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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아버지를 찾을 때 아버지는 도덕을 가르쳤고 딸은 따른다. 사랑을 느끼게 되고 관능과 맞서지만 계율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가르침을 지킬 수 없는 딸은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가 딸을 죽인다.

연극 ‹에밀리아 갈로티›, 바르바라 다비트 브뤼슈 연출, 슈투트가르트 극장, 2012


인텔리겐치아 2198호, 2014년 9월 2일 발행

추석 특집: 가족 2. 윤도중이 옮긴 고트홀트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

영주 아! 아름다운 예술품아, 내가 너를 소 유하고 있는 게 사실인가? 자연의 한 층 더 아름다운 걸작아, 너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건, 그게 착한 어머니 건 고분고분하지 않은 늙은 아버지건 너에 대한 대가로 얼마를 요구하건 관 계없으니 요구하기만 해라. 달라고들


해. 마술사야, 너를 너한테서 직접 사 는 게 가장 좋으련만! 사랑스러움과 겸 손이 가득한 이 눈! 이 입! 이 입이 말하 기 위해 열리거나 미소를 지으면! 이 입! 누가 오는 소리가 들리네. 아직은 너를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구나. -≪에밀리아 갈로티(Emilia Galotti)≫, 고트홀트 레싱 (Gotthold E. Lessing) 지음, 윤도중 옮김, 21쪽

영주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에밀리아 갈로티다. 어느 야회에서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사랑하는가? 고백도 하기 전에 시종장 마리넬리로부터 그 녀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누구와 결혼한다는 것인가? 아피아니 백작이다. 영주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존경할 만한 젊은이고 잘생겼으며 부 자인 데다 명예심 있는 귀족”이다. 영주의 사랑은 끝난 것인가? 마리넬리가 나선다. 영주의 뜻인 양 백작을 사신으로 기용해 결혼식 전에 그를 멀리 보내 려 한다.


아피아니는 떠나는가? 사신을 거부한다. 예정대로 에밀리아와 결 혼하고자 한다. 다음 계략은 무엇인가? 사람을 시켜 백작과 에밀리아가 탄 마차를 습 격한다. 백작은 죽고, 에밀리아는 구출되어 영주의 별장으로 옮겨진다. 강도 떼가 한 짓 으로 위장한다. 영주의 승리인가? 간단치 않다. 에밀리아는 영주의 보호를 받 게 된다. 그때 영주의 연인 오르시나 백작부 인이 별장을 찾아온다. 그녀는 에밀리아가 연적임을 직감한다.


연적임을 어떻게 아는가? 그녀가 보낸 정탐꾼들이 성당에서 영주가 에 밀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야기를 엿들 었다. 그녀는 강도의 습격과 백작의 죽음에 대한 영주의 관련을 의심한다. 마리넬리를 추궁한다. 당사자 에밀리아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에밀리아의 아버지가 별장에 당도하고 오르 시나 백작부인으로부터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해 듣는다. 영주가 불순한 의도로 딸을 가 로채기 위해 백작을 살해했을 거라고 확신하 고 에밀리아에게 모든 것이 마리넬리와 영주 의 계략이었다고 말한다. 에밀리아는 아버 지의 단도로 자결하려 한다.


자결 시도의 이유가 무엇인가? 더 이상 순결을 지켜 낼 자신이 없어서다. 그녀는 죽는가? 자결하려다 제지당하자 아버지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청한다. 아버지의 칼에 찔려 죽는다. 비극인가?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꾸준히 상연되는 독일 비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18세기 독일 문학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기 도 하다.


