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무엇이냐? 사실을 올바르게 확보하는 것이다. 보고 들은 대로 전하는 것인가? 아니다. 틀리지 않도록, 균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서 얻은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은 사실을 찾아내 사실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를 확인 하고 재정립하여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인텔리겐치아 2133호, 2014년 7월 22일 발행
한국 언론의 문창극 보도 리뷰 2. 이충환이 쓴 ≪저널리즘에서 사실성≫
사실을 전제로 하지 않거나 사실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은 존재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머리말”, ≪저널리즘에서 사실성≫, v쪽.
당신이 생각하는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사실을 찾아내 사실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를 확인하고 재정립하여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저널리즘이다. 사실성의 사실적 의미는 뭔가? 사실과 사실의 여러 관계를 제대로 확인했는 지, 사실관계를 재정립하고 의미를 부여하 는 과정에서 기본에 충실했는가를 물어야 한 다. 저널리즘의 기본이 여기서 비롯되기 때 문이다. 사실성을 척도로 판단할 때 문창극에 대한 KBS의 보도는 어느 수준인가? 사실을 왜곡 없이 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 라고 볼 수 없다. 보도는 파편적이고 단절적 이었다. 분별력과 맥락성 또한 찾아볼 수 없 었다.
파편과 단절을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는가? 6월 11일 KBS의 관련 보도 제목을 보라. 이런 것들이었다. 1. “문창극, 일 식민지배는 하나님 뜻, 발언 파문” 2. “문창극,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 민족 DNA” 3. “문창극, 선거 국면마다 노골적 정치편향 칼럼 논란”. 제목에서 다분히 어떤 ‘의도성’이 감지되지 않는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1.과 2.를 보라. 전체 발언에서 특정 내용만 잘라 내 의도를 부각하고 있다.
세 번째 제목은 문제가 없는가? ‘노골적’이라는 표현에 가치 판단이 개입되 어 있긴 하지만, 기존에 누적된 팩트에서 크 게 벗어난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약과 아이 캐치라는 제목의 요건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없는가? 보도는 제목과 내용으로 이뤄진다. 제목은 보도 내용에 대한 길라잡이다. KBS의 제목 은 사실의 한 부분만을 부각시킨다. 균형을 잃은 것이고 올바른 길라잡이가 아니다. KBS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줘야 하지 않는가? 시간 제약이라는 방송 뉴스의 특성을 들어 반 론을 구했다. 그러나 문창극 당사자가 응하
지 않아 보도 내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KBS의 해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어야 했 다. 제목 글자 수의 제한이 문제였다면 앵커 멘트로 보충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쨌든 문창극의 발언을 옮겼다는 것, 곧 사 실보도라는 반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 는가? 의도성이 농후한 보도를 사실보도라 옹호할 수 있는가? 맥락을 무시한 채 파편적 사실들 만을 앞세워 진실이라고 주장할 경우 이것은
사실보도가 아니다. KBS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실행한 것인가? 조직 차원의 의도성은 없었을 것이다. 담당 기자의 가치관이 많이 개입되었다고 본다. 발언 전체의 맥락을 소개하기보다는 특정 발 언에 초점을 맞춘 점은 특정 가치를 앞세웠다 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의견 보도가 사실 보도에 앞선 것인가?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언론이 사실 보 도가 아니라 의견 보도, 가치 보도를 더 앞세 우기 시작했다.
사실보다 의견이 보도에서 앞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대중의 불신과 의견의 양극화가 일어난다. KBS의 이번 사례도 그러한 경향을 방증한다 고 할 수 있다. 우리 언론의 보도 사정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면 어떤 단어가 적절한가? 사실이 사라졌다. 의도가 개입된 보도가 ‘사 실’이 되는 형국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실 을 특정 정치 지향에 따라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여론 사정이다.
우리 언론의 사실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어 있 는 것인가? 사실성에 대한 통념이 올바른 정의를 축출하 는 형편이다. 일어난 일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사실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사실성에 대한 통념이다.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사실성이 아니란 말인가? 순진한 생각이다. 월리엄 스티븐슨의 말을 들어 보라. 사실성은 행위와 진술을 단순 보 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성은 파 편적, 단절적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사실 을 왜곡 없이 재현하려는 종합적 노력을 뜻 한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왜곡을 피하려는 별도 의 노력이 필요한가? 그렇다. 사실성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과학 적으로 재현하려는 다면적 노력의 산물이 다. 비록 완전할 수는 없지만 저널리스트들 은 그런 노력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세상에 전달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에게 사실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저널리스트들이 존재하는 근본 이유다. 그 가 만나는 사실은 이미 그 순간 왜곡된 현실 이다. 저널리스트는 사실을 가능한 한 최고 수준에서 왜곡 없이 전달하기 위해 검증하고 종합하고 확인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사실성 추구가 그렇게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누구나 저널리즘을 말하고, 저마다 저널리 즘을 표방하는 시대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 리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 충실해야 한 다. 오늘날 저널리즘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 운 적은 바로 저널리즘의 탈을 쓴 유사 저널 리즘이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 무엇인가? 지난 2000년 미국 CCJ(the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가 저널리스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상 최대 규모의 설문조사 결과가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저널리스 트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무엇이냐는 질문
에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사실을 올바르게 확보하는 것(getting the facts right)”이라고 대답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충환이다.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센터장 이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무엇이냐? 사실을 올바르게 확보하는 것이다. 보고 들은 대로 전하는 것인가? 아니다. 틀리지 않도록, 균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서 얻은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은 사실을 찾아내 사실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를 확인 하고 재정립하여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저널리즘에서 사실성 이충환 지음 저널리즘/보도 2013년 9월 30일 출간 신국판(153*224) 무선 제본, 322쪽 20,250원
작품 속으로
저널리즘에서 사실성 이충환
01 사실성, 그 의미의 바탕
