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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미디어 생활 9/10

라디오

1950년대 한국에서 사용됐던 제니스 단파 라디오 H500

국영 라디오 방송의 비극 북쪽의 선전 방송을 믿는 국민은 없었지만 남쪽의 라디오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통령의 담화가 거짓으로 확인되고 한강 다리가 끊어진 그날 이후, 방송은 신뢰를 상실한다. 권력의 입이었을 뿐 대중의 귀가 되지 못했다.


인텔리겐치아 2652호, 2015년 6월 25일 발행

해방 이후 정부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거구기 (擧口機)’ 공보 매체에 불과하던 국영 라디오 방송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을 버려두 고 도망가는 정부의 거짓말까지 그대로 보도 하게 된다. 허위 전황 방송은 국민의 라디오 방송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게 했다. 1951년 1 월 부산으로 이동한 방송국은 “멸공의 적개심 을 앙양하고” “후방의 결속을 고양하는” 전황 보도를 주된 역할로 삼았다. 전쟁이 해를 넘기자 국영 라디오는 전쟁 에 지친 국민의 침울한 “기분을 풀어 주기 위


1950년대 라디오 방송용 녹음에 주로 사용된 자기 테이프 녹음기


해 아담하고 명랑성을 띠는” 프로그램을 제 작하기 시작했다. 코미디 프로그램 <유모 어 소극장>, 퀴즈 프로그램 <천문만답>, 그리고 대중가요 프로그램이 이때 방송되었 다. 환도 후 정부는 방송 재건을 위해 방송관 리국을 공보처에 신설하고 <마음의 샘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청취자의 관심을 끄는 데 여전 히 실패했다. 당시 방송작가로 활동했던 백야는, “내 용이 국민이 요구하는 진실과 거리가 있어 국 민에게 버림을 받는 것이며 … 북한의 거짓 선전 방송을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대한민 국 공보처의 방송도 국민에게 상당히 멀어지 고 말았다”고 평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라


디오는 주로 정치 선거 보도에서 정부의 홍위 병으로 복무했다. 4·19를 겪으며 국영방송 이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었고 방송의 중립화가 주요 이슈로 등 장했다. 일각에서는 민영화를 추진하기도 했 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61년 5·16 군 사 쿠데타로 중단되었다. 백미숙,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중 “라디오 사 회문화사” 지은이


한국전쟁과 미디어 생활 9/10

라디오

1950년대 한국에서 사용됐던 제니스 단파 라디오 H500

국영 라디오 방송의 비극 북쪽의 선전 방송을 믿는 국민은 없었지만 남쪽의 라디오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통령의 담화가 거짓으로 확인되고 한강 다리가 끊어진 그날 이후, 방송은 신뢰를 상실한다. 권력의 입이었을 뿐 대중의 귀가 되지 못했다.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백미숙·유선영·박용규· 이상길 외 지음 언론/미디어 일반 2007년 12월 10일 크라운변형(173*225) 무선 제본, 598쪽 25,000원


작품 속으로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유선영·박용규·이상길 외


오과가 준비한 방송이었다. 북한 당국자와 소련에 대한 공격과 미점령군과 군정의 정책에 대 한 홍보를 주요내용으로 하였다. 라디오과 담당자는 ‘뉴스분석을 통한 강도 높은 대항 선전 프로그램이라고 규정했다.88) <뉴스 속의 뉴스>, <시사해설>, <거리의 화제>, <방송토론> 등의 시사보도 프로그램 들은 일반 청취대중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국내 정치보도를 배제하고 국제정치 해설 프로그 램에 역점을 두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지방과 농어촌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 시기 가 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프로그램의 하나는 양악(약 28%)이었으나 청취자들은 <국악감상> 프로그램에 더 높은 호응을 보였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대중음악이었는데 미군 진주 와 함께 들어온 각종 재즈, 스윙, 블루스, 탱고 등의 경음악, 그리고 한국 대중가요였다. 미국 경음악 프로그램은 식민조선 경성에서 이미 보고 경험했던 아메리칸 모더니즘이 직수입되 는 경로이기도 했다. 미국과의 직접 대면과 접촉이 라디오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중문화의 형 식으로,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표상으로 이루어졌다. 청취자들은 근대식 방송 프로그 램을 경험하며 미국 상업 라디오의 대중문화와 오락에 익숙해지는 청취 관습을 형성하게 되 었다. 해방 후 미군정 방송은 식민지기 일본적인 것에서 ‘미국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방송의 근대화를 구성했다. 38선 이남의 10개 민간방송의 편성권을 접수하여 제도, 기구, 프로그램 포맷을 포함한 방송 편성의 기본정신을 미군정의 정책과 일치된 방향으로 재조정했다. 그러 나 일제 방송 인력을 청산하지 않은 채 계속된 방송은 근대성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식민기부 터 계속되어온 방송구조, 행정, 장르, 기술 등이 미국적인 것과 혼합된 채 남아 한국 방송의 성격을 규정짓는 요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식민시기부터 계속되어온 선전과 공보의 ‘전통’이 미군정기를 거쳐 내면화되어 한국방송의 정체성 전반을 규정하는 후기 식민지적 징후로 재 생산되었다.89)