이 작품이 논쟁의 중심에 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작품이 한 가정의 비극을 그린 가정극인 가, 아니면 독재자와 절대주의 체제를 비판 하는 정치극인가 하는 문제다. 가정극을 주장하는 논지는 무엇인가? 에밀리아의 죽음이 아버지의 도덕지상주의 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엄격한 도덕관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윤리적, 종교 적 원칙만 배웠을 뿐, 외부 자극에 대처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등 자신의 문제를 자율적으 로 해결하는 능력은 키우지 못했다. 결국 에 밀리아는 관능을 부도덕한 것으로 보는 자신 의 도덕관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도덕성에만 집착하는


시민 계급의 교육 실패를 보여 준다. 정치극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주가 권력을 남용해 절제되지 않은 열정을 충족하도록 허용하는 절대주의 체제 역시 비 극적 파국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뜻은 무엇이었나? 레싱은 이 작품을 통해 자율성보다는 강제에 의해 담보되는 시민 계급의 도덕률뿐만 아니 라 무책임한 지배 계급의 도덕 불감증을 동 시에 비판했다. 그럼으로써 시민 계급의 해 방 운동이 자체 모순과 적대 세력 때문에 좌 절할 위기에 처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그려 낸 것이다.


레싱은 누구인가? 독일 계몽주의 시대에 문학평론가, 이론가, 작가, 언론인으로서 문화 전반에 걸쳐 뛰어 난 성취를 이룬 독일 근대 희곡의 아버지다. 당신은 누구인가? 윤도중이다. 숭실대학교 독문과 명예교수다.


딸이 아버지를 찾을 때 아버지는 도덕을 가르쳤고 딸은 따른다. 사랑을 느끼게 되고 관능과 맞서지만 계율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가르침을 지킬 수 없는 딸은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가 딸을 죽인다.

연극 ‹에밀리아 갈로티›, 바르바라 다비트 브뤼슈 연출, 슈투트가르트 극장, 2012


에밀리아 갈로티 고트홀트 레싱 지음 윤도중 옮김 희곡 2014년 4월 25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94쪽 14,500원


작품 속으로

에밀리아 갈로티


나오는 사람들

에밀리아 갈로티 오도아르도 갈로티: 에밀리아의 아버지 클라우디아 갈로티: 에밀리아의 어머니 헤토레 곤차가: 구아스탈라의 영주 마리넬리: 영주의 시종장 카밀로 로타: 영주의 보좌관 콘티: 화가 아피아니 백작 오르시나 백작부인 안젤로 그리고 하인 약간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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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막


무대: 영주의 집무실

제1장

영주, 시종

영주

(편지와 서류가 가득한 탁자에 앉아 몇 개를 훑어본 다.) 불평불만, 온통 불평불만뿐이로군. 탄원서, 죄 다 탄원서뿐이야. 서글픈 업무로다. 그런데도 사람 들은 나를 부러워한단 말야. 하기야 모든 사람을 다 도와줄 수 있다면야 부러움을 살 만도 하지. 에밀리 아? (탄원서 가운데 하나를 뜯어 서명된 이름을 보면 서) 에밀리아라? 허나 에밀리아 브루네스키로군. 갈 로티가 아니야. 에밀리아 갈로티가 아냐. 그런데 이 에밀리아 브루네스키가 원하는 게 뭔가? (읽는다.) 엄청난 걸, 대단히 많은 걸 요구하는군. 하지만 이름 이 에밀리아니 들어주기로 하지. (서명을 하고 종을 울린다. 종소리를 듣고 시종이 들어온다.) 대기실에 나와 있는 보좌관은 아직 없겠지?

시종

없습니다. 7


영주

하긴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났어. 아주 상쾌한 아침이 야. 마차를 타고 산책하고 싶구나. 마리넬리 후작이 수행했으면 좋겠으니 부르라. (시종 퇴장) 이제 더는 집무를 못하겠네. 마음이 아주 평온한 상태였어. 아 주 평온했었다고 생각돼. 그런데 가엾은 브루네스키 란 여자의 이름이 하필이면 에밀리아라니. 순식간에 마음의 평온이 사라져버렸어. 그리고 모든 게.

시종

(다시 등장해서) 후작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

영주

오르시나라고? 저기 놓아라.

시종

백작부인의 심부름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주

필요하면 답신을 보내겠다. 그녀가 어디 있느냐? 도

시종

어제 도성으로 오셨습니다.

