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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위에 떠도는 것 자연과 교감하는 힘, 예술가의 심장을 타오르게 하는 것, 신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순간. 예술가의 열정은 지상에 영원을 건설한다.

‹그란두카의 성모›, 라파엘로 산치오, 1505


인텔리겐치아 2143호, 2014년 7월 28일 발행

7월 신간 6. 임우영이 옮긴 빌헬름 바켄로더와 루트비히 티크의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고 떨리 는 손으로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음이 점점 뜨거워졌 다. 한번은 밤에 자주 있는 일이지만 꿈속에 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했고, 너무 심한 가위에 눌려 갑자기 깨어났다. 어두운 밤 침


대 맞은편 벽의 밝은 빛 쪽으로 시선이 끌렸 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직 완성하지 않은 자신의 마돈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그림은 온화한 빛을 받고 있 었는데 아주 완벽하고 실제로 살아 있는 그림 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림 속의 신성함에 압 도되어 그는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그 그림 은 형언할 수 없이 감동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고 그 순간 마치 움직이려고 하는 것 같았 다. 그리고 실제로 그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 럼 생각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라파엘로의 환상>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 (Her zensergießungen eines kunst liebenden K lo s t e r br u d e r s)≫, 빌헬름 바켄로더(Wi l he l m Wackenroder)·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 지음, 임우영 옮김, 14쪽.


그는 누구인가? 라파엘로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 가다. 성모 마리아 그림에 특히 뛰어났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가 완벽한 성모 마리아를 그리려 애쓰는 장 면이다. 완벽한 성모 마리아가 인간에게 가능한 목표 인가? 꿈에서 계시를 받는다. 영혼 속에 떠오르는 성모의 모습이 꿈에서 보았던 성모의 모습과 일치한다. “천상적인” 성모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된다.


계시란 영감인가? 그렇다. 하늘이 내리는 영감이다. 천재 예술 가만 얻을 수 있다. 이 글을 쓴 바켄로더는 예 술가의 영감과 열광을 강조한다. 예술가의 열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영감, 즉 ‘신적인 것’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 는 능력이다. 괴테가 강조한 예술의 “수호신 (Genius)”과 같은 맥락에 있는 개념이다. 괴테가 말한 예술의 수호신이란 어떤 것인가? 이를 통해서만 신이 창조한 자연과 감정적으 로 교감할 수 있고 예술가의 심장을 타오르게 해서 작품을 창작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라파엘로에게 열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 는가? “나는 내 영혼으로 들어오는 마음속의 어떤 그림에 의지해 그린다”라고 고백했다. 예술 가의 고양된 감정, 신과의 영적 교류를 통해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들의 열광은 예술 작품의 수용자에게 어떻 게 전달되는가? 수용자가 “마음속 깊이” 이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깊은 신앙 없이는 아무리 천재적인 예술가도 신의 계시를 작품에 표현 할 수 없듯이,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도 똑같 은 신앙심이 없으면 그 작품에 표현된 신의 계시를 느낄 수 없다.


예술이 종교인가? 예술이 곧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 위에 떠도는 것” 을 예술만이 “신의 불꽃”의 중계자로서 “우리 의 감정 안으로”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종교인인가? 작품에 등장하는 수도사는 가상의 인물이 다. 처음에는 루트비히 티크의 작품으로 알 려졌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글을 바켄로더 가 썼고 티크가 나중에 자신의 글들을 덧붙여 출간했다. 티크의 작품으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초기 낭만주의


