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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방향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기계가 생활을 만든다. 일상이 계산으로 움직이면 인류는 작은 합리에 수감된다. 이제 끝인가 싶을 때,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반대쪽을 돌아본다. 그곳엔 도덕과 사랑의 영웅들이 있다.

1927년의 앙리 베르그송, 그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인텔리겐치아 2261호, 2014년 10월 14일 발행

노벨문학상 2. 김재희가 뽑아 옮긴 앙리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천줄읽기≫

닫힌사회는 다른 인간들에게는 무관심한 채 구성원들끼리 결속되어 있는 사회이고, 공 격하거나 방어할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으면 서 전투태세를 강요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 의 손에서 만들어져 나왔을 때의 인간 사회 다. 개미가 개미 집단을 위해 만들어졌듯이, 인간도 사회를 위해 만들어졌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천줄읽기(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지음, 김재희 옮김, 132쪽


닫힌사회는 어떻게 닫히게 되는 것인가? 한 사회의 보존과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집단 이기주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회와 전쟁으로 가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닫힌사회는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억압의 도덕과 정적 종교다. 억압의 도덕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결속을 지향하는 본능에 따라 의무를 강제하는 것이다. 가족애와 애국심으로 똘 똘 뭉쳐 다른 사회에 대해 배타적인 거리를 취한다.


정적 종교는 무엇인가? 억압의 도덕을 강화하는 종교다. 인간이 지 닌 고도의 합리적 지성에 저항하는 환각적 표 상, 즉 미신을 꾸며 내서 한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한다. 닫힌사회에서 인류의 모습은 어떤가? 자신이 이룩한 문명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 한다. 문명의 억압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거대한 기계의 발명으로 근대 산업사회가 구 축되면서 인간의 물리적 힘이 크게 증가했 다. 그에 따라 기계적인 것이 신비적인 것을 위축시키고, 커진 육체는 영혼의 보충을 기


다리게 되었다. 인간은 미래에도 이렇게 살게 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뭐가 달라지는가? 사회의 진화에서는 한쪽의 경향을 극단으로 소진한 다음에는 반대쪽 경향을 뒤이어 실현 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역사 속에서 관찰되 는 보수와 진보 양극단의 교대는 파국으로 치 닫기 전에 인간 사회가 진정한 살길을 찾아 도약할 가능성을 암시한다. 진정한 살길이란 무엇인가? 열망의 도덕과 동적 종교로 특징되는 열린사


회로 도약하는 것이다. 열린사회는 어떤 것인가?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의 본성에 기초를 둔 다. 사회와 사회의 관계 속에서 타자에 대한 개방과 포용을 허용하는 사회다. 열망의 도덕이란 무엇인가? 보편적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인류 전체의 진보 를 지향하는 것, 타자를 환대하는 것이다. 동적 종교는 무엇인가? 열망의 도덕을 강화하는 종교다. 인류를 근 본적으로 변혁하고 인간 사회의 진보를 개방 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를 실천한다.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 넘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도약이 필요하다. 예수나 성인들이 실천해 보였던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을 모두가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 전체가 예수처럼 살 수 있나? 도덕적 영웅들의 사랑의 행위로부터 받은 정 서적 감동과 그들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을 자발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근시안적 지성 의 눈을 생명 일반과 인류 전체의 근원에 대 한 직관으로 돌려 전체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 다면 인류의 미래는 열릴 수 있다.


앙리 베르그송은 누구인가? 프랑스의 철학자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 학 교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유네스코 의 전신인 국제연맹 국제협력위원회 의장 을 지내고, 레지옹 도뇌르 명예 훈장에 이어 1927년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살아생전에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철학자에게도 노벨문학상을 주는가? 20세기 중반까지는 문학자가 아니라 뛰어난 글을 남긴 역사가나 철학자에게도 준 적이 있 다. 테오도어 몸젠이나 버트런드 러셀도 그 상을 받았다.


당신은 이 책을 어떻게 발췌해 옮겼는가? 원전의 주요 내용을 장별로 균형 있게 소개 하면서 핵심 사상에 접근할 수 있도록 30%를 발췌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재희다.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다.


