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20140718 p

Page 1

공수의 형세 전장에서는 군율이 우선이고 정치에서는 인의가 먼저다. 나라를 세울 때는 전쟁이 우선이고 지킬 때는 정치가 먼저다. 형세의 오름과 내림을 알지 못하면 법이 있어도 법이 아니다.

≪고성현상전략(古聖賢像傳略)≫의 삽화 <가태부상(賈太傅像)>, 19세기 초


인텔리겐치아 2129호, 2014년 7월 18일 발행

제헌절 특집 고전 5. 장현근이 옮긴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한 필부가 난을 일으켜 나라를 뒤엎고 천자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해 천하의 웃음거 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의의 정치가 행해지지 않아 공수의 형세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一夫作難而七廟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義不施, 攻守之勢異也. - ≪신서≫, 가의 지음, 장현근 옮김, 31쪽


어느 나라 얘긴가? 진나라다. 진나라가 인과 의가 없어 망했는가? 그렇다. 인의를 근본으로 삼는 왕도 정치를 버리고 폭력과 기만에 기초한 법치주의를 택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이 가의의 분 석이다. 공수의 형세가 달라졌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천하를 제패할 때와 나라를 다스릴 때는 방법 을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나라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잠재우고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진시황과 진2세는 자만에 빠져 민심 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폭정을 일삼았


다. 결국 진섭이 난을 일으키고 유방이 진2세 를 죽여 15년 만에 멸망에 이르렀다. 한나라 사람이 진나라의 흥망을 이야기하는 까닭이 뭔가? 한나라 문제가 진나라를 반면교사 삼아 어진 정치를 베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진 정치인가? 이 글 <과진론(過秦論)>은 다음과 같이 끝 을 맺는다. “군자는 나라를 다스릴 때 상고의 역사를 관찰하고, 당시의 사정을 증험하며, 인사 제도의 득실을 검증하고, 국가 흥망성 쇠의 이치를 고찰하며, 권세가 마땅한지를 자세히 살펴서 정책의 거취에 질서를 잡고,


변화가 시세에 입각해 이루어지도록 한다.” 어진 정치의 구체 방안을 내놓았는가? 국가의 안정을 위해 천자의 권위를 강화하고 제후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 기 위해서 천자와 제후의 복식·녹봉·호칭 등을 구별하고, 제후에게 주는 봉지를 분할 해 소규모 제후국을 여럿 두는 방법을 제안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도 제시하는가? 군주가 모범을 보여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 부득이 벌을 내릴 때는 신중해야 한다. “무고 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차라리 죄 있는 사 람을 놓치는 것이 낫다”고 썼다.


한나라는 가의의 주장을 실천했는가? 한나라가 유가적 민본 사상에 입각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자리 잡는 데 가의의 주장이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생존 당시에는 훈구 대신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훈구 대신은 왜 그를 반대했는가? 어린 나이에도 자신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그를 시기했다. 자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 려는 개혁 사상을 곱게 볼 수 없었다. 가의는 누구인가? 한나라 초엽의 천재 사상가이자 당시 가장 유 명했던 정치 이론가다.


왜 그를 천재라 불렀는가?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났고 유가를 비롯해 법가·도가·묵가·음양 등 제자백가 사상 에 정통했다. 하남 태수 오공의 문하에 있다 가 그의 추천으로 문제 때 박사가 되었는데, 불과 20세였다. 조칙을 의논할 때마다 물 흐 르듯 대답해 문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박사가 된 지 1년 만에 태중대부까지 올랐다. 문제는 그를 어떻게 운영했나? 그를 공경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훈구 대 신은 그를 참소했고 24세에 좌천되었다. 거기가 끝인가? 문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뒤에 문제의


막내아들 양회왕 유읍의 태부가 되었다. 유 읍이 낙마해 죽자 슬퍼하다 이듬해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신서≫는 어떤 책인가? 새로운 국가 건설의 격동기에 치안에 대한 생각과 정치적 아이디어가 가득한 한나라 초 정치철학의 압권이다. 문경지치(文景之 治)를 통해 한나라 문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글 56편이 실려 있다. 정치학 교과서인가? 그렇다. 모든 정치적 판단을 백성의 입장에 서 행하라는 민본의 참 의미를 깨우쳐 준다. 백성이 왜 국가의 목숨인지, 현명한 정치가


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얼마나 어떻게 뽑아 옮겼나? 가의의 정치사상이 잘 녹아 있는 것으로 평 가되는 권1 열한 편, 권2 다섯 편, 권9 네 편 을 뽑아 모두 옮겼다. 당신은 누구인가? 장현근이다.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다.


