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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부터 기적이 나타나는 순간 분홍 장미가 탐스럽다. 뿌리 주변을 부지런히 김맨 지렁이 덕분이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다. 그러나 지렁이는 왜 하필 그 장미를 골랐을까? 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렁이와 장미의 사랑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기적이다. ‹야외 결혼식 춤›, 피터르 브뤼헐 그림, 1566


인텔리겐치아 2189호, 2014년 8월 27일 발행

오디오북 특집 3. 김은숙이 짓고 최정원이 해설한 ≪김은숙 동화선집≫

잔치가 모두 끝나고 임금은 백성들에게 말했 습니다. “그대들과 나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오. 그러니 그대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해 보시오.” 백성들은 임금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머뭇거 리다가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맨 처음 일어


난 사람은 아까 임금이 팔을 부축했던 할머니 였습니다. “전하,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백성들도 이어, “저도 있습니다.” “저도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담, 한꺼번에 다 들을 순 없으니 한 분씩 손을 들고 말씀하시오.” 백성들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처럼 손을 번쩍 번쩍 들었습니다. 임금은 한 사람씩 차례로 말하도록 했습니 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백성들의 이야기는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것은 이러했습니다. “전하, 우리나라에는 지금 흰 꽃밖에 없습니 다. 흰 꽃은 우리들의 옷처럼 깨끗하여 마음


에 들지만 한 가지 꽃만을 가꾸는 건 좀 싱겁 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나라도 그런 대로 살 만큼 되었으니 흰 꽃이 아닌 다른 꽃도 가꾸 어 보고 싶사옵니다. 옷도 색색 옷을 입고 싶 습니다.” 백성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한 신하가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얼른 끼어들었습니다. “전하, 소인도 바로 그런 생각을 늘 해 왔던 바이온데…. 강 건너 이웃 나라에는 온통 빨 간 꽃만 피었다 하옵니다. 황공하오나 소인 을 그 나라로 보내 주시면 바람처럼 달려가서 빨간 꽃씨를 얻어 오겠나이다.” “강 건너 이웃 나라엘?” “네.” “그러도록 분부 내리시옵소서.”


백성들은 합창하듯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빨간 왕관의 나라 하얀 왕관의 나라>, ≪김은숙 동화선집≫, 김은숙 지음, 최정원 해설, 66~68쪽

오디오북 듣기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인가? 벽오동이라는 나라다. 제목에서 가리키는 하얀 왕관의 나라다.


뭐가 하얗다는 말인가? 벽오동 나라 임금이 하얀 왕관을 쓰기 때문 이다. 빨간 꽃만 핀다는, 강 건너 나라 이름은 뭔가? 대보름이다. 여기가 빨간 왕관의 나라다. 대 보름 나라 임금은 빨간 왕관을 쓴다. 임금은 사신을 보내는가? 그리한다. 사신을 통해 하얀 꽃씨를 보내고 답례로 빨간 꽃씨를 받는다. 백성들은 그 빨 간 꽃씨를 심는다. 빨간 꽃이 피는가? 아니다. 빨간 꽃뿐만 아니라 노란 꽃, 분홍


꽃, 자주 꽃, 보라 꽃, 연두 꽃이 핀다. 어찌 된 일인가? 빨간 꽃씨와 하얀 꽃씨가 수정된 결과다. 백 성들은 새로운 꽃향기에 취해 임금에게 다시 청한다. 꽃향기에 취한 백성들의 다음 청은 무엇인가? “강 건너 백성들도 우리 백성들도 모두가 착 한 백성입니다. 그러니 두 나라 백성들이 함 께 지낸다면 더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백성들의 다음 바람이다. 이루어지는가? 임금은 강에 다리를 놓는다. 그러자 대보름


나라에서도 다리를 놓기 시작한다. 마침내 두 다리가 이어진다. 두 나라 백성들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고 하나가 된다. 그래도 나라는 둘이 아닌가? 두 나라 임금은 백성이 하나가 되었으니 나라 도 합치기로 합의한다. 임금이 둘인데 한 나라가 될 수 있는가? 두 임금은 백성에게 여러 꽃으로 꽃 왕관을 만들게 한다. 낮에는 벽오동 임금이, 밤에는 대보름 임금이 이 왕관을 쓰고 백성들을 돌보 기로 한다. 이렇게 합의하고는 기쁨에 차서 쓰던 왕관을 강에 던진다.