인류의 방향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기계가 생활을 만든다. 일상이 계산으로 움직이면 인류는 작은 합리에 수감된다. 이제 끝인가 싶을 때,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반대쪽을 돌아본다. 그곳엔 도덕과 사랑의 영웅들이 있다.

1927년의 앙리 베르그송, 그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천줄읽기 앙리 베르그송 지음 김재희 옮김 철학 2013년 3월 25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64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제1장 도덕적 의무

사회 속의 개인 도시의 구성원들은 한 유기체의 세포들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성과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형성된 습관은 그 구성원 들 사이에 규율을 도입하는데, 그 규율은 구분되는 개체들 사 이에 자신이 확립한 연대성을 통해서, 서로 접합되어 있는 세 포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의 통일성을 멀리서 모방한다. 다시 한 번 말하면, 모든 것은 사회 질서가 사물들 안에 서 관찰된 질서를 모방한다는 데로 수렴한다. 우리들 각자 는,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을 때, 자신의 기호, 자신의 욕망,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따르면서 다른 사람은 염두에 두지 않 는 자유로움을 분명히 느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축적된 모 든 사회적 힘들로 이루어진 어떤 반대의 힘이 등장하면 오 히려 표현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동기들의 차이로 각자 기 울어지는 것과 달리, 이 힘은 자연현상들의 질서와 유비적 인 어떤 질서에로 도달할 것이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 가 잠시 의식적이 되어 벗어날 의도를 나타내자마자 그것은 다시 필연성에 붙들릴 것이다.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개인 25


은, 자신이 창조하는 데 조금은 기여했지만 무엇보다 복종 하고 있는 그 사회가 모방하고 있는 필연성의 방향을 바꾸 거나 심지어 그 필연성을 해체해 버릴 수도 있다. 이 필연성 에 대한 느낌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식을 수반하지 만, 그래도 역시 그 개인이 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고찰해 볼 때 가장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무란 습관이 자연에 속하듯이 필연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무는 분명 외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우 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만큼 사회에도 속한다. 만일 심층에서 작동하고 있는 각자의 의식이, 아래로 내려 감에 따라, 다른 누구와도 통약 불가능하고 게다가 표현할 수도 없는, 점점 더 근원적인 인격성을 드러낸다면, 우리 자 신의 표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연속성 속에 있고, 그 들과 비슷하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 상호 의존을 창출하는 어떤 규율에 의해서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 자신의 이러 한 사회화된 부분에 자리 잡는 것이 우리의 자아가 견고한 어떤 것에 달라붙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가? 아마 그럴 것 이다. 우리가 충동, 변덕, 후회의 삶에서 달리 벗어날 수 없 다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가장 심층에서 그것을 찾 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피상적인 균형보다 더 바람직 한 다른 종류의 균형을 발견할 것이다. 표면 위로 나와 있는 26


수생식물은 물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 잎들 은 물 위에서 서로 결합해 있으면서, 서로의 얽힘을 통해, 위에서, 안정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밑에서 그 식물들을 지 탱해 주는, 땅에 굳게 박혀 있는 뿌리들이 훨씬 더 안정적이 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바닥에까지 파고들어 가는 노력 에 대해서는 잠시 동안 말하지 않겠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보통 자신의 표면 에, 외면화된 다른 인격들로 짜인 조직 안에 삽입되어 있는 자신의 지점에, 몰두하고 있다. 이것의 견고함은 그 연대성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가 몰두하는 바로 그 지점에 사회화된 자아 자신이 있다. 우리가 인간들 사이의 연결로 표상한 그 의무는 무엇보다 우리들 각자를 (사회화된) 그 자 신에 연결한다. (MR, 6∼8/985∼986)

의무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의무의 본질과 그 기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의무에 대 한 복종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노력이고, 긴장이나 수축의 상태라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수많은 도덕 이론들 을 오염시킨 심리학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렇게 해 27


