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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 길들여지기 그리고 길들기 여자는 남자를 우습게 안다. 남자는 여자를 억압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한다. 복종은 허세를 키우고 허세는 실재를 잠식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길든다.

연극 ‹말괄량이 길들이기›, 애린 아부 연출, 듀크 극장, 2012


인텔리겐치아 2232호, 2014년 9월 25일 발행

구월의 새 책 4. 김종환이 옮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뱁티 스타 신사 양반들, 제발 더는 조르지 마 시오. 당신들도 알다시피 난 단호하게 결심 했소.

큰딸 남편 될 사람을 얻기 전에는

절대로 둘째 딸을 당신들에게 줄 수 없소. 두 분을 잘 알고 있고 또한 좋아하고 있소.


두 분 중 어느 분이 캐서리나를 사랑한 다면 조금도 개의치 말고 그녀에게 청혼하 시오. 그레 미오 차라리 수레 뒤에 매고 다니는 게 낫지. 큰딸은 나에게 너무 벅찬 상대야. 호르텐시오, 자네는 누구든 상관없지 않은가? 캐서리나 (뱁티스타에게) 아버지 제발!

저를 왜 이런 웃기는 사람들

놀림감으로 만들려고 하시나요?

호르텐시오 이 런 사람들이라니! 뭔 뜻이오?

좀 더 얌전히 굴지 않으면

당신하고 살 사람은 아마 없을 거요.


캐서 리나 당신이 그런 걱정 할 필요는 없어요. 난 결혼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으니까. 하지만 결혼한다면 알뜰하게 보살펴 드 리죠.

세 발 달린 의자로 빗질을 해 주고

얼굴에 피 칠을 해서 바보로 만들어 드 리죠. 호르 텐시오 주여, 저런 악마에게서 구해 주 소서! 그레미오 주 여, 저도 좀 구해 주소서!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지음, 김종환 옮김, 33∼34쪽


누가 말괄량이를 선택하는가? 페트루키오다. 호르텐시오의 친구다. 그는 왜 그녀를 원하는가? 지참금 때문이다. 부친이 죽자 행운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좋은 아내를 얻어 한몫 챙기 려 한다. 뱁티스타는 파도바의 갑부다. 청혼 자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캐서리나 의 사랑을 얻는 것이다. 캐서리나는 페트루키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말만 늘어놓으면 만사가 뜻대로 되리라고 생 각하는 무뢰한이요 반미치광이라고 생각한 다. 결혼할 뜻이 없다.


남자는 여자의 거부를 어떻게 돌파하는가? 자신에 대한 캐서리나의 반응은 정략일 뿐이 라고 주장한다. 둘이 있을 땐 비둘기처럼 온 순하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끈한다는 것 이다. 돌아오는 일요일에 결혼하기로 그녀 와 합의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결혼이 되는 것인가? 신랑은 예정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참 이나 지난 뒤 해괴한 행색으로 식장에 등장한 다. 주례를 맡은 신부를 때려눕히고 온갖 행 패를 부린 뒤 신부를 데리고 식장을 떠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시작된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괜한 트집을 잡아 하인들에게 호통을 친다. 고기가 탔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몇 번이고 식사를 물린다. 사육사가 매를 길 들이듯 신부를 재우지도, 먹이지도 않으려 한다. 말괄량이는 길들여지는가? 나중에는 페트루키오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 는 모습을 보여 준다. 태양을 달이라고 하고 노인을 가리켜 젊은 처녀라고 우겨도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친다. 길들여진 것인가? 그는 마지막으로 장인과 친구들이 모인 자리


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친구들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내기에서 이 긴다. 어떤 내기였나? 각자 사람을 시켜 부인을 호출하도록 했다. 캐서리나만 페트루키오의 부름을 받고 한달 음에 달려왔다. 캐서리나의 갑작스러운 복종의 진실은 무엇 인가? 전통 학자들은 캐서리나의 마지막 대사를 근 거로 그녀가 당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견해 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으며 이 작품이 남편 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역설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대사가 무엇인가? “남편은 그대의 주인이요 생명이자 보호자 시며, 그대의 머리요 군주십니다.” 5막 2장 캐서리나의 마지막 대사 일부다. 정말로 그런가? 최근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그녀의 마지막 연설이 가부장제를 조롱하고 비판한 것이라 고 주장한다. 캐서리나의 대사는 남편에 대 한 여성의 복종을 지나치게 과장함으로써 오 히려 역설적으로 들린다. 이러한 장치를 통 해 이 극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단순 한 환상일 뿐이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조롱했는가? 캐서리나는 페트루키오의 체면이 그녀의 행 동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다. 그녀가 자의적 으로 남편에게 복종하는 마지막 장면은 힘 있 는 남성을 만드는 것이 여성의 의지에 달렸다 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부인이 남편 의 길들이기 게임을 인정하고 그에 동조할 때 만 남편은 아내에 대한 지배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길들인 것인가? 캐서리나는 본질적인 면에서 결코 길들여지 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를 길들였다는 환상 에 들뜬 어리석은 남편을 길들이기 시작한 다. 친절한 체하면서 아내를 길들이려고 했


던 페트루키오처럼, 그녀도 남편에게 복종 하는 체하면서. 당신은 누구인가? 김종환이다.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다.


길들이기, 길들여지기 그리고 길들기 여자는 남자를 우습게 안다. 남자는 여자를 억압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한다. 복종은 허세를 키우고 허세는 실재를 잠식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길든다.

