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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까짓 것 내가 무엇이 되든, 나 자신이든 아니든, 인간인 바에야 그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다. 철저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연극 <리처드 2세>, 그레고리 도란 연출, 로열셰익스피어극장, 2013


인텔리겐치아 2274호, 2014년 10월 22일 발행

시월의 새 책. 강태경이 옮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

헨리 볼링브로크 양위에 일말의 불만이라도 있으신지요? 리처 드 없소, 아니 있소. 있고도 없소. 있고 도 없는 존재, 그게 나니까. 그러니 있다 고 할 수도 없지, 왕위를 그대에게 넘겨 주었으니. 자, 내가 어떻게 나를 없애는 지 잘 지켜보시오. 내 머리에서 이 무거 운 짐을 내려놓고, 내 손에서 이 성가신


지팡이도 내려놓는다. 내 마음에서 왕 의 긍지도 몰아내고 이마에 기름 부음 받 았던 성유는 내 눈물로 씻어 낸다. 내 손 으로 왕관을 내어 주고 내 입으로 내게 주어진 신성한 통치권을 부인한다. 신 하와 백성으로부터 받은 충성과 의무의 서약들은 한숨으로 토해 내어 모두 없던 것으로 하고, 왕으로서 누리던 모든 영 광과 존엄은 남김없이 내려놓는다. 내 영지와 세입과 그 외 모든 소득을 포기할 것이며 내가 세운 법과 칙령과 조례들을 모두 파기한다. 신이여, 내게 한 맹세를 깨뜨린 자들을 부디 용서하소서! 당신 께 한 맹세를 깨뜨리지 않은 자들을 보우 하소서!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 슬퍼할


것 또한 없다. 모든 것을 얻은 그대는 모 든 기쁨을 누리길! 리처드의 자리에 올 라 그대는 오래 사시길. 리처드는 어서 죽어 땅에 묻히길! 신이여, 더 이상 왕이 아닌 리처드가 비오니 부디 헨리 왕을 보 우하사 오래토록 햇빛 쨍쨍한 날들만을 누리게 해 주소서! 자, 내가 할 일이 더 남아 있나? -«리처드 2세(King Richard II)»,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지음, 강태경 옮김, 130~131쪽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가? 영국 플랜태저넷 가문의 마지막 왕 리처드 2 세가 랭커스터 가문의 첫 왕 헨리 4세에게 말 한다.


둘의 관계는? 사촌이다. 헨리 4세의 부친은 리처드 2세의 숙부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이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리처드 를 대신해 섭정을 하기도 했다. 왜 양위하는가? 리처드가 아일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성을 비 운 사이 헨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는 모 두 앞에서 양위를 통해 왕으로서 당당히 입성 하고자 했고, 전세가 불리해진 리처드는 헨 리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란의 원인은? 리처드가 정쟁에 휘말린 헨리를 해외로 추방


했다. 헨리가 없는 사이 그의 부친이 죽자 헨 리의 유산까지 가로채려 했다. 아일랜드 원 정에 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양위한 왕은 어떻게 되나? 런던탑에 유폐되었다가 33세에 감옥에서 사 망한다. 이 극에서는 엑스턴이 자객을 동원 해 리처드를 살해한 것으로 그렸다. 실제로 리처드 2세는 어떤 인물인가? 역사 기록은 대부분 그를 어리고 연약한 왕이 었다가 실정을 거듭하면서 권력에 집착하는 폭군이 되어 가는 인물로 제시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는 어떤 인물인가? 군주의 위엄과 진중함 대신 종잡을 수 없는 변덕과 경박함, 섬세한 감수성과 냉정한 무 관심이 혼재하며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신경 증적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했나? 리처드 2세가 폐위되고 살해당하기까지 3년 이라는 시간을 몇 달로 압축해 사건의 인과관 계를 좀 더 긴밀하게 구성했다. 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회적 이해관계의 역학을 ‘리처 드의 몰락과 헨리의 상승’으로 단순화했다. 상반된 두 통치자는 각각 왕권의 정통성과 정 치적 정당성을 대변한다.