서 인위적인 난점들, 철학자들을 분열시킨 문제들이 발생하 는 것이며, 이것들은 우리가 그 사항들을 분석해 보면 사라 지게 될 것이다. 의무란, 신비한 환영처럼 다른 것들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른 것들과 통약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어떤 사실이 전혀 아니다. 만일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특히 칸트와 관련된 자들이 의무를 그렇게 고찰했다면, 이는 그 들이 의무에 대한 느낌, 그 성향과 관련된 차분한 상태를, 그 것에 대립하는 것을 부술 때 때때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동 요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류머티즘의 발작이 시작되면 근육이나 관절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기관들에 대립하 는 어떤 저항에 대한 총체적인 감각이다. 그 감각은 점점 감 소하다가, 우리가 건강해질 때 우리의 운동에 대해 갖는 의 식 안에서 사라진다. 다른 한편 그 감각이 여전히 막 나타나 려는 상태 아니면 차라리 사라지려는 상태로 거기에 남아 있다가 강화될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류머티즘에 걸려 있을 때는 그 발작을 기다려야만 한 다. 그런데도 팔다리를 움직이려는 우리의 습관적인 느낌 에서 오직 고통의 약화만을 보려는 자에게, 즉 우리의 (정상 적인) 운동 능력을 류머티즘의 불편함에 대한 저항의 노력 으로 정의하려는 자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 28


렇게 해서 우선 운동 습관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각각의 운동 습관은 사실 운동들의 특수한 조합을 함축하고, 그 조합에 따라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걷고 달리고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는 일반적인 능력은 오직 요소 적인 습관들의 총합일 뿐이며, 그 습관들 각각은 자신이 담 고 있는 특별한 운동들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설명을 발견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만 이 능력을 고찰하면서, 더욱이 이것을 어떤 저항에 대립되는 능력으로 세우면서, 필연적 으로 사람들은 류머티즘을 독립적인 실체처럼 (그 능력과 무관하게) 그 옆에서 발생하게 만든다. 의무에 대해 고찰했 던 많은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던 것처 럼 보인다. 우리는 제각각 설명을 요하는 수많은 특수한 의 무들을 갖고 있다. 의무 전체에 복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습관적인 것이다. 예외에 의해 서만 그 의무들 중 어떤 것을 분리해서 그것에 저항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이 저항에 저항한다면, 긴장이나 수 축의 상태가 산출될 것이다. 우리가 의무에 엄격한 면을 부 여할 때 외재화하는 것이 바로 이런 꼿꼿함이다. 철학자들이 의무를 이성적인 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다 고 믿을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꼿꼿함이다. 저항에 저항 하기 위해서, 또는 욕망, 정열, 흥미가 우리를 이탈시킬 때 29


올바른 길 위에 우리 자신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 우리는 필 연적으로 우리 자신을 이성에 맡겨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부정한 욕망에 다른 욕망을 대립시킨다 할지라도, 의지를 통해 야기된 이 후자의 욕망은 오직 관념의 호소에 따라서 만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지성적인 존재자는 지성 을 매개로 자기 자신에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길들 을 통해서 의무로 간다는 것에서, 의무가 이성적인 질서에 속한다는 것은 도출되지 않는다. (MR, 14∼16/991∼992)

의무 전체와 사회의 지위 요컨대, 절대적으로 정언적인 명령은 본능적이거나 몽유병 적인 본성에 속한다. 그것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그처럼 작 동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유들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는 아 니지만 정식화될 수 있을 정도로는 충분히 오랫동안 반성해 본다면, 그것은 그처럼 표상된다. 좌우간 합리적인 존재자 의 경우, 발휘되는 그 활동성이 지성적인데도 본능적인 형 태를 더 많이 취하게 될수록, 어떤 명령도 그만큼 더 정언적 인 형태를 취하게 될 거라는 건 자명하지 않은가? 어쨌든 처 음엔 지성적이었지만 결국 본능의 모방에 도달하게 된 활동 30


