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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 벌써 세계 2위 2000년대 초반 홍콩 수준이었던 중국 영화. 매년 20~30%씩 크더니 2009년에는 한국과 비슷해졌고 2012년에는 일본을 앞질렀다. 5년 뒤엔 미국도 제칠 태세다. 사전 사후 검열, 등급제 미실시, 수입쿼터는 아직 엄연하다.

중국 영화 산업은 2010년을 전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밤 식물의 성장>, 파울 클레, 1922


인텔리겐치아 2509호, 2015년 3월 26일 발행

박희성이 쓴 ≪중국 · 홍콩 · 타이완 영화≫

광대한 시장을 보유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 야 개방을 본격화한 중국과 내수 시장의 한 계로 해외 시장 개척의 필요성을 절감한 한 국은 공동 제작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외 국에서 아예 제작을 위탁하는 방식 외에 중 국은 국제 공동 제작을 두 가지로 나눈다. - ‘한국 영화와 관계’, ≪중국·홍콩·타이완 영화≫, 97쪽.


국제 공동 제작이란? 협의로는 2개국 이상이 기획부터 투자, 제작 까지 전 과정을 함께하는 방식이다. 광의로 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부만 결합 해도 공동 제작이라고 한다. 중국은 어떻게 운영하나? 허파이(合拍)와 시에파이(協拍)로 나눈다. 허파이란? 중국 측이 판권을 가지고, 자금이나 현물을 투자하는 방식이다. 중국에서 상영될 때 중 국 영화로 간주된다. <비천무>(2000)는 상 하이필름스튜디오가 중국 판권을 가져가는 것을 조건으로 현물투자하였다. 상하이 지


역에서 중국 영화로 개봉하여 좋은 성적을 기 록했다. 시에파이란? 외국 영화제작 팀에게 노동력과 장소를 제공 하는 방식이다. <아나키스트>(2000)는 이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국 무정부주의자들을 그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상하이 로케이션이 필요했다. 한중 양국의 공동 제작 역사는? 2000년부터 시작된 공동 제작은 주로 한국 영 화의 중국 로케이션이거나 한국의 특수 효과 와 분장의 중국 영화 참여 방식이었다. 2010 년을 전후로 달라진다. 중국 영화 산업이 폭


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 감독을 초빙해 중 국 영화 연출을 맡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 감독이 만든 중국 영화는?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호우시절>(2009)과 <위험한 관계>(2012)다. 정우성, 장동건이 참여하고 한국 자본이 일부 투자했지만 중 국 영화에 더 가깝다. 안병기 감독이 연출한 <분신사바-저주의 시작>(2012), <분신사 바2>(2013) 같은 호러영화도 있다. 중국에서 성공했는데 두 작품 모두 한국 스태프가 대 거 참여했다. 자본은 100% 중국이 댔다. 중국 감독이 만든 공동 제작 영화는?

<20세여 다시 한번(重返20岁)>(2014)은 중


국판 <수상한 그녀>(2013)다. 중국 감독 천 정다오가 연출을 맡아 3억5000만 위안의 흥 행 수입을 올렸다. 처음부터 한국판과 중국 판 동시 제작을 기획하였다. 공동 제작의 현 단계는? 장기 산업 간 협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4 년 저장화처미디어그룹은 한국 영화사 NEW의 지분 15%를 인수하여 2대 주주가 되 었다. 저장화처미디어그룹은 중국에서 히트 한 공동 제작 영화 <이별계약>에 투자한 회 사고, NEW는 <7번방의 선물>(2012), <변호 인>(2013)에 투자·배급한 회사다. 두 회사 는 중국에 합자회사를 설립해 한국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공동 제작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지금 중국 영화는 무엇이 필요한가? 중국 극장 규모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홍 콩과 비슷했다. 중반부터 매년 20~30% 성 장하여 2009년에는 한국과 비슷해졌고, 2012년에는 세계 2위 일본을 앞질렀다. 자본 이 영화계로 몰려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창작 인력은 절대 부족 하다. 중국이 한국을 선택한 이유가 뭔가? 중국은 이미 불법 DVD를 통해 한국 영화를 많이 봐서 한국 영화의 우수성을 안다. 한국 의 창작력과 기획력을 들여와 중국 영화의 수


준을 끌어올리고, 한국 영화를 배우고 싶어 한다. 중국에게 한국은 일본보다 친숙하고, 미국보다 가깝다. 한국은 왜 중국을 원하는가? 2014년 한국의 연간 1인당 극장관람횟수는 4.19회다. 세계 최고다. 극장 시장 규모는 세 계 8위권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규모가 늘기는 쉽지 않다. 영화제작비가 상승하면서 국내 시장만으로는 수익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중국의 광대한 시장과 성장잠재력은 매력적 이다. 하지만 중국은 1년에 외국 영화를 34편 만 수입할 수 있다.