연극 ‹말괄량이 길들이기›, 애린 아부 연출, 듀크 극장, 2012


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희곡 2014년 8월 8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244쪽 16,500원


작품 속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


나오는 사람들

영주 슬라이: 땜장이 주막 안주인, 시동, 배우들, 사냥꾼, 하인들

뱁티스타: 파도바의 갑부 빈첸티오: 피사의 노신사 루첸티오: 빈첸티오의 아들, 비앵카를 사랑하는 청년 페트루키오: 베로나의 신사, 캐서리나의 청혼자 그레미오, 호르텐시오: 비앵카의 청혼자 트라니오, 비온델로: 루첸티오의 하인 그루미오: 페트루키오의 하인 커티스: 페트루키오의 별장 관리 하인 교사: 빈첸티오로 변장한 만토바 출신 교사

캐서리나: 말괄량이, 뱁티스타의 맏딸 비앵카: 뱁티스타의 둘째 딸 미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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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사, 방물장수, 뱁티스타와 페트루키오의 하인들

장소: 파도바와 페트루키오의 시골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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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제1장 황야에 자리 잡은 주막 앞

(주막 안주인과 슬라이 등장)

슬라이 이 여편네, 정말 한 대 맞아야겠어. 안주인 차꼬를 차고 수치나 당해, 불한당 같은 놈! 슬라이 이 잡년아, 족보를 살펴봐. 슬라이 가문에

불한당이라니? 우리 조상은 정복 왕 리처드와 함께 이 땅에 왔다. 그러니 간단하게 말하지. 세상만사 될 대로 돼라 이거야. 빨리 꺼져! 안주인 유리컵을 깨 놓고 변상하지 않을 거냐? 슬라이 그래, 한 푼도 못 물어 줘. 줄행랑이나 치자.

차디찬 침대로 가서 몸이나 녹여야지. 안주인 내게도 처방이 있어.

경찰 주임을 불러와야겠다. (퇴장) 슬라이 주임이건, 소장이건, 서장이건 누구든지 불러.

법으로 대응해 주지. 난 꼼짝하지 않을 거야. 올 테면 오라고 해. 환영해 줄 테니까. (땅에 누워 곯아떨어진다.) 7


(뿔 나팔 소리가 들린다.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영주, 사냥꾼들과 하인들을 대동하고 등장)

영주

너희 사냥꾼들에게 명하노라. 사냥개들을 잘 돌보아라. 암캐 메리맨은 가엾게도 그 입에서 거품을 내고 있구나. 클로더란 놈은 목청 좋은 암놈하고 함께 매 둬라. 실버란 놈을 보지 못했느냐? 울타리 모퉁이에서 놓친 짐승 냄새를 묘하게 다시 맡아 내는 놈이다. 20파운드를 준다고 해도 그 개는 줄 수 없어.

사냥꾼 1 영주님, 벨먼이란 놈도 못지않습니다.

거의 잃어버린 사냥감을 감쪽같이 찾아내고 짖어 댔지요. 오늘 두 번씩이나 놓쳐 버릴 뻔한 사냥감 냄새를 잘도 맡아 냈답니다. 절 믿으세요. 그놈이 더 나은 놈입니다. 영주

바보 같은 놈! 에코란 놈이 잘만 뛴다면, 그런 개 열두 마리 몫은 해낼 거다. 그놈들을 잘 먹이고 잘 돌봐 줘. 내일 다시 사냥을 나갈 생각이다.

사냥꾼 1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영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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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슬라이를 보고) 이건 뭐야? 죽은 거야? 고주망태가 된 거야? 아니, 숨은 쉬고 있느냐?

사냥꾼 2 숨은 쉽니다, 영주님.

술기운으로 몸이 따뜻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차디찬 땅바닥에서 저렇게 곤히 잠들 수는 없겠지요. 영주

오, 흉측한 짐승 같구나! 자빠져 자는 꼴이 꼭 돼지 같아. 네놈 꼴을 보니 무서운 죽음도 그렇게 더럽고 징그러운 꼴이겠구나! 이 사람들아, 이 주정뱅이에게 장난을 걸어 골려 주려는데, 다들 어찌 생각하는가? 그를 침대로 옮겨 멋진 옷을 입히고 손가락엔 반지를 끼우고, 침대 옆에는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깨어나면 멋진 시종들이 가까이에서 시중들게 하면 어떨까? 그럼 저 거지 같은 놈이 제 존재를 잊고 헷갈릴 게 아니겠느냐? 9


사냥꾼 1 영주님, 분명합니다. 분간하지 못할 겁니다. 사냥꾼 2 잠에서 깨면 몹시 어리둥절할 겁니다. 영주

그렇겠지. 달콤한 꿈이나 헛된 공상에 사로잡힌 듯 이상하겠지. 자, 그럼, 저 무지렁이를 데려가서 재미있는 장난을 한번 해 보기로 하세. 나의 가장 좋은 방에 놈을 옮겨 놓고 방 주위에는 온통 음탕한 그림을 걸어 둬.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따뜻한 물에 그 더러운 놈의 더러운 머리를 감겨라. 향기로운 나무를 태워서 방 안을 향기롭게 만들어 두어라. 음악을 준비하고, 놈이 눈을 뜨거든 감미롭고 황홀한 음악을 들려줘라. 그리고 그자가 혹 무슨 말을 하면, 즉시 낮은 음성으로 공손하게 이렇게 말해라. “분부하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한 사람은 장미수에 꽃을 그득 채운 은 대야를 들고, 다른 한 사람은 물 항아리를 들고, 또 한 사람은 수건을 받쳐 들고 놈의 옆에 대령해 이렇게 말해라. 10


