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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김정희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이야기와 인간, 네버 엔딩 스토리

이야기의 본질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요?”라는 말을 던졌을 때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지 않는 사람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이야 기는 분명 우리의 관심과 흥미를 자극하는 무언가를 가지 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이야기들과 마주치게 된 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는 이웃들의 이야기, 자동차 안 에서 듣는 라디오 사연들, 친구나 회사 동료들의 이야기, 신문기사와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오는 이야기, 지인의 블 로그나 SNS에 게시된 이야기 등등. 비단 흥행 영화나 베 스트셀러 소설이 아니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야기를 소비하고 만들어 낸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질리지도 않고 이야기에 탐닉하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 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이 세계와 인생에 대한 의문 을 품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여러 가지 방식 으로 탐구한다. 이야기는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에 서 비롯되어 인생에 대한 해석을 담아낸다. 우리는 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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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야기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 보고 간접적인 체험을 넓혀 가는 것이다. 이는 세계와 인 간이 조화를 이루어 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최초의 서사 시로 알려진 호머의 󰡔일리아드󰡕처럼 이야기는 인류와 연 원을 함께해 왔다. 따라서 고대부터 현재까지, 어린아이 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영원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야기는 계속 변해 간다. 고대에 입 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서사시는 구술 문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장성과 집단성을 바탕으로 구 술되던 이야기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특히 기억이 용이해 야 하므로 반복되는 운율을 살려 지어졌다. 그 후 문자가 발명되고 ‘구텐베르크 혁명’이라 부르는 인쇄술의 발달로 문자 문화에 접어들면서 이야기는 큰 전환을 겪는다. 작 가 개인에 의한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되면서 더욱 예술 적이고 전문 장르로 발전해 갔으며 이야기의 향유 형태 또 한 달라졌다. 구술과는 달리 문자로 고정되고 완결된 이 야기의 형태를 지니며 영원히 보존되는 문학 장르가 형성 된 것이다. 여기에 비견될 만큼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 이 오늘날 디지털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사이에는 영상 문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이야기가 변해오기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무한하다. 다시 말해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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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아무리 변해 가더라도 그 본질적 속성은 영원히 이어 질 것이며 이야기의 영역은 앞으로도 무한히 열려 있다.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고대부터 이어진 구술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최첨단 디지털 미디어 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 방식을 가리키는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오늘날 스토리텔링 은 영상 미디어와 디지털 미디어뿐만 아니라 축제나 테마 파크 등의 오프라인 콘텐츠까지 다양한 미디어에서 활용 한다. 다시 말해 스토리텔링은 책 속에 갇혀 있던 이야기 를 세상의 온갖 콘텐츠들로 새롭게 재현시키며 살아움직 이게 한다.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요?”라는 제안에 귀를 쫑긋 세우 는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호 모 루덴스(Homo Ludens)적인 욕구와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기대가 투영되어 있 다. 이 책은 변치 않는 이야기의 본질을 담고 있는 스토리 텔링의 개념은 무엇인가에 관한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스 토리텔링이 이와 같은 사람들의 욕구와 기대에 어떻게 부 응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하나의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현상에 대한 이해 가 필요하다. 오늘날 스토리텔링이 부상하게 된 배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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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다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 로잡기 위한 이야기의 기본 원리에 대해 제시해 볼 것이 다. 마지막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에 대해 소개해 보겠다.

스토리텔링의 부상 스토리텔링은 태곳적부터 존재했고 언제나 우리 곁에 있 어 왔지만 오늘날 미디어의 변화에 의해 새롭게 부상하게 된 이야기 방식이다. ‘스토리(story)’가 ‘무엇’이라는 내용을 나타낸다면, ‘텔링(telling)’은 ‘어떻게’라는 형식을 나타낸 다. 서사학 용어로는 스토리(story)와 담화(discourse)에 해당한다. 문자 문화의 내러티브(narrative)와 달리 구술적 특성을 띠고 있음을 함의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고대부 터 ‘구술(口述)’의 의미로 오랫동안 존재해 온 개념으로 볼 수 있지만, 최근 미디어의 변화에 의해 촉발된 담화의 변화 양상으로 새로운 용어로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신조어 스토리텔링은 1995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디지털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에서 처음 사용되어 확 산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현재는 최초에 적용된 디지털 미 디어뿐만 아니라 특정한 미디어에 구애 없이 다양한 문화 콘텐츠 장르로 외연을 확장해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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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스토리텔링이 부상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 는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즉 이야기하는 인간에 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향유하고 창 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다. 따라서 미디어의 변화에 의해 아무리 다양한 양식으 로 변화해 가더라도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호응 될 수 있는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 늘날에는 누구나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쉽게 자신 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전달하며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이 마 련되었다. 바야흐로 호모 나랜스의 전성시대다. 우리는 이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으로서 이야기를 다루는 동시에 인간의 의사소통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힘 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스토리텔링이 부상하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로 ‘드림 소 사이어티’라고 하는 미래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이성 중심의 패러다임이 끝나고 우리 사회가 감성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진입하면서 꿈과 감성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가 핵심 역할을 맡게 된 것 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적 경향은 비단 오늘만의 일 은 아니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인류사 전체의 결과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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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하며 수렵채취 사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바 로 정신적인 요소, 즉 이야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사회 였기 때문이다. 다시 부활한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스토리 텔러는 미래의 중요한 인재가 된다. 다양한 문화콘텐츠 산업뿐만 아니라, 감성 마케팅, 정치, 교육, 저널리즘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스토리텔링이 활용되고 있다. 스토리텔링이 구술성을 환기시키는 새로운 이야기 방 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영상과 디지털미디어를 통해 내러티브와는 차별되는 담화적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이 다. 이를 가리켜 ‘제2의 구술성’이라고 부른다. 합리주의 극단에서 사람들은 보다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추구하게 되었고, 이미지를 재현하는 최첨단 기술은 이를 가시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스토리텔링은 ‘신화’ 의 귀환을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근 들어 나타난 판타지 장르의 흥행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스토리텔 링의 부상이라는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호모 나랜스, 드 림 소사이어티, 신화의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해서 제시해 보겠다.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 이야기에 관한 사람들의 욕구와 기대에 관해 앞서 언급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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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 창작에 관한 여러 가지 전략이 요구되겠지만, 우선 마음을 사로잡는 이 야기를 성립시키는 기본 원리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야기의 본질적인 속성에서 출발해 보자.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영원히 이어지고 있는 가 운데 변해 간다고 지적했다. 스토리텔링은 신화와 민담 등 수많은 문화유산의 원형 스토리를 차용해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친근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가간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을 환기시킨다. 바로 ‘상호텍스 트성’이다. 이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오늘날 트렌드에 맞 는 변형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가공하는 방식은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텔링 기획의 기본 원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현 대 문화콘텐츠들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창작의 중요한 논 점을 제공하고 있다. 󰡔시학󰡕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개 념 가운데 하나가 비극의 정서적 효과를 나타내는 ‘카타르 시스’다. 극을 보는 사람은 동일시에 의해 주인공이 겪는 갈등에 깊이 공감하고 마침내 결말에서 이것이 해소되었 을 때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를 자극하는 근원은 바 로 공포와 연민이다. 이 둘은 매우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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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대중서사장르에 흔히 활용되고 있다. 특히 양가적으 로 보이는 두 감정은 결국 동전의 양면으로서, 동시에 주 어질 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매 우 중요한 기제가 된다. 매혹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원리로서 카타르시스를 이해해 보고, 나아가 이것이 주는 정신분석학적 효과까지 다루어보겠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이야기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이야기하는 내용 자체도 매력을 가지고 있어 야 한다. 즉,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내용 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바로 돈·사랑·권력·명예·영 생 등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보편적인 자질로서 ‘이야기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플롯의 패턴이 존재한다 는 사실이나 단순한 픽션을 넘어 보편적 가치와 상징을 담 고 있는 신화가 무수한 콘텐츠들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따라서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나 감정, 오감, 집단무의식 등이 이야기의 테마로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를 논의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본다. 마 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위한 기본 원리로서 상호텍스트 성, 카타르시스, 이야기가치 등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해 소 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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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기법 이제 드디어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 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어 볼 차례다. 이 책은 특정한 이론을 소개하고 심도 있게 논하는 책이 아니므로 서사학 이론에 국한시키기보다는 극작법, 시나리오 작법 등과 더 불어 필요하다면 경험적 사례 분석까지 다양한 방법을 망 라해서 좋은 스토리텔링의 방법에 관한 필자의 견해를 제 시해 볼 것이다. 첫째 키워드로 ‘낯설게하기’를 선정했다. 스토리가 이 야기의 내용이라면 텔링은 이야기의 형식이다. 앞서 제시 한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기본 원리가 주로 소재를 비 롯한 내용적 측면을 설명해 주었다면 낯설게하기는 형식 적 측면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표현해야 하는가를 말해 준 다. 아무리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대중적인 내용을 다루 더라도 흥미나 긴장감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스 토리텔링으로 완성되기 어렵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는 언 제나 새로운 이야기로 신선하게 다가가야 한다. 낯설게하 기 기법을 이해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시간의 불일 치를 비롯한 대표적인 낯설게하기 기법과 함께 서스펜스 를 중심으로 알아보겠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모든 예 술적인 기교를 낯설게하기로 보았으며 그것 자체가 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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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술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경향이 점차 복잡하고 낯선 것을 추구하고 있 다는 사실에도 주목해보겠다. 둘째 키워드로는 ‘캐릭터’를 선정했다. 모든 이야기에 서 캐릭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근본 특성으로서 이야 기를 창작하거나 이해하는 데 보편적인 출발점이 된다. 고유명사의 힘은 강력하다. 좋은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만 으로도 사람들의 정서를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데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스토리텔링에서 캐릭터의 역 할과 중요성에 대해 알아보고 캐릭터를 재현해 내는 여러 가지 방식에 대해서도 제시해 본다. 특히 주인공의 역할 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가지는 공 통적인 자질은 무엇인가,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는 주인공 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등에 대해 살펴보겠다. 또한 지 나치게 플롯 위주로 끌려가지 않고 캐릭터의 고유성과 깊 이를 통해 좋은 스토리를 창작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 보겠다. 셋째 키워드는 ‘공간’이다. 캐릭터나 플롯에 비해 이야 기에서 공간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독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공간은 영상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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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전면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요소이며, 디지 털 스토리텔링에서도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방식 대신 공 간적 특성을 반영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하고 있다. 축제나 전시 등의 문화콘텐츠에서 공간 스토리텔링은 매우 유용 한 방법론으로 응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특히 이야기에 서 공간적 구조의 역할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플롯의 형상 화에 밑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유리 로트만 (Yuri M. Lotman)의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은 스토 리텔링 방법론에서 좀 더 차별된 접근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시해 볼 키워드는 ‘극적 통일성’이다. 다 른 말로 하면 스토리텔링의 완결성을 위한 의미적 일관성 에 관한 부분이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이야기에서 주제의 빈약이나 산만함에 의해 초래되는 혼란은 흔히 지적되는 문제점이다. 좋은 스토리텔링을 위해서는 다른 유사 콘텐 츠와 차별되는 명확한 콘셉트가 설정되어야 하고 이것이 일관성 있게 표출되어야 한다. 즉, 스토리의 각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콘셉트를 드러낼 때 극의 통일 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극적 통일성의 방법론을 습득함으 로써 여러 가지 전략을 녹여 내어 창작하고자 하는 스토리 텔링에 마지막으로 완결성을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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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 이론과 실제󰡕. 인간사랑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으로 보는 콘텐츠 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데이비드 하워드 · 에드워드 마블리 지음, 심산 옮김(1999). 󰡔시나리오 가이드󰡕. 한겨레신문사.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2002). 󰡔시학󰡕. 문예출판사. Durand, Gilbert(1996). Introduction à la Mythodologie. Albin Michel. Ong, Walter(1982). Orality and Literacy. Methu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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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이야기와 인간, 네버 엔딩 스토리

