 것뿐이지 언제 내가 그런 소릴 했소?” “그렇게 말한 게우? 그럼 그렇겠지. 얘야 아버지가 저렇 게 말씀하시는데 넌 잘못했단 말이 한마디도 없느냐. 응, 그 런 말버릇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구 좀 너두 생각해 봐라.” 中學校 二학년 되던 때의 일이 생각나기도 했읍니다.

≪어머니를 찾아서 三萬里≫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아버 지가 왈칵 그것을 뺏으면서 소리를 질렀읍니다. “저기 뻐젓한 네 에미가 있는데 무슨 에미를 또 찾는 거 냐! 삼만 리가 아니라 만만 리를 찾아봐라. 어디 있는가 구…” 서럽고 의아해서, ‘이것이 내 부몰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하는 더한 일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 그 24


저 ‘내 부모는 세상 부모와 다르구나’ 하는 정도로 모든 것을 그렇게 흘려보냈는데,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이 ‘三萬里’의 일만은 지워지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언제까지나 새겨져 있 는 것이었읍니다. 어떨 때는 의붓자식이 아니면 전실 소생이 아닐까고도 해 봤지만 아무리 몰래 비교해 봐도 몰정하기는 아버지나 어머니나 비슷비슷했읍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 는 마치 犯行 이전의 共犯者처럼 손발이 맞고 다정한 부부 였읍니다. 이장으로 하여금 그런 부모를 그저 세상 부모와 다르구 나 하는 정도로 해 두고 지낼 수 있게 한 것은, 본인은 그렇 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용돈을 넉넉히 주었 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달 치의 용돈이다’ 하면 서 꼬박꼬박 내주는 그 액수는 뱉을 듯이 말하는 그 音聲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푸진 것이어서, 넉넉하달 수는 없 어도 돈 쓰는 데 부족은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읍니다. 그 래서 때때로는 내가 부모에게 대하는 태도가 보통 아들과 다르기 때문에 부모가 싫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서 남 의 집 아들들이 자기 부모에게 대하는 태도를 가만히 살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읍니다. 또 어떤 책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공연히 자기 자식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경우가 있 25


다는 것을 읽고, 내 부모도 그런 아버지나 어머니인지도 모 르겠다고도 해 봤읍니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이럭저럭 실로 이럭저럭 지내 왔지 만 ‘부젓가락’ 이후는 그렇게 지낼 수가 없었읍니다. 한 번 깃든 의혹은 과거의 모든 설움과 疑訝와 더불어 날이 갈수 록 짙어져서 마음을 아주 덮어버리는 것이었읍니다. 解放의 기쁨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별로 없었읍니다. 오

히려 모든 사람들이 해방이 되었다고 좋아할수록 그는 홀로 우울해만졌읍니다. “학교 같은 건 그만둬! 남들은 해방이 되어서 돈벼락을 맞는데 난 돈줄이 끊어졌단 말이야, 돈줄이!” 해방된 다음 해 봄 이도무는 이렇게 내뱉을 듯이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물론 내 땅이 이북에 있었는데 암만해두 三八선이 열릴 것 같지 않단 말이다!” 땅이 있다는 말은 또 처음 듣는 소리였읍니다. “이제부턴 밥 멕여 주는 것만두 고맙게 생각해야 할 처진 줄 알아라!” 그렇게 하고 반년쯤 지났는데 다시 또 학교에 다녀도 좋 다는 것이었읍니다. “사람을 시켜서 몰래 땅을 팔았지. 도깨비 세상 같은 이 26


북이라지만 아직도 그럴 수는 있대.” 하루에 부모와 한 번도 말을 건네지 않고 지내는 것은 보 통이고, 식사도 아침저녁 식모가 가져다 놓는 것을 자기 방 에서 따로 먹는 것이 옛날부터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얼굴을 대하지 않고 지내는 날도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의 疑惑을 구체적으로 품게 된 것은 그로 하여금 그들 을 자기 부모로 생각하게 한 유일한 줄(絆)이었던 용돈과 생 활비 같은 것이 어디서 생기는지, 그 出處에 의심을 품을 줄 알게 되면서부터였읍니다. 감정의 機微 같은 데는 早熟했 던 그도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편이어서, 중학교를 나올 무 렵까지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이 지냈읍니다. 그렇던 그가 돈의 출처에 관심을 품게 된 것은 처음에는 大學 같은 것은 갈 생각두 말라 해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 는데, 그 아버지가 入學試驗을 서너 달쯤 앞두고 갑자기 시 험 공부를 하라고 서둘렀을 때부터였읍니다. 그런 관심을 가지고 보니 부모는 그에게 그 出處를 감추 느라고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읍 니다. 일정한 수입이 있는 이렇다 할 직업도 없었는데 생활 은 괜찮게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러구 있을 작정이냐! 공부를 시켜 줬으면 갚 을 줄 알아야 할 게 아니냐?” 27


이장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었읍니다. “이제는 대학두 다 졸업해 버리구, 돈줄이 개울창만 해졌 다는 것을 내가 말해야 알겠느냐!” 그렇게 며칠을 두고 성화를 하던 이도무는 얼마 지나서 는 흐지부지해지는 것이었읍니다. “별놈 다 봤다. 네 용돈만이래두 벌어야 할 께 아니냐.” 그 후도 별로 궁색한 빛이 없이 여전하게 생활해 가는 것 이었읍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붉은 완장을 두른 것을 봤을 때 그도 동 넷사람들처럼 아버지가 공산당의 비밀 당원이 아니었을까, 순간 그렇게도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帝政 때는 무슨 비밀 당원이라고 해야 하겠읍니까. 그 아버지가 하루는 대낮에 헐떡거리면서 집에 돌아와 아들더러 義勇軍에 나가 줄 수 없겠느냐 한 것입니다.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청년은 모두 거기에 지원하게 돼 있다. 응, 너 학교 때 빨갱이를 좀 좋아했지?” “…” “내 다 알구 있었다. 민보단 단장을 하구 있던 이 내가 말 이다. 그것을 못 본 체해 주었다는 사실두 알아주어야 할 게 아니냐?” 28


“…” “무엇이던 빨리하는 것이 제일이야. 이다음에 출세하는 데두 유리하구. 반드시 이북이 이긴다!” “아버진 그동안 어디 가 뭘 하구 계셨읍니까?” “감독을 했지, 감독.” “감독요?” “왜, 폭격당한 다리를 復舊한다든지, 폭격에 죽은 시체 를 치운다든지 하는 일이 있지 않어? 그런 걸 가서 감독해 줬단 말이다.” “누가 시켜서 하신 겁니까?” “모르는 소릴 말아라. 이 난장판에 누가 누군지 알구 시 키구 어쩌구가 있겠나. 자진해서 해야 하는 거야.” “이제는 그것두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제발 좀 나가 줘. 어느 놈이 죄두 없는 이 나를 꽂아 넣었 단 말이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 “어떠냐? 이 애비를 위해서, 아니 조국 防衛를 위해서 좀 나가 줘!” “제가 의용군에 나가는 것이 아버지를 살리는 길이라면 나가도 좋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29


“…” “거짓말이지? 잘못 말한 것이지? 아니, 네가 잘못 말했을 리 없다! 넌 거짓말하는 애가 아니다.” “지원만 하면 되지요? 다음에는 어쩌든…” “그럼 정말이구나! 아, 넌 참으로 내 아들이다. 너만 나가 주면 저들두 내 忠誠을 알아줄 게다. 정말 난 살았다.” 어쩔 줄 모르면서 이렇게 좋아하다가 밖으로 소리를 지 르는 것이었읍니다. “여보오! 이제는 망볼 것 없소. 이리 들어와 앨 좀 봐 주 오. 의용군에 나가 주겠다는 거요.” “아니 그 말이 참말이오?” 마누라가 뛰어 들어왔읍니다. “우리 아들이 언제 거짓말한 적이 있었소. 정말이지? 응, 참말이지?”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은혜는 갚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은혜?…” “오늘까지 저를 키워 주신 두 분의 은혜 말입니다.” “어 그게 무슨 말이냐? 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말끝을 얼버무리면서 마누라에게 묻는 것이었읍니다. “여보, 저게 무슨 말이오?” 30


“글쎄 나두 처음 듣는 말이래서 무슨 말인지…” “그리고 한 가지 交換 條件이 있읍니다.” “교환 조건? 그런 게 있나?” 옆에서 마누라가 더 애가 타는 것이었읍니다. “뭐문 어떻소. 의용군에만 나가 준다면야…” “말해 봐라. 뭐래두 들어주겠다.” “제 부모가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누구라니?” “에이구, 우리 아이두. 나를 바루 앞에다 두구 그게 될 말 이냐. 여보 왜 가만있수?” “바루 낸데. 바루 앞에 두구 그게 될 말이냐.” “그럼 좋습니다.” “좋다니, 의용군 말이냐? 이제 와서 안 나가겠단 말이냐! 이 아버지가 그놈들에게 맞아 죽는 걸 구경하겠단 말이냐!” “죽는 것이 그렇게 싫으시면 제 부모가 누구라는 것을 여 기서 말씀해 주시지.” “이놈아! 죽는 걸 싫어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 느냐!” “여보, 죽는다 산다 하는 판에 그까짓 것 뭘 가지구 그러 우?” “왜 내가 죽어? 나쁜 짓이라곤 난 손톱만치두 한 것이 없 31


소!” “그렇지만 그것들이야 어디 사람 새끼들이오?” “아 몇 푼도 안 생기는 民保團인지 뭔지를 하구 이 지경 이 되었다. 여보 당신은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소? 피난 갔던 사람들이 다시 서울에 돌아올 것 같소?” “좀 잘 생각해 보우. 그 사람이 돌아온다 해두 당신이 이 세상에 없으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수?” “제가 의용군에 나가 죽어두 그것은 소용이 없읍니다.” “소용이 없어두 좋다. 나가만 줘. 여보, 내 다 말해 주겠 오!” 이럴 때 대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아이구? 놈들이 왔소!” “왜 문을 안 잠갔소!” “그럴 때가 아니요! 빨리 도망쳐요! 빨리빨리!” “달아나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네놈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면 네놈 때문인 줄 알아라!” 그때까지도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있었던 이도무는 아들을 때려눕히고 싶어 하는 것이었지만, 그럴 사이가 없 어서 갈팡질팡하다가 마누라가 가리키는 대로 뒷마당으로 뛰어내려 가지고 담에 매달렸읍니다. 그러나 총소리가 더 빨랐읍니다. 32


이도무의 뚱뚱한 몸은 쭈르르 담벽을 흘러내리면서 땅에 꾸겨졌읍니다. “나아리님들이요! 나아리님들이요!” 쓰러진 남편에게로 달려간 마누라는 완장을 잡아 뜯어내 는 것이었읍니다. “이게 안 보입네까! 이 빨간 헝겊이 안 보입네까? 아이고 죽었고나! 아이고 내 사람이 죽었고나!” 대성으로 통곡하는 것이었읍니다. “이 돼지 같은 놈들아! 이 늑대 같은 놈들아! 왜 부처님 같 은 내 사람을 죽였어! 죽였어!” “저것두 없애 버려!” 그래서 한 방의 총소리는 그 대성통곡을 없애 버렸읍니 다. “너는 뭐냐!” “이 사람들의 아들이오.” 銃口가 그의 가슴으로 돌려졌읍니다.

“그놈두 죽여 줘어!” 어머니가 죽어 가면서 발악을 하는 것이었읍니다. “애비를 잡아먹은 그놈두 죽여라!” 피에 굶주린 保安署員들도 약간 어리둥절해졌읍니다. “동무는 저것들의 뭐가 되오?” 33


“아들이라구 하지 않었소!” 이렇게 소리 지르고 돌아서서 李章은 담 아래로 걸어갔 읍니다. 총대가 그 등에 겨누어졌지만 총소리는 나지 않았 읍니다. 어머니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고, 이도무는 실낱같은 숨을 잇고 있었읍니다. “아버님!” “네 네놈은 살아 있구나…” “저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없다… 모른다…” “어머니는 어디 있읍니까?” “처 천벌을 맞았다, 아 알겠느냐. 네놈은 그 베락에 맞아 생긴 사생아다…” “…” “거 거짓말인 줄 아느냐… 방골이란 마을에 가 가 봐… 그 나 나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또 몇 마디 뇌이다가 그도 그렇게 숨이 끊어졌읍니다. 三日葬을 치른 李章은 그 이튿날부터 알 만한 사람을 찾

아 돌아다녔읍니다. 그들의 고향은 三八선 이북인 평안도 라는 곳이었지만, 그가 세 살 되던 때부터 서울에 올라와 살 34


았기 때문에 옛날의 李道武를 아는 사람을 찾기란 구름을 잡는 일과 같았읍니다. 한 가지 그가 알아낸 것은 ‘방골이란 ’ 마을이 平壤 동북방 百 리쯤 떨어진 곳에 정말 있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그

마을이나 그 근방에서 온 사람이나마 만나 보려고 다시 헤 매고 다녔지만 평안도에서 越南한 사람은 대부분 공산군을 피해서 남쪽으로 피난해 갔기 때문에 그것도 막연한 일이었 읍니다. 그렇게 헤매다가 지치고 보니, 언제 길에서 ‘동무에게 ’ 붙 잡히게 될지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三八線도 열리게 되었으니 직접 방골 마을로 찾아갈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싶 어서 집에 들어앉아 있기로 했읍니다. 부모가 그렇게 죽음 을 당했기 때문인지 집에 찾아와서 의용군에 나가라고 하는 말은 없었읍니다. 그 사람이 돌아온다 해두 당신이 이 세상에 없으면 그것 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던 그 사람이란 누구인가? 어머니 는 천벌을 맞고 죽었다니까, 아버지라는 者일까? 그러나 이 도무는 私生兒라고 했다. 그저 棄兒인 줄 알았지 사생아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읍니다. 私生兒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衝擊이라기 보다 허리띠가 끌러지며 바지가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35


羞恥와 嘔吐症이 뒤섞인 乖離感을 느꼈읍니다. 體溫이 식어지고 皮膚가 굳어져 간 그 陷落 속에 피어나

는 毒버섯… 그러나 아직 모른다. 허풍장이 이도무 씨가 한 소리다. ‘그 사람이란 ’ 사람을 만나봐야 확실한 것을 안다. 그러나 二○여 년 동안 그림자도 보여 주지 않았던 그 사 람이 가령 피난에서 돌아온다 해도, 자기를 찾아 주리라고 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읍니다. 그리고 戰勢는 나날이 불 리해져서 공산군은 벌써 洛東江에 도달했고 釜山 점령도 시간문제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설마 세상이 정말 뒤바뀌는 것이야 아니겠지 하 고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지 二○ 일쯤 지난 어느 날 오후였읍니다. 총을 멘 보안서원과 같이 한 청년이 와서 洞人民委員會까지 같이 가자는 것이었읍 니다. 무슨 일인지는 가 보면 안다는 것이었읍니다. 가 보니 자기는 열다섯 번째의 ‘노획물이었읍니다 ’ . 그들 은 그날 저녁 여섯 時까지 잡아서 보내야 할 責任 數量이 열 다섯 명이었는데, 하루 종일 여러 길목을 지키고 서서 그렇 게 열심히 붙잡았는데도 한 명이 모자랐읍니다. 그래서 초 상난 집 아들 생각이 번뜩 나서 그를 데리러 온 것이었읍니 36


다. 그길로 그는 열다섯 명 중의 하나가 되어 가지고 줄을 지 어 어떤 국민학교 운동장에 끌려갔읍니다. 이렇게 해서 이 장은 의용군에 志願하게 된 것입니다. 義勇軍이라면 義를 위해서 용감하게 싸우는 군대라는

뜻이겠읍니다. 사람을 사냥하듯이 잡아다가 手榴彈 몇 개 를 쥐어 가지고 전선으로 끌어가는 군대에다가 이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訓練이라는 것도 별로 없었읍니다. 수류탄 몇 개를 던진 다음에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하는 군대 였읍니다. 그런 군대이니까 ‘義勇’이란 이름이나마 안 붙였 다면 거짓말이라는 惡德만이라도 면할 수 있었겠는데 그들 은 왜 그랬을까요. 그 당시의 인간이란 先天的으로 거짓말장이였읍니다. 그들은 人間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으로 理性을 가졌다든 지 道具를 사용할 줄 안다든지 하는 것을 걸핏하면 내세우 지만, 그런 것보다 더 뚜렷한 특성은 그들이 거짓말을 잘하 고 또 거짓말에 잘 속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밥을 먹는 입 으로 소리를 내야 하는 動物의 條件을 최고도로 活用한 존 재들이었읍니다. ‘의용군처럼 ’ 악덕이 되는 거짓말도 있었지만 美德이 되 는 거짓말도 있었읍니다. 추워도 안 춥다 하고, 배가 고파도 37


안 고프다 해야 사람답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 을 嘉尙히 여기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感激을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었읍니다. 그들이 聖人이라 해서 최고로 받들었던 私生兒인 예수부터가, 자기 어머니더러 ‘女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 해서 사람들을 크게 감동 시켰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상관이 없다면 세상에 關係가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읍니까. 관계 라는 것이 세상에 없다면 相關이라는 말도 세상에 없어야 할 것이 아니겠읍니까. 그런데 그는 뻐젓이 상관이라는 말 을 사용했읍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참된 관계 라고 할 것이지만, 그러면 예수와 娼婦인 막달라의 마리아 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이겠읍니까. 序列로 말하면 어느 모 로 보더라도 첫째가 하나님이고, 둘째는 聖母 마리아가 되 고, 막달라의 마리아는 맨 끝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 나님과 막달라의 마리아는 관계가 있는 쪽이고 어머니인 마 리아와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 되는 倫理는 어디서 끌어온 것입니까. 가령 그때 예수가 正直하게 ‘어머니, 언제 이리로 오셨어 요. 참 만나고 싶었어요’ 했다 해도, 이 예수는 엉터리 예수 다 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 감동이라는 38


것은 안 했을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論理였 읍니다. 그들이 數千 年을 두고 그 말에 감격한 것은 추워도 안 춥다고 하는 것처럼, 그리운 마음을 눌러 버리고 거짓말 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라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點, 인간은 예수부터가 철저한 實用主義者였던 것 입니다. 感激이라는 實用的 價値를 자아내는 것이라야 眞 理라고 했던 것입니다. 眞理였기 때문에 감격한 것이 아니

라 感激했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眞理 와 感激 사이의 事實上의 順序는 이런 것이었읍니다. 그리 고 인간은 거짓말에 가장 크게 감격할 수 있었고, 그래서 거 짓말을 잘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人類 前史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알아 두지 않으 면 안 되는 가장 중대한 열쇠의 하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잘 했고, 거짓말에 잘 속았다는 바로 이 點에 있읍니다. 이 인 간의 習性을 무의식적으로 이용해서 크게 성공한 것이 지금 말한 예수의 祠堂이 되는 敎會였고 이 習性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計劃的으로 활용한 것이 말하자면 소비에트였던 것 입니다. 人類 前史를 몰락시킨 核戰爭은 바꾸어 말하면 이 敎會의 거짓말과 소비에트의 거짓말 卽 ‘정말과 ’ ‘거짓말의 ’

싸움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9


共産主義者들은 거짓말도 百 번 들으면 정말이 된다는 哲學을 肥料로 삼았는데 그 始祖인 카알 마르크스라는 사

람은 ‘人間은 可能한 것만을 생각한다는 ’ 말로 이것을 뒷받 침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터무니가 없고 恐怖 를 불러일으키는 거짓말일수록 정말이 되기가 쉽다고 했읍 니다. 나아가서 이 거짓말 作業이 성공했을 때 人類 前史는 끝나고 평화스럽고 행복스러운 새 歷史가 전개된다고 하였 는데, 이것은 ‘사탄이 ’ 神이 되고, 神이 사탄이 되어야 한다 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말도 거짓말을 잘하고 거짓말에 잘 속는다는 人間 條件 안에서 한 말이지만, 그 거짓말 作業은 무서운 힘

으로 地球의 表面을 덮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義勇軍’과 같은 거짓말은 약과에 속하는 것이어서, 共産主義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 것이 茶飯事가 되어 별로 놀라지 않게 쯤 되었읍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앞 으로 그것을 믿게 된다는 素地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人間이었읍니다. 흔히, 사람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보다 거짓말에서 나와 거짓말로 돌아가는 動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表現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洛東江 戰爭에 끌려올 때까지 李章은 수없는 시체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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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읍니다. 혹은 피에 젖고 혹은 불에 타고 혹은 썩어서, 거 짓말처럼 딩굴어져 있었고, 그 거짓말 위에는 파리들이 감 실감실 서로 붐비면서 살아 있는 喜悅을 立證하고 있는 것 이었읍니다. 나도 죽으면 저런 거짓말이 되어서 감실감실한 喜悅에 덮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거

짓말인 것 같았읍니다. 手榴彈을 다 던져 버렸는데도 목숨이 남아 있게 된 의용

군들은 전사자의 시체에서 鐵帽며 帶劒이며 총을 몰수해서 자기를 무장했읍니다. 그래도 차려지지 않은 者들은 僞兵 노릇을 했읍니다. 총을 쥐고 있는 散兵들 속에 끼여, 그들과 함께 엎디고 기고 뛰고 고함치며 돌격을 했읍니다. 그래도 그것은 덜 억울한 편이고, 전투가 없을 땐 종 노릇을 해야 했 읍니다. 총을 소지하고 있는 자들은 陣地에 그대로 누워 있 고, 주먹밥을 나른다든지 땅을 판다든지 풀을 베 온다든지 하는 일은 僞兵들이 할 일로 되어 있었읍니다. 그러다가도 전투가 벌어지면 총 가진 그 高等官들 속에 끼여 함께 와아 해야 했읍니다. 죽을 걱정이 없을 땐 不平等했다가, 제일 중 요한 죽는 일에는 平等이 강요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義勇軍’ 자체에 대한 憤懣4)은 잊어버리고, 이 ‘不平

4) 분만(憤懣):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가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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等의 平等’에 대한 불평에 온통 신경을 소비하게 되어, 고등

관이 전사하는 것을 기다리게쯤 되었읍니다. 그래야 武器 를 배급 받아 고등관이 될 수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전선이 膠着 狀態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九月도 반쯤 접 어들었겠다 하는 어느 날 밤, 人民軍 속에 끼여 있었던 의용 군은 한곳으로 집결당했읍니다. 처음 그 중대에 배치되었을 땐 二 個 小隊가 되는 수였는데, 지금 모인 것을 보면 二 個 分隊도 될까 말까 했읍니다.

무기를 가진 자는 그것을 모두 풀어 놓으라는 것이었읍 니다. “동무들!…” 성을 金이라고 하는 小尉가 주먹을 불끈 움켜 들고 소리 를 가다듬는 것이었읍니다. “동무들두 낮에 봤겠지만 전방 二百 메터 지점에 있는 高 地에는 우리 인민군의 영용한 전사자의 시체가 二, 三○이

누워 있소!” 이 한마디 속에 그들의 生理가 잘 나타나 있읍니다. 낮에 봤지만 한 것은 고지를 가리킨 것인지 전사자의 시체를 가 리킨 것인지, 고지라면 낮에가 아니라 반달 전부터 봐 오고 있는 것이고, 전사자의 시체라면 오늘 하루 종일 전투라는 것이 없었으니 누가 거기에 시체를 운반이라도 해 간 것이 42


란 말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科學的 共産主義는 이러한 안개 속에서 건설되어 가고 있는 것이고, 듣는 사람도 그 저 그러려니 하고 그런 것을 굳이 캐지 않게 되는 것입니 다. “거기서 敵과의 거리는 약 三百 메터. 우리는 이제부터 거기까지 진출해서 우리 자신을 무장하구 돌아와야 하겠오! 그렇게 해서래도 무장을 하지 않으면 동무들은 내일 새벽에 있을 예정인 總攻擊에 있어서 맨 앞줄에 서서 총알받기가 되기에 십상이오. 내 말의 뜻을 알겠지? 알았으면 右로 돌 앗! 前進!” 무슨 틈이 없었읍니다. 총을 든 인민군 下士 다섯 명이 사이사이에 끼였읍니다. “이제부터 여기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리 작은 소리라두 일체 무슨 말이든 금지한다.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총살 이다! 알았으면 匍匐 전진, 엎드려! 앞사람의 발 그림자를 놓치지 말고 입을 열지 말라!” 二百 메터가 된다는 데를 한 시간이나 걸려 기어가 보니

정말 시체가 여기저기에 굴러 있었고, 언제 죽었는지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인민군이 아니라 그것은 國軍의 시 체들이었읍니다. 그런데 군복부터 벗겨서 껴입으라는 것이 었읍니다. 43


“왜 우물쭈물하구 있는 기야! 명령이다! 軍番票두 뜯어 걸라!” 시체에 붙어 자고 있던 파리떼가 방향을 잃고 왕왕거리 는 속에서 모두들 움직임을 잃었읍니다. “명령이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쏘아 버릴 테다. 다섯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모두들 이 여섯 명만 죽여 버리면 三百 메터 저쪽이라고 하는 유우엔 陣地로 탈출해 갈 수 있다고는 마음속으로 생 각하면서도, 묵묵히 시체에서 군복을 벗겨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읍니다. 이럭저럭 무장을 갖추고 돌아가려니까 김 소위는 마루턱 으로 올라가 보자는 것이었읍니다. 올라가니까 이번에는 稜線에 한 줄로 적을 향해 엎드려 姿勢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었읍니다.

“밝을 녘까지 여기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좋겠소. 이 밤 중에 이런 복장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적으로 몰려 맞아 죽 기가 십상이 아니겠소?” 무슨 꿍꿍이 수작인지 알 수 없었읍니다. 국군 차림을 했 으니 밝을 녘에는 더 맞아 죽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도 꿀 먹은 것처럼 먹먹해서 엎드려를 하고 있는 의용군들 이었읍니다. 44


동녘 하늘이 밝아 오기 시작했읍니다. “동무들! 그대루 듣고 있소. 우리는 진지로 돌아갈 필요 가 없소. 곧 總攻擊이 시작되는데 뭣 때메 돌아가겠소. 배 가 좀 고프겠지만 참소. 곧 주먹밥이 오게 되어 있으니 정신 을 바짝들 차리오!” 완전히 속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무슨 속임수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런 것인 줄은 몰랐읍니다. “그럼, 동무들! 여기서 우리 민족의 太陽이시요, 영명한 지도자인 위대한 김일성 장군의 특별 명령을 전달하겠소! 우리는 적을 假裝해 가지고 적진에 접근함으로써 앞으로 十 五 分 후에 있을 我軍의 총공격과 함께 육탄 돌격으로 突破 口를 만드는 것이 이 성스러운 조국 해방 전쟁에 있어서 우

리가 맡은 사명이라는 것을 榮光으로 생각하는 바이오!” 이 말과 함께, 하사들은 제각기 의용군들의 뒤에 자리 잡 으면서 짤각짤각 요란스럽게 裝塡을 다시 하더니 저마다 소 리를 지르는 것이었읍니다. “이제부터 뒤를 돌아보는 놈은 뒤통수에 구멍을 뚫어 놓 는다!” 담배를 한 대 피어 물고 연방 팔뚝시계를 쳐들어 보던 소 위의 얼굴에는 점점 의아해 하는 빛이 짙어 갔읍니다. 예정 시간이 십 분이나 지났는데도 약속했던 信號가 오르지 않는 45


것이었읍니다. “저걸 보십시오!” 옆에 서 있던 崔라고 하는 先任下士가 이렇게 소리를 내 면서 북쪽을 가리키는 것이었읍니다. 차츰차츰 하늘이 밝아 오름에 따라 걷혀 가는 안개 사이 로 간신히기는 하나 내려다보이는 아군 진지에는 움직임이 라는 것이 조금도 없었읍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림자 하나 없었읍니다. 그러는데 능선에서 소리가 났읍니다. “적은 벌써 이 산 그늘에 와 있읍니다!” 깜짝 놀란 소위는 능선에서 뛰어갔읍니다. 이 高地 아래 만이 아니라 들에는 적의 散兵들이 쫙 깔려 있었읍니다. 이때, 후방에서 총소리가 세 번 났읍니다. 그것은 약속되 어 있었던 行動 開始의 신호였는데 百 里 밖에서나 쏜 것처 럼 희미하게 들려왔읍니다. “속았다!” 소위의 입에서는 이런 소리가 터져 나왔읍니다. 그제야 그는 我軍이 새벽녘에 총공격을 개시한 적이 거의 없었던 사실을 생각해 낸 것이었읍니다. “후퇴다! 모두 분산해서 저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집결해 라!” 46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소위는 뒤도 안 보고 고지를 뛰어 내려가는 것이었읍니다. 하사들이 그 뒤를 따랐읍니다. 그 근방에 있던 의용군들도 덩달아 뛰는 것이었읍니다. 三百 미터쯤 떨어진 숲 속으로 뛰어든 그들은 숨 돌릴 사

이도 없이 다시 遮蔽物이 하나 없는 돌밭을 十 分쯤 뛰며 넘 어지며 하면서 도망쳐, 간신히 산에 매어달릴 수가 있었읍 니다. 따라온 의용군은 다섯 명뿐이었읍니다. 그 가운데는 李 章도 끼여 있었읍니다. 나머지는 고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

거나 되돌아갔거나 한 것 같았읍니다. “개새끼 같은 반동분자 놈들이! 다 죽여 버릴 것을 그랬 다!” 선임하사는 이를 갈면서 거기 따라온 의용군까지 흘겨보 는 것이었읍니다. 인민군 다섯 명은 의용군 다섯 명을, 총알을 몰수한 다음 앞에 서게 해 가지고 무작정 산속으로만 자꾸 들어가는 것 이었읍니다.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전투는 없었읍니다. 공산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유우엔군은 新作路를 두 줄로 縱隊를 지어 가지고 행군하는 것이 아득하게 보였읍니 다. 47


유우엔軍은 총공격이라기보다 總進擊을 개시한 것이었 읍니다. “동무들이요!” 소위는 의용군 다섯 명에게 훈시를 하는 것이었읍니다. “어디까지 후퇴할지 모르지만 최후의 승리는 우리 인민 군대에게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오! 김일성 장군은 혹 우 리를 버릴는지는 몰라두 말이오, 위대한 弱少民族의 수호 자이며 세계의 태양인 위대한 스탈린 동무는 언제나 우리를 보살피고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몽매에두 잊어서는 안 되겠소!” 처음 二, 三 일은 不寢番도 자기들만이 서면서, 의용군 을 몰아서 앞에 세우던 것이 그다음 날부터는 한데 섞어서 가기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여기까지 따라온 여러분의 충성을 티끌만치두 우리는 의심하지 않겠소. 오늘부터는 더욱 합심 협력해서 형제처럼 지냅시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까, 그들은 의용군을 한 사람씩 맡아 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고, 불침번도 그렇게 두 사람씩 섰읍 니다. 이장의 감시자는 최라고 하는 그 선임하사였읍니다. 그들은 국군 복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에 내려가 서 식량을 구걸하곤 했지만 그런 구걸로는 한 번에 많이 얻 48


어 올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이렛째 되는 날 밤에는 掠奪 을 하기로 했는데 소위와 이장은 동구 밖이 되는 높은 언덕 에 숨어서 망을 보고 나머지 아홉 명이 마을로 들어갔읍니다. 이제는 돌아올 때도 되었겠다 할 쯤 마을 안에서 요란스 러운 총소리가 났읍니다. 이윽고 나타나는 그림자는 다섯이었는데 인민군뿐이었 읍니다. 의용군 네 명은 서로 짜고서 돌담을 끼고 달아나기에 총 질했다는 것입니다. 그중 두 명은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라 고 했지만 確認하고서 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읍니다. “이놈두 죽여 버립시다!” 선임하사가 이장을 두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었읍니다. “달아나거든 쏴두 늦지 않어. 한 명쯤은…” 소위가 이렇게 살려 두기로 한 것은 국군 행세를 하자면 이남 출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읍니다. 결국 혼자 남게 된 이장은 완전히 포로처럼 되었으나 오 히려 편해졌읍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걷고, 걷다가 서면, 쓰러져 자면 되었읍니다. 무슨 구실만 있으면 쏴 죽일 것만 같은 선임하사만 아니라면 마음도 한결 편했을 것입 니다. “너 이북에 가서 뭐하겠다구 딜딜 따라오는 게야!” 49


이장이 달아나 주지 않는 것이 괘씸해서 못 견디겠는 모 양이었읍니다. “이놈 때메 조꼼두 마음 놓을 수가 없다!” 그 선임하사는 방골 마을의 출신이었읍니다. 그것을 이 장이 알게 된 것은 中隊에 있을 때부터였읍니다. 그는 北에 서 내려온 인민군과 섞여서 살게 되면서부터 은근히 방골 마을 출신을 알아보다가 이 선임하사를 찾아낸 것입니다. 인민군이라는 것도 대부분 껍질을 한 까풀 벗기고 보면 사 실은 그렇게 빨간 것도 아니었는데, 이 선임하사라는 자는 어떻게 된 인간인지 以南 출신인 의용군을 원수처럼 미워하 고 의심하는 것이 普通 정도가 아니었읍니다. 이장은 어떻 게 그를 가까이해 보려고 해 보았으나 번번이 ‘이 부패분자 가…’ 하면서 고약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그도 어디 이따위 자식이 있나 싶어서 돌아섰지만 여전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읍니다. 그가 그들을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어쩌면 그 가운데 이 선임하사라는 자가 있었기 때문 인지도 몰랐읍니다. 적어도 전연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 었으니까요. “하사님…” 그者가 불침번을 하고 있을 때 이장은 이렇게 불러 보았 읍니다. 50


“하사님? 그래 내가 네깐 놈의 하사야!” “사람이란 恩惠란 것을 알아야죠.” “무어라구…” “내가 아니었더라면 죽지야 않았겠지만 다리쯤 부러졌 을 게 아니오.” 낮에 그가 높은 바위에서 구를 뻔한 것을 이장이 붙잡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다리가 아 니라 온몸이 억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니가 날 열댓 번 살려 줬나? 한 번 고맙다구 하문 됐지 몇 백 번 듣겠다는 거야!” “고맙단 말 한 번은 했던가요?” “니 이 새끼 듣기 싫다! 나두 늘 살려 줬다. 느 같은 부패 분자는 마음대루 죽에 버려두 괜찮단 걸 느두 알디!” “최 동무…” “니 증말 죽구 싶으냐!” “방골 마을에는 벼락 맞은 무슨 나무가 있다지요?” “…?” “중대 있을 때 들으니 최 동무는 그 벼락을 맞구 태어난 사생아라던데, 건 거짓말이죠?” “쌍! 누가 그러데!” “내가 그랬지요.” 51


“인젠 그대루 못 두겠다!” “날 죽일 만한 힘이 있소?” “야 요 새끼!” “우리 팔씨름을 하자. 내가 지면 달아나 줄께 쏴 죽여.” “요 베룩이 새끼 같은 것이, 하자! 그 자리에서 비틀어 죽 여 베리겠다!” 그리하여 둘은 어둠 속에서 서로 엎디고 앉아서 팔씨름 을 했읍니다. 이장은 낮에 그를 붙잡아 일으켜 줬을 때, 그 의 四肢가 보기처럼 그렇게 단단한 편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느꼈던 대로였읍니다. “달아나지 않아두 되지요?” “…” “그 얘길 들려줄 수 없소?” “무어 말이야!” “천벌로 벼락 맞은 나무에서 사생아가 났단 옛말이 있지 않소?” “…” “나두 듣고 싶은데…” 언제 눈을 떴는지 小尉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말을 던지 는 것이었읍니다. 52


“잠두 안 오구. 내일은 三八선이다. 그런 얘기나 들어 보 자.” “어릴 때 들은 얘기여서 나두 잘 모릅니더.” “그런 나무가 정말 있기는 있어?” “있읍니더.” “해 봐. 들어 보자.” 머뭇거리다가 최 하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읍니다. “폭풍우가 불던 날이라구 합니더. 마을 한가운데 있는 몇 백 년 묵은 느티나문데, 베락이 떨어져 한쪽 줄기가 꺾에지 면서 그 아래에 있는 기와집에 떨어졌답니더. 지붕은 쪼곰 두 다치지 않았다는데 그 밑에서 난데없는 어린애 우는 소 리가 나기에 사람들이 문 열구 들에다보니 그 여자가 죽어 있었다구 합니더.” “무슨 여잔데…” “타방에서 몇 달 전에 온 여잔데 굉장한 미인인데 아깝게 두 아버지두 모르는 애를 배구 왔더랍니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꼼 반반하면 다 그렇거든.” “쪼곰이 아니구 우리 할머니두 봤다든데 으떻게 미인인 디 여우가 변한 걸 게라구까지 했답니더.” “그래 죽은 걸 보니 꼬리가 있더라 그 말이지?” “꼬리가 아니구 치마 속에서 울음소리가 나서 이렇게 들 53


구서 보니…” “본 것처럼 말하지 마라.” “아니 증말이랍니더. 탯줄두 안 끊어진 갓난애가 거의거 의 죽어 가고 있었답니더.” “살아는 난 게로군.” “게우 살레 냈는데 그 여자의 오빠라는 사람이 어디서 나 타나서 그 앨 죽이려구 했다는데 이건 증말인지 거즛말인지 잘 모르겠읍니더.” 그 선임하사두 이튿날 싸움에서 죽고 말았읍니다. 三八線을 넘으니 자기 故鄕에나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였을 것입니다. 골짜기에도 마음 놓고는 내려서지 못하던 그들이, 한쪽은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는 산그늘을 따라 걸 음을 재촉하였읍니다. 한참 가다가 산모퉁이를 돌아 골짜기 로 접어드는 데서였읍니다. 언덕진 데를 올라서려다가 그들 은 그만 깜짝 놀랐읍니다. 저만치 앞에 개천이 있고, 그 건 너편에 쓰러져 가는 물방앗간이 있는데, 그 그늘에는 칠팔 명이 되는 兵丁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무 그늘에 숨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人民軍의 낙오병들이었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반가와서 그만 자기들이 國軍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리로 뛰어갔읍니다. 손을 흔들며 막 개천을 건너가려고 하는데 54


저쪽에서 따발총의 一齊射擊이 퍼부어 왔던 것입니다. 순식간에 두 명이 넘어졌읍니다. 언덕 뒤로 도루 도망칠 수도 없었읍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맞아서 죽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들도 그 자리에서 엎디어서 총질을 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싸움이 되지 않았읍니다. 소위가 쓰러지고 선임하사와 또 한 명이 그 뒤를 따라 쓰 러졌읍니다. 총알도 다 쏘아 버리고 이제는 다 살았구나 하는데 갑자 기 저쪽에서 총질이 멈춰졌읍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 아나고 있었읍니다. 小隊 兵力의 국군이 골짜기에서 나타 났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살아남은 그 두 명은 국군 부대에 편입되었 읍니다. 그들이 진술하는 말이 엔간히 서툴고 앞뒤가 맞지 않아도, 국군 복장을 하고 인민군과 총질까지 해서 그중 다 섯 명이 죽은 것은 눈으로 직접 본 사실이었기 때문에 의심 해 볼까고도 하지 않았읍니다. 그저 못난 친구들이구나 하 는 정도로 보아 넘기는 것 같았읍니다. 所屬은 전에 그 高地 에 죽어 있었던 국군들의 부대를 댔고, 이장은 입고 있는 옷 의 임자 이름을 따라 金 무슨 二등병으로 행세했읍니다. 그들이 편입된 그 부대는 西部戰線에 속하는 부대이기 는 했지만 평양 쪽으로 가지 않고, 곧장 慈江道로 해서 압록 55


강을 향해 진격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二線 部隊인 그 부대가 二, 三일 후면 鴨綠江에 도달하리라는 지점에까지 이르러서입니다. 산그늘에서 野 營을 하고 있었는데, 일선 부대에서는 무슨 變動이 있는 것

같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한밤중 놀라 깨어나 보니 벌써 敵 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읍니다. 꽹과리와 날라리 같은 것을 치고 불어 대고 하다가, 必死的이라기보다 술에 취한 것처럼 왈라왈라 하면서 무턱대고 덮어 드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읍니다. 中共軍이 그 전쟁에 介入했던 것입니 다. 反擊을 가해 봐도 한번 차지한 지점은 거머리처럼 들러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이었읍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무감각과 감각의 전쟁이었는데 무감각 쪽이 이기는 것이었 습니다. 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읍니다. 後退하다가 돌아 서서, 새 부대와 합세해 가지고 싸워 보는 것이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달아나기 위한 싸움이었읍니다. 指揮系統도 없어 지고, 뿔뿔이 흩어져서 제 살 길은 제가 찾으면서 달아나야 했읍니다. 며칠을 그렇게 도망치다가 李章은, 모두 소속 부대를 잃 고 제멋대로 서울을 바라고 도망하는 칠팔 명 되는 국군 落 伍兵 속에 끼여 있는 자기를 발견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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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海道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들은 平地를 버리고 산

길을 찾아 들어갔읍니다. 여기까지는 산이 더 危險했읍니 다. 유우엔軍의 진격에 밀려 산으로 들어갔던 인민군 敗殘 兵들이 그대로 거기에 묻혀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平地를 멀리하려고 될 수 있는 대로 깊은 산속을 더듬어 南으로 향하던 일행은, 어찌 된 셈이었는지 앞이 탁 트이는

벼랑 끝에 나서게 되었읍니다. 발아래에 펼쳐져 있는 平野 를 보니 그들은 피로가 한꺼번에 스며 오르는 것이었읍니 다. 그래서 낮에는 쉬지 않기로 했던 그들도 어떤 洞窟 앞에 주저앉고 말았읍니다. 거기서 쉬면서 의논한 끝에 길을 바꾸기로 했읍니다. 이 산줄기를 이대로 따라가다간 金剛山 쪽으로 가게 될 것 같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을 이용하여 저 아래 벌판을 횡단 하여 西쪽이 되는 저편 산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곧장 南쪽 으로 향하면 바로 서울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부터 그런 것을 의논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벌판 가운 데에 조그만 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을 襲擊해서 식량을 얻 어 오자는 것이었는데, 다시 돌아올 것 없이 그대로 서쪽 山 줄기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누가 제안한 것에 모두들 찬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 西山은 저 하늘가에 아득하게 그 윤곽을 그어 놓고 있었읍니다. 57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 그들은 일어섰읍니다. 그 런데 이장은 일어서지 않는 것입니다. 남겠다는 것이었읍니 다. “왜?” “난 너희들의 의견에 찬성할 수 없어.” “뭘 말이야?” “보기에는 저 산이 저렇게 멀어 보이지만, 地圖에서는 쌀 알의 길이만큼도 안된단 말이야.” “그래서?” “거기라구 해서 서울 쪽에 더 가깝다구 생각되지 않는다 는 말이다.” “…”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저 마을까지 갔다가 여기 까지 도루 돌아오는 길이 싫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왜 아깐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기냐!” “하여간 나는 이 산줄기를 그대루 간다면 따라가지만 저 벌판을 건너기는 싫어.” “이유가 있겠지?” “저 아득한 서쪽 산까지 갈 생각을 하면 머리 속이 아득 해진단 말이다.” 58


“쌀알만 한 길이밖에 안된다구 한 것은 누구였는데 그따 위 소리냐! 이 산속으로 가면 아득하지 않단 말이냐?” “적어두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아득한 것이.” “도대체 네 생각은 뭐냐?” “너희들은 서울이 終點인 줄 알지만 수일 내로 반격이 없 을 양이면 또 낙동강까지 가야 해. 거기까지 갔다가 또 여기 까지 와? 난 이젠 도망치는 것이 싫어졌어. 진저리가 난단 말이다! 밤낮없이 도망만 치려구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 란 말이다.” “누군 좋아서 도망치나…” “그러니까 이제부터 난 내 좋은 대루 하겠다!” “넌 곧 反擊이 있을 줄 안다만 그렇다손 치더라두 그때까 지 여기서 살아 있다구 어떻게 保證하느냐 말이다!” “그런 보증은 필요 없어! 알겠나? 난 도망치기 싫구, 그래 서 살구 싶지 않다는 것뿐이다!” “…” “알았으면 빨리 가 줘.” “널 이런 데다 혼자 두구 우리만 갈 순 없다.” “그래 너희는 기어이 내가 私生兒라는 것을 듣구야 가겠 단 말이야!” “…?” 59


“알아들었니? 난 모든 것이 너희들과 달러. 養父母를 빨 갱이의 총에 맞아 죽는 걸 옆에서 구경하구 있은 이 나야!” “그러지 말구 빨리 일어나 가자.” “이걸 놔!” 어깨에 닿는 손을 뿌리치며 그는 그들에게 총을 겨누어 대는 것이었읍니다. “이때까지 숨겨 왔지만 난 국군이 아니야! 의용군이야, 義勇軍. 낙동강에 가서 수류탄 스물세 개를 던졌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들의 戰友가 몇이 거기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알아 두란 말이다!” “…” “나를 쏘아 죽이구 싶지 않다면 빨리 가 줘! 내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나두 모른다!” 그가 그렇게 해서 거기에 혼자 남은 것은 옆구리에 맞은 상처 때문이기도 했읍니다. 여기까지는 대단하지 않는 것처 럼 하고 왔지만, 앞으로는 아픈 소리를 내면서 누구에게 의 지해야 했읍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내가 꼭 살아야 할 무슨 까닭이 있는가? 없었읍니다. 남들에게는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들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읍니다. 그가 살기를 바라는 것은 그 自身뿐이라는 것이었읍니다. 60


그런 孤獨 속에서 그는 또한 私生兒였읍니다. 그런 人間 따 라지가 남들처럼 살겠다고 열심히 도망치는 꼴이 우습지 않 겠는가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아픈 소리까지 하면서 一 行의 걸음을 더디게 한다면 그게 무슨 꼴이겠는가라는 것이

었읍니다. 그런 자기 자신이 불쌍해지기도 하는 것이었읍니 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겨?… 그러면 내가 설 자리는 어디 에 있단 말인가?… 이런 侮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侮辱 이 生의 條件이든 내게는 生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산다 는 것은 얼굴을 들고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머리를 숙이고 늘 무엇을 감추면서 살아야 한다. 마치 팬츠를 꼭 껴 입고 있어야 하는 肉體처럼. 이런 生은 淸算되어야 한다. 적어도 청산되는 것을 회피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 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矜持가 아니었던가… 洞窟 속에 들어가 옆으로 누워서 그는 이렇게 해가 진 서

녘 하늘의 輓歌를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生이란 人間 이상의 것인가. 살기 위해서는 人間을 버려

도 좋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인간은 또 生을 초개처럼 버린 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人間=生’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에 있어서는 ‘人間<生’이 아니면, ‘人間>生’이다. 결국 人 間이란 이 세 式의 合計라는 말이 된다. 이 무슨 잡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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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잡탕이라고 하는 것은 그 時節의 인간은 一元 論者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로 돌리기를

좋아했읍니다. 일례를 들면 幸福이란 百 가지 요소가 합쳐 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읍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은 돈에서 생긴다 하고, 어떤 사람은 名譽 에서, 또 어떤 사람은 사랑에서, 또 다른 사람은 또 무엇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읍니다. 따지고 보면 一元이어야 할 아 무런 이유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一元이 아니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 一元論은 物質의 世界에서 따 온 것입니다. 거기서는 答은 하나뿐입니다. 둘에 셋을 더하면 답은 다섯 이라는 하나뿐입니다. 넘어져 있는 것은 넘어져 있고, 서 있 는 것은 서 있는 것이지, 양쪽을 겸하는 일은 物質世界에는 없읍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를 뿐입니다. 그들의 사전에 ‘擬人’은 있어도 ‘擬物’이라는 말은 없지

만, 그들의 意識은 擬物化의 所產인 것입니다. ‘擬物化’라

는 下層構造 위에 ‘思考方式’이라는 上層構造가 세워진 것 입니다. 따라서 人間은 六體로서는 萬有引力에 얽매여 있 지만, 精神으로서는 이 擬物化라는 引力에 매여서 비로소 人間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는 多元的인데, 이것을 一元論으로 설명하자니까 62


詭辯이 생기고 我田引水가 되어, 각자 異說로 諸子百家를

이룬 것입니다. 그들의 방대한 學問은 그래서 그렇게 방대 해진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一元이 라면 學問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학문이란 ‘異說’인 것입니다. 그들이 眞理에 도달하지 못하 고 영원히 彷徨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읍니다. 그래서 眞理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一元論을 버려야 할 텐데, 그 一元論을 버린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부정하고 抹 殺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생각해 낼

까고조차 하지 않았고, 간혹 생각해 냈다 해도 텃세를 믿고 그대로 눌러앉아 있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知 識을 사랑한 것은 이런 防衛本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

읍니다. 知識을 사랑함으로써 自己崩壞를 면하고, 그 不安 을 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意識下에 幽閉되어 있는 多元의 原型을 만나는 것은 주로 꿈속에서였지만, 그들의 智慧는 그것을 제대로 알아낼 수 없었읍니다. 알아는 내지는 못해도 모든 꿈에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意味가 없는 것은 存在할 수 가 없읍니다. 存在한다는 것은 意味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 다. 양지바른 洞窟에도 해가 떨어지면서부터는 추위가 스며 63


들어서 몸이 오슬오슬해졌읍니다. 하늘에는 언제 구름까지 깔리었읍니다. 그런데도 연일의 피로 때문에 눈이 자꾸 감 기려 하던 李章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총을 안아 들고 굴 밖으로 기어 나가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읍니다. 黃昏이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저쪽 소나무

그늘에서 토끼가 껑충 뛰어올랐다가 그대로 솜뭉치처럼 딩 구는 것이었읍니다. 사람도 맞으면 죽는 총알을 그렇게 가 까이서 당한 토끼는 形體도 찾아볼 수 없는 핏덩어리가 되 어 있었읍니다. 손에 피를 묻히면서 껍질을 벗기노라니 자꾸 原始人이 되어 가는 것 같았읍니다. 원시시대에 사람이 하던 일은 한 가지도 없어진 것이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읍니다. 다만 規模가 커져서 制度化된 것뿐이라고 했읍니다. 이 制度라는 것은 社會的 動物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사 회적 동물이라고 한 인간들이 그 하나의 處方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自由를 위해서 자유를 죽이자는 것입니다. 하 나의 자유를 위해서 百의 자유를 痲醉시키는 것이 制度의 機能이었읍니다. 그것은 들어갈 때엔 自由이고, 한번 들어

가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과 같은 것이었읍니다. 그 런 그물을 열심히 짜내는 일이 가장 인간다운 것으로 여겨 졌고, 그런 그물에 얽혀서 거기에 묻혀 있는 것을 더없는 榮 64


譽로 삼았읍니다. 빽빽히 쳐진 그물은 太陽의 빛까지 가리

었고, 하늘 위에 있어야 할 하나님도 制度라는 그 새장에 들 어 있어야 神으로서의 대접을 받았으니까 다른 일이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읍니까.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되었읍니 다. 그런데도 그 그물을 자꾸 짜내는 것이었읍니다. 自由를 얻기 위한다면서 말입니다.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인간 이란 寓話였읍니다. 人間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動物인 가 하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하나의 寓話에 지나지 않았 읍니다. 이렇게 되면 이 寓話人間이 더 인간적인지, 저 原 始人이 더 인간적이었는지 알 수 없겠다고 하겠읍니다.

가죽을 벗겨 버린 토끼 고기를 바깥에 가지고 나가 어두 워진 나무가지에 걸어 놓았읍니다. 그대로는 먹을 수가 없 어서 凍太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밤공기는 점점 추위를 더해 가고 눈송이마저 떨어지기 시작했읍니다. 동굴 안쪽에 가서 몸을 조그맣게 해 가지고 앉은 채 그는 졸리어도 드러누울 수가 없었읍니다. 누우면 더 추울 것 같 았읍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오들오들 떨기만 하다가, 누 우면 더 추운 것은 눕는 그때뿐일 것만 같아서 勇氣를 내어 누워 버리려고 하였는데, 그만 멈칫했읍니다. 누우면 몸의 表面積이 커진다는 생각이 난 것입니다. 國民學校 三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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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담임선생이 추위는 몸의 표면적을 줄여서 막는 것이 좋 다고 하던 말이 기억에 떠오른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생각해 보았읍니다. 내가 드러눕지 않은 것 은 그 敎訓 때문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내 스스로 그렇게 느낀 때문이었던가? 잘 알 수 없었지만 어렸을 때 그런 교훈 을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 교훈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 었읍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괜히 그런 교훈을 들었구 나 하는 생각이 나는 것이었읍니다. 그 교훈을 들려준 아까사끼 센세이는 野球를 잘했지. 피 처를 했는데 배팅도 잘해서 어린이들의 英雄이었다. 한번 은 보기 좋게 배트를 휘둘렀는데 빗맞아서 공은 네트 뒤에 서 있는 돌배나무 가지 속으로 날아든 다음엔 소식이 없었 다. 가을이 되어 落葉이 진 다음에 쳐다보니 공은 가지와 가 지 사이에 꼭 끼여 있었다. 오르는 것이 금지된 나무였기 때 문에 우리는 그 아래에 모여 서서 돌을 던져 떨어뜨릴 내기 를 하는 것이 재미였다. 워낙 높은 데여서 맞아도 떨어질 리 없었다. 아까사끼 센세이는 다른 데로 轉勤해 가서 없어져 도 그 공은 언제까지나 거기에 끼여 있어서, 해마다 낙엽이 지면 어린이들이 돌팔매질하는 과녁이 되었다. 까닭도 모르 는 下級生들도 열심히 돌질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끼여 있었던 그 흰 66


것은 사실은 공이 아니었을지도 몰랐읍니다. 아까사끼 센세 이가 친 공을 거기에 보고 싶은 어린 마음들이 그것을 공으 로 만들어 내어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 공은 지금도 거기 에 그렇게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아주 얼어 버렸을걸. 칼로 싹싹 베 내면 근사한 햄이 될걸… 그런데 움직이기가 싫었읍니다. 여기는 너무 추워. 정말 추워. 역시 따뜻한 데가 좋아. 내 일 아침 눈이 떠졌을 때 다행히 죽지 않구 살아 있으면 남쪽 으로 가자.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그들에게 말했던 구실은 없어졌어. 根據가 없어졌거든. 난 조금두 안 아프니까 말이 야. 그러니 살고 싶어 할 權利도 있는 것이다. 아픈 소리를 안 낼 게니까… 사실 그렇게 쑤시던 상처의 아픔은 없어진 것입니다. 아 픔도 얼어붙은 것일 것입니다. 나는 冷藏庫다. 아픔의 냉장고, 追憶의 냉장고, 부끄러 움의 냉장고… 그는 언제 옆으로 누워 있는 몸이 되어 있었읍니다. 아, 저 토끼는 얼마나 추울까. 그 좋은 털을 다 벗기구 알 몸뚱이가 되었으니. 아니 내가 무슨 잠꼬대야. 껍질이 벗기 어졌으면 그건 죽은 게 아냐. 죽은 게 어떻게 추운 걸 알어. 67


그럼 나두 지금 죽은 걸까. 조금두 춥지 않다. 졸릴 뿐이다.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우선 졸고 싶은 것뿐이다. 나는 왜 이런 데에 와서 이렇게 졸고 싶어 해야만 하는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끼여 들었는가… 오오라, 나는 전쟁이 라는 野球 試合에서 배트에 잘못 맞아 빗나간 공이다. 사실 은 그저 흰 것인 공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닌지도 모른 다. 그저 내 같은 것이 여기에 누워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 도 모른다. 꼭 그럴 것만 같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 놓고 자 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反對의 敎訓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몸이 얼었을 때 잠들면 죽어 버린다는 교훈을 열심히 지키 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훈은 들은 적이 없었더라면 좋겠다. 그랬더라면 지금쯤 나는 얼마나 마음 놓구 편안히 잠잘 수 있겠는가. 아 니 그런 교훈이 없었더라면 나는 자다가 얼어 죽을 必要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나를 이렇게 자지두 못하게 하는 이런 교훈은 누구에게 서 들었던가? 그건 누구던가… 누구던가… 바삭 바삭… 무슨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을 들은 것 같았으나 눈을 뜨기 가 싫었읍니다. 68


敎訓을 지킬 생각은 벌써 까마득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삭 바삭… 누가 토끼 고기를 훔치러 온 건지도 모르지. 그런 건 누 가 훔쳐 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을 먹고 싶은 생각 때문에 마음 놓구 잘 수가 없다. 어쩌면 별주분지두 몰라. 龍王의 병환이 아주 심한 모양이지… 발소리는 굴 안으로 들어서는 것 같았읍니다. 바스락 바스락… 난 아니야. 난 공이 아니야. 그저 흰 게야. 가까이 오지 말구 거기서 돌을 던져 봐. 절대로 안 떨어질 테니까… 어깨에 무엇이 닿는 것을 느꼈읍니다. 꿈인 줄만 알았는 데 놀라서 눈을 떠 보니 어둠 속에 뿌연 것이 움직이고 있었 읍니다. 허리 밑으로 손을 넣더니, 간단히 안아 들어서 어깨에 둘 러메는 것이었읍니다. 이것은 누굴까?… 아 그 교훈을 가르쳐 준 사람인지도 모른다. 지금 그 교훈의 책임을 지려는 것이다. 꼭 그럴 게 다. 그 교훈이 사람을 죽일 뻔했으니까… 아래로 아래로 얼마나 그렇게 해서 내려가서일까, 땅바 닥에 놓여진 것을 느꼈읍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기는 廣場의 한복판이었고, 길이 八 69


方으로 뻗어 있는데, 길바닥이며 建物이며 紀念塔이며가

모두 大理石으로 되어 있는 하얀 都市였읍니다. 사람이라 곤 그림자도 없고,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 空氣가 어디론지 새어 나가 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밤중의 대낮이었읍니다. 우러러보니 파란 하늘에는 아무 데도 해가 없었읍니다. 해 는 없고 하늘 한 구석에 구멍이 펑 뚫리어 있는데, 그 뚫린 모양이 아까 토끼를 잡아먹었던 동굴의 입구와 꼭 같았읍니 다. 그런데 동굴 밖에서 지금 거기를 쳐다보고 있는지, 동굴 안쪽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읍니다. 아까 그 뿌연 그림자는 동굴 밖이 아니라 안쪽으로 자꾸 내려간 것 같기도 했읍니다. 자세히 다시 살펴보니, 모든 건물은 지은 것이 아니라 통 째로 새겨 낸 것이었읍니다. 銅像을 조각하듯이 말입니다. 거리 전체를 파내고 다듬고 해서 새겨 낸 거대한 하나의 藝 術作品과도 같은 地下都市였읍니다. 하늘이 뚫린 그 구멍

으로 빛은 물처럼 흘러들어서 땅속에 파란 하늘을 이룩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幽靈들의 거리였읍니다. 유령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透明한 유리로 된 것 같은 人間들이 희미한 실루 엣을 그려 내며 오고 가고 하고 있는 것이 꼭 化石의 무늬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大氣가 바 70


위이고 저 건물 같은 物質이 空氣가 아닐까 하는 錯覺이 순 간 일면서 정말 숨이 꽉 막혀 드는 것 같기도 했읍니다. 窓가에서 웃고 있는 女人, 길에서 무엇인지 줍고 있는 老 人, 다투고 있는 장삿군들, 서로 팔을 끼고 散策을 하고 있

는 젊은 男女들… 그들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소리 없는 말 을 주고받고 하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 살아 있는 化石의 거리를 헤매다가 그는 로마時代의 코로세움과 같은 거대한 圓形 建物 앞에 이르렀읍니다. 안 으로 들어가 보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린이들이 열심히 體操를 하고 있는데 암만 보아도 그것은 몸을 약하게 하는

운동 같았읍니다. 몸을 해파리처럼 흐늘대면서 빙글빙글 돌 고 있는 품이, 몸을 튼튼하게 하려는 運動은 아니었읍니다. 그 사이를 지나 한가운데로 가 보니 움푹하게 땅이 파여 있는 것이, 중학교 시절 濟州道로 수학여행 갔을 때 본 적이 있는 三姓穴과 그 모양이 비슷했는데, 규모가 훨씬 크고 그 밑바닥에 몇 군데 파여 있는 구멍이 무슨 噴火口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읍니다. 체조에 여념이 없는 어린 유령들의 사이를 지나 저편 스 탠드에 가 보니, 그것은 그저 스탠드가 아니고 전체가 하나 의 건물로서, 그 지붕이 그렇게 삑 둘러 가며 층층대 모양으 로 設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국민학교인 것 같읍니다. 그 71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따라 이 교실 저 敎室을 기웃거리던 李章은 어느 교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읍니다. 敎壇에 서

서 지금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선생의 실루엣은 낯익은 것 이었읍니다. 그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서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읍니다. 오른쪽 다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왼쪽 손은 허리 뒤에 붙이고,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분필을 뱅글 뱅글 돌리면서 떠들고 있는 그 모양은 틀림없는 아까사끼 센세이였읍니다. ‘비록 몸은 다른 데로 가지만 마음만은 언 제나 이 학교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고 눈물까지 글썽거 리면서 전근해 갔던 아까사끼 센세이는 이런 데에 와 있었 던 것입니다. 이장은 그의 몸짓이든지 턱의 움직임이든지 분주히 놀리 고 있는 입술 모양이든지 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지금 무 슨 이야기를 가르치고 있는가를 열심히 飜譯해 보았읍니다. 生物 시간 같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가 이야기하고 있

는 내용은 대략 이러한 것이었읍니다. …바닷가에서 물과 공기의 摩擦로 생겨난 바깥 世界의 인간들은 오랫동안 자기들의 意識構造가 單細胞로 되어 있 는 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그러던 그들도 점점 슬기로와졌 다고 할까, 하여간 마침내 자기들 마음 저 안속에, 바꾸어 말 72


하면 意識下에 무슨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옛날 그리이스의 누가 말한 이데아

의 世界가 공상의 產物이 아니고 사실로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그들은 ‘自我의 發見’이라고 했 는데, 이것이 바로 불과 공기의 마찰로 생겨난 여러분의 존 재를 그들이 엿보게 된 시초가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자기가 자기의 主人이 아니고, 한낱 그 머슴에 지나 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傲慢하고 미련스 러운 그들이 이 事實을 순순이 받아들이려고 할 리 없었다. 그래서 이 事實을 외면하기 위해서 科學과 藝術을 꾸며 대 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들어 낸 眞善美란 것은 바른대로 말 하면 여러분을 意識下에 그대로 가두어 두려는 術策이었는 데, 그들은 그것이 도리어 우리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오늘에 이르렀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의 世界政策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 었다. 우리 工作員이 퍼뜨린 流言蜚語에 현혹되어 바깥 世 界는 지금 혼란을 일으켜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데에 血眼

이 되어 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하여간 재미가 있 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면서 다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뒷문 이 휙 하고 열리면서 守衛가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읍니다. 73


달아날 사이도 없었읍니다. 벼락같이 달려들어 허리를 안아 들고 창가로 가더니 그대로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이었습니 다. 퉁, 땅에 떨어지면서 눈을 떴읍니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서 문이 탕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읍니다. 거기는 어두 운 땅속 같은데, 쳐다보이는 저 위로는 몇 줄기의 가느다란 빛이 새어들고 있는 것이 꿈속 같았읍니다.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는데 이것도 여전히 꿈속인가?… 옆구리의 상처가 쑤시기에 몸을 돌려놓으려고 하니까 저 절로 아픈 소리가 났읍니다. “소리 내지 마세요.” 속삭이는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였읍니다. 조금 있더니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 왔읍니다. “어서 오시오. 이렇게들 어디를 가는 길이오?” 그것은 굵다란 남자의 목소리였읍니다. “이상한 놈들 못 봤소?” “보구말구. 엊저녁 수상쩍은 놈들이 칠팔 명이 저 비탈 너머로 해서 벌판으로 내려가는 것을 봤는데, 너무 멀어서 그게 뭔지…” “그놈들은 우리가 어젯밤에 다 쏘아 버렸소.” “다 죽였단 말이오? 참 장하오.” 74


“그놈들이 이 산에서 내려왔더란 말을 듣구 왔는데 이상 한 놈 또 못 봤소?” “그러지 않어두 어제 그놈들이 내려가는 것을 보구 곧장 마을로 뛰어가서 동무들에게 보고하려구 했는데 눈보라가 치구 해서…” “저 방에 펴 놓은 이불은 뭐이오? 금방 누가 일어난 것 같 은데?” “아 그거 말이오? 그건 딸년이 갑자기 배탈이 나서…” “그 딸은 어디 있소?” “금방 일어나서 저 부엌에서 설겆일 하구 있소. 여자란 아무리 몸이 아파두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소.” 잠시 말소리가 뜸해졌읍니다. “저게 그래 동무의 딸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세상에 딸이 아닌 것을 딸이라구 할 그런 도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굉장히 잘 생겼는데. 노인을 다시 보겠는데.” “노인이라니 오십 고개두 아직 덜 넘었는데 그런 말 마 오!” “마누라는 없소?” “없소.” “이런 곳에 둘이서만 사오?” 75


“그게 어쨌단 말이오!” “이 노인 동무가 아까부터 왜 이리 빽빽거려!” “아니 내가 그만 좀. 노하지 마오. 옛날부터 성미가 좀 급 한 편이어서 내가 잘못했소이다.” “이상한 놈 보면 눈보라를 핑계 대지 말구 지체 없이 보 고해야 하오! 알아들었소?” “보고하다뿐이겠소. 저기 저 총으로 쏴 죽이겠소. 비록 이런 산속에서 사냥질하며 살망정 언제나 조국 방위는 잊지 않고 있소.” 조금 있다가 동무들은 물러갔읍니다. 그리고서 다시 조 금 있더니 머리 위에서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덮쳐들 었읍니다. “어, 정신 깼구먼…”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이 뻗어 내려왔읍니다. 四肢가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과 함께 그는 위로 끌

어 올려졌읍니다. 해는 西山 위에 있었읍니다.

