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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한국 영화 역사 김미현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한국 영화 역사 쓰기

영화사 쓰기 방법론 영화사의 재인식

영화 역사는 연구 방법의 시간성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한다. 영화가 시간을 경과하며 어떻게 기능해 왔는지를 다루는 것이 영화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알렌·고메리, 1997, 17 ∼48). 영화사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서술하는 것은 다 수의 역사들이 서술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field)을 펼치 는 것이다.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시대의 의미는 ‘역사적 특정성(singularities)’에 따라 복수의 해석이 가능하며 사 회적, 산업적, 문화적, 미학적 접근 방법에 따라 다양한 이 야기가 구성될 수 있다. 영화 연구에서 영화사가 부상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70년대 전성기를 누린 기호학, 정신분석학, 알 튀세르적 마르크시즘, 후기 구조주의 등에 의거한 영화 이 론이 ‘거대 이론(grand theory)’이라 비판 받으면서, 미 시정치학적 관점에 따라 탈식민주의(post colonialism), 페미니즘(feminism), 문화 이론(cultural studies) 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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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연구방법이 분화한 맥락과 함께한다. 새로운 역사적 접근 방법은 수정주의 역사학(revisionist historiography) 을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 시기, 감독을 발굴하고 재해석 의 공간을 열어줌으로써 영화사를 새롭게 기술했다. 관습 적인 역사 쓰기에 대해서는 과거의 사실을 의심 없이 재생 산하면서 이론적 반성은 하지 않았던 문제가 지적되었으 며, 역사 연구가 자료의 기록더미에서 ‘중요한’ 사실을 추 려 내어 연대기적 질서를 구성하는 데 제한되는 것이 아니 라는 인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과 거를 재현하는 것을 불가능할 뿐더러, 영화 담론은 당대의 사회제도에서 생산된 권력 관계와 질서의 산물이기 때문 이다.

영화와 집단적 기억, 그리고 역사

영화와 역사학의 만남은 크게 두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영화에 나타난 역사성, 집단적 기억에 대한 관심이 다. 영화의 집단적 기억에 대한 관심은 1974년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가 ‘영화와 기억’을 주제 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장 나르보니(Jean Narboni) 등과 가졌던 일련 의 인터뷰에서 비롯했다. 이들은 역사영화가 대중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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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조작하고 투쟁력을 통제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푸코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역사물’이라 칭해진 장르를 통해 대 중문화에서 ‘역사 쓰기’가 진행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몇 편의 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과 나 치시대 프랑스의 정치를 조작함으로써 당시에는 진정한 투쟁이 없었다고 기억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대중문 화의 역사 재현은 민중이 ‘기억해야 하는 것’만을 보여 줌 으로써, 기억을 통제하고 저항의 동력을 차단하기 때문에, 현대의 투쟁은 대중의 기억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Foucault, 1977, 18∼36). 1977년 에든버러영화제는 영화의 역사·생산·기억 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Edinburgh Film Festival), 같은 해 영화잡지 ≪스크린≫으로 지면을 옮겨 심화되었다. 영화 이론은 연구 방법론의 시간적 차원을 회복해 특정 시기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관계에 집중해야 하며(Mark Nash & Steve Neal, 1977, 77∼91), 역사영화 가 대중이 ‘기억해야 할 것’만을 보여 주고 있다면, 기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전유(appropriation) 하는 투쟁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역사학계의 일부는 영화를 역사의 기록으로 받 아들였다. 영화는 광학적 기록과 정보를 보존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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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들거나 관람한 사람들의 야망, 강박 그리고 좌절 의 기록이고, 특정 시기의 심리, 사회, 역사 연구로 가는 길 을 열어 주는 질료(raw material)다. 마르크 페로는 소비에 트 무성영화 시기의 영화들에서 그 시대의 심리 구조, 그 리고 ‘망탈리테(mentalité, 그 시대의 정신을 다른 시대와 구분하고 본질적인 차이와 심성적 한계를 결정하는 물질 적 구조를 의미한다)’를 찾아내면서, 1917년 소비에트 혁 명에서 뉴스릴에 나타난 시위 행렬을 통해 시위에 나선 혁 명의 주체 세력이 볼셰비키의 선전과 달리 대부분 ‘낫을 든’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새로운 역사 쓰기

새로운 역사 쓰기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스타일을 구분하 고 구조화하는 방식(영화사를 스타일의 역사로 파악하며 영화의 형식 규범에 시대의 구조가 내재해 있다는 전제에 서 출발한다)과 인종지학적(ethnographic) 연구(1980년 대 이후에는 페미니즘의 관객 연구가, 그 이후에는 탈식민 주의론이 영화사와 만나면서 발전시켜 왔다)로 대표된다. 전통적인 역사서와 연구 성과는 의심받았고 새로운 사 실과 가설이 발굴되었다. 초기 영화사 연구는 많은 성과 가 집중되었던 시기다. 초기 영화사를 할리우드 고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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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의 전사(前史, pre-history)로 인식하던 것에서 독 자적 질서를 부여하고, 초기 영화가 고전적 할리우드 스타 일과 시공간의 논리, 내러티브 전략, 장르 구성, 영화와 관 객 사이의 관계에서 차이가 있었음을 밝혔다. 고전적 할 리우드 영화가 관객을 디제시스(diegesis) 안에서 환영을 즐기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초기 영화는 관객의 시각을 자극하고 긴장시키며, 불안과 긴장을 일으키는 공 격적이고 전시하는 형식을 보인다는 것이다. 1907년 이전 미국 영화의 주요 장르는 트릭영화, 꿈 영화, 추적영화, 멜로드라마, 소극 등이었고 이완된 구조 를 가지고 있어서 늘이거나 줄일 수가 있었다. 어떤 영화 는 반복적인 쇼트로 구성되어 있어서 기본 골격만 유지하 면 변형이 가능했다(John Fell, 1983; Elasaesser & Barker eds., 1991). 노엘 버치는 초기 영화의 이러한 형식적 특징 을 ‘원시적 재현 양식(primitive mode of representation)' 이라고 명명한 바 있었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제도적 재현 방식(institutional mode of representation)보다 느 슨하고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상호 텍스트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Noël Burch, 1979). 페미니즘 관객 연구의 측면에서 접근한 영화사 연구도 활발하다. 패트리스 패트로(Patrice Patro)는 1920, 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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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독일 바이마르 시기의 거리 멜로드라마(street film)에 주목한다. 이 시기 영화가 남성 주체성의 위기를 반영하 고 있다는 그동안의 연구가 인지하지 못한 측면을 비판하 고, 거리영화가 여성 관객에게 호소하는 형식과 여성의 욕 망, 판타지를 그려 내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1989). 이 밖 에도 여성 감독을 발굴해 영화 생산과 소비를 여성의 관점 에서 재해석한 연구들도 있다. 새로운 영화 역사 쓰기는 영화가 대중매체의 일부로서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을 재구성하고, 역사적 사실을 웅변하기도 하며, 새로운 의미와 사실을 생산한다 는 점을 입증했다. 현대에서 영화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비공식적 역사 이상의 것이 되었고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 새로운 영화 역사 쓰기는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와 영화 이론의 성과를 결합한 역사를 지향하고 있다. 1970년대의 이론은 그 막대한 파급력과 의미에도 불 구하고 비싼 대가를 치러 왔고 역사연구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대두된 역사 연구도 여전히 문제점을 지니 고 있다. 역사 쓰기에서 개별 공간의 연구가 거대 담론의 모든 실수를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어 온 것은 아닌 가 하는 점이다. 새로운 역사쓰기와 역사적 특이성에 대 한 강조가 이론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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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역사쓰기는 역사의 영역에서 역사와 이론의 결합에 대 한 고민이면서, 보편성의 층위와 개별적 연구가 어떻게 만 날 것인가에 대한 길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한국영화사 연구의 흐름 한국영화사 연구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부터 많은 진전 을 이루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노력으로 옛 한국영화 를 관람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으며, 원로 영화인들 의 구술 기록과 신문기사, 잡지 등을 정리한 자료집도 발 간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영화가 발굴되어 작품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여러 분야의 아카이빙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역사적 자료에 대한 접근이 용 이해 졌다. 현대 한국사회의 성질과 문학, 연극, 건축, 만 화 등의 대중문화와의 관계를 다룬 인접 분야의 연구도 활 발해지면서 ‘한국 영화 역사’가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이 풍 성해지고 있다. 역사 연구는 비록 폐허의 잔해에서도 시대의 풍경과 담 론을 구성하는 작업이지만 1차 사료의 발굴과 복원은 무 엇보다 중요한 토대다. 영화사가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여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 고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역동적인 작업이라는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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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한국영화사 연구의 소중한 진전이다.

󰡔한국 영화 역사󰡕의 관점 󰡔한국 영화 역사󰡕는 역사학계와 한국 영화사 연구의 성과 를 결합하고 한국 영화를 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소개하고 자 기획했다. 한국 영화사는 어떻게 인식하고 접근하는지에 따라 다 양한 관점과 사실을 서술할 수 있다. 󰡔한국 영화 역사󰡕는 한국 영화가 말하고 있는 시대의 기록이며, 그 영화를 생 산하고 소비한 시대의 대중심리와 사회구조에 대한 성긴 프레임을 짠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는 식민지 조선에 양풍(洋風)과 함 께 도래해 대중문화의 꽃으로 자리 잡았다. 1900년경에 첫 상영이 이루어진 후, 1910년대 극장가의 형성과 함께 전파되었고, 1920, 1930년대에 걸쳐 관람이 보편화하 면서, 가두(街頭) 모던 생활의 일부로 대중에게 환상을 제공했다. 이에 비해, 한국 영화 제작 역사는 1919년 <의리적 구 토(義理的仇討)>가 연쇄극(kino-drama)으로 만들어지고, 1923년 <월하의 맹서>가 완전한 극영화로 공개되면서 시 작되었다. 영화가 보편화된 1934년 조선에서 상영된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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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편수 중 조선 영화의 비율은 4%에 불과하며, 1940년 에서야 국민 1인당 관람횟수(외국 영화 포함)가 1회에 도 달한다. 해방 후 1950년대 중반까지도 기록영화와 뉴스 외의 장편 극영화 제작은 미진했다. 한국 영화가 산업적 으로 융성했던 196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만 한국 영화 점유율이 50% 내외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이외 시기에는 15.9(1993)∼40% 사이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 한국 영화 역사를 한국인이 한국 자본으로 제작 하고 한국 문화와 정서를 다룬 작품들의 기록으로 이해한 다면 그 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서양에 기원을 둔 기계 복제의 예술이며,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하는 산업일 뿐 아니라, 상영 지역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매개하는 문화다. 또한 영화 역사는 그 기원부터 국제적으로 유통되어 온 제작과 소비의 순환 고리를 구성하고 있어서, 민족 국가마 다 차이가 있으면서도 유사성을 공유하는 장르적 군집을 형성하곤 했다. 일례로 196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과 홍콩 의 검술영화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검객 영화 제작을 촉진해 장르의 지역화가 이루어졌다. 동일한 문화 상품을 소비하고 제작함으로써 세계적 보편성을 매 개하면서 동시에 각 민족 국가의 지역성을 표현해 온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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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와 같은 현상이 세계 영화 역사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한국 영화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근대 의 형성과 외래의 수용을 포함한 사회문화사이자, 민족 영화 제작과 소비의 장이면서, 전 지구적 보편성을 담지 한 시간의 흐름이다.

시기 구분 기준과 주제 󰡔한국 영화 역사󰡕는 현대사와 한국 영화의 시기별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든 역사 기술이 존재 했던 것들을 듬성듬성하게 재현한 것일 뿐이지만, 이 책 에서는 한국 영화의 세세한 제작 기록과 사실은 상당 부 분 누락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지면을 변명삼아 각 시기 를 다른 시기와 구별하는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싶었 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역사󰡕의 시기 구분은 이제까지 기술해온 것 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역사의 시간성은 다양한 층위와 단면을 지니는 연속적인 흐름이며, 시기 구분은 역사의 불 연속적인 단절과 질적 변화가 일어난 문턱을 표지하는 구 분점으로 인식했다. 일제 식민지 시기는 활동사진과 극장가의 형성(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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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식민지 대중문화와 무성영화(1923∼1935), 유성영 화와 근대의 삶 그리고 군국주의(1935∼1945) 등 세 부분 으로 분류했다. 활동사진 상영 시기, 조선 영화 제작 출발, 그리고 유성영화의 시작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영화 제작 형식의 전환, 일제의 식민 정책, 근대 도시문화 형성 이 어떤 현상으로 발현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보았다. 무성 영화는 <청춘의 십자로>(1934) 단 한 편만 보존되어 있어 영화의 특징을 통해 다른 방식의 시대 구분을 제안하기 어 려웠던 한계도 작용했다. 해방 후 1945년부터 1957년까지를 ‘정치적 격변기’ 라는 주제로 묶은 것은 다른 한국 영화사 책들과 차이가 있다. 이 기간은 일반적으로 1954년까지 묶이는 시기로 1955년 <춘향전>의 상영을 기점으로 한다. 그러나 1955 년까지 지배적인 장르는 전쟁영화였고, 1958년에 이르러 서야 극영화 중심으로 영화계가 재편되기 때문에, 영화의 기록성이 우선하던 시기로 보고 이 기간을 연장했다. 1958년에서 1962년을 ‘미국 문화, 근대화, 그리고 가족’ 이라는 주제로 별도의 시기로 분리한 것은, 이 시기에 한 국 사회와 영화 형식이 어떤 길을 갈지에 대해 여러 가능 성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우리 영화는 1960년 4·19 혁명 과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의 격변기에 가족 드라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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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한 가족 이야기를 생산했고, 1963년에서 1971년까지 는 영화정책이 체계를 갖추고 산업을 형성하며 장르영화 중심의 제도화 시기로 진입했다. 한편, 1972년에서 1979 년까지는 유신 독재 체제가 사회 전반의 규율과 분위기를 지배하던 시기이다. 한국 영화의 경향은 시대의 변화를 여러 징후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한국 영화는 현대로 진입하는 차이를 가 시화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지속되던 영화 정책과 구조 가 변화했고, 금지되었던 소재와 표현 방식이 가능해졌으 며, 사회 민주화에 화답하는 영화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 다. 1990년대에는 대기업 자본의 영화 투자와 미국 직접 배급이 정착했고, 소비 문화를 직접 반영하는 기획 영화와 함께, 2000년대를 맞이하는 작가 감독들의 데뷔작이 출현 했다. 2000년대 한국 영화의 성취는 정책 지원과 산업 성 장에 근거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상업적 가능성과 작가 성을 버무린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한국 영화가 당대의 현실과 어 떻게 조우했고, 무엇을 드러내었는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사회문화적 변화와 이를 반영하거 나 예감하는 정책적, 산업적, 기술적 변화를 중요하게 다 루었다. 영화 정책과 산업의 변화가 미치는 영화의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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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과 장르, 그리고 담론에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핵심적 으로 요약하는데 집중했다. ‘코리안 뉴웨이브’나 ‘작가주 의’ 감독의 영화를 등장한 시기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시 기 구분을 벗어나는 내용을 한 시기에 통합 서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의 영화 역사 오늘날의 역사 쓰기(historiography)는 어떤 단일한 관점 도 부정한다.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식민지 시기, 다 양한 욕망이 투사된 스크린과 관객의 역사, 민족에 대한 관념 등에 구체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당대의 심리 구조, 욕 망, 환상에 대한 다수의 역사를 펼치려고 한다. 역사 서술 은 영화사의 가설을 검토하고, 영화를 분석하며, 정치학 과 영화 사이의 접합점을 밝히는 현실의 실천이다. 역사 적인 작업은 불변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 제도가 우연적 인 것임을 보여 줌으로써 현재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 임을 밝혀내고자 한다. 한국 영화 역사 쓰기는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 (localization)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시대에 한국 영화 를 정의하는 것부터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한국형 블록버 스터는 할리우드의 액션 장르를 ‘공개적’으로 차용해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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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역사와 감정을 버무렸으며, 각 국가와 공동 제작 영화 는 다양한 출처의 자본, 문화, 인력이 공동 작업한 혼종 (hybrid)의 상품을 내놓고 있다. 국가가 영화 제도를 규율 하고 통제하는 시기는 멀리 지나고 있으며, 영화 산업은 한국 영화가 소재와 표현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달성할 만큼 성장해 있다. 한국 영화가 하위 문화로 간주되던 역 사도 지나갔다. 그 자리는 산업화에 따른 다양성의 문제, 지속 성장을 위한 과제, 글로벌화에 대한 대응 등의 화두 가 대신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한국 영화를 둘러싼 담론은 그 형태 를 달리할 것이고 역사가 되어 간다. 영화 역사 쓰기는 시 간에 대한 그칠 수 없는 저항이자 재현이다. 한국 영화사 는 현실의 역동성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쓰여질 것이다.

