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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비뚤어진 인생 밀수범, 도박범, 사기범, 횡령범 그리고 아편중독자지만 한때는 기술자, 운동가, 예술가, 종교인, 의사, 교육자였다. 일제는 王道樂土를 약속하고 갱생을 제안한다. 부질없다. 뿌리가 없는데 꽃이 피겠는가?

‹고개를 푹 숙인 두 남자›, 케테 콜비츠, 1919


인텔리겐치아 2169호, 2014년 8월 13일 발행

광복 전후의 기억 3. 윤송아가 엮은 ≪초판본 현경준 작품집≫

“그야 물론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인간의 취급 을 받지 못하는 락오(落伍)의 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의 온 갖 박해라든지 조소에는 벙어리 노릇을 하여 왔고, 귀먹어리 노릇을 하여왔고, 천치의 노 릇을 하여오며 산송장의 생활을 하여온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너는 무에냐? 너는 우리들을… 즉 지옥에서 헤매는 무리들 을 개전(改悛)시켜서 다시금 참다운 사회인


으로 맨들려구 자청을 하여온 소위 지도자라 는 것이 아니냐? 설마 우리들에게 매질을 하 려구 온 눔이야 아니겠지? 만약 그런 목적으 루서 왔다면 나는 여기서 단언한다. 너 같은 눔은 지도는커녕 도리어 우리들의 근성을 더 한칭 삐뚜러지게만 할 눔이다. 대체 네가 우리들을 알기를 어떻게 아느냐? 아편쟁이는 밸이 없다더냐? 아직은 피두 있구, 눈물두 있구, 신경두 있는 눔이다. 너 같은 눔의 주먹에 그저 죽었오 하고 드려 댈 눔은 아니다.” -<유맹(流氓)>, ≪초판본 현경준 작품집≫, 현경준 지음, 윤송아 엮음, 46~47쪽


지금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주인공 명우다. 부락 자위단장 세준에게 뺨 을 맞은 뒤 덤비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부락에 탈주자가 발생했다. 단장은 부락민을 모아 놓고 일제 검색을 벌인다. 그러나 그들 은 얼빠진 표정으로 반응이 없다. 단장은 그 중 젊어 보이는 명우를 다짜고짜로 때린다. 이 일이 지금 어디서 벌어지고 있는가? 만주국에서 범법자들을 교화하고 신흥 국가 의 인재로 키우기 위해 설치한 특수 부락이다.


만주국은 어떤 나라인가? 1932년에 일본이 중국 동북부에 세운 괴뢰 국가다. 관동군이 무단으로 통치했다. 범법자란 누구를 말하는가? 아편중독자, 밀수업자, 도박 상습범, 사기 상 습범, 횡령범들이다. 한때는 기술자, 정치운 동가, 예술가, 종교가, 의술가, 교육자였던 사람들이다. 명우는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 한때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 출품해 입선 도 했지만 실연하고 방황하다 아편쟁이가 된 뒤 이곳에 수용되었다.


명우와 세준의 싸움은 어디까지 가는가? 보도소(輔導所) 소장이 나타나 중재한다. 그 는 왕도낙토(王道樂土)를 건설하려는 만주 국의 혜택을 모르고 비뚜로 나가려고만 하는 부락민들을 보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고 호 소한다. 부락민의 반응은 무엇인가? 무관심하다.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옆 사람 과 수군거리기도 하고, 산봉우리 위를 흘러 가는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뻔뻔스런 거 짓말을 관두라며 비웃기까지 한다. 싸움은 여기서 끝인가? 그러지 못했다. 소장은 부락민의 비웃음에


분노해 명우를 비롯한 일곱 명을 2주일간 구 류소에 보냈다. 구금을 마치고 돌아온 명우 는 부락 주민 득수가 명보와 짜고 명보의 딸 순녀를 아편에 취하게 한 뒤 강간하려는 사실 을 알게 된다. 명우는 순녀를 구하지만 다시 자위단이 동원되어 일제 심문이 벌어진다. 득수는 명우가 아편을 먹었다고 고발한다. 심문을 받지만 보도소 소장이 그를 따로 불러 용서해 주겠다고 말한다. 소장이 왜 이러는 것인가? 그는 명우가 “아직 양심의 쪼박찌나마 지니 고 있다”고 말한다. 양심의 잔편(殘片)을 곱 게 키워 이전과 같이 훌륭히 소생해 달라고 한다.