몸은 破產되어 버린 것 같고 意識은 剩餘 속에 파묻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읍니다. 지금 들어가 있었던 곳이 이 집 마룻방 밑이었다는 것을 희미하게 깨달으면서 그는 자리에 눕혀지자 다시 의식을 잃 76


어버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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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 다시 의식을 회복한 것은 이튿날 아침때였읍니다. 사지가 노곤한 것이 몸은 어디로 漂流되어 버리고 ‘나만이 ’ 여기에 남아 있는 것 같았읍니다. 혹은 肉身이라는 白紙에 ‘나라는 ’ 斑點이 그저 찍혀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 斑點이 다른 白紙에, 또는 이 白紙에 다른 斑點이 찍혀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나인가? 나는 나의 主人인가? 나의 머슴인가? 傷處의 아픔이 없어져 있었읍니다. 거기에 손을 가져가

보니 약이 발리어 있고, 꾸깃꾸깃한 헝겊이 허리에 둘리어 있었읍니다. 문이 하나밖에 없고 골방처럼 조그만 방인데 거미줄이 그리워질 방 냄새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붉고 푸른 치마 저고리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득한 나라에 와 있는 것 같 은 느낌을 주었읍니다. “눈을 떴으면 떴다구 말해야 내가 알지…” 목이 짧고 텁석나룻이 반질반질한 노인이 문을 열고 들 여다보더니, 이렇게 좋아하면서 들어서는 것이었읍니다. “노형은 상당히 엄살꾸레기던데…” 발바닥을 맞댈 정도로 무릎을 쫙 벌리고 앉으면서 유쾌 하다는 듯이 배를 불룩이는 것이었읍니다. 어떻게 보면 노 78


인 같고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는 것을 섭섭해 할 것 같은 건 장한 體軀였읍니다. “고것두 상처라구 그렇게 아픈 소리를 내오. 그걸 곧이듣 구 내 딸이 한잠도 못 자구 간호했다는 걸 알아야지. 헛헛허 허…” 이장은 간신히 일어나 앉았으나 주인이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인사말을 할 계제를 찾을 수가 없었읍니다. 도리어 말만으로라도 그대로 누워 있으라고 해 주어야 할 것이 아 니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이는 것이었읍니다. “이제는 조금두 안 아프다 그 말씸이지?…” “네…” “그럴 테지. 워낙 그 고약이 명약이거든. 곰의 간과 벌꿀 과 그리구 뭐더라 그렇지 독버섯 이 세 가지를 가지구 내 손 으루 만든 거라네. 미국 다이야찡이 신통스럽다고들 하지만 내 고약을 대량생산만 하기만 하면 큰 부자가 되겠는데 지 금 세상이 어디 그렇소?” “뭐라구 감사를 드려야 할지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서 죄 송합니다.” “폐 정도가 아니지. 이 목숨을 걸고 살려 준 거요.” 이때 창문 밖에 밥상이 놓이는 소리가 났읍니다. 그러나 문은 열리려는 기척이 없었읍니다. “뭘 꾸물꾸물하고 있어!” 79


하면서 노인이 문을 열어 주었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읍 니다. “체녀라구 사내 보기가 부끄러운 게지 허헛 허헛…” 점심때에도 밥상은 그렇게 창문 밖에 놓여졌을 뿐 열리 지 않았읍니다. 털보 영감은 집에 없었읍니다. “뭘 시킬 일 이 있으면 마음대로 내 딸을 부르게.” 하고선 사냥에 간 것 이었읍니다. 신세를 지고 있는 몸으로 이래 달라 저래 달라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니, 일어나서 자기 손으로 문을 열고 밥상을 들어 들여오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부엌 문기둥에 몸을 가리고 이쪽 동정을 살피던 여자는 그가 문을 열자 얼른 숨어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기역 자 모양으로 방은 두 개뿐인 이 초가집은, 저 아래 에 흰 눈 벌판이 굽어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읍니 다. 이튿날 아침 李章은 더 머물러서 폐를 끼치기만 하는 것 도 죄스럽고 해서 떠날 인사를 하려고 했더니, 노인은 펄쩍 뛰는 것이었읍니다. “그렇게 보내 주려구 살려 준 줄 아오?” “…?” “아니, 물론 노형을 위해서 말이오. 한 발자국이래두 내 80


집에서 나가만 보오. 이 산에는 빨갱이들이 짝 덮여 있소. 담박에 붙잡혀서 총살이오, 총살!” “…” “난 말이오, 한번 이 사람은 살려 주어야 하겠다구 마음 먹으면 끝끝내 살려 주는 게 내 성미요. 조금도 폐 된다는 생 각 말구 아주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마음을 푹 놓소.” “국군 패잔병인 걸 왜 이렇게 해 주시는지 죄송해서 마음 을 놓을 수가 없읍니다.” “그런 걱정일랑 뒀다가 하구, 빨리 원기나 회복하오.” 이튿날은 아주 따지고 물었읍니다. “저를 이렇게까지 해 주신 데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 까닭이 있으면 들어주겠단 말이오?” “…” “농담이야 농담. 생면부지인 노형에게 무슨 청이 있겠소. 되려 노형 쪽에서 무슨 청이 있다면 몰라두…” 하면서, 이장의 시선을 얽어 가지고 벽에 걸려 있는 치마 저고리를 힐끔 쳐다보는 것이었읍니다. “보아하니 노형은 이남에 있을 때 많은 체녀를 달구 다닌 것 같은데, 그렇지? 안 그랬다면 병신이제. 나두 젊었을 땐, 지금은 그런 것에 초월해 있지만 호화판으로 놀았다오. 내 경험에 의하면 말이오, 여자란 그저 힘으루 꽉 붙잡는 게 제 81


일 손쉽단 말이오. 그러니 남자는 우선 힘이 세야 하오. 약 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니라 하는 말두 근본을 따지면 이것을 두고 한 말이오. 그러니까 욕심이 나는 여자가 있으 면…” 밥상 소리가 그 말을 중단시켰읍니다. 언제나 발소리는 나지 않고, 밥상 소리부터 나는 것이었읍니다. “범은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더니…” 털보는 이렇게 중얼거리는가 했는데, 갑자기 소리지르 는 것이었읍니다. “오늘은 네가 열구 들여놔라!” 하면서, 문을 휙 열어 제치는 것이었읍니다. 돌아서려던 여자의 시선과 이장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 쳤읍니다. 정면으로 털보 영감의 딸을 보기는 그것이 처음 이었읍니다. “그래 넌 인사두 안 하구 나가기냐…” 털보는 밥상을 들여다 놓고 돌아서는 딸의 풍만하고 날 씬한 엉덩이를, 얼굴이 해벌어져 가지고 그 두터운 손바닥 으로 툭 치는 것이었읍니다. 딸은 깜짝 놀란 토끼처럼 얼른 나가기가 바쁘게 문부터 닫아 놓는 것이었읍니다. “핫핫핫 술집 여자들에게는 저런 순진한 맛이 없거든.” 눈을 가느다랗게 해 가지고 벙글거리는 얼굴에는 왕년의 82


‘호화판이 ’ 무늬져 있는 것 같기도 했읍니다. “그럼 또 가 볼까. 식구가 하내 늘었으니 사냥두 매일매 일 가야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일어나 문을 열다가 다시 돌아 보는 것이었읍니다. “여기 체녀들은 이남 소식을 몹시 궁금해 하지. 뭣하면 불러들여다 재미나는 이남 얘기래두 들려주면 좋아하겠는 데. 옷을 그렇게 입어 그렇지 말쑥한 체녀란 말이오.” 시집갈 나이가 훨씬 넘어 보이는데 종잡을 수가 없는 여 자였읍니다. 딸이라고 하지만 싸늘한 氣禀부터가 털보 영 감에 비하면 늙은 머슴에 대한 主人 딸, 시대가 바뀌어져서 그 主從이 거꾸로 된 것 같은 쑥스러운 대조를 이루는 딸과 그 아버지였읍니다. 그런 父女가 이런 人跡이 드문 산속에 서 단둘이 살고 있는 風景에는 녹쓴 浪漫 같은 것이 느껴지 는 哀愁가 있었읍니다. 수수께끼와 같은 하루하루가 지났읍니다. 털보는 매일 처럼 총을 메고 나갔다가는 어두워져서야 돌아오는 것이었 읍니다. 돌아와서는 노골적으로, 이 젊은 것들 사이에 무슨 일이 없었나 하는 눈초리로 點檢해 보는 것이었읍니다. 그 런 눈초리를 알면서도, 李章은 불쾌감을 느낄 줄 모르는 자 기를 발견하고 마음이 붉어지는 것이었읍니다. 83


“내 딸에게는 말이오…” 하루는 이런 말을 남기고 나가는 것이었읍니다. “이런 말을 애비의 입으로 하긴 뭣하지만 저 애 에미는 약간 음탕한 데가 있었단 말이오. 내가 이 산에 데리구 있는 것두 다 그 때문인 줄 알고 있소.” 한나절 외딴 산속 같은 지붕 밑에서 단둘이 지내고 있는 것이지만, 여자가 어찌나 조심스럽게 피하는지 이장은 말을 건네 볼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읍니다. 시선이 엇갈릴 때가 가끔 있었지마는 순간뿐이고, 그저 그뿐이었읍니다. 무슨 일이 그렇게 있을 것 같지도 않는데 부엌에서 꿈지럭거리고 만 있었읍니다. 하는 일이 없을 땐 안방에 들어박혀서 나오 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모욕감 같은 것까지 느꼈읍니다. 그래서 한번 은 뒷간에 갔다가 자기 방에 들어가려던 이장은, 발을 돌려 놓더니 안방 문에 손을 가져간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衝 動에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문을 휙 열었을 때의 이장은 ‘제

가 아무리 잘나구 쌀쌀해 해두 털보 따위의 딸이 아닌가’ 하 면서 마음이 도사려졌던 것입니다. 반듯이 앉아 있던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 무릎 위에 모아 놓았던 손을 얼른 뒤로 감추는 것이었는데, 그 한쪽 손목에 는 念珠가 감겨져 있었읍니다. 이장은 무슨 絶壁을 거기에 84


본 것 같았읍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 밤이었읍니다. 잠결에 무엇이 부 딪치는 것 같은 소리에 눈을 떴는데, 문풍지가 바람에 떨고 있을 뿐이었읍니다. 다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어디서 문 짝이 떨어져라도 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는가 했더니, 눈 앞에서 방문이 휙 열리는 것이었읍니다. 검은 그림자가 툭 뛰어들더니 문부터 닫아 버리고 발치에 가서 무너지듯 주저 앉는 것입니다. “이년! 네가 에미를 닮았지, 내가 닮았겠나!” 때늦게 이런 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슬며시 닫히는 소리 가 흘러왔읍니다. 처마 끝을 스쳐 든 달빛에 창호지는 다시 누르스름한 적 막을 빚어내었읍니다. 倫姬라고 하는 그 여자의 숨소리는 가슴에까지 들려오

는데 이장은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었읍니다. 안방에 건너가야 하나 싶어서 이장은 옷가지를 찾았읍니 다. 처음부터 자기는 안방에서 털보 영감과 기거를 같이하 고, 이 방은 여자에게 내주어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제 야 들기도 했읍니다. 저고리를 주워 입으려는데 구석에서 ‘그대루!’ 하는 소리가 났읍니다. 명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읍니다. 그 소리에 이장은 그대로 거 85


기에 굳어져 버렸읍니다. 밤은 깊어 가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는 것도 뭣하 고 해서 이장은 이불을 구석으로 밀어 주고 담요를 뒤집어 쓰면서 누워 버렸읍니다. 내가 잠이 들어야 저 여자두 잘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 어 빨리 자 버려야 하겠다고 잠을 청해도 들듯 들듯 하다가 도 그때마다 잠은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그래도 언제 잠이 들었던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읍니다. 날은 훤히 밝았는데 커다란 눈알이 굽어보고 있 었읍니다. “지난밤에는 잘 잤소?” 그 두 눈알은 능글능글 빛나는 것이었읍니다.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지? 내 다 알고 있어.” “뭐 말입니까?” 이장은 잠이 한꺼번에 깨어지며 일어나 앉았읍니다. “아니 노형을 어떻다는 게 아니구, 딸이 병이란 말이오. 밤이 이슥해지면 더구나 요지음 같은 달밤이면 참지 못한단 말이오!” “…?” “자면서 무슨 말이 있었지? 무슨 거짓말을 꾸며 댔을 거 요.” 86


“무슨 말씀인지? 그만 자 버려서…” “그만 자 버렸다구?” 유심히 이불을 더듬어 보는 것이었읍니다. 그제야 이장 은 자기가 이불을 덮고 있었던 것을 알았읍니다. “거짓말 마. 윤희는 벌써 사실대루 다 고백했는데 시치미 를 떼다니, 노형은 보기보다 엉큼한데…” “영감은 정말 사람 같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야?” “있기를 바랬단 말입니까!” “이거 정말 등신이군. 아직 내 딸이 어떤지 모르는 모양 이지. 안다면 그대루 놔두지 않았을걸…” “…” “애비인 내가 어떻게 그런 걸 아는가구 이상하단 말이지? 그렇지만 난 그 애 에미 노릇도 해야기 때문에 모든 면을 다 안단 말이오.” 이장은 의분까지 느꼈읍니다. 倫姬까지 더럽게 느껴지 는 것이었읍니다. “여기서 내가 노형을 목숨까지 걸구 살려 준 까닭을 말하 겠소.” “…” “저절로 그렇게 되라구 기회도 줬구, 어젯밤엔 밀어 넣어 87


주기까지 했는데 왜 그렇게 둔하오. 사내대장부가 그랬다구 뭐 손해 보는 일이야 아니잖소?” “까닭을 말해 주십시오.” “아하아.” 한숨을 쉬는 것이었읍니다. “애비인 내가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해야 하겠소…” “…” “아까두 말한 것처럼 내 딸에게는 상사병이라는 것과두 다르구, 낮에는 그렇게 얌전타가두 밤이 되면 사내이기만 하면 좋단 말이오. 이 말의 뜻을 알겠소? 그에게서 무슨 말 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지난밤에는 보기 싫어서 이 방으로 차 보낸 거요.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 오.” 털보의 눈에서는 정말 눈물이 굴러떨어지는 것이었읍니 다. “이렇게 사정이오.” 눈물을 씻어 내면서 두 손을 방바닥에 짚는 것이었읍니 다. “내 딸을 귀여워해 달란 말이오. 당분간이라도 좋으니 좀 데리고 살아 주오?” “…?” 88


이장은 지금 도깨비 굴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얼 떨떨한 착각까지 느끼는 것이었읍니다. 친아버지가 아닌지 도 모른다 하는 생각도 해 봤으나, 이런 도깨비 같은 돼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면 그 여자가 이런 산속에서 함께 살고 있을 리는 더욱 만무한 일이었읍니다. “그럴 게오. 그럴 게오.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게오…” 하면서 털보는 자기 가슴을 쾅쾅 때리는 것이었읍니다. “뭣 때문에 내가 그런 챙피한 거짓말을 꾸며 내겠소? 거 짓말이라구 생각되면 왜 그런 거짓말을 했겠나 하는 까닭을 말해 보오.” “…” “있을 리 없지. 있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게.” “출가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만 한 여자면 누군지도 모르는 제가 아니라두…” “잘 말했소. 바꾸어 말하면 그 애에게 반했단 말이겠는 데, 사실 말이지 난 이래 뵈어두 해방 전에는 海州에서 큰 양주소를 한 사람이오. 肅淸을 당한 홧김에 좋아하던 사냥 을 아주 업으로 삼게 됐지만, 난 양반이오. 양반의 딸이란 말이오. 여학교두 나왔소. 어디 그뿐이오. 노형은 아직 모를 테지만 난 계집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인물두 그렇구 체격 도 그렇구, 난 윤희만 한 여자를 처음 봤단 말이오. 때가 때 89


라면 노형쯤 거들떠두 보지 않었을 게란 말이오.” “…” “승낙해 줬으니 피차 다행이지, 노형은 오늘을 넘기지 못 했을 거요. 그건 농담이지만 하여간 난 열흘에 한 번씩 마을 에 내려가 이 산 형편을 동무들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는데 오늘이 바루 그날이었단 말이오.”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읍니다.” “싫단 말두 안 하구서 괜히 딴소리 마오. 난 전부터 생각 한 일인데 사람은 왜 남녀 간의 그런 일이라면 공연히 부끄 러운 것으로만 치는지 알 수 없소.” “저는 영감보군 아무 말두 하지 않었읍니다!” “하여간 좋소. 마을에 내려가는 일은 보류하고 사냥 갔다 오겠는데 달아나고 싶으면 그동안에 달아나오!” 방바닥을 차고 일어서는 것이었읍니다. “그렇지만 달아나지 못할걸.” 이렇게 히쭉하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털보 영감이 집에서 나갔을 때 이장은 당장 이 집을 나가 야 하겠다고 서두르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마음뿐이고 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날 밤이었읍니다. 마룻방에서 ‘놔요!’ ‘이년!’ 하는 말소리가 어지럽게 나더 90


니 방문이 열렸읍니다. 털보가 딸의 팔목을 쥐고 있는데 비틀어 쥐고 있는 것이 었읍니다. 입술을 깨문 딸은 그 팔목을 감추려고 몸을 이쪽 으로 돌려놓는 것이었읍니다. “약속대루 내 딸이오.” 손을 놓아줍니다. 딸이 들어서지 않으니까 뱃가죽으로 떠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이 방 안에 들어서자 얼른 문을 닫고 밖으로 잠 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괜히 부끄러운 체하네.” 李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읍니다. 이것은 강요

된 매음이 아닌가! 도살장에 들어선 것 같은 그 여자는 그러나 羊처럼 고요 했읍니다. 비스듬히 한쪽 손을 짚고 앉은 樣은 손님방에 들 어온 기생 같기도 하였읍니다. “전 약속한 일이 없읍니다!” 이장은 辯明부터 해야 했읍니다. 아무 반응도 없기에 다음에 해야 할 말을 찾는데 가늘지 만 똑똑한 목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알고 있어요.” “…” 91


이장의 마음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넘나들었으 나 그것이 무슨 생각들인지 한 가지도 알 수가 없었읍니다. 무슨 故障난 機械 속에 끼어든 것 같고, 不協和音 속에 파 묻히어 있으면서도 이장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읍니다. 벌써부터 倫姬에게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던 이장이었읍니다. 언제나 황톳빛 치마저고리를 되는 대로 걸 쳤는데도, 그 육체에 흐르고 있는 官能에는 鄕愁 같은 것까 지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念珠의 절벽이 아니었다면 쏟 아져 가는 그리움은 막을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찌직 찌직, 심지가 타는 소리에 너울거리는 불 그림자, 두 男女는 손을 들면 닿을 만한 사이를 두고 언제까지 그렇 게 앉아 있었읍니다. 멀리서 총소리가 서너 번 울려 왔읍니다. 그 총소리를 되 새기듯 윤희는 옆으로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세우는 것이었읍니다. 이장은 그 視線에, 숨 쉬는 것도 罪 되는 일처럼 느껴졌 읍니다. “마음으로는 약속하고 싶었읍니다.” “…” 여자의 슬픈 시선과 남자의 타는 시선이 서로 얽혔읍니 다. 92


찌직 찌직 타는 심지와 너울거리는 불 그림자… “…” “…” 여자의 눈망울이 젖는 듯했는데 그것은 싸늘한 嬌이기 도 했읍니다. 안방에서 우락부락한 소리가 났읍니다. “뭘 하구 있기야! 빨리 불 끄문 어때.” 금시 嬌가 외면하는 것이었읍니다. “실례지만 저이는 친아버지가 됩니까?” 여자는 돌렸던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는 것이었읍니다. “저에게는 간질병이 있어요.” “…?” 그래서 이 산속에 묻혀서 살고 있다는 말인 것 같았읍니 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며칠 전 부엌에서 무엇이 무겁게 넘어 지면서 산산이 그릇이 깨져 나가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나 기도 했읍니다. “염주는 지금도 갖고 있읍니까?” “버렸어요.” “언젭니까?” “아까…” “왜?…” 93


“선생님은 지금 우리에게 속고 있는 거예요.” 그 소리는 이슬에 맺혀져 있었읍니다. “저는 부친에게만 속고 있는 것입니다.” “…” “이름을 불러서 좋다면 나는… 윤희의 생각만 하면서 지 냈읍니다.”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안방 문이 와다닥 열리는 소리 가 났읍니다. “정 그렇다면 내가 가서 꺼 주겠다!” 그 소리에 倫姬는 입술을 모아 등불에 바람을 보내는 것 이었읍니다. 순간 暗黑이 덮어 버렸던 방 안을, 창문에 비쳐 든 달빛 이 뿌옇게 흐려 놓았읍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저를 가엾다 생각하시면 이대루 속아 주세요.” “윤희…” 그 손목을 잡는 것입니다. “…” 순간 꿈질했던 윤희는 남자의 가슴에 스러지듯 안겨 드 는 것이었읍니다. “이제는 가엾지 않을 것이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94


“아… 이렇게 한 번만 안기고 싶었어요…” 그 倫姬는 이튿날 새벽, 집 뒤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목 을 매고 죽었읍니다. 화려한 그 푸른 치마와 붉은 저고리를 입고. “어허 끝내 죽었구나…” 털보는 축 늘어진 딸의 시체를 쳐다보며 이렇게 탄식하 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슬퍼하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읍 니다. 李章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獵銃을 들고 나와 총

알을 재면서 털보의 가슴에 들이대는 것이었읍니다. “저 배 안에 있는 것은 누구의 아이요!” “아니야! 아니야!”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참구 참구. 내 말두 들어 보! 무슨 거짓말을 들었는지 모 르지만 생각해 보오! 딸의 뱃속에 어떻게 애비의 새끼가 들 수 있단 말이오?” “뭐라구?” 세상에 이런 소리가 어디 있을 수 있겠읍니까. 공포에 질려 이장은 소나무 가지를 쳐다보았읍니다. 푸 르고 붉은 옷에 잠긴 ‘不倫’은 새벽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추 고 있었읍니다. 95


悲感해진 그는 달아나려고 하는 털보의 어깨를 총으로

쳐서 거기에 꿇어앉혔읍니다. “내 다 알고 있었다.” 이것은 거짓말이고 아까 소나무 가지에 드리워 있는 시 체를 봤을 때, 지난밤 어둠 속에서 껴안았던 그 몸이 불룩했 던 것 같은 感이 들었던 것이고, 딸의 그런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털보의 氣色 을 느꼈을 때 이장은, 자기를 그 배 안에 있는 아이의 애비로 삼으려고 했다는 計略을 깨달은 것 같았던 것입니다. “네 딸에게서 다 들었다!” “아니오! 정말 딸이 아니오! 저건 첩의 딸이오. 戶籍에두 없는 기생의 딸이란 말이오!” “그럼 네 이름은 그 호적에서 지워 주마!” 총 끝으로 그 입을 박았읍니다. “아이구, 아이구, 목숨만 살려 줘 목숨만…” 피 흐르는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한 마디라도 더 많은 말 을 해 내겠다고 미친 듯이 허위적거리는 것이었읍니다. “나만 나쁜 게 아니야! 일본 어느 裁判長도 말한 것이 있 소! 세상에 정말 강간이란 없다구…” “이 人間 돼지야!” 총을 거꾸로 쳐들어 가지고 개머리판으로 그 머리를 후 96


려갈겼읍니다. 털보는 퍽 하고 간단히 쓰러졌읍니다. 까옥 까옥… 머리 위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들이 돌고 있었읍니다. 삽과 곡괭이를 찾아 가진 李章은 倫姬의 시체를 메고 산 위로 산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산꼭대기에 다다른 그는 거기서도 멎지 않고, 마루터기 를 따라서 깊은 산속으로 더듬어 올라가는 것이었읍니다. 아늑한 양지쪽을 찾아낸 그는 눈을 헤치고서 땅을 파기 시작했읍니다. 눈에 불이 달려서 쉬는 법도 없이 깊으게 깊으게 파고 또 파고서, 무슨 秘錄이라도 감출 듯 땅속 깊이에 倫姬를 묻는 것이었읍니다. 무덤은 만들어 내지 않고 편편하게 한 다음 거기에 큼직 한 돌덩어리를 보일까 말까 하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멀리 가까이 東西南北을 재어 보는 것은 그 위치를 외어 두 자 함인 것 같았읍니다. 하늘에서 송이송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읍니다. “倫姬,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 이 땅에 平和가 오면 내 손으로 여기다 네 碑石을 세우겠다. 그때까지 내가 너의 비 석이다.” 97


집에 내려와 보니 까마귀의 밥이나 되었을 줄 알았던 털 보는, 머리를 싸매고 안방에 이불까지 펴 놓고 누워 있는 것 이었읍니다. 아무리 약간 빗맞은 것 같았다고 해도,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무슨 짐승이라고 했읍니다. “어쨌든 윤희의 아버지니까 더 손을 대지 않지만 그 더러 운 눈으로 윤희의 무덤을 찾을까 하지 마라.” 두둑한 털보 영감의 털옷을 바꾸어 입은 李章은, 말린 짐 승 고기 같은 먹을 것을 몸에 지닐 대로 지닌 다음, 엽총을 메고 눈이 쏟아지는 산길을 北쪽을 바라고 떠났읍니다. 지 난밤에는 倫姬를 데리고 以南으로 나갈 생각에 가슴이 울 렁거렸던 이장이었읍니다. 그렇게 해서 北으로 향했던 李章이 內務署員에게 붙들 린 것은, 그로부터 二○ 일쯤 지난 어느 날 오후, 한쪽 어깨 가 허리에서부터 비어 나간 것 같은 느티나무의 허전한 모 양을 저 멀리에 바라볼 수 있는 ‘방골’ 마을 어귀에서였읍니 다. 그러나 붙잡혔을 때의 그는 그다지 낙담하거나 한탄하거 나 하는 기색은 없었읍니다. 바위틈에 끼여 자기도 하면서, 마치 산짐승처럼 산에서 산으로 여기까지 더듬어 오느라고 心身이 지칠 대로 지쳐서 虛脫狀態가 되어서만은 아닌 것

같았읍니다. 도중 한 번도 방골 마을에의 길을 멈출까고 한 98


적이 없었는데, 멀리에 그 느티나무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주춤해졌고, 걸음이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 로 움직여 놓았던 것입니다. 事實을 알고 싶지 않았던 李章 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까지 그렇게 한사하고 더듬어왔던가. 崔 下士에게서 방골 마을에 그런 느티나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정말 그런 나무가 찾아내어지리라고 는 생각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자기 얼굴을 거 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私生兒라는 것이 확 인될지도 모르는 眞相은 될 수 있으면 회피하고 싶었던 것 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그런 느티나무가 거기에 없다 는 것을 發見하기 위해서 그 느티나무를 악착같이 찾아내어 야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랬는데 그 느티나무는 儼然히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솟아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새빨간 거짓말 말구 사실대루 대오. 一黨이 있다 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소! 무슨 工作을 꾸몄소!” “거짓말인지 아닌지 한번 알아보십시오. 그 노인이 갖다 버리지 않았다면 그 집 마룻방 밑에 내 군복과 총이 있을 것 입니다.” “그런 강도질두 총살이요 총살! 알겠소?” 99


“그렇게 되어두 할 수 없읍니다. 내가 어떤 강도였는가 하는 것은 그 노인이 말하는 대로일 것입니다.” “동무, 동무가 모든 것을 사실대루만 고백한다면 우리는 용서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무를 영광스러운 우리 인 민군대의 戰士로 받아들일 用意두 있단 말이오.” “국군의 낙오병이라는 것 이외 사실이란 없읍니다.” “또 국군? 그래 그게 국군이야! 美帝의 앞잽이가 국군이 란 말이야!” “뭐라고 부르는 건지, 하라는 대로 하겠읍니다.” “것두 몰라서 묻는 거야!” “…” “동무! 동무는 그래 인자하신 우리의 위대한 김일성 장군 의 雅量에 대해서 그렇게 보답하기요?” “…” “동무가 바라는 게 뭐요? 한번 들어나 보자.” “포로로 취급해 주는 일입니다.” “포로?…” 그 下士는 뒤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 장교에게 물어보는 것이었읍니다. “포로라는 게 뭡니꺼?” “우리 영용한 인민군대는 포로라는 포두 몰라. 그런 건 100


자본주의 군대에게만 있는 것이라구 똑똑히 가르쳐 줘!” “알겠어? 네가 뭔데 건방지게 포로 취급이야! 우리 인민 공화국엔 포로수용소 따윈 없어! 그런 건 다 자본주의 국가 에만 있는 봉건 시대의 유물이야 유물! 알아듣간?” 장교가 옆으로 나서며 일러 주었읍니다. “그런 것보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 줘.” “너 전쟁이 끝났단 걸 아직 모르고 있었군. 그래서 버틴 게로군. 이봐 오늘 아침 방송에 의하면 말이오, 우리 인민군 대는 벌써 그그저께 釜山을 완전 해방시키구 지금 소탕전만 하구 있는 중이오. 그러니까 동무는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나 기 전에 인민군대의 전사가 되어 이때까지 지은 죄를 깨끗 이 씻어 버려야 한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강제노동 아니 면 총살이 있을 뿐이오! 어느 길을 택하겠소? 영광스러운 인 민군대와 강제노동 어느 것을 택하겠소? 잘 생각해서 다시 한 번 말해 보오.” “총살두 할 수 없지만 그 강제노동이란 델 보내 주시오.” “이 새끼! 정말 지독한 악질이다!”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이었읍니다. 이장은 앉 아 있던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며 앞으로 고꾸라졌읍니다. 하 사는 그 등 위에 올라서서 쿵쿵 두 발로 방아를 찧는 것이었 읍니다. 101


“강제노동이란 매일 이런 거다!” 그러다가 다시 일으켜 먼지까지 털어 주면서 걸상에 도 로 앉혀 주는 것이었읍니다. “우리는 강제로 동무를 인민군대에 편입시킬 수도 있소. 그렇지만 그것은 紳士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겠 소. 그러니까 동무 쪽에서 신사적으로 나와 주어야 하겠소!” 이들이 강제로 군복을 입혀서 인민군대에 집어넣으면 어 쩌나, 이장은 이것만이 걱정이었읍니다. 그렇게 하면 의용 군 때처럼 군대 노릇을 해야 했읍니다. 국군이고 인민군이 고 군대에는 진저리가 난 그였읍니다. “빨리 신사적으로 대답해 보오.” “釜山에는 인민군 포로가 十만이나 있다고 들었읍니다.” “이 새끼! 정말 와다닥 총살해 버릴 테다!” “이런 놈에겐 동정을 베풀 필요가 없다. 上部에 보고되 는 대로 총살이다! 갖다 집어넣어!” 그 후도 매일처럼 불리어 나가서 漫談 같은 그런 공갈을 받았읍니다. 듣는 편에서는 만담 같지만 공산 사회에서는 그런 漫談이 그대로 실행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째 되는 날 불리어 나가 보니, 책상 위에 헌 군복 과 총이 놓여 있는데, 그것은 털보 영감의 집 마룻방 밑에 처 넣어 두었던 것이었읍니다. 102


“이게 누구 거지?” “내 겁니다.” “거짓말 마오.” “…” “그 집에 며칠 있었소?” “한 三○ 分 동안 있었을 것입니다.” “닥쳐!” 책상을 치는 것이었읍니다. “동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하고 있소! 그러니 이 총이 동무의 거라는 것도 거짓말이오!” “…” “동무가 왜 그런 거짓말만 잘하게 되었는지 아오? 다 자 본주의 사회에서 젖 먹구 쌀 먹구 교육받았기 때문이오! 그 런 버릇은 당장 청산해야 하오! 알아듣겠소?” “그 노인은 어떻게 되었읍니까?” “걸 알아 뭘 하오? 아니 알려 주지. 炭鑛에 가서 강제노동 하고 있다면 생각이 어떻소?” “무슨 죕니까?” “무슨 죄라니? 그럼 동무는 美帝의 傭兵이 아니었단 말 이오!” “…” 103


“동무를 숨겨 준 죄가 七 년 징역이라면 그 동무는 百 년 징역을 해야 알맞을 게지만 백 년 징역이라는 것이 없으니 까 뭐겠소?” “…” “이것이 마지막 기회요, 悔改하고 애원하면 인민군대의 전사로 받아들일 용의가 아직도 남아 있소.” “어느 길을 골라잡겠소?” “인민공화국에도 그런 데 관한 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 법을 따르겠읍니다.” “그럼 총살이다!” 결국 이장은 J市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넘기어졌읍니다. 捕虜收容所에 들어서는 ‘世界’에서 해방된 것 같았읍니

다. 그것은 숨는 自由, 늘 무엇을 두려워하면서 사람의 눈을 피해야 하는 自由에서의 해방이었읍니다. 自由에서의 自 由, 이장에게 포로수용소란 捕虜라는 구속 이외 아무 구속

도 없는 自由世界였읍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그는 처음 으로 平安을 얻었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며칠 안 가서 그 平安은 깨어져야 했읍니다. 국군 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국군 포로들을 속일 수 는 없었던 것입니다. 轉屬되었다 落伍되었다 하면서 部隊 名을 두셋 댔으나, 번번이 그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던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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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었읍니다. 三八線에서 편입되었던 部隊와는 압록강 가까이까지 갔으면서도, 그 部隊가 어디

에서 어떻게 編成되었으며, 그전에 어느 戰線에서 어떤 전 투를 했는가 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이 막혀 버린 그는 할 수 없이, 실은 하고 義勇軍에 끌려간 데 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經緯를 설명했으나 곧이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결국 그는 빨갱이들이 잠입시켜 놓은 諜者로 몰리고 말았읍니다. 수용소는 埠頭가 가까운 산그늘에 있었읍니다. 폭격에 지붕이 날아가 버린 倉庫 같은 건물이 몇 채 나란히 서 있는 것인데, 二중 三중으로 둘리어 있는 鐵條網이 아니라면 그 저 廢墟의 한 部分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헌 天 幕을 몇 장 이어 대서 이럭저럭 하늘을 가린 그 밑에서 추위

와 굶주림에 露出되어 그날그날을 넘기고 있었읍니다. 捕虜라고 하면 사람 냄새가 느껴지지만 엄밀히 말하면 家畜이었읍니다. 그들이 하루에 하는 일이란, 자는 것과 일

하는 것과 먹는 세 가지뿐이었는데, 잘 때만은 꿈이라는 것 을 꾸기 때문에 人間이지만 일할 땐 나귀, 먹을 땐 돼지였으 니까 家畜으로서의 比重이 더 승했읍니다. 家畜은 가축이 아닌 萬物의 靈長이라고 하는 인간에 의

해서 가축이니까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지만, 이 포로라는 105


가축은 같은 人間에 의해서 가축인 것입니다. 인간이 人間 을 그렇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당하고 있는 쪽에서 그것을 당연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어야 할 것입니다. 人間이 가축이 아니라 家畜 以下로 취급되는 것도 보통

으로 있는 일입니다. 개에게는 아침저녁으로 고깃덩어리를 던져 주면서, 인간인 거지에게는 무우 조각 하나 주는 것도 아까와합니다. 개를 사랑하는 것은 動物愛라는 미덕으로 치지만, 거지를 대문 밖으로 떠밀어 버리는 것은 보통으로 있는 일로 보아 줍니다.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다룰 때는 물론 거기에는 무슨 論 理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떠한 論理도 人間 以上

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人間의 尊嚴性을 짓밟을 수 있는 論理는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人間의 尊嚴性

을 무시하고 짓밟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인간의 尊嚴性도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人類 前史의 ‘人間’이란 ‘人間 侮辱’이었던 것입 니다. 그들은 ‘根本’을 놓치고서 산 것입니다. ‘中心이 없는 圓’,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 그런 圓이 세상에 어디 있을 수 있는 106


가고 語不成說이라 해서 一笑에 붙일 것이지마는 그들이야 말로 ‘中心이 없는 圓’과 같은 語不成의 존재였읍니다. 가령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똑같은 짓을 다른 동물들이 한다면, 畜生이니까 할 수 없군 하고 幸福하게 웃어넘깁니 다. 그렇게 幸福하게 웃어넘길 그런 일을 점잖은 表情으로 열심히 해 내는 것으로 一生을 마친 것이 人間이라는 動物 이었읍니다. 捕虜 生活은 인간이 人間이 아니라는 것을 確 認해 보이는 하나의 示範場이었읍니다.

그러한 생활 가운데서 이장은 또한 스파이로 따돌리어 살아야 했읍니다. 憎惡에 가득 찬 멸시의 눈초리와 鐵條網 의 가시 사이에 끼여 그는 설 자리가 없었읍니다. 몸은 철조 망에 갇혀 있지만, 그의 意識을 에워싸고 있는 가시는 국군 포로들의 눈초리였읍니다. 그는 그 눈초리 속에서 말을 잃 어버렸읍니다. 말을 잃는다는 것은 마음이 돌이 되어 간다 는 것입니다. 李章의 그것은 빨개져 가는 돌이었읍니다. 諜者라는 의심이 풀려 和解의 시선을 피부에 느끼게 되

어도 그의 마음은 굳어진 대로 풀리지 않았읍니다. 그들과 는 담을 쌓고 監視兵들과만 기회 있는 대로 ‘人間的’으로 접 촉하는 것이었읍니다. 하루는 수용소 所長이 그를 불러 갔읍니다. “동무는 다른 포로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데 무슨 까 107


닭이오?” “포로들의 動態를 알고 싶지 않습니까?” “알고 싶소. 무슨 일이오?”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말입니다.” “우리에게 협력해 주겠다는 말이오?” “스파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럼 동무는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바치겠단 말이지요?” “…” “그것이 진정이라면 동무는 여기 포로수용소에서 있을 필요 없소. 석방시켜 주겠소. 무엇이든 원하는 대루 해 주겠 소. 알겠소? 자유를 주겠단 말이오.”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서 그저 스파이를 해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동무가 하는 말은 도무지 알 수 없소. 스파이는 왜 그렇 게 하구 싶다는 거요?” “저들은 나를 스파이라고 했읍니다.” “동무, 그만두오! 여기가 무슨 兒童 수용소인 줄 아오!” 소장은 이렇게 화를 내고 그를 쫓아 버렸읍니다. 소장에게 불리어 갈 때까지는 스파이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장이었읍니다. 쫓겨 나오면서 자기에게 물어보는 것 이었읍니다. 108


“하라고 했더라면 나는 했을까?” 自由와 平等이라는 이름으로 二 年 동안 밀리고 밀고 하

면서 國士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도로 三八線을 중 심으로 하여 休戰이 성립되어 捕虜 交換이 있게 되었을 때, 李章은 마지막 審査에 가서 以北에 남는 길을 취했읍니다.

‘나는 父母를 모르는 私生兒이다. 내가 共產世界를 택

한 것은 이때까지의 世界가 아닌 世界를 살고 싶기 때문이 다’ 상부에 제출하는 自叙傳이라는 것에 이런 말을 썼읍니

다. 그리고 養父母가 공산군에 살해되었다는 것과 의용군 에 끌려갔다는 것까지 있는 그대로 적었고, 學校에 가서 공 부를 다시 하고 싶다고 했읍니다. 대학 시절 化學을 전공했던 이장은 산속에 있는 炭鑛에 보내졌읍니다. 거기서 그에게 주어진 일은 勞務管理였읍니 다. 일하기 싫어하는 鑛夫들을 달래고 협박하고 해서 움직 이게 하는 일입니다. 한 달쯤 지나서 광부들은 그가 冷血動物이 아니라 機械 라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달래거나 협박하는 일은 없고, 모든 일을 旣定事實로 指示할 뿐이었읍니다. 感情이라는 것이 없이 時計 바늘처럼 할 일을 그저 가리킬 뿐입니다. 사 람을 따르지 않는 人間도 기계에는 따르는 법입니다. 냉혈 동물보다 기계 쪽이 실은 더 非人間的이지만 미워하게 되 109


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도 냉혈동물 밑에서보다 機械 옆에서 더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부들은 그를 빨갱 이 같지 않으면서 빨갱이보다 더한 빨갱이라고 수군거렸읍 니다. 所長 이하 간부들도 그를 두려워하게쯤 되었읍니다. 그

들은 은근히 이 捕虜 出身에게서 以南 냄새를 맡아 보려고 했는데, 우선 그가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읍니다. 할 말 을 다 하면 손님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주인처럼 혼자 일하고 있거나 했읍니다. 무엇보다 그 捕虜 出身의 입이 黨 史 같은 것을 줄줄 외어 내는 데는 질리지 않을 수 없었읍니

다. 그 광산에는 인물다운 人物이 없기도 했지만. 그가 없으 면 모든 機能이 움직임을 잃을 것 같게도 느껴졌읍니다. 광산에 온 지도 반년쯤 지나 北國 땅에도 봄빛이 느껴지 는 것 같은 어느 날이었읍니다. 견디다 못해 광부들은 배가 고파서 일할 수 없다고, 作業을 버리고 산그늘에 떼를 지어 앉아 버렸읍니다. 그들을 땅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李章이 할 일이었읍니다. “인민공화국에서는 노동자가 배고플 리 없읍니다.” 밤낮으로 말 같지 않은 말만 들어 온 광부들도 이런 소리 에는 어리둥절해지는 모양이었읍니다. “동무들이 이 광산에 딴 나라를 세울 생각이면 배고파해 110


두 좋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면 가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협인지 진정으로 하는 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읍니 다. 후에 소장은 주모자를 색출해 내라고 호령했읍니다. “주모자는 없읍니다.” “없을 리 없소!” “인민공화국에는 굶주림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니까 주 모자는 없읍니다.” “아니 동무, 내가 동무와 지금 농담하고 있는 줄 아오?” “석 달 후에는 그런 농담두 안 하게 될 거라구 약속했읍 니다.” “석 달 후에 무엇을 어떻게 약속했단 말이오?” “고쳐 짓기로 된 노무자들의 주택을 북쪽 비탈에 옮기구 사택에 딸린 땅과 합쳐서 이 골짜기를 아주 밭으로 만들어 서 감자와 옥수수를 심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입니다.” “동무, 좀 온기가 있는 말이나 하오.” “뭐 말입니까?” “뭐라니? 동무는 사택에 살지 않구 땅바닥에 살구 있는 거요? 우린 뭘 먹구 산단 말요?” “같이 짓는 것입니다. 같이 지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 小兒病的인 이야기는 듣구 있을 시간이 없소!” 111


이장은 그 소아병적인 이야기를 위해서 근 한 달이나 투 쟁이라는 것을 했읍니다. 귀찮아지고 화가 난 소장은 그 문 제를 상부에 보고했읍니다. 열흘쯤 지나서 거기에 대한 회답이 왔는데, 노무자들에 대한 식량은 부족함이 없이 배급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그와 함께 이장은 中央에 소 환되었읍니다.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올라가니, 大學院에 가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읍니다. 해방 전 갑자기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했던 半年을 빼면, 그는 중 학교 때부터 대학을 나올 때까지 딴 책만 읽고 학교 공부란 별로 한 적이 없었읍니다. 그렇던 그가 여기 대학원에 와서 는 들뜬 것처럼 공부에 달라붙은 것입니다. 一 年 지났을 쯤 에는 교수들도 그의 질문에 말이 막히는 일도 있게 되었읍 니다. 그의 그런 學究熱에 제일 놀란 것이 대학 시절의 은사 이기도 했던 鄭 敎授였을 것입니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머 리 속은 흐릿하다고 보았던 李章이었읍니다.

“自叙傳에다는 뭐라고 썼나? 思想 關係…”

“제가 기회주의자였다는 것은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 습니까.” 112


“…” 정 교수는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었읍니다. 연구실에 두 사람만이 남아서 實驗道具 같은 것을 치우고 있었을 때입 니다. 窓밖에서는 가을이 익어 가고 있었읍니다. “이 군은 쏘련 유학을 희망하나?”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이 인민의 나라에서 그것을 원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 “그럼 추천하는 일은 그만두지.” “…” “내가 이상한 질문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 한마디를 가 지고두 문제로 삼자면 삼을 수 있지.” 사실 그랬읍니다. 문제란 먼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 삼으면 있게 되는 것이었읍니다. “선생님 한 가지 묻겠읍니다.” “묻지 않는 것이 좋겠어.” 여전히 딴 일을 하면서 하는 소리였읍니다. “인민공화국에 인민이 어디 있읍니까?” “묻는다는 것은 非經濟的이거든.” “이북의 진리가 以北에서는 통하지 않고 있읍니다.” “광산에서의 일 말이지? 그 대신 여기에 오게 되지 않었 나.” 113


“무슨 대신입니까?” “쏘련은 경제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美國 같은 나라에는 절대로 지지 않어. 모든 思考는 여기서부터 출발시켜야지.” “거짓말로라도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십시오.” “불교에 解脫이라는 말이 있지? 예수교에서는 神은 본다 고 하지만…” “…” “이 군 같으면 그 해탈 이전의 상태를 거짓이라고 할 거 라.” “…” “이 군은 행복한 편이지. 나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서 그것을 깨닫는 데 상당히 시간을 허비했고 출세두 늦었 다.” “…” “공산주의자가 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어. 하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되는 것이고, 하나는 자유주의 교 육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해탈하는 길이다.” “무엇을 해탈합니까?” “神을 보는 것처럼 거짓말을 보고 아주 그것이 되어 버리 면 돼.” “…” 114


“별루 어려운 것이 아니다. 쏘련이 勝利한다는 것을 확 신하면 저절로 되지.” “…” “내가 이 군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구 생각하네.” “…” “이북의 진리가 이북에서 통하게 되면 이북은 없어진다. 이북이 이북이려면 이북의 진리는 이북에서 통하지 않아야 해. 알겠나? 이북이 없어지면 군은 어디로 가겠나? 그러니 까 해탈이다. 자유주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순서가 좀 거꾸 로 되지만 순서쯤 世界革命이라는 大目的에 비하면 電燈 불 앞에 반딧불이야.” “…” “참다운 공산주의자는 의식하고서이건 안 하고서이건 모두 이 해탈이라는 關門을 통과했다. 그러면서도 그랬단 말을 안 하지. 공산주의자들이 단결심이 강한 것은 바로 이 런 데서두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저 ‘토종’ 동무는 그런 共 犯者가 아니란 말일세.” 土種이라는 것은 大學院長의 별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둘째 문제구. 君은 내게 이상한 질문 을 했구, 나는 이 군에게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敎訓을 가 115


르쳐 줬다. 그러니까 내가 출세하면 이 군도 출세하구, 내가 지면 이 군도 埋葬돼. 그러니까 쏘련 유학을 가게 되기 전에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겨 줘야겠네.” “…” “그래서 내일 大會에서 이 군이 先鋒 역할을 맡게 되겠 는데…” 하면서 ‘토종 동무를 ’ 잡을 戰略을 세세히 일러 주는 것이 었읍니다. 대학원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정 교수와 토종 동 무 사이에는 암투가 있었는데, 며칠 전 細胞會議 때 그것이 표면화되었읍니다. 그래서 정 교수는 先手를 써서 내일 있 을 학생 민청 대회에서, 누구를 시켜 교수 사이의 암투를 공 격하는 형식으로 대학원장을 성토하게 해야 했는데, 소련 유학을 미끼로 이장에게 그것을 떠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이 군이 탄광에 도루 가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이고, 黨員으로서의 나의 위치는 ‘解脫’ 같은 것쯤으로 흔들 린다구 생각하면 인식 부족이야.” 이튿날 대회에서 언권을 얻어 가지고 연단에 올라간 李 章은 정 교수와 자기를 告發하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이북의 진리가 이북에서 통하고 있지 않고 있다 고 했읍니다. 정 교수께서는 이북의 진리가 이북에서 통하 게 되면 공산당은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고 했읍니 116


다…” 그 고발의 결과 정 교수는 어느 面 人民委員會의 窓口에 가 앉게 되었고, 이장은 시골 農業學校 교사 發令을 받았읍 니다. 강제노동쯤 예기하고 있었던 이장은 그런 처분에 크 게 감격을 했읍니다. 마음을 다시 한 그의 교사로서의, 또는 당원으로서의 생 활은 그 시골의 標本이 되었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李 章 동무를 따르자 하는 運動이라도 일어날 정도였읍니다.

그쯤 되니 지난날의 告發 事件은 무슨 투쟁 경력이라도 되 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이었읍니다. 一 年 남짓 그렇게 교편생활을 한 그에게 殘務를 정리하

고 평양에 올라오라는 지령이 내려왔읍니다. 사람들은 그가 크게 영전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間諜 敎育이었읍니다. 三 개월 간의 그 교육을 받은 그는 海州에서 어선을 타고

내려와 仁川 근방에 상륙했읍니다. 그리하여 李章은 약 七 년 만에 남한 땅을 다시 디디게 된 것입니다.

여름放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起美는 등의자에 다리 를 괴고 앉아서 잘 읽히어 내려가지지 않는 原書를 뒤적이 117


다가 말고, 무릎으로 손을 가져가나 싶더니 슬며시 스커어 트 자락을 당겨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드러난 하 얀 살결, 그 곡선이 그려 내는 부끄러움에 스스로 도취되려 다 그만 그 密語를 감추어 버리면서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起美였읍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읍니다. “조센노 오나고산또와 오모에 나이와. (조선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오끼미산노 오하다와 혼또니 오끼레이. (기미 씨의 살결은 정말 고와)” 이것은 일본의 어느 오까미상이 한 말인데, 기미의 오빠 인 吳澤富가 들어 가지고 고향에 와서 몇 번이고 되뇌인 것 이어서, 기미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제일 싫었지만 이렇게 혼자 있을 땐 그 살결을 애무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동경에 있는 M學院 영문과에 적을 두고 있는 기미가 한 달 전 무릎까지 올라온 하늘색 스커어트에 斷髮을 하고 크 고 작은 빨간 동그라미가 노랑 바탕에 무늬져 있는 파라솔 이라는 것을 펴 들고 평양驛頭에 내려섰을 때, 바지저고리 나 치마저고리나 할 것 없이 모두들 한번은 발을 멈추고 바 라보고 쳐다보고 하였는데, 그 新式 女性이 누구의 딸인가 를 알아낸 사람은 다시 한 번 눈을 휘둥그린 것입니다. 그러 나 누구보다도 눈알을 휘둥거렸던 것이 오빠인 오택부였을 118


것입니다. 그들 남매는 유별나게 사이가 좋은 것으로 유명했읍니 다. 오빠가 지난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들은 방은 벽 하 나 사이를 두고 달리하였지만 같은 아파아트에서 저녁은 동 생이, 아침은 오빠가 하는 식으로 자취 생활을 했읍니다. 그 러나 저녁을 집에서 먹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밥 짓는 일은 오빠가 도맡은 거나 마찬가지였읍니다. 그뿐 아니라 집에서 식사하는 것도 냄새가 난다 해서 오빠의 방에서 했 읍니다. 그래도 오빠는 불평은커녕 도리어 행복감 같은 것 을 느끼는 듯했읍니다. 그렇게 그는 동생을 좋아했고 아껴 주었읍니다. 그들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愛人 사이인 것처럼 행 세했읍니다. 日本의 젊은 남녀들도 그렇게 하고 다니는 일 이 없는 시절이었는데, 그들은 밤에만이기는 했지만 팔을 끼고 긴자며 신주꾸 같은 번화가를 활보하였읍니다. 처음 그렇게 애인 행세를 하자고 제안한 것은 동생인 기미였읍니 다. 그 대신, 서양 남자들같이 騎士道를 발하여 줄 것을 요 구했읍니다. 세상에 자기 동생만큼 잘생긴 여자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택부는 얼른 그것을 승낙해 가지고, 活動寫 眞 같은 데서 보는 양코배기 남성들이 여자에게 베푸는 시

늉을 내어서 동생을 公主 모시듯 했읍니다. 그러면 기미는 119


그것을 당연한 것인 것처럼 받아들여 가지고, 종을 대하듯 도도하면서도 상냥스럽게 다루는 품이 오빠의 서양 남자 흉 내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어색함이 조금도 없었읍니다. 조선 留學生들 사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일본 사람들로 봤을 땐 여자가 워낙 기품이 있고 세련되어 놔서 손가락질하게 되지 않는 모양이었읍니다. 여자에 비해 남자 쪽은 값진 舶來品으로 온 몸을 차렸지만 천한 구석이 드러 나 있어, 그들을 貴族의 딸과 돈깨나 있는 그 애인쯤으로 봤 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을 캐면 한가지로 白丁의 아들과 딸이 었읍니다. 起美가 오빠를 대하는 시선 속에 어딘지 모르게 멸시에

가까운 가시가 느껴지는 것은, 자기들의 血管에 흐르고 있 는 백정의 피에 대한 嫌惡였는지도 모릅니다. 오빠인데도 자기 방에 들어서려 하면 ‘레이디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상놈이나 할 짓이야요’ 하고 끝끝내 거부하는 것이었 읍니다. 그러면 택부는 그 거부를 흡족하게 생각하는 것이 었읍니다. 남자 취급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美女는 동생인 것보다 애인인 쪽이 더 자랑스 럽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半年 만에 그 起美를 만난 택부는 동생도 아니고 공주도

아니고, 거기에 女子를 발견한 것이었읍니다. 느닷없고 능 120


청스러운 데가 있는 吳澤富도 불룩해진 동생의 앞가슴에 압박감을 느끼고 시선을 망설인 것입니다. 그런데 플랫포옴 에 마중 나온 오빠를 대하는 태도는 몹시도 냉랭했읍니다. “왜 그렇게 쌀쌀하기냐?” “저리 비켜요. 사람들이 보지 않아요!” “보라면 보라지. 그까지 未開人들이 보문 어때?” “난 싫어요.” 집에 돌아와 방에 단둘이 되었을 때 택부는 한쪽 무릎을 꿇면서 두 팔을 벌리는 것이었읍니다. “오! 나의 비너스여, 호수 같은 눈동자에 나팔꽃 같은…” “그만해요! 까마귀가 웃고 있지 않아요!” 어디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정말 들려오기도 했읍니다. 오빠는 화도 나게 되었읍니다. “요오시 와깟다! (응 이제 알았다) 너 애인이 생겼구나?” “애인은 안 생겨두 시집갈 나이는 됐을 거예요.” 기미에게는 애인이 생겨 있었던 것입니다. 떠들썩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던 기미가 가족들이 있는 市內 에 있지 않고, 二○ 里 떨어진 이 果樹園에 와서 방학을 보 내고 있는 것은 白丁의 딸이라는 시선을 느끼기 싫어서이기 도 했지만, 홀로 외롭게 지내는 것이 애인에 대한 도리인 것 같았읍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부정스러운 데가 있다고 보았 121


던 기미였는데, 애인이 생겨서는 자기의 자태를 다른 남자 들의 시선 속에 내놓는 것이 不貞한 일처럼 느껴졌던 것입 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피하고 싶은 것이 오빠 오택부의 시선이었읍니다. 구질구질한 오빠의 그 팔이, 전에 어두운 밤길 같은 데서 허리를 감고 들던 것을 생각하면 그 부분이 不潔해져 있는 것 같기도 했읍니다.

애인인 玄 先生에 비하면 오빠는 정말 졸장부였읍니다. 남자라곤 그 오빠밖에 몰랐던 기미였읍니다. 그래서 남자란 그저 그런 존재려니 해 가지고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았고, 자기를 女王처럼 받들 남자가 필요했고, 장차 남편이 될 사 람은 자기의 발밑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을 그 첫 조건으로 꼽고 있던 기미였읍니다. 그렇던 기미가 현 선생 을 알게 된 후로는 평범한 여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이는 나를 어떻 게 대할까?’ 하는 두려움에 마음이 어두워지기도 하는 것이 었읍니다. 백정의 딸이라지만 엄밀히 말하면 손녀였읍니다. 그렇 지만 아버지도 소년 시절에는 조부의 백정 일을 거들었다니 까 백정의 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代代로 백정을 생업으로 삼아 온 집에 태어난 기미의 祖 父는 日露戰爭 때 일본군에 소 돼지를 잡아 바치는 일을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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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해 가지고 한밑천 단단히 잡은 것입니다. 그의 아들은 그 돈을 가지고 고무신을 만들어 내는 공장을 세워서 벼락부자 가 되었읍니다. “다 앞을 내다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야. 그 당시만 해 두 발에 끌구 다니는 신발을 제조하는 일을 천하게 봤거든, 못난 것들이…” 요즈음도 툭하면 이렇게 先見之明이 있었음을 자랑하는 그 백정의 아들은, 그 돈의 힘을 가지고 보통 사람이었다면 염도 못 낼 어마어마한 야심을 품어, 종내 그 목적을 달성했 던 것입니다. 즉 낙백해 있었지만 몇 代 조상은 平安 監司를 지냈다는 집안의 딸을 온갖 비열한 수단을 다 써서, 그가 스 스로 자랑삼아 하는 말을 빌면 ‘점잖게 약탈하는 ’ 데 성공했 던 것입니다. 그 약탈에서 태어난 것이 택부와 기미였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은 어머니를 닮았다고들 했읍니 다. 발 너머 바깥에서는 발갛게 익어 가는 열매들이, 쭈룩쭈 룩 내리는 빗속에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고 있었읍니다. 집에는 앞마당에 면해 있는 마루에서 콩깍지를 바르고 있는 늙은 식모가 있었을 뿐이었고, 비도 이렇게 오니 시내에서 찾아올 사람도 없을 것 같았읍니다. 얼굴이 홍조되어 오르던 기미는 비밀스러운 듯이 의자에 123


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들창으로 가서 밖을 살펴보고서는 커다란 體鏡을 저만치에 바라보는 자리에 가 섰읍니다. 약 간 떨릴까 하는 손으로 단추를 끄르는가 했더니 훌훌 옷을 벗는 것이었읍니다. 슈미즈까지 벗어 버리니 노랑 빛깔의 수영복에 가려진 하얀 육체가 묵직하게 나타났읍니다. 부끄러운 듯해 하던 육체는 대담해 갔읍니다. 몸을 쭉 뻗 으며 야릇한 포오즈를 취해 봅니다. 눈가에는 자기도 모르 게 웃음이 피었읍니다. 몸을 돌리며 나른해진 손을 머리로 가져가던 기미는 그 만 소리를 질렀읍니다. 쓰러지듯 두 손으로 앞을 가리면서 힐끔 거울 속을 다시 들여다봤읍니다. 거울 속에 비친 들창에는 이미 사내의 두 눈이 보이지 않 았읍니다. 아가씨의 비명 소리에 빗속을 뒷마당으로 뛰어온 식모는 아가씨의 방문이 탕 하고 닫히면서 머리부터 우비를 뒤집어 쓴 사내가 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目擊했고, 들창까지 닫 히는 소리를 또한 들어야 했읍니다. 의자가 어디에 부딪치는 소리, 경대가 넘어지는 소리, 몸 과 몸이 다투는 숨결… 그러나 끝내 그 방에서 비명 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이었읍니다. 124


방 안은 조용해졌읍니다. 아가씨가 지르는 소리가 나기만 하면 뛰어들려고 벼르고 있던 식모는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허위적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하나님 맙시사아’ 하고 비 오는 사과밭 속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읍니다. 그로부터 起美는 시든 꽃이 되었읍니다. 주름이 잡힌 것 은 아니지만 그렇게 매끄럽던 얼굴에도 쭈글쭈글한 그늘이 졌읍니다. 가을바람이 느껴지고 방학은 끝나도 동경에 건너갈 생각 은 없었읍니다. 딸이 임신한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된 것은 나뭇가지에서 落葉이 다 질 무렵이었읍니다.