공수의 형세 전장에서는 군율이 우선이고 정치에서는 인의가 먼저다. 나라를 세울 때는 전쟁이 우선이고 지킬 때는 정치가 먼저다. 형세의 오름과 내림을 알지 못하면 법이 있어도 법이 아니다.

≪고성현상전략(古聖賢像傳略)≫의 삽화 <가태부상(賈太傅像)>, 19세기 초


신서 가의 지음 장현근 옮김 사회과학 2011년 1월 21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200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新書 신서


권1


1. 과진(過秦) 상 사세(事勢)1): 진나라의 과실 /상

해제

이 편은 진 왕조 멸망 원인을 분석해 한(漢) 문제(文帝)에게 어진 정치를 권하는 글이다. 인의의 정치를 시행해 오래도 록 안정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진나라 효공(孝公)2)은 효산(殽山)3)과 함곡관(函谷關)4)의 견고한 요새를 차지하고 옹주(雍州)5) 땅을 끌어안아 군주

1) 어떤 판본이든 ≪신서≫의 편명 뒤에 작은 글씨로 “사세(事勢)”, “연어(連 語)”, “잡사(雜事)”란 표시가 붙어 있다. 사세라고 붙어 있는 것은 시대 정치에 대한 의견 위주고, 연어라고 붙어 있는 것은 예법 및 제도에 대한 견해, 잡사라 고 붙어 있는 것은 역사 이야기 및 분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다. 언제부터 표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편의 순서에 따라서 32편(어떤 판본 은 28편)에는 “사세”, 18편에는 “연어”, 8편(어떤 판본은 3편)에는 “잡사”라고 붙어 있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으므로 이하 번역에선 모두 생략한다. 2) 효공: 서기전 356년 초현령(招賢令)으로 법가 인물 공손앙[公孫鞅: 나중 상(商)에 봉해졌으므로 상군(商君) 또는 상앙(商鞅)으로도 불림]을 임용해 두 차례 변법에 성공함으로써 낙후한 진나라를 일약 최강국으로 만든 인물. 3) 효산: 오늘날의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닝(洛寧) 지역. 4) 함곡관: 오늘날의 허난성 링바오(靈寶).

21


와 신하가 굳건히 지킴으로써 주 왕실을 넘보았다. 천하를 석권하고 세상을 몽땅 들어 사해(四海)를 주머니에 담을 통 일의 뜻과 팔방 제후들의 땅을 집어삼킬 마음이 있었다. 이 때에 상앙(商鞅)이 그를 보좌했는데 안으로 법도를 세워 밭 갈이와 베 짜기에 온 힘을 쏟도록 하고 수비 작전의 설비를 가다듬었으며, 밖으로 연횡(連橫)6)을 통해 제후들끼리 다 투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진나라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서하(西河)7) 바깥 땅을 얻게 되었다.

秦孝公據殽函之固, 擁雍州之地, 君臣固守以窺周室, 有席 卷天下, 包擧宇內, 囊括四海之意, 幷呑八荒之心. 當是時 也, 商君佐之, 內立法度, 務耕織, 修守戰之具; 外連衡而鬪 諸侯. 於是秦人拱手而取西河之外.