01

호모 나랜스

02

드림 소사이어티

03

신화

04

상호텍스트성

05

카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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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이야기가치

37

07

낯설게하기

47

08

캐릭터

09

공간

10

극적 통일성

1 7

13 21

57 67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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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호모 나랜스

‘호모 나랜스’는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 본능을 가진 존재임을 함의한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야기에는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스토리텔링은 대중의 이야기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을 담아내는 창구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라는 근원적 욕망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는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 본능을 가진 존재임을 함의 한다. 오늘날 스토리텔링이 각광 받고 있는 이유는 이야 기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야기에는 인간의 삶과 세계 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즉, 미토스(mythos)와 로고스 (logos)는 이야기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전달하 고자 하는 바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연구 결과에 의하 면 인간은 언어를 채 다 배우기도 전인 옹알이 단계부터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한다. 그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정 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에 담아내는 것이다.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은 우리가 ‘이야기하기’ 를 멈추지 않는 것은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 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인간 의 짧은 생애에서 이룰 수 있는 경험치는 한정되어 있으므 로 우리는 보다 많은 간접 체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 를 넓히고자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인간의 삶 자 체가 결국 나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가 서로 섞여 가는 상호 교차적인 대화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가 주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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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주의는 한 텍스트의 문화적 실천을 둘러싼 모든 얼개 를 말한다. 즉, 작가 내면적 자아 간의 대화, 텍스트와 텍 스트들 또는 문화적 맥락 간의 대화, 그리고 작자와 독자 간의 대화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특히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호모 나랜스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쉽게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이야기꾼의 시대를 꿈 꾼다(한혜원, 2010). 이러한 맥락에서 스토리텔링은 대중 의 이야기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을 담아내는 창구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힘 이야기는 인간의 의사소통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 순한 정보의 형태가 아닌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몰 입과 공감을 끌어내어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 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예를 들어 <말아톤>이라는 영화 의 흥행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현상은 ‘장애 인에 대한 차별 철폐’라는 추상적인 문구에 비해 이야기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이 훨씬 강력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최혜실, 2006). 영화의 흥행은 영화를 단순히 픽션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과 운 동을 확산시키는 매개체로 만들기도 한다. 영화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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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우 관객들은 인화학교 사건의 재수사를 요구하는 서 명 운동을 벌여 관련 교사 등이 형사 입건되었으며, 결국 ‘도가니법’이라 불리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 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언론이 제대로 담당하지 못했던 역할을 이야기의 힘을 빌려 해결할 수 있었던 사례다. 2008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의 미국 대통령 당 선을 가리켜 ≪뉴욕타임스≫는 ‘서사시의 승리’라고 말했 다. 서사적 정체성을 구현할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캠페 인 내내 타이밍과 리듬을 조절해 이야기를 전달하며, 후보 의 관념적 메시지의 틀을 짜기 위해 은유를 빌려오는 등 서사적 전략이 성공적으로 작용했다는 뜻이다(크리스티 앙 살몽, 2010). 스토리텔링은 현재 경영, 홍보, 마케팅, 정 치 커뮤니케이션, 교육, 의료, 저널리즘 등 사실상 거의 모 든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야기의 속성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서는 이야기의 몇 가지 속성 에 대해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야기는 추상적인 내용의 전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다는 점이 다.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어떤 인물에 의해 어떻 게 사건이 일어났는가가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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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건·배경이라는 소설 구성의 3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법에서는 가능하면 대사 또한 구체적 으로 표현될수록 좋다고 말한다(심산, 2004). 예를 들어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나오는 주인공 형사는 단 순히 “바쁘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마누라 머리 아프다. 그래서 내가 요 앞에 가서 아스피린 사올게! 그러고 쓰레 빠 끌고 나온 지가 벌써 한 달 됐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동일한 상황을 보다 실감나게 전달한다.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 미 아는 이야기에 비유하는 방법은 널리 활용되고 있다. 각종 광고대상에서 수상한 바 있는 SK텔레콤 기업광고를 예로 들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약과 개척 정신을 강조 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 콜럼버스의 이 야기를 도입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지브롤타 해역을 건 너 신세계를 향해 탐험을 떠나면서 “더 큰 세상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기업광고에서는 익 히 알려진 이야기를 먼저 제시한 다음 “2009년 SK텔레콤 도 이렇게 말한다”라는 카피를 통해 매우 간단하고 효율 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으로 스토리텔링에서 이야기는 눈에 보이듯이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효과를 높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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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이야기의 힘’ 제작팀이 진행했던 한 실험 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지하철 안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호 소하면서 “곧 태어날 제 아이가 올 봄에 필 꽃을 볼 수 있 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활용하자 호응도가 매우 높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따뜻한 햇살, 바람에 나부끼는 고운 빛깔 의 벚꽃잎, 공중에 번지는 향기 등에 대한 상상은 우리의 공감각을 자극하면서 훨씬 쉽게 이야기에 몰입하고 감성 적인 판단을 하도록 유도한다.

참고문헌 심산(2004).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해냄. 여홍상(2000). 󰡔바흐친과 문화이론󰡕. 문학과지성사. 조지프 캠벨·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2002). 󰡔신화의 힘󰡕. 이끌리오, 최혜실(2006).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 삼성경제연구소. 크리스티앙 살몽 지음, 류은영 옮김(2010). 󰡔스토리텔링󰡕. 현실문화. 한혜원(2010).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 호모 나랜스󰡕. 살림. EBS 다큐프라임 ‘이야기의 힘’ 제작팀(2011). 󰡔이야기의 힘󰡕. 황금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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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드림 소사이어티

우리 사회는 이성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감성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접어들고 있다. 정보 사회에 뒤이어 도래할 미래는 꿈과 이야기 등의 감성적 요소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드림 소사이어티’다. 드림 소사이어티의 청사진은 오늘날 스토리텔링이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상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는 덴마크 코펜하겐미래 학연구소(Copenhagen Institute for Futures Studies)의 소장이자 미래학자인 롤프 옌센(Rolf Jenssen)이 주창한 개념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이성 중심적인 패러다임에서 감성 중심적인 패러다임으로 접어들었음에 주목했다. 세 계 대부분에서 삶의 물질적인 측면을 보다 많이 확보하려 는 추세가 끝나가면서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 이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정보 사회에 뒤이어 도래할 미 래는 꿈과 이야기 등의 감성적 요소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사회라는 것이다(롤프 옌센, 2005). 즉, 기업, 지역사회, 개인이 데이터나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 하게 되는 새로운 사회를 가리킨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10만 년의 인류사 전체의 결과로 보 아야 한다. 롤프 옌센은 수렵채취 사회의 모습에서 드림 소사이어티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부족의 전설이나 의식(儀式)을 가장 잘 아는 자가 지도자 로 선택되었다. 정신적인 요소, 즉 이야기를 가장 중요하 게 여겼기 때문이다. 드림 소사이어티에서는 수렵채취인 과 마찬가지로 스토리텔러가 미래의 중요한 인재가 된다. 상품 자체의 기능이나 효용은 부수적이고, 오히려 상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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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긴 이야기가 어떻게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느냐가 관 건이라 할 수 있다.

감성 마케팅과 스토리텔링 드림 소사이어티의 청사진은 오늘날 스토리텔링이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상을 뒷받침하기 에 충분하다. 특히 상품의 실용적인 기능을 강조하기보 다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그것이 가진 고유한 이야 기와 신화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마케팅은 드림 소사이어 티의 제안을 매우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장 마리 플로 슈(Jean-Marie Floch)가 제안한 소비의 가치론을 참조하 면, 사람들은 특정 상품을 구매할 때 본래 사용 목적에 충 실한 실용적 가치나 여러 면에서 타 상품보다 뛰어난 비 판적 가치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상품을 미적 이고 오락적인 면에서 판단하는 유희적 가치, 또는 특정 한 상품의 가치나 속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자 하는 유토피아적 가치 등도 중요하게 작용한다(장 마 리 플로슈, 2003). 감성 마케팅에서 스토리텔링이 제공하는 것은 바로 상 품에 담긴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자 신의 이야기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가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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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달콤하고 향이 좋은 사과가 아닌 사 랑을 이루어 주는 사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순전히 감성 적인 동기에서 기꺼이 지갑을 연다. 오늘날 기술의 발달로 상품의 실용적인 기능, 즉 물질 적인 가치는 일정 수준 이상을 갖추고 있어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고유한 스토리로 감성을 자극하는 일이 관건이 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포 라이터 에 담긴 베트남 참전 용사의 이야기나 에비앙에 담긴 프랑 스 후작 이야기와 같은 사례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활용 되고 있다. 개별 상품이 아니라 기업 이미지나 브랜드를 위한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또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야기의 은유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스 토리텔링의 방식은 중요한 설득 도구로 처세술 분야에서 도 유용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오늘날 이야기를 하나의 코드로서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 이 바로 문화콘텐츠다. 각종 미디어에 담긴 문화적 내용 물을 의미하는 문화콘텐츠는 공통적으로 이야기 요소를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문학이나 영화, 연극처럼 이야기 향유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 장르가 아니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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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도, 최근에는 게임, 테마파크, 축제 등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이야기를 응용하고 있다. 일례를 들면,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실현시키며 ‘유비 쿼터스(ubiquitous) 엑스포’를 표방했던 2012 여수세계박 람회는 전체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주제관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주제관은 바다의 중 요성과 그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목적으로 삼고 있 다. 주최측은 관람자들이 스스로 바다에 대한 태도를 변 화시킴으로써 바다와 인류가 상생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서는 단순한 정보나 메시지 전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즉,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객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끌어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또한 관객의 참여와 체험을 유도 할 때 보다 능동적으로 메시지가 수용될 수 있다. 주제관의 전시 콘텐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 는 것이 ‘듀공’이라는 캐릭터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상생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전시관에서는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듀공 캐릭터가 관객에게 말을 걸도록 조정 한다. 스크린 뒤에서 성우는 관람객을 보고 상황에 맞게 말하고, 조작자는 미리 준비된 버튼을 눌러 듀공을 움직여 서 신기함을 주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관객과 진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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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토크는 관객들에게 재미와 체험의 요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이다. 메인쇼에서도 한 소년과 듀공의 여행 이야기가 영상과 실제 공간을 넘나드는 공연 연출로 펼쳐졌다. 실 제의 소년과 실제 제작된 듀공 조형물이 입체적으로 체험 되면서 스토리텔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참고 문헌 롤프 옌센 지음, 서정환 옮김(2005). 󰡔드림 소사이어티󰡕 리드리드출판. 아네트 시몬스 지음, 김수현 옮김(2001). 󰡔대화와 협상의 마이더스, 스토리텔링󰡕. 한언. 장 마리 플로슈 지음, 김성도 옮김(2003), 󰡔기호학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나남출판. EBS 다큐프라임 ‘이야기의 힘’ 제작팀(2011). 󰡔이야기의 힘󰡕. 황금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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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신화

디지털 문화가 발달하고 인간의 감성적 욕구가 증대하는 사회가 올수록 인류는 오히려 고대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영상 미디어를 넘어 디지털 미디어의 최첨단이 선보이는 이미지의 폭발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신화의 귀환’을 경험하고 있다. 미디어의 변화와 발전과는 상관없이 고대부터 쌓여온 수많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 된다.