그는 소생하는가? 소장의 끈질긴 노력에 감화되어 소생의 실마 리를 찾는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소장 의 중개로 순녀와 혼인하기로 결심한다. 현경준은 <유맹>에서 일본의 만주국 통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인가? 표면상으로는 만주국의 ‘왕도낙토’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친일 관변문학의 모습 이다. 뒷면에는 이러한 정책을 조롱하고 부 정하려는 소극적 저항이 숨어있다.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문학적 선택이었다.


책에 실린 또 다른 작품 <탁류>는 무엇을 이 야기하는가? 지식인 사회운동가의 내면 갈등과 저항 의지 를 다룬다. 주인공 명식은 사회운동을 하다 가 투옥되어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정 세가 예상 밖으로 악화된 데에 실망한다. 그 러던 중 예전의 신념을 지켜 나가는 은밀한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야학을 꾸려 저항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고향의 정세가 어떻게 달라졌나? 농촌 고유의 미풍이었던 향약이 일제의 ‘풍 기 개량’과 ‘자력갱생’을 위한 정책 도구로 전 락했다. 주민의 결속력과 상부상조의 미덕 도 사라졌다. 명식의 가장 절친한 동지였던


유덕도 출옥 후 전향해 향약회 간사, 청년훈 련회 간사, 자력갱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가 면사무소 서기 자리까지 차지한다. 무엇이 탁류인가? 명식을 둘러싼 상황이다. 자신을 옥죄는 절 망적인 식민지 현실이 마치 장마 뒤에 나타나 는 검붉은 탁류 같다고 말한다. 흙탕물과 오 물로 휩쓸린 사회를 정화하고 새로운 혁명의 물결로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시사하는 비유다. 현경준은 누구인가? 1909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1934년 문 단에 데뷔한 뒤 상당수의 작품을 만주에 거주


하면서 집필하고 현지 신문인 ≪만선일보≫ 를 통해 발표했다. 안수길, 강경애와 더불어 재만 조선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당신은 누구인가? 윤송아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 서 강의한다.


식민지의 비뚤어진 인생 밀수범, 도박범, 사기범, 횡령범 그리고 아편중독자지만 한때는 기술자, 운동가, 예술가, 종교인, 의사, 교육자였다. 일제는 王道樂土를 약속하고 갱생을 제안한다. 부질없다. 뿌리가 없는데 꽃이 피겠는가?

‹고개를 푹 숙인 두 남자›, 케테 콜비츠, 1919


초판본 현경준 작품집 현경준 지음 윤송아 엮음 한국 근현대 소설 2013년 8월 1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80쪽 16,000원


작품 속으로

현경준 작품집


유맹(流氓)


作者의 말 ― 이것은 한 개의 報告文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다. 作者는 이것을 第一回의 報告로 하고 앞으로 몇 차례 고 이 部落의 蘇生狀況을 報告하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 記錄된 것은 至今으로부터 二年 前의 狀 況이라는 것을 말하여 둔다.