노발대발한 아버지는 사내놈을 대라고 쥐어박으면서 족 쳤으나, 기미에게는 우선 反應이라는 것이 없었읍니다. 어 머니가 아니었더라면 몇 ‘이 家門을 더럽힌 화냥년!’ 하는 욕 설과 함께 아버지에게 밟혀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는 무슨 가문이 있었나요?” 二○ 몇 년 동안 아내의 無言 옆에서 살아왔으면서, 신

경이 무디어서 그 무언의 蔑視라는 것을 모르고 터덜터덜 살아왔던 아버지도, 어머니의 그 소리에는 약간 질리는 것 이 있었는지 머뭇머뭇하는 것이었읍니다. 이런 말대답 듣기 125


는 처음이기도 했읍니다. “그 말 다시 한 번 말해 봐!” “내 딸을 화냥년이라구 두 번 말아요.” “뭐 어쩌구 어째…” “아버지, 진정하십시오.” 언제 밖에 와 있었는지 택부가 뛰어 들어와서 아버지를 안아 들다시피 해서 끌고 나가는 것이었읍니다.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제 생각 같아서는 식모가 혹시 알지 않을까 합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식모가 나간 것이 바로 그때쯤 된 것 같습니다.” “그때쯤이란 무슨 때쯤이야?” “저 기미가 그것을 당한 그거 말입니다.” “정말이냐? 지금 어디 가 있어!” “제가 압니다. 제가 가서 데려오겠읍니다.” 먼 친척이 되기도 한다는 그 늙은 식모는 그런 일이 있은 날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튿날 주인 영감 앞에 불리어 나와, 처음에는 머뭇머뭇 하면서 모른다고 하던 그 노파의 입에서는 孟八이라는 이름 이 나왔읍니다. 과수원지기로 있는 젊은이 말입니다. 머슴 치고는 훤하게 생긴 편이고, 멋도 부릴 줄 알아서 시골 색시 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는 바람둥이였읍니다. 126


아버지와 아들은 그를 새끼줄로 묶어 가지고 사과밭 깊 숙이 끌고 들어가서, 치고 차고 하면서 형편없이 매질했읍 니다. 얼굴이 퉁퉁 부은 맹팔의 입에서는 결국, ‘잘못했읍니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읍니다. “네가 했단 말이지?” 택부는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따졌읍니다. “응? 바른대루 대라!” “…” “했다구만 하면 괘씸하지만 내 매부가 되는 셈이다. 일생 먹구살 만한 땅을 사 줄 테니 바른 대루만 대라!” “네가 미쳤니!” 옆에서 아버지가 펄쩍 뛰었읍니다. “죽여두 시원치 않는 놈에게 땅이라구, 정신이 빠졌느 냐!” “아버지, 생각해 보십시오. 죽여 버릴 수 있다면 오빠인 제가 벌써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하면서 거기 무릎을 꿇고 있는 孟八의 옆구리를 걷어차 는 것이었읍니다. “그렇다구 경찰에 넘길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 127


“그러니 이놈의 입을 막구 소문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일 놈 같으니!” 아버지는 죽어라 하고 머슴을 차고 밟고 하는 것이었읍 니다. 澤富는 죽는 소리를 내면서 딩구는 맹팔의 목덜미를 잡

아 일으켰읍니다. “우리가 한 말을 들었지?” “…” “난 거짓말 안 한다. 어때? 네가 한 짓이지? 다 알구 있지 만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다. 안 하면 며칠이구 여기 다 묶어 두고 족칠 테다!” “네…” “네가 뭐냐? 했다는 말이냐?” “네 바루 제가 했는뎁쇼.” 아버지와 아들은 달려들어서 다시 한 번 죽도록 차고 때 리고 밟고 한 다음에,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三百 圓이라는 대금을 쥐어서 고향인 南道로 쫓아냈읍니

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을 알게 되자 起美는 팔에 있는 動脈을 면도칼로 끊었읍니다. 그러나 다 죽기 전에 감시를 게을리 128


하지 않고 있었던 어머니에게 발견되었읍니다. “그대루 죽게 내버려 두는 게 그 앨 위하는 길이 아니겠 읍니까?”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썩 나가거라!” 어머니에게 그렇게 퇴박을 맞은 택부는 아버지에게 가 서, 會社에 있는 가난한 젊은이를 아무거나 하나 골라 한시 바삐 기미를 결혼시키는 것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건의했읍 니다. 아버지는 크게 찬성했으나 기미를 설복시켜 낼 수는 없 었읍니다. “오늘부터 넌 내 딸이 아니다! 죽든지 살든지 네 마음대 로 해라!” “나는 이 애 어머니니까 여기서 같이 살겠소.” “좋아! 그 대신 난 절대로 부르러 안 올 테니까 단단히 알 아 둬!”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 과수원에 남아 딸과 같이 살게 되 었읍니다. 겨울방학이 되어 애인인 玄 氏가 찾아왔을 때, 기미는 만 나 주지 않았읍니다. 美術學校에 다니고 있는 그 청년은 市 內의 여관에 묵으면서 일주일이나 과수원을 찾았으나, 끝내

기미를 만나 보지 못하고 서울인 자기 집으로 돌아갔읍니 129


다. 妓生을 집에 들여놓고 살던 아버지는 이듬해 봄 中風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고, 기생첩도 달아나 버렸읍니다. 성화 처럼 어머니를 돌아오라고 재촉이었읍니다. 며칟날 몇 時 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당장 이혼이라고 협박하던 아버지는 끝에 가서는, 나는 그래두 남편이 아니냐, 어떻게 무정할 수 있느냐고 애원 애원이었읍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기미는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가 죽 어 버린다고 했읍니다. 어머니는 딸을 자기의 친척이 살고 있는 방골이란 마을 에 보내기로 했읍니다. “꼭 부탁이다. 성급한 생각을 말아라. 나는 이 세상에 너 밖에 바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너두 알고 있을 게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아이는 낳겠어요.” 생각 끝에 그렇게 마음을 잡은 것 같은, 底邊이 느껴지는 소리였읍니다. “그리구서 修道院에 들어가겠어요.” 검은 치마에 흰 무명 저고리를 입고 방골 마을에 간 기미 는 修女와 같은 생활을 하였읍니다. 따로 차려 주는 밥상을 물려 놓고, 그 집 식구가 먹는 같은 보리밥과 산나물로 끼니 130


를 메우고, 성경책을 읽을 때가 아니면 일거리를 달래서, 그 집 일을 돕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읍니다. 전에 보이던 우울한 그림자도 얼굴에서 가시고 건강한 빛이 떠돌았읍니 다. 그러나 생기가 없는 건강이었읍니다. 봄방학이 되어 그리로 찾아온 玄 氏를 발견했을 때, 기미 의 그 얼굴에는 젊은 피가 퍼져 오른 듯했으나 순간이고, 생 기 없는 건강으로 덮어 버리면서 방으로 맞아들이는 것이었 읍니다. 그러나 그 姿勢도 오래 지탱할 수 없었던지 꼭 닫은 방 안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읍니다. ‘남자가 ’ 찾아온 것으로 알고 호기심을 못 이겨 그 문가로 숨어 가서 몰래 엿듣는 이웃 아낙네의 귀에는 생각한 것과 는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그 아이는 저의 아이와 같습니다… 몇 번이나 마음속에 서 기미 씨를 간음했는지 모르니까요…” 그런 말을 남이 엿들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 남자는 그 집 사람에게 자기가 그 배 안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인 것같 이 말을 하면서, 解產을 하면 본인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電

報를 쳐 달라고 동경에 있는 住所까지 적어 놓고 돌아간 것

이었읍니다. 해산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던 어느 날, 며칠을 두고 비 131


가 쏟아지던 하늘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천둥이 퉁! 퉁! 하고 울리더니, 그중 벼락 하나가 마당 구석에 서 있는 느티나무에 떨어졌읍니다. 火藥이 터지는 것처럼 하얀 연기가 풀썩 하더니, 한 아름

이나 되는 줄기 하나가 마디로부터 동강이 나면서 넘어지는 데, 때마침 몰아치는 바람에 안겨 집채 쪽으로 쓰러진 것입 니다. 그러나 사이가 떠 있어서 잔가지가 기와를 몇 장 튀겨 냈을 뿐, 지붕은 별로 상한 데가 없었읍니다. 천만다행이라고 모두들 숨을 돌려 쥐려는데 난데없이 갓 난애 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읍니다. 사람들은 미처 생각하 지 못하고 그 울음소리가 넘어진 나뭇가지 속에서 났는가 했읍니다. 사람들이 그 방문을 열어제치고 봤을 때 거기는 피바다 였읍니다. 起美는 창호지를 뚫고 들어간 그다지 굵지도 않 는 가지에 가슴을 찔렸던 것이고, 그 치마폭 속에서는 탯줄 도 끊어지지 않은 갓난애가 이 세상에의 誕生을 울부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미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날 밤 이 세상과 관계를 끊었읍니다. 이튿날 전보를 받고 오빠가 뛰어왔읍니다. 病이 나아서 좀 기동을 하게 된 아버지는 기생을 데리고 며칠 전부터 어 132


느 溫泉으로 가 없었고, 어머니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던 것 입니다. 그는 동생의 시체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이부터 찾는 것이었읍니다. 아이는 漢醫인지 신의인지 알 수 없는 허술 한 병원에서 맡고 있었읍니다. 그 병원으로 찾아간 택부는 간호부를 겸하고 있는 의사 의 부인이 잠시 자리를 떠서 방 안에 아무도 없이 되었을 때, 이불을 갓난애의 얼굴에 가져가더니 그대로 덮어서 꾹꾹 누 르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는데 의사가 들어왔읍니다. 그 의사를 힐끔 쳐다봤으면서도 그는 손을 놓을까 하지 않고 더욱 힘을 주는 것이었읍니다. 의사가 달려들어 얼굴 을 갈겼는데도 그것을 막을 겨를을 찾지 않는 것이었읍니 다. 엉덩방아를 찧었던 몸을 일으켜 다시 어린 것에게 달려 들었읍니다. 기어코 죽여 놓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미쳤나!” “이 애 장래를 위해서, 의사 선생, 죽여 버려야 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못 본 체만 해!” “끝끝내 비켜서지 않으면 순사를 부르겠소! 이 애는 法 아래에 있는 것이오!” “법이 다 뭐요! 아니 의사 선생, 법은 사생아를 호적에 올 려 주지 않는단 말이오!” 133


“난 시골에 살고 있지만 의사요.” “의사 선생! 제발 못 본 체만 해 주오. 에미두 죽어 버렸 는데 누가 키운단 말이오! 二백 원 아니 三백 원까지 드릴 테니 눈만 감아 주오! 이렇게 부탁이오…” “알겠소. 알았으니 진정하시오. 내 말 듣구 죽여두 늦지 않을 테니…” “…?” “자 이리로 좀 오시오.” 의사는 그를 걸상으로 끌고 가서 앉혀 놓는 것입니다. “저 아이의 아버지는 정말 누군지 모르오?” “맹세코 모르오!” “아까 얼마라구 했던가, 그 三백 원과 함께 아이를 아주 버릴 생각은 없소?” “어떻게라구?” “내 아는 사람에 나이는 서른도 안 되었지만 어쨌든 아이 가 없는 부부가 있는데 어떻겠소? 양육비를 붙여서 깨끗이 인연을 끊어 버리는 것이 피차 다행한 일 같은데…” “…” 죽여 버리지 못하게 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쪽에서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읍니다. “그 사람 어디서 뭘 하고 있소?” 134


“지금은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놀고 있지만 한 밑천 쥐면 크게 뭘 할 사람이오.” “교환 조건을 들어주면 생각해 보겠소.” “어떤 것이오?” “무슨 일인데…” “먼 데 가서 살아 달라는 거요. 만주나 함경도쯤에 아이 를 데리고 가겠다면 이사값두 내가 따루 내겠소. 저 애는 우 리 가문의 수치니까 절대루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단 말이 오.” “알겠소. 원래가 떠돌아다니던 사람이니, 만주는 몰라두 그 점은 내가 책임지겠으니 안심하시오.” “또 한 가지 있소. 영원히 눈에 띄지 않게끔 말이오, 文書 를 받아 둬야 하겠소. 다시 돈 달라든지 하는 일은 절대로 없 겠다는 서약서를 받아야 하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그리하여 그 갓난아이는 李道武라는 그 사람에게 인도 되었고, 李章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의 호적에 올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장이 알아낸 李章의 출생 經緯였읍니다. 그의 마음에는 이러하게 비쳐져 있는 것이었읍니다. 어떻게 보면 그가 以北 땅에 남은 것은 방골 마을에 가서 135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을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었는데도, 그가 그 마을에 끝내 찾아간 것은 농업학교 선생으로 있었던 여름이었읍니다. 방골 마을 北쪽 山에 있는 그 여자의 무덤에는 책가방만 한 碑石이 서 있었고, 단지 ‘吳娘之墓’라는 네 글자가 三○ 年 風霜에 씻기고 씻기어서 저녁 바람에 희미했는데 이름

모를 들꽃이 한두 송이 거기에 머리를 자꾸 쪼아리고 있을 뿐이었읍니다. 언제까지 번들번들해져서 도무지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 던 李章의 두 눈에서는 마치 생각난 것처럼 눈물이 방울방 울 맺더니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었읍니다. 그의 가슴속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간직되어 있었으리라고는 그 자신도 몰 랐을 것입니다. 어머니라는 그 女子가 불쌍하고 미운 눈물이었읍니다. 왜 끝내 자기를 지키지 못했단 말인가, 하는 한탄과 輕蔑의 눈물이기도 했읍니다. 그것은 또한 倫姬에게 대한 그리움 과 책망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눈물 속에서 그가 맹세한 것은 정 교수가 말했던 解脫 로 완전한 共犯者가 되겠다는 것과 女子를 가까이하지 않 겠다는 두 가지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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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章 李章의 그런 맹세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마담 바타플라이

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南韓에 나온 그는 처음부터 서울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

었읍니다. 옷차림을 말쑥하게 해 가지고, 서울 자기가 살던 동네에 찾아간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 전라 도인 K市에 있는 대학에 부임해 가는 길이라고 했읍니다. 義勇軍에서 도망하여 시골에 숨어 있다가, 一·四 後退 때

부산에 가서 그대로 日本으로 건너갔다고 하는 그의 말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없었읍니다. 빨갱이에게 父母를 사살당 한 아들이 공산당의 間諜이 되어 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읍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들어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家庭을 가지게 될 때까지 그대로 管理를 잘해 달라고 부탁

비슷하게 말을 해 두고, K市에 가서 半年가량 교편을 잡으 면서 刊行物 같은 것을 통해 南韓의 사정을 파악한 다음, 다 시 서울에 올라왔던 것입니다. 서울에는 대학에 講座가 마련되어 있었읍니다. 그의 임 무는 학생을 赤化시켜 포섭하는 비교적 한가로운 일이었읍 137


니다. 간첩 교육을 받을 때 배운 것 중에는 自然科學 계통의 講義와 어떻게 결부시켜서 社會主義를 선전할 것인가 하는

방법과 함께,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人氣를 끌 수 있는가 하 는 기술에 관한 것도 있었읍니다. “동무들에게 南半部는 하나의 舞臺라는 것을 잊지 말 것 이며, 동무는 그 무대에 出演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단 말 이오. 잠을 잘 때두 말이오. 알겠소? 배우라는 것은 個性이 없소. 자기 개성을 불살러 버리구서 아주 作中人物이 되어 야 하오. 동무는 世界革命이라는 大심포니의 한 콩나물이 란 말이오. 더군다나 학교 선생은 人格보다 연기가 필요한 게요. 그렇다구 촌띠기처럼 拍手갈채를 바래서는 안 되오. 꼬리는 있어야 하지만 너무 길면 밟힐 우려두 있단 걸 알아 야 하오. 학생들의 마음을 은근하게 사로잡아야 하오. 여기 서 배워 준 것은 완전한 것이니 그대로만 나가서 하오.” 그는 기계처럼 배운 要領대로 했읍니다. 元素의 이름을 勞動이니 資本이니 正義니 하는 말로, 化學作用을 止揚, 搾取, 恐慌 따위로 나타내기도 하고, 分子式의 전개를 社會 發展에 비유하는 등 해서 재미있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때

로는 일부러 틀려 놓고 솔직히 그것을 시인합니다. 마음이 틔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 주면서 그보다 더 어려운 것 을 간단히 풀이해 보임으로써, 내가 시간 중에 여러분에게 138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내 實力으로 볼 땐 氷山의 一角에 지 나지 않는다는 것을 풍기는 演技도 적당히 부리는 것입니 다. 매일 밤 밤늦게까지 열심히 짜내고 있는 그의 敎授案이 란 그런 꼭둑각시 놀음의 進行圖인 것입니다. 그의 그런 精 力을 探究에 돌린다면 방대한 論文이 생산되어 나왔을 것

입니다. 그렇게 다듬어 낸 진행도에 따라 연기를 하는 것이 니까, 학생들의 인기가 모여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을 안 내고 웃지도 않고 그러면서 친절하고 진지하니까, 인기를 지나 崇拜의 대상이 되었대도 무리가 아니었읍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모여 서 있고, 모여 앉아 있었읍니다. 그럴 때는 대개 전공이 아닌 人文 方面의 문제 가 話題에 오르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방면의 講 座를 맡고 있는 敎授들의 講義 內容보다도 더 재치가 있고,

깊이가 있어 보였읍니다. 그리고 讀書家로 통하는 그가 교 수실 같은 데서 읽고 있는 것은 藝術과 哲學에 관한 서적이 었는데, 학생들의 눈에 열 권 읽은 것으로 보였다면 정말 읽 은 것은 한두 권밖에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이 알 까닭이 없었 읍니다. 그의 인기는 이런 詐欺와 演技의 산물이었읍니다. 그렇던 그의 인기가 一 년쯤 지나서부터는 내려가기 시 작한 것입니다. 139


“저로 볼 땐 별로 달라진 데가 없다구 생각합니다.” “그럼 작년의 이 선생과 요즈음의 이 선생이 같단 말이 오!” 金 社長은 소파에 깊숙이 파묻었던 자세를 세우면서 어

성을 높이는 것이었읍니다. “그렇다면 밑천이 드러난 거겠지요.” “겠지요? 그게 이 선생의 현재 姿勢요?” “믿어 주지 않으니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지 않습니 까?” “밑천이 드러났다구 자기로두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 으란 말이오!” “…” “그리구 그 밑천이란 게 뭐요? 설명을 해 주어야 하겠소.” “배우로서의 밑천입니다.” “그런 소리는 敎養이 부족하기 때문이오!” “…” “내가 이렇게 집에까지 찾아온 의미는 알았으리라고 생 각하오.” 훌쩍 일어서는 것이었읍니다. “召喚당하기 싫으면 잘 연구해 보오.” 仁川에 상륙한 이래, 그의 指示에 따라 움직였고 대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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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를 미리 마련해 놓은 것도 이 김 사장이라는 동무였읍 니다. “소환이란 말은 노파심에서 한 말이니 농담으로 들어 두 구…” 자리를 박차듯 문으로 갔던 김 사장은 돌아서서 이렇게 어성을 낮추는 것이었읍니다. “이 선생, 동무는 이 남반부에 交換교수로 와 있는 게 아 니구 工作員으로 와 있소. 그러니 나는 이 선생의 일거일동 을 알고 있어야 報告두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소?” 빙그레 웃어 보이기까지 하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읍니 다. 요즈음 학생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이장이 모를 리 없읍니다. 표면으로는 태연해 하고 있지만 늘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읍니다. 그것은 스스로 앉은 바늘 방석이었읍니다. 학생들이 李 敎授를 再評價해서 보게 된 것은 그가 窓밖 으로 침을 탁 하고 뱉어 버렸을 때부터였을 것입니다. 그렇 게 침을 뱉고 나서 ‘그러니까 말이야…’ 하면서 흑판으로 돌 아가 다시 計算 풀이를 하는 그의 등을 앞에 놓고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읍니다. 그렇게 알고서 보니 이 교수는 그다지, 교양도 교양이지 141


만 실력도 그렇게 있는 편이 못 되었읍니다. 잘못 틀리게 가 르쳐 주고 학생들에게 指摘받고서도 한참 동안이나 우기다 가, ‘원숭이두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가 있지’ 입으로는 능청 을 부리면서도 얼굴은 홍당무가 되는 것이었읍니다. 前 學 年度에 그의 강의를 받은 상급생이나 선배들의 말도 있었고

해서, 學年 初 두어 달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던 학생들도 여 름방학이 끝나 二學期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不 信을 나타낼 줄 알게 되었고, 實力이 그렇게 없는 편은 아니

니까 배울 거나 배우자, 하게쯤 되었다고 할까, 하여간 애매 한 존재가 되어 버렸읍니다. 그런데 본인은 여전히 자신만 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幸福한 爲人’이라고 비웃는 학생도 있었읍니다. 모여 서고, 모여 앉는 학생의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되었읍니다. 따라서 讀書도 없어졌고, ‘꼭둑각시 進行 圖’도 짜낼 필요가 없었읍니다.

그가 南韓에 와서 발견한 것은 共產主義라는 말은 있어

도 左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된 사실입니다. 大學도 事 變 전, 자기가 다니고 있을 때는 좌익 一色이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회가 그렇게 부패했는데도 ‘反共’이란 말까지 遺物로 취급되어 있는 것이었읍니다. 公式이 거꾸 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社會가 부패하면 人民은 공산 주의로 쏠리는 것이 법인데, 事變을 겪은 남한에서는 반대 142


로 공산주의가 사회를 부패시키고 있는 役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共產主義보다는 낫다 해서 그 부패를 견디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굶어서 피골이 상접한 노동자끼리 공 산주의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슬슬 피해 버리는 것입니 다. 그러나 자기는 觀客이 없는 무대에 나선 배우와 같았던 것입니다. 관객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생들도 가만히 살 펴보면, 그들은 歷史 밖에서 호흡하고 있는 理想主義者에 지나지 않았읍니다. 그들의 머리 속에 그려져 있는 공산주

의는 百 年 後의 공산주의였고, 그 백 년 후에는 ‘共產主義’ 라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 러면서 未來는 우리 편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싶어 하는 것 이었읍니다. 그래서 중국 땅에는 蔣介石이 아니라 모택동 의 銅像이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時間이라는 것은 흘러 왔다가 흘러가는 것이어서 장개석의 동상은 이미 서 있는 것이고, 毛澤東 다음에는 또 다른 누구의 동상이 선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銅像은 過去이지 미래가 아니라는 것을 모 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主義’라는 것은 새로 왔을 때, 바꾸어 말하면 無力했을 때만 眞理이고, 矛盾과 罪惡을 뒤따르게 하지 않은 權力은 아직껏 없었다는 歷史의 條件 이 현재의 共產主義에도 작용하고 있는 사실에 눈을 가리 143


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시즘만은 例外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例外라 고 할 수 있는 權利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金科玉 條로 삼고 있는 또 마르크시즘을 가능케 한 辨證法에는 例 外가 없고 停止도 없는 것이다. 그 歷史的 使命을 다한 오

늘날의 공산주의는 資本主義의 모순 부패를 牽制하는 의미 에 있어서, 善을 일깨우고 善을 강요하는 것 같은 否定的인 ‘惡’的 存在로서만 그 存在 理由가 있다. 李章이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읍니다.

이 ‘惡’的인 存在가 되는 것에 生의 意義를 느끼는 者라

면 共產主義者가 되어라. 이 나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이러한 견해는 남한에 와서 새삼 스럽게 느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자가 될 때의 그 出發點 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悲願, 現實逃避였고, 禁慾主義였읍니다. 금욕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感覺의 門을 닫고 感情을 枯渴시키는 일입니다. 捕

虜收容所에서 共產世界로 ‘轉屬’을 할 때 그의 感覺의 門에

는 그물이 쳐진 것이고, 그것이 吳娘之墓를 거치는 사이에 그 그물코가 배어져서, 間諜이 되어 월남할 쯤엔 두꺼운 帳 幕이 된 것이었읍니다.

무겁게 드리워졌던 그 帳幕에 하루는 바람이 휘몰아쳤 144


던 것이고, 그래서 헤쳐진 그 장막 사이로 그만 보게 된 마담 바타플라이의 肉體에 그의 시선은 그슬러지게 되었던 것입 니다. 그는 정말 그것은 처음부터 바람 때문이라고 했읍니다. 한 달쯤 있으면 여름放學이 되는 어느 날의 일이었읍니 다. 길 가다가 李章은 전봇대에 붙어 있는 어떤 個人展 포스 터를 보게 되었읍니다. 그런 것에 눈이 갈 이장이 아니었지 만, 윗귀가 떨어져 드리워 있던 포스터를 바람이 제자리로 몰아쳐 놓는 매운 소리에, 그 앞을 지나다가 얼굴을 그리로 돌린 그의 눈에 忘却 속에 있던 姓名 석 자가 비쳐 든 것입 니다.

얼마 후 그는 그 個人展이 열리고 있는 S백화점 畫廊에

찾아간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玄勝雨라고 하는 그 畫家는 마흔댓으로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계란 모양으로 기룸한 얼굴에 윗수염을 기른 中年이었읍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 이어서인지 여남은 명 되는 관람객이 기웃거리고 있을 정도 이고, 빽빽이 걸어 놓은 畫幅들에 비해 장내는 퍽 한산해 보 였읍니다. “여기 그림은 파는 겁니까?” “뭐에 쓰려구?” “…” 145


“내 그림은 술집이나 노인 방에 걸어 두기에 알맞는다는 것을 모르오? 선생 같은 현대인은 抽象化라구 하는 초현대 적인 걸 갖다 걸어 놓아야 격에 맞소.” 이장은 말하기 쉬워졌읍니다. “팔리지 않는 것은 너무 아름답기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 다.” “천만에. 추상화라는 것이 그게 팔리는 줄 아시오? 사 가 는 사람두 그것을 보는 줄 아오? 멋두 모르구 걸어 놓구 구 경하는 거지. 써커스 구경처럼.” “현대가 써커스니까 그쪽이 더 寫實的인지두 모르지요.” “그 말은 저쪽 편을 들어 하는 말이오? 농담으로 한 말이 오?” “저두 잘 모르겠읍니다.” “그럼 왜 내 그림을 사겠다는 거요?” “실은 그림을 살 만한 여유도 취미도 없읍니다.” “희롱하려는 것 같지도 않은데…” “친척에 그림 그리는 분이 안 계십니까?” “왜 내가 그렇게 흥미의 대상이 되어야 하오?” “화가의 세계가 어떤가 알고 싶어서요.” “화가의 세계라면…” 入口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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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抽象派와, 누가 말 엉덩이에 매달리는 파리라고 한 評論家라는 예술가들이 나타났으니 소개해 드리지. 저 들이야말로 참다운 現代的 예술가, 즉 써커스쟁이들이거 든.” “아니 좋습니다.” 스파이는 쓸데없는 사람을 顔面으로 가지지 말아야 합 니다. “어디에 잘 나가십니까? 가끔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나야 만나기 쉽지. 세 時쯤이면 요 길 건너 흑나비 다방 이 내 집이라면 매담이 좋아두 안 하구 싫어두 안 하는 그런 정도이니까…” 이삼 일 후 李章은 그 다방에 나가 보았읍니다. 그럴싸하 게 꾸며 놓은 다방이었읍니다. 이쯤 되면 다방도 물장사가 아니라, 취미 아니면 企業이 라고 해야 할 것 같았읍니다. 한가운데에 噴水가 솟는 못이 있고, 거기에 실개천 같은 물이 굽이굽이 흘러들어서는, 흘러 나가고 있는데, 높다란 소철나무 따위가 바닥에 아주 뿌리를 박고 여기저기에 서 있는 것이 지붕이 있을 뿐인 庭園과 같았읍니다. 한쪽 벽은 옛날 埃及의 벽화를 흉내 내서 훤한데, 반대편 은 짙게 회색 칠을 한 벽에 칙칙한 抽象畫가 커다란 것들이 147


무질서할 정도로 되는 대로 걸려 있어서, 그 사이에 앉아 있 노라면 무슨 溪谷에 들어선 것 같았읍니다. 단골 같은 얼굴들을 해 가지고 묵직한 의자에 파묻혀 있 는 손님들의 사이사이를, 어떻게 훈련을 시켰는지 같은 옷 차림을 한 레지들이 고개를 쳐들고 또박또박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살아 있는 마네킨 같았읍니다.

세 時쯤이면 으례 나와 있는 것같이 말했던 玄 畫伯은 세

時 半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문 쪽을 향해서 앉아

지키고 있던 이장은 어지간히 지쳤읍니다. 속이 이상하게 메슥메슥해졌읍니다. 建物의 구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화장실은 방향이 몰라

질 정도로 꼬불꼬불한 복도 끝에 있었읍니다. 거기서 나오는 길에서입니다. 한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 는데, 그저 壁인 줄 알았던 좁다란 문짝이 바람에 안겨 휙 하 고 열린 것입니다. 아담하게 꾸며 놓은 그 조그만 방에 무심 결에 視線을 돌려놓았던 이장은 숨이 막혀 버렸읍니다.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읍니다. 걸상에 한 다리를 올려놓 은 풍만한 肉體는, 곡선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살에 발라 붙은 검정색 그물이 발끝에서부터 가슴까지를 가리었 다면 가리었달 수 있는 그런 裸體였읍니다. “닫아요!” 148


힐끔 돌아보았다가, 숨을 데는 없고 그렇다고 옷을 주워 가리는 시늉을 하는 것도 화가 나고 해서 어쨌든 全裸는 아 니니, 그대로 등을 댄 채 버티고서 지르는 소리였읍니다. 안쪽으로 뒷걸음쳤던 이장은 전기에 닿은 것처럼 얼른 문을 닫고, 도망치듯 복도를 빠져 그대로 다방에서 나왔읍 니다. 마도로스파이프를 문 현 화백이 유유히 걸어오고 있는 것을 만났읍니다. “노형은 칸트學派군…” 팔뚝시계를 쳐들고 보는 것입니다. “세 시 사십팔 분 오 초, 나두 이렇게 시계 볼 줄은 알지.” “아니 저…” “自由는 時間 밖에 있고, 더더구나 말이오, 제일 만만해 보이는 시간이래두 無視 못하면 이 땅에서는 예술가로서의 프라이드를 내세울 구석이 없거든…” 그의 뒤를 따라 다방에 다시 들어가면서 이장은, 오늘은 이대로 돌아갔더라면 싶어 화백을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얄궂게 생각되었으나, 그를 그렇게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자 기는 다시는 이 黑나비 茶房을 찾아들지 못하리라는 생각 도 해 보는 것이었읍니다. “이 다방 感想이 어떻소?” 149


화백은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만족한 표정이었읍니 다. “現代의 뒷골목을 안 느끼오? 이 벽은 古代구 저 벽은 미 래구.” 이장은 기운을 좀 내야 하겠다고 했읍니다. “추상화가 미래라는 것은 인정하시는군요.” “인정? 外國 通信에 의하면 그렇단 말이오.” “우리에게는 외국 통신이겠지만 그들에게는 국내 소식 이 아니겠읍니까?” “외국과 우리는 다르오.” “寫實主義라는 것도 외국 통신의 時節이 있지 않았읍니 까?”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종이 한 장의 차이거든.” “사실주의와 抽象派는 외국의 것과 우리의 것이라는 差 이기도 하겠지만, 새것과 낡은 것의 차도 되는 것이 아니겠 읍니까. 그렇다고 해서 새것이 더 훌륭하다거나 더 진실이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百 年 후에 가서 보면 다 같 은 碑石이겠으니까요.” 그 뒷벽에 넓이가 한 발이나 되는 꺼먼 나비가 새겨져 있 는 카운터에 아까 그 여자가 나타났읍니다. 그래서 이장은 뭐라고 쉬지 않고 지껄여야 했읍니다. 150


“사실주의에도 사실주의의 프라이드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주의자의 後退性은 寫實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새것을 비웃고 비방하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새것들이 寫實을 비웃는 것은 前進性이구.” “그들에게는 그 權利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노형의 논리는 참으로 써커스的이야. 요전에 추상화는 써커스라구 했지?” “그래두 그 써커스에는 現代의 眞實이 있는 것 같습니 다.” “하아, 현대의 진실이…” “거기서 무슨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無意識의 破片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는…”

“騷音이겠지. 調和에는 소음이 없으니까.” “조화는 하나의 죽음의 상태가 아닐까요?” “美가 죽음이란 말이군.”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럴지두 모른다…” 말이 중단된 것은 마담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기도 했읍 니다. “여자는 참말로 카멜레온인데. 오늘은 또 九重深處의 공 주가 되었군.” 151


짙은 다갈색 치마저고리도 화려하게 어울리는 얼굴이었 읍니다. “이분두 그림 그리시나요?” 그 소리에 이장은 이마를 들었읍니다. 오만하게 굽어보 는 그 눈매와 시선이 부딪쳤을 때 이장은 피가 파리해지는 것을 느꼈읍니다. 그 눈동자 속에 倫姬의 陰影을 느낀 것입 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의 윤곽도 어딘지 비슷한 데가 있다 고 했읍니다. “그림쟁이가 아니구 이장 씨라구 아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수구, 이 매담은…” “새삼스럽게 소개는 필요없어요.” “아하, 그러문…” “애들의 말을 들으니 찻값도 안 내구 도망치듯 나가시더 래요.” “지금은 그런 찻값이 문제가 아니구, 매담을 장안에서 一 등 가는 시체라구 했단 걸 아시오?” “제가요? 제가 시체 같더라구요!” “이 선생의 學說에 의하면 美는 죽음의 상태라니까 너무 화려해지지 않는 것이 保健에두 좋겠소.” “정말 그렇게 말했나요?” 이장에게 묻는 말이었읍니다. 152


이장은 머리를 숙이고 묵묵했읍니다. “저는 입술이 금붕어 같은 분의 찻값은 받지 않는 것이 취미얘요.” 새침해져서 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어때요. 꽤 교양이 있어 보이지요? 사실 교양은 있지. 그 런데 무식하단 말이요. 형편이 없는 것을 모르구 있거든. 바 루 지난봄이니까 본인의 말을 그대루 믿는다 해두 스물아홉 인데, 달나라에서라도 놀러 온 旅行家처럼 ‘선생님 地球가 빙글빙글 돈다는 걸 아세요’ 했더란 말이오. 그리구서, ‘선생 님도 아시구 계셨어요’ 하는 것이 결단코 농담이 아니란 말 이오. 농담이면 더 유치하거든. 그리구서 하는 말이 더 걸작 이오. ‘어렸을 때 돈다는 말 듣기는 들었어두 아무리 봐두 도 는 것이 아니어서 무슨 비유로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라구 ’ . 그래 가지구 比喩란 말은 알구 있으니 순서가 거꾸루가 아 니오? 모든 게 거꾸루란 말이오. 이 다방 장치는 전문가들두 약간 머리를 짜낼 만한 건데 누가 고안한 겐 줄 아오? 埃及 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어디에 붙어 있는 건지두 모 르구, 추상이 뭐구 具象이 뭐구 알 까닭이 없는 저 마담 바 타플라이 女史가 적당히 꾸며 낸 거요. 그리구 ‘눈으로 보는 거야 모를라구’ 아주 간단하단 말이오. 보통은 말이오, 눈은 있는데 볼 줄 모르는 건데, 저 매담은 눈은 없으면서 볼 줄은 153


안단 말이오. 바타플라이란 血統을 따지면 번데기의 成蟲 이거든. 노형은 어떻게 생각하오? 저 여자는 聖女인가 蕩女 인가…” “…” “그렇게 알아 두구, 멀리서 감상하는 거야 害될 거 없지.” “…” “아까 시체라구 했다구, 겉으로는 그저 뾰루퉁해졌지만 속은 덜 익었으니까 지금쯤 이글이글하구 있을지두 몰라.” “친척에 그림 그리는 분 안 계십니까?” “노형은 그림 그리는 친척을 잘 찾는데 내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아오. 어머니가 유명한 退妓였단 말은 들어두, 모든 게 안개 속이니까 친척이 고기잡이를 하구 있는지 그림쟁이 를 하구 있는지 내가 알 수 있소?” “아니 선생님 말입니다.” “내 친척에 말이오? 지금은 없지만 그런 건 알아서 뭘 하 오?” “세상을 떠나셨읍니까?” “본인이 들으면 섭섭해 하겠는데…” “그분 혹시 玄晩雨 씨라구 하지 않습니까? 동경에서 미 술학교 나오시구?” “다 나오지는 않구, 어린 나에게 미술이야말로 예술 중의 154


예술이라구 선동해서 오늘의 나를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었 는데, 자기는 가볍게 方向 전환을 한 덕분으로 지금은 교외 에 별장까지 지어 놓구 꽤 잘살구 있소마는 노형이 그런 걸 어떻게 아오?” “연치는 몇쯤 되십니까?” “육촌 형이지만 六○이 내일모레여서 요즈음 낚시會 회 장이 된 게 큰 벼슬 같아서 만사가 귀찮다는 거요.” “만나 뵈일 수 없을까요?” “낚시에 취미가 있는 것 같지두 않는데…” “어디서 들은 傳說에 그분의 이름이 있어서요.” “전설에? 살아 있는 사람이 전설에 出現했다면 그건 幽 靈이겠는데, 그림자가 어딘지 뿌연 데가 있기는 하지만 낚

시會長이 유령이란 것은 좀 이른 것 같소.” “꼭 그렇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同名異人두 있는 것이니 까요.” “어디에 있는 전설이오?” “평안도 방골이란 마을입니다.” “방골? 어떤 내용인데?” “저두 잘 모릅니다.” “잘 모르는 것을 어떻게 이름까지 아오?” “취미로 전설을 연구해 보구 있어서 그런 수도 있읍니 155


다.” 玄勝雨라는 이름을 포스터에서 발견했을 때 그는 그것

을 玄晩雨로 잘못 봤던 것입니다. 다시 보니 ‘晩’이 아니고 ‘勝’이었으나, 腦裏 깊숙이 파묻혀 있던 ‘玄晩雨’는 忘却의 안개를 헤치고 幽靈처럼 굽닐었던 것입니다. 그 個人展이 열리고 있는 백화점으로 찾아가는 그의 걸 음은 몇 번인가 머뭇거렸지만 끝내 돌아서 버릴 수는 없었 읍니다. 中年을 거기에 발견했을 때 그는 어깨가 도로 가벼 워짐과 함께 失望을 느껴야 했었을 것입니다. ‘雨’가 항렬字 라 해도 연령의 차가 너무 컸으니까요. 그러나 그 한 가지를 가지고 단념해 버릴 수는 또 없는 일 이었읍니다. 그래서 다시 흑나비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玄 畫伯에게서 ‘玄晩雨’를 확인하게 된 李章은 그 후 오

늘까지 석달이 넘도록 ‘흑나비에 ’ 나가지 않았읍니다. 스스 로는 ‘玄晩雨’라는 過去를 더듬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 읍니다. 사실 過去를 끊어 버리고 살아온 이장이기도 했읍 니다. 그러나 以北에서 무슨 핑계를 대고 피할 수도 있었을지 모를 스파이가 되어 월남을 한 것은, 吳澤富라고 하는 어머 니의 오빠가 事變 前엔 軍政廳의 한 高官으로 있었다는 말 이 그의 적개심을 더하게 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 서울에 156


지금도 건재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단언 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오택부가 어느 시골에 企業體를 가지고 있 고 거기서 出馬해서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고 알고 있는 정도이고, 그 이상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은 그 것이 ‘過去’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어머니를 그리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기 ’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오택부에 비하면 玄晩雨 씨는 어머니도 그를 좋아했고 그도 어머니 를 좋아했던 어머니의 단 하나의 愛人이었읍니다. 더구나 그 ‘過去’는 이장으로 봤을 때 眞相이 완전히 밝 혀져 있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풀리 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읍니다. 완전히 풀리지 않는 과거 란 완전히 끊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玄晩雨 씨는 그것을 풀어 줄 키이를 갖고 있는 사람, 어

쩌면 그보다 더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李章은 몰래 생각하 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니 ‘玄晩雨’라는 過去를 더듬지 말기 위해서 茶房 흑나비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표면의 구실이고, 실은 마 담 바타플라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玄晩雨’가 過去에의 門이라면, ‘마담 바타플라이는 ’ 感 覺의 門을 가리고 있던 帳幕을 휘몰아 버리는 바람인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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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吳娘之墓 앞에서, 그는 女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맹세와 함께 共產主義者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결부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마담 바타플라이와 共產主

義는 양립되지 않는 것이었읍니다. 마담 바타플라이에 끌

려간다는 것은 공산주의에서 그만큼 멀어지는 것을 의미했 읍니다. 그 마담 바타플라이의 幻影은 지워 버릴 수가 없었읍니 다. 그는 그 女人의 肉體를 봤고, 그 눈동자에 倫姬의 陰影 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 女人은 蕩女였고 聖女였읍 니다. 慾情과 함께 聖스러움을 일으키게 하는 ‘魔’였읍니다. 그 ‘魔’에 비하면 ‘공산주의는 ’ 骸骨이었고, 이제껏 열심히 해 온 演技는 굿거리와 같았읍니다.

그 이장을 共產主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고 있는 것은

信義 때문이었읍니다. 그것은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德目

이었읍니다. 그 時節에는 德目과 德目 사이에도 對立이 있었고, 싸움 이 있었읍니다. 美와 善의 대립은 日常으로 있는 것이고, 忠 과 孝, 正義와 正直도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보통으로 있는 일이었읍니다. 일례로, 正義의 隊列에 끼여 있는 사람이 어 떤 경우 正直하게 움직이면 그 隊列에 害가 되는 수가 있읍 니다. 그렇다고 해서 不正直하게 움직인다면 그 不正直은 158


正義와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正義와 배치되는 것을 가

지고 正義를 위한다는 것은 成立되지 않는 일이어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도 正義를 위해서 不正直하게 움직인 그 행 위는 大義를 위해서 小義를 죽인 것이라 해서, 正直하게 움 직이느라고 正義를 위하지 못한 사람은 未練하고 卑怯하다 는 烙印이 찍히는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正直하게 正 義를 위한 사람보다도 더 級數가 높은 勳章을 받는 것입니

다. 勳章이란 대부분의 경우 이런 犯罪의 代名詞이고, 따라 서 熱을 가하면 보잘것없는 쇠붙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 다. 人間 歷史를 타락시킨 한 原因은 이런 勳章의 示威에 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敎科書는 그런 勳章의 示威로 가 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正直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價値觀은 그런 비빔밥 이었읍니다. 그 비빔밥은 ‘多數決’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正義’를 위 해서가 아니라, 隊列이라는 ‘多數’를 위해서 不正直을 행한 것입니다. 大義의 大는 大가 아니라 多였고, 小義의 小는 小가 아니라 少였던 것입니다. ‘多’를 ‘大’로 바꾸어 놓는 換 骨이랄까 詐欺랄까, 이것이 그들의 倫理인 것입니다. 나아

가서는 ‘最大多數의 幸福’이 善이라고 公言하기에 이른 것 입니다. 159


多數決에 희생된 ‘少數’. 그 속에는 惡石도 있겠지만 多 數決로 살아남은 돌보다도 더 귀한 玉이 있는 것입니다. 얼

마나 많은 玉이 多數決이라는 歷史의 수레바퀴에 의해 抹 殺되었던가. 그러면서 그 무덤에는 床石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다 碑石을 세울 ‘反正’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그들이었읍니다. 多數決에 의해 엮어진 그들의 그 歷史는 ‘上’도 아니고

‘下’도 아니고 좋게 말해서 ‘中’의 歷史였읍니다. 쓰지도 않 고 달지도 않고, 과히 나쁘지도 않고 과히 좋지도 않은 미지 근한 歷史였읍니다. 딴은 地上은 天國도 아니고 地獄도 아 니기는 하였읍니다. 흔히 그들은 스스로를 中間的 存在라고 했읍니다. 神과 動物의 中間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能力의 限界를 告白

한 것입니다. 그들의 感覺은 너무 큰 것과 너무 작은 것 앞 에는 眩氣症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宇宙의 大를 볼 수 없었고, 原子의 小를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直徑이 몇 千分의 一밀리미터가 되는 그 속에 太陽系 大의 空間이 있다는 原子의 世界, 一 秒 동안에 地球를 일곱 번 半 돈다 는 빛이 百億 年 걸려 到達하는 無限한 宇宙 空間. 이 ‘微視’ 와 ‘巨視’를 감당해 내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中間的’이었읍 니다. 그것은 뚫을 수 없는 眩氣의 壁이었읍니다. 160


그들더러 그 壁을 뚫고 그것을 生活感情으로 해서 살라 고 하는 것은, 마치 마당에서 공 던지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실은 그것은 運動이 아니라 죽음에의 律動이라는 것 을 깨닫게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긴 時 間으로 볼 때 그 現代도 한 原始時代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2.0의 視力을 가진 사람보고 소경임을 깨달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 다. 진실로 그들이 스스로 자랑하는 것과 같은 ‘現代人’이라 면 現代가 洞窟時代라는 것을 깨달을 줄 알아야 했던 것이 었읍니다. 그래야 世界革命이라는 거창한 事業이 보잘것 없는 한 女人의 肉體로 의해서 버림을 당하는 것도 이해될 수 있게 될 것이고, 사랑과 信義의 갈등도 그 洞窟의 壁畫감 으로서는 알맞는달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읍니까.

召還이라는 공갈을 남겨 놓고 金 社長이 돌아간 후 우두

커니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던 李章은 넥타이를 고쳐 매 며 밖으로 나왔읍니다. 黑나비 茶房에 이르렀을 땐 저녁때가 다 되어 있었읍니

다. 해가 짧아지는 것이 눈에 띄게 느껴지는 요즈음이었읍 니다. 161


“서울에 계셨군요.” 레지가 갖다 놓은 茶에 입을 가져가려는데 마담이 가까 이 왔읍니다. “제가 한 誤解에 화가 났나요?” “…” “시체 말이에요.” 그 말에 이장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었읍니다. “오해라는 건 짐이 되는 것이니까요.” “현 선생님 요즈음두 나오십니까?” “한동안 매일처럼 선생님을 찾으시던데 요즈음 연애 중 이에요. 딸 같은 여학생하구요.” “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앉으실 수 없읍니까?” “말씀해 보세요.” 약간 수그러지려 했던 姿勢를 도로 펴 들면서 내려다보 는 것입니다. “실례지만 고향이 어디십니까?” “싱거운 질문이군요. 다음엔 몇 살이냐구 할 작정이세 요?” “황해도가 아니신지?” “첫사랑의 여자가 황해도 여자였는데 얼굴 모습이 어딘 지 닮은 데가 있단 말씀이죠?” 162


“…” “미안하지만 그런 新派劇에 등장하구 싶진 않아요.” 냉랭한 소리와는 달리 상냥스럽게 웃음까지 지으면서 돌 아서는 것이었읍니다. 두 번 다시 보기 싫다는 듯이, 거기 있는 손님들과 농담을 두세 마디 주고받으며 카운터에 가 앉아선 이쪽엔 시선을 흘리지도 않는 것이었읍니다. “어때요? 얘기해 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玄 畫伯은 방금 헤어졌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간단했읍니다. “들어오다 보니 둘이 이야기하구 있기에 저쪽에 가 앉았 지. 테스트해 보라구.” “…” “앉으라구 해두 절대로 안 앉지. 앉을 양이면 듣는 사람 이 민망할 정도로 무식이 폭로된다는 걸 자기두 알구 있는 예술가란 말이오. 예술이란 게 그렇거든. 본인은 하품을 하 면서 적당히 얼버무려 놓은 붓 자국을 가리키면서 평론가라 는 파리 떼들은 이 筆致야말로 이 작자의 力量을 보여 주는 것으로 타인의 追從을 불허함이라구 금빛 딱지를 붙이지만 그건 그들의 직업이니까 또 좋은데, 본인이 말이오, 하품했 던 건 잊어버리구 그 소리에 갑자기 의젓한 포우즈를 취한 단 말이오. 바루 저 매담이 그거요. ‘無識한 敎養’이라는 이 163


름의 藝術品이면서 그 作家란 말이오. 사실 이 다방에 앉아 있는 손님의 三分의 二는 저 매담의 평론가들이란 말이오. 본인두 그것을 잘 알구서 시원한 포우즈를 열심히 취하구 있으니 딱하지 않소. 우리 두 사람두 지금 자기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구 있을 거라구 짐작하구서 의젓해 하구 있을 테 니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해야 궁합이 맞겠소.” “그동안 그림 얼마나 그렸읍니까?” “美人畫지. 언젠가 말한 그 낚시회장 말이오, 그런 모욕 이 어디 있소. 그런 미인화는 집어치우구 자기 회사에 와서 專務 노릇을 하라는 거요. 아들이 없거든. 둘이 있었지만 사

변에 죽구 딸이 하나뿐이오. 그렇다구 남의 그림을 미인화 라구 할 거야 뭐 있소.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모욕은 처음 이오. 노형두 그 모욕에 동감일 테지만 말이오.” “그럴 리 있읍니까. 일을 맡기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요.” “나두 그렇게 생각하기루 하구 참았지.” “언제 말한 전설 이야기를 해 보셨읍니까?” “아 그래그래. 형님을 유령이라구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게 사실입니까 했더니, 모를 소리라구 하면서 노형에 관해 서 몇 가지 묻군 틈이 있으면 한번 데리구 오라던데, 벌써 서 너 달 전 일이 아니요…” 164


“제게 관해서 뭐라구 말씀했읍니까?” “사실 말이오, 내가 뭐 아는 게 있소. 나이는 스물대여섯 이구 이름은…” “제가 왜 스물대여섯입니까?” “그래 몇이오?” “서른셋입니다.” “그렇게 많소? 상당히 나배긴데. 그럼 매담이 본 게 맞았 군. 자기와 동갑쯤이 될 게라구… 아니 가만히 있자?… 그 럼 저 매담은 서른셋이란 말인가? 이거 큰 발견인데. 아니 다. 自稱 스물아홉이랬지. 하하 하하 난 숫자 관념이 제로거 든. 그런 나더러 전무라니 될 말인가, 하하하…” 혼자 유쾌해 하는 것이었읍니다. “다음에 찾아가시는 기회가 있으면 같이 찾아가 뵈이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알고 싶소? 낚시회장두 좀 시치미를 떼 는 것처럼 보이기는 보이던데… 그럼 이렇게 하오. 조금 있 으면 조카애가 여기에 오기로 되어 있으니 안내해 달라지.” “누구 조캅니까?” “낚시회장 딸 말이오. 아프레두 조금 아니구, 묘하게 다 듬어진 여성이오. 내가 十 分 늦게 나오면 다음번엔 二○ 分 늦게 나오는 애요. 그래서 다음번엔 내가 三○ 分 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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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면 그다음번엔 그 애가 四○ 分 늦지. 그러니 말이오, 약속이 두 時라면 서루 네 時쯤에 나오기 마련이오. 이래서 는 안 되겠다 해서 協定을 맺지만 다시 十 分, 二○ 分, 三 ○ 分이 되거든. 그렇지만 場所는 어기지 않지. 장소두 어 길 만한 앤데 말이오. 흑나비에서 만나자고 하면 반드시 흑 나비에 나오는 게 기특하지만, 알구 보면 동성연애라는 게 있지 않소. 저 매담에게 그런 것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오. 그런데 저 ‘무식한 교양’ 女史는 무정타 말이오. 젖내두 가시 지 않은 그 애를 라이발 취급을 해 가지구 쌀쌀하게 굽어본 단 말이오. 美와 美가 사이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 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二, 三 일 지난 일요일날, 正午 때쯤 해서 李章은 버스 終 點이 되는 다방에 가서 현 화백과 公子라고 하는 현만우 씨

의 딸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셋이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 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화백이 늦거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렇다 할 수 있어도 公 子라는 그 여자는 꽤 깜찍스러운 여인이다 하는 생각이 새

삼스럽게 드는 것이었읍니다. 지난봄에 대학을 나와 지금은 미국 留學의 수속을 하고 있다는 그 女學士의 입에서는 묘한 소리가 많이 나왔지만, 166


性慾이란 말이 서슴지 않고 音聲化되어 나오는 데는 얼떨

떨해지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화백이 ‘사랑이 느껴지지 않 는 美는 참다운 미가 아니고 사랑은 異質 사이에 일어나는 感情’이라고 한 데 대해서, ‘美는 성욕의 變態’일 수 없다고

시원시원하게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런 것이 現代 女性 인가 했읍니다. 여성과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거의 해 본 적 이 없는 이장에게, 젖내가 나는 그 女學士는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읍니다. 현대 여성에게는 사람을 공연히 기다리게 하는 것쯤 보 통인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단념하고 밖으로 나왔읍니다. 길 건너에 머물러 있는 하얀 乘用車에서 누가 손질하고 있는 것 같기에 시선을 모아 보니 선글라스가 웃고 있었읍 니다. 안경을 벗은 것을 보니 공자라고 하는 그 現代 女性이었 읍니다. “선생님은 꼭 한 時間 二十五 分, 저는 한 時間 二十四 分 五十五 秒 기다린 셈이에요. 화내시기 전에 이 一元二次 方程式을 풀어 보세요.”

이장을 밖에 세워 둔 채 스무고개 같은 말을 꺼내는 것입 니다. 167


“高等學校 때 교과서에요, 우리 민족의 特性은 끈기라구 했는데 그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오늘 알았어요. 안에서 기 다린 선생님 말구, 저의 끈기 말이에요.” 이장은 그 소리들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알려는 생각 은 포기했읍니다. “선생님은 약속 시간보다 五 分 빨리 오신 거구, 전 선생 님보다 五 秒 늦은 것뿐이니 약속 시간보다는 四 分 五十五 秒 빨리 온 거에요.”

“…” “이것이 方程式의 답이구요. 다음은 끈긴데, 그래서 시 간을 잘 지키는 미스터 藝術家를 기다렸어요. 五 분, 十 분, 十五 분,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다방에 들어가는 것이 뭣해

졌어요. 그렇게 늦었다는 것이 되니까요. 아무리 설명을 해 도 완전히 믿어 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方向을 바 꾸었어요. 언제까지 기다리시나 한번 구경해 보자구. 기다 리다가 제가 지쳐 버렸어요. 그래서 다방에 찾아 들어가려 다가 문득 우리 민족의 특성이 생각났어요. 결국 저는 合格 했구 선생님은 落第.” “…” “지금 마음속으로, 참새처럼 잘두 재잘거리는 여자구나 하구 계시죠?” 168


“…” “그리구 지금은, 참 쎈스가 빠른 여자구나…” “…” “뭐라구 대답 좀 해 보세요. 이번엔 제가 쎈스가 있는 분 인지 아닌지 테스트할 차례예요.” “아버님은 댁에 계십니까?” “어서 타세요. 그런 散文이 나올 줄은 알았어요.” 새침해져서 발동을 거는 것이지만 이내 또 문제를 내는 것이었읍니다. “앞자리와 뒷자리, 어느 쪽에 앉는 것이 적당할까, 망설 이구 계시는 거죠? 적당히 선택해 보세요.” 이장은 뒷문을 열고 뒷자리에 들어가 앉았읍니다. 차는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읍니다. 소리 없이 움직 이기 시작한 것은 처음뿐이고, 暴走였읍니다. 앞에서 오는 차들이 묘하게 피해 줬으니 망정이지, 뒤에 앉은 이장은 몇 번 손에 땀을 쥐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十 分도 안 달리고 차는 신작로의 아스팔트를 버 리고 밭 사이에 난 흙길로 굽어 들어야 해서 속력을 낼 수 없 게 되었읍니다. “미인이 운전하는데 담이 작으면 실례니까요. 이렇게 대 답을 하게 된 저의 말은 어떤 걸까요?” 169


“…” “대답이 없을 걸 미리 알구 가르쳐 드린 거예요. 선생님 은 상당히 겁쟁이시군요.” “속력을 내두 운전만 잘하면 담이 작아질 필요가 없지 요.” “운전할 줄 아세요?” “짐차는 할 줄 알지요.” “한 가지 묻겠는데요. 이건 꼭 대답해 주셔야 해요.” “…” “어째서 추럭이라 안 하시구 짐차라 하셨어요?” “그것두 대신 대답해 주면 좋겠는데…” “이것이 대답이에요.” 急停車하는 것이었읍니다.

“추럭이 짐차라면 이건 인력거가 되는 셈이죠?” “내가 왜 대답을 못 하구 감탄만 거듭했는가 하는 것에 正答을 해 주면 진정으로 감탄하겠는데 어떨는지…”

부석부석한 흙 같던 李章의 마음에도 水分이 끼는 듯해 지는 모양이었읍니다. “이때까지는 적당히 감탄해 두고 있었다는 말씀이네요.” “요전 날부터 보니 쎈스가 날카로워서 어설피 뭐라구 대 답했다간…” 170


“말씀 다 하셨어요? 그럼 두 가지를 묻겠는데요. 요전 날 에는 쎈스가 어떻게 날카로웠어요?” “어떻다구 할까…” “간단해요. 公式이 몇 가지 있으니까요. 그날 것은 順序 를 거꾸로 하기에요. 因果律을 끊어 놓으면 時가 된다지만, 거꾸로 해 놓으면 쎈스가 있어 뵈는 거에요. 現代를 逆說의 시대라구 하지 않아요. 게다가 文法까지 무시하면 完璧한 現代가 된다구 며칠 전 신문 문화란에서 본 걸 應用해서 외

어 두었다가 그날 써 본 거죠. 미스터 藝術家에게 지기 싫어 서요.” “…” “그러니 저의 쎈스는 가짜예요. 그래서 저의 말에 대답 안 하시는 것도 이해해 드리겠어요. 그렇지만, 어설피 뭐라 구 대답했다간, 다음엔 어떤 말이 이어질 예정이었어요?” “…” “쪼아댈까 봐란 말씀이죠?” “쪼아대단다구까지는 아니지만…” “저는 딱다구리기는 하지만 인력것군이 아니니 걷는다 는 것은 건강에두 좋아요.” 하고선,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정말 내리라는 모양이었읍니다. 171


百 미터쯤 앞이 되는 언덕 위에 빨간 지붕을 인 초록색 二층 洋館이 외로이 서 있었읍니다.

“미안하지만 가실 때에두 그렇게 걸어가세요. 饒舌을 들 으면 胃에두 좋지 않으니까요.” 정말 차를 돌리는 것입니다.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돌아보니 흰 車는 신작로에 나가 서 천천히 거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읍니다. 자동차 소리를 듣고서인지 현관에 나와 서 있던 식모가 말없이 그를 응접실로 안내해 가는 것이었읍니다.

조금 있더니 玄 畫伯의 얼굴에서 윗수염만 없이 해 놓은

듯한 斑白의 노인이 들어왔읍니다. 들어서면서 뭐라고 활달하게 입을 열려던 그는, 돌아보 면서 일어서는 이장의 얼굴을 힐끔 뜯어봤다가 멈칫하는 것 이었읍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지워 버리면서 “어서 안 소.” 하고 예사롭게 자리를 권하면서 건너편에 가 앉는 것이 지만, 한번 굳어진 표정은 쉽게 풀려지지 않는 것 같았읍니 다. “勝雨의 말을 들으니 전설 같은 것에 퍽 취미를 가지고 있다구 들었는데, 금년에 몇이지요?” 처음 묻는 말이 이것이었읍니다. “서른셋입니다.” 172


“그럴 리 없소. 그렇게 안 보이오.” 그것은 斑白에 어울리지 않게 冷情을 잃은 是非調였읍 니다. “저도 그럴 리 없었으면 좋겠읍니다.” “…?” “…” “고향은 서울이라지요?” “…” “전설을 연구한다면 여러 지방의 재미있는 일두 많이 알 게 되겠소.” “…” “전설과 神話는 어떻게 다르오? 요즈음은 노인두 이런저 런 소양이 있어야 하나 보오. 무식하다구 젊은이들이 자리 에 끼여 주지 않소. 그래서 물가에 가서 낚시질이나 하게 되 는데 이 낚시질이라는 것이…” 말을 다른 데로 끌어가는 것이었읍니다. “신화는 옛날 이야기구 전설에는 살아 있는 사람두 가끔 등장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렇지 않던데. 신화에는 系譜가 있지만 전설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이 다른 점이 아니요?” “네, 물론 계보두 없읍니다. 그래서 父母가 누군지 모르 173


니 私生兒지요.” “…” “오기미라는 여자의 아들처럼입니다.” “그럴 리 없다!” 이제는 회피할 수 없게 되어 경련을 일으키는 몸은, 그대 로 달아나고 싶은 모양이었읍니다. “저도 吳娘之墓 앞에서 몇 번인가 그럴 리 없다고 해 보 았읍니다.” “정말 起美의 아들이냐?” 李章이 그 얼굴에서 읽은 것은 恐怖와 憐憫이었읍니다.