두 나라의 손익계산서는? 아직 정산할 때가 아니다. 중국은 한국의 감 독, 배우, 촬영, 특수효과, VFX 같은 창작과 기술 인력을 초빙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몇 편은 중국에서 훌륭한 성과를 냈지만 아직 많은 영화가 미개봉 상태라 손익을 계산할 수 없다. 한국은 주로 인력이 진출해서 중국 자 본으로 영화를 찍는다. 현재까지 단편적이 고 개별적 수익이 있을 뿐 정상 수익을 낸다 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 영화 시장의 전망은? 아직도 사전 사후 검열, 등급제 미실시, 수 입쿼터 같은 진입 장벽이 살아 있다. 그러나 2014년 시진핑 방한 시 한중영화공동제작협


정이 체결되었고 한중FTA도 타결되었다. 중국 영화는 5년 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다. 이 책, ≪중국·홍콩·타이완 영화≫는 무엇 을 다루나? 영화는 예술이자 산업이며, 문화이자 상품 이다. 이데올로기 선전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삼중국, 곧 중국과 홍콩, 그리고 타이 완의 영화사는 영화의 여러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 책은 이런 내용이 잘 드러나도 록 감독과 배우는 물론 정책과 산업, 시장, 회 사, 대외 교류를 다룬다. 삼중국 영화의 과거 와 현재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와의 관계와 향 후 전망을 볼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희성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부 정 책조사팀장이다.


중국 영화, 벌써 세계 2위 2000년대 초반 홍콩 수준이었던 중국 영화. 매년 20~30%씩 크더니 2009년에는 한국과 비슷해졌고 2012년에는 일본을 앞질렀다. 5년 뒤엔 미국도 제칠 태세다. 사전 사후 검열, 등급제 미실시, 수입쿼터는 아직 엄연하다.

중국 영화 산업은 2010년을 전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밤 식물의 성장>, 파울 클레, 1922


중국·홍콩· 타이완 영화 박희성 지음 영화이야기 2013년 2월 25일 사륙배판(188*258) 무선 제본, 142쪽 9,800원


작품 속으로

중국·홍콩·타이완영화


삼중국영화가 걸어온 길

한국에서 ‘중국영화’라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화를 뜻 하기도 하고, 중국대륙, 홍콩, 타이완영화를 아우르는 개 념, 즉 중국어 영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래서 ‘중국영화’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싱가 포르 등 다른 지역에서 제작되는 중국어 영화까지 다 포괄 하지 않고, 세 지역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특성과 관 계를 살펴보는 방향으로 서술되었기에 ‘중국․홍콩․타이완 영화’로 정했다. 중국영화, 홍콩영화, 타이완영화 3권으로 나누지 않은 이유는, 선정한 10개 항목에 따라 서술하다 보면 세 지역이 만나는 지점을 피할 수 없어 주제별로 내 용을 완결짓기 위해서는 세 지역을 아우를 수밖에 없기 때 문이다. 참고로 이 책에서 ‘중국영화’는 문맥에 따라 중화 인민공화국의 영화, 혹은 중국·홍콩·타이완의 삼중국 영화를 통칭하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지역명 의 경우, 1949년 이전에 대한 내용에서 ‘중국’은 세 지역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1949년 이후에 대한 내용 중 에서 ‘중국’은 많은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을 뜻하지만, 다


