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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시대의 진단술 확실한 대상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꽤 확실한 편이다. 그러나 해체와 혼종, 공황 효과, 지배질서의 일탈과 무질서 같은 사회변동기 고유한 아이러니를 잡아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로테스크의 정치성에 물어볼 차례다. <마음의 상태>, 움베르토 보치오니, 1911


인텔리겐치아 2663호, 2015년 7월 2일 발행

이창우의 ≪그로테스크의 정치학≫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은 동시대 사회 성원들 의 집단적 마음을 읽어 내는 것,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적 기호를 둘러싸고 정치적 태 도들 사이의 경합과 연대를 해독하는 작업이 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 시대의 예술이 나 특정 예술가의 주관적 정신세계가 아니라 동시대 문화다. 또한 특정한 사회집단에 국 한된 문화가 아니라 여러 집단의 목소리가 혼


합된 대중문화다. - ‘추한 것이 즐거움을 주는 시대’, ≪그로테스 크의 정치학≫, xi쪽.

그로테스크가 뭔가? 낯섦, 추함, 익살스러움, 무서움을 복합적으 로 느끼게 하는 미적 표현 양식이다. 정치의 대상이다. 어째서 정치의 대상인가? 미적 표현에 무질서와 질서가 병존하기 때문 이다. 기존 질서를 위협하기도, 반대로 뒷받 침하기도 한다. 정치적 변증법이다.


그로테스크의 변증법은 뭔가? 더러움·무작위성·해체·비천함 같은 무 질서와 거대함·유기성·숭고함 같은 질서 를 동시에 표현한다. 기존 질서를 와해하려 는 힘과 이에 맞서는 법ㆍ제도 간의 다툼을 그로테스크 미학에서 읽을 수 있다. 무질서와 질서의 다툼은 어디서 확인할 수 있나?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 대중문화에 종종 등장 하는, 추하고 섬뜩한 ‘괴물’이다. 그로테스크 의 전형으로, 사회 불안을 반영한다. 어떤 불안인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대량 해고, 비


정규 노동의 상례화에서 야기된 불안이다. 대중문화에서 이것은 괴물의 이미지로 재현 되고, 이에 맞선 피해자들이 등장한다. 괴물 이미지는 무엇을 가리키나? 괴물은 재앙에 맞서 함께 싸우는 피해자들 사 이의 수동적 연대가 투영된 이미지다. 종종 익살맞기도 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섬뜩함과 익살의 양가성은 무엇을 뜻하나? ‘희생자인 우리’가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경 합 중인 ‘냉소적 군중’이라는 사실이다. 박찬 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등장인 물들이 단적인 사례다.


<복수는 나의 것>이 보여 주는 섬뜩과 익살 의 양가성은 어떤 모습인가? 이 영화는 희극과 비극이 겹친 텍스트다. 사 회 성원이 집단적으로 모였을 때는 희극적이 지만, 개별적으로 분산되었을 때는 비극적 이다. 이들은 격투기를 관조하는 쾌락적 관 객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죽이는 격투의 당 사자다. 사회 비관인가? 그렇진 않다. 추함에는 두려움을 불결함, 익 살스러움, 숭고함으로 변형하는 힘이 있다. 이러한 변형에 의해 두려움으로부터의 방 어, 활력의 증대, 정의로운 실천이 주는 해방 감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그로테스크의 정


치성이 있다. 그로테스크의 정치성을 사회분석 방법으로 사용할 때 무엇을 얻을 수 있나? 소비주의자, 탈식민주의, 여성주의 같은 안 정된 지배 체제를 의미하는 ‘~주의’에 관한 분석은 많다. 그러나 정체성의 형성이 아니 라 해체와 혼종, 공황 효과, 지배질서의 일탈 과 무질서 같은 사회변동기 고유한 아이러니 에 접근하려면 그런 분석은 한계가 있다. 그 로테스크의 정치성 분석은 이 지점에서 새로 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 책,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은 무엇을 말 하는 책인가? 그로테스크에 관한 기존의 미학적 논의를 정 치학 측면에서 종합했다. 그로테스크 스타 일의 문학·미술·연극·영화·건축 영역 의 창작과 비평, 동시대 생명관리정치에 관 한 시사 비평, 성소수자·이주민노동자·비 행청소년·노인 등 ‘괴물’로 재현되는 주류 담론의 문화정치를 비판한다. 문학 비평에서도 의미가 있는가? 장정일의 <요리사와 단식가>라는 시를 보 라. 중산층 아파트 주민들 사이의 식인 사건 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1990년대 호황기 의 개인주의가, 자유롭고 풍요로운 겉모습


