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한국문학 9.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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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斷의 文學


60년대의 젊은 작가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 는다고 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중요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무엇이며 거기서 우러나 오는 창작 방법론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 떠한 인간을 창조하려 하며 어떻게 상황을 표현하려고 하는 가, 이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사고를 밝혀 두는 것은 우리 문학의 발전 과정에서 볼 때 퍽이나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요즘 그들이 자칭해서 말하는 이른바 제3세대의 작가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관은 무엇이며, 그들의 문학적 의 식이 어떠한 자세와 행동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우 리 문학의 내일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왜곡된 오늘의 현실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더욱 절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50년대 초기에 나는 어느 세미나에서 60년대의 문학을 이렇게 전망한 일이 있었다. 50년대가 고슴도치의 문학이 라고 한다면 60년대는 까치의 문학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리고 적어도 60년대의 문학은 방향도 없이 울부짖던 50년 대의 끝없는 방황병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50년대가 시작된 6·25 직후 피난지 부산에서 모더니즘 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던 김경린, 김규동, 김수영, 박인환, 이봉래, 임호권, 양병식 등은 아르튀르·랭보의 구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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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으로 현대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 市街地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박인환은 숨 가쁘게 반근대적인 구호를 절규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칠흑 같은 밤바다를 표류하고 있 는 한 잎의 낙엽처럼 욕구 불만을 아비규환으로 부르짖던 전후 일본의 ≪荒地≫ 시 동인들처럼 그들은 50년대를 덧 없이 방황하면서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되어야 한다는 막연 한 관념만 가지고 6·25로 인해 빼앗겨 버린 방향을 찾을 길 없이 그 허무함을 통탄했다. 이 무렵 발버둥 치며 일어났던 손창섭, 장용학, 김성한 등도 광적일 정도로 현대를 갈구하며 방향 없는 신경질적인 반항만을 거듭하면서 6·25의 상처를 가누지 못한 채 고슴 도치처럼 좌충우돌적인 항체가 되어 버렸다. 즉 그들에게 는 오늘은 물론 어제도 내일도 없이 오늘 이 순간만을 가시 돋친 신경을 곤두세우는 고슴도치였다. 모조리 거부되었 다. 다만 무한한 반항과 현대라는 구호가 있을 뿐이었다. 이 들의 이러한 방황은 양대 이데올로기의 격돌이 빚어낸 6·25의 민족상잔이 그들의 방향을 약탈해 가 버린 데서 오 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일본의 ≪황지≫ 시 동인들의 패전한 조국의 참담하고 황폐한 상 황 속에서 한 떨기 자유주의의 꽃처럼 이들 모더니스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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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며 막연하나마 현대적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가 되는 양 무조건 현대적인 것이 되기 위해 서 몸부림치는 반항을 거듭했다. 그들은 꽃이 피지 않는 봄 앞에 떨고 있어야 했으며, 그 리고 수확이 없는 가을 앞에 굶주림으로 온 신경을 움켜쥐 어야 했다. 정신적 파산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독립이 되었 는지 해방이 되었는지 분간이 안 되는 변화 속에서 또다시 갈라진 38선 앞의 동족상잔의 사상적 장벽을 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한 줄기 가느다란 희망 그것은 다름 아닌 통일의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 6·25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마치 우리의 독립을 우리들의 손으로 이룩 하지 못한 데서 오는 그 보상인 것처럼, 독립을 위한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반대의 편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그 죄값을 치루는 것처럼 38선은 너무나도 가혹한 동족상잔의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50년대의 작가들은 이 가혹한 시련 속에 서 낙오되어 버린 것이다. 퇴폐가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만 것이다. 막막한 어둠과 폭풍우 같은 거센 파도만이 그들 에게 밀려왔을 뿐이다. 그들은 어느 사이에 밤의 족속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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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양대 이데올로기의 격돌 속에서 인텔리겐차의 종말을 의식하였다. 소외자의 길손에 이끌려 끝없이 방황하면서 그저 막연하게 현대만 부르짖으며, 현대만이 그들이 구원 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양 무조건 현대적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그들의 온갖 울분과 정력과 지력은 반근 대적인 것으로 집중하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깊숙히 파고 들지 못하고 그저 허공을 향한 절규에 불과했다. 이것이 바로 이들 50년대 작가들의 생리였다. 이러한 그들이 60년대에 와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동 안 모질게 휩쓸었던 전화의 폭풍은 사라지고 휴전이 되었 다. 그리고 비교적 안정기에 들어섰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다방 구석에만 처박혔던 피난 생활을 청산하고 화려한 도시 의 치레에 참여했다. 그들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현대의 상 징이라고 보던 그 도시 속에서 마음껏 감각적인 촉각을 예 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현대에 도취했다. 감각만이 살아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에 38선이 휴전선으로만 바뀌자 이 데올로기의 장벽, 언제 다시 터질지도 모르는 양대 세력의 전쟁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그들은 이렇게 불안한 현실에 둔감해져 버렸다. 그들은 이러한 안이한 습성을 어느 사이 에 기르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적이 되기 위해서 현실에 눈 이 어두워지고 타락과 소비와 향락으로 세련된 도시 감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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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되어 그들의 항체는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의 눈에는 휴전선도 통일에의 의지도 비치지 아니했다. 