른 지역과 구분해야 할 때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대륙 (대륙)’으로 기술했고, 세 지역을 통칭할 때는 ‘양안삼지’ 혹은 ‘삼중국’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책이 기존에 중국, 홍콩, 타이완영화를 다룬 책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정책과 산업, 시장, 회사 등 예술로서 영 화와는 다소 동떨어진 항목들도 많이 서술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주제들이 삼중국영화 역사상 지대한 영향 력을 미쳤고, 삼중국영화의 예술적 특성과 분리해서 생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영화는 일찍부터 상하이를 중 심으로 영화회사를 주축으로 산업화, 시장화를 이루었고, 이는 홍콩으로 이어졌다. 홍콩은 장르영화를 발전시켜 내 수시장 장악은 물론 동남아, 미국 등지까지 진출하고 한국 과도 일찍부터 합작을 시작했다. 반면 사회주의 중국의 영화는 정책의 강력한 통제와 관리를 받으며 운영되었고 지금까지도 완전한 시장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타이완 은 일제 치하에서 영화가 유입되어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영화의 영향력과 국민당 정부의 통제 속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 또 삼중국 간의 관계 변화는 영 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는 예술이자 산업이며, 문화이자 상품이다. 게다가 이데올로기 선전도구로 사용 되기도 한다. 삼중국의 영화사는 이처럼 다양한 영화의


여러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런 점이 잘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10개 항목을 선정했다. 그리고 아이템의 차례는 삼중국영화 역사의 흐름을 감 안해 결정했다. 중국영화의 시작엔 ‘감독’이 있다. 초창기 감독들은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와 배우 역할까지 1인다 역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회 사’를 조직했고, ‘배우’들은 회사에 들어가 영화에 출연했 다. 회사들은 관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일정한 ‘유형(장 르)’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만들어냈다. 이렇게 영화 ‘시장’ 이 형성되고 ‘산업’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공화국이 대륙 과 타이완에 설립되면서 영화는 ‘정책’의 통제 혹은 지원 을 받게 되었다. 영화가 발전하면서 ‘대외교류’가 늘어났 고, 가까운 이웃나라인 ‘한국영화와 관계’도 생겨났다. ‘영 화제’를 통해 우수한 영화인들과 영화를 격려하고, 삼중국 간 교류의 장을 만들었으며 외국의 좋은 영화들을 소개했다. ‘영화감독’에서는 대륙에서 주로 활동한 감독들의 경우, 영화의 암흑기였던 문화대혁명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 후를 나누어 시기별 주요 감독들과 작품들의 특성을 설명 했다. 홍콩과 타이완도 시대별 주요 감독들을 각각 소개 했다. ‘영화회사’에서는 1949년 이전의 상하이와 홍콩의 영화회사, 1949년 이후 대륙의 영화회사, 홍콩의 영화회


사, 타이완의 영화회사로 나누어 영화사에서 중요한 역할 을 했던 영화회사들을 소개했다. ‘영화배우’에서는 1920∼ 1940년대 상하이의 배우들, 1950∼1970년대 홍콩의 배우 들, 1960년대 이후 타이완의 배우들, 1980년대 이후 홍콩 의 배우들과 1980년대 이후 대륙의 배우들로 나누어 주요 배우들과 활동 내역을 설명했다. ‘영화유형’에서는 중국영 화의 고유 장르인 무협영화, 쿵푸영화, 무술영화를 비롯 해서, 특히 홍콩에서 인기있는 코미디영화, 전통적인 의 미의 ‘장르’로 보긴 힘들지만 대륙영화의 중요한 ‘유형’으 로써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주선율영화, 대륙영화의 상 업화 경향을 보여 주는 설연휴 특선영화와 대작영화에 대 해 설명했다. ‘영화시장’에서는 대륙, 홍콩, 타이완의 영화 시장 흐름과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극장수입 규모, 관객 수, 스크린수, 제작편수와 국적별 시장 점유현황, 관객 특 성 등 지역별 시장 특성을 서술했다. ‘영화산업’에서는 2000년대 들어서야 산업의 개념이 도입된 대륙, 일찍부터 영화산업을 꽃피운 홍콩,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로 산업 기 반이 다져지지 못한 타이완, 세 지역별로 영화산업의 흐름 과 현황을 소개했다. ‘영화정책’에서는 1950년 이후 정책 으로 영화업을 좌지우지 해온 대륙의 제작, 배급, 상영 관 련 정책과 대외 정책, 검열 등에 대해 설명하고, 홍콩의 영