* ‘영화사 쓰기 방법론’은 김미현(2003)을 요약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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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미현(2003), 영화, 역사와 관계 맺기, 󰡔영상예술연구󰡕 3호, 9∼28쪽. 로버트 알렌 · 더글라스 고메리 저, 유지나 외 역(1997). 󰡔영화의 역사: 이론과 실제󰡕. 까치. 마르크 페로 저, 주경철 역(1999). 󰡔역사와 영화󰡕. 까치. Edinburgh Film Festival(1977). History/Production/Memory.

Edinburgh Magazin(no 2). John Fell(1983). Film Before Griffith. Berkeley &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Mark Nash & Steve Neal(1977). Reports from the Edinburgh Festival, Film: ‘History/Production/Memory.’ Screen 18. 4(Winter, 77/78), pp.77∼91. Noĕl Burch(1979). Film’s Institutional Mode of Representation and the Soviet Response. October 11(Winter, 1979), pp.77∼96. Patrice Petro(1989). Joyless Street: Woman & Melodramatic

Representation in Weimar Germany. Princeton University Press. Thomas Elasaesser & Adam Barker(eds.)(1990), Early Cinema:

Space Frame Narrative. B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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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한국 영화 역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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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활동사진과 극장가의 형성(1895∼1923)

02

식민지 대중문화와 무성영화(1923∼1935)

03

유성영화와 근대의 삶, 군국주의(1935∼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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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해방과 한국전쟁, 정치적 격변기(1945∼1957)

29

05

미국 문화, 근대화, 그리고 가족(1958∼1962)

37

06

영화 정책과 장르영화(1963∼1971)

47

07

유신시대와 청춘 문화(1972∼1979)

57

08

민주화와 전환의 시대(1980∼1989)

67

09

영화 산업 구조 변화와 제작 경향(1990∼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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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업과 상업적 작가주의(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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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활동사진과 극장가의 형성 (1895∼1923)

1900년대 초부터 개화기 조선에 활동사진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외화 프로그램을 상영하면서 진고개(명동과 충무로 지역)와 종로 일대에 극장가가 형성되었고, 활동사진은 근대 생활과 신문물에 익숙한 계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919년 신파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제작되기 전까지 약 20년간 외화를 감상하는 것이 조선의 영화 문화였다.


근대의 여명 개항 이후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 간 철도가 놓였고, 1901년 8월부터 전기가 설치되면서 서대문에서 홍릉까지 전차가 운행되었다. 1902년 서울 ‒인천 간 전화통화가 개 통되었고, 1911년 황실에 자동차가 들어왔다(김진송, 1999, 246). 주로 일본을 통해 서양 물건이 수입되면서 양 풍(洋風)이 일상화하고 새로운 문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 했다. 1883년 ≪한성순보≫를 시작으로 신문, 잡지, 라디 오, 영화 등의 대중매체가 확산되었고, 근대의 생활에 익 숙한 인텔리겐차, 월급 생활자, 학생과 같은 새로운 계층 이 형성되었다. 도시 대중의 존재는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가능성의 조 건들을 만들었다. 영화는 값싸고 재미있는 화려한 볼거리 로 소설과 연극에 이어 대중을 사로잡았다. 전근대적 삶 이 여전히 민중의 일상에 자리한 상태에서 근대화, 도시화 의 풍경이 동시에 잡거(雜居)하는 비동시적인 것들의 공 존이 시작되었다.

활동사진의 상영 조선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상영 기록과 그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뤼미에르 형제(Lumière Brothers)는 1895년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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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을 시작한 후, 각 국에 촬영기사를 파견해 현지 풍경 을 촬영하고 상영하는 방식으로 전 세계에 영화를 전파했 다. 영화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 이라 판단해서였다. 그 결과 세계 주요 도시에서 영화가 빠르게 공개되었고, 일본에서는 1897년 2월 첫 대중 상영 이 이루어졌다. ≪황성신문≫ 1903년 6월 23일자 광고는 ‘동대문 한성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국내와 구미 각국의 절승한 풍경을 찍은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관람 시간은 일요일과 비오 는 날을 제외한 저녁 8∼10시까지이며, 입장료는 동화 10 전’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1887년 상영에 대한 <상록 수>의 작가이자 감독인 심훈과 이구영 감독의 증언, 영화 사 연구자인 이치가와 사이(市川彩)의 기술 등 이보다 앞 서 조선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기록과 증언은 다수 존 재한다(김종원·정중헌, 2001, 16∼29). 당시 경성 거주 일본인의 급속한 증가와 서구 문물의 유입 속도를 고려할 때 1900년 이전에 영화가 대중에 공개되었다는 주장은 설 득력이 있다. 조선의 영화 유입에 대한 기록에서 외국인이 상영의 주 체였으며, 영화가 담배회사, 전기회사의 활동을 위한 수 단이었다는 점은, 영화가 자본주의의 전파와 연관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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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활동사진은 곧 대중에게 근대를 상상하고 대리 체험하는 기능을 했다.

극장가의 형성 1902년 근대 극장의 시초인 협률사가 왕실 극장으로 개소 했고, 동대문 내 활동사진소를 비롯한 양옥집, 벽돌집, 창 고 등을 개조한 장소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되었다. 1907년 경성 거주 일본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일본인 지역이 형성되 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근대적 의미의 극장이 형성되었다. 남촌에 어성좌, 경성좌, 개성좌 등이 들어섰고, 1910년부 터 상설 연예관인 경성고등연예관, 우미관(1912), 대정관 (1912), 황금관(1913)이 잇달아 세워졌다. 북촌에도 1907년 단성사를 시작으로, 1910년대에 걸쳐 연흥사(1908), 장안사 (1908) 등의 극장이 설립되었다. 1920년까지 경성에서 12개 극장이 문을 열었고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대표적 조선인 극장이었던 조선극장은 1922년 개소했다. 극장은 곧 지방 도시에도 확산되어 1925년에는 서울 12관, 전국 15관이 번 성했고, 군소도시에는 학교나 공회당에 세운 천막극장이 대 신했다(이영일, 2004, 50∼51쪽). 1920년경 경성의 인구 중 일본인은 전체의 30%를 차지 할 정도로 증가해 있었고, 이들은 상위 10%의 경제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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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하고 있었다. 1907년 경성 거주 일본인의 수가 급증 하면서,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조선인 지역인 종로 중심의 북촌, 남쪽은 일본인 지역인 진고개(현재의 명동 과 충무로 일대) 중심의 남촌이 민족적 경계를 지으며 식 민도시의 구조를 이루었다. 활동사진 상영 초기에는 뤼미에르와 멜리에스, 그리고 미국 바이타스코프에서 제작한 짧은 필름 중심으로 상영 이 이루어졌고, 191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리피드(D. W. Griffith),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 등 유럽 과 미국의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극장은 복합적 연행(performance)의 공간으로 창극, 신파연극, 기생의 병창, 유랑극단, 서커스 등과 함께 상영 되었다. 모든 프로그램은 1주일 단위로 자주 교체되었으 며 뉴스, 희극, 서부극(활극), 본 영화(멜로드라마) 등의 순서로 약 2∼3시간의 프로그램이 저녁 시간에 주로 상영 되었다. 이 시기의 극장 요금은 특등석, 일반석으로 차이 가 있었으며, 극장에 따라 5등급까지 구분되어 있었고, 부인석(婦人席)을 따로 두어 여성의 입장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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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극과 신파 1919년 연쇄극(kino-drama)이 제작됨으로써 외국 영화를 감상하는 것만이 전부이던 시대에서 생산이 함께 이루어 지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키노 드라마’로 불리는 연 쇄극은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무대극의 일종으로 야외 장 면을 필름으로 촬영해 연극 무대가 진행되는 중에 상영하 는 방식이다. 연쇄극은 일본에서 1897년부터 1915년까지 번성했으 며 조선에서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간 신파극단에 서 제작했다. 김도산의 신극좌가 <의리적 구토>(1919)를 제작한 것을 기점으로 꼽는다. 1918년 극단 ‘세도나이카 이’가 황금정에서 <선장의 아내>를 공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단성사 경영주인 박승필의 자본으로 1000피트(10 분) 정도를 한강철교, 장춘단, 노량진, 청량리 등에서 촬영 해 연극 중간에 상영했다. <의리적 구토>는 ‘송산은 간악한 계모 밑에서 재산을 뺏 기고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의리의 칼을 빼든다’는 내용이 었다. ‘<의리적 구토>가 거둔 예상 밖의 성공’(매일신보, 1919. 10. 19)은 운영 경비를 지탱하지 못하고 해산되던 신 파 연극단이 연이어 연쇄극을 촬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 성구의 혁신단, 김도산의 신극좌, 이기세의 문예단, 김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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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취성좌 등이 <지기(知己)>(1920), <학생절의>(1920) 등을 제작했다. 연쇄극은 집안의 대립, 애정 관계, 인과응 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유사한 구조와 이야기로 대중 의 관심을 오래 끌지 못했고 신파극단의 유행이 지나자 급 격히 몰락했다(이영일, 2004, 54∼66). 연쇄극은 영화로서는 불완전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한 국 영화의 기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연쇄극의 양식적 특 징인 초기의 신파(新派)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으로 전 통 연극인 구파(舊派)에 반하는 새로운 극형식을 일컫는 다. 사적(私的) 소재를 통해 자유연애와 봉건 철폐를 제기 하고 근대 의식을 제기한 것이다. 일본의 신문 연재소설 인 <불여귀>, <금색야차>(장한몽) 등이 연쇄극과 무성영 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신파극단의 극적 전개 방식과 배우가 조선 무성영화에 대거 진출하고 연쇄극의 소재와 연기 스타일 등이 전승되면서 극복해야 할 낡은 것 을 의미하는 기원이 되기도 했다. 조선 영화에서 신파는 무성영화 시기에 <장한몽> (1926), <농중조>(1926) 등의 눈물에 호소하는 작품이 인 기를 끌었으나, 1930년대를 거치면서 치정, 살해, 음모 등 의 소재와 우연성의 남발, 반복적 구조, 지연된 서사 등의 양식적 특성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하위 장르로 인식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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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했다. 신파는 근대와 전근대의 가치충돌에서 선택의 딜레마에 처한 대중의 혼란을 반영하는 타율적인 근대의식 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강영희, 1989).