소설과 시로 명성이 높았다. 바켄로더는 이 작품과 속편에 해당하는 ≪예술에 관한 환상 들(Phantasien über die Kunst)≫을 제외하고 는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 둘은 어떤 사이였나? 1773년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어릴 때부터 아 주 친했다. 그러나 문학가로 산 티크와 달리 바켄로더는 아버지의 강요로 법률가의 길을 걸었고 이 작품이 출간된 1년 후인 1798년 장 티푸스로 사망한다. 이 책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앞부분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이야기다. 인 용문처럼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뒷부분은 ‘절대 예술’ 을 추구하려는 한 음악가를 통해서 예술가의 삶과 예술 사이의 갈등을 보여 준다. 책이 출간되었을 때 세상의 반응은 무엇이었나? 최고의 예술과 그 예술을 창조한 천재 예술가 에 대한 감동적인 서술, 예술을 종교로까지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낭만주의자 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작가들의 종교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는가? 이 책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가톨릭으로 개종 했다. 이 책에 묘사된 독일 중세의 소박함과 경건함은 낭만주의자들이 중세 독일을 동경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당신은 왜 이 작품을 번역했나? 독일 낭만주의가 태동할 무렵, 중세 예술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문학적 방향을 잡게 해 준 책이다.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지 않아 아쉬웠다. 독자에게 전할 말이 있는가? 18세기 말 독일 낭만주의의 한 기원인 바켄 로더와 티크의 ‘낭만적’ 세계관과 정신을 만 나기 바란다. 당신은 누군가? 임우영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다.


우리 위에 떠도는 것 자연과 교감하는 힘, 예술가의 심장을 타오르게 하는 것, 신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순간. 예술가의 열정은 지상에 영원을 건설한다.

‹그란두카의 성모›, 라파엘로 산치오, 1505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 빌헬름 바켄로더· 루트비히 티크 지음 임우영 엮음 독일문학 2014년 7월 28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260쪽 18,000원


작품 속으로

Herzensergießungen eines kunstliebenden Klosterbruders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


차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5

라파엘로의 환상··················9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17 생존 시 널리 유명했던 화가이자 롬바르드 유파의 일인자 프란체스코 프란차의 특이한 죽음 ·········20 연습생과 라파엘로 ················32 피렌체의 젊은 화가 안토니오가 로마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 ······················41 재주가 많으면서도 학식이 깊은 화가의 전형. 피렌체 유파의 유명한 시조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에서 소개함 ··47 두 가지 그림 묘사 ················70 예술에서 일반적인 것, 관용 그리고 인간애에 대한 몇 마디 ·························80 우리의 존경하는 조상 알브레히트 뒤러의 명예를 기념하며 ·························87 놀라운 언어 두 가지와 그 신비한 힘에 대해·····107


피렌체파(派)의 옛 화가 피에로 디 코시모의 특이성에 대해 ························115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세상의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을 감상하고 자기 영혼의 안녕을 위해 이용해야 하는가? ·························127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위대함 ·········133 로마에 있는 어느 젊은 독일 화가가 뉘른베르크에 있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 ···············145 화가들의 초상화·················155 화가들의 연대기·················162 음악가 요셉 베르크링거의 이상한 음악적 삶 1, 2부 ·193

해설 ······················225 지은이에 대해··················243 옮긴이에 대해··················252


“신과 같은 라파엘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외로운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멀리 떨어진 세계를 어렴풋이 생각하며 다음의 글들을 조금씩 써 갔습니다. 나 는 젊은 시절에 예술을 매우 사랑했고, 이 사랑은 마치 소중 한 친구처럼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나와 함께 계속 동행해 주 었습니다. 내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마음의 충동에 북받쳐 이 회상들을 적어 나갔던 것을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은 관 대한 눈으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들은 요즘 어조로 적 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오늘날의 어조에 익숙지 못하고,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런 어조를 좋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젊은 시절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세적인 일에 많이 얽혀 있었습니다. 나의 가장 큰 갈망은 예술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삶과 보잘것없는 재능을 모두 예술에 바치고 싶 었습니다. 몇몇 친구들도 내 스케치가 그렇게 서툴지만은 않다고 평가해 주었고, 내가 모사(模寫)한 작품이나 내 창 작품들도 완전히 불만스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대 한 예술가들이 그린 성모 마리아상을 생각하면 언제나 말할 수 없는 신성한 놀라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머릿속에 라파 5


