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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민주주의의 실패, 그 이후 야당은 여당을, 여당은 야당을 적으로 인식한다. 정당의 목적은 권력 장악이고 권력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파국이다. 경합적 민주주의가 새로운 길을 가리킨다. 서로를 수용할 수 있는 경쟁자, 곧 친구로 인식한다.

＜두 남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그림, 1928

인텔리겐치아 2608호, 2015년 5월 28일 발행

유용민이 쓴 ≪경합적 민주주의≫

경합적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들이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직면한 위기에 효과적 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현실을 이론 적으로 비판하고, 그 위기를 실천적으로 극복 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 ‘샹탈 무페와 경합적 민주주의’, ≪경합적 민주주의≫, v쪽.

경합적 민주주의가 뭔가? 샹탈 무페가 기존 민주주의 모델의 대안으로 제시한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이다. 기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여러 정치 집단이 서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적대하는 정치다. 새로운 민주주의란 뭔가? 서로를 정당한 상대자로 인식하는 경쟁자들 간의 정치다. 전환의 핵심은? 안타고니즘으로부터 아고니즘으로의 전환 이다.

뭘 전환한다는 말인가? 안타고니즘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는 태도다. 민주주의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고니즘은 다른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경쟁 자, 즉 ‘친구’로 본다. 전환의 목표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서로를 물어뜯어 제거하는 싸움터를 지양하여 서로 를 격려하고 자극하는 경합의 장으로 발전시 키는 것이다.

샹탈 무페가 누구인가? 벨기에 태생 정치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다.

1985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헤게 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발표해 학계의 주 목을 받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의 자유 민 주주의 위기에 주목하고 실천 대안으로 ‘경 합적 민주주의’ 모델을 주장한다.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란? 적대 갈등을 화해시키는 데 실패한 정치 현실 을 말한다. 원인이 뭔가? 민주주의를 투표 또는 모두의 동의를 위한 시스 템으로만이해하는정치철학에서비롯되었다.

무페의 위기 극복 전략은 뭔가? 정치가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근본주의적 사고와 믿음을 버리는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다. 인식 전환의 성과는? 대안을 찾았다. 다원 민주주의 전략이다. 갈 등을 민주적으로 경합시키는 전략이다. 인식 전환의 현실 배경은?

1980년대 후반에 자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이념 경쟁에서 승리한다. 곧 자유, 인권, 평등,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낙 관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현 실은 그 반대로 치닫고 있다.

낙관의 반대 지점은 어디인가? 사라진 줄 알았던 민주주의의 ‘적’들이 부활했 다. 배타적 민족주의, 극단적인 정치 세력, 종 교적 근본주의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세계는 테러로 얼룩져 갔다. 적대와 반목의 증거다. 적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나? 소비에트 공산주의라는 외부의 적은 사라졌 다. 그때부터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민 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 하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에 자유 민주주의는 무엇을 잘못 한 것인가? 화해 불가능한 적대 전선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

적상황에적절히대처하지못했다.무페는자유 민주주의스스로위기를초래했다고주장한다. 이 책, ≪경합적 민주주의≫는 무엇을 다루나? 무페의 경합적 민주주의를 소개한다. 주요 개 념과 내용, 이론이 제기된 사회역사적 배경, 기존 민주주의 이론과의 차별점과 유사성, 기 존 자유 민주주의와의 차이를 지적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유용민이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 원 박사과정에서 학위논문을 준비한다.

자유 민주주의의 실패, 그 이후 야당은 여당을, 여당은 야당을 적으로 인식한다. 정당의 목적은 권력 장악이고 권력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파국이다. 경합적 민주주의가 새로운 길을 가리킨다. 서로를 수용할 수 있는 경쟁자, 곧 친구로 인식한다.

＜두 남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그림, 1928

경합적 민주주의 유용민 지음 정치이론 / 민주주의 2015년 5월 20일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20쪽 9,800원

작품 속으로

경합적 민주주의

샹탈 무페와 경합적 민주주의

이 책은 민주주의에 관한 대안적 모델로 주목받는 경합적 민주주의(agonistic democracy)를 소개한다. 경합적 민주 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들이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직면 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현실을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그 위기를 실천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루 는 경합적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 가 체계화한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 혹은 급진 다원주의(radical pluralism)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녀의 민주주의 모델은 경합적 다원주의, 급진 민주주 의, 쟁투적 민주주의, 급진 다원주의 등 다양한 용어로 부 른다. 그래서 ‘경합적 민주주의’라는 표제가 적절하지 않다 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용어가 가진 표현상의 차이에도, 그녀의 민주주의 논의가 궁극적으로 아고니즘(agonism)의 정치를 초점으로 구체화해 왔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무페가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의미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샹탈 무페 샹탈 무페는 1943년 벨기에 태생으로 유럽에서 남미까 지 국제적으로 다양한 권역을 가로지르는 학문적 여정을 거친 정치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다. 그녀는 현재 영국 웨스트민스터대학교 정치및국제관계학과에 몸담고 있 다. 무페는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학자 에르네스토 라클

