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20140923 p by Communicationbooks

초능력의 정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인간, 그는 초능력자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신비와 마술, 신념과 열정의 결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한때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보면.

연극 ＜초능력자＞, 에스트라다 극장, 알렉산드르 시노토프 연출, 2013

인텔리겐치아 2228호, 2014년 9월 23일 발행

구월의 새 책 2. 백승무가 옮긴 그리고리 고린의 ≪초능력자≫

라리체프 안녕하시오, 동무들! 제가 맞게 왔 죠? 왜 말이 없으실까? 대답해 보세 요, 맞게 왔나요? 클랴긴 제대로 왔는지 안 왔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아시겠죠. 누굴 찾아오셨나요? 라리체프 여기가 몇 호실인가요? 425호실 맞죠? (방에서 나가더니 잠시 후 돌 아온다.) 425호실 맞네요. 당신들 이 바로 그 특별한 사람들인가요?

클랴긴 우리가 초능력자들입니다. 라리체프 초능력자! 제가 말하려던 게 그거 예요. (프로호로프와 클랴긴을 쳐 다본다.) 음, 그래요. 상상하던 대 로군요. 누가 누구인지 한번 맞혀 보리다. 당신이 프로호로프고, 당 신은, 그 불쾌하고 딱딱한 시선으 로 보아 클랴긴이군요. 맞혔나요? 그런데 이바노프는요? 이바노프 어딨나요? 이바노프 씨가 있어야 하는데. 프로호로프 이바노프는 나갔어요. 클랴긴 (라리체프에게) 당신은 누구요? 라리체프 아, 저는 라리체프입니다. －≪초능력자(Феномены)≫, 그리고리 고린(Григорий Горин) 지음, 백승무 옮김, 26쪽

초능력이라니? 프로호로프는 정신 집중만으로 물체를 움직 이는 염력을 가졌다. 클랴긴은 어떤 벽이든 뚫고 볼 수 있고 이바노프는 다른 사람의 생 각을 읽을 수 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라리체프는 누구인가? 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사람, 옐레나 페트로 브나의 남편이다. 그녀가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가 뭔가? 학회에 이들의 사례를 보고해 초능력의 존재 를 인정받기 위해서다.

라리체프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는 이들을 사기꾼이라 의심한다. 아내가 망신당하지 않도록 이들의 학회 참석 을 막으려 한다. 사기꾼인가? 클랴긴의 투시력은 거짓으로 밝혀진다. 이 바노프는 평범한 엔지니어였다. 프로호로프의 염력도 사기인가? 그는 좀 다르다. 염력이 있다. 그러나 움직이 려는 물체에 대해 적의를 갖고 분노해야만 염 력이 발동한다.

학회의 인정은 물 건너간 것인가? 아니다. 아내를 실망시킬 수 없었던 라리체 프가 이들을 돕는다. 감기 때문에 학회에 참 석할 수 없는 아내를 대신해 이들과 학회에 간다. 학회를 속일 수 있었는가? 관계자를 매수해 시험 과제를 빼돌린다. 클 랴긴과 이바노프는 시험을 통과한다. 프로 호로프는 전날 과로 때문에 제 능력을 발휘하 지 못했다. 혼자만 탈락한다. 낙담하던 차에 매수 사실을 알게 된다. 매우 분노한다. 분노의 결과는 무엇인가? 모든 사실을 옐레나에게 폭로하려 한다. 라

리체프가 말리다 총까지 들게 된다. 마침 현 장에서 이 소동을 보게 된 옐레나는 모든 사 실을 알게 된다. 옐레나의 반응은? 라리체프는 사랑이라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남편을 감싼다. 프로호 로프를 원망하면서 분노가 아닌 사랑의 감정 으로 물체를 움직여 보라고 충고한다. 멜로드라마인가? 초능력이 소재지만 주제는 평범한 사랑의 감 정이 바로 인간의 진실한 초능력이라는 반어 적 메시지다. 코믹 멜로드라마의 외형을 띠 고 있지만 풍자적 기지와 철학적 사유가 깊은