一. 최초(最初)의 탈주(脫走)

一 찌는 듯한 푸낮.18) 보도소 소장(輔導所所長)은 씻어도 씻어도 멎을 줄 모 르는 땀빨이 거이 발광이라도 할 지경 단김을 후욱 훅 내뿜 으며 어제부터 시작한 성공서(省公署)에 버낼 제육회째의 부락민의 성적 보고서를 작성하기에 가진 애를 다 쓰고 있 다. 열어제친 뒷창으론 제법 쏴− 하며 바람이 들어오긴 하

18)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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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것은 화독에서 풍기는 화기와도 같은 뜨거운 바람이 다. 쉴 새 없이 씻는 수건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흘러 떨어지 고, 얼굴빛은 붉게 익어들다 못해 내종에는 시껌엏게 독이 올은다. 출입문 어구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던 자위단(自衛 團) 서기는 하도 민망스러워 그만 웃줄 일어나 밖으로 나가 더니 얼마 안 되어 찬물이 넘처흘르는 세수대야를 들고 들 어온다. “땀 좀 닦으시지요.” “뭐? 세수물인가? 아 고맙네.” 소장은 웃통을 버서던지고 대야에 막우 머리를 잠근다. “에− 씨언하다.” 전신의 땀줄은 일시에 선뜻 숨여든다. “에− 좋다. 에− 씨언해라.” 연방 흑흑 느끼며 좋와하는 모양에 서기는 만족한 듯 빙 그으시 미소를 띠운다. 바루 그때. 누군지 더벙머리를 너펄거리면서 넋 없이 마당 안에 달 려들더니 문어구에 와 무춤 멈춰서며 “저 소장님 큰일났어요.” 하고는 헐떡거리기만 할 뿐, 뒷말을 잇지 못한다. 36


소장은 어인 영문을 몰라, 한참 동안 머어니 상대편의 얼 굴을 마주 보고만 있다가 눈에 흘러드는 물을 손등으로 썩 씻으며 “뭐가 큰일났단 말인가?” 다소 거칠게 어조를 높인다. “저… 성룡이 눔과 문삼이가 도망갔어요.” “뭐?” 소장은 소수라치며 정신없이 문어구로 달려 나온다. “성룡이허구 문삼이가 어쨋어?” “저… 도망갔어요.” “응? 언제?” “인제 방금 저 뒷산마루를 넘었어요.” “누가… 누가 봤는가? 자네가 봤는가?” 달려들어 목아지라도 틀어잡을 듯한 소장의 험악한 기 세에 질려 상대편은 말을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왜 대답을 못 하는가? 자네가 봤는가.” “저, 지가 본 게 아니라요, 저… 북문보초(北門步哨) 섰 던 기호가 봤어요.” “뭐? 기호가? …그럼 자네는 못 봤는가?” 소장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주먹까지 틀어쥔다. “저두 보기는 봤는데.” 37


“봤는데 왜 놓쳤는가?” “지가 본 땐 벌서 두 눔은 거진 마루턱을 넘어설 때었어 요.” “그럼 기호는 어디루 갔는가?” “뒤들 좇아 올러갔어요.” 소장은 입술을 찢어저라고 악물고 허공을 노려보다가, 갑짜기 정신을 채린 듯 옆에 선 자위단 서기를 돌아보고 “얼른 단장한테 가서 일르구 비상소집 종을 때리게.” 한 다음 안쪽 구석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다시금 돌아서 서 “단장보다 먼저 종부텀 때려주게.” 하고는 구석에 뛰어가더니 벽에 걸린 몽둥이 같은 집팽 이를 쥔다. 벌서 누가 때리는 것인지 종루(鐘樓)에서는 비상 경종 소리가 요란스레 땡땡땡 울려온다. 소장은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린다. 바루 낮밥 쉼 때라 자위단원들은 곧 모여든다. 모두들 서로 질서 없이 떠들어대는 그 속에서 자위단 단 장이자 겸 툰장(屯長−部落長)인 세준이는 면목없어 하며 죄송스레 보도소 소장 앞에 와 선다. “소장님, 대할 낯이 없습니다.” 38


“그런 사과는 뒀다 이담에 허구, 어서 뒤를 추격하기루 합시다.” 소장은 단장의 늘어진 듯한 행동에 발을 굴르며 독촉이 아니라 역정을 쓴다. “예.” 단장은 반발된 듯이 옆으로 비켜서더니 소장을 대할 때 의 모양과는 딴판으로 소리를 버럭 질른다. “일 분대 이 분대는 저 아랫마루를 넘어서 강역을 살피 구, 삼 분대 사 분대는 우쪽 마루를 넘어서, 큰 봉 안에 들지 못하두룩 하구, 그러구 오 분대는 내 뒤를 따라, 도망간 눔 들의 뒤를 고추 좇아보세.” 명령이 내리자 단원들은 일제히 토성(土城) 밖으로 무 에라고 떠들며 내달린다. 그 뒤를 보도소 소장도 주먹을 틀어쥐고 달려간다.