“나리, 시원하게 손을 씻지 않으시렵니까?” 또 다른 사람은 값진 옷들을 준비해 대령했다가 “어떤 옷을 입으시렵니까?” 하고 물어봐라. 또 누구는 그의 사냥개와 말에 대해 얘기하고, 나리께서 병환 중이라 마님께서 무척 슬퍼하신다고 해라. 지금까지 실성했던 거라고 믿도록 놈을 설득해라. 그가 설득당해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하거든 “꿈을 꾸고 계십니다. 나리는 분명히 훌륭한 영주십니다”라고 말하란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럴듯하게 잘들 해. 다들 알겠나? 지나치지 않게 적당히 잘만 하면 아마 굉장히 멋진 오락거리가 될 거야. 사냥꾼 1 영주님 장담합니다.

모두들 맡은 바 역할을 잘 해낼 겁니다. 각자 열과 성을 다해 연기해서, 우리가 말한 대로 자신을 영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영주

살며시 그를 데려가 침대에 눕혀라. 그가 깨거든 각자 맡은 역할을 잘하고…. (슬라이, 운반되어 나간다. 나팔 소리) 11


아니, 저 나팔 소리는 뭐냐? 가서 알아봐! (하인 퇴장) 혹 어떤 귀인이 여행하다가, 여기서 쉬려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하인, 다시 등장)

그래, 어떤 사람들이냐? 하인

황송하오나 영주님 앞에서 공연할 배우들입니다.

영주

이 자리에 불러들여라.

(배우들 등장)

여러분 모두 환영하오. 배우들 감사합니다. 영주

오늘 밤 내 집에 머물러 주겠나?

배우 1 저희들 충정을 받아 주신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영주

기꺼이 받아들이지. 이 배우를 기억하고 있어. 언젠가 농부의 맏아들 역을 한 적이 있지. 12


귀부인에게 멋지게 구애하는 장면이었지. 자네가 맡은 배역은 잊어버렸지만, 그럴듯하게 연기하고 자연스럽게 역을 소화했어. 배우 1 소토 역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영주

그래 맞아. 그 소토 역을 정말 잘했어. 그건 그렇고, 자네들 때마침 잘 왔네. 지금 재미있는 장난을 계획하고 있네. 자네들의 멋진 솜씨가 큰 도움이 될 거네. 귀한 분께서 오늘 밤 자네들 연극을 보실 거야. 하지만 자네들이 실례하지 않을까 걱정이군. 지금까지 연극을 본 적이 없는 분이라서 이상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이상한 행동을 보고 자네들이 박장대소를 하면 그분 기분이 상할 거야. 그리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단 말일세. 단단히 일러두겠네. 자네들이 웃으면 그분은 절대 참지 못하실 테니 조심해.

배우 1 영주님, 걱정 마십시오.

그분이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분이라도 저희는 자제할 수 있습니다. 영주

여봐라, 이들을 식당으로 데려가라. 13


한 사람 한 사람 극진히 대접해라. 해 줄 수 있는 모든 걸 제공해 절대로 부족함이 없도록 하란 말이다. (하인, 배우들을 데리고 퇴장) 여봐라, 시동인 바설러뮤에게 가서 그가 귀부인처럼 보이게 옷을 잘 갈아입혀라. 그러고는 그를 술에 전 그놈 방으로 데려가서, “마님, 마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굽실대라고 일러라. 내 명이라 하고…. 맡은 역할을 잘하면 내가 베푸는 은총을 얻을 거라는 말도 전해라. 귀부인이 남편을 대하는 걸 보았을 것이다. 그런 태도로 그 주정뱅이를 극진히 모시라고 해라. 겸손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둬라. “당신의 정실부인이요 변변찮은 아내인 제가 아내의 도리와 남편에 대한 애정을 보여 드리려고 하오니, 나리, 저에게 어떤 분부라도 내리세요.” 이 말과 함께 그를 정답게 포옹하라고 일러라. 유혹적인 키스를 곁들여 가면서 그 주정뱅이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14


눈물을 흘리라고 해라. 그러고는 그 눈물이 기쁨에 겨워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하도록 일러라. 7년 동안이나 가련하고 역겨운, 비렁뱅이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귀한 낭군께서 건강을 회복한 것을 보고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하도록 말이다. 여자라면 억수같이 퍼붓는 소낙비처럼 제 마음대로 눈물을 쏟아붓는 재주가 있겠지만, 시동에겐 그런 재주가 없거든, 눈물을 잘 흘릴 수 있도록 양파를 쓰라고 일러라. 양파를 수건에 잘 싸서 눈에 비비면 억지로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올 거다. 내가 시킨 대로 빨리 서둘러라. 곧 다른 명이 떨어질 것이다. (하인 퇴장) 나는 잘 알고 있어. 그 시동이 귀부인의 음성이나 걸음걸이나 몸짓을 우아하게 잘 따라 할 거라는 걸 말이야. 시동이 그 주정뱅이 놈을 남편이라 부르면, 내 사람들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 꼴을 보고 싶구나. 그 순진한 촌뜨기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말이다. 안에 가서 충고해야겠다. 내가 거기 있으면, 15


사람들이 지나치게 웃으면서 흥분하는 걸 가라앉힐 수 있을 테니까. 그러지 않으면 도가 지나친 웃음으로 일을 그르칠지도 몰라.