엘로나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이 떠오르면 내가 손에 잡고 있 는 목탄 연필이나 붓을 움직인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고 멍청한 짓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정말 고백하건대, 그들의 작품이나 생애가 선명하게 떠오를 때면 나는 가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마음에 울어야만 했습니 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좋은 그림과 소위 나쁜 그 림으로 구분해서 결국엔 냉정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평가하 기 위해 모두 한 줄로 차례대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그 런 생각은 마치 신을 모독하는 것같이 여겨졌습니다.−아 마도 요즘의 젊은 예술가들이나 소위 예술 애호가들은 즐겨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 는 H. 폰 람도르(H. von Ramdohr)의 글을 읽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쓴 글들 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손에서 바로 내려놓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이 글들을 책으로 인쇄하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 았습니다. 그래도 특히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나, 자신을 예술에 바치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지난 시대 에 대한 신성한 경외심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부풀지 못해 조용히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 글을 바치고자 합니다. 이들 은 내가 이 글을 쓸 때와 똑같은 사랑으로 읽을 것이기 때문 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도 없을 내 말에 혹시 많은 감동 6


을 받아 더욱 깊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내 삶을 수도원에서 끝맺도록 정해 주셨습니 다. 그래서 이 시도는 지금 내 능력으로 예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이 글들이 아주 불만스럽지만 않 다면 혹시 2부로 이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2부에서는 각 각의 예술 작품을 개별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반박하고 싶 고, 하늘이 건강과 시간을 허락하신다면 기록해 놓은 내 생 각들을 여기에 맞게 정리해서 분명하게 설명해 드리고 싶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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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환상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것은 옛날부터 논쟁의 대상 이자 커다란 자극이 되어 왔다. 보통 사람들은 이 사실에 무 슨 사정이 숨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아주 엉뚱하고도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체험한 거룩한 종 교적 신비들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천재 예술가들이 받은 ‘내적 계시’와 많은 ‘비이성적인 것들’에 관해서도 체계적인 방법 또는 비체계적인 방법으로 다루거나 떠들어 왔다. 소 위 이론가나 분류학자라는 사람들은 소문으로 들은 예술가 들의 열광을 우리에게 묘사한다. 그들은 말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과 그 의미도 모르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자신들의 교만하고 통속적인 사이비 철학으로 바꾼 말들을 주워 모아 놓고 스스로 아주 만족한다. 그들은 예술가의 열광을 마치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하면서, 그것을 설명하고 거기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성한 말을 그냥 내 뱉을 뿐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부끄 러워해야 한다. 요즘 지나치게 똑똑한 작가들이 조형 예술에서 이상을 소재로 말할 때 얼마나 많은 필요 없는 말들로 잘못을 저지 9


르고 있는가! 화가나 조각가는 보통 사람들이 가는 길이나 경험이 아니라 보다 특수한 길을 가면서 자신들의 이상에 다다라야만 한다고 그들 자신도 고백한다. 그리고 이런 일 이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기 제자들은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다 는 듯이 너무 잘난 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 안에 뭔가가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다면, 거기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줄 수 없을 때 그들은 스 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군다나 회의적이고 눈이 먼 조소꾼들 인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예술적 열광 속에 있는 천상적 요 소를 비웃음으로 완전히 부인하고, 정말로 드문 고상한 정 신을 특별하게 칭찬하거나 신성하게 축복해 주면서 받아들 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런 것들과 너 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가리키는 이런 사이비 현자(賢者)들을 나는 가르치 고 싶다. 그들은 자기 제자들의 여린 마음을 짓밟고, 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마치 인간적인 것인 양 환상에 의해 심어 진 것이라고 그렇게 과감하고 경솔하게 자신들의 견해를 말 해 버린다. 마치 자신들의 힘으로 가장 위대한 대가들이− 내가 자유롭게 말해도 된다면−오로지 신적인 영감에 의해 10