한반도 분단과 통일 염원의 메시지인가? 그렇다. 그러나 벽오동, 대보름 나라가 남북 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소 통이 더 넓은 주제다. 현실성 없는 환상 아닌가? 벽오동 나라에서 꽃 가꾸기가 가장 중요한 일이듯 내 동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판 타지다. 당신의 작품에서 꽃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뭔가? 꽃은 아름답지만 경제적 효용은 없다. 그런 데도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꽃은 우주 적 포용력을 지닌 사물이다.


꽃만 그런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동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동화(童話)는 동화(動話), 곧 움 직이는 이야기다. 동화가 뭘 움직인다는 말인가? 동화는 세상의 모든 사물의 잠을 깨워 움직이 게 하는 이야기다. 당신에게 동화 쓰기란 무엇인가? 어린이들에게 생각의 씨앗이 박힌 말을 선사 하는 일이다. 동화는 어린이들 마음속에 생 각의 씨앗을 심어 그들의 마음을 키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판타지다.


왜 판타지가 필요한가? 보통의 언어로는 알 수 없는 것을 판타지의 언어로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언 어는 상상의 나라 언어다. 상상의 나라에 들 어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언어다. 보통 언어와 상상 언어의 차이가 뭔가? 보통의 언어는 이렇다. 꽃밭에 장미 세 그루 가 있었다. 어느 해던가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유독 탐스럽게 분홍 장미꽃을 피웠다. 신기 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뿌리 둘레의 흙 이 포슬포슬하고 주변에 흙탑 네댓 개가 쌓 여 있었다. 그래서 뿌리 근처를 파 보니 지렁 이들이 오글오글 모여 흙을 부수고 있지 않은 가. 여기까지가 보통 언어다. 판타지의 언어


는 여기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판타지의 언어는 어떻게 발생되는가? 새 침입자 장미를 위해 입이 헐도록 흙을 부 드럽게 만들어 주고 바람 길을 내주는 지렁이 랑이의 헌신적 사랑 이야기가 탄생된다. 여 기에다가 지렁이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가 장 곱고 부드러운 꽃잎 하나를 선사하는 장미 의 고운 마음을 보탰다. 나의 동화 <여왕을 만났어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판타지 동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사물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세상을 아름답 고 촉촉하게 가꾸는 것이다. 이러니 동화를


쓰는 일이 얼마나 기쁘겠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김은숙이다. 동화 작가다.


상식으로부터 기적이 나타나는 순간 분홍 장미가 탐스럽다. 뿌리 주변을 부지런히 김맨 지렁이 덕분이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다. 그러나 지렁이는 왜 하필 그 장미를 골랐을까? 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렁이와 장미의 사랑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기적이다. ‹야외 결혼식 춤›, 피터르 브뤼헐 그림, 1566


김은숙 동화선집 김은숙 지음 최정원 해설 한국 동화 2013년 6월 10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234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꽃불 켜는 집

넘실대는


일요일 아침 일요일인데도 영이는 일찍 깼습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늦잠을 좀 자도 괜찮겠지.’ 생각하고 아직 주무시는 엄마 방문을 똑똑 두드렸습니 다. “오냐, 영이냐? 벌써 일어났구나.” “엄마, 밥해 주세요.” “응? 좀 더 자지 않구서. 오늘은 일요일 아니니?” “네, 엄마. 하지만 오늘 친구들하고 어딜 가기로 약속했 어요.” “어딜?” 엄마는 계란빛 스웨터를 입으면서 방문을 열고 나오셨 습니다. “누구 생일이니?” “아뇨.” 영이가 도리질을 하였습니다. “그럼, 전람회?” “아니요.” “그렇담, 대관절 어딜 가기로 했다는 거냐?” 엄마는 궁금해서 자꾸만 재우쳐 물었습니다. 3


