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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거울 양반 정부가 지지부진하던 때, 민이 모이는 곳에서는 담론이 일어났다. 향회와 두레와 동학이 나타났다. 막힌 언로를 스스로 뚫고 외세의 압력에 자진해 맞섰다. 그때나 지금이나 민은 지식인의 거울이다.

대항공론장은 ‘해방’의 의미를 담고 운동공론장을 지향한다. <거울>, 르네 마그리트, 1963


인텔리겐치아 2632호, 2015년 6월 12일 발행

원숙경이 쓴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도 마찬가지다. 제도 화된 봉건공론장이 사실상 봉쇄되자 농민, 상인, 도시빈민을 비롯한 기층민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자 언로(言路) 가 필요했다. -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의 공간’, ≪조선후기 대항공론장≫, 73쪽.


대항공론장이 뭔가? 보편적 공론장에 저항하는 공론장이다. ‘해 방’의 의미를 담고 운동공론장을 지향한다. 뭘 하는가? 미숙한, 또는 변질된 보편적 공론장이 본래 역할을 하도록 돕는다. 언제 나타나는가? 공론장이 제 역할을 못할 때다. 자본주의 적ㆍ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저항과 대항을 표명하는 활동이다. 68혁명을 계기로 학문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의 등장 계기는 뭔가? 민의 굶주림이다. 외세에 의한 시장개방, 무 능한 정부, 과다한 부세, 부정부패가 민의 생 계 위기를 조성했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 해, 열강의 시장개방 압력과 싸우기 위해, 변 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다. 당시 상황에 대한 민의 대응 수준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인지했다. 울분을 토했 다. 말과 글로 정부에 저항하고 행동으로 부 패 관리와 외세에 맞섰다. 독립운동으로 발 전했다. 어디에 있었는가? 삶의 담론이 형성되는 곳이면 어디든 가능했


다. 빨래터, 장터, 산과 들과 같이 민이 모이 는 곳, 그리고 향회, 두레, 동학 같은 사회 공 간에서도 나타났다. 이들은 결사체로 발전 한다. 향회가 뭔가? 사족층이 상호 결속을 다지고 향촌 질서를 유 지하는 조직이었다. 18세기에 들어 수령의 자문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반상의 구 분도 사라져 대소민제회(大小民齊會) 형식 이 되었다. 활동은? 1740년 임천 대동계를 통해 향촌 문제에 적 극 개입했다. 다수의 이익, 민의 공감 위에 활


동했다. 대동의식을 기반으로 지역적으로 집단화·조직화되었다. 두레는? 농민만의 결사체다. 농업노동력을 효율적으 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도의 조직 성을 갖추었다. 자체 경제력으로 조직을 독 자 운영하였다. 무엇을 했는가? 조선 후기 농민이 봉건 체제를 벗어나고 외 세 반대 투쟁을 벌이는 데 큰일을 했다. 인 적ㆍ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지역 봉기에 두레가 기반이 되었다는 기 록이 남아 있다.


대항공론장으로서 동학은 어떤 조직인가? 겉은 종교단체다. 안은 사회운동단체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유민과 상인이 합세했다. 대동사상, 보국안민, 평등주의, 반외세를 기 치로 세우고 안으로는 사회 부패와 싸웠고 밖 으로는 척왜양운동을 펼쳤다. 사회변화와 체제변혁을 시도하는 이념적ㆍ운동적 공간 이었다. 향회, 두레, 동학의 대항공론장은 어떻게 펼 쳐지는가? 지도부의 약세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막 힌 언로를 스스로 개척한 민의 지혜와 외세에 대응한 민의 자세가 역사의 거울로 남았다.


무엇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인가? 침체된 시민운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 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식인은 민으로부터 반성하고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이 책,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은 무엇을 다루나?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이 형성되었던 정치· 사회 배경과 이데올로기를 다룬다. 당시 대 항공론장의 구성요소를 통해 장이 생성될 수 밖에 없었던 배경과 활동을 소개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원숙경이다. 동의대학교, 동명대학교, 부산 교육대학교 외래교수다.


지식인을 위한 거울 양반 정부가 지지부진하던 때, 민이 모이는 곳에서는 담론이 일어났다. 향회와 두레와 동학이 나타났다. 막힌 언로를 스스로 뚫고 외세의 압력에 자진해 맞섰다. 그때나 지금이나 민은 지식인의 거울이다.