작품이다. 풍자의 대상은 무엇인가? 1980년 봄, 소련은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사회주의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거 리를 화려하게 치장했다. 국가 차원에서 초 능력자를 발굴, 육성하던 정책도 이러한 겉 멋의 소산이었다. 이 국가사업을 풍자한 것 이다. 이 작품의 철학 사유는 무엇을 묻는가? 고린은 동시대인의 고독과 자아 상실, 정체 성 혼란을 그린다. 세 초능력자가 옥신각신 하면서 만들어 내는 갈등은 현대인이 처한 실 존 문체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고린은 누구인가?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러시아 극작가다. 어떻게 명성을 얻었나? 풍자와 유머가 가득한 글을 여러 잡지와 신문 에 기고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텔레비전 코미디쇼 에 고정 출연해 자신의 유머 작품을 낭독했는 데 그 인기가 대단했다. 고린의 유머는 무엇이 특별한가? 일회적인 휘발성 유머가 아니라 세련된 플롯 과 위트 있는 대사에 사회성 있는 테마와 철 학적 사유가 녹아 있었다. 그와 비교할 만한 극작가나 풍자 작가가 없을 정도였다. 답답

한 시대에 그가 선사하는 웃음은 대중에게 산 소와도 같았다. 당신은 누구인가? 백승무다. 연극 평론가다.

연극 ＜초능력자＞, 에스트라다 극장, 알렉산드르 시노토프 연출, 2013

초능력자 그리고리 고린 지음 백승무 옮김 희곡 2014년 7월 17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32쪽 18,000원

작품 속으로

초능력자

나오는 사람들

미하일(미샤) 미하일로비치 프로호로프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클랴긴 예브게니 세묘노비치 이바노프 올레크 니콜라예비치 라리체프 옐레나 페트로브나 라리체바: 라리체프의 아내 안톤: 프로호로프의 동생 호텔 당직자

사건은 모스크바의 한 호텔 객실에서 이틀 동안 벌어진다.

1막

1장

모스크바 인근 호텔의 투룸 객실. 왼쪽에는 현관으로 이어 지는 어두운 입구가 있고, 오른쪽에는 침실로 들어가는 문 이 있다. 이러한 객실에 어울리는 평범한 가구들(옷장, 탁 자, 의자들, 침대 두 개)이 있고, 벽에는 스피커가 달려 있 다. 구석 탁자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현관 쪽에서 이바 노프가 빠르게 등장한다. 45세 정도의 인텔리로 보인다. 손 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다. 그는 지나가는 길에 텔레비전 을 끄고 침실로 들어간다. 이어서 클랴긴이 등장한다. 50세 정도. 헐렁한 양복을 입고, 두 손에는 상자, 쇼핑백 등 많은 꾸러미를 들고 있다. 그는 모든 짐을 한 침대에 내려놓고, 꾸러미 중 하나를 열어 여성 용 원피스를 꺼낸다. 원피스를 자기 몸에 대보더니 화장실 로 들어간다. 지나가는 길에 텔레비전을 켠다. 잠시 후 호텔 당직자가 프로호로프를 데리고 들어온다. 침 울한 표정을 한 서른 살 정도의 남자. 작은 트렁크를 들고 있다.

호텔 당직자 (텔레비전을 끄고 침대 하나를 가리킨다.) 여기

서 주무시면 돼요. 이게 당신 침대예요. 프로호로프 알겠습니다. 호텔 당직자 이 객실에 두 사람이 더 묵을 겁니다. 한 명은 저

기서 자고, 다른 한 명은 저쪽 침실에서 잘 거예요. 모두 당신 쪽 사람들이에요. 프로호로프 당신 쪽이라뇨? 호텔 당직자 잘은 모르지만, 객실을 빌린 그 단체 말입니다.

누가 이 객실을 예약해 줬나요? 프로호로프 저널요. 호텔 당직자 어떤 저널? 프로호로프 정신병리학요. 호텔 당직자 뭐라고요? 프로호로프 정신병리학 저널요. 호텔 당직자 (약간 경계하며)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의사? 프로호로프 아뇨. 저는 운전기사입니다. 운수회사에서 일해

요. 호텔 당직자 그럼 환자란 말이군요? 프로호로프 그게 무슨 말이오? 호텔 당직자 생각해 봐요, 그런 저널 일로 왔다면…. 프로호로프 그게 어때서요? 사람들이 나를 연구하는 겁니

다. 8

호텔 당직자 그러니까 환자라는 거죠. 그 분야 환자. 프로호로프 (화가 나서) 왜 나더러 환자라는 거예요? 나는

그 분야의 환자가 전혀 아닙니다! 반대로 끝내주게 건강하다고요. 그래서 절 연구하려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 두뇌를 말입니다. 제 두뇌는 아주 특별해요.