목적은 실현하거나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나 방향을 뜻한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머리말에서 언급했던 미국의 퓨리서치센터와 CCJ의 조사는 지금까지 실시된 저널리즘 관련 연구조사 가운데 가장 지속적이고 조 직적이며 포괄적이었다. 3년 동안 모두 21차례에 걸쳐 연인원 3000여 명이 참석하는 공개토론회를 개최했고, 300명이 넘는 저널리스트들부 터 언론 현장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또한 저널리스트들의 가치 관을 알아보는 인터뷰를 100차례 이상 실시했다. 저널리스트들이 갖고 있는 원칙에 대한 두 차례의 표본조사와 함께 수정헌법 제1조 연구자와 저널리즘 학자와의 회의도 가졌다. ‘우수한 저널리즘을 위한 프로젝트 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를 통해서는 10여 차례에 걸쳐 뉴스 보도의
내용을 연구하고 저널리스트들의 역사를 연구했다. 이렇게 광범위하 게 논의한 결과를 토대로 저널리즘의 기본요소The Elements of Journalism
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처럼 방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내린 결 론의 핵심은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는 진실 추구’라는 것이다(Kovach & Rosenstiel, 2000; 이종욱 옮김, 2003, 11~15쪽). 이처럼 저널리즘의 목적 또는 지향점이 진실이라는 것은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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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저널리즘이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 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 만일 저널리즘이 진실을 외면한 채 거짓된 정보를 사람들에게 제공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된다.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최소한 진실을 추구하는 과 정을 통해 진실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저널리즘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존립과 사회 공동체의 구성과 유지, 그리고 발전 에 기여한다. 진실이야말로 저널리즘의 목적인 것이다. 반면 저널리즘 연구에서 자주 언급되는 객관성, 공정성 등은 엄밀 하게 말해서 진실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방법이나 수단이지 저널리즘 의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사건과 현상,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한 추론 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자 체는 진실을 규명하거나, 또는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저널리즘 의 방법적 차원의 문제이지 결코 저널리즘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목적과 그것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방법이 나 수단을 혼동한다. 일상생활에서의 간단한 예로 ‘돈’을 생각해 보자. 돈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수단 또는 방법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삶의 목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목적과 방법이나 수단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삶의 가치에 대해 심 각한 오류와 혼란을 겪는 일들을 우리는 자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저널리즘 영역에서도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 학자 들조차도 저널리즘의 목적 개념과 방법적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저널 리즘이 추구하는 본령이자 궁극의 목적인 진실이 그것에 도달하기 위 한 수단이나 방법의 개념으로 바뀌어 버리곤 한다. 메릴과 오델은 우려 할 만한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진실이 매우 경솔하게 사용되고 있다” (Merrill & Odell, 1983, p.172; 박영상 편, 1994, 164쪽)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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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닝엄Stanley B. Cunningham도 진실과 관련된 개념들의 혼동 가능성에 대 해서 이미 1990년대 초에 경고한 바 있다. 그는 진실과 유사한 어군(語 群)에 진실성, 정확성, 타당성, 객관성, 진정성, 그리고 정직성을 포함
시키되 오판의 혼동을 경계했다(Cunningham, 1993, pp.152~153). 저 널리스트나 저널리즘 학자, 그리고 그 밖의 그 누구라도 진실이라는 용 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다.
사실과 진실 진실이 저널리즘의 목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이 책을 통해 논의하게 될 사실성은 저널리즘의 방법적 개념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 사실성의 한가운데에 사실이 존재한다. 사실은 사실성의 핵이다. 따라서 사실성 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말에서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은 서로 엄연히 다른 언어적
표현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1999)에 따르면 사실 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한다. 반면 진실은 거짓 이 없고 참되고 바름을 말한다. 한글학회가 편찬한 우리말큰사전
(1991)에서도 진실은 바르고 참됨을 의미하며, 사실은 실제로 있는 일 로 풀이된다. 유럽과 미국 등 영어문화권에서는 사실과 진실의 개념이 ‘truth’라
는 한 단어에 포괄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truth를 “철학적으로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일컬어지거나 사건 그 자체 what is the case라고 설명되는 제안·사고·진술이며,
일반적으로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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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일치하거나 사건 그 자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정의한다.7) 케임 브리지 사전은 이를 다시 사실fact과 속성quality, 그리고 규범principle으 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사실로서의 truth는 어떤 사안에 대한 실 제적 진상the actual fact or facts about matter을 뜻하며, 속성으로서의 truth는 참된 본질the quality of being true을 의미한다. 또 규범의 측면에서는 참이라 고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진술이나 원리a statement or principle that is generally considered to be true를 말한다.8)
이렇듯 사실은 진실을 구성하는 제1 요소
이며, 사실과 진실은 비등가적(非等價的)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저널리즘 영역에서도 사실은 진실을 지지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사실 개념에 대한 이해는 관점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절대주의적 관점에서는 사실을 공간과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상태와 행위라고 규정한다. 반면 상황이나 현상의 현존하는 상 태, 일정한 시간 안에 일어나는 사건은 물론이고 인간의 의식과 사고의 과정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폭을 넓혀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예를 들어 번지는 “자연적 사실이든 사회적 사실이든 인간을 포함한 구체적 사물의 상태나 상태의 변화,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통틀어 사 실이라고 규정한다(Bunge, 1996). 사실이라는 개념은 철학의 오래된 물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 렇다면 사실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우 리의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에 대한 다양한 철학 적 사유를 알아보는 과정을 통해 저널리즘에서의 사실성이 갖는 의미 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다.
