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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무한 생산의 관계 들뢰즈의 미디어는 광범하다. 다른 것과 연결되어 의미가 달라지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 불통의 원인이 여기서 찾아진다. 우리는 고립을 고집하고 기회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미디어-기계’는 무한 접속을 전제로 한다. <빨간 격자에 얼굴>, 클라렌스 홀브룩 카터, 1971


인텔리겐치아 2615호, 2015년 6월 2일 발행

최영송이 쓴 ≪들뢰즈와 미디어≫

들뢰즈 미디어론의 가장 큰 특징은 주류 커 뮤니케이션학의 정보삼각형, 곧 송신자-정 보-수신자의 변수를 각각으로 나누지 않고 일체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송신자, 정보, 수신자 모두 미디어라는 것이다. - ‘들뢰즈의 철학과 미디어론’, ≪들뢰즈와 미디어≫, viii쪽.


저 셋이 어떻게 미디어가 될 수 있는가? 들뢰즈가 상식을 벗어나 미디어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미디어는 뭔가? 다른 것과 접속해 변할 수 있는 유무형의 모 든 개체다. 들뢰즈의 기계(machine) 개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기계 개념이 뭔가? 우리가 말하는 기계(mechanique)는 정해진 구조에서 같은 기능을 반복한다. 들뢰즈의 기계는 무한 접속을 통해 구조를 바꾼다.


기계의 무한 접속이 뭔가? 선수-기계, 관중-기계, 공-기계가 따로 있 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접속하면 야구-기계가 된다. 야구-기계는 때로 구단-기계와 얽혀 자본주의-기계의 첨병 노릇도 한다. 매개와 재매개의 운동 아닌가? 그렇다. 기계 개념에는 매개하면서 매개당 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매개를 낳는 운동 이 있다. 여기서 들뢰즈의 기계는 미디어 개 념과 맞닿는다. 기계 접속의 현실은 뭔가? 2011년 중동혁명을 보라. 혁명 세력의 대자


보나 팸플릿, 이들을 억압하려고 동원된 텔 레비전과 신문, 개인의 페이스북과 트위터 는 미디어이자 기계다. 하지만 들뢰즈에서 미디어는 더 넓어진다. 중동혁명에서 미디어는 어디까지 넓어지나? 민주화운동 세력, 폭압적 권력, 장기불황 외 에 무수히 많은 요소가 포함된다. 일반 미디 어뿐만 아니라 이들 유무형의 개체가 접속해 창발한 사건이 중동혁명이기 때문이다. 연 쇄 혁명을 불러온 초기 이집트혁명도 또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는 의미에서 미디어고, 중 동혁명도 사회역사적 의미에서 하나의 미디 어다.


그가 미디어의 범위를 확장하는 목적이 뭔가? 우리가 영화, 텔레비전, 신문을 미디어라 정 의하는 관점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기존 관 점은 미디어를 인간 봉사 도구로 정의한다. 전쟁 시기나 기업 현장에서 오직 효율성을 목 표로 할 때 통용되는 정의다. 하지만 이 정의 는 주류 미디어의 실재를 은폐한다. 주류 미디어의 실재는 뭔가? 특정 이념을 전파하려고 동원되는 이데올로 기 장치다. 그렇게 많은 미디어가 있지만 민 족과 지역, 집단 간에 불통이 만연한 이유가 뭐겠는가? 인간에 예속된 도구로 미디어를 이해하면 불통을 벗어나기 어렵다.


미디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불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를 미디어로 정의하 고 그 역학 관계를 살펴야 한다. 익숙한 미디 어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미 디어와의 접속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다행히 도 오늘날 디지털 문명은 그 물질 토대를 제 공한다. 낯선 접속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월가 점령 시위를 보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서 동시 진행됐다. 신용카드를 통 해 지구 반대편에서 월가의 시위대에게 피자 를 배달하거나, ‘나는 99%다’라는 홈페이지 동영상 릴레이에 전 지구인이 참여했다. 미


디어‘들’의 접속이 불통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이 책, ≪들뢰즈와 미디어≫는 무엇을 말하는 책인가? 비소통, 전염, 기계, 리좀, 이접처럼 들뢰즈 존재론의 주요 개념을 정리한다. 통제사회, 미시정치, 명령어, 배치, 되기와 같은 실천론 적 키워드를 살펴본다. 들뢰즈의 사상을 대 안적 미디어론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영송이다. 부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사 다.


