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유혹 그림자의 유혹 그림자는 빛의 증인이다. 밝은 곳이 두려울 때 인간은 그림자를 사용한다. 어둠의 시간이 끝나면 그림자는 대가를 요구하고 그때부터 빛은 어둠의 노예가 된다.
연극 <그림자>, 세르게이 졸킨 연출, 스테를리타마크 극장, 2013
인텔리겐치아 2281호, 2014년 10월 27일 발행
시월의 새 책. 백승무가 옮긴 예브게니 시바르츠의 ≪그림자≫
아가씨 안녕, 흐리스티안-테오도르, 내 사 랑. 그렇게 웃지 마세요! 교묘하게 절 속였다고 여기지도 말고요. 이젠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말만 해 본 거니까요…. 당신이 갑작 스럽게 저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이렇게 얇은 옷을 입고 발코니에 나
왔음에도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 을 받았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마세 요! 충분해요. 한마디라도 더 듣는다 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요. 잘 있 어요! 아, 불행한 내 신세. (떠난다.) 학자 아…. 모든 걸 이해하는 것도 한순간 인 듯했는데, 이렇게 혼란에 빠지는 것도 정말 한순간이구나. 저 아가씨 가 정말 공주일까 봐 두렵구나. 모든 인간들은 비열하고, 세상 모든 게 뻔 하고, 모든 게 매한가지고, 그 무엇 도 믿지 않는다니. 온실에서 자란 나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지독한 악 성빈혈에 걸린 사람 같아! 그녀는 정 말…. 하지만 내가 사랑을 고백했을
때 온기를 느낀다고 말했잖아! 그 말 은 그녀의 혈관에 피가 충분하다는 말이겠지? (웃는다.) 난 모든 게 멋 지게 끝날 거라고 확신해. 그림자여, 친애하는 나의 충실한 그림자여! 변 함없이 내 발밑에 누워 있는 그림자 여. 너의 머리는 저 미지의 여인이 사 라진 문 쪽을 바라보고 있구나. 자, 어서 쑥 튀어나와 그녀에게 가거라. 어서 가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다 오. ‘이 모든 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주인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모든 걸 멋지게 끝낼 정도로 당신을 사랑 하고 있어요. 설령 당신이 개구리 공 주가 되더라도 주인님은 당신을 소
생시켜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주 실 겁니다.’ (웃는다.) 자, 가거라! -«그림자(Тень)», 예브게니 시바르츠(Евгений Шварц) 지음, 백승무 옮김, 45~46쪽
학자가 이야기하는 대상인 그림자는 누구인가?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그림자다. 학자의 몸에서 분리된 그림자는 아가씨가 사는 호텔 맞은편 건물로 들어간다. 아가씨는 누구인가? ‘남쪽 나라’ 공주다. 선왕의 유언에 따라 정체 를 숨기고 외딴곳으로 숨어들었다.
선왕의 유언은 무엇이었나? 열여덟이 되면 민가로 나가 살면서 선량하고 현명한 남편을 찾아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남편감은 반드시 평민 출신이어야 했 다. 자신이 아는 한 모든 왕자들은 작은 나라 조차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바보들이었기 때 문이다. 공주는 남편을 찾은 것인가? 공주는 학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하지 만 그림자의 계략에 넘어가 학자의 진심을 의 심한다. 공주는 결국 그림자와 결혼한다. 그림자의 계략은 무엇이었나? 학자를 속여 공주를 포기하고 ‘남쪽 나라’를
떠나겠다는 서류에 서명하게 만든다. 공주 에게 그 서류를 보인 뒤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왕위 계승권자인 공주와 결혼함으 로써 ‘남쪽 나라’ 통치자가 된 뒤 학자에게 자 신의 그림자가 되라고 명한다. 학자는 그림자가 되나? 그림자의 명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처형당한 다. 하지만 학자의 목이 떨어지자 그림자의 목에도 이상이 생긴다. 그림자는 결국 생명 수로 학자를 되살린다. 학자의 반격이 시작되나? 공주와 대신들 앞에서 그림자의 정체를 밝힌 다. 정체를 들킨 그림자는 도망친다. 학자는
‘남쪽 나라’에 머물러 달라는 공주와 대신들 의 청을 거절하고 떠난다. 동화인가? 안데르센의 동화를 바탕으로 쓴 극이다. 하 지만 강도 높은 풍자와 철학적 깊이는 웬만한 드라마 못지않다. 무엇을 풍자했나? 약점 있는 인간을 잡아먹는 것으로 설정한 식 인종은 당대 언론이나 권력 집단이 가진 이중 적이고 야비한 기질을 폭로한다. 또 학자를 위해 애쓰지만 권력에 종속되어 수시로 말을 바꾸는 여가수를 등장시켜 시류에 편승하는 경박한 예술가들을 표상했다. 이처럼 현실