二 해가 저물 때까지 뒤를 좇으며 숲을 속19)을 삿삿치 뒤젔것

19) 수풀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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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두 탈주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수색단은 하는 수 없이 풀끼없는 걸음으로 부락으로 돌 아왔다. 부락에 돌아와서 보도소 앞마당에 제각기 되는 대로 주 저앉은 그들은 모두 다 무거운 침묵에 사로잡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그중에서도 보도소 소장의 침묵은 더한층 무겁다. 그는 출입문 앞 마루 구광에 힘없이 걸터앉아 말할 수 없 이 침통한 얼굴로 어느 때까지던지 입을 열 줄 몰으고 그 무 슨 생각에만 잠겨 있다. 그 모양을 보고, 자위단 단장은 비길 때 없는 송구스런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소장의 동정에만 곁눈을 팔지만, 그러 나 일체를 망각하여 버린 듯한 소장의 얼굴에서는 털끝만한 표정의 움직임도 찾을 수가 없다. 해만 지면, 그렇게 모여들어서 떠들어대던 아이들도 한 쪽 구석에 몰켜 가서 기줄하니20) 어른들의 기색만 살피고 있다. 얼마나한 오랜 시각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지나갔던지 소장의 입에서 땅이 꺼저라고 후유−긴 한숨이 흘러나오고

20) ‘남의 눈치를 보며 주뼛거리는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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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단장.”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는 벌서 컴컴하니 어둠이 밀 려든 때다. “예?” 단장은 고대하고 있던 터라, 얼른 일어나 소장의 앞으로 돌아서며 뒷말을 기다린다. “다들 해산을 시킵시다.” “예.” “그러구 단장은 좀 상의할 일이 있으니 사무실루 들어갑 시다.” “예.” 소장의 명령대로 단장은 선 자리에서 해산을 명한 후, 조 심스레 소장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간다. 사무실에 들어간 소장과 단장은 책상을 사이에 놓고 조 용히 마주 앉는다. 그러나 한동안이 지나도록 둘 사이에는 부자연한 공기 만 오락가락 떠돌 뿐 아무런 말도 없다. 그러다가 맛츰내 소장은 서서히 고개를 쳐들며 나즉히 입을 연다. “상의라는 것은 달은 것이 아니라, 이번 탈주 사건으로 41


말할 것 같으면 부락이 건설된 이후, 처음으루 생긴 일인 것 만큼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자는 것인데, 단장의 의견은 어 떠신지요.” 소장의 말씨는 전과 같이 정중하게 나온다. “지당한 말슴입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그냥 시무룩하게 내버려두었다간 앞으루 자꾸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니까, 아 예 첫번에 버릇을 곤처놓아야 합니다.” 소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오늘 밤으루 경찰서, 각 분주소(分駐所) 부락에다가 죄 다 통기하여 수배를 하면 二三일 내루 붓잡기야 허겠지만, 그러나 이런 불상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은 참말 유감이란 말이오. 그러구 그보다두 이담 성(省)이나 현(縣)에 이 말이 미 쳤을 때 무슨 면목으루 그들을 대하겠소? 난 아무리 생각해 봐두 보고서 쓸 일이 기가 맥히오.” 하고 또다시 긴 한숨을 짓는다. “전부가 저의 실책입니다. 단원들의 단속을 겨을리 한 탓이지요.” 단장은 진정으로 사죄하며 고개를 쳐들지 못한다. “그런 말은 그만두시오. 다 한가지요. 나는 별사람인가 요? 단장이 평소에 단원 단속을 겨을리한 게 탓이라면 나 역 42