미디어, 무한 생산의 관계 들뢰즈의 미디어는 광범하다. 다른 것과 연결되어 의미가 달라지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 불통의 원인이 여기서 찾아진다. 우리는 고립을 고집하고 기회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미디어-기계’는 무한 접속을 전제로 한다. <빨간 격자에 얼굴>, 클라렌스 홀브룩 카터, 1971


들뢰즈와 미디어 최영송 지음 미디어 이론 2015년 5월 20일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12쪽 9,800원


작품 속으로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들뢰즈와 미디어 최영송


들뢰즈의 철학과 미디어론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오늘날 가장 주 목받는 프랑스 철학자다. 그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연구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찬사가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들뢰즈는 서양의 주류 철학이 동일성 에 기초해 차이를 억압해 온 것으로 규정하고, ‘차이의 존 재론’을 철학의 중심에 세우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들뢰즈 의 철학은 철학계뿐만 아니라 예술계, 인문·사회과학, 자 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들뢰즈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감을 제공해 왔다. 들뢰즈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크게 세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첫째는 들뢰즈 이론 자체에 대한 검토와 이를 통한 철학적 사유의 혁신이 철학계를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둘째는 사회학, 정치학, 정신분석학 등에서 기존의 지배적 테제들을 전복하는 실 험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셋째로 영화와 문학, 음악, 미 술 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수용이 일어났다. 들뢰즈가 그


분야에 대한 다양한 텍스트를 남긴 이유도 있지만, 들뢰즈 의 존재론 자체가 기존 질서로부터 탈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 분야의 숙명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20년이 넘는 국내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커뮤니 케이션학에서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았다. 사정은 서양에서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들뢰즈 철학의 난 해함도 있겠지만 커뮤니케이션학이 전통적으로 실증주의 에 경도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미국을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전염성과 미디어성에 대한 연 구가 활발해지고 있어 관심을 끈다.

차이와 반복

들뢰즈는 그의 주저인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소들(les

différents)의 차이 짓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테제는 평생

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일관되게 반복된다. 우리는 이 것을 미디어론에 적용함으로써, 들뢰즈가 명시적으로 전 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존재론에서 이미 밝혀 놓은 미디 어론을 풀어 보고자 한다. 그것을 요약하면 ‘차이소’라는 미디어가 ‘차이 짓기’라는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는 것 이다. 그런데 차이 짓기의 결과조차 다시 차이소가 된다 는 점에서 미디어의 접속이 곧 커뮤니케이션이다.


‘차이 나는 것들의 차이 짓기’라는 테제는 그의 존재론에

서 ‘실재성=잠재성+현실성’으로 반복된다. 실재(le Réel) 는 현실적인 것(le Actuel)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le Virtuel)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잠

재성의 층위에 있는 ‘차이 나는 것들’이 현실화를 반복하는 것이 ‘차이 짓기’다. 그 실재 세계를 사막에 비유해 보자. 우리는 그 세계를 모래바위처럼 현실화된 것들로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한다. 사막을 건너야 하고 바위보다 길게 살지 못하는 우리는 효용성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는 데 익 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막은 본질적으로 미세한 모래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조차 모래 입 자들이 일시적으로 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래 입 자의 관점에서 보면, 모래바위는 지금도 해체되고 있을 뿐 이다. ‘차이 나는 것[미디어]’에 의한 ‘차이 짓기[커뮤니케 이션]’라는 들뢰즈의 핵심 테제는,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 를 ‘차이 지으며 반복하는’ 미디어들에서 다시 등장한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들뢰즈의 존재론으로부터 우리는 왜 들뢰즈에게 ‘미디어-정보-커뮤니케이션’이 세 개의 이름으로 부르는 단 하나의 세계인지 알 수 있다. 세계는 미디어들의 커뮤니케이션 자체이고, 이로부터 창발하는 정보조차 커뮤니케이션을 작동시키는 또 다른 미디어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정보’는 하나의 완전체인 것이 다. 그러므로 주류 커뮤니케이션학에서 그것들을 독립변 수로 다루는 것은 인간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사실은 아무 근거가 없다. 정보도 미디어고, 미디어들이 커뮤니케이션 한 결과도 또한 미디어다. 그래서 ‘차이 나는 것의 차이 짓 기’는 커뮤니케이션 자체이며, 미디어들의 끊임없는 자기 생산이고, 정보는 커뮤니케이션에 재진입하는 미디어다. 따라서 들뢰즈의 차이 존재론은 그 자체로 미디어론이자 커뮤니케이션론이다.