완전 마비된 시각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유일한 상표였던 반항이란 이름의 돛을 걷어 올리고 서서히 호수가를 맴돌고 있다. 한물이 가 버린 잔잔한 고요가 이들 호상(湖上) 가족을 에워싸고 있을 뿐이 다. 이들의 반항은 이제 문학 박물관에나 소장되어 있는 것 일까, 가끔 현실에 대한 모순이나 인간의 존엄성 등을 소재 로 회고적이며 감상적인 반항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의 기수 김경린은 장 기 동면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고 있으며, 기지력이 왕성한 김규동은 <瓦斯燈>의 김광균처럼 자기의 시재를 상재로 전업해 버렸다. 숨 막히도록 절망을 노래했던 박인환은 다 다이즘보다도 단명했고 지적인 현대를 구가했던 이봉래는 다재다능하다 못해 시에서 멀어져 갔다. 고도의 비평 정신 을 가진 김수영은 냉소적인 항체가 되어 버렸고, 주지적인 박태진, 송욱, 김종문은 감성 결핍증에 걸려 버렸다. 반항을 내면으로 깊숙히 용해시켰던 장용학은 그 반항이 과잉된 관 념 속에 빠져 버리고 있으며, 잔인하도록 반항을 극했던 손 창섭은 통속적인 신문소설로 안이해져 버리고, 독특한 리 얼리티 속에 현대적 의지를 모색하던 김성한은 그의 역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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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李成桂≫에서 풍속화해 버리고 있다. 모두가 절대적 으로 현대적이 되기 위해서 반항에 반항을 거듭하여 방황하 던 50년대의 ‘고슴도치’ 문학의 모더니스트들이었다. 그런데 60년대의 젊은 ‘까치’의 작가들은 어떠한가. 확실히 50년대에 전망했던 대로 이들 60년대의 젊은 작 가들은 고슴도치처럼 끝없이 방황하던 전시(戰時)의 세대 를 넘어섰다. 이들은 이미 절망도 절규도 반항도 하지 않는 다. 감상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되기 위한 몸부림 도 없다. 여기에 바로 그들 60년대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도달한 곳은 다름 아닌 개아주의(個我主 義)로 오도된 상황의 부재였다. 그곳은 동시에 사회성의 부

재 민족성의 부재 역사성의 부재까지도 동반하고 있다. 종 교는 물론 인간성마저도 그들에게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현재에 철저하도록 밝아진 것일까, 그들은 일부 러 신비스러운 문학적인 냄새를 피우지 않아서 시원스럽다 는 평을 듣는다. 다재다능하며 현학적일 정도로 박식하며 구질구질한 문사적인 퇴폐성이라곤 전연 느낄 수 없을 정도 로 말끔하다. 문장만 하더라도 아주 세련된 세일즈맨의 미 끈한 스타일과도 같이 기교 만능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60 년대의 젊은 작가들은 독자들의 감각적인 반응에 예민해진 것이다. 이미 그들에게서는 독자를 떠나 문사들만이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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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자아도취나 관조적인 고고감이 말끔히 씻어져 버리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들 60년대의 젊은 작가들은 그들에게 이러한 현재성은 있는지 몰라도 현실이 없고 또한 현실의 핵을 이루는 상황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세계관이 없고 이데 올로기가 없다. 더우기 그들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분단 상태에 대하여 눈이 어두우며 그 분단을 통일하려는 상황성 에 대하여 전연 관심조차 갖지를 않는다. 아니 분단이니 통일이니 하는 소재가 그들에게 있어서 는 한낱 낡아 빠진 지난날의 얘기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다. 심한 경우, 그들은 통일을 원치도 않으며 분단 해소를 위한 행동을 전연 생각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문 제들이 등외적인 문제로 되어 버렸다. 통일과 분단이라는 명제는 그들의 소재는 물론 문학적 사고권에서마저 떨어져 나가 버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골동 품이나 무형문화재나 기념식 때나 쓰는 싱거운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통일을 운운하면 무슨 진부하고 고루하 고 낡고 묵은 소재나 되는 것처럼 외면해 버리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무관심 또는 상황 부재의 경향이 이 웃 일본 문학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일본의 젊은 작 가들과 우리의 60년대 작가들을 잠시 비교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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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대−일본 문단에서 5, 6년 전부터 제3의 신인이란 이름으로 쓰여 오던 이 말이 지난해부터 우리 문단에도 오 르내리고 있다. 일본 문단에서 제3의 신인을 명명한 비평가 야마모도 겡기찌(山本健吉)는 문학적 세대의 구분을 우리 문단처럼 연령에다 두지 않고 문단 진출을 중심으로 어느 때에 문학 활동을 하면서 등용이 되었는가에 따라서 나누어 놓았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요는 사상적인 세대가 문제이 지 생리적인 연령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데 진보성을 볼 수 있다. 즉 비평가 야마모도 겡기찌는 젊은 청춘을 전쟁(2차 대 전) 통에 희생당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종전(8·15 이후) 초기에 활동한 작가들을 제1의 신인이라 하였다. 둘째, 종 전 후 패전의 황량하고 참담을 극한 상황 속에서 청춘을 불 태운 아레지7) ≪荒地≫ 동인들과 같은 작가들을 제2의 신 인이라 하였다. 끝으로 전상이 회복되고 역사 이래 최대의 경기 상승기를 맞이한 때에 등장한 작가들을 제3의 신인이 라 명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단의 세대 구분을 보면 해방 직후, 이데올 로기 상쟁으로 복잡다단했던 시기에 진출한 작가를 제1세

7) 아레지: 엘레지(élégie), 비가(悲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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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 하고, 둘째 동족상잔으로 피비린내 나는 6·25를 통해 등단한 작가를 가리켜 제2세대라 하며, 세째로는 4·19와 5·16 등 국내 정치 정세가 혼란했을 때 나온 신인들을 제3 세대라고 일컫는 모양인데 이는 다분히 일본 문학의 세대 구분과 비슷하면서도 사상성보다는 생리적 연령이 가미되 고 있는 것이다. 