(모두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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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영주 저택의 침실

(값비싼 잠옷을 걸친 슬라이, 하인들과 함께 등장. 어떤 하 인은 옷을, 다른 하인은 대야와 물 단지를, 또 다른 하인은 기타 생활용품을 들고 있다. 하인처럼 옷을 입은 영주 등장)

슬라이 제발 술 한 잔 주시오. 하인 1 나리, 포도주 한 잔 드시렵니까? 하인 2 나리, 꿀에 절인 과일을 드시렵니까? 하인 3 나리, 오늘은 어떤 옷을 입으시렵니까? 슬라이 난 크리스토퍼 슬라이요.

나리라고 부르지 마시오. 난 평생 포도주를 마셔 본 일도 없소. 뭣에 절인 걸 주려거든 꿀에 절인 과일 말고 쇠고기 절임이나 주시오. 어떤 옷을 입겠느냐고도 묻지 마시오. 이 등짝이 내 윗옷이요 이 다리가 양말이요 이 발이 신발이니까. 아니, 발이 신발인지 17


신발이 발인지도 분간되지 않소. 발가락이 신발 밖으로 기어 나오니까. 영주

하늘이시여! 나리의 이 허황한 실성기를 고쳐 주소서! 아, 그토록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신 분께, 그토록 많은 영지를 물려받은 귀하신 분께 이렇게도 흉측한 악령이 깃들다니!

슬라이 아니, 날 미치게 할 작정이오?

내가 슬라이가 아니란 말이오? 이 슬라이가 버튼히스에 사는 늙은 슬라이의 아들이 아니란 말이오? 태어날 때부터 난 행상인이었소. 털을 손질하는 연장 만드는 걸 배우다가 잘되지 않아, 곰 부리는 사람이 되었지만…. 하지만 다 집어치우고 지금은 땜장이가 되었소. 윈콧 주막의 그 뚱뚱한 주모, 마리안 해킷에게 날 아느냐고 물어봐요. 내게 14펜스나 되는 외상 술값이 있다고 할 거요. 아니라면 난 하나님을 믿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거짓말쟁이요. 뭐요? 난 미치지 않았소! 자, 여기…. 하인 1 오! 이러시니 마님께서 슬퍼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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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 2 오! 이러시니 아랫사람들이 기가 죽었죠. 영주

이러시니 친척들이 발걸음을 끊은 거죠. 나리의 이상한 광증을 보고 놀라서 말입니다. 나리, 당신이 태어난 가문을 생각하세요. 쫓아낸 옛 생각을 불러들이고 그런 천박한 몽상을 쫓아내세요. 나리를 시중들려고 대령한 하인들을 보세요. 각자 분부를 받아 시중들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나리, 음악을 들으시렵니까? 아폴론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어 보세요. (음악이 연주된다.) 새장 속 나이팅게일 스무 마리가 부르는 노래를 들어 봐요. 나리, 주무시렵니까? 그럼 세미라미스1)를 위해 만든 음탕한 침상보다 더 부드럽고 기분 좋은 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산책하시겠습니까? 그럼 땅에 꽃을 뿌려 놓겠습니다. 아니면 승마를 하시렵니까?

1) 세미라미스(Semiramis)는 미(美)와 지혜로 유명한 아시리아의 전설에 나 오는 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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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온통 황금과 진주로 장식한 마구를 갖춘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매사냥을 하시렵니까? 그럼 아침 녘 종달새보다 더 높이 하늘을 나는 매들을 준비하겠습니다. 사냥은 어떻습니까? 사냥개들 소리에 창공도 호응해 텅 빈 대지에서 날카로운 메아리가 울릴 겁니다. 하인 1 나리께서 달리라고 하시면,

사냥개들이 힘이 넘치는 수사슴처럼 빨리, 아, 노루보다 더 빨리 달리게 하겠습니다. 하인 2 그림을 좋아하시나요?

그럼 당장 가서 그림을 꺼내 오겠습니다. 흐르는 개울에 아름다운 아도니스가 서 있고 갈대가 무성한 곳에 숨어 훔쳐보는 사랑의 여신이 그려진 그림을 가져오겠습니다. 여신의 숨결로 음탕하게 흔들리는 갈대가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물결처럼 보인답니다. 영주

이런 그림도 있으니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우스 신이 처녀 이오2)를 속이고 그녀를 겁탈하는 것을 마치 20


현장을 보듯 생생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하인 3 아니면, 아폴론 신에게 쫓겨

가시덤불 숲으로 달아나던 다프네3)가 가시에 긁혀 다리에서 피를 흘리자, 이를 본 아폴론이 슬피 우는 모습을 마치 피눈물이라도 나올 듯이 솜씨 좋게 그린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영주

나리는 영주십니다. 분명 영주십니다. 나리께는 쇠락해 가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부인이 계십니다.

하인 1 나리 때문에 흘린 눈물이 시샘하는 홍수처럼

마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덮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그리 뒤떨어지진 않지만…. 슬라이 그럼 내가 영주란 말이오?

내게 그런 부인이 있었다고? 내가 꿈을 꾸고 있소? 아니면

2) 이오(Io)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신의 사랑을 받았으나 헤라(Hera)의 미 움을 사 흰 암소로 변한 인물이다. 3) 다프네(Daphne)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 신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월계 수로 변한 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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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란 말이오? 지금 잠자는 건 아냐. 보고 듣고 말하고 있으니까.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부드러운 촉감도 느껴져. 아이고, 맙소사! 내가 정말 영주로구나! 땜장이도 아니고 슬라이도 아니야. 그럼 좋아. 마님을 여기 내 눈앞에 데려오너라. 그리고 술 한 병을 더 가져오너라. 하인 2 제발 이제 손을 좀 씻는 게 어떠신지요?