6. 반공 ‘거구기’ 라디오: 청취자가 없는 방송 미군정 체제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방송 조직과 체계, 프로그램의 형식과 내용은 이승만 정부 의 수립 이후 전면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국영방송이 된 서울중앙방송국의 역할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부시책에 순응’하고 ‘대국민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신 생국가를 운영하는 정부는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하고 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방 송을 국영화한 것은 “이북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전파매체가 절대로 필요한 상황이기 때


문”이라는 것이었다. 북진 통일과 북한동포 구출을 위해 <이북동포에게 보내는 시간> <우리 의 나아갈 길>같은 반공독본 프로그램이 편성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상했다. 냉전이 고 착화되어가던 한국사회에서 방송은 우선적으로 “이북동포를 구출하고 남북통일이란 민족 적 과업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효적절한 무기로 인식되었다.90)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으로 북한에서 보내오던 전기 공급이 중단되자 실시했던 배전상 황 중계조차도 반공 캠페인 방송으로서 계도 효과가 기대되었다. 1948년 5월 14일부터의 송 전 중단으로 전기사정이 악화되자, KBS는 관수동 배전소에 마이크를 설치해두고 배전상황 을 중계하였다. “지금 xx동에서는 배전된 촉수이상으로 전기를 남용했기 때문에 부득이 xx 동의 불을 끕니다”, “높은 촉수의 전등이나 전기다리미를 쓰시면 여러분 동네의 변압기가 타 서 암흑세계가 됩니다”, “전기다리미나 전기 곤로를 쓰고 계신 분은 지금 당장 꺼주시기 바랍 니다”라는 식의 계도 방송은 절전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더 나아가 절전 캠페인 방송을 통해 “같은 동포끼리 이처럼 전기 쓰기도 어렵게 해놓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솟구쳐 오를 만했다”는 것이었다.91) 철저한 반공 정책으로 언론이 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것조차 규제되었다. ‘언론단속 7개 항’이 발표(1948. 9. 22)되었고, 보도방송뿐 아니라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이를 준용하여 반공의식을 고취하고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정부 공보·선전 활 동을 위한 KBS 보도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1945년에 2명으로 시작했던 취재기자 수는 1948∼1949년만도 18명에 이르렀고, 아나운서는 20명에 이르게 되었다.92) 국내외를 대상으로 한 대공, 반공 방송에 주력한 결과 일반 방송은 저조를 면치 못했다. 저녁의 가족시간대 ‘골든아워’에 선전방송이나 반공 프로그램, <미국의 소리>같은 심리전 방송이 들어서서 “가족이 라디오 앞에 둘러앉아 들을 수 있는 프로가 엮어지기 어려웠다.”93) 방송국이 공보처 소속으로 되면서 많은 방송요원들이 물러났고, 방송에 경험이 없는 간부들 의 무지함으로 인해 프로그램의 빈곤함이 가중된 탓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방송문예가 극 심히 퇴조하여 전쟁 전까지 4∼5명의 극작가가 활동을 유지하는 정도였다.94) 한국전쟁과 전황 방송

철저하게 정부의 공보매체로 전환된 KBS는 마침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을 버려두고 도망가는 정부의 거짓말을 그대로 보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허위 전황 방송으로 국민 들은 KBS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렸다. 1951년 1월 부산으로 이동한 방송국은 전황보도에 중점을 두었지만, UN군 사령부 심리전 감실에 설치된 ‘테레타이프’에서 수신한 AP나 UP, INS 등의 외신 보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미군들이 외신을 수신하면 번역사들이 번역한 것


그림 5-11.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기에 도입된 가방형 자기 테이프 녹음기

그림 5-12. 1950년대 초반 6. 25 한국전쟁 시기 사용한 전지식 TAPE 녹음기

출처: KBS 방송박물관 [http://museum.kna.co.kr]

출처: KBS 방송박물관 [http://museum.kna.co.kr]