(호텔 당직자가 프로호로프의 머리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달리 특별한 게 보이지 않는다.)

호텔 당직자 당신 뇌가 뭘로 특별하다는 거죠? 프로호로프 전 물체들을 옮길 수 있어요. 호텔 당직자 어디로? 프로호로프 여기저기 아무 데나. 호텔 당직자 그럼 텍배 기사인가요? 프로호로프 (화나기 시작) 운전기사라고 말했잖아요! 전 생

각만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어요. 의지로 말이죠! 이해가 돼요? 손이 아니라, 생각으로요. 이건 텔레키 네시스, 그러니까 염력이라 부르는 희귀한 현상이에 요. 들어 본 적 없어요? 호텔 당직자 없어요. 프로호로프 그럴 리가 있나. 여러 신문에 나왔어요. ≪주보≫

란 신문에도. 물론 의심하는 사람도 많아요. 아직 과 학으로는 설명되지 않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 한 일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전 움직일 수 있어요! 호텔 당직자 뭘 움직일 수 있죠? 프로호로프 그때그때 달라요. 기분에 따라서요. 성냥갑도

움직이고, 꽃병이나 의자를 움직이기도 하죠. 호텔 당직자 그럼, 한번 보여 주세요. 프로호로프 지금은 내키지 않네요. 물건을 옮기려면 특별한

상태에 빠져야 해요. 어떤 특별한 신경 상태 말이죠. 이해되나요? 내적으로 긴장해야 한다고요! 알겠어 요? 이거 하면 힘이 쭉 빠져요. 성냥통 하나 옮기는 데도 기진맥진한다고요! 내일 오후에 오시면 보여 줄게요. 내일 아침부터 저널에서 절 연구하니까 오 후에는 여유가 있어요. 호텔 당직자 좋아요. 올게요. (잠시 생각에 잠겨) 그러면 여

기 묵고 있는 다른 두 사람도 그건가요? 당신처럼? 프로호로프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럴걸요! 호텔 당직자 괜히 당신들을 한 방에 넣었군요. 따로따로 묵

는 게 더 좋을 뻔했어요. 같이 지내는 게 그다지 내키 진 않죠? 프로호로프 왜요?

호텔 당직자 그러니까… 가구는 옮기면 안 돼요! 지배인이

알면 호통을 칠 테니까요. 프로호로프 알겠어요.

(호텔 당직자 나간다. 프로호로프는 전화기로 가서 번호를 누른다.)

(수화기로) 여보세요! 누구시죠? 저는 미하일인데 요! 네, 도착했습니다. 오늘요. 호텔 ‘관광객’입니다. 안톤 좀 불러 주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상대편에서 전화를 끊은 것 같다.)

(험악하게) 그래, 좋아!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원피스를 입은 클랴긴이 나온다. 프 로호로프의 놀란 시선엔 아랑곳없이 자기 침대로 간다.)

클랴긴 (기뻐하며) 아! 이웃이 도착했네요. 반가워요! (다가

가서 손을 내민다.)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클랴긴 입니다. 11

프로호로프 (악수를 하며) 미하일 프로호로프입니다. 클랴긴 라리체바가 그러던데, 당신은 아침 일찍 도착하기로

했다면서요. 전화해서 걱정을 하더라고요. 당신이 없어졌다면서요. 프로호로프 비행기가 늦어졌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

런 원피스를 입고 있나요? 클랴긴 아내에게 주려고 샀어요. 선물로요! 프로호로프 그런데 왜 당신이 입고 있죠? 클랴긴 치수를 재려고요. 와이프는 나랑 사이즈가 똑같거든

요. 백화점에서는 입어 볼 수가 없으니까 여기서 입 어 보고 결정하려고요. 꽉 조이면 바꿔야죠. 입고 좀 움직여 봐야 해요. 부담스러우세요? 프로호로프 제가요? 괜찮으니까 입고 계세요. 클랴긴 이만한 원피스는 없겠죠, 네? 프로호로프 예쁘군요. 클랴긴 어때요, 와이프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프로호로프 아마도요. 클랴긴 우리를 어디 먼 데로 끌고 가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요. 그래야 옷을 교환하죠. 전 옷을 자주 교환하는 편이에요. 옷을 사고 마음이 바뀌면 교환하러 가죠. 원래 성격이 그래요! 옷을 사 오면 바꾸고 싶어진답 12

니다. 옷을 팔았으면 바꿔 줘야죠! 원피스 하나가 100루블인데, 그게 장난입니까? 교환을 원하면 바꿔 줘야죠! 그런데 대부분은 잘 바꿔 주지 않아요. 제가 동독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요. 진짜 잘 바꿔 주더라 고요. 독일 사람들은 정말 공손해요. 100번이라도 교환하라는 거예요. 미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프로호로프 크라스노다르에서 왔어요. 클랴긴 저는 피아도시야에서 왔어요. 둘 다 남쪽 출신이네!