참고문헌 강영희(1989). 일제강점기 신파양식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김종원 · 정중헌(2001). 󰡔우리영화 100년󰡕. 현암사. 김진송(1999).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현실문화연구. 이영일(2004). 󰡔한국 영화전사󰡕(개정증보판). 도서출판 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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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식민지 대중문화와 무성영화 (1923∼1935)

한국 영화사의 무성영화 시기는 최초의 전성시대로 불린다. 40여 개의 제작사가 활동했으며 8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1920년대 이후 경성을 중심으로 대중문화가 형성되면서 ‘영화’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고, 나운규, 이규환, 윤백남, 이필우, 전창근, 심훈 등의 영화인들이 대표작을 내놓았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적 리얼리즘 영화가 출현했으며, 변사는 영화의 해설자이자 배우로서 무성영화 연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성영화의 제작 식민지 시기의 조선 영화는 일본인 스태프와 자본이 제작 에 참여했으며, 판소리 소설을 각색한 영화와 신파극이 다 수 제작되었다. 1923년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윤 백남)가 제작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 으로 만든 계몽영화였으나, 조선인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 고, 최초의 조선인 여배우 이월화를 비롯해 조선인 배우와 스태프가 참여해 한국의 첫 극영화로 인정되어 왔다. 이보 다 앞서 <국경>(1923, 김도산)이 제작, 개봉되었다는 주장 도 있다. <춘향전>(1923)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첫 조선 영화 로 조선극장 사장인 일본인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결성한 동아문화협회에서 만든 작품이다. 조선극장 변사 김조성과 개성 명기(名妓) 한룡이 이도령과 춘향 역을 맡 았다. <춘향전>은 1923년 10월 18일 전북 군산좌에서 개 봉된 후, 서울에서는 12월 5일 황금좌에서 상영되었다. <춘향전>의 흥행 성공에 자극을 받은 단성사 경영주 박승 필은 단성사 활동사진 촬영부를 조직하고 순수하게 조선 인만으로 <장화홍련전>(1924, 김영환)을 제작했다. 단성 사에서 총 1만 3000여 명의 관객이 동원되어 “조선에 활동 사진이 생긴 이래 초유”(매일신보, 1924.9.13)의 흥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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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1924년 설립한 최초 영화사 조선키네마주 식회사를 비롯해,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 고려키네마, 고려영화제작소, 반도키네마, 계림영화협회 등이 설립되 어 <해의 비곡>(1924, 왕필렬), <운영전>(1925, 윤백남), <장한몽>(1925, 이경손), <멍텅구리>(1926, 이필우)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1930년 이후 영화 제작은 급격히 감소했 지만, 중앙키네마 <꽃장사>(1930, 안종화), 동양영화사 <승방비곡>(1930, 이구영), X키네마 <큰무덤>(1931, 윤봉 춘), 평양서선키네마 <도시의 비가>(1934, 이창근) 등이 발 표되었다. 조선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1934년에도 전체 상영 영화 중에서 일본 영화가 69%, 기타 외화가 27%를 차지했고, 조 선 영화는 4%에 불과했다. 영화 문화는 여전히 양풍(洋風) 을 즐기는 관람 중심의 환경에 있었다. 한편, 1934년 조선 극장에서 개봉한 <청춘의 십자로>(1934, 안종화)는 현존 하는 최고(最古)의 한국 영화로, 2008년 발굴되어 대중에 공개되었으며, 변사 연행을 통해 새로운 문화 형식으로 공 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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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저항적 민족주의 <아리랑>(나운규)은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제작 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는 민요 아리랑에서 모 티브를 가져왔고 상영 당시 조선 대중의 울분을 자아내어 저항적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작품이 되었다. 민 족정신을 형상화했고, 한국 영화의 수준을 올려놓았으며, 춘사 나운규의 저항성이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 사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이영일, 2004, 101). 1950년 대까지 순회 상영했다는 증언과 기록이 있으나 현재 필름 이 소실된 상태다. <아리랑>의 민족사적 의미와 예술적 성취는 재론의 여 지가 없지만, 정신병자 영진이 악덕 마름 기호가 여동생 영 희를 겁탈하려 하자 살해한 후 정신을 되찾는다는 서사는 당대의 신파극과 유사한 점이 있다. 나운규가 이 영화의 모 티브를 <탐욕(Greed)>(1925, 에릭 폰 스트로하임)에서 얻 었다는 사실에서 당대 영화인에게 외화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나운규는 감독, 연기자, 제작자 였으며, <풍운아>(1927), <들쥐)(1927), <옥녀>(1928) 등 을 비롯해 발성영화 <아리랑 3편>(1936), <오몽녀>(1937) 등을 감독했다.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저항적 영화 활동으로 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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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F)의 영화 운동을 꼽을 수 있다. 조선의 영화인들은 1927년 발족한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카프의 영화동맹을 조직해 활동했다. 이후 영화제작사 서 울키노 등을 결성해 <유랑>(1928, 김유영), <혼가>(1929, 김유영), <암로>(1929, 강호), <지하촌>(1931, 강호), <화 륜>(1931, 김유영)을 제작했으나 1934년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되면서 마감되었다. 일제의 검열로 작품의 완 성도가 낮고 상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대중의 호응 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이규환)는 <아리랑>의 맥을 잇는 민족적 리얼리즘 영화로 평가받았다. 농부 수삼이 인력거꾼에서 나룻배 사공으로 전전하다 딸이 철교의 기 사에게 겁간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살해한 후 달려오는 기 차에 몸을 던져 죽는다는 이야기는, 근대의 흐름에서 흔들 리던 민중의 초상을 웅변한 수작이다.

무성영화의 형식과 변사 무성영화 시기에 제작된 영화 중 상당수는 전승되는 판소 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세계 초기 영화사에서는 전래의 신화, 민담을 근대적 기계장치인 영화에 결합하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춘향전>을 비롯해 <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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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1925, 이경손), <숙영낭자전>(1928, 이경손) 등이 대 표적이며, 특히 <춘향전>은 1970년대까지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영화화한 최고의 이야깃거리였다. 무성영화 시기의 사운드는 현장 음악과 연주로 대신했 으며 영화 해설자의 존재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 다. 미국에서도 변사는 영화의 전설(前說)을 담당하는 사 회자로 1910년경까지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대 만, 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는 무성영화 전 시기에 변사 가 있었다. 조선의 변사는 1908년경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추론하 고 있다. 일본의 변사(辯士)가 다인극의 양식화된 공연을 수행한데 반해, 조선의 변사는 1인극으로 변형되었으며, 경성 극장가를 중심으로 1913년경부터 발성영화가 제작 되기 시작한 1935년경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개봉관에는 극장마다 3∼4인의 변사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도제식으 로 운영되었다. 고급 관리 월급이 30∼40원일 때 두 배 이 상의 급여를 받는 인기 직종이었고, 허가제로 운영되어 1921년부터 경기도 경찰부가 주관한 등용시험에 합격해 야 했다. 장르별로 주요 인물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서상 호, 김덕경, 최병룡, 성동호, 김조성, 서상필 등이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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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역의 변사는 전통극과 초기 영화 상영 환경에 서 기원을 찾는다.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분라쿠(文 樂)라는 일본의 꼭두각시 놀음에 다유우(太夫)라는 해설

자가 있었고 가부키에서 이것을 답습함으로써 변사의 기 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국에도 판소리 공연과 소설을 읽어 주는 통독 문화가 광범위하게 있었고 이 연장선상에 서 변사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외화 중심의 관람 문화에서 높은 문맹률은 변사의 해설이 중요했고, 유성영 화 도입 이후에도 사운드 장치가 열악해 이를 보완하기 위 해서는 토키(takie) 연행이 필요했다. 변사는 능동적 해설 자이자 연기자로서 현장의 음악을 조절하고 즉흥적인 연 행을 수행했다. 1930년부터 조선에 유성영화가 상영되고 1935년 첫 발 성영화 <춘향전>이 제작되면서 변사의 시대는 종말을 고 했지만, 지방의 순회공연에서 변사의 연행은 여전히 중요 한 상영 요소로 잔존했다. 해방 후 제작된 무성영화 <검사 와 여선생>(1948, 윤대룡)과 유성영화 <독립전야>(1948, 최인규)는 무성영화 시기 영화의 의미는 변사의 해설과 연기를 거쳐야 완성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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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사토 다다오 저, 유현목 역(1993). 󰡔일본영화 이야기󰡕. 다보문화. 이영일(2004). 󰡔한국 영화전사󰡕(개정증보판). 도서출판 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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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유성영화와 근대의 삶, 군국주의 (1935∼1945)

식민지 유성영화 시기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1935년 <춘향전>이 첫 발성영화로 제작된 후 1940년까지이며, 둘째는 1941년 영화 신체제가 선포되어 조선영화배급회사로 영화의 배급이 일원화하고, (사)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제작이 이루어진 군국주의 시기다. 조선의 유성영화는 2005년 이후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발굴해 10여 편이 보존되어 있다. 이 영화들은 근대 삶을 다룬 멜로드라마, 친일 협력영화, 군국주의 선전영화로 구분할 수 있다.


발성영화의 제작 1930년부터 조선에 유성영화가 상영되기 시작되자 1935년 10월 4일 경성촬영소는 조선의 첫 발성영화 <춘향전>(이 명우)을 제작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이필우가 미국의 RCA 시스템을 모방한 독일 녹음기를 일본에서 구입, 개조 해 <춘향전>의 사운드 녹음을 완성했다. 첫 발성영화 <춘 향전>은 사운드 재현 수준이 낮았고 작품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었으나 조선어 발성 영화에 관객이 운집해 흥행 에 성공했다. 감독 이명우는 “보는 눈과 일하는 손의 차이 가 우심(尤深)함을 한(恨)한다”(이명우, <춘향전>을 제작 할 때−조선영화감독고심담, 조선영화 제1호, 1936년 10 월호)는 표현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의 성과를 회고 했다. 식민지 시기에는 영화 기재가 부족해 기술적 완성도가 중요했고, 스태프는 한 사람이 연출, 촬영, 녹음, 현상, 편 집을 모두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메라, 조명, 현상기 등을 자체제작하거나 개조해 사용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 으로 이창근은 평양에서 서선키네마를 설립하고, 코첼1호 무성카메라를 만든 데 이어, 1937년 코첼2호 발성카메라 를 개발해 <처의 모습>(1939) 등을 제작했다. 이 외에도 1960년대까지 영화 현상기 등을 직접 제작하거나 개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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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이창근과 코첼 카메라

사용하는 일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1936년부터 대다수의 영화가 발성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영화주식회사, 고려영 화주식회사,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 한양영화사, 조선 영화주식회사[이후의 (사)조선영화주식회사와 다른 민간 영화사임], 고려영화협회 등이 활동했다. 1935년에서 1939년까지 총 26편의 발성영화가 제작되었는데 그중 10 편은 1939년에 제작되었다. <강 건너 마을>(1935, 나운규), <바다여 말하라>(1936, 이규환), <홍길동전>(1936, 이명 우), <오몽녀>(1937, 나운규), <순정해협>(1937, 신경균), <도생록>(1938, 윤봉춘), <무정>(1939, 박기채),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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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춘향전>

료>(1940, 최인규) 등의 영화가 연이어 나왔다. 유성영화 시기에 진입하면서 영화 기술 개혁론과 기업 화론이 부상했다. 유성영화의 사운드를 재현하기 위해서 는 블림프(blimp) 카메라, 싱크로나이저(synchronizer), 기계식 현상기, 소음이 적은 텅스텐 조명 등 모든 분야에 서 새로운 기재들이 필요했다. 제작비가 두 배 이상 상승 하면서 산업자본이 필요하고 영화 제작을 기업화해야 한 다는 요구도 발생했다. 경성촬영소, 한양영화사, 고려영 화협회, 조선영화주식회사 등에 촬영소를 설치했으며,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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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소음 통제에 유리한 스튜디오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노재신, 이종철, 문예봉, 한일송 등 발성이 좋은 연극배우 들이 영화계로 진출했고, 일본, 독일에서 연출 수업을 한 박기채, 방한준, 신경균, 안철영, 이규환, 최인규 등이 신 인 감독들로 등장하면서 영화인의 세대 교체도 일어났다. 1930, 1940년대의 유성영화 중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 에서 발굴된 <미몽>(1936, 양주남), <심청>(1937, 안석영), <군용열차>(1938, 서광제), <어화>(1939, 안철영), <반도 의 봄>(1941, 이병일), <집 없는 천사>(1941, 최인규), <지 원병>(1941, 안석영), <망루의 결사대>(1943, 이마이 다다 시), <조선해협>(1943, 박기채), <젊은 모습>(1943, 도요다 시로), <사랑의 맹서>(1945, 최인규)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사료와 증언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던 이 시대 의 영화가 세상에 공개됨으로써 식민지 시기 한국 영화의 귀중한 증거가 되었다.

근대 도시의 삶과 대중영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울의 인구가 40만 명을 넘어섰고 1940년대 초에는 100만 명에 육박했다. 1920년대 중반 이 후부터 영화의 관객 구성이 변화하고, 장르와의 상호관계 에 따라 영화 경험이 정형화되었으며, 사회질서의 일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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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순환하는 제도적 시스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단편으 로 구성된 프로그램, 관객의 소음과 드나듦, 변사의 해설 등으로 산만하던 극장의 풍경은 서서히 스크린에 집중하 는 제도적인 관객성으로 성립되어 갔다. <춘향전>을 계기 로 애활(愛活)가라는 표현에서 애극(愛劇)가라는 표현도 등장하고(매일신보 1923. 8. 22.∼ 8. 24), 활동사진 대신 영화라는 호칭도 사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유선영, 2006, 209∼240). 영화는 사진에 움직임이 있는 구경거리 에서 이야기를 중심에 둔 ‘드라마’, ‘극’이라는 인식이 시작 되었다. 영화 관객은 1910년대 우미관을 드나들던 직공이나 자 유노동자들에서 ‘유식 계급의 프티 브르주아들인 학생, 지 류계와 부랑아, 화사(化士), 숙녀급의 상등 손님, 그리고 관계자와 기자들’로 변화해 갔다(심훈, “우리 민중은 어떠 한 영화를 요구하는가?를 논해 만년설 군에게”, 중외일보 1928.7.11∼7.27). <동도>(1920, Way Down East, D. W. 그리피스), <철로의 백장미(La roue)>(1923), 아벨 강스) 등의 외화가 인기를 얻었고, 부인석(婦人席)이 여염집 부 녀, 기생, 여학생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카 페, 음악당, 영화관은 근대 생활자의 삶에 첨단의 유행이 되었다. 영화는 ‘값이 싸고 화려하고 재미있으며’[(하소(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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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 <조광>, 1937년 12월호], ‘50전만 가지고 가도 하루

저녁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김을한, <별건곤>, 1930년 7월호) 대중의 오락이었다. 근대 생활은 다른 지역에서 거기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그 장소를 빌어서 영위하는 가두(街頭)의 생활이며, 영화 의 소비자는 노동, 생산에 무관한 생산 활동 없이 ‘소비로 만 생활을 쌓아올리는 모던 생활자’로 정의되기도 한다 [“적라산인(赤羅山人), 모던수제(數題)”, <신민>, 1930년 7월호]. 1930년대의 영화 관객층은 입장료를 지불할 수 있 고, 외화의 서사적 관습에 익숙하고, 변사의 해설 없이도 유성영화의 자막을 독해할 수 있는 근대 교육의 수혜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40년에 이르면, 극장의 총 관람 객 수는 1250만 명이고, 연극 관람객 수는 109만 명으로 영화는 연극의 12배에 가까운 규모에 이르고 있다(삼천 리, 1940년 5월호). 1930년대 극영화는 전근대의 삶과 구별되는 근대의 이 미지를 생산하고 있다. 보존되어 있는 첫 발성영화 <미 몽>에서는 가정을 버리고 쾌락을 쫓는 여인의 파멸을 그 리고 있으며, <어화>는 순박한 어촌과 매혹적이지만 위험 한 도시를 대비시키며, <반도의 봄>은 영화 <춘향전>의 제작과 상영 과정을 담고 있어 당대 대중문화의 일면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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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주고 있다. 영화에서 재현된 근대는 매혹적이고 위험 한 도시의 삶처럼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영역이 었다.