을 한국 아나운서들이 가져다 읽는 방식이었다.95) 피난지 첫 1년 방송은 ‘멸공의 적개심을 양양하고, 후방의 결속을 고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2년차에는 전쟁에 지친 국민의 침울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아담하고 명랑성을 띠는’ 프로그램에 치중했다. 이에 따라 <유모어 소극장>같은 코메디 프로나 <천문만답> 퀴즈 프로그램, 그리고 대중가요도 방송되었다. 드라마로는 <결전의 모습>같은 다큐멘터리 목적 극이 매주 30분씩 방송된 것이 고작이었다. 일선장병과 후방국민들을 연결하기 위한 위안 교 양물로 <라디오의 꽃다발>이라는 녹음 구성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전쟁기간 중에 전자마 그네틱 녹음기가 도입되어 새로운 프로그램 형식이 가능해진 것이 그나마 수확이었다.96) 정부는 환도 후 방송의 재건을 위해 방송관리국을 공보처에 신설했다. 청취자들은 <마 음의 샘터>(1953. 2. 9∼1958)같은 프로그램에서 마음의 위로를 찾았다. 동서고금의 성현 명인들의 명언과 격언 등을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을 것을 음악과 함께 방송하는 프로그램이 었다. 그러나 KBS는 청취자 대중의 관심을 끄는 방송을 만드는 데 여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당시 방송작가인 백야는 신문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보처 직속기관인 서울 방송국에 대해서는 국민들은 “좋거나 나쁘거나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뉴스방송 방송원의 역량과 성의 문 제 특히 여러 가지 의미의 방송 상태 등 등 조건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국민이 듣고 싶 어 하는 진정한 뜻의 국민의 방송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이 국민이 요구하는


진실과 거리가 있어 국민에게 버림을 받는 것이며 “국내선전의 실패”를 의미할 것이다. 북한 의 거짓 선전방송을 믿는 사람이 없겠지만, 대한민국 공보처의 방송도 국민에게 상당히 멀 어지고 말았다.97)

경성방송국 시절부터 근무했던 방송인 이덕근 역시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국 민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KBS와 공보 관료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던졌다. 우리나라의 방송은 전시에 태어나 전시에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이 지니는 특성으로 제법 선전전이니 사상전이니 하는데 이것은 방송초창기를 지나자마자 중일전쟁 과 2차 세계대전을 겪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래서 우리의 방송은 전시방송으로서 뼈가 굳 었다. 현재 방송에 종사하는 분들도 대개 2차대전부터 근속해온 분들이어서 더 그런 감을 준다. 그래서 이분들은 전시방송이라면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다고 자부하며 사상전에 있어 서의 방송의 중대한 직책을 스스로 자긍하는 것이다. 일선장병의 사기고무, 국민정신의 양 양, 전시생활체제의 강조, 국민저축이나 애림운동이나 어느 하나 못해본 것이 없으며 모를 것이 없으며 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중략) 전시방송이 위엄을 가지고 군림 하려고 하는 것은 착오다. 방송과 국민이 멀어지는 것은 방송의 자기 부정이기 때문에 전시 라고 해서 방송이 국민위에 설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중략) 대중은 몇 해 동안 계속된 전쟁에 모든 것이 고갈되었다. (중략) 국민을 즐겁게 해주는 길은 친절과 성실밖에 없다. 전 시방송은 대중이 신뢰를 갖도록 성실해야 한다. 그동안 대중은 방송에 많이 속아왔다. 국민 이 먼저 알고 있는 일도 구태여 속이려고 했다. 방송이 재미없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불신이 아닐까한다. 전시방송의 특성은 선동도 아니며 (중략) 오직 신뢰성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방송에 의지하여 안도할 수 있고, 국민의 안도 속에서 방송은 그 본래의 위안과 오락성까지 도 유지할 수 있다.98)

전후 방송 시설의 재건과 확장

서울 환도 후 라디오 방송은 미군과 유엔군 원조에 의해 인적, 기술적으로 엄청난 외형적 성 장을 시작했다. 보도부문은 여전히 공보방송이 중심이 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외신의 중요 성을 경험했기 때문에, 1955년 4월에는 텔레타이프를 설비하고 AP, UPI, 로이터 통신사와 직접 수신계약을 맺었으며, 외신 번역진 10여 명을 보강하는 등 내외신 기자와 아나운서의 대폭 확충으로 보도 체계의 외형을 갖추었다. 또한 대북계를 신설하여(1956. 3) 대북 방송의 본격 체제를 확립했다.99)


그림 5-13. 이승만 대통령 83회 탄신 경축 행사 출처: ≪방송≫, 1958. 4.