보도자로서의 힘과 성의가 부족한 탓이 있었겠지요. 그런 말은 아혀 입 밖에 내지를 말구, 금후의 대책이나 잘 강구합 시다.” “황송합니다.” 단장의 머리는 한칭 더 숙어진다. “헌데 첫재 오늘 저녁에 자위단 간부회의를 엽시다. 그 런 다음 간부들을 잘 단속해 가지구, 내일 아침 일즉, 집집 마다 일제히 가택 수색들을 해봅시다. 그러구, 미안한21) 혐 의자들을 붓잡아다가 오늘 탈주한 둘의 행방에 대해 추궁하 면서, 서루 련락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밝혀봅시다. 나는 반 드시 미리부터 눈치를 알구, 또 서루 련락이 있었으리라구 믿는데요. 단장은 어떻게 생각허십니까?” “글세외다. 저두 아까부터 그걸 생각하구 있었읍니다. 반드시 서루 련락이 있었으리라구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반드시 있었지요. 그럼 오늘 밤에 다시 모이 두룩 헙시다.” 둘의 입가에는 똑같이 소리 없는 미소가 떠돈다.

21) ‘미심쩍은’ 혹은 ‘의심스러운’의 의미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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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이튼날 아침 네 시를 기하여, 부락에는 일제 검색이 일어났 다. 자위단 단장의 지휘하에 거행된, 이 일제 검색에 의하여, 미리부터 의심되던 혐의자의 집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가 나 타났다. 무엇보다도 엄금물인 마약(痲藥−阿片)의 현품이 수처 에서 발각되었음에는, 새삼스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고, 또 그 우에 남녀 간의 치정 관계까지 발각되었다. 단장은 자기의 단원 단속 부주의로 하여 생긴 작일의 탈 주 사건의 그 불명예를 이런 기회에 깨끗이 씻어버리려고, 엄중한 취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또 평소부터 대강 눈치 채인 강 건너 만주인 부락과의 비밀 련락 증거까지 이런 기회에 확실히 잡어내 가지고, 속으로 단단히 항의할 것까지 바수었다. 단장의 곁에서 보도소 소장은 무겁게 입을 담을고 피검 자의 동정을 낱낱이 살피며 앞으로의 대책을 생각고 있다. 그러나 취조받는 피검자들의 태도는 어디까지든지 태연스 럽고 무표정하다. 그들은 일체를 망각하여 버린 표정으로 단장의 말에는 44


귀도 기우리지 않고 얼빠진 양을 하고 앉아 있다. 그중에서도 중독자(中毒者)들이 더하다. 단장은 참다못 해 그중 젊어 뵈는 명우의 볼따구니를 철썩 후려갈긴다. “이눔아. 귀먹어리처럼 묻는 말에 잠자꾸 있으면 장수 냐!” 이 불의의 일에 명우는 한동안 머엉하니 단장의 얼굴을 얼빠진 모양을 하고 쳐다보더니, 그만 입술을 비꼬며 “흥.” 하고 외마디 콧방구를 뀌고는 모루 고개를 돌려버린다. 단장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그는 재차 명우의 뺨을 후려갈기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 선다. “이눔아. 네눔의 입에서 대답을 못 들으면 성을 갈 테다.” 노오랗게 절은 명우의 얼굴에 차츰 푸른 독기(毒氣)가 서린다. 입술에서 피가 날 지경 악물고 쳐다보던 그는 서서히 일 어서며 두 주먹을 틀어쥔다. 그 모양에 단장은 다소 압기가 된 듯 주춤거리다가, 이내 제대로 돌아지며 한 걸음 앞으로 썩 닥아선다. “맛서면 어쩔 테냐?” 명우의 얼굴은 풀으다 못해 하얘진다. 말없는 시선과 시 45