7) http://www.britanica.com 8) http://dictionary.cambrid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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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존재론적 의미 사실이 인간의 내밀한 의식작용까지 포함하는 일정한 사태를 의미한다 면 이러한 사실은 어떠한 형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론적 고찰은 이러한 질문에 대 해 유용한 답을 제공한다. 하이데거는 비록 막연하고 모호하기는 하지 만 존재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행동 관계를 이끌며 규정하고 있다고 주 장하면서 존재의 여러 형식들을 ‘있다’라는 실재적 의미와 ‘~이다’라는 서술적 의미로 분류했다(Heidegger, 1976; 박휘근 옮김, 1994). 먼저 실재적 의미로서의 존재는 일상적인 용어로 ‘있는’, ‘있는 것’ 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있다’라고 할 때 이 경우 의 ‘있다’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 즉 실재 reality를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있는’ 것은 전부 ‘존재’라는 포괄적인 개념 속으로 들어올 수 있고, 이러한 존재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없는’ 것, ‘존재 하지 않는’ 것이 된다. 서술적 의미로서의 존재는 ‘~인’, ‘~이다’라는 일상적인 용어로 표 현되는데, 이것은 어떠한 존재의 현상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 잔은 은잔이다”라는 표현은 은잔이라는 존재의 한 특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서술적 의미의 사용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의 구체적인 현 상과 특성들을 자세히 나열할 수 있다(이기상, 2001, 350쪽). 일상적인 언어 사용이나 학문적인 논의와 주제 탐구 등에서 이러 한 두 가지 존재 개념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도 이 처럼 실재적 의미와 서술적 의미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 러한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페르버Rafael Ferber9)는 ‘사물 또는 존재한 것의 연계’를 사실10)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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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규정하면서 이를 다시 실재적 사실과 의미적 사실로 분류했다. 실재 적 사실은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사실로 세분된다. 물리적 사실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과 같은 외적인 감각에 의해 증거를 제시할 수 있 는 사실을 말한다. 하지만 외적인 감각을 통해 모든 사실을 증명할 수 는 없는 일이다. 어떤 사실은 내적인 감각, 즉 느낌, 소망, 생각과 같은 의식과 사고의 작용에 의해서만 입증할 수 있는 사실도 있다. 예를 들 어 실연의 고통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외적인 감각에 의해서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이처럼 내적인 감지를 통해서만 입증할 수 있는 사실 을 페르버는 심리적 사실, 또는 의식 사실이라고 규정했다(Ferber, 1999; 조국현 옮김, 2002, 115~116쪽). 실재적 사실과 다른 성격의 사실도 존재한다. ‘1+1=2’라는 수학적 명제에서 각각의 수는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수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들 존재는 경험이나 감각 을 통해 사실을 입증하거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 것이 다. 이런 것들을 추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추상 개념은 실 재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며, 실재 세계를 추상화한 서술 방식, 즉 언어 속에 존재한다. 페르버는 이를 의미적 존재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의미 적 존재의 연계를 나타내는 것이 의미적 사실이다(Ferber, 1999; 조국 9) 철학자.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명예교수. 저서로는 운동에 대한 제논의 파라독스, 그리
고 시간과 공간의 구조, 플라톤의 선 이데아, 철학자의 무지 혹은 왜 플라톤은 ‘저술 되지 않은 학설’을 저술하지 않았는가?, 라파엘 페르버의 플라톤 선집등이 있다.
10) 페르버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실이 그
러하다’라고 말한다. 세계는 단지 존재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존재한 것들 의 연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도 논리철학 논고(1921)에서 “세계는 전부 그러한 경우들로 이루어져 있 다. 세계는 단지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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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옮김, 2002, 128~130쪽). 따라서 의미적 사실이란 추상적인 표현의 사용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적 사실은 인간이 만드는 것으로 자 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미적 사실들을 만들 면 이들은 마치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설11)은 실재 세계의 일정 부분은 객관적 사실들이 차지하며, 객관 적 사실은 개인의 선호나 평가, 도덕적 태도와 같은 주관적 사실과는 별 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Searle, 1995). 그는 사실을 비제도적 사실 noninstitutional facts인 원초적 사실brute facts과 제도적 사실institutional facts인
사회적 사실social facts로 세분했다(Searle, 1995, pp.2~4, p.27). 원초적 사실이란 그 자체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제도를 필요 로 하지 않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달과 지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인 간이 만든 제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반면 사회적 사실 은 그것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것을 필요 로 하는 사실이다(Searle, 1995, pp.27~29).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 통령이란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의 제도, 미 국의 대통령이란 직책의 제도와 그것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12)
11) John R. Searle. 철학자. 미국 버클리대학교 교수. 심리철학과 언어철학의 대가. 저서
로는 정신의 재발견 , 논리의 기초 , 정신, 두뇌, 과학, 지향성, 표현과 의미, 언어 행위등이 있다.
12) 설은 ‘제도’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규정적(regulative) 규칙’과 ‘구성적 (constitutive) 규칙’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Searle, 1995, pp.27~29). 어떤 규칙들은 예부
터 존재하는 행위들을 규정(regulate)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로의 오른쪽으로 운전하라는 규칙이 있는데 사실 이러한 규칙이 있기 전부터 운전은 존재해 온 것이다. 하지만 어떤 규 칙들은 단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위들을 만들어 낸다. 장기의 규칙은 예부터 존재해 온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장기의 규칙이 있음으로써 장기를 두는 행위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규칙이 바로 구성적(constitutive) 규칙인데 설의 제도는 이러한 규칙 에 기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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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논의에서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 하는 것은 실체나 실 체의 유형이 갖는 속성일 뿐이다. 예를 들어 ‘고통’은 주관적 실체다. 왜 냐하면 고통이라는 존재의 정도는 개인이 느끼는 것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과는 달리 ‘산’은 존재론적으로 객관적이다. 존 재의 정도가 사람이나 정신적인 상태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 재론적으로 객관적인 실체에 대해서 인식론적으로 주관적인 진술을 할 수 있으며, 존재론적으로 주관적인 것에 대해서 인식론적으로 객관적 인 진술을 할 수도 있다.