방송 시설의 복구와 기술 발전이 가장 두드러졌다. 1956년 1월 수원송신소에 중파 100KW 송신 시설이 완비됨에 따라 그 해 10월 1일부터 제2방송을 실시하게 되었고, 방송시 간이 배 이상 증가했다. HLKA 제1방송은 일반 대중 대상 방송으로, 제2방송은 대북방송과


‘거구기(擧口機)’ KBS 4·19 이후 HLKY의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도 방송문화연구실에서 최근 각 개인으로부터 얻은 앙케이트에서도 거의가 4·19 이후 KY를 들었다는 중론이 나타나고 있는데, 출력 100킬로로 KY에 비할 바 없는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진 HLKA가 이처럼 신용을 잃고 무색해졌다는 것만을 보아서도 KA의 편당(偏黨) 적인 과거의 과오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앞으로도 방송의 갈 길에 대한 절대적인 혁신을 말해주고 있다. 자유당과 이승만 씨의 선전실 같은 구실에만 총력을 소비해오던 공보실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국립방송이 ‘거 구기(擧口機)’(?) 노릇만 해오던 것은 누구보다도 국민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요즘 방송의 중립화에 대한 방송국내의 여론에 대하여 공보실 고위관리들이 일종의 노조 요구같이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 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4·19서 4·26까지 KA의 아나운서실에는 온 종일 시민들로부터 공정한 방송을 하라 고 전화와 편지 데모가 날아들어 불안해하였고, 4·19 때는 데모대 일부가 남산 스튜디오에까지 밀어닥쳐 아 슬한 고비를 넘겼다는 에피소드까지 있었다고… 국립방송이 거구기 노릇이나 앵무새 시늉만 하지 않기 위해서 시급히 방송행정의 중립화가 강구돼야겠다. ‘거구기(擧口機)’는 그만?, ≪동아일보≫, 1960. 4. 28.

부터는 오후의 휴식 시간을 없애고 종일방송을 시작했으며, 제2방송에서는 9월 2일부터 미국 서해안과 하와이로 보내는 대외방송을 개시했다. “대공사상전 승리”를 위한 물질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었다.100) 민간방송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산권 선교를 목적으로 개국한 복음주의 방송은 물론, 기독교방송(CBS) 역시 부족한 출력에도 불구하고, ‘남북지향성’ 안테나를 사용 하여 북한으로의 방송은 물론 VOA 중계방송을 실시하며 ‘선전’ 방송의 역할을 일정 지분 수행 하였다. 이렇듯 1950년대 방송은 냉전 전파전의 병기 역할을 주 임무로 했다. 앰프 라디오 보급

정부는 수신기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1957년부터 앰프촌 설치 사업을 시작했다. 라디오 수 신기의 20분의 1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설치가 가능한 앰프 라디오는 고정된 채널만을 수신 할 수 있었다. 채널이 고정된 앰프 라디오의 방송내용은 아침 5시부터 자정까지 일상생활의 시간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라디오 체조시간이 오전 5시 25분과 정오에 각 각 편성되어, 하루 2번 아침 기상과 일상의 업무 조정에 방송이 관여했다. 식민 조선에서 그 러했듯이, 재건과 근대화 시기 국민의 행동과 의식을 하나로 통일하는, 동시성과 정기성의 시간체제가 ‘국민’의 형성을 위해 다시금 활용되었다.101) 이와 함께 농어촌 벽지나 KBS 난청 지역을 방문하여 방송 순서와 영화 상영, 노래 자랑 등을 묶은 위안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이


그림 5-14.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FLEETWOOD사 제품 6TR식 홈 트랜지스터라디오 정부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직전 일본에서 수 입하여 농어촌 가정에 무상으로 배포. 전원이 없는 농 어촌에서도 소량의 건전지로 방송청취가 가능한 이 트 랜지스터라디오는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직전 공보처가 일본에서 긴급히 수입하여 각 시, 군에서 추 천하는 가정에 무상으로 배포하였다. 출처: KBS방송박물관 [http://museum.kna.co.kr]

그림 5-15. 텔리폰 스피커 광고 출처: ≪방송문화≫, 1968. 3.

동방송차’ 파견 사업이 실시되었다. 방송이나 영화는 이승만 대통령의 치적, 정부 정책 선전, 자유의 종 같은 반공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공보 선전활동이 주목적이었으며, 미 공보국의 냉 전 선전, 심리전 활동과도 긴밀히 연계되었다. 정부 홍위병 방송

기독교방송 개국(1954년)을 계기로 방송 편성 방향에서도 미미하나마 변화가 나타났다. 방 송을 단지 국민 ‘위안’의 도구로만 간주하지 않고, 즐기면서 배울 수 있도록 ‘교양과 오락을 양 립’할 것이라는 개편 방향이 제시되었다(1955년 10월 1일 개편). 연예 프로그램이 청중을 감 화 각성시키는 데 더 효율적이라는 것과 청취자가 원하는 방송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한 다고 강조되었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이 증가하고, 장편 성인 연속극이 새로이 시작되었으며, KBS 및 각 방송국들이 참여하는 ‘시민위안의 밤’ 실황중계 방송이 시행되기 시작했다.102) 재건의 시기, 민심을 위로하는 한편 라디오 보급을 촉진하는 이중적인 효과를 겨냥한 것이었다. 라디오가 국가재건과 경제성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림 5-16. 37만 대의 스피커 출처: ≪방송≫, 1961. 10.