성은 정확히 말해 인간에게 습관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리 고 가장 강력한 습관, 축적된 모든 힘들로 이루어진 힘을 지 닌 습관, 요소적인 사회적 습관들 모두로 이루어진 습관, 그 것은 필연적으로 본능을 가장 잘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완 전하게 표상되고 모든 종류의 이유들로 정당화된 의무로부 터 순수하게 체험된 의무를 분리하는 짧은 순간에, 사실상 그 의무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의 형태로 취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 사람들이 ‘도 덕’이라 부를 수 있을 그 습관들 각각은 우연적인 것일 거다. 그러나 그 습관들의 총체, 내가 습관들을 습관 들이는 습관 이라 부르는 것은, 사회들의 토대에 놓여 있으면서 그들의 실존을 조건 짓는 것으로서, 본능의 힘에 비교될 만한 어떤 힘을, 강도와 규칙으로서 가질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정확하 게 우리가 ‘의무 전체’라고 불렀던 것이다. (…) 본능과 지성은 도구 사용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갖 는다. 후자는 발명된, 따라서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도구들을 사용하고, 전자는 자연이 제공한, 따라서 불변하 는 기관들을 사용한다. 게다가 도구란 일을 위해 고안된 것 이고, 또 이 일이란 상호 보완적인 다양한 특성의 일하는 사 람들로 더 전문화되고 더 분화될수록 그만큼 더 효과적인 것이다. 사회적 삶은 이렇게 본능에도 지성에도 모호한 이 31


상처럼 내재해 있다. 이 이상은 가장 완전한 자신의 현실화 를 한편으로는 꿀벌이나 개미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사회에서 발견한다. 인간적이든 동물적이든, 사회는 하나 의 유기 조직이다. 사회는 요소들 간의 협력과 함께 일반적 으로 상호 종속도 함축한다. 따라서 사회는 단순히 체험되 는 것이든 아니면 표상되는 것이든 간에 규칙들이나 법칙들 의 총체를 제공한다. 한 무리의 꿀벌이나 개미 떼에서, 개체 는 자신의 구조에 따라 쓰임이 고정되어 있고, 조직은 상대 적으로 불변한다. 반면, 인간 도시는 가변적인 형태를 지니 고 모든 진보에 개방되어 있다. 이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전 자는 각각의 규칙이 자연에 의해 부과되며 필연적인 것인 반면, 후자는 단 하나의 것, 즉 규칙의 필연성만이 자연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 안에서 일반적인 의무 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의무들의 뿌리를 파헤쳐 볼수록, 의무는 점점 더 필연성이 되어 갈 것이고, 명령성을 지닌다 는 점에서 점점 더 본능에 가까워져 갈 것이다. 그렇지만 무 엇이든지 간에 특수한 의무인 것을 본능에다 갖다 붙이고자 한다면, 그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항상 말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어떠한 의무도 본능적인 본성 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의무 전체는 아마 인간 사회가 변화 가능성과 지성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면 본능에 속하는 것이 32


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본능이다. 말 하기의 습관 배후에 있는 본능처럼. 인간 사회의 도덕은 사 실 인간의 언어에 비교될 수 있다. 만일 개미들이 기호를 교 환한다면, 이는 그럴 법하게 보이는데, 그 기호는 그들이 함 께 소통할 수 있도록 한 본능 자체에 의해서 그들에게 제공 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언 어란 사용의 산물이다. 어휘에도 구문에도 자연으로부터 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말하기는 자연스러운 것이 고, 대개 곤충 사회에서 사용하는, 자연적인 기원을 갖는 불 변의 기호들은, 만일 자연이 우리 안에 말하기의 능력을 부 여하면서 그 도구의 제작과 사용 기능을, 따라서 지성의 것 인 발명의 기능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의 언어 였을지도 모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일 인간 사회가 지성적이 아니라 본능적이었다면, 의무였을지도 모르는 것 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하자. (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특수한 의무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고, 심지 어 계속 붙들고 있다면 거짓일 어떤 관념을 의무 일반에 제 공할 것이다. 그런데도 도덕의 토대들에 대한 탐구에 길 안 내자 없이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면, 지성 사회에 짝을 이루 는 이 본능 사회에 대해서도 사유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관 점에서 보면, 의무는 자신의 특수한 성격을 잃어버린다. 의 33