고 여기 오르시나 백작부인의 서신이 있습니다.

성인가, 별장인가?

영주

더욱 나쁘군, 아니 더욱 좋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심 부름꾼이 기다릴 필요 없으니까. (시종 퇴장) 친애하 는 백작부인 (편지를 집어 들고 화가 나서) 읽은 거 나 다름없어. (편지를 내던지며) 그래, 그녀를 사랑 한다고 생각했었지. 무슨 생각인들 못하겠는가? 정 말 사랑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지난 일이야.

시종

(다시 등장해서) 화가 콘티가 알현을 청합니다. 8


영주

콘티라고? 좋아, 들라 해라. 그자를 보면 다른 생각 을 하게 될지 모르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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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콘티, 영주

영주

평안하오, 콘티? 어떻게 지내오? 미술은 어떠하오?

콘티

미술은 빵을 쫓아다닙니다, 전하.

영주

그래서는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내 작은 영토 안에 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하지만 미술 가도 일할 마음이 있어야겠지.

콘티

일이라고요? 일하는 건 미술가의 즐거움입니다. 다 만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예술가라는 이름을 잃 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영주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라는 게 아니라 집중적으로, 한두 가지 일을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이오. 맨손으 로 온 건 아니겠지?

콘티

전하께서 주문하신 초상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주문하시지 않은 초상화도 한 점 가져왔습니다. 볼 만한 것이라 가져왔습니다.

영주

그게 뭐더라?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콘티

오르시나 백작부인입니다. 10


영주

그렇지. 그걸 주문한 지가 좀 오래되었지.

콘티

아름다운 숙녀 분은 날마다 그릴 수 있는 게 아닙니 다. 백작부인은 지난 3개월 동안 단 한 번 포즈를 취 해주셨을 뿐입니다.

영주

그림들이 어디 있소?

콘티

대기실에 있는데 가져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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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영주

오르시나의 초상화라. 좋아. 그녀의 그림이지 그녀 자신은 아니니까. 실물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는 걸 어쩌면 그림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 허나 그걸 다시 찾고 싶지 않아. 화가가 성가시군. 그녀가 화가 를 매수했다는 생각까지 드네. 그래도 상관없어. 다 른 밑그림 위에 다른 색깔로 그린 그림이 내 마음속 에서 그녀에게 다시 자리를 만들어준다면 진정으로 마다하지 않겠어. 이전에 사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언제나 아주 경솔하고 쾌활하고 자유분방했었지. 이 제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야. 허나 아니야, 아냐. 마 음이 더 편하든 안 편하든 지금 이대로가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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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영주, 콘티(그림 한 점을 뒤집어서 의자에 기대어 놓는다.)

콘티

(다른 그림을 정면으로 세워놓으면서) 전하, 저희 예 술의 한계를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움의 최 대 매력 가운데 많은 것이 그 한계 밖에 있습니다. 이 렇게 서서 보시지요.

영주

(잠시 관찰한 후)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그대의 솜 씨, 붓 솜씨를 두고 하는 말이오. 허나 미화했어, 지 나치게 미화했군그래.

콘티

본인께선 그런 생각이 아니신 듯합니다. 그리고 실 제로도 미술이 미화해야 하는 것보다 더 미화한 건 아닙니다. 미술은 조형자로서 자연이, 그런 것이 있 다면 말씀입니다만, 구상한 대로 형상을 그려야 합 니다. 그리기 어려운 소재로 인한 한계와 상황에 따 른 훼손 없이 말입니다.

영주

생각할 줄 아는 미술가는 배나 더 값진 법이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대 말로는 본인은….

콘티

송구합니다, 전하. 그분은 제가 존경해야 하는 인물 13


입니다. 그분께 누가 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영주

얼마든지 해도 좋소. 그런데 본인이 뭐라 말했소?