풍자적인 면 때문에 정치극으로 비쳐져 상연 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때가 언제인가? 이 극을 초연한 1940년은 스탈린 대숙청이 끝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고, 대외 적으로는 2차 대전 발발로 정부가 내부 단속 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초연 자체가 기적이 었다. 기적의 초연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작품이 형식상 동화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 작품에서 명백한 정치적 풍자를 읽었지만 동화 작품을 탄압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 가 좋지 않았다. 초연 직후 상연을 철회하는
것만이 당국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타협책이 었다. 덕분에 작가 시바르츠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시바르츠는 누구인가? 러시아 극작가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모티 프를 얻어 현실 정치를 강하게 풍자한 작품을 여러 편 썼다. 사후에 작품이 영화, 애니메이 션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로 제작되어 현재까 지 러시아 전역에서 인기리에 상연 중이다. 어떻게 살다 갔나? 1896년 카잔에서 태어났다. 배우로서 먼저 인정받았다. 1929년 희곡 <언더우드>로 데뷔한 이래로는 꾸준히 극작 활동을 펼쳤
다. 스탈린 사후인 1956년에 첫 희곡집을 출 간했고, 1958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백승무다. 연극 평론가다.
그림자의 유혹 그림자의 유혹 그림자는 빛의 증인이다. 밝은 곳이 두려울 때 인간은 그림자를 사용한다. 어둠의 시간이 끝나면 그림자는 대가를 요구하고 그때부터 빛은 어둠의 노예가 된다.
연극 <그림자>, 세르게이 졸킨 연출, 스테를리타마크 극장, 2013
그림자 예브게니 시바르츠 지음 백승무 옮김 2014년 9월 15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제본 , 176쪽 14,500원
작품 속으로
그림자
그림자
학자는 화가 났다. 그림자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 보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떠올랐 기 때문이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 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더라 면, 사람들은 그가 인간 흉내를 내는 그림자라고 말할 게 뻔했다. 안데르센, <그림자> 중에서
낯선 이야기가 마치 내 피와 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재구성해 세상에 발표했을 뿐이다. 안데르센, <내 삶의 동화> 8장 중에서
나오는 사람들
학자 학자의 그림자 피에트로: 호텔 주인 안눈치아타: 피에트로의 딸 율리야 쥴리: 여가수 공주 국무총리 체자리 보르지아: 기자 3등문관 의사 사형집행인 집사장 하사관 궁녀들 궁정 대신들 요양객들 오락 간호사 치료 간호사
의전관들(전령들) 재무장관 시종들 경비병 시민들
1막
(남쪽 나라에 위치한 호텔의 작은방. 한쪽 문은 복도로 향해 있고, 다른 문은 발코니 쪽으로 향해 있다. 해 질 녘. 26세의 젊은 학자가 소파에 반쯤 누워 있다. 그는 책상을 더듬으며 안경을 찾고 있다.)
학자
안경을 잃어버리면 곤란하기도 하지만 좋은 점도 있 어. 노을이 질 때면 이 방이 전혀 낯선 곳으로 변한단 말씀이야. 의자를 덮은 이 담요도 사랑스럽고 멋진 공주님처럼 느껴져. 난 이 공주님께 흠뻑 빠졌어. 이 분이 내게 왕림해 주셨지. 물론 혼자 오신 건 아냐. 공주님은 항상 수행원들과 함께 다니시거든. 나무 상자로 만든 이 길쭉한 시계도 사실은 시계가 아냐. 이건 공주님의 영원한 동반자인 3등문관이지. 그의 심장은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뛰고, 그가 공주님께 드리는 조언은 매시간 달라져. 그는 귓속말로 자신 의 조언을 전하지. 비밀스러운 조언자라고나 할까. 이 3등문관은 자신의 조언이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판명 나면, 그건 자기가 한 말이 아니라며 발뺌하기 도 해. 사람들이 자기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거라며 우 겨 대는 거야. 참 편리한 처신술이지. 근데 저건 누 구지? 저 낯선 남자는 누굴까? 마르고 날씬한 체격에
온통 검은 옷을 입고 하얀 얼굴을 가졌네. 저 사람이 공주님의 약혼자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왤까? 아, 난
정말 공주님과 사랑에 빠졌나 봐! 공주님이 다른 남 자와 결혼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내가 이렇게 공주 님을 사랑하는데 말이지. (웃는다.) 이런 공상의 매 력은 내가 안경을 다시 쓰기만 하면 모두 다 제자리 로 돌아온다는 거야. 담요는 담요가 되고, 시계는 그 냥 시계가 되지. 그리고 저 음산한 낯선 남자도 사라 지고. (두 손으로 책상을 더듬는다.) 안경이 여기 있 군. (안경을 쓰자마자 비명을 지른다.) 이게 뭐야?