대항공론장은 ‘해방’의 의미를 담고 운동공론장을 지향한다. <거울>, 르네 마그리트, 1963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 원숙경 지음 커뮤니케이션학 일반 2015년 5월 20일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14쪽 9,800원


작품 속으로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의 구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양 극화 현상, 외부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때문에 외국 자본이 유입되어 기층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내· 외부적인 자본의 위협은 새롭고 다양한 사회운동을 양산 했다. 운동의 경향 역시 ‘민주화’라는 대전제에서 벗어나 생활 중심의 의제를 기반으로 다양한 주제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생활 중심의 운동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시점부터다. 봉건공론장에 가려져, 당시 민(民)들의 사상이나 이들의 염원을 반영하 지 못했다. 이는 당시 신흥부르주아지들이 봉건지배세력 과 결탁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 적 배경으로 생겨난 대항공론장은 민들의 의식을 성장시 키고 이는 곧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대항공론장을 통 해 근대사상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에 서 나타난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은 한국 사회의 시민사회 형성이 늦어진 이유와 그럼에도 현대사를 거치면서 다양 하게 형성된 민중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대항공론장의 정의와 구조 대항공론장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 는다. 1960년대 후기자본주의와 신사회운동을 배경으로 배태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보편적인 틀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시민사회의 재활성화, 재조직화 그리고 생활 정치를 설명 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서 제시된 것이다. 대항공론장 논의는 미디어의 발달로 가속되었다. 새로 운 미디어들은 대중매체들이 보여 주지 못한 가능성들을 시민들에게 열어 주었다. 스스로 매체를 만들고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항공론장을 정의하는 방식도 여러 갈래로 나눠졌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계급해방을 위한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장, 평등 논 리에 내재된 사회적 불평등을 끌어내는 실천의 장, 지배문 화코드에 대항하고자 하는 집단적 정체성 형성의 장, 누구 나 참여 가능하고 다양한 의제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또한 대항공론장을 접근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게 논의 되고 있다. 우선 공론장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 다. 주체의 속성에 따라 공론장의 성격이 규정된다. 같은 계급이라도 당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성격에 의해 그 의


미가 달라진다. 또한 공론장이 누구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가에 따라 담론의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 제다. 주제는 공론장이 형성되는 시기의 이데올로기적 상 황과 정치사회적 틀을 근거로 만들어진다. 때문에 공론장 의 성격과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는 공간이다. 공간은 커뮤니케이션의 흐름, 당시 미 디어의 구조, 미디어를 움직이게 하는 조직, 커뮤니케이션 생산수단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이때 공간은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사회적 공간도 포함된다. 넷째는 커뮤니케 이션 방식이다. 공론장이 형성되는 시기의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그 헤게모니에 의해 결정이 된다. 또한 미디어 주도 권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달라진 다. 이때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 는 사회적 제도가 허용하는 공식적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허용되지 않는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커뮤니 케이션 방식에 따라 그 성격과 정치사회적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중심으로 각 시대상에서 나타나는 대항공론장의 성격과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전통 이데올로기와 공론장 조선 시대를 지배했던 전통적 이데올로기는 민본사상이 다. 민본사상은 그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세 축을 천(天) 과 군주(君主), 민(民)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천(天)을 정 점으로 하고 그 아래에 군주와 민의 상하관계가 서로 엇갈 릴 수 있는 근거는 천이다. 천은 정치세계로부터 멀리 떨 어져 있지만, 민에 대한 군주의 통치권과 군주에 대한 민 의 근본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민본사 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본사상은 효제를 기본으로 한다. 이러한 정신은 태조 3년 ‘사간원에서 수령의 복무규 칙 등에 관해’라는 상소에 잘 나타난다.

“부모가 비록 자애롭다 하더라도 그 자신을 길러서 살게 할 수 없고, 군수가 어질지 못하면, 괴롭히고 역사시키며, 주구 (誅求)하고 박탈(剝奪)하니, 임금이 비록 어질(仁)더라도 그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소의한식(宵衣旰食)하여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이(利) 로운 것은 일으키고 해(害)되는 것은 제거하시니, 어진 마 음(仁心)과 어진 정사(仁政)가 지극하다 하겠으나, 백성에 그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은 오직 수령이 어질(賢)지 못하 기 때문입니다.” 󰡔󰡔태조실록󰡕󰡕, 태종 3년(1403년), 6월 17일.