“저는 그 여자의 아들이지만 그 여자는 저의 어머니가 아 닙니다! 그런 여자를 어떻게 어머니라구 할 수 있읍니까.” “무서운 일이다…” 몸이 푹 꺼져 가는 것이었읍니다. “더럽지 않고 어째서 무서운 일입니까?” “너는 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바늘구멍만 한 길이 하나 있었읍니다. 아시겠읍니까? 그것이 여기서 산산이 부 서졌읍니다. 전 그 전설을 믿고 싶지 않았읍니다. 그런 여자 가 내 어머니라니…” 174


“네 어머니는 마음이 어린이의 눈동자와 같았다.” 李章은 뒤를 돌아보았읍니다. 아까부터 玄晩雨 씨의 시

선이 자기의 머리 위로 몇 번인가 날아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천장에 가까운 그 뒷벽에는, 짙은 보라色을 배경으로 하 고 노란 스웨터를 입은 여자의 초상화가 두터운 테 속에 갇 혀 있었읍니다. “저것이 오기미라는 그 여잡니까?” 벌떡 일어서려다가 말고 도로 앉아 버리는 것이었읍니 다. 그리고서 빈정거리는 투였읍니다. “꽤 예쁘게 생겼읍니다.” “…” “그런데 왜 그 값어치를 못 하고 그렇게 물렀을까요?” “災難이다. 길 가다가 자동차에 치여 다리를 하나 떼이 는 것 같은 재난이다!” “다리와 정조는 다릅니다. 그래서 일본의 어떤 재판관은 정말 강간이란 없다구 했답니다.” “너의 마음은, 너의 행위는 너의 어머니에게 돌을 던질 만큼 순수하냐? 그렇게 正大하기만 했느냐?” “…” “사람은 植物이 아니다. 美德과 罪가 종이 한 장의 差로 175


갈라지는 동물이다.” “그런 동물이면 소리쯤 한번 질러야 할 게 아닙니까?” “대부분의 여자는 소릴 질렀다. 그러나 너의 어머니는 그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왜? 그 사내는 누굽니까?” “난 모른다!” 겁에 질린 듯 훌떡 일어서는 것입니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모른다.” “그렇게 몰라야 하는 겁니까?” “그런 것을 알아낼 필요는 없다구 생각한다. 나는 너의 어머니에게 그 아이는 내 아들이라구 약속했다. 어머니만이 너의 父母다. 아버지는 필요없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뿐입니 다!” “그런 말을 하겠으면 다시 나를 찾지 말아라!”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하고 나가 버리는 것인데, 그 소리 가 어찌나 우렁차고 컸는지 흥분해서 따라 일어서려던 李章 을 그대로 못 박아 놓을 정도였읍니다. 요란했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다가 힘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몸을 옮겨 놓 176


는 이장의 망설이던 시선은 끝내 肖像畫에 끌려가 멎는 것 이었읍니다. 호소하고 싶어 하는 듯한 야윈 눈과, 恐怖와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 어딘지 모르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입술. 傲 慢과 不貞과 美, 이런 同心圓 속에서 쓸쓸한 嬌笑를 머금고

있는 新式 女性, 이렇게 마음의 壁에 그려 가지고 있던 女人 像과는 너무 달랐읍니다. 罪에 떨고 있는 가련한 少女. 이

것이 경멸과 원망으로 지새우게 했던 어머닌가… “실물은 더 이뻤을 거예요…” 옷을 갈아입은 公子가 문기둥에 팔짱을 끼고 기대 서 있 었읍니다. “終點까지 갔다가 돌아왔어요. 선생님은 우리 아버님의 손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서요.” “저 그림은 언제 그리신 겁니까?” “모르겠어요. 제 記憶에는 그림 그리시던 모습이 없으니 까요. 서울 집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걸려 있지만, 처음엔 기 분 나빴어요. 질투두 나구 어머니가 억울한 생각두 나구. 어 머닌 제가 여학교 일학년 때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제가 버릇없이 자랐다구들 하지만. 喪을 벗자 저 여자가 벽을 장 식하구 나섰을 땐 며칠을 두고 맹반대를 했지만 불쌍한 생 각두 들어요. 슬픈 여자임에는 틀림없겠으니까요. 그렇기 177


두 하지만 행복한 편이랄 수도 있어요. 저이의 墓地는 우리 아버지라는 남자의 가슴이니까요. 안 그래요?” “…” “선생님의 가슴은 누구의 묘지가 될까?…” “…” 倫姬의 생각이 났읍니다.

“마담 바타플라이?” “…” “默秘는 일종의 肯定이라는 걸 아세요?” 이장은 그 公子의 앞을 지나 복도로 나갔읍니다. “화내시는 것도 일종의 긍정이에요.” “인사를 못 드리구 돌아간다구 말씀드려 주시오.” “정말 노하신 거면 취소할 필요없겠네요.” 신발을 신으면서도 혼자 좋아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뵈지 않을 것이라구 이것두 꼭 전해 주 면 고맙겠소.” “전 그런 어려운 심부름할 줄 몰라요. 선생님, 차 타구 가 세요. 레이디에게 예의를 지키게 해 주는 것이 남자가 아니 예요?” “걷는다는 것은 여기에두 좋은 것이니까…”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키면서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178


것인데, 그 李章 자신은 자기가 무슨 시늉을 하면서 무슨 말 을 했는지 모릅니다. “생각한 것보다 선생님은 도량이 좁으신 것 같아요. 남자 가 그러면 좋지 않아요.” 뒤에서 그런 소리도 나는 것 같았으나 이장은 지금 흙을 밟고 있는 것인지 구름을 밟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았 읍니다. 여기에 찾아올 때까지 그는 玄晩雨라는 사람이 자 기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한 오리의 희망을 몰래몰래 품고 있었던 것이었읍니다. 품고 있었다 해도 글자 그대로 萬에 一의 가능성도 없는 것이어서 스스로도 그럴 리 만무하다고, 그런 생각이 머리 를 들 때마다 그 자리에서 웃어 버렸던 그런 희망이 깨어졌 다고 해서 이렇게 앞이 깜깜해 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이겠 읍니까. 玄晩雨 씨를 찾아본 것을 뉘우치기도 하는 것이었읍니

다. 그가 그를 다시 찾아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런 말을 하겠으면 다시 나를 찾지 말아라’ 한 말에 對應하는 의미로 서가 아니라, 決定的인 絶望을 회피하기 위해서인지도 모 릅니다. 그러니 玄晩雨 씨가 아버지인지도 모른다고 하는 한 오리 희망은 아직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그대로 餘喘 을 잇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밭 사이의 길을 빠져나가 179


신작로를 걸으면서도 그는 아까 현만우 씨가 한 表情이며 말투 따위를 되새겨 올려서 하나하나 다시 검토해 보는 것 이었읍니다. 참으로 미련하고도 질기다 하겠읍니다. 사실 人間에게 서 제일 질긴 것이 未練인지도 모릅니다. 그 未練이 人間을 人間답게 했을 것인지, 그 반대로 했을 것인지 하는 것은 博 士論文의 한 테에마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겠읍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人間은 論文의 素材가 얼마든지 있는 豊富한 倉庫라고도 하겠읍니다.

더구나 말입니다. 석 달 前 포스터를 보게 될 때까지 玄 晩雨라는 이름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李章이었읍니다. 완

전히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그때까지는 그저 어머 니의 愛人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석 달 동안에 그 ‘愛人’ 이 ‘아버지로 ’ 孵化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읍니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는, 그것이 허망한 기대였다는 것이 밝혀진 셈인 데도 끊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人間의 마음이란 이렇게 節介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절개란 대부분 이런 無節介인 것입니다. 節介가 없는 未練한 動物. 名譽를 목숨처럼 아끼고 勳 章과 銅像에 무한한 애정을 표시하는 人間에게는 이런 面

이 있었던 것입니다. 私生兒의 問題보다 人間의 이런 면을 180


究明해 보는 것이 더 휴우머니즘의 關心事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술기운에 얼굴이 부어 가지고 李章은 黑나비 茶 房 앞에 이르게 되었읍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들어갈 것인

가 말 것인가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露出이 라기보다 옷이 벗겨졌나시피 뻐근하게 양장을 한 바타플라 이 女史가 핸드백을 팔에 걸고 나왔읍니다. 이장을 보더니 그저 目禮 하나 남기고, 비켜서는 앞을 휘 香水 냄새를 풍기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十 미터쯤 그렇

게 시원하게 걸어가서 모퉁이를 도는 김에, 아직도 그 양반 이 거기에 서 있나, 하는 것처럼 얼굴을 돌리더니 걸음을 멈 추는 것이었읍니다. 네온사인의 불빛에 그 얼굴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 읍니다. 이장은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그리로 끌려갔읍니 다. 그 모퉁이에 가 보니 바타플라이는 저 앞을 분주하게 걸 어가고 있었읍니다. 큰길이 나왔읍니다. 큰길을 건너 골목길로 곧장 굽어 들었읍니다. 한참 들어 가니 점점 비탈이 지는데, 남자가 따라오는 것을 정말 모르 고 있는지 한 번도 돌아본 것 같지 않았읍니다. 181


길이 점점 급해지고 그림자까지 가끔 나타나는 것이 비 밀스러운 곳으로 이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만졌읍니다. 아홉 時가 조금 지났을까 할 때이니 집으로 가는 길인 것 같지 않았읍니다. 저 위에 큰 料亭의 전등이 거뭇거뭇한 나무숲 사이로 나 타났읍니다. 그러나 마담 바타플라이는 그 앞을 그대로 지나 올라가 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의 그림자도 하나 볼 수 없고, 숲 속을 가는 것 같았읍니다. 距離를 좁히지 않으면 그림자도 놓칠 것 같 아서 돌아설까 하는 생각도 났읍니다. 그 바타플라이의 그림자가 우뚝 멎는가 싶더니 두세 걸 음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세 개의 그림자가 바타플라이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입니 다. 작은 길이 옆으로 갈리어 나가는 어귀였읍니다. 이장은 발소리를 죽이며 가까이 가 보았읍니다. “비켜요!” 여자는 조금도 겁이 안 난다는 소립니다. “모르는 사이두 아닌데 그렇게 쌀쌀하게 굴 거 없잖어.” 그者가 두목이고 그 양옆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은 부하일 182


것입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전화를 건 거는 내니까 있겠지.” 바타플라이는 입이 쓰다는 듯이 돌아섰읍니다. 그보다 먼저 두 졸개가 그 뒤를 막아섰읍니다. 바타플라이는 三角 形 안에 갇힌 셈이 되었읍니다.

“너무 도도하게 놀기에 오늘은 이런 것두 가지고 있지.” 칼을 번득여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강도질까지 하게 됐나요?” “강도와 강간은 약간 다르지.” “웃기지 말아요.” “고분고분 들어주면 어때? 깨끗한 것두 아닌 걸 가지구 세도 부리지 마!” “먼저 죽이고 봐요.” “안심해. 절대루 죽이지는 않으니까. 강간두 안 해. 저절 루 말을 듣게 한다. 그저 코를 베 내는 것뿐이야. 그래두 말 을 안 들을 땐 신사적으로 물러나지. 코가 뜯겨 나간 여자를 안구 잘 살 수는 없거든.” “내게 손가락 하나라두 댔다간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알구말구. 비서실에서 전화가 찌르릉 하면 짤깍 하지.” “그것을 알았으면 비켜요.” 183


“우리 셋은 맹세했어. 길지 않은 목숨이니까 매담 같은 우리나라 최고 가는 高級과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면 새벽 에 죽어두 한이 없겠다구.” “소리를 지를 테야요!” “질러 보라니까!” 손바닥이 번쩍했읍니다. 비명을 뿜으면서 비틀거리는 것을 뒤에서 지키고 있던 졸개들이 덤벼드는데, 벌써 한 놈은 여자의 두 손을 뒤로 비 틀어 잡았고, 다른 한 놈은 수건으로 입을 막아 머리 뒤로 틀 어쥔 것입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읍니다. 두목은 얼른 여자의 다리를 안아 들고 거기 옆길로 접어 드는 것이었읍니다. 이장이 먼저 그 길을 막아섰읍니다. “넌 뭐야…” 두목은 여자 다리를 내버리고 그에게로 다가갔읍니다. “목숨이 아까우면 집에 돌아가 자는 게 어때.” 벌써 주먹이 날아들었읍니다. 그러나 그 주먹은 行方不明이 되고 몸뚱이만이 저기에 가 나가떨어졌읍니다. 어디를 어떻게 당했는지, 일어나려 고 한두 번 굼틀거리다가 그대로 뻗어 버리는 것입니다. 덤 벼들려던 두 졸개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기가 죽어서 이러 184


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씩씩거리고만 있었읍니다. 이장은 길을 비켜 주었읍니다. 두 놈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두목에게로 가서 흔들어 보더니, 일으켜 가지고 ‘어디 두고 보자’ 하면서 샛길로 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 다. “제가 어떤 여자라는 것은 들었을 텐데 좀 모험이 지나치 지 않으셨나요?” “내라는 남자가 따라오고 있는 것을 몰랐던가요?” “안 것 같기도 하고 모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나는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몰랐다면 그저 구경하구 계셨겠어요?”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잘 모 르겠읍니다.” “애매하기는 피차 마찬가지군요.” “내가 지금 그 활극의 댓가로 당신의 육체를, 물론 넌지 시 점잖게 요구한다면 어떨까? 저들하구 어느 쪽이 더 不道 德일까…”

“어려운 문제군요.” “빼기 셈이니까 무슨 方程式보다는 쉽지.” “저는요, 현 선생에게서 들어서 아시겠지만 말을 길게 하 면 무식이 드러나니까 말은 그쯤으루 하시구, 요구하시든지 185


안 하시든지 해야 저두 뭐라구 대답하기가 쉽지 않겠어요.” “전화는 저들이 건 것이라니까, 여기까지 따라온 내가 요 구하지 않으면 오늘 밤이 空中에 뜰 것이 아니겠소.” “저의 몸은요, 깨끗하지 못하니까 거절하겠어요.” 승리라도 거둔 것처럼 휙 돌아서서 저 위를 향해 올라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그 길을 내려오면서 이장은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읍니 다. 아까는 어디라도 굴러 내려갔었을 것이라고 했읍니다. 마담 바타플라이가 그런 여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 은 허전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읍니다. 순결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그 生活相을 봐야 했을 땐 화가 나 기도 했고, 여지없이 모욕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입 니다. 過去의 追憶이 한꺼번에 그를 배반한 하루이기도 했읍

니다. 이튿날부터 그는 姿勢를 바로하기로 노력했읍니다. 失 態도 부리지 않고 演技도 하지 않고 살기를 했읍니다. 本來

의 나대로 살자. 내 表情과 내 몸짓으로 살자. 精神은 원래 賣渡이지만 儀容만은 確保해야 한다.

한 일주일이 지났읍니다. “요전에는 상당히 기분 나쁘셨지요?” 186


“왜?” “바타플라이의 묘지…” “…” “화를 안 내세요?” “낼 수도 안 낼 수도 없군.” “왜요?” “내두 안 내두 긍정이라면서…” “그럼 제가 한 말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 “지금 시간이 있으세요?” “무슨 일인데…” “있으세요, 없으세요?” “三○분 있으면 수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는 교문 앞에 있는 다방이에요.” 전화를 끊고 이장은 다방에 나갔읍니다. “무슨 일이지요?” “선생님은 일밖에 모르세요.” “…” “그렇게 일이 소원이시라면 여기 있어요.” 핸드백에서 네모난 봉투를 꺼내 놓는 것입니다.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구요.” 187


어머니의 사진이었읍니다. “또 한 가지 있어요. 틈이 있으시면 낚시질 가지 않으시 겠는가구 알아 오라구요.” “그런 취미와는 거리가 멀다구 전해 주시오.” “선생님은 어떤 취미를 가지고 계세요?” “별루 취미라구는…” “제가 남자라면 취미란 취미는 다 가져 보겠어요. 낚시질 두 하구 다마두 치구 바둑두 두구.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정 말 한번 신나게 살아 볼 걸 그랬어요.” “미국 가서 그렇게 살아 보면 되지.” “미국요? 신체검사가 남았어요. 그래서 망설이구 있어 요.” “그렇게 엄한가…” “전 여학교 二학년 때부터 저고리를 벗고 하는 신체검사 받아 본 적이 없어요. 進級 못해두 좋구, 진학 못해두 좋다 구 거부해 왔어요. 정말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존 엄성을 위한 일종의 레지스탕스인 셈이에요.” “…” “그렇지만 그건 구실이구요. 미국 유학을 위해서라면 그 런 레지스탕스쯤 포기할 수 있어요. 문제는 빠빠가 요즈음 와서는 반대하시는 거예요. 내놓구는 안 하시지만, 네가 돌 188


아올 때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구나, 한숨지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손금은 八○ 세까지는 문제없이 長壽하 시게 되어 있으니 전 그 한숨은 못 본 체할 작정이에요. 우리 아버진 어딘지 쎈치한 데가 있어요.” “…” “한 가지 물어봐두 좋겠어요?” “뭘?” “아까 그 사진 왜 선생님에게 드려야 하는 거예요?” “…” “제가 想像力을 발휘했더니, 그 여자는 처녀로 세상을 떠나신 거라면 대단히 노하세요. 그럼 선생님은 그 여자와 뭐가 되셔요?” “내 아버지란 사람의 주인 딸쯤 되겠지.” “쯤 돼요? 쯤이 뭐예요.” “관계없는 일을 그렇게 알아 뭘 하게…” “그렇지만 전 요즈음 인생의 엑스트라에서 무슨 配役을 맡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기분두 좋지만 신체검사나 빨리 받는 게 중하겠지.” 하면서 일어섰읍니다. “실은요, 지금 신체검사 받으러 가는 길이에요.” 밖에 나온 공자는 그것이 좀 창피하다는 얼굴이었읍니 189


다. “언제쯤 떠나게 되지요?” “가게 되면 전화할께요. 어떻게 떠나가나 구경하러 나와 주세요. 新郞감을 얻으러 가는 거니까요. 그것두 적절한 표 현이 아니구, 신부가 되러 가는 거죠. 워낙 여학생이 모자라 서 엔간히 못생겨두 괜찮은 신랑을 얻을 수 있대요.” 사나흘 지나, 전화라고 거의 오지 않는 이장이었기 때문

에 급사 아이가 ‘이 선생님 전홥니다’ 했을 때, 公子가 벌써 미국에 가는가 해서 어쩐지 서운한 생각부터 들었는데 金

社長이었읍니다. 旅行에서 어제 돌아왔다면서 급히 만나야

하겠다는 것이었읍니다. 가을빛이 어린 古宮은 時間의 落差 속에서 조는 듯했읍 니다. 五百 年 후에는 어떤 가을빛이 시간의 落差 속에서 졸고

있어야 할 것인가. 담 너머 보이는 저 빌딩이 古宮이 될 때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걱정하며 무엇에 關心을 두고 살 것인가. 그리고 싸움이 있다면 무엇을 위하여 싸울 것인가? 빵이다, 自由다 하는 動物的인 싸움이 아닐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것은 空氣처럼 되어서 빼앗기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고, 뺏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自由는 人間의 마지막 排泄物. 人間이 人間이려면,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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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서일 때와 마찬가지로 自由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도 羞恥스러운 죽음에 속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 같은 數字다. 빵에서부터 自由까지, 이것이 現 代人이라는 圓의 中心과 圓周 사이의 距離이다. 과학자들

이 보여 주고 있는 人間의 圓은 그 中心이 현재의 圓周 밖에 있다. 그래서 現代는 想像力이 유일한 道德이 되어야 한다. 正 義가 아니라 合理가 아니라, 想像力이라는 羅針盤을 가지

고 航海하지 않으면 우리 배는 坐礁하고야 만다. 이 想像力에 비쳐 볼 때 人間의 意識生活이란 박테리아 의 密集運動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汚穢와 破廉恥 와 醜惡과 卑屈, 奸巧, 謀陷, 小心, 尊大가 빵과 自由의 이 름 아래 창궐하고 있는 것인가. 마르크시즘은 이 빵의 문제를 해결하고 自由를 준다고 약속한다. 무릇 約束은 福音이다. 그러나 그 約束이 敎理 를 갖출 때 福音은 그 敎理 속에서 風化한다.

마르크시즘은 無產獨裁로 階級을 없앤다고 한다. 무산

독재로 계급이 없어질 만큼 人間이 그렇게 簡單하단 말인 가. 階級은 欲望과 빵의 不調和에서 생긴 것이다. 獨裁, 바

꾸어 말하면 慾望을 억제함으로써 階級을 없앨 수 있다고 191


생각하는 것은, 잎사귀를 따 버림으로써 나무를 죽일 수 있 다고 하는 것과 같은 即興 아니면 罪惡이다.

그것은 階級의 말살이 아니라 人間의 抛棄다. 直立을 中止하고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살라고 강요하는 것을 의

미한다. 牧者와 家畜, 딴은 階級이 아니다. 市民社會가 없 어지고, 勞動階級은 ‘奴隸群’이 된다. 階級을 없앨 수 있고 人間을 해방시켜 주는 것은, 獨裁

가 아니라 生產이다. 빵을 約束했다는 點에서 마르크시즘이 福音이란다면 그것은 샤아머니즘이 福音이었던 時節이었던 것처럼, ‘核 分裂’ 이전의 福音이다. 그 核分裂에 비하면 마르크시즘은 資本主義나 封建制度나와 마찬가지로 端午날에 두둥실 춤

을 추는 빨간 고무風船에 지나지 않는다. 저기 걸어오고 있는 저 金 社長 동무는 자기가 고무풍선 을 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노아의 方舟쯤에 타고 있 는 것으로 알고 있는 저 김 동무와 고무풍선인 줄 알고서 타 고 있는 나와, 어느 쪽이 그 고무風船에 더 충실한 것인가… “이 동무!” 옆에 와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고 주위를 완상하는 시늉 을 하면서 김 사장은, 오래오래 요 한 마디를 벼르고 있었다 는 듯이 뱃속으로부터 發聲하는 것이었읍니다. 192


“마담인지 양갈본지 하는 그 바타플라이란 계집과 손을 끊소!” “…” “성 문제를 해결하는 거라면 그런 고급 말구두 충분하오! 그따위 고깃덩이를 위해서 政治 깡패와 싸움까지 했다니, 건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는 타락이오, 타락! 알겠 소?” “평양에 소환시켜 주기 바랍니다.” “소환? 소환시켜 달라… 이유는?”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동무가 지금 한 그 말이 무엇을 폭로한 것인지 아오? 배 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오!” “…” “그렇지만 나는 그 고백을 못 들은 것으로 해 둘 수도 있 소.” “…” “그리구 나는 지금의 그 고백을 그 가능성을 청산했다는 새 출발로 보겠소. 이것이 나의 마지막 友情이면서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오! 알겠소…” 김 사장이 돌아간 후에도 그는 그대로 벤치에 남아서, 저 멀리 나무 수풀 위에서 목이 긴 흰 새들이 그려 내고 있는 優 193


雅한 飛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두려움과 기대로 마지막 破局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장 은 그것이 그런 식으로 保留되고 보니 할 일이 없어진 것 같 았읍니다. 그가 벤치에 그렇게 남아 있은 것은 김 사장이 먼저 자리 를 뜨면서 十 分쯤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기 때문이지만, 十 分쯤이라고 했으니 七, 八 分이라도 좋고, 一二, 三 分이

라도 좋았지만 그는 꼭 十 分을 지켰읍니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下宿으로 돌아가려다가 말고 방향을 바꾸어 都心地로

나갔읍니다. 집에 돌아가도 천장이나 벽을 바라보는 것 이 외 할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읍니다. 옛날에는 日人들의 게다짝 소리가 요란했던, 쓸쓸한 거 리를 가는데 除隊兵 차림의 청년이 옆을 지나면서 열심히 자기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을 느꼈읍니다. 햇발이 걷히고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는 무렵이었읍니다. 그 시선에 끌려 힐끔 보았던 그 얼굴이 어디서 본 듯한 기 억이 나는데, 그 청년은 발길을 돌려 뒤따라오는 것이었읍 니다. “실례지만…”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읍니다. 194


“김두삼 二等兵이 아니었읍니까?” “아니, 그런 사람 모르오.” 가볍게 대답하고 걸음을 다시 이어 놓았으나, 김두삼이 란 國軍으로서의 그의 이름이었고, 그 除隊兵은 포로수용 소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읍니다. “여보시오? 좀 서시오.” 암만해도 의심을 버릴 수 없다는 듯이 쫓아오면서 소매 를 잡는 것이었읍니다. “귀찮게 왜 이러오?” “죄송하지만 저 파출소까지 같이 가 봅시다.” 十 미터쯤 앞길에 순경이 총을 쥐고 서 있는 것이 보였읍

니다. “이 양반이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마오.” 손을 물리치면서 李章은 工事中인 판자가 둘리어 있는 모퉁이를 돌아들었읍니다. “왜 달아나는 게오?” 미련하게도 달려들어 허리를 껴안는 것입니다. 그 팔을 왼손으로 비트는 이장의 바른손이 번뜩해지는가 했더니, 벌써 그 제대병의 목덜미를 내리친 것입니다. 어쿠 하는 소리를 남기고 그 청년은 그 자리에 고꾸라졌읍니다. “제대병이면 아무 짓 해두 다 되는 줄 알아!” 195


이장은 이렇게 소리를 크게 하고, 유유히 그 골목을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대 군인은 아주 기절했던 것은 아니었읍니 다. “저놈, 빨갱이를 잡아라!” 비틀거리면서 모퉁이로 가서 순경을 부르는 것이었읍니 다. 그 소리를 들었으련만 이장의 걸음은 여전히 유유한 것 입니다. 돌아도 보지 않는 것이었읍니다. 그 골목길이 다할 쯤에 이르렀을 땐 뒤쫓아 오는 순경과 제대병과의 거리는 七, 八 미터밖에 안 되었는데, 그제야 무 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뒤돌아보는 것이지만 걸음을 옮겨 놓고 있는 그 얼굴에는 아무 그늘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모퉁이를 다 돌아선 순간, 그는 생각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이었읍니다. 슬그머니 되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 고는 마치,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뛰어가는 걸까 알 수 없다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면서 그 모퉁이를 도로 도는 것인데, 언 제 그 머리에는 베레帽가 얹어졌고 눈에는 로이드眼鏡, 입 에는 마드로스파이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튀어 오던 순경과 제대병은 그를 떼밀다시피 하면서 모 퉁이를 획 돌아가 버립니다. 196


위험한 잔재주를 부린 것이지만 그 경우 그로서는 그 이 외의 방법이 없었기도 했읍니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하던 거기 行人들이 “저 베레帽를 쓴 사람이…” 하면서, 거품을 물고 두리번거리는 순경에게 알려 줬을 때, 그 베레帽는 그 골목길을 다 빠져서 派出所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읍니다.

그들이 거기까지 달려갔을 때 한 대의 택시가 二, 三○ 미터 앞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었읍니다. 서너 번 택시를 바꾸어 타고 자기 하숙에 이른 李章은, 방 안을 간단히 정리하고 도로 밖으로 나왔읍니다. 그가 金 社長 집 솟을대문 앞에 이른 것은 황혼이 밤으로 이어져 가는 무렵이었읍니다. 집으로 찾아온 것만 가지고도 심히 못마땅해 하던 김 사 장은, 이장이 하는 말을 듣고서는 안절부절하다가 즉시로 하숙에 돌아가 있으라는 것이었읍니다. “학교에는 몸이 불편하다구 연락하구 집에서 한 발자국 도 밖에 나오지 말아야 하오. 二, 三일 있다가 춘천으로 가 서 휴전선을 넘소.” “어쩌면 한 시간의 여유도 없을지 모르겠읍니다.” “왜?” “弟子가 보았읍니다. 돌아 나올 때 알아보구 인사를 하 197


는 것을 모른 척했지만…” “그랬는데 날 찾아와!” “찾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붙잡히면 拷問을 당해 낼 수 없 을 것 같아서…” “붙잡히면 불겠는가?” “앞으로 공작원을 고를 땐 그런 抵抗力두 고려하구, 그 런 훈련두 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겠읍니다.” “알았소. 우리가 맨 처음 만났던 숲을 알지요? 아홉 時까 지 거기에 닿소. 더 빨리도 말구 늦게두 말구, 정각 아홉 시 에 거기에 이르면 누가 隱身處에 데려다 줄 것이니까 그 사 람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오. 二, 三일 후면 동무는 평양에 가 있을 것이오.” 거기서 나와 어두운 뒷골목만 찾아 더듬던 이장은 생각 을 바꾸어 불빛이 훤한 거리에 몸을 내놓았읍니다. 내놓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좀 있고 해서, 쇼우윈도우 같은 것을 서 서 들여다보기도 하는 것이었읍니다. 資本主義의 밤을 安寧히 하고 그는 지금 平壤으로 돌아

가는 길이었읍니다. 資本主義에는 資本主義惡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美가 있고 사랑이 있고 創意가 있는데, 資本主 義惡에는 敵對하기 위해서만 존재해 있는 골짜기로 말입니

다. 第二의 르네상스를 豫備하는 暗黑만이 그 存在 價値로 198


되어 있는 그 골짜기 이외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던 것 입니다. 그 暗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불빛을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이 가엾게도 느껴졌다면, 그는 인제 센티멘탈리스 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南韓 警察에 붙잡히는 것을 겁내고 있는 것이 아니 었읍니다. 저절로 붙잡히게 되었으면 하는지도 모릅니다. 懲役이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拷問이었읍니다. 拷問도 안

당하고 自白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拷問당하는 것은 생각 만 해도 아찔해지는 일이었읍니다. 그는 무서운 拷問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듣고 읽어서 알 고 있었읍니다. 그런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해서 꼭 지켜야 할 만한 무슨 價値가 있을 것인가? 이것은 자기에게도 비밀 로 해 두고 있는 疑問이었읍니다. 어쨌든 그는 고문이 두려 워 以北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숲 속에는 검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가까이 갔더니 帽子를 깊이 눌러쓴 그림자는 한 걸음 다 가서며 배를 꾹 찌르는 것입니다. 권총이었읍니다. “위를 보오.” “…?” “머리 위 말이오.” 거리의 먼 불빛을 받아 불그레해진 하늘에 흔들리고 있 199


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얼른 깨달아지기도 전에 붉고 푸른 倫姬의 시체 생각부터 났읍니다.

“희생이 되어 주어야 하겠소. 組織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소.” “희생이오? 말살이 아니구…” “그것은 동무의 생각 나름이오.”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희생이란 黨 조직을 위해서 자결하는 것이니까 黨史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오, 김 동무의 약속이니 믿어두 좋소.” “자결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오?” “이 총에는 농담으로 총알이 들어 있는 게 아니오. 동무 는 아무래두 죽는 몸이오. 반역자로 개죽음이 되는 것은 애 석하지 않소?” “자결하면 누군지 모르게 돌로 얼굴을 으깨어 버리는 일 이야 없겠죠?” “시간이 없소! 거기에 올라서기 적당한 바우가 있소.” “…” 허리에 올 만한 높이의 바위였읍니다. 이장은 그 위로 올 라갔읍니다. 올라서서 손을 드니 밧줄이 손끝에 닿았읍니 다. “이렇게 알맞게 하느라고 수고를 많이 했겠소.” 200


“…” “줄이 좀 가는데…” 단단히 매어 있는가고 당겨도 보는 것이었읍니다. “정말 당사에 올려 주는 거겠지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소? 당사에 올리기에 적합한 말로 말이오.” “김일성 장군 만세가 어떨까요?” “그게 가장 좋겠소.” “그럼 꼭 그렇게 믿겠소.” 하면서 올가미를 목으로 가져가던 李章의 발이 바위를 툭 찼읍니다. 다음 순간, 권총을 쥐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저리로 나가 쓰러졌읍니다. 땅에 뛰어내린 이장의 발길이 일어서려는 그 사내의 얼 굴을 걷어찼읍니다. “올라서기 적당한 바우라구…” 그者는 한 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한 손으로 땅을 찾는 것 입니다. 이장은 그 손을 밟아 버리고 권총을 집어 들었읍니 다. “내가 오늘 실패한 것은 人情을 썼기 때문이다. 상처가 안 나게끔 해 줬는데 빨갱이야 하구 소리 질렀단 말이야!” 201


발로 차고 찌르고 밟고 밟아서 반죽음을 만들어 놓는 것 이었읍니다.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다가 말고, 거기 늙은 나무 밑동이에 핑 뚫려 있는 구멍 속에 처넣어 버 리고 거리를 향해 걸어 나갔읍니다.

202


第四章 부웅 通行禁止 三○ 分 前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땅속에처

럼 하늘을 울려 왔읍니다. 어디로 가나?… 멈칫해졌던 걸음을 다시 이어 놓으면서 李章은 旅館밖 에 찾아갈 곳이 없이 되었지만, 거기는 더 危險한 것 같아서 하숙에 돌아가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는 것이었읍니다.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 숲으로 찾아갈 때는 붙잡혀두 좋다, 차라리 붙잡혔으면 좋겠다고 엄살 같은 것을 부릴 수 도 있었던 그가, ‘組織’에서 이탈한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그 警察의 눈이 더 두려워진 것입니다.

사이렌 소리에 한때 법석해지려 했던 밤길은 싱겁게 갈 아 들고 고요가 내려앉는 것이었읍니다. 전찻길로 나갔읍니다. 거기는 아직 법석이 계속되고 있 는 것이고, 차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서성 거리고 있었읍니다. 그 속에 끼여 들어서니, 아직 여유가 좀 있는 것 같아지기도 했읍니다. 그러나 거기 사람들은 제각기 짝을 지어 차를 잡아타는 데, 그에게는 차를 잡아탈 方向이 없는 것입니다. 203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會社員 風의 한 청년이 택시를 같이 잡을 同行을 찾는

것입니다. 이장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下宿이 있는 방향 을 댔읍니다. “거기는 저쪽으로 가얍니다.” 그래서 이장은 길 건너로 건너갔읍니다. 거기 어느 골목길로 되는대로 찾아들려던 그의 눈에 公 衆電話의 표지가 비쳐 들었읍니다. 문을 닫으려고 하는 그

상점에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었읍니다. 신호가 가서 한참이나 지나서야 응답이 있었읍니다. “흑나비지요?” 문을 닫은 지 언젠데 전화를 거느냐고 벌써 끊으려고 듭 니다. “마담을 대 주시오.” “마담요?… 전화 걸기루 약속했던 분이에요?” 그렇다고 했읍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하면서 전화番號를 하나 대 주는 것입니다. 하여간 그리 로 다이알을 돌렸읍니다. 受話機에서는 재즈의 요란한 소리부터 흘러나왔읍니다.

누구를 찾느냐고 묻는 말은 영어였으나 조선 사람의 음 204


성이었읍니다. “마담과 좀 바꾸어 주시오.” “매담 메니 메니 해븐데 어느 매담을 불러 드릴깝쇼.” “흑나비 마담 말입니다.” “오, 버터플라이…” 노래 부르는 것처럼 들뜬 소리로 마담 바타플라이를 연 거푸 불러 대는 것이었읍니다. 거기는 지금 한창 흥겨운 난장판인 것 같았읍니다. 이윽고 그 남자보다 더 술 취한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누구… 백 선생님?” “이장입니다. 그림 그리는 현 선생님과 가끔 다방에 나간 적이 있는…” “흥, 난 또 누구라구…” 전화를 끊는 줄 알았는데 다시 말을 잇기는 하는 것이었 읍니다. “禮儀가 바른 것은 알 수 있는데 가끔이란 말은 보통 몇 번 이상에 쓰이는 말인지 註釋을 달아 주실 수 없나요?” “만날 일이 있읍니다.” “없을 거예요.” “유치장에서 잘 수 없고 해서 전화 건 겁니다.” “호텔이면 그 옆 골목을 五 미터쯤 들어가면 있을 거예 205


요.” “위험해서요.” “무슨 일이에요?” “可否만 말해 주면 됩니다.” “건 强要가 아니에요?” “十五 分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강요두 하게쯤 되었읍니 다.” 그 말에 대해서 딴소리는 없이, 다짜고짜 무슨 무슨 洞 몇 番地, 하곤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갈 수 있으면 찾아가고, 못 찾아가면 할 수 없지요 하는 마음보 인 것 같았으나, 그런 것을 저울질하고 있을 여유가 있는 李 章이 못 되었읍니다.

들은 적은 있어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 수 없는 洞 이 름이었읍니다. 타임 엎을 앞둔 競技者들처럼 지이프와 택시들은 지금 이 마지막 고비인 듯 이리 올리 뛰고 저리 내리뛰고 하면서 세상없는데, 빈 차는 달려와서 문을 열지만 자기와 방향이 같지 않으면 대꾸도 없이 휑하니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서너 臺 만에야 겨우 잡아타게 되었는데, 다짜고짜 옆 골 목으로 꺾이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운 데였는가 했는데 아니고, 다시 훤한 큰길 206


로 나간 택시는 이번에는 탈 때의 方向과 거꾸로 얼마를 달 리더니, 다시 어두운 옆길로 돌려 대는 것입니다. 料金은 달라는 대로 낼 테니 番地 앞까지 대 달라는 말을

들었던 운전수는 한 골목길로 빠져 들어가면서 번지를 다시 묻는 것입니다. 얼마쯤 들어가던 운전수는 시계를 보더니, 派出所는 지 났다면서 차를 세우는 것이었읍니다. 더 올라가면 길이 좁 아져서 차를 돌리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고, 그 番地 는 이 길을 쭉 올라가면 곧장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한참 올라가면 앞길에 料亭의 전등불이 나타난 것이 언제 본 것 같다 했는데 그 앞에 이르러서 보니 그 언덕 길은, 열흘 전 마담 바타플라이의 뒤를 따라 더듬었던 그 고 갯길이었읍니다. 情夫의 집에 찾아가게 한 것일까?

통행금지를 고하는 사이렌이 울려 왔읍니다. 라이터를 켜 가면서 문패를 비쳐 보면 番地數가 점점 가 까와지기는 했읍니다. 길은 차가 겨우 비비고서야 올라갈 수 있을까 싶게 좁아 져 갔읍니다. 그런 길가에 그 번지수가 나타나기는 했는데, 아무리 交 際가 넓기로 茶房 마담이 살고 있을 집 같지 않았읍니다.

207


샛문은 한쪽밖에 없었으나 돌대문이고, 깊숙한 곳에 자 리 잡고 있는 현관까지 여러 그루 서 있는 늙은 나무들 사이 로, 하얀 돌을 섞어서 다진 콘크리이트 길이 넓직하게 나 있 었읍니다. 정말 첩살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여자의 어머니는 退妓라던 말도 생각났읍니 다. 벨을 눌렀읍니다.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중늙은 식모가 나왔읍니다. “…” 말은 없이 그져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장이라구 하는데 아까 댁의… 다방을 하고 있는 분 말 입니다, 아까 전화로…” 잘 안 나오는 말은 더 안해도 좋았읍니다. 식모는 벌써 샛문을 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현관에 들어서서 보니 집 구조는 밖에서 생각한 것과는 달리 좀 허룸하고 설멍해 보였지만 안내된 二층, 호올처럼 널따란 방은 무슨 展示場처럼 왁자지껄한 것이었읍니다. 바닥은 울긋불긋한 양탄자로 깔렸는데, 침대가 있고 化 粧臺가 있고 옷장이 있고 테이블이 있고 卓子가 있고, 소파,

안락의자, 교의, 의자 따위는 세어 보니 일곱 개였읍니다. 208


없는 것은 피아노뿐이랄까. 텔레비전이 있고 전축이 있고 라디오가 있고 전화가 있고 철 늦은 扇風機가 있고, 어항,

塑像, 화분, 벽엔 사진, 油畫, 俳優들의 브로마이드. 보통 집

에서라면 서너 房에다 나누어서 차릴 것을 한곳에 集合시 켜 놓은 잡동사니였읍니다. 침실도 되고 居室도 되고 응접 실도 되고, 한구석에는 각종 洋酒병이 진열되어 있는 스탠 드까지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밖에서는 가을을 누비는 벌레 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 읍니다. 아가씨는 오늘 밤두 안 돌아오실 거라면서 사라졌던 식 모는 과일을 들고 다시 나타나서, 스탠드에서 술병도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야, 지금 아가씨께서 손 님이 오셨냐구 전화가 왔는데 받갔슈 하는 것입니다. 망설이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수화기를 들려고 하니까 한 달 전부터 故障이라는 것이고, 방 안을 가리키면서 이것 두 저것두 고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가씨는 고장이 난 것을 좋아하지우.”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 같애 하는 것입니다.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전화는 벌써 끊어져 있었읍니다. 돌아섰던 그는 망설이다가 전화번호장을 뒤져 가지고 다 시 수화기를 드는 것이었읍니다. 209


“오택부 씨 댁이죠? 바꾸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P邑이라는 시골에 내려가 있다는 것이고, 일주일 있어야 올라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화기를 놓으려니까 누구 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 의원과 같은 고향입니다.” “나는 비선데 무슨 일이지요?” “연락을 취해 줄 수 있읍니까?” “글쎄,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라지 않습니까.” “아마 그 양반이 깜짝 놀라서 기절할 만한 일이지요.” “말씀해 보시지요.” “그럼 거기다가 메모해 주시오. 맹팔, 括弧 하고서 과수 원지기를 하던 머슴. 방골, 이것두 괄호 하구서, 벼락이 떨 어진 마을. 그래두 그분이 쎈스가 무디다면 이도무, 괄호, 이장의 양아버지. 이상입니다.” “그게 뭡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연락해 줄수록 좋습니다.” 이층에 올라와 안락의자에 앉으니 몸이 深淵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읍니다. 밤공기에 줄음지는 벌레 소리에는 沒落을 재촉하는 浪 漫이 있었읍니다.

그가 그런 전화를 걸게 된 것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210


의 침실에 떼거리 쓰다시피 해서 들어와 있게 된 卑屈을 외 면하려는 제스추어에서였는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가 한사 코 自己를 외면하면서 살아온 漫談 같은 日常生活에 終止 符를 찍은 것이 된 이제 그가 흘러들 곬은 ‘吳娘之墓’가 있

는 그 골짜기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때까지 自己를 팬츠로 가리고 산 셈이었읍니다. 빨간 팬츠로 말입니다. 이 제 그것을 벗어던진 것이니, 그의 生活도 리얼하게 되었다 고나 할까. 浪漫을 우는 벌레 소리를 문질러 버리면서 뒷산에서 銃 聲이 서너 방 울려왔읍니다.

그 총소리에 그는 共產軍에 피살된 養父母를 생각했읍

니다. 그리고 그때 李道武 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숨 을 거두었다면, 내 人生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는 것이었읍니다. 義勇軍에 끌려갔었다 해도 洛東江 戰線이 무너졌을 때

내 行路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共產軍을 따라 北

으로 北으로 달아났다. 國軍 編入, 또 敗走. 洞窟 앞에서의 落伍, 倫姬의 죽음, 방골 마을, 捕虜收容所, 鑛山, 大學院,

시골 농업학교의 敎員 生活, 吳娘之墓, ‘解脫’, 間諜 그리고 올가미의 숲… …가도 가도 거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거리의 불 211


빛을 향해서 그 숲을 벗어 나왔는데 어디까지나 어둡기만 한 것입니다. 停電이 되어 거리가 암흑이 된 것인가 해 봐도 아닙니다. 집채 같은 바위가 여기저기에 딩굴어 있는 험한 벌판 가기도 한데 길은 탄탄하게 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얼마쯤 가니 앞에 물이 나타났읍니다. 저 위에서부터 저 아 래까지 보이는 한 一直線으로 흐르는 강물이었읍니다. 地 圖에서 보면 新大陸 같은 데에는 이렇게 直線으로 된 國境

이 있었지만 自然이 이렇게 자로 잰 것처럼 區劃이 되어도 좋을까? 運河인지도 모른다 하면서 강 건너로 건너가 보니 거기는 하얀 갈대밭이 저 地平線까지 뻗어 있는 것입니다. 달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대낮 같은 그 갈대밭을 걸어 가노라면 하얀 파도를 가르면서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읍니 다. 나는 어째서 이런 데에 와야 했던가? 발을 멈추고 생각 하여 보았읍니다. 무엇을 發見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런데 무엇을 발견 하기 위해서였던가?… 두리번거리는데 거기 유별나게 密生해 있는 갈대 사이 로 무슨 비밀스러움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놀란 눈알이 이 쪽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아 저것이었다! 그 두꺼비 같은 얼굴은 벌떡 일어나면서 허둥지둥 달아 212


는 것입니다. 그 뒤를 쫓아 뛰다가 어디서 꼭 본 것 같은 얼 굴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아 신문에서 본 그 國會議員의 얼굴이다! 뛰던 다리를 멈추었읍니다. 그러면 아까 거기에 水泳服을 찢기고 울고 있는 그 處女 는 누구일 것인가? 두려워서 그곳을 돌아볼 수가 없었읍니다. 짤깍! 하는 매운 소리에 거기를 돌아본다는 것이 눈을 떴 읍니다. 그 李章의 시선에 놀란 女人은 술병을 손에서 떨어뜨렸 읍니다. 술을 따른 유리컵은 한쪽 손에 그대로 쥐고 있으면 서. 꿈에서 채 깨지 못했던 이장도 그만 외면을 했읍니다. 여인은 놀라는 바람에 어깨에서 흘러 떨어졌는지 했던, 알락달락한 日本 유까다(浴衣)를 얼른 집어서 몸을 가립니 다. 時計는 세 時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읍니다.

“정말 자고 있은 거예요?” “…” “사람이 들어와서 할 일을 다 하고 있는 데두 모른다면 그다지 위험한 신세 같지는 않군요.” 213


“…” “열심히 기다리구 있는 줄 알았는데 나만 술이 다 깼네.” 혀가 꼬부라진 마담 바타플라이는 싱거워졌다는 듯이 컵 을 들이키고는 가누어지지 않는 몸을 침대에 가져가 내던지 듯이 눕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이장은 창문 쪽을 향해 비스듬히 앉아 있는 것이지만 線 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여자의 姿勢를 아니 보는 것으로 할 수는 없었읍니다. “그놈 長官 운전수가 미꾸라지 같은 눈알루 슬쩍 쳐다보 지 않았겠어…” 천장을 보면서 분하다는 것인데, 이장은 누가 따라 들어 와 있는가 해서 뒤를 돌아보기로 했읍니다. “한 대 붙여 줬지. 그랬더니 찍소리 한다는 것이 ‘뭐 그럴 거 있읍니까라구 ’ . 한 대 더 붙여 줬지. 아 이번엔 달겨들지 않겠어. 어찌나 무서웠는지 소리를 지르려는데 夜警의 딱 다기 소리가 들려왔기에 있는 힘을 다해서 또 붙여 줬더니 ‘용서해 주십시오라구 ’ …” “…”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남자란 왜 모두 이렇게 못났을까? 신물이 나서 올라와 214


보니 또 남자가 내 방 내 안락의자에 있는 게 아니겠어요…” “…” “알고 보니 그날 그 恩人이예요. 다시 알구 보니 아까 전 화했던 茶房 손님이 아니겠어요.” “나두 그 은혜 은 字를 믿구 전화 걸 생각이 났지요.” “아까는 그렇지 않던데요. 가끔 같이 나온 그 현 선생님 댁에나 가 보세요 할까 하다가 참았죠.” “그땐 좀 여유가 있었으니까.” “어째서 그렇게 조금밖에 여유가 없게 된 거예요?” “…” “깡패예요?” “아니 경찰입니다.” “저는 또 저의 일 때문에 깡패에게 쑥스러운 봉변이라도 당하게 되었나 했지요.” 멋적어졌다는 듯이 머리맡에 있는 卓子에서 담배를 집 어 한 대 피워 물며 모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일로 경찰에 쫓기고 있는지 알고 싶을 텐데…” “제가 상대하는 남자란 거의 모두가 法대로면 경찰에 쫓 겨야 할 신사들이니까 그런 것에는 別無 관심이에요.” “…” “아까 잠옷보다 술병을 먼저 집어 놓는 걸 봤지요?” 215


아까 마담은 스트립쇼우에나 나서기 알맞을 것 같은 몸 을 유까다로 가리는 것보다는 떨어뜨린 洋酒甁을 먼저 집 어서 탁자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일부러 그랬을 경우와 무심결에 그랬을 경우와, 도덕적 으로 어느 쪽이 더 못마땅할까요?” “…” “그런데 저는 어느 한쪽이 아니구 양쪽이 다예요.” 한쪽 무릎을 세우며, 노출되는 다른 다리를 그 위에 걸쳐 놓는 것입니다. 露出이라지만 전날의 그 그물 같은 것으로 가리어진 살결입니다. “어째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괜찮구, 보이는 것은 부도 덕이에요? 같은 共犯인데 말이에요. 안 그래요?” “…” “공범은 같은 무리라는 거구, 같은 무리 사이에는 일부러 라는 게 없거든요.” 다리를 도로 눕히면서 이쪽으로 얼굴을 돌려놓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일부러이면서 동시에 무심결이 되는 거예요.” “육체에는 무심결이라는 것은 없었을 텐데.” “요전에 大哲學者이신 현 선생님이 빠블로프인지 뻬들 로프인지 하는 개 이야기를 들려주던데 이것과 관계없나 216


요?” 條件反射의 이야긴 것 같았읍니다.

“저는 돈만 보면 저절로 흥분이 돼요. 얼굴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허리 아래까지, 저에게는 이게 모든 生存資本인 걸요. 그 돈을 받아서 한 장 한 장 셀 때는 온 몸이 싸늘해지 지만 그건 고때뿐이에요. 生理가 아주 그렇게 젖어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술

취한 때문일까? 걷잡을 수 없는 여자였읍니다. “저 같은 것이 그런 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 의외란 말씀이죠?” 좀 난처해 하는 이장의 표정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입 니다. “‘無識한 敎養’ 女史. 들으셨지요? 현 선생은 저의 宣傳 員이에요. 淑女들에게는 그런 말이 時勢 暴落이 되겠지만

저에게는 도리어 時勢를 올려 주는 거거든요.” “…” “선생님두 현 선생과 동감이지요?” “아니 다르지요.” “어떻게 달라요?” “그 정도가 아니지.” “어떻게 더해요?” 217


“당신은 墮落한 聖女입니다. 알겠소?” “그 말은 나쁘다는 뜻이에요?” “…” “나쁘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저에겐 듣던 중 기분 좋은 말 이에요.” “…” “제가 타락했다는 것은 公認된 사실이구, 공인이라는 것 은 問題性이 없어졌다는 것이니까 남는 건 聖女뿐이거든 요. 幾何에두 말을 들으니 立體幾何라는 것이 있다지 않아 요.” “…” “취소하고 싶으면 취소해두 좋아요.” “아니, 입체기하에두 平面이 있으니까.” “저에게두 지금은 타락했지만 三 年 전까지만 해두 까만 스타킹을 신은 시골 女學校 선생님이었다는 平面이 있거든 요.” 연기를 길게 내뿜으면서 천장으로 돌려놓는 그 얼굴은 좀 그늘지는 듯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읍니다. “二 年 몇 個月 동안에 대단한 출세죠?” “…” “지금 말은 취소해야겠네요. 지금 이것이…” 218


가슴을 꿈틀여서 내밀며 하는 말입니다. “김치 냄새가 물씬물씬 나는 벤또바꼬를 안구 다니던 가 슴보다 不道德하다는 걸 전 알 수 없어요. 지금은 서울 一流 신사들이 이 육체에 한숨을 짓고 있지만 시골 여학교 선생 은 결국 救濟品 신사에게 농락당하는 게 고작이었거든요.” “…” “거기서 전 깨달았어요. 나는 마음보다 육체가 勝한 여 자라는 것을요. 저보다 마음이 착한 여자는 얼마든지 있어 두, 혼자 생각하기를 이 옷 속에 가리어져 있는 내 육체만 한 여인은 아직 못 보았노라구요. 쭈글쭈글한 벤또바꾸를 집어 던지구 서울에 올라와서, 그 육체를 뭇 사내들에게 드러냈 어요. 자기의 승한 것을 가지구 사는 것이 왜 부도덕이에요? 밤의 女王이든 무슨 여왕이든 하여간 女王이 되었어요. 청 년이구 중년이구 노인이구 없이 한숨을 흘리면서 ‘百萬 딸 라의 肉體’를 연발하지 않는 男性이 없었거든요. 實感이 나 게 말하면 하룻밤 價格이 시세가 있을 경우엔 시골 여학교 선생의 月給 半年 치가 되더란 말이에요. 내 마음은 一 딸라 로두 呼價되지 않는데 말이에요. 선생님, 그래두 꾀죄죄해 서 벤또바꼬를 들구 다니는 게 더 人間다와요?” “…” “가끔 市公館 같은 데에 烈女 孝女를 표창하지 않아요? 219


그 표창장을 朗讀하고 수여하는 嚴肅한 나으리가 누구였나 하니 이 마담 바타플라이의 ‘百萬딸라族’이더란 것까지는 못 본 체할 수 있었지만요, 하필이면 그날 밤에두 한숨을 흘 리겠다구 전화를 걸어 왔기에, 좀 뭣하지 않으세요 했더니 ‘그저 그런 거지라는 ’ 거에요. 아시겠어요? 그래서 전 마음 을 더 굳게 해 가지고 靈魂보다 肉體를 더 소중히 하기로 했 죠.” 이장은 어째서 현 선생은 이런 여자를 무식하다고 했을 까 해졌읍니다. “이 다리에 얼마나 많은 돈과 정성이 들었는지 아세요?” 한쪽 다리를 자락 사이로 쭉 뻗어 올리는 것이었읍니다. “유혹하는 게 아니에요. 은인이니까요…” 발목까지 직선으로 뻗은 발가락 끝으로 圓을 그리는데 그에 따라 근육이 意圖가 있는 것처럼 굼니는 것이었읍니 다. “미용 체조를 하구 있는 거예요. 목욕하구 계란으로 온몸 을 맛사지 하구서요. 하루에 三○ 分씩, 一 年 열두 달 하루 도 빼지 않구 말이에요. 아까 食母 보셨지요? 그래 뵈어두 제 육체의 마네이쟈예요. 拳鬪 選手에게 마네이쟈가 있듯 이 남자를 다루는 연기두 가르쳐 주죠.” “…” 220


“화장은 아침에 두 시간, 점심때 한 시간, 저녁때 두 시간. 八 時間 勞動이라지만 저는 하루에 다섯 시간을 육체 다듬

질에 바치는 셈이니까 여왕이 되는 것두 그리 쉬운 일이 아 니예요.” 다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 노력과 정성이면 요지음의 博士學位쯤 네댓 번 타구 두 남을 거예요. 그러니까 보이고 싶구, 신사들의 성욕이 ‘백 만 딸라를 ’ 연발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보람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런 걸 惡循環이라고 한다지요?” 다리를 내려놓으며 크게 숨을 돌려 쉬는 것입니다. “여학교 선생을 이만큼 열심으로 했더라면 쫓겨나기까 지는 않았을 거예요.” “…” “하느라고 했지만 원래가 바탕이 없는데다가 학생 애들 이라는 것은, 실력이 없다구 보기만 하면 정말 무자비하거 든요.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이란 실력이 없는 선생 노릇일 거 예요. 양갈보라구 하는 손구락질 같은 건 黑板 앞에서 빨개 져야 하는 것에 비하면 약과예요.” “…” “아마 解剖해 보면 제 마음은 아직두 빨간 대로일 거예 요.” 221


일어나면서 무릎을 안고 이쪽으로 돌아앉는 것입니다. “제가 국민학교에두 못 다닌 걸 아세요?” “…”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의 특별 교육 을 받았지요. 아마 ‘마담 바타플라이의 ’ 基礎는 그때 다져졌 던 모양이예요. 어머니는 기생이었으니까요.” “…” “사변으로 월남해 가지구 부산에 갔을 때 아버지라는 사 람이 나타났기 때문에 학교 구경을 하게 되었지요. 나이를 속여서 담박에 고등학교 二학년에 들어갔는데 알 게 뭐예 요. 그래두 결혼이나 무사히 잘 하라구 졸업시켜 주더군요. 용기를 내 갖구 대학에 들어갔어요. 입학원서와 등록금만 내면 됐으니까요. 얼굴에는 전부터 자신이 있었지만 내 젖 가슴이라든지 궁둥이의 위력을 알기 시작한 것은 대학 교수 들의 鑑賞力에 의해서였어요. 學點은 모두 은근한 몸짓이 따 줬으니까요. 졸업은 해야겠구 할 수 없잖어요.” “…”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해 가지구 시골 여학교에 간 것까 지는 좋았는데 여학생들에게는 젖가슴이나 궁둥이가 통하 지 않는다는 걸 미처 몰랐어요. 밤잠을 자지 않구 예습을 해 가지구, 가두 質問 攻勢를 당해 낼 수가 없어요. 한국의 대 222


학 교수님들은 너무 무책임했다구 원망했지만 늦었어요. 여 름방학까지는 어떻게 버티었지만 개학이 되는 것이 무서워 서 살이 빠질 지경이었어요.” “…” “그러던 차에 洋品商을 하는 구제품 신사가 본색을 나타 냈거든요. 실력이 없으니까 몸치장으로 학생들을 위압할 필 요가 있어서 외상을 꽤 많이 졌단 말이에요. 好人인 줄 알았 는데 당장 갚지 않으면 데마를 퍼뜨리겠다는 거에요. 몸을 바칠 테니 외상값과 엇셈을 하자구 提案한 것을 자기가 거 절을 했노라구. 그렇지 않아두 실력이 없어서 위태위태한데 그런 소문까지 나는 날에는 당장 쫓겨나기 안성마춤이거든 요. 쫓겨나기란 정말 싫은 거에요. 앞날을 위해서 눈을 감았 어요. 이번에는 결혼해 주지 않으면 관계했다는 걸 퍼뜨리 겠다는 거에요. 남자의 뺨을 때려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 어요. 찰싹 하는 소리에 눈이 번득 뜨이는 게 아니겠어요. 앞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거에요. 마담 바타플라이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어요.” “아이는 안 났나요?” “선생님은 참으로 生物學的이군요.” 상당히 기분이 빗나가게 하는 소리였읍니다. “제가 말을 기다랗게 늘어놓은 것은 그런 데에 흥미를 일 223


으키라구 한 게 아니구요, 어떤 여자를 위해서 騎士道를 발 휘했는가 하는 것을 좀 아시라는 건데, 감상이 어떠세요?” “…” “전 그런 기사도는 필요치도 않구 믿지두 않는단 걸 아셨 죠?” “…” “믿지 않는다는 것은 요전 날 證明된 셈이구, 필요치두 않는다는 것은 아까 영혼보다 육체를 소중히 한다구 했잖았 어요. 그런 폭력에 몸을 빼앗기면 그 말을 배반하는 것이 된 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요전 날에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던데…” “혀는 이와 이 사이에 있는 걸 모르세요?” “깨문다는 말이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말은 쉬워 두…” “선생님은 그런 方面에 흥미가 있으신 것 같으니까 그럼 전에 끊어질 뻔했던 자리를 내보일까요?” 이쪽에서 가만히 있으면 정말 혀를 내밀어 보일 것 같았 읍니다. “아니.” “그래요? 그러시다면 선생님은 조금두 은인이 아니라는 걸 아셨죠?” 224


“…” “이렇게는 아니지만 전 그 점을 밝혀 두고 싶었던 거에 요.” 이로써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몸을 돌려 아주 저쪽을 향 해 누워 버리는 것입니다. 몇 달을 두고 눈망울을 어지럽히던 魔의 육체가 지금 눈 앞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자리는 저쪽 방에 준비되어 있어요.” 허리에서 다리로 흘러내린 그 곡선에서는 나른해진 慾 情이 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어떻게 아세요?” 돌아도 보지 않고 생각난 것처럼 묻는 것이었읍니다. 일어서려고 몸을 움직였던 이장은 주춤했읍니다. “어머니가 들으니, 아까 오택부란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거시더라던데요?” “마담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이마가 좁구 돈벌이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비열해질 수 있는 구두쇠로 유명하지 않아요.” “…” “어떻게 아세요?” “같은 고향의 선배라는 것 이외에는 나두 그 정도로 알구 225


있지요.” “상당히 복잡한 관계 같더라던데요?” “상당히 관심을 갖구 있는 것 같은데 그 사람두 百萬딸라 族인가 하는 건가요?”