들뢰즈 미디어론의 특징 들뢰즈 미디어론의 가장 큰 특징은 주류 커뮤니케이션학 의 정보삼각형(송신자-정보-수신자)의 변수들을 나누 지 않고 일체형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송신자, 정보, 수신 자 모두 미디어라는 것이다. 나아가 미디어와 커뮤니케이 션, 정보가 하나의 완전체로 취급된다. 그 배경에는 그의 존재론이 미디어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들뢰즈의 미디어는 다른 것과 접속할 수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에게 미디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차이소’에 해당하는 개념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책, 인쇄, 신문, 방송, 인터넷 등만 미디어라고 알려져 왔는가를 되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미디어라고 믿는 것들은 인간의 이해관계가 개입 된 특정한 대상들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계의 구성 자체에 개입하는 단위로서 미디어 개념은 권력에 의 해 선택적으로 축소되고, 인간 중심적인 척도에 따라 배열 된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미디어 개념은 권력의 질서 로부터 탈영토화하는 데 동원되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2011년 중동혁명 과정에서 권력은 신문과 방송을 왜곡하 고 중지시킬 수 있었지만 SNS에는 개입할 수 없었다. 마 침내 40년 독재가 무너지고 서로 모르는 개인들을 소통시 킬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미디어가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동혁명의 사례에서 보듯이, 미디어의 개념은 좁게는 SNS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그것을 포함한 민주화 운동 세력, 폭압적 권력, 장기불황 등 모두를 미디어로 본 다는 것이다. 둘째, 들뢰즈의 미디어론은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한다. 휴먼 커뮤니케이션에서 소통은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서 유의미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 나 들뢰즈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인간-비인간을 포함한 모 든 미디어들이 소통하면서 차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간적인 의사 전달은 그런 과정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들뢰즈가 자신의 미디어론을 인간 중심적인 접근과 구분 하고자 한 이유는, 전달 모델이 오히려 현실을 왜곡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휴먼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이 외부 대상을 동일하게 파악할 수 있고, 그 동일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공통감 각에 기초한 일치와 소통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미디어들 의 접속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 이라고 본다. 그래서 들뢰즈는 공통감각 대신에 역설감각 을 주장한다. 공통감각의 환상을 깨고 역설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론자들이 공통감각에 기초한 반면, 들뢰즈는 공통감각에 대항하는 역설감각이 진정한 커뮤 니케이션을 낳는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공통감각에 기초한 소통은 “발견되는 한에서 만 소통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한에서만 발견되는” 폐 쇄적인 소통, 즉 친구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우정의 소통’ 이라고 비판한다(Deleuze, 1964/1997, p.59). 우정의 소 통은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조작되기 쉬운데, 대중매체와 권력의 역사 속에서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무질서와 혼돈을 도입해 차이를 가동시키는 것이 들뢰즈 의 차이 존재론이자 그의 미디어론이다.