세대 구분에 있어서 일본 문학의 그것과는 양상이나 성격이 다소 다르다고 볼 수 있겠으나 한편 시대 적인 상황과 그 체험을 중심으로 젊은 작가들의 세대관을 차질해 놓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개념 밑에 분화되어지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 는 우리의 60년대 젊은 작가들과 일본의 제3의 신인들이 그 문학적 자세나 사고나 특징에 있어서 한결같이 상황의 부재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즉 일본의 역사적 현실이라든가 또는 전 일본의 작가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몸에 배어 있고, 또한 그 정신적 골수에 맺혀 있는 이른바 “다시는 원폭의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겠 다” “원폭 없는 평화를 지켜야겠다”든가 하는 이와 같은 그 들의 통일된 상황이나 미래상이 이 제3신인들에게서는 찾 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 문학이 전쟁 말기 때 문학을 군국주의적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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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의 군화로 무참히 짓밟아 버린 때보다도 한결 불행한 일 이며, 문학적 진공의 고뇌를 겪어야 할 위급한 현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일본의 제3신인들이 극단적인 사 생활주의에 빠져 문학성 부재의 상태 속에서 현실적인 상황 뿐만 아니라 미래상마저도 상실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문단의 60년대 젊은 작가들도 우 리의 역사적 현실이며 사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분단된 민족을 통일해야 한다” “휴전선이 없어져야 한다” “다시는 6·25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등등 이러한 사상적 기조나 그 상황 인식에의 자세가 없는 것이다. 일본의 제3신인은 물론 우리 문단의 제3세대들도 이러 한 정신적 기조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으며 그러한 것에 무관심이나 무위의 상태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통일에 대한 미래상을 창조하는 대신에 일체의 기성에 대한 불신만 을 표명하는 데 치중해 버리고 있으며, 분단의 병폐가 우리 생활과 현실을 어떻게 좀먹고 있으며 또한 살려는 희망을 좌절시키고 있는가를 직시하려는 대신에, 모든 것은 낡고 병들었으니 역사는 이제부터라고 극히 자기 중심적인 개아 의 아성에서 독고성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낡아 버렸고 어찌하여 병들어 버렸으며 어찌하여 창조의 바탕마 저 말라 버렸는가에 대해서 이를 생각하고 연구하려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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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무조건 썩었다, 낡았다, 병들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한다고 주먹을 휘두른다는 것은 오히려 병 들고 썩었고 낡은 것보다도 한결 보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그들일수록(이는 60년대 젊은 작가를 통틀어 말 하지는 않는다) 주장하는 반메카니즘도 따지고 보면 바닥 이 드러나 버린 감상적인 휴우머니즘의 잔재에 지나지 않으 며 그들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도 캐들고 보면 개인주의와 일맥상통한 것이며, 그들이 궁극적으로 찾아 헤매고 있는 영원한 인간상이란 것도 니이체나 키에르케고 르가 던져 놓고 가 버린 그 불길하고 음산한 니힐에서 아직 껏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그 들이 최고 긍지로 삼고 있는 소위 권위의식이란 것도 사실 지성 부재의 고립주의적인 열패감을 엄호하려는 변변찬은 무기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최후까지 지키려는 비판적 인 자세와 불의에 저항한다는 의식 자체마저도 하나의 현대 인적인 액세서리에 불과하다고 하면 너무한 소리일까, 이 는 나의 오해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하여튼 그들의 작품에서 진실한 언어의 창조 대신에 잔 소리가 많아졌으며 아는 체만 하려는 현학적인 세설(細說) 문학적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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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젊은 작가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러나 현학적일 정도로 해박한 그들의 지식과 전투적일 정도 의 기지력도 결국에는 개아주의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족의식이란 한낱 고루한 것이라고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린 그들이 찾아간 곳이란 다름 아닌 무정부적인 세계성이 었으며, 줏대가 없는 국제주의에의 환상적인 방랑자의 무 대였다. 다시 말해 두지만 이러한 오도된 경향이 60년대의 젊은 작가들의 전체적인 양상이라고는 결코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진보적이어야 할 작가적 자세가 개아주 의로 오도된 나머지, 뉘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통일을 위한 상황이나 분단으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적 현실에 대해서 는 일제히 외면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장된 사상으로 기교에만 쏠리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현실이나 민족적 상황에서 볼 때 분명히 통일을 싫어하며 분단이 됨 으로써만이 존재할 수 있는 그러한 보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관조나 무관심이나 무위(無爲)처럼 역사적 보수성은 없 다. 더우기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민족이 분단으로 인해 비극적인 상황에 허덕이고 있을 때 여기에 눈을 돌리 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가 그만큼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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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외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인간 존 재의 극리(極理)를 영원한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찾는 이 른바 비상황적 문학파라 하더라도 이는 분명히 역사적인 흐 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젊은 주인공 들만 해도 그렇다. 아내의 시체를 모르모트로 팔아 버린 그 돈을 가지고 술꾼과 휩쓸려 술을 마시려다 화재 현장에서 돈을 불 속에 던지고 자살해 버리는, 즉 비사회적이며 비상 황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의지나 사회 속에서의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실패당하며 탈락당해 버린 비현실적인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인물일 수록 자기의 비극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비극적인 결과만에 매어 달린 채 그 비극의 근 원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 김승옥 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역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행 행위는 자살하고 말아 버린 주인공의 자폭 적인 항화(巷話)보다도 이를 바라보며 밑도 끝도 없이 꿈 틀거린다는 치어를 무슨 의미심장하게 나누는, 소위 타락 적인 지식인의 권태로운 허상 속에 한결 도사리고 있는 것 이다. 사실 이는 지식인의 무력한 사고를 그대로 나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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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바로 그러한 인물이 이 소설에서 자살자를 에워싸 고 무슨 인생무상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인 간의 존재가 그리고 지식인의 사고가 기껏해야 패배해 버 린 소외자를 가지고 운운한다는 것은 이처럼 경박한 일도 없다. 적어도 이 작가는 아내의 치료는 고사하고 시체조차도 모르모트로 팔아야만 했으며, 끝내는 자살해 버리고 마는 주인공의 비극을 사회적 모순에서 파생된 근원적 원인에서 부터 파헤치지 못하고 한낱 인생의 무상으로만 돌려 버리고 있다. 