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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압도하는 기억 단 한 번 만났지만 그녀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눈앞의 여자는 그녀를 반추하는 스크린에 불과하다. 영화는 끝났지만 주인공은 사라지지 않는다.

1896년에 출판한 영문판 ≪실비, 발루아의 추억≫에 실린 그림


인텔리겐치아 2230호, 2014년 9월 24일 발행

구월의 새 책 3. 이준섭이 옮긴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의 ≪불의 딸들(Les filles du feu)≫

나는 어느 극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매일 저녁 나는 구애자답게 성장을 하고 무대 앞 칸막이 좌석에 나타나는 것이 상례였다. 때 로는 모든 것이 충만해 있었고, 때로는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겨우 30여 명의 연극 애 호가연하는 자들이 메우고 있는 일층 뒷좌석 이나 챙 없는 모자를 쓰고 구식 치장을 한 사


람들이 차 있는 칸막이 좌석을 바라본들, 또 한 화사한 옷차림과 번쩍이는 보석과 환한 얼 굴들이 층층을 메우고 웅성거려 생기 넘치는 관중석의 분위기에 젖어 본들, 내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실내 광경에는 무관심 했고 연극도 거의 내 마음을 끌지 못했다. 다 만 당시 걸작이라는 한 지루한 작품의 제2장 이나 3장에서는 예외였다. 아주 낯익은 모습 의 여인이 나타나 텅 빈 공간을 비쳐 주고, 나 를 둘러싼 이 공허한 얼굴들에게 한 번의 숨 결과 한마디 말로 활기를 불어넣을 때만은 예 외였던 것이다. -<실비, 발루아의 추억>, ≪불의 딸들≫,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219쪽


‘나’는 누구인가? 여배우를 사랑하는 남자다. 여배우를 보러 연극 공연장에 간 그는 근처 클럽에서 고향의 꽃다발 축제 기사를 읽게 된다. 그러고는 3년 전 축제 때 아드리엔과 원무를 췄던 추억에 빠져든다. 아드리엔은 누구인가? 그가 첫눈에 반한 여자다. 그때 그에게는 실 비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녀를 울린다. 원무를 추다가 아드리엔에게 마음을 뺏긴 것을 실비가 보았기 때문이다. 실비에게 상처를 남긴 채 파리로 떠난다.


아드리엔과의 사랑이 시작되는가? 아니다. 한 번 만난 뒤 더는 보지 못한다. 그 녀가 수녀원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아 드리엔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고향에 남은 실비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실비와의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가? 몇 해가 흘러 그녀를 만난다. 그러나 아드리 엔을 잊지 못한다. 실비에게 적극 구애하지 못한다. 실비는 다른 남자와 약혼한다. 두 여자를 잃고 무엇을 하는가? 파리로 돌아간다. 거기서 여배우 오렐리를 만난다. 사랑을 고백한다.


이번에는 진짜로 사랑하는가? 아니다. 여전히 아드리엔을 잊지 못한다. 오 렐리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당 신은, ‘여배우인 내가 그 수녀와 동일 인물입 니다’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군요. 당 신은 하나의 드라마를 찾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그런데 대단원이 빗나갔습니다. 자, 이제 난 당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이별을 고한다. 세 번째 여자를 잃고 그는 어떻게 하는가? 실비를 데리고 오렐리의 공연을 보러 간다. 오렐리가 아드리엔을 닮지 않았느냐고 묻는 다. 실비는 한숨을 쉬며 아드리엔이 1832년 에 수도원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실비, 발루아의 추억>은 어떤 작품인가? ≪불의 딸들≫에서 최고의 작품이다. 작가 특유의 서정성과 낭만성이 충만하기 때문이 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서정 적인 작품 중 한 편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보여 주는가? 젊었을 때 얻을 수도 있었던 옛 사랑의 행복 을 상기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하려는 노 력을 감명 깊게 표현한다. 자전인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제라르 드 네르발이 젊은 시절에 겪은 사랑의 실패와 몽상이 뒤섞여 있다.


아드리엔, 실비, 오렐리의 실제 모델은 누구 인가? 아드리엔은 학자마다 의견이 나뉘는데 대부 분 영국의 여배우였던 마담 드 푀셰르로 본 다. 실비의 모델은 작가의 어린 시절 마을 처 녀들을, 오렐리는 네르발과 사귀었던 여배 우 제니 콜롱이라고 간주한다. ≪불의 딸들≫은 어떤 책인가? 1854년에 출간된 네르발의 작품집이다. 19 세기의 위대한 책이다. 어떤 작품이 실렸는가? 중단편 소설로는 <실비, 발루아의 추억> 외 에도 <앙젤리크>, <제미>, <옥타비>,