작가의 역사관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 사극 전반을 조망하는 입장에서 현대 학자들은 작가가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 한 당대 지배 사관을 작품에 투영했다고 주장 한다. 당대 지배 사관이란? 정통의 왕 리처드 2세를 폐위한 일이 이후 한 세기 동안 영국을 참혹한 내란으로 내몬 원죄 가 되었다고 보았다. 아무리 실정을 펼친 왕 이라도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지상의 통치권 을 신하가 침탈할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에 따 른 입장이다.


정치적 정당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은 왕권신수설의 전복 가능성과 왕 위 찬탈의 정당성 측면에서 읽히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이른바 에섹스 반란에서 잘 드 러난다. 에섹스 반란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 에섹스 백작은 여왕 의 강제 양위를 목표로 봉기하면서 셰익스피 어의 극단에 이 작품의 전 장면을 상연해 달 라고 주문했다. 반란의 정당성을 런던 시민 들에게 선전하기 위해서다. 에섹스 백작이 헨리에 기댄 것인가? 에섹스 일파의 봉기는 결국 실패하고 백작은


처형당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떠오르는 헨리’에 비견했을 거라는 사실은 추측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이 자신을 ‘떨어지는 리처드’와 동일시했음 을 보여 주는 일화는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속내는? 반란이 평정된 뒤 여왕은 한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리처드 2세임을 정녕 그대는 모르는가?” 이 극의 예술적 성취는 어디서 오는가? 피상적으로 묘사되던 역사적 인물에게 두터 운 인간적 부피를 입히고 깊은 심리적 음영을 새겼다. 사료에서 문제적 왕이었던 리처드 2


세를 문제적 인간으로 그려 낸 것이다. 리처 드 2세의 마지막 독백에는 인간 실존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인식이 드러난다. 셰익스피어에게 실존이란 무엇인가? “왕위를 찬탈당해 영락해 버린 나 (…) 내가 무엇이 되든, 나 자신이든 아니든, 인간인 바 에야 그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철 저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당신은 누구인가? 강태경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다.


이름, 그까짓 것 내가 무엇이 되든, 나 자신이든 아니든, 인간인 바에야 그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다. 철저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연극 <리처드 2세>, 그레고리 도란 연출, 로열셰익스피어극장, 2013


리처드 2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태경 옮김 희곡 2014년 9월 26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96쪽 14,500원


작품 속으로

리처드 2세


나오는 사람들

리처드 2세 곤트의 존: 랭커스터 공작, 리처드 왕의 숙부 헨리 볼링브로크: 헤리퍼드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 후일의 헨리 4세 토머스 모브레이: 노퍽 공작 요크 공작: 본명은 랭글리의 에드먼드. 리처드 왕의 작은 숙부 오머얼 공작: 리처드 왕의 사촌 동생, 요크 공작의 아들 칼라일 주교 부시, 그린, 배거트: 리처드 왕의 총신들 노섬벌랜드 백작 로스 경 윌러비 경 해리 퍼시: 노섬벌랜드 백작의 아들 버클리 경 솔즈베리 백작 웨일스 군 장교 기사 스티븐 스크루프 3


피츠워터 경 서리 공작 웨스트민스터 성당 원장 기사 엑스턴 왕비 글로스터 공작부인 요크 공작부인 의전관, 왕비의 시녀들, 정원사, 마부, 간수 그 외 귀족, 병사, 기수, 시종, 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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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막


1장 런던, 왕궁

(리처드 왕, 곤트의 존, 귀족과 시종들 등장)