그러나 라디오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외형적 변화 에도 불구하고 국영방송은 각종 정치 선거 보도에서 정부의 홍위병으로 복무하는 데 급급했 다. 국영 KBS의 직원들은 공무원 신분이었고, 보도는 항상 공보처 지침을 따라야 했다. 방송 기자들도 공무원으로서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것이 뉴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 시체제를 벗어나고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신문들은 정부 시책을 적극적으 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국영이라는 소유권 형태가 KBS의 왜곡, 편향 보도를 불러오고, 방송 사업의 발전을 막는 주원인이라는 것이었다.103) 정부 공보 매체로서 국영 KBS 라디오의 한계가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여파가 4·19로 번져가던 계엄령 시기였다. 학생과 시민 항의 데 모의 현장을 일일이 실황중계 보도하여 시민들의 뉴스욕구를 풀어준 것은 자체 보도 기능이 없었던 서울의 기독교방송과 부산문화방송(1959년 개국) 등의 민간방송이었다. 기독교방송 은 ≪조선일보≫와 그 밖에 통신을 이용한 보도로, 부산문화방송은 마산 부정선거 규탄 시민 의거 현장을 취재하고 녹음테이프를 기동성 있게 운반하여 가장 빠르고 현장성을 생생히 살 리는 보도로 청취자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 특히 보도의 역할을 다한 것은 부산문화방송이 었다. 이 두 민간방송의 보도는 라디오 보도방송에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KBS의 보도계는 침묵과 왜곡으로 일관했다. 4·19를 겪으며 정부 정책의 공보기능을 우선으로 국영방송이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없 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었고, 방송의 중립화가 중요한 각 신문의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일각에서는 민영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로 중단되었다.

7. <청실홍실> 라디오 연속극 시대를 열다 한 때 라디오 방송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1960년대 중·후반까지 지방에서는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라디오는 방송 미디어의 중심이었다. <청실홍실>, <산 넘어 바다 건너>같은 라디오 연속극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동네 주부들이 라디오 있는 집에 옹기종기 모여 라디오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방송을 듣고는 하였다.104) 국영 라디오가 정부의 ‘거구기’로 비웃음을 사면서도, ‘라디오붐’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 든 것은 연속극이었다. 동네 여자들이 모여 귀를 세우고 연속방송극을 듣는 것은 일상적 풍 경의 하나였다. ‘붐’을 촉발시킨 것은 <청실홍실>(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이라는 일요 드라 마였다. 1956년 10월 7일 시작하여, 매주 일요일 밤 9시 15분부터 45분까지 30분간 30회에 걸쳐 방송되어 1957년 4월 28일에 종료했다. ≪한국일보≫는 이 드라마가 끝날 무렵 즈음 게 재한 기사(1957. 2. 10)에서 청실홍실이 청취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현상을 두고 ‘청실홍실 붐’이라고 이름 붙였다. 붐이라고는 하나 이 당시 라디오 수신기는 남한 정부 수립기인 1948년 수준의 18만 5천 대에서 별로 증가하지 못한 채였다. 청취자 대중들의 반향을 즉각적으로 실감하기도 어려웠 고, 청취률이 측정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후 같은 시간대에 <꽃피는 시절> <봄이 오면>같 은 유사 드라마들이 계속 편성되어 처음으로 ‘드라마 시간대’가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


은 해 <산 넘어 바다 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라는 일일극이 출현하는 토대가 되었다 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족히 짐작할 수 있다.105) 전후 공개 오락 방송의 등장

<청실홍실>이 등장한 1956년은 방송이 전시체제를 탈피하면서 ‘청취자들이 방송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이중방송 개시를 앞두고, 증가한 방송 시간과 채널에 어떤 방송, 무엇보다 어떤 오락방송을 제공할 것인가가 중요한 논의거리로 부상했 다.106) 청취자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관영(국영)방송은 공보와 선전 활동을 효과 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라디오에서 오락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취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라 디오는 아직도 일반 대중들의 것이기에 너무 고가였으나, 전쟁의 혼란이 안정되어 가면서 묻 혀 있던 “민중의 잠재적인 정서가 현화식물(顯花植物)처럼 피어나는” 시기였다.107) 별로 새 로울 것도 없는 외국 레코드 음반을 자꾸 틀어주는 데 항의해 “농촌사람은 ‘개 짖는 소리는 들 어도 방송국의 외국 음악프로는 못 듣겠다’”라는 불평과 우리나라 곡(당시 유행하는 대중가 요)을 더 많이 들려달라는 요구도 그의 하나였다. 이승만 정부와 미 공보원과의 갈등으로 중 지된 <미국의 소리> 저녁 방송시간에 대신 “오락 방송이 편성되기를 기대”한다는 독자투고 는 더욱 적극적인 의사표시였다.108) 기독교방송의 개국도 KBS 편성에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일보≫는 “모순과 무력과 혼란 속에서 매너리즘의 혹평을 피할 길 없던 서울방송국은 이 자극(기독교 방송의 개국)을 받음으로써 프로작성이나 설비 개혁에 심심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과정 속에서 단언할 바 아니나 분명히 희망적이다. 여기에 공보처의 각성이 수반된다 면 불원 면목의 일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109) 최초로 공개방송이 시도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노래자랑>(1955. 6. 6)과 <스무고개> (1947. 12)의 첫 공개방송이 열린 동화백화점 영화관에는 오락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가 그대 로 나타났다. “출연자와 방청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문을 닫으면 사람들이 유리를 깨고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했다. 장기범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 가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는 ‘신라의 달밤’, ‘백마야 우지마라’, ‘방랑시인 김삿갓’, ‘페루사 왕 자’ 등이었고, 여자출연자들은 ‘봄날이 간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이 애창곡이었다. 미군정 시기 미국 인기 프로그램을 본 따서 처음으로 시작했던 <스무고 개> 역시 사회자와 참석자들의 기지와 유머로 청취자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는 재미거리가 되었다.110)