무는 생명의 가장 일반적인 현상들에 관련되는 것이다. (…) 자연적인 것은 대부분 후천적인 것에 가려진다. 그 러나 그것은 거의 불변한 채로 수세기를 가로질러 존속한 다. 습관들과 인식들은 흔히 상상되었던 것처럼 유기체에 배어들거나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 실 자연적인 것이 문명의 세기 동안에 자신 위에 축적되어 온 획득 습관들에 의해 으깨져 버렸다면, 의무에 대한 우리 의 분석에서 우리는 그 자연적인 것을 무시할 만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도 매우 강력한 상태로 아주 생생하게 유지되고 있 다. 이런저런 사회적 의무를 고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 리가 의무 전체라고 불렀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자연적인 것)이다. (MR, 20∼ 25/996∼999)

조국애와 인류애의 본성 차이 요컨대, 우리가 사회적 의무의 토대에서 파악했던 사회적 본능은 항상−본능은 상대적으로 불변하기에−닫힌사회 를 겨냥한다. 그 사회가 아무리 광대하다 해도 말이다. 물론 34


그 사회적 본능은 다른 도덕에 은폐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도덕을 통해서 유지되고, 그 도덕으로부터 명령적 성격을 띤 어떤 힘을 빌려 온다. 그러나 사회적 본능 그 자체가 인류 를 겨냥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큰 국가라 해도, 국가와 인류 사이에는 유한과 무한 사이의, 폐쇄와 개방 사이의 모든 거 리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시민의 덕을 훈련하는 것은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국 을 소중히 하고 같은 동족인 인간을 사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라고들 말한다. 우리의 동감(sympathie)은 이렇게 연속 적인 진전에 의해 확대되고, 동일한 것이 점차 커져가며, 마 침내 인류 전체를 포용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영혼의 순수하게 지성주의적인 개념화로부터 비롯된 선험 적인 추론이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세 집단 (가족, 국가, 인류)이 점점 더 증가하는 사람들을 포괄한다 고 인정하며, 따라서 사랑받는 대상의 계속적인 그런 확대 가 느낌의 점진적인 팽창에 단순히 상응한다고 결론짓는다. 게다가 그런 착각을 고무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우연한 마 주침으로 인해서 그 추론의 첫 번째 부분이 사실들과 일치 하는 것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즉 가정과 사회가, 그 기원에 서는 서로 혼동되며, 밀접한 연관 속에 남아 있다는 아주 단 순한 이유로, 가정의 덕이 시민의 덕에 잘 연결되어 있다는 35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일반적인 인류 사 이에는, 반복해서 말하지만, 폐쇄와 개방 사이에서와 같은 대조가 있다. 두 대상의 차이는 본성상의 것이지, 더 이상 단순히 정도상의 것이 아니다. 이를 우리가 영혼의 상태라 는 경우로 옮겨 가서, 조국에 대한 애착과 인류에 대한 사랑 이라는, 두 감정 상태에서 비교한다면 어떨까? 사회적 응집 력은 대개 다른 사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한 사회의 필연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을 사랑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항해서 라는 것을 누가 보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원초적인 본능 이다. 이것은 문명의 축적물 아래에 적절히 은닉된 채로 아 직 거기에 남아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자 연스럽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우리의 부모와 동료 시민들을 사랑하는 반면, 인류에 대한 사랑은 간접적이고 후천적이 다. 전자에게 우리는 직접 다가가지만, 후자에게는 오직 우 회를 통해서만 다가간다. 왜냐하면 종교가 인간에게 같은 인간 종족을 사랑하라고 권하는 것은 오직 신을 통해서만, 신 안에서만 그렇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자들이 인간 인격 의 탁월한 위엄과 모든 사람의 존중받을 권리를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이성 안에서 만 인류를 바라보게 한 것과 마찬가지다. 전자든 후자든, 우 36


리는 가족과 국가를 거쳐서 단계별로 인류에 도달하지는 못 한다. 우리는 껑충 뛰어넘어서, 그 인류보다 훨씬 더 멀리까 지 건너갔어야만 하고, 또 그것을 최종 목표로 삼지 않고 그 것을 초과해 가면서, 그 인류에 도달했어야만 한다(그래야 인류에 도달할 수 있다). (MR, 27∼29/1001∼1002)