<이시스>, <에밀리>가 있고, 희곡으로 는 <코리야>, 여러 시편의 연작인 <몽상의 시> 가 있다. 제라르 드 네르발은 누구인가? 1855년 파리의 으슥한 골목길에서 자살한 이 후 20세기 초까지 고국인 프랑스에서도 잊혀 진 작가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네 르발을 ‘가장 프랑스적인 서정시인’으로 꼽 는다. 잊혀진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프랑스인들은 네르발이 광증에 시달렸 기에 그의 작품들도 이해할 수 없는 광증의 발로로 보았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오해


를 샀다. 어떤 오해인가? 그의 작품은 광증의 결과이므로 일반 논리에 서 이탈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에 와서 프루스트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그의 작품은 재평가된다. 재평가의 내용은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실비, 발루아의 추억>을 걸작 이라고 평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앙드레 브르통과 그의 동료들은 네르발의 무의식 세계를 발견하고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내세웠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준섭이다.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다.


현실을 압도하는 기억 단 한 번 만났지만 그녀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눈앞의 여자는 그녀를 반추하는 스크린에 불과하다. 영화는 끝났지만 주인공은 사라지지 않는다.

1896년에 출판한 영문판 ≪실비, 발루아의 추억≫에 실린 그림


불의 딸들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프랑스 소설 2014년 7월 1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596쪽 28,000원


작품 속으로

Les filles du feu 불의 딸들


알렉상드르 뒤마에게1)

1) <알렉상드르 뒤마에게(A Alexandre Dumas)>(1853)는 1854년 ≪불의 딸들≫의 서문으로 삽입된 것이다. 이 글은 1844년 3월 10일 ≪라르티스트 (L’Artiste)≫에 발표된 <비극 소설(Roman tragique)>의 서문을 약간 수 정하여 그대로 되살려 놓은 것이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1853년 12월 10일 ≪총사(Le Mouquetaire)≫에 발표한 <내 독자와의 한담(Causerie avec mes lecteurs)>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네르발이 <몽상의 시(Les Chimères)>를 ≪불의 딸들≫ 속에 넣고, 뒤마에 대한 답신을 그 서문으로 채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로렐라이(Lorely)≫ 의 서문을 쥘 자냉에게, 또한 ≪멋쟁이 보헤미안(La Boême galante)≫을 아르센 우세에게 헌정했듯이 ≪불의 딸들≫을 알렉상드르 뒤마에게 헌정 한 것이다. 네르발은 1853년 11월 30일 인쇄소 감독 아벨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에서 “…‘서문’은 이러한 추억들에 대한 열쇠와 관계를 제공할 것입니다”라고 밝 히고 있듯이, 뒤마에 대한 답신 겸 서문이 된 이 텍스트는 1853년에 겪은 시 인의 정신병 발작에 대한 일종의 변명과 그것이 정신병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의 한 표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상상해 낸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예로 이 ‘편지-서문’을 제시하고, 그 증거 로 ≪불의 딸들≫에 실린 작품들을 제시한 것이다. 더욱이 이 편지-서문은 1854∼1855년 네르발의 마지막 작품인 ≪오렐리아(Aurélia)≫까지 예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오렐리아(Aurélia)≫의 정식 제목은 ‘Aurélia ou Le Rêve et la vie(오렐리아 또는 꿈과 삶)’인데 흔히 예의 약칭으 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친애하는 선생, ≪로렐라이≫를 쥘 자냉에게 헌정했던 것 처럼2) 이 책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나는 그에게 지금 당신 에게 하는 것과 꼭 같은 명목으로 사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몇 년 전,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는 나 의 전기를 썼던 것입니다. 며칠 전,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당신은 아주 매혹적인 글 가운데 몇 행을 내 영혼의 묘비명에 할애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상속재산 을 미리 당겨 받은 것과 같은 영광입니다. 어찌 감히 내 생전 에 이런 눈부신 화관들을 머리에 얹겠습니까? 나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야 하겠지요. 그러니 내 유해에 바친 그토록 많 은 찬사 중에서 많은 부분을 거두어 달라고 대중에게 빌어 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스톨프의 본을 따서 그 유리병의 어 렴풋한 내용물을 찾아 달까지 갔었고,3) 그래서 희망하는 바