(하인들, 물 단지와 대야와 수건을 대령한다.) 맑은 정신을 회복하신 걸 보니 정말 기쁩니다. 나리께서 자신의 신분을 알아보시니 말입니다. 15년 동안이나 꿈속에 살고 계셨답니다. 하지만 마치 잠에서 깨어나신 것처럼 이제 제정신이 돌아오셨습니다. 슬라이 15년이라고! 그래, 그렇게 긴 잠이었느냐?

그동안 내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던가? 하인 1 오! 몇 마디 하셨습니다.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어요. 여기 이 훌륭한 침실에 누워 계시면서도, 문밖으로 쫓겨났다고 하셨어요. 22


주막의 주모를 욕하면서 호통을 치고 그녀를 고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마개를 따지 않은 술병을 가져오라셨는데, 돌 항아리를 가져왔다고 그리하셨습니다. 가끔은 시슬리 해킷이란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슬라이 아, 그건 주막 색시 이름이야. 하인 3 아니, 나리께서 그런 술집이나

그런 색시를 아실 리가 없습니다. 나리께서는 스티븐 슬라이니, 그리스의 존 냅스 영감이니. 피터 터프니, 헨리 핌퍼넬 등 20명도 더 되는 사람들 이름을 읊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장 어디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이들은 없답니다. 어느 누구도 만나 보지 못한 이들 이름입니다. 슬라이 그럼, 완쾌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일동

아멘!

슬라이 고맙소. 여러분 기도를 헛되이 하지 않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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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으로 변장한 시동, 하인들을 데리고 등장)

시동

나리, 별고 없으신지요?

슬라이 그래, 잘 지내고 있다.

여기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네? 내 마누라는 어디 있나? 시동

여기 있습니다, 나리. 분부하실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슬라이 당신이 마누라라고?

그럼 왜 날 여보라고 부르질 않소? 아랫것들은 나리라고 불러야 하지만, 난 당신 남편이 아니오? 시동

남편이 제 주인이시고 제 주인께서 제 남편입니다. 전 오로지 당신께 순종하는 아내랍니다.

슬라이 잘 알겠소. 그럼 난

이 여자를 어떻게 불러야 하오? 영주

부인이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슬라이 앨리스 부인이오? 존 부인이오? 영주

그저 부인이라고 부르십시오. 대감들 모두 그리 부르니까요 24


슬라이 부인,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꿈을 꾸면서

15년도 넘게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디다. 시동

그래요. 독수공방을 하며 지낸 그 기나긴 15년 세월은 제겐 30년 세월과도 같았어요.

슬라이 그것참 긴 세월이오. 여봐라,

내 아내만 남겨 두고 모두 물러가라. 부인, 빨리 옷을 훌렁 벗고 침대로 오시오. 시동

귀하고 귀하신 나리, 청이 하나 있습니다. 제발 하루나 이틀 밤만 말미를 주십시오. 아니 된다면 해가 질 때까지라도 참아 주세요. 시의들이 단단히 당부했으니까요. 아직은 나리 병환이 도질 위험이 있으니, 잠자리에 동침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까닭이 이러하니 너그러이 이해하십시오.

슬라이 아이고, 거시기가 벌떡벌떡 서서

도저히 더는 못 참을 것 같은데…. 하지만 다시 그런 꿈에 빠져드는 건 지긋지긋해. 살이 바르르 떨리고 피가 끓어오르지만 참아야지.

(하인 등장) 25


하인

나리께서 쾌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리 앞에서 흥겨운 희극을 상연하기 위해 배우들이 당도했습니다. 시의들도 희극 공연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극심한 슬픔 때문에 나리의 피가 꽁꽁 얼어붙었고, 우울증은 광증의 유모라서, 극을 보시는 게 나리 몸에 좋다고 합니다. 연극을 보시면 나리 마음이 유쾌하고 즐거워지리라 생각한 거죠. 그럼 수천 가지 해를 물리치고 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랍니다.

슬라이 좋아, 좋아, 그리하지.

배우들더러 연극을 상연하라고 해. 도대체 희극이 크리스마스 춤이냐? 아니면 공중제비 곡예냐? 시동

나리,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겁니다.

슬라이 그럼 집에서 마누라하고 노는 것 같은 건가? 시동

아닙니다. 옛날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26


슬라이 좋아, 좋아, 그럼 봐야지.

부인, 내 곁에 와서 앉아요. 다시 젊어질 순 없으니, 허망한 세상 돌아가는 대로 두고 봅시다.

(나팔 소리)

27


제1막


제1장 파도바, 광장

(루첸티오, 트라니오 등장)

루첸티오 트라니오, 난 오랫동안 동경해 왔네.

예술의 본고장인 이 멋진 파도바를 보길 말이야. 마침내 위대한 이탈리아의 즐거운 낙원인 이 기름진 롬바르디 평원에 도착했어. 아버지의 애정과 허락을 얻어 떠났고, 그분 호의와 함께 충직한 자네까지 동행하니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여기서 쉬면서 한숨 돌리고 나서 학문을 하고 공부할 방도를 찾아보자. 난 귀한 시민들로 이름난 피사에서 태어났어. 내 아버님도 거기서 태어나셨지. 밴티볼리 가문 빈첸티오라는 분인데,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하시는 거상이지. 난 그분 아들로 태어나 플로렌스에서 자랐어. 그러니 덕행으로 타고난 복을 장식하는 게 31


사람들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겠지. 그래서 트라니오, 이번에 내가 배우고 싶은 건 덕행이야. 특히 덕행을 쌓아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시하는 학문을 배우고 싶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피사를 떠나 파도바로 온 것은 절벅절벅 소리가 나는 얕은 개울을 버리고 깊고 깊은 연못에 뛰어들어서 갈증을 해소하려는 생각 때문이야. 트라니오 황송합니다, 선한 도련님.