사회적 도덕과 인간적 도덕 어느 시대에나 이 (완전한) 도덕을 육화한 예외적 인간들이 출현했다. 기독교의 성인들 이전에는 그리스의 현자들, 이 스라엘의 예언자들, 불교의 아라한들, 그 밖의 다른 이들에 대해서 인류는 알고 있었다. 절대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이 완전한 도덕성을 갖추기 위해서 사람들이 항상 참 조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이런 사실 자체가 이미 특징적 이고 교훈적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문제 삼았 던 도덕과 우리가 이제 연구하려는 도덕 사이에, 최소치와 최대치 사이에, 두 극단들 사이에, 단지 정도상의 차이가 아 닌 본성상의 차이를 예감하게 한다. 전자가 비인격적인 형 식들로 잘 환원되는 만큼 더 순수하고 더 완벽한 것인 반면 에, 후자는 온전하게 그 자신이기 위해서 하나의 범례가 되 37


는 특권화된 어떤 인격체로 육화되어야만 한다. 전자의 일 반성이 어떤 법칙의 보편적인 수용에 있다면, 후자의 일반 성은 어떤 모델의 공통된 모방에 기인한다. 왜 성인들은 모방자들을 지니며, 왜 선(善)의 위대한 인 간들은 추종하는 군중을 뒤에 끌고 다니는가? 그들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획득한다. 그들은 설교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들의 존 재 자체가 하나의 호소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완전한 도 덕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의무가 억압이거나 압 박이라면, 완전하고 완벽한 이 도덕에는 호소가 있다. 이 호소의 본성은 자신이 위대한 도덕적 인격체 앞에 있 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완전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 나 우리들 각자는, 행위의 습관적인 준칙들이 불충분한 것 처럼 보일 때에는, 비슷한 경우라면 이러저러한 사람이 자 신에게 기대했을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 속에서 떠올려 보는 사람은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한 친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우리가 결코 만나 보지는 못했고 단순히 사람들이 그의 삶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던 어떤 인간일 수도 있고, 그래서 상상 속에서 그의 판단에 따라 우리의 행위를 복종 시키면서, 그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그의 칭찬을 자랑스러 38


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영혼의 바닥으로부터 의 식의 빛으로 끌어내 온, 우리 안에서 탄생한, 더 나중에는 우리 자신을 온통 사로잡을 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스 승에게 제자가 하듯이 당분간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매어 놓고 싶은, 그런 인격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인격 체는 사람들이 그를 하나의 모델로 채택했을 때 나타난다. 취하고자 하는 어떤 형상을 관념적으로 발생시키는 닮고 싶 은 욕망은 이미 닮아 있음이다. 자신이 하려는 말은 자기 안 에서 메아리로 들었던 그 모델의 말 바로 그것이다. 그 인물 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만은 인정하자. 즉 앞서의 도덕이 비인격적인 의무들로 분명하게 분리될수 록 그만큼 더 힘을 가졌다면, 반대로 이 후자의 도덕은, 우 선은 우리의 지성이 집착하고 있지만 우리의 의지를 흔들 정도는 아닌 일반적인 교훈들 속에 흩어져 있으나, 준칙들 의 다수성과 일반성이 한 인간의 통일성과 개체성 안에 잘 녹아들어 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마음을 끌게 된다. 도대체 그의 힘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자연적인 의무 에 뒤따르는, 아니, 차라리 그것을 흡수하고 마는 그 행위의 원리는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암암리에 요구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문제되었던 의무들 은 우리가 사회적 삶에 부여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인류에 39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도시에 대해서 짊어져야 할 의무들이 다. 따라서 사람들은 오로지 사회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라는 점에서 두 번째 도덕이−결정적으로 그 둘을 구분하자면−첫 번째 도덕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우 리는 보았다. 인류에 도달하는 것은 도시를 확장함으로써 가 아니라는 것을. 사회적 도덕과 인간적 도덕 사이의 차이 는 정도상의 것이 아니라 본성상의 것이다. (MR, 29∼ 31/1003∼1004)