초기 라디오 방송극

1933년 제2방송 채널 실시 후 방송극 시작, 지금의 방송극과과는 거리가 멀다. “무대 가운데 마루가 있고, 바 른 쪽이 안방… 이제 딸이 밖에서 돌아왔습니다…” 식의 설명이 따라야 했고, 대사 역시 무대극을 그대로 썼 으며 성우가 따로 없고 무대배우들이 했다. 그러니까 마치 지금의 무대중계방송과 같았다. 방송도 정기적으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연속방송극도 없었다. 각본을 방송극에 갖다 주면 검토한 후 날짜를 정해주었고, 방송이 끝나면 각자에게가 아니라 작품 한편에 얼마로 수고료 정도가 나왔다. 그러면 같이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방송국에서는 무척 친절히 대해주어 자동차로 모셔가고 데려다주곤 하였다. 그러 나 영국의 런던 방송국에서는 리차드·휴즈라는 이가 지은 <Danger>라는 20분짜리 방송극이 방송되었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방송극다운 방송극이었다. JOAK에서는 곧(1927년) <탄갱>이라 번역해서 방송했으며,

JODK에서는 홍해성 씨가 우리말로 번역, 방송했으니 이것이 외국방송극으로 최초였고 방송극다운 방송극을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취미오락 방송극, 가정마다 높은 청취율 … 붐” 이룬듯, 김희창, 1963. 8. 19, ≪조선일보≫

<인생역마차>와 <청실홍실> 공개방송 퀴즈 프로그램 외에 환도 후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프로그램은 청취자 수기 각 색드라마 <인생역마차>였다. 인생역마차는 현대사를 살아간 기구한 운명의 여성들의 삶에 서 ‘어찌하오리까’ 식의 선택의 기로를 드라마화한 에피소드 시리즈였다. 전후 고난의 시절, 어느 개인의 인생사라도 청취자의 공감대를 만들어 내는 인기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다. 그 러나 방송전문가들은 이미 1956년경부터 <인생역마차>는 전후 “정리기에 들어선 국민들의 생활심리”에서 더 이상 공명을 얻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청실홍실>은 시대적 유물이 된 비극성을 대체하는 신선한 기호품이었다. 라디오는 ‘명랑’하고 ‘도회적’인 프로그램을 필요 로 했다.111) <인생역마차>는 청취조사 결과 1958년까지도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으나, 결국 이해 에 폐지되는데, KBS가 “일상생활의 어두운 측면만이 과장 반복되어 전파되는 데서 기인하는 사회적 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112) 여기에 56년 10월 1일부터 실시될 이중방송을 앞 두고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이 필요했다. <청실홍실>의 작가 조남사는 KBS의 연출계장이었 다. 당시 미국무성 초청으로 교육시찰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던 조남사는 철야송전이 가능 해졌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구상해오던 성인대상 연속극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기록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언제고 한번은 반드시 연속방송극을 쓰리라 마음먹었고 쓴다면 어떤


것을 쓸까 막연하나마 이모저모 궁리한바 있었습니다. 방송작가로서 이러한 궁리를 한 사람 이 비단 나뿐이겠읍니까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한번도 구체화되지 않은 최대의 이유로 나는 당시의 우리나라의 전기사정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회 배치되어야 할 부분적인 사건의 기복은 작가의 기술에 속하거니와 일단 그것이 ‘연속 방송극’이고 보면 어디까지나 청취자로 하여금 연속해서 듣게 함으로써 비로소 ‘푸로그램’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의 우리나라의 전기사정은 불행히도 순조롭지가 못했읍니다. 그러던 것이 바로 작년 5월 달 이었나 봅니다. (중략) 나는 정말이지 춤을 추고 싶으리만큼 기쁜 소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국의 전기사정이 호전되어 ‘철야 송전’도 가능하다는 것이었읍니다.113)