이건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입니다. 우리 둘 다 초능 력자고 남쪽 출신이라는 거 말이에요.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기후가 뇌 활동에 영향을 미친 다는 겁니다. 프로호로프 과일도요. 클랴긴 예? 아, 그래요, 당연하죠! 과일에, 채소에. 우리 지

역은 정말 농산물이 좋아요. 프로호로프 (호기심에 차서 클랴긴을 유심히 본다.) 저, 당

신은 어떤 초능력을 가지고 있죠? 클랴긴 벽 너머를 볼 수 있어요. 프로호로프 (놀라서) 네? 어떤 것이든 다 뚫고요? 클랴긴 원칙적으론 모든 것을 다 뚫고 봅니다. 물론 낡은 벽

너머를 보는 건 좀 더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벽돌을 13

세 겹으로 쌓았잖아요. 요즘은 시멘트 블록을 쌓으 니까 훨씬 더 보기가 편해요. (복도 쪽 벽을 본다.) 어! 보여요! 청소부가 오고 있어요! 파란 작업복을 입고, 허리띠를 꽉 묶고. 어－어! 교태를 부리며 가 네요! 어－어! 당신한테도 보이나요? 안 보여요? 저 는 보이는데! 프로호로프 (감탄하며) 그렇군요! 어릴 때부터 그랬나요? 클랴긴 아뇨. 어렸을 때는 평범했어요. 다 커서 이 능력을

발견했어요. 완전히 우연히요! 피아도시야에 있는 이웃이 2미터짜리 울타리를 세워 놓고 살았는데, 갑 자기 합판을 덧대어 울타리를 높이는 거예요. 왜 그 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매일 아침 그 울타리 옆 을 지나면서 골똘히 생각했죠. 이 자식이 뭐 때문에 울타리를 높인 거지? 그래서 점점 더 자세히 보기 시 작했죠. 프로호로프 그냥 물어보지 그랬어요. 클랴긴 물어도 봤죠. 근데 설명해 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자기네 마당에 수영장을 파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느 날 주의를 집중해서 울타리 를 바라봤는데요. 갑자기 눈앞에 있던 울타리가 녹 아내리면서 그 너머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예요. 14

프로호로프 그랬더니 뭐가 있던가요? 클랴긴 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녁마다 아내와 차를 마시며

평소처럼 살고 있더라고요. BBC 방송1)이라도 듣고 있나 했지만, 의심스러운 점은 하나도 없었어요! 아 무 짓도 하지 않더라고요. 직장에서 돌아와 아내와 차를 마시고 자러 가는 게 다예요. 근데 왜 울타리를 높였을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오랫동안 울 타리 너머를 투시한 덕분에 내 재능은 발달하기 시 작했어요. 누가 무엇을 하는지, 누가 일을 하고 누가 바보짓을 하는지 보게 된 거죠. 도시 전체가 나를 두 려워했어요! 프로호로프 그랬군요! 감찰관2) 같은 사람이 된 거군요! 클랴긴 바로 그겁니다! 아, 미샤, 나는 단지 남의 집 담 너머

만을 본 게 아니었어요. 구구절절 얘기해 주면 당신 도 미쳐 버릴 거예요. 저는 정말 미칠 뻔했다니까요! 의사를 찾아갔더니 그 의사가 이 뇌 전문 저널에 편

1) BBC 방송은 영국 채널이었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시청을 금지했다. 자본주 의 국가 방송을 본다는 것은 간첩 행위에 해당했다. 2)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작가 고골의 ＜감찰관＞을 상기시키고 있다. ＜감 찰관＞은 시골 소도시에 감찰관의 암행이 시작되었다는 정보 때문에 시장 을 비롯한 관리들이 공포에 떠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를 썼어요. 저널에서 라리체바가 직접 절 찾아왔 습니다. 라리체바는 절 연구하더니 깜짝 놀라더군 요. 그래서 저를 위원회에 보여 주려고 모스크바로 불러들인 거죠. 제겐 특별한 투시력이 있으니까요. 당신 눈 속을 좀 봐 드릴까? 프로호로프 해 보세요.

