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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원인 곧, 인간은 죽을 것이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사인도 불분명하다. 의미는 찾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곧 죽는다는 확신, 전쟁의 약속이다. 누가 한 약속인가?

‹부상당한 군인›, 알베르트 안케, 1870년경


인텔리겐치아 2241호, 2014년 10월 1일 발행

국군의 날 3. 사순옥이 옮긴 하인리히 뵐의 ≪열차는 정확했다≫

곧, 나는 죽는다. 난 죽을 것이다. 곧. 네 스스 로 말했다. 네 안에 있는 누군가가 그리고 네 밖의 누군가가 이 곧이 실현될 것이라고 말 했다. 이 곧은 전쟁 중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확고한 얘기다. 전쟁은 앞 으로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난 영영 평화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 화는 없을 것이고 아무것도 더 이상 남아 있


지 않을 것이다. 음악도… 꽃도… 시도… 인 간의 어떤 기쁨도−곧 나는 죽을 것이다.

-≪열차는 정확했다(Der Zug war pünktlich)≫,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 지음, 사순옥 옮김, 21쪽

‘나’는 누구인가? 젊은 병사 안드레아스다. 휴가를 마치고 동 부전선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는데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불안의 근원은 무엇인가? 소리다. 그는 이 소리가 전쟁의 발단이고 모 든 불행의 근원이며 끔직한 전쟁을 지배한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지 모른다.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가? 죽음의 환상에 사로잡힌 채 계속 간다. 그러 다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병사 빌리와 지벤 탈을 만난다. 빌리는 누구인가?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갔으나 아내가 이미 러 시아인 전쟁 포로와 함께 사는 것을 목격한 다. 차라리 전쟁에서 죽고 싶은 심정으로 전 선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지벤탈은 어떤 일을 겪었나? 사디스트인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요 구를 거절한 병사는 그에게 사살되었다. 지 벤탈은 동료들과 함께 병사의 시체를 치운


다. 죽은 병사의 부인은 남편의 전사 전보를 받을 것이다. 거짓과 위선의 세상에 저항하 지 못하고 추잡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 에 지벤탈은 자신을 증오한다. 세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열차에서 하차한다. 셋은 폴란드의 한 유곽 으로 향한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안드레 아스는 슈베르트의 소곡을 듣고 감동을 받 는다. 누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인가? 창녀 올리나다. 고국 폴란드의 저항군을 위 해 독일군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스파이다. 전쟁 전에는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음악대학


을 다녔다. 적을 만난 것인가? 그렇다. 하지만 스물두 살의 청년 안드레아 스를 보고 자신이 아무 죄 없는 젊은이들을 죽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죄 책감을 느낀다. 자신의 스파이 노릇이 얼마 나 무의미한 것인지 인식한다. 두 사람은 육 욕이 없는 사랑을 느낀다. 왜 무의미한가? 비록 그것이 조국을 위한 것일지라도 자신이 돕고 있는 고국의 저항군 역시 단순히 사형 집행자들의 하수인밖에 되지 않다는 것을 깨 달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의 희생


자일 뿐이다. 희생자들의 선택은 무엇인가? 올리나는 세 사람과 함께 그녀의 손님인 독일 장교가 보낸 자동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도망 치려 한다. 그녀는 안드레아스를 죽음의 공 포에서 구하려 한다. 공포로부터 탈출하는가? 아니다. 폭탄이 터져 자동차는 동강이 난다. 죄 없는 젊은이들은 ‘형리(刑吏)’의 손을 벗어 나지 못하고 만다. 무엇이 ‘형리’인가? 낭랑한 소리이고 실체 없는 힘이다. 이것은


전쟁을 혼자서 조종하며 인간을 죽음으로 내 몬다. 전쟁의 메커니즘은 개인의 운명을 무 시하기 때문에 탈출은 불가능하다. 전쟁에 서는 ‘형리’와 희생자만 존재한다. 뵐에게 전쟁은 무엇인가? “티푸스와 같은 병”이고 원인은 결코 밝혀 지지 않는다. 따라서 ‘형리’는 익명으로 남는 다. 작가는 이 익명의 힘을 단지 ‘그들’로 표현 한다. 대명사는 파악할 수 없는 힘의 익명성 을 더욱 강화한다. 뵐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는가가 아니라 전쟁 이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가다.