라우(Ernesto Laclau)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1985)을 내놓 으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급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경제 본위의 결정론적 사고에 얽매인 전통적인 마르크시즘적 접근과 결별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전통 마르크시즘을 극복하는 맥락은 계급에 주목 하는 전통 좌파적인 인식론으로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 등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적 전략의 마련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의식에 있다. 포 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입지를 구축한 무페는 이 를 토대로 급진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자신의 민주주의 이 론을 발전시켜 왔다.

그녀의 주된 저작으로는 편저 󰡔󰡔카를 슈미트의 도전

(The challenge of Carl Schmitt)󰡕󰡕(1999), 󰡔󰡔정치적인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political)󰡕󰡕(1993), 󰡔󰡔민주주의의

역설(The democratic paradox)󰡕󰡕(2000),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On the Political)󰡕󰡕(2005) 등을 꼽을 수 있다. 무페

는 최근 󰡔󰡔아고니스틱스: 정치적으로 세계를 사고하기

(Agonistics: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2013)를 펴내는 등 지금도 왕성한 학문적 실천을 지속하고 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무페의 경합적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마 르크스주의자(post-Marxist)로서 무페의 학문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우선 필요하다. 그녀의 학문적 명성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이 력에서 출발한다. 무페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정치와 철 학에 대한 관심과 결합하고 이를 대안적인 민주주의 모델 에 대한 모색으로 넓혔다. 이를 통해 그녀는 계급과 경제를 중심으로 사회 변화의 문제를 사고하는 전통 좌파의 한계 를 이론적으로 극복하고, 탈근대와 지구화라는 시대적 조 건에서 부상하는 정치적인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모델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통해 무페가 가장 먼저 시도한 작업은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정치적 주체의 성격을

오직 하나의 총체(as a whole)로서의 계급에서 구하려는 전통 좌파적 전략으로부터 탈피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물 질적 요인으로서 계급이 중요한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지 만, 현대사회의 개인들이 가지는 정체성의 다층적인 성격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급적 정체성을 중시하는 인식론 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무페는 정치적인 갈등을 경제적 인 차원으로 환원하거나 유물론적 입장에 근거해 물질적 토대의 변화에 매달리는 전략으로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아가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 마르크스주의가 우선적인 비판과 극 복의 대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무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담론(discourse)과 상부구 조(super structure) 차원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구체 적으로 무페가 요청하는 주체의 개념은 담론적으로 구성 된다는 인식론에 근거한다. 무페는 구체적인 인간 집단들 이 현실에서 서로 관계를 맺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특성이 무수히 분화된 사회 영역들 속에서 개인이 처하는 경험과 다원주의적 조건들 의 다층적이고 중첩적인 접합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강조한다. 이는 주체들이 처한 위치들(positions)

이 단일한 요소나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 고 볼 수 있는데, 이를 기반으로 무페는 탈근대적 조건에 서 정치의 비결정성과 우연성을 열어 놓음으로써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도모한다. 실제 다양한 사회관계들에서 출현하는 정체성들의 모 습을 살펴보면, 그들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단지 물질적 토대나 사회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 발 견된다. 정치적 주체의 성격이나 사회 갈등의 원인 및 책 임을 물질과 사회구조의 차원으로 환원할 경우, 사회 변화 를 위한 실천 전략은 경제적 조건과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인식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연결되어 있다. 무페는 전체주의의 몰락을 역사적으로 실증한 소비에트의 붕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어떤 형태의 근본주의적 인식론이나 실천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갖게 된다.