(화려한 의상을 입은 미모의 여인이 가면을 쓰고 안락의자 에 앉아 있다. 그녀 뒤로 예복을 입은 대머리 노인이 서 있 다. 그는 별을 들고 있다. 벽 쪽에는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검은색 연미복에 화려한 셔츠를 입고 서 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손에는 빛나는 보석 반지를 끼고 있다.)
(촛불을 밝히며 중얼거린다.) 이게 웬일이람? 나 같 은 보잘것없는 학자에게 이런 지체 높은 손님들이 오시다니.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분을 뵈어서 반 갑긴 합니다만…. 어인 용무로 이렇게 왕림하셨는
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왜 아무 말이 없으신지 요? 아, 알겠다. 내가 지금 졸고 있군. 꿈을 꾸고 있 는 거야. 가면 여인 아니오, 이건 꿈이 아니에요. 학자
맙소사! 대관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가면 여인 원래 이런 동화예요. 잘 있어요, 학자 양반!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연미복 남자 또 봅시다, 선생!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별을 든 노인 (속삭이며) 잘 있어요, 존경하는 학자 나리! 우
리 다시 만납시다. 당신이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모 든 것은 해피엔드로 끝날 거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 셋 다 사라진다.)
학자
이게 꿈이야, 생시야!
(다시 노크 소리)
들어와요!
(검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검은 눈을 가진 안눈치아타가 들
어온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힘이 넘치지만, 몸가짐과 목소 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머뭇거림이 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17세 아가씨다.)
안눈치아타 죄송해요, 전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어! 학자
왜 그래요, 안눈치아타?
안눈치아타 분명히 이 방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 걸 들었는
데! 학자
내가 자다가 꿈에서 잠꼬대를 한 거요.
안눈치아타 하지만…. 여자 목소리도 들렸어요. 학자
꿈속에서 공주님을 봤거든요.
안눈치아타 노인이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고요. 학자
그건 내가 꿈속에서 3등문관을 본 거요.
안눈치아타 웬 남자가 당신께 소리치는 것 같기도 하던데요. 학자
그 사람은 공주의 약혼자였소. 자, 이제 그게 다 꿈이 었다는 걸 믿겠어요? 그런 불쾌한 손님들이 어떻게 현실의 나에게 나타나겠소?
안눈치아타 농담하시는 거죠? 학자
맞아요.
안눈치아타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항상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아마 제가 옆방 소리를 잘못 들었나 봐
요. 그래도 저에게 화를 내시는 건 아니겠죠?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해도 되나요? 학자
그럼요, 안눈치아타.
안눈치아타 오래전부터 당신께 미리 들려주고픈 얘기가 있
었어요. 무례하다고 화내진 마세요…. 당신은 학자 고, 전 미천한 소녀일 뿐이지만…. 저만 알고 당신은 모르는 어떤 얘기를 해 드리고자 해요.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 숙인다.)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학자
천만에! 말해 주세요! 저를 가르쳐 주세요! 저는 학 자입니다. 학자는 평생 배워야 합니다.
안눈치아타 농담하시는 거죠? 학자
아니요, 아주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안눈치아타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문 쪽을 둘러본
다.) 책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기후도 좋고, 맑은 공 기에 멋진 경치와 따사로운 태양을 가진 나라라고 써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우리나라에 대해 책 에 어떤 내용이 써 있는지 잘 아시죠? 학자
그럼요, 잘 알죠. 그래서 제가 이곳으로 온 겁니다.
안눈치아타 네. 당신은 책에 쓰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책에
쓰여 있지 않은 것은 잘 모르실 거예요. 학자
학자들에겐 가끔씩 있는 일이죠.