성취했던 것을 감히 이해할 능력이라도 있는 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몇몇 일화(逸話)를 써서 언제나 반복해 서 이야기해 왔으며, 예술가들에 대한 의미 있는 몇몇 격언 을 모아서 계속 되풀이해 말해 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이 야기를 건성으로 감탄하며 그냥 듣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말을 하고 있는 이 기호들로부터 이것이 암시하는 예술의 가장 신성한 것을 어느 누구도 예감할 생각조차 못 하고, 더욱이 나머지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 흔적조차 인정 할 생각도 못하는데 말이다. 나는 옛날부터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 렴풋했던 생각이 아주 분명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늘이 아직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기적들을 확실하게 증명함으로 써 자신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자 나를 선택하신 것에 나는 행복하다. 나는 신의 영광을 위해 새로운 제단을 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라파엘로1)는 미술가 중에서도 빛나는 태양이다. 그는 카스틸리오노(Castilgliono) 백작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내 게는 황금보다도 소중한 말들을 남겼는데, 나는 경외심과

1)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 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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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배라는 은밀하고 어렴풋한 느낌 없이는 그 글을 읽을 수 가 없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성의 자태를 별로 보지 못하기 때 문에, 나는 내 영혼으로 들어오는 마음속의 어떤 확실한 그 림에 의지해 그린다(Essendo carestia di belle donne, io mi servo di certa idea che me viene al mente).” 이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최근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마 음의 기쁨을 느꼈고, 밝은 빛이 가득 비치게 되었다. 나는 우리 수도원에 있는 보물인 옛글들을 샅샅이 찾아보 았고,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먼지투 성이가 된 소용없는 여러 문서들 중에서 브라만테2)가 손으 로 쓴 몇몇 글들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하고자 한다.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자세히 보존하 기 위해서 놀라운 사건 하나를 여기에 기록해 놓으려 한다. 이 사건은 내 친구인 친애하는 라파엘로가 절대로 비밀로 한다는 조건으로 내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얼마 전 내가 라 파엘로가 그린 마돈나와 성가정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 벅

2) 브라만테: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 이탈리아 르네 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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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감탄을 표하고,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전 세계적으로 비 교할 수 없는 성처녀의 아름다움과 감동적인 표정들, 비할 데 없이 탁월한 표현을 도대체 어디서 차용해 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고 간곡하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라파 엘로는 한동안 특유의 소년 같은 수줍음에 말이 없더니 마 침내 너무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내 목을 껴안고 자신 의 비밀을 내게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감수성 예민한 어 린 시절부터 항상 신의 어머니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마음 에 품고 있었고 그래서 가끔 그 이름을 크게 불러 볼 때면 완 전히 고통스런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후 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항상 성모 마리아를 정말 천상의 완벽 함으로 그리는 것이 자신의 최고 바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밤낮 으로 마음속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계속 생각했지만 그 작업을 도저히 만족스럽게 완성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 의 환상이 항상 어둠 속에서 작업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가 가끔 하늘에서 빛이 자신의 영혼에 비치는 듯했고 그때 그는 자신이 원했던 밝은 모습의 형상을 본 것 같았다. 하지 만 그것은 항상 순간적일 뿐이어서 그 형상을 마음에 붙잡 아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했고, 그 모습들이 항상 이리저리 떠돌아다 13