“관둬요!” 거친 그 소리에 이장은 얼떨떨해졌읍니다. “그런데 선생님…” 하면서 이쪽으로 번져 눕는데, 방금 질렀던 소리는 그사 이에 어떻게 처리했을까 싶게 훤한 얼굴이었읍니다. “百萬딸라族이란 건 固有名詞예요? 보통명사예요?” 그 얼굴을 대하면 욕정이 가시어지는 그런 여자였읍니 다. “깔보이기만 하면 별 질문을 다 당해요. 전 문법 선생두 아닌데 건드리는 거예요. 포플라는 고유명삽니까, 보통명 삽니까 하는 질문이 던져지지 않았겠어요. 그래 校庭을 내 다보았더라면 문제없었겠는데 ‘그건 말이지요’ 하면서 소나 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벗나무 이렇게 나무가 여러 가지라는 생각에 끌려서, ‘그건 고유명사지요’ 했더니, 한 아이가 ‘선 생님’ 하구 일어서더니 창밖을 가리키는 거예요. 교정 주위 엔 여남은 그루의 포플라가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차 했 는데 그 아이가 벌써 ‘고유명사가 저기에 저렇게 많네요’ 하 226


니까 잘 알지두 못하는 것들까지 와아 발을 구르면서 좋아 하지 않겠어요. 어찌나 땀을 뺐는지, 숙직실에 가서 보니 속 옷이 다 젖어서 나 보기도 가엾어졌지만 그런 덕분으로 공 부도 했으니까…” “…” “아이 졸려 그런 珍談은 얼마든지 있으니…” 손을 가져가며 하품을 하는 것인데, 하품을 하느라고 감 겼던 눈은 하품이 끝나도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듣고 싶으면 내일 또…” 안녕히를 하려는 듯 들려던 손이 제물에 몸 밖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름을 安芝夜라고 하는 마담 바타플라이는 정말 그렇 게 간단히 잠이 들 수 있는 것인지, 창밖에서 울어대는 벌레 소리의 가장자리에 기어들 듯 쌕쌕 벌써 코를 고는 것입니 다. 몸을 저쪽으로 뒤치락이는 바람에 한쪽 옷자락이 흩어져 서 옆가슴과 다리 하나가 통으로 드러나게 된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가슴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다리로 팽팽하게 이어진 능 선… 그것은 風俗을 짓밟고 오만하게 누워 있는 墮落. 神의 227


질투이면서 하나의 啓蒙思想이었읍니다. 靈을 단념하고 肉 을 통하여 이데아(故鄕)로 돌아가는 啓示라고나 할까. 이장은 海岸線을 부는 바닷바람에 몸이 시려지는 것입 니다. 영원히 永遠히 거기에 그렇게 굳어 주었으면 싶은 그 ‘墮 落’에 꽃송이가 날아들어서는 떨어집니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금시 꽃으로 묻혀 버립니다. 호산나 호산나… 群衆들의 환호성 사이를 꽃수레가 된 그 檻車는 골고다

의 언덕을 올라갑니다. 그 앞에 가는 함거에는 돌멩이가 수 없이 날아드는데, 거기에는 十 年 守節 끝에 그만 젊은 물장 수를 자기 방에 불러들인 지난날의 烈女가 무릎을 꿇고 悔 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리를 쭉 펴고 반 누운 자세인 蕩女는 만면에 웃음을 지 으면서 환호성에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刑場에 도착했읍니다.

두 여인은 十字架에 손발이 묶여 하늘 높이 세워졌읍니 다. 槍을 꼬나든 군사 두 명은 正午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오 기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열녀는 실신해서 축 늘어졌는데, 탕녀는 오연히 하늘의 228


一角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더한층 소리를 돋구어서 호산나를 외치는 사이 사이 마음 구석으로는, 情이 바다와 같고 저렇게 좋은 여자 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라고 하면서, 탕녀의 육체를 아까와 하는 한숨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人民裁判에서는 왼손을 높이 들어서 사 형에 처할 것에 대찬성을 한 것입니다. 탕녀의 告發文은 이러했읍니다. “十字架는 한갓 美術品이 되고 福音은 플랫포옴에서 적 시는 손手巾만도 못하게 되어 市民 生活에 새 十字架가 갈 망되어 온 지 이미 오래였으니, 靈으로써 실패한 天國을 肉 으로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밤마다 證言하고 있는 저 蕩女 를 마땅히 磔刑에 처함은 우리에게도 多幸인 동시에 저에 게도 榮光된 일이라 할지라. 왜냐하면 어느 누가 故鄕에 돌아갈 생각이 없으리요마 는 故鄕에 돌아가려면 秩序를 파괴하고 일체의 제스처를 청산해 버려야 하겠거늘 그리되면 市民은 무엇을 의지하여 日常生活을 살며 무엇을 핑계하여 必要惡을 행할 것이며,

또 이미 自由나 正義보다 自由나 正義를 갈망하는 제스처 가, 純潔이나 犧牲보다 純潔이나 犧牲을 칭송하는 제스처 가 더 우리의 生理로 되었는데 이제 그 허울을 벗어 버리면 229


紳士 淑女들은 무엇으로 人間을 가리리요. 그러니 저 蕩女

를 磔刑함으로써 우리는 秩序에 충실했음을 立證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十字架는 본받아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 市民 은 善男善女로서의 제스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行實 을 公公然하게 따를 수 있는 것이니 이 어찌 우리에게 多幸 할 일이 아닐 것이며, 그 十字架는 舊約에서 新約으로 넘어 가는 橋梁이 되는 것이니 저 蕩女에게 이보다 더 거룩한 죽 음이 어찌 주어질 수 있으랴…” 李章은 幻想을 떨어 버리면서 일어섰읍니다.

오늘 밤에도 어디서 질탕하게 놀다가 돌아온 娼女가 아 닌가! 자기에게 욕정을 품고 있는 줄 알면서, 그 남자의 눈앞 에서 거의 나체라고 할 수 있는 몸을 내놓고 잠들 수 있는 女 子다.

그러나 그 욕설은 慾情보다 疲勞를 더 못 이겨서 하게 된 소리인지도 모릅니다. 時計는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읍니다.

피로할 대로 피로해진 이장이었읍니다. 除隊軍人에게

쫓기다가 결국 共產主義에서 脫落하게까지 된 오늘은, 間

諜이기는 하였으나 조용한 생활을 해 왔던 그에게는 激動

의 하루였다고 할 수 있었읍니다. 車窓 밖으로 내다본 무우밭인 줄 알았는데, 深山幽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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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人蔘밭이었읍니다. 밭도 아닙니다. 아니 밭이라고도 할 수 있었읍니다. 몇 百 年 묵었으리라 싶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쪽쪽 뻗어 서 있는 비탈인데, 灌木과 잡초가 엉클어져 있는 사이사이에 보이는 것은 不老 長生한다는 인삼이고, 안개가 자욱해서 저 멀리까지는 보

이지 않지만 또박또박 일정한 사이를 두고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山蔘이 아니고 家蔘인 듯싶었읍니다. 배가 고픈 생각이 났읍니다. 배가 고파하는 것은 不老長 生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인삼 하나를 뽑아서 우선 단가 쓴가 씹어 보았읍니다. 깜 짝 놀랐읍니다. 바로 콧등에서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 갓난 애의 울음소리가 터진 것입니다. 보니 인삼에서 빨간 물이 줄줄 흘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놀라서 그 인삼을 다시 자세히 보니 그것은 標本室에서 흔 히 볼 수 있는 胎兒와 꼭 같은 모양을 한 것입니다. 恐怖에 질려, 얼른 그것을 제자리에 꽂아 놓으면서 보니

여기저기에 책가방만 한 碑石이 있는데, 그것은 墓碑가 아 니라 ‘產出之地’라는 碑인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자세히 보니 ‘安芝夜產出之地’라고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잘리는 소리가 난 것 같기에 그쪽을 보니, 사람 231


모양을 한 그림자가 안개 저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는 것인데, 그 손에는 곡괭이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읍니다. “아 人間 栽培!” 거기는 人間을 栽培하고 있는 밭이었던 것입니다. 도망치는 것도 잊고 그 엄청난 陰謀에 얼떨떨해져서 멍 하니 서 있다가, 언제까지 안개에 싸여 있는 그 희미한 그림 자가 바로 거기에 이르렀을 때에야 정신이 나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읍니다. 빨리 경찰에 가서 알려야지! 지금은 自由다 平等이다 하 고 다투는 人間的 싸움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구! 火星人 이란 정말 있는 것이고, 그것은 화성인이 아니라 地球人이 더라구! 地球人이 出現했다! 하느님이 만들어 낸 우리 人間을 몰

아내려는 거다. 그 五列은 벌써 우리 社會에 潜入해 있다! 마담 바타플라이부터 고발해야지. 아 그 蕩女가 그 五列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나를 洗腦하려고 한 것이다! 처음부터 計劃的이었다. 偶 然이란 저들이 마련해 놓은 陷穽의 딴 이름인 것이다!

아 왜 이 다리는 빨리 뛰어 주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기 급할 지경인데 내 다리는 내 다리 같지 않다. 내 말을 잘 들 어주지 않는다. 232


저들과 內通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細胞의 一部 는 벌써 저들의 工作에 걸려 洗腦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 이다. 내가 나를 산 것은 나의 一部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다른 내가 나를 살고 있었다는 것은 썩 전부터 느끼고 있었 다. 설마하고 얼버무리면서 살아온 것뿐이다. ‘自我’에게 속은 것이다! 自我니까 낸 줄 알았다. 나를 犧 牲시켜 가면서 모든 것을 그에게 白紙委任하고 살았다.

골짜기에 내려서 한참 뛰다 돌아보니 불도우저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괴상한 機械가 전속력으로 쫓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깔아뭉개 버리려는 것일 것입니다. 아 여기서 내가 죽으면 이 사실을 누가 세상에 알리나. 모든 人間的 活動을 停止하고, 人間은 人間을 守護할 十字 軍을 결성해야 한다구 누가 打鐘해 주나.

그 五列들은 ‘多數決’이니 ‘左側通行’이니 ‘自由 아니면 죽음이니 ’ ‘A는 非A가 아니다니 ’ 하는 따위의 流言蜚語를 퍼뜨려서 우리 日常生活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警告해야 하나. 우리 意識은 저들의 權謀術數에 의해서 明 渡令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디에 가서 密告

할 것인가! 그 怪物의 입김은 바로 등 뒤에 닥쳤읍니다. 아 나는 이제 죽는구나… 233


마지막으로 萬歲를 불러야겠다! 萬歲를 무슨 萬歲를 부를까? 그렇다. 人間 栽培 萬歲다. 툭! 强打를 당하고 앞으로 고꾸라졌읍니다. 턱이 어디에 부딪쳤읍니다. 머리를 들어 가지고 보니, 車 안은 발칵 뒤집힌 것이, 한 번 엎질렀다가 다시 해 놓은 것 같았읍니다. 기차가 急停車한 것이었읍니다. 무우밭이 아니고 이삭들이 익어 가는 논밭 한가운데였읍 니다. 입이 아프기에 손을 가져가 보았더니 터졌는지 피가 묻 었읍니다. 소에 풀을 먹이던 少年이 기차에 치였다는 말이 전해 왔 읍니다. 얼마 후, 살아 있는 사람과 짐을 실은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읍니다. 窓으로 내다보니 조그만 屍體는 거적에 덮여, 무슨 ‘告 發’처럼 거기에 멎어 있었읍니다.

“저 少年은 그 怪物이 치여 죽인 것이다.” 李章의 입은 不隨意 筋肉처럼 불쑥 이런 蜚語를 뇌까린

것입니다. 234


불도우저의 꿈과 저 少年의 죽음은 世界의 根本 形式인 時間에 있어서 繼起한 것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現象이 因 果關係에 있는 무슨 秩序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현상은 小括弧로써는 꿈과 生時라는 별개의 괄호에 묶이어 있지만, 大括弧로써는 하나의 數式으로 이어져 있 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끔 경험하고 있는 꿈과 生時의 그러한 繼 起가 단순한 偶然의 一致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必然이

라고 처음부터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同類의 ‘偶然’ 들이 덩치를 져서 ‘必然’을 僣稱했던 것이다.

기차는 江가를 달리고 있는데, 두세 마리 白鷺가 놀라서 강 건너로 날아가고 있었읍니다. 아직은 모르지만 그 두 現象 사이에는 무슨 關係가 있다. 아직 모른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멘델 以前에도 ‘멘델의 法則’은 作用했고, 파스트르가 發見하기 전에도 細 菌은 人體를 좀먹고 있었다. 그런 歷史의 敎訓이 있는데도

아직 우리는 ‘發見’ 이전에는 그 ‘存在’는 존재해 있지 않는 것으로 하고 있다. 存在가 먼저 있고 다음에 그 發見이 있는 것이다. 그런

데 우리 意識은, 發見이 存在에 先行해 있는 것으로 보는 그런 투로 되어 있다. 우리 意識은 世界를 거꾸로 解釋하고 235


있는 것이다. 우리 網膜에는 世界가 거꾸로 비쳐져 있는 것 이다. 存在는 發見 如何와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어떤 두 現象 사이의 ‘關係’란 우리가 그것을 알 기 前에도, 안 後에서처럼 있는 것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關係’라는 것도 하나의 意味다. 意味 란 人間의 意味이고, 의미는 처음부터 意味인 것이 아니다. 人間이 그 意味의 奴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는 意味가

된다. 그런데 人間이란 원래가 奴隸이고, 노예인 것은 人間의 條件이다. 그런 ‘意味’의 거미줄에 얽힌 나비와 같은 것이 人間이고, 世界란 그런 거미줄의 交響樂이다.

그러니 문제는 意味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데에 있는 것 이 아니고, 그 奴隸가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데에 있다. 人蔘밭의 꿈과 그 少年의 죽음과의 사이에 關係가 있는

가 없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이 있다고 보고 싶은가 없 다고 보고 싶은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것을 없다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은, 現 秩序에서 우리가 幸福해질 수 있다고 보 고 거기에 希望을 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現 秩 序로써는 도저히 人間이 救濟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마

땅히 그 두 現象 사이에 무슨 關係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 236


다. 秩序인가, 救濟인가? 이 選擇이 現代人의 運命이다. 秩序냐 救濟냐 하고 외치는 것은 二者擇一만 하면 만사

가 다 해결되는 줄로 아는 感傷癖의 한 發動이고, 意識이 스스로의 老衰를 외면하려는 하나의 遊戱랄까 左衝右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秩序는 救濟와 對立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이르려는 한 階段이었읍니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 만 다만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秩序가 굳어져서 拘 束이 될 때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救濟가 되는 수도 있었지

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陣營 안에서의 政敵과 같은 것이고, 秩序의 外敵은 어디까지나 無秩序입니다. 그 런데 秩序냐 救濟냐 하는 二者擇一의 강요는, 救濟를 위해 서는 無秩序와도 同盟을 맺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外敵의 힘을 빌어 政敵을 없애겠다는 것과 같은 亡國에의 길이고, 스스로의 墓穴을 파는 일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誠實과 正直까지를 對立시켜 가지고, 誠 實하기 위해서라면 不正直과 손을 잡는 것을 서슴지 않았

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런 生理를 現代的이라 해서, 겉 으로는 悲痛한 표정을 짓지만 내심 우쭐해지기까지 했던 것 입니다. 이 遠近 輕重을 분별할 줄 모르면서 도리어 비통한 表情 237


을 취하는 한편 거기에 自負를 느끼고 있는 沒廉恥, 그것은 老衰의 변명할 수 없는 한 徵兆였던 것입니다. 老衰를 카무

플라즈5)하기 위해서, 原色 넥타이를 매는 그런 포우즈를 그 들은 ‘現代的’이라고 한 것입니다. 現代란 언제나 가장 늙은 時代이고, 現代人은 가장 ‘늙

은이인 ’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現代를 가장 젊은 時代, 現代人을 가장 ‘젊은이라고 ’ 굳게 믿으면서 살았던 것입니

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歷史는 젊어져 가는 過程이고, 따라 서 原始人이 老人이고 現代人일수록 철부지 어린애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모두 氣分이 나쁘다고 일 제히 抗議를 하고 나섰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現代的이란 것은 老衰해 간다는 딴 이름이라 는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슬기가 있었다면 공 연히 悲痛하게 외치거나 야릇한 포우즈를 취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야릇한 그 포우즈와 悲痛해 하는

5) 카무플라즈: 카무플라주(camouflage). 불리하거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나 지 아니하도록 의도적으로 꾸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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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을 삼가거나 멈출 줄 몰랐읍니다. 왜냐하면 人間은 現 代的이어야 人間이었으니까요. 그리고 人間이 現代的인

한 人間은 落이 재촉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汽車는 P邑에 닿았읍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까지는 P邑에까지 吳澤富 씨를 찾아 갈 생각은 없었읍니다. “恩人은 어젯밤으로 끝난 거예요.” 창문이 열리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뜨는 것을 기다렸다 는 듯이, 마담 바타플라이는 아침 인사가 그런 것이었읍니 다. “安全地帶가 없으시면 여기 籠城하는 것두 자유구, 떠나 시는 것두 선생님의 자유란 말이에요.” 두 시간인지 걸린다는 아침 化粧을 한 마담 바타플라이 는 가을날의 아침 공기에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읍니다. “그런데 미스 ‘첫사랑은 ’ 어떤 여자였나요?”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향해 머리를 매만지면서 하는 소 리였읍니다. 이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주워 입었읍니다. “지금 어디 있나요? 남의 아내? 아니면 저승?” “당신이면 어떻게 했겠소?” “어떤 경우? 부모가 맹반대했을 때?” 239


“아버지란 사람에게 강간당했을 때 말이오.” “끔찍한 말 말아요!” “목 매구 죽었겠소?” “죽게 내버려 뒀나요?” “잘 죽었다고 했지.” “참으로 남자답군요.” “오빠란 자에게 그런 것을 당했을 경우는 어떨까…” “징글맞은 소리 이제는 그만하면 어때요?” “그럴 때는 벼락에 맞아 죽으면 되지.” “전 이제부터 남자라는 一方的인 動物들에게 이 육체를 展示하러 가는 거예요.”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을 늘씬하게 끼면서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왜 남자는 벼락두 안 맞구 목두 안 매나요?” “世界란 원래 一方的이니까 할 수 없겠지.” “여자의 타락은 세계가 일방적이 되도록 짝을 지어 주는 것이니까 烈女보다 이 마담 바타플라이에게 표창장을 주는 것이 솔직하지 않아요?” 장갑을 낀 손으로 양말의 주름을 바르게 하는 것인데 허 벅다리까지 매만져 올리는 것입니다. 외면하려던 이장은 대신 한마디 던져 보았읍니다. 240


“솔직히 말해서 그것두 무심결인가요?” “간섭이 심하겠네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새침해져서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문 열고 나섰다가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잤단 말 안 하시리라구 생각해요. 이래 뵈두 그런 例가 없었으니까요. 현 선생은 입이 가볍구 오택부 씨는 쌍스러운 데가 있어 귀찮아서요.” 마담 바타플라이의 집을 안녕히를 하고 길에 나서니, 驛 으로밖에 향할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驛에서 邑까지는 五 里쯤 떨어져 있었읍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에 업고, 매듭이 풀린 것 같은 다 리를 하여간 교대 교대로 옮겨 놓던 李章은 길이 南쪽으로 한 갈래 갈려 나가는 分岐點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보면 마 치 뱀이라도 밟을 뻔하였던 것처럼 움찔하면서 뒤를 힐끔 돌아보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저으면서 다시 걸 음을 이어 놓는 것인데, 그는 자기의 그림자가 앞길에 던져 져 있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무심결에 저 끝까지 뻗 어 있는 너무 기다란 그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순간 자기의 그림자 같지 않았던 것이고, 힐끔 뒤를 돌아볼 때의 그의 표 정에는 두려움이 서리어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고요한 그 시골길도 뒤숭숭해졌읍니다. 슬그머니 멀리 241


가까이 그늘진 데를 살펴보게 되는 李章이었읍니다. 그 당시 그런 것을 그들은 流行하는 말로 ‘노이로제라고 ’ 해서 病으로 쳤읍니다. 고요가 무겁게 내려앉은 밤길을 갈 때, 그는 무슨 발자국 소리를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第三의 발자 국 소리라고 ’ 했읍니다. 분명히 들려왔는데 발을 멈추고 귀 를 기울이면 없어집니다. 그러면 安堵와 함께 서운한 생각 이 드는 것입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서 일부 러 通行禁止 전의 어두운 길을 헤맬 때가 있는데, 그럴 때의 그는 不安과 期待로 가슴이 미어질 듯한 것입니다. 쌓이고 쌓였던 强迫觀念의 變形인 것입니다. 間諜은 늘 누구의 발자국 소리에 겁을 내면서 살아야 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半生이란 고른 것이 못 되었읍니 다. 養父母의 묘한 눈총 속에서 지낸 어린 時節, 강제로 휩 쓸려 들어간 戰爭에서 당한 動物的 恐怖와 不安, 그리고 組 織 生活, 더구나 무엇보다 그는 私生兒였던 것입니다.

당시 하늘에는 飛行접시라는 怪體가 날아다녔고, 거기 에는 火星人이 타고 있을 것이며, 地球上의 곳곳에 그것이 착륙도 했다는 報道에 온 세상이 騷然해졌던 때였읍니다. 그것을 一笑에 붙여 버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太陽系를 서울運動場으로 치면 地球는 어떤 運動選手의 한 머리카 242


락 끝에 묻은 먼지만도 못하달 수 있는 그 땅덩어리에 몇 十 億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것에 따분함을 느낄 줄 알게 되었

던 사람들은 그 비행접시에 人類史의 轉機, 그것이 地球의 終末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무슨 轉機를

느껴 보고 싶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世界를 猜忌하고, 그것이 깨어져 버려도 서운할 아무것도 자기에게는 없다고 하는 私生兒 李章에게 그런 보도는 荒野에서 외치는 무슨 洗禮 요한의 豫言처럼 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豫感은 그의 觀念을 적셔 버렸고, 그의 마음은 그 발자국 소리를 느끼고 설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느낄 수 있을 뿐, 꼭 요것이라고 캐치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에 對應 하는 感覺器官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 리는 그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맛볼 수도 냄새 맡 을 수도 없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世界는 펜터건(五角形 建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다

섯 가지의 감각기관으로 搬入된 材料로써만 이루어진 것입 니다. 그런데 人間에게 感覺이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은, 마 치 房에 窓이 보통 세 개 있는 것처럼 하나의 事實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방에 창이 세 개만 있으란 法이 없는 것처럼 人 間에게 感覺이 다섯 가지만 있으란 법도 없는 것입니다. 世界는 東西南北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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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으로 내다본 세계가 세계의 全貌일 수 없는 것이라면, 다

섯 가지의 感覺만을 통해서 본 세계가 完全한 세계가 아니 라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人間에게 감각이 다섯 가지가 아니고 여섯 가지, 일곱 가

지 있었더라면 그에게 비친 世界像은 어떠하였을 것인가? 그것이 얼마나 찬란하고 豊富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은, 날 때부터의 소경이 開眼手術 같은 것으로 視覺이라는 다섯 번째의 窓이 열렸을 때 그에게 비친 世界像이, 이전의 그것 에 비하여 얼마나 恍惚한 것이겠는가 하는 境遇를 가지고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혹은 反對로 第六 第 七의 感覺에 비쳐 든 世界가 너무 醜惡하고 비참해서 自殺

이 오히려 美가 되거나, 世界 자체가 破壞되어 버릴 終末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人間에게 다섯 가지의 感覺밖에 없다고 해서 世界에도 다섯 가지의 屬性밖에 없

다고 하는 것은 群盲의 撫象과 같은 愚濫이라 할 것입니다. 世界만이 世界가 아니다. 人間의 可能性은 世界보다 크

다. 世界에는 ‘變化’만이 있지만 人間에게는 그 위에 ‘發展’ 이라는 것이 또 있다. 大括弧의 世界가 있다. 그래야, 地球가 움직이는 것으

로 하고 보니 ‘天動’에서는 矛盾이었던 天體의 運行에서 그 矛盾이 덜어졌던 것처럼, 世界의 矛盾도 비로소 가시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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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것이다. 그 以外 世界가 救濟될 길은 없다. 그가 기찻간에서 꾼 꿈과 少年의 죽음 사이에 무슨 관계 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論理에서일 것입니다. 하여간 덮치고 덮친 强迫觀念은 그렇게 그를 世界 밖으 로 散策시키는 것이었읍니다. 지금 그는 그 世界에서는 유

일한 그늘이었던 共產組織에서까지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해도 지고 마을은 점점 가까와졌읍니다. 부글부글 貪慾처럼 연기를 토해 내고 있는 工場의 높다 란 굴뚝을 건너다보듯, 마을을 사이 두고 北쪽 산비탈에 붉 은 벽돌집이 육중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읍니다. 마을에 들어서려다가 거기 쓰러져 가는 판자에 廣告가 나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읍니다. ‘國會議員 吳澤富 先生 님 大講演會’라는 것이고, 場所가 여러 곳인 것으로 보아 選 擧區 全域에 걸친 것인 듯싶은데 오늘 날짜의 場所는 여기

P邑이 아니었읍니다. 한참이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발을 떼 놓으면서 보 니, 저쪽으로 巡警이 자전거를 몰고 달려오고 있었읍니다. 驛의 파출소로 가는 길인 듯 보이는 그 순경은 李章의 아

래위를 훑어보면서, 檢問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는 듯 하다가 그대로 지나가기로 한 것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 좀 서시오!” 하면서 급히 자전거를 한 바퀴 크게 돌려 가지 245


고 그의 앞길에 갖다 대는 것이었읍니다. “그건 무슨 피요?” 그 시선을 따라 양복 자락을 헤쳐 보니 와이샤쓰의 왼쪽 포켓에 회중시계의 크기만 하게 정말 피가 묻어 있는 것입 니다. “누구하고 싸움했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汽車가 급정거할 때 다쳤던 입에서 흘러 떨어진 것 같았

지만 그런 것을 길게 설명할 기분이 나지 않았읍니다. “신분증 보이시오.” 市民證도 들어 있는 케이스를 내주었읍니다.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겁니까?” 말소리는 좀 정중해졌지만 눈빛은 도리어 험해진 것입니 다. 오택부의 이름을 대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읍니다. 그래 서 지나가는 길에 좀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고 했읍니다. “무슨 볼일이오?” 순경의 말소리는 도로 거칠어졌읍니다. “말할 수 없는 일도 있지요.” “그럼 支署까지 좀 같이 갑시다.” “오 의원을 만나러 왔읍니다.” 246


“뭐요? 오 의원님을? 어떻게 아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알든지 상관없지 않습니까?” “나두 오 의원님을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오. 오늘 여기에 안 계시고, 선생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野黨 계열 이 준동할 우려도 없지 않아 있어서 案內해 드려야 하겠읍 니다. 결국 支署에 안내되어 갔읍니다. 시골 경찰이라고 업수이 봤는데 市民證이 가짜라는 것 이 드러났읍니다. 그제는 오택부 의원의 친척이라고 했읍니다. “거짓말 마라! 오 의원 대감께서 가짜 시민증을 가진 친 척이 있을 리 없어!” “그 양반은 이북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친척이 한 두 명쯤 있을 수도 있지요.” 지서 主任이 나섰읍니다. “어떻게 되는 친척이오?” “어떻게 되는지 그 양반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그런 소리 여기선 안 통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후려갈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 다. “오택부의 이름이 여기서는 안 통합니까?” 247


“뭣이…” 지서 주임은 멈칫해졌읍니다. 오택부 국회의원은 이 一 帶의 生殺與奪之權을 쥐고 있는 덴노헤이까였고, 지서 주

임이라면 이 마을에 있어서의 그의 私兵長인 것입니다. “어떻게 되는 친척인지 말해 보오!” “그 양반이 그런 놈은 모른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요, 그때는 왜 내가 가짜 시민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내가 지금 말한 대로 그 양반에게 전해야 합니다. 한 三○ 년 전에 과수원에서 일어난 일도 참고로 다 말하겠읍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때린다든지 하지 말아 주시오.” 지서 주임은 난처해졌읍니다. 가짜 시민증을 가지고 있 으니 빨갱이임이 틀림이 없는데, 그의 말로 미루어 보면 오 의원과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았읍니다. 까 딱 잘못 처리하면 이래도 저래도 모가지가 날아날지 모를 판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골치덩어리를 붙잡아 온 순경이 원 망스럽기도 했읍니다. 그는 나라의 支署 主任이지만 그를 자리에 앉혀 준 것은 오택부 國會議員인 것입니다. “거짓말이면 없어! 알았소!” 헤식은 고함을 지르면서 유치장에 집어넣는 것이었읍니 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가까이 되어도 불러내는 248


일도 없었읍니다. 그보다, 그가 그 유치장에 들어갔을 때 서너 명 있었던 留置人이 그 이튿날 저녁때쯤 한꺼번에 불리어 나가선 다

시 돌아오지 않았고, 뿐더러 새로 들어오는 유치인도 그 후 없어서 이장은 죽 혼자 있게 된 것입니다. 여드렌가 아흐레째 되는 날에야, 해가 다 진 무렵 그 유 치장에서 불리어 나갔읍니다. 지서 주임의 책상 위에는 이장의 소지품이 고스란히 놓 여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서울에 照會해 본 결과 시민증은 가짜가 아니라 는 것이 밝혀졌소.” 헛기침을 하면서 손으로 소지품을 거두라는 시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방하는 것인데 그동안 불편한 것이 많았겠지 만 모두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니까 그렇게 알아준다는 의 미에서 자 시원하게 한잔 드시오.” 거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소오다水를 그에게 권하는 것 입니다. 이런 시골에는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고 큼직한 유 리컵이었읍니다. 이장은 손을 가져갈 생각이 나지 않았읍니다. “자 사양 말구, 모든 것을 씻어 버리자는 의미에서, 자…” 249


“…” “씻어 버리지 못하겠단 말이오? 아무리 시골 경찰이래두 好意를 무시당하면 섭섭하단 말이오.”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하여간 그가 하라는 대로 하고, 다음을 기다려 볼 수밖에 없었읍니다.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데 주임은 불쑥 일어서는 것 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쭉 들이키시오.” 얼른 마셔 버리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김에 마시고 일어서려니까 그 주임은 도로 앉 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딴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書類를 이것저것 뒤적이는가 하면, 문밖에 步哨 서 있는 순경에게 무엇을 물 어보기도 하고, 변소에도 갔다 옵니다. 시간을 끄는 것입니 다. “그럼 슬슬 가 봅시다.” 어디에 간단 말도 없읍니다. 밖에는 지이프車가 있었읍니다. 이장을 뒷자리에 앉혀 가지고 지서 주임은 東쪽으로 차 를 몰아대는 것입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차는 마을 밖에 나가서는 소걸음처럼 250


느릿느릿해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소?” “…” “上部의 지시에 따라 어느 절간으로 안내하는 거요.” 이장은 갑자기 몰려드는 졸음을 막을 수가 없었읍니다.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뜨려고 하면 할수록 눈까풀은 무겁게 내리덮이는 것이었읍니다. 그만 곯아떨어졌읍니다.

… 목젖 아래가 따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떴읍니다. … 이게 눈 뜬 걸까? 보이는 것이 없읍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한가집니다. 어둠이라기보다 그저 無明, 그리고 쓰레기통 속의 忘却 과 같은 고요… 머리가 실실이 금이 서는 것처럼 아픕니다. 목젖 아래가 또 따끔해졌읍니다. 거기에 손을 가져가 보니 와이샤쓰의 칼라가 흠뻑 젖어 있읍니다. 여기가 어딜까? 251


이불을 덮고 寢牀 위인 것입니다. 손을 뻗어 더듬어 보니 벽도 바닥도 거칠거칠한 널이었 읍니다. 거칠거칠한 그 感觸이 망설이던 不安을 불러냈읍 니다. 자리에서 내려 손을 가지고 살펴보니, 그런 침상을 두 개 놓으면 거의 차 버릴 만한 골방인데 사면이 모두 거칠은 널 로 된 壁이고, 창이나 문은 끝내 없었읍니다. 팔을 위로 뻗 쳐 보니 역시 널로 된 천정이 손바닥에 닿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 속이 아닌가… 도로 침상에 몸을 눕히니 憤한 생각이 번져 드는 것입니 다. 이건 棺 속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 같기도 했읍니 다. 머리가 쑤시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 소오다水다. 그저 최면제였을까? 그보다 더한 毒藥이라면 이불이나 침상과 짝이 맞지 않 았읍니다. 그러나 이불과 침대는, 창문도 없는 棺 속 같은 골방과 짝이 지어지지 않았읍니다. 그러니 그 中間이다. 서서히 말라 죽게 하자는 것이다. 직접 손을 대서 죽이는 것이 뭣하니까 저절로 衰盡해 버리 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52


時間에서 함몰되어 버린 空白, 寂寞을 빨아들이는 海綿

과 같은 暗黑. 그저 낫싱. 意識이 가서 머무를 못도 없다. 意 識이 指向할 바를 잃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잠(睡眠)이요, 肉身이 말라서 죽음이 되기 전에 意識이 먼저 미이라가 되

어 버릴 것이다. 미이라가 되기 전에 自己 拂下를 하는 것이 順序가 될지 도 모르겠다. 못이 없다는 것은 ‘남의 눈이 ’ 없다는 것이기도 했읍니다. 人間이란 ‘남의 눈의 ’ 所產인데 여기에는 그 ‘남의 눈이 ’ 없

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이렇게 있고 다음에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나는 여기 에 이렇게 나인 것입니다. 애초에야 먼저 내가 있고 다음에 남의 눈이 나를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이지만, 일단 ‘남의 눈’ 을 意識하게 된 다음부터는 ‘남의 눈이 ’ 나를 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생각이 먼저 있고 다음에 말이 생겨 나는 것이지만, 일단 말이 생긴 다음에는 말이 생각을 이끌 어 내는 것과 그 順序가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이나 ’ ‘남의 눈은 ’ 人間半島를 政治的으로 二分하 는 三八線과 같은 것이어서, 以北의 法은 以南에서는 통하 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以北이 大陸에 이어져 있다고 해 253


서 흔히 以北의 法을 가지고 以南을 說明하려고 듭니다. 그 래서 차질이 생기고 혼란에 빠져서 人間은 昏迷해지는 것 입니다. 人間은 ‘남의 눈이 ’ 塑像입니다. 남의 눈이 彫刻해 낸 藝 術品인 것입니다. 옷은 내가 입은 것이 아니라, 남이 입혀

놓은 것입니다. 이 有形無形의 옷이 곧 人間입니다. 그 옷 이 벗겨졌을 때 그는 人間이 取消되는 것이 됩니다. 그 棺 속과 같은 暗黑은 그 옷을 벗겨 놓은 것이기도 했읍니다. 나는 왜 이렇게 消滅되어야 하는가? 間諜으로서가 아니다. 간첩이면 裁判에 회부시키면 그

만이다. 私生兒로서이다. 그러나 그저 私生兒라면 戶籍에서 거

부하면 족하다. 그런데 세상에서 아주 除去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어떤 私生兒이기에? 아 나는 정말 그런 私生兒인가? 그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까? 그러나 이 暗黑이 그 證據가 아닌가! 그는 消滅을 기다릴 것 없이 차라리 여기에서 自己를 忘 失해 버렸으면 싶었읍니다. 거기서는 觸覺만이 自己를 保 障해 주고 있었읍니다. 손으로 자기 몸을 만져 볼 때만 自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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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거기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 만져 보는 것만 잊으면 自己 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을 만져 보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면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이다. 영원히 잊어버리면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이 된다. 이대로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 그렇게 된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소변이 나오고 대변이 나와도 그저 꼼짝 않고 있으면, 飢餓와 糞尿의 더미 속에 나는 나를 遺失해 버릴 것이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꼼짝 않고 있었는지… 그래도 그동안 잠이 들었던 것으로, 무심결에 눈을 뜬 그 는 눈앞이 뿌여진 것 같았읍니다. 머리를 돌려 머리맡 쪽을 봤읍니다. 실 같은 줄이 쭉쭉 아래로 그어져 있는 것입니다. 눈을 부비면서 다시 봤으나, 분명히 그것은 틈새로 새어 든 빛이었읍니다. 침대에서 내려 그리로 다가가 보았읍니다. 그 壁面의 구석진 곳에 손잡이 같은 것이 느껴졌읍니다. 아무리 밀어 보아도 끄떡하지 않았읍니다. 힘껏 옆으로 당 겨 보았읍니다. 따르르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왈칵 흰 洪水였읍니다. 한동안 눈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읍니다. 255


부시는 눈은 한쪽 손으로 가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 로 나아가 보았읍니다. 내어 들고 나가는 손이 무득득하고 차가운 金屬性에 걸 리었읍니다. “…?” 쇠창살이었읍니다. 動物園 같은 데서 猛獸를 가두어 두 는 그런 창살입니다. 획 돌아서서 보니, 거기는 洞窟이었던 것입니다. 놀라움과 侮辱感이 얽힌 憤怒가 치밀었읍니다. 우리에 갇힌 짐승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憤怒는 몇 瞬間 동안의 현상이고, 거기에 便器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땐 啞然해지지 않을 수 없었읍니 다. 洞窟은 二分되어 있는데 안쪽은 널로 된 寢牀이 놓여 있

는 하꼬방이고, 바깥쪽은 바위가 노출되어 있는 그대로였읍 니다. 굵직한 쇠창살은 가로로 세 줄, 세로는 여남은 줄이 콘크 리이트로 단단하게 四면 바위에 박혀 있어서, 코끼리의 힘 으로나 여우의 몸집으로도 여기를 離別할 수는 없을 것 같 았읍니다. 그 한쪽 아랫구석에는 기어서나 겨우 드나들 만 한 문이 있는데, 밥공기만 한 자물쇠가 밖으로 걸려 있었읍 256


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갇히고 보니 자기가 그렇게 어마어 마한 存在인 것 같았읍니다. 굴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콘크리이트며 하꼬방의 널 따위 는 금방 손질한 새것이었읍니다. 침상 밑에는 두둑한 이불이 예비로 갖추어져 있는 것으 로 보면, 當分間이 아니고 적어도 겨울은 여기서 지내야 한 다는 것인데, 그 長期計劃에 비해 備品이라곤 그 이불과 침 상과 便器뿐이니, 말하자면 動物로서의 條件만이 고려되어 있는 것이었읍니다. 창살 밖으로 바라보이는 것은 먼 산등성이와 하늘과 하 늘에 떠 있는 구름뿐, 바로 앞에는 싸리의 나뭇단이 둑처럼 쌓여 있어서 下界와는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날이 점점 밝아지면서 햇빛이 번져지는 것으로 보아 이 동굴은 南面해 있는 것이고, 싸리나뭇단의 둑을 가지고도 하늘에 오르는 연기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이어서, 지이프車 로 어디 먼 곳으로 옮긴 것처럼 해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닥 꺼멓게 오르는 그 연기가 열흘 전 마을에 들어오면서 본 그 工場의 굴뚝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면 마을을 사이에 두고 그 北쪽 산기슭에 육중하게 자리 잡았던 벽돌집은 바 로 이 발 아래라고 하면 位置가 서로 맞아 들 것이었읍니다. 257


안으로 들어가 몸을 던지려다가 보니 그 침상 밑, 이불 위에 까만 책이 있었읍니다. 집어 보니 聖經책입니다. 그는 그 성경책을 들고 나가 창살 밖으로 홱 내동댕이쳐 버렸읍니다. 읽어야 한다면 누가 이 책을 더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것 이고, 갓난아이의 입 코를 이부자리로 틀어막아 죽이려던 그 손이 갖다 놓은 책이라는 것이었읍니다. 자기를 여기에다 가둔 것이 吳澤富이고, 여기가 그의 벽 돌집 뒷산이라는 것을 正面으로 알게 된 것은 한 달쯤 지나 서였읍니다. 그동안 그가 본 사람이라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씩 먹을 것을 날라다 주는 老婆뿐이었읍니다. 허리가 구부 정한 그 식모는 노파라기보다 늙은 生物이었읍니다. 일절 말이 없다기보다 생각이라는 것이 그 머리 안에 있는지 없 는지 짚어 낼 수가 없는 것이고, 그 하는 동작을 보면 자기에 게 주어진 일은 이럭저럭 해내기는 해내는데, 사람이란 늙 으면 어린애가 된다고 하는 말을 증명하는 것도 힘에 겨운 것 같은 그런 것이었읍니다. 주어진 일 이외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싸리나뭇단의 그 늘에 굴러 있는 성경책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그대로 방 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58


그래서 이장은 노파가 나타날 때마다, 이번에는 그 책을 어떻게 하는가 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이 그의 유일한 興이 되기도 했는데, 그 흥은 언제까지 가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이었읍니다. 따라서 그 노파의 존재는 동굴의 생활에 변화 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언제부터는 오히려 단조로움을 더 짙게 하는 作用을 하는 것이었읍니다. 늙은 생물이라기 보다는 老朽해진 로봇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 었을지도 몰랐읍니다. 느릿느릿하고 불안스러운 그 동작은 그런 대로 二 點 간 의 最短距離를 움직이고 있는 셈이었읍니다. 굽어진 허리 를 짊어지듯 해 가지고, 한 손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크고 작 은 도시락을 두 개 묶어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물주전자를 들고서 나타나는 데서부터, 들고 온 것을 창살 사이로 밀어 놓고 그 손으로 변기를 어디에 가서 가져다 놓고는, 거기 나 지막한 바위 끝에 오므리고 앉아서 담뱃대를 피워 무는 동 작까지 판에 박은 듯이 일정한 것입니다. 그 노파가 그런 로봇이 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李章이라 는 사람이 말을 던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장은 한 마디도 입을 연 적이 없었읍니다. 입을 연다면 그것은 怨聲이고 비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니, 自己 侮辱밖에 될 것이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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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미칠 듯이 지리한 그날그날을, 그는 오직 吳澤富 가 자기 발로 걸어서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으로 참아 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오택부는 이장 쪽에서 뭐라고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벙어리 같은 노파는 꼭 한마디 한 적 이 있었읍니다. 여기 들어온 지 二○ 일쯤 지나서였읍니다. “무신 할 말이 없시우?” 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었는데, 그 늙 은 로봇에게 그런 말을 지어낼 機能이 있을 리 없었읍니다. “저 공장에서는 왜 요지음 연기가 안 나오?” 바람도 없었는데 며칠 계속해서 연기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신 옌기가?” 얼굴을 돌려 하늘을 보는 것이지만, 그 이상은 말을 이어 낼 재간이 없는 모양이었읍니다. “예기는 깊은 산속이래든데…” 하고는 도로 로봇이 되어 버린 것이었읍니다. 늦가을이라기보다 오슬오슬, 아침저녁으로 옷깃이 여미 어지게 되는 어느 날, 吳澤富는 마침내 돌멩이 같은 것으로 창살을 뚝뚝 두드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말입니다. 문을 열고 보니 어슴푸레한 달빛을 뒤로 받으며 그 그림 자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읍니다. 260


“이리 좀 나와.” “…” 문을 연 것을 뉘우쳤읍니다. 처음 대하게 되는 오택부의 그 상판은 太陽의 광선 아래 정면으로 봤어야 할 일이었읍 니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 “무슨 말이 있을 법한데 없느냐?” 高壓的이던 말투는 약간 後退한 듯했읍니다.

“그럼 내가 하겠다. 네가 以北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라면 이 내가 책임지고 보내 주겠다.” “…” “어떠냐. 이렇게까지 힘써 줄 줄은 몰랐지? 나는 國法까 지 어기면서 너를 구출해 주려는 거다.” “…”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여기다 보호해 준 거다. 간첩은 무조건 총살이다. 이 내가 아니었더면 너는 벌써 총살돼 있다. “…” “벙어리냐! 이리 나와서 뭐이라구 말이나 해 봐!” 밖에 서 있는 그에게는 李章이 어느 쯤에 서 있는가 하는 261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 말뜻을 제대루 모르는 모양이구나. 설명해 줄 터이니 잘 들어 둬라. 마을 사람들에 너는 미친 사람으로 되어 있지 만 언제까지 그렇게 감추어 줄 수는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네

가 共產黨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選擧에 불리하지만 그런 것쯤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다음 선거에 실패하면 여

기 경찰은 내 政敵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리되면 너는 경 찰에 넘겨져서 담박에 총살이다! 알아들었지? 내가 책임지 구 틀림없이 너를 越北시켜 주겠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이외 딴 이유란 있을래야 있을 수 없다! 알아들었느냐? 뭐니 뭐니 해두 목숨이 제일이니까 딴 생각은 집어치우구 살 도 리를 찾아야 한다. 알아들었느냐?… 응 알아들었으면 알아 들었다구 뭐이라구 말해야 알 게 아니냐!” “딴 생각이란 어떤 거죠?” “뭐? 내가 언제 그런 말했나. 안했다!” “당신은 나에게 뭐가 되죠?” “뭐라니 외삼촌이지 뭐이겠나.” “그 손 임자 말입니까?” “…?” 오택부는 무슨 말인지 몰라 그 손에 시선을 가져간 것입 니다. 262


“三十二 年 전에 갓난애를 이부자리로 입 코를 틀어막아 죽이려다가 실패한 그 손 임자 말입니까?” “뭐? 뭣!” “내 외삼촌이라면 우선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그 말 취소해라!” “다음으로는요,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리면서, 오 나의 무슨 꽃과 같은 비이너스여 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놈 아가리를 닥쳐라!” “그리고 비 온 날 그 비이너스가 입었던 水泳服은 빨강 것이었읍니까? 노랑 것이었읍니까?” “이놈아! 이놈아! 죽고 싶으냐?” “그렇지 않으면 파랑 것이었읍니까? 알락달락한 것이었 읍니까.” “그만 닥쳐라! 닥치지 못하겠느냐! 이놈 새끼!” 창살에 매달려 발을 구르면서 으르렁대는 것이 마치 그 가 우리에 갇혀 있는 것 같았읍니다. “그따위를 내가 어떻게 아느냐! 바루 오빠인 내가 그런 추잡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바루 오빠인 당신이 그런 추잡한 것을 모르면 누가 압니 까?” “이 패륜이 망덕할 놈의 아가리를 못 닥치겠느냐?” 263


“그렇습니다. 나는 대낮에 오빠에게 강간당한 비이너스 에게서 난 사생아니까 원래가 悖倫이죠.” 오택부는 소리 지르는 대신 미친 듯이 땅에서 돌을 찾아 가지고 굴 안으로 팔매질하는 것입니다. 돌은 날아 들어가서 널에 가 맞는 것도 있고, 어떤 돌은 너무 커서 창살에서 튀기는 것도 있었읍니다. “그런데 忘德이라는 것은 뭘 두고 한 말입니까? 설마 李 道武 씨에게 돈 준 걸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죠?”

“뭐이? 아니, 왜 설마냐. 왜 아니란 말이냐!” “그 당시에 지금과 같은 勢道가 당신에게 있었다면 돈 내 라고 공갈을 일삼는 이도무는 아마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배은망덕아! 내 돈으로 대학까지 나오구서 이제 와선 그런 은혜를 입은 적이 없다구, 그게 사람 새끼가 할 소리 냐!” “패륜도 좀 그렇게 구체적으로 반박해 보시죠.” “이놈아. 나두 인간이다! 사람의 탈을 쓰구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응 이놈아!” “인간이라는 것이 별난 것입니다. 당신 같은 것이 인간이 라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니다! 머슴이 한 짓이다! 맹팔이란 그 죽일 놈이 264


한 짓이다!” “그러지 말고 그것은 내가 한 것이라고 인정만 해 주시 오. 그러면 당신이 제안한 대로 이북에라두 가 버리겠읍니 다.” “죽여 버릴 테다! 너는 하나만 알구 둘은 모른다. 맹팔이 란 놈이 어떤 미남이구 어떤 色狂이었는가 하는 것을 아느 냐? 네 얼굴이 얼마나 그놈을 꼭 닮았는지 알아봤느냐!” “…” “증명할 수가 있다! 네가 나를 닮은 데가 손톱만큼두 있 느냐? 있으면 말해 봐라!”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니까 白丁을 닮을 필요가 없읍니 다.” “잔말 말구 알아 두어라! 以南 땅을 다 뒤져서라두 네 얼 굴과 똑같은 그놈 맹팔이를 찾아내서 네 눈앞에 들이대구야 말겠다!” 주먹을 쥐어 흔들면서 뒤로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나는 살아 있는 한 당신의 입에서 ‘나는 내 동생을 강간 한 그런 외삼촌이다란 ’ 말을 하게 하구야 말겠읍니다!” “오냐오냐, 알았다. 네가 내 財產이 탐나서 그 지랄이구 나. 그래 가지군 살아 있는 한 너는 거기서 못 나온다! 일생 을 그 속에서 썩는 줄 알아라!” 265


하면서 다시 다가서는 것입니다. “알았지? 어찌하겠느냐, 降伏하겠느냐, 응? 대답해 봐라!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당신이란 사람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엉망이었군요.” “뭣이라구! 아하하하 머슴의 자식인 네가 이 오택부 국회 의원의 아들이 되어 보겠다구? 어림도 없어 어림두. 아하하 하…”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退場하던 오택부는 다시 한마디를 더 남겨 놓고야 마음이 풀리겠다는 것이었읍니다. “내 맹팔이라는 놈을 찾아내서 對面시켜 줄 터이니 그때 까지 죽지나 말구 기다리구 있어라!” 이튿날 아침 눈을 뜬 李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窟 안을 둘러보았읍니다. 어떻게든 여기를 脫出하여야 했읍니다. 이때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 택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그런 생각을 保留해 두 고 지내게 했던 것입니다. 그 吳澤富는 다시 그 동굴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택부로 하여금 ‘그 말을 ’ 하게 하려면 李章이 그의 앞에 나타나야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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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동굴에서 脫出하려던 생각은, 그러나 단 하루로서 버려야 했읍니다. 吳澤富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탈출을 保留해

두게 했다는 것은 煙幕이고, 실은 洞窟에서의 탈출이란 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탈출하려면 쇠창살을 끊든지 뜯어내든지 해야 했읍니다. 끊어 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니 뜯어내 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가로 세로로 서로 얽힌 창살들이 박 혀 있는 콘크리이트를, 적어도 바닥과 벽 한쪽은 다 뜯어내 야 했읍니다. 그런데 그가 그 동굴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쇠붙 이란 寢牀에 박혀 있는 성냥개비만 한 못뿐이었읍니다. 못을 뽑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손가락 끝에 피 를 보면서 겨우 서너 개를 얻어 가지고 콘크리이트를 긁어 보았으나 螳螂의 拒轍이랄까, 一 년이 걸릴지 二 년이 걸릴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읍니다. 그리고 아무리 로봇 같기로 아침저녁으로 나타나는 식모의 눈을 속여 낸다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읍니다. 콘크리이트를 긁느니보다 地震이라 도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賢明한 일인 것 같았읍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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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살을 단념하고 이모저모로 아무리 연구해 보았으나 方 途는 없었읍니다.

그제야 우리에 갇힌 짐승이 되어 고함까지 지르면서 몸 부림치는 것이었으나 浪費였고, 거기서는 儉素만이 人間的 인 姿勢가 되는 것이었읍니다. 연장을 갖지 않은 人間이란 열 개의 손가락이 그 全部였 고, 연장이 없는 손이란 그저 앞발이었읍니다. 그 동굴 속에 서는 直立해 있는 것도 無意味했읍니다. 人間을 그만두고 사는 것이 人間的이었읍니다. 그 동굴 안에서 보면 몇 年을 하루같이 샤트 디프의 獄壁을, 비록 方向은 그르쳤건 간에 하여간 뚫어 낸 파리아 法師는 케자르나 나폴레옹보다 더 偉大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었읍니다. 그의 不屈과 지혜

로라면 이런 동굴쯤 콧노래를 부르면서 뚫어 버렸을 것이라 고 했읍니다. 아니 그 法師에게는 마음을 설레게 하는 希望이 있었다. 몽테크리스토 섬에 무진장으로 埋藏되어 있는 寶物이 약속 해 주는 榮華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기껏해서 오택부라는 국회의원의 멱살을 움켜쥐고 ‘당신 이 내 어머니를 강간한 내 외삼촌이라구 自白 못 하겠소’ 하 는 기막히게 지저분한 쎄리후6)가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新 268


派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제 딴에는 무슨 悲劇의 주인

공이나 된 것 같아서 노상 悲痛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지 만, 실상인즉 남들의 눈으로 봤을 땐, 징글맞은 點으로만 봐 서도 트기를 스무 백번 뺨칠 만한 나는 그런 傑作物인 것이 다. 그러니 이 동굴은 어느 모로 보나 나에게는 안성마춤인 避身處가 되는 것이다. 이 하늘 아래 몸을 가리어 주고, 숨

겨 줄 수 있는 곳은 이 洞窟뿐인 것이다. 그는 間諜이었기도 했읍니다. 간첩이란 그만두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만둔 것이 아니었읍니다. 도리어 孤兒가 되어, 양쪽에 다 용납이 되지 않는 신세가 되는 것이었읍니 다. 그래서 이 동굴은 운명에서뿐만 아니라 法網에서의 安 全地帶도 되는 것이었읍니다. 脫出이 불가능한 것을 나는 도리어 多幸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체면상 내놓고 그렇다고 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洞窟에는 동물적인 自由가 없고, 바깥 世界에는 인간 적인 자유가 없었읍니다. 그런데 어느 自由가 없는 쪽을 택 해야 하는가 할 때, 人間이라면 動物的 자유가 없는 自由보

6) 쎄리후: 세리후(せりふ). 대사, 틀에 박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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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 인간적 自由가 없는 自由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싫 어도 말입니다. 아니 싫으니까 더욱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것과 하기 좋은 것이 서로 짝을 지어 對立할 땐, 하기 싫은 쪽을 택하면 틀림없이 人間的이 되는 것입니 다. 그들의 倫理說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은 다 分子 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公分母는 ‘하기 싫은 일이 곧 善이 다라는 ’ 것입니다. 그래서 人間의 地理를 잘 모르는 他方 사람이라도 덮어놓고 가기 싫은 쪽으로 가면 ‘善’이라는 公 設市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性善이냐 性惡이냐 하는 시이소 게임은 枝葉이 고, 倫理學의 根本 問題는 ‘하기 싫은 것이었기 때문에 善 이 되었는가, 善이었기 때문에 하기 싫어졌는가?’ 하는 것을 밝혀내는 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進化論에 의하면, 하기 싫어졌기 때문에 善이 되었다는 것이고, 性善說 같은 것에 의하면 善이기 때

문에 하기 싫어졌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進化論이냐 性善說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 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對立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서로 이 어지는 것입니다. 即 처음에는 하기 싫어졌기 때문에, 바꾸 어 말하면 損害를 보는 일이기 때문에 善이 되었는데, 그렇 지만 일단 善으로 策定된 다음에는 善이기 때문에, 바꾸어 270


말하면 損害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하기 싫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있는 온갖 아름다운 또는 悲壯한 어투도 아 니라고 雄辯을 농하는 이것이 가장 생생한 生活的 眞理인 것입니다. 그들이 眞理에 도달 못 하고 있는 것은 對立癖 때문이었 는데, 무엇이든 對立시켜야 심성이 풀렸던 것입니다. 대립 되어야 悲壯해질 수 있었고, 비장해져야 食慾이 돋는 것이 었읍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食慾을 위해서 산 것이고, 食慾 이란 굶주림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굶주림 이 必要했읍니다. 여기에 ‘進步’라는 것이 登場하게 되는데, 進步란 ‘굶주림을 낳는다라는 ’ 딴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굶주림을 메꾸기 위해서 進步가 필요하다고 한 것입 니다. 先後를 錯倒한 이러한 欺瞞 위에 그들의 이른바 公理 는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굴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悲痛한 일 이면서 동시에 多幸한 일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多幸은 곧 悲痛이다라고 ’ 하면, 그들이 흔히 즐 기면서도 웃어넘기기를 잘하는 逆說의 하나라고 하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逆說은 단순한 패러독스가 아니라, 그들 의 참다운 生態를 나타내는 말인 동시에 對立을 解消시켜 보려는 그들 나름의 ‘良心’의 發露였던 것입니다. 271


깊기 때문에 어둡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둡기 때문에 깊어 보이는 수가 있읍니다. 人間이란 그런 우물이었읍니 다. 그래서 人生은 到處가 靑山인 것입니다. 그렇게도 하늘 이 무너진 것처럼 분통해 하고 몸부림치던 李章도, 얼마 안 가서 原狀을 회복해 가지고 언제 그랬더냐 하는 表情을 지 어내는 것이었읍니다. 바꾸어 말하면 거기는 더 깊은 洞窟 이 된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渴症이나 운명에 대한 詛呪보다 어찌 보면 더 질긴 것이 쑥스러움이라고 하는 감정일 것입니다. 보는 사람은 없어도 앞이 훤히 트인, 여기서는 대청이랄 수도 있 는 창살 그늘에서 바지를 걷어 내리고 便器에 앉아 있는 자 기의 모습에는 侮辱感을 지나 쑥스러움이 느껴지는 것이었 읍니다. 그런 꼴을 하는 것이 싫으면 먹지 않으면 된다고 할 것이지만 먹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어야 할 만한 屈辱인가? 물론 아니고, 이런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 소위 大를 위 해서 小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大이고 어떤 것이 小인가. 侮辱을 거 부하겠다는 것은 小이고, 쑥스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끈덕 지게 사는 것은 大인가? 우리의 風習은 그렇다고 한다. 인 간에게 알맞는 價値觀이다. 그렇지만 悲痛해 할 계제는 못 272


된다. 그런대로 살아가는 날이면 그런 悲痛도 잊어질 날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 쑥스러움도 언제였더냐 하는 표정이 되어서 그날그 날을 보내던 그가 이번에는 또 悲哀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 는데, 그것은 침대 밑에 있는 두터운 이불을 꺼내 덮어야 할 때였읍니다. 얼어 죽지야 않을 텐데 더 따뜻해져 보고 싶어 하는 자기에게 도리어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이었읍니다. 훈 훈해진 이불 속에서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땐, 동굴에 갇힌 以後 처음으로 눈시울에 눈물까지 맺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겨울은 동굴 생활에 慰安을 갖다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읍니다. 지리한 낮을 줄여 주고, 추위는 皮膚만이 아 니라 感情까지 얼어붙여 놓는 것입니다. 슬픔도 미움도 분 함도 추위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분고 분해져서 기를 못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感情이 얼어붙는다는 것은 人間이 얼어붙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人間이 世界와 交易을 하는 窓입니다. 그 창문에 서리가 쳐서 흐려진다는 것은 바깥 세계, 바꾸어 말 하면 意識世界와 담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의식세계가 人 間的 世界라면 그 담 안은 인간적 세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언제 이런 추위가 있었다?… 273


아, 토끼를 잡아먹었던 그 洞窟이다. 이 정도가 아니었 다. 기가 막히게 추웠다. 아까사끼 센세이의 생각까지 했으 니까. 그 아까사끼 센세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지금도 거기 서 敎鞭을 잡고 있는 것일까? 아니, 藝術品과 같은 그런 地下都市가 정말 있는 걸까? 적어도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별의별 傳說을 다 實證해 내는 考古學이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武陵桃源이 實在했었다는 것도 언젠가는 밝혀낼 것이다. 그러니 그 人間 產出 都市도 밝혀지는 날이 있다.

그리되면 이런 추위는 北極으로 흩어 가 버린다. 世界에 봄 이 오는 것이다. 吳澤富보다, 당면의 적은 그 추위였읍니다. 밤이고 낮이

고 문을 꼭 닫아 놓고는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이었읍니다. 冬眠입니다.

이불 속에 누워 있으면 時間이 더딘 것이 몰라지는 것이 기도 했읍니다. 서 있을 때보다 누워 있을 때 時間은 더 빨 리 흐르는 것 같았읍니다. 왜 그럴까? 서 있으면 몸이 疲勞해지기 때문일까, 서 있다는 것이 기 다리는 姿勢이기 때문일까? 274


오라, 그렇다. 時間이라는 것은 흐르고 있는 것이기 때 문일 게다. 흐른다는 것은 옆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런 그 흐름 가운데 우뚝 섰으니까 時間이 자꾸 거기에 걸리기 마 련일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딘 것이다. 꼭 그렇겠다. 꼭 그래야 하겠다. 그래야 時間에 시달리 고 시달린 ‘民心’은 直立을 버리고 다시 기어 다닌 鄕愁를 느끼게 될 터이니 말이다. 일찌감치 기어 다니면서 사는 게 어떨까? 기어 다니고 싶어 하는 그의 意識이었읍니다. 몸은 그런 대로 直立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意識은 봄빛이 느껴 지는 마파람을 타고는 ‘直立’에서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것 이었읍니다. “할머니, 할머니에겐 이게 무슨 색으로 보이우?” 반찬 속에 묻혀 있는 빨간 고추 조각을 젓가락 끝으로 집 어 들어 보이면서 하는 말이었읍니다. “빨간색이란 말이죠?” 저녁놀이 오목하게 괴어 있는 바위 끝에 앉아 담배를 폴 폴 피워 물고 있는 그 노파는 물론 馬耳東風이었읍니다. “그런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죠. 반반이란 말이오. 알겠소…” 傾聽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는지 그런 노파를 상대로 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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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竪說인 것입니다.