닫힌 영혼과 열린 영혼 인간의 도덕적 태도와 사회는 한 몸을 이룬다. 양자는 개인 의 보존과 사회의 보존이라는 동일한 임무에 함께 몰두하고 있다. 개인과 사회는 모두 자기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 물 론, 특수한 이익이 일반적인 이익과 항상 일치하는지는 의 심스럽다. 공리주의적 도덕이 원리상 개인은 오직 자기 고 유의 선만을 추구할 수 있고, 따라서 개인이 타인의 선을 위 해 행위할 때도 이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 도덕 을 사로잡고 있는 풀 수 없는 몇몇 난점들에 대해 사람들은 40


알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데, 지성적인 존재자는 종종 공공의 이익이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할 것이다. 그런데도 공리주의적 도덕이 이런저런 형 태로 계속해서 다시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도덕이 지지받 을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 도덕이 지 지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자기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 사 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지성의 활동 아래에, 자연이 심어 놓 은 원초적인 본능적 활동의 기체(基體)가 있고, 바로 거기 서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거의 서로 섞여 있기 때문 이다. 세포는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생명성을 주고받는 유기체 전체를 위해서도 산다. 그것은 필요하다면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 만일 그 세포가 의식적이라 면, 그렇게 희생하는 것도 그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아마 이것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개미 의 영혼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개미는 자신의 활 동이 자기의 선과 개미 집단의 선 사이의 중간적인 어떤 것 에 걸려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근본적 인 본능에다가 엄밀히 말한 의무를 갖다 붙여 놓았다. 그 본 능은, 기원에서,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서로 구분되 지 않는 어떤 상태를 함축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 본능에 해당하는 도덕적 태도가 자기 자신들에게로 되돌아 41


가는 개인의 것이자 사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그 영혼은 여기서 하나의 원 환 속에 있다. 그 영혼은 닫혀 있다. 다른 태도는 열린 영혼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들어오 게 하는가? 만일 그것이 인류 전체를 감싸 안는다고 말한다 면, 이건 너무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충분히 멀리 나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을 텐데,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동물들에로, 식물들에로, 자연 전체에로 확장될 것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그를 차지하게 되는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그가 취했던 태도를 정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 영혼은 엄밀히 말해서 그 모든 것조차 넘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영혼의 형식은 내용에 의존하 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막 채웠다면, 이제 다시 비울 수 도 있다. 자비로운 마음은 그런 영혼을 소유한 자에게 존속 할 것이다. 심지어 지상에 다른 생명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조차도. 다시 한 번 말하면, 전자의 상태에서 후자의 상태로 넘어 가는 것은 자아의 팽창에 의해서가 아니다. 물론 아주 순수 하게 지성주의적인 심리학은 언어의 지시를 따르면서 영혼 의 상태들을 그것들이 주의하고 있는 대상들에 의해 정의할 것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42


사랑, 이 세 경향들 속에서 그 심리학은 동일한 감정이 증가 해 가는 사람들의 수를 포괄하기 위해서 점점 더 팽창해 간 다고 볼 것이다. 영혼의 그 상태들이 동일한 태도나 동일한 운동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번역되고, 그 셋 모두에게 우리 의 마음이 기울어진다는 그런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 들을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묶게 만들고 똑같은 단어로 그것 들을 표현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서로 관 련되어 있는, 점점 더 커지는, 세 대상들로 지칭하면서 구분 할 것이다. 사실 그것들을 지시하는 것은 이것으로도 충분 하다. 그러나 그 단어가 그것들을 묘사하는가? 그 단어가 그것들을 분석하는가? 첫눈에 보아도, 의식은 앞의 두 감정 과 세 번째 감정 사이에 본성상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챈다. 가족애와 조국애는 어떤 선택에 따라서 어떤 배제를 함축한 다. 그것들은 싸움을 야기할 수도 있고, 또 증오를 쫓아내지 도 않는다. 그러나 인류애는 오직 사랑일 뿐이다. 전자의 것 들은 자신들을 사로잡는 어떤 대상에 바로 안착하려고 한 다. 후자는 대상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는다. 인류애는 대상 을 겨냥하지 않고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가며, 오히려 인류 를 가로질러 감으로써만 인류에 도달한다. (MR, 33∼ 35/100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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