분단이 빚어낸 사회적 불안에서 오는 그러한 현상으 로 보려 하지 않고, 그저 막연한 사회적 부조리가 빚어낸 하 나의 권태로운 사실에 불과했으며, 이것마저도 단순한 개 인의 어느 처참한 경우가 상황적 관련에서 파헤쳐지지 못하 고 있다. 그저 이 작가는 자살자 옆에 부자집 아들의 대학원생과 가난한 구청 직원을 배석시켜 자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 다. 아내를 모르모트로 팔고 자살한 판매원은 현실의 사회 적 구조와 역관계(力關係)에서 확실히 소외당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무위하게 바라보며 덧없는 대화만 일삼고 있 는 대학원생과 구청 직원은 자살보다 더한 소외자이며 동시 에 한낱 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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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월부 판매원의 자살을 배석하고 너무 늙어 버린 감각에 잠기는 그것으로써 엄청난 체험이라도 한 것처 럼 심각해하는 대학원생 같은 인물은 속물보다도 치기가 앞 선다. 이는 확실히 작가가 현실을 위장한 것이다. 아니 현실 을 너무나도 가볍게 스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무슨 사상이나 있는 것처럼 의미 있게 단장해 놓는다는 것은 현 실의 근원을 은폐한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청준의 여러 작품들, 그중에서도 <별을 보여 드립니다>에 나오는 ‘그’라는 주인공 역시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아내를 모르모트로 팔고 자살한 월부 판매원과 도 결국은 일치된, 소위 현대사회의 생활 구조나 역관계에 서 소외당해 버린 인물들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 사이로 오니까 더 외로와지더군. 그렇지, 하긴 거기도 사람은 있었지, 하지만 난 거기서 언제나 혼자라 고 생각되거든. 그런데 여기서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 되는데도 엄청나게 외로와진단 말야. 배반을 당한 것 같 기만 하고… 배반을 당하면 나도 배반을 하고 싶거든. 그것뿐이야.”

S대 천문기상학과를 나와 영국까지 다녀온 이 젊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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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 ‘그’가 배반을 배반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떠도는 몸이 다시 떠난다고 작가는 묘사하고 있다. 즉 사회에서 소외당 한 인간이 자기 소외를 거듭하며 군중 속의 고독을 견디다 못해 도피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 젊은 과학도가 고독해졌으며 또한 그 고독해 진 사회적 인간적 요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캐내기보다는 개 인적인 성격이나 무수한 성군(星群) 속에서 자기 별을 찾아 헤매는 개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독이 상 황 속에 용해되지 못하고 개아로 집착해 버린 데서 빚어진 에고이즘의 소산이란 것을 이 젊은 과학도는 의식하지 못하 고 그 환상화되어 버린 자기의 별만을 찾아 현실도피를 거 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무위(無爲)의 세계로 도피 해 버린 것처럼 이청준의 <별을 보여 드립니다>의 주인 공 ‘그’는 환상적인 별의 세계로 도피해 버리고 있다. <날 개>의 주인공이 옆방에서 딴 사내와 수작을 부리고 있는 아내를 어찌할 수 없어 그저 새와 조롱이나 하고 무위하게 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별을 보여 드립니다>의 ‘그’도 역 시 “자기를 좋아하는 것은 결국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며, 왜 자기가 불행해하는지 무척도 알고 싶지만 결국 자기는 그렇게밖에 될 수가 없노라는 이른바 숙명적인 고립감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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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잡힌 나머지 애인에게서 떠나 버리는데, 이 두 개의 도피 적 유형 속에 도사리고 있는 니힐리즘을 캐고 보면 사회적 으로 패배당해 버리고 소외당해 버린 고립되고 무기력한 지 식인의 감상적 도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의 도피에서는 카프카처럼 어떤 사회적인 무위를 느낄 수 있는 데 반하여, 이청준의 ‘그’의 고독에서는 개아적인 소외감밖에는 느껴 오지 않는다. 그만큼 상황에 서의 일탈을 볼 수 있고, 이것은 60년대의 젊은 작가들의 작 품 경향이나 문학적 사고가 사회나 민족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개아의 신변성에서 무슨 철학을 찾아보려고만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상의 <날개> 속의 무위에서는 가슴 깊이 내재된 사회성(건너방에서 아내가 딴 남자와 수작을 거는 외계의 현실이 일제 치하의 사회적인 상황으로 해석하 면서…)을 찾을 수 있듯이 60년대 작가인 최인훈의 <총독 의 소리>나 유현종의 <소금>에서는 한결 진한 사회성 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의 <날개>를 통하여 기형적이나마 일제 에 저항하는 상황성을 지니고 있으며, 최인훈과 유현종도 오늘의 상황인 분단의 의식을 간접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 런데 이청준과 김승옥에 이르러서는 현실성이 개아의 감각 속에서 하나둘 허물어져 버리고 있다. 즉 작품 속에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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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상황성이 사상(捨象)되어져 버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성의 부재는 곧 민족적 현실인 역사적 분단 의식의 부재도 초래하고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리얼리티 의 부재까지도 동반하면서 무정부적인 세계문학으로 방향 도 없이 줄달음치고 있다. 물론 세계적인 조류에 그대로 뛰어드는 것도 좋으며, 조 그마한 향토적 소재보다는 일시에 세계적 소재를 다루는 것 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적인 현실 따위보다는 세계 인 간의 근원을 파고들며 세계적인 인간상을 구현하는 것도 좋 으리라. 하나 진정한 세계성은 그러한 데만 있는 것이 아니 고 민족적 현실 속에서 그 세계성을 찾아내며 또한 그러한 민족적 특수성을 통해서 이를 세계적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길이 바로 60년대의 우리 문학이 지향해야 할 가장 참 다운 길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60년대의 젊은 작가들은 이 러한 길에서 일탈하여 민족적 개성이 사상(捨象)되어지고 분단 의식이 마비된 상황 부재 속에서 세계성으로만 치닫고 있다. 어찌하여 민족적 현실이며 동시에 역사적인 현실인, 나아가서는 세계적 현실인 분단된 상황을 외면하고 있는가 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다. 60년대를 보내는 문단에는 현재 몇 갈래로 갈라진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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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경향들이 상대적으로 극을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다. 첫 째, 전통적인 순수문학과 사회적인 참여문학의 대립을 들 수 있겠고, 둘째, 한국적인 전통주의와 국제적인 세계주의 의 상극, 세째,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전후 세대와 일상적 자아를 찾는 60년대 신인들 간의 세대 논쟁 등, 그리고 이 밖에 몇몇 경향들이 존립하고 있으나, 이 세 개의 대립 관 계가 지배적인 양상을 띠면서 6·70년대 문학으로 넘어가 고 있다. 