신화의 귀환 21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적으로 신화(myth) 가 부상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가 발달하고 인간의 감성적 욕구가 증 대하는 사회가 올수록 인류는 오히려 이야기가 중요한 가 치를 지녔던 고대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롤프 옌센 역시 드림 소사이어티는 고대에 뿌리를 두고 있 으며 인류사 전체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 다. 이런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오늘날 대 중성이라는 현대 문화의 코드는 우리를 신화와 같이 익숙 하고 쉬운 옛이야기들에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미디어의 변화와 발전과는 상관없이 고대부터 쌓여온 수많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 된 다. 태곳적부터 구술로, 또는 문자와 다양한 담화 양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후대의 또 다른 이야기 를 위한 하나의 원형 스토리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김 정희, 2010). 세계적인 킬러 콘텐츠가 된 ‘해리포터’ 시리즈 나 ‘반지의 제왕’에 뒤이어 수많은 신화 모티프의 영상 콘텐 츠들이 제작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단군 신화를 바탕으 로 한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가 대규모 예산으로 제작 되는가 하면 ‘장화홍련전’, ‘구미호 이야기’ 등 민담을 모티 프로 한 스토리들이 꾸준히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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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미디어를 넘어 디지털 미디어의 최첨단이 선보이 는 오늘날 문화 현상에 대해 질베르 뒤랑(Gilbert Durand, 1996)은 이미지의 폭발 시대로서 ‘신화의 귀환’을 경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로고스(logos)에 억압당하던 미토스 (mythos)의 복원이다.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의 극단에서 인식론적 한계와 위기에 봉착한 사람들은 보다 환상적이 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욕망은 판 타지 장르의 흥행과도 연결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판타 지는 고대 신화, 전설, 민담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판타 지의 장르적 본성은 이야기의 환상성과 더불어 존재 불가 한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가시화에 있다. 영화는 시각 효과 에 대한 끊임없는 기술 개발을 시도해 왔으며, 특히 오늘날 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기인해 판타지 장르의 영화화 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지의 신화적 세계를 현 실보다 더 실감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로 표 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제2의 구술성 옹(Ong)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 (1982)에서 인쇄 미디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 문화의 구술성을 ‘일차적인 구술성(primary orality)’으로,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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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화한 기술문화에 의해 발생하는 구술성을 ‘이차적인 구술성(secondary orality)’으로 구분했다(Walter Ong, 1982). 미디어의 변천사에서 가장 초기 단계인 구술 문화 시대에 스토리텔링은 종족이나 민족 등 일정한 공동체 집 단을 대상으로 한 구연 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한 번 행해진 이야기는 정착되거나 기록되지 않고 시간과 함 께 사라져 버렸다. 청자와 상호작용이 가능했으며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한 가변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매번 조 금씩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문자가 발명되고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기 술성을 띠게 되어 ‘구텐베르크 혁명’이라 부르는 결정적인 문화의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이제 이야기는 종이에 활 자로 정착되어 영구히 보존되는 하나의 ‘작품’이 되었으며 작가의 개념이 탄생한다. 스토리텔링은 ‘내러티브’라는 전 문 용어로 규정되면서 비평의 대상으로 탈바꿈한다. 이처 럼 오랜 기간 문학 장르로서 발달해 온 이야기가 이후 영 상과 음향 위주의 영상 미디어가 나오면서 다시 한 번 대 전환을 겪게 된 것이다. 즉, 영상 콘텐츠는 현장이라는 맥 락을 전제로 집단성, 현재성, 상호작용성 등의 구술적 특 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을 생각해 보면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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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있다. 극장이라는 일정한 공간에서 관객 집단 은 영화의 상영을 동시적으로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개인 이 임의로 중단하거나 연기할 수 없이 집중적으로 이루어 진다. 영화의 메시지는 관객 개인에게 전달될 뿐만 아니 라 같은 공간에서 관람하고 있는 다른 관객들과 상호작용 에 의해서도 해석·부연되며, 과장되거나 축소된다. 배우 의 대사라는 구술적 이야기 방식 외에도 이미지와 음향이 라는 시청각적 메커니즘은 이전 시대 문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현장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영상 미디어의 구술성에서 한 발 나아가 디지털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은 상호작용성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된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하 다는 구술 문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즉, 스토리 텔링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개 념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재현 방식은 최근 축제나 테마 파크 등의 여러 문화콘텐츠 장르에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것들이다. 구술성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책의 경우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볼 수 있지만 영화는 대사가 말해지는 순간 즉각 적인 이해를 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다시 되짚어 볼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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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다. 또한 구술성의 특성은 쉽게 기억할 수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태인 서사시의 경우 특 정한 운율을 가지는 것이 이를 설명한다. 오래 잘 기억해서 후대에 전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작가 의식이 중요한 문학 작품과 달리 쉽고 대중적인 이야기를 추구하는 문화콘텐츠의 속성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다. 다 시 말해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대중에게 친근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속성에 의해 스토리텔링은 문화콘텐츠에 더욱 부합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서사 구조의 차용 신화에는 모든 문화, 모든 시대, 모든 개인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스토리 패턴이 담겨 있다. 이야기 의 창작자들은 흔히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내려오는 수많 은 이야기들에서 추출해 낸 일정한 패턴을 모방하려는 경 향을 드러내었다. 서사학자들 역시 스토리의 보편적 구조 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선구적인 연구자로 알려진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는 러시아 민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물과 대상 은 변할 수 있지만, 행동은 소수의 일정한 내용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여기서 추상화 과정을 거쳐 도출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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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 ‘기능(function)’이라 부른다. 기능은 줄거리의 전개 속에서 가지는 의미상의 맥락에 의해 한정되는 인물의 행 동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프로프는 러시아의 민담 200여 편을 분석한 결과, 모든 보편적인 이야기는 31가지의 제한 된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기능들의 순서 또한 일정하 게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부재에서 출발해서 결투 와 승리 등의 기능을 거쳐 결혼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서사기호학자 알기르다스 줄리앙 그레마스(Algirdas Julius Greimas)는 서사 모델의 보다 일반적인 적용을 위 해 프로프의 기능 목록을 추상적이고 단순한 형식으로 재 편하여 체계적인 구조를 확립시켰다. 그레마스는 이야기 를 이야기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근본적인 특성으로서 ‘서사성’의 개념을 최초 상황에서 최후 상황으로의 변형으 로 규정했다. 그리고 양자 사이에는 ‘시련(épreuve)’이라 고 부르는 동일한 구조의 세 가지 통합체(자격 시련 → 근 본 시련 → 영광 시련)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연결되어 있 다고 보았다. 한편 그레마스가 제시한 서사도식을 살펴보 면 모든 이야기는 ‘조종·계약 → 역량 → 수행 → 상벌’의 구조로 진행된다고 밝히고 있다. 인지주의 서사학자 호건(Patrick Colm Hogan)은 세계 의 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문학적 보편소를 경험적 연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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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귀납적으로 추론해 전형 서사의 모델을 제시했다. 인 지주의 서사학에서는 이야기를 감정의 ‘전형(prototype)’ 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야기는 추상 적 상황들의 복합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유형화한 전형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 장르 개념을 포함 시켜 세분된 장르에 따른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을 제시하 고 있다.

참고문헌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 이론과 실제󰡕. 인간사랑.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으로 보는 콘텐츠 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조해진(2012). 󰡔판타지 영화와 문화콘텐츠 산업󰡕. 새미. Durand, Gilbert(1996). Introduction à la Mythodologie. Albin Michel. Ong, Walter(1982). Orality and Literacy. Methuen. Propp, Vladimir(1970). Morphologie du Conte. Paris; Seuil. Hogan, Patrick Colm(2003). The Mind and Its Sto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Greimas, A. J.(1983). Du sensⅡ. Paris; Seu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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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상호텍스트성

스토리텔링 기획에서 상호텍스트성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오늘날 특히 많이 활용되고 있는 신화나 원작, 실화 등이 아니라도 동일한 장르, 또는 비슷한 소재를 가진 콘텐츠들을 전제로 해 이야기를 개발할 수 있다. 콘텐츠 기획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의 맥락 가운데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고유한 차별성을 마련하느냐다.


텍스트 간의 대화 우리가 어떠한 참신하고 개성적인 이야기를 창조해 내더 라도 이전에 존재한 무수한 스토리들과 무관하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수용이면 서 또 한편 다른 텍스트에 대한 응수(réplique)다(김인환, 2003). 이를 가리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고 한다. 바흐친은 인간의 삶 자체가 남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가 서로 섞이는 상호 교차적인 대화의 과정이라고 했다(여홍상, 2000). 즉, 우리는 가정과 학교, 친구, 대중 매체들 사이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길러 진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모든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단편이 녹아들어 있다. 따라서 단언컨대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상호텍스트적인 관점에서 완 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스토리텔링 기획에서 상호텍스트성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어떠한 새로운 아이템에 대해서도 우리는 반드시 참조할 만한, 그리고 비교할 만한 이전의 원형 스토리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콘텐츠를 기획할 때에도 우선 제작이 결정된 아이템에 관련된 기존의 유사 콘텐츠들을 선정하 고 분석해 보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된다. 오늘날 특 히 많이 활용되고 있는 신화나 원작, 실화 등의 구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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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동일 한 장르, 또는 비슷한 소재를 가진 콘텐츠들을 전제로 해 시나리오를 개발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하는 콘텐츠 기획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의 맥락 가운데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고유한 차별성을 마련하느 냐로 압축할 수 있다.

원형 스토리의 활용 스토리텔링은 작가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기획의 관점에 서 접근해야 한다. 문화콘텐츠라는 용어가 함의하고 있듯 이 기획은 반드시 문화의 콘텍스트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성격이 강하다. 우선 문화의 통시적 맥락에서 가치 있는 문화 자원을 발굴하여 콘텐츠의 소재로 효과적으로 차용 함으로써 원형 스토리의 보편성을 토대로 삼을 수 있다. 동시에 문화의 공시적 맥락에서 접근해 일정한 차별성을 모색해야만 하는데, 우리 시대의 사회적 이슈와 트렌드를 반영해 대중이 호응할 수 있는 참신한 스토리로 전환시키 는 것을 말한다. 바로 시대적 코드와 접속이 관건이다. 기존의 원형 스토리를 해당 문화에 적합한 스토리로 가 공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콘텍스트 분석에는 사회 전반의 변동과 트렌드를 비롯해 콘텐츠 시장의 환경이 포함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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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대중의 관심사와 기호, 사회적 분위기, 기술의 개발 이나 동종 업계의 동향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은 스토리텔링은 마치 그 옷을 입을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고 디자인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데이비드 하워드·에드워드 마블리, 1999). 새로운 콘텐 츠를 기획하고 제작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왜 하필 지금 이 이야기인가”에 대한 답을 명쾌히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관객을 설득하고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하기 위한 해답은 여기에 있다.

