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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미디어의 현실 서울의 방송과 신문은 군의 손에 들어갔다. 부산의 언론이 빠르게 발전한다. 전황이 궁금한 국민은 뉴스에 매달렸다. 25억 장의 삐라가 하늘을 수놓았고 ≪학원≫과 ≪사상계≫도 이때 창간되었다. 서울수복 소식을 전하는 ≪서울신문≫ 호외를 읽고 있는 사람들, 본문 187쪽


인텔리겐치아 2591호, 2015년 5월 18일 발행

김영희가 쓴 ≪한국전쟁기 미디어와 사회≫

1950년 6월 27일 저녁 9시 대전으로 피난을 간 이승만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녹음해 방 송으로 발표했다. “서울 시민은 대통령과 함 께 서울에 남아서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방송으로 서울 시민은 대통 령이 서울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6월 28 일 새벽 2시 넘어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고, 그날 오후 5시 북한군이 서울을 완전히 점령 했다. 정부 발표와 대통령의 담화 내용은 사


실과 너무 달랐다. - ‘전쟁 보도’, ≪한국전쟁기 미디어와 사회≫, 138~139쪽.

방송이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는가? 전쟁 다음 날부터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가 당 시 유일한 라디오 방송국인 중앙방송을 감독 했다. 정훈국의 발표 내용만 방송했고 그랬 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방송되었다. 방송 내용이 무엇이었나? 전쟁 발발은 알렸으나 자세한 전황은 일체 밝 히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간 것, 정부가 한강대교를 폭파한 것도 알리지 않았다.


신문은 어땠나? 사전 검열해 정부 발표만 보도했다. 북한군 이 서울을 점령하자 신문사 건물과 시설이 파 괴되었다. 피살되거나 납북된 언론인도 있 었다. 서울의 신문사들은 임시 수도 부산으 로 피난 갔다. 부산의 사정은? 대구, 부산의 지역 신문과 피난 간 서울의 신 문사가 사무실과 윤전기를 임대해 신문을 발 행했다. 부산 지역 언론이 비약적으로 성장 했다. 성장의 모습이 어땠는가?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황이 궁금한 독자가 크


게 늘었다. 부산 지역 신문인 ≪국제신보≫는 전쟁 기간 일일 최대 10만 부, ≪민주신보≫는 8만 부를 발행했다. 뉴스의 품질은? 서울의 언론인, 문인, 대학교수를 필자로 참여시켰다. 해설 기사의 권위가 높아졌다. ≪국제신보≫는 헤리크라프트라는 수신기 로 세계 각국의 방송을 청취해 전달했다.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 가?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날부터 중앙방송을 장 악해 방송을 시작했다. 점령 5일째인 7월 2일 에는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를 창


간했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 시민의 신뢰를 잃었다. 사람들은 믿을 만한 다른 정보원을 찾았다. 믿을 만한 정보원, 그게 뭔가? 미 육군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6월 29일 일 본 도쿄의 NHK 방송 시설을 이용해 시작한 한국어 라디오 방송인 유엔군총사령부방송 과 1942년 8월 29일 처음 시작한 미국의 대외 선전방송인 미국의소리 한국어 방송이다. 믿을 만했나? 전황은 비교적 정확하게 보도했던 것으로 보 인다.


방송의 다른 목적이 있었나? 전황 보도보다 더 중요한 방송 목적이 따로 있었다. 대한민국을 도운 시혜자로서 미국 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 동아시아에서 영향 력을 넓히는 것이다. 적의 기강과 마음을 흔 들어 분열시키는 심리전 매체의 기능도 중요 했다. 심리전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미국은 한국 군대 훈련을 지원하고 평화를 원 하며 아시아에 호의적이다, 유엔은 아시아 의 난민을 돕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잔인하 고 비인간적이며 포로를 학대한다, 중공은 가뭄과 굶주림에 시달린다. 이런 내용을 방 송했다. 이런 메시지를 삐라에도 담았다.