리처드 경륜 높은 랭커스터 공작이시자 연로하신 내 숙부님

곤트의 존 경, 약속하고 서약한 대로 헤리퍼드 공작 헨리 볼링브로크, 곧 숙부님의 용맹한 아들을 이 자 리에 출두시켰습니까? 지난번 의회에서 시간이 없어 미처 듣지 못한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에 대한 떠들썩한 고소를 실체적으로 제기하기 위해서 말입 니다. 곤트의 존 그렇습니다, 주군. 리처드 또한 헤리퍼드 공작이 해묵은 사적인 원한이 아니라

노퍽 공작의 분명한 혐의를 발견하고 충실한 신하의 의무로서 그런 고발을 한 건지 조사하셨습니까? 곤트의 존 그 점에 대해 최선을 다해 철저히 조사한 결과, 결

코 개인적인 악의 때문이 아니었고, 노퍽 공작이 폐 하께 분명히 위해를 끼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7


리처드 그렇다면 두 사람을 들게 하세요. 짐이 이마를 찌푸

리고 얼굴을 직접 대면하여 고발하는 자와 고발당한 자가 각자의 입장을 거침없이 토로하는 말을 듣겠습 니다. 두 사람 다 이렇게도 혈기에 가득 차 화를 다스 리지 못하니 그 분노가 마치 성난 바다같이 귀를 먹 먹하게 하고 급한 불길같이 타오르는 모양입니다.

(헨리 볼링브로크와 토머스 모브레이 등장)

헨리 볼링브로크 경애하는 주군, 지존의 국왕 폐하, 축복된

날들이 세세 무궁하시길 기원합니다! 토머스 모브레이 축복된 날들이 더욱 복된 날들로 이어져, 지

상의 행복을 시샘하는 하늘이 폐하의 왕관에 영원불 멸의 영광을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리처드 두 분 다 감사하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의 성격으로

보아 한 사람의 인사는 분명 입에 발린 아첨일 것이 오. 서로를 반역자라 고발하고 있으니 말이오. 내 사 촌 헤리퍼드 공작,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를 어 떤 혐의로 고소한 것인가? 헨리 볼링브로크 먼저 제 말에 한 점 거짓이 없음을 하늘에

맹세합니다! 제가 오늘 이 고귀하신 분들 앞에 감히 8


고소인으로 나선 것은 소중하신 주군의 안위를 지키 고자 하는 신하의 충성심 때문입니다. 그 어떤 사적 인 원한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 토머스 모 브레이, 이제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에게 합당한 이 름을 부를 테니 잘 들으라. 내가 하는 말은 내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며 죽어서라도 내 영혼이 그 진실을 입증할 것이다. 너는 반역자며 천하에 둘도 없는 비 열한 놈이다. 하늘이 밝고 청명할수록 하늘에 낀 구 름이 더욱 보기 흉한 것과 같이, 넌 타고난 고귀한 신 분 값도 못하는 자요 목숨을 부지할 가치도 없는 자 다. 아니, 이 말로도 부족하니 한마디 덧붙이겠다. 내 너의 목구멍에 더러운 반역자라는 이름을 쑤셔 넣고야 말겠다. 폐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이 정의의 검으로 내 말을 입증해 보이겠 다. 토머스 모브레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고 해서 제게 퍼부

은 혐의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 치 혀로 싸우 는 여자들의 싸움과는 달리 저희 두 사람의 문제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요. 피가 뜨거워진 만큼 누 구 하나의 피가 식어야만 해결될 일일 것입니다. 하 지만 저 또한 온순한 인내심을 자랑할 만한 사람은 9