영화 신체제와 친일 협력 영화 일제 말기는 일반적으로 1937년 중일전쟁에서 1945년 해 방까지를 지칭한다. 1907년부터 통감부는 ‘흥행취체규칙’ 과 ‘보안법’을 통해 영화와 공연예술에 대해 통제를 가하 기 시작했고, 1922년 경기도 훈령 제11호로 전문 38조의 ‘흥행및흥행장취체규칙’이 발표되어 각본, 필름 검열과 변 사 검정에 대한 규칙을 추가했다(함충범, 2008, 197∼213). 1923년 필름검열소가 설립되어 1924년부터 검열이 이루어 졌고, 1925년부터 검열세를 징수하면서, 1926년 7월 5일 총독부령으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제정해 검열의 근거를 두었다. 1934년 8월 7일 공포된 ‘활동사진영화취 체규칙’은 영화업자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여 영화업을 체 계적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군국주의를 강화하면서 ‘국가총동원법’(1938)을 제정해 황국신민서사, 일장기, 전 쟁 표어 등을 극장에서 강제 상영토록 했다. 이에 ‘영화 신 체제’는 전시체제 하 일본과 조선 영화 산업 구조를 효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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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재편하기 위한 정책, 법률과 개혁을 포괄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2007, 200). 1940년 1월 4일 공포된 ‘조선영화령’에 따라 10여 개 조선인 제작사들의 허가가 일 제히 취소되었고, 조선총독부가 제작사와 배급사를 매입 하는 형식으로 조선인 영화사를 강제 통폐합했다. 1941년 1월부터 생필름 배급제가 시행되었고 조선어 발성영화의 전면 상영 금지가 이루어졌다. 1940년 10월 관제 ‘사단법 인 조선영화배급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42년 9월에는 관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이하 조영)’가 발 족함으로써 조선에서 영화의 제작과 배급을 국유화했다. 한편, 외화는 1936년부터 수입이 통제되기 시작했고, 1942년에 상영이 전면 금지되었다. 1942년 10월 총독부 와 관계관청에 의해 구성된 ‘영화기획심의회’가 설립되어 선전영화를 기획했고(김미현, 2013, 2∼6), 조영은 연간 극영화 4∼6편, 문화영화 4∼5편, 시사영화 12편 등을 제 작했다. 조선영화배급회사는 전국을 홍백 2계통으로 구 획해 각 지역에 선전영화를 전파했다. 중일전쟁 이후 1938년 <군용열차>를 시작으로 친일 협 력 영화와 군국주의 선전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들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내포적으로 혹은 직접적인 방 식으로 주장하는 영화로서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와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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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있다. 최근 발굴된 <군용열차>, <반도의 봄>, <집 없는 천사>, <지원병>, <조선해협> 등은 일본 영화사들과 제휴한 작품이 많았고 일제가 조선인을 교육하고 만주 등 에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그러나 <군 용열차>는 조선어 시나리오가 없어 일본어 시나리오를 현 장에서 조선어로 즉석 번역 녹음해 오역이 발생했으며, <집 없는 천사>는 일본 문부성 추천 영화로 결정되었으나 조선어가 등장하는 이유로 추천 취소되어 일본의 이중 의 식을 보여 주었다. 조선인이 주도한 <조선해협>과 일본인 이 주도한 <젊은 모습>이 지원받은 기자재 수준과 제작비 규모는 매우 달랐다(김려실, 2006, 93∼96). 일제 말기 조선 영화는 일제의 지배가 강압으로만 이루 어질 수 없었으며 토착사회 내부의 자발적인 협력을 필요 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조선인에게 황국신 민화와 내선일체는 현실적,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불가능 한 것이라는 균열과 차이를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려실(2006). 일제 말기의 합작 선전영화. 김미현 편, 󰡔한국영화사: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김미현(2013). 󰡔한국 영화 정책과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유선영(2006). 황색식민지 시대의 서양영화 관람과 소비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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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942. 공제욱 · 정근식 편,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 한국영상자료원 엮음(2007). 󰡔고려영화협회와 영화신체제󰡕. 한국영상자료원. 함충범(2008). 1910년대 조선에서의,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른 활동사진정책에 관한 연구−1910년~1918년 ≪매일신보≫를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6권, 197∼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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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해방과 한국전쟁, 정치적 격변기 (1945∼1957)

1945년 해방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시기는 영화가 시대의 요구에 밀착했던 기간이었다. 정치적 격변기에서 기록영화의 역할이 부상해 군(軍), 관(官), 경(京) 중심의 뉴스영화, 기록영화, 문화영화 등이 다수 제작되었다. 1954년 4월부터 국산 영화 면세조치가 시행되고, <춘향전>(1955, 이규환)과 <자유부인>(1956, 한형모)이 크게 성공함으로써 영화 산업의 기틀을 다졌다.


해방 정국과 광복영화 해방 후에는 영화가 공보 활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인 력, 자본, 기재가 고갈된 상태에서 다수의 영화가 16mm, 무성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미국문화의 영향력이 확대되 기 시작했고, 해방 정국에서 영화인들의 조직적 활동이 이 루어졌다. 극장가는 미국 8대 메이저사의 독점 배급사인 중앙영화배급사가 배급한 미국 영화가 다수 상영되었다. 1945년 12월 16일 조선영화동맹은 앞서 조직된 조선영 화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을 통합해 ‘반제 반봉건반국수주의 민족 영화론’을 천명하며 전국적인 대 중운동 단체로 결성되었다. ‘영화 국영화론(國營化論)’을 제기하며 미군정의 정책과 중앙영화배급사의 독점적인 배급을 비판하는 등 좌우익을 망라한 공감을 얻었으나 미 군정의 탄압과 주요 영화인들의 월북으로 무력화되었다 (조혜정, 2006, 112∼114). 미군정은 1946년 ‘군정청령’ 제68호, 제115호를 각각 발 표하고 활동사진 취체 책임을 조선정부 공보부에 이관했 다. 나아가 미 502부대는 1949년 9월에 미 공보원(이하 USIS)으로 개편하고 <전진대한보>(1953년 5월부터 <리 버티뉴스>로 개칭함), <전우> 등의 뉴스영화를 제작해 미 국의 원조 활동과 정책을 선전하는 데 영화를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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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산, 김학성(촬영), 이경순(녹음), 김봉수(현상) 등의 영화인들은 자동현상기, 자기녹음기 등 최신 기재들이 갖 추어진 USIS 영화제작소에서 일하면서 영화기술을 체득 하였다(김미현, 2005).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 약 5년 동안 총 61편의 극영화가 제작되었으며, 광복영화는 주로 고려영화협회와 계몽영 화협회에서 만들었다. <자유만세>(1946, 최인규>, <안중 근사기>(1946, 이구영), <윤봉길의사>(1947, 윤봉춘) 등 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기쁨과 새 조국 건설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이 고착되고 이념 대립이 격화하면서 <북한의 실 정>(1949, 이창근) <성벽을 뚫고>(1949, 한형모), <무너 진 38선>(1949, 윤봉춘) 등 남북의 현실을 다룬 영화가 제 작되었다. 해방 후 첫 35mm 극영화인 <자유만세>는 독립투사의 해방 투쟁과 신파 멜로드라마를 결합하고 있으며, 정치적 노선을 둘러싸고 논쟁하는 장면 등 해방 정국의 정치적 지 형을 비롯하여 소비에트 몽타주를 연상케 하는 편집이나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받은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다. 반면, <마음의 고향>(1949, 윤용규)은 고요한 산사 의 정취와 절제미를 표현해 찬사를 받았다. 인간의 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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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그리움을 담아 낸 영화지만, 친모와 양모, 그리고 정 신적 스승인 주지스님의 관계에서 길을 찾아 떠나는 동승 의 모습을 통해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상징적으 로 담아 낸 흔적을 볼 수 있다.

한국전쟁과 반민반관의 영화 1950년대 전반기인 한국전쟁 후 5년 동안의 기간에는 민 간 영화 산업이 형성되지 못해 군대, 행정기관, 경찰 관련 조직에서 광범위하게 영화 제작에 참여한 반민반관(半民 半官)의 영화 제작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중에는 국방

부 정훈국 촬영대, 공군 촬영대, 육군본부 촬영대, 해군 촬 영대 등의 군대 관련 조직에서, 휴전 후에는 공보처 산하 의 대한영화사와 USIS의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USIS <리버티뉴스>, 국방부 정훈국 <국방뉴스>, 공보 처 <대한뉴스> 등의 뉴스영화가 전시의 공보 매체로 제작 되었다. 기록영화 중 <정의의 진격 1, 2부>(1951, 1953, 한형모)는 전쟁 과정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전 쟁 중 평양영화제작소에 보관되어 있던 북한군 촬영 필름 을 가져와 삽입한 장면도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김 기영, 이형표 등은 USIS에서, 한형모, 홍성기, 신상옥 등은 국방부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196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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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영화인이 되었다. 극영화 제작에서도 공공 부문이 직접 제작하거나 촬영 협조, 기자재 후원 등의 방식으로 참여했다. 1950년 전쟁 발발 후 1954년까지 제작된 장편 영화는 약 40여 편이며, 이 중 극영화는 24편으로 추정된다(한국영화진흥조합, 1973). 1955년 15편, 1956년 30편, 1957년 37편으로 극영 화 제작편수는 증가하지만, 1950년대 중반까지 극영화는 공공 부문이 참여한 한국전쟁 소재의 작품이 상당수다. “1953년까지 제작된 작품은 거의 모두 6·25사변에서 왔 으며 극영화조차 기록뉴스영화처럼 보인다”(중앙일보, 1953. 12. 6), “1954년 개봉된 영화들 전부가 시국색이 농 후한 것으로 민족의 수난 속에서 빚어진 작품들”(서울신 문, 1954. 12. 23)이라는 논평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전쟁영화들은 <자유전선>(1954, 김홍), <불사 조의 언덕>(1955, 전창근)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반공을 전파하거나, <운명의 손>(1954, 한형모)과 <죽엄의 상 자>(1955, 김기영)같이 신파극, 탐정극 형식을 반공주의 와 결합했다. <피아골>(1955, 이강천)은 빨치산의 자멸 과정을 그리고 있으나 용공혐의로 ‘반공영화란 무엇인가’ 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고, <격퇴>(1956, 이강천)는 국군 의 영웅주의와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1960년대 반공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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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1950년대의 전쟁영화는 반공 이념을 서사 구조에 통합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대중 의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공적 부문의 영화 참여는 한국의 정치권력과 미국의 통 치세력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반공을 통해 냉전 문화를 형 성하는 데 활용되었다(염찬희, 2008, 409∼457). USIS는 1956년에도 남한 총인구(약 2080만 명) 규모의 대중에게 영화를 관람하게 해 한국 정부의 상영 규모를 압도했다 (허은, 2009, 259∼271).

<춘향전>과 <자유부인>, 그 이후 1954년 3월 31일 ‘입장세법’ 개정은 첫 영화 산업 진흥을 위한 시책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48년 초에 개정 된 고율 입장세는 1949년 부분 인하를 거쳤고 1954년 입 장 요금의 60%에 이르는 입장세금을 국산 영화에 한해 폐 지했다. 1956년까지 국산 영화의 면세 정책이 유지됨으로 써 극장에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한 이 조치는 이후 한 국 영화의 성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성공은 1950년대 중반 이후 민간 영화 산업이 형성되고, 현대극과 사극으로 영화 경향 이 분화하면서 다양한 장르영화가 생산되는 계기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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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춘향전>은 한국전쟁 후 최초로 민간 자본으로만 제 작한 영화로 (≪신영화≫, 1955. 3. 27), 2개월간 상영해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를 계기로 사극영화의 붐 이 일어나 고전 소설을 영화화하거나, 특정한 역사적 시기 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민족 영웅 소재의 전기물 등이 제 작되었다. <자유부인>은 정비석의 신문 연재소설을 영화 화한 작품으로, 수도극장에서 개봉해 45일간 장기 흥행에 성공했다. 여성의 욕망과 파멸을 댄스홀, 양품점 등의 향 락적인 공간을 통해 보여 줌으로써 전후 혼란한 가치관을 묘사했다. 한국전쟁기에 기록영화 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영 화인들이 극영화를 연출하면서 리얼리즘 기조의 멜로드 라마를 연출했다(이영일, 257). 홍성기 <출격명령>(1954), <실락원의 별>(1957), 김기영 <양산도>(1955), <황혼열 차>(1957), 유현목 <유전의 애수>(1956), <잃어버린 청 춘>(1957), 신상옥 <악야>(1952), <젊은 그들>(1955) 등이 대표적이다. 신상옥 감독은 한국전쟁 후 영화계의 과제는 ‘보이고 들 리는 영화’를 만드는 것과 ‘편집 원리’에 도달하는 것이었 다고 회고한다. 1950년대 영화의 불연속적이고 나열적인 구성 방식은 미숙함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형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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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했던 시대의 증좌이기도 하다. 1950년대 말의 한국 영화는 형식적 완결성을 갖추어 가면서 이야기를 중심에 둔 할리우드 고전적 스타일에 안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김미현, 2006, 147∼148).

참고문헌 김미현(2005). 󰡔한국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역사적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논문. 김미현(2006). 장르의 분화와 형식의 경향. 김미현 편, 󰡔한국영화사: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염찬희(2008). 1950년대 냉전국면의 영화작동 방식과 냉전문화 형성의 관계.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1940∼1950년대󰡕. 현실문화. 이영일(2004). 󰡔한국 영화전사󰡕(개정증보판). 도서출판 소도. 조혜정(2006). 미군정기 영화단체의 활동. 김미현 편, 󰡔한국 영화사; 개화기에서 개화기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한국영화진흥조합(1973). 󰡔한국 영화총서󰡕. 영화진흥조합. 허은(2009). 󰡔미국의 헤게모니와 한국 민족주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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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미국 문화, 근대화, 그리고 가족 (1958∼1962)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거쳐 1963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근대화와 서구화의 급격한 변화에 접어들고 있었다. 1950년대 말 명동에서 충무로로 옮겨 한국영화계의 중심이 형성되었으며, 71개의 영화수입사와 제작사가 활동했다. 이 시기의 영화는 근대화의 격랑(激浪)에서 가족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의 희망과 불안을 그리고 있다.