5) 옹주: 고대 중국 구주(九州)의 하나로, 진나라가 원래 봉해졌던 곳. 오늘날 의 산시성(陝西省)·간쑤성(甘肅省) 및 칭하이성(靑海省) 동부 지구. 6) 연횡: 전국 7웅(七雄)의 경쟁 시대에 서쪽의 강한 진나라와 동쪽의 나머지 여섯 나라 사이에 벌어진 외교적 권모술수를 이르는 말. 연횡 또는 연형(連衡) 은 각 나라가 진나라와 독자적인 관계를 맺어 다른 나라를 공격해 자국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고, 합종(合縱)은 6국이 연합해 진나라에 대항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찾으려 한 것이다. 7) 서하: 당시 위(魏)나라 황하 서쪽 지역으로, 오늘날의 산시성 이촨(宜川) 일대.

22


효공이 죽은 뒤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양왕(昭襄 王)이 효공의 옛 사업을 이어받고 전해 오는 정책을 받들어

남쪽으로 한중(漢中)8)을 취하고, 서쪽으로 파(巴)와 촉(蜀)9) 을 얻었으며, 동쪽으로 제후들의 비옥한 땅을 빼앗고, 북쪽 으로 [흉노 땅에 가까운] 중요한 군들을 접수했다. 제후들은 두려웠고 회맹(會盟)을 통해 진의 약화를 꾀했다. 그들은 진귀한 기물, 중요한 보배, 비옥한 땅을 아끼지 않고 천하의 명사를 불러들였으며, 합종을 통해 교류를 맺고 서로 연합 해 하나가 되었다. 이때에 제(齊)나라엔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엔 평원군(平原君), 초(楚)나라엔 춘신군(春申 君), 위(魏)나라엔 신릉군(信陵君)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10) 이 네 명의 군은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 성 실한 믿음이 있었으며, 너그럽고 후하면서 백성을 사랑했으 며,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들을 중시했다. 합종을 약속해 진

8) 한중: 오늘날의 산시성 남부 한수이(漢水) 유역. 9) “파”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 동부와 충칭시(重慶市)고, “촉”은 오늘날 의 쓰촨성 피현(郫縣). 10) 제나라 귀족 맹상군 전문(田文), 조나라 공자 평원군 조승(趙勝), 초나라 영윤 춘신군 황헐(黃歇), 위나라 공자 신릉군 위무기(魏無忌)는 모두 현인을 존중하며 전국시대 후반을 장식한 탁월한 재상들이었다.

23


나라와의 연횡을 끊으니 한, 위, 연, 조, 송(宋), 위(衛), 중산 (中山)국의 대중이 두루 뭉쳤다. 여기에서 6국의 뛰어난 선

비로 영월(甯越),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 등11)

은 합종을 위해 계책을 도모하고, 제명(齊明),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골(召滑), 누완(樓緩), 적경(翟景), 소려(蘇

厲), 악의(樂毅)의 무리12)는 그 의미를 두루 보급했으며, 오

기(吳起), 손빈(孫臏), 대타(帶佗), 예량(倪良),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의 무리13)는 그 병사들 을 제어했다. 그들은 일찍이 열 배의 땅과 백만의 군대로 함 곡관을 우러러보며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관 문을 열고 적을 맞아들이니 9국의 군대가 머뭇거리며 감히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진은 화살 하나, 살촉 한 개 버리

11) 모두 합종해 진에 항거할 것을 주장한 인물로 영월은 조나라 농민 출신, 서 상은 송나라 사람, 동주 낙양 사람 소진은 6국 재상의 인수를 잡고 15년 동안 진이 동쪽을 넘보지 못하게 한 사람, 두혁은 동주 사람이다. 12) 제명은 동주의 신하, 주최는 동주의 공자, 진진은 초나라 회왕(懷王)의 모 사, 소골도 초나라 모사, 누완은 조나라 사람으로 위나라 재상을 지냈고, 적경 은 위나라 사람, 소려는 소진의 동생으로 제나라 신하, 악의는 중산국 사람으 로 연나라의 명장이다. 13) 오기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위 문후(魏文侯)의 장수가 되어 진에 대승을 거둔 군사전략가, 손빈은 ≪손자병법≫을 쓴 손무(孫武)의 후예로 제나라 장 수, 대타는 초나라 장수, 예량은 조나라 장수, 왕료와 전기는 모두 저명한 제나 라 장수, 염파와 조사는 모두 조나라 장수로 진을 크게 패퇴시킨 명장이다.