화 지원 정책과 타이완의 영화 지원 정책에 대해 각각 서 술했다. ‘대외 교류’에서는 대륙의 국제공동제작 정책과 홍콩, 타이완에 대한 문호개방, 대륙의 외화 수입 역사와 쿼터제, 타이완의 외화수입 정책 변천, 그리고 홍콩영화 의 해외 배급, 중국어영화의 국제영화제 상영에 대해 설명 했다. ‘한국영화와 관계’에서는 대륙에서 소개된 한국영화 들, 한중 공동제작의 흐름과 현황, 한국과 홍콩 간의 합작 과 교류, 타이완에서 상영된 한국영화의 현황 등에 대해 설명했다. ‘영화제’에서는 상하이국제영화제, 홍콩국제영 화제 등 삼중국의 주요 영화제와 영화상의 설립 배경과 운 영 현황, 시상 부문 등 특성에 대해 소개했다. 이 책은 일정한 분량이 정해져 있다. 게다가 10개 항목 으로 나눠서 서술이 되었기 때문에 영화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기가 다소 쉽지 않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본문 에 서술하지 못했던 부분을 포함해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 았다.

중국영화의 초창기(1905∼1949) 1896년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로 부터 9년 후 1905년 베이징에서 경극 공연을 담은 중국 최 초의 영화 <정군산(定軍山)>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중국


은 청조가 기우는 가운데 밀어닥치는 외세로 인해 혼미했 다. 1911년, 신해혁명을 담은 중국 최초의 기록영화 <우 한전쟁(武漢戰爭)>이 나왔다. 이듬해 청나라는 막을 내 렸고,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과 공방을 오갔다. 1913년 중국 최초의 극영화 <난부난처(難夫難妻)>가 상 하이에서 제작되었다. 같은 해 홍콩에서 제작된 <장자시 처(莊子試妻)>는 중국 최초로 해외에 소개된 영화이자 중 국 최초로 여배우가 등장한 영화다. 중국영화 초창기에 영화 중심지는 상하이였다. 1920년대부터 산업의 형태를 보였고, 1930년대부터 규모가 큰 영화회사가 등장했으며, 배급과 상영도 체계를 잡아갔다. 영화회사를 중심으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활발하게 영화를 생산해 냈다. 사실주의 영화, 반제국․반봉건을 표방하는 영화들 과 더불어 무협영화와 사극영화 등 각종 장르영화도 등장 했다. 계속된 전란은 영화인들을 상하이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1932년 일본이 상하이를 침범했고, 이는 1937년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1945년 일본이 물러난 후엔 곧 국 공내전이 있었다. 영화인들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내륙과 홍콩을 오가면서 활동을 계속했다. 내륙에선 이데올로기 가 담긴 항전영화가 주로 만들어졌고, 1930년대부터 상하 이의 영화 자원을 흡수하기 시작한 홍콩은 중국영화가 해


외로 향하는 창구로서 상업영화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타이완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있 었다. 따라서 이 시기 타이완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일제 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영화, 계몽영화 위주였고, 유성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일본어 대사를 의무 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등 철저하게 총독부의 지배를 받았 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간 후 국민당 정권이 영화업을 관 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빈곤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영화는 나오기 힘들었고, 1946년 중미우호조약 체결 이후 미국영화가 시장을 장악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과 문화대혁명 (1950∼1976)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중국대륙의 영화 자원은 모두 국유화 되었고, 영화업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 운영되었다. 이른바 ‘17년 시기’로 불리는 1949년부터 1966년까지의 기간에 영화는 예술이나 산업이 아닌, 이데 올로기 도구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1966년부터 1976년까 지 계속된 문화혁명 기간 동안 영화는 소수의 모범극(樣 板戱) 영화[장칭(江靑)과 4인방이 세운 원칙에 따라 만들

어진 현대 경극과 발레극을 촬영한 영화] 외엔 거의 만들 지 못했다. 영화인들은 반동으로 몰려 박해받았으며, 베


이징영화대학(北京電影學院)은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시골로 하방(下放)되어 육체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홍콩에서 영화산업은 만개했다. 대륙에서 유입된 인구로 인해 복잡해진 홍콩에서 영화는 각광을 받 는 오락이었다. 1950년 제작편수가 200편에 달할 정도였 다. 영국령 자유무역항이라는 유리함을 한껏 발휘해 해외 로도 한껏 뻗어가 ‘동방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한국과는 1957년부터 합작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인력 등 다방면의 교류가 있었다.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 등 메이저스 튜디오들은 무협영화, 코미디영화, 사극영화 등 장르영화 들을 제작하고, 스타 감독과 배우들을 배출했다. 1970년 대엔 리샤오룽(李小龍, Bruce Lee)은 쿵푸영화로, 쉬관원 (許冠文, Michael Hui)은 코미디영화로 관객들의 큰 사랑 을 받았다. 타이완에선 1950년대에 국영 타이완영화사(臺灣電影 公司)와 국민당의 중양영화사(中央電影公司)가 선전영

화, 반공영화 등을 주로 만들었다. 1960년대 들어 멜로영 화, 사극영화, 무협영화 등으로 회복세를 보였지만, 1970 년대 후반부터는 힘을 잃고 홍콩영화에 주도권을 내어준다.