사실의 인식론적 의미 인식론적 논의에서는 사실성의 중심에 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임일환, 1998). 사실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 에 따라 실재론적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인식론, 즉 관념론적 인식론으 로 나뉘기 때문이다. 실재론적 인식론은 사실을 일정한 사태의 객관적 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하 는,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 관념론적 인식론에서 의 사실은 우리의 인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내적인 사실이며, 무형무 체(無形無體)의 사실이다. 사실의 존재와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서로 독립 해 있다는 명제에 대해 실재론적 인식론은 이를 긍정하지만 관념론적 인식론은 이를 부정한다. 실재론적 입장의 논리는 단순하고도 명백하 다.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관념론적 입장은 우리의 인식 영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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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서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일정한 사태의 존재를 의미하는 사실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인식의 결과로 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실재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식론의 궁극적 과제인 진리를 사실과 사실의 종합(변종필, 1996)으로 이해하는 인식론은 전통적으로 대응이론correspondence 과 정합이론coherence
theory,
그리고 실용주의적 이론pragmatic
theory
theory으로
나뉜다. 보편적인 구분으로 대응이론은 실재론적 입장에 속하며, 정합 이론과 실용주의적 이론은 관념론적 입장에 해당된다(임일환, 1998).
실재론적 인식론: 대응이론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경우 그 말과 글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 지를 따지게 된다. 그리하여 진술된 말과 글이 실제 사실과 일치하면 참이라고 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진술의 일치 여부가 그 명제의 참과 거짓을 가리게 된 다. 이것이 대응이론의 본질이다. 이러한 방법론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가장 익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응이론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로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 는 것은 참”이라고 했다(백종현, 2003, 350쪽). 또 “네가 희다고 우리들이 믿기 때문에 네가 흰 것이 아니라, 네가 희기 때문에 우리들이 희다고 말 하는 것이 진리”라고 했다(Ferber, 1999; 조국현 옮김, 2002, 100쪽). 근대 경험론 철학에서는 그들이 전제하는 실재론적 입장 때문에 대응이론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경험론자들은 주체의 외부에 사물 들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은 주체와 상관없이 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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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실재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주 체 속에 모사된다는 것이다(김미영, 1998). 20세기 이전의 대응이론이 대상object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면 20 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실fact에 기반을 두게 된다(Hirschberger, 1965; 강성위 옮김, 1983). 무어George E. Moore와 러셀Bertrand Russell은 모 사(模寫)의 관점에서 진리를 사실에 대한 관계로 이해했다. 이들은 어 떤 신념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할 때 그 신념은 참이 되며,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그 신념은 거짓이 된다고 믿었다.13) 비트
겐슈타인Wittgenstein도 논리철학논고에서 “모사는 현실과 일치하거나 또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 모사는 정당하거나 또는 부당하며, 참이거나 또는 거짓이다”라고 주장했다(Glock, 1996). 러셀과 비트겐 슈타인은 사실에 기반을 둔 대응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뒷날 언어는 세
계를 반영하고 세계를 기술한다는 논리를 핵심으로 하는 논리적 원자 론 logical atomism으로 발전시켰다. 대응 correspondence이라는 언표는 관점 에 따라 합치conformity, 적합 congruence, 일치 agreement, 조화 accordance, 복 사 copying, 실사 picturing, 지시 signification, 재현 representation, 언급 reference, 충족 satisfaction 등의 개념으로 대치되기도 한다.14) 그러나 대응이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에 직면한다. 대응이론 에서는 진리를 인식과 사실의 일치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실과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 또 다른 사실이 사실임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제외한 또 다른 사실과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무한정 반복된다. 결국 사실과의
13) http://plato.stanford.edu/entries/truth/#CorThe 14) http://plato.stanford.edu/entries/truth/#Cor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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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 여부 확인은 무한순환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또한 대응이론은 감각적 인식이 아닌 수학적 지식이나 전칭판 단15)들을 다룰 수 없다. 대상과 판단, 사물과 지성이 비교될 수 있기 위 해서는 판단 내용이 반드시 감각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어야 하지만 수 학적 지식은 감각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 전칭판단은 일반적 으로 귀납적인 방식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서, 실제로는 개별적인 사실 들과 전칭판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귀납법은 모든 가능한 개별적 사 례들을 전부 확인하고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김진, 2003, 352쪽). 이와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응이론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저 널리즘에서의 사실성 개념을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철학적 기반이다. 사실성 구현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모사와 재현 행위를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성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을 다룸으로써 구현된다. 다시 말해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사실을 다룸 으로써 사실성은 구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 크 침공’을 예로 들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 가 이라크라는 특정 국가를 무력으로 공격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 는 명백한 사실이다. 침공의 배경이나 의도, 밑바탕에 깔려 있는 종교 적인 문제나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는 사실이냐 아 니냐하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침공 그 자체를 사실이 아니라 고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널리즘에서의 사실성은 이처럼 침공이
15) 주개념에 적용될 수 있는 사물의 모든 범위를 긍정 또는 부정하는 판단을 말한다. 이
에 반해 특칭판단은 주어가 가지는 외연의 일부분에 대해 무엇을 주장하는 정언판단을 말 한다. 즉 ‘어떤 A는 B이다(아니다)’는 형식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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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사실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실재하는 현실을 대상으로 기능한 다. 마찬가지로 남극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는 사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FTA 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 미국 버지니아공대에 재학 중이던 한 한국계 학생이 두 정의 권총으로 32명의 학생들을 살해했다는 사실, 2007년 4월 18일 이라크 수도 바그 다드에서 네 건의 연쇄 차량 폭탄 테러로 2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 생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침공’이나 ‘남 극과 북극’, ‘차량 폭탄 테러’라는 사실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현실이 존 재하기 때문이다.