첫째,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대립을 보면 이형기 원형 갑 김상일 등의 참여 문학에 대한 반론과 홍사중 김우종 김 병걸 등의 이에 대한 공박이 60년대 초기부터 전개되더니 김붕구 교수가 참여문학을 성급하게 정치주의로 몰아세우 는 독단론을 펴자 김수영 신동엽이 붓을 세워 이에 맞섰다. 더우기 작고한 김수영에 대한 선우휘의 반론은 비상한 관심 을 집중케 했으며 반참여문학의 선봉에 섰던 원형갑까지도 비판하고 나섰다. 둘째, 서기원이 <전후 문학의 옹호>론에서 역사의식 이 결핍되었다고 김현 김주연 등 60년대 신인들을 비판하 자, 이에 맞선 신인들은 새 세대를 이해 못 한다고 서기원의 현실 참여론을 공박하여 5·60년대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 어지고 있다. 앞으로 전기 두 개의 대립 관계가 확대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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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문단적인 논쟁으로 퍼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 나 이에 비하여 전통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 관계는 60년 대 초기, 아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 5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 하였으나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또는 세대론 등의 극단적 인 대립 관계와는 달리 이렇다 할 논쟁 하나 없이 자체의 유 형성만을 지켜 오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이 전 통주의와 세계주의는 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이루지 않은 채 그저 상극으로만 편향하여 나름대로 성장한 것이다. 여기 서 극단화된 세계론을 비롯 순수문학과 참여문학과의 대립 관계에 논급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잠자는 식으로 대립하면 서 상극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또 이에 대하여 제대로 비평 을 받아 보지도 않은 채 비대해져 버린 전통주의와 세계주 의와의 상반 관계를 파헤쳐 보는 일도 다시없는 과제인 줄 믿고, 이 문제에 대한 비평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전통주의자들은 한국문학의 우위성을 찾는 나머 지 옛 신라로 되돌아가려는 보수적인 색채를 간직한 채 내 적으로만 형성되었으며 둘째, 세계주의는 서구 문학의 우 위성에 압도당한 채 그의 전통을 빌려다가 한국문학을 그것 에 맞추어 정형수술을 하려는 나머지 외적으로만 기울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마치 이 두 경향은 외곬으로 버티고 서 있는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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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적인 국문학 지상주의와 이를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외 국 문학 우월주의의 모순된 상반 관계처럼 서로 비교나 교 류함이 없이 높은 담을 쌓은 채 각기 독자적인 주장에만 몰 입하여 통일성을 간직해야 할 우리 문학의 창조적 소지로부 터 먼 거리에 독존하고 있다. 해방 후 오늘날까지 20여 년을 통하여 하루같이 읊조려 오던 “올바른 전통의 계승과 외래 문학의 비판적 섭취”라는 대명제는 불행히도 형식적인 구호에만 그친 채 전통주의와 세계주의라는 극단적인 경향이 대두하여 우리 문학은 예기 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커다란 반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우리의 전통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올바 르게 인식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전통에만 매어 달린 채 옛 신라에 몰입되어 현대 우리 문학을 천 년 전으로 복귀시키 려 하는가 하면 세계주의자들은 식상이 될 정도로 외국 문 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문학을 외래 문학의 척도에 서 이를 규제하며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천 년간의 우리 문 학을 통틀어도 괴테 문학 하나만도 못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 같은 작가가 우리 문학에서는 도저히 나 오지 못할 것으로 아예 단정해 버리고 있다. 세계주의자들은 말한다. 우리에게는 신화가 없다고− 즉 희랍과 같은 창조 신화가 없고 라인강이 흐르는 신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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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설화가 한강에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옳은 말이다. 우리 에게는 단군설 기자설과 같은 건국설화는 있어도 <일리어 드> <오딧세이>와 같은 창조 신화가 없다. 그리고 <일 리어드> <오딧세이>가 한 희랍의 민족 신화가 아니라, 전 유우럽의 신화가 되고 또한 근래에 와서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세계 신화로 군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마 치 유태 민족들의 조그마한 종족 신이 오늘날 세계 종교가 되었듯이, 그리고 서구의 어느 한 나라에서 입었던 양복이 세계 복장이 되어 버렸듯이 서구 문학이 세계문학의 위치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시인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희랍신화나 기독교나 서구의 문학 또는 그 복장이 세계화되고 있을망정 우리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절대로 무 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오늘날 일방적으로는 세계가 획일 화로 줄달음치고 있으나, 반면에 인류는 자기들의 민족적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우리의 민족적 현실이란 다름 아닌 분단된 상황이다. 아 무리 세계 신화인들 우리의 분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세계 종교라 하더라도 통일의 길을 제시해 주 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노상 세계 복장인 양복을 입고 산다 하더라도 분단의 비극에서 피할 수가 없으며 세 계문학이 된 서구 문학에 심취된다 하더라도 분단된 민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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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주의자들은 눈앞에 벌어진 민족적 현실은 보려 하지 않고 왜 우리의 조국은 이 모양인가 하고 한탄하면서 유산의 빈곤을 탓하고만 있다. 그런가 하면 전통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 의 우리 문학이 빈약해진 근본 원인은 반만년의 빛나는 역 사를 가진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은 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달리 신라를 찾으며 복고주의의 영화 로운 옛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T. S. 엘리어트가 고 전을 찾고 사르트르나 아누이가 희랍신화를 찾았다고 해서 우리까지 문화재가 되어 버린 옛 깃발을 들어야 한다는 것 이다. 