상소와 같이 부모는 국가이며, 자식은 백성으로 상정하 고 있다. 임금이 어질지 못해 백성이 힘들면, 이는 가정에 서 부모가 잘못하면 가족이 힘든 이치와 같다는 논리다. 그래서 가족은 공적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사 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의 모델이 되고 공적 활동의 출발점이 된다. 때문에 군주는 마땅히 백성의 마음을 얻 어야 한다는 백성 중심의 민본주의다. 민본사상의 기본 명제는 ‘민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 다’는 것이다. 기술 수준이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생산성이 낮았던 전통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민들이 먹 고사는 데 불편 없는 최소한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민의 생활을 보장하고 소통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이 민본주의에 입각한 공론장이다. 민본에 토대한 공론장 은 그 근본적인 목적을 민에 두고, 민을 위한 공론이어야만 정당한 것이며, 이는 곧 국가의 원기(元氣)라 인식했다. 조선 시대 공론장은 공식적 커뮤니케이션 채널과 비공 식적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나누어진다. 조선조의 제도화 된 공론장은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관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하지만 제도화된 봉건공론장은 주로 양반 계 층이나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면 사실상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다. 민이 접근 가능했던 공론장으론 신문고, 규


혼(叫閽), 복합(伏閤), 등장(等狀), 격쟁(擊錚)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공론장은 형식적으로는 모든 민에게 개방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실행되기 힘든 장벽들이 존재 했다. 특히 등장과 같은 집단행동의 경우 난동의 수괴(首 魁)나 주모자로 몰리기도 하고, 이에 따라 그들에게 가해

질 위험 부담은 물론 목숨까지 각오해야만 했다. 때문에 제도화된 봉건공론장에서 소외된 민들은 그들만의 일상 공간이나 그들만의 공동체를 통해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들은 일상의 부조리를 민요, 민담, 가면극, 민화 등으 로 표현하기도 하고, 사회의 불만과 불평은 주로 유언(流 言)이나 풍자, 괘서, 방 등을 통해 토로했다. 때로는 미륵

신앙(彌勒信仰)이나 정감록신앙(鄭鑑錄信仰)과 같은 민 간 종교로, 살주계·검계 등과 같은 지하운동이나 대규모 의적단으로, 혹은 민란이나 변란 등과 같은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비제도적 공론장은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활 성화되는데 이는 당시 불안했던 정치사회적 상황에 기인 한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의 등장 근대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사회운동이 민들의 의식 성장을 표출하는 과정이라면, 이를 담론과 행위로 표현하 는 대표적인 공간은 대항공론장이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 장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 생성 시기와 관련이 있다. 조 선 후기 봉건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되는 시기에 민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계급 간 갈등이 본격 화되고 근대적 인민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는 반강제적으로 문호가 개방되어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민들이 주축이 된 대항공론장의 초기 목적은 직 접적으로 정치사회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일 상생활 속 침탈과 속박 등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당시 민들의 생활 속에서 체험 하게 된 문제인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집중한 적대적 저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항공론장 형성은 당 시 정치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대내적으로는 농업의 근대화와 민의 커뮤니케이션 욕구 상승, 신분제 붕괴 등으 로 인한 민의 사회적 참여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대 외적으로는 개항 이후 외세에 의한 시장경제의 잠식과 외


국 상인들의 불법적인 상업 행위·침략 등과 이에 대한 정 부의 무력한 대응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민 들이 자기방어적 행위로 공론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의 계급적 대립도 민이 주축이 되는 대항공론 장의 형성 원인이었다. 이 시기 계급적 대립은 서구와 다 른 양상을 보인다. 조선 후기 계급투쟁은 봉건지배계급 대(對) 민(民) 간의 대립 구도를 보인다. 조선의 새로운 부 르주아지, 즉 새로운 생산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부농, 도 시 부르주아지나 중소상공업자, 상인 등은 봉건지배계급 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봉건지배계급과 결탁해 오로지 민만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의 폐해와 삼정문란, 매관매직 으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외세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 되어 있는 자신을 지키고자 한 것에 기인한다. 이러한 정 치사회적 환경은 민이 주축이 된 대항공론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의 사상적 토대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은 봉건적 공론장과 초기 근대에서 나타나는 공론장의 유형들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조선이 서구와 같은 시민혁명이나 근대적 사회변동을 겪지 않았