한국 영화계의 형성 한국전쟁 발발 후 1951년 가을부터 부산, 대구를 중심으 로 외화가 수입 상영되었고, 대중은 피난지의 피폐한 현 실을 스크린에 펼쳐진 환상에서 위로받았다. 1954년에 는 30여 개 수입사가 활동하면서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1953), <나이아가라(Niagara)>(1953)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들여와 인기를 얻었다. 영화인들은 전 쟁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에서 <자전거 도둑(Ladri Di Biciclette)>(1948, 비토리오 데 시카)을 비롯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55년부터 미국에서 제작된 와이드 스크린 컬러영화 <성의(The Robe)>(1952, 헨리 코스터), <스타탄생(A Star is Born)(1954, 조지 큐거), 70mm <벤허(Ben Hur)(1959, 윌리엄 와일러) 등도 상영되면서 와이드 스크린 영화의 제작도 일어났다. 외화를 중심으로 흥행업이 정착해 감에 따라 명동에 모 여들었던 영화인들은 충무로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1950 년대 중반 78개였던 극장은 1950년대 말에는 242개로 증 가했고, 71개사의 영화사가 활동하면서 1958년 84편, 1959년 108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같은 해 외화는 각각 134편, 222편 수입되었다. 제작편수와 수입편수의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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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제작 비용의 상승에 따라 제작비를 조달하고 전국에 유 통할 수 있는 투자, 배급 체계도 형성되었다. 제작사는 경 기·강원, 광주·호남, 대구·경북, 부산·경남, 충청, 서 울 변두리 등 6개로 구분된 상권에 지역 배급권을 사전 판 매해 제작비를 조달하고 지역 배급업자는 영화 상영권리 를 확보하는 방식의 지역별 유통 체계가 형성되었다(김미 현, 2005b, 113∼139). 영화가 다루어온 근대와 전근대의 이분법적 가치 체계 는 전통과 근대, 가부장의 권위와 여성의 욕망, 가정과 거 리, 농촌과 도시 등으로 세분되었다. 1950년대부터 미국 대중문화와 서구화 바람이 본격적으로 상륙하면서 영화 에 재현된 풍속의 수위도 높아졌다. 할리우드 영화는 한 국 영화의 성장기에 소재, 미장센, 인물형 등에서 장르와 영화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신영 화≫, ≪영화세계≫와 같은 잡지는 외화 소식과 배우의 동정으로 채워졌고 한국 영화에 이와 유사한 장르나 장면 이 등장한다. 1958년 이후 산업의 성장에 따라 형성된 장르영화 중에 는 신파조의 멜로드라마와 코미디가 다수 제작되어 통속 성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기도 했다. <눈 나리는 밤>(1958, 하한수), <화류춘몽>(1958, 박성복) 등의 신파드라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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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자>(1958, 권영순),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1959, 정창화) 등의 코미디는 사회 현실에 눈물과 웃음의 근원 을 두고 있으나, 흥행작을 모방해 유사한 영화가 군집을 이루게 되는 장르 자체의 특징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 다. 이외에 <돈>(1958, 김소동)은 농촌의 비극적 현실과 도시의 사악함을 기차로 상징되는 근대화 이미지에 중첩 시켜 주목을 받았다.

가족 이야기, 4 · 19 혁명과 5 · 16 군사 쿠데타 1950년대가 전후의 궁핍과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다양 한 가능성이 공존했던 시기라면, 1960년대는 서구 민주주 의의 가치가 급속한 근대화에 침식되는 정치적, 경제적 변 화의 길목에 놓여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에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에 이르는 기간은 역사적인 가능성이 발전적으로 폭발한 시 기였다. 영화전국윤리위원회가 수립되어 8월부터 민간 자율 기구에 의해 검열 업무가 시도되었으나 큰 성과를 내 지 못하고 5·16 쿠데타 이후 해산되었다. 민주적 정책과 변화의 에너지는 김기영, 유현목, 신상옥 등의 감독들의 대표작을 통해 발현되었으며, 가족 드라마에 나타난 대담 한 시선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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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부터 1963년경까지 가족이 중심이 되어 벌어지 는 이야기를 담은 기족 드라마가 전성기를 누렸다. <로맨 스 빠빠>(1960, 신상옥), <박서방>(1960, 강대진), <마 부>(1961, 강대진), <서울의 지붕 밑>(1962, 이형표), <삼 등과장>(1963, 이봉래), <월급쟁이>(1963, 이봉래) 등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소재로 세대 갈등, 실업 문제, 정치 풍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가족 드라마의 배우 김승호는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 부터 서민적 아버지 상으로 근대화에 밀려나는 기성세대 의 애환을 표현해 호응을 받았다(이길성, 2006). 이 시기의 대표작 <오발탄>(1961, 유현목)은 한국 영화 걸작 반열에 오른 리얼리즘 영화로 꼽혀 왔다. 첫 개봉은 1961년 4월 13일에 이루어졌고, 1961년 7월 17일에 재개 봉되었으나 쿠데타 정국에서 상영 중지 처분을 받았다. 1963년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출품을 계기로 다시 개봉됨 으로써 4·19와 5·16 사이의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 했다. 자유당 말기에 기획되어 조명기사 김성춘이 제작했 고 배우들도 거의 무보수로 촬영해 완성했다. 이범선의 동명 원작소설이 검열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반면에, 영화 화하면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음으로써, 영화의 힘을 살린 작품으로 역사적 신화를 얻게 되었다. <오발탄>은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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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오발탄>

현실을 해방촌의 절망적인 가족을 화면의 깊이감(deep focus)과 시각적, 청각적 장치를 통해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녀>(1961, 김기영)는 이 시기의 또 다른 걸작이다. 이 영화는 중산층 가족이 마련한 이층집에 하녀가 들어오 면서 행복과 부의 공간이 공포와 죽음의 장소로 변해 가는 과정을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으로 연출하고 있다. 김기영 감독은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해 상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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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도 성공한 작가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연출했다. <하녀>의 이야기는 <화녀>(1971), <충녀>(1972), <화녀 82>(1982), <육식동물>(1984)까지 연작으로 이어지고 있 으며, <이어도>(1977),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등 의 작품에도 괴이하고 독특한 감독의 색채가 배어 있다. 최근 <하녀>는 세계영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복원됨으로 써 국제적인 인지도를 더하고 있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 사이에 걸친 1년 여의 시기 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둘러싼 사회현실과 내부 균열을 묘사하고 있다. 가족의 이야기는 근대화와 정치적 변화의 불안, 그리고 희망을 표현하는 중 요한 지점이다.

와이드 스크린과 근대화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한국 영화의 화면 포맷 (가로:세로 비율)이 1.33:1의 스탠더드에서 2.35:1의 시네 마스코프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와이드 스크린은 1958년 <생명>(이강천)이 제작된 후, 1950년대 말에 1.66:1, 1.85:1의 비스타비전 비율과 시네마스코프가 일 부 제작되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다가 1962년을 전 후로 시네마스코프가 지배적 형식이 되었다. 1961년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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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전>(홍성기)과 <성춘향>(신상옥)이 컬러 시네마스코프 로 제작되어 <성춘향>이 흥행에 성공한 것이 계기였다. 1960년대의 시네마스코프는 <여사장>(1959, 한형모) 등 초기 시네마스코프의 단순하고 평면적인 스타일을 벗 어나고 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김기영)는 처 절한 마지막 장면을 넓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트래킹 쇼트 로 한 프레임에 묘사한다. <김약국집의 딸들>(1963, 유현 목), <갯마을>(1965, 김수용) 등은 과감한 클로즈업과 파 격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형식미를 일구고 있다. <고려 장>(1963, 김기영), <쌀>(1963, 신상옥)에서는 시네마스 코프의 넓은 수평 화면을 적극 활용한 파노라마 숏을 통해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안개>(1967, 김수용), <귀로>(1967, 이만희) 등에서는 갇혀진 무기력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시네마스 코프 화면을 활용하면서 심리적 고착 상태와 근대의 회의 를 표현하고 있다. 1960년대 흑백영화의 미학적 성취는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형식적 자의식과 활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시네마스코프 시대는 1962년부터 197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정치독재와 경제성장 이라는 근대화의 양날을 체험하고 있었다(김미현, 200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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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성춘향>

<사진 5> <고려장>

<사진 6>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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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미현(2005a). 󰡔한국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역사적 연구󰡕, 중앙대학교학교 박사학위 논문. 김미현(2005b). 한국 영화 간접배급구조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26호. 이길성(2006). 󰡔1960년대 가족 드라마의 형성과정과 제 양상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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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영화 정책과 장르영화 (1963∼1971)

1963년부터 1971년의 기간은 영화법이 제정 시행되고, 연간 100∼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국민 1인당 연간 평균 관람횟수가 5∼6회에 이르렀던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다. 군사정권이 추진한 근대화가 가속도를 내며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왔고 영화 산업의 기업화가 모색되었다. 1960년대는 영화 제작편수의 양적 확장과 함께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변화 속에서 대중 관객의 분화와 정책이 장르 현상의 중심에 있었다.


영화법과 영화 정책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화폐 개 혁이 실시되었으며, 전국 단위의 주민등록증 체제가 갖추 어졌다. 영화법, 문화재보호법, 관광진흥법, 공연법 등의 법 체계가 갖추어져 해방 후 첫 분야별 법률도 속속 입안 되었다. 영화법의 실시 전 단계로 1961년 9월 12일 문교부고시 제148호에 의거해 71개 영화사가 16개사로 통합되었다. 정부기구 개편에 따라 영화 행정 업무는 문교부에서 공보 부로 이관되었고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이 제정·공포 되었다. 한국영화인단체협회는 영화감독협회, 배우협회, 기술자협회,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외국영화배급협회 등 영화인 단체 연합체를 통합해 그 산하에 각각의 분과를 두 도록 했다. 제반 사회단체와 민간기구의 통폐합과 선별적 강화는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문화 예술계 전반, 나아 가 사회 전체에 걸친 현상이었다(이영미, 2001, 18). 1960∼1970년대 영화정책과 영화법은 대기업화를 지 향하고자 강력한 행정력을 토대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산 업과 문화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할 수밖 에 없었다. 1962년 1월 제정된 영화법은 영화 산업의 보호 와 육성이라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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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강력한 통제를 실시하려는 모순적인 정책 목표를 표방하고 있다. 메이저 영화사를 육성하기 위해 영화제작 자만 외화 수입이 허용되었던 수입, 제작 일원화 정책과 영 화 통제를 위해 시나리오의 사전 검열, 필름의 실사 검열이 라는 이중 검열 체제를 시행한 것이 대표적인 조치였다. 영화법과 동년 3월에 공포된 영화법시행령은 영화제작 업을 등록제로 전환하고 등록요건과 의무제작편수 규정 을 명시했고, 1963년 1차 개정, 1966년 2차 개정, 1970년 3 차 개정을 거쳤으나 그 정책 기조는 1980년대까지 유지되 었다. 제작사 육성의 중요한 조치였던 제작 쿼터와 외화 수입 쿼터 제도는 각 제작사에 제작편수를 할당하고 우수, 계몽, 반공 영화 등의 제작 실적과 영화제 수상 등의 실적 에 따라 외화수입권을 배정함으로써 제작사만 제작과 수 입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제작 쿼터 제도는 미등록 제작사가 등록 제작사의 쿼터를 전매해 제작하는 대명(貸 名) 제작을 성행하게 했고, 외화 수입 권리를 배정받기 위

해 정책 영화가 양산되었다(김미현, 2013, 12∼16). 신필름, 합동영화, 한국예술, 태창영화, 우진필름, 화천 공사, 연방영화 등이 활발하게 영화를 제작했으며, 이 중 신필름은 유일하게 영화사를 독자 등록하고 스튜디오 시 스템을 갖춘 메이저 제작사였다. 1960년대 초반에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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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명의 전속직원이 있었고 20년 동안 약 240편의 영화를 제작해, 한해 평균 13편을 만들었다. 1975년 등록취소되 기 전까지 신필름은 대형 스튜디오 시스템을 시도한 한국 영화사의 기업화 사례였다(조준형, 2010).

장르영화 현상 1960년대 중·후반은 한일협정과 월남파병에 이어 경제 개발과 근대화를 통해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였 다. 1965년 TV의 전국 방송이 시작되었고, 프로 레슬링과 레저 문화가 등장했으며, 도시의 풍경도 바뀌어갔다. 영 화는 도시화와 사회변화에 조응하는 작품을 생산했다. 이 기간을 장르영화 시기로 부를 수 있는 것은 한 작품 이 흥행에 성공하면 이어 유사한 경향의 작품이 군집을 형 성하는 전형적인 장르현상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1963 년 이후의 한국 장르영화를 크게 구분한다면 멜로드라마, 사극, 희극영화처럼 전통 장르가 진화한 범주와 스릴러액 션, 청춘영화와 같이 새롭게 등장해 짧게 지속한 단속 장 르(cycle), 그리고 문예영화, 반공·계몽영화처럼 외화 수 입 쿼터를 목적으로 제작한 정책 영화로 구분할 수 있다. 1960년대의 장르영화는 근대화의 억압적 공기와 정책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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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되고 소비되었으며, 때로 예술적·작가적 성취가 당당 히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전통 장르의 변주−사극, 코미디, 멜로드라마 1960년대에는 시네마스코프와 더불어 컬러가 확산되었다. 첫 컬러영화 <여성일기>(1949, 홍성기)와 1950년대 제작 된 몇 편의 컬러영화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성 춘향>이 성공하면서 1962년부터 <연산군>(신상옥), <진 시황제와 만리장성>(권영순), <대심청전>(이형표) 등이 연이어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었다. 컬러는 제작비 가 흑백에 비해 높았기 때문에 대중성이 있는 사극과 결합 했다. 1969년 한국 영화의 96%가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 작되면서 흑백 화면을 대신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의 사극은 <내시>(1968, 신상옥), <이조여인잔혹사>(1969, 신상옥)처럼 에로티시즘이 배어 있는 경향을 보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희극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인 기 코미디언이 출연한 장르영화도 양산되었다. <총각김 치>(1964, 장일호), <청춘사업>(1965, 심우섭), <여자가 더 좋아>(1965, 김기풍)의 이례적인 관객 동원은, 1960년 대 말까지 당대의 평론가들이 ‘저속하다’고 표현한 여장남 자 코미디와 팔푼이 시리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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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표적인 멜로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 번> (1968, 정소영)은 64일의 장기 상영에 관객 38만 명을 동 원했고, <미워도 다시 한 번 2편>(25만 명), <미워도 다시 한 번 3편>(20만 명), <미워도 다시 한 번 대 완결 편>(25 만 명)까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신파드라마는 희생을 모티브로 삼고 있으며 희망도 결단도 없이 고착 상태가 끝 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이 시대 대중 심리의 정형화라고 할 수 있다(이영일, 1972, 32∼35). 이 영화들 은 컬러영화 시대를 맞아 원색의 선명한 화면을 울긋불긋 한 여인의 옷차림과 소품으로 포장했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제외하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례는 거의 없었다.