못 됩니다. 이런 비방과 중상모략 앞에 입을 꾹 다물 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반역자란 이 름을 두 배로 더해 저자의 목구멍에 처넣을 때까지 열변을 토할 수도 있지만, 제 입에 고삐를 죄고 마음 속에 들끓는 말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지극히 높으신 폐하께 대한 공경 때문입니다. 그가 왕가의 혈통이 아니고 주군의 친족만 아니었다면 그 를 담대히 능멸하고 그에게 침이라도 뱉었을 것입니 다. 무고한 사람을 헐뜯는 비겁하고 비천한 자라 불 렀을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알프스의 얼어붙은 산등성이 를 넘어서라도, 아니 어떤 영국인도 발을 디딘 적 없 는 오지에 가서라도 그와 결투로 담판을 지을 것입 니다. 그때까지는 이 말로 제 충성심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바라옵건대 그의 주장은 철저한 거짓임을 믿어 주십시오. 헨리 볼링브로크 겁에 질려 떨고 있구나, 이 비겁한 놈. 자,

이 장갑을 받아라. 국왕의 친족이라는 특권도 왕가 의 혈통도 다 내려놓겠다. 네놈이 그걸 들먹이는 건 존중해서가 아니라 두려워해서겠지. 죄로 인해 두려 워하는 마음속에 내 도전을 받아들일 한 줌 용기가 10


남아 있다면 몸을 숙여 장갑을 주워라. 기사도의 모 든 의식적 절차에 따라 칼과 칼로써 너에 대한 고소 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네 죄악을 입증하겠다. 토머스 모브레이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폐하께서 내 어깨에

대고 작위를 수여하신 이 칼로 기사도에 입각한 시 합에 임해 그대의 고발에 맞서겠소. 내가 반역자이 거나 정정당당히 싸우지 않는다면 말에서 떨어져 죽 어도 좋소. 리처드 내 사촌은 모브레이의 혐의에 어떤 증거를 댈 것인

가? 단지 역심을 품었다는 심증 말고도 짐이 그를 반 역자라 판단할 확고한 증거가 분명 있었겠지? 헨리 볼링브로크 제가 드릴 말씀이 사실임을 목숨을 걸고 맹

세합니다. 먼저 모브레이는 폐하의 병사들에게 지불 할 금화 8천 노블을 착복하여 사욕을 채우는 데 유용 했으니 이야말로 분명한 반역이요 파렴치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여기서나 또는 저자 가 말하듯 영국인의 눈길이 가닿은 적 없는 어떤 곳 에서라도 결투를 통해 증명하겠거니와, 지난 18년간 이 나라에서 일어난 그 어떤 역모와 반란도 모브레 이의 사주나 묵인에 뿌리를 두지 않은 것이 없습니 다. 무엇보다, 결투에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 증명하 11


려니와, 폐하와 저의 숙부이신 글로스터 공작의 죽 음을 배후에서 획책한 자가 바로 모브레이입니다. 자신은 뒤에 숨은 채 경박하기 짝이 없는 공작의 정 적들을 교사하여 그의 죄 없는 영혼을 흐르는 핏속 에 떠내려 보낸 비열한 반역자가 바로 저자입니다. 글로스터 공작의 피는 형제에게 죽임 당한 희생양 아벨의 피처럼 깊은 땅속을 흐르며 정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살인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왕족의 혈통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칼로 처벌을 할 것입니다. 불운이 따른다면 대신 이 목숨을 내놓아야겠지요. 리처드 고발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노퍽 공작 토

머스 모브레이, 그대는 이 고발에 어떻게 해명하겠 소? 토머스 모브레이 폐하께서 부디 얼굴을 돌리시고 잠시 귀를

막으신다면, 저 거짓 고발자의 혈통을 능멸하는 일 까지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전능하신 신도 선량한 인간들도 가증스러운 거짓말쟁이를 얼마나 미워하 는지 똑똑히 말해 주겠습니다. 리처드 모브레이 경, 짐의 눈과 귀는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

지지 않소. 볼링브로크는 짐의 숙부의 아들에 불과 12


하지만 설령 그가 내 친형제이거나, 아니 이 왕위의 계승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요. 자, 이 신성한 왕홀 에 걸고 맹세하겠소. 왕가의 혈통이라 해서 더 큰 특 권을 가지진 못할 것이며 짐의 공정한 판단을 흐리 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오. 볼링브로크는 나의 신 하요, 모브레이 그대가 내 신하이듯이. 그러니 두려 워 말고 기탄없이 말하시오. 토머스 모브레이 그러시다면 말하겠습니다, 폐하. 볼링브로