던 것도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즉, 당시 조선 후기 부 르주아 계층들은 서구의 계몽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봉건지배계급과 결탁, 봉건의 체제에서 안주하고자 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고통을 받던 민들이 중심이 된 공론장이 형성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 근대적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 했다. 조선 후기에도 민본주의를 고수하고자 하는 민들의 노 력은 계속되었다. 집단적 격쟁이나 상언, 복궐 상소에 이 어지는 소원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민의 경험은 민의 세 계관에도 변화를 주었다. 민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민 본주의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새로 운 사상들을 꿈꾸게 되었다. 향회를 중심으로 대동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동사상은 신분 차별과 계급 간 불 평등을 해소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동학운동을 통해 배 태된 사상은 보국안민과 평등사상이다. 이런 사상을 구체 화한 것은 고부민란 이후 정부와 화약을 체결하면서 내세 운 개혁 조건에서다.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쌓인 원한을 씻고 서정(庶政)에 협 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하게 징벌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하게 징벌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갖가지 천인들의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의 평량갓을 없 앤다. 7.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모두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일본인과 내통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한다. 11. 빚은 공적인 것이냐 개인의 것이냐를 막론하고 기왕 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를 평균하여 나누어 분작(分作)한다.

이 폐정 개혁안을 살펴보면 당시 민들의 생활 속에 내 재된 염원을 알 수 있다. 제1조에서 민은 봉건정부를 인정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의 정치적 참여를 요구한다. 이 것은 그들의 정치적 의식이 높아졌음을 의미하고, 나머지 조항과 함께 봉건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 다. 제2, 3, 4조의 요구는 현 지배계급 그 자체를 부정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 실시 정도에 따라서는 심각한 계급투 쟁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는 민의 사회운동 과정


에서 많은 탐관오리와 양반 지주를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 을 파괴하거나 몰수했음을 상기할 때 봉건정부가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다. 즉, 민의 사회운동의 정당성을 상기시 키는 동시에 향후 정부의 태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12조는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를 전면적으로 철저 히 청산하자는 의미는 아니지만,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라는 요구를 기본적으로 반영 하고 있다. 제5, 6, 7조와 9조는 봉건적 신분제의 타파를 요구하고 있다. 천민의 대우 개선이나 노비문서 소각 등 은 신분 질서 개혁으로서 조선조 사회의 최저변 신분인 천 민의 해방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 신분제도에 대해 민 스스로 현실화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과부의 재혼 허가와 문벌 타파, 인재 본 위의 관리 등용과 함께 생각할 때 평등사상에 기초한 민주 주의적 지향이 뚜렷하다. 제11조 공사채의 무효 조항은 민초들의 절실한 문제를 반영한 것이다. 경제 정의에 기 초한 균등으로 이념적 지평을 확대하여 사상적 발전을 보 이고 있다. 이와 같이 폐정 개혁안의 단면만 보더라도 당 시 민의 염원과 운동의 지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한편 문호 개방으로 외세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민들은 여러모로 힘들어졌다. 특히 일본은 조선 침략 야욕을 적


극적으로 드러냈다.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의 체결 (1871년), 강화도 사건 도발(1875년)과 강화도조약 강요 (1876년)는 그 구체적인 표출이다.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의해 최초로 무관세 무역, 세 항구의 개항 및 거류지 설치, 영사재판권, 일본 화폐의 통용권 등 일본의 요구를 들어줬 다. 그러면서 주요한 주권들을 점점 상실했다. 특히 관세 무역규정은 일본 상인이 조선에 진출하는 데 강력한 무기 가 되었다. 이것은 조선 시장을 일본 국내시장과 똑같은 환경으로 만든 것으로, 조선 측으로서는 힘없는 민의 경제 를 보호할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종류의 불평등조약들은 외세에 의해 끊임없이 강요되었 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위기의식을 느낀 민(民)들은 산곡(山谷)으로 피난을 갔고, 어떤 곳은 고을 전체의 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권을 박탈당한 도시 상인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난다. 1887 년 2월, 1889년 12월, 1890년 1월 등 세 차례에 걸친 철시 (撤市)파업과 투쟁이 그것이다. 세 차례에 걸친 철시투쟁 에서 서울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도성(都城) 철수를 주 장하면서 이를 위해 서울을 개방한 외국 조약을 개정할 것 을 정부에 요구했다. 철시투쟁은 육의전과 시전 상인이 주도했다. 이들 수천 명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