삐라는 어떻게 사용되었나? 심리전의 대표 매체가 바로 삐라다. 삐라는 ‘들리지 않는 총성’이고 ‘종이폭탄’이었다. 6 월 28일 미 극동군 심리전과가 처음 살포한 삐라는 1176만 장이었다. 그해 10월 말에 1억 장, 1951년 1월에 2억 장, 같은 해 11월 말에 8 억 장을 돌파했다. 전쟁 기간에 모두 25억 장 이상의 삐라를 살포했다. 북한군과 중국군 도 삐라를 적극 활용했다. 메시지는 뭔가? ‘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 하는 ‘안전보장 증명서’다. 귀순 권유 삐라로 이 증명서를 들고 오면 안전을 보장한다고 설 득한다. 전황과 국내외 소식을 전달하는 신문


형식의 ‘낙하산뉴스’와 ‘자유세계주간신보’도 있다. ‘자유세계주간신보’는 창간사와 사설 을 게재한 신문의 축소판 같은 형태였다. 이 책 ≪한국전쟁기 미디어와 사회≫는 무엇 을 설명하는가? 풍부한 사료로 한국전쟁 기간 미디어의 역 할, 정부의 미디어 정책, 사회 현상을 고찰했 다. 이승만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반공 이 데올로기를 설파한 미디어의 역할을 살펴본 다. 당시 라디오, 신문 등의 자료에서 서울 시민이 미디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확인한 다. 부산 언론의 발전과 전쟁 기간 출판, 잡지 가 큰 성장을 이룬 배경을 짚는다. VUNC, VOA 한국어 방송, 삐라 살포로 미국이 동아


시아에서 영향력을 강화한 현상을 이해하 고, 설득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쓰인 남북한 삐라의 메시지를 분석한다. 북한이 전개한 선전선동사업과 언론 활동도 살펴본다. 한 국전쟁 기간 미디어 현상과 사회를 다룬 최초 의 책이다. 한국전쟁기에 우리 미디어는 무엇을 했는가? 이승만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했다. 냉 전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확대 재 생산했다. 전황 정보를 제공해 전쟁 소식에 대한 수용자의 갈증을 해소했다. ≪희망≫, ≪학원≫, ≪신태양≫, ≪사상계≫가 부산 과 대구에서 창간되었다. 즐거움과 오락을 제 공하는 미디어이면서 교양과 지식을 제공하


는 정보원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영희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책임 연구원이다.


한국전쟁과 미디어의 현실 서울의 방송과 신문은 군의 손에 들어갔다. 부산의 언론이 빠르게 발전한다. 전황이 궁금한 국민은 뉴스에 매달렸다. 25억 장의 삐라가 하늘을 수놓았고 ≪학원≫과 ≪사상계≫도 이때 창간되었다. 서울수복 소식을 전하는 ≪서울신문≫ 호외를 읽고 있는 사람들, 본문 187쪽


한국전쟁기 미디어와 사회 김영희 지음 사회과학 일반 2015년 5월 11일 신국판(153*224) 무선 제본, 554쪽 35,000원


작품 속으로

한국전쟁기 미디어와 사회


머리말

이 책은 한국전쟁 기간 미디어와 관련한 주요 현상을 고찰한 것이다. 전 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3년이 넘는 장기간 이어진 전쟁, 전쟁을 일으킨 북한 이외에도 북한을 지원한 소련과 중국,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전 쟁 참여 등 복합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전쟁 기간 과연 미디어는 어떻게 존재하고, 그 특징은 무엇인지 살펴본 것이다. 내가 이 주제의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언론사 연구에서 한국 전쟁 기간에 관한 연구가 거의 공백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나는 언론사 관련 문헌들을 읽으며, 대부분의 문헌에서 제1공화국 이승만정 부 수립 직후의 미디어 현상을 설명하고, 전쟁 기간은 간략히 언급만 하 거나 건너뛴 채, “전후에는… ”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해 1950년대 후반 의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고 문헌을 조 사한 결과 한국전쟁 전쟁 발발 후 휴전까지 3년이 넘는 기간의 미디어 연구 성과는 매우 드물어 사실상 거의 연구되지 않은 실정임을 알았다. 그에 비해 한국사 분야는 물론 정치사를 비롯해 경제사, 사회사 등 의 분야에서 한국전쟁 기간을 다룬 연구들이 그야말로 산같이 쌓여 있 었다. 한국전쟁은 한국의 현대사에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 건이다. 따라서 현대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 야의 구조와 성격에 한국전쟁이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학문분야에서 전쟁 관련 연구들을 꾸준히 수행해 온 것이