크, 그대의 마음만큼이나 비열한 그대의 목구멍은 거짓을 쏟아 놓았다. 그대가 말한 8천 노블의 사분의 삼은 칼레에 주둔한 폐하의 병사들에게 분명히 지불 했다. 나머지 사분의 일은 내가 지난번 왕비 전하를 모시러 프랑스에 간 여비를 스스로 충당했기에 폐하 께서 그 빚으로 변제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 착복과 유용이라는 터무니없는 모함은 도로 삼켜라. 글로스 터 공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는 그분을 죽이지 않았 다. 다만 폐하의 숙부이신 그분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일이기에 스스로 도 책망하는 일이다. 내 적수의 아버지이신 고귀하 신 랭커스터 공, 공께 대해서는 외람되게도 제가 한 때 위해를 가하고자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 13


난번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백했고 공의 용서를 간절히 구했지요. 용서해 주신 걸로 감히 믿고 있습 니다. 저의 죄는 그것뿐, 나머지 혐의는 사사로이 적 의를 품은 저 신앙심 없고 불충한 역적이 꾸며 낸 무 고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의 도전에 당당히 맞서 진 실을 밝히겠습니다. 여기 이 장갑을 역적의 발아래 던집니다. 저자의 가슴에 담긴 고귀한 피를 흘려서 라도 제 충성과 명예를 입증하겠습니다. 그러니 폐 하, 저희 두 사람의 결투 시합일을 속히 정해 주십시 오. 리처드 분노에 불타오르는 두 사람은 짐의 명을 따르시오.

내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종양과도 같은 이 증오를 피 흘림 없이 고치도록 처방을 내리겠소. 마음 깊이 품은 악의는 살 속 깊이 파고드는 병과 같소. 그러니 잊고 용서합시다. 끝없는 갈등에 이제 그만 종지부 를 찍고 화해합시다. 의사들도 말하지 않소, 피를 뽑 는 치료를 할 때는 따로 있다고 말이오. 숙부님, 이 일을 원점으로 되돌려 해결합시다. 저는 노퍽 공작 을 달랠 테니 숙부님께서는 아들을 달래세요. 곤트의 존 평화를 위한 중재야말로 제 나이에 어울리는 일

이지요. 아들아, 노퍽 공의 장갑을 도로 내려놓아라. 14


리처드 노퍽 공도 그리하시오. 곤트의 존 어서 내려놓지 못하느냐? 순종하라, 다시 말하게

한다면 그건 순종이 아니다. 리처드 노퍽, 내려놓으라 말했소. 더 버티지 마시오. 토머스 모브레이 지엄하신 폐하, 저 자신은 폐하의 발아래 내

려놓겠습니다. 제 목숨은 폐하의 것이니까요. 하지 만 제가 받은 모욕은 오로지 저의 것입니다. 폐하께 제 목숨은 바쳤지만 설사 무덤에 묻히는 한이 있더 라도 제 이름만큼은 더럽혀지게 내버려 둘 수 없습 니다. 제 명예가 짓밟혔습니다. 억울하게 탄핵받고 만인 앞에서 모욕당했습니다. 중상모략의 독 묻은 창끝이 제 영혼을 찔렀으니 독을 뿜은 자의 심장이 흘리는 피가 아니고서는 치료할 약이 없습니다. 리처드 분노를 다스리시오. 그 장갑을 짐에게 주시오. 날뛰