정서 구조 문화기호학자 로트만은 문화의 체계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것의 역동성에 주목했다. 즉, 문화의 기호학적 구조는 체계 외적인 요소들을 끊임없이 체계성의 궤도 내부로 끌 어들이는 동시에 체계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체계 외부의 영역으로 추방하는 형태를 드러낸다. 대중은 익숙한 것들 가운데에서도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하는 속성을 가진다. 우리는 콘텐츠 기획 단계에서 시나리오를 개발할 때 일부 트렌드에 편승하기도 하며,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기도 한다. 보편적인 원형 스토리나 장르의 전형은 일반적으로 대중성을 보장하지만, 특정 부분 차별화 전략이 없이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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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력을 갖기 힘든 것이다. 이런 문제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가 동시대적 문화의 보다 능동적이고 현재적인 양태를 표 현하기 위해 제시한 ‘정서 구조(structures of feeling)’라는 개념은 매우 유의미하게 고려할 수 있다. 정서 구조는 “개 인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활발히 체험되고 느껴지는 그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뜻한다(레이먼드 윌리엄스, 2003). 즉, 하나의 문화권에서 같은 세대의 구성원들이 공 유하는 독특한 그들만의 정서다. 그는 정서 구조가 예술 과 문학을 다루는 데 특히 적절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문 화콘텐츠는 작가주의보다는 시대적 정서를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기획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측면에서 정서 구조 와 더욱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를 들어보면, 1960년대부터 미국 사회와 학계에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는 과정 에서 선과 악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의 어려움을 인정하 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곧 할리우드 영화들에 반영되 었다(김성곤, 2004). 최근 국내에 수입되어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 드라마의 기저에도 이러한 주제 의식이 흐르고 있으며, 이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한국 드라마 콘텐츠에 서도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즉, 선악의 명확한 구분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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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의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이 일치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를 탈피해 오 히려 인간의 불완전성을 부각시키는 캐릭터를 통해 빈번 하게 표출되고 있다.

원소스 멀티유스 문화콘텐츠 시장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부가가치의 극대 화를 추구하는 효율적인 마케팅 방식으로 ‘원소스 멀티유 스(One Source-Multi Use)’가 주목받고 있다. 원 소스 멀 티유스는 특정한 문화 자원이나 콘텐츠를 여러 가지 다른 미디어 콘텐츠로 전환해 파급 효과를 노리는 전략이다. 즉, 하나의 흥행 콘텐츠만 있으면 추가 비용 부담을 최소 화하면서 높은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 가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주 인공을 캐릭터로 개발해 완구나 문구류 등 각종 문화상품 으로 재탄생되었으며, 테마파크와 공연 등에 중요한 소재 로 활용되어 원천 소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수익을 얻고 있다. 최근 세계적인 흥행 콘텐츠인 ‘해리포터’ 경우에도 소설을 원천 소스로 하여 영화, 캐릭터, 온라인게임 등의 장르로 확대되어 큰 인기와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전형적 인 OSMU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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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검증되고 인지도가 높은 원작을 각색하거나 하나 의 모티프를 여러 콘텐츠에 동일하게 반복 적용한 콘텐츠 를 개발하는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상호텍스트성을 기반 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 작품은 영상 콘텐츠에 변함없이 좋은 원형 스토리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최근에 는 인터넷 소설이나 만화 등의 원작이 큰 인기를 얻는 경 향이 있다. 앞서 제시한 콘텐츠의 기획 원리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이 구성되어 다양한 미디어로 재현할 때, 즉 원 소스 멀티유스의 가능성을 높일 때 진정한 문화콘텐츠 스 토리텔링으로서 가치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성곤(2004). 󰡔영화 속의 문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치완 · 김정희 외(2013). 󰡔문화콘텐츠 입문사전󰡕. 꿈꿀권리. 김인환(2003).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문학 탐색󰡕.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데이비드 하워드 · 에드워드 마블리 지음, 심산 옮김(1999). 󰡔시나리오 가이드󰡕. 한겨레신문사. 레이몬든 윌리엄스 지음, 박만준 옮김(2003). 󰡔문학과 문화이론󰡕. 경문사. 여홍상(2000). 󰡔바흐친과 문화이론󰡕.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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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비극은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관객이 극 속의 인물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감정을 이입하고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참여해 카타르시스를 간접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공포’와 ‘연민’이라는 감정에 기인하는 일종의 쾌감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 감정이 잘 결합된 형태로 자극이 주어질 때 관객들은 더욱 효과적으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된다.


비극의 정서적 효과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 기시키는 사건에 의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말 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그리스어로 정화(淨化), 또는 배설(排泄)의 의미를 가진다. 즉, 감정이 순화되거나 깨끗해지는 일종의 승화 작용이나 정서적인 불순물을 밖 으로 내보내는 의학적 작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리 스토텔레스는 이처럼 비극의 목적을 특정한 쾌감을 산출 하는 데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야기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 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 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 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 이라는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이야기의 도덕적 기능을 부 각시켰다(천병희, 2002).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억압될 경우 언젠가는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위험 부담 없이 안전하게, 관례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간 격을 두고 배출하도록 하는 도덕적 기능을 드라마에 부여 했다. 이러한 작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동일시’의 효과다. 즉, 관객이 극 속의 인물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감정을 이입하고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참여해 카타르시 스를 간접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발단과 전개, 절정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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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갈등이 첨예해질수록 긴장이 고조되어 가다가 마침내 결말에서 갈등이 해소되면 일종의 쾌감을 느끼며 안정을 되찾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덕적 기능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통한 간접 체험은 관객과 극 중 인물의 유사성과 공감대를 기반으로 한다. 비록 비극의 주인공이 특별히 덕망과 정의를 갖춘 인물로 규정되지만,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에 빠지는 상황은 여느 평범한 대중과 다를 바가 없다. 현대 시나리오 작법에서 좋은 스토리텔링의 기본 조건 을 관객들이 정서를 몰입할 수 있는 주인공에서 찾고 있는 점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관객의 관심과 공감을 자 극하는 인물의 유형은 완벽하고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인간적 결점을 지닌 자로 제안되고 있다. 어 찌되었든 대중의 정서적 참여를 이끄는 인물의 설정에서 시작해서 눈덩이처럼 커지는 갈등의 고조를 거치고, 마침 내는 반드시 모든 갈등이 해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만족 스러운 엔딩을 맺어야 한다는 스토리텔링의 원칙은 카타 르시스 체험을 위한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공포와 연민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가 공포와 연민에서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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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감임을 밝히고 있다. 시인이 모방하는 사건에는 이러한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비극에 서 일어나는 불행은 󰡔오이디푸스왕󰡕에서처럼 주인공의 사악함이 아닌 의도하지 않은 과오에 의해 발생한다. 아 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신 탁을 거스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부각시킴으로써 대 중에게 공포감을 자아낸다. 동시에 자책감으로 더 이상 세상의 빛을 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의 처지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공포와 연민은 매우 보 편적인 인간의 정서로 대중서사 장르에 쉽게 활용되고 있 다. 여기서 말하는 공포가 비단 좁은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공포물은 오늘날에도 매우 인기 있는 흥행 장르 의 하나이며, 관객의 연민을 자극하는 소재는 강한 정서적 반응을 끌어내어 드라마 장르의 좋은 아이템이 되고 있다. 공포감은 대중에게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나?’라는 강한 두려움과 함께 ‘내가 저런 상황이 아니라서 다행’이 라는 위안을 주면서 극 중 인물에게 연민을 느끼게 만든 다. 따라서 공포와 연민은 기본적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용을 통해 보다 정교 하게 두 가지 감정이 잘 결합된 형태로 자극이 주어질 때 관객들은 더욱 효과적으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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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저씨>의 포스터

예를 들어 영화 <아저씨> 포스터의 두 버전은 각각 공포 와 연민의 정서를 강하게 자극하면서 이 둘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야기의 정신분석학적 효과 카타르시스를 통해 이야기는 정신분석학적 효과를 제공 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성행했던 비극과 마 찬가지로 오늘날 대중적인 이야기의 장(場)인 영화의 관 람을 생각해 보자. 신화가 주제적이고 반복적인 경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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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인간 공통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자극하는 것처럼, 대중의 집단무의식을 반영하는 영화는 시청각 이 미지를 통해 관객들의 감추어진 두려움과 욕망을 상징화 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비단 영화만이 가진 것은 아니지 만 미디어적 특성상 태초의 원형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매 우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영화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영화의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극 중 인물에 대한 동 일시 효과가 부가되면서 관객들의 긴장이 창출되고 고조 되며, 마침내 결말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즉,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정서적 해방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억압된 욕망을 이 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 신 치료법이 될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적 이론과 연관된다. 영화 속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 자. <왕의 남자>에서 연산이 광대들의 놀이판을 지켜보다 가 갑자기 무대로 내려가 극에 동참하는 장면이 제시된다. 다시 말해 현실과 이야기가 합치되는 것이다. 여기서 놀 이판이 제공하는 이야기의 의미는 정신 치료의 역할로 볼 수 있다. 연산은 광대들의 자유로운 발언과 흥겨운 놀이 판에 매료된다. 그는 공길에게 계속 함께 놀 것을 요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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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광대패들을 찾아가서 북을 치고 놀음을 벌인다. 겉으 로는 중신들 말처럼 ‘천한 광대’들의 이야기 형식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연산이 이를 통해 일종의 정신적 치료 효과를 얻는 것이다. 공길의 인형을 빌어 손수 그림자극을 공연하는 연산은 그동안 묻어 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와의 갈등,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등 억압된 감정들이 자신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통해 형상화하고, 이를 통해 연산은 정신적 치유와 위안을 얻음으로써 해방감을 맛본 다. 이처럼 이야기는 카타르시스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몰입시키고 자극하는 데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다.

참고문헌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 이론과 실제󰡕. 인간사랑. 데이비드 하워드 · 에드워드 마블리 지음, 심산 옮김(1999). 󰡔시나리오 가이드󰡕. 한겨레신문사.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2002). 󰡔시학󰡕. 문예출판사. G. 조엘 · J. 린톤 지음, 김훈순 옮김(1994). 󰡔영화 커뮤니케이션󰡕.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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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이야기가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야기가치가 높은 테마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 관객들이 선호하는 ‘영원한 사랑’이라든가, 남성 관객들이 열광하는 ‘영웅의 모험’ 등은 언제나 반복적으로 변형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그 외에도 복수·유혹·성장·변신 등의 테마는 이야기 개발에서 끊임없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과 연결된 것이기에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