다. 미디어 역사 연구자로서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렇게 전 쟁 기간 미디어 연구가 부진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언 론학계에 역사 연구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후 한국전쟁 기간의 미디어 현상의 연구가 매우 필요하다 고 생각하고 장기적으로 전쟁 기간에 대해 연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거기에는 미디어 역사 연구자로서 일종의 의무감이랄지 책임감 같은 것 도 있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학술진흥재단(현재의 한국연구 재단)에 신청한 “한국전쟁과 매스 커뮤니케이션 현상 연구”가 3년 기간 의 연구 과제로 선정되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 기간 후에 도 나는 전쟁 기간 미디어를 주제로 연구서를 간행할 계획을 세우고 관 련 연구를 틈틈이 이어갔다. 그러던 중 한국연구재단에 저술성과확산 지원사업이 새로 생겨 후속 연구를 신청한 것이 선정되어 마무리 집필 에 도움을 받았다. 이 주제를 연구하고, 저술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한 국연구재단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 연구는 󰡔󰡔한국언론연표󰡕󰡕󰡕Ⅱ(1987), 󰡔󰡔한국언론연표󰡕󰡕󰡕Ⅲ(1993)과 네

이버 뉴스라이브러리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조선일보≫ 아 카이브 등 인터넷에서 검색이 가능한 신문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대한민국사󰡕󰡕를 비롯한 한국사데이타베이스(http://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미 국에서 수집해 영인본으로 펴낸 자료집 및 국립중앙도서관이 인터넷으 로 검색할 수 있도록 공개한 해외 수집 기록물 가운데 북한 노획 문서들을 1차 사료로 활용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 일부 소장한 부산의 ≪국 제신보≫와 ≪부산일보≫, 국사편찬위원회가 복사본으로 묶어 놓은 ≪민 주신보≫도 유용했다. 나는 이 연구를 하면서, 해방 이후 미국의 대한 선전 활동 관련 논문


을 꾸준히 발표하신 상지대학교 장영민 교수님의 주선으로 상지대학교 박용규 교수님과 함께 “미국의 대한 방송 활동 연구”에 공동 연구원으로 참여해 미국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자료 수집을 했다. 그 과 정에서 전쟁 기간 미국의 방송 활동에 관한 사료를 보충했다. 연구자로 서 정말 행운이었다. 장영민 교수님이 미국에서 수집하신 사료 가운데 슈람(Wilber Schramm)의 보고서를 선뜻 제공해 주신 것도 고마웠다. 슈람이 누구인가.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하나의 학문으로 체 계화한 저명한 학자 아닌가! 그 슈람이 전쟁 기간 VUNC의 방송 활동을 조사, 분석하여 1952년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다. 슈람의 보고서를 읽으 며 느낀 감회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서에서 보던 슈람의 글과는 달랐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예상치 않은 곳에서 만난 반가움 같은 것이었다. 슈 람의 보고서와 함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미국 NARA에서 수집해 3권으 로 펴낸 전쟁 기간 심리전 자료집을 읽으며, 1950년대 미국의 커뮤니케 이션 이론 연구에 한국전쟁 기간의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음을 확인한 것도 언론학 전공자로서 뜻깊은 발견이었다.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은 미국의 대한 방송과 삐라를 제외하면 지 금까지 거의 연구되지 않은 주제들이다. 선행 연구가 드문 주제들을 연 구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구상한 책의 체계를 염두에 두 고 관련 주제를 하나씩 발표하며 기쁨과 보람도 컸다. 우리나라에서 처 음으로 발표한 북한이 남한 점령 기간 발행한 ≪조선인민보≫와 ≪해방 일보≫ 연구 논문은 내가 소속한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역사상 처 음으로 서울대학교 홍보실에서 우수 연구 사례로 보도 자료를 내었다. 삐라 분석 연구와 전쟁 기간 이승만정부의 언론 정책과 대응 연구는 영 역하여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행하는 영문 계간지 Korea Journalism