콘티

내가 이보다 더 못생기지 않았다면 만족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영주

더 못생기지 않았다면? 정말 그 사람다운 말이로군.

콘티

그렇게 말씀하시며 표정을 지으셨는데, 이 그림에는

영주

그게 바로 내 말이오. 지나친 미화라는 말은 바로 그

물론 그런 표정의 흔적도 기미도 없습니다.

런 뜻이오. 오! 나는 알고 있소, 우아미 여신의 얼굴 마저 흉하게 일그러뜨릴 오만하고 경멸하는 표정 말 이오. 아름다운 입이 비웃듯 살짝 일그러지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부정하진 않소. 허나 분명히 말하지만 살짝이어야 하오. 일그 러짐이 찡그림이 되어서는 안 되오. 이 백작부인의 경우처럼. 그리고 두 눈은 즐기는 듯 비쭉이는 입을 감독해야 하오. 잘난 백작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눈 이오. 이 그림에서조차 그런 눈이 아니오. 콘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

영주

무엇 때문에? 백작부인의 커다랗고 툭 튀어나온, 무 표정하게 똑바로 응시하는 메두사 같은 무서운 눈을 가지고 미술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것, 그걸 그대는 14


적절하게 해냈소. 적절하게라고 말했던가? 그렇게 적절하지 않은 게 더 적절한 게 되겠지. 이 그림을 보 고서 그 인물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지 그대가 직 접 말해보시오. 그림은 그래야 하지 않겠소. 그대는 오만을 위엄으로, 조소를 미소로, 침울한 광적 기질 을 차분한 우울함으로 바꾸었소. 콘티

(약간 불만에 차서) 아이고, 전하… 저희 화가는 그림 이 완성될 때에도 주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인의 가슴이 뜨거우리라 기대합니다. 저희는 사랑하는 눈 으로 그립니다. 그리고 저희를 평가하는 건 사랑하는 눈이어야만 할 겁니다.

영주

에, 저, 콘티. 왜 한 달 전에 이 그림을 가져오지 않았 소? 저리 치우시오. 다른 그림은 무엇이오?

콘티

(그것을 가져와 뒤집어 든 채) 역시 숙녀의 초상화입

영주

그럼 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소. 그림은 여기나 (손

니다.

가락으로 이마를 가리킨다.) 여기에 (손가락으로 가 슴을 가리킨다.) 품은 이상에는 미치지 못하니까. 이 보시오, 다른 소재를 다룬 그대 솜씨를 감상하고 싶 소. 콘티

저보다 더 경탄할 만한 솜씨는 많습니다만 감히 장 15


담하건대 이보다 더 경탄할 만한 대상은 없을 겁니 다. 영주

그렇다면 단언하건대 화가 자신의 부인이 아니겠소. (화가가 그림을 돌려놓자) 이게 뭔가? 이보시오, 그 대의 작품이오, 아니면 내 환상의 산물이오? 에밀리 아 갈로티가 아니오!

콘티 영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이 천사를 아십니까? (진정하려고 애쓰나 시선을 그림에 고정시킨 채) 그 저 조금, 겨우 누군지 알아볼 정도요. 몇 주 전 어느 야회에서 모친과 함께 참석한 그녀를 만났었소. 그 후로 그녀와 마주친 곳은 넋 놓고 바라보기에는 적 당치 않은 성스러운 장소뿐이었소. 그녀의 부친도 아는 사람인데 내 편은 아니오. 사비오네타에 대한 내 소유권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자가 바로 그 자였소. 늙은 군인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성정이 거 칠지. 그 밖에는 건실하고 훌륭한 사람이오.

콘티

아버지는 그러합니다만 여기 있는 건 그 사람의 여 식입니다.