…연안에서 두 시간 거리에서 조업을 하다 뒤집힌 59톤급 102 해승호입 니다. 해경 수상구조 대원들이 하루 종일 배 밑을 드나들며 구조작업을 벌였지만 실종된 선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고 선박은 완전히 뒤집힌 채 배 밑바닥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고 어선은 오늘 새벽 1시쯤, 경남 통영시 홍도 앞바다에서 다른 어선 1 척과 함께 쌍끌이 조업을 하던 중 뒤집혔습니다. 타고 있던 선원 10명 가운데 인도네시아 선원 1명만 구조됐을 뿐 선장 37살 김원진 씨 등 네 명이 숨지고 기관장 49살 최삼규 씨 등 다섯 명은 실종됐습니다. 사고 직후 함께 조업하던 어선 등이 구조에 나섰지만 날 이 어두운데다 조류가 거세 인명피해가 컸습니다. <인터뷰> 구영환(통영해경 특수기동대장):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 해경은 사고 어선이 전갱이와 멸치 등이 가득 찬 그물을 무리하게 끌어 올리다 중심을 잃으면서 전복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녹취> 해승호(101 사무장): “판단 착오인 거 같습니다. 많이 있으면 버 릴 수도 있고 안올릴 수도 있고….” 해경은 실종자들이 조류에 떠밀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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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보고 범위를 넓혀 수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KBS 1TV <9시 뉴스>, 2007년 3월 23일)
위의 TV 뉴스 보도의 진술들도 실재하는 현실과 일치 또는 대응하 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통영 앞바다에서 어선이 전복된 사실, 네 명이 숨지고 다섯 명이 실종된 사실, 해경이 구조 활동 을 벌인 사실, 해경이 실종자 수색을 벌이고 있는 사실 등은 누구도 부 정하거나 부인할 수 없게끔 명백하게 과거에 벌어졌거나 현재 벌어지 고 있는 현실과 일치하는 일들이다. 더군다나 TV 화면은 사고 현장에 전복돼 있는 실재하는 어선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러한 사실들이 허위가 아님을 입증한다. 이처럼 대응이론에서의 진리(진실)는 특정한 언표나 명제가 객관 적인 사실과 일치할 때 비로소 성립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저널리 즘에서의 사실성 역시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실과 일치되 어야 한다. 저널리즘에서의 사실성은 모사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것 이 이와 같이 실재하는 객관적인 사실과 대응하거나 일치할 때 가장 명 확하게 구현된다.
관념론적 인식론: 정합이론과 실용주의적 이론
정합 coherence이라 함은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뜻한다. 어떤 사고나 언 표가 참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는 표상이나 말이 서로 어긋나지 않 아야 한다. 또한 여러 사고나 언표가 인식의 체계를 이룰 때는 체계 안 에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어야 하는데, 언표나 사고 사이의 일관성과 그 것들의 체계 내의 통일성을 사고나 언표의 정합성(整合性)이라고 부 른다(백종현, 2003,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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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합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명제들의 승인된 체계가 참이라고 믿는다(Walker, 1989). 극단적으로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이 실제로 믿는 가장 큰 규모의, 모순되지 않은 체계가 바로 승인된 체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천동설이 이 세상의 진리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우주를 운행하고 있는 별들에 관한 모든 지식들은 천동설 에 기초할 때에만 진리가 될 수 있었다. 천체의 중심은 우리가 살고 있 는 지구이고, 태양을 비롯한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였다. 그런데 이러한 천동설도 실은 더 광대하고 확고한 진리 체계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신적 진리 계다. 당시의 종교관에 따르면 신이 다스리는 지구야말로 우주의 중심 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합이론에서는 어떤 판단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존의 판단 체계에 부합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 그 진위가 결정된다. 수학 적 논리와 같은 추상적인 명제들을 설명할 때 정합이론은 효과적이다. ‘1 더하기 2는 3’이라는 명제는 참이다. 우리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미 ‘1 더하기 1은 2’라는 기존의 명제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1 더하기 2는 3’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판단한 결과 그것 이 기존의 명제와 모순되지 않는 것이므로 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이다. 그런데 실재 세계에서는 ‘1 더하기 1은 2’라는 명제가 반드시 참 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도 직면하게 될 수 있다. 1개의 원소와 다른 1 개의 원소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면 0이 될 수도 있고, 10이 될 수도 있고, 10억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명제는 대응이론으로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대신 정합이론을 통해서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정합이론은 앞서 설명했듯이 이미 승인된 체계를 진리 판단의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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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미 승인됐다고 해서 그러한 기 존 체계가 참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나아가 승인된 체계와는 독립적인 어떤 명 제에 대해서는 진리 여부를 판별해 주지 못한다는 한계 또한 갖고 있다. 즉 기존의 체계와는 다른 이질적인 정보나 내용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원리와 기준이 되는, 다시 말해 이미 승인된 체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 즉 신적인 존재와도 같은 ‘제1 원리’를 찾아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김진, 2003, 352쪽). 또 하나의 문제점은 정합성이라는 개념이 논리적 무모순성 consistency을
필수조건으로 한다는 전제 그 자체에 있다.16) 무모순성의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둘 이상의 믿음이 동시에 참일 수도 있다. 대응이 론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또 다른 사실과의 대응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무한순환의 늪에 빠져 있는 것처럼, 정합이론은 어떤 믿음이 기존의 체 계와 명백히 모순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일단 진리로 인정해야 하 는 무모순의 늪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합이론은 이러한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응이론과 마찬가지로 저널리즘에서의 사실성을 인식론적으로 뒷받침한다. 즉 경험적 인식이나 지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사실 성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해 주는 대응이론과는 달리 경험적 검증이 불 가능한 경우이거나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실성을 지 지한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이 사실성의 대상이 되는 경우보다는 앞서 예로 제시했던 수학적 명제와 같은 추상적 성질의 것이 대상이 될