니는 것만 볼 뿐이어서 자신의 희미한 예감이 결코 뚜렷한 모습으로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고 떨리는 손으로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시 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의 마음은 점점 뜨거워졌다. 한번은 밤에 그에게 자주 있는 일이지만 꿈속에서 성모 마 리아에게 기도를 했고, 너무 심한 가위에 눌려 갑자기 잠에 서 깨어났다. 어두운 밤에 침대 건너편 벽의 밝은 빛 쪽으로 시선이 끌렸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직 완성하지 않은 자 신의 마돈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그림은 온화한 빛을 받고 있었는데 아주 완벽하고 실제로 살아 있는 그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그림 속의 신성함에 압도되어 그는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그 그림은 형언할 수 없이 감동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마치 움직 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비록 그 모습에 대해 항상 어렴풋하고 혼란스럽게만 예감해 왔지만 바로 이 모습이 자신이 지금까지 찾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잠이 들었고, 전혀 기억해 낼 수가 없었 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다시 태어난 듯이 일어났고, 이 환상 은 그의 마음과 감각에 영원히 확실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래서 이제 그는 성모 마리아를 평소 자신의 마음에 떠돌아 14


라파엘로의 <그란두카의 성모>(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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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대로 언제든 그려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항상 자기 그림들에 대해 어떤 경외심을 느끼게 되 었다.−이것이 내 친구 라파엘로가 해 준 이야기다. 이 기 적은 내게 너무 중요하고 특별해서, 나를 위해 그리고 나 스 스로 즐기기 위해 이렇게 기록해 둔다.” 이것이 내가 입수한 귀중한 글의 내용이다. 이제 사람들 은 신과 같은 라파엘로가 무슨 뜻으로 “나는 내 영혼으로 들 어오는 마음속의 어떤 확실한 그림에 의지해 그린다”는 이 상한 말을 했는지 분명히 깨닫게 될까? 사람들은 신의 전능 함이 드러나는 이런 기적에 교훈을 받아, 그의 순수한 영혼 이 이 간단한 말로 아주 심오하고 위대한 의미를 말하고 있 다는 걸 이해하게 될까? 이제 사람들은 예술가의 열광에 대 한 평범한 모든 수다가 정말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을 드디 어 깨닫게 되지 않을까?−그래서 이때는 무엇보다도 직접 적인 신의 도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렇게 중요한 성찰의 대상을 각자 숙고해 볼 수 있도록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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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대한 동경

묘하게도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다음의 짧은 글을 지금까지 보관하게 되었다. 이 글은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 이미 써 놓 은 것인데, 당시에 나는 예술의 나라로 칭송받는 이탈리아에 언젠가 한번 가 보고 싶은 바람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낮이나 밤이나 내 영혼은 오직 아름답고 밝은 지방들만 생각한다. 그 땅들이 언제나 꿈속에 나타나서 나를 부른다. 내 바람과 동경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가? 여러 사람 들은 거기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와도 자기가 어디에 있었으 며 무엇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예술을 그렇게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 나라는 며칠 걸어서는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린 불멸의 작품들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모든 감탄과 사랑 을 고백했을 텐데. 그래서 그 유령들이 내 고백을 듣고 나를 가장 충실한 제자로 받아 주었을 텐데 말이다. 친구가 우연히 지도를 펼치면 난 그 지도를 감동적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머릿속으로 도시와 고을과 마 17


을들을 돌아다닌다. 아! 그러나 모든 것이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 느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화려한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 신성한 예술에 삶을 바치는 것이 내게는 단 한 번이라 도 허락되지 않는단 말인가?

난 속만 애태우며 사랑 때문에 아주 사라져 버려야 하는가? 운명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런 생각이나 노력을 계속 못마땅한 듯 쳐다볼 것인가?

그렇다면 난 완전히 패배해 쫓겨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인가? 선택받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오직 예술을 위해 태어나 마음과 삶을 예술에 바치는데.

아, 내 행운은 아마도 아직 저 멀리 있어,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있구나! 물론 나는 이렇게 의심하기를 좋아했지만 18


그래도 종종 별들은 돌고 돌아 마침내, 마침내 행운이 왔다!

얼마나 오래 꿈꿔 온 뒤인데 주저하지 않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과 숲을 지나 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고향으로 가자!