(클랴긴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랫동안 프로호로프의 눈 을 바라본다.)

클랴긴 어때요? 프로호로프 찜찜하군요! 클랴긴 미샤, 무섭네요! 눈은 엑스레이가 아니에요! 과학적

으로 말하자면 관통 투시력이라고 합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거울로 제 자신을 오랫동안 볼 수 가 없어요. 의식이 몽롱해지거든요. 전 중세에 태어 났다면 화형을 당했을 거예요. 마법사처럼요. 프로호로프 (웃으며) 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클랴긴 확실해요! 라리체바 말이 당신은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던데요? 프로호로프 네.

클랴긴 대단해요. 저도 시도는 해 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물체를 흔드는 건 가능해도 움직이는 건 도저히 불 가능해요. 한번 보여 줄 수 있나요? 프로호로프 지금은 내키지 않네요. 내일 테스트를 위해 힘

을 아껴 놔야 하거든요. 클랴긴 쉬운 것으로 한번 해 봐요. 연습한다 생각하고. 어떤

신문에서 봤는데, “꾸준한 연습만이 좋은 결과를 보 장한다”고 그러더라구요. 프로호로프 연습용으로 뭐가 좋을까요? (방을 둘러본다.) 물

병은 어떨까요? 클랴긴 해 봐요! 제가 가벼워지도록 물을 따라 낼게요. (화

장실로 가서 물을 따른다.) 프로호로프 테이블보는 치워야 합니다. 클랴긴 잠시만요. (테이블보를 걷고 물병을 탁자에 올린다.)

자, 해 봐요.

(프로호로프는 물병 앞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물병을 바 라본다.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깨물었지만, 물병은 움직이지 않았다.)

프로호로프 안 되네요! 물체를 움직이려면 특별한 심적 상태

에 빠져야 합니다. 특별한 신경 상태에 말이죠. 이해 하시겠어요? 클랴긴 그럼 그 상태에 빠져 보세요. 프로호로프 악한 마음을 품어야 해요. 이해하시겠어요? 물

체에 대한 악의! 저 물병에 대해 악의를 품을 수가 없 네요. 클랴긴 (잠시 생각하며) 그러면 제가 물을 반만 채울게요. 프로호로프 (잠시 생각하며) 뭐, 그러세요. 근데 물이 반쯤

차 있으면 악의가 생길 수 있을까요? 클랴긴 생길 수 있죠! 전에는 밀로 술을 만들었는데, 젠장,

지금은 뭘로 만드나요? 온통 화학물질로 만들잖아 요.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다니까요! 프로호로프 맞아요. 클랴긴 간이 죽을 지경이에요. 직장을 빼먹기도 한다니까

요. 교통사고도 많이 생기고 시력도 나빠집니다. 화 학물질로 만든 술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 났습니까? 기형아는 또 얼마고요? 우리 동네에 알코 올중독자한테서 아들 하나가 태어났는데, 글쎄 귀가 없지 뭡니까. 프로호로프 귀가 없다뇨? 클랴긴 이렇게요! 한쪽 귀는 있지만, 다른 쪽은 귀가 없어요!

프로호로프 (주먹을 쥐고, 결단력 있게) 반만 채우세요. 클랴긴 잠시만요. (쇼핑 가방 쪽으로 달려가 술병을 꺼낸

다.) 여기 있어요, 이 저주받을 것!

(프로호로프는 술병을 집중해서 바라본다. 그의 입에서 온 갖 욕설이 쏟아진다. 클랴긴이 옆에서 열심히 응원하며 그 를 독려한다.)

프로호로프 우우! 전염병! 더러운 놈! 에이, 이 상놈아!

(병이 움직인다.)

클랴긴 (흥분하며) 미샤, 좋아요! 좋아! 좀 더 세게! 프로호로프 (쉰 목소리로) 이－이 사앙놈 새끼!

(병이 탁자 끝까지 움직이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클랴긴 이 능숙하게 술병을 잡아낸다.)

클랴긴 (소리친다.) 미샤, 탁자 끝까지 움직였어요! 끝까지!

만세!