2) 1841년 2월 24일 네르발은 ‘강경증 쇠약’ 또는 ‘실어증’이라는 병명으로 마 담 생 마르셀 요양원에 입원했다. 쥘 자냉은 그 당시 네르발이 사망한 것으 로 오인하여 상당히 긴 추도사를 바친 바 있었다. 네르발은 1852년 6월 21일 에 발표된 ≪로렐라이≫의 서문 <쥘 자냉에게(A Jules Janin)>에서 빈정 거리는 투로 글을 썼던 사실을 여기서 상기하고 있다. 3) 아리오스토(Ariosto)의 ≪분노한 롤랑(Roland furieux)≫(1516, 1532)에 등장하는 기사들 중의 한 명인 아스톨프를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은 46편 의 노래로 된 희극적 영웅 서사시로서 사라센의 왕 아그라망과 사를마뉴의 싸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싸움보다는 기사들의 사랑과 대결, 환상 적인 장면 등이 더 부각된 작품이다. 네르발이 상기하는 부분은 아스톨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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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이 내 사고를 일상적인 위치로 되돌려 놓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더 이상 이포그리프를 타고 있지 않으 며, 인간들이 보기에 흔히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되찾았 으니 잘 생각해 봅시다. 다음은 지난 12월 10일, 나에 관해 당신이 썼던 글의 일 부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생각하듯 매혹적이며 뛰어난 정신의 소 유자였습니다. 그에게 때때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다행스럽게도 당사자나 친구들이 심히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무슨 일이 몹시 그의 마 음을 사로잡고 있을 때, 상상력이라는 저 공상이 잠시 이 성을 쫓아내기도 하는데, 이성은 공상의 연인 격에 불과 한 것이지요. 그러면 꼭 카이로의 아편 흡연자나 알제의 해시시 중독자처럼 꿈과 환영으로 채워진 그 두뇌 안에

이성을 잃은 롤랑을 구해 내는 장면이다. 아스톨프는 성 요한의 도움을 받 아 이포그리프라는 하늘을 나는 말을 타고 달나라로 간다. 그는 그곳에서 지상에서 잊어버린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유리병에 롤랑의 이성을 담아 온다. 지상으로 내려온 아스톨프는 롤랑에게 유리병에 있는 이 성을 들이마시게 하여 그의 이성을 되찾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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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이 전능하게 남아 있게 되고, 그래서 상상력이라 고 하는 이 방랑자는 불가능한 이론들 속으로, 실현 불가 능한 책들 속으로 그를 던져 넣습니다. 때로는 그가 동방 의 왕 솔로몬이 되어 정령들을 불러오는 증표를 다시 찾 아내기도 하고, 시바의 여왕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 정령들의 날렵함과 권능에 대해, 이 여왕의 아름다움과 풍만함에 대해 그가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비 하면 요정 이야기나 ≪천일야화≫는 아무것도 아닙니 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정말 그를 동정해야 할지 아니면 부러워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크리미아의 술 탄, 아비시니아의 백작, 이집트의 공작, 스미른4)의 남작 이기도 합니다. 또 어느 날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을 하고 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들려주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쾌활하고, 그가 거쳐 지나온 우여곡절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암몬5)에 이르는 불타는 듯한 길 위에 솟아 있는 것보다 더 그늘이 많고 시원한 오아시스들이 가득 찬 몽상과 환영의 고장으로 이끌어 가는 이 안내자를 따라 가고 싶어서 모두들 자기도 그렇

4) 스미른(Smyrne): 오늘날 이즈미르라 부르는 에게 해에 면한 터키의 항구 도 시. 5) 암몬(Ammon): 리비아 사막의 오아시스를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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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 또 어떤 때는 우수가 그 를 위한 시의 여신이 되는데, 그럴 때 할 수만 있다면 여 러분, 눈물을 참아 보세요. 베르테르도, 르네도, 앙토니6) 도 그보다 더 가슴 에는 탄식을,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오열을, 그보다 더 정다운 말을, 그보다 더 시적인 외침 을 토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7)

친애하는 뒤마, 당신이 앞서 말했던 그 현상을 설명해 보 도록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자신을 상상의 인물들과 동일 시하지 않고서는 창작을 할 수 없는 이야기꾼들이 있습니 다. 우리의 오랜 친구 노디에가 어쩌다 자신이 혁명기에 단 두대에서 처형되는 불행을 겪었는가를 얼마나 확신을 갖고 이야기했는지를 아시죠. 그의 말에 설득된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그가 자신의 목을 다시 붙이게 되었을까 자문하게 됐지요….8)

6) 뒤마의 드라마 <앙토니(Antony)>(1831)의 주인공. 이 작품은 남편과 아 내와 그 연인이라는 삼각관계의 불행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주인공 앙토니는 태생이 불분명한 사생아라는 굴레 때문에 사랑에서도 삶에서도 모두 버림받는 처절한 인간으로 그려져 있다. 7) 1853년 12월 10일 ≪총사≫에 실린 알렉상드르 뒤마의 글의 일부로, 네르 발은 테아트르 프랑세와 관련된 이 글의 앞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8) 샤를 노디에(Charles Nodier): 19세기 전반 프랑스의 소설가. 위고, 뮈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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