셋째, 들뢰즈에게 정보는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지, 이미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information)의 어 원을 보면, 무엇인가에 형태[form]를 부여하는[in]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구조에서 유출되는 것은 정보가 아 니다. 진정한 정보는 기성의 사회구조에 봉사하는 것이 아 니라, 거기에 자극을 주기 위해 외부로부터 초대된다. 들 뢰즈가 상호작용적 의사소통에서 “이방인, 추방자, 이주 자, 통행인, 원주민, 귀향자 등 소외지역과 경계지대의 소 규모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 흔히 그 존재가 불안정하게 보이는 유형들”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새로운 소통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보로서 가치는 없다. 단, 여기에 동원되는 정보는 무(無)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 라 유(有)의 재발견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들뢰즈는 A 와 B의 만남이 둘 사이에 블록(block)을 만들어 낸다고 말 한다. “이 관념 안에도 저 관념 안에도 속하지 않는, 하나의 ‘블록’”이 바로 정보가 된다(Deleuze & Parnet, 1977/2005, p.39). 이 과정에서 미디어인 A와 B도 새롭게 A'와 B'로 변 하고, 블록[AB]은 정보이자 새로운 미디어가 된다. A', B', [AB] 모두 A와 B의 재발견이자 소통의 결과다.


미디어의 작동 원리 들뢰즈 미디어론의 핵심 테제는 ‘차이 나는 것[차이]’들의 ‘차 이 짓기[반복]’이다. 미디어들이 접속해 거기에 참여한 미디 어들도 이전과 달라지고, 여기에 더해 새로운 미디어가 생 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공식화하면, A+B=A'+B'+[AB]가 된다. 미디어 A와 B가 소통에 들어가면, A는 A'가 되고 B는 B'가 되는데, 이것은 미디어 내부의 변화가 된다. 중요한 것 은 여기에 더해진 블록[AB]인데, 이것은 일종의 뉴미디어다. 새로운 미디어가 탄생한 것이다. 미디어들 스스로 변해 가 면서 새로운 미디어를 더해 가는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 이다. 그렇다면 뉴미디어가 탄생하는 그 지점에서 미디어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미디어 사이의 접속 원 리를 해명하는 것이 곧 미디어론이자 커뮤니케이션론이 다. 들뢰즈는 그 작동 원리로 기호, 계열, 횡단, 종합이라 는 네 가지를 들고 있다. 기호는 미디어들이 서로 마주치 는 순간 어떻게 대상 속에서 새로운 미디어를 발견하는지 를 해명한다. 계열은 미디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어떻게 새로운 미디어들이 더해지는지를 다룬 다. 횡단은 질서 잡힌 미디어들의 네트워크에서 어떻게 다른 질서로 이행하는지를 알려 준다. 마지막으로 종합은


미디어들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흐름을 자세히 들여다보 면 그 흐름으로부터 끊어지는 작은 흐름들로 진행되고 있 음을 밝혀 준다. 정리해 보면 A+B=A'+B'+[AB]이라는 미 디어 공식은 마주침[기호], 이어짐[계열], 어긋남[횡단], 끊 어짐[종합]이라는 네 가지 원리로 작동한다. 다음에서 그 각각의 원리를 자세히 살펴본다.

기호 들뢰즈가 말하는 미디어의 작동 원리 첫째는 기호다. 먼 저 들뢰즈에게 기호는 기표와 기의를 다루는 일반 기호학 의 그것이 아니다. 그의 기호는 오히려 어떤 증상에 가깝 다. 배후에 폭로해야 할 많은 비밀을 간직한 대상 말이다. 들뢰즈는 자신이 다루는 기호가 인간의 감각에 직접적으 로 주어지는 어떤 형상(figure)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차 이 짓는 차이소’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미디어다. 나에게 하나의 형상-기호로 다가오는 모든 것이 미디어인 것이 다. 이러한 형상-기호와 마주침을 다루는 것이 들뢰즈의 기호론이자 미디어론이다. 들뢰즈의 네 가지 미디어 원리 가운데 인간을 중심에 둔 원리는 기호가 유일하다. 기호의 원리는 일종의 휴먼 커뮤니케이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같은 휴먼 커뮤