나를 마중하러 축복해 주며 달려 나오는 예술의 수호신들, 화환을 쓰고 환한 빛에 둘러싸여! 그들은 여행으로 지친 사람을 달콤한 평화와 기쁨과 휴식이 있는 예술의 고향으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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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시 널리 유명했던 화가이자 롬바르드 유파의 일인자 프란체스코 프란차의 특이한 죽음

학문을 다시 소생시켰던 박학다식의 시대는 매우 다재다능 하고 진귀한 인간이면서도 아주 강한 정신을 소유한 학자들 을 배출했다. 그래서 미술이 타고 난 재처럼 오랫동안 잠자 고 있다가 불사조처럼 다시 등장했던 이 시대도 아주 고상 하고 고귀한 예술가들로 대표되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예술의 진정한 영웅시대로 간주할 수 있어서, 사 람들은 이 영웅시대의 힘과 위대함이 이제는 지상에서 사라 져 버렸다고 (오시안3)처럼) 한탄하고 싶어 한다. 많은 예술 가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서, 오로지 자신의 강한 힘으로 우뚝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들의 삶과 활동에는 무게가 있 었고, 당시 예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기록되어 지 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상세한 연대기는 후세를 위해 보존하 려고 노력할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정 신은 고귀해서, 우리는 그들의 소중한 그림 모음집에서 그 3) 오시안(Ossian): 3세기경 스코틀랜드의 서사 시인. 그의 작품은 북유럽의 음 침한 자연을 배경으로 우울한 낭만적 정서를 담고 있어 낭만주의 작가들에 게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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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수염 난 얼굴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보게 된다. 그들에 게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이상한 일들이 벌 어졌는데, 왜냐하면 ‘열광’이 요즘에야 몇몇 개인의 가슴에 마치 희미한 불꽃처럼 타오르지만, 황금시대 당시에는 전 세계를 불타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변질된 후세는 이 시대 로부터 전해 오는 그런 몇몇 이야기들을 의심하거나 동화라 고 비웃어 버린다. 그것은 신의 불꽃들이 그들의 영혼으로 부터 완전히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아주 진기한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를 나는 감탄하지 않고는 결코 읽을 수 없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의심하고픈 유혹에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이 야기는 아주 오래된 화가 프란체스코 프란차4)의 죽음에 관 한 것이다. 이 화가는 볼로냐와 롬바르드에 형성된 유파(流 派)의 시조이자 조상이었다.

이 프란체스코는 보잘것없는 수공업자의 집안에서 태어 나 지칠 줄 모르는 노력과 항상 정상을 향해 노력하는 정신 으로 가장 높은 명성의 꼭대기까지 뛰어올랐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맨 먼저 어느 금세공업자 밑에서 일하면서 금과 은

4) 프란체스코 프란차(Francesco Francia, 1450∼1517): 이탈리아의 화가. 볼로 냐 화파의 대표적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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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프란차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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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예술적으로 가공했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감탄할 정도였다. 또 그는 오랫동안 기념주화를 새기는 작업도 했 는데, 롬바르드의 모든 제후와 공작들이 그의 손으로 주화 에 자신을 새겨 넣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왜냐 하면 당시만 해도 나라의 귀족이나 시민은 모두 조국의 예 술가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큰 박수를 보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제후들이 볼로냐를 뒤지고 다 니면서 프란체스코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그것으로 금 속을 깎아 주조하게 하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란체스코는 영원히 움직이는 정열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뜨 거운 공명심이 충족되면 될수록 더욱 조급하게 아직 발을 내딛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에 도달하 려고 했다. 마흔이 되었을 때 그는 새로운 예술에 도전했다. 그는 억제할 수 없을 정도의 끈기로 붓놀림을 연습했고 전 반적인 구성과 색의 효과를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비 범하게도 대단히 빨리 자기 작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해 볼 로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화가였다. 왜냐하면 비록 경쟁자가 많았고 신과 같은 라파엘로가 당시 로마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들도 당연히 항상 최고 의 작품에 포함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에서 미(美) 23