16) http://plato.stanford.edu/entries/truth/#Coh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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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 이를 확고하게 뒷받침해 주는 철학적 기반인 것이다. 인간의 신 념이나 의식적인 사고 활동, 특히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실과의 대응 이 곤란한 신앙에 관한 문제, 이데올로기적인 논쟁, 경제적 지표에 관 한 사안 등에 관한 사실성을 논할 수 있는 것도 정합이론에 의해 가능해 진다.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의 시가총액이 약 5년 만에 8조 6천억 원 증발해 10% 이상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번지는 9일 현재 ‘강남 4구’(강남·서초·송파·강동구) 재건축 아파트 시가총액이 72조 8천323억 원으로 지난 2007년 1월 대비 8조 6천655억 원(10.6%) 떨어졌다고 밝혔다. 투기지역 내 대출규제를 확대하고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한 2007년 1.11 대책으로 강남권 재건축의 하락세가 시작됐다고 업 체는 분석했다. 구별로는 송파구가 19조 3천561억 원에서 15조 1천800 억 원으로 4조 1천761억 원 내려 21.6% 떨어졌다. 이어 강동구는 2조 3천306억 원, 강남구는 3조 1천559억 원이 빠져 각각 16.5%와 12.9%씩 하락했다. 단지별로는 송파구 잠실동 잠실주공 5단지의 시가총액이 5조 6천573억 원에서 4조 328억 원으로 떨어져 28.7%의 최대 낙폭을 기 록했다. 둔촌동 둔촌주공 4단지(-21%)와 고덕동 고덕시영현대(-21%)도 하락률이 높았다. 반면 서초구는 9천970억 원(4.2%) 상승했다. 또 비강 남권 서울 21개구 재건축 아파트의 시가총액도 5조 6천719억 원에서 6조 182억 원으로 3천463억 원(6%) 증가했다. (≪연합뉴스≫, 2011년 12월 9일)
어떤 물건의 가격, 즉 가치는 엄밀하게 말해서 실재하는 객관적 대 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인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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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믿음에 기초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특정한 기준의 가치를 정하고 그것에 비해 높고 낮음을 따진다. 이는 추상적인 가치나 상태, 또는 상황에 대 한 보다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나 확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과 같은 가치의 사실성은 대응이론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하지 만 현실적으로 저널리즘은 이러한 가치의 문제와 신념에 해당하는 사 안을 무수히 많이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우의 사실성은 정합이론에 의 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응이론이나 정합이론은 저마다 진리를 인식하는 데 한계를 안고 있다. 대응이론은 실재론을 바탕으로 하며 존 재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이론이 될 수 있지만 객관적인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수학 명제와 같은 추상적인 명제에 대해선 참과 거짓을 가리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반면 정합이론은 대응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추상적인 명제의 참과 거짓을 드러내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그 역시 상위의 정합 체계를 먼저 진리라 고 인정해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실용주의적 이론은 이처럼 대응이론이나 정합이론이 갖고 있는 한계들을 극복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진리 를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이와 같은 철학적 논의는 퍼스Charles S. Peirce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어떤 대상에 대해 갖게 되는 관념의 의미를 그 대상이 직접 가져오게 될 효과로부터 얻으려고 했다. 퍼스에 따르면 어 떤 것을 ‘단단하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유리를 긁을 수 있음, 구 부러지지 않음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러한 실천 적 효과야말로 단단함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전부다. 퍼스의 실용주 의의 격률Pragmatic Maxim은 이처럼 개념의 의미 내용을 대상이 초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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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결과로 생각하고자 하는 원칙이다. 실용주의의 사고방식은 실제 적인 결과의 총계가 모든 일의 의미라고 받아들인다(Menand, 1997; 김 동식 외 옮김, 2001, 71~96쪽). 실용주의적 이론에 따르면 사실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 지 못한다. 사실과 사실의 종합이라는 뜻에서의 진실(진리)도 마찬가 지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실은 실제 생활에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거나 유용한 효과를 창출할 때에만 진리가 되는 것이다. 퍼스에 의해 시작된 실용주의적 이론을 전 세계에 확산시킨 철학 자는 제임스William James다. 제임스는 진리는 관념의 한 속성으로서 실 재와의 일치agreement를 의미하며, 허위는 실재와의 불일치disagreement를 의미한다고 강조했다(James, 1975). 일단 여기까지는 대응이론의 그것 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제임스가 주목하는 것은 명제 그 자체가 아 니라 명제가 의미하는 표상이나 이념인데, 참된 표상이라 함은 효력이 생기도록 하고 증명할 수 있는 표상을 말한다. 어떤 표상이나 이념은 결과를 통해 유용성이 입증됨으로써 진리가 된다. 앞서 제임스가 말한 ‘일치’도 대상 또는 사실과의 관계가 아니다. 표상 또는 사유가 갖는 실 천적인 결과, 즉 유용성(有用性)과의 관계다. 또 실재는 사실이나 대상 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진리의 총합이다. 관념의 의미도 그 대상이 초래하는 결과에 있다. 제임스에게는 ‘신’이라는 관념도 신을 믿음으로 써 사람들이 용기를 갖게 되고, 현실의 삶에 보다 충실하게 될 때 비로 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은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왔다. 그 래서 “여기가 서울입니다”라고 답했다. 주어진 공간적 상황에서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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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울입니다”라는 답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그 대답이 설사 사실 이라고 해도 질문에는 합당하지 않다. 이처럼 사실이 진리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 인간생활이나 행위에서의 유용성을 떠나 서 존재하는 진리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실용주의적 이론의 핵심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도덕적 가치관도 실용주의적 이론에 근거해 그것이 참임을 설명할 수 있다. ‘간음하지 말라’, ‘남의 물 건을 훔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등등의 도덕률이 진리인지 아 닌지를 대응이론이나 정합이론으로는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치시켜야 할 대상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독립된 하나하나의 명제에 대해 다 른 도덕률과의 정합 여부를 따지기도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률을 준수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에 모두 이롭거나 긍정 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도덕률의 진리 여부는 실용주의적 이론이 제공하는 기준에 의해서만 판단 가능한 것이 된다.