과는 반대로 자기 계발의 강박과 소비주의의 탐욕이 융합하여 생겨난 것임을 해부한다. 메르스를 대하는 생명관리정치는 어떤가? 마당극의 꼽추 춤이 연상된다. 춤추는 꼽추 는 관절이 따로 노는 산만한 몸짓과 분노한 채로 정지한 얼굴 표정을 결합시킨다. 무작 위로 번식하는 바이러스의 유동성과 비밀주 의를 고수하는 생명관리정책의 경직성이 만 나면서 풍자적 그로테스크를 생산하고 있다. 비주류의 문화정치는 어떻게 보는가? 빈민가 엽기 범죄를 다루는 주류 언론을 들 수 있다. 대중매체는 빈곤한 동네에서 발생 하는 토막 살인 같은 엽기 범죄를 정상세계


밖에 만연한 비정상세계의 사건 혹은 ‘산책길 의 개 배설물’처럼 묘사한다. 여기서 추함은 도시 중산층이 느끼는 두려움을 주변인들에 대한 배제와 추방의 관념으로 전환한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창우다. 문화평론가다.


불안정한 시대의 진단술 확실한 대상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꽤 확실한 편이다. 그러나 해체와 혼종, 공황 효과, 지배질서의 일탈과 무질서 같은 사회변동기 고유한 아이러니를 잡아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로테스크의 정치성에 물어볼 차례다. <마음의 상태>, 움베르토 보치오니, 1911


그로테스크의 정치학 이창우 지음 문화연구 2015년 5월 20일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26쪽 9,800원


작품 속으로

그로테스크의 정치학


추한 것이 즐거움을 주는 시대

다양한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두려워하면서도 더러워서 라고 서둘러 변명하는 것, 두렵기 때문에 재밌는 것, 두려 움에 비례해 비장함을 느끼게 하는 것 등이 있다. 산책길 에 무심코 밟은 개의 배설물, 꼽추 행세를 하는 괴팍한 춤 동작, 1980년 광주의 난자당한 몸 등을 생각해 보자. 이들 은 모두 추(醜)하다. 추함 때문에 두려운 대상을 우리 마 음의 경계 밖으로 내쫓아 버리거나, 박장대소하는 감상자 와 일체화하거나, 숭고함의 원천으로 규정한다. 추한 대 상은 확실히 두려움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그 요소를 즉각 다른 감정으로 바꾸는 작용 또한 포함한다. 추함은 두려 움을 변형하는 신비한 에너지를 내포하기 때문에 오래전 부터 문화 예술 장치를 구동하는 핵심 역할을 해 왔다. 21세기 이래로 한국 사회에서는 ‘추함의 운동’이 나날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 경향은 근본적으로는 1997년 외 환 위기 이후 상례화한 경기변동의 산물이다. 신자유주의 란 과거 같으면 불황기에나 발발했을 대규모 해고와 실업 사태를 ‘유연함’, ‘자기 계발’, ‘작은 정부’라는 이름으로 합


법화한 체제다. 대중매체는 ‘죽게 내버려진’ 빈곤한 동네 에서 발생하는 토막살인 등, 엽기적 범죄들을 ‘정상 세계’ 밖에 만연한 ‘산책길의 배설물’처럼 묘사한다. 여기서 추 함은 도시 중산층이 느끼는 두려움을 주변인들에 대한 배 제와 추방의 관념으로 전환할 것이다. 상층 엘리트가 자 신의 탐욕을 숨기지 않는 경향은 ‘꼽추 춤’과 유사하다. 골 프장의 상습적인 성폭행, 항공사 소유주의 기내 욕설, 수 배 중 변사체가 된 종교지도자의 골상학(骨相學) 프레젠 테이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권력 남용은 과거처럼 지위 의 횡포로 나타나지 않고, 생리적 약취와 해부학, 몸과 정 신의 기형으로 표현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그 추함으로 말미암아 공포의 대상에서 냉소와 비웃음의 대상으로 변 신한다. 세월호 침몰 관련 사건은 추함이 두려움을 숭고 함으로 변형하는 경우다. 해맑게 깔깔대다가 한순간에 몰 살한 세월호 학생들의 죽음은 그들을 연민하는 사람들에 게는 침몰 당시 느꼈을 공포로 의미화한다. 그들의 신체 는 추하지 않고 아름답다. 그러나 곧 그 신체는 추해진다. 사건의 진정한 원인 규명이 방기되고, 심지어 유가족까지 모함받음으로써, 모든 희생자는 물속에서 여전히 부패 중 인 실종자의 추한 신체 상태에 수렴한다. 유족들이 소리 를 지르고 머리를 깎는 것도 추해지는 것이다. 그 추함은