“할머니의 눈에, 어렵게 말하면 網膜에 말이오, 거기에 비쳐 든 이 고추의 색깔은 실은 초록빛인지두 모르고, 이 내 눈에 비쳐 든 것은 노란빛인지두 실은 모른단 말이오. 그러 니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랏빛으로 또한 다른 어떤 사람 에게는 빨간빛으로 보일지도 모르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이, 할머니두 나두 그 세상 사람의 하나이지만 그 세상 사람 들이 빨갛다 빨갛다 하니까 아 이런 것을 빨갛다구 하는구 나 해서, 고추는 빨갛다라구 하게 된 거요. 알겠소? 사람이 란 제각기 다 그런 色盲들이란 말이오. 그렇지 않다구 증명 할 수 있는 能力까지는 인간은 못 가졌거든. 그런 능력이 없 는 인간이 붙여 놓은 이름이 꼭 들어맞는 걸 거라구 말할 수 있는 權能을 가진 인간은 한 사람두 없단 말이오.” 馬耳東風과 橫說竪說은 짝이 지어지는 것이기도 했읍

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어떤 세도가 당당한 大臣이 말(馬)을 가리켜 사슴이라구 했다오. 그랬더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끄

덕했고, 滿朝百官들은 지당하외다 하고 아룄단 말이오. 알 겠소? 할머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두 따지고 보면 그런 몇 사람의 勢道家들이 만들어 놓은 거란 말이오. 알아들었소? 그렇지만 말을 사슴이라고 하든, 말을 말이라 276


고 하든 피장파장인데 문제는요, 그따위 이름 때문에 피투 성이가 돼서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노파는 힐끔 굴 안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입니다. 밥을 다 먹었나 어쨌나를 살피는 눈일 것입니다. 식사는 언제나 안쪽 마루 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며 하 는 것입니다. “모두 二分法이란 것 때문이오. 세상에는 分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이 二分法이란 것이 압도적으로 많고 따라서 가장 人間的인 分法인데, 그래서 가장 주먹九九로 돼 있는 거요. 二分이란 바꾸어 말하면 對立인데 소위 科學的이라 는 입장에서 볼 때 세상에 對立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오. 한 줄로 ‘나라비’7)를 시켜 놓으면 서로 이웃이 되어서 모두 親 戚이란 말이오. 靑은 남색과 藍은 紫朱와, 자주는 赤色과,

적색은 朱黃과, 주황은 綠色과, 녹색은 靑色과, 이렇게 한 바퀴 휘 돌게 되거든. 道德도 마찬가지. 봐요. 善은 忠과, 충 은 愛國과, 애국은 暗殺과, 암살은 惡과. 그리고 이번엔 거 꾸로 말이오. 惡은 도둑질과, 도둑질은 굶주림과 奉養과 봉 양은 孝와, 孝는 善이거든…” 부시시 일어난 노파는 밥그릇을 내놓으라고 손짓하는 것

7) 나라비(ならび): 늘어선 모양,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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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이 사슬을 끊어 놓으면, 끊어진 고 자리만 봤을 땐 두 조 각으로 갈라진 것 같지만 전체를 보면 여전히 한 줄이란 말 이오. 圓의 둘레는 끊어 놓으나, 안 끊어 놓으나 한 줄 아니 오? 森羅萬象은 제각기 다 이렇게 서로 돌고 도는 것인데, 거기에다 二分法을 썼으니 주먹九九가 될 수밖에.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東쪽으로 자꾸 가면 西가 되고, 西쪽으로 자꾸 가면 東이 되는 뚱그란 땅덩어리 위에 살게 했다는 뜻 을 깨닫는 것 이것이 참다운 宗敎란 말이오.” 노파는 대통으로 창살을 똑 똑 두드리는 것입니다. 빨리 밥그릇을 이리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便利한 대로 하나님이란 말을 썼는데, 이 하나님이

라는 것이 一方通行의 所產이거든. 인간이 不完全하니까 어디에 完全한 것이 있을 게다 해 가지구 그것을 神이라구 이름 했는데, 이것은 마치 내가 가난하니까 어디에 富者가 있을 게다 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겠소? 그렇다면 말이오, ‘富者가 없으면 나는 가난하지 않다’, 오므라만 들지 말구 이 렇게 탁 티어 보지 않느냐 말이오. ‘神은 없다. 그러므로 나

는 아무 짓을 해도 좋다가 ’ 아니라, ‘神은 없다. 그러므로 나 는 罪人이 아니다’, 적어도 이렇게 말할 줄은 알아야 하고, 그리되면 ‘나는 罪人이 아니다. 그러므로 神은 없다’, 이런 278


解說은 눈을 한번 딱 감기만 하면 된단 말이오. 아니 딱 감

을 것 없구, 똑바로 뜨면 되지. 神이 없는데, ‘아무 짓이라는 ’ 게 어떻게 있을 수가 있소?”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老婆는 돌멩이를 주 워서 밥그릇을 향해 던지는 것입니다. “禁斷의 복숭아를 먹는 일이 왜 不幸을 가져왔는가 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때문이 아니고, 그것을 도로 토해 내 려구 했기 때문이오. 먹었으니까 아주 먹어서 胃로 보내어 대변으로 排泄해 버렸더라면 그만이었을 것을, 여자는 가 슴에 남자는 목에 스톱시켜 놓았단 말이오. 그로써 인간의 姿勢는 그만 결정된 것이고 一方通行은 시작된 거요. ‘그저

잘못했읍니다’ 하면 잘된 것이 되는 줄 알게 되었단 말이오. 하나님두 하나님이지 먹게 한 惡魔는 어쩌지 못하면서, 잘 못했다구 애걸복걸하는 인간만 짓궂게 쫓아다니면서 못살 게 군단 말이오. 그런 것을 어떻게 하나님이라구 할 수 있겠 소. 趣味가 좋지 못하거든. 그럴 거면 全知全能이라고나 하 지 말지. 그런데 우리 사라들은 가끔 생기는 自然의 부스럭 지를 奇蹟이라구 하는데 에누리해서 그렇다 해도, 그런 하 나님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萬 사람에 한 사람 정도라 하겠 는데, 그 萬分의 一을 위해서 一分의 萬이 덩달아 손을 비빌 거야 뭐 있소. 여기서는 왜 이 모양이오. 多數決을 그렇게 279


좋아하는 人間들이 民主主義란 뭐 때문에 있는 거요. 손을 비비라구 直立한 거란 말이오? 그럴 거면 차라리 네발걸음 하란 말이오, 네발걸음을. 알겠소? 敎會니 절간이니 하는 하나님의 집 대신 孤兒院이나 양로원을 세우는 것이 더 소 위 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거란 말이오. 그동안 墮落해서 人間끼리 싸우는 깃발이 됐지만 ‘휴우머니즘의 ’ 根本은 하

나님의 집을 깨뜨려 버리구 고아원을 짓는 여게 있단 말이 오. 휴우머니즘을 하나님에게 비는 건 넌센스란 말이오. 그 런 넌센스로 살 거면 차라리 네발걸음으로 사는 것이 더 인 간다울 거란 말이오.” 意識이 그렇게 네발걸음을 닮아 가는 어느 날, 한 靑年이

그의 앞에 나타났읍니다. 창살을 잡고 서서 멍하니 초여름의 하늘과 구름에 하염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던 이장은 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 으나 幻像도 아니고, 그것이 한 보름 전에 싸리나뭇단의 그 늘에 숨어서 이쪽을 엿보던 그 얼굴임을 깨닫자 反射的으 로 돌아섰읍니다. 그때는 그것이 환상이 아니었는가, 환상 이었을 것이다, 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던 청년이었읍니다. “좀 기다려 주시오. 나는 동생입니다!” 그 소리에 이장은 안으로 옮겨 놓던 발을 멈추고 돌아봅 니다. 280


이십칠팔 歲쯤 되어 보이는 그 청년은 창살을 움켜쥐고 울먹울먹해하는 표정이었읍니다. “오택부 의원의 아들일 텐데 무슨 동생이오?” “나는 알고 있읍니다.” “무엇을…” “어머니는 달라도 형은 형입니다!” “…” “아버지가 지은 죄는 제가 꼭 갚겠읍니다.” “내 어머니가 어떤 여자였는지 알구서 하는 말이오?” “그런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 것이 뭔데…” “식모라고 들었읍니다.” “내 어머니가?…” “아닙니까?” “姓은 뭐라구 들었소?”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하지. 吳 哥라면 어떻겠소? 오 가와 오 가가 관계할 수 있소?” “…” “그러니까 安 哥쯤으로 해 두지. 이름은 芝夜라 해두 좋 구.” 281


“그것은 좀 지나친 말입니다.” “왜?” “그 여자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런 소문을 들었지.” “…?” “그 소문은 정말인 모양이군.” “아까 식모라던 것은 아버지의 거짓말입니까?” “요지음 세상은 어떻게 돌어가고 있소? 무슨 색다른 소 식이라도 없소?” “…” “이를테면 어떤 遊星에서 使臣이 왔다든지, 세계에 終末 이 올 것이라든지…” “아버지가 무엇을 감추고 있다는 것은 저도 짐작은 하고 있읍니다.” “政權이 바뀐다든지…” “이제는 더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오늘 찾아온 것입니 다.” “모른 척 안 하면 어쩌겠다는 거요?” “우선 여기서 나와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읍니다.” 282


어떻게 여기를 깨쳐 부술 수 있을까를 어림이라도 하듯 창살의 가장자리 같은 데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오택부란 사람은 나의 원수요. 그러니 그 원수의 아들에게 동정을 받는다는 것은 설 자리 가 없어지는 것이 되오. 나는 지금 이래두 어디에 서 있는 것 이니까 노형이 참견할 일은 못 되오.” 돌아서는 것입니다. “동정이 아닙니다. 義務입니다! 나는 아들이기 전에 한 인간입니다!” “‘인간이 ’ 무슨 膏藥인 줄 아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필요 없소.” 하꼬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었읍니 다. 그 청년은 그래도 이 소리 저 소리 하는 것이지만 침대에 드러누운 이장은 그런 白丁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들이 생겨 났을까 하는 것이었읍니다. ‘네가 나를 닮은 데가 손톱만치 두 있느냐. 있으면 말해 봐라.’라구 하던 말을 그 청년에게 도 해야 옳을 만큼 닮은 데가 없고, 단정하다기보다 端麗한 용모를 하고 있었읍니다. 아마 그의 어머니도 시어머니처럼 ‘점잖게 약탈당한 ’ 거 겠지. 283


그럼 그 피를 이어 받은 나에게는 公子를 그렇게 약탈할 소질이 없을까… 아니 그 전에 安芝夜라는 마담을 犯할 수 있는 資格이 구비되어 있다 할 것이다. 그 靑年의 출현은 두더지가 되어 가던 그로 하여금 바깥 世界의 바람을 쏘이게 한 것이 되었읍니다.

지금쯤 공자는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있을 것이고, 마 담 바타플라이는 이 남자 저 남자의 가슴에 돌려 가며 안기 고 있을 것입니다. 흰 百合은 아끼고 싶고, 빨간 다알리아는 짓밟아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百合은 俗되어 보이고, 다알리아 는 聖스러워 보이는 것이었읍니다. 내 피가 더러워서일 것이다. 돈을 보면 온몸이 흥분이 된다는 芝夜가 조금도 추함이 느껴지지 않고,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안기는 것이 오히려 그 여자에게는 자연스러운 生態로 보이는 것이었읍니다. 그가 마담 바타플라이에게 聖스러움 같은 것까지 느끼 는 것은, 倫姬의 추억에 의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萬 人의 女子’라는 것을 公言하는 것이고 조금도 自虐에서 하

는 虛勢가 아니고, 生의 터전을 거기에 두고 있는 그 白痴에 가까운 陽性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聖’이란 萬人共有의 일 284


종의 白痴美인 것입니다. 오택부가 그 마담 바타플라이의 ‘百萬딸라族’의 한 사람 이라는 것은 거의 명백한 일인 것 같았읍니다. 그의 아들은 ‘그런 소문을 ’ 적어도 否定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그것 이 事實이었던가 생각하니 憤怒와 질투에 사로잡혀지는 것 이었읍니다. “내 어머니를 姦한 그 백장은 이제 또 내 女子를 범하고 있다!” 몸을 벽에 부딪쳐 가루를 내서라도 창살 저쪽이 되고 싶 어지는 것이었읍니다. 그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창살 안에 길이 한 뼘쯤 되는 줄( )이 떨어져 있는 것이었읍니다. 떨리는 손은 덥석 그것을 집어 들었읍니다. 그것은 하나의 可能性이었읍니다. 腐爛해진 채로 말라 붙었던 可能性이, 마른 나무에 움이 돋듯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누가 이것을 던져 넣었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손이 경련을 일으켜, 미처 마음과 相議하여 보 기도 전에 單獨行爲를 한 것이었읍니다. 뱀이라도 쥐었던 것처럼 내쳐 버린 것입니다. 오택부의 아들이 한 일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可能性은 창살 밖으로 날아가 버렸읍니다. 285


아뿔싸 했을 땐 벌써 늦었지만, 뉘우칠 수는 없는 일이었 읍니다. 공교롭게도 그 줄이 떨어진 곳이, 전에 聖經책이 굴러 있 던 바로 그 자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은 二, 三일 지나 서였읍니다. 성경책은 언제 어떻게 없어진 것일까? 그때까지는 없어졌다는 것도 모르고 지내고 있었던 李 章이었읍니다.

그러면 그 ‘성경책은 ’ 그동안 어디에 있은 것인가? 줄이 거기에 떨어졌을 때까지는 忘却의 세계에 있었다 하겠지만, 이 二, 三일 동안 그 성경책이 머물러 있은 世界는 무슨 세 계인가? 일 없는 것을 보면서 없다는 것을 모른 그런 世界가 있다. 그 二, 三일 동안 성경책이 머물러 있은 세계와, 그 이전 의 망각의 世界는 같은 性質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여간 그런 무슨 世界가 또 있다. 어쩌면 ‘늙은 生物’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성경책과는 달라 危險千萬인 그 줄은, 그 늙은 식모의 눈 에 비쳐는 들었으련만 보지 못하는 것인지, 언제까지 그대 로 거기에 굴러 있는 것입니다. 286


설마 나를 골려 주기 위해서야 아니겠지. 창살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그 줄을 눈앞에 두고 보고만 있 어야 하는 것은 拷問이었읍니다.

磔刑된 可能性. 復活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비가 내리더니 녹까지 쓰는 것이었읍니다. “할머니, 저거 말이오. 그 많은 자리를 다 버리구 하필이 면 어째서 바로 성경책이 떨어졌던 그 자리에 가 떨어졌겠 소? 다 거기에는 뜻이 있는 거요. 어젯밤 꿈에 말이오, 白髮 神仙이 나타나서 하늘까지 닿는 지팽이를 가지구 거기를 가

리키면서 파 보라는 거요. 그래서 금덩어리가 나오면 그건 할머니가 가지구, 저 쇠붙이 말이오, 저건 이리로 던져 줄 수 없겠소?” 전연 마이동풍은 아니었던지, 밥그릇을 거두어 가지고 갈 때 늙은 生物은 그 줄을 넓죽 집어 드는 것이었읍니다. “할머니, 잠깐! 이거 봐요. 이 돈 봐요?” 할머니는 돈이란 말에 사라지려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 는 것이었읍니다. “이 돈 다 드릴께 그걸 내게 파오.”

그것은 千 圜짜리 紙幣로 四, 五○ 枚쯤 되어 보였읍니 다. 그의 주머니에는 아직도 그만한 돈이 있는데, 오택부는 287


그의 소지품에는 손을 안 댔던 것입니다. 그만큼 쇠창살을 믿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다음에두 할머니의 은혜를 안 잊겠소.” 노파는 주위를 살피더니 살살 다가서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창살에서 서너 걸음 되는 데까지 와서는 더 가까 이하지 않는 것이었읍니다. 주름살 속에서 멀겋게 빛나고 있는 두 눈에는 파뿌리처럼 꾀죄죄한 의심이 가득 배어 있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장은 돈 쥔 손과 빈손을 함께 내밀었읍니다. 노파는 머리를 젓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할머니. 절반을 먼저 받구 그 줄 을 이리 주면 나머지를 드리겠소.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 면 할머니는 어디에 가 일러바치면 되지 않소? 어떻소…” 조금 생각해 보고서 노파는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읍니 다. 이장은 紙幣 뭉치를 반 갈라서 창살 밖에 내놓았읍니다. 노파는 안쪽으로 물러서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이장 은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서 주었읍니다. 가까이 와서 그 돈을 살짝 집어 쥔 노파는, 누런 이를 드 러내 보이며 돌아서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데, 그것은 늙은 生物이 아니라 족제비처럼 감쪽같은 동작이었읍니다. 288


그래서 노파가 저녁때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이장은 끼니까지 잃은 것이 되었읍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나타난 그 식모는 다시 늙은 生物이 되 어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렇게 해서 오택부의 아들이 나타나서 일으킨 물결은 가라앉고, 동굴에는 다시 無爲가 틀어 들게 되었읍니다. 그 속에서 그는 웅덩이에 괸 물이었읍니다. 흐름이 멎고 늘 축축한 陰地에는 버섯이 무성해지는 것입니다. 그 버섯 들은 숲이 되고, 하늘을 가리는 密林이 되었읍니다. 그 밀림 속에서 그는 사냥도 하고 낮잠도 잡니다. 웃기도 하고 울기 도 했읍니다. 그 密林 속에서 時間이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原始時代로 흘러가는 시간일 것입니다.

가령 인간의 歷史라는 것이 人間에의 역사라면, 어느 쪽 으로 흐르는 時間이 거기서 멀어져 가는 역사이겠읍니까. 그들이 부르짖는 自由니 正義니 平和니 하는 것은 어느 쪽 으로 흐르는 時間이 약속해 주는 것이겠읍니까. 現代라는 密林에는 두 個의 時間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

다. 원시시대에서 흘러나온 시간과, 원시시대로 흘러가는 시간과. 아프리카의 女人들이 점점 그 皮膚를 가리어 가고 있는 한편에서 歐羅巴의 여성들은 그 피부를 자꾸 드러내 가고 있는 것입니다. 黑人들이 왈츠를 출 때 白人들은 궁둥 289


이춤에 흥겨워지는 것입니다. 現代란 그 遠心과 求心의 밸 런스 위에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自由에의 길이란 奴隸化의 길이었고, 宗敎의 발달 普及

은 필경 天堂에 ‘滿員謝禮’라는 팻을 달게 했으니, 地獄으로 몰려가야 했던 것입니다. 現代的이란 反現代的과 同義異語인 것입니다. 그래야 世界는 完全한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北半球나 南半球만

으로는 완전한 地球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은 그 反對에 의해서 그것인 것이며, 또 그 反對 의 前身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反對가 되는 것입니 다. 미는 것은 밀리는 것입니다. 밀리는 것이 있어야 문이 열린다는 現象, 바꾸어 말하면 미는 일이 실현되는 것입니 다. 그리고 同情이라는 道德은 저쪽으로 보면 依他心이라 는 不道德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道德은 不道德의 前身이 었고, 행할 때까지 道德이고 행한 순간부터는 不道德이 되 는 것입니다. 論理도 그렇습니다. 論理는 곧 反論理인 것입니다. 論 理란 生을 토막 내는 일이요, 意識의 痲醉, 人間의 睡眠이

어야 論理는 論理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密林 속에서 李章은 점점 健康해져 갔읍니다. 論理 가 걷히어 간다는 것은 기름진 검은 땅이 드러난다는 것입 290


니다. 거기서는 이때까지 當爲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偶然인 줄 안 것이 必然인 것입니다. 가벼운 것이 무겁고, 비극이 喜劇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넋두리는 넋두리가 아닌 것입니다. 現代는 生이 눈을 뜨는 시대다. 說明에 지나지 않는 知·情·意에 맞추어 낸 眞·善· 美는 옷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眞·善·美를 禮拜하면

서 산다는 것은 生을 산 것이 아니라 옷을 산 것이다. ‘永遠 不變’이라는 저고리와 ‘普遍妥當性’이라는 바지에 갇힌 生

은 제대로 發育할 수 없었고, 호흡할 수 없었다. 그래서 生이 地殼을 뚫고 나왔을 때 그때까지 地上을 裝 飾했던 ‘眞·善·美’는 시들어야 할 運命을 처음부터 지니

고 있었다. 그것들은 ‘生’이 誕生할 때까지 臨時로 地上을 맡았던 管理人, 어쩌면 ‘生’을 準備한 園丁이었는지도 모른 다. 眞·善·美가 褪色해 버린 地上, 그것은 밤이면 부엉이

가 울고 박쥐가 날아다니는 廢林. 먼 未來의 時點에 가서 보지 않더라도 그 現代는 原始林이다. 太古의 원시림에서 人類의 生存과 自由를 위협한 것이 天變地異, 猛獸의 습격이었다면, 여기서는 機械, 制度, 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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爭 따위가 그것이다. 原始人들의 生活感情을 지배한 것이 自然崇拜이었다면, 現代人의 意識生活을 마비시키고 있

는 것은 ‘合理的’이라는 萬有引力이다. 언제나 不安 恐怖에 露出되어 있고, 자기가 조작해 낸 偶像 앞에

坐하여 法悅

의 눈물의 짜내고 있다는 點에서는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일반이다. 그들도 薄明 속에서 헤맸고 우리도 박명 속에서 방황하 고 있다. 다르다면 그들의 薄明은 眞善美의 날이 밝아 오는 그것이었고, 우리의 그것은 眞善美의 날이 저물어 가는 그 것이다. 그들이 原始林에서 기어 나와서 ‘眞·善·美’의 平地를 향해 서서히 내려갔듯이, 우리는 現代라는 密林에서 나와 ‘生’의 平地를 향해야 할 마당에 지금 당도해 있는 것이다… 그런 呪文의 안개가 깊어 가던 어느 날 밤이었읍니다. 洞窟이 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매우면서도 鈍濁한 소리

에 눈을 떴읍니다. 소리도 소리였지만 몸이 털썩해졌던 것 이고, 흙이 와르르 흘러 떨어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천장의 두꺼운 널판 석 장이 깨끗하 게 동강이 나서 거들거리고 있는 것인데, 뾰죽한 모서리를 가진 바윗덩이가 하나 비꾸러져서 그렇게 내려앉은 것이었 읍니다. 292


그리고 거기서 흘러 떨어진 흙이 이불이나 마룻바닥에 수북하게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동굴은 壁보다 천장 쪽 이 무른 것 같았읍니다. 太平스러웠던 동굴에는 금이 서고, 죽음의 그림자가 쐐

기처럼 박혀 든 것입니다. 누우면 바로 가슴패기가 겨누어 지는 곳이었읍니다. 반대쪽 벽 아래로 침대를 옮겨 놓으려고 하던 李章은, 그 손을 멈추었읍니다. 부질없는 일이었읍니다. 떨어진다면 그 바위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그 주위가 한꺼번에 내려앉 을 것이었읍니다. 어쩌면 洞窟 전체가 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읍니다. 설령 그 바위 하나만이 떨어져서, 그리고 침대를 옮겨 놓 은 덕분으로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負傷만 입는다 해도 그 것은 다행이 아닌 것이었읍니다. 그 노파가 藥을 갖다 줄 것인가, 오택부가 의사를 불러 줄 것인가.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갖다 주지도 않을 것이고, 불러 주지도 않을 것이고, 받 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니, 죽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것으로 되 어 있는 신세에 부상까지 입으면 그 꼴이 보기 좋을 것이라 는 것입니다. 그저 自由가 없는 우리였던 거기는, 다시 죽음의 도가니 293


가 된 것입니다. 침대는 死刑臺가 된 셈이고, 거기에 드러눕 는다는 것은 죽음의 面接試驗을 당하는 것 같은 일이었읍 니다. 미적지근하기만 했던 그 독 속에, 선득선득한 바람이 끼쳐 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읍니다. 며칠을 그렇게 침울해서 時限폭탄의 눈치를 살피면서 쥐 죽은 듯이 지내던 이장은, 그것이 자기에는 奢侈스러운 恐怖요 不安이라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바꾸어 말하면 죽

음의 바위와도 낯이 익어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낯이 익어져 간다는 것이었읍니다. 낯이 익 어져 간다는 것은 낯이 두터워져 간다는 것입니다. 두터워 지지 않으면 淘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適者生存이란 낯 이 두터워 간다는 것을 學術的으로 表明한 말입니다. 學術이란, 化粧室과 같은 것이어서 그 속에서는 부끄러

운 姿勢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 化粧室이 거리에 까지 넘쳐진 것과 같은 것이 現代였읍니다. 달갑지 않은 鑑 札과 같은 것이었던 이 ‘適者生存’은 자랑삼아 내휘두르는

깃발이 되었읍니다. ‘生存’이란 곧 ‘適者’란 것이니, 살아 있다는 것은 낯이 두 껍다는 證明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껍질은 자꾸 두터워져 가는 것이었읍니다. 人間은 그렇게 하여 두꺼워진 그 껍질 속에서 化石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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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것입니다. 그 동굴에는 다시 太平歲月이 흐르게 되었읍니다. 태평 해지지 않고는 時間을 에워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지만 그 생각도 枯渴해 갔읍니 다. 생각도 養分이 있어야 하는데, 하늘의 구름만 먹고는 發 育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땅속에서 地靈이 잡아당기고 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 리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양은 열심히 夢遊病을 살고 있 는 것 같았읍니다. 식사도 때를 맞추지 않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노파도 바 위 끝에 앉아서 기다리는 일이 없게 되었읍니다. 그대로 둬 두고 갔다가 다음번에 왔을 때 바꾸어 가는 것인데, 가다가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땐 새로 지어 왔던 것을 그대로 가 지고 가 버리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묵은 밥을 담아 오기도 했읍니다. 한번은 일부러는 아니었겠지만 수저를 빠뜨렸읍니다. 그런데 다음 끼니 때 와 보니 식사는 깨끗이 치러져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일부러 수저를 안 갖다 주었읍 니다. 그리고서 바위 끝에 앉아 전처럼 기다리면서 보니 맨 손으로 집어먹는 것입니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그릇을 버리고 주먹밥을 만들어다 주 295


는 것이었읍니다. 처음에는 그대로 김치 같은 것을 접시에 따로 담아서 주었지만, 인제부터는 그것도 아주 주먹밥 속 에 넣어서, 가로질린 창살에다 놓아두고 가기로 하는 것이 었읍니다. 주먹밥과 물 한 그릇, 결국 이것이 그의 식사가 되게 되 었지만, 그것은 노파를 나무랄 일이 못 되고 그가 제 손으로 自取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本人은 그것을 홀가

분해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읍니다. 짐승처럼 갇힌 생 활에서 젓가락질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일 수도 있는 것 입니다. 이제 옷만 벗어 던지고 산다면 원시시대의 穴居 生活 쪽 에 더 가까운 것이 될 것이었읍니다. 그렇게 보면 原始時代 란 그렇게 먼 時節 같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그런 生態는 가장 現代的이라고 할 수도 있었읍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이어 가고 있던 그가 時計의 利用價 値에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은, 밤이면 벌레 소리가 들려올 무

렵이었으니, 이 洞窟에 갇힌 지도 한 해가 다 될 쯤이었읍니 다. 그에게는 時計의 ‘時間’이 필요 없다기보다 苦痛이었읍 니다. 그도 처음 여기에 갇혔을 땐 시계의 태엽을 열심히 감 아 주었으나, 吳澤富가 그렇게 왔다 간 후로는 언제 흐지부 296


지 내버려 두었읍니다. ‘한 시간이라는 ’ 單位는 이 동굴에서는 지리하면서도 너 무나 짧은 것이었읍니다. 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기다리 기란 一刻如三秋인데, 지나고 보면 그것은 겨우 二十四分 의 一밖에 안 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런 것이 열두어 번쯤으로 하루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 까. 그러면 밤은 자는 것이니까, 여섯 時間만 보내면 하루가 지나간다라는 것입니다. 벽이 壁인 것은 時間 때문이라고 했읍니다. 壁 안에서도 바깥 世界와 같은 時間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읍니 다. 아니 더 더딘 시간이었읍니다. 누가 時間을 쪼개 냈는가? 時間을 ‘時間’으로 쪼개지 않았던들 世界는 더디지도 않

고 빠르지도 않고, 따라서 空氣처럼 意識에 떠오르지도 않 았을 것이다. 쪼개는 것이 그렇게 能事라면 한번 空氣를 그렇게 쪼개 보라지. 그러면 쪼개는 일이 어떤 것인지 뼈에 사무치게 알 게 될 것이다. 時間은 원래 生成의 根本 形式이었는데, ‘時間’이라는 私生兒가 그것을 토막을 내서 서로 물고 늘어지게 했다.

원래 時間은 晝夜, 春夏秋冬이면 족했다. 陰과 陽, 元· 297


亨·利·貞이면 충분했다.

누가 時間을 스물넷으로 쪼갰는가. 기어이 쪼개어야 심성이 풀리는 것이라면 차라리 쉰네댓 으로 쪼개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짤막은 하되 지리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지리하게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면, 차라 리 대여섯쯤으로 쪼개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짤막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팔삭동이라는 말이 있지만 人間은 ‘스물네 時間짜리다 ’ . 人間이 그렇게도 약삭빠르고 영리하고 간사스러우면서도,

둔하고 미련하고 뻔뻔스러운 것은 ‘스물네 時間’ 때문이다. ‘最後의 審判’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이라면, 被告席의 맨 앞줄 한가운데에 서야 할 것은 이 ‘스물네 時間’이어야 한다. 나머지는 그 共犯者가 아니면 그 졸개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 檢事는 차라투스트라이다. 라스코리니코프가 辯 護士이고, 검사석 맞은편에 있는 證人席을 보면 예수, 釋迦

를 비롯한 四大 聖人이 시무룩해서 앉아 있다. 被告席 第一列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스물네 時 間’을 필두로 眞·善·美 등 元兇 중의 元兇들이 쇠고랑에

채여 있다. 第二列에는 敬虔한 모습들인 베드로, 聖프란스시코를

위시한 聖職者들이 앉아 있다. 298


第三列에는 베에토오벤, 와그너를 비롯한 陶醉的인 音 樂家들이 자리 잡고 있다. 第四列에서는 文學家인 단테, 톨스토이 等이 深刻한 表 情을 짓고 있다. 第五列에는 코페르니쿠스, 뉴우턴을 위시한 科學者들

이 冷徹한 포우즈를 취하고 있다. 第六列에는 플라톤, 칸트 等 哲學者들이 瞑想에 잠기고

있다. 第七列에서는 케에사르, 비스마르크를 위시한 政治家

들이 威嚴을 뽐내고 있다. 그 뒤에는 또 ‘信義’ ‘勸勉’ ‘端雅’ 등 그 밖의 雜犯들이 차 례로 줄지어 늘어앉아 있다. 그리고 히틀러, 나폴레옹, 스탈린 等은 몽둥이를 들고 廷 吏 노릇을 하고 있다. 被告들이 起訴된 罪名은 ‘人間 去勢’이다. 被告 全員이 有罪가 분명해지자 檢事는 사납게 일어서

며, 證人席에 앉아 있는 聖人들을 法廷拘束할 것을 主張한 다. “被告들의 先生인 저者들을 罰하지 않고 被告들을 뉘우 치게 할 수는 없다.” 辯護士가 反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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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法廷의 被告席에는 聖人들이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이 고 더구나 저들은 先生이 아니라 半밖에 人間이 아니다. 그 런 半人을 被告席에 앉히는 것은 當 法廷을 모욕하는 것이 다.” “證人席에 나선 자는 모두 被告席에 앉힐 수 있다.” “檢事席에 나선 자도 被告席에 앉을 資格이 있다.” 장내가 소란해진다. 裁判長은 방망이를 두드림으로써 그들의 感情的 싸움

을 제지한다. 그런데 그 재판장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디서 늘 보던 얼굴인데 따지고 보면 아무도 본 사람이 없 다. 말하자면 그저 ‘人間’이다. ‘人間’은 말한다. “그들이 ‘聖人’으로서는 마땅히 被告席에 앉아야 할 것 이로되, 被告들의 有罪가 곧 그들은 裁判하는 것이 되는 것 이고, 젊었을 때 그때까지의 世界觀에 反抗하여 그것을 破 壞한 叛逆兒로서의 前功에 鑑하여 그 以後에 저지른 人間 去勢罪는 不問에 붙이게 한 것이다.

어떤가? 證人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은 이 자리를 빌어서 저 被告들에게 나아가서는 全 人類에게 第二의 說敎를 할 誠實과 勇氣는 없는가. 저들에게, 그대들이 엮어 낸 世界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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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反抗하여 그것을 破壞하는 것이 現代의 良心이고, 그것 이 人間이 人間이 되는 길이며, 人間이 人間이 되는 것만이 人間의 길이라는 것을 說敎할 勇氣는 없겠는가…” 聖人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이미 너무 늙은 것이다.

“그러면 저 證人들은 養老院으로 案內해 가라.” 時計의 태엽을 거꾸로 틀고 틀어 뒤죽박죽을 만들어서

마룻바닥에 팽개쳤을 때 李章은 무슨 死刑을 執行한 것 같 은 뒤숭숭한 느낌이 들었으나, 역시 가슴이 후련해졌던 것 입니다. 스물네 個의 기둥으로 받쳐졌던 宮殿이 와르르 무 너져서, 거기에 깔리어 肉身이 문드러져 버리는 것 같은 幻 覺을 느꼈으나, 어쨌든 그 지붕에 가리웠던 푸른 하늘이 머

리 위에 나타나는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時間’은 시계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한번 만들 어진 ‘時間’은 시계와 관계없이 숨 쉬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지금 몇 時쯤 되었을까?’ 하는 생각은, 아무리 하지 말자고 해도 머리를 쳐들어 가지고 꽤 오랫동안을 두고 그를 괴롭 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時間’도 스며드는 봄빛에 밀려 추위와 함께 땅 속으로 사라지고, 洞窟은 웅덩이에 괸 물속이 되었던 것입 니다. 그렇게 ‘時間’을 외면하고 봄여름을 살았던 그가 死刑해 301


버렸던 그 時計 속에, 이 洞窟에서 어쩌면 脫出할 수 있을지 모를 可能性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은, 老 婆의 색다른 動作에 의하여서였읍니다.

저녁때였읍니다. 밖에서 무엇이 긁히는 것 같은 가는 소 리가 계속해서 나기에 침대에서 내려 내다보니, 주먹밥을 창살에 얹혀 놓은 노파는 돌아가지 않고 거기 바위 끝에 앉 아서 열심히 꼬물거리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힐끔 이쪽을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서 가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면도날 같은 것으로 대통을 자르고 있었던 것 같았읍니 다. 그렇다면 이제는 너무 늙어서 긴 대통이 무거워진 걸까. 그러나 동그랗게 생긴 면도날도 있는 것일까? 노파가 이제는 그렇게 늙었든,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자 르든 무슨 상관일까마는, 그의 生活에는 하찮은 노파의 그 런 동작에도 생각이 이모저모로 움직여질 만큼 刺戟이 없었 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마치 그것은 원숭이가 사람이 하는 짓을 엿보고서 그게 무엇하는 것인지 몰라 머리를 기 웃거리는 것과 같은 好氣癖의 한 發動이었는지도 모릅니 다. 302


면도날이 아니었다면 무엇일까 하다가, 그 동그란 것이 톱니바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듬과 함께, 그의 머리 속에는 난데없는 생각이 미쳐 들었던 것입니다. 방 안을 뒤졌읍니다. 時計는 침대 다리와 벽 사이에 녹이 쓸어 끼여 있었읍니다. 그 시계를 分解해서 몇 개의 톱니바퀴를 얻어 낼 수가 있 었읍니다. 팔목에 차는 것치고는 큼직하게 생긴 시계였는데, 그 톱 니바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작은 데는 적이 실망하였으 나, 하여간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가지고 자물쇠의 줏대 를 그것으로 긁어 보았읍니다. 미미하게나마 자국이 나는 것이었읍니다. 한동안 열을 내어 켜 보니, 새끼손가락 굵기의 줏대에 제 법 홈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이었읍니다. 생각해 보니 이 동굴에서 제일 脆弱한 부분이 자물쇠였 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물쇠를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 는 생각은 이때까지 해 본 적이 없었읍니다. 그런 생각을 했 더라면 時計 속에 있는 톱니바퀴에는 벌써 생각이 미쳤을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자물쇠를 늘 눈으로 보고 살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할 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直接 자기를 가두고 있는 303


것은 창살이지 자물쇠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또는 그것은 밖에서 잠근 것이니까 안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고 하는 그런 限界意識 때문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 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이 동굴에서 脫出할 생각이 진실 로는 그다지 간절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인 지도 몰랐읍니다. 어쨌든 톱니바퀴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에 자물쇠를 어떻 게 해 볼 생각이 난 것이지, 자물쇠를 어떻게 해 보자는 생각 에서 톱니바퀴에 생각이 미친 것은 아니었읍니다. 두 팔을 구부려서 내밀고 불편한 대로 일심불란으로 켜 대는 그 톱질은 일종의 解放運動이었읍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여기를 脫出할 수 있다면 그것은 落水 물이 바위를 뚫는다 하는 俗談의 덕분이다. 깊어지는 홈에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떠올랐읍니다. 나는 지금 그 俗談의 世界로 나가려는 것이다. 그게 解放인가? 그는 이렇게 反問하는 것이었읍니다. 洞窟에서 탈출해 나가는 것이 마음 한구석으로는 두려운 모양이었읍니다. 전에 그것을 두려워했다면 그것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난 市民證을 가지고 어떻게 處身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이 主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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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지만, 지금은 吳澤富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었 읍니다. 그는 그 密林에서 나아갈 準備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 다. ‘宗敎’가 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一 年 동안의 洞窟 生活은 그를 世界의 風習에서 더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더 없는 일이 었읍니다. 나가서 二, 三 日만 산다. 스스로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 로 直線으로 산다. 그러면서 그 解放運動은 점점 속도가 느리어지는 것입 니다. 그러면서 呼吸은 거칠어져 가는 것이었읍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直線으로 사는 것인가? 人間性을 덜어 내고 사는 것이다!

원래 人間과 人間性은 同一律로 묶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다. 人間性이 곧 人間이라고 하는 것은, 나무는 타기 때문 에 나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타는 現象이 먼저 있고, 다음 에 그래서 나무인 것이 아니다. 나무가 먼저 있고 다음에 그 나무가 타는 것이다. 나라는 人間은 某年 某月 某日 某時에 태어났다. 그런 데 알고 보니, 나의 人間性은 그 이전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 던 그런 것이다. 某年 某月 某日 某時에 비로소 태어난 나 305


라는 ‘人間’과 그 이전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나의 ‘人間 性’이 어떻게 同一이랄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契約에 의

해서만이다. 그런데 契約이란 二者 사이에서야 있을 수 있 는 것이다. 더구나 그 契約은 철도 들기 전에 强要에 의한 것이다. 인간을 얽기 위해 있는 꾀를 짜서 만든 法律에서도 選擇의 自由가 없는 環境에서 저지른 行爲에 대해서는 責任을 지

우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그 契約은 行爲도 아니요, 어린애 의 動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 ‘나의 人間性’에 責 任을 질 필요가 없고, 拘束될 이유도 없다. 理由가 없는 것

을 受諾해야 할 義務는 없다. 도리어 拒否할 權利가 있는 것이고, 그 權利가 있는 곳에 人間이 있다. 그것을 拒否할 줄 아는 狀況이 곧 現代다. 그런 의미에 서 現代人은 自由人이다. 이 自由를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 할 때 그는 奴隸가 된다. 자유인이 되느냐, 노예가 되느냐 하는 것은 오직 그의 決斷에 달려 있다. 그 決斷 앞에 自由 人으로 섰으면서, 주저할 때 그는 노예다. 그래서 現代人은

자유인이면서 奴隸다. 노예란 睡眠狀態다. 時空에 얽매어 있다는 것은 同時에 두 地點에 설 수 없

다는 것이고,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눈에 비쳐 든 것은 그 對 306


象의 一側面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永遠히 한 地點에만 서 있게 되면 우리는 그 一側面만을 보고 사는 것

이고, 영원히 一側面만 보고 살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全面 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空間이 永遠이라는 時間에 의하여 歪曲되었다 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왜곡된 空間은 거꾸로 時間에 작용 하여, 永遠을 영원히 永遠으로 歪曲해 버리는 것이다. 世界 란 이러한 왜곡된 時間과 空間의 흥정에서 생겨난 所產이 다. 이런 의미에서 世界는 하나의 歪曲이고, 生이란 그런 잠(睡眠)이다. 이 왜곡된 世界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또 다른 歪曲된 잠의 世界로 잠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잠들고 있어야 人間的인 가. 또 다른 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깨어난다는 것은 헛 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또 더러워질 것이니 구두는 닦 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懶怠다. 幸福이란 懶怠의 딴 이름인가? 人間은 지금 幸福한가?

그 懶怠에서도 幸福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人間은 너 무 고달프고 비참하다. 人間性은 너무나 비루해졌고 잔인 해졌고 무엇보다 찌그러졌다. 꾀가 좀 증가했을 뿐 陰鬱해 졌다. 307


명랑하면서 勇氣가 있고, 나이브하면서 威嚴이 있는 사 람이 萬 名 중에 한 사람이나마 있을 것인가. 現代는 自然惡이 가져온 不幸이나 苦痛보다, 人間惡이

빚어낸 그것이 더 큰 것이다. 人間惡은 人間性에서 생긴 것 이다. 그 人間性은 그 人間善도 分泌했다. 그러나 人間善 이 가져온 幸福과 人間惡이 가져온 不幸과의 무게의 比는 自然惡과 人間惡의 그것과 같기가 마련이다. 人間善을 보고 人間性을 두둔할 것인가, 人間惡을 보고 人間性을 破棄할 것인가? 이것이 現代의 있는 그대로의 狀 況이다. 이 상황은, 毒蛇에게 물린 다리를 그대로 둬 둘 것

인가, 절단해 버릴 것인가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람의 想像力과 趣味에 달려 있는 것이다. 人間性에서의 人間의 解放, 과연 그것은 可能할 것인

가? 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可能, 不可能을 생각할 그런 한가로운 것 이 아니다. 그것은 選擇할 문제가 아니라, 選擇된 것이기 때 문이다! 人間에 의해서! 한 一週日째쯤 되는 날 저녁, 자물쇠의 줏대는 마침내 끊 어졌읍니다. 密林의 문은 열리고, 그는 바깥으로 나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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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두 걸음 옮겨 디디던 그는 현기증과 함께 그만 두 손으로 땅을 짚어야 했읍니다. 무릎이 무너지는 것입니 다. 無限한 世界는 洞窟에 알맞아진 그를 壓倒해 버린 것입 니다. 생각만 앞서고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었읍니다. 기 고만 싶어지는 것입니다. 힘을 다리에 모아 가지고 일어나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 갔읍니다. 싸리나뭇단의 둑 끝에 가서 보니 工場의 그 굴뚝이 서 있 는 마을이 한눈 아래였고, 바람벽 일부가 보이는 벽돌집은 바로 발밑이었읍니다. 멍하니 下界를 내려다보다가 동굴 앞으로 돌아온 李章 은 體操 같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굳어진 몸이며 마음을 風 化시키는 것입니다. 제자리뛰기도 해 보는 그의 體操에는 悲哀가 느껴지기도 했읍니다.

어둠이 찾아들었읍니다. 굴속으로 도로 들어간 그는 침대에 몸을 눕혀, 생각을 모 아 봤읍니다. 여전히 漠然한 일이었읍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吳澤富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우선 어떻게 그것을 自白시킬 것인가? 무지하고 치 사스러운 그 凶物을 무슨 수로 자백시킬 것인가… 309


생각할 것이 없다. 생각을 빼 버리고 그때그때에 어울리 는, 가장 생생한 動作을 취한다. 그 순간을 위하여 조심스럽 게 살아야 한다. 언제 붙여졌던 눈이 띄어진 것은 子正이 지났다고 생각 될 무렵이었읍니다. 굴에서 나와 아래로 내려갔읍니다. 내일모레면 滿月일 하늘은 구름에 가리어, 恐龍의 비늘 처럼 얼룩이 져 있었읍니다. 불이 켜져 있는 방은 부엌에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찢 어진 창호지 틈으로 들여다보니 늙은 내외는 이불 위에 앉 아서 수박 사과 배 옥수수에다 감자까지 겹쳐서 먹고 있는 데 무슨 뱃가죽이 그렇게 늘어났는지 대야에는 그런 껍질들 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턱을 열심히 놀리고 있는 老婆의 얼굴은 善良해 보이기도 했읍니다.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았으나 안으로 잠겨 있었읍니다. “뉘기우?” “난데, 알겠소?” “우애! 저눔 도깨비가?…” 이장은 그것이 도깨비라고 했는지 두꺼비라고 했는지 잘 알 수 없었읍니다. “예보! 빠리 저눔을! 도끼 도끼…” “도끼라면 여기 있소.” 310


이장은 바람벽에 세워져 있는 도끼를 들어 문살을 툭 받 았읍니다. 그리고서 그 사이로 손을 넣어서 안으로 걸어 놓은 고리 를 벗기면서 문을 열었읍니다. “에우 에우! 살레 줍쇼. 목숨만 지발 살레 줍쇼…” “아까 도깨비라구 했소? 두꺼비라구 했소? 한 대로 해 주 지.” “뚜 뚜께비요! 뚜께비요.” “다음에는 도깨비라구 한번 소리 내 봐요. 그저 소리 내 보란 말이오!” “도 도께비…” “뚜꺼비라구 해 보오.” “뚜께비…” “그 도깨비에게 갖다 멕인, 쉰밥이라는 말에는 사투리가 없소?” “이럴 줄 모르구, 되지를 팔아서 그저 베리는 게 아까워 에끼느라구 한 게 그만…” “되지 돼지?” “아네우 아네우! 되지가 아네구…” “그저 버리는 것이 아까울 테니 이 껍질은 할머니가 다 먹어야지.” 311


“댉이우! 되지가 아네구 알을 낳는 댉이우.” “한 조각두 남기지 말구 먹어야 해. 이 도끼에 맞기 싫으 면 말이오.” 번득거리는 도끼에 놀란 노파는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라 는 듯이 대야를 끌어당기더니, 멀건 눈알을 굴려 가며 주워 서는 삼켜 들이는데, 뱃가죽이 그렇게 늘어날 줄은 몰랐읍 니다. 꼬끼오! 첫닭이 울었읍니다. “이 세상에 나온 마수거리로 혼을 내 줄까 했지만, 할머 니는 사람됨두 사투리 같으니 돼지나 빨리 얻어다 길러요.” 그 집 안에는 늙은 그 두 내외만이 있었읍니다. 노파는 장롱 속에서 전날의 그 돈을 꺼내 바칩니다. “사투리가 되어 버렸는 줄 알았지.” 벌벌 떨기만 하고 있는 영감을 이불장 속에 들어가게 하 고 열쇠로 잠근 다음, 노파더러 가위와 면도칼을 가져오게 하고서, 목욕탕에 물을 끓이라고 했읍니다. “할머니가 一 分 이상 내 눈에 비치지 않으면 저 영감은 이 도끼로 요정이 날 줄 아오.” 거울 앞에 가 선 李章은 황량한 忘却의 안개에 휩싸이는 것이었읍니다. 헝클어진 쑥밭을 약간 밀어 내고서 두 눈알 과 콧마루를 심어 놓은 것 같은 상판이었읍니다. 입은 꺼칠 312


꺼칠한 수염에 가리워 숫제 보이지도 않는 그 몰골은 흉물 스럽다기보다 망측했읍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時間이 멎어 있는 것인가. “난 예기 있슈.” 나는 저기에 있다. 나는 저기에 있는 저것에 더 가깝다. 여기 있는 이 나는 나의 風俗에 지나지 않는다. 그날 저녁, 버스로 漢江 다리를 넘어 長安으로 들어갈 때 의 그 穴居人은 멀쩡한 都會人이 되어 있었읍니다. 밝을 녘 산기슭으로 해서 P邑을 벗어 나와, 신작로에 나 선 그는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탈 수가 있었읍니다. 두어 時間 달리니 꽤 번잡한 마을이 나왔읍니다. 장날인 것 같았읍니다. 그 마을에서 그는, 노파의 영감을 시켜 대충 가위질했던 머리를 理髮하고, 남방샤쓰와 바지와 구두, 그리고 양말과 속옷까지 새것으로 갈아입었읍니다. 그리고서 의아해 하는 객주집 영감에게 구전을 붙여서, 벗어 놓은 와이샤쓰와 바 지와 구두를, P邑의 吳 의원 댁에 전해 줄 것을 부탁하고, 버 스에 올라탔던 것입니다. 一 年 만에 보는 서울 거리는 ‘過去 안의 現在’처럼 칙칙

하면서도 無聊했읍니다. 黑나비 茶房에 이른 것은 해가 다 질 무렵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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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바타플라이는 보이지 않았읍니다. 구석진 자리에 가서 바타플라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보았읍니다. 실내 裝置들은 전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것 같았 고, 마네킨 같던 레지들의 걸음걸이도 풀이 바래져 있었읍 니다. 그는 지금, 아직 확실히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吳 澤富와 최단거리가 되는 地點으로 보고 마담 바타플라이를

찾아온 것이었읍니다. 마담 바타플라이가 그 지점이라는 것을 어떻게 確認하 고, 어떻게 占領할 것인가? 여기서 기다리는 것보다 밤이 이슥해서 通行禁止의 사 이렌이 울릴 쯤 해서 다짜고짜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기서 그러다가 싫어하는 얼굴이라도 당하게 되면 집에 찾아가지도 못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로 여기서 기다려 볼 것인가, 일어날 것인가 하고 망 설이던 李章의 시선은, 조금 전에 앞자리에 와 앉았다고 생 각되는 여자의 웃는 것 같은 시선에 말리어 갔읍니다. 순간 어디서 본 얼굴이라고 했읍니다. “안녕하셨어요?” “아 공자?…” 회색 투우피이스에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그 여자는 어 314


른이 다 된 公子였읍니다. 그전처럼 명랑하기만 한 것이 아 니고, 여위어 보이는 그 눈가에는 憂愁가 배어 있는 것 같기 도 한 것이 더욱 성숙해 보이게 했읍니다. “몇 번이나 다른 분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구 했는지 몰 라요. 전연 알아보시지도 못하니까요.” “…” “정말 어디 다치셨던 거에요?” “미국에 가 있는 줄 알았는데…” “모르시는군요…” “무엇을?” “지금은 다 나으셨어요?” “그렇게 병신 같은가?” “농담이 아니구요, 몰라볼 정도예요. 들어오실 때 걸음걸 이두 딴 사람인 걸요.” “西大門이나 淸凉里 같은 데서 갓 나온 것 같지 않았소?” “그런 농담은 없어요.” “그럼 馬山쯤은 어떻겠소?” “요양원 말씀이에요?” “그런 점잖은 병두 아니구, 요즈음 세상에는 별로 없는 괴상한 병인데 햇빛을 쬐면 안 된다나. 그래서 지금 土窟 같 은 데서 나온 길이라면 더 믿어지지 않겠지.” 315


“그런 병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지금 동굴에서 막 나온 것이 사실인데 세 상을 아무리 갖다 댄들 무엇하겠소.” “症勢는 어떤 거예요?” “꼭 감옥살이하는 심정과 같았지.” “원인은 뭔데요?” “뭐라고 할까…” 자기도 모르게 농담調가 되었던 이장은 갑자기, 겪은 모 든 일을 公子에게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었으나, 이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뒤로 물러나 앉는 것이었읍니 다. “막 올라오신 길이랬지요? 언제 올라오신 거예요?” “아까 저녁 차로.” “그럼 여기가 첫걸음이시군요.” “…” “그러시다면 과일점에 가셔야 할 것 같아요. 그이는 복숭 아를 좋아한다니까요.” “…” “열이 四十 度나 올랐다나요. 지금은 좀 차도가 있다지 만.” “…” 316


“집 아세요? 모르시면 제가 가르쳐 드릴께요.” “공자가 마담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오?” “앞으로 친척이 될지도 모를 사람이니까요.” “친척?…” “농담이야요. 그런 얼굴 마세요.” “…” “우린 갑자기 친해졌어요. 왜냐구요? 結婚 말이 나왔기 때문이에요. 그이 아니구 제가 말예요.” “…” “순서가 거꾸로이지만 제가 미국 안 간 것두 그 때문일 거에요.” “아버님께서도 그간 안녕하시겠지요?” “선생님을 꼭 한번 만나 뵈이시겠다구 하셨는데… 그래 서 한때 몹시 찾았어요.” “어디에 가서?…” “학교에 가 주소를 알아 가지구 하숙에 찾아가 봤어요. 그 집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누가 와서 交通事故로 대학병 원에 입원하셨다면서 책가지 같은 것을 몇 卷 가져갔는데 병원에 가 보니 그런 분 입원한 적도 없다더라는 거예요.” “학교에서는 뭐라구?” “한 달 전부터 통지도 없이 안 나오신다구…” 317


“…” “그래서 여기 마담에게 물어보니 日本에 건너가셨을 거 라는 거예요. 그래서 전 그런 줄만 알았어요.” “언제 일이라구 했지요?” “지난봄이에요.” “한 달 전부터 통지도 없이라는 것은…” “처음 찾았을 때의 일이에요.” “…” “지난봄에 다시 찾아본 거예요.” “그렇게 찾을 일은 그때 벌써 없어졌을 텐데…” “부친으로서는 좀 중대한 일이신 것 같았어요. 전 잘 모 르지만요.” “…” “언제쯤 한번 찾아오실 거라구, 그렇게 전해두 괜찮으세 요?” “아니, 중대한 일이라는 것은 없읍니다.” “그럴까요?” “이렇게 전해 주면 고맙겠소. 나는 그동안 그 여자의 肖 像畫의 여자 말이오, 그 여자의 오빠 집에, 시골에 있는 바

위로 된 그의 別莊에 갇히어 있었다구 하면 다 아실 것입니 다.” 318


“…” “찾아뵈구 싶은 마음은 태산 같지만 그러지 못한다구…” “여기에는 종종 나오시겠지요?” “아니.” “왜요?” “…” “모레 열두 時에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제가 대신으로라 도 꼭 한번 만나야겠어요.” “나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소.” 일어서는 것입니다. “내 혼자 생각이지만… 공자는 내 갈 길에 뭐라구 할까, 방해가 된다고 할까…” 公子에게 무슨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

읍니다. 그렇게 다방에서 나와 대여섯 걸음 옮겨 놓던 이장은, 저 앞으로 급한 걸음을 해 가지고 오는 한 청년의 모습에 그만 우뚝해졌읍니다. 그가 그렇게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그 청년도 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지만, 그대로 걸음을 재촉해서 ‘黑나비로 ’ 사라져 들어가는 것이었읍니다. 그 청년은 언젠가 洞窟 앞에 나타났던 오택부의 아들이 319


었읍니다. ‘마담 安芝夜’가 자기 아버지의 뭐가 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茶房에 드나드는 것으로 보면, 그 아들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시원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치 는 것이었읍니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나 오택부와 마담 바타플라이는 아 무것도 아닌 關係가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다. 色에 있어서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그 白丁이 마담과 아는 사이면서 그 百萬 딸라의 肉體를 아 무것도 아닌 관계로 둬 두고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마담 바타플라이의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을 더듬으면 서 李章은, 公子를 만나지 말았어야 할 것이라고 되뇌이는 것이었읍니다. 洞窟을 나서면서부터 風化作用을 일으키던 이장은 公 子를 대하면서는 아주 흐무러지고 있는 자기를 깨달은 것입

니다. 去勢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老婆로 하여금 대야의 그 껍질을 다 먹게 해야 했 다. 그런데 나는 半쯤에서 외면했다. 외면할 만한 노파였던 가. 교활하면서도 미련한 그 늙은 生物은 배가 터지면서라 도 기를 쓰고 주워 먹었을 것이다. 다 먹으면 아무리 두꺼운 뱃가죽이었기로 터진다. 320


나는 그것도 못 했다. 지금에 와서는 오택부와 마담 安芝 夜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인지도 모른다고까지 해 보는 것이

다. 公子가 뭔가? 幸福해서 明朗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가

장 俗된 암노루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마담 바타플라이는 聖스러운 뱀이 다! 料亭 앞에 이르렀을 쯤에는, 그의 마음에는 毒버섯이 피

어올랐읍니다. 바타플라이가 暴漢들에게 습격을 당한 지점에 이르러서 는 慾情마저 이는 것이었읍니다. 安芝夜는 반항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오택부

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담 바타플라이의 팬츠 인데 이것을 찢어 내느라구 땀을 되우 뺐소. 그러면, 뭐이 이 돼지 같은 놈아! 할 게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왜요, 당신이란 남자는 자기 동생을 강간했는데 내가 당신 의 情婦쯤 강간 못 하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못 되거든 요. 그러면 반드시 白丁이 되어 나올 게다. 그러나 나도 이 제는 갓난애가 아니니까 그렇게 간단히 이부자락에 입 코를 틀어막히지는 않을걸. 芝夜의 집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읍니다. 현관 앞에는 꺼

321


먼 지이프차가 있는 것입니다. 의사가 온 걸까? 머뭇하다가 안으로 들어가 보았읍니다. 운전수는 코를 골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남버’ 옆에 붙 어 있는 것은 無窮花 속에 ‘國’ 字가 새겨져 있는 국회의원 의 표지였읍니다. 오택부가 와 있다는 말인가? 오택부만이 국회의원이란 법은 없다. 그러나 가령 오택부라면… 현관문을 획 열고서 단숨에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그 침 실 문을 쑥 열어 본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아니야, 그리 되면 그것은 演劇이지 영화가 못 돼, 지금

映畫 時代거든.

그는 대문 밖으로 물러 나왔읍니다. 운전수가 운전대서 졸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는 것은 아닐 것이었읍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망설이는데, 현관문이 열리면서 뚱뚱하고 모가 난 신사가 나왔으나, 머리에 쓴 모자에 가리 워져 얼굴은 짐작해 볼 수도 없었읍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현관 밖으로 몸을 내놓는 것을 꺼리어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차에 타던 사람 쪽이 돌아보며 무 322


슨 말에 反問하다가, 다시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남의 눈이 두려워서인가. 바타플라이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던가. 생각한 것보다 쑥스러운 데가 있는 여자다. 자기 집에 남자가 발을 들여놓은 예가 없노라고 하면서 도도해 하던 일이 생각나기도 했읍니다. 지이프차는 헤드라이트를 켜 대면서 굴러 나왔읍니다. 담 그늘에 숨어 서서, 커어브를 도느라고 부비적거리는 차 안을 더듬어 보았으나, 안에는 불이 켜 있지 않아 사람의 그 림자는 윤곽도 알아볼 수 없었읍니다. 저 아래로 제물에 굴러 내려가는 차의 뒷모습을 멍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문이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났읍니 다. 언제 식모가 나와서 대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장은 말도 없이 그리로 다가갔읍니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던 식모는 그것이 누구인지를 알아보 는 것 같았는데, 몹시 당황해 하는 것이었읍니다. 어물어물 문을 그대로 닫으려고 합니다. 이장은 무가내로 들어서려고 했읍니다. 식모 또한 무가 내로 몸으로 이장을 막아 내면서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 다. 빗장을 질러 놓곤 무엇에 쫓기듯이 안으로 사라지는 것 이었읍니다. 323


현관燈마저 꺼지는 것입니다. 좀 기다려 보자. 매니저인지 뭔지 하는 식모로서는 하룻 밤에 두 남자를 안내하는 것이 뭣하겠지만, 마담 바타플라 이는 質이 좀 다르니까, 담을 넘어서라도 만나 봐야 하겠다. 현관에 다시 불이 켜졌읍니다. 식모는 고개를 옆으로 제 쳐 가지고 나와서 대문을 여는 것입니다. 식모의 안내도 기다리지 않고 이층에 올라가 그 방문을 열었읍니다. 스탠드에 불이 하나 희미하게 켜져 있을 뿐 마담은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옷이라도 걸치고 있는 것일까… 침대 발치가 되는 소파에 앉아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문 이 열리는데, 마담 바타플라이는 금방 목욕탕에서 나온 나 른해진 몸을 타올地의 浴衣로 두르고 있었읍니다. “이북에 갔다 오셨나요?” “…” “그런 거죠?” “왜?” “선생님 같은 분이 경찰에 쫓기다가 行方不明이 되었으 니 거기밖에 생각날 데가 있어요?” 침대 머리맡이 되는 자그마한 의자에 가서 어딘지 꺼림 324


칙해 하면서 들어앉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보았지만 대학 교수가 경찰에 신 세를 진 사람은 없다구요.” “그 전화 지금두 고장인가요?” “왜요?” “그 아는 사람에게 그 간첩은 무사히 돌아왔으니 안심하 라구 알려야 할 게 아니겠소.” “그래도 좋겠지만 선생님 같은 이도 빨갱이가 될 수 있을 까 생각하니 그쪽이 더 흥미가 나는 걸요.” “…” “그 대신 저를 洗腦할까는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마음이 풀리는지 꼿꼿이 앉히고 있던 姿勢를 흐려 놓는 것이었읍니다.