프란체스코 프란차의 <아기 예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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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한 사람의 삶이 다 써 버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보잘것없 거나 볼품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선택받은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운명도 아니다. 그 빛은 오히려 수천 가지로 나뉘어 반사되는 빛으로, 하늘이 지상에 보내신 위 대한 예술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황홀해하는 눈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 고상한 1세대 이탈리아의 예술가들과 함 께 살았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보다 큰 존경을 누렸 고, 야만의 폐허 위에 완전히 새롭고 훌륭한 제국을 건설했 다. 그리고 롬바르드에서는 그가 바로 설립자인 동시에 새 롭게 건국한 나라의 첫 번째 제후였다. 그의 능란한 손은 뛰 어난 그림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완성했으며, 그 그림 들은 전체 롬바르드뿐만 아니라(이 지방에서는 어떤 도시 라도 최소한 그의 습작이라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방으로도 흘러들어 갔고, 그의 그 림을 보고 행복해하는 모든 눈에 그의 명성을 큰 소리로 알 렸다. 이탈리아의 군주들과 공작들은 그의 그림을 소유하 는 데 열심이었고, 사방에서 칭찬하는 소리가 몰려들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다르는 모든 지방에 그의 이 름을 퍼뜨렸고, 그들의 말에 기분 좋은 반향이 자신들의 귀 로 되돌아와 울렸다. 로마를 방문한 볼로냐 사람들은 라파 25


엘로에게 자기 조국의 예술가를 칭찬했고, 라파엘로도 그 가 붓으로 그린 몇 가지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그에 게 보낸 편지에 라파엘로 특유의 부드러운 상냥함으로 존경 과 호감을 표시했다. 그 시대의 작가들도 그들의 모든 작품 에 그에 대한 칭찬을 넣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후세의 눈을 그에게 돌리게 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신 처럼 존경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카바초네(Cavazzone)는 한층 과감하게 라파엘로가 그의 마돈나 그림을 보자 페루자(Perugia) 유파의 특징인 무미건조함을 버리고 보다 위대한 양식을 받아들였다고 쓰 고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성공들이 우리 프란체스코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그의 활기찬 정신이 가장 고귀한 예술가의 자 부심으로까지 상승했고, 속으로는 하늘이 주신 자신의 천 부적 재능을 믿기 시작했다. 이런 고상한 자부심을 지금은 어디서 찾겠는가?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에게서 그 자부심 을 찾아봐야 소용없다. 그들은 자신만 우쭐댈 뿐 자기 예술 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 라파엘로는 프란체스코가 동시대 모든 화가들 가운데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코 는 살아생전에 한 번도 볼로냐를 멀리 벗어난 적이 없었기 26


때문에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는 행운을 한 번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설명을 읽고 나서 라 파엘로의 화풍을 생각하면서 어떤 확고한 형상을 스스로 만 들었고, 특히 라파엘로가 그에게 보낸 편지의 겸손하고 대 단히 호감 가는 태도를 통해서도 자신의 작품이 대부분 라 파엘로의 것과 견줄 만하며, 몇 작품은 오히려 훨씬 낫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파엘로의 그림 하나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려고 했다. 아주 뜻밖에도 그는 라파엘로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는 데, 그 편지에서 라파엘로는 볼로냐에 있는 성(聖) 요한 성 당에 놓을 성녀(聖女) 세실리아를 그린 제단화를 막 완성했 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친구인 그에게 보낼 테니 자신을 도와주고 싶다면 그 그림이 이동 중에 어 떤 손상을 입었거나 그밖에 어떤 실수나 잘못을 발견할 경 우 자기 대신 적당히 손질해 주고, 어쨌든 친구로서 그림을 다듬어 주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다. 라파엘로와 같은 화가가 자신에게 겸손하게 붓을 손에 쥐여 주는 이 편지에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그 그림 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임박해 있는지 그는 몰랐던 것이다! 언젠가 한번 그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자 27