정의를 위한 실천의 욕구를 강력히 환기하는 것, 두려움을 숭고로 전환하는 작용을 한다. 대중매체로 넘어가면 추한 이미지에 관한 한국 사회의 애호 경향은 더욱더 두드러진다. 추함과의 유희는 1990년 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유례없는 번영을 지속했던 한국 영화 산업의 미적 견인차였다. 김지운, 박찬욱, 봉준 호 등 스타 감독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몸에 관한 잔혹한 묘사로부터 다양한 유형의 유머를 유도해 냈다. 서영채 (2005)에 따르면, 대중 영화보다 10년 먼저 문학 분야에서 는 장정일, 백민석, 김언희 등이 ‘역겨운 문학’의 계보를 형 성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시대착오적인 권 위주의적 가부장과 실없는 광대가 결합한 캐릭터가 인기 를 끌고 있다. 몇몇 유명 웹툰(webtoon)의 주인공은 욕을 마구 한다든가, 열패자(劣敗者)의 너저분한 형상을 함으 로써 독자들에게 오히려 격의 없고 다정한 캐릭터로 통용 된다. 요컨대 추한 것이 즐거움을 주는 시대다. 실제 사건 에서든 텍스트 내부에서든, 추한 즐거움은 유령처럼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문화적 기호로서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는 추함에 내장된 다양한 문화적 역능을 발굴 하고, 그 역능과 유희하는 예술적 표현 방식이다. 이 책은 그로테스크의 의미를 문화정치학 측면에서 해명하는 것 을 목적으로 한다. 그로테스크는 직관적 느낌으로 인식되 는 범주이므로 우선 감성적 측면을 간단히 점검해 보자. 그로테스크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이 뒤섞인 느 낌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단번에 잘 정의되지 않는 개념이 다. 그로테스크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알 수 없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이치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과장된 것, 추하고 이상한 것, 웃기면서 무서운 것 등을 기술할 때 적합한 용어다. 이 단어는 ‘숭고’나 ‘균제미’ 같은 고급 미 학 용어로 종종 이해되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 자주 사 용하는 ‘기괴하다’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로테스크의 감 각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몇몇 경험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음은 일상의 전형적인 세 가지 순간이다. 첫째, 그로테스크는 민속에 흔하다. 가령, 마을 진입로 에 수호신으로 세워 놓은 장승의 우락부락한 표정은 화난 듯하면서도 친근하고, 못생겼으면서도 재밌다. 나무 재질 과 투박한 조각 솜씨는 민간의 소박한 미학, 생산자의 건 강함, 농업공동체 특유의 우애를 상징하지만, ‘∼장군’이


라는 이름은 자신의 영험함을 입증하기 위해 백성 위에 군 림하는 국가, 군대의 권위에 의존함을 보여 준다. 민중적 인 것과 관료적인 것의 복합적 정체성은 장승에 그로테스 크한 느낌을 가져오는 원천이다. 둘째, 현대의 여가 문화에서도 그로테스크는 중요한 요 소다. 행락객들은 유원지의 궤도열차가 활강할 때, 혹은 유령의 집을 통과할 때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름 끼치는 느 낌, 환희의 웃음을 발산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경험을 엑 스플로이테이션 영화(exploitation film: 충격적인 소재로 관객에게 소구하는 저예산 영화)도 서비스해 준다. 관객 들은 연쇄살인마나 좀비의 식인주의 스펙터클에 오싹해 하면서도, 표현의 지나친 과장에 실소한다. 두려움과 결 합한 웃음, 추한 육체를 관조하는 매혹은 현대 오락 문화 의 중요한 부분이다. 셋째, 그로테스크는 실제로는 약자의 고통을 체계적으 로 생산하는 사회 시스템이 그 시스템의 효과적 운영을 위 해 고통을 감추는 장치를 함께 갖추고 있을 때 위선, 냉소, 환멸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호로 나타난다. 가령 고객 앞 에서는 편안한 표정을 짓지만 짐짓 열악한 노동의 피로에 신음하는 감정노동자들의 이중화한 감정 상태는 화려하 면서도 냉랭한 가면무도회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노골적