“흥미라면 이북이 아니구, 시골에 있는 오택부 씨의 별장 에 가 있었다면 어떨까…” “…” “믿어지지 않을 테니 전화 걸어 보시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테니 좀 있다가 말이오.” “거기서 뭘 하셨어요.” “體操를 했지. 건강해지라구.” “요양하셨어요? 안색이 말이 아니에요.” 325


“나는 마담께서 요양 중이라구 들었는데.” “마담에게두 이름은 있어요.” “난 그 이름이 겁이 난단 말이오.” “바타플라이 같지 않아서요?” “어떤 深山幽谷에 가 보았더니 ‘安芝夜’라는 碑石이 있 었거든요.” “어마나 그럼 烈女碑겠군요.” “아니 洗腦碑 같았소.” “세뇌비? 묘한 비석두 다 있군요.” “아까 ‘세뇌할까곤 ’ 하지 말랬지만 도리어 내가 세뇌당했 는걸.” “영광이군요. 그러지 않아두 婦人네들이 들고일어나서 저의 행실을 天下에 폭로하려구 記者까지 다 매수했는데, 그만 남정네들에게 들켰거든요. 크게 宣傳이 되었을 것을 지금 생각해두 서운한 일이었어요.” “요양 중이라구 들었는데 목욕해두 괜찮은가요?” “한 시간가량 더운 물에 잠겨 있는 게 요양이래요.” “한 시간 동안 목욕탕에 있었나요?” “왜요?” “아니, 저 창밖에서 울고 있는 벌레 소리는 과연 작년 울 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구 할 수도 있겠다는 말이오.” 326


“무슨 의미지요?” “남자가 발을 들여놓은 例가 없다고 한 것은 아마 이 침 실이구, 목욕탕을 말한 것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뭐라구요?…” “그럼 혼자 여기서 혼자 저 술만 마시다가 돌아간 건가 요?” “…” “十 分 전에 지이프車를 타구 저 아래로 굴러 내려간 국 회의원의 머리에서는 흰 김이 이던 것 같았는데…” “그 이상의 말을 하면 용서 못 하겠어요!”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읍니다. 이장은 마담 바타플라이가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흥분하 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면 그 이하의 말부터 할까요?” “듣고 싶지 않아요.” 흩어졌던 앞가슴을 여미는 것입니다. 이장의 시선을 거기에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읍니다. “내가 安芝夜 아닌 마담 바타플라이와 키스하지 못해서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알지요?” “뭐요?… 아이 우스워라…” 327


머리를 뒤로 제치고 그 무거운 가슴을 출렁거리면서 남 자처럼 웃어 대는 것입니다. “선생님만큼 교양이 있는 분이 무엇을 믿구 그렇게 자신 이 만만해질 수 있으세요?” 茶房에서 흔히 하는 버릇으로 턱으로 내려다보는 자세

를 취하는 것입니다. 守勢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 더 유쾌한 모양이었읍니다. “제가 왜 선생님에게 약간 무르게 대했는가 하는 까닭을 말하면 아마 상당히 기분이 나빠하실 거예요.” 팔짱을 끼고 거기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방바닥을 보고 하 는 말입니다. “그것은요, 선생님은 저의 알몸을 본 남자였기 때문이에 요.” “…” “그야 보인 것은 수없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보이지두 않 았는데 본 남자는 李章 씨라는 사람뿐이었어요. 그래서 아 니꼬우면서도 관심이 가게 된 것뿐이에요.” “…” “이만하면 선생님이 다른 남자들보다 특별히 매력이 있 기 때문이 아니구, 저의 一方的 감정의 混線이라는 것을 아 셨죠?” 328


가까이 가더니 이장이 기대앉아 있는 소파의 팔걸이에 그 엉덩이를 갖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요, 이것두 公子라는 애에게 공연히 질투를 느꼈거든요.” 이장은 숨결이 닿는 곳에서 꿈지럭거리고 있는 음탕한 곡선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못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읍니다. “공자하구 무슨 친척이 될지도 모른다던데, 그동안 사이 가 좋아진 모양이지…” “어머나 그럼 프러포우즈했다가 이 마담 바타플라이를 찾아오신 거군요. 가엾게스리…” 몸을 비틀더니 두 손으로 사내의 얼굴을 싸쥐고는 이마 에 입을 갖다 대는 것이었읍니다. “그래두 전 조금두 자존심이 상해 안 해요. 더 뭐라구 할 까, 아이를 가져 보지 못해서 母性愛라는 것을 잘 모르지만, 선생님이 꼭 그런 아기처럼 느껴져요. 좀 무서운 데가 있지 만…” “그 아이를 배게 해 주지!” 李章은 벌떡 일어나는 서슬을 가지고 芝夜를 안아 들었

읍니다. “어머나 힘이 세네요.” 하면서 구렁이 같은 두 팔. 목을 329


감고 드는 것을, 침대에 가져다 내던졌읍니다. “난 오늘 百萬딸라族으로 온 거야!” 紙幣 뭉치를 마구 주머니에서 꺼내, 여자의 가슴에다 던

지는 것입니다. 여자의 눈은 웃기만 하는 것입니다. “모욕두 안 느껴?” “노려만 보지 말구, 철이 지나가기 전에 빨리 안아요.” 몸을 꼬는 것입니다. “내일모레면 이 몸두 바래 버린다니까요…” “목욕탕에서 아까 껴안구 딩군 것은 吳澤富였지?” 하면서 여자의 위로 덮어 드는 것입니다. “놔! 이 더러운 사람!” 그 白蠟같이 희기만 한 살결 속에 어디 그런 힘이 있을까 싶게 날카롭게 남자의 가슴을 떼밀면서 일어나 앉는 것이었 읍니다. “반항할수록 나는 좋다!” 달려들어서 그대로 껴안는 것입니다. “이거 놔요!” “나는 지금 오택부의 情婦를 겁탈하면 그만이다!” 쓰러뜨립니다. “아이구 아이구…” 330


남자의 가슴에서 벗어나려고 악을 쓰며 몸부림칩니다. “아니야, 芝夜! 정말은 지야를 사랑해! 그 늙은이를 죽이 고 싶도록. 아니 이 살결을 짓밟은 그 늙은 백장은 죽여 버리 고 말 테다!” “망측한 사람 같으니! 전 딸이야요!” “…” “그 사람은 아버지야요!” “…?” “나가 줘요!” 침대에서 뛰어내린 芝夜는 문을 가서 열어제치면서 외 치는 것이었읍니다. “썩 나가 줘요!” 비참하면서도 멋없는 신세가 되어 그렇게 그 집에서 쫓 겨난 李章은, 비틀비틀 산 위로 헤엄치고 오르면서 몸이 불 덩어리가 되어 있었읍니다. 그게 정말일까? 그게 정말일까?… 쇠망치에 얻어맞았던 그 머리에서는 이런 呻吟소리만이 分泌되는 것이었읍니다.

마담 바타플라이가 동생… 피부가 썩어서 문드러지는 것 같았읍니다. 그 여자에게 한 말, 動作 그리고 품었던 色情… 331


나는 오택부가 될 뻔했다. 아니 오택부다! 그 말을 듣고 도 어쨌든 나는 그대로 行하려고 했다. 芝夜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소리와 팔만이 그렇게 거역

했을 뿐, 그의 욕정도 나처럼 그대로 타고 있었다. 이런 문둥이가 될 것이면 그대로 해 버려야 했다. 그것만 이 내가 나아갈 길이었다. 아니 더 劇的이다. 마담 바타플라이의 육체에 人生을 태 우면서 동시에 世界를 짓밟는다는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산꼭대기가 저 위에 희미한 어느 바위 그늘에 몸을 내던 지면서 그는 生의 挫折을 느끼는 것이었읍니다. 여기에 와서 이렇게 쓰러지려고 洞窟에서 나왔던가… 그 속에서 그대로 살았다면 적어도 健康은 그대로 유지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나의 終點이라는 말인가? 票에 적혀 있는 到着驛까지는 아직도 한 停車場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제 와서는 또 다시 그렇게 생각 하고 싶어 하는 李章이었읍니다. 어둠 속에서도 흐릿한 그의 눈망울에서, 어느 집 창문의 불이 꺼졌읍니다. 李章은 그것이 芝夜의 방 창문일 것이라 고 했읍니다. 332


저 아래 거리의 불빛들은 목이 터지게 인간의 營爲를 合 唱하고 있는 것이나, 그 위에 덮인 어둠의 重壓에 비하면 그

것은 한 장의 陰畫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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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章 죽어 가는 것 같은 짐승의 悲鳴소리에 눈을 떴읍니다. 날은 훤히 밝아 오르고 있었지만 萬物은 아직 잠에서도 덜 깬 이른 아침인데 바로 발아래가 되는 산길은, 한 손에 자 루가 긴 갈구리를 든 중늙은이가 낑낑거리는 개를 새끼줄로 목을 옭아매 가지고 저 아래로 끌고 내려가고 있었읍니다. 백정의 손자가 되기도 하는 李章이지만 白丁이라는 것 을 눈으로 보기는 이것이 처음이고, 그 중늙은이의 뒷모습 에서 오택부가 아니라, 털보 영감의 獸性을 맡는 것이었읍 니다. 불의 바다였던 거리는 허연 하늘 아래 다닥다닥 서로 얽 혀서 질펀하게 널려 있는 것이, 얼핏 보아서는 武裝한 共犯 意識들의 蝟集이요, ‘巨視의 손이 ’ 있어 空氣를 파헤치고 들

여다볼 양이면, 그것은 女王을 섬기는 것이 그 全部가 되는 개미 世界의 構造보다는 좀 복잡하고 規模가 크기는 하지 만, ‘左側通行이 곧 生’이라는 祭政一致의 오목한 奴隸社會 인 것입니다. 自由도 노예가 되어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 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그 反對가 되는 것이고, 兩極端 은 저쪽에 가서는 서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 로 돌고 돌아가는 길에 있는 것입니다. 334


밤이슬이 축축해진 몸에 첫가을의 아침 공기는 일말의 悲感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읍니다. 간질병 때문에 婚期를

놓치고, 그런 아버지와 함께 산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 다가 그렇게 죽은 윤희가 서러운 생각입니다. 마담 바타플 라이를 그렇게 만나게 해 놓고는 뒤안으로 사라졌던 倫姬의 追憶이었읍니다.

어머니가 그 윤희와 거의 같은 不倫을 당한 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털보의 정수리를 그때 개머리판으 로 깨 버리지 못했던 것을 얼마나 恨으로 하였던 것인지 모 릅니다. 오택부는 그 털보보다 더 質이 나빴고, 무슨 짓이라도 해 내는 惡人 같았읍니다. 그 오택부에의 最短距離였던 마담 바타플라이는 ‘동생 芝夜’라는 絶壁 끝이 된 것이었읍니다. 그 저쪽으로 뛰어넘

기를 決斷하든지, 旗를 말아 감고 도로 내려가든지 하여야 하는 二者擇一 앞에 그는 놓여지게 된 것이었읍니다. 東쪽 산마루에 시뻘건 불덩어리가 솟아올랐읍니다. 世 界는 갑자기 시들해지는 것 같았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햇

빛은 소금물과 같은 것이어서, 밤의 精氣를 타고 움이 텄던 모든 神秘와, 勇氣와 智慧의 모든 싹을 시들어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太陽은 共犯意識들의 錢主요, 奴隸社會의 女王 335


인 것입니다. 人間은 그런 太陽의 아들이었고, 그들은 그런 俗化를 健康이라고 했읍니다.

아침 공기에 비감해졌던 李章은 허전해지는 몸을 일으 켜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지난 밤 부끄러움과 絶望에 꺼져 가던 마음의 불을, 식어 가는 밤 공기에 다시 불러일으켜서 작정한 바로는, 오늘 하루를 산 에서 지냈다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芝夜를 그 침실로 다시 방문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 叛心도 太陽의 소금물 에는 끝내 시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거리로 내려온 이장에게는 指向이 없었읍니다. 그러면 서 그가 곧장 도달한 곳은 지난날 警官에게 쫓겼던 그 길모 퉁이였읍니다. 무슨 感慨라도 이는 듯 멎는가 싶더니, 아니 고 슬그머니 돌아서서 그때 달아나던 그 골목길을 더듬는 것이었읍니다. 거기 상점 문을 열고 있던 店員이, 검불과 흙을 몸에 바 른 그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은 行人을 수상쩍어 하는 눈초리 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뭐요? 뭘 아는 것처럼 쳐다봐.” 생생한 그 소리에 점원은 질겁을 먹고 안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전에 工事 中이었던 모퉁이에는 四層짜리 빌딩이 서 있 336


었읍니다. 그 꼭대기까지 훑어보고서는 머뭇해 하다가 그는 파출소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이어 놓는 것입니다. 하품을 켜면서 立哨하고 있던 순경은 이상하다는 눈초 리로 맞이하였다가, 그것만으로는 불러 세울 수까지는 없었 는지 그저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내 놓는 것이었읍니다. 조그만 十字路에 이르는데 옆으로 택시가 굴러 나왔읍 니다. 그의 길을 막듯 앞을 스쳐서 저쯤에 가 멎는 것입니다. 내가 서라고 무슨 시늉이라도 했던가? 보이지 않는 무슨 손이 여기까지 마중하러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일었다가 스러졌읍니다. 돌아보니 순경은 이쪽 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읍니다. 얼른 자동차에 올라탄 李章은, 그날 택시로 도피했던 그 코오스를 달리게 하는 것이었읍니다. 저만치에 지난날의 下宿이 바라보이는 데에 이르러 차 에서 내린 그는, 여기까지 와서 돌아설 수는 없다는 듯이 하 여간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이었읍니다. “이 선상님이 아니시오?” 지나가 버린 줄 알았던 금테 帽子의 영감입니다. 본 것 같은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읍니다. “아니 나는 吳 哥라구, 다른 사람입니다.” 함부로 말을 건네지 말라는 듯 상대방의 눈에 못을 박아 337


놓고 발길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포도 덩굴이 얽혀 있는 하숙집 대문은 아직 잠겨 있는데 이층의 흰 커어튼은 분홍으로 바뀌어 있었읍니다. 변한 것 이라고는 그것뿐이었읍니다. 그 커어튼을 흰색으로 도로 해 놓으면, 지나간 일 년은 꺼져 버리고 그날이 바로 어제가 될 것만 같았읍니다. 돌아보니 아까 그 守衛 영감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걷 다가는 돌아보는 것이었읍니다. 걸음을 이어 대여섯 집을 지나, 落書가 가득 긁혀 있는 어느 대문 앞을 지나다가 그는 아까 그 금테 모자가 이 집 노 인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읍니다. 길바닥에서 구두를 고치고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그런 금테 모자를 쓰고 벤또바꼬를 들었으니 내가 알 게 뭐람. 수 위라면 은행이 아니면 회사겠지. 경찰서에는 수위가 필요 없거든. 情報機關 같은 데는 수위가 없을까…

큰길에 나온 그는 전차에 올라탑니다. 終點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린 그는 좀 널찍한 길을 따라

들어가다가, 어느 골목길로 굽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잘못 찾아 들었는지 서너 발자국도 못 가서 되돌아 나옵 니다. 그 일대는 같은 모양의 韓式 家屋들이 즐비해 있어, 338


골목을 어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金 社長의 집은 다음 골목 인 것입니다. 그 대문 앞에 이른 이장은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싶어 하 는 듯도 해 보였으나, 바싹 다가서더니 문고리를 연방 잡아 흔드는 것이었읍니다. 열대여섯 되어 보이는 낯설은 식모아이가 문을 조그맣게 열고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읍니다. “누구를 찾으세요?” “아, 이사 갔다는 걸 그만 깜빡 잊구 지나가던 길에…” “누구를 찾으시나 말에요?” “김 사장이라구, 무슨 뿌로카 같은 일을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 사람과 절친한 사인데, 어디로 이사 갔는지 그런 건 모르겠지?” “손님은 누구에요?” “나? 난 아까 말한 것처럼 절친한 사인데 이장이라구 하 지.” “잠깐 기다레 보세요.” 문을 닫고는 빗장까지 도로 질러 놓는 것입니다. 이장은 길 가운데로 나가서 電話線이 들어가 있지 않나 를 살펴보았읍니다. 警察에 연락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전화선은 없었읍니다. 339


그럼 이사 간 住所를 알려 주겠다는 것일까? 그 간첩의 두목은 자기가 이사 간 곳을 적어 놓고 갔다는 말인가… 문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읍니다. 그러나 문이 얼른 열 리지 않는 것을 보니, 문틈으로 내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 읍니다. 이장은 발길을 돌려놓았읍니다. 당황스럽게 문이 열리는데 거기 나타난 것은 金 동무 그 사람이었읍니다. 퍼런 눈알을 굴리면서 골목 안을 살피는 것입니다. “정말 혼자 온 거겠지?” “아니, 둘이서 왔지요.” “뭐!” 한 걸음 물러서면서 포켓에 손을 집어넣는 폼이, 권총을 잡아 쥐는 것 같았읍니다. “둘이란 누구요?” “여기는 그늘이 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림자라는 것이 있거든요.” “뭣이요? 그림자를 둘이라구…” “왜요, 나를 여기까지 안내해 온 張本人인데…” “나를 조롱하러 온 건 아니겠지?” “이사 간 줄 알구 지나가던 길에 들러 보게 된 것인데 조 340


롱이라니요.” “들어가서 이야기나 좀 들어 봅시다.” “이 집에는 침침한 地下室 같은 것이 없읍니까?” “…?” “위를 쳐다보오 해서 쳐다보니 올개미가 흔들거리고 있 는 말입니다.” “…” “아직 그렇게 죽을 수는 없거든요.” “이런 데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소?” “문을 반쯤 닫으면 문간에서도 할 수 있지요.” 들어서면서 문을 닫는데 반쯤 열어 두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한번 혼난 건 잊지 못하거든요.” “용건을 들어 봅시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 “그동안 어디서 뭘 했소?” “平壤에 가는 길을 마련해 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그 것만 답변해 주면 됩니다.” “동무가 이북에 돌아가겠다구?” “…” “반가운 말씀인데 무슨 생각으로 돌아가겠다는 건지 그 점이 좀…” 341


“김 동무와의 끈줄은 그때 끊어진 것이니까 그저 交通巡 警으로서의 역할만을 기대하는 것뿐이오.”

“교통순경이라 해두 이사 간 줄 알구 지나가던 길에 들렀 단 氣分派를 어떻게 믿어.” “동무는 이사 안 갔더란 말이오!” “왜 안 가. 한때 난 여기 못 있었다는 걸 참고로 알아 두란 말이오!” “솥뚜껑을 탓하는 것도 뭣한데 그 자라는 누가 考案해 낸 건가요?” “동무의 말투에는 敎養이란 똥꼬치만큼두 찾아볼 수 없 소!” “길거리에서 보니 間諜 自首 期間이라구 광목에다 굉장 히 큼직하게 써서 달아 놓았더군요.” “그따위 짓을 하겠단 말이오?” “두 가지 사실은요, 이제 이 남한에는 오늘 하룻밤도 이 몸을 재울 곳이 없다는 것과 이제는 피해 다니기란 정말 진 저리가 났다는 것이오.” “…” “오늘 밤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와 함께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대기해 있다가 얼른 열어 주구 안 열어 주구는 오로지 김 동무의 자유지요.” 342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동무! 잠깐 기다리오!” “그다음엔 삶든 굽든 그것두 동무의 자유요.” 거기서 돌아 나온 李章은 올가미의 숲으로 찾아가는 것 이었읍니다. 어느 고목 아래로 가까이 가더니 움푹하게 패어진 그 밑 동에 손을 집어넣어서 더듬어 보는 것입니다. 그 손끝에 쥐어져 나온 것은 그날의 그 권총인데, 누렇게 녹이 슬어 있었읍니다. 얼른 포켓으로 가져가다가 말고 제자리에 도로 넣어 두 고, 숲에서 나온 그는 버스를 타고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 니다. 部屬品 따위를 파는 상점을 찾아가 그리이스油와 헝겊

나부랑이를 구해 가지고 거기 쓰러져 가는 것 같은 木造建 物 이층에 있는 다방에 올라가 , 그것을 신문지에 싸서 포켓

에 넣으니 준비는 다 된 것 같은 것입니다. 권총에 슬어 있는 녹을 닦아 내려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그 권총을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가? 설마 국회의원을 쏘려는 것은 아니겠지… 金 동무의 얼굴을 볼 때까지는, 以北에 돌아갈 생각이란

꿈에도 없었던 李章이었읍니다. 343


아침에 그렇게 산에서 내려와 지난날의 逃避 코오스를 巡禮한 것은, 어쩌면 누가 이상하게 여겨서 경찰에 密告라

도 해 주었으면 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 면 그의 그러한 행동은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고, 사람이란 자기 생각이 아닌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 아닌 생각도 ’ 자기 생각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 생각인데, ‘자기 생각이 아닌 생각이 ’ 라면 누구의 생각이겠읍니까. 人間은 이러한 食言 위에 構 築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이른바 그들의 ‘人間的’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不幸한 일이라고 하는 것 같은 表情을 지어내지만 內心으로는 큰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모랄리티라고 하는 것은, 어느 생각이 정말로 내 생각일까 하면서 두 생각을 싸움시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 ‘내 생 각이 아닌 생각이 ’ 이기기로 마련입니다. 그렇지마는 이름 은 여전히 ‘내 생각이 아닌 생각인 ’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 님이 必要하기도 했던 소이연(所以然)은 이러한 데에도 있 는 것이고, 에네르기의 浪費요, 人間을 食言하는, 不道德이 라기보다 罪라고 이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 ‘자기 생각이 아닌 생각이라고 ’ 하는 것은, 비유해서 말하면 자기의 精子에 의해서 태어난 것인데도 庶 子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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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庶子를 否認하는 것은 非難감으로 쳐지는데, 그 庶子는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는 存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 ‘-’, ‘善’ ‘惡’, 이렇게 두 개의 마음이 있다고 들 했지만, 그런 투로라면 두 개의 마음이 바로 平行해 있어 서 교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는 데, 그것은 希望的 論理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心理的 事 實은 하나의 마음이 그 境界線을 넘나들면서 갈 지(之) 字

모양으로 비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道德 的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한 줄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김 동무의 얼굴을 볼 때까지는 이북에 돌아갈 생각은 꿈 에도 없었다는 것도 실은 ‘자기 생각이 아닌 생각인지도 ’ 모 릅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이제 내가 할 일은 倫姬의 무덤에 碑石을 세우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는 일밖에 없다고 개탄

비슷한 심정이 되었던 이장이었읍니다. 이 땅에 平和가 올 날은 까마득한데, 윤희의 무덤에는 흙도 올려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흙을 올리고서 그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바랄 수 있다면 그 옆에 草幕을 짓고 사냥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 자기에게 남겨진 유일한 浪漫, 유일한 生의 樣式일 것 같았던 것입니 다. 그런데 윤희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려면 休戰線을 넘어 345


야 하는 것이고, 北半部에서는 그런 浪漫은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密告라도 해 주었으면 한 것이라면, 김 동무의 얼굴을 봤을 때 평양에 돌아갈 생각이 난 것은 값 싼 自虐에서라고 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학에 사로잡힌 마음이 김 동무의 포켓 속에 있는 권총을 느꼈을 때 그의 腦裏에는, 숲 속에 그대로 있을지도 모를 멋없이 크기만 한 그 권총의 기억이 번개처럼 비쳐 들 었던 것입니다. 김 동무가 무슨 수를 쓰고 나올지 몰라 그 對備策으로 그 권총 생각이 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아직 그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다 음에는 삶아 먹든 구워 먹든 김 동무의 자유에 속한다고 ’ 한 말로 미루어 알 일입니다. 그러면 그 ‘아직은 ’ 무슨 의미에서 한 ‘아직일 ’ 것이겠읍 니까. 아직이라고 했을 땐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택부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고서 自白을 요구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뿐이 다. 그가 자백을 拒否하고 백정이 되어 나왔을 땐, 그다음은 나는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생각은 털끝만 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芝夜를 犯하는 것보 다 더 못할 노릇이다! 346


그러니 통행금지의 사이렌이 울릴 때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문을 열어 달라고 한 것은, 資本主義의 밤도 이제는 정 말 오늘이 마지막이 되는 것이니, 그때까지 시간을 아껴서 저기 저 마담처럼 俗되기는 하지만 多感해 보이는 여자와 어울려 술이라도 지독하니 마셔 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아직 그렇게 죽을 수는 없거든요’ 했을 때의 그 소리에 어딘지 개운치 않은 未練스러움이 깃들여 있었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나에게 숨기고 있는 ‘내 생각이 아 닌 생각이 ’ 있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하다가, 그는 끝내 그 생각을 외면하 는 체하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 읍니다. 벌떡 일어섰으니까 밖으로 나가야 했읍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면서, 그는 언젠가 公子의 안내를 받 았던 그 終點에 이른 것이었읍니다. 그는 지금 ‘마지막 한 停車場’을 더 가 보려는 것입니다.

‘부친으로서는 중대한 일인 ’ 것 같다던 公子의 말에, ‘네 가 나를 닮은 데가 손톱만큼두 있느냐’ ‘네 얼굴이 얼마나 그 놈을 꼭 닮았는지 알아봤느냐’, 그땐 그저 부글거리는 물거 품쯤으로 흘려보냈던 이 오택부의 말이 되살아나서, 그를 끝내 이렇게 이 郊外의 아스팔트길을 더듬게 한 것이었읍니 347


다. 孟八이라는 그 머슴이 혹 그 强姦犯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玄晩雨 씨에게 마지막으로 밝혀 보자 는 것이었읍니다. ‘아직은 ’ 이 일을 두고서의 아직이었던 모 양입니다. 내 벌써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런 未練한 자가 권총을 찾으러는 왜 갔을까? 없을 줄 알구 갔지. 그랬는데 손가락 끝에 金屬性이 닿았을 때 가슴 이 얼마나 덜컥해졌던 것인가. 그렇다고 아니오 하고 달아 날 수는 없고 해서, 오택부의 가슴에 들이대기 위해서느니 뭐니 한 것이고, 급기야는 그것은 芝夜를 犯하는 것보다 더 못할 노릇이라고 얼버무렸지. 別莊에 이르는 밭 사이의 길은 그동안 車가 별로 다니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雜草가 우거져 있어, 무슨 동산으로 이 어져 가는 것 같은 오솔길이었읍니다. 犯罪的인 응달에 내 던져진 것 같은 그의 生涯에 있어서 그 빨간 지붕을 인 綠色 의 別莊으로 이르는 그 길은, 찢어지고 멍이 든 그의 皮膚에 도 人情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유일한 陽地였읍니다. 해는 正午와 西山 중간에 있었읍니다.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는 언덕에 올라서 보니, 맘보바지 라는 것에 검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公子가 분주스럽게 쇠스랑을 가지고 갈퀴 대용으로 마당 소제인지를 하고 있었 348


읍니다. 李章이 바로 곁에 가서야 놀란 것처럼 돌아보고는, 더 참

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읍니다. “선생님이 저 아래에 나타나실 때부터 알았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하구 비를 찾았는데, 할아범이 어디에 뒀는지 알 아야죠. 그것을 찾느라구 이렇게 땀이 밴 거에요.” 이마의 땀을 씻는 것입니다. “어쩐지 오늘 오실 것 같았어요.” “아버님께서는 외출하신 게 아니겠지요?” “선생님두 여자가 바지 입는 걸 좋아 안 하시겠지요?” “…” 늙은 식모가 쟁반에 마실 것을 들고 나와서 언덕배기가 되는 마당 구석, 큼직한 비이치 파라솔이 그늘을 지어 내고 있는 탁자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무슨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 탁자 위에는 책이 서너 권 층이 지어져 있는 것으로 보 아 거기서 독서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 건너 稜線 너머로 서울 거리의 꺼먼 한 모퉁이가 보이 는 것이, 도리어 더 먼 데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읍니다. “선생님께 드리라구요.” 자리에 앉아서 머뭇머뭇하던 공자는 책과 책 사이에서 349


봉투에 든 書類 뭉텅이 같은 것을 뽑아내서 이장 앞으로 밀 어 놓는 것입니다. “외출하셨나요?” “세상을 떠나셨어요.” “세상을… 농담이겠지?” “그런 농담 어디 있어요!”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그러나 터뜨리지는 않으 려는 것이었읍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이오.” “지난봄의 일이에요.” “병환으로? 오래 앓으신 거요?” “가을부터 시름시름 불편해는 하셨지만 갑자기 돌아가 셨어요.”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마지막까지 저는 손금을 하늘처럼 믿었는데 맞지 않았 어요.” 웃음을 지어낸다는 것이 손수건을 찾게 되는 것이었읍니 다. “어제 말씀드릴까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울 것 같구요, 여기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뭡니까. 이건…” 350


“선생님에게 드리라는 이 집 文書예요.” “이 집 문서…?” “저는 부친의 遺言을 이행하는 것뿐이에요.” “정말 무슨 연극 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집이 필요 없는 몸이어서…” “왜요?” “…” “까닭이 있을 게 아니에요?” “내일이면 아마 이 땅을 떠나 있을 거니까…” “어디를요?” “이해 못 할 거요. 내 세계는 공자와 다르니까.” “전 선생님의 세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세계가 어떤 건데…” “저는 어쩌면 선생님보다 선생님의 세계를 더 잘 알고 있 을지도 몰라요.” “…” “정말 모르구 계시는 거예요?” “뭘?…” “그 다방 마담 하는 이 말이에요…” “뭔데…” “오택부 씨라는 분의 딸이 된다는 걸 알고 계시죠?” 351


“아니 난 조금두…” “그럼 왜 놀라지 않으세요. 하늘이 꺼지는 것처럼 절망하 실 줄 알았는데…” “왜 내가 절망을 해야 할까…” “그이를 사랑하신 게 아니었어요?” “…” “알게 되신 거군요. 그래서 이 땅을 떠난다구 하신 거군 요?” “마담 바타플라이가 오택부 씨의 딸이라구 내가 이 땅을 떠나야 하는 까닭은 뭔데…” “외사촌 사이의 사랑은 禁止니까요.” “누가 공자에게 그런 말을 했소? 내 어머니가 그 백정의 동생이라구…” “…?” “누가 일러 주었던가 말이오?” “용서해요. 전 옛날부터 입이 가벼워서…” “아버님이오?” “…” “그랬군. 나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한때 공자의 부친 이 내 아버지가 아닐까고도 했다오.” “저도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해서 몹시 설레였어요. 형제가 352


한 사람도 없이 된 외톨이었으니까요.” “내 어머니가 어떤 여자라는 것은 모르겠지?” “미인이었다는 것밖에…” “굉장한 미인이었지. 친오빠까지 탐냈다니까.” “어마나 그런 말씀을…” “그러구 보니 우리는 이럭저럭 친척이 될지두 모르겠군.” “어떻게요?” “어제 말로는 지금 婚談이 있는 사람은 그 마담 바타플라 이와 어떻게 되는 사람이겠으니까…” “아직 몰라요. 부친이 반대하시던 사람이에요. 돌아가시 면서도 그 점이 걱정이셨나 봐요.” “故人에게는 안되었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 “부친은 선생님을 양자로 삼았으면 싶어했어요.” “…” 어이가 없다는 생각보다 疑心이 앞질러 일었읍니다. 내 가 不倫의 씨라면, 그 나를 어떻게 지나가는 말로라도 養子 로 삼았으면 싶어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렇게 입 밖에 내시지는 않았지만요…” “…” “저를 아내로 삼을 생각은 없으세요?” 남의 일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353


“그것은 또 무슨 연극이오?” “왜 연극이오!” “…” 그럴 수도 있다. 연극이 아닐 수도 있다. 李章의 마음에는 逆流가 일었읍니다.

오택부와는 외조카로서 協定을 맺고, 自首를 하면 思想 關係도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다.

앞으로 무슨 暴風이 몰아칠지도 모를 현재의 이 수렁 바 닥에서 헤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公子와 이런 집에서 살 면 童話 같은 그날그날이겠다. 겉으로 내놓고 생각해 본 적 은 없지만 나는 공자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 사람 말이오, 부친께서 그렇게 반대하신 데는 까닭이 있을 게 아니오?”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그이는 부친이 제일 싫 어하신 오택부 의원의 아들이에요.” “…?” “어머니는 달라도 그 지야 씨라는 이의 동생도 되구요.” “세상이 그렇게까지 좁을 줄은 몰랐어.” “…” “그렇게 좁은 세상이라면 마담 바타플라이와 新婚旅行 하는 것두 그렇게 보기 흉할 것두 없을 거요.” 354


“그런 말 어떻게 하실 수 있어요!” “공자의 부친은 좀 생각이 좁으신 것 같애. 아버지는 백 정이지만 그 밑에서 자라난 아들이면서 닮지 않은 것만두 어려운 일이 아니오? 부친에 비하면 공자는 사람을 보는 눈 이 있소.” “그이는 선생님이 누구신지 아세요?” “그이라니? 아, 마담 바타플라이 말이오? 열이 四○ 度 나 된다던데 가 보니 목욕하고 있더군.” “제 말에 대답해 주세요. 그이는 선생님이 외사촌이 된다 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 걸 알 까닭이 없지.” “알려야 할 게 아니에요?” “이 땅을 떠나지 말구?” “떠나신다는 데는 어디에요?” “어디냐 하면… 모두들 흉하다고 하지만 日本 같은 데서 는 친사촌끼리의 결혼식 같은 것두 떳떳하게 진샤(神社)라 는 데서 올린다나.” “그래서 일본에 가시려는 거예요?” “아니 그저 그렇단 말이지.” “일본 말구 저 原始 雜婚 時代에 가시면 어떠세요.” “점점 나를 이해해 가는군.” 355


“선생님은 그럴 사람이 못 돼요!” “아까 뭐라구 했소. 공자와는 처음부터 세계가 다르다 구…” “그렇게 그 여자를 사랑하셨어요?” “사랑 以上이지. 운명이라고 할까. 運命에 대한 사랑, 이 러면 아주 演劇의 제목에 알맞겠군.” “…” “가 봐야 하겠는데. 나는 오택부 씨의 아들을 잘 아오. 내 가 한 말이라구 소홀히 듣지 말기를 바라오.” “저는 이미 작정했어요.” “무엇을?” “美國 가겠어요. 수속은 다 되어 있으니까! 내일 그분들 에게 그렇게 알리면 돼요.” “그렇게 간단히 처리해서 좋을까…” “간단히가 아니에요. 이때까지 그것 때문에 망설인 거에 요. 전부터 내일 확답하는 날로 되어 있었던 거에요.” “그분들이라는 것은 누구누구요?” “그이하구 그의 부친이에요.” “어떨까, 그 자리에 나두 나갈 수 없을까?” “내일은 이 땅을 떠나신다면서요?” “좀 연기할 수도 있지. 참고로,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356


되어 있소?” “열두 시에 半島호텔 屋上이에요.” “장소두 알맞군. 신사 숙녀들이 많이 드나들겠구…” “무슨 일로 나오시는 거에요?” “마담 바타플라이를 데리구 나가는 일이지.” “왜요?” “오택부 씨가 ‘너희들은 외사촌이 된다’ 이렇게 소리 지르 면 깜짝 놀라는 연극을 할 수 있으니까.” “…” “이쪽에서두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소. 내가 서울에 있 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까. 어떻겠소? 혼담 이야기 같은 것은 그 전엔 입 밖에 내지 않는다구 약속해 줄 수 없겠소?” “무슨 연극을 하시려는 거에요?” “그것두 마담 바타플라이가 응해 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만, 연극이란 것은 미리 줄거리를 알고 보면 흥미가 半減이 되는 법이오.” “저는 연극 몰라요. 그런 약속은 할 수 없어요.” “꼭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지못해 그렇게 그저 약 속한 것처럼 해 두자는 것이오. 알겠소?” “…” 그러하게 公子와 내일을 약속하고 거리로 돌아온 李章 357


은, 몇 시간 전에 잠시 들렀던 그 이층 다방으로 다시 찾아가 는 것이었읍니다. 처음부터 한 실오리도 안 되던 ‘아직을 ’ 찾아갔다가 공자 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외면해 두고 싶었던 곬으로 빠져든 李章이었읍니다. 줄거리까지 째어진 것입니다. 권총을 품

고 오택부를 찾아가는 장면은 芝夜를 동반하는 것으로 바뀌 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현재 앉아 있는 이 다 방의 位置가 芝夜의 집과 金 동무의 집과의 대략 그 中間地 點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읍니다.

찻잔을 거두어 가는 레지를 시켜 마담을 보자고 하는 것 이었읍니다. 그 傳言을 귀담아듣던 마담은 힐끔힐끔 시선 을 이쪽으로 던져 보면서도 동하지 않고 있다가, 時效가 다 되었을 쯤에야 머리를 쳐들고 가까이 오는 것이었읍니다. 앉으라고 하니까 우습다는 듯이 앞자리에 들어앉아서는 창밖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눈이 사팔뜨기인 것이 도리어 俗됨을 약간 덜어 내어 주는 얼굴이었읍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분명히 앉으라고 해 놓고 언제까지도 말이 없으니 기분 이 나빠진 모양이었읍니다. “나 말이오, 나는 내일 아침이면 멀리 여행을 떠나는 몸 이오.” 358


“싱거운 양반을 다 보겠네.” “오늘 밤에는 나는 할 일이 없소.” “흥…” “그래서 통행금지 삼십 분 전을 알리는 사이렌이 있지 않 소? 그때까지 나와 놀아 주지 않겠소? 영화 구경이랑 하면 서…” “나가요!” 벌떡 일어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 데두 분수가 있잖아요! 보기 싫게, 말께나 배워 가지구 그런 수작을 부려요!” 거기 視線들이 그에게로 쏠렸읍니다. ‘저게 뭐야’ 하는 소리도 들려왔읍니다. 얼굴은 먹먹했지만 마음은 부끄러움으로 빨개져 가지고 밖으로 나온 그의 이마에는 땀까지 배어 있었읍니다. 앞은 보이지 않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한 걸음이라도 빨리 現場 에서 멀어지고 싶어 하나, 땅이 잘 밟혀지질 않았읍니다. 그 늘진 人生을 걸어온 그로서 온 몸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그 런 羞恥感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길 건너로 넘어서려고 몇 발자국 옮겨 놓았던 그는, 그만 외마디소리를 지를 사이도 없이 등줄기에 얼음이 섰읍니다. 한산한 길이었지만, 자동차가 아래위에서 全速力으로 달려 359


오고 있는 그 가운데로 불쑥 나섰던 것입니다. 아래에서 온 까만 지이프車가 얼결에 이장의 앞길을 피해 왼쪽으로 꺾이 는 바람에, 앞에서 온 흰 앰블란스는 그 지이프차를 피하느 라고 이장의 앞길로 바퀴를 돌려 댔던 것입니다. 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맞부딪칠 듯했던 두 자동차는,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半圓을 그려 내어선 和解하듯 제 가 던 쪽으로 풀려 나갔읍니다. 그 黑白의 突風에 말려 이장은 그 자리에 落葉처럼 한 바퀴 돌았으나 넘어지지는 않았읍니다. 거기 모든 사람들이 한숨 놓는 시선이 集中한 길 복판에 서 그는 말할 수 없는 孤獨에 휩쓸렸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황홀한 고독이었읍니다. 굳었었던 피부에 금이 서는 것 같은 것이, 旱魃의 땅이 더 가뭄을 못 이겨 갈라져 나가는 것 같다고 할까, 연못에서 蓮꽃이 퐁 하고 피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얼굴이 紅潮를 띠

는 것은 夕陽 때문만 아니고, 눈은 싸늘하게 빛나는 것이었 읍니다. 무슨 門이 비스듬히 열리는 것 같았읍니다. 위에서 온 하얀 時間과 아래에서 온 검은 時間이 自己에게서 부딪 칠 뻔했던 순간 그는 무엇을 본 듯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 世界가 否定됨으 로써 그 一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는 것, 이 世界는 그것 360


을 가리고 있는 膜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는 무엇이었읍니 다. 이 世界에 사로잡히고 있는 限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이 世界를 떠났을 때 비로소 볼 수 있게 되는 그런 것이었읍 니다. 지금도 느낌으로만 볼 수 있는, 比喩해서 말하면 여름 과 겨울이 同棲하고 있는, 땅은 여름이요, 氣候는 겨울로 되 어 있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읍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어디에 있는 것이고 이 世界를 일단 否定하고 떠나 는 곳에 그것은 存在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어야 했읍니다. 黑나비 茶房에 전화를 걸었읍니다.

마담은 오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읍니다. 一直線으로 아침에 내려온 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읍니

다. 풍랑에 휘몰린 一葉片舟와 같은 오늘 하루의 李章이었 읍니다. 그 파도에 밀려 도로 이 바위 그늘에 떠올려진 것이 라고 할 수도 있었읍니다. 아까 그 다방의 여자가 그의 청을 들어주었던들 그는 같이 놀다가 그대로 金 동무의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해는 西山을 넘어가고 있었읍니다. 오늘 하루의 巡禮와 彷徨이 이렇게 落着되고 보니, 오택 부를 어쩌려는 것은 芝夜를 범하는 것보다 더 못할 노릇이 361


라고 한 것은 캄플라지8)요, 戰術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택부를 죽이는 것은 아버지를 殺害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道德的인 罪惡이라고 하지만 그는 한사코 애비가 아니라는 것이고, 戶籍에도 그렇게 되어 있 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人倫이라고 하겠지만 그도 나를 죽이려고 한 事實이 있다. 말하자면 이 것은 一 對 一이다. 그를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단순한 殺人이 다. 그를 죽이는 것이 단순한 살인이라면 芝夜를 犯하는 것 도 단순한 姦淫인 것이다! 그가 몇 시간 전에, 오택부의 가슴에 拳銃을 들이대는 것 은 지야를 범하는 것보다 ‘더 못할 일이라고 ’ 한 것은 지야를 범하는 것은 그것에 비하면 그래도 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고, 人間이란 比較級으로 되어 있는 것이니 까, ‘더 못할 일이 ’ 할 수도 있는 일이 된다면, ‘그래도 좀 할 수 있었던 일은 ’ 더욱 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 니 경우에 따라서는 오택부 殺害도 사양치 않겠다던 犯意 는 芝夜 간음에의 징검다리가 되는 셈이고, 拳銃은 그 小道

8) 캄플라지: 카무플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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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였다는 말이 됩니다.

아니, 우리의 경우는 간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에서 出發한 것이다.

아니다! 단순한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 그저 運命이어서 도 안 된다. 더 次元이 높은 것이어야 한다! 芝夜를 犯하는 것은 오택부 殺害보다 더 못할 그것은 ‘罪’다. 그 罪는 그보 다 더 높은 次元, 이를테면 四次元에의 길목이 되어야 한다! 四次元, 그것은 어떤 세계인가?

모른다.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 버렸 지만, 가끔 그것을 느꼈다. 아까는 그 幻想을 보기까지 했 다. 그 환상에 이끌려 여기에 돌아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世界만이 世界일 理 없 다. 있어야 하는 것은 있다. 누구는 이 世界만이 世界일 理 없다 해서 그것을 來世에 미루었지만, 來世가 아니라 그것 은 現世에 있어야 하고 있다! 낮 다음에는 밤이 오는 것입니다. 밤은 地上의 모든 輪廓 이 사라지고, 神秘와 智慧와 勇氣가 날개를 펴 드는 世界의

그늘입니다. 낮에는 戲畫이던 것도 거기서는 리얼리즘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추워 가는 몸을 일으켜 어젯밤 헐떡이면서 올라왔

던 그 길을 거슬러 내려가는 것이었읍니다. 공자에게 即興 363


으로 말했던 演劇을 하려는 것이었읍니다. 문제는 芝夜가 共演을 승낙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하는 데에 있는 것뿐이다. 돌뿌리가 자꾸 발에 채었읍니다. 문도 안 열어 줄지 모른다. 안 열어 주면야 도리가 없지. 집 사이를 얼마쯤 내려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지야 의 집이라고 짐작이 되는 이층은 窓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 읍니다. 그 돌대문 앞에 이르러 보니, 잠그는 것을 잊었는지 샛문 이 반쯤 안으로 열려 있었읍니다. 현관문을 열어도 아무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말도 없이 그는 층층대를 올라가서 芝夜의 방문을 열었 읍니다. “理由 없는 反抗이란 게 뭐예요?” 水族館처럼 파란 불빛 속에서 外出服으로 옷을 갈아입

고 있던 芝夜는 별로 놀라는 빛이 없는 것입니다. “그 양반은 취미가 고상해서 宿題를 곧잘 내거든요. 제 딴에는 무슨 테스트를 하는 모양인데…” 바닷속 같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옷매무새를 다듬는 것입니다. “곤야꾸가 되게(꼼짝 못 하게) 해 주고 싶은데, 이유 없는 364


반항이란 알 듯하다가도 결국 모르겠어요.” “그건 우리가 이제부터 하려는 것 같은 反抗이지.” “전 그저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理由 없는 反抗이라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하면 모든 理 由에 대한 反抗이지.”

“모든 이유에 대한… 무슨 말인지 더 알쏭달쏭하지만, 듣 던 중 그럴싸하네요. 그럼 전 가 봐야겠어요.” 장갑을 끼는 것입니다. “二, 三 分쯤 일찍 서둘러야 했을걸, 이제는 늦었어.” 권하지도 않은 거기 소파에 가 앉는 것입니다. “대학교 선생님이시기에 모르는 걸 좀 물어봤다고 잘못 해석하신다면 선생님답지 못해요. 전 다만 모르는 것을 남 에게 묻는 것을 꺼려 하지 말라고 한 先賢의 말씀을 따라 본 것뿐이에요.” “오늘따라 대문은 왜 열려 있을까…” “잠그는 것을 잊구, 바람이 움직이면 문은 열리게 되어 있는 거예요.” “지야는 바람이 문을 열어 놓게 하는 것만 알구, 나무를 둥글둥글하게 해 놓았다는 것은 모르거든. 先賢의 말씀을 따라 물어보면 내 대답해 주지. 나무줄기는 왜 둥글둥글한 가…” 365


“…” “옛날 自動車는 요즘 것과 달라 豆腐 모양으로 모가 났 었는데, 우리 中學校 다닐 땐 ‘이유 없는 반항이 ’ 아니구 ‘流 線型’이란 말이 많이 유행했지. 그 ‘유선형은 ’ 어떻게 해서

생겼나 하면 바람 때문이지. 速力이 빨라 지니까 그만큼 바 람두 세어져서 모서리를 밀어내 버렸거든.” 芝夜는 나가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에 앉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무들이 모가 지지 않은 것은 말이오, 오래고 오랜 歲月을 두고 바람 속에 서 있었는데 그 바람이 란 것이 거기서는 四方八方에서 부는 것이었기 때문에 四 方八方으로 流線型이 될 수밖에. 알겠소? 이 이외 나무가

둥글해져야 할 理由건 原因이건 없어. 있으면 말해 봐…” “…” “말이 없으면 없다는 거고. 그런데 나무와 달라 오래고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의 마음을 분 바람은 한쪽에서만 불 어온 바람이었단 말이오. 이것이 人間이 半쪼가리가 된 까 닭이니까. 사람도 나무처럼 둥글둥글 圓滿해지려면 方向을 바꾸어서 살아야 하겠다는 까닭이오. 요즈음 유행되고 있는 ‘理由 없는 反抗’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해야 하는 거요.” “선생님의 손에 들어가면 뭐든 어마어마해 하는군요. 저 366


는 그런 고무풍선을 탈 수 없기에, 어젯밤으로 우리는 남이 되었다는 것이 두구두구 다행이라구 생각해요.” “그 말에 나두 크게 찬성이오. 생각해 봐요. 三○ 年이라 는 歷史를 가진 남이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結婚두 못할이 만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단 말이오? 理致에 닿지 않거든.” “저는 시간이 바빠요. 아무리 취미가 고상하지 못해두 結 婚할까 하는 사람을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것두 고상

한 편이 아니죠?” “…” “결혼할까 해요. 아이가 셋이 있는 後室루요. 약간 놀랬 지요? 소개해 드려두 좋아요. 선생님의 덕분으로 결혼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이도 아마 환영할 거예요.” “百萬 딸라의 肉體가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좀 殺風景인데…” “주름살이 잡히기 전에 어머니가 되어 두지 않으면 가을 날의 바타플라이는 보기가 흉해요.” “그래서 난 바타플라이를 永遠한 여름에로 招待하러 왔 지.” “어제는 吳澤富 씨의 딸이라구 얼음장이 되던 사람이 오 늘은 영원한 여름이에요?” 367


“마담은 吳芝夜가 아니구 安, 芝夜야! 내가 李, 章인 것 처럼!” “…?” “거듭 강조해 두지만, 李章은 이장이구 오장이 아닌 것처 럼 安芝夜는 안지야구 오지야가 아니란 말이오! 오지야? 오 장? 語感부터 틀려먹었어!” “이상하네요, 선생님이 어째서 오장일 수도 있어야 하나 요?” 거기 椅子 끝에 슬며시 앉는 것입니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정말 결혼 못 하게…” “뭐라구요?” “우리는 어젯밤 結婚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요? 그 ‘마 찬가지라는 ’ 것은 ‘같다라는 ’ 것이고, ‘같다는 ’ 어느 쪽인가 하면 ‘이다에 ’ 더 가깝거든.” “그런 言語놀음으로 될 일이야요?” “언어놀음? 누가 한 말을. 그럼 알기 쉽게 一例로 우리 現 地에 가 봅시다. 여기는 鐘路五街인데, 이 鐘路五街는 鐘 路에 더 가깝소? 東大門에 더 가깝소?”

“…” “鐘路의 五街니까 鐘路겠는데 그런데 東大門은 바로 코 끝인데 鐘路는 저렇게 멀단 말이오. 생각 말구 얼른 대답해 368


봐요. 어느 쪽이 言語놀음이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이라는 ’ 地圖는 현지의 地形하고 는 같지 않단 말이오. 合格者와 落第生은 地圖에 의하면 푸 른色과 노란色만큼 다른데 現地에 가 보면 그것이 불과 一 點 差, 경우에 따라서는 零點零零一 點 差요. 그런데 한 사

람은 長官 街道를 달리고 한 사람은 뒷골목으로 사라지기 마련이오. 이것은 悲劇도 아니구 喜劇도 아니구 寫實이오. 世界는 이런 寫實劇의 파노라마란 말이오. 알겠소? 아니면

아니라구 언제라두 말하오. 나는 아무 말 않고 물러가 줄 터 이니…” “…” “그러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겠는데, 世界라는 것이 그렇 고 그러니 그럼 芝夜는 이 人生을 一場春夢이다 해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李太白이 노던 달아’ 하는 노래나 부르고 앉 아 있겠소? 그렇지 않으면 人生을 演劇처럼 感動的으로 삼 겠소?” “…” “舞臺에서 벌어질 때는 박수喝采를 보내면서두 人生에 서 그와 같은 줄거리를 엮어 내면 罪惡이니 不倫이니 해 가 지고 낯을 찌푸리는 것은 왜냐하면 入場料를 안 냈기 때문 369


이오. 그렇게 공짜를 좋아하는 人間들이 말이오.” “오택부 씨와 무슨 사이신지 모르겠지만…” “芝夜는 어느 쪽이오? 人生은 꿈이다 하고 돌아설 것인 가? 演劇이다 하고 나와 共演할 것인가?” “선생님은 참으로 유능한 藥장수이시지만 이 거미가 대 신 대답해 줄 거에요.” 卓子 위에 굴러 있는 복숭아를 집어서 지금 막 천장에서

줄을 타고, 그들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一號活字만 한 거미에게 갖다 대는 것이었읍니다. 거미란 놈은 허겁지겁 방향을 거꾸로 하더니, 부리나케 도로 올라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보셨죠? 돌아가 주셨으면 해요.” “나는 말을 믿지 않어…” 일어나더니 芝夜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었읍니다. 芝夜도 덩달아 일어섰읍니다.

“…” “…” 숨을 조금 크게 쉬어도 몸이 서로 닿을 듯한 사이를 두고 두 男女는 對決하고 있는 것입니다. “共演할 생각이 없으면 손가락 끝으로 내 가슴을 밀어내 요. 그러면 나는 물러갈 것이오.” 370


“…” 빤히 쳐다보던 芝夜의 손가락이 李章의 가슴으로 뻗어 올라갔읍니다. 李章의 마른 입이 芝夜의 젖은 입술에 닿았읍니다.

가슴에서 주춤했던 芝夜의 팔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 럼 사내의 목에 가 감기는 것입니다. 짙은 키스가 되었읍니다. “놔요…”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빼낸 芝夜는 이장의 視線을 휘감 으면서 침대에 가 몸을 던지는 것이었읍니다. 露出되고 싶어 하는 풍요한 慾情. 이제는 부끄러움도 벗

어던지고, 性의 흐느낌에 肉身이 겨운 것이었읍니다. “그런 것쯤 보통이야. 西洋서는 남매간에 키스쯤 아침저 녁으로 있는 거야.” 여자의 등어리에서 욕정이 주춤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사촌 사이밖에 안 되거든.” 시이트에서 머리를 떼어 들었다가 돌아보는 그 얼굴에는 아직 色情이 疑訝 속에 그대로 묻혀 있었읍니다. “뭐라구요…?” “내 어머니가 오택부라는 백정의 동생이었다는 것은 틀 림없는 일이니까 보통이면 우리는 욋字가 붙는 사촌남매가 371


되어야 하겠지.” “그럴 리 없어요! 그럴 리가…” “길 건너에 있는 나도 그럴 리 없다구 하고 싶지만 오택 부 씨가 어찌나 완강하게 우겨대는지, 더 바랄 나위 없는 일 이라고 해 둘 수밖에…” “거짓말이에요! 정말이라면 이렇게 다시 찾아올 리 없어 요!” “아까 公子의 말에 의하면 東洋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했 다는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親四寸끼리두 얼마든지 아무렇 지 않게 華燭을 밝히는 거라면서, 우리를 충심으로 祝福하 고 싶다고, 지야 언니에게도 그렇게 전해 달라구…” “거짓말, 거짓말 말아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침대 위를 뒤로 뒤로 물러나 앉는 것입니다. “말이 틀려요! 어젯밤에는 그 사람에게 대한 원한을 저에 게 갚으려구 했잖았어요!”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어젯밤 그 사람은 정말 어머니를 만나러 왔던 거겠지!” “그럼 누구를 만나러 왔단 말이에요!” 뒤로 뒤로 물러앉다가 벽에 막힌 지야는 두 손으로 얼굴 을 가리는 것이었읍니다. 372


“도무지 오빠 같지 않은 爲人이어서 아빠 같지 않은 性品 을 발휘 안 했을까 하는 내가 망측하오? 지야가 보는 바로는 그者가 그래 사람 축에 드오?” “…” “사람 축에 들지 않는 자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니 우 리는 외사춘두 아무것두 아니야! 그러니 우리는 결혼할 수 있어!” “듣기 싫어요!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가령 남매간이라 해두 결혼할 수, 아니 해야 해!” “아 무서운 사람…” 恐怖에 물드는 얼굴을 저쪽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었읍

니다. “芝夜, 들어 봐. 優生學的 見地 같은 건 처음부터 우리는 관계가 없어! 그건 ‘優生兒’끼리 부지런히 지켜서 優生兒를 낳으라는 거고, 私生兒는 사생아끼리 私生兒를 낳으면 그 만이야. 道德이요 人倫이니 하는 것은 그런 優生兒들이 옹 기종기 할 수 있게끔 人間牧場을 둘러막은 말뚝에 지나지 않는 거요.” “…” “그런데 이 말뚝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 말뚝만 건드리 지 않고 살짝 빠져나가서 이것저것 훔쳐 먹구 그 구멍으로 373


도로 살짝 들어와서 시치미만 잘 떼면 훔쳐두 훔치지 않은 것으로 쳐준다는 不文律이 보다 優位에 자리 잡고 있는 거 야. 이따위 말뚝은 그러니까 그 말뚝 안에서 소꿉질하는 것 이 健康에 좋고 대견스러운 幸福人이나, 그렇지 않으면 살 짝살짝 드나드는 데에 天才的인 嗅覺을 갖춘 모랄리스트들 이나 열심히 지킬 만한 것이지, 우리와 같은 私生兒가 그런 흉내를 내는 것은 우스운 것은 고사하고 우선 허용되어 있 지 않는 걸 알아야 해. 그러니 우리가 結婚한다는 것은 理由 가 있는 反抗이야!” “…” 이제는 이장을 直視하고 있는 지야의 얼굴은 非難으로 꾸겨져 있었읍니다. “말뚝이 박히기 전에 거기는 푸른 벌판이었다! 우리 거기 가서 살자! 우리가 人間답게 살 곳은 거기밖에 없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야요!” “가다가 한쪽이 지치면 그땐 같이 죽는다는 微笑만 지어 낼 수 있으면 생각할 수 있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나는 강요는 안 해. 아까 우리가 했던 키스는 取消할 수 있으면 취소해. 취소해서 홀가분해질 수 있으면 취소해두 좋아.” 374


“…” “빨래처럼 말뚝에서 펄렁거리며 살 것인가? 사랑을 위해 서 暴風이 몰아치는 푸른 草原에 가서 살 것인가? 오늘 하 룻밤 두고두고 생각해 보오.” “생각해 볼 수 없어요!” “생각할 수 없으면 나는 이 땅을 떠나야 하니 이것이 마 지막이고, 생각할 수 있으면 내일 열두 時 十 分에 반도호텔 앞으로 와 주오. 흰 옷을 입고. 알겠소? 아까 키쓰는 取消할 수 없는 것이라는 표지로 흰 옷이오.” 돌아서는 방에서 나가는 것이었읍니다. “전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어요!” 사라졌던 李章은 다시 한 번 얼굴을 나타내는 것이었읍 니다. “흥분해서 못 들었을지도 몰라. 다시 말하지만 열두 時 十 分, 半島호텔 앞에, 흰 옷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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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章 이튿날 正午 조금 지나 芝夜는 흰 원피이스를 입고 반도호 텔 앞에 나타났읍니다. 어제 오늘 한결 높아진 듯한 하늘 아 래, 철이 좀 지난 흰 옷은 서글퍼 보이기도 했읍니다. 길 건너 二층 다방에서 그 지야의 모습을 발견하는 李章 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가리어 낼 수가 없었읍니다. 차라리 無表情이라고 할까 지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거기서 지켜보고 있은 것인지도 모를 이장이었읍니 다. 그랬는데 그 芝夜가 흰 옷을 입고 나타났으니, 표정이 한동안 眞空이 될 수밖에 없기도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까이 가는 李章을 지야는 못 알아보는 것이 었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禮式場 같은 데 가서 빌어 입은 것인지, 새것도 아니고 낡은 것도 아닌 까만 싱글을 넥타이 로 받혀 입은 것이 딴사람이었읍니다. 한 가지 흠을 잡는다 면 구두가 새것이기는 하지만 말가죽으로 된 촌스러운 것이 라는 것입니다. “벨 소리는 아직 안 난 건가요? 전 一 分도 어기지 않았는 데…” 시원스럽게 흐르는 微笑는 어젯밤의 지야에 비하면 豹 變이라기보다 革命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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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幕은 어떻게 전개되는 거에요?” 몹시 즐거운 모양을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舞臺는 저 스카이라운지?…” 이장의 팔에 손목을 거는 것이었읍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들은 안으로 걸어 들어갔읍니다. “미리 줄거리를 귀띔해 줄 수 없어요?”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층층대를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었읍니다. “여기는 국회의원들이 잘 드나드는 곳이니까, 그러다가 오택부 씨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오필리아는 안 나타나요?…” “…” “공자라는 아가씨 말에요.” “공자가 오피리아? 왜?…” “아니 그저.” “지야는 뭐구?” “연극을 본 게 있어야죠. 맥베드 夫人 어때요?” “어떻게 해서…” “언젠가 洗腦碑라구 한 건 농담이었나요?” “그럼 나는 맥베드란 말이지…” “맥베드에다 햄릿을 약간 가미한 水陸兩棲라구 하면 기 377


분 나쁘시겠죠?”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에 어울리지 않아.” “그럼 뭐에 어울려요?” “카인야, 난 카인의 弟子야!” “聖經에 있는 카인 말에요?” “바이른의 카인은 그보다도 좀 또 달러.” “어떻게 달라요?” “가령 오택부 씨를 만나게 되면 지야는 내가 오택부의 뭐 가 되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으로 해 주면 좋겠는데…” “…” “그리구서 사실대로 나를 소개해 주오.” “어떤 것이 사실인지 잘 모르겠는걸요.” “우리가 약혼했다는 사실 말이오.” “…” “그러면 오택부 씨는 펄펄 뛰면서 너희들은 외사촌지간 이다 할 거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오. ‘거짓말 잘 하네’ ‘맹팔 씨는…’ 알겠소, 맹팔이오. ‘맹팔 씨는 姓이 吳 가라던데 옛 날에는 그런 일이 흔히 있었나 보죠’ 알겠소?” “…?” “그건 그렇고 조금 말이 다르지만, 전에 妾의 딸은 딸이 아니라구 소리 지르는 어떤 아버지를 본 적이 있기에 말인 378


데, 그 양반 아버지답지 못한 데가 없었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있었소?” “그 양반의 왼쪽 눈썹 위에 콩알만 한 흠이 생긴 그런 일 이 있었기를 원하시는 모양이군요.” “무슨 일인데…” “어떤 高官을 매수하는 美人計에 저를 動員시켰다뿐이 에요. 그래서 저는 그 고관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서 말해 줬 지요. ‘저는 마담 바타플라이기도 하지만 저 영감의 옛날 妾 의 딸인데 그래도 흡족해요라구 ’ . 그랬더니 그 고관두 어슷 비슷한 인간이었는데 얼굴이 빨개져 가지구 ‘이 돼지 같은 사람아’ 하면서 술잔을 뿌리친 것이 이마에 맞아서 빨간 피 가 흘렀어요.” 이장은 포켓에서 色眼鏡을 꺼내 쓰는 것입니다. 屋上에 다 올라온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生活費라는 명목으로 돈을 내놓기두 그 후 부터였는데, 세상에 널리 廣告를 하겠다구 공갈한 것을 뉘 우쳤지만 늦었어요. 그저 내놓는 것이 아까운지 집에 종종 들러서 저의 방에까지 올라와 주정을 부리는, 뭐랄까…” 오택부 씨 一行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읍니다. “오필리아도 와 있네요.” 379


공자가 알아보고 손을 드는 것이었읍니다. “공자가 정말 祝福했나를 물어봐두 괜찮아요?” “아 괜찮구말구, 쑥스럽지만 않다면.” 그들은 그리로 가까이 갔읍니다. “야 이거 정말 참으로 오래간만인데…”

자기 눈을 의심하던 玄 畫伯은 넓적 손을 내미는 것이었 읍니다. “마담 바타프, 아니 우리 安 女史를 에스코트하고 들어 오는 신사가 누군가 했더니 이거야말로 ‘벗이 있어 遠方에 서 오다가 ’ 아니오?” 이장이 입을 열기 전에 지야가 나섰읍니다. “저는 누구의 앞에서두 마담 바타플라이인데, 선생님은 트인 분이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군요.” 오택부를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지만, 그 오택부는 色眼 鏡을 쓴 멀쩡한 ‘신사의 ’ 옆얼굴을 훔쳐보면서 머리를 기웃

거리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P邑에서 報告가 오기는 왔지만, 그놈이 여기에 더구나 芝夜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말이오, 有口無言으로 여기에 배석하고 있는 참이니까 트일 재간이 있어야지.” “安이라고 해 주시려면 安 女史 말고 미스 安이 좋겠어 380


요. 공자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무슨 헤이워드라는 俳優는 결혼을 열댓 번 하고두 미스라구 하지 않아요. 네, 吳 議員 님, 그렇지 않아요?” “넌 뭣 때문에 여기에 나타났어!” “아마 祝福받으러 온 걸 거예요.” “축복?…” 보이가 의자를 가져왔기에 그 對話는 끊어졌읍니다. 公子, 이장, 芝夜, 오택부, 吳澤富의 아들 그리고 현 화

백 이런 순서로 빙 둘러앉게 되었읍니다. “그래 그동안 소식두 없이 벌써 一 年이 아니요, 어디에 가 있었소?” “그 후 個人展은 없었읍니까?” “아 그럼 내가 會長까지 한 걸 모르고 있었겠군. 회장 아 래에는 社長이 있지만 會長 위에는 천장밖에 없는데, 내가 그런 회장을 하고 있은 것을 이제 그 會社를 처분할까 하는 마당에서야 알게 되다니 유감인데!” “아 잠깐…” 오택부가 그 말을 가로막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장의 옆 얼굴에 점점 疑惑을 부풀어 올리던 오택부의 귀도 번쩍해진 모양이었읍니다. “회사를 처분하다니 당치두 않는 말이오. 그 회사로 말할 381


것 같으면 공자 孃이 물려받은 제일 근본이 되는 有產이오. 그 본인이 여기 있는데 친척들이 무슨 참견이오.” “참견이 아니고 공자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출가 할 때는 재산을 다 가지구 가고, 자기보다 한 푼이라도 더 많 은 사람일 경우에는 持參金을 일천만 환에 限한다는 遺言 을…” “그따위 이치에 맞지 않는 유언이 다 무슨 유언이오!” “이것은 유언과 親戚會議 그리고 본인인 공자의 의사, 이 세 가지가 합치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뭐라구? 아니 공자, 저 사람의 저 말은 저게 도둑놈들이 하는 소리겠지?” “아버님!” 아들이 울상이 되는 것입니다. “넌 참견 마라! 공자, 왜 대답 안 해!” “왜 대답 안 하는가 하면 공자는 약혼두 안 했으니까 아 무 누구의 며느리도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자네는 모르거든 잠자코 있소. 오늘 여기서 승낙하기로 다 돼 있소. 그렇지? 공자 양?…” “…” “말씀 중이지만요…” 족제비눈이 되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오택부의 얼굴 382


에다 지야는 이렇게 말을 붙이는 것이었읍니다. “약혼이라는 말이 나왔기에 생각이 나서 소개하겠어요.” 그리고 이장을 돌아봅니다. “선생님도 실례가 되니까 색안경은 벗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장은 안경을 벗으면서 처음으로 오택부의 얼굴을 정면 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읍니다. 오택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오릅니다. 筋肉은 도망치 고 싶다는 경련을 일으켰읍니다. “이분은 이장 씨라구 저의 約婚者예요.” “뭐 뭣, 뭣이라구?” “깜짝 놀라셨지요? 우리 결혼해요.” “미 미친 소릴 말아라!” 그래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 것만 다행이라고 할까. 이쪽 구석에서 公子도 두려움과 놀라움에 마음이 새까 매지는 것이었으나, 오택부의 기급을 먹은 그 激動에 눌려 홀로 애만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 결혼이 어째서 미친 소리에요? 전 조금도 알 수 없어요.” “닥쳐라! 너는 지금 속고 있다! 그런 줄 단단히 알구 있어 라!” 383


“미친 소리가 아닐 거야. 아직 非公開로 묻혀 있지만 三 ○ 年 전에두 있은 일이야.” “그따위 소릴 두 번 다시 하면 어떻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다시 맛을 봐야 알겠느냐!” 態勢를 정비했는지, 그런 공갈에 이 오택부가 끄떡할 줄

아느냐 하듯 꾸겨진 웃음까지 흘려 내는 것이었읍니다. “이거 정말 뜻밖인데…”

玄 畫伯은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었읍니다.