는 표범들도 사자 앞에서는 잠잠해지는 법이오. 토머스 모브레이 예, 하지만 사자가 표범의 반점까지 지울 수

는 없지요. 제 치욕을 씻어 주신다면 장갑을 내려놓 겠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폐하, 살아 있는 동안 사 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보물은 흠결 없는 이 름입니다. 그걸 빼앗긴다면 인간은 금칠한 벽돌이요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충성스러운 가슴속에 불의 15


에 맞설 용기가 없다면 제아무리 빛나는 보석이라도 열 겹 자물쇠를 채운 상자 속에 가둔 것이나 다름없 습니다. 명예는 곧 생명입니다. 불가분의 것입니다. 제게서 명예를 빼앗는다면 제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주군, 제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오직 명예로만 살고 명예를 위해 죽을 것 입니다. 리처드 사촌, 그대가 먼저 장갑을 내놓게. 헨리 볼링브로크 오, 신이여, 그런 깊은 죄악으로부터 제 영

혼을 구하소서! 내 부친 앞에서 스스로 굴욕을 당하 란 말입니까? 기고만장한 저 비겁한 놈 앞에서 불쌍 한 거지처럼 우리 가문의 수치를 구걸하란 말입니 까? 내 혀가 그런 나약한 짓을 저질러 명예에 상처를 입히고 터져 나오던 결투의 고함 소리를 도로 집어 삼키느니 차라리 이빨로 비겁한 혀를 물어뜯어 수치 스러운 피가 절절 흐르는 혀 조각을 이 세상 모든 수 치를 담고 있는 곳, 곧 모브레이의 얼굴에 뱉어 버릴 겁니다. 리처드 짐은 명령을 할 뿐 부탁을 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내 명령에도 그대들이 화해하지 않겠다니 그렇다면 좋다. 그대들의 목숨을 걸어라. 코번트리에서 성 램 16


버트 축일에 결투 시합을 할 것이다. 거기서 그대들 의 들끓는 증오에 칼과 창으로 마지막 중재자가 되 게 하겠다. 이제 짐의 손을 떠났으니 가혹한 정의가 승자를 결정짓고 진실을 밝힐 것이다. 의전관, 그대 는 궁정 무관들을 지휘하여 시합 준비에 차질이 없 게 하라.

(모두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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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랭커스터 공작 저택

(곤트의 존, 글로스터 공작부인과 함께 등장)

곤트의 존 나는 동생 글로스터와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제

수씨의 울부짖음 못지않은 이 마음속 격정이 동생의 살해자들에 대한 복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벌의 권한이 바로 그 잘못을 저지른 자의 손 안에 있으니 복수는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요. 이 지상 의 때가 찰 때 하늘은 반드시 살인자들의 머리 위에 뜨거운 복수의 칼을 내리칠 겁니다. 글로스터 공작부인 피를 나눈 형제라 하면서 더 날카로운 박

차는 없으십니까? 형제의 뜨거운 사랑도 나이 든 핏 속에는 불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겁니까? 성군 에드 워드 왕의 일곱 아들은, 아주버님을 포함해, 그분의 거룩한 피를 담은 일곱 개의 병이요 성스러운 뿌리 에서 나온 일곱 가지였습니다. 그중 몇 분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시들었고 또 몇 분은 운명의 여신들의 손에 꺾였지요. 하지만 내 사랑하는 남편, 내 생명이 18