약취와 정중한 매너가 결합한 직장 문화, 한국 영화 <카 트>(2014)에서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손쉬운 해고 대 상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여사님”이라는 극존칭을 쓰 는 관습도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는 물론 예술 텍스트에서 사용되는 기호다. 그러나 그 기호는 미술사가나 문학평론가들의 담론에 국 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전통문화, 여가 및 노동 문화의 독특한 경험을 특정 매체의 문법에 맞게 표현한다.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에 접근하는 논점 그로테스크에 접근하는 이론적 방법은 다양하다. 각 방법 들은 그로테스크를 해명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를 하고 있 지만, 오늘날의 그로테스크를 문화정치적 관점에서 해명 해 주기에는 파편적인 한계를 갖는다. 16세기 파리 농민 공동체와 인문주의자들의 ‘웃음의 문화’를 표현하는 예술 양식으로 그로테스크를 해명하는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1984)의 논의가 있고, 수백 년에 이르는 그로테 스크의 예술사에서 관철되는 초지일관한 본질을 추출하는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 1966)의 역사주의적 논 의가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956)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80)는 각각 ‘두려움과 낯섦(uncanny)’, ‘비체(abject)’를 핵심어로 한 정신분석 프

레임을 적용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76)의 󰡔󰡔광 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는 어떤 것 을 그로테스크한 대상으로 지식 체계가 재현하고, 그것에 대해 사법당국이 처벌하는 지식 권력의 계보학을 근대사회 의 탄생사로 기술했다.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은 동시대 사회 성원들의 집단적 마음을 읽어 내는 것,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적 기호를 둘러싸고 정치적 태도들 사이의 경합과 연대를 해독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 시대의 예술이나 특 정 예술가의 주관적 정신세계가 아니라 동시대 문화다. 또한 특정한 사회집단에 국한된 문화가 아니라 여러 집단 의 목소리가 혼합된 대중문화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앞서 의 접근 방식은 각각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바흐친이 민중 문화의 강력한 이념형이나 유 토피아를 제시해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이른바 ‘사 실주의적 그로테스크’는 근대성의 때가 묻지 않은 지나치 게 천진난만한 텍스트에만 적합하다. 카이저의 논의는 계 승된 그로테스크 예술품들의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지만,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그로테스크의 본질적 정신


이 있다는 주장은 환상이다. 바흐친이 비판하듯이 카이저 는 400년간 생산된 그로테스크를 모더니즘으로 환원시킨 다. 정신분석 패러다임은 그로테스크를 해석하는 문제를 동시대의 특정하고 유동적인 정세로부터 유리시킨다. 또 한 권위자에게 사랑받기를 갈망하거나 호명당하는 것을 주체 형성의 전제로 삼음으로써, 패러다임의 수준에서 해 방적 주체 형성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경향이 있 다. 마지막으로 푸코의 논의는 질문 자체가 근대의 주류 관념인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변증법을 묻는 것이다. 하 지만 주류 관념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사회 일각 의 하위문화가 있을 수 있다. 푸코의 패러다임은 상이한 집단들마다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담론들 사이의 차이를 외 부에서 조망하기보다는, 정상 담론의 내재적 작동 메커니 즘을 규명하는 일에 충실한 것이다. 다채롭게 분산된 그로테스크의 해석학들이 더 높은 위 치에서 통합되어야 동시대 문화 해석에 쓸모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이 책이 제안하는 논점은 그로테스크를 사 회변동기에 갈등하는 여러 세력의 경험들이 교직(交織) 한 것, 곧 변동기 사회 형세에 관한 직관적 감각으로 파악 하자는 것이다. 불균등한 힘들의 세력 관계로 편성된 여 러 집단은 혼동 상황을 맞이해 동상이몽을 꿈꿀 것이다.