라파엘로의 <성녀 세실리아>(1516/1517) 28


들이 급히 달려와 라파엘로의 그림이 그사이에 도착했으며, 자신들이 그 그림을 그의 아틀리에에서 제일 빛이 좋은 곳 에 세워 두었다고 기쁨에 넘쳐 말했다. 프란체스코는 너무 나 기뻐 작업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사람이 이 그림을 보고 느낀 마음이 찢 어지는 감정을 오늘날 어떻게 묘사해야 좋단 말인가. 그의 심정은 마치 어린 시절 헤어진 동생을 너무나 기쁘게 껴안 고 싶지만 눈앞에 자기 동생 대신에 갑자기 빛의 천사가 보 이는 것과 꼭 같았다. 그의 가슴은 마치 무엇에 구멍이 뚫린 듯 보다 고상한 존재 앞에 완전히 회한에 차서 무릎을 꿇어 야 할 것만 같았다. 번개를 맞은 것 같은 감동으로 그는 거기에 서 있었고, 제자들은 노인의 주위에 몰려들어 그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프란체스코는 기운을 약간 차리고 신이 그린 것 같은 너 무나 훌륭한 그림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정상 에서 추락하는 느낌이 과연 어땠겠는가! 너무나 잘못 생각 해 별까지 날아 올라가 지나친 명예욕으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라파엘로 위에 자신을 세운 잘못을 그는 얼마나 힘 들게 뉘우쳐야만 할 것인가. 그는 백발의 머리를 두드리면 서 쓰라리고 고통스런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는 우쭐대 29


며 야심만만하게 삶을 살면서 점점 더 멍청한 짓을 열심히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죽음에 가까이 와서 열 린 눈으로 자신의 삶 전체가 보잘것없고 불완전한 서툰 작 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되돌아봐야만 했다. 그는 성녀 세 실리아의 거룩한 얼굴처럼 눈을 들어 올려 자신의 상처 입 은 그러나 뉘우치는 마음을 하늘에 드러내 보이면서 겸손하 게 용서해 주시길 빌었다. 그의 몸 상태가 너무 약해서 제자들은 그를 침대에 눕혀 야 했다. 방에서 나갈 때 자기 그림들 가운데 몇몇 작품들과 특히 그 방에 걸려 있던 그의 <죽어 가는 세실리아>가 그 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고통스러워 거의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부터 그의 마음은 계속 혼란스러웠으며, 보는 사 람마다 그가 거의 정신이 나갔음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 렇게 오랫동안 항상 긴장하면서 그렇게 많은 작품들을 만들 어 왔던 정신이 이제 지쳤고, 게다가 고령의 허약함이 함께 나타나서 그의 영혼의 집을 기초부터 흔들어 놓았던 것이 다. 무한히 다양했던 그 모든 교육은 옛날부터 그 화가의 마 음을 움직여 색과 선으로 캔버스에서 실현되었지만, 이제 는 찡그린 모습으로 그의 영혼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끊임없 이 괴롭히는 유령이 되어 고열의 그를 불안에 떨게 했다. 그 30


는 제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침대에서 죽은 채로 발 견되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하늘과 같은 라파엘로에 비해 자 신이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느낌으로써 비로소 정말 위대해졌다. 또한 이 예술의 천재 라파엘로도 정통한 눈으 로 오래전에 프란체스코가 성인임을 선언하고는 그의 머리 를 후광으로 감쌌는데, 그 후광은 예술에 열광한 진정한 순 교자인 그에게 마땅한 것이었다. 프란체스코의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옛날 의 바사리5)가 우리에게 전해 준 것으로, 그 책 속에는 아직 도 예술의 초대 조상들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믿으려 하 지 않거나 믿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은 세상만사를 무미건 조하게 해결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옛날의 존경할 만한 연대기 작가의 동화라고 비웃고, 뻔뻔스럽게도 프란체스코 프란차가 독약 때문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5)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 역사가. 르네상스 미술가의 전기 ≪미술가 열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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