현대중공업 노사가 건전한 노사 관계 속에 기업의 위상을 더욱 발전시 켜 나갈 것을 선포했습니다. 노사 상생만이 세계 1위의 기업 경쟁력을 유지하고 사회 안정에도 기여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한 것입니다. <인터뷰> 민계식(현대중공업그룹 부회장): 지속성장을 통해 지역사회 와 공헌…. <인터뷰> 김성호(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기업의 번영이 곧 기업에 관 계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KBS 1TV <9시뉴스> 2007년 3월 22일)
도덕률의 경우와 같이 위의 기사에서 다루는 내용들도 대응시킬 수 있는 대상을 찾기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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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명제들과의 정합성 여부를 따지기도 곤란한 사실들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사 내용들은 모두 거짓인가? 우리는 위의 기사에서 다루는 내용 이 실현될 경우 사회에 이롭게 작용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기사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과거의 사례들과 경험들로 미루어 보아 위 기사 속 내용들이 실현될 경우 사회 적으로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 다. 그러한 측면에서 위의 기사는 보도에서 사실성을 갖게 되는 것이 다. 그리고 우리가 바람직한 것, 실용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사의 내용은 곧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진리가 된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이론에 대해선 유용성이라는 진리의 기준이 너무 가변적이라는 비판이 늘 따라다닌다. 어떤 사람에게는 쓸모가 있 고 도움이 되어도,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쓸모없고 심지어 해로운 것 이 될 수도 있다. 특정인에게는 진리이지만 또 다른 특정인에게는 진리 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특정한 시기에는 유용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처한 상황이 바뀌면서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변할 수 있다. 반 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인용한 기사의 내용, 즉 노사화합의 필요성과 당위성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당장 우리의 현대사만 보더라도 노사의 화합이라는 것이 한때는 노동자들의 권리 박탈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고,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정권의 유지를 위해 악용될 때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 보도의 사실성은 궁극적으로 부 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의 노사화합이란 진보하는 역사 의 차원에서는 결코 우리 사회에 유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실용주의적 이론은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적용 가능한 보편성이라는 진리의 제1 요 소를 지나치게 소홀히 다룬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결과로서의 효과나 성공에 대한 관점과 해석도 보는 이에 따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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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질 수 있다는 점도 중대한 흠결이다(Bollnow, 1975; 백승균 옮김, 1994, 37쪽).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효과가 있다고 볼 수도 있고, 효과 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성공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성 공이냐는 판단 기준은 실은 매우 모호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 한 기사의 경우 노사화합의 결과가 가져오는 성공에 대한 평가도 관점 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내재적 실재론 : 퍼트넘의 융합
퍼트넘17)은 마음이 세계를 단순히 모사해 세계가 한 개의 참된 이론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는 실재론적 견해를 배격하는 동시에 마음이 세계 를 꾸며낸다는 상대주의적 관념론도 지양한다. 그가 제시한 ‘내재적 실 재론’은 마음과 세계가 공동으로 마음과 세계를 구성한다(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10쪽)는 절충주의적 관점을 유지한다. 그는 “사실과 가치 간의 그 악명 높은 이분법이 생긴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 로는 진리모사설(실재론)과 주관주의적 진리설(관념론) 간의 이분법 때문이기에 사실과 가치 간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진리 문 제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고치는 것 뿐”이라고 강조한다. 나 아가 “진리를 모사론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면 우리들 스스로와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
17) Hilary Putnum. 철학자.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라이헨바흐에게 과학철학을 배우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콰인에게 현대논리학을 배웠다. 노스웨스턴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 에서 강의했으며, MIT와 하버드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했다. 저서로는 Philosophy of Logic(1971), Mind, Language and Reality(1975), Realism and Reason(1983), Representation and Reality(1988), Words and Life(1994), The Threefold Cord: Mind, Body and World(200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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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11쪽). 퍼트넘이 비판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세계가 인간의 마음으로 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하게 고정된 양의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다. 세계에 대한 참되고 완벽한 기술은 오직 하나뿐이며, 진 리는 말이나 생각을 나타내는 기호와 외적 사물 간에 성립한다는 일종 의 대응 관계에서 찾아진다. 그는 이를 ‘외적external 관점’이라고 부르는 데 외적 관점은 마음도 물리적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가치도 사실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감각 경험도 물리적 사건과 동일시될 수 있으며, 도덕이나 가치 같은 것들도 결국 사실의 범주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퍼트넘은 지적한다 (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95~96쪽). 이에 반해 그가 옹호하는 ‘내적internal 관점’은 세계에 대한 하나 이 상의 참된 이론 또는 기술이 있으며, 진리는 마음에서 독립되어 있는 사 태들과의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 상호 간에, 또는 믿음과 믿 음 체계 속에 구현된 경험 간에 성립되는 일종의 이상적 정합성ideal coherence에 있다고 보는 견해다.