제 생각도 전적으로 도련님과 같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시다니 저도 기쁘답니다. 달콤한 학문의 달콤한 맛을 초지일관 즐기겠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도련님, 덕을 닦고 행하는 일이나 수양하는 일은 칭송받을 행동입니다. 하지만 제발, 금욕주의자나 목석같은 사람은 되지 마세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훈에만 심취해 사랑의 시인 오비디우스를 버려선 아니 됩니다. 32


친구들과 논쟁을 통해 논리학을 배우시고 일상의 대화를 통해 수사학을 연마하세요. 음악과 시는 생기가 돌게 할 겁니다. 수학이나 형이상학 같은 것은 마음이 내킬 때 배우면 됩니다. 재미가 없으면 아무런 이익도 없으니까요. 요컨대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공부하란 말입니다. 루첸티오 고맙네, 트라니오. 좋은 충고야.

만약 비온델로가 도착했다면, 당장 준비했을 텐데. 파도바에서 묵으면서 내가 사귈 친구들을 다 초대해서 대접하기에 적당한 집을 구했을 텐데. 가만있자. 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트라니오 도련님, 우리가 여기 온 것을

환영하는 행렬처럼 보이네요.

(뱁티스타, 캐서리나, 비앵카, 그레미오, 호르텐시오 등장. 루첸티오와 트라니오, 옆에 서 있다.)

뱁티스타 신사 양반들, 제발 더는 조르지 마시오.

당신들도 알다시피 난 단호하게 결심했소. 33


큰딸 남편 될 사람을 얻기 전에는 절대로 둘째 딸을 당신들에게 줄 수 없소. 두 분을 잘 알고 있고 또한 좋아하고 있소. 두 분 중 어느 분이 캐서리나를 사랑한다면 조금도 개의치 말고 그녀에게 청혼하시오. 그레미오 차라리 수레 뒤에 매고 다니는 게 낫지.

큰딸은 나에게 너무 벅찬 상대야. 호르텐시오, 자네는 누구든 상관없지 않은가? 캐서리나 (뱁티스타에게) 아버지 제발!

저를 왜 이런 웃기는 사람들 놀림감으로 만들려고 하시나요? 호르텐시오 이런 사람들이라니! 뭔 뜻이오?

좀 더 얌전히 굴지 않으면 당신하고 살 사람은 아마 없을 거요. 캐서리나 당신이 그런 걱정 할 필요는 없어요.

난 결혼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으니까. 하지만 결혼한다면 알뜰하게 보살펴 드리죠. 세 발 달린 의자로 빗질을 해 주고 얼굴에 피 칠을 해서 바보로 만들어 드리죠. 호르텐시오 주여, 저런 악마에게서 구해 주소서! 그레미오 주여, 저도 좀 구해 주소서!

34


트라니오 쉿, 도련님!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저 계집은 완전히 돌아 버렸거나 고집불통 같은데요. 루첸티오 하지만 잠자코 있는 저 여인을 한 번 봐.

처녀답게 거동이 얌전하고 온순하질 않느냐? 트라니오, 조용히 해! 트라니오 좋아요, 도련님. 쉿! 실컷 살피세요. 뱁티스타 신사 양반들, 내가 한 말이

사실이란 것을 곧 증명하겠소. 비앵카, 집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비앵카, 내가 한 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널 사랑하는 마음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캐서리나 응석이나 부리는 계집!

그 까닭을 안다면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우는 게 상책일 거야. 비앵카 언니나 만족하세요. 난 불만이지만….

아버님, 기꺼이 아버님 뜻에 따르겠어요. 소녀는 책과 악기를 벗 삼아 책을 읽고 악기를 배우는 데 전념하겠어요. 루첸티오 트라니오 들었나?

35


음악의 여신이 입을 열었어! 호르텐시오 뱁티스타 어르신,

너무 매정하신 것 아닌가요? 저희 호의가 비앵카의 슬픔으로 이어지다니 유감입니다. 그레미오 뱁티스타 어르신,

왜 따님을 집에 가둬 두려고 하시나요? 저기 저 악마 때문인가요? 그녀가 퍼붓는 독설의 고통을 작은따님이 참고 견디도록 하실 참인가요? 뱁티스타 두 분 다 진정하시오. 결심했소.

들어가라, 비앵카. (비앵카 퇴장) 난 알아요. 비앵카는 음악과 악기 연주와 시를 무척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소. 아직은 미숙한 저 아이를 가르칠 가정교사를 내 집에 모시려고 하오. 호르텐시오 씨, 그레미오 씨, 적임자를 알거든 추천해 주시오. 유능한 사람이라면 우대할 겁니다.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을 것이오. 36


그럼 이만 실례하오. 캐서리나, 넌 여기 있어도 좋다. 나는 비앵카와 좀 더 이야기할 게 있다. (퇴장) 캐서리나 왜지? 내가 들으면 아니 될 일이라도 있나?