물론 옛것이 없이 오늘이 있을 수 없으며 현대의 우리 문 학을 생각해 볼 때 융성했던 신라 문화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시대는 발전적 흐름이었으며, 우 리 고대사에서 신라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어 비록 여대(麗 代) 문화로 인해 부정은 되었을망정 그 유산이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를 신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아무리 신라 문화의 유산이 빛난 것이라 하더 라도 그것이 전사적(全史的)인 것은 될 수 없으며, 또한 현 대는 어디까지 엄연한 역사적 현대인 것이다. 어떠한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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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에게 물어보아도 역사가 뒷걸음친 일은 없었다. 엘리어 트와 사르트르가 아무리 고전을 찾고 신화를 재현시키려 하 였지만 옛것과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단지 고전과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그쳤 으며, 그들의 작품 역시 모티브를 그것에서 얻어 내는 데 머 물렀던 것이다. 고전과 신화를 현대어의 화술로서 창작적 재현을 꾸미 는 것이 아니고 문학적 소재를 그 시대의 유산 속에서 구하 고 또 그 당시의 작품을 새롭게 봄으로써 현대문학의 소지 를 넓히고 문학사의 명맥을 건전하게 이어 나간다고 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주의자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신라의 정신을 확대해석하여 마치 그것이 우 리 문학의 근원으로 단정하고 이를 현대문학에 주입할 것을 강요하면서 민족문학의 헌장으로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반면에 세계주의자들은 ‘오늘에 살자…’고 입에 바른 수식어만 늘어놓고 단군설이나 기자설이 창조 신화가 아닌 것을 통탄해 하면서 서구의 신화를 빌려다가 얕은 코 를 높이고 작은 눈을 크게 만들고 검은 머리를 옥시풀로 빨 고 심지어는 까만 눈동자에 파란 색소를 들이고 노란 피부 를 표백하는 등 전신 정형수술을 일삼으면서 우리 문화를 온통 서구제(製)로 뒤바꿔 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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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쑥스런 정형미용사가 모처럼 동경해 마지않던 서 구 문학의 성지를 순례하고 온 뒤 더욱더 이 나라의 유산 빈 곤을 비관한 나머지 조국이나 민족보다는 아예 세계주의의 깃발을 내흔들며 막연하기 짝이 없는 차관형 휴우머니즘을 내세우면서 민족적 현실과는 아예 외면해 버린 채 근래에 와서는 순수의 아성으로 후퇴하여 문학의 반참여 운동의 선 봉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세계주의가 반참여 운동으로 기 울어진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왜냐하면 세 계주의란 원래 민족적 개체나 그 역사적 현실에 대해서는 극히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폐쇄적인 울안에서 칩거하고 있는 전통주의, 모 든 가치를 서구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세계주의, 이 두 경향 을 본다. 이는 분명히 총화될 수 없고 통일될 수 없는 상극 으로 분단되어 버린 상태의 경향이다. 외래 문학의 맹목적인 추종에 대한 하나의 반동으로서 출발했던 한국문학의 전통주의자들은 신라 문화의 특질과 장점만을 들추어 이를 확대시키는 나머지 배외적인 쇼비니 즘에 빠져 버리고 있는가 하면, 반면에 우리 문학의 고유한 특성을 무시해 버리고 모든 창작적 척도를 외래 문학 특히 서구 문학의 기준에서만 바라보려는 나머지 획일적인 세계 주의에 깊숙이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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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서 일단 이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들어가 보자. 첫째, 세계 주의자들에 대하여−오늘날 우주 시대로 접어든 지금에 와 서, 동화로만 그리던 달나라 여행이 실현되고 있는 이 마당 에 뭐가 말라빠진 민족이며 또한 인공위성으로 지구가 시간 권내에 들어가 주먹만큼이나 작아져 버린 이런 초고도의 과 학 문명기에 지도에서도 확대경이 없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극소한 이 나라에서 무슨 케케묵은 민족이니 나발이니 하며 높은 담을 쌓아 놓고 있는가 하는 태도로써 폐쇄적인 민족 주의와 세계적인 동시성을 지니고 있는 민족성을 혼돈하면 서 이를 일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이러한 거시적인 호언을 세계주의자들의 입에서 흔히 듣기 마련이다. 물론 현대가 민족주의 시대는 아니다. 아무리 세계 인류 가 민족국가 단위로 구성돼 있다고 하지만 배타적인 민족과 민족이 서로 대립하고 있어야 하는 시대는 넘어섰다. 2차 대전 후 세계는 확실히 각 민족이 하나의 주체로서 존립하 여 국가를 형성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생활권이 3대 세력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다. 세계는 이처럼 단일화로 줄 달음치고 있으며, 서구에서는 통합 정부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 으로나 이미 세계 정부의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아직도 민족 간의 복잡하고 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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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한국 독일 월남 등과 같은 동일 민족을 분단해 버리는 역사적(逆史的)인 현 실까지도 빚어내고 있다. 그리고 아랍족과 유태족과의 싸 움을 비롯하여 아프리카의 족쟁(族爭)은 그칠 줄 모르며, 키프로스를 에워싼 터어키 민족과 그리이스 민족의 대립,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 이러한 모든 민족 분쟁은 2차 대 전의 전후 처리에 있어서 과거 식민주의자들의 계획된 조작 때문에 빚어진 변질적 현상이지만, 오늘날 현대사는 이 문 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가 아 무리 우주 시대로 첨단을 가고 있지만 동시에 민족 문제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파리가 곧 세 계이기도 하고 뉴욕의 월가가 세계은행이기도 하지만, 파 리는 그곳을 에워싼 전통적인 불란서 농민 속에서 자라고 있으며, 뉴욕은 남북전쟁 이전부터 내려오는 인종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 쉬고 있다. 현대의 우주과학은 세계화로 줄달음치고 있을지 모르 나, 반면에 복잡다단한 민족적 현실은 아직도 현대사의 주 축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세계화의 과정이, 다 른 한편으로 민족화의 과정이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 관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 는 민족성과 세계성이 동시적으로 존립하고 있는 시대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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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성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즉 민족성이 세계성으로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 체로서의 민족성의 투철한 자기 확립을 통하여 세계화되는 것이다. 