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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분명히 있다 살해되었으니 살해한 자가 있다. 그러나 찾지 못한다. 진실은 있지만 찾을 수 없고 찾아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진실은 알기 어렵다는 생각에 김광림은 이 작품을 썼다. 그래도 범인은 분명히 있다.

연극 ‹날 보러 와요›(연출 변정주)가 아트센터K 세모극장에서 7월 9일부터 8월 24일까지 공연된다.


인텔리겐치아 2105호, 2014년 7월 3일 발행

여름 희곡 4. 김광림의 ≪날 보러 와요≫ 김 형사 잘 생각해 봐, 정인규. 바로 며칠 전 일이야. 비 오던 날 말이야. 네가 신청한 곡이 나온다. 미현이 얼굴을 떠올린다. 넌 서서히 흥분되 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까 8시 20분. 넌 마 음이 급해졌어. 8시 반이면 미현이가 뚝방 을 건너니까. 라디오를 끄고 방 불도 끄고 넌 몰래 집을 빠져나온다. 빗속을 있는 힘을 다 해 달린다, 뚝방까지. 뚝방 아래 숨어 미현이


를 기다리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뚝방 저쪽 끝 어둠 속에 미현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 다. 우산을 받고 오고 있다. 빗소리에 섞여 찰 박찰박 미현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가슴 이 뛴다. 숨이 가쁘다. 하지만 이 벅찬 가슴을 눌러야 한다.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는. 드 디어 미현이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이때다. 뛰어올라 뒤에서 미현이를 덮친다. 미현이는 너무 놀라 소리 한번 질러 보지 못하고 너의 포로가 된다. 미현이를 뚝방 아래 미리 봐 둔 장소까지 끌고 간다. 제대로 반항도 못 하면 서 허우적거리는 미현이의 명치 부분을 정확 하게 가격한다. 비를 맞으며 땅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는 미현이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난폭하게 옷을 벗긴다. 어둠


속에서 미현이의 알몸이 뽀얗게 빛난다. 실 신한 상태에서도 미현이는 버둥거리며 몸을 웅크린다. 얼마간의 반항은 괜찮지. 오히려 즐거움을 더해 주니까. 미현이의 여린 살을 혀로 핥아 낸다. 속살의 따스함과 빗물의 차 가움이 동시에 혀로 전해 온다. 이 쾌감!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젖꼭지. 이빨로 꽉 깨물어 주 고 싶지만 치흔을 남겨서는 안 된다. 허리띠 를 끄르고 바지를 내린다. 그리고 네 물건을 미현이의 거기에 문질러 댄다. 힘껏 더 힘껏. 그렇게 안간힘을 쓰지만 절정의 그 순간이 오 기도 전에 망할 놈의 물건이 쪼그라들고 만 다. 추위도 공포도 아닌 어떤 기억 때문에. 너 를 괴롭혀 오던 열등의식. 미현이가 두 팔로 밀쳐 내는 순간 그놈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


다. 두 팔로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기를 바랬 는데… 빌어먹을! 손을 더듬거려 스타킹을 찾는다. 검정색 스타킹이 미현이의 흰 목을 감는다. 세게 당긴다. 아주 세게. 있는 힘을 다해서. 미현이는 사지를 버둥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지고 만다. 차갑게 식어 가는 시체를 눕혀 놓고 다시 한 번 해 본다. 안 된다. 화가 난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미현이의 가방 을 뒤져 필통에서 연필깎이 칼을 꺼낸다. 미 현이의 가슴에 엑스 자를 긋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배에도 허벅지에도 미친 듯 엑스 자를 그어 댄다. 비가 미현이의 살갗을 계속 씻어 내리는데도 벌써 미현이의 몸은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되어 있다. 나쁜 년! 나를 밀쳐 내? 그 까짓 구멍이 뭐라구? 넌 우산을 들어 그걸 미