해야 할 것과 아니할 것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애처럼, 내가 왜 정한 시간에 오고 가고 해야 하지? 하! (퇴장) 그레미오 악마의 어미에게나 가 봐요. 성질이 너무 좋아

여기선 아무도 붙잡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봐도 부녀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그러니 호르텐시오, 지금은 우리가 손가락이나 빨면서 허기를 참아야 할 것 같소. 우리 기대가 빗나갔소. 그럼 잘 있어요. 난 사랑스러운 비앵카에게 연정을 품고 있소. 그래서 어떻게라도 적임자를 찾아내 그녀 부친에게 천거하고 싶소. 그녀를 즐겁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 말이오. 호르텐시오 그레미오 씨, 나도 그리해 보겠소.

한마디 하겠소. 우리가 다투는 일의 성격 때문에 타협할 생각을 하지 못했소.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는 우리 둘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일이오. 37


그러니 다시 아름다운 비앵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사랑을 두고 행복한 경쟁자가 되려면, 먼저 이 일을 위해 각별히 노력해야 할 것 같소. 그레미오 그게 무엇이죠? 호르텐시오 그녀 언니에게 남편을 얻어 주는 것이오. 그레미오 남편이라고! 악마 말이오? 호르텐시오 남편이라고 했소. 그레미오 아니, 악마겠지. 호르텐시오, 생각해 봐요.

딸 아버지가 아무리 부유한들 지옥으로 장가들 바보가 어디 있겠소? 호르텐시오 젠장, 그레미오! 우리는 그 계집이

요란스럽게 떠드는 소리를 참지 못해요. 하지만 세상엔 희한한 사람도 있으니, 그런 사람을 한번 찾아내 봅시다. 결함이 아무리 많아도, 돈을 두둑이 챙길 수 있다면, 그런 여자를 받아들일 사람 말이오. 그레미오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겠소?

나라면 그런 조건으로 그런 여자의 지참금을 바라느니, 차라리 매일 아침 38


시장 네거리에서 채찍을 맞는 게 낫겠소. 호르텐시오 그래요. 당신 말처럼

썩은 사과를 고를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보시오. 우리가 이렇게 같은 피고석에 앉은 동지가 되었으니,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겠소. 서로 협조해서 뱁티스타 어른의 큰딸에게 남편감을 얻어 줍시다. 작은딸이 자유롭게 남편감을 고를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때 다시 경쟁하면 됩니다. 아름다운 비앵카! 그녀를 얻는 자에게 행복이! 가장 빨리 뛰는 자가 반지를 차지하는 법이오! 그레미오 씨, 어떻소? 그레미오 찬성이오. 그 말괄량이 계집에게 구혼하고,

구혼에 성공해 혼사를 치르고, 잠자리를 같이한 다음, 그 집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가 줄 그런 사내가 있다면, 난 기꺼이 그에게, 파도바에서 가장 좋은 말 한 필을 줄 수 있소.

(그레미오와 호르텐시오 퇴장) 39


트라니오 도련님, 말씀 좀 해 보세요.

사랑이란 것이 그렇게도 갑자기 사람을 사로잡을 수가 있나요? 루첸티오 트라니오, 그게 사실이란 걸

발견하기 전에는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또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조차 못했어. 하지만 봐. 이렇게 멍하니 서서 보고 있는 동안, 이렇게 멍청하게 사랑에 빠진 걸 알게 되었어. 그러니 이제 너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지. 너와 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그녀의 여동생 애나의 관계와 같아.4) 넌 내가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아주 귀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트라니오, 만약 내가 이 젊고 정숙한 처녀를 얻지 못한다면 심장은 타 버리고 몸은 말라비틀어져

4) 애나(Anna)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Dido)의 동생이다. 디도는 트로이 전 쟁에서 살아남아 떠돌다가 카르타고에 온 아이네아스를 깊이 사랑하고, 아 이네아스에 대한 연정을 애나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아이네아스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났고, 절망한 디도는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한다.

40


마침내 죽어 버리고 말 거야. 그러니 트라니오, 제발 날 좀 도와줘. 네게 날 도울 방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나를 도우리라는 것도 알고 있어. 트라니오 지금은 책망할 때가 아닌 것 같군요.

책망한다고 도련님 가슴속에서 사랑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요. 사랑의 포로가 된 이상 가능하면 값싼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을 것 같군요. 루첸티오 고마워. 계속 말해 봐. 마음에 드니까.

앞으로 들려줄 말이 위로가 될 것 같아. 그럴듯한 충고가 틀림없을 테니까. 트라니오 넋이 빠져 그녀를 보고 계셨으니

모든 문제의 핵심이 뭔지 아마 도련님은 보지 못했을 겁니다. 루첸티오 아니야. 나는 보았어. 아게노르의 딸인

에우로페5)의 얼굴처럼 아리따운 얼굴을 보았어. 5)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니키아 아게노르(Agenor) 왕의 딸 에우로페 (Europe)를 말한다. 에우로페가 바닷가에서 다른 소녀들과 노는 틈을 타서 제우스는 황소로 둔갑해 그녀에게 접근한다. 에우로페는 멋모르고 그 황소

41


위대한 제우스가 크레타 섬 해변에서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키스했다는 그 에우로페 말이야. 트라니오 다른 것은 보지 못하셨나요?

그녀의 언니가 사람 귀로는 차마 견딜 수 없을 만큼 목청을 높여 폭풍 같은 소릴 지르는 걸 보지 못하셨나요? 루첸티오 트라니오, 보았어.