그러다가 금세 생각난 듯 “오라, 또 그 만화영환가 뭔가를 보러 우우 몰려갈 참이 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런 게 아니라니?” 엄마는 영 갑갑해 못 견디겠는데 영이는 있는 대로 뜸 을 들였습니다. “저어-, 섬엘 다녀오려구요.” “서엄? 무슨 섬?” “네에, 마파람섬이라고 하는데요. 지난 토요일, 삽사 리 버스 회사 전무 아저씨한테서 예쁜 초대장을 받았어 요.” “어디 있는 섬이라던?” “우리나라에서 섬이 제일 많은 남쪽 다도해 중에서도 맨 아래 있대요.” “그렇게 먼 델 어떻게 오늘 갔다가 오늘 돌아올 수 있겠 니?” 엄마는 퍼뜩 걱정이 앞섰습니다. 영이가 계집애답지 않게 늘 모험을 좋아하여 전에도 동 네 꼬마들과 산에 갔다가 길을 잃고 밤중에 온 적이 있기 4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래도 가까운 산이었기 망정이지, 오늘처럼 먼 데를 갔다가 만일 길을 잃는다면…. 엄마는 상상만 해도 아뜩했습니다. 고명딸은 기르면서 근심거리가 많이 생긴다던데 이만 큼 키우기도 얼마나 간을 졸였던가. 갑자기 눈앞에 어두운 문젯거리가 일어난 듯 엄마는 밥 지을 맘도 내키지 않는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습니 다. 그러자 영이가 안 되겠는지 방으로 들어가 서랍에서 종 이쪽지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엄마, 이 초대장을 보셔요.” 영이는 둘레가 나비 모양으로 된 노란 초대장을 엄마께 드렸습니다. 엄마는 영이가 보여 주는 초대장을 읽었습니다.

초대장

어린이 여러분께. 어린이 여러분 안녕! 저는 삽사리 버스 회사 전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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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니라 이번에 새로 들여온 초고속 삽사리 버스로 어 린이 여러분을 모시려 하오니 이때를 놓치지 말고 바람 한 번 쏘이시도록.

차비: 오는 걸로 때움. 모시고 갈 곳: 마파람섬 꽃불 켜는 집. 모이실 때: 다음 일요일 이른 아침(갈 곳이 조금 멀기 때문. 그러나 틀림없이 그날 돌아올 수 있음). 모이실 곳: 통나무 놀이터 앞. 삽사리 버스 회사 전무 올림.

“암튼 밥은 해 주마. 한데 영이야, 정말 오늘 꼭 돌아올 수 있겠니?” 엄마는 영이한테 다짐을 받아 둘 양으로 또 한 번 물었 습니다. “문제없어요. 엄마, 우리 모두 삽사리 회사 전무 아저씨 를 믿기로 했어요.” 영이는 오돌차게* 대답했습니다.

* 오돌차다: 허술한 데가 없이 매우 야무지고 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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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이네가 먼저 믿은 것은 삽사리 회사 전무가 아 니라 바람처럼 날아든 노란 초대장이었습니다. 그 초대장을 한 장씩 받았을 때,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 이 뛰었습니다.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신비한 일이 눈앞에 벌어질 것 같은 예감으로 온통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너, 이런 초대장 받았니?” 달수가 인호더러 물었습니다. “응, 너도 받았니?” 인호는 짝꿍 옥희한테 물었습니다. “응, 영이야, 넌?” 옥희는 뒷자리에 앉은 영이에게 물었습니다. “나도.” 영이는 콧소리가 조금 섞인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였습 니다. 사실 삽사리 버스 회사 전부의 초대장을 제일 먼저 받 은 아이가 바로 영이였으니까요. 초대장이 늘 받아 보던 생일 카드 같은 것과는 달라서 며칠 동안 혼자서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공부가 끝난 뒤, 아이들은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갈까?” 7


“가지 말까?” “글쎄, 한데 그 전무라는 분이 누굴까?” “혹, 우리를 나쁜 곳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닐까?” 아이들은 서로 물어보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영이 가 “얘들아, 초대장에 ‘꽃불 켜는 집’이랬지? 거긴 우리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데 아니니? 그러니까 말이야, 한번 가 보는 게 어떠니?” 하고 말했습니다. 이에 다른 아이들도 “그래, 그리구 말이야, 초대장의 글씨도 참 예쁘지 않 니?” “그렇담, 그런 글을 써 보낸 전무 아저씨도 우릴 해칠 것 같진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하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처음의 의심을 풀고, 노란 초대장과 초대장 속의 전무 아저씨를 믿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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