개혁 개방과 뉴웨이브의 등장(1977∼2000)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 개방의 물결이 중국대륙에 일 어났다. ‘신시기(新時期)’가 시작되던 즈음 양안삼지에 연 달아 새로운 영화 흐름이 나타났다. 1979년부터 홍콩에서 는 1940년대 후반 태생으로 홍콩에서 성장해 외국에서 유 학한 일군의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선보였다. 쉬 안화(許鞍華, Ann Hui), 팡위핑(方育平, Allen Fong), 옌 하오(嚴浩, Ho Yim) 등 뉴웨이브 감독들은 홍콩인으로서 정체성을 탐구하고 홍콩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들을 선보 였고, 그중 쉬커(徐克, Tsui Hark) 감독은 무협영화에 새 로운 기술을 접목해 이후 무협액션영화의 새로운 전성기 를 열었다. 1982년 타이완에서는 양더창(陽德昌), 장이 (張毅) 등 4명의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영화 <세월이야기 (光陰的故事)>를 필두로, 1983년 허우샤오셴(侯孝賢), 완런(萬仁), 쩡좡상(曾壯祥)의 <샌드위치맨(兒子的大玩 偶)>, 천쿤허우(陳坤厚)의 <샤오삐 이야기(小畢的故事)>

등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 영화들은 타이완의 과거와 현 대사 속 개인들의 삶을 심도깊게 다루었으며, 미학적으로 도 매우 뛰어났다. 이러한 타이완 뉴웨이브(新浪潮: 신랑 차오)영화는 평단과 관객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대 륙에서는 <하나와 여덟(一個和八個)>(1984), <황토지(黃


土地)>(1985)가 이전 세대와 명확히 구분되는 이른바 제5

세대의 탄생을 알렸다. 문화혁명 이후 재개교한 베이징영 화대학 78학번 동기들인 장이머우(張藝謀), 천카이거(陳 凱歌), 톈좡좡(田壯壯), 황젠신(黃建新) 등은 영화예술에

중국 전통 미학과 예술형식을 도입해 독특한 영화언어를 선보였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중국 사회와 제도를 분석 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을 담았다. 홍콩과 타이완, 중국에 차례로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정치적·사회적인 변화가 작용했다. 홍콩 은 1970년대에 유행했던 쿵푸영화와 코미디영화의 붐이 사그러들 무렵, 전성기를 구가하던 방송산업이 흔들리면 서 TV 쪽 인력들이 영화계로 유입된다. 홍콩에서 자라 해 외에서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대륙에서 건너온 기존 세대 와 다른 자신들만의 주제와 영상미학을 선보였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개혁개방정책을 공표한 이래 사회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베이징 영화대학 78학번들은 문화혁명 이전에 영화를 공부한 4세 대 선배들과는 달리 외국영화들을 접할 수 있었고, 다양한 시도도 가능했다. 그 결과 문화혁명 기간 동안 경험한 하 방의 기억과 학창 시절 습득한 영화 지식을 결합한 새로운 영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5세대 감독들은 졸업 후 대부