24


지 않았는데도 천하는 벌써 곤경에 빠진 것이다. 그리하여 합종은 흩어지고 맹약은 무너져 서로 다투어 땅을 떼어 진 에 바쳤다. 진은 그러고도 남은 힘이 있어 피로를 다스리며 도망하는 패잔병들을 몰아붙이니 엎드린 시체가 백만이요, 흐르는 피에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유리한 형세와 기회 를 타고 천하의 분할을 주재하고 산하를 갈라 쪼개니 강국 들은 자청해 복종하고 약국들은 입조하기에 이르렀다.

孝公旣沒, 惠文‧武‧昭襄蒙故業, 因遺策, 南取漢中, 西擧巴 蜀, 東割膏腴之地, 北收要害之郡. 諸侯恐懼, 會盟而謀弱 秦, 不愛珍器重寶肥饒之地, 以致天下之士, 合從締交, 相 與爲一. 當此之時, 齊有孟嘗, 趙有平原, 楚有春申, 魏有信 陵. 此四君者, 皆明智而忠信, 寬厚而愛人, 尊賢而重士, 約 從離衡, 兼韓‧魏‧燕‧趙‧宋‧衛‧中山之衆. 於是六國之士, 有甯 越‧徐尙‧蘇秦‧杜赫之屬爲之謀, 齊明‧周最‧陳軫‧召滑‧樓緩‧翟 景‧蘇厲‧樂毅之徒通其意, 吳起‧孫臏‧帶佗‧倪良‧王廖‧田忌‧廉 頗‧趙奢之朋制其兵. 嘗以十倍之地, 百萬之師, 仰關而攻秦. 秦人開關延敵, 九國之師逡巡而不敢進. 秦無亡矢遺鏃之費, 而天下已困矣. 於是從散約敗, 爭割地而賂秦. 秦有餘力而 制其弊, 追亡逐北, 伏尸百萬, 流血漂櫓, 因利乘便, 宰割天 下, 分裂山河, 疆國請服, 弱國入朝.

25


이어서 효문왕(孝文王)과 장양왕(莊襄王)은 재위 기간이 일천해14) 나라에 큰일이 없었다.

施及孝文王‧莊襄王, 享國之日淺, 國家無事.

시황(始皇) 대에 이르러 위로 6대의 남은 업적을 발휘하고 긴 채찍을 떨쳐 천하를 제어하게 되었다. [동주와 서주] 두 주나라를 삼키고 [황제라는] 지존의 위치에 올라 천지 사방 을 다스렸으며, 길고 짧은 곤장을 잡고 천하를 채찍질하니 그 위엄이 사해에 떨치었다. 남으로 백월(百越)15)의 땅을 취해 계림(桂林)과 상군(象郡)16)을 삼았고, 백월의 군주는 머리를 구부리고 목을 내밀어 진나라에 목숨을 맡긴 하급 관리가 되었다. 이에 몽염(蒙恬)17)에게 북으로 장성을 쌓

14) 소양왕의 아들 효문왕은 즉위 3일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장양왕은 단 3년 재위했을 뿐이다. 15) 백월: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인 회계(會稽) 땅을 월(粵)이 라 하는데, 이 지역은 고대에 월(越)이라 불렀기 때문에 ‘粵’과 ‘越’을 같은 것 으로 본다. 곧 회계에서 교지(交阯)까지, 즉 오늘날의 저장성·푸젠성(福建 省)·광둥성(廣東省)·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흩어진 민족들의 총칭을 ‘백월’이라 했음. 16) 계림은 오늘날의 광시좡족자치구에 있는 구이린을 말하며, 상군은 광시 의 충쭤(崇左) 일대를 말함.