20세기 후반은 좌파 진영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절 감하고 사회 변화를 위한 새로운 전략 모색과 실천에 나설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포스트 혹은 탈마르크스주의가 본 격화되기 시작한 시대적 맥락은 오직 좌파 이론가들만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사회과학, 나아가 지성사 전반 의 새로운 경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극복 하고자 했던 여타의 민주주의 이론가들과 무페가 차별되 는 지점은 다른 이론가들이 여전히 노동계급과 마르크스 주의 영역 안에 머무르면서 사회 변화의 전략을 모색하려 했던 반면 그녀는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전통 좌파적 흐름 에서 이탈해 계급을 본질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인식론에 대한 해체를 정면으로 시도했다는 데에 있다. 종합해 보면,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크게 두 가 지 맥락에서 의미를 가진다. 첫째, 그녀의 포스트마르크스 주의는 계급 중심 세계관에 기초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사 회 변화 전략에 대한 이론적 탈피를 목적으로 한다. 둘째,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계급과 경제를 중시하는 전 통 좌파적 전략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기존 관 행에서 벗어나는 인식론적 전환을 발판으로 서구가 발전 시켜 온 자유주의적 전통을 다원 민주주의로 이행시키는 민주적 전략 수립을 그 목표로 지향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근대 이 래 서구를 중심으로 지속되어 온 정치적 실천의 가장 큰 두 흐름을 ‘다원 민주주의의 급진화(radicalizing pluralistic democracy)’라는 새로운 사회 변화 전략의 모델로 통합하

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그 두 흐름 중 하나는 인간을 억압하 는 모든 전체주의적 압력에 맞서 평등과 해방의 사회 전략 을 모색해 온 좌파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하나의 흐름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의 발전을 지 향해 온 자유민주주의적 실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탈근대적 시대의 민주주의 무페의 학문이 현대 민주주의 정치 이론 영역에서 차지하 는 위상을 간단히 말하자면 선호 집합적 민주주의나 심의 민주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그간의 자유주의적인 민주주 의 모델들의 한계와 결함을 비판하고 다원 민주주의 관점 에서 그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 이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민주주의 논의가 가지는 보다 더 큰 함 의는 그녀의 민주주의 이론이 탈근대적 조건에 주목함으 로써 근대성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한 다는 점이다. 그녀의 민주주의는 탈근대적 인식론을 민주 주의 이론에 적극 수용함으로써 정치를 비추는 근대적 세 계관에 대한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 무페는 마르크스주의와 단절을 통해서 역사가 합법칙 적이고 단선적으로 발전한다는 결정론적 믿음에 토대를 두는 근대적 세계관으로부터 탈피를 도모한다. 근대는 인

간이 가진 계몽주의적인 이성과 합리성의 힘을 통해 역사 가 발전할 것이란 보편적 믿음에 기초해 왔다. 서구의 자 유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또한 그러한 믿음 에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 그 둘은 근대성의 상반된 두 얼 굴이었다. 하지만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와 세계 에 대한 합법칙적이고 발전론적인 사고는 덜 강조된다. 그 대신 무페는 역사의 변화와 발전을 비본질주의적인 관 점에서 보다 유연하게 사고하자는 자세와 태도를 취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의 민주주의 모델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나 실용주의 철학(pragmatism)과도 연관되어 있다. 근대성과 관련해서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가 지는 또 다른 함의는 사회를 유기체적으로 파악하는 근대 적 관점에 대한 극복이라는 맥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와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로부터 발전한 근대적 사회관은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통합되어 있는 유기체로 간주함으로써 사 회 발전을 전체주의적인 관점에서 사고한다. 하지만 무페 의 민주주의 이론의 근저에는 그러한 근대적 사회관이 극 복되어야 한다는 비판 의식이 담겨 있다. 사회에 존재하 는 복수성과 다원성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는 민주주의 전

략을 위해서는 사회에 존재하는 요소들이 유기체적 사회 를 위해 기능한다는 사고는 극복되어야 할 낡은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와 극복 경합적 민주주의에 관한 그녀의 고민이 구체적으로 발 딛 고 서 있는 역사적 현실은 1980년대 후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자유주의 진영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 되기 시작한 이래 자유민주주의 사회들이 직면하게 된 위 기에 그 초점이 모아져 있다. 역사적으로 소비에트를 위시한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자 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예찬하는 목소리들이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주 장한 ‘역사의 종언’은 냉전과 이념 경쟁 시대의 종식을 선언 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종국적인 승리가 찾아왔음을 기념하 는 선언이었다. 20세기 후반 많은 사람들은 자유, 인권, 평 등, 평화의 시대가 번영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장밋빛 전망이 현실화되었다고 말하기 에는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는 심각해 보인다. 민족 주의는 다시 부활했고, 극단적인 정치 세력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근본주의도 다시 나타났으며, 9·11 사 건과 함께 세계는 테러로 얼룩져 갔다. 지구촌 곳곳에서