<청실홍실>에는 성격과 환경이 판이하게 다른 네 사람의 주인공, 나기사, 애자(愛子), 동숙, 윤청년(尹靑年)이 당시 젊은 세대의 대표적 인간형으로 등장했다. 작가는 이들 사이 에서 벌어지는 “애정의 갈등을 통해서 … 한국의 젊은 세대의 애정관을 묘사해보려”했다고 밝혔다. <청실홍실>은 전쟁미망인인 애자와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적극적인 부잣집 아가씨 동숙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여성주체(전후파 여성, 일명 아프레걸)를 등장시키고 금기된 소 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서울이라는 근대성과 물질 자본주의의 풍속도 안에서 그렸다는 점에서 이전의 드라마들과 차별성이 분명했다. <청실홍실>에서 보여주었던 “로맨 스 주제와 터부적 소재, 운명적 우연과 반전, 그리고 해피엔드 등을 기본 구성으로 망라한 전 향적인” 멜로드라마 방식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한국 방송 드라마의 보편적인 양식과 경향이 되었다. <청실홍실>은 <인생역마차>, 영화 <자유부인> 등에 영향을 받았으나, 사극, 어린이 극, 각색수기에 머물러있던 기존의 방송드라마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최초의 성인대상, 장편 연속극이었다.114) <청실홍실> 이후 ‘방송문예’에 대한 일반 청취자의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청소년 학생층의 청취율이 높아졌고, 신문이나 잡지에 비평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방송작가들은 ‘방송극작가협회’를 발족하며(1956. 12) 다가오는 연속극 시대를 대비했다. KBS <청실홍실> 이 놀라운 성공을 보이자 최초의 민간방송이자 종교방송인 CBS도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를 편성할 것을 결정하는 등 기본 프로 편성방침에 변화를 가져왔다. CBS는 1957년 조남사의 신 작 <수정탑>을 주간연속극으로 12월말까지 6개월간 방송하며 청취률 신장을 실감했다.115) 연속극 붐과 상업방송 경쟁

이미 1958년경부터 몇몇 소수에 집중된 연속극 작가들은 한 달에 1편 혹은 2편, 연간으로는 5∼8개의 연속극을 썼다. 연속극 한 편의 길이는 대개 20∼30회 내외였다. 소수의 작가들이


연속적으로 써내는 드라마들은 작품 늘이기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도시 중류 계층 이상 중심의 전개와 비생산적이고 퇴영적인 성격 등이 반복적인 문제로 제기되었다. 극작가 차범석은 “전쟁이 남기고 간 비극이니 인간성의 상실이니 하는 것이 테마처럼 되어 있으면서 도 실상은 값싼 연애소설이나 신파연극의 재탕에 한 껍질을 입힌 것이 대부분”이며, “아무런 신선미도 야심도 찾아볼 수 없”어 방송극의 문제가 고질화되어 간다고 지적했다. 소수의 작 가에 의한 다작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1968년 상반기 조사에 의하면 8개월 동안에 8편을 발 표한 작가가 3명이나 되었다.116) 이는 라디오 드라마의 영화화 경향과 중첩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청실홍실>이 종방 과 동시에 이미 영화화가 결정되었듯이, 이후 제작된 드라마들은 거의 대부분이 영화화의 수 순을 밟았다. 특히 조남사의 드라마는 <산 넘어 바다 건너>, <동심초> 등을 포함 1960년 초 까지 7∼8개가 영화화되었다. 라디오 드라마가 국산영화 붐에 중요한 촉매제가 된 것이었 다.117) 작가들의 고료도 계속 올라가서 한운사의 <어느 하늘 아래서>는 200만 환이라는 당 시 최고 고료를 받은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118) 가장 막강한 네트워크를 가진 KBS의 방송극 이 영화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1962년에만도 KBS 21편의 연속방송극 중 10편이 영화화되었 다. 방송극이 영화 관객의 취향에 영합함에 따라 방송극 질적 수준 저하의 요인이 되었다. 이 같은 경향은 TV 등장으로 영화가 사양화되는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119) KBS가 연속극 편성에 주력한 것은 상업방송을 의식해서였다. 한국문화방송(MBC, 1961), 동아방송(DBS, 1963), 라디오서울(RSB, 1964, 후에 동양라디오 TBC) 등 민방은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대량 편성으로 시청률 경쟁 체제에 대응했다. MBC는 1960년대 내내 오락 프로그램이 50%를 넘었다. 가장 인기 있고 경쟁이 치열한 프로그램은 연속극이었다.120) 1963년 8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요즈음 전에 없는 방송극 붐을 이루다시피 단막극, 연속극 등이 쏟아져 나와 각 가정에서는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면서 방송극 청취에 열을 띄 는가하면, 저마다의 다른 기호와 취미로 청취 선택에 옥신각신거리는 일도 많다”며 가장 지 배적인 취미오락으로 등장한 방송극을 조명하는 동시에 천차만별의 수준을 우려했다. 방송국마다 거의 매 시간 하나 혹은 둘의 연속극 띠를 편성했다. MBC는 DBS 개국 직후 인 1963년 5월부터 이전까지 정시에 하던 뉴스를 시보 전으로 옮기는 대신 연속극 띠를 정시 표 5-3. 연속극 제작 편수 연도