반전문학인가? 그렇다. 1949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하인리 히 뵐의 처녀작이며 전쟁문학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전쟁문학과는 다르다. 다른 전쟁문학과 무엇이 다른가? 치열한 전투 현장을 그리지 않는다. 전쟁이 라는 커다란 사건에 말려든 병사들의 무기력 과 공포, 불안만을 묘사한다. 뵐에게는 전쟁 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어처구니없이 사라 져 가는 개인의 억울한 운명만이 중요하다. 전쟁 테러에 무력한 인간의 실존적 공포만을 세세히 전달할 뿐 전쟁에 대해 판단하지 않 는다.


하인리히 뵐은 누구인가? 독일의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사순옥(사지원)이다.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다.


전쟁의 원인 곧, 인간은 죽을 것이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사인도 불분명하다. 의미는 찾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곧 죽는다는 확신, 전쟁의 약속이다. 누가 한 약속인가?

‹부상당한 군인›, 알베르트 안케, 1870년경


열차는 정확했다 하인리히 뵐 지음 사순옥 옮김 독일 소설 2009년 2월 15일 출간 사륙판(128*188) 양장본, 118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열차는 정확했다


그들은 아래쪽의 어두컴컴한 지하도를 통과하면서 기차가 위의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확성기에서는 아 주 부드러우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파리발 프 르체미슬행 전선 휴가병 열차.’ 그들은 계단을 올라 플랫폼으로 들어서 어느 차량 앞에 서 있었다. 그 차량에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서 꽉 채운 큰 짐 들을 가진 휴가병들이 올라타 있었다. 플랫폼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재빨리 사라졌다. 어느 창가 옆에는 소녀 들이나 여자들 또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문 아버지가 서 있었 다. 그리고 낭랑한 소리는 서두르라고 말했다. 열차는 정확 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어느 열려 있는 문으로 올라탔다. 안에 서 창문을 내리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밖을 내다보았 다. 한편 그 위에서는 낭랑한 소리가 마치 점액질 구름처럼 맴돌았다. “발차.” 안드레아스가 서서히 차 안을 더듬거릴 때 그의 내면에 서 ‘곧이란 ’ 단어가 총알처럼 떠올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 없이 살과 조직과 세포와 신경을 통과하여 끝내는 어 딘가에 꽂혀 폭발하고 말았다. 거친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 게 했다. 삶… 고통… ‘곧’ 하고 그는 생각했다. 공포가 깊이, 깊이 내려앉았다. 19


공포 그리고 완전한 확신. ‘이제는’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제 다시는 이 정거장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마지막 순간 까지 비난했던 내 친구의 얼굴도… 다신 보지 못할 거야.’ 그는 자리를 잡고 옆에서 자고 있는 군인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곧’ 하고 그는 생각했다. 기차의 딸가닥거리는 소리, 모 든 것이 예전과 같다. 냄새. 무조건 담배만 피우고 싶다. 단 지 자지 말 것! 창가로 도시의 어두운 윤곽이 스쳐 간다. 멀 리 어두운 하늘에는 서치라이트가 무엇을 찾는 듯하다. 그 빛은 마치 밤의 푸른 외투를 입은 시체의 긴 손가락 같다. 또 멀리에서는 은은하게 고사포 소리가 들린다. 그리곤 불빛이 없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어두운 집들이 있다. 이 ‘곧은 ’ 언제가 될 것인가? 피가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와 가슴으로 되돌아가고 돌고 돈다. …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 상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 문 장을 만들자마자 ‘나는 곧 죽을 것이다라는 ’ 말이 불쑥 머리 에 떠올랐다. 곧, 곧, 곧, 곧, 곧은 언제일까?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 말 인가. 곧. 곧은 1초 이내일 수도 있고, 1년 이내일 수도 있다. 곧은 소름 끼치는 단어다. 곧은 미래를 압축시켜 작게도 한 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전혀 없다. 절 20