26


고 변방을 지키게 했으며, 흉노를 7백여 리 밖으로 몰아내 버렸다. 오랑캐들은 감히 남하해 말을 놓을 수 없었으며, 무 사들은 감히 활에 화살을 메워 당겨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왕의 [인의의] 도를 폐기하고 제자백 가의 언어를 불태움으로써 검은 머리 [백성들을] 어리석어 지도록 했다. 이름 있는 성을 무너뜨리고 호걸들을 죽였으 며, 천하의 병기를 거둬 함양(咸陽)18)에 모아 놓고 칼날과 화살촉을 녹여 금속 인간 12명을 주조함으로써 천하 백성들 의 무력을 약화시켰다. 그런 뒤 화산(華山)을 밟고 성을 둘 렀으며, 황하를 가지고 [성을 보호하는] 해자(垓子)로 삼았 다. 억만 길의 높이에 의지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 으로써 수비하게 된 것이다. 훌륭한 장수에게 굳센 활을 맡 겨 요충지를 지키게 하고, 믿을 만한 신하에게 정병을 맡기 고 예리한 병기를 벌여 놓고 [드나드는 사람을] 감독케 했다.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시황은 마음으로 스스로 함곡관의 내 부가 견고하고 쇠로 된 성곽이 천 리에 이르니 자손만대 제 왕의 위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17) 몽염: ≪사기≫에 따르면 몽염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으로 융(戎)·적 (狄)족을 물리쳤으며 황하 이남을 거두어 요동(遼東)까지 만리장성을 쌓은 사람이다. 18) 함양: 진나라의 도읍지로, 오늘날 산시성 셴양시.

27


及至始皇, 奮六世之餘烈, 振長策而御㝢內, 呑二周而亡諸 侯, 履至尊而制六合, 執敲朴而鞭笞天下, 威振四海. 南取

百粵之地, 以爲桂林‧象郡; 百粵之君, 俛首係頸, 委命下吏.

乃使蒙恬北築長城而守藩籬, 卻匈奴七百餘里, 胡人不敢南 下而牧馬, 士不敢彎弓而報怨. 於是廢先王之道, 焚百家之

言, 以愚黔首. 墮名城, 殺豪傑, 收天下之兵, 聚之咸陽, 銷 鋒鏑, 鑄以爲金人十二, 以弱天下之民. 然後踐華爲城, 因 河爲池, 據億丈之高, 臨不測之淵以爲固. 良將勁弩, 而守 要害之處, 信臣精卒, 陳利兵而誰何19). 天下已定, 始皇之 心, 自以爲關中之固, 金城千里, 子孫帝王萬世之業也.

시황이 죽은 뒤 남은 위엄이 아직 먼 변방에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진섭(陳涉)20)은 깨진 항아리로 창문을 만들고 새끼 줄로 문설주를 동여맨 가난한 집 아들이었고, 고된 노동으 로 농사짓던 천민으로 징발을 당해 변방에 수자리하려고 온 병사에 불과했다. 재능은 중간 사람에도 미치지 못해 중니 (仲尼)나 묵적(墨翟) 같은 현명함이 없었고, 도주(陶朱)나

19) 수하(誰何): ‘누군데’, ‘무엇 때문에’라고 옛날 초병들이 관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묻는 말. 20) 진섭: 진 왕실에 대항해 처음으로 농민 봉기를 일으켜 진의 멸망을 재촉한 진승(陳勝)을 말함.

28


의돈(猗頓)21)처럼 부유하지도 못했다. 행군 대오 사이를 걷 다가 돌연 밭고랑 가운데서 봉기해 겨우 피폐한 병졸 수백 명을 거느리고 돌아서서 진 왕조를 공격했다.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들어 깃발로 삼았을 뿐이나 천하 사람 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메아리처럼 호응해 각자 양식을 등에 지고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이에 효산 동쪽[山東]의 영웅 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진 왕조를 멸망시켰다.