보편적 욕망과 이야기의 테마 돈·사랑·권력·명예·영생 등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 는 보편적인 자질들에 관한 테마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이야기가치(story value)가 높은 것들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욕망에 기인해 도출된 소재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욕(五慾)도 수면욕(睡眠 慾), 식욕(食慾), 색욕(色慾),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 物慾)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삶의 불균형에 처한 인물이 어려운 장애물을 극복하고 삶 의 균형을 회복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결핍된 가치 대상을 욕망하는 인간의 도전과 결투, 승리의 패턴은 많은 사람들이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 체험하고 대리 만족 을 느끼게 만드는 근간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야기가치가 높은 테마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 하다. 여성 관객들이 선호하는 ‘영원한 사랑’이라든가, 남 성 관객들이 열광하는 ‘영웅의 모험’ 등은 언제나 반복적으 로 변형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그 외에도 복수·유혹·성 장·변신 등의 테마는 시나리오 개발에 끊임없이 활용되 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 과 연결된 것이기에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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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단순한 하나의 픽션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관 한 고대인들의 해석과 가치관을 담고 있다. 여기에 등장 하는 캐릭터는 하나의 보편적인 가치를 상징한다. 예를 들어 아프로디테는 사랑, 헤라는 권력, 아테나는 무패의 명예를 나타낸다. 신화적 모티프는 시대를 초월해 영원한 이야기의 테마로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파리 스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 에게’라는 문구와 함께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에 의해 던져진 황금사과는 제우스에게 어려운 숙제를 안겨 주었 다. 그는 이데산에 사는 양치기 파리스에게 결정권을 넘 겼고, 파리스는 각기 다른 미를 지닌 세 여신 가운데 아프 로디테를 선택했다. 헤라는 절대적인 통치권을, 아테나는 무적의 힘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 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하 여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하여 트로이 로 도망치고, 이로 인해 10년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사랑을 택한 이유로 파리스는 조국도, 가족도, 자기 자 신의 생명마저도 빼앗긴다. 헤라와 아테나의 복수였다.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으며, 어차피 권력과 사랑, 명예 가 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해야만 한다면, 여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 파리스의 신화다(유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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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반대로 <동방불패>나 <대부> 등의 영화는 불패와 권력을 선택한 주인공이 아프로디테의 복수로 인해 비참 함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파리스의 신화가 제기하는 인 간의 욕망에 관한 문제는 수많은 콘텐츠의 이야기로 되살 아나고 있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메디컬 드라마 ‘메디컬 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장르로 규정될 만큼 영상 콘텐츠에서 자주 활용되는 소재다. 인간의 삶을 가장 단 순화해 축약적으로 표현하자면 ‘생노병사(生老病死)’라 고 말할 수 있다. 메디컬 드라마의 주요 공간인 ‘병원’은 바 로 이러한 인생의 행로가 집약된 공간이다. 산부인과에서 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동시에 중환자실에서는 죽음 이 빈번히 일어나고, 늙거나 병든 환자들이 병실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병원은 집이며, 또 어떤 이들 에게는 직장이라는 지극히 일상적 공간으로 주어진다. 따 라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자 연히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는 것 역 시 이야기가치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정서들 의 ‘백화점’과 같은 종합병원은 그만큼 대중에게 호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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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다는 뜻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과 질병에 대한 불안감, 생명을 향한 희망과 치료에 대한 열망 등 인간 존재의 공통된 관심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병 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몰입의 정도를 높여 주기 때문이 다. 사실 ‘병원’이란 그다지 유쾌한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은 한 편의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자신 에게 다가오지 않은 불행에 안도감을 느끼고 스스로 만족 감을 얻기 위해 메디컬 드라마를 본다. 즉,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오가며 자극하는 메디컬 드라마는 지극히 대중적 이고 통속적인 동시에 감정의 정화를 가져다주는 정신분 석학적 효능을 가진다.

인간의 오감과 킬러 콘텐츠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시각·청각뿐 아니라 후각을 전 달할 수 있는 TV가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법은 대중에게 호응도가 높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야기가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특 히 오감 가운데서도 미각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인 식욕과 연결되어 매우 강력하다. 각종 광고에서도 미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대표 적인 예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다 만 것 같은 애플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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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커피 브랜드 이름을 딴 디지털 프로그래밍 언어 ‘자바’ 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로고로 삼고 있다. 아직 기술적인 방식의 전달에 한계가 있는 미각, 촉각 등의 감 각은 콘텐츠 자체 내에서 최대한 효과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대장금>, <내 이름은 김삼순>,<커피프린스 1호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높은 시청률을 올리고 고가(高價)에 세계로 수출되는 이 콘텐츠들은 모두 음식과 관련된 공간 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즉, 궁정의 수라간, 프렌치 레스토 랑 ‘보나뻬띠’, 커피점 ‘커피프린스’다. 음식 문화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선호는 단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어 령은 󰡔디지로그󰡕에서 한국인들은 ‘먹다’라는 표현을 유난 히 많이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한국인들이 먹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떤 미디어도 먹는 것만큼 강력한 소통 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어령, 2006). 미각소(味覺素)와 신화소(神話素)가 서 로 일치한다는 것은 구조주의자들만의 주장이 아니다. 음 식물은 단순한 ‘먹이’에서 복잡한 메시지를 담은 소통의 미디어가 되고, 목구멍의 식도는 생명과 우주로 통하는 정 보의 회로가 된다. 예수가 ‘먹고 마시는’ 자리를 통해 자신 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한 예에서도 말해주듯이 음식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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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치는 인류 보편적이다. 미각과 관련된 콘텐츠에 대해 높아진 관심은 최근의 킬 러 콘텐츠들이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국내를 넘어서 세계를 ‘난타’한 공연 <난타>는 한국 전통 가락인 사물놀 이 리듬이 큰 특색을 이루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주 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맛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 와인 열풍을 불 러일으킨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은 2005년 12월 출 간 후 현재 15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와인 바이블’로 인식 되면서 여러 파생 콘텐츠의 기획을 주도하고 있다. 갖가 지 음식들과 요리 대결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허영만의 만 화 󰡔식객󰡕은 영화로 제작되어 관객 수 300만을 넘기는 흥 행을 기록했으며, 120억 원 이상이 투입되어 드라마로 방 영되기도 했다.

물질적 상상력과 집단무의식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 원소에 의한 물질적 상상력을 연구했는데, 그는 우리에게 이미지를 제공해 주는 대상을 ‘형태’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서 파악했다. 즉, 외적 형태에 의해 만들어 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질료의 고유한 속성에 의해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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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이미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물질성은 속성 상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각각의 질료가 가 진 물질적 이미지는 불변하는 정신적 이미지라는 것이다 (홍명희, 2005). 이는 인류의 공통적인 집단무의식으로 전 수되어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으로서 후천적 학습과 상 관없이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환경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유 하고 있는 원형적 모티프들이 직접적으로 형태를 드러내 는 소재다. 예를 들어 물의 신화들이 띠고 있는 상징적 의 미들, 즉 모성이라든가 죽음과 재생, 나르시시즘 등은 바 다나 강, 호수 등으로 가장 쉽게 표출될 수 있다. 다양한 콘텐츠들에 배경으로 제시되는 자연환경은 말 그대로 캐 릭터나 사건에 비해 돌출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은 바 로 의도된 무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수용자의 집단무의식 에 호소해 인상을 남기게 된다. 물질적 상상력은 4원소가 직접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자연 요소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은유적인 소재들에 의해서 도 유발될 수 있다. 자연 배경이 지닌 원형 이미지들은 또 다른 유사한 이미지들과 절묘하게 연결되고 맺어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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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그 상징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물’ 이라는 원소는 투명성이라는 특성에 근거해 거울이나 유 리 소재로, 모성성에 근거해 차나 음료, 알코올 등으로 표 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제시되지만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자연적 모티프는 짧은 시간 안에 의 미를 전달해야 하는 뮤직 비디오 장르에서도 유용하게 활 용되고 있다. 이야기의 핵심 주제나 사건을 직접 드러내 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물질적 상상력을 자극 하는 것 역시 이야기가치를 높이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으로 보는 콘텐츠 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로널드 B. 토비아스 지음, 김석만 옮김(1997).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풀빛. 유재원(2005). 󰡔신화로 읽는 영화 영화로 읽는 신화󰡕. 까치. 이어령(2006). 󰡔디지로그󰡕, 생각의 나무. 홍명희(2005),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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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낯설게하기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수용자들에게 스토리를 쉽게 이해하고 친근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야기의 틀을 빌려올 수는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반복되기만 한다면 지루함을 줄 뿐이다. 흥미나 긴장감이라는 반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낯설게하기’ 기법이 요구된다.


스토리와 담화 서사(narrative)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 다. 가장 보편적으로 채택되어 온 구분이 바로 ‘story(이야 기)’와 ‘discourse(담화)’다. 서사를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 어 설명하려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계속해 전해 내려 왔다. ‘스토리’가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라면 ‘담화’는 이야기의 형식을 뜻한다. 이것은 오늘날 ‘스 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는 용어가 지닌 양면성에도 그 대로 적용될 수 있다. ‘스토리’가 ‘텔링’이라는 형식을 통해 서, 특히 현재진행형의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바로 스토 리텔링이다. 최근에는 스토리 층위를 세분해 세 가지 부 분으로 보는 상관적 체계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어 찌되었든 서사는 스토리에서 담화로 되어 가는 과정 전체 를 함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러 가지 다양한 미 디어로 재현되는 오늘날 문화콘텐츠의 이야기하기 방식 은 다중의 담화화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스토리는 작가들이 재료로 사용하는 사건을 시간적· 인과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체계이고, 이것은 담화로 되어 가는 과정에서 다시 인위적·예술적 순서로 기술된다 (Cesare Segre, 1979). 서사학의 주요 연구들이 이야기의 보편적인 구조나 공통 문법을 발견해 내는 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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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이야기 창작자들이 대중적인 스토리를 창작할 때 참고할 만한 모델이 제공된 것이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수용자들에게 스토리를 쉽게 이 해하고 친근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야 기의 틀을 빌려 올 수는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반복되기만 한다면 흥미나 긴장감이라는 반응을 유발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보편적인 구조를 지닌 스토리를 새로운 담화로 전 환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기법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한 ‘낯설게하기’ 기법 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쉬클로프스키(Shklovsky)는 모 든 기교성(artfulness)은 낯설게하기의 기법이라고 했으 며, 예술이란 그 기교성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낯설게하기의 기법들 쉬클로프스키는 낮설게하기(defamilliarization)의 방법적 측면에 관해서 지각의 과정 자체가 미적 목적이므로, 형식 을 어렵게 함으로써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쉬클로프스키, 1993). 즉, 서사의 통시 적 진행을 방해하는 효과를 가져옴으로써 사건의 중단을 노리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낯설게하기의 기법 으로는 시간의 불일치가 있으며, 공간의 병행적 배열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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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액자(frame)식 구성, 즉 이야기 속의 이야기 기법도 여 기에 해당한다(Eric S. Rabkin, 1977). 서사학자 주네트는 순서(order), 지속 시간(duration), 빈도(frequency) 등 ‘시간’에 관해서 연구의 많은 부분을 할 애했다(Gérard Genette, 1972). 그 가운데 시간의 불일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순서’에 관한 이론을 참고해 볼 수 있다. 관습적으로 연대기적 순서에 충실한 민담에 비해 현 대의 다양한 서사 텍스트에서는 실제 사건의 시간과 서사 되는 시간 사이의 ‘시간의 불일치(anachronies)’가 발견된 다. 과거의 일을 회상하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 것 등이 바로 그렇다. 특히 회상의 기능으로는 ‘보충하는 (completing)’ 기능, 또는 ‘복귀(returns)’라는 기능이 있다. 이는 의도적인 생략 후에 서술에서 빠졌던 부분들을 채우 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이 바로 온전한 이해를 방해하며 서사를 지연시키는 낯설게하기의 기법이 된다. 그리고 이 와 유사하게 시간의 흐름에서만이 아니라 서술하는 기간 내에 나타나는 특정 부분을 일부러 피해 갔다가 후에 보완 하는 ‘옆으로 빼놓기(sidesteps)’, 또는 ‘역언법(paralipsis)’ 도 있다. 이는 어떤 기간을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요소 를 피해 가는 것이다. 회상과 역언법에 의한 시간의 불일치 기법은 기본 서사의 진행이 이차적 서사에 의해 채워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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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지연되는 방식으로, 수용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 서 스토리를 지켜보도록 만드는 효과를 부여한다. 공간의 분리는 시간의 불일치에 대한 은유적인 용법으 로 볼 수 있다. 기본 서사에서 벗어나는 이차적 서사의 분리 가 가져다주는 해독의 어려움이라는 효과는 서로 다른 공 간을 오가며 병행적 전개를 구사하는 서사에서도 마찬가지 로 얻을 수 있다. 액자식 구성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 그 자 체로 완성된 짜임새를 가진 또 다른 이야기가 삽입된 형태 를 말한다. 즉, ‘바깥 이야기(외화, 外話)’라는 액자 안에 ‘안 이야기(내화, 內話)’가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두 가지 이상의 기본 서사가 충돌하면서 얻어지는 형식상의 고유성 이라는 효과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김정희, 2010).