단속 장르 현상−청춘영화, 액션스릴러, 검객영화 1960년대 단속 장르 현상은 도시의 젊은 관객과 기성 세 대 간의 취향과 소비 형태의 차이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 다. 당시의 조사에 따르면, 20대는 국산 영화(14.7%)보다 외화(50%)를 훨씬 많이 보고 있고, 50대 이상은 국산 영화 (61.6%) 선호도가 현저히 높다(한국일보, 1967. 11. 14, 5면). 1960년대 중반에 유행한 청춘영화는 해방 전후에 출생 해 미국 대중문화에 익숙했던 4·19세대 중심의 젊은 관객 에 의해 지지받았다. <맨발의 청춘>(1964, 김기덕),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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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1966, 정진우)를 비롯한 청춘영화는 아카데미극장과 주변의 도시공간에서 어슬렁거리는 젊은 관객층의 장르였 다. 청춘영화가 대부분 일본 시나리오를 번안한 작품이었 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한계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에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의 풍속도이기도 했다. 1960년대 스릴러액션 장르는 주로 신진 감독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 이만희), <안 개 낀 거리>(1963, 강범구), <마의 계단>(1964, 이만희) 등은 만주 대륙과 일본, 홍콩을 넘나들며 사나이의 로망을 호쾌한 액션에 날렸다. 이 영화들은 스타일과 소재의 확 장을 이루었지만 ‘액션은 강조되지만 스릴러는 약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액션스릴러와 함께 남성 관객에게 소구했던 또 다른 장 르로 검객영화를 들 수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007> 시리즈, 마카로니 웨스턴, 호금전(胡金銓), 장철(張徹) 감 독 등의 홍콩 무협, 검객영화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우리 나라에서도 유사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일지매 삼검객>(1967, 장일호), <황혼의 검객>(1967, 정창화), <수라문의 혈투>(1967, 김시현) 등의 검객영화는 한 ‒ 홍 합작영화로 이어지면서 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유사성 을 형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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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영화−반공 · 계몽영화, 문예영화 1960년대 장르 현상 중 일부는 영화법과 정책에 의한 것 이었다. 외화 수입 쿼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수영화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영화를 제작해야 했고, 반공·계몽 영화가 주된 대상이었다. 영화 검열이 가혹해지면서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7인의 여포로>(1965, 이만희)는 북한 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 았고, <춘몽>(1965, 유현목)은 반라 장면으로 음화 제조 혐의를 받았다. 이 밖에도 정치 소재의 영화나 어둡고 우 울한 분위기의 영화도 검열의 대상이었다. 이와 달리 반 공·계몽영화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작품들이었 다. 1968년의 검열편수 212편 중 반공물은 24편, 11.3%, 계몽물은 20편, 9.4%로 20.6%의 영화가 이 범주에 포함 된다. 그러나 상당수는 쿼터를 목적으로 제작되어 개봉도 하지 못했다(󰡔영화·연예 연감󰡕 1969, 101). 한편, 문예영화는 우수영화에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포 함되면서 외화수입쿼터 확보를 위해 제작되었던 1960년 대의 정책 장르현상이었다. 따라서 소설 원작이 있는 영 화 전체를 지칭하기보다 이 시기의 단속 장르로 볼 수 있 으며, 향토성이 짙은 작품에서 현실 비판적인 영화에 이르 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문예영화는 <안개>가 15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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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관객을 동원한 후 몇 편의 영화가 흥행에도 성공하 면서 작품성과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얻은 장르이기도 했 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로 불리는 <귀로>(1967, 이만 희),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 김수용), <장군의 수염> (1968, 이성구) 등은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받은 영상미학을 선보이면서, 도시의 소외와 근대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 해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 상은 1968년 후반기 우수영화 심사 대상에서 문예영화가 제외되면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참고문헌 김미현(2013). 󰡔한국 영화 정책과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국제영화사(1969). 󰡔영화·연예 연감󰡕. 국제영화사. 이영미(2001). 󰡔한국현대예술사대계 Ⅲ󰡕. 시공사. 이영일(1972). 마비와 혼미의 시대. 󰡔영화예술󰡕, 1972년 4월호. 조준형(2010). 󰡔영화제국 신필름: 한국 영화 기업화를 향한 꿈과 좌절󰡕.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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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유신시대와 청춘 문화 (1972∼1979)

한국 영화는 1960년대의 황금기를 지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성장에 따른 텔레비전의 보급, 국민들의 오락 성향과 형태의 다양화, 영화의 질적 하락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무엇보다 유신시대 가혹한 검열과 정책의 영향으로 국책 영화가 양산된 점이 가장 큰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대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인기를 얻었고 하위 장르가 출현했으며 청년 문화가 영화에 담겨졌다.


영화 산업의 침체 1970년대의 본격적인 경제성장과 도시화는 서울을 비롯한 위성도시의 인구 밀집과 공간의 확장을 가져왔다. 1955년 에서 1975년까지 서울의 인구는 157만 명에서 1975년 689 만 명으로 4.39배 증가하면서 총인구의 19.8%가 거주하는 거대 도시로 변모했다(김미현, 2008).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노동시간 증가와 레저 문화 형 성은 유신시대 질적 경쟁력을 잃은 영화 산업의 몰락을 부 추겼다.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 HLKZ-TV가 개국하면서 시작되었고 1966년부터 KBS-TV가 전국에 전파를 송신했 다. 1965년에 0.61%에 불과하던 가구당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률이 1979년에 79.1%로 증가하면서 대중매체로 위 상을 굳혔다. 1969년 1억 7300만 명에 육박하던 영화 관객 수는 1976 년에 70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고, 같은 해 각각 5∼6회 에 이르던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도 1.8회로 급감했다. 1969년에 최대 제작편수였던 229편은 1970년대 100편 내 외로 떨어졌으며, 전국 극장 수는 1971년 717관에서 1978 년 488관으로 감소했다. 관객의 외화 선호도 명백히 증가 해 한국 영화 점유율은 20∼30% 내외로 축소되었다(김미 현, 2006,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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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업의 침체는 유신시대 검열을 비롯한 통제 정책 의 결과이기도 하다. 1970년 8월 6일 3차 개정 영화법이 공포되었고, 4차 영화법 개정은 1973년 2월 16일 이루어 졌다. ‘유신 영화법’이라 불리는 4차 개정 영화법은 영화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전환해 문화공보부의 허가를 받아야 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고, 3차 개정에서 분 리되었던 제작업과 수입업을 다시 통합했으며, 3∼4년간 중단했던 외국 영화 수입 쿼터 보상 제도를 부활했다. 유신헌법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이 국가 위기 상태에서 유보·축소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강력한 이중검열을 실시했다. 한편, 통제와 육성의 모순적인 정책 방향이 더 욱 강화되었다. 국가 주도의 정책을 수행하는 행정기구로 영화진흥조합에 이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했고, 매년 국 책영화제작을 비롯한 영화시책을 발표해 영화 수급계획, 제작 수입 쿼터 배정 등의 구체적 방침을 하달했다(김미 현, 2013, 14∼16).

영화 기술의 변화 1970년대의 영화는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었으나 장비의 부족과 노후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졌고 테크니 스코프(techniscope) 방식의 촬영이 전체 제작편수의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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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를 차지했다. 테크니스코프는 영화의 한 숏이 필름의 4프레임에 찍히는 것을 2프레임에 촬영하고 현상을 통해 다시 확대해 2.35: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을 구현하 는 방식이다. 네거티브 필름이 절반밖에 소요되지 않아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영세한 영화 현장에 서 경제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김미현 2005). 1970년을 전후해 <몽녀>(1968, 임권택), <지지하루의 흑태양>(1971, 장석준) 등이 입체영화로 촬영되었고, <춘 향전>(1971, 이성구)이 한국 영화사의 유일한 70mm 영화 로 촬영되었다. 이와 같은 기술의 활용에는 장석준, 유재 형, 서정민 등의 촬영감독들이 자체 제작하거나 개조한 영 화 장비가 사용되었다. 한국 영화의 기술적 결함으로 지적되어 온 후시녹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대원군>(1968, 신상옥)에서 이례 적인 동시녹음이 이루어졌다. 한국 영화의 동시녹음은 영 화계의 오랜 과제였으나 1980년 초에 비로소 정착되었다.

대중소설 영화와 청춘 문화 1974년 최인호 소설을 각색한 <별들의 고향>(이장호)이 46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한 후, <어제 내린 비>(최인호 원작, 1974, 이장호),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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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테크니스코프 촬영 실례 네거티브필름

현상 필름

출처: <섬개구리 만세>(1972, 정진우)

<사진 8> 장석준이 제작한 입체영화 촬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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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김호선), <바보들의 행진>(최인호 원작, 1975, 하길 종), <겨울여자>(조해일 원작, 1977, 김호선) 등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대중소설의 영화화가 이어졌다. 이 영 화들은 해방 후 한글로 교육받은 ‘제3세대’ 작가 소설을 각 색한 것으로, 젊은 감독들이 영화 흥행작으로 만들어 내면 서 다수 제작되었다(안병섭, 22∼24). 대중소설의 영화화 흐름은 비극적 여 주인공의 인생 여 정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1970년대 호스티스 소재 영화의 기류를 형성하기도 했다. <별들의 고향>의 경아가 도시적 감상 속에서 떠도는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면,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도시화의 바람에 상경해 식 모, 여공, 차장, 창녀를 전전하는 밑바닥 인생의 절망과 희 망을 보여주었다. 1975년 김호선, 변인식, 이장호, 하길종, 홍파 등의 신 인 영화인들은 ‘영상시대’를 결성해 청년문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한국 영화의 예술화 운동’을 지향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동인지 ≪영상시대≫를 발간하고 신진 인력을 양성하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 했다. 영상시대의 대표작 <바보들의 행진>(1975, 하길종) 은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 장발 단속, 단체 미팅, 희망 없 는 연애 같은 청춘 풍속도와 시위로 얼룩진 대학(영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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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검열로 대학 간 운동시합 장면으로 교체되었다) 등 시대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송창식의 가요들이 영화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주제가 ‘고래사냥’은 4·19 혁 명의 이상이 좌절된 비극을 주인공의 자살에 빗대어 은유 적인 가사로 풀어 내었다. 하길종 감독은 1972년 <화분>으로 데뷔해 1979년 <병 태와 영자>를 마지막으로 타계한, 유신시대를 살았던 감 독이다. 그는 <화분>에서 ‘청와대’를 상징하는 ‘푸른 집’ 사람들의 성적 타락과 폭력을 통해 한국 정치의 단면을 그 리고자 했으며, 이후 영화에서도 시대에 대한 정치적 알레 고리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화 청년의 이상이 현 실에 번번이 좌절을 겪으면서 “한국 영화는 세계 속의 어 디쯤 있는가. 아무 곳에도 없다. 싹도 없고 잔해도 없다. 설익은 모방과 지저분한 상혼만이 있다”(하길종 1982, 345)고 탄식했다. 1970년대의 청년 문화는 음울했던 시대 를 자기 파괴와 낭만적 저항으로 넘어서려 한 청년의 자화 상이었다.

정책 영화와 장르 3, 4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화진흥조합에 이어 영화진 흥공사가 발족하면서 국책 영화의 직접 제작이 이루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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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첫 번째 작품 <증언>(1973, 임권택)은 육해공군의 지 원을 받아 강원도와 인천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로케이션 을 했고, 한강 다리, 전투기 등의 미니어처 촬영과 최첨단 특수효과 기술에 이르기까지 대규모로 제작되었다. 이어 반공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이만희), 새마을운 동 홍보영화 <아내들의 행진>(1974, 임권택)을 비롯한 총 5편이 제작되었다. 영화시책에 따라 민간 영화제작사에 서도 반공, 새마을 정신, 호국, 멸사봉공 등을 소재로 ‘민 족 주체성의 확립’과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하는 국 책 영화를 제작했다. 1970년대 장르 현상 중에 특징적인 것은 하이틴영화다. 하이틴영화는 1970년대 중·후반에만 존재했던 단속 장 르이며 십대 고교생을 관객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문화적 현상이다. <고교 얄개>(1976, 석래명)는 서울 관객 26만 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여고졸업반>(1975, 김응천), <진짜 진짜 잊지마>(1976, 문여송)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1976년에만 25편의 하이틴 영화가 제작되었고, 석래명, 김응천, 문여송 감독이 주로 활동하면서 하이틴 스타를 배출했다(안재석, 2006, 243∼245). 그러나 1977 년 상반기 우수영화 선정에서 제외되면서 퇴조한 정책 장 르 현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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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장르 중에서는 홍콩 영화의 영향을 받은 무협 장르 와 스파이 영화가 재개봉관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편, 김기 영, 김수용, 유현목, 이만희, 임권택 감독 등도 수작을 내놓 았고, 1960년대 윤정희, 남정임, 문희에 이어 장미희, 유지 인, 정윤희가 신 트로이카 여배우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참고문헌 김미현(2005). 󰡔한국시네마스코프에 대한 역사적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김미현(2006). 영화 산업의 침체와 TV의 영향, 김미현 편, 󰡔한국영화사: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김미현(2008). 근대화의 경험, 도시를 걸어가는 주체의 공간성. 󰡔영화연구󰡕, 36호, 41∼63쪽. 김미현(2013). 󰡔한국 영화 정책과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안병섭(1975). 제3세대 영화의 기수 이장호 감독. ≪월간 영화≫, 1975년 5월호. 안재석(2006). 십대 관객층의 형성, 하이틴 영화. 󰡔한국영화사: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하길종(1982). 한국 영화의 가능성. 󰡔사회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 전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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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민주화와 전환의 시대 (1980∼1989)