(침실 문이 열린다. 그곳에서 이바노프가 뛰어나온다. 그는 짜증 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프로호로프는 얼굴 이 상기되어 있고, 클랴긴은 원피스를 입은 채로 보드카 병 을 쥐고 있다. 이바노프는 마음을 진정하고 공손하게 말하 려고 애쓴다.)

이바노프 이보세요! 꼭 이렇게 고함을 질러야 하나요? 이런

실험을 해 보면 어떨까요. 술은 마시지만, 고함은 지 르지 않는다! 한번 해 봅시다, 친구들, 네! 왜냐하면 바로 옆에 사는 사람도 있고, 일하는 사람도 있잖아 요. 곳곳에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친애하는 나의 친구들이여, 미안합니다. 사 랑하는 나의 동시대인들이여, 미안합니다. (일부러 문을 쾅 하고 닫고 들어간다.) 프로호로프 (당황하며) 성공은 했는데. 좋지만은 않네요. 클랴긴 (경멸조로) 잘난 체하기는. 사사건건 시비야. 프로호로프 저 사람은 누구요? 클랴긴 성이 이바노프란 작자인데, 여기서 묵고 있죠. 프로호로프 저 사람도 초능력자입니까? 클랴긴 그럼요. 엄밀히 말하면, 초능력자가 아니라, 독심술

사라고 할 수 있죠. 멀리서도 남의 생각을 알아맞힐 20

수가 있어요. (싱긋 웃는다.) 그게 뭐 대단한 능력이 라고! 우리 집 푸들도 남의 생각 같은 건 알아맞힐 줄 안다고요. 정말이에요! 제가 ‘밥 먹을 때가 됐네’ 하 고 생각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 녀석이 제 앞에 떡 하니 나타나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니까요. 프로호로프 에이, 괜히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클랴긴 괜히 그럴 게 뭐가 있어요! 전 당신을 존경해요. 눈

앞에서 술병을 움직였잖아요. 정말 대단한 재능입니 다! 그렇다고 우쭐대지도 않지, 정말 순수하고 격이 없는 분이잖아요. 근데 저자는요. 제가 아침에 뷔페 에서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거든요. 내가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지 한번 맞혀 봐라. 비아냥거림 없이 아주 평범하게 물어봤다니까요. 한번 알아맞혀 보라 고 했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제발 날 가만히 놔두세 요. 당신 생각 말고도 내 머리는 터질 지경이에요’ 하 면서 쏘아붙이지 뭡니까. 나 따위하고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거죠. 자기 혼자 초능력자입네 하고,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냐는 거 아닙니까. (침실 쪽에 소리친다.) 여기선 우리 모두 평등하다고! (프 로호로프에게) 텔레비전도 못 켜게 한다니까요. 라 디오도 안 되고요. 하루 종일 어딘가 뛰어다니다가 21

방에 들어오면 저렇게 문을 잠그고 외톨이처럼 꼼짝 도 안 해요. 프로호로프 방 안에서 뭐하는데요? 클랴긴 알 게 뭡니까! 프로호로프 당신은 볼 수 있잖아요. 클랴긴 말했잖아요, 저 녀석은 문을 잠근다고! 프로호로프 당신은 벽을 투시할 수 있잖아요! 클랴긴 뭐하러 봐요. 나한테는 제 능력을 조금도 쓰기 싫어

하는 작자인데, 내가 왜 내 능력을 씁니까. 프로호로프 (클랴긴을 주의 깊게 보며) 이제 그 원피스는 벗

으시죠. 걸을 때마다 엉덩이를 흔들게 되잖아요! 클랴긴 좋아요! 옷을 교환할 겁니다, 젠장! 마음에 들지 않

아요. 어깨끈이 너무 꽉 조여. (욕실로 간다.)

(얼마 동안 프로호로프는 혼자 앉아 있다. 침실 문이 열리더 니 코트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이바노프가 나온다. 빠르게 출구로 걸어간다. 프로호로프는 그를 바라본다.)