었던 글로스터 공, 선왕의 신성한 피가 가득 든 병이 었던 그분은 때 이르게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깨져 서 담고 있던 존귀한 피를 모두 쏟아 버리고 말았습 니다. 선왕의 고귀한 뿌리로부터 나와 늠름하게 자 라난 그 가지는 무참한 도끼질에 쓰러졌습니다. 쓰 러져 무성했던 이파리들을 모두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를 시기했던 자들의 손이 그 병을 깨뜨렸고 피 묻 은 도끼가 그 가지를 내려쳤지요. 아, 아주버님, 그 의 피는 바로 당신의 피가 아닙니까! 당신을 빚어낸 침상과 자궁과 씨앗과 탯줄이 그분을 빚어내지 않았 습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계시지만 그가 죽 을 때 당신도 죽지 않았습니까. 같은 부친의 씨앗인 불쌍한 동생이 억울하게 죽어 간 것을 그냥 두고만 본다면 부친을 다시 한 번 죽이는 꼴이 아닙니까. 그 걸 인내심이라 부르지 마세요, 랭커스터 공. 그건 절 망일 뿐이니까요. 동생이 살육당한 것을 참는다면 그건 그 도살자들에게 당신의 목숨까지 순순히 내주 는 꼴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인 내랄 수 있겠지만, 고귀한 자들에게 그건 창백한 안 색의 비겁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씀 을 드리겠어요? 당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19


내 남편의 죽음을 복수해 달라는 말씀밖에요. 곤트의 존 이 일에 대한 복수야말로 하느님의 것입니다. 신

의 눈앞에서 신의 대리인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글로스터의 죽음을 지시했으니까요. 그 지시가 잘못 된 것이라면 하늘이 심판할 겁니다. 신의 대리인에 게 분노의 칼을 겨누는 일을 나는 결코 하지 않을 테 니까요. 글로스터 공작부인 그럼 나는 어디 가서 탄원해야 한단 말인

가요? 곤트의 존 남편 잃은 여인의 방패요 창인 하느님에게 하세

요. 글로스터 공작부인 그럼 그렇게 하지요. 안녕히 계세요, 연

로하신 랭커스터 공. 공께서는 코번트리로 가셔야지 요. 가서 우리 조카 헤리퍼드 공작이 망할 놈의 모브 레이와 싸우는 걸 보셔야지요. 아, 내 남편의 원한이 헤리퍼드의 창끝을 날카롭게 하여 도살자 모브레이 의 심장을 뚫게 되기를! 운이 따르지 않아 모브레이 가 첫 합에서 살아남는다면, 놈의 가슴속 죄악이 무 거울 대로 무거워져 입에 거품을 물고 달리는 제 말 의 등뼈를 짓눌러 부수고 땅에 곤두박질쳐 조카 헤 리퍼드 앞에 비참하게 무릎 꿇게 되기를! 이제 정녕 20


작별이군요, 아주버님. 한때 당신 동생의 아내였던 저는 슬픔을 벗 삼아 여생을 마치렵니다. 곤트의 존 제수씨, 안녕히 가시오. 나는 코번트리로 가지만,

행운이 내가 가는 길보다는 제수씨가 가는 길에 함 께하기를 빌겠소! 글로스터 공작부인 한마디만 더. 슬픔은 땅에 떨어져도 다

시 튀어 오른답니다. 속이 비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죠. 아니, 이런 말씀 다시 꺼내지 않 고 떠나야겠어요. 슬픔이란 끝난 것처럼 보일 때조 차 끝나지 않는 것이니까요. 동생 요크 공작께 안 부 전해 주세요. 그럼 이만. 아니, 아직 떠나진 마세 요. 드릴 말씀은 다 드렸지만 그래도 그렇게 서둘 러 가 버리진 마세요. 할 말이 더 남았어요. 요크 공 께…. 아, 뭐였더라…. 그래요, 플래시 저택에 있는 저를 한 번 찾아 주십사고 전해 주세요. 아니, 오셔 봤자 마음씨 착한 그분이 볼 거라곤 텅 빈 집과 퇴 락한 벽, 인적 없는 방들과 발길 끊긴 회랑뿐이겠 죠? 들리는 거라곤 내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밖에 없겠죠? 그러니 그냥 안부만 전해 주세요. 슬픔만 이 이곳저곳 굴러다니는 죽은 형님의 집엘랑 오시 지 말라고 해 주세요. 저 또한 그곳에서 쓸쓸히, 쓸 21


쓸히 죽어 갈 테니까요. 이렇게 흐르는 눈물로 마 지막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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