적대와 반목의 질서가 들끓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이민 자들과 소수자들의 권리와 정체성에 대한 위협 또한 더욱 커졌다. 과거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위협하는 적이 민주주의 사 회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로 나타났다 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외부의 적 말고도 내부에서 발생하는 적대적 전선의 팽창으로부터도 심각 하게 위협받고 있다. 무페에게 이러한 위기의 핵심은 사회가 점차 화해 불가 능한 적대의 전선들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에 대해 자유민 주주의가 적절히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로 정의된 다. 그녀의 경합적 민주주의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내놓은 정치철학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무페는 자유주의 정치를 둘러싼 사고의 전환이 절실한 이유와 관 련해서 자유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지금의 위기가 실은 바 로 그 자유민주주의가 초래한 결과라는 점을 역설한다.

민주주의와 무페 읽기 소통보다 불통에 빠진 제도권 정치,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 는 적대적 갈등의 확장, 민주적 시민권의 위축과 시민사회 의 침체, 반민주적인 담론과 근본주의적 실천의 팽창 등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입지가 위협받는 정치 현실을 둘 러보면, 민주주의의 위기에 주목하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의 모색은 무척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로 다가온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회에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주장 을 도그마적 진리와 정의로 내세우는 한편 이념적 극단성 과 선명성을 추구하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 및 집단을 근본 적으로 적대시하는 정치 세력·담론들이 난무하고 있다. 반면, 가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도 소통하며 어울려 나아갈 줄 아는 지혜를 제시하고 실천하는 정치 집단과 문 화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정치 현 실에서 특히 요청되는 것은 바로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 에 대한 관심과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 착되기 시작한 이래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과연 우 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까? 최근의 상황을 보면 그러한 질문에 대해 희망적인 대 답을 내놓을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공동의 문제들에 대처하거나 이를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되기보다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문제를 야기

하는 원인으로 손가락질 받고 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 하지 않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민주적 공동체를 향한 사람 들의 애정과 열망은 줄어들고 정치에 대한 냉소와 회의는 그만큼 더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정치의 문제를 엘리트 정치 집단의 무능 이나 부패 탓으로 돌린다. 문제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 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는 점에도 있을 것이다. 제도 정치 외의 영역에서도 민주주 의의 가치와 정신에 어긋나는 반민주적인 사고나 실천은 넘쳐난다. 서로를 끊임없이 배제하고 적대하는 사회적 관 계는 사회의 일상적인 영역 곳곳에서 발견된다. 화해 불 가능한 적대의 팽창이 민주주의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가 지는 않을까? 이러한 고민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그녀의 경합적 민주주의의 의미는 크게 와 닿을 것이다. 국내에서 그녀의 정치 이론이 학계와 대중에게 널리 알 려지고 크게 각광받아 온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페의 학문은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과 독자들로부 터 뜨거운 관심을 받아 왔다. 그녀의 이론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정체와 답보 상태에 있는 민주주의를 다시금 진전 시켜 갈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과 희망을 호소력 있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이론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념론적 사고에 얽매여 정치의 모습을 아름답거나 이상적 형태로 보여 주기보다 구체적인 인간 집단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측면에 주목해 정치를 이론화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주 주의 이론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색깔과 매력을 제공 한다. 무페가 경합적 민주주의를 내놓은 지 꽤 되었지만, 그녀의 이론에 주목할 필요는 여전히 크다.

이 책의 구성 필자는 경합적 민주주의가 제기된 배경과 목적, 경합적 민 주주의가 담고 있는 핵심 개념과 내용들, 기존 민주주의 이론들과 이론적 차별성, 제시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구체 적 모델과 민주적 사회상 등을 차례대로 설명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 이론을 둘러싼 비판과 논쟁 또한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이 경합적 민주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1장에서는 무페가 기획한 급진 민주주의의 배경과 그 녀의 민주주의 이론이 가지는 전반적인 성격을 소개한다. 이를 위해 그녀의 민주주의론의 근저에 깔려 있는 토대로 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후기구 조주의적 논의의 성격 등을 간략히 살펴본다.

2장에서는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철학에 대 한 비판적 해석을 토대로 정치를 개념적으로 재정식화하 는 무페의 논의를 소개한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관한 슈미트의 정치철학에 대한 무페의 비판적 해석은 무페가 제기하는 ‘정치적인 것’의 성격을 규명하고, 자유민주주의 에 내재한 근본적인 긴장과 모순이 무엇인지를 간파할 수 있게 해 준다.