1980년대는 정치·사회·영화사적으로 구조적인 전환의 시기였다. 이장호와 배창호 감독에 이어, 장선우·박광수·이명세 등 ‘코리안 뉴 웨이브(Korean New Wave)’가 등장하면서 영화운동 정신과 충무로 영화계와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제 5, 6차 영화법 개정은 제작·수입의 자유화와 미국 영화의 직접 배급을 시작으로 영화 산업 구조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문화 정책과 전환기의 영화 1980년대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성장이 동전의 양면처럼 지배했던 1970년대와 갑작스런 단절 끝에 출현한 듯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을 탄압하고 언 론 통폐합을 단행했으며 문화를 통치 수단으로 적극 활용 했다. 3S(Sex, Screen, Sports) 정책으로 대변되는 문화 정 치의 시작이었다. 1980년 12월 컬러TV 방송을 시작으로 1981년 국풍 81, 소극장(300석 미만 좌석 수 극장) 허용, 1982년 야간 통행 금지 해제, 두발 자율화, 프로야구 출범, 심야 극장 허용에 이어,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 림픽 유치가 결정되었다. 1980년대 한국 영화는 정치적으로 열린 틈새를 비집고 역사적, 사회적, 성적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한 공적 담론 의 장소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시기의 영화들 은 사회 비판적 영화, 토속적 작품, 에로 영화로 구분되기 이전에 권력이 허용한 공간을 전유(appropriate)한 대중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1980년에 제작된 세 편의 영화 <바람 불어 좋은날>(이 장호), <피막>(이두용), <짝코>(임권택)는 전환의 시대를 알리는 서막과 같은 작품들이다. 이장호는 <바람 불어 좋 은 날>에서 도시로 상경한 농촌 청년들의 근대화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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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바람 불어 좋은날>

자의식과 결코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면서, <바보 선언>(1982), <과부춤>(1983),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로 이어지는 시대정신의 변화와 영화적 실 험을 예고했다. 이두용은 <피막>에서 무속을 빌려 살인자 를 처벌하는 굿판을 벌림으로써 억압된 것의 존재와 귀환 을 알렸다. <땡볕>(1984, 하명중), <뽕>(1985, 이두용) 등 의 ‘토속적’ 작품들은 모호한 역사적 시기에 피지배자의 처절한 경험을 통해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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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 <길소뜸>

드러낸다. 임권택은 <짝코>와 <길소뜸>(1984)으로 분단 과 역사적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새로운 작품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제작 · 수입의 자유화, 미국 영화 직접 배급 영화 산업의 구조 변화는 1984년 5차 영화법 개정과 1985 년 6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1960년대부터 소수 제작사의 영화 제작과 수입 독과점으로 인한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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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았고 비판의 소리가 높았지만 영화 산업 자유화는 이 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1985년부터 시행된 제5차 영화법 개정은 외화 수입 업자와 제작업자를 분리해 외화 수입 쿼터를 독점적으로 배정받아 수익을 확보해 온 한국 영화 제작사의 특혜 구 조를 재편했다. 외화 수입업자의 독자 등록이 가능해지 고 외화 수입 쿼터가 폐지되면서 수입업자와 외화 상영편 수는 급증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 영화 시장을 육성하기 위한 자율적인 조치가 아니라 미국의 한국 영화 시장 개 방 압력 탓에 이루어진 갑작스런 개정이었다.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는 1970년대 말부터 한국 영화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1985년 6월 21일 미 무역대표부(USTR)에 통상법 301조를 적용해 한국에 불공 정한 수입 규제가 있다고 제소했다. 1985년 열린 제1차 한 미 영화협상에서, 1987년부터 외국 영화사의 국내 지사 설치를 허용하고, 외화 수입 편수 쿼터제와 외화 수입 가 격 상한제를 폐지할 것 등에 합의했다. 이어 1988년 제2차 한미 영화협상에서는, 외화 수입 심의용 영화 프린트 통관 추천 제도 폐지(1989.1.1), 외화 수입 프린트 벌수 제한 폐 지(1989.1.1.부터 실시하되 1989년 12벌을 시작으로 1년 에 한 편씩 증가하며 1994년에는 완전 철폐), 공연윤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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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회의 외화 심의 절차 간소화(1990.1.1) 등의 사항에 합 의했다. 5, 6차 개정 영화법은 이러한 사항을 반영한 결과다. 1998 년 UIP(United International Pictures)를 시작으로, 20세기 폭스(20th Century-Fox), 1989년 워너브라더스(Warner Brothers), 1990년 컬럼비아 트라이스타(Columbia Tristar), 1993년 브에나 비스타(Buena Vista)에 이르기까지 5대 메이저 직배사가 한국에 지사를 설치했다. 이에 대해 국 내 영화인들의 대규모 반대 집회와 집단행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1988년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가 첫 직 배 영화로서 신영극장(서울 신촌 위치)을 비롯한 5개 지 역 8개 관에서 상영되었고, 1990년 UIP의 <사랑과 영혼 (Ghost)>이 서울극장에서 개봉되어 크게 성공하면서 전 국의 주요 극장에서 미 직배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김미현, 2013, 55∼60).

소극장, 하위 문화, 장르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영화의 극장 개봉은 개봉관 부터 2∼3년에 걸쳐 재개봉관, 재재개봉관, 동시상영관까 지 순차대로 상영되었다. 근대화와 도시 확장은 서울 종 로, 충무로 지역의 개봉관 이외에 인구밀집 지역인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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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화양리, 미아리 등에 위치한 재개봉관의 번성을 가져왔다. 또한 1980년 소극장이 허용되면서 영동, 뉴코 아, 이수극장 등 전국 11개 소극장이 개관한 것을 시작으 로 점차 그 수가 증가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외화 수입 편수가 1985년 27편, 1986년 50편, 1987년 84편, 1988년 175편, 1989년 264편, 1990년 276편으로 급증하면서 극 장수도 1985년 561관에서 1990년 789관까지 늘어났다. 재개봉관의 관객들은 개봉관보다 상대적으로 무협영 화, 공포영화, 액션영화, 에로영화 등 장르성이 강한 영화 들을 선호했다. 1960년대부터 홍콩 영화는 검술영화와 이 소룡(李小龍) 출연작이 인기를 얻었고, 성룡(成龙)의 <취 권>(1978) 이후 쿵푸영화와 홍콩 누아르액션영화로 이어졌 다. 1987년 5월 <영웅본색>(1986)이 재개봉관인 미아리 대 지극장에서 개봉된 후 ‘홍콩 누아르’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첩혈쌍웅>(1989) 등이 개봉관에서 상영되기에 이르렀다. 미국 영화 직접 배급 이후 할리우드 영화의 수입가가 상승하고 구매가 어려워지자 비교적 저작권이 싸고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유럽 영화, 홍콩 영화에 관심을 기울인 영 향도 있었다. ‘저질 수입영화가 판친다’(경향신문 1987년 6월 5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국내 영화계에서 제작한 무협, 액션 영화와 에로 영화가 더해지면서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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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의 하위 문화(sub-culture)를 형성했다. 산업 환경의 이 와 같은 변화는 1990년대 유례없는 예술영화 붐을 일구는 조건을 형성하기도 했다.

영화 운동과 코리안 뉴웨이브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면 서 대학 영화패를 중심으로 ‘열린 영화’, ‘민중 영화’, ‘민족 영화’, ‘소형 영화’ 등의 기치를 걸었던 영화 운동이 출현했 다. 우리나라의 문화 운동은 1970년대 후반 프랑스문화원 시네클럽, 독일문화원 동서영화동우회 등에서 활동한 문 화원 세대에서 시작되었으나, 1980년대는 실천적인 교육, 투쟁의 수단으로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다는 점에 서 차이가 있다. 대학 영화패는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대학 서클 활 동이 활발해지자 활기를 띠게 된다. 서울대학교 영화연구 회 얄라셩, 고려대학교 돌빛, 경희대학교 그림자놀이, 명지 대학교 필름아트, 서강대학교 영화공동체, 성균관대학교 영상촌, 연세대학교 영화패, 외국어대학교 울림, 이화여자 대학교 누에, 한양대학교 소나기 등이 있었고, 1987년 13개 영화패가 대학영화연합을 결성했다(신강호, 289∼291). 1986년 서울영상집단은 소규모 영화단체를 통합해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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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 <성공시대>

랑새>(1986) 등을 제작했고, 1980년대 후반 장산곶매, 푸 른영상 등은 <상계동 올림픽>(1988), <파업전야>(1989) 등을 제작해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순회상영하며 조직 적인 문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단편영화도 다수 제작 되어 청년 인력의 영화 활동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 말 코리안 뉴웨이브(Korean New Wave)는 대학 영화패를 중심으로 대안 영화를 모색했던 일련의 영 화인들이 충무로에 입성해 해외 영화제에서 중국 5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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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 <칠수와 만수>

대만 뉴웨이브와 비견되는 평가를 받으며 형성되었다. 장선우는 초기작 <서울황제>(1986), <성공시대>(1988) 등을 통해 광주 민주화 항쟁과 자본주의의 상업적 타락 을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그려내었으나, <경마장 가는 길>(1989),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꽃잎>(1996), <거짓말>(1999) 등 성을 매개로 개인과 역사의 위선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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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3> <개그맨>

트는 형식 파괴적이고 논쟁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반면, 박광수는 <칠수와 만수>(1988), <그들도 우리처 럼>(1990),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이재수의 난>(1998) 등에 이르기까지 민 주화운동과 저항의 역사를 일관된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 려내었다. 이명세는 <개그맨>(1988)에서부터 사회 저항 적 영화 대신 꿈과 판타지가 뒤섞인 드라마를 통해 독특한 미학의 작가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의 영화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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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인력의 구조 변화 시기에서 중심적인 감독군으로 부상 했다.

참고문헌 김미현(2013). 󰡔한국 영화 정책과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신강호(2006). 새로운 영화, 대안적 영화를 모색하며. 김미현 편, 󰡔한국 영화사; 개화기에서 개화기까지󰡕(289∼291).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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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영화 산업 구조 변화와 제작 경향 (1990∼1999)

1990년대부터 미국 영화의 직접 배급이 정착했고, 삼성, LG, 대우 중심의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에 진입했으며, 비디오와 케이블 TV가 부가시장을 형성했다. 충무로 영화계는 산업 자본의 수혈을 받았고 이에 조응하는 기획 영화와 장르가 제작되었다. 영화 시장 개방 결과 한국 영화 제작편수와 시장점유율이 감소했지만, 다양한 외화가 상영되면서 예술영화 붐이 일어났고,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영화잡지의 창간 등이 잇따라 영화 문화의 저변이 풍성해졌다.


영화 시장 개방의 영향 미국 영화의 직접 배급이 정착하면서 1980년대 초 40%대 까지 올라갔던 한국 영화 시장점유율은 1993년 15.9%까 지 떨어졌다. 1990년을 전후해 100∼120여 편이던 한국 영화 제작편수도 1998년 43편까지 감소했다. 반면, 직접 배급을 포함한 외화 상영편수는 날로 증가해 1996년 405 편까지 치솟게 되었다. 영화인들은 ‘스크린 쿼터 감시단’ 을 조직해 사문화한 스크린 쿼터 제도를 통해 한국 영화의 상영 기회를 확보하고자 했다. 1994년 이후 프린트 벌수 제한 조치가 풀리면서 시장 개방의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프린트 벌수 제한은 개봉관 수와 흥행 규모가 제한된다는 의미다. 1994년 이전에 전 국 동시 개봉관수는 6∼20개 규모였지만 1994년 프린트 벌수가 폐지된 후 미 직배 영화들은 전국 40여 개 관에서 개봉했다. 1994년 삼성영상사업단이 수입한 <컬러오브나 이트>가 전국 51개 관에서 개봉되었고, <태백산맥>(임권 택)도 한국 영화로서 처음으로 46개 관에서 확대된 규모 의 개봉을 시작했다(김미현, 2013, 58∼60).

대기업의 영화 산업 진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비디오 시장이 급성장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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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삼성, LG, 대우 등의 가전 3사는 소프트웨어 시장에 눈 을 돌렸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비디오 시장은 극장 시장 규모의 4∼5배에 이르는 1조 원대에 육박하고 있었고, 1995년 종합유선방송이 시작되면서 영화 케이블 시장이 출현했다. 1992년 삼성이 비디오 판권 구매 형식으로 투자한 <결 혼이야기>(김의석)가 크게 성공하자 1990년대 중반까지 대우, 벽산, 해태, 한보, SKC, 새한, 진로 등 20여 개 대기 업이 영화 산업에 진출했다. 특히 삼성과 대우는 각각 영 상사업단과 영상음반사업부를 결성해 영화 제작과 수입 배급뿐만 아니라, 극장(삼성 ‒씨넥스, 명보극장, 서울극 장·대우‑씨네하우스, 대한극장, 스카라 극장), 영화 전문 채널(삼성‑캐치원, Q채널·대우‑DCN), 홈비디오 업체 (삼성‑드림박스, 스타맥스·대우‑우일영상, 씨네마트)까 지 운영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대기업의 구 조조정이 시작되면서 1998년 1월 SK가 영상사업을 포기 했고, 1999년 대우가 영상음반사업부를 해체하고 멀티플 렉스 등을 동양에 매각했다. 1999년 삼성영상사업단이 <쉬리>(강제규)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유상욱) 의 배급을 마지막으로 해체함으로써 대기업 자본의 영화 산업 1차 진출은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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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금융자본의 영상 산업 진출도 이루어졌다. 금융자본의 영상 산업 투자는 벤처 투자 열풍이 불면서 일 어난 정부의 전폭적 지원에 의해 시작되었다. 1995년 일 신창투의 <은행나무 침대>(강제규)가 금융자본이 투자한 첫 영화이며, 본격적인 활동은 1998년 미래영상벤처 1호 가 영상전문투자조합을 결성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영 상전문투자조합은 한국 영화 투자 자본의 중요한 재원으 로 일정 규모의 자본을 조성하고 이를 여러 작품에 분산투 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김미현, 2013, 70∼71).