그로테스크가 표현하는 두려움과 익살, 추함과 숭고함, 친근함과 낯섦 등 복합적 감각은 부상을 준비하는 사회집 단이나 위기를 느끼는 지배 엘리트들의 정치적 상상력이 복잡하게 섞이면서 나타난다. 특정한 집단의 이해(利害) 를 전일적(全一的)으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그로테 스크를 설명하는 데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로테스크는 안정된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형화한 의식 체계가 잠식되는 상황, 지배 이데올로기가 손상되고 균열 된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물론 특정 집단의 정치적 태도를 대변하지만, 자신의 진영이 세계 전부를 차 지하거나, 반대로 세계로부터 소멸할 것이라는 극단적 자 의식을 갖고 있다. 주어진 위계 안의 위치가 아니라 혼돈 으로부터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경험의 표현이 중요하다. 요컨대 그로테스크는 기존의 이데올로기 체계가 손상되 는 정세에서, 지위의 변동을 겪는 여러 집단의 정치적 상 상들을 과거로부터 답습된 적합한 예술형식을 빌려 무섭 거나 유희적인 목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세 가지 핵심어와 그 이론적 자원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의 논점은 ‘사회변동’, ‘축제성’, ‘군중’ 이라는 세 핵심어와 관련되어 있다. 세 용어는 서로 강력


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에 관한 논의는 나름의 이론적 자원을 갖는다. ‘사회변동’은 역사의 문제다. 그것은 신체 와 언어가 파편화하는 경험을 해석하는 준거다. ‘축제성’ 은 미학의 차원이다. 그것은 파편적 경험이 소통 가능해 지도록 활용되는 문화 자원이다. ‘군중’은 정치학의 문제 다. ‘사회변동’과 ‘축제성’ 사이의 상관관계는 군중의 운동 을 포착하고 의미화하는 특정한 정치적 지향성에 매개된 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회변동’의 경험은 그로테스크가 표현하는 언어적· 신체적 파편화를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그로테스크에 관한 정치적 접근은 규정된 이데올로기 체계로 분석할 수 없다는 태생적 특징을 안고 있다. 혼돈을 찬미하는 경향과 두려워 하는 경향, 기존 질서로 반동을 원하는 경향과 대안 질서를 구축하려는 경향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는 정세의 미학적 표 현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1965)가 󰡔󰡔기나긴 혁명(Long revolution)󰡕󰡕󰡕등에서 제시한 ‘감정 구조(structures of feeling)’에 관한 논의는 사 회변동기의 유동적 경험에 토대한 문화연구라는 점에서 중 요하다. 그는 19세기 영국 대중소설의 분석 사례를 통해, 지배 질서가 강요하는 ‘윤리’와 사회 성원들이 실제로 겪 었던 ‘경험’ 사이의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 예술적 ‘마술’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972) 의 ‘성좌 구조(constellation)’ 개념도 혼돈의 경험이 창의 적 실천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성좌

구조는 듣기에 아름다운 어감이지만, 󰡔󰡔독일 비애극의 원 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에서 베냐민 은 절단되어 널브러진 인체들의 알레고리(allegory)로부 터 대안적 세계에 관한 명상의 소재와 자극을 얻을 수 있 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사회변동기의 혼돈스러운 경험, 무질서와 질서의 길항작용은 그로테스크를 낳는 근본 조 건이다. ② ‘축제성’은 축제의 역사적 경험이 미술이나 문학으 로 옮겨 가 관습화한 것이다. ‘축제성’은 그로테스크의 근 본적인 문법적 특징들-상반된 이미지의 조합, 과장되거 나 전도된 표현, 불결함·식사·출산·주검 등 여러 생리 적 표현-의 기원이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바흐친이 이 논의의 가장 유력한 권위자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그로테스크가 표현하는 ‘축제성’은 대부분, 선하고 명랑하다기보다는 악하고 음산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 요가 있다. 축제성은 원래 중세 교회 권력에 대한 전복으 로 나타났지만, 현대에 이르러 또다시 어두운 쪽으로 전복 되고 있다. 따라서 바흐친의 연구서들 외에, 아놀드 하우