3장에서는 ‘정치적인 것’의 본성에 대한 무페의 논의를 검토한다. 무페는 ‘적대’의 차원이 ‘정치적인 것’의 본성을 이루며, 이를 중심으로 정치가 재정식화되어야 한다고 주 장한다. 무페는 기존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정치적인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근거로 자유주 의의 결함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비판을 전개한다.

4장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에 대한 무페의 해석을 검토한다. 민주적 제도와 정책이 마련 되어 있고 정치 지도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있음에 도, 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끊임없이 제기되는가? 경 합적 민주주의는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민주주의 를 ‘과정/절차’ 그리고 ‘실질’로 구분하는 논의 틀을 가져온 다. 무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논의를 빌어 과정과 절차로서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인식만으로 민주주의가

충분하게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설명한다.

5장은 자유민주주의 이론 진영 중 20세기 후반부터 지배 적인 정치 이론으로 자리매김해 온 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합적 민주주의의 비판을 다룬다. 무페의 비판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두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와 존 롤즈(John Rawls)를 향해 있다. 무페는 자유주의자들이 인간 이성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과도하게 기대하고 민주주 의를 절차주의적으로 한정해 버림으로써 정치를 초정치적 인 중립지대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6장에서는 무페가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 모델이란 무엇인지를 다룬다. 서로 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정치가 서로를 정당한 상대자로 인식하는 경쟁자들 간의 정치로 전환되어야 한 다는 것이 핵심이다. ‘안타고니즘에서 아고니즘으로의 전 환’ 테제는 민주주의를 다원 민주주의로 이행시키기 위한 핵심 과제로 제시된다. 정치 세계에서 ‘열정’은 배제되어 야 할 것이 아니다. 열정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진전시키 기 위한 기획에 동원되어야 한다.

7장에서는 경합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정치적 결사체 의 개념을 제시한다. 무페는 자유를 강조하는 전략과 민 주를 강조하는 전략이 야기하는 각각의 편향을 경계하면

서, 자유와 민주 두 가치를 함께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 유주의적 전통이 지향하는 사회와 공동체주의가 지향하 는 사회의 모습 모두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다. 대신 무페는 공화주의적인 ‘소키에타스(societas)’ 개 념을 통해 민주 사회의 대안을 제시한다.

8장에서는 민주주의에 필수적으로 연관되는 공적 의사 소통에 관해서 논의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적 대화 와 토론이 뒷받침될 때 민주주의가 더욱 효과적으로 정당 화될 수 있다고 바라보는 심의적 견해는 공적 커뮤니케이 션에 접근하는 자유주의 진영의 지배적인 틀로 다뤄져 왔 다. 하지만 무페는 합리성과 이성 중심의 공적 커뮤니케 이션 개념의 정치학적 결함을 비판한다. 공적 커뮤니케이 션, 공론장, 저널리즘 등 공적 심의와 관련한 중요한 개념 들은 다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9장은 지구촌 시대 시민권의 문제를 논의한다. 전통적 으로 시민권 개념은 개별 국가에 소속된 구성원들의 법적 지위 차원에서 다뤄져 왔다. 무페는 이러한 접근으로는 지구촌 시대의 맥락에서 요청되는 시민권을 발전시켜 가 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시민권은 단순한 법적 권 리를 넘어서 보다 넓은 맥락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페의 문제의식이다.

10장에서는 무페의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논쟁 의 주제들을 요약한다. 비판가들은 경합적 민주주의에 관 한 무페의 모델이 그녀 스스로 극복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적 전통과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 측면을 지적한다. 더 핵 심적인 문제는 적대와 헤게모니를 강조하는 무페적 민주 주의가 민주주의를 다원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데 성공하 기보다 오히려 갈등이 난립하는 반민주적인 질서를 넓힐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무페에게 동의를 표하면서 도 한편으로 의구심을 품는 이들은 무페를 향해 적대적 갈 등이 서로에게 정당한 경쟁 관계의 형식으로 전환될 수 있 는 구체적인 경로나 조건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밝혀 줄 것 을 요청하고 있다. 끝으로, 이번 논의의 구성 및 내용과 관련해 필자는 학 술적 논의의 형태보다는 가급적 무페의 경합적 민주주의 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초점을 두고자 했다는 점을 덧 붙이고자 한다. 그럼에도 무페의 민주주의 이론이 추상적 인 정치철학적 논의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어 있다는 점에 서 내용이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될지 조심스럽다. 그렇 지 못한 부분은 전적으로 필자가 가진 지식의 부족과 능력 의 한계 탓임을 미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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