선의 싸움이 한동안 계속된 후 “이눔아. 왜 때리는 거냐? 부락민에게 함부루 그런 버릇 없는 손찌거리들 하라구 누가 시켰더냐?” 어디서 그런 위엄 있는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단장은 얼 른 말을 못 한다. “부락민에게 함부루 손을 대며 제 자신의 무능과 무식을 폭로시키는 그런 부락장이나 단장이라면, 어서 곱게 손을 씻구 물러앉아라. 우리는 너한테 매맞을 아무런 의무두 가 진 일 없구, 너에게 그런 권리를 준 일두 없다. 부락장이면 부락장답게, 단장이면 단장답게, 인격적으루 부락민에게 감화를 주며 지도를 해야 한다.” 류창한 말은 끊질 줄 모르고 다시 뒤를 잇는다. “그야 물론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인간의 취급을 받지 못하 는 락오(落伍)의 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 리는 사회의 온갖 박해라든지 조소에는 벙어리 노릇을 하여 왔고, 귀먹어리 노릇을 하여왔고, 천치의 노릇을 하여오며 산 송장의 생활을 하여온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너는 무에냐? 너는 우리들을… 즉 지옥에서 헤매는 무리들을 개전(改 悛)시켜서 다시금 참다운 사회인으로 맨들려구 자청을 하 여온 소위 지도자라는 것이 아니냐? 설마 우리들에게 매질 을 하려구 온 눔이야 아니겠지? 만약 그런 목적으루서 왔다 46


면 나는 여기서 단언한다. 너 같은 눔은 지도는커녕 도리어 우리들의 근성을 더한칭 삐뚜러지게만 할 눔이다. 대체 네가 우리들을 알기를 어떻게 아느냐? 아편쟁이는 밸이 없다더냐? 아직은 피두 있구, 눈물두 있구, 신경두 있는 눔이다. 너 같은 눔의 주먹에 그저 죽었오 하고 드려댈 눔은 아니 다.” 단장은 참다못해 떨리는 두 팔을 와락 내밀고 달려든다. 그러나 그의 등덜미는 어느 틈엔가 소장의 손아귀에 단 단히 잡혔다. “단장 좀 참으시우.” “아닙니다. 놓세요. 내 오늘은 이눔들에게 버릇을 단단 히 알으켜주구야 말 텝니다.” 하며 씩은거리는 단장의 모양을 일종의 가엾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명우의 입가에는 싸늘히 조소가 떠올은다. “흥, 기끝하면 구류소(拘留所)지, 별수가 있냐?”

四 험악하게 벌어지려던 위급한 형세는 보도소 소장의 중재로 47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장내의 험상한 공기는 좀체로 완화되지 않는다. 단장의 격분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명우의 반항으로 하 여 오랫동안 참아오던 부락민의 울분은 비로소 기회를 얻어 가지고 바야흐로 한 덩어리가 되어 폭발되려는 형세다. 만은 보도소 소장의 능난한 수완은 그 기회를 얼른 빼앗 어버릴 수가 있었다. 그는 씩은거리는 단장을 겨우 달래여놓고는, 자기가 대 신 나서서 벌서 귀에 못이 백히도록 들은 설교를 또 시작하 는 것이었다. 한번 시작만 하면 좀체로 끊질 줄 모르는 그의 설교에, 여럿의 이마에는 이내 주룸쌀이 잡혀진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우리 만주국(滿洲國)에서 전만 (全滿) 오 개소에다가 이러한 특수부락을 설치한 것은 무슨 까닭인 줄 아시우? 빗두루 인생의 행로에서 탈선하여 나간 여러분을 바른 길우 다시금 인도하여 주려는 것이, 그 제일 본의라는 것은 자초부터 알 수 있은 일이 아니우? 왕도락토(王道樂土)를 건설하려는 만주국이 아니고는 꿈에두 상상할 수 없는 이런 고마운 혜택을 모르구 여전히 빗두루만 나가려는 여러분을 대할 때 나는 참말 세상사가 48