Review에 2008년 2권 3호와 2013년 7권 1호에 수록되었다. 삐라 연구는 월간 ≪신문과 방송≫(2008년 11월 호)에 화제의 논문으로도 소개되었 다. 전쟁 소식 전파와 대응 연구는 한국언론학회 2014년 봄철 학술대회 에서 우수발표논문상을 받았다. 연구자로서 발표 논문의 이런 평가들 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이 책은 이런 논문들을 책의 체계에 맞게 대 폭 보완하고, 새로운 주제들을 추가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그 성격상 이념전, 국제전적 내전, 장기전, 제한전 등 복 합적인 양상을 보인 전쟁이다. 전쟁이라는 비상한 상황이었으므로 이 기간 한국 사회의 미디어 현상은 다른 기간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이 책은 전쟁기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당시의 미디어 현상을 이해하는 데 우선적으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3 측면의 11개 주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체계와 주제에 접근하는 이 책의 기본적인 연구 입장과 시 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되지 않으면서 역사적 사실(fact)을 바탕으 로 기록과 사실이 말해 주는 실증주의적 시각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 이 저술에서 활용한 접근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국 정부, 미국, 북한이 발행하거나 남긴 1차 사료를 기본으 로 당시의 신문, 잡지의 관련 기사 등을 면밀하게 수집해, 교차 분석하는 역사적 문헌 연구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 시기의 주요 미디어 현상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매우 적은 실정이므로 현상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서는 1차 사료를 근거로 한 현상의 기술과 설명이 먼저라고 판단하기 때 문이다. 둘째,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발전한 관련 이론들을 가능한 활용해 현상을 해석하는, 보다 분석적이며 역사언론학적인 연구를 지향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기존 연구가 거의 없는 주제들을 처음 연구한 것으 로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다룬 주제 이외에 전쟁 기간의 미디어 현상 이해를 위해 연구되어야 할 과제들도 여전히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기 미디어 현상에 관한 연구의 작은 시작 이다. 이 책이 미흡하지만 전쟁 기간의 미디어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 이 되고, 후속 연구의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큰 보람일 것이다. 다른 연구 과제들이 있어 예정보다 출간이 늦어졌는데, 부족하나마 저술을 마무리해 이렇게 머리말을 쓰는 시간이 결국 찾아와 참으로 기 쁘고 감사하다. 내가 좋은 연구 환경에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서 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전·현직 소장님들의 배려와 지원 덕분이다. 이전 소장님이셨던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강남준, 양승목, 윤석민, 이 재현 교수님과 현 소장님이신 이준웅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책을 발행한 커뮤니케이션북스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출 판 산업이 불황으로 어려움이 많은데, 수요가 적은 전문 연구서를 발행 한 커뮤니케이션북스에 감사드린다. 책 출간의 기쁨은 나의 연구를 언제나 지지하고 성원해 준 사랑하 는 나의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 나의 가족은 내가 새로 구하거나 발견한 자료로 기뻐할 때 가장 먼저 듣고 함께 기뻐해 주었고, 나의 연구 내용을 식탁에서, 거실에서 가장 먼저 듣고 의견을 말해 준 독자들이기도 하다. 끝으로 이 책을, 전쟁을 직접 겪으며 피난 생활로 고생하신, 살아계 셨다면 나의 연구 작업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격려해 주셨을 부모님 영 전에 삼가 그리운 마음을 담아 바친다. 2015년 5월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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