기획 영화와 장르 대기업의 영화 산업 진출은 한국 영화 편당 제작비의 증 가와 제작편수의 감소를 가져왔다. 1996년 평균 제작비 는 10억 원(순제작비 9억 원, 마케팅비 1억 원)이었으나, 이후 총 제작비에서 마케팅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 으로 증가해 1999년에는 총 제작비 19억 원(순제작비 14 억 원, 마케팅비 5억 원)으로 늘어났다. 1990년대 제작편 수가 감소한 것은 직배 영화의 영향과 더불어 대기업 투 자 전략의 결과이기도 했다. <은행나무 침대>(1996, 강제 규), <쉬리> 등을 비롯해 PC통신 소설을 영화화한 <퇴마 록>(1998, 박광훈) 등 고제작비 영화의 출현은 산업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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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시대 변화의 산물이었다. 1990년대 ‘기획 영화’라는 용어는 한국 영화 산업에 스 타시스템, 마케팅과 홍보의 강화 등 할리우드식 전략을 도 입해 합리적인 투자 결정을 통해 제작한 상업 영화 현상을 일컫는다. 신진 기획 프로듀서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신씨네, 씨네 2000, 기획시대, 영화세상, 우노필름, 명필 름 등은 대기업 자본과 기획 역량을 결합했다. <투캅 스>(1993, 강우석), <마누라 죽이기>(1994, 강우석), <닥 터봉>(1995, 이광훈) 감각적인 웃음의 로맨틱코미디 와 액션 장르는 비디오, 케이블 시장에서 성공한 장르이기 도 했다. <하얀 전쟁>(1992, 정지영), <우리들의 일그러 진 영웅>(1992, 박종원), <개 같은 날의 오후>(1995, 이민 용) 등 역사와 현실을 깊게 되새긴 작품들은 여전히 제작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시장을 주도한 기획 영화는 한 국 영화가 ‘코리안 뉴웨이브’로 대변되는 1980년대의 정 치·사회적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역사적 징후이 기도 했다(김영진, 2006, 325∼327). 1993년 <서편제>(임권택)는 개봉관 단성사에서 장기 상영해 100만 관객(전국 추정 220만)을 동원하며 민족 문 화와 ‘한’의 정서를 담론화하는 국가적 현상이 되었지만, 단일 극장 개봉을 통해 최대 관객을 동원한 마지막 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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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영화 문화의 재형성 1990년대에 외화 수입 자유화의 결과로 그동안 상영되지 못했던 동유럽 영화를 비롯한 예술영화가 다수 개봉되었 다. 1995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감독의 <희생(Offret)>(1986)이 서울에서 3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 순위 10위에 오르는 이변이 발생했다. 1995년 5월 주간지 ≪씨네21≫과 월간지 ≪키노≫에 이어, 12월 월간지 ≪프리미어≫가 창간했다. 1996년 부 산국제영화제의 출범에 이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여성영화제, 서울청소년국제영화 제 등의 국제 영화제를 비롯해 전국에서 크고 작은 영화제 들이 개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영화 산업의 확 대와 함께 1980년대 대안문화가 ‘씨네필’의 예술적 소비로 이동하면서 발생했다. 대중문화의 다양한 소비가 가능해 지면서 고급 문화를 향수하려는 관객층의 분화와 저변 확 대를 맥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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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주의 감독의 출현 1990년대에는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이 차례로 첫 작품을 발표했다. 박찬욱은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으로 ‘매력적인 B 급 영화’를 선보였으며, <공동경비구역 JSA>(2000)을 거 쳐, 복수 삼부작과 <박쥐>(2009),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 커>(2013)까지 인간의 욕망과 탁월한 미장센을 결합한 작 품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홍상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 일상의 소소한 사건과 관계가 얽혀 조금씩 진전되지만 되풀이되 는 플롯을 구성하고, <강원도의 힘>(1998), <오! 수 정>(2000), <극장전>(2005), <우리 선희>(2013)까지 거의 매년 작품을 발표했다. 김기덕은 <악어>(1996)에서 어디에도 존재할 것 같지 않았던 삶의 원초적인 욕망과 폭력성을 세상에 알렸다. <파란대문>(1998), <섬>(2000), <나쁜 남자>(2001), <빈 집>(2004), <피에타>(2012), <뫼비우스>(2013)까지, 홍 상수와 더불어 저예산 독립 제작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면 서, 작가적 기표로 가득한 스타일로 (유사)장르적 흐름을 이끌었다. 이창동은 <초록물고기>(1997)에서 <박하사탕>(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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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4> <JSA>

<사진 15>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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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 등까지, 때로는 시간의 재배열과 판타지를 통해, 때로는 인간의 이 중적 윤리와 이미지를 통해, 현실에 정면으로 진입하는 서 사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2000년에 <플란더스의 개>로 데뷔해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 (2013)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장르적 감각으로 탁월하게 그려낸 봉준호와 함께 2000년대를 걸쳐 작가주의 감독이 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 영화감독으로 부상했다.

참고문헌 김미현(2013). 󰡔한국 영화 정책과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김영진(2006). 코미디의 새로운 감각, <결혼이야기> <투캅스>. 김미현 편, 󰡔한국영화사: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325∼327).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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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화 산업과 상업적 작가주의 (2000∼ )

2000년 이후의 한국영화계는 ‘성장’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영화 산업과 문화를 진흥하기 위한 지원 중심의 정책이 집행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영화 산업 자본과 인프라가 확대되어 한국 영화의 성공 요인이 되었다. 디지털 매체가 필름을 대신해 유통 환경을 변화시키면서 이전 시기부터 활동했던 주요 감독들과 신인들이 함께 다양한 영화를 창작하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의 특징은 산업의 틀에서 장르영화를 변형, 발전시키는 상업적 작가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영화 정책 변화와 성공 요인 1990년대 중반부터 영화를 진흥의 대상으로 간주한 입법 과 정책이 시작되었다. 1995년 12월 제정된 영화진흥법은 2006년 4월 28일 ‘영화및비디오물의진흥에관한법률’(이 하 영비법)이 시행되기까지 한국 영화 정책의 주요 변화 를 규정했다. 2012년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는 ‘영화및비 디오물의진흥에관한법률’은 영화진흥법과 ‘음반·비디오 물및게임물에관한법률’(이하 음비게법)에서 각각 구분하 던 영화와 비디오의 관련 법제를 통합한 것으로 뉴미디어 시대의 콘텐츠 개념을 담고 있다. 한국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다음 사항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영화 정책이 ‘규제에서 지원으로’ 변화 했다. 1997년 검열 제도가 폐지되고 ‘상영등급제’가 도입 되어 분단을 비롯한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한 창작의 자유 가 확대되었고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한 공공 부문의 지 원이 대폭 증가했다. 둘째, 1980년대 말부터 창의적 인재 의 유입이 확대되어 새로운 영화 세대가 주역으로 부상했 다. 셋째, 영화 산업에 대한 대기업의 투자와 자본이 유입 되었다. 넷째, 멀티플렉스가 확대되어 관람 환경을 개선 했고 관람을 위한 인프라가 확충되었다. 다섯째, 디지털 등의 기술 혁신으로 저예산 영화의 창작과 다양성이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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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한국 영화 지원 정책 중 스크린 쿼터제는 한국 영화 산 업을 보호해 온 대표적인 정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 라에서 1966년부터 이 제도가 명문화했지만, 1993년 미국 영화의 직접 배급으로 한국 영화 산업이 위기에 처하자 영 화인들이 자발적으로 ‘스크린 쿼터 감시단’을 조직해 활동 하면서 비로소 살아 있는 보호정책이 되었다. 1984년 5차 개정영화법부터 연간 상영일수 5분의 2 이상(146일, 40%) 으로 강화해 유지되고 있었으나 2007년 7월 1일부터 한미 FTA 현상의 선결 조건으로 의무일수가 축소되어 73일 (20%)로 시행되고 있다.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는 1974년 이후 운영해 온 영화 진흥공사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민간 전문가 9인의 자율적 조직으로 탄생하면서 영화 정책 집행 기구로 출범했다. 국내 영상 산업 진흥 및 문화 다양성 확대를 위한 정책과 해외 영화제와 마켓을 중심으로 한국 영화의 글로벌화를 지원하고 있다. 이 밖에 영화인 교육 기능, 정책 연구 기능 등이 강화되었고, 2007년부터 ‘영화발전기금’이 신설되어 영화진흥금고의 이월금과 국고 출연금, 영화관 입장요금 의 100분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을 조성해 진흥재원을 집행 하고 있다(김미현, 2013,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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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업 구조와 멀티플렉스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영화 산업은 양적, 질적 성장을 이 어갔다. 2000년에서 2012년까지 극장 시장 규모는 3460 억 원에서 1조 4551억 원으로, 국민 1인당 극장 관람회수 는 1.3회에서 3.83회로, 한국 영화 제작편수는 59편에서 229편으로, 스크린 수는 720개에서 2081개로, 한국 영화 점유율은 35.1%에서 58.8%로 증가했다. 1990년대 말부터 대기업의 2차 진출이 이루어져 영화 산업의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다. 대기업의 1차 진출이 비 디오 판권 구입과 영화 제작 투자를 통해 시작되었다면, 이후의 CJ 엔터테인먼트, 동양, 오리온(동양그룹에서 분 사), 롯데는 멀티플렉스 체인을 기반으로 투자 ‒배급 영역 에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영화 투자의 위험을 방어(hedge) 하면서 진입했다. 2000년대 중·후반 SK, KT 등의 통신자 본 등도 영화업에 투자했고, 시네마서비스, 싸이더스, 명 필름 등의 중견 제작사도 다양한 방법으로 투자 ‒배급 ‒상 영 시장에 진출했으나 모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013년 현재, CJ E&M과 롯데는 투자 ‒배급 ‒상영을 가 로지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형성하고, 전체 배급, 상영 시장 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어 자유경쟁 시장(free-booking market)을 왜곡하고 블록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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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특히 CJ E&M은 CJ엔터테인먼트-CGV-CJ미디어(케이 블, 게임, 온라인)에 걸쳐 미디어 산업 전반에 이르는 통합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부가시장은 2000년대 이후 비디오를 대 체한 DVD가 온라인 불법 유통의 영향으로 시장을 충분 히 형성하지 못했고, 방송통신 융합과 뉴미디어의 발달 에 의해 DMB(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가 출현 했으나 역시 산업적 의미는 확보하지 못했다. 2010년 이 후 IPTV(Internet Protocol TV)와 온라인 다운로드 등을 중심으로 부가시장이 성장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멀티플렉스는 복수의 영화를 상영하는 최소한 7개 스 크린 이상의 극장을 말하며, 쇼핑몰이나 놀이동산과 연계 되어 복합적인 상업, 문화 공간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의미의 멀티플렉스가 도입된 것은 1998년 강변CGV가 11개 스크린으로 설립되면서다. 2000 년대 이후 멀티플렉스는 점차 규모와 영향력이 확대되어, 2012년 말 전국 2018개의 스크린 수 중 95% 이상 점유하 고 있다. 2012년 현재 멀티플렉스는 영화 투자, 배급, 상영 의 수직 계열화를 이룬 CJ(CGV), 롯데엔터테인먼트(롯데 시네마), 씨너스와 통합한 메가박스가 3대 멀티플렉스 체 인으로 형성되어 있다(김미현, 2013, 7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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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블록버스터 한국 영화 제작비가 상승하고 극장 중심으로 영화 시장이 재편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고제작비 액션 장르를 일컫는 주류 상업 영화의 제작 경향을 상징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최초로 표방한 영화는 1998년 <퇴마록>이 며, 1999년 <쉬리>가 620만 관객을 동원하자 할리우드 블 록버스터를 형식적으로 차용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민족 적 감성을 결합한 영화로 형성되었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박찬욱), <친구>(2001, 곽경택)의 성공에 이 어, 10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2004, 강우 석),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제규)가 차례로 등장했 다(김경욱, 2006, 289∼291). 2013년까지 <왕의 남자>(2005, 이준익), <괴물>(2006, 봉준호), <디워>(2007, 심형래), <해운대>(2009, 윤제균),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추창민), <도둑들>(2012, 최 동훈), <7번방의 선물>(2013, 이환경) 등 9편의 영화에 1000만 이상의 관객이 찾았다.

장르 혼합적 성격과 상업적 작가주의 한국 영화의 주요한 특징은 상업적 성공과 작가적 표지가 적절히 결합한 상업적 작가주의로 정의할 수 있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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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이후의 한국 영화계는 1962년 데뷔한 임권택 감독이 여전히 활동하는 가운데 1980, 1990년대 데뷔한 주요 감 독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는 작가군을 형성하고 있다. 그 뒤를 잇는 감독들 이 영화 산업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고, 다수의 신인 감독들이 진입하면서 가능성을 잇는 풍요로운 토양 을 조성하고 있다. 작품 경향은 매우 역동적이며 특정 장르가 주도하기보 다 다양한 영화들이 동시에 나오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조폭마누라>(2001, 조진규) 이후 조폭 코 미디가 다수 제작되었으나, 장르 현상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블록버스터 중심의 액션영화, 멜로드라마, 코미 디, 공포, 스릴러, 누아르, 사극까지 다양한 장르가 포진되 어 있으며, 이 중 공포영화가 여름철에 제작되는 계절적 장르로 자리 잡은 것과 역사적 상상력에 기초한 사극이 제 작되기 시작한 것이 특징적이다. 장르 혼합적(hybrid) 경 향의 공존이 주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2007년 이후 한국 영화 제작편수가 연간 100∼230편까 지 증가한 것은 디지털을 이용한 다양한 창작 시도가 가능 해진 덕분이다. 상업적인 규모로 제작되고 유통되는 영화 는 연간 50∼70편이라 할 수 있으며, 제작편수의 절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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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 10억 이하의 저예산 영화다. 다수의 신인감독들이 장편 극영화를 소규모 예산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화 문화와 미래 창작군의 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한국 영화 산업의 성장은 할리우드의 절대적인 세계 시 장 지배력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안정성 여부 는 불투명하다. 영화 산업의 성장은 일시적일 수 있으며 관 객 수요는 늘 유동적이다. 한국 영화의 역사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언제나 창작 인프라와 관객의 문화일 것 이다.

참고문헌 김경욱(2006), <쉬리>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김미현 편, 󰡔한국 영화: 개화기에서 개화기까지󰡕(289∼291). 커뮤니케이션북스. 김미현(2013). 󰡔한국 영화 정책과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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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현 영화진흥위원회 국제사업부 팀장이며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 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한국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역사 적 연구󰡕(2005)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7년 가을학기부터 1년간 하버드 대학 시각예술학부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지냈 다. 2001년 영화진흥위원회에 입사한 후 한국 영화사를 비롯 해 영화산업과 문화정책을 연구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주요 저술로 󰡔한국영화사: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책임편 집, 2006), 󰡔창의성에 대한 11가지 생각󰡕(공저, 2009), 󰡔한국 영화 정책과 산업󰡕(2013) 등이 있고, 논문에는 “<안개>의 모 더니즘과 비판적 근대성”(2012), “한국영화 자본조달 구조와 유형에 대한 연구”(2012), “지역의 영상정책 사례: 한국과 프 랑스의 지역협력형 사업을 중심으로”(201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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