니케이션이라도 들뢰즈의 미디어는 이성적 전달 모델이 아니라 감응적 전염 모델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자기 인생이 바뀌었다거나, 어떤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거 나 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선불교의 일화들이 대 부분 이런 소통 원리를 담고 있다. 사실은 그 일화들의 논 리일 뿐만 아니라 선불교 자체의 논리이기도 하다. 미디 어가 주는 짧은 충격과 긴 여운으로 깨달음의 소통까지 이 를 수 있다는 논리는 기호-미디어론의 전형이다. 실제로 선불교의 일화 가운데, “할”이라는 고함-기호와 “방”이라 는 몽둥이-기호가 등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 럼 기호-미디어는 폭력적으로 우리의 감각을 바꾸고, 사 유를 바꾸고, 삶을 바꾼다. 새로운 감각과 사유, 그리고 삶 을 촉발하는 것이 바로 ‘마주침’의 원리다. 그래서 들뢰즈 는 이렇게 촉발된 소통을 “소통적 폭력” 또는 “폭력적 소 통”이라고 부른다. 그런 수동적 감응의 폭력이 바로 미디 어가 작동하는 원리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이러한 기호-형상

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기호를 분류하는 기 준도 폭력적 소통의 정도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소통의 힘이 반드시 기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다. 오히려 문제는 그 기호와 마주치는 사람의 감응력이다.


누군가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모든 기호-미디어들 이 잠재적인 폭력적 소통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 다만 그 힘이 아직 현실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힘은 현실의 바 깥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질서에서는 배제되었지만 그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것의 한 꺼풀 아래서 언제든 튀어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미디어의 마주침 원리는 당 장이라도 우리를 현실의 낯선 바깥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래서 일상의 길들여진 체험과 그 바깥 사이의 불균등한 간격, 그 “간격 안에서 섬광처럼 번득이는 것, 불균등한 것 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어떤 소통 같은 것”(Deleuze, 1968/ 2004, p.66), 그것이 바로 기호라는 미디어의 작동 원리다.

계열 계열은 말 그대로 미디어들이 ‘이어져 있는 집합’이다. 그 렇게 이어지다 보면 그 가운데 사건이 발생한다. 원래 미 디어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어느 순간의 사건과 감응 해 현실화한다. 말하자면 계열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폭력적 소통 능력을 갖춘 미디어들이 잠재적 층위 에서 무한히 이어져 가는 큰 계열이 있다. 둘째는 일부의 계열이 집합을 이루면서 현실성의 층위에서 사건화되고


의미화되는 작은 계열이 있다. 예를 들어 미디어로서 촛 불은 원칙적으로 무한한 큰 계열을 이룰 수 있다. “생일 케 이크의 촛불을 켜다”라거나 “촛불 이벤트를 하다” 등 수많 은 문장이 가능하다. 이런 잠재적 큰 계열들이 구체적 사 건을 작은 계열로 현실화한다. 예를 들어, “2008년 여름에 민중은 촛불을 들었다”는 사건은 촛불이라는 미디어가 새 로운 의미로 현실화한 것이다. 들뢰즈는 그 지속적 흐름 위로 명멸하는 사건들, 즉 미디어들에 의해 매번 다르게 의미화하는 사건들로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이어짐의 원리를 큰 계열과 작은 계열로 나눌 수 있지만, 사실은 모든 작은 계열들 배후에 큰 계열이 자 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어짐의 원리는 원래 큰 계열, 즉 잠재적 층위에서의 이어짐이라는 것이다. 모 든 미디어들의 이어짐은 현실 속에 ‘실존한다(existent)’고 할 수 없더라도 분명히 ‘존속한다/내속한다(subsistént ou

insistent)’는 것이다. 현실을 고려할 때, 실존하는 것과 함 께 존속하거나 내속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현 실의 창조적 발명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계열의 원리를 사회에 적용해 보면, 미디어들의 이어짐 을 통해 사회변혁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이 나 혁신은 한 계열 내부를 교정하거나 개량하는 것이 아니


라 계열의 이어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드는 현상 자체로 는 아직 사건도 의미도 없다. 광화문, 인간 군상, 촛불이라 는 미디어는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이것들이 광 우병 사건이나 MB정권과 계열화하면서 촛불시위라는 사 건이 되고,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반정부시위 등의 의 미를 획득한다. 의미는 따로 있지 않고 항들이 계열화되 는 이어짐의 원리에 따라 생성된다. 그것은 다른 미디어 와 계열화를 이루는 그 순간에 생겨났다 사라진다. 그래 서 메시지는 특정한 사물이나 커뮤니케이션 구조 안에서 항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어짐’에 따라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