즉 신적 관점과 같은 유일의 관점이란
없으며, 다양한 관심과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기술하고 이론을 창출해 내는 인간들의 여러 관점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Putnum, 1981; 김효 명 옮김, 2002, 96쪽).18) 퍼트넘은 관념론의 극단적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체적 상대주 의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전체적 상대주의의 입장은 단 하나의 세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하나의 진리만 있는 것도 아니며, 세계를 보는 시
18) 퍼트넘에 따르면 정합이론, 비실재론, 검증주의, 다원론, 실용주의 등은 내적 관점이
적용되어 왔던 이론들이다(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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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과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세계, 다양한 진리가 가능하다고 본 다(Fay, 1996). 진리의 객관성을 부인하면서 일체의 사고방식과 일체 의 관점을 모두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어떠한 객관적인 적합함 fit의 개념도 부인하는 것이 전체적 상대주의의 전체적인 목표이고 본질
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진리를 객관적인 정당화의 조건에 의거해서 논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Vision, 1988). 그러나 퍼트넘이 보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일정한 종류의 객관적인 옳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의 사유 전체에 이미 전제로 되 어 있다는 사실을 전체적 상대주의자들은 간과했다. 겉으로는 매우 유 연한 관점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설명 하는 데 대단히 유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 상대주의는 어떤 입장 을 취하면서도 어떤 입장도 우선해서 지지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 게 된다는 것이다. 퍼트넘의 내재적 실재론에 따르면 진리란 실재 또는 사실과의 대 응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판가름해 줄 수 있는 일종의 이상화된 합리적 수용 가능성rational acceptability이라는 기준에 의해 규명된다(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96쪽).19) 또 어떤 것이 합리적인지 여부를 가려주는 것은 이론적인 믿음 상호 간의 정합성, 경험적인 요소가 적은 믿음과 경험적인 요소가 많은 믿음 간의 정합성, 경험적인 믿음과 이론적인 믿음 간의 정합성 등이다(Putnum,
19) 퍼트넘에 따르면 정합성과 합리적 수용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심리 작용과 밀
접하게 관련돼 있는 것으로서 가치 중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 두 개념에 의해서 객관성 이라는 개념도 정의될 수 있는데, 이때의 객관성도 마찬가지로 ‘우리’에 대한 객관성이지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객관성은 아니다. 객관성과 합리성이란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서 어떤 절대적인 성질의 것은 아니다(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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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김효명 옮김, 2002, 104쪽). 퍼트넘은 이처럼 사실과 합리성을 상호 의존적인 개념으로 본다. 사실이란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으로, 사실과 비 사실을 구별하는 척도는 어떤 것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퍼트넘이 말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은 실은 매우 불 투명한 개념이다(원만희, 2004, 198쪽). 그 자신도 “합리성이란 쉽게 설 명되지 않는 개념 중의 하나”(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177쪽) 라고 시인한 바 있다. 전후 문맥상으로는 가치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어떤 모사가 참이라는 결정은 우리 가 어떤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고, 또 우리가 가진 가치 체계를 드러내주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존 재는 사실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 면 모든 사실에는 가치가 실려 있고, 모든 가치는 사실을 싣고 있다 (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216쪽, 329쪽). 퍼트넘은 잔디와 인간을 사례로 내재적 실재론의 합리성이 갖는 해석상의 관용성과 선험성(先驗性)을 설명하고 있는데, 저널리즘에서 의 사실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한 측면이 있다. 퍼트넘은 ‘잔디’를 예로 들면서 서식하는 장소에 따라 색깔과 모양 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사는 곳에 따라 잔디에 대한 서로 다른 지각적 원형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잔디가 식물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고 하더라도 이번엔 ‘식물’ 이라는 개념 자체가 또 문제가 된다. 200년 전의 식물이라는 개념은 광 합성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오늘날의 식물과는 엄밀히 말해 다른 존 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200년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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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와 오늘날의 잔디를 동일시해 주는 해석상의 관용성이라는 것이다 (Putnum, 1981; 김효명 옮김, 2002, 199쪽). 이러한 퍼트넘의 합리성이 갖는 해석상의 관대함은 오늘날 특정 한 지역이나 특정한 인구들, 그리고 특정한 이념의 범위 내에서 기능하 는 저널리즘이 지역과 인구, 그리고 이념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이해 가 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뒷받침한다. 이는 저널리즘에서의 사실성에 대한 설명도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도 하다. 또한 퍼트넘의 합리성이 갖는 선험성도 같은 맥락에서 저널리즘 과 저널리즘에서의 사실성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조상들, 과거의 우리들, 현재의 우리들, 다른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우 리가 똑같은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기 본적인 개념들 덕분이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서 가졌던 개념들이 시대 에 따라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인간에 대해서 동일한 지 시, 동일한 개념들을 사용해 왔다는 뜻이다. 상호 해석이 가능할 정도 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대상과 개념들뿐만이 아니다. ‘사리에 맞는다’든지 ‘자연적’이라는 등의 생각에도 해당된다(Putnum, 1981; 김 효명 옮김, 2002, 200쪽). 우리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풍 속과 습성을 접하고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나타내거나 인상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행위가 이러한 기본 개념의 범위를 비상식적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널리즘에서의 사실성에 대한 이해도 모사하거나 재현하고자 하 는 어떤 것에 대한 우리들의 이러한 선험성을 바탕으로 한다. 선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실성의 구현으로 드러나는 내용적 의미들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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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들이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실재론과 관념론의 융합을 꾀하는 퍼트넘의 내재적 실재 론은 저널리즘의 사실성을 두 개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동시에 지지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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