저(Arnold Hauser, 1990)의 ‘매너리즘(mannerism)’의 역 사에 관한 논의와 그 밖에 르네상스 이후의 그로테스크에 관한 다양한 분석들이 원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로테 스크 정치학의 미학적 측면에서 볼 때 ‘축제성’과 ‘축제성’ 의 역사적 변용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③ ‘군중’은 법과 제도가 견고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안 정된 사회에서는 결혼식장이나 버스정거장 근처에서 발 견할 수 있지만, 사회변동기에는 훨씬 정치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또한 군중의 운동은 정적(政敵)의 마네킹을 태우 는 시위나 2008년에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모 인 촛불시위 군중에서 종종 발견되듯이 축제적 성격을 띤 다. 그러나 그로테스크의 화자가 군중 운동에 대해 서 있 는 위치, 즉 시점(視點)의 다양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권력 위계나 세력 관계의 지도 안에서 화자가 차지하는 위상에 따 라, 군중에 관한 경험을 그로테스크 텍스트 내부의 상상으로 번역한 양상은 판이해질 것이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82)의 ‘희생양’ 이론,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98; 2005)의 ‘예외 상태(exceptional state)’와 ‘호모 사케 르(Homo Sacer)’에 관한 논의는 사회변동과 군중 동태의 상관관계에 관한 논의의 자원이다. 그로테스크의 정치학 에서 사회변동과 축제성의 범주는 군중의 운동이라는 범


주에서 합류한다. 미학적 재현은 역사 상황의 참조를 거 쳐 군중 정치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한다.

열 가지 아이템들 1장에서 10장까지는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 다. ① 총론, ② 그로테스크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 ③ 기 존 논의를 통합하는 정치학적·미학적 준거, ④ 정치학의 관점에 따른 그로테스크의 분화로 나뉜다. 1장과 2장은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에 관한 총론이다. 1 장은 사회변동과 군중운동과 축제(및 축제의 변주) 사이 의 논리적 연결을 개괄한다. 논리적 측면에서 총론을 설 명하는 장이다. 2장은 그로테스크의 계보를 간략히 개괄 한다. 그로테스크는 동시대의 정세와 화자의 정치적 태도 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승된 그로테 스크의 예술 형식에도 영향을 받는다. 역사적 측면에서 총론을 설명한다. 3장, 4장, 5장은 그로테스크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을 각 각 축제성, 숭고성, 비정상성이라는 핵심어와 관련지어 유형화한다. 그로테스크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 여러 갈래 로 분산되어 있는데, 분산의 일차적 원인은 실제로 그로테 스크가 주는 느낌이 축제적인 것, 숭고한 것, 비정상적인


것으로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갈 래의 관점을 존중하고, 해당 관점을 검증하는 전형적인 텍 스트를 예시할 필요가 있다. 세 장 모두의 마지막 부분에 는 그로테스크에 관한 각각의 예술 담론이 갖는 의의와 한 계를 평가해 놓았다. 6장, 7장은 그로테스크에 관한 분산된 기존 논의를 통 합할 수 있는 더 높은 발판을 확보하는 이론적 작업이다. 6 장에서는 모든 유형의 그로테스크에 대해 원체험(原體驗) 이라고 할 괴물 이미지가 상상되는 과정을 사회변동의 경 험과 관련해 해명한다. 지라르와 아감벤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괴물이 ‘희생양-국조(國祖)’에서 ‘호모 사케르- 주권자’로 발전해 가는 경로를 볼 수 있다. 7장은 그로테 스크가 괴물이 활동하는 시공간을 나타내는 ‘근원적 세계’ 개념을 탐색한다. 중세의 지옥 이미지에서 변주해 온 근 원적 세계는 이후 장들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유형의 그로 테스크들이 그로부터 균열되고 산출되는 시공간이다. 6 장이 정치학적 논의라면 7장은 미학적 논의다. 8장, 9장, 10장은 각각 화자가 군중 권력의 능동적 시점 에 서 있는가, 군중 권력에 적대하는 수동적 시점에 서 있 는가, 능동과 수동이 교착하는 시점에 서 있는가에 따라 상이한 그로테스크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인다. 이 세 장