프로호로프 동무! 이바노프 (멈추며) 나 말이오? 프로호로프 동무, 우리가 떠들었다고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우린 술을 마신 게 아닙니다. 그냥, 리허설을 했을 뿐 입니다. 이바노프 저도 개인 활동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단

지 고함을 지르지는 말라는 부탁입니다. (나가고 싶 어 한다.) 프로호로프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바노프 그럼요. 프로호로프 당신은 왜 남의 생각을 읽는 거죠? 허락이라도

받았습니까? 이바노프 이해가 안 되는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프로호로프 그건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

는지는 알아서 뭐합니까. 그건 사적인 비밀이에요. 왜 남의 머릿속을 엿보는 겁니까? 이바노프 동무, 전 아주 바빠요. 좀 알아듣게 말하시오. 프로호로프 아무튼, 제 생각은 읽지 말아 주십시오! 이바노프 기꺼이 그러지요. 프로호로프 근데 이미 읽었다면. 방금 생각한 건. 아무에게

도 누설하지 말아 주세요. 이바노프 그럽시다. 프로호로프 왜냐하면 그 여자는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냥

홧김에 그런 생각을 한 거요. 하지만 그 자식은 반드 23

시 죽일 거요! 이바노프 (놀라서) 누구 말입니까? 프로호로프 누군지 당신도 알잖아요! 이바노프 (당황해서) 동무, 동무. 잠깐만요! 당신 범행에 나

를 연루시키지는 마시오! 프로호로프 (화내며) 그러니까 안톤에게도 전화하지 말고,

경찰에 신고하지도 마십시오! 당신과 나만 아는 비 밀입니다! 이바노프 안톤이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당신 생각을

읽지 않았어요. 지금 저는 제 생각만으로도 충분합 니다. (시계를 보며) 죄송하지만 지금 빨리 뛰어가야 해요. 저녁때 얘기합시다. 프로호로프 얘기할 게 뭐가 있단 말이오? 이미 다 결정 난 일

입니다. 이바노프 그러니까, 지금은. (문을 열며) 프로호로프 (따라가며) 당신은 그런 인간도 살 권리가 있다

는 겁니까, 네? 이바노프 (짜증을 내며) 몰라요, 동무, 모른다고요! 난 바빠

요! 저녁까지만 살려 둡시다. 그때 얘기해 보자고요. 완전히 정신병원이군. (나간다.)

(욕실에서 클랴긴이 나온다. 평상시의 정장 차림이다.)

클랴긴 이봐요, 미샤! 뷔페 갈래요? 지금 거기 사람도 적은

데. 프로호로프 내키지 않네요! 클랴긴 가서 요기나 합시다. (벽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신

선한 스메타나3)도 있고, 갓 구운 소시지도 있어요. 오! 맥주도 갖다 놨군요. 브랜드가. (목을 빼고 띄엄 띄엄 읽는다.) ‘프라－즈－드－로이’! 체코 맥주군. 좋아. 자, 갑시다! 프로호로프 (감탄하며) 정말 여기서 그게 보여요? 클랴긴 놀라긴요. 별거 아니에요. 자, 갑시다! 프로호로프 그러죠.

(노크 소리. 남자의 목소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라리체 프가 들어온다. 민첩한 동작이 약간 부산스러울 정도다. 목 소리는 날카롭고, 시선은 딱딱하다. 전체적으로 지나친 흥 분 상태인 것 같다.)

3) 우유를 발효해서 만든 유산균 음식이다. 러시아인들은 수프나 국에 스메타 나를 섞어 먹는다.

라리체프 안녕하시오, 동무들! 제가 맞게 왔죠? 왜 말이 없

으실까? 대답해 보세요, 맞게 왔나요? 클랴긴 제대로 왔는지 안 왔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아시겠죠.

누굴 찾아오셨나요? 라리체프 여기가 몇 호실인가요? 425호실 맞죠? (방에서 나

가더니 잠시 후 돌아온다.) 425호실 맞네요. 당신들 이 바로 그 특별한 사람들인가요? 클랴긴 우리가 초능력자들입니다. 라리체프 초능력자! 제가 말하려던 게 그거예요. (프로호로

프와 클랴긴을 쳐다본다.) 음, 그래요. 상상하던 대 로군요. 누가 누구인지 한번 맞혀 보리다. 당신이 프 로호로프고, 당신은, 그 불쾌하고 딱딱한 시선으로 보아 클랴긴이군요. 맞혔나요? 그런데 이바노프는 요? 이바노프 어딨나요? 이바노프 씨가 있어야 하는 데. 프로호로프 이바노프는 나갔어요. 클랴긴 (라리체프에게) 당신은 누구요? 라리체프 아, 저는 라리체프입니다. 올레크 니콜라예비치

라리체프. 옐레나 페트로브나의 남편이지요. 클랴긴 만나서 반갑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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