대적인 불확실만이 있을 뿐이다. 곧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많은 것일 수도 있다. 곧은 모든 것이다. 곧은 죽음이 다. 곧, 나는 죽는다. 난 죽을 것이다. 곧. 네 스스로 말했다. 네 안에 있는 누군가가 그리고 네 밖의 누군가가 이 곧이 실 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곧은 전쟁 중에 있을 것이다. 그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확고한 얘기다. 전쟁은 앞으로 얼마 나 계속될 것인가? 난 영영 평화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없을 것 이고 아무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음악도… 꽃 도… 시도… 인간의 어떤 기쁨도−곧 나는 죽을 것이다.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미래를 상상하자고 그는 생각한다. 이 곧은 아마 거짓일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지치 고 지나치게 흥분하여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이 끝 난 후에 할 일을 상상해 보려 한다. 그가 할 일이 있을 테 지… 있을 거야…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벽, 아주 검은 벽이 가로막혀 있다. 그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문장 을 끝까지 생각하고자 자신에게 강요할 수는 있다. 난 공부 를 할 것이다. … 어딘가 방을 얻고… 책이 있고… 담배가 있고… 공부를 할 것이다. … 음악… 시… 꽃을… 그러나 그는 문장을 끝까지 생각하려고 자신에게 강요할 21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꿈이 아니며 무게도 피도 또 어떤 인간적인 실체도 없는 한낱 창백한 생 각일 따름이다. 미래는 얼굴이 없다. 어딘가에서 끝나버린 다. 그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가 이러한 이미지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더 자주 든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 그것은 1년과 1초 사이에 놓여 있는 확실함이다. 더 이상 꿈 이란 없다. 이 모든 불행은 이 낭랑한 소리에서 나온다. 이 낭랑한 소리가 전쟁을 시작했고 이 낭랑한 소리가 끔찍한 전쟁을 조정한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 렘베르크와 체르노비츠 사이에서. 내 생명은 일정한 킬로미터의 숫자에 불과하다. 철로의 구 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렘베르크와 체르노비츠 사이에 전선이 없다는 점이다. 빨치산도 많지 않다. 아니면 전선이 밤새 이 멋지고 깊은 여행을 하게 했는가? 아주 갑자 기 전쟁이 끝난 것인가? 평화가 이 ‘곧’ 이전에 올까? 어떤 파 국이 올까? 아마 신의 동물은 죽었을 것이다. 결국 살해된 것이다. 아니면 소련 사람들이 전면 공격을 가해 렘베르크 와 체르노비츠 사이까지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어버리고 항 복… 도망쳐 나갈 길이란 없다. 잠자던 군인들이 깨어나서 22


먹고 마시고 떠들기 시작한다. “어이.” 거친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린다. “여보게, 함 께 게임 한판 할까?” 그는 놀라 몸을 돌려 “예” 하고 무턱대 고 말한다. 그때 그는 면도를 하지 않은 군인의 손에 들려 있 는 카드를 본다. 그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군인이 있다. 좋다고 대답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고개 를 끄덕이고 수염쟁이를 따라간다. 통로는 비어 있다. 둘은 짐을 들고 앞 차량으로 옮긴다.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긴 금발머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다. “한 사람 구했어요?” “그래.” 거친 목소리로 수염쟁이가 말한다. 안드레아스는 그들이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 차린다. 열차는 덜컥거리며 달리고 있다. 날이 점점 밝아온 다. 열차는 낭랑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역이건 낭랑한 소리 가 없는 역이건 다 정차한다. 열차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가 는 텅 비곤 한다. 그러나 그들 셋만은 구석에 앉아서 카드놀 이를 한다. “플러시” 하고 그는 말한다. 그가 또 이겼다. 주머니에 돈 이 한 뭉치나 됐다.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수염쟁이가 말한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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