서스펜스 서스펜스(suspense)는 극적 아이러니(irony)에 의해 발생 된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관객에게 누설(revelation)될 때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리고 일단 누설이 형성되고 나면, 시나리오 작가는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바 로 등장인물도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나타나는데, 이를 인식(recognition)이라고 부른다. 즉, 서스펜스란 누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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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인식 사이에 이르는 과정 동안 관객들이 스토리에 몰입 한 채 가슴 졸이며 지켜보도록 만드는 강력한 도구다(데 이비드 하워드 에드워드 마블리, 1999). 서스펜스는 바로 정보의 양이라는 수단을 통해 수용자의 이해를 지연시키 거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므로 낯설게하 기 기법이 지향하는 목적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김정 희, 2010). 서스펜스의 대가라 불리는 앨프리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감독은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surprise)의 차이에 대해서 하나의 사례를 들어 명쾌하게 정의내린 바 있다(프랑수아 트뤼포, 1993). 우리가 사소한 잡담을 나누 며 앉아 있는 식탁 밑에 폭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쾅 하고 폭탄이 터지면 관객 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반면에 누군가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을 관객들에게 미리 보여 주었다면, 관객들은 폭탄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사소한 장 면에도 몰입하게 된다. 어찌 보면 서프라이즈 방식의 전 자가 더욱 감정의 진폭을 크게 자극하기도 하지만, 히치콕 은 순간적인 놀라움보다는 일정 시간 동안 지속되는 정서 의 몰입을 더욱 효과적인 수단으로 본 것이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특정한 비밀이 겉으로 드러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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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통해 갈등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활용한다. 트렌디 드라마의 클리셰인 출생의 비밀이나 기억 상실 등의 소재 도 초반에는 일부 감추어지다가 마침내 모든 이들에게 알 려지는 과정을 통해 극의 갈등을 부각하기 마련이다. 드 라마 <겨울연가>에서 준상과 민혁이 동일인이라는 사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주인공 은찬이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가는 것이 스토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 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서스펜스가 장르에 구애 없이 널리 활용되고 있는 것은 대중의 정서를 몰입시키는 강력 한 심리적 기제임을 증명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최근에는 대중문화의 경향 자체가 단순하고 쉬운 내용보 다는 낯설고 복잡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고 있다. 스티브 존슨(Steve Johnson)은 오늘날 대 중문화가 갈수록 지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대중문화는 우리가 저질, 통속이라고 무시하는 연예 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아주 조금씩 우리 뇌를 명민하게 만 들고 있다(스티브 존슨, 2006). 과거에 독자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소위 ‘예술’ 장르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게 임이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의 형식이 복잡 미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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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추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열광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미디어 환경이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동시에 다양한 플랫폼이 개발되고 있다. 더 이상 하나의 콘텐츠는 단일한 미디어 또는 플랫폼과 일 대일 대응관계를 갖지 않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 산업의 핵심 전략으로 주목받아 오던 OSMU 방식을 넘어 최근에는 트랜스미디어 전략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담 화 양식을 만들어 가고 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란 하나의 핵심 스토리를 중심으로 부차적인 사건이나 캐릭터, 그리고 배경을 다루 는 스토리들이 다양한 장르의 미디어 플랫폼에 걸쳐서 전 개되는 방식을 말한다. 하나의 스토리는 영화로 소개되고, 텔레비전, 소설, 그리고 만화로 확장된다. 그 이야기의 세 계는 게임 플레이를 통해 탐험할 수도 있고, 놀이공원의 명소로 경험할 수도 있다. 개별 콘텐츠의 스토리들이 조 합하여 시간적·공간적으로 상호 보완되고, 하나의 일관 된 세계를 형성한다는 특징을 보여 준다. OSMU는 하나의 개별 콘텐츠가 통시적으로 새롭게 해석, 재창조되는 과정 을 드러내는 반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여러 개의 콘텐츠들이 공시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의 거대 서사로 통합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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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핵심 특성이 바로 이야기 의 복잡화를 통한 낯설게하기 방식이다(김정희, 2013). 하 나의 이야기는 여러 개의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들로 쪼개 어 각각 서술된다. 물론 개별 콘텐츠 역시 독립된 이야기 로 인식될 수 있지만,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분명히 전체 스토리를 관통하는 거시 스토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야기는 쉽고 빠르게 이해되지 않고, 수용자가 지각하는 시간이 연장된다. 그러는 사이 미처 짜맞춰지지 않은 이야기의 빈틈은 미스터리 내지는 서스 펜스를 유발한다.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하고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남김으로써 수용자들이 ‘퍼즐 맞추기’에 몰두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 링이 미디어 컨버전스 시대의 산물이자 집단지성 시대의 엔터테인먼트임을 강조했다. 대중은 영화를 보고 게임을 즐기는 동시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정보를 교환 하고 토론한다. 거기서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거나 창출되 기도 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이처럼 독자나 관 객의 적극적인 참여와 해석이 부가되고 패러디를 생산해 냄으로써 한층 더 낯설고 복합적이며 풍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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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 이론과 실제󰡕. 인간사랑. 데이비드 하워드 · 에드워드 마블리, 심산 옮김(1999). 󰡔시나리오 가이드󰡕. 한겨레신문사. 박치완 · 김정희 외(2013). 󰡔문화콘텐츠 입문사전󰡕. 꿈꿀 권리. 쉬클로프스키 지음, 조주관 편역(1993). 󰡔러시아 현대비평이론󰡕. 민음사. 스티븐 존슨 지음, 윤명지·김영상 옮김(2006). 󰡔바보상자의 역습󰡕. 비즈앤비즈. 프랑수아 트뤼포 지음, 곽한주·이채훈 옮김(1993). 󰡔히치콕과의 대화󰡕. 한나래. Genette, Gérard(1972). FiguresⅢ. Paris; Seuil. Jenkins, Henry(2006). Convergence Culture. New York University Press. Rabkin, Eric S.(1977). Spatial Form and Plot. Critical Inquiry, 4(2), 253∼270. Segre, Cesare(1979). Structures and Time. Illinois: The University of Chic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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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캐릭터

이야기에서 캐릭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비중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공통적인 자질은 ‘강렬한 열망’이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추구하는 인물의 의지와 노력이 강할수록 사람들은 공감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오래 기억되는 이야기는 바로 심각한 정신적 곤경을 겪고 있는 실제 인간을 그려 내기 때문이다.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야기의 근본 특성 가운데 하나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캐릭터(character)다. 따라서 이야기 창작의 보편적인 출 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누구’의 이야기인가 하는 것 이다.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사 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단번에 끌어들인다. 한편으로 이 야기는 어떠한 ‘사건’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 신문 기사에서 다루어지거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특이하고 놀 라운 사건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에 좋은 소 재가 된다. 이는 이야기의 양대 축인 캐릭터와 플롯에서 각각 이야기의 모티프를 발견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야기 를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 역시도 누구의 이야기인가, 또 어떤 사건을 다루는가 하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에 서 찾을 수 있다. 인물에서 또는 사건에서 촉발된 이야기의 구상은 시작 은 비록 다르지만 캐릭터를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는 점에 서는 동일하다. 특히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비 중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 인공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선하다, 잘생겼다, 힘이 세다, 능력이 많다? 아니다.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자질은 ‘강렬한 열망’이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추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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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의지와 노력이 강할수록 사람들은 공감한다. 대다 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 결핍된 바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이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삶의 불균형을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에 감 정을 이입하도록 이끈다. 덧붙여 이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캐릭터는 완전무결성이 아니 라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목표에 너무 쉽게 이를 수 없 도록 만드는 2% 부족한 인간적 결함에 의해 완성된다.

고유명사의 힘 대중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에 는 캐릭터의 이름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물론 얼마만큼 참신한 캐릭터를 생생하게 형상화했는가 하는 문제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캐릭터는 우리 에게 고유명사로서 각인된다. 삼순이, 강마에, 초원이 등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콘텐츠의 주인공들은 고유명 사로서 우리에게 기억된다. 콘텐츠의 제목 자체가 인물의 이름과 일치하는 경우도 고전, 현대물을 막론하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단지 어떤 남자, 어떤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누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정서적 공감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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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아톤>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 어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 속 주인공이 단지 어떤 장 애인이 아니라 ‘초원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 람들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을 대할 때 초원이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초원이와 동일시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관점 에서 이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야기가 근본 적으로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특성을 말해 준다. 시 나리오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인물에 의해 한 사건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자세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 김춘수의 시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 던 존재가 의미를 부여받는 순간이다. 스토리 창작에서 캐릭터에 관해 작가가 결정해야 할 사항들은 매우 많다. 성별, 나이, 직업, 학벌, 가족관계, 출신지, 주거 형태, 인 맥, 취미 등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캐릭터의 이름을 정했다는 것은 이러한 정보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한정되 었음을 증명한다. 작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스토리에 등 장하는 캐릭터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그것이 스토리에 직접 표출되지 않더라도 그의 성격을 형성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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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롯에 관해서는 한정된 수의 유형과 패턴들을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지 만, 인간의 성격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유형화가 매우 어렵다. 극작법에서 대표적인 분류는 사색가 ‘햄릿형’과 행동가 ‘돈키호테형’ 정도이며, 실제 시나리오 창작에서는 혈액형이나 별자리, 사상의학 등 다양한 방법론이 활용된 다(심산, 2004).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 하나의 캐릭터는 ‘행위(doing)’인가, ‘존재(being)’인가. 서사학에서는 작중 인물의 지위에 관해 이와 같은 논쟁이 있어 왔다. 작중 인물을 어떤 행동의 행위자(agent)로 취 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이후 형식주의와 구조주 의로 맥을 잇고 있으며, 반면 이를 부정하는 전통적인 문 학 비평가들은 작중 인물을 하나의 ‘고유명사’로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했다(김정희, 2010). 이러한 논쟁은 츠 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에 의해 서로 대립하거 나 위계를 가진 관점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어느 정도 정리 되었다. 작중 인물을 행위로 축소해서 볼 경우 다양한 스 토리에서 드러나는 캐릭터의 기본 구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준다. 작중 인물을 존재로 볼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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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풍부하고 다양한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피와 살 을 갖춘 살아 있는 인간과 같이 생생한 인물로 그려내는 데 도움을 준다. 앤드루 호턴(Andrew Horton)은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 분이 캐릭터를 포기하고 플롯 주도로 된 이야기 구조를 지 닌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전자레인지식 시나리오’ 라고 비꼬았다(앤드루 호턴, 2000). 여기서 말하는 플롯 중심성이 바로 캐릭터를 행위로 축소해서 보는 입장과 일 치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스토리를 보다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행위를 중심으로 인물 구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 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 호턴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장르 영화라 하더라도 뭔가 결여된 느낌을 준다면 그건 인간의 실존적 문제와 내면적 불안에 대한 탐구가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사람 들의 마음을 끌고 오래 기억되는 영화는 바로 심각한 정신 적 곤경을 겪고 있는 실제 인간에 관한 스토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형적 캐릭터 유형에서 벗어나 보다 참 신하면서도 보다 강렬하고 생생한 캐릭터의 창조가 관건 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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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재현의 방식들 롤랑 바르트는 이야기의 구조적 단위를 통합체적인 제재 인 ‘기능(functions)’과 계열체적인 제재인 ‘징후(indices)’ 로 구분지었다(Roland Barthes, 1977). 다시 말해 기능이 ‘행위(doing)’에 관한 것이라면 징후는 ‘인물(being)’에 관 한 것으로, 이는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행위라기보다는 인 물을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징후들이 모여서 하나의 성격 특성으로 일반화하고, 다시 이 특성들이 결합되어 하 나의 캐릭터를 형성하게 된다. 다양한 징후들을 통한 캐릭터 재현 방식을 알아보기 위 해 리몬 캐넌의 이론을 참조할 수 있다(Shlomith Rimmon -Kenan, 1983). 캐릭터화(characterization)는 크게 직접 한정과 간접 제시에 의해 이루어진다. 직접 한정은 인물 의 성격 특성을 화자가 직접 서술하는 형태를 말한다. 즉, 텍스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목소리를 통해서, 인물의 성격 을 빠르고 쉽게 일반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19세 기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적 효용성을 인정받아 왔으나 독 자의 능동적 역할이 중시되는 오늘날에는 오히려 꺼리는 방식이 되었다. 반면에 간접 제시는 인물의 특정 행위나 말, 외양, 환경 등의 암시를 통해 독자나 관객이 인물 성격 을 추론하게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문학적이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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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행위(action)를 살펴보면, 캐릭터의 반복적인 습 관을 통해 정적인 성격을 드러내거나 일회적인 특정 행 위를 통해 동적인 성격을 드러낼 수 있다. 말(speech)의 형식적인 면을 통해서 캐릭터의 출신이나 학벌, 계급, 직 업 등 사회적 특성을 드러낼 수 있으며, 순하거나 거친,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교만하거나 비굴한 등 개인적 특성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 또한 말의 내용적인 면을 통해서도 인물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 다. 외모(external appearance) 역시 캐릭터의 성격을 암 시할 수 있는 요소로서, 특히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아닌 의복, 헤어스타일, 장신구 등은 캐릭터와 더욱 인과적으 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캐릭터를 둘러싼 환경(environment), 즉 물리적 환경(방·집·거리·도 시)과 인간적 환경(가정·사회적 계층)도 마찬가지로 인 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정희(2010). 󰡔스토리텔링 이론과 실제󰡕. 인간사랑. 데이비드 하워드 · 에드워드 마블리, 심산 옮김(1999). 󰡔시나리오 가이드󰡕. 한겨레신문사. 심산(2004). 󰡔한국형 시나리오쓰기󰡕.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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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호턴 지음, 주영상 옮김(2000).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 쓰기󰡕. 한나래. Barthes, Roland(1977). Introduction to the Structural Analysis of Narratives. Image-Music-Text, selected and trans. Stephen Heath. London : Fontana/Collins. Rimmon-Kenan, Shlomith(1983). Narrative Fiction:

Contemporary Poetics. London: Methu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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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공간

스토리의 공간은 고유하게 창조되는 하나의 가상 세계다. 따라서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치는 장소가 아니라 스토리의 테마와 서사적 의미에 부합하는 공간으로서 신중하게 선정되어야 한다. 텍스트의 공간적 구조가 갖는 본질적인 자질은 그것의 내적 공간을 분리해 내는 분절적 경계성이다. 즉, ‘안’과 ‘밖’이라는 구분이다. 이야기에서 사건이란 바로 주인공에 의해 이러한 의미론적 ‘경계’의 횡단이 이루어질 때 발생한다.


이야기와 공간 스토리텔링 기획은 여러 가지 모티프에서 시작할 수 있다. 작가나 연출가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할 수도 있고, 다양한 원작들로부터 각색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최초의 아이템은 특정한 캐릭터의 형태일 수도 있고 흥미로운 플 롯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관점의 주제 의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간(space)이 다. 특히 영상 미디어나 디지털 미디어 등을 통한 콘텐츠 에서 배경 공간은 따로 서술하지 않아도 전면적으로 드러 날 수밖에 없으므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축 제나 전시 등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오프라인 콘텐츠에 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에서 공간은 캐릭터 나 플롯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요소다. 어떠한 콘텐츠든 스토리의 공간은 고유하게 창조되는 하나의 가상 세계다. 따라서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치는 장소가 아니라 스토리의 테마와 서사적 의미에 부합하는 공간으로서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인지주의 서사학 에서 이야기 속 공간은 단순히 객관적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망·감정·행위·기억과 같은 인생의 경 험과 관계있는 지역으로서 주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Patrick Colm Hogan, 2003). 미케 발 역시 스토리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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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특정한 지각점과 연계된다고 보았는데, 즉 등장인물이 일정한 장소에 대해 시각·청각·촉각 등을 동원해 관찰 하고 반응하는 것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다고 했다 (Mieke Bal, 1985). 로트만은 모든 예술적 텍스트가 의미 해독이 가능한 기호의 텍스트임을 밝히며, 창작 산물에서 제시되는 세계는 분명 목적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 했다(유리 로트만, 1996). 예를 들어 단테의 󰡔신곡󰡕에서 모든 공간의 범주들은 각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특히 ‘상 ‒ 하’의 공간 축은 전체 구조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 닌다. 서사물에서 공간은 대개 두드러진 ‘형상(figure)’이라기 보다는 ‘배경(ground)’으로 인식되지만, 어떤 콘텐츠의 경 우 공간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요소로 부각되기도 한 다(Peter Stockwell, 2002). 이러한 점은 공간의 두 가지 기능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배경으로서만 기능 하는 것으로 ‘행동이 실현되는 장소(the place of action)’ 이며, 또 다른 경우 공간은 종종 ‘주제화(thematized)’되기 도 하는데, 공간 자체가 제시 대상이 되는 경우다(Mieke Bal, 1985). 이는 ‘행동하는 장소(acting place)’로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론적 내용들이 반복, 축적, 변형되면서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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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소재와 트렌드 이야기에서 공간은 트렌드를 반영하기에도 매우 좋은 소 재다. 그레마스의 의미생성모델에 따르면 공간은 텍스트 에서 가장 근접한 ‘담화 층위’에서 표출되기 때문에 캐릭 터나 구상화한 소재와 마찬가지로 트렌드가 가장 직접적 으로 반영될 수 있다. 1990년대 트렌디 드라마가 밤새도 록 환하게 불 켜진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감각적으로 그렸 다면, 2000년대 이후 드라마는 시대적 트렌드를 반영해 찜질방이나 와인바 등 가장 핫(hot)한 장소를 섭외하기 시 작했다. 이러한 측면은 최근 영상 콘텐츠의 트렌드에서 공간 소재가 특정 장르를 형성할 만큼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국 드라마의 흥행에서 시작된 ‘메디컬 드라마’의 붐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계에 ‘병원’이라는 공간적 모티프에서 파생된 기획물의 홍수를 이루게 만들었으며, 방송가라는 공간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공간으로 다루어지 고 있다. 경찰서나 병원, 또는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전문 직 소재는 꾸준히 활용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소위 ‘전문 직 드라마’라는 장르를 형성하며 흥행을 보증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새로운 소재를 끊임없이 발굴해야 하 는 이야기 장르에서 파일럿, 호텔리어, 로비스트, 아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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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조향사 등 이색적인 전문직은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모티프로 캐릭터에 신선함을 불어넣어 주는 동시에 새롭고 낯선 직업 공간을 제시한다.

서사적 공간의 모델 로트만은 인간의 정신에는 근본적으로 공간적 사고가 미 리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서사물을 해독하는 과정에서도 공간적 구조의 역할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는 텍스트의 공간적 구조가 갖는 본질적인 자 질은 그것의 내적 공간을 분리해 내는 ‘분절적 경계성 (fragmentation)’이라고 했다(Yuri M. Lotman, 1975). 여 기에서 핵심 기준은 ‘안’과 ‘밖’이라는 구분이다. 이는 세계 구비문학의 보편적 주제 가운데 하나인 ‘집(dom)’과 ‘반집(antidom)’의 대립이라는 예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데, 주인공이 속한 세계와 그 외부라는 구분은 스토리에서 기본적인 대립을 이룬다. 예를 들어 수많은 민담과 동화의 경우, 주인공이 일상 적으로 거주하는 내부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외부 공간으 로 이탈이 일어난다. 텍스트 속에서 강이나 다리, 숲 등으 로 구현되는 경계를 통해 나아가게 되는 외부 공간은 흔히 마법적 성격을 지닌 공간으로 묘사된다. 이야기에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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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이란 바로 주인공에 의해 이러한 의미론적 ‘경계’의 횡 단이 이루어질 때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그레마스의 서사기호학에서도 유사하 게 발견할 수 있다. 담화 층위에서 나타나는 공간의 구 조는 ‘주공간(espace topique)’과 ‘종속공간(espace hétérotopique)’으로 대별된다. 주공간은 역량을 획득하 는 자격 시련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준-주공간’과 근본 시 련이 이루어지는 ‘이상공간(espace utopique)’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민담의 주체는 그가 살았던 ‘종속공간’을 떠 나 ‘준-주공간’에서 수행에 필요한 역량을 획득하고, ‘이 상공간’에서 근본 시련을 통해 기저 가치 대상을 얻은 다 음, 다시 ‘종속공간’으로 되돌아오는 행정을 취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해 ‘종속공간’은 주체에게 익숙한 일상의 공간 이고, ‘이상공간’은 새로운 환경으로 제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지주의 서사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간적 구분을 ‘고 향(home)’과 이를 벗어난 곳으로 보고 있다. 고향과 관련 해서는 개개인의 집, 동네, 지방, 국가 등이 해당된다. 이야 기에서 공간적인 구성은 ‘고향과 타향(home and away)’의 구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형적인 이야기 의 세 가지 유형에서 각각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로맨틱 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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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에서 ‘고향’은 연인과 함께 불변의 장소를 의미하며, 영 웅 플롯에서 ‘고향’은 모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희생제의적 플롯에서 ‘고향’은 자연의 편안과 풍족함이 있는 파라다이 스다. 이 같은 공간적인 장소들은 고향으로부터 거부나 추 방이라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공간 스토리텔링 최근 흥미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가 공간적 스토리텔링 방 식이 하나의 트렌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성, 인과성을 원리로 하던 기존의 서사가 아니라 공간적인 특 성을 지닌 이야기 방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야기 단위 들의 순차적 결합이 강조되는 통합축이 아니라 대체 가능 한 선택적 단위들로 구성된 계열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 운 스토리텔링이다. 예를 들어 미국 드라마 <CSI>의 경우 에는 하나의 시즌을 이루는 에피소드들이 여러 공간에 걸 쳐 산재하면서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최근 이러한 형식 을 띠는 시리즈물을 스핀오프(spin-off)라고 부른다. <CSI 라스베이거스>, <CSI 뉴욕>, <CSI 마이애미>는 대체 가능 한 하나의 계열체로 볼 수 있다. 사실 공간 중심의 서사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다. 시간이라는 차원을 배제할 수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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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스토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가 비선형적이라 는 뜻이다. 이는 우연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하나의 시퀀스에 대체 가능한 시퀀스들이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 는 양상을 드러낸다. 또한 이러한 특성은 자연스럽게 상 호작용성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사용자는 수동적으로 보고 듣는 대신에 능동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것 이다. 따라서 상호작용성의 형태는 고정되고 순차적이며 선형적인 스토리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Carolyn Handler Miller, 2005). 최근에는 문화 산업 영역에서 스토리텔링이 갖는 역할 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여러 장르의 콘텐츠에 스토리텔 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가 특정 공간을 전제로 하는 오프라인 콘텐츠 들이다. 전시, 박물관, 테마파크, 지역축제 등이다. 여기 서도 공간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적용된다. 시간적으로 진 행되는 서사를 특정한 공간에 실현해 참여자들이 동선을 따라 스토리를 체험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문학 작품의 대표적인 OSMU 사례로 언급되 고 있는 단편소설 ‘소나기’의 서사 구조를 그대로 공간에 재현해 놓은 테마파크 <소나기 마을>이 있다. 또 스토리 텔링을 도시 공간에 적극적으로 도입해 도시의 이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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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하고 브랜드화하려는 시도들도 있다. 인간이 도시 공 간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행위는 공간을 의미 있는 장소로 만들어 주는 작업이며, 도시에 말을 건네는 작업이다(김 영순·정미강, 2008). 즉, 인간과 공간이 소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스토리텔링을 제안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순 · 정미강(2008). 공간텍스트로서 ‘도시’의 스토리텔링 과정 연구. 󰡔텍스트언어학󰡕, 24집. 유리 로트만 지음, 러시아시학연구회 편역(1996). 󰡔시간과 공간의 기호학󰡕. 열린책들. Miller, Carolyn Handler(2005), Digital Storytelling: A Creator's