始皇旣沒, 餘威震於殊俗. 然而陳涉, 甕牖繩樞之子, 氓隸 之人, 而遷徙之徒也. 才能不及中人, 非有仲尼‧墨翟之賢,

陶朱‧猗頓之富. 躡足行伍之間, 而俛起阡陌之中, 率疲弊之

卒, 將數百之衆, 轉而攻秦. 斬木爲兵, 揭干爲旗, 天下雲合 而嚮應, 贏糧而景從, 山東豪俊遂幷起而亡秦族矣.

이는 [진나라] 천하가 작고 약해서가 아니다. 옹주 땅과 효 산·함곡관의 견고함도 옛날과 같았다. 진섭의 지위가 제·

21) 도주는 춘추시대 월나라 명신 범여(范蠡)를 말한다. 그는 월왕 구천(勾 踐)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몸을 숨겨 도[陶: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페 이청현(肥城縣) 서북쪽] 지역에 살며 장사로 거부(巨富)를 이루었는데, 자칭 도주공(陶朱公)이라 했다. 의돈은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도주공에게 장 사를 배워 의씨[猗氏: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안쩌현(安澤縣) 남쪽] 지역에 서 목축으로 큰돈을 벌었다.

29


초·연·조·한·위·송·위·중산의 군주들보다 존귀하 지도 않았다. [농민군들이 썼던] 호미, 곰방메, 가시나무 창 자루가 [9국 군사들이 썼던] 갈고리 달린 극이나 긴 양날 창 보다 예리하지도 않았다. 벌을 받아 수자리하게 된 무리들 이 9국의 군사들보다 대항 능력이 있지도 않았다. 계략의 심 원함과 군대 운용과 용병(用兵) 방법이 그 옛날의 장수들에 미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성공과 실패에 이변이 생기고 공업이 상반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산동의 나라들과 진섭 의 장단·대소 및 권한·역량을 헤아려 보면 당시로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보잘것없는 땅으로 만 승(萬乘) 천자의 세에 다다르고 나머지 8주(八州)에 차례를 매겨 같은 반열이었던 [6국을] 조회에 들게 만든 지 백여 년 이 되었다. 그런 뒤 천지 사방을 제집으로 만들고 효산·함 곡관을 궁궐 담으로 삼았다. 그런데 한 필부가 난을 일으켜 나라를 뒤엎고 천자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해 천하 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의의 정치가 행해 지지 않아 공수의 형세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且夫天下非小弱也, 雍州之地, 殽函之固, 自若也. 陳涉之

位, 非尊於齊‧楚‧燕‧趙‧韓‧魏‧宋‧衛‧中山之君也; 鉏耰棘矜22),

非鉆於鉤戟長鎩也; 適戍之衆非抗九國之師也; 深謀遠慮,

30


行軍用兵之道, 非及鄕時之士也. 然而成敗異變, 功業相反, 何也? 試使山東之國與陳涉度長挈大, 比權量力, 則不可同 年而語矣. 然秦以區區之地, 致萬乘之勢, 序八州而朝同列,

百有餘年矣. 然後以六合爲家, 殽函爲宮. 一夫作難而七廟23) 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義不施, 攻守之勢異也.

22) 극긍(棘矜): 대부분 주해서들에서 ‘극’은 창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진 극 (戟)을 말하고, ‘긍’은 긴 창의 자루를 뜻한다고 했으나, 왕염손(王念孫)은 ‘나 무를 베어 무기로 삼았다’는 앞 문장에 따라 가시나무를 베어 무기의 자루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여기서는 왕씨의 주장에 따랐다. ≪신서교주≫ 13쪽의 주 66) 참조. 23) 7묘(七廟): ≪예기≫ <왕제(王制)> 편에 따르면 부묘(父廟)인 소(昭) 셋, 자묘(子廟)인 목(穆) 셋, 태조묘(太祖廟) 하나를 더해 천자는 총 7묘의 제 사를 받든다고 함. 7묘는 천자가 경영하는 나라 전체를 뜻함.

31


지금까지 북레터 <인텔리겐치아>를 보셨습니다. 매일 아침 커뮤니케이션북스와 지식을만드는지식 저자와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인텔리겐치아>사이트(bookletter.eeel.net)를 방문하면 모든 북레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