슬퍼나서 견딜 수가 없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다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 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여러분과 고락을 가치하 며 여러분의 그 쓰라린 과거를, 여러분의 기억에서 흔적없 이 씻어버리구 새로운 광명의 길을 밟게 하자는 것이 아닙 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그것을 몰라주십니다. 아니 알고도 일부러 모르는 체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께 장래의 은혜를 지워서 그 갚음 을 받으려구 이러는 것두 아니구, 내 뱃속을 채우려는 것두 아닙니다. 만약 그런 속으루 온 것이라면 웨 하필 이런 곳으 루 왔겠읍니까?” 보도소 소장의 말소리는 떨리기까지 하며 점점 울음쪼 로 변해간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있는 군중의 표정은 너무나 평범하 다. 그들은 제각금 제멋대로 다리를 틀고 앉아서는 혹은 담 뱃대를 뻐금뻐금 빨기도 하고 혹은 곁사람과 숙은거리기도 하고 혹은 먼 산봉오리 우를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그야말로 소장의 설교에는 오불관심이라는 격이다. “여러분의 두뇌 속에는 아직두 일확천금의 그 꿈이 그냥 남어 있구, 마약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49


그 비현실적이구, 내 몸을 망치구 국가와 사회를 망치는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하며 일단 목소리를 높이려는데 갑짜기 한쪽 구석에서 “소장님! 그 뻔뻔스런 거짓말을 인젠 그만 헙시다. 귓구 멍에 못이 백혔수다.” 하는 툭명스런 소리가 불쑥 나온다. 소장은 머춤하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질서 없이 떠들어대던 군중들도 이 불의의 폭언에 일제 히 긴장을 띄며 그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폭언의 임자는 밀수업자로서 한때는 국경지대에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던 병철이다. 그는 일제히 쏠리는 군중의 시선에는 눈도 팔지 않고 정 면으로 빤−이 소장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 까지던지) 결려보려고 노리는 조전(挑戰)의 태세를 취한 다. 소장은 한동안은 말문이 맥혀 덤덤히 선 채 병철의 검우 테테한 얼굴만 얼빠진 양으로 바라보다가 “어째서? …어째서 거짓말인가?” 질문이 아니라 괴롬을 못 이겨 불으짖는 신음소리다. “거짓말이 아니구요. 일확천금이 어째서 비현실적이구 꿈이라는 말이우?” 50


병철의 태도는 더한칭 툭명스러워진다. 소장은 또 한동안이나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이번에는 확 내뿜듯이 노긔를 잔뜩 띄고 반문한다. “그럼 그것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게.” “얼마든지 하지요. 현재, 지금 누구니 누구니 하며 돈푼 씩이나 지니구 뽐내는 그들 중, 자초부터 한 푼 두 푼씩 바 른 노릇을 해서 모은 것을 가지구 부자라는 이름을 띈 자가 그래 몇이나 됩니까? 전부가 일확천금을 한 것이라구 해두 틀리진 않겠지요.” “그렇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업을 해서 얻은 것이야 아니지.” “천만에 말슴입니다. 그들의 사업은 전부가 밀수가 아니 면 부로카 노릇이었지요. 그두 대낮에 공공연하게 한 축이 랍니다. 멀리를 생각지 마시구 전번에두 목단강(牡丹江)22) 에서 소장님을 찾아왔지만, 그 무슨 회사 사장인지 한 그 양 반이 자초에는 무슨 업을 해서 그렇게 돈을 쥐였는지 아십 니까? 자초에는 도문(圖們) 개척 시에 밀수를 굉장히 해서 돈푼이나 쥐었으니까 아쥐 지금 회사두 그때에 얻은 것으루 된 것임에 틀림없겠지요.”

22) ‘牧丹江’의 오기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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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의 낯색은 새파랗게 질려간다. 그는 무에라고 말하 려고 씩은거리기는 하나 입술만 푸들푸들 떨릴 뿐 종시 입 은 열지 못한다. 모다들 킥킥거리며 조소하는 그 속에서 병철은 자못 통 쾌한 듯 빙글거리기까지 하며 옆채기에서 천천히 담배갑을 꺼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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