분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가 아닌 서부 내륙 지역 제작 소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이들이 비교적 빨리 데뷔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당시 시안영화제작소 소장이자 4세대 감독 중 하나인 우톈밍(吳天明)은 후배들 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후원 역할을 아끼지 않 았고, 그 결과 <붉은 수수밭(紅高粱)>(1987), <아이들의 왕(孩子王)>(1987) 등의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타이완 은 1970년대 경제성장으로 인해 관객들의 수준이 향상되 었고, 타이완에서 성장한 세대들이 영화계에 입문했다. 또한 1980년을 전후로 검열을 대폭 완화하는 등 정책의 변화가 있었고, 중앙영화사에서 신인감독들의 영화를 지 원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삼중국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공통적인 특징은 1940 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출생해, 중국, 홍콩, 타이 완 각각의 현지 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자라났 고, 이전 세대와 달리 외부의 문화를 자유롭게 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존 영화들과 선을 긋는 동시에, 자신들 의 정체성에 매우 주목한다. 또한 자신들만의 영화언어를 구축했다. 이들로 인해 삼중국의 영화는 본격적으로 해외 에 알려지게 되었고 중국영화는 국제적인 주목과 인정을 받게 된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 수준은 향상되고 관객들의 눈높이도 달라졌지만, 영화계는 거기에 부응하 지 못했다. 그 결과 관객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들어서 영화업에도 개혁개방의 움직임이 가시화된다. 영화제작소에 자체 배급권을 부여했고,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나 민간영화사의 시스템을 도입한 준관 방영화사와 민간영화사가 등장했다. 1994년엔 <도망자> 를 필두로 할리우드영화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영화계에 는 이른바 6세대 감독들이 등장해 검열을 거부하는 지하 영화(地下電影)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거가 아닌 현재, 바로 자신 옆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카메라를 들이댔 다. 홀로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이야기인 장위 안(張元)의 <엄마(媽媽)>(1990)를 필두로 한 6세대 감독

의 영화들은 영화제를 통해 해외에 알려졌다. 제도권에서 는 펑샤오강(馮小剛)이 <갑방을방(甲方乙方)>(1997) 등 의 설연휴를 겨냥한 코미디영화로 사랑을 받았고, <샤워 (洗澡)>(1999) 같은 발랄한 소품들도 인기를 모았다. 홍콩에선 청룽(成龍, Jackie Chan)이 <취권(醉拳)> (1978) 등의 쿵푸코미디로 스타덤에 올라 <프로젝트 A(A 計劃)>(1983) 등의 코믹액션물로 인기를 모았으며 할리

우드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1980년대 후반에 예술성


짙은 작가주의 성향의 감독 왕자웨이(王家衛, Wong Kar Wai)와 관진펑(關錦鵬, Stanley Kwan)이 등장한다. 왕자 웨이는 인간의 고독과 사랑을 주제로 스타일리시한 영화 들을 선보였고, 관진펑은 섬세한 심리묘사와 인간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돋보이는 영화를 내놓았다. 뉴웨 이브의 일원인 쉬커는 <영웅본색(英雄本色)>(1986)을 제 작해 이른바 홍콩누아르로 일컬어지는 액션물의 붐을 일 으켰다. 1990년대 들어서는 <황비홍(黃飛鴻)>(1991) 등 을 연출하고, <동방불패(笑傲江湖之東方不敗)>(1992) 등 을 제작했는데, 특수효과가 결합된 이 새로운 스타일의 무 협영화들은 큰 인기를 얻었다. 1997년의 대륙 반환을 앞 두고 홍콩의 경제는 침체기에 빠진다. 많은 홍콩인들은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 아시아 지역의 경제상황 역시 나 빠지면서 홍콩영화도 활기를 잃어갔다. 제작편수는 줄어 들고, 영화인력의 해외 유출도 늘어갔다. 그 무렵 저우싱 츠(周星馳, Steven Chow)의 황당무계한 코미디영화들이 지친 홍콩인에게 웃음을 안겨주면서 인기를 모았다. <도 성(賭聖)>(1990)에 출연해 스타덤에 오른 저우싱츠는 감 독과 주연을 겸한 <식신(食神)>(1996) 등을 연거푸 빅히 트 시켜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한다. 1990년대 접어들 면서 타이완 뉴웨이브영화들은 국내 시장에서 활력을 잃


고 정부 보조금이나 해외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 게 된다. 이 시기에 등장한 차이밍량(蔡明亮), 린정셩(林 正盛) 등은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유수의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했지만 국내 박스오피스는 초라했다. 1986년 영화 수 입쿼터가 폐지되면서 미국영화의 공세를 막을 수 없게 되 었고, CATV의 발달과 불법판으로 인해 타이완영화산업 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한편, <쿵후선생(推手)> (1991) 등으로 주목받은 리안(李安)은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겨 영어로 된 작품을 활발히 만들었고, <와호장룡(臥虎 藏龍)>(2000) 이후 중국어영화도 간간이 만들고 있다.