즉 흑인이 아무리 백인 국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백 인은 아니듯이, 우리가 아무리 희랍인이 되고 서구인이 되 려고 해도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흑인은 흑 인으로서 또한 한국인은 한국인으로서 어디까지나 독자적 인 개성을 지니고 국제적인 자기의 위치를 갖추고 있어야만 이 비로소 세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흑인 문학이 세계문학으로 크게 각광을 받고 중남미 의 인디언 문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들이 백인들의 이른바 서구 문학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흑인과 인디언으 로서의 자기의 문학을 확립했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몇 천 년 묵은 조상의 이야기보다는 오늘의 흑인과 인디언을 철저 하게 내세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세계주의자들은 어떠 한가. 오늘에 살자는 입에 바른 구호 아래 오늘이 마치 서구 의 시대인 것처럼 희랍신화의 수입에 여념이 없으며, 우리 의 현대를 외래형 정형수술로서 날조하고 있다. 둘째, 전통주의자들에 대하여−그들은 우리 것을 찾아 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그 ‘우리’의 개념이 문제이다. 그들은 우리의 것을 오늘의 역사적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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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애써 먼 옛날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만 우리가 있는 줄 안다. 그것은 우리를 미국 사람과 구별하 기 위해서 갓 쓴 노인을 내세우는 격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라 문화에서 무슨 거창한 유물이나 발굴해 낸 것처럼 토 기나 금관이나 사치스런 장식품 등 이러한 사라져 버린 고 대 부족들의 호사했던 골품(骨品) 문화의 잔영을 끌어다가 이것이 마치 우리 문화의 본연이고 그 속에서만이 우리의 것과 우리의 창조 정신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것 을 만대로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잊혀지고 묻혀진 조상들의 빛나는 유산을 다시 캐 내어 민족정신의 역사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는 문화적 작업에 속한다. 그리고 몇 수 안 되지만 신라의 향가가 끼치는 국문학적 가치는 평가할 만하다. 당풍(唐風) 이 지배하던 시대에 당시(唐詩)와 대립하여 순전한 우리의 시가로서의 향가에는 확실히 우리의 것이 있다. 그러나 우 리의 것으로서의 문학사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향가의 정 신이 오늘의 문학 정신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제가 내포 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외국인과 구별하기 위해서 쓰고 나온 갓을 가지고 이것이 영원한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향가는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전통주의자들은 우리의 전통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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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에 있고 그 향가를 즐겨 부르며 수련을 쌓던 화랑들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의 모든 것은 이 향가적 전 통 속에 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의 모든 것 을 신라의 전통에만 의존하고 현대문학의 창조적 바탕을 그 전통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이른바 전통 지상주의는 오늘 날 세계문학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변두리 문학으로 빠지 기 마련이다. 아무리 당풍(唐風)에 젖지 않은 순수한 우리의 것으로서 의 향가 정신을 전통으로서 이어받아야 한다지만,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산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대(羅代) 문학의 핵을 이룬 향가 정신이 당풍에 젖지 않 은 순수한 우리 것이라는 그것만으로서는 우리 문학사의 특 수한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정신적 소산의 전부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대대로 우리 문학 창조의 정신적 기조가 될 전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때문이다. 따라서 향가가 지니는 시정신의 전통 여부보다는 오히려 당 풍에 젖지 않은 순수한 우리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것은 전통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유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 다. 설사 향가 정신을 전통으로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것만 으로서 현대 우리 문학의 창조적 기틀에 밑불이 될 수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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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다고 전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 문학의 파우스트 정신과 영국 문학의 햄릿 정신은 두 나라 문학의 주류적인 전통 정신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가 톨릭이요,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요, 문학적으로는 고전주의 였던 T. S. 엘리어트처럼 전통의 가치를 현대의 시점에다 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전통의 권위를 재현하는 데 있다면 그것은 현대를 창조하는 진정한 정신적 바탕으로서의 전통 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주의자는 현대를 상실해 버린 데 그 불행이 있다. 이처럼 전통에 대한 가치 평가와 인식의 척도가 판이한 전통주의자들이 전통의 우월성만 주장하고 지독한 쇼비니 스트가 되어 버렸는가 하면, 한편 세계주의자들은 북극을 외면한 남극처럼 아무리 현대가 우주 시대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분단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는 엄연한 역사적 현 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본다. 환상적일만큼 먼 신라의 옛 꿈 을 찾아 헤매는 전통주의의 정체를−그리고 세계인이 되려 고 발버둥 치는 권위의식에만 사로잡힌 외래 문학 추종의 정체를−사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바로 우리 문학의 전통이 다 하고 선뜻 내세울 만큼 뚜렷한 전통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서구의 유산으로 우리 문학을 정형해 버릴 수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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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경향은 모두가 오늘의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도피주의인 것이다. 물론 오늘의 이 현대 가 북극이나 남극, 어느 해저 비밀 기지에서 오발한 수소폭 탄으로 온 인류가 파멸당할지도 모르는 것을 걱정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유엔이 세계 정부의 구실을 하고 있는 시대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에 아직도 영국인의 대부분은 인도보다도 셰익스피어가 보다 귀중하다는 격언 속에 살고 있으며, 화려한 재즈에 들뜬 나 이 어린 미국 문화보다는 철두철미하게 전통의 긍지 속에 파묻혀 살고 있는 불란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극단적인 상반된 현상이 동시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20세기 후반기 현대문화의 역현상인지 모 른다. 