산호 같은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니 그 입김 때문에 대기가 향기로 진동하는 걸 보았어. 비앵카에게서 본 모든 것은 성스럽고 감미로웠어. 트라니오 아니, 그럼 흔들어 깨워 드려야 할 때군요.

도련님, 제발 꿈 깨세요. 그녀를 사랑하신다면 정신 차리고 그녀를 손에 넣을 궁리를 하셔야죠. 지금 형편은 이렇습니다. 그녀 언니는 몹시 고약한 말괄량이라서 부친께서 큰딸을 치울 때까지는, 도련님이 사랑하는 동생분은 집에 틀어박혀 처녀로 썩어야 한답니다. 둘째 딸이 청혼자들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등에 탔고, 제우스는 그녀를 납치해 크레타 섬으로 데려가 결혼한다.

42


부친께서 그녀를 집 안에 단단히 가두어 둔 거죠. 루첸티오 아, 트라니오,

그분은 참으로 지독한 아비가 아닌가! 하지만 자네도 들었지? 그분이 둘째 딸을 가르치기 위해 노련한 가정교사를 찾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트라니오 네, 분명 들었어요.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요. 루첸티오 트라니오, 나도 떠올라. 트라니오 그럼 도련님, 분명해요.

두 사람 생각이 딱 들어맞아 하나가 되겠군요. 루첸티오 네 생각을 먼저 말해 봐. 트라니오 도련님이 직접 가정교사가 되어

그 처녀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에요? 그게 바로 묘안 아닌가요? 루첸티오 그래. 그런데 잘될까? 트라니오 가능성 없어요. 그럼 도련님 역할은 누가 하죠?

파도바에 온 빈첸티오의 아들 역할은 누가 하죠? 집안을 돌보고 열심히 책을 읽고 친구들을 환대하고, 고향 사람들을 방문해 그들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등의 일은 누가 하죠? 루첸티오 안심해도 좋아. 완벽하게 대비해 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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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 사람도 우릴 본 일이 없어. 우리 둘 얼굴을 보고 하인인지 주인인지 구별할 사람도 없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하자. 트라니오, 네가 나 대신 주인 역할을 좀 해 다오. 집안을 돌보고 나처럼 행세하면서 하인을 부려라. 나는 딴 사람 노릇을 할 것이다. 플로렌스 사람이나 나폴리 사람이나 천한 피사 사람인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묘안이 떠올랐으니 바로 실천하자. 트라니오, 즉시 그 옷을 벗고 화려한 내 모자와 외투를 걸쳐라. 비온델로가 오거든 놈더러 널 상전으로 모시라고 해. 하지만 먼저 비온델로를 설득해서 놈의 입을 봉해 놔야지.

(서로 옷을 바꿔 입는다.)

트라니오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도련님, 제가 간단하게 말하지요. 그게 도련님 뜻이라면 복종할 수밖에요. 44


고향에서 작별할 때 어르신께서 이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 시중을 잘 들어라.” 도련님이 말씀하신 그런 짓을 하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기꺼이 루첸티오 역을 하겠습니다. 루첸티오 도련님을 정말 좋아하니까요. 루첸티오 트라니오, 그렇게 해.

루첸티오도 널 끔찍이 좋아해. 그녀를 내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하인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그녀를 보고 갑자기 눈이 멀어 노예가 되고 말았다. 비온델로가 여기 오는구나.

(비온델로 등장)

이봐, 어딜 그리 싸다니느냐? 비온델로 어딜 싸다니느냐고요?

아니, 어찌 된 일입니까? 트라니오가 도련님 옷을 훔쳐 입었나요? 아니면 도련님께서 훔쳐 입었나요? 45


아니면 서로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이죠? 루첸티오 이봐, 여기 좀 와 봐. 농담할 때가 아니야.

상황과 때에 맞게 처신하도록 해. 네 친구 트라니오는 내 생명을 구하려고 여기 이렇게 내 옷을 입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난 도망치려고 트라니오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상륙한 뒤 싸움에 휘말려 내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게 발각될지 몰라 두려워서 이러는 거야. 그러니 부탁해.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 생명을 구할 때까지, 네가 트라니오의 하인이 되어 그 역할을 잘 좀 해 줘. 알아들었나? 비온델로 도련님,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요. 루첸티오 트라니오란 말을 절대 입에 담으면 안 돼.

트라니오는 루첸티오라는 사람으로 바뀌었으니까. 비온델로 트라니오는 정말 좋겠네.

나도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트라니오 이봐, 정말 그리될 수 있다면 좋겠어.

그래야 도련님이 뱁티스타 어른의 둘째 딸을 손에 넣고 소망을 이룰 테니까. 이 사람아, 내가 아니라 도련님을 위한 일이니, 46


어느 누구 앞에서건 신중하게 처신해야 해. 혼자 있을 때는 내가 트라니오지만, 다른 사람하고 있을 땐, 어디에 있든, 내가 자네 주인인 루첸티오란 말일세. 루첸티오 트라니오, 가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네가 청혼자들 중 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해. 그 이유를 묻고 싶겠지만, 적절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만 알아 둬.

(모두 퇴장. 서막 배우들이 무대에서 이야기한다.)

하인 1 나리, 졸고 계십니까?

연극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슬라이 아니, 천만에. 정말 마음에 들어.

그런데 아직 더 남았나? 시동

나리,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슬라이 부인, 정말 엄청나게 훌륭한 작품이오.

하지만 어서 다 끝났으면 좋겠소.

(모두 앉아서 연극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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