1966

1967

1968

제작편수(개)

153

143

160

* 출처: ≪한국방송의 역사와 전망≫, 조항제, 2003, 한울출판사, 194쪽.


그림 5-17. 1960∼1970년대 라디오 보급 현황

(단위 : 대)

표 5-4. 1960∼70년대 라디오 보급 현황 연도 1948

(단위: 대)

라디오 수신기 각종 라디오/ 상업유선방송스피커

인구 1000명 당 보급대수

156,733

7.83

1959. 12.

346,154

15.07

1960

420,414

16.82

1961. 9. 1963. 1. 1965. 9. 1967. 7. 1970. 1. 1971 1972 1973. 9.

707,033 588,519 / 118,514 1,414,834 815,774 / 599,060 1,920,265 1,173,658 / 746,607 2,455,797 1,658,456 / 896,341 3,053,259 2,540,375 / 512,884 3,769,384 3,400,350 / 369,034 4,300,000 4,000,000 / 300,000 4,958,041 4,892,018 / 66,023

* 출처: “한국의 라디오 시기의 라디오 수용현상”, 김영희, 2003, ≪한국언론학보≫, 제47-1호, 145쪽.

27.44 51.90 66.90 81.50 97.03 114.63 128.34 145.38


로 고정시켰다. 드라마 시간을 가장 먼저 정하고 난후에 뉴스와 다른 프로그램을 배치했다. 이에 따라 심지어 밤 시간대에는 약 6개의 드라마 띠를 편성하기도 했다.121) 양적으로 1966년 부터 1968년까지 각방송사들이 방송했던 라디오 드라마의 연평균 개수는 150편에 달했다. 방송극이 시청률 경쟁의 최전선이 되자 광고주들의 개입도 극심해졌다. 광고주들은 광 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작가를 대동하기도 하고, 드라마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작가 김영수 에 의하면 “스폰서는 좀 강력하고 성급한 선전효과만을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작품의 주제 와 전개에까지 간섭” 했다.122) 또 다른 커다란 요인은 청취자 층의 변화였다. 1960년대에 들 어 라디오 수신기 보급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라디오 주 청취자 층이 중하층으로 하향, 드라마가 이들이 주로 즐기는 장르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공법과 드라마의 자기 검열

그러나 이 시기 라디오 연속극이 멜로드라마 일변도로 대중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반 공법이라는 정치적 조건이 작용한 탓이기도 했다. KBS 대전방송국에서 방송된 드라마 <송 아지>는 1964년 11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법원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검찰은 이 드라마가 “북괴 및 공산계열의 상투적인 선전에 동조하고 북괴의 활동을 찬양, 고 무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법원은 “도시 처녀의 철없는 … 기질을 규탄한 것에 불과하다”고 기소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가 얼마나 직접적 영향을 미쳤는가는 알 수 없지 만, 제작진이 ‘자기검열’을 내면화한 것은 분명했다. 1968년 ≪방송문화≫ 8월호에 실린 드 라마 연출가와 작가와의 대담에서는 드라마가 사상적 문제나 대 사회적 문제에는 크게 위축 되어 있다고 고백하며 자기 검열의 문제를 인정하였다. 라디오 드라마의 양산, 질 저하, 도식 화, 소재 제한은 이러한 역학의 산물이었다.123)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시기 드라마의 양산 체제가 오늘날과 같은 한국의 PD(Producer +Director)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까지 드라마는 기 획기능(Producer)과 연출기능(Director)이 엄격히 분리되어 전문 연출가가 별도로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 제작이 과다해지자 제작비 절감을 위해 방송국 내의 프로듀서가 연출을 직접 하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KBS도 점차 상업방송을 따라갔다. 1968년도 경우 전체 37.2% 가 방송국내 연출이었고, 민영방송에서는 약 50%가 방송국내 연출을 했다. 1969년 상반기 에는 드디어 프로듀서들의 연출회수가 총 30회에 이르러 전문연출자의 25회를 넘어서게 되 었다. 전문연출가의 숫자가 22명인데 반해 총 8명의 프로듀서들이 중복연출을 한 탓이었 다.124) 이는 소수 작가들의 다작 경향과 중첩되어 질이 낮은 아류 드라마가 양산되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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