이러한 역현상을 우리 현대문학에서도 역력히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문학이 이 역현상적 현상의 기생 때문에 건전한 발전을 크게 저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주의와 세계주의라는 이 두 개의 역현상적 경향이 모 두가 오늘의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우리 문학 위 에 군림하려 들기 때문에 현대 우리 문학은 크게 오도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문학의 고유한 전통을 찾고, 세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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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호흡을 같이하려는 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궁극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세계문학이 아니라 우주 문학이라도 좋고 신라가 아니 라 기자나 그 이전의 선사시대를 찾아도 좋다. 그러나 여기 에 문제가 있다. 첫째 외래 문학인 당풍에 젖지 않는 것까지 는 좋으나 향가의 대표적 작품이고 또 그 예술성이 높이 평 가되고 있다는 <慧星歌>만 하더라도, 그 작품이 일본군 에 대한 화랑들의 풍류적 자세를 혜성과 심대성(心大星)을 통하여 의미 깊은 암유와 함축성으로 표현하고 있다지만, 결국 그것은 본질적으로 점성술적인 주문이나 축도에서 벗 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한결 문제가 되는 것 은 아무리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한다 하더라도 평양 원산선 이북을 떼어 준다는 조건 아래 외세인 당(唐)과 손을 맞잡 고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했던 그 화랑들의 정신을 우리 문화의 전통으로서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것이 못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신라인이 문화적이고 화랑 들의 인격 성장이 고매했다 하더라도 외세와 짜고 동족을 분할 잠식했던 그러한 무사 정신이 도저히 우리의 전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세계주의자들을 본다. 파리에 산다고 다 세계인이 되고 케이프케네디8)에 산다고 모두 우주인이 될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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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이 정신은 희랍에다 두고 옛 로마에 조예가 깊고 구미의 소비성 문화로 세련만 되면, 그리고 미국인들보다도 영어 를 잘하면 모두가 세계인이 된다는 격으로 우리 문학을 표 백 정형해 버린다는 것은 폐쇄적인 전통주의보다 한결 부정 되어야 할 경향이다. 이미 현대문학사는 오랫동안 세계문학의 정상에 군림해 오던 서구 문학의 전근대적 특권을 박탈해 버리고 세계문학 의 다원화 과정을 걸으면서 만대의 노예와 무지와 천한 신 분 속에 운명적으로 저주받던 인종인 제임스 볼드윈, 랭스 턴 휴즈, 렐프 엘리슨, 리처드 라이트 같은 흑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가 하면 백인들의 학살적 침략으로 멸족의 위기에 놓인 인디언, 그 인디언과 같은 인종인 남미 과테말라의 아스투리아스와 같은 인디언의 작가가 노벨문 학상을 받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가 이미 워싱턴이나 런던이나 파리에서만 이루어지는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한 나라만의 깊숙한 울안에 도사리고 앉아서 창작을 하는 시대는 더욱 아니다.

8) 케이프케네디(Cape Kennedy): 케이프커내버럴(Cape Canaveral) 의 옛 이름. 미국 플로리다 반도 동쪽 연안에 있는 곶. 항공 우주국 기 지와 미사일 실험장, 우주선과 인공위성 로켓 발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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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세계문학사적인 동시성이다. 국제적인 시야에서 본 새로운 민족문학을 창조하는 일이다. 새로운 민족문학이 바라는 진정한 전통성과 세계성은 오늘날 우리 문학의 경우 그것은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주어진 민족적 상황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다. 즉, 분단된 오늘의 상황을 통하 여 이루어지는 창조적 작업 과정에서 이에 상응되는 전통 정신을 밑거름으로 삼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세계적으로 실 현시키는 데 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분단이라는 역사적 시련을 창조적 으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정신적인 결정(結晶)으로 서의 작품이 바로 세계문학적인 동시성을 지녀야 하며, 또한 그것이 고유한 전통으로서 승화되어 앞날의 우리 문학의 밑 바탕에 흘러 이어지는 창작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사의 흐름은 식민지 민족의 독립과 흑인 민권 등 인종 문제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양대 사조 의 대립으로 인하여 벌어진 독일 월남 라오스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와 같이 분단되어 버린 민족들의 상황 극복에 있다 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분단된 그 나라 한 나라만의 유리되 어진 문제가 아니다. 분단 자체가 양대 사조와 직결된 이상 분단국가의 운명은 그만큼 세계적인 것이다. 이처럼 분단 은 그 민족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세계적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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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분단은 곧 세계의 분단 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계적인 문제가 지도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깨알만 한 우리 민족의 현실 속에 깊이깊이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의 거시병(巨視病) 작가들은 이러한 세 계적 현실에는 눈을 돌리려 하지 않고 그저 낡은 족보처럼 꾀죄죄한 전통만을 찾기에 여념이 없으며, 그런가 하면 서 구의 신화를 쫓아다니며 그 흔해 빠진 소비성 문화나 절망 적인 개아주의 철학을 뒤적거리기에 정신이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에 산다는 세계주의이며 또한 옛 신라 로 돌아가자는 전통주의의 정체인 것이다. 결국 두 개의 경 향이 모두 분단된 현실에서 도피해 버린 곡예사들이다. 이 들은 민족적 현실과는 아랑곳없이 역사에의 참여를 거부하 면서 마치 역사 참여가 곧 비문학적인 행동인 양 귀족 냄새 가 물씬한 화랑의 풍류나 찾는가 하면, 한편 심한 경우 황진 이의 노래를 우리 문학의 상징으로 오인까지 하고 이다. 좀 비약되지만 분단의 얘기가 나온 김에 이 문제를 한 걸 음 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다. 송원희의 단편 <분단>에 나오는 주인공 ‘나’를 보면, 이북에 처자를 두고 월남한 남자와 결혼을 한 아내로서 6·25 때 동생이 의용군으로 끌려가 그 생사를 알 길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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