횡단 미디어론의 셋째 원리인 횡단은 기성 질서를 유지하는 소 통 흐름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가를 다룬다. 최근 물리 학은 세계가 안정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불안정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커뮤니케이션도 질서 잡힌 미디어들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에 어긋나는 미디어들의 횡 단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 고대 물리학자인 에피쿠로스


(Epicouros)에 따르면, 세계를 창조하는 힘은 중력과 관 성에 따라 운동하는 원자들이 아니라, 그 사이를 어긋나게 가로지르는 원자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어긋나게 가로 지르는 원자의 운동을 클리나멘(clinamen)이라고 불렀 다. 들뢰즈는 클리나멘으로부터 자신의 횡단 개념을 만들 어 낸다. 홈이 파인 것으로부터 탈주하는 미디어가 바로 클리나멘인 것이다. 결국 미디어의 횡단 원리는 관성적인 평행 상태를 해체하면서 새로운 창조로 나아가는 미디어 의 운동에 주목하는 것이다.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 라 어긋나게 움직이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이 횡 단 원리다. 커뮤니케이션의 비밀은 일사불란한 미디어들의 집단 적 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운동에 무질서를 도입하는 미디어에 있었다. 이것은 또 다른 비밀로 연결 되는데, 그것은 모든 미디어들이 집단적 운동에 순응하기 보다는 언제든 거기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재적 횡 단-미디어라는 사실이다. 미디어들의 개성을 훼손하지 않 으면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통일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도 횡단의 원리 때문이다. 들뢰즈의 비유에 따르면 봄이 되었기 때문에 제비가 날아오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니 다. 사실은 철새들의 이동과 짧아진 일광, 꽃을 틔우는 나


무, 높아진 대기 온도 등의 미디어들이 횡단적으로 늘어선 것을 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사실 그 이질적 미디어들을 봄으로 통일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이 파편적인 통일성을 들뢰즈는 “소통하지 않는 미디어들 사이의 일탈된 커뮤니케이션으로, 내부의 미디어들은 다 른 것들과의 차이를 보존하면서 횡단적 통일성을 만들었 다”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72/1994, p.71). 횡 단성은 점과 점 사이의 이동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궤적을 가리킨다. 미디어는 어긋남의 원리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을 새로운 상황으로 몰아간다. 이렇게 횡단하는 미디어가 없다면 커뮤니케이션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종합 마지막으로 종합은 미디어들의 독특한 접속 방식을 다룬 다. 어떤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와 접속한다는 것은 이전 의 소통 체계로부터 ‘단절’하면서 다른 체계에 접속하는 원리를 말한다. 어떻게 끝없이 이어지는 소통 흐름이 끊 어짐을 원리로 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종합이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집에서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학교 에 간다고 하자. 이것은 집과 단절하는 동시에 학교에 접 속하는 것이며, 도보로부터 단절하면서 버스로 접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동원되는 집, 다리, 버스, 학교, 모두가 미 디어다. 물론 등교 과정에서 친구와 영화 이야기를 하다 가 학교에 도착해서 수학 수업을 들었다면, 대화 또한 영 화에서 수학으로 단절되면서 이어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흐름은 항상 다른 미디어에 의해 절단되 면서 연결된다. 들뢰즈는 그 각각의 과정을 채취-절단, 이 탈-절단, 잔여-절단이라고 불렀다. 채취-절단은 미디어가 연결되는 순간 기존의 흐름을 절단한 뒤, 그 흐름에서 새 로운 흐름을 채취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합의 원리 또 는 끊어짐의 원리는 바로 이 채취-절단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엄마의 유선을 따라 흐르는 젖이 아기의 입에 의해 채취-절단되면서 새로운 흐름이 생긴다. 젖의 흐름이 커 뮤니케이션이라면, 아기의 입이 미디어가 된다. 둘째 절단은 이탈-절단이다. 기존의 흐름을 끊어서 이탈 시키는 것이다. 이탈된 흐름은 그 새로운 흐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 과정에서 이탈-절단은 미디어들을 배제하거나 포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엄마 의 젖과 접속된 아기의 입은 수유 체계를 형성한다. 젖과 입이 미디어라면 수유 체계는 새로운 소통 흐름이다. 수 유 체계는 젖과 입이라는 미디어 외에 다른 미디어들은 배 제한다. 입과 입의 접속, 젖과 유착기의 접속은 다른 소통