영주

이럴 수가! 꼭 거울에서 빼내온 것 같군. (여전히 그 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보시오, 작품 칭찬에 정 신이 팔려 그린 사람에 대한 칭찬을 잊는 경우야말 16


로 화가를 제대로 칭송하는 것임을 잘 알 것이오. 콘티

그렇지만 저는 이 그림으로 인해 저 자신이 매우 못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렇게 저 자신 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는 걸 아주 흡족하게 생각합니 다. 직접 눈으로 그리지 못하는 게 안타깝기 그지없 습니다. 눈에서 팔을 거쳐 붓으로 이어지는 긴 노정 에서 얼마나 많은 게 상실됩니까! 그러나 말씀드렸 듯이 여기서 상실된 게 무엇이고, 그게 어떻게 상실 되었으며, 어째서 상실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안다 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제가 상실되지 않 게 한 모든 것에 대해 갖는 것만큼 또는 그 이상의 자 부심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상실되지 않게 한 것보 다 상실된 걸 안다는 점에서 제가 정말 위대한 화가 임을, 그러나 제 손이 항상 위대한 화가처럼 잘 그리 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전하, 라파엘로1)가 불행하게도 손 없이 태어났더라면 가 장 위대한 천재 화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1)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당대에 가장 위대한 천재로 간주 되던 이탈리아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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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마지못해 그림에서 시선을 떼며) 무슨 말을 했소? 뭘 물었소?

콘티

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리입 니다. 전하의 마음은 온통 눈에 집중되어 있었군요. 저는 그런 마음, 그런 눈을 좋아합니다.

영주

(냉정을 가장하면서) 이보시오, 그러면 그대는 정말 로 에밀리아 갈로티를 우리 도성에서 가장 빼어난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콘티

가장 빼어난 미인 가운데 한 사람, 우리 도성에서 가 장 빼어난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요? 절 조롱하 시는군요, 전하. 아니면 줄곧 제 말씀을 듣지 않으신 것처럼 보지도 않으셨나 봅니다.

영주

이보시오, (시선을 다시 그림으로 향하면서) 우리 같 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 눈을 믿겠소? 아름다움을 평 가할 수 있는 건 원래 화가뿐이오.

콘티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느끼기 전에 먼저 화가의 판결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뭐가 아름다 운지를 먼저 저희 화가들한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수도원으로나 보내야 할 겁니다. 전하, 말씀드리지 만 화가로서 제 생애 최대의 행운 가운데 하나는 에 밀리아가 모델이 돼준 겁니다. 그때부터 저한테는 18


이 머리, 이 얼굴, 이 이마, 이 눈, 이 코, 이 입, 이 턱, 이 목, 이 가슴하며 이 몸매, 이 전체적인 골격이 여 성의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유일한 대상이 되었습니 다. 그녀가 모델이 된 원본은 딴 곳에 사는 그녀의 부 친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이 복사본은…. 영주

(급히 콘티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 건 아니겠지?

콘티

전하의 취향에 맞으신다면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영주

취향이라. (미소 지으며)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 대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 가 어디 있겠소? 저기 저 초상화는 다시 가져가서 표 구를 맡기시오.

콘티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영주

표구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하 라고 하시오. 그건 갤러리에 걸어놓을 생각이오. 그 러나 이건 여기 두겠소. 습작을 가지고 그렇게 법석 을 떨 건 없으니까. 그리고 습작은 걸어놓지 않고 항 상 손이 닿는 곳에 두는 법이오. 고맙소, 콘티, 정말 고맙소. 그리고 이미 말한 것처럼 내 나라에서는 미 술이 빵을 쫓아다니지 않도록 하겠소. 내가 먹을 빵 이 없어질 때까지. 이보시오, 재정 담당관에게 사람 19


을 보내 계산서를 제시하고 이 두 초상화 대금을 청 구하시오. 그대가 원하는 액수를 청구하시오. 원하 는 액수만큼, 알겠소? 콘티

전하, 그토록 후하게 상급을 내리시니 전하께서 예 술이 아닌 다른 걸 포상하시려는 게 아닌가 우려되 는군요.

영주

오, 저 화가 질투심도 많군! 그렇지 않소. 잘 들으시 오, 콘티, 그대가 원하는 만큼이오. (콘티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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