대륙의 WTO 가입과 삼중국의 심기일전(2001∼) 2001년 중국대륙은 WTO에 가입하면서, 분장제(分帳制: 상영 수익의 일정 비율을 수출한 측에 배분하는 방식)영 화 수입편수를 10편에서 20편으로 확대하고, 영화관 건립 과 증축에 외자 비율 49%까지 허용하는 등 영화업의 문호 를 열기 시작했다. 2002년에 민영영화사의 독자적인 영화 제작과 개봉을 허용하고, 원선(院線: 극장체인) 건립을 통 해 배급과 상영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2003년에 검열 방 식을 시나리오 검열에서 시놉시스 검열로 간소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 변화에 힘입어 2000년대 중반부터 영


화산업은 매년 급성장해 2011년에는 세계 3위 수준으로 도약했다. 대륙의 영화는 대형화를 지향해 가고 있다. 국 영영화제작소는 지역의 영화 단위들을 묶어 그룹화시켰 고, 민간 자본 투자 활성화 정책은 영화계에 자본 유입을 가속화시켰다. 급기야 <영웅>(2002)이라는 중국식 대작 영화를 시장에서 성공시킴으로써 펑샤오강, 천카이거 등 중견 감독뿐 아니라 신진 감독들도 대작영화를 만들어내 는데 열을 올렸다. 이를 통해 중국대륙의 영화 시장 몸집 을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불러왔다. 이에 반해 2000년대 접어들어서도 침체를 떨치지 못하 고 있는 홍콩은 이제 중국어권의 허브 역할로 새로운 돌파 구를 찾고 있다. 개방을 원하지만 쉽사리 두려움을 떨치 지 못하는 중국대륙에는 같은 민족으로서 친근하게 다가 가 대외 교류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중국대륙에 진출하고 싶지만 ‘죽의 장막’으로 인해 좌절을 맛보고 있는 외국영 화 관계자들에게는 영어 구사력과 국제적인 비즈니스 매 너로 접근해 대륙으로 다가설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겠다 는 것이다. 타이완영화는 199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극심한 침 체에 빠졌다. 자국영화 점유율이 1% 내외로 바닥을 찍었 던 타이완은 2008년 신인감독 웨이더셩(魏德聖)의 <하이자


오 7번지(海角7號)>의 대성공과 더불어 정부 차원의 지원 정책 활성화 움직임에 힘입어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한류와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 향상과 홍콩영화의 몰락 등은 1990년대 말부터 삼중국에 한국영화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 했다. 대륙에서는 드라마 스타들이 출연한 <결혼 이야기>(1998) 등이 포문을 열었다. 홍콩에서는 <8월의 크리스마스>(1999)와 <쉬리>(1999)가 예술성과 상업성 을 입증하면서 많은 한국영화가 소개되기에 이른다. <지 독한 사랑>(1998), <여고괴담>(1999)은 타이완에 첫발을 디딘 한국영화들이다. 세 지역에서 결정적으로 한국영화 를 각인시키게 된 것은 <엽기적인 그녀>의 활약이다. 2001년 불법 DVD로 선보여 대륙에서 큰 히트를 기록한 이후 홍콩과 타이완에서는 극장 개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뒤늦게나마 대륙에서도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이 후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양안삼지에 소개되고 있다. 또한 삼중국과 공동제작은 물론 인력 교류도 다방면에서 이뤄 지고 있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중국과 홍콩, 타이완은 좀더 가 까이 연합하고 있다. 2004년 대륙과 홍콩 간, 2010년 대륙 과 타이완 간 경제협력협정 체결로 이제 홍콩과 타이완영 화는 수입쿼터의 제한 없이 대륙에 진출이 가능해졌고,


2005년부터 홍콩과 마카오 자본은 대륙에 독자적인 영화 관 설립이 가능해졌다. 한때 중국영화를 수입하지 않았던 타이완도 문호를 넓혔고, 감독과 배우들 등 인력 간 교류 는 더욱 활발하다. 이제 삼중국은 대륙의 방대한 시장과 자본력, 홍콩과 타이완의 제작 노하우와 글로벌한 감각과 기획력 등을 합쳐 할리우드영화에 대적할 수 있는 영화 강 국을 꿈꾸고 있다. 이 책은 입문서로서 일반인들이 중국․홍콩․타이완영화 를 가볍게 일별할 수 있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10개 항목에 따라 요약 정리된 것이므로 삼중국영화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의 참고문헌 등 다른 책들을 찾 아서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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