은 군중, 타자, 화자가 맺는 정치적 역학의 변화에 따라 분 화한다. 3장의 축제성은 8장의 능동적 시점과, 4장의 숭고 성은 9장의 수동적 시점과, 5장의 비정상성은 10장의 교 착적 시점과 대응 관계를 갖는다. 3, 4, 5장이 미적 표현에 기초한 예술 담론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것이라면 8, 9, 10 장은 기존의 담론을 사회변동기 군중 정치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이 갖는 의의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에 관한 논의가 갖는 의의는 세 측면 에서 정리할 수 있다. 세 측면이란 실천적 측면, 문화연구 의 측면, 미학적 측면이다. 첫째, 실천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축제가 본격적인 시위 양식으로 도입된 것은 효순·미선 추도집 회가 있었던 2002년 이후다. 이 경향은 2008년 광우병 쇠 고기 수입 반대 시위까지 온건하고 유희적 특성을 일관되 게 유지해 왔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패배 이후 진보적 이거나 보수적인 측을 막론하고 순수하게 축제적인 성향 은 ‘축제적 그로테스크’의 성향으로 바뀌었다. 몇 년 전에 유행한 진보적 성향의 인터넷 방송 <나꼼수>와 ‘일베’라는 보수적 성향의 인터넷 동호회는 욕을 하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정적(政敵)을 비천하게 패러디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잔혹함을 포함하는 즐거움이 정치투쟁의 새로운 코드로 부상한다. 반면에 전통적인 진보진영은 이항 대립 의 엄숙한 패러다임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집단들이 그 안에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그로테스크라는 문화 기호는 부상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적절한 연구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그로테스크 의 정치학은 많은 대중이 이미 참여하고 있지만, 적합한 이름조차 갖지 못한 최근의 흐름을 의식적 탐구의 대상으 로 상정하는 의미가 있다. 둘째, 문화연구 측면에서 기성 문화연구 대다수는 소비 주의든, 소수자 인권이나 탈식민주의에 관련된 것이든 자 발적 예속의 체제에 관한 연구였다. 이 연구들의 공통점 은 지배 체제의 상대적 안정성과 민중 혹은 하위 집단들의 수동성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편재한 긍정성과 예속된 군 중이 짝지어진 상황에서 연구의 초점은 체제의 요구대로 사회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그러 나 21세기 이후 한국 상황에는 정치경제적 불안과 위기의 식이 편재해 있다. 혼란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사회집단들 에 역동적 능동성을 부여하는데, 불행히도 앞장서서 능동 화하는 군중은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파시즘적 군중에


더 가까운 쪽이다. 현시점은 기존 문화연구가 토대한 68 혁명 이후 1970년대 서구 지식인들의 자각보다는 자유주 의 체제의 위기와 함께 유럽 전체에서 파시즘 애호가 상승 했던 1차 세계대전 전야에 더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시급 하게 해명해야 할 연구 대상은, 정체성의 형성이 아니라 차라리 정체성이 기괴한 쪽으로 해체하는 작금의 경향이 다. 또한 다양한 지배규범에서 체제의 전환이라든가 경기 변동이 대중의 삶에 미치는 효과 등으로 연구의 초점이 옮 겨 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에는 문화연구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는 의의가 있다. 셋째, 미학적 측면과 관련해서는 바흐친, 카이저의 그 로테스크 담론이나 푸코의 ‘비정상인’, 프로이트의 ‘언캐 니(uncanny)’에 관한 논의는 종종 기존 문화연구에서 원 용되어 왔지만, 편의에 따른 부분적 인용에 그쳤다. 문화 연구, 예술사, 정신분석이라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 안에 서 논의되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관련성은 탐색되지 않 았다. 그런데 그로테스크의 정치학은 동일한 사회 상황에 서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의미로 재현된 괴물의 여러 면 모를 탐색하는 논의를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그로테스크 에 관한 기존의 여러 예술 담론이 함축하는 사회 역사적 상황을 복원하고, 정치화함으로써 나뉘었던 그로테스크


담론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사회변동기의 문화라는 구심점에서 각종 그로테스크 관련 이론을 수렴 한 것은 그로테스크 정치학의 논의가 갖는 미학적 의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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