체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절단은 배타 택일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셋째 절단은 잔여-절단이다. 기존의 흐름으로부터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낸 절단을 가리킨다. 채취-절단이나 이탈-절단이 미디어 접속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잔여-절단은 접속의 결과 남겨진 새로운 소통 흐름을 가리 킨다. 젖과 입의 접속에서 시작된 결과 남겨진 수유 체계 가 한 예다. 넓은 의미에서 수유 체계도 하나의 미디어로 작동하면서, 이후 분유 체계라는 흐름을 낳는다. 이렇게 절단[끊어짐]은 종합에 대립하기는커녕, 종합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래서 들뢰즈는 세 가지 절단의 흐름 에 각각 연접적 종합, 이접적 종합, 통접적 종합이라는 이 름을 부여한다. 모든 미디어는 끊임없는 접속을 통해 존 재하며[연접적 종합], 그 와중에 미디어들은 서로 포함하 거나 배제하는데[이접적 종합], 그 결과 또 다른 미디어가 생겨난다[통접적 종합]는 것이다. 결국 종합의 원리는 커 뮤니케이션이 미디어의 ‘끊어짐’을 통해 더 풍성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종합은 미디어 연 구에서 어느 지점에서 누구에 의해 어느 정도의 종합이 발 생하는지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미디어 존재론과 실천론 오늘날 인터넷과 SNS 시대를 맞아 이전에 잠재적으로 존 재해 오던 미디어들이 직접적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잠재 성의 층위에 있는 미디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 한 것이다. 원래 미디어는 신문이나 방송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미디어라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미디어와 관련된 실천적 대안에도 영향을 준다. 지금까지 주류 미디어들은 대부분 당대의 지배권력을 위해 봉사해 왔다. 오늘날의 주류 미디어도 권력과 자본이 자신의 지배구도를 전지구 적으로 퍼뜨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나마 우리가 미디 어라고 외치는 1인 미디어들 때문에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10개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차이 나는 것들의 차이 짓기’라는 미디어 존재론에 기초하면서, 억압적인 현실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미디어 실천론을 모 색한다. 본문의 개념들도 존재론에서 실천론의 순서를 따 르고 있다. 전반부의 비소통, 전염, 기계, 리좀, 이접 등이 존재론적 개념들이라면, 통제사회, 미시정치, 명령어, 배 치, 되기는 실천론적 개념들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 과 같다. 1장 비소통과 2장 전염은 들뢰즈의 존재론적 커 뮤니케이션이 기존의 주류 커뮤니케이션학과 어떻게 다


른지, 그리고 그 특징은 무엇인지를 다룬다. 3장 기계와 4장 이접은 각각 들뢰즈의 미디어와 그것의 구체적 소통 방식을 보여 준다. 5장 리좀은 들뢰즈의 네트워크론을 다 룬다. 여기까지가 들뢰즈 미디어론의 존재론적 성격을 밝힌 것이라면, 후반부는 그것을 구체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들뢰즈 미디어론의 실천론적 가능성을 확인할 것이다. 6장 통제사회와 7장 미시정치는 들뢰즈가 현대사회를 어 떻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지를 살펴본다. 8장 명령어와 9장 배치는 우리의 언어와 삶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 떻게 배치를 바꾸어야 하는지 알아본다. 마지막 10장 되 기에서는 들뢰즈 미디어론의 핵심에 있는 뉴미디어 공식 을 살펴볼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이 대안적 미디어론으로 갖는 의의를 확인할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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