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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은 자기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 곧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종과 개체의 특수성, 언어와 전통의 일반성 때문에 돌과 나무와 짐승과 하늘 그리고 땅까지, 우리는 우리 식으로 믿는다. 아는 것이 아니다. 미신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프란스 푸르부스 2세 그림, 1619


인텔리겐치아 2180호, 2014년 8월 21일 발행

팔월의 새 책 2. 김홍표가 옮긴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신기관 (Novum Organum)≫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실험을 생각하고 수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지금까지 시 도된 것과는 전혀 다른 순서와 과정을 밟아서 진행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호 하고 변덕스러운 경험이란 것은 어둠 속을 헤 매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인간을 바르게 인 도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에 빠뜨린다. 경


험이 확고부동한 법칙에 따라 일정한 순서를 지켜 확보된다면 과학이 한층 진보할 것이라 는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신기관≫,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김홍표 옮김, 85쪽

무엇이 과학을 진보시키는가? 자연과 세계에 대한 더 많은 경험이다. 경험의 양이 관건인가? 그렇지 않다. 변덕스런 경험은 인간을 혼란 에 빠뜨릴 뿐이다. 변덕스런 경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베이컨이 이 책을 쓰던 당대 사람들이 흔히 가


졌던 도그마를 통해 얻고 해석되는 경험이다. 어떤 경험이 필요한 것인가? 도그마에서 벗어난,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 방법을 이용해 얻어진 경험이 필 요하다. 도그마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등장하는 ‘제1질료’, ‘부동의 운동자’ 같은 관념이다. 그가 ≪오르 가논(Organon)≫에서 주창한 논리와 추론 방법도 도그마다.


베이컨이 이 책 ≪신기관≫을 쓴 목적이 아리 스토텔레스 비판인가? 그렇다. 책 제목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은 라틴어로 새로운 기관, 즉 ‘신 기관’이라는 뜻이다. ‘신기관’이 무슨 뜻인가? ‘기관’이란 장치, 방법론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새로운 자연과학 방법론을 주창한 것 이다.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편견을 버리는 것, 그리고 귀납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어떤 편견인가? 네 가지 우상, 곧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다. 그대로 내버 려두면 사람을 잘못된 오류로 이끄는 마음의 네 가지 경향이다. 우상이 인간을 오류로 이끄는 이유가 뭔가? 종족의 우상은 인간 고유의 감정과 의지 때문 에,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특수성과 주관 성 향 때문에, 시장의 우상은 언어에 현혹되기 때문에, 극장의 우상은 그릇된 전통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발생한다. 미신과 신학을 보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도 우상인가? 물론이다. 사람들은 그의 철학 관념과 일치


하는 실재가 실제로 있다고 믿었다. 그로부터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모두 근거 없는 주 장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우상이다. 우상이 아니라면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베이컨은 귀납법을 강조한다. 귀납법이 무엇인가? 관찰된 사실을 엮어 내는 적절한 원리다. 자 연에 관한 진리를 잘 드러낼 수 있게 만드는 인식과 설명의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베이컨은 이 책에서 자신의 귀납 방법론을 토 대로 열의 성질을 논의한다. 열을 충분히 관


찰하고 실험해 그 형상과 본성에 대한 표를 세 가지 작성한다. ‘존재표’, ‘부재표’, ‘단계 표’다. 베이컨은 이것을 통틀어 예시표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열은 ‘물체의 내부에서 억 제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 소립자 의 팽창 운동’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이 방식 으로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성질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가? 근대 철학의 두 줄기인 경험론과 합리론 가운 데 경험론을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베이컨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가? 과학철학자들은 16~17세기 전까지 유기체


적 세계관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고 본 다. 베이컨을 필두로 등장한 기계론적 세계 관은 인간과 자연을 떼어 놓고 보는 방법론이 중심을 이룬다. 우리의 현재 세계관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아직 베이컨이 마련한 세계 관 속에 머물고 있다. 우리가 지금 베이컨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 기계론적 세계관을 뛰어넘어 진보하기 위해 서다. 그러려면 베이컨의 대표작인 이 책부 터 정독해야 한다.


이 책은 이번에 처음 번역된 것인가? 아니다. 정치학 전공자에 의한 번역서가 있 다. 그러나 자연과학 전공자가 베이컨을 번 역해 출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철학책 아닌가? 이 책은 자연으로부터 우리 인간이 진리를 파 악하는 방법론을 설명한다. 실험 관찰이 진 행되고 관찰 결과가 기록되고 정리된 뒤 그곳 으로부터 자연에 대한 진리를 추출한다. 당 시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이해에 큰 비중을 두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홍표다. 아주대학교 약학과 교수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은 자기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 곧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종과 개체의 특수성, 언어와 전통의 일반성 때문에 돌과 나무와 짐승과 하늘 그리고 땅까지, 우리는 우리 식으로 믿는다. 아는 것이 아니다. 미신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프란스 푸르부스 2세 그림, 1619


신기관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김홍표 옮김 자연과학 2014년 7월 25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362쪽 18,000원


작품 속으로

Novum Organum 신기관


차례

머리말 ·····················vii

잠언 1권 ·····················3 잠언 2권 ····················120

해설 ······················353 지은이에 대해··················360 옮긴이에 대해··················361


신기관, 또는 자연계의 진정한 이해를 향한 방법론에 대해


잠언 1권

1. 자연에 종속되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어서 자연을 분석해야만 하는 인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그 법칙을 사색 하는 한에서만 그것의 상당부분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뭔 가 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은 이해할 수도 없고 뭔가 할 수 도 없다.