해 외아문(外衙門)에서 시위를 벌였다. 특히 1, 2차 투쟁 이 이틀 정도로 짧게 끝난 것에 비해 1890년 1월 26일부터 시작된 3차 투쟁은 7일 간이나 계속되어 상인들의 결속된 힘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외국과 교섭 과정에서 봉건정 부의 사대주의 정책과 무기력한 대응으로 철시투쟁으로 상징된 1880년대 상권수호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 만 반외세운동은 동학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민들의 사회적 경험으로 배태된 사상이 반외세·척왜양사상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의 구성 요소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은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환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민의 염원이 분출된 장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대항공론장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인 주체, 주제, 커뮤니케이션 생산 장소 혹은 매개체인 공간, 커뮤니케이 션 방식 등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작업이다. 이는 당시의 사회상과 정치 현황, 민들의 생활상을 총괄해 볼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역사적 흐름에서 본다면 이러한 구성 요소가 방해가 될 수 있다. 분절되고 규격화된 시각으로 당 시 일면만을 부각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네 가지 구성 요소를 찾아보는 것은 대항공론장의 주체, 주제,


공간,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통해 그 당시 민들이 지향한 것 이 무엇이었으며 그 시대 대항공론장의 형성, 그 진행 사항 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 태동기 우리 사회에서는 부르주아적 공론장이 왜 형성되지 않았 는가에 대한 의문에 힌트를 제공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을 구성하는 요소 중 주체의 문제 는 공론장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당시의 주체는 농민, 상인, 유민(流民), 천민 등 기층민으로 대변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애초에 사회운동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이들이 왜 대항공론장의 주체가 되었는가 를 당시의 시대상, 즉 정치사회적 상황을 통해 찾아 가고 자 했다. 대항공론장의 주제는 당시 조선 후기의 정치사 회적 고민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대항공론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로 생존권 침해를 꼽는다. 조 선조 민의 생활은 그리 풍요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 왔다. 조선 후기 에 들어와서 사회적 격동과 외세의 침략이 민에게 직접적 인 영향을 주었다. 이로써 민들은 그들이 생활 속에서 체 험한 사회적 불평등에 눈을 뜨게 된다. 국가의 전통 이데 올로기인 ‘민본사상’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못함을 인식 하게 된 것이다. 민들은 그들의 이념, 즉 공론장에서 지향


해야 할 사상적 토대를 운동을 통해 터득하고 이를 실행한 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 동에도 일견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의 공간에 대한 검토는 미디어에 의해 지배당하는 오늘날 시민운동의 지향점을 보여 준다. 당시 민들을 위한 제도적 공론장이 작동되지 않은 시기였 다. 민들은 정부와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 다. 그래서 다양한 경로로 자신들의 의지와 욕구를 표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소극적인 행태의 운동으로 출발했 다. 동네 장시나 빨래터 등 일상의 공간에서 점점 조직화 되고 체계화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근간에는 민의 의식 성장이 크게 작용한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 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이들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운동의 발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일상에서 민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주로 소리말 (spoken language)이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소리말은 주로 판소리다. 판소리는 민의 생활에 근거한 전설·설화 의 비공식 언어의 관행 차원에서 사실성의 인식을 통한 상 징 획득과 정보 전달이라는 의도적 커뮤니케이션 일환으 로 공식화된 사회적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다양 한 소리말의 유행은 당시의 사회적 의견과 집합의식을 표


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리말은 민의 의식 고양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이때 나온 것이 실천운동이다. 이것이 민란, 변란 등 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 는 조선 후기 민의 사회적 소통 욕구와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다. 조선 후기 대항공론장과 관련한 10가지 아이템은 그 순 서를 좇아 가 보면 당시 민초들의 일상생활과 한국의 근대 화 이행 과정의 정치사회적 모순, 그리고 그 속에서 고통 받으면서, 혁명을 꿈꾸었던 민들의 의식 성장 과정을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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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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