“아니,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공자는 아니 라구 했지만 역시 난 先見之明이 있거든.” “모르시면 오빤 가만 계세요!” “모르다니, 이 결혼은 예술이야, 藝術.” “어머나, 선생님 우리 결혼을 예술이래요.” “이년, 듣기 싫다! 선생이 뭐냐 선생이!” “그러면 약혼자를 뭐라구 부르면 좋아요? 가르쳐 주시면 좋겠어요.” “가르쳐 주마!” 오택부는 다시 激動해 가지고 왈칵 지야의 손을 낚아채 면서 일어서는 것이었읍니다. “노세요. 전 淑女가 아니지만 여기에는 신사와 같이 온 숙녀들이 옹기종기 하고 있어요.” 384


“이리 오너라.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겠다.” 흥분을 누르면서 손을 놓는 것입니다. “제가 누구와 결혼하든 눈썹 위에 그런 흠이 있는 분이 무슨 간섭이에요?” “잔말 말구 오라면 와.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을 들려줄 테 니.” “정말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에요?” 오택부는 그 지야를 저 구석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읍 니다. “참말로, 안 여사와 결혼한다는 게 참말이오?” “어젯밤 그러기로 했지요.” “선생님!…” “그게, 참말이라면 날 꼭 들러리로 해 주기 바라오.” “오빠!” “아 요즈음 결혼식에는 들러리가 없는 게 유행이던가…” “오빤 무책임해요! 밖에만 나오시면…” “아 내가 언제 안에서는 그까짓 켸켸묵은 三綱五倫을 입 밖에두 낸 적이 있었어? 난 공자가 그런 거짓말쟁인 줄 몰랐 어. 아니 그래 國民學校 다니는 어린것들에게 三강五륜을 말 안 하구 그 뭔가 狀況이니 實在이니 하는 걸 가르치란 말 이야. 난 공자가 그렇게 新式인 줄 몰랐어.” 385


“농담이 아니야요!” “나는 이때까지 농담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어, 진실만 골 라서 말했어.” 지야와 오택부가 돌아왔읍니다. 오택부는 그대로 入口 쪽으로 가 버리려고 했읍니다. “避해 가시면 그런 말 전 못 들은 척하겠어요.” “누가 피했어!” 빨개 가지고 퉁 들어앉는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 결혼 못한대요.” “…” “세상에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뭐잇, 그렇게 일러 줬는데두 거짓말이라구!” “선생님, 좀 들어 보세요. 선생님과 저는 외사촌지간이 된대요. 그러면 吳 가와 吳 가가 결혼한 게 되게. 아무리 吳 가네가 망측한 씨갈래기로 그럴 리는 없지요? 네 선생님, 맹 칠 씬가 맹팔 씬가 하는 그 사람은 姓이 吳가라구 하셨죠!” “이 몹쓸 년! 넌 아직두 눈을 못 뜨느냐. 맹팔인지 뭔지 하는 그 머슴 놈은 권 哥였다 권 가! 똑똑히 알았느냐?” “누가 뭐라든 우리는 李 가와 安 가죠? 네 선생님도, 좀 뭐라구 말씀해 보세요.” “좀 이상한데요?” 386


“뭐가 그렇게 이상해요?” “저 사람이 한 말과 약간 다른 데가 있어.” 李章은 오택부의 아들을 향하는 것이었읍니다.

“전에 뭐라구 했던가?” “…” “어머니는 달라두 兄은 형이라구 한 것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 그럼! 그럼…” 오택부는 뭐가 뭔지 몰라 아직 소리를 못 지르는 것입니 다. “공자가 좀 풀이를 해 보오. 動物性인지 식물성인지. 아 니면 變態性인지. 이 딸보고는 너의 외사촌이다 하구, 저 아 들보고는 너의 배다른 형이다 하니, 그럼 나는 兩頭蛇라는 말이오?” “말 잘했다! 네놈은 정말 뱀새끼 같은 망종이다!” 卓子를 탕 치는 것입니다.

주위의 視線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이리를 돌아보는 것 이었읍니다. “원하신다면 내게는 소프라노가 있읍니다. 여기 모든 사 람들이 들을 수 있게 오 솔레미오를 부를까요. 나팔꽃 같은 나의 뷔너스여 하는 名曲을 말입니다.” 387


“아가리를 찢어 죽일 놈이!” 그러나 소리를 크게는 내지 못하는 것이었읍니다. “이놈이 이런 놈이기 때문에 부득이 여러분에게 공개하 지만…” 그 소리는 너무 낮아서 현 화백 같은 이는 귀를 내밀기도 했읍니다. “이놈은 빨갱이다! 있는 말, 없는 말을 마구 조작해 내는 간첩이란 것을 알아 두란 말이오!” 자못 만족한 모양이었읍니다. “아니면 아니라구 어디 말해 봐.” “저기 電話가 있는데 그렇게 작은 소리로 말고 경찰에 告 發하는 게 어떻습니까?”

“대신 걸어 드릴까요? 노래 부르기에는 그쪽이 더 효과 적이고 脚光두 더 받을 수 있구…” 일어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쌍간나새끼, 뭣이 어쩌구 어째!” “아버님!” “너는 뭐야! 너 이놈, 이 애비를 배반한 놈 같은 건 내 아 들이 못 된다! 썩 물러가라!” “공자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의 아들이 아닌 것이 좋소.” 388


이장이 이렇게 말하니까 현 화백도 한몫 끼는 것입니다. “나두 공자의 後見人으로서 한마디 해야겠는데, 저 政治 家께서 이 혼담에 열심인 것은 공자의 재산이오. 말하자면

정책 결혼이오.” “당연하지. 세상에 공짜 결혼이 어디 있어. 우리 上流社 會에서는 그런 건 으례 있어야 하는 하나의 道德이야.”

“저 말을 들었소? 공자는 저런 사람의 며느리가 되기 싫 은 모양이오.” “알았읍니다.” “알았다? 어떻게 알았느냐? 좋다! 너는 오늘 이 자리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 義絶이다!” “…” “똑똑히 알아 두어라. 내 재산은 한 푼두 바라지 말란 말 이다!” “알았읍니다. 저는 아버님을 아버지로 섬기려고 나를 죽 이면서 지내 왔읍니다마는 이렇게 되니 이제는 할 수 없읍 니다.” 일어서는 그 얼굴에는 눈물이 감도는 것 같았읍니다. “듣기 싫다! 애비를 蔑視해 온 놈이, 내가 모르는 줄 아느 냐! 당장 내 눈 앞서 꺼져라!” 이장이 현 화백에게 말합니다. 389


“공자를 데리고 가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군…”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녁때 거기서…” 현 화백은 이렇게 말하고, 무슨 말을 하지 못해서 머뭇거 리는 公子를 재촉하면서 나가는 것이었읍니다. “지야도 저쪽에 가 기다려 주면 좋겠소.” “저두요?” 不滿인 모양이었읍니다.

“기다릴 것 없다! 없어져라!” “오늘 보니, 오 의원은 意味深長한 인물이기도 하군요.” 손으로 인사를 하면서 저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만난 것은 당신을 위해서 다행이었읍니다.” “당신이라구!” “그럼 뭐라구 부를까요?” “뭐가 다행이야? 어디 들어 보자.” “으슥한 곳에서 만났더라면 당신은 期必 백정의 본성을 드러낼 것이니까요. 그러면 저도 이제는 갓난애가 아니니 가만히 있자구 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 되면 제가 이길 수밖 에 없거든요.” “나를 죽이고 싶다, 그 말이지?” 390


무슨 반가운 말이라도 들은 것 같아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遺傳이라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이어 내려가 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요즈음은 人知가 발달해서 子息 쪽에서 닮는 것이라나요.” “이놈아, 살인이 그래 유전을 해! 아니 殺人이 어디 있었 어! 아니 아니 遺傳이라구, 아들새끼도 아무것두 아닌 놈이! 이 뱀새끼 같은 놈을 그저…” 와들와들 쥐었다 놓았다 하는 그 손가락은 짤막했지만 모가 나고 굵직굵직해서 뱀이라도 움켜 잡아당기면 동강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읍니다. “살인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遺傳 은 그게 아니고, 거 뭡니까, 사랑에는 國境이 없다는 식으로 情慾에는 人倫도 없다는 게 있지 않습니까.”

“!…” 폭발하는 감정을 그렇다고 터뜨릴 수는 없었읍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시인을 하 면…” “네가 하겠다는 말이 뭐냐! 들어 보자.” “왜 전에 通告해 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네 에미를 강간한 네 아버진데 그 네 에미는 내 여동생이었다’” “오, 이놈! 이 간장 탱크에 처넣어두 시원치 않을 놈이! 391


기어이 精神病院에 가고 싶으냐!” 인간은 어찌 보면 簡單明瞭한 동물이었는지도 모릅니 다. 간장 탱크니 정신병원이니 하는 소리가 그 입에서 나오 게 된 것은, 정신병원 院長에 잘 통하는 사람이 있었고, 企 業體의 하나에 간장 工場이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당신은 社會的 埋藏밖에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읍니다.” 일어서는 것이었읍니다. “이놈, 어디에두 못 가는 줄 알아라!” 따라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쫓아오면 나는 이 길로 경찰서에 들어갑니다. 그 것이 두려우면 도로 앉으시지.” “…” “지금은 상당히 흥분이 되어 있어서 앞이 잘 내다보이지 않는 것 같기에 다섯 時 정각에 다시 여기에 옵니다.”

그 다섯時가 조금 지나서, 漢江 다리를 넘어 南쪽으로 달 려 나가는 자동차가 있었읍니다. 그 안에는 李章과 芝夜가 서로 낯설은 사람 모양 바깥을 내다보고 앉아 있었는데, 그 것은 玄 畫伯에게서 빌린 車였읍니다. “安 女史와 드라이브를?” 392


“郊外를 한 바퀴 돌아볼까 해서요.” “이렇게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黃昏에는 교외가 더 경치가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외라는 것은 어느 교외요?” “人間의 郊外라고 해두 좋겠지요.” “인간의 교외? 그런 말 나는 금시초문이니까 車는 빌려 주지 않기로 하겠소.” “아까는 藝術이라구 하신 것 같았는데…” “그건 공자 말처럼, 잘 알지두 못하면서 괜히 한 소리구, 나는 이제부터 좀 責任感이 있는 사람이 되겠노라구 방금 맹세했다오.” “지금은 어떻게 잘 아셨읍니까?” “꼭 어떻게라고는…” “꼭 어떻게라고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알 지 못한다는 쪽이 됩니다.” “하여간 아까 말한 것처럼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맹세 라는 것을 해 본 것이 처음이어서 이번만은 꼭 지켜 봐야 체 면두 서구…”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저로서는 다섯 時까지 이 서 울을 떠나지 않으면 社會的으로는 더 歡迎 못할 일이 일어 날까 봐 未然 防止로 郊外에나 나갈까 한 것이었는데…” 393


“사회적으로 더 환영 못할 일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일이 오?” “내일 아침 新聞에 어쩌면 現場 寫眞도 함께 날지 모르 죠.” “뭐요?… 정말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아? 그 양반과의 관계 를 넌지시 좀 비쳐 줄 수 없겠소?” “선생님은 예술가가 아닙니까. 상상하고 있는 두 가지 중 에서 빛깔이 더 짙은 쪽이라고 생각하면 대략 틀림없을 것 입니다.” “…”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마는, 저로 하여금 어느 쪽을 택하게 하고 싶습니까?” “양쪽이 다요. 양쪽 다 택하게 하고 싶지 않소!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 “그런 건 다 버리구, 우리 事業을 같이해 보지 않겠소? 이 때까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가 있소. 파우 스트도 결국 사람이 할 보람이 있는 것은 事業이라구 했거 든.” “殺人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업은 될 것 같지 못한데, 結婚 쪽은 경우에 따라서는 大事業이 될 수 있지 394


요.” “기어이 그 길을 가야만 하겠소?” “그럼 저쪽 길을 갈까요?” “아니, 난 아무것두 모르오! 알겠소? 아무것도 모른단 말 이오. 안다면야 내가 차를 빌려 주겠소?”

차는 남으로 남으로 무엇에 쫓기듯 전속력으로 내닫고 있었읍니다. 사실 쫓기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읍니다. 다섯 時에 吳澤富는, 다섯 時 半까지 黑나비 茶房에 와 달라는 李章의

쪽지를 받을 것입니다. 여섯 時 半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길 로 찾아갔다면, 지금쯤 그는 허둥지둥 차를 몰아대 가지고 쫓아오고 있을 것이었읍니다. 茶房에다는, 新婚旅行次 P邑 으로 향하니 支署 주임에게 쓸데없는 것을 묻지 말라고 電 話를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편지를 적어 놓은 것입니

다. 그러나 芝夜는 그런 것을 모릅니다. “어마나, 복숭아가 아직두 저렇게 달려 있네요?” 해는 저 벌판 끝에 아득한 산등성이로 파고 들어가고 있 는데, 차는 산비탈로 이어져 오른 果樹園 옆을 달리고 있었 읍니다. 395


“복숭아를 좋아한다구 들었는데, 좀 쉬었다 갈까…” “누가 그랬어요?” “공자에게서 들었던가…” “祝福이라더니 얼굴이 새파래지더군요.” “나는 못 봤는데…” “다행이었군요…” 차를 세우게 하고 둘은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읍니 다. 新婦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흰 드레스 자락을 끌며 果樹

사이를 거니는 芝夜의 자태는 거기 시골 농부들의 눈에 아 니더라도 仙女와 같았읍니다. “오택부 씨가 강간을 한 곳이 바로 이런 과수원이었지…” “…” “그리구서 맹팔이라는 머슴에게 덮어씌웠거든.” “아직두 복숭아가 가지에 달려 있는 수도 있나 물어봐 주 시면 좋겠어요.” “물어보나마나 씨를 받으려는 거겠지.” “몇 알 나누어 줄 수 없겠는지 좀 물어봐 주세요.” “값이 좋으면 물어보나마나겠지.”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던가요?” “신혼여행이란 말 내 안 했던가…” 396


“…” 半島호텔에서 나와 헤어질 때, 新婦와 같은 차림새로 다

섯 時까지 어디에서 만나 주면 좋겠다 해서 그렇게 해 가지 고 나갔다가, 거기 기다리고 있는 차에 하여간 올라타고 여 기까지 온 芝夜였읍니다. “싫어?” “…” “나는 강요 안 해. 저 차를 타구 혼자 되돌아가두 좋아.” “目的地두 도착한 다음에야 알려 주나요?” “나는 秘密이 없어, 물어만 보면 뭐든지 대답해 줄 용의 가 있어.” “…” “질문이 없으면 서두를까…” “누가 쫓아오나요?” “실은 지난밤 꿈에 啓示가 있어. 헤로드王이 잡아 죽이 려 하니 장차 거룩한 新種을 잉태할 約婚女를 데리구 오택 부의 별장으로 달아나라기에 부랴부랴 이렇게 떠나온 거 요.” “상당히 散文的인 啓示군요.” 나무 사이로 사라지던 지야는 조금 있더니 복숭아를 세 알, 하나는 먹어 보면서 나왔읍니다. 397


“잡수어 보세요.” “…” “이렇게 맛있는 걸 처음 봤어요.” “아니, 좋아.” “아담은 먹는 걸루 되어 있던데요?” “거미 생각이 나서 기분이 이상해.” “그럼 빨리 서둘러야 하지 않아요! 뭐든지 붙잡힌다는 것 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요.” “뭐 그렇게 서두를 것은 없어.” “붙잡히구 싶은 모양이죠.” 뒤도 돌아보지 않고 芝夜는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는 新 作路로 나가는 것이었읍니다.

차는 다시 남쪽으로 남쪽으로 속력을 냈읍니다. 그들은 다시 말이 없었읍니다. 運轉手는 갈수록 종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범이라도

뒤쫓아 오는지, 더 빨리 달릴 수 없을까 하면서 수시로 재촉 하던 것이, 과수원엔 들어가 놀기는 하고, 엊그저께 결혼이 라도 한 듯한 夫婦인가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는 것입니다. 떨어져 앉아서 눈은 말똥말똥한데 한 시간에 한두 번씩이나 생각난 것처럼 주고받는 말은, 딱딱한 것이, 對話라기보다 는 남자의 일반적인 獨白이었읍니다. 398


“지야는 포플라를 固有名詞라고 했다가 땀을 뺏다구 했 지?”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그때 어째서 지야의 얼굴이 그렇게 빨개졌는가 하면 그 미쓰는 歷史의 흐름에 거슬리는 일이었기 때문이오.” “역사의 흐름이란 것이 어떤 건데요?” “고유명사와 普通名詞의 蕃殖率을 비교해 보면 後者가 말사스의 法則 이상으로 압도적이오. 미구에 叛亂을 일으 켜 固有名詞를 征服해 버리기로 되어 있는데 어엿한 普通 名詞를 고유명사라구 했으니 마음이 미리 부끄러워해 준 거

지.” “기특한 마음이군요.” “기특하다뿐인가. 얼마나 뿌리가 깊다구. 人間은 이 마 음과 眞理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貝塚이야.” “저는 무식해서 그런 것은 모르지만, ‘李章’이라는 고유 명사는 무엇에 정복되나요?” “왜, 내가 언제 栽培 人間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던가? 그 들은 一連番號로 불리우는 거야. 世界는 멀지않아 그들의 것이 되는 거야.”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는 것이 좋겠어요.” “싫어두 우리는 지금 그런 데로 가고 있는 것 같단 말이 399


야.”

“오늘은 보름인가 보군요. 저 달빛, 그림 같지 않아요.” “그렇게 두려워할 것은 없어. 달밤에 끔찍한 事件이 잘 일어난다는 것은 四柱와 같은 서투른 統計의 산물이니까.” “…”

“지야는 現代의 英雄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글쎄요. 영웅이라면 무지무지한 느낌부터 나서 조금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아요.” “아니 그건 옛날 영웅이구, 현대의 영웅은 너무 平凡해서 영웅 같지 않을 정도지. 알기 쉽게 요전에 말한 것을 例로 들어 말하면 一 點 差로 一 年 묵는다는 것은 理致에 닿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退學願書를 내구 학교를 그만둘 줄 아는 少年이 이른바 現代의 英雄이오. 나폴레온은 뽐내기 를, 내 사전에는 不可能이란 없노라 했지만 現代의 英雄이 란, 너무나 손쉽고 情이 들어서 오히려 그것에 기대어 사는 것이 여러 모로 安穩한 것을 굿바이 하는 사람이오. 이것은 너무나 쉽다는 의미에서 알프스를 넘는 것보다 더 어렵지.” “말씀대로 現代의 英雄은 우선 落第生이어야 하겠군 요.” 400


“優等生이 영웅이 되기란 駱駝가 바늘구멍을 기어 나가 려는 것처럼 어렵지.” “人生에 退學願書를 내는 사람이 최고의 영웅이겠군 요.” “아니, 우등생이 英雄이 되는 길이 한 가지 있는데 우등 생으로서 그 自殺을 했을 때요.” “그런 이야기 이제는 그만해요.” “나두 동감이오. 우리는 落第生이니까.” “…”

“어떤 사람이 저보구 敎會에 나오래요. 마담 바타플라이 두 얼마든지 크리스찬이 될 수 있다구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있다구 생각할 수 없어 요?” “나는 아주 열렬한 크리스찬을 한 사람 알고 있는데, 어 렸을 때 장난삼아 그저 장난삼아 동무들과 어울려서 사과밭 으로 기어들어 갔다가 붙잡히었지. 하룻밤 사과나무 등걸에 결박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랄 수 있는데 내일 아침 담 임선생님에게 일러바쳐서 퇴학시켜 버리겠다는 공갈에는 어떻게나 가슴이 죄어들었던지 그 이튿날부터 단숨에 模範 401


生이 되어 그대로 어른이 된 것은 찬양할 만한 일인데 一生

사과 맛을 잃었다나…” “그게 하느님의 없다는 증명이에요?” “人間이 어떻게 해서 없어졌나 하는 하나님의 發生 경위 지.”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없어졌나요?” “全知 쪽은 어떤지 알 길이 없지만, 全能 쪽으로 말하면 요지음처럼 그 權能이 해마다 縮小되어 가는 그런 하나님 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하나님은 사랑이라구 하던데요?” “인간의 智慧로써는 헤아릴 수 없다는 사랑 말이오? 그 야 人間의 지혜로써 헤아릴 수 있다면 神이 따로 있을 필요 가 없으니 헤아릴 수 없어야 하겠지만, ‘人間의 智慧로써 만 들어 낸 神인데 人間의 智慧로써는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神?’ 이것은 ‘人間’은 ‘人間 以下’의 것이라는 것이면서, ‘神’

은 또 ‘神 以上’의 것이라는 말밖에 안 돼. 그런데 ‘人間 以 下’에는 동물이라는 것이 있지만 ‘神 以上’이라는 것은 없어

야 하니 그건 神의 否定이거든. 그 否定이 싫으면 人間이 神보다 더 크다는 것을 認定해야 돼.”

“…” “神이 있다는 쪽에 서서 말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고, 내 402


말은 그게 아니구, 神이 없다고 假定해 놓구서 世界를 觀測 해 보면 이때까지는 맞지 않던 모든 計算이 꼭 들어맞을 거 란 말이오. 그런데 人間들은 計算이 맞지 않아야 興을 느끼 게 되어 있으니, 痼疾은 하나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거요. 우리 지금 그 痼疾을 手術하러 가는 길이라구 할 수 있지.”

“지야는 四次元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 “알고도 싶지 않아요.” “線이라는 것은 點이 이어진 것인데 이 線을 一次元이라 고 하지. 이 線은 아무리 一次元의 方向 즉 線의 방향으로 연장을 시켜두 線은 언제까지나 線이오. 이것을 그리지 않 고 옆으로 移動시키면 거기에 面이 생기는데 이것을 二次 元이라고 하오. 이 面도 面이 되는 方向, 바꾸어 말하면 二 次元의 방향으로 아무리 넓혀도 面은 언제까지나 面이어서 二次元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이것을 面이 아닌 방향, 알기

쉽게 말해서 그대로 위로 들어 올리면 그 軌跡으로 立體가 생겨나지 않겠소? 보통 空間이라고 하는 이것을 三次元의 세계라고 하오. 그러면 四次元이란 어떤 것인가? 이때까지 의 투로 말하면 三次元을 三次元이 아닌 方向, 바꾸어 말하 면 空間을 空間이 아닌 方向으로 移動시켰을 때 거기에 나 403


타나는 軌跡이 곧 四次元일 것인데, 세상에 그런 方向이 어 디 있어. 上下도 아니고 東西南北도 아닌 方向? 상상할 수 도 없지 않소? 그런데 科學者들에 의하면 時間의 方向이 그 거라니까 妙하지 않소? 空間과 時間과 對立되는 것이 아니 라 한 줄로 이어진단 말이오.” “…” “그것도 그렇지만 그 四次元의 世界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하여간 지금 이 현재에도 우리는 그 四次元의 世界 속에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사실이 오. 그러면 말이오, 그러면 人間의 四次元은 어떤 것인가? ‘禁止’ ‘罪’ ‘神’, 이 三次元을 어느 方向으로 遊牧시키면 그 四次元이 出現할 것인가? 아무도 몰라. 몰라야 하고 알 도

리가 없지만, 한 가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 方向은 현 재도 보고는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더 正確하 게 말하면, 눈이 없어 못 보는 것이 아니라 卑怯해서 보려고 하지 않아서 못 보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리고 그 方向은 空 間에 대한 時間처럼 전연 對立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

이오.” “…” “江 저편에 푸른 벌판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비록 다리 (橋)가 없어도 건너가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쪽 땅에서는 404


살 수 없게 된 者라야만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쪽 땅에서 살 수 없게 되기 위해서 서울을 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

P邑에 도착한 것은 열두 時가 조금 지나서였읍니다. 차는 支署 앞에 가 멎었읍니다. 이장은 그대로 남아 있고, 지야가 지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임은 어느 사람이야요?” “바로 저올씨다.” “오 의원은 아직 안 나타났나요?” “오 의원 대감님 말입니까?” 처음에 걸어 들어올 때는, 눈이 부시는 고급 옷차림에 비 해서는 무슨 逢變이라도 당했던 것처럼 풀이 없어 보이던 貴婦人이, 입을 열면서부터는 안하무인으로 도도하게 나오

기에 지서 주임은 좀 얼떨떨해진 것이었읍니다. “곧 전화해 줘요. 아직도 거기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다 음번 국회의원은 다 出馬하게 될 줄 알라구. 알았어요? 오 늘 밤 안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다음번 국회의원은 꿈에두 바랄까 하지 말라구, 단단히 일러 줘요.” “네네 곧, 곧 하겠읍니다. 죄송합니다마는 성함은 누구시 405


라구 여쭈면 좋을는지?” “지야가 약혼자하구 왔다구 하면 돼요.” “네 잘 알았읍니다. 약혼자 되시는 분하구? 네 곧 그렇게 보고하겠읍니다.” “이걸 뒤에 갖다 심어요.” 손에 쥐고 있던 복숭아 두 알 중에서 하나를 가볍게 抛物 線으로 던져 주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일러 주신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해 놨어요.” 차는 다시 달려 오 의원의 벽돌집에 이르렀읍니다. 지야는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이장은 운전수의 옆자리 에, 숨겨 둔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여간 그리 크지는 않아도 꽤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따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는 없었읍니다. 차를 돌려보내고서 이장은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여기에 오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던가…” 이장의 出現에 늙은 식모 내외는 마음이 감자 껍질이 되 었읍니다. “할머니, 내가 거처했던 그 별장, 거기를 깨끗이 소제하 구, 이불은 그 누더기 말고, 등불두 갖다 놓소. 알아들었으 면 서둘러 주면 좋겠소.” 늙은 내외는 이장의 앞에서 없어질 수 있는 것만도 다행 406


이어서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서로 앞을 다투는 것이었읍니 다. “저 할머니는 저래 뵈어두 상당히 느림보지.” 지야는 저쪽 마루 끝에 가 앉아서 자기 구두 끝만 보고 있 었읍니다. 할머니는 十 分도 안 되어 나타났읍니다. “말짱하게 소지하구 제일 좋은 비단 이불을 갖다가 페났 읍네다. 물처럼 이 땜이 흐른 걸 좀 보오.” 말짱하게 소제했다는 것은 아닌 소리고, 적당히 발로 빗 질하고 입으로 후 후 불어 놓고 내려온 것입니다. 이장은 지야를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갔읍니다. “별장이 어디에 따로 있어요?” “여기는 오택부의 王國이라니까.” 나무와 바위 사이를 지나 동굴 앞에 이르렀읍니다. 등불이 희미하게 비쳐 나오는 그 洞窟은 음산해 보이기 도 하고 따스해 보이기도 했읍니다. “이게 뭐예요? 별장이라는 게 이거에요?” “나는 故鄕에 돌아온 기분인데…” 동굴 조금 위 되는 곳에 몇 百 年 묵었으리라 보이는 巨 樹가 달빛 아래 활개를 펴고 묵묵히 서 있는 것이 마치 하늘

을 받쳐 들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407


“이 안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들어가구 안 들어가구는 지야의 自由지.” “말로만 自由라면 자윤가요.” “세상은 말로 되어 있는 것이니까 내게 그런 抗議를 한다 는 것은 좀 애매하오.” “항의는 하고 싶지 않는데 들어갈 데가 없군요.” “저기 저 아래에 있지 않소.” “…?” “작아두 門은 문이지.” “기어 들어가는 거에요?” “항의하고 싶지 않으면 기어야 하겠지.” “기어이 들어가야 하나요?” “여기는 무슨 漁網과 같아서 여간해서는 도루 나오지 못 한다는 것두 알아 둘 필요가 있지.” 자기가 먼저 기어이 들어가는 것이었읍니다. “내가 지야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 하늘 아래 여기뿐 이오. 그러니 두려우면 간단하오. 돌아서서 터덜터덜 도로 내려가면 되오.” “…” 芝夜는 모든 것을 단념한 듯 무릎을 꿇고 기는 것이었읍

니다. 408


히프가 너무 커서 잘 들어가지지 않는 것을 이모저모로 비비는 꼴은 우습다면 우습고 비참하다면 비참하기도 했읍 니다. 사실 조금만 더 컸어도 못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네요.” 바깥에 있을 때와는 딴판인 것입니다. “실은 아무리 어째두 못 들어와질 줄 알았어요.” “그 점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과히 유능한 演出家는 못 되었군요.” “…” “第二幕은 근사했는데 三幕은 형편이 없는 곳이군요.” “내게는 제五막이라구 하는 것이 알맞겠소. 一幕도 무대 가 여기였으니까.” “그래요… 그럼 그저께 밤 것두 연극이었나요?” “…” “저는 참으로 행복한 여자네요.” 幸福한 표정을 지어내면서 안쪽으로 가 보는 것이었읍

니다. “신발은 안 벗어두 괜찮겠지요?” “아 괜찮구말구.”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땅에 놓고 끄르는데, 꺼내는 것 은 끝에 큼직한 자물쇠가 달린 기다란 鐵 였읍니다. 409


그것을 가지고 문을 칭칭 얽은 다음, 자물쇠를 채워 버리 는 것이었읍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는 芝夜의 표정은 그늘 이 지어져 있어서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읍니다. “世界를 잠가 버렸어.” 일어서며 손가락 끝에 쥐고 있던 열쇠를 멀리 바깥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여기에는 動作이 있을 뿐이야!” “…” “이제는 ‘말이 ’ 소용이 없어!” “여기 元兇이 있는데요…” 아직 한 개 남아 있는 복숭아를 들어 보이는 것이었읍니 다. “이 禁斷의 열매두 버릴까요?” “뭐 전에는 그만 목에 걸리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깨끗이 삼켜 버릴 거야.” “그럼 오택부 씨는 왜 오게 했나요? 그것두 有能하지 못 해선가요?” “지야!” “밖에서 생각한 것보단 아늑하네요.” 새삼스레 거기를 둘러보면서 핸드백을 寢臺에 던지고 410


목걸이를 끄르는 것이었읍니다. “저는 新婚旅行이라기에 푹신푹신한 침대두 있구, 물론 목욕탕두 있구, 속삭이면서 거닐기에 적합한 숲 속 길두 있 으려니 하고 가슴이 설레였는데, 여기에는 달빛이 새어 들 카텐두 없잖아요.” “여기는 密林이야!” “芝夜와 마담 바타플라이, 어느 쪽이 作中人物이구 어느 쪽이 모델이에요?” “연극이 아니다! 여기에 들어선 순간부터 연극이 아니 다!” “제五막은 어느쯤에서 막이 내리는 거예요?” “어젯밤에 말하지 않았어? 한쪽이 싫어질 때까지라구.” “어젯밤 것은 연극이라면서요?” “그것두 연극이 아니다! 처음부터 연극이란 하나두 없었 다!” “그럼 저는 그대루 마담 바타플라이겠네요?” “그렇다. 지야는 女子구, 난 男子다!” “그럼 이 옷 좀 끌러 줘요.” “…” “벌써 싫어졌나요?” “…” 411


“이런 데에 招待해다 놓구 싫어하시문 전 어떻게 해요.” 드레스를 훌훌 벗는 것이었읍니다. “지야! 잠깐 기다려!” 悲鳴 같은 소리를 흘리면서 널문 그늘에 가서 몸을 가리

는 것이었읍니다. “내 말을 들은 다음, 들은 다음엔 反抗을 해두 소용이 없 지만, 들은 다음이다!” “아까는 動作만 있다구 하지 않았어요.” “그 動作을 더 동작답게 하기 위해서다!” “듣고 싶지 않아요!” “어젯밤에 말한 것처럼 내 어머니는 오택부의 동생이다.” “…” “아까 낮에 들은 것처럼 오택부가 내 아버지다!” “…” “모르겠어? 나는 지야의 오빠란 말이다!” “…” 李章은 무슨 反應이 있나 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으

나, 안에서는 언제까지도 아무 소리 없는 것입니다. “뭣이라구 말해 봐라!” “…” “지난 일 년 동안 어떻게 하면 그 백정을 보기 좋게 골려 412


줄 수 있을까, 나는 그것만 연구했다. 그랬는데 더 한층 效 果的이게도 지야는 情婦가 아니라 딸이었다! 알겠어? 더 효

과적이게도 말이야. 그러니 反抗해 봐! 반항해두 소용없단 말이야!” 숨겼던 몸을 끌어당기며 마루에 덥석 올라섰읍니다. “…?” 芝夜는 침대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읍니다. 마룻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로 보아, 얼굴만 내놓고 반듯이 누워 있는 그 芝夜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어야 했읍 니다. “자기도 모르고 있는 것으로 해 두고 여기까지 따라왔는 데 끝내 연극이 아니었군요.” “지야! 알고 있었어?” “圖書館에 가서 ‘카인을 ’ 찾아봤어요.” “…” “성경책에는 ‘아다라는 ’ 여동생이 없었는데…” “聖經은 원래 誤植과 거짓말의 동산이야. 예수가 私生 兒라는 것두 거기서는 遁甲을 하고 있잖어?”

“험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미워도 해 봤지만 演劇을 할 만두 했겠다구 理解가 가요. 저는 사랑을 위해서였지만.” “사랑하기 위한 연극이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연 413


극은 있을 수 없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왜 그렇게까지 좋아했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늦었는걸요.” 이슬이 맺는 얼굴을 저쪽으로 돌려놓는 것이었읍니다. “地獄에 떨어질 女子죠?…” “地獄이 아니다! ‘에덴’ 저쪽이다! 아담 이브를 넘어 에덴 저쪽에 가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거기에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말은…” 그리하여 그 洞窟에서는 등불이 꺼졌읍니다. 푸른 하늘에서는 둥근 달이 하얀 솜구름에 안겼다가는 벗어 나오고, 벗어 나왔다가는 안겨 들고 하면서 그리 길지 않는 밤길을 재촉하고 있었읍니다. 그 무렵에야 吳澤富는 지이프車를 독촉하면서 漢江을 넘어서고 있었읍니다. 그는 다섯 時에 자기는 그 호텔에 가지 않고, 暴力輩를 두세 명 보내어 이장을 誘引 납치하게 한 것입니다. 院長을 잘 아는 정신병원 獨房에 가두어 버릴 計劃이 다 되어 있었 읍니다. 홧김에 간장 탱크에 집어넣어 버릴까고 연구도 해 봤으나 그건 좀 잔인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깡패들이 돌아와 그런 人相을 한 者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라는 보고를 들었을 때, 그는 일단 會心의 미소를 지었읍 414


니다. 자기를 두려워 회피한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오늘 밤 안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다음번 국회의원은 꿈 에도 생각지 말라고 하더라는 P邑에서의 전화 연락받은 것 은 어떤 요정에서 한잠 자고 있을 때였읍니다. 정말 개백장 같은 相이 되어 가지고, 더 빨리빨리 몰 줄 모르느냐, 하면서 운전수를 볶아 대던 오택부는 한 시간쯤 차에 시달리고는, 졸음을 못 이겨 쿨쿨 코를 고는 것이었읍 니다. 걸찍한 침을 입으로 흘리면서 자꾸 쓰러지려고만 하 기에 운전수는 한 손으로 그것을 밀어 세워 놓느라고 제대 로 운전할 수 없을 지경이었읍니다. 이틀 전 李章이 옷을 갈아입었던 마을을 지날 쯤 해서는, 그렇게 청청하던 하늘이 언제 그렇게 꺼먼 구름에 가리웠는 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읍니다. P邑에 이르렀을 땐 暴雨였읍니다. 그 빗발 속에서도 동 녘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르고 있었읍니다. 오 의원이 정말 ‘오늘 밤 안으로’ 내려온 것을 본 지서 주 임은 자기가 무슨 큰 功을 세우기나 한 것 같은 얼굴을 했읍 니다. 그 지서 주임에게서 그들이 별 딴소리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오택부는 크게 한시름 놓았읍니다. 그가 밤중 에 이렇게 등에 불이 달린 것처럼 허둥지둥 내려온 것은 주 415


로 그 걱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넌 지서 주임 뭘루 하는 거냐! 그따위 소리를 하는 연놈 들을 그대루 두구, 그래 그따위 전화를 올려 보내, 정신을 바 짝 차려!” 불호령을 퍼붓고 씩씩거리면서 자기 집에 달려간 오택부 도 그 연놈들이 동굴에 들어가 비단 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 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해지는 모양이었읍니다. “이놈들이!… 이놈들이?…” 한참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뭘 꾸물꾸물하구 있어! 자물쇠가 또 있었지? 빨리 이리 가져와!” 하늘에서는 천둥까지 터지고 있었읍니다. 우산을 한 손으로 받으며 살금살금 동굴로 올라간 오택 부는 감쪽같이 자물쇠로 잠가 버리려고 허리를 굽혔다가, 거기에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는 것을 보고는, 얼씨구나도 해졌지만 어리둥절해지는 모양이었읍니다. 그러다가, 그것 이 안으로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흙탕물에 무릎까지 꿇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온 자물쇠를 가지고 밖 으로 잠그려고 하나 거기 감겨 있는 鐵

때문에 그것이 잘

되지 않았읍니다. “지야는 나를 有能하지 못하다구 했지만, 내 그럴 줄 알 416


았지.” 바로 이마빼기에서 나는 그 소리에 오택부는 히야, 하는 소리를 뿜으면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읍니다. 안쪽은 어둡기도 해서 李章이 바로 거기에 나와 서 있는 것을 미처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놈아! 너 너, 지야를 어쨌느냐? 이리 내놔라!” “지금 벌거벗고 있어서 부끄럽다나요.” “거짓말 말아라! 거짓말이다! 아직 아무 일두 없다. 恐喝 을 떨자면 아무 일두 없어야 한다! 응 안 그래?” “이미 다 아는 사실두 공갈감이 되나요? 더구나 당신은 鐵面皮로 천하에 드문 인물인데…”

“뭐잇!” 주먹을 해 가지고 다가서는 것이었으나 우산이 창살에 걸렸읍니다. 하늘도 그들의 對話를 듣고 싶어서인지 그렇게 퍼붓던 빗발도 기세를 누그리는 것이었읍니다. “너는 비켜라! 나는 네놈 같은 놈은 相對 않는다! 알겠느 냐? 네 공갈에 끄떡할 오택부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 두란 말이다!” 고개를 쳐들고 안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읍니다. “지야! 들어라! 너는 이놈에게 깜쪽같이 속고 있는 거다. 417


이놈은, 알겠느냐, 네 외사춘이라는 게 아니구, 그보다 더한 놈이다! 알았느냐, 더한 놈, 더한 놈 말이다. 이만하면 알겠 지? 알았으면 얼른 나와서 이놈의 얼굴을 할켜 놔라!” “…” “왜 안 나오느냐! 이놈이 그렇게도 무서우냐!” “이미 늦었읍니다.” “늦었다구?” “우리는 新婚夫婦가 되어 있지요.” “관계를 했단 말이냐?” “지야는 오빠를 남편으로 삼는 것은 좀 뭣하다구 했지만 요.” “뭐라구! 지야두 알구서 그 지랄을 했단 말이냐?” “강간이 못 된 것이 유감이었지요.” “이놈들 봐라. 내보다 더한 놈들이다! 양심의 가책두 모 르는 놈이다. 너희들에 비하면 이 나는 그래두 孟子다!” “…” “음, 그럼 할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은 할 수 없는 법이 다. 이렇게 되었으니 어떠냐? 같은 立場에서 協定, 紳士協 定을 맺자. 알겠느냐? 나두 너희두 아무 짓두 안 했다! 응 어

떠냐? 안 했다구만 하면 된다. 절대 秘密로 붙이고 서로 發 說하거나 공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 사람 앞에 일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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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씩 제공하겠다!” “그때 얼굴을 할퀴었다는 것은 또 처음 듣는 사실입니 다.” “듣기 싫다! 좋다. 그럼 한 사람 앞에 이백만 환씩이다!” “아까 맹자라구 하셨는데…” “최고로 오백만 환을 주겠다. 이 이상은 한 푼도 더 낼 수 없다!” “水泳服을 찢는 孟子두 있나요?” “뭣이!… 오냐 오냐…” 우산을 접는가 했더니, 그 끝으로 李章의 얼굴을 냅다 찌 르는 것이었읍니다. “뒤져라!” 그러나 창살에 걸려 빗나갔기 때문에 이장의 이마를 조 금 스쳤을 뿐이었다. “독 안에 든 놈이 피하면 네가 어디로 피하겠느냐!” “권총이 있으면 쏘겠읍니까?” “뭐라구?” “빌려 드릴까요…” 포켓에서 꺼내는 것은 올가미의 숲 속에서 찾아냈던 그 권총인데, 말끔히 닦아져 있었읍니다. “니가 나를 죽일 셈이냐?” 419


얼른 달아나지 못한 것을 탄하는 소리였읍니다. 이장은 그 권총을, 전에 주먹밥이 흔히 놓이던 창살대에 올려놓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었읍니다. “주지 말아요!” 뒤에서 芝夜의 소리가 났읍니다. “주면 정말 쏠까?” 이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왈칵 달려 든 오택부는 凱歌부터 올리는 것이었읍니다. “이 등신 같은 놈아!” 권총을 이장의 가슴에 겨누어 대는 것이었읍니다. “당장 죽여 버리고 싶으나 용서해 준다. 그 대신 굶어 죽 을 때까지밖에 못 산다! 알았나? 세멘또 공고리로 여기를 메 꾸어 버린단 말이다! 네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을 썩혔는 지 그것을 생각하면 이걸루 당장 꽝 해 버리구 싶지만 말이 야…” 권총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당신을 죽일 권총이었는데 미지근하게나마 자 백을 했기 때문에 쓸모가 없게 된 廢物이오.” “자백이라구, 내가 언제 自白했나!” 권총을 도로 꺼내 들고 으르렁대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자백한 적이 없다! 誘導訊問을 좀 해 본 것뿐이다!” 420


“지야, 여기 나와 이 치사스러운 우리 아버지를 좀 봐요.” “오오, 이 튀기 같은 놈이!…” “지야, 아까 이 백정께서 자백하는 것을 들었다? ‘孟子 같 은 내가 强姦한 네 에미는…’” “닥쳐라! 닥치지 못하겠느냐!” “‘나팔꽃 같은 내 여동생이었다.’” “죽어 봐라!” 탕! 빗소리를 꺼 버리면서 그 총소리는 이장의 눈을 태워 놨 읍니다. 메아리는 時間을 밀어내고 거기에 空間을 그려 냈 읍니다.

一望無際로 트인 灰色의 벌판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녹쓴 砲車의 殘骸, 갈기갈기 찢어 져 나간 旗. 그 위를 바람에 구르는 號外 人間食言이 原罪

‘禁止된 動作’은 그 安全裝置 四次元의 方向은 ‘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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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現代의 벌판을 좌충우돌 白馬를 달리고 있는 戰士의 앙상한 孤影. 검은 투구에, 휘두르는 칼은 이가 다 떨어졌는데…

敵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으니, 自畫像과의 死鬪라고 할

까. 회오리 이는 바람에 怒濤 치는 구름. 氣盡脈盡 할할거리면서 뒤로 뒤로 물러서는 앙상한 몰

골… 그의 謀逆도 여기서 다하는가 하는데, 별안간 拍車를 차 며 찔러 울리는 渾身의 一擊. 世界가 부서지는 것 같은 悲鳴, 으악!

그 斷末魔와 함께 퉁 하고 全體로 굴러 떨어지는 하늘! 거기 떨어져 딩굴고 있는 ‘人間的’이었다. 그 아가리는 자기 꼬리를 물고 있다. 그리로 달려가서 모가지를 내리치니, 그제야 꼬리를 토 해 내는 입에서 여울여울 흘러나오는 赤 黃 靑 藍 紫… 퍼렇기만 하던 하늘에 雨後竹筍으로 서는 무지개… 七色으로 彩色되어 오르는 찬란한 穹窿…

“괴이한 일이로다. 어째 하늘이 좀 어두워진 것 같은 데…” 422


“이제 너에게도 마지막 날이 온 것이다!” “아? 너는 누구냐!” “내가 門지기를 하고 있는 이 城의 主인 ‘人間’이다! 얼른 내려와서 이 門을 열어라!” “무어 人間? 어디서 한번 본 듯한 얼굴이라고는 했으나 그런 누더기 행세가 여기를 어딘 줄 알고, 어떻게 왔느냐!” “네가 마련해 놓은 세 개의 門을 지나서 왔다. ‘禁止’의 門 을 들어서니 號哭 涕泣하는 소리가 땅을 뒤덮었더라. 그 울 음의 늪을 지나, ‘罪’의 門을 넘어서니 祈禱하고 讚頌하는 소리가 공기를 메웠더라. 그 贖罪의 숲을 헤치고, ‘神’의 門 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骸骨의 더미가 마치 세상의 모든 장작은 마구 처넣은 것처럼 널리어 있는 저 谿谷에 굴 러떨어졌다. 까맣게 달려드는 까마귀의 떼, 그 검은 帳幕 사 이로, 나는 하늘을 찌르고 山嶺에 솟아 있는 이 ‘人間’의 城 을 발견한 것이다!” “너의 城이란 증거를 대라!” “그 懸板을 칼로 긁어냈지만 희미하기는 하나 뚜렷이 읽 을 수 있는 두 글자 ‘人間!’ ‘내가 긁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 은 저의 本心이 아니었읍니다’ 하고 너의 本心을 팔아 버린 것은 바로 내 자신이고, 나는 그것을 引受한 것뿐이다!” “나의 모든 눈물과 아픔과 그리고 땀은 그 食言에서 由來 423


했다는 것을 이제 깨닫고, 뉘우치고, 그래서 너를 죽인 것이 다!” “나를 죽인 것이다? 잠꼬대도 분수가 있다. ‘禁止’와 ‘罪’ 와 ‘神’ 그 三位一體의 비단 옷으로 몸을 감은 이 나를 ‘人間’ 이 죽인다?” “머리를 들고 저 七色으로 찬란해진 地上을 보아라. 너 의 비단 옷에 흡수되어 버렸던 七色이 제 故鄕을 찾은 저 地 上을 보아라. 너는 아까 내 칼에 맞아 죽은 것이다!”

“流言蜚語를 함부로 말라! 손등에 약간 負傷을 입었지만 네가 누구고 내가 누군데 네가 이 나를 죽인다고 입 밖엔들 낼 수 있단 말이냐!” “너는 내가 없으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고, 나는 네 가 없어진 곳에 있다. 이것이 네가 나에게 죽어야 하는 너와 나와의 關係다.” “무식한 놈이, 벼락 맞을 소리를 그만해라! ‘人間’이 어떻 게 ‘人間的’을 죽일 수 있느냐 말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의 그림자를 없애려는 것과 같은 語不成의 잠꼬대라는 것은 네가 잘 알고 있다!” “그림자가 存在를 規定한다는 것은 더 어불성의 浪說이 었지만 이루어졌던 것이고, 더구나 그것은 汚辱에의 그것 이었다!” 424


“存在가 本質에 先行한다, 그 말이지?” “어느 쪽이 앞서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存在와 本質 은 敵對 關係에 있다는 사실이다! ‘人間’과 ‘人間的’은 서로 對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人間的’은 獄이요, ‘人間’은 그 囚人. 囚人의 故鄕은 自由다. 그는 自由를 期한다. ‘人間’

은 反‘人間的’이기를 主張한다!” “나쁜 짓을 해야 人間이다, 그런 말이지?” “너는 善의 反對를 惡이라 하지만, 善과 惡은 兄弟에 지 나지 않는다.” “그따위 뒤죽박죽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너는 ‘神’을 頂點으로 하고 있는 三位一體에 의지하고 있지만, 나는 나를 받쳐 주고 있는 生에 뿌리박고 있다. 꽃 은 아름답기 전에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따라서 아름다 움의 對角은 醜가 아니라 ‘땅에 뿌리를 박다다 ’ !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은 시든 꽃의 醜와 이어진다!” “너.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反‘美醜’ 反‘善惡’ 反‘眞僞’, 그 新天地를 오늘의 用語로 말하면 來世다!” “그 來世라는 것을 좀 說明해 봐라. 들어 보자.” “그것은 說明할 수 없다. 來世에는 來世의 用語가 있고, 來世는 來世의 用語로써만 說明된다. 그 來世의 用語는 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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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가 온 다음에야 생긴다. 그 뒤에야 있을 것을 가지고 어떻

게 아직 오지도 않은 그것을 說明한달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說明할 수는 없어도 나는 그것을 느낀다. 焦點이 맞지 않은 映像처럼 어렴풋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焦點이 맞지 않은 렌즈에 그 責任이 있는 것이지 對象이 不實해서가 아 니다.” “궤변이다! 왜 설명을 못 하는가 하면 그 來世라는 것은 反‘人間的’이라기보다 非自然的이어서 存在할 수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非自然的이라는 것이 그것이 自然的이라는 證據다. 三 次元에서 보면 四次元은 想像을 絶한 非自然이다. 마찬가

지로 四次元에서 보면 三次元이 非自然이다. 마치 中世에 서 보면 近世가, 近世에서 보면 中世가 非自然的인 것과 같 다. 그러나 中世도 존재했고 近世도 존재했다. 따라서, 四 次元에서 봐서 非自然的이기 때문에 三次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三次元에서 봐서 非 自然的이라 해서 四次元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말

이 안 된다. 現在에서 봤을 때 過去와 未來는 現在가 아니 라는 점에서는 同等이다. 視點을 過去에 두고 보는 것과 마 찬가지로 未來에다 두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現代란 그 未 426


來에 視點을 두고 現在를 보아야 하는, 또 보는 季節의 딴

이름이다!” “철부지 소리는 그만해라! 네가 뭐라구 하든 너는 食言 을 하구서 어디 花柳界나 굴러먹으며 돌아다닌 蕩兒다! 그 따위 蕩兒의 잠꼬대 같은 소리로 數千 年, 아니 數萬 年을 두고 다지고 다져서 쌓아 올린 人間 歷史가 取消될 줄 아느 냐!” “數千 年 數萬 年이 아니라 나는 數億 年의 未來를 皮膚 에 느끼면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뭐라고…” “네가 심심하면 번득거리는 ‘最後의 審判’이란 너의 歷史 가 그치는 날이 아니었더냐.” “아하하하, 그만 약장수의 넋두리에 현혹될 뻔했다. 연설 을 그만하구, 저 地上을 봐라. 七色이 걷히고 도로 퍼렇게 멍이 들어 가는 저 地上을 보란 말이야. 핫핫핫…” “…”

“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 창살에 매달려 있던 李章은 깨어나는 것처럼 번쩍 이마 를 들었읍니다. 427


거기 흙탕물 속에 쓰러져 斷末의 굼틀거림을 치고 있는 것은 吳澤富였읍니다. 탄환은 총 안에서 그대로 터졌던 것이고, 그 反動으로 그 손을 떠난 그 멋없이 크기만 한 銃은 오택부의 얼굴을 强打 했던 것입니다. “지야, 총소리가 나서 얼마나 되었어?… 十 分은 지났겠 지?” “一 分도 안 되었어요.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一 分? 거짓말 마라!” “뭐 때문에 그런 거짓말해요? 곧 사람들이 와요! 사람들 이!” “그럼 내가 거짓말이란 말이야?” 다시 퍼붓기 시작한 빗발 밑에 굴러 있는 권총에서는 아 직도 硝煙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우리두 같이 죽어요!” “죽다니, 演劇은 大成功이었다!” “뭐라구요? 저렇게 될 줄 아셨단 말이에요!” “이 實驗은 가장 公正한 方法이었다. 한쪽은 죽어야 했 으니, 저者가 쏘지 않을 爲人이었다면 내가 쏠 것이었다!” “거짓말이야요!” “거짓말? 걸핏하면 거짓말이라는데 좋은 일은 왜 거짓말 428


이 아니야? 내가 죽인 것은 오택부가 아니라 그런 葉錢根性 이야!” “어쨌든 아버지 되는 사람을! 네, 거짓말이라구 해 줘요!” “殺人未遂犯은 저 屍體다! 더구나 저者는 前科者였다!” 먼 곳, 가까운 곳에서 천둥이 울리면서 하늘이 쭉쭉 찢어 져 나갔읍니다. 기세를 돋구던 빗발은 더한층 기승을 부리 는데, 얼굴이 半은 뜯겨 나간 吳澤富의 무거운 몸집 위에 폭 포처럼 쏟아졌읍니다. “아 우리두 같이 죽어요!” “‘人間’이 人間 四次元의 方向이었다! ‘人間’과 ‘人間的’ 이 서로 敵對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日常生活에서 늘 당 하고 있는 事實이 아닌가! 그럴 때 人間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 것인가? 아까 芝夜는 나와 함께 ‘人間’의 편을 들었다, 反 ‘人間的’일수록 人間은 人間이다!” “아 저는…” “芝夜, 우리는 人間으로 還俗한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 는 ‘人間’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요, 우리는 못 살아요!” “거기가 來世다! “無數한 圓의 交響, 萬象은 圓周의 一部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對立이 없다! 量的인 差만 있고, 質的인 差가 거기 429


에는 없다! “거기엔 敎育이 없다! 모든 圓의 中心은 健康이다!” “芝夜가 李章과의 結婚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옛날 地 動說의 발견을 두려워한 것과 마찬가지로 歷史에 거슬리는

일이라는 것을 거기서는 안다.” “그런 말,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아요!” “人類가 森林에서 기어 나와 平地로 내려갈 때도 통하지 않는 말을 했다. 지야, 말은 통하지 않아도 가슴에 손을 대 봐. 모든 사람이 마음 구석으로는, 意識하고 있든 아니하고 있든 이미 거기에 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어디에 가서 살고 싶어도 사람들이 오기 전에 여 기를 어떻게 나갈 수 있어요? 그들은 우리를 거기에 보내 주 지 않을 거에요!” “이런 豫備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있었 을 거야.” 포켓에서 또 하나의 열쇠를 꺼내 보이는 것이었읍니다. “…” “왜? 지야는 나를 센티멘탈리스트로 알았던 모양이지…” “연극은 언제면 끝나는 거예요!” “이제는 끝나지는 않는다!” “그래요? 그럼 빨리요! 저기 사람들이 와요!” 430


李章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듯이 해서 자기 손에 넣는 것

입니다. 사람들의 그림자는 아직 거기에 나타나 있지 않았 읍니다. “저는 같이 죽는 길을 찾아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열쇠를 창살 밖으로 멀리 멀리 던져 버리는 것이었읍니 다. “선생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멍하니 열쇠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고 있는 李章의 가슴 에, 두려움과 哀願과 눈물로 꾸겨진 얼굴을 갖다 대는 것이 었읍니다. “바깥 세계에 나가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고 말아요!” 李章을 안으로 안으로 밀어 들이는 것이었읍니다.

“아무도 이 연극을 끝내게 할 수는 없다!” 이럴 쯤 사람들의 그림자가 서넛 빗발 저쪽에 희끗거렸 읍니다. 그때 洞窟이 와르륵! 震動과 함께 破產을 일으켰읍니다. 동굴 위쪽에 서 있는 巨木에 벼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밑둘 레가 아름 반이나 되는 줄기가 동강이 나는 바람에 支根 하 나가 동굴 바로 천장에까지 뻗어 있는 뿌리가 전체로 털썩 했던 것이고, 그 바람에 지난해 떨어지다가 멎었던 그 바위 가 마음 놓고 떨어지면서 침대를 으스러 놓는 것을 信號처 431


럼 해 가지고 천장 전체가 무너져 내린 것이었읍니다. “아 우리는 같이 죽는 거예요!” 芝夜의 歡喜에 찬 소리가, 그 무엇에 홀린 것 같은 李章

에게 매달렸읍니다. 李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끝을 다 맺지 못하

고, 芝夜의 타는 입김과 함께 바윗덩이에 부서져 버렸읍니 다. “獄이 깨어지는 것이다! ‘올 것이 ’ 오고 ‘온 것이 ’ 부서진 것이다. 芝夜, 이제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다! 꽃이 지는 것 이다! 꽃이 지면…” 무너져 내린 흙과 바위는 순식간에, 서로 손을 쥐고 쓰러 진 男女를 땅속으로 해 버렸읍니다. 그렇게 해서 그 洞窟은 무너졌다기보다 꺼져 버렸읍니 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여간 시체라도 파내자고 했는 데 그 늙은 生物이 나서서 공연한 일이라고 했읍니다. “내가 은제 그 몹쓸 것들이 들어가서 잔 것 같다구 했지, 나아리를 쏴 놓구 저 산 위로 뺑소니치는 것을 이 두 눈으루 뙥뙥히 봤다오!”

지서 주임은 그 말을 곧이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비도 아 직 내리고 있는 것이고 노파가 저 산 위로 뺑소니치는 것을 432


똑똑히 봤다고 말한 것만은 사실이니, ‘그럼, 빨리 그렇다구 말할 것이지라고 ’ 해 두었읍니다. 그래서 그 남자와 여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地上에서 消 滅된 것이 되었읍니다. 核戰爭이 分泌해 낸 放射能이 氷河時代처럼 世界를 휩

쓴 다음, 洞窟이 꺼진 자리에서는 복숭아나무 한 그루 솟아 났읍니다. 꽃이 피었다 지니 그 가지에는 몇 알의 열매가 맺 혔읍니다. 오랜 옛날의 일이어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傳說에 의하면 우리가 즐기는 복숭아는 그 가지에 맺혔던

열매의 씨가 四方에 흩어져서 繁殖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벼락으로 태어났다가 벼락으로 죽은 이 私生兒 의 이야기는 ‘圓形의 傳說’이라기보다 ‘복숭아의 由來記’라 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보는 사람 의 趣味 나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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