현이의 몸 깊숙이 밀어 넣는다. (김 형사가 이 말을 하는 도중 정인규는 이를 계속 부인하다가 나중에 가서 그 부인은 범행 을 시인하는 혹은 참회하는 듯한 울음으로 바 뀐다.) 김 반장 (음악을 끄며) 자, 이제 말해 봐. 어차피 넌 못 빠져나가. 혈액형은 이미 B형으로 확인이 됐 고 이제 DNA 감식 결과가 나온다. (울고 있 는 정인규에게) 다 털어놔, 사실대로. 털어놓 고 나면 시원할 거야. - ≪날 보러 와요≫, 김광림 지음, 132∼135쪽


강간 살해 사건인가? 그렇다, 연쇄 살인이다. 가장 절망적인 장면 이다. 열네 살 소녀가 잔인한 방법으로 강간, 살해당했다. 정인규가 용의자인가? 살인이 있던 날 밤마다 한 라디오 프로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내보냈는데, 모두 정 인규가 신청한 것이었다. 혈액형과 유전자는 어떻게 획득했는가? 박 형사가 사건 현장에서 흙을 채취해 왔다. 모두가 매달린 끝에 모근이 붙어 있는 체모를 찾아냈다. 범인의 것으로 추정한다. DNA 감 식 결과만 확인하면 된다.


잡았나? 못 잡는다. 정인규와 체모의 DNA가 일치하 지 않았다. 또 다른 용의자는 누구인가? 이영철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지만 증거 부족 으로 풀려났고, 남현태는 꿈과 현실을 혼동 하는 것 외에 별다른 혐의점이 없다. 목격자가 있을 것 아닌가? 첫 번째 용의자였던 이영철이 목격자일 확률 이 높았다. 진범이 아닌데도 자신이 저지른 일처럼 범행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 다. 평소 관음증이 있었다던 친구의 증언도 그가 목격자일 확률을 높여 준다.


이영철이가 범인을 봤을 것 아닌가? 심문 이후 완전히 미쳐서 동네를 휘젓고 다니 다가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 연극은 세 용의자를 같은 배우가 연기하도 록 설정했다. 왜 이랬나? 같은 사람이 용의자로 등장해도 형사들이 이 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연극적 패러독스다. 당신은 이 작품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수사극인데 끝까지 범인을 못 잡았다. 죽은 사람이 있으니 범인이 있을 것이다. 범인이 진실을 상징한다면 ‘진실은 있지만 찾을 수 없다, 찾아도 알 수 없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떠올렸다. 결국 ‘진실은 알기 어렵다’는 얘기 를 하고 싶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인가? 그렇다.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을 때는 화성경찰서에 여전히 수사 본부가 남아 있었다. 그때는 사정이 어땠나? 오랫동안 범인이 잡히지 않아 막막한 때였 다. 실제로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DNA 검 사에서 범인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 형사들 이 큰 충격을 받았다. 제목이 왜 <날 보러 와요>인가? 중의법이다. 우선 당시 하도 연극 관객이 없 어서 나 김광림이 하는 연극 좀 보러 오라는 뜻이었다. 또 혹시 범인이 객석에서 이 공연


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런 제목을 붙 였다. 연극 보고 형사들이 뭐라고 했나? 엘리트로 나오는 김 형사는 가공의 인물이 고, 박 형사와 김 반장은 실제 형사를 모델로 했다. 이들이 초연을 보고 자신들의 애환을 잘 표현했다며 배우들에게 술을 샀다. 언제 초연했나? 1996년에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직접 연출을 맡아 공연했다. 이 공연으로 제20회 서울연 극제 작품상, 연기상, 인기상을 수상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광림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 과 교수다. 어떤 작품을 썼나? 놀이의 여러 형식을 연극적으로 표현한 작품 을 비롯해, 실험정신이 충만한 작품을 다수 썼다. 대표작은 무엇인가? <홍동지놀이>, <사랑을 찾아서>, <우 리나라 우투리>가 있다.


범인은 분명히 있다 살해되었으니 살해한 자가 있다. 그러나 찾지 못한다. 진실은 있지만 찾을 수 없고 찾아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진실은 알기 어렵다는 생각에 김광림은 이 작품을 썼다. 그래도 범인은 분명히 있다.

연극 ‹날 보러 와요›(연출 변정주)가 아트센터K 세모극장에서 7월 9일부터 8월 24일까지 공연된다.


날 보러 와요 김광림 지음 한국 희곡 2014년 2월 13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54쪽 10,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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