Guide to Interactive Entertainment. Boston: Elsevier. Lotman, Yuri M.(1975). On the Metalanguage of a Typological Description of Culture. Semiotica, 14(2), 113∼130. Hogan, Patrick Colm(2003). The Mind and Its Sto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Bal, Mieke(1985). Narratology: 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Narrativ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Stockwell, Peter(2002). Cognitive Poetics,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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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극적 통일성

주제에 의해 스토리를 짜 맞추어 캐릭터나 플롯이 종속된다면 좋은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스토리든 창작자의 의도나 콘셉트 등이 내재되어 있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이 스토리의 각 요소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구상화할 때 극의 통일성은 높아지고 콘텐츠의 완결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통일성의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통일성의 개념을 제시했 다.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 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 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관계 내에서 재현해야 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 이론에서 중요하 게 다루어지는 장소의 통일성, 시간의 통일성, 행동의 통 일성으로 구체화했다. 즉, 단일한 장소를 배경으로, 단 하 루 동안에 일어난, 단일한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다. 삼일치의 법칙으로도 불리며 프랑스 신고전주의자들 에게로 계승되어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오늘날에 는 더 이상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이 의미를 가지기 어렵 다. 연극 무대가 아닌 영상 미디어를 통해서는 시간의 축 소나 생략, 반복 등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공 간적 제약이나 한계가 없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오 히려 단기간의 시간 제약이나 공간의 한정이라는 특수한 설정을 지닌 영상 콘텐츠는 대개 실험영화나 예술영화인 경우가 많다. 유일하게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시나리오 작법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행동의 통일성이다(데이비드 하워드 ·에드워드 마블리, 1993).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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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구조적인 통일성을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의 유기적인 부분으로서 필수 행동만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플롯의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 아닌 행동 들은 없애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스토리의 목 표에 대한 주인공의 추구와 관련된 행동만을 가리킨다고 할 때 지나치게 플롯 중심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사건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캐릭터의 형상 화를 위해 필요한 행동들도 포함될 수 있다. 또한 플롯과 캐릭터 이외에 주제나 공간 등 스토리의 여러 요소들이 좀 더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전체적인 통일성은 강하게 구축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산만하다거나 불필요하다는 것 은 플롯의 발전에 무의미하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넓게 보자면 이야기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주제적 의미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김정희, 2009). 따라서 극적 통일성 (dramatic unity) 의 문제를 플롯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 스토리의 기저에 작용하고 있는 주제적 요소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주제에 의해 스토리를 짜 맞추어 캐릭터나 플롯이 종속된다면, 좋은 스 토리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스토리 든 창작자의 의도나 콘셉트 등이 내재되어 있지 않을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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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이것이 스토리의 각 요소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구 상화할 때 극의 통일성은 높아지고 콘텐츠의 완결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주제의 일관성 스토리텔링 전략에서 플롯과 캐릭터의 중요성에 비해 주 제는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콘텐츠의 취약점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주제의 부실함이나 불명 확함 때문에 초래되고 있다. 이는 주제의 부재 또는 결여 에 의해, 그리고 주제의 분열에 기인한다. 매번 반복되는 플롯만 있고 참신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근간에서 새로운 주제 의식이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제가 없다는 것은 기존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인 답습일 가능성이 크 다. 시대와 사회 환경은 계속해서 변해가는데 의식 면에 서는 정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과 소통이 중요한 부 분을 차지하는 문화콘텐츠에서는 주제에도 트렌드가 있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반드시 주 제의 육화(肉化)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제 의식 이 여러 가지 요소들을 통해 하나의 스토리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종종 분열된 양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나의 스토리가 주제에서 벗어나면 수용자는 혼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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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며 긴장이 풀어지고, 결국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장기오,1997). 즉, 주제의 분열은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잘 짜인 좋은 스토리의 요건에는 만족스러운 엔딩도 포함된다. 이는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보는 이에게 만족스러운 엔딩이란 충분히 공감하고 설득될 수 있는 상황의 제시를 말한다. 엔딩이란 창작자 의 주제 의식이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므 로 만족스러운 엔딩을 위해서는 스토리 전체를 통해서 주 제 의식이 일관성을 구축해야 한다. 주제 의식이 명확하게 구축되어 있는 동시에 플롯과 캐 릭터에서도 주제 의식의 표출이 뚜렷한 양상으로 드러나 는 콘텐츠의 사례를 제시해 보자면 시트콤 <거침없이 하 이킥>을 들 수 있다. 제목부터 강하게 호소하고 있듯이 이 시트콤의 스토리는 ‘기존 가치의 전복’을 표방한다. 우선 캐릭터 설정에서 기존의 관습에 대한 역전이 드러나고 있 다. 문희와 순재 부부의 신체적인 조건에서 아내인 문희 가 키가 더 크며, 아들 준하와 해미 부부 사이에서도 해미 가 더 나이가 많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대개 한정된 세 트를 중심으로 에피소드가 전개되는 시트콤의 특성상 가 족들이 같은 직업 공간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가 장의 직업에 동참하는 구성원은 대부분 아들로 등장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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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 따라 딸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거침없이 하이 킥>에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독특한 동업자 관계를 보여 주며, 실업자 남편과 대비되는 능력 있는 아내를 전 면적으로 그려낸다. 이와 같은 캐릭터 구도에 따라 일반적인 고부 갈등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시어머니가 아니라, 오히려 며느리 때 문에 시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중요하게 다루 어진다. 매 에피소드의 플롯 역시 준하가 직업을 구해 당 당함을 회복하거나 문희가 가장의 규제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 문희가 며느리 해미를 골탕 먹이는 상상만 으로 즐거워하는 이야기 등 상대적인 ‘약자들’의 즐거운 ‘반란’으로 구성되어 있다. 덧붙여 형식 면에서도 본격적 인 멜로 라인, 스릴러 요소 등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기존 시트콤의 한계를 ‘뛰어넘는’ 양상을 보여 준다.

극적 통일성을 위한 방법론 시나리오 개발 때 가장 요구되는 사항 가운데 하나가 내적 완결성이다. 사실 제작 현장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 는 부분도 바로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여줄 수 있는 체계적 인 방법론이다. 시나리오 개발 과정에서는 작가나 감독의 개인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작가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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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요하지만 하나의 대중문화 콘텐츠로 제작되기 위 해서는 균형 잡힌 스토리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작업은 스토리의 어느 한 요소에 치우치거나 다른 요소들과 연결 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낳는다. 따라서 시 나리오 개발 시에는 스토리의 여러 요소들을 반드시 염두 에 두고 체계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하나의 콘텐츠가 질 (quality)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 건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기본적인 잣대는 극 적 통일성의 유무다. 아무리 독창적이고 의미 있는 지점을 갖고 있더라도 극 전체에서 통일성 있게 표현해 내지 못한 다면 하나의 문화콘텐츠로서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전달되는 ‘이야기’들의 근본 특 성, 즉 하나의 이야기를 이야기일 수 있도록 해주는 기본 요소들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공통적으로 포함된다. 첫 째는 사건의 발전이며, 둘째는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 셋째는 사건이 펼쳐지는 배경이다. 바로 소설 구성의 3요 소이다. 원래 소설의 3요소는 주제·구성·문체다. 그러 나 문체는 문화콘텐츠가 미디어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다 양한 양상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주로 감독의 연출 스타일 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콘텐츠 기획을 위한 이야 기의 보편적 요소로서는 주제와 더불어 사건, 인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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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요소들 상호 간의 일관된 의미 구축을 통해 완 결성 있는 시나리오를 창작할 수 있는 방법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레마스의 의미생성모델을 차용할 수 있다. 의 미생성모델은 겉으로 드러나는 텍스트 아래에 담화, 표층, 심층이라 부르는 다양한 층위의 구조들이 내재되어 있다 고 가정한다. 텍스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심층구 조는 텍스트의 기저 의미가 조직되는 곳으로 스토리의 주 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본다. 다음 표층 구조는 거시적으로 볼 때 서사 구조 내지는 플롯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담화 구조는 보다 구체적인 캐릭터와 공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이야기의 의미는 심 층에서 담화로 각각의 층위들 간에 전환이 이루어짐으로 써 생성되며, 이때 의미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다. 이러한 점을 차용해 보면 일정한 주제 가 플롯과 캐릭터, 배경의 요소들로 통일성 있게 표현되어 나가는 양상을 도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실제 콘텐츠의 시나리오 개발 프로세스가 반드시 의미 생성 경로와 일치할 수는 없다. 즉, 주제에서 플롯, 캐릭터, 배경 순으로 스토리의 요소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 다. 최초의 아이템은 흥미로운 플롯이나 개성적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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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디 공간 등 다양한 소재에서 비롯되어 핵심 모티프로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어느 요소에서 출발하 든 나머지 요소들과 극적 통일성을 상호 구축하는 것이 중 요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토리를 균형 있게 구성해 나 감으로써 완결성 있는 시나리오를 개발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정희(2009). 시나리오의 극적 통일성에 관한 연구. 󰡔기호학연구󰡕, 26, 143∼165. 데이비드 하워드 · 에드워드 마블리 지음, 심산 옮김(1999). 󰡔시나리오 가이드󰡕. 한겨레신문사.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2002). 󰡔시학󰡕. 문예출판사. 장기오(1997). 󰡔TV드라마 바로보기, 바로쓰기󰡕.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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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선문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불어불문학 과에서 프랑스 영화 작품의 신화 비평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 위를 취득했다. 200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 서 스토리텔링 구성 전략에 관한 논문으로 문화콘텐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삼순이 신드롬: 성공하는 스토리텔링󰡕(2007), 󰡔스토 리텔링 이론과 실제󰡕(2010), 󰡔스토리텔링으로 보는 콘텐츠 기 획󰡕(2010), 󰡔문화콘텐츠와 상상력󰡕(공저, 2013), 󰡔문화콘텐 츠 입문 사전󰡕(공저, 2013)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시나리 오의 극적 통일성에 관한 연구”(2009), “영상콘텐츠 기획을 위한 스토리텔링 전략”(2010), “김동률의 노래말에 투영된 공 기적 상상력에 관한 고찰”(2011), “이미지텔링과 글로컬 문화 콘텐츠의 전략”(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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