2. 맨손이 그런 것처럼 그 자체로 방치된 인간의 지성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도구의 도움을 받아 일이 행해지듯 지성도 마찬가지다. 손에 도구가 주어지면 그에 상응하는 운동을 할 수 있거나 하기 쉽게 되듯이 정신의 도구도 사물 에 대한 이해나 그 원인을 파악하는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3.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원인을 모른 채로는 어떤 결과도 해석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자연을 지배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 다. 자연계가 작동하는 데에는 항상 뭔가 원인이 있다. 그것 이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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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연의 실체를 가능한 한 한데 모으거나 해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자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수 행한다.

5. 공학자, 수학자, 외과의사, 연금술사 혹은 마술사들이 자 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고 있 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듯 그들은 크게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고 괄목할 만한 성과도 없다.

6. 지금껏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 아닌 다른 것에 의 해, 지금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자기 모순이다.

7. 인간 노동과 지적 능력의 산출물인 책과 가공물은 매우 많다. 그러나 이들 다양성이라는 것 대부분은 기존에 이미 알려진 몇 가지 사실에 기초했거나 그것을 조금 변형시킨 것뿐이다. 이들 산출물의 근거가 되는 절대적 진리(공리, axioms)2)는 기실 그 수가 많지 않다.

2) 공리란, 어떤 이론 체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는 명제다. 어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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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게다가 이미 알려져 있는 공리라는 것도 우연적 사건이나 반복적인 실험에 의존해 나타났을 뿐이지 진정한 과학에 기 반은 둔 것은 아니었다. 소위 우리가 가진 과학이라는 것도, (그 체계가) 이미 발명된 것의 기초가 되는 공리가 잘 직조 된 것도 아니고, 방법론적으로도 새로운 발명이나 방향을 지시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9. 과학계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었던 인간의 정신력을 우리가 간과해왔던 데에, 혹은 그 것을 지나치게 믿어 왔거나 그른 방향으로 숭배해 왔던 데 에 그 뿌리가 있다.

10. 인간의 감각이 섬세하고 이해력이 특출하다고 해도 자 연의 미묘함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칭송 해 마지않는 인간의 사색과 가설들 혹은 번지르르한 해석들 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며 자연의 정수를 엿본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다.

명제들을 증명하기 위한 전제로 이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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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당대의 과학이 새로운 발견에 종종 걸림돌이 되는 것처 럼 현재의 논리학도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12. 현재의 논리학은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그들이 기초하 고 있는 잘못된 토대를 공고히 하거나 고착화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따라서 이로움은 적은 대신 해로움은 사뭇 크다.

13. 삼단 논법은 과학에 적용될 수 없었고 쓸데없는 공리만 을 양산했다. 자연의 미묘함에 도저히 미칠 수 없기 때문이 다. 삼단 논법은 명제를 확증하는 데 사용할 수 있지만 사물 의 진리에 접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14. 삼단 논법은 명제로 구성되어 있고, 명제는 단어들로, 단어는 개념의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개념(사물의 뿌리다) 자체가 혼란스럽거나 그것이 사실(fact)에서 조악 하게 추상된 것이라면 그것으로 논리의 상부 구조를 구축하 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진정한 귀납법(induction)이다.

15. 논리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우리의 개념은 아직 확 6


고하지 않다. 질료(substance), 성질(quality), 능동(action), 수동, 정수(essence) 자체는 제대로 확립된 개념이 아니다. 무겁다, 가볍다, 진하다, 묽다, 습하다, 건조하다, 생성, 붕괴, 인력, 척력, 원소, 물질(matter), 형태(form) 등은 앞의 것들 보다는 좀 덜하지만 이것들도 모두 아직은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다.

16. 몇몇 종들, 가령 사람, 개, 혹은 비둘기 같은 개념과 즉각 인식할 수 있는 감각, 예컨대 뜨거움, 차가움, 검은 것, 하얀 것 등은 우리를 물질적으로 잘못 인도할 가능성이 거의 없 다. 그러나 이런 개념도 물질이 변하거나 다른 것과 섞이면 헷갈릴 수 있다. 정당한 방법을 거쳐 실체에서 만들어지고 추상되지 않은 다른 모든 개념들은 잘못된 것이다.

17. 개념의 형성 과정이 그런 것처럼 공리를 세우는 데에도 방종과 오류가 있다. 또한 통속적인 귀납법에 의해 도출된 여러 원칙들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 삼단 논법에 의해 끌어 낸 낮은 수준의 명제와 공리는 여기서 더 언급할 것도 없다.

18. 지금까지 과학 분야가 이룬 발견은 천박한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매우 피상적이었다. 자연의 내부에 깊숙이 7


파고 들어가 그 본질에 접근하려면 보다 신뢰성 있고 정당 한 방법에 따라 사물(things)에서 유래된 개념과 공리가 필 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확실한 지적 수정을 거친, 보다 진보한 것이어야 한다.

19. 진리를 추적하고 발견하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뿐이 다. 하나는 감각과 개별자(particular)에서 출발해서 가장 일 반적인 공리에 도달한 다음, 그것을 확고부동한 진리로 삼 아 이들 원칙을 판단하고 중간 수준의 공리에 이르는 것이 다. 현재 유행하는 방법이다. 다른 방법들도 역시 감각과 개 별자에서 출발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기에서 점진적이 고 지속적으로 상승한 다음 마침내 가장 보편적인 공리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지금껏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 는 진정한 과학적 방법이다.

20. 인간의 지성은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19에서 서술된 길을 좇아, 논리학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가기 십상이다. 왜 냐하면 인간의 정신은 곧바로 일반화 과정을 치르면서 그곳 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실험을 계속해야 되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한다. 논리학은 이 과정에서 폐해를 더욱더 조장했을 뿐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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