안눈치아타 지금 당신이 계신 곳이 아주 특별한 나라라는 생
각은 못했을 거예요. 우리나라에선 남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동화 같은 일들이 정말 매일같이 일어나 고 있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마을 분수대 오른편 에 있는 담배 가게 아시죠? 거기서 걸어서 다섯 시간 걸리는 곳에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살기도 했답니 다. 지금은 죽었지만요. 마을 전당포에서 감정평가 사로 일하는 자는 식인종이에요. 식인종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요. 별명이 꺽다리인 장신의 여자와 결혼한 난쟁이도 있답니다. 근데 그 집 아이들은 당 신과 저처럼 중키예요. 정말 놀라운 건 뭔지 아세요? 별명이 꺽다리인 그 여자는 키만 컸지, 그 난쟁이한 테 완전히 잡혀서 산대요. 꺽다리 여자는 시장 갈 때 도 그 난쟁이를 데려가요. 난쟁이는 그녀의 앞치마 주머니에 악마처럼 웅크리고 앉아, 물건값을 흥정한 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화목하게 살고 있어요. 여 자가 그렇게 남편에게 극진하다네요. 명절날 미뉴에 트를 출 때면, 그녀는 늘 이중 안경을 끼고 있어요. 춤추다가 본의 아니게 남편을 밟아 버릴까 봐서요. 학자
그것참 흥미롭군요.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은 책에 쓰 지 않은 거죠?
안눈치아타 (문 쪽을 둘러보며) 모든 사람이 동화를 좋아하
는 건 아니니까요. 학자
그래요?
안눈치아타 그럼요. 이건 상상도 못하셨죠! (문 쪽을 둘러본
다.) 우린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우리나라에 발길을 끊을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렇 게 되면 우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거든요! 절대 비 밀을 누설하시면 안 돼요! 학자
그럼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안눈치아타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불쌍한 제 아버
지는 돈을 무척이나 밝힌답니다. 아버지가 기대치보 다 돈을 적게 벌면 전 절망에 빠져요. 아버지는 기분 이 나쁘면 제게 욕설을 마구 퍼붓거든요. 학자
하지만 제가 보기에 당신 나라의 동화가 사실임이 밝혀지면 방문객이 늘어날 것 같은데요.
안눈치아타 아뇨. 우리나라에 아이들만 방문한다면 아무 일
이 없겠죠. 하지만 어른들은 조심성이 많습니다. 그 들은 동화가 대부분 슬프게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 죠. 제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도 바로 이거예요. 제발 조심하셔야 합니다. 학자
어떻게 하란 말이죠?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옷을
따뜻하게 입으면 되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발밑을 잘 보고 걸으면 되죠. 하지만 슬픈 결말을 가진 동화 를 피해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안눈치아타 글쎄요…. 저도 그건 모르겠어요…. 잘 알지 못
하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나눠선 안 돼요. 학자
그럼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군요. 전 이방 인이니까요.
안눈치아타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제발 조심하셔야 해요.
당신은 무척 좋은 분이세요. 꼭 그런 사람한테는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고요. 학자
무슨 근거로 제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죠?
안눈치아타 전 부엌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요. 우리 요
리사한테 여자 친구가 열한 명 있는데, 그들은 세상 만사를 모두 다 알고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모조리. 그들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집집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낱낱이 알고 있다니까요. 마치 유리벽 너머를 보는 것처럼. 우리 는 부엌에 모여 앉아 함께 웃고 울고, 함께 놀라워한 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질 땐 매번 음식 을 태우곤 하죠.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당신은 좋은 사람이래요.
학자
당신 나라의 동화가 모두 사실이라고 말해 준 것도 그 사람들인가요?
안눈치아타 네. 학자
저도 저녁 무렵에 안경을 벗고 있을라치면 그 말을 믿고 싶어진답니다. 하지만 아침에 호텔 방을 나설 때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 어느 나라 와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을요. 부자와 빈자, 귀족과 노 예, 죽음과 불행, 이성과 무지, 성자와 범죄자, 양심 과 파렴치, 이 모든 게 마구 뒤섞여 있어서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이 모든 걸 해결하고 정리해서 사람들 이 상처받지 않게 만드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것 같 아요. 동화에선 모든 게 아주 단순한데 말이죠.
안눈치아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 숙인다.) 고마워요. 학자
무엇이오?
안눈치아타 저 같은 미천한 소녀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말씀
을 해 주셨잖아요. 학자
별말씀을. 학자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근데 전에 이 방에 묵었던 제 친구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도 당신네 동화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안눈치아타 네, 안데르센 씨도 그 동화에 대해 알고 있더라
고요.
학자
그래, 그는 그 동화에 대해 무슨 말을 하던가요?
안눈치아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태껏 저는 제가 진실
을 쓰고 있는지 회의를 품었답니다.” 그분은 우리 집 을 매우 사랑하셨어요. 우리 집이 매우 조용했기 때 문이죠.
(귀가 찢어질 듯한 총성)
학자
이게 무슨 소리죠?
안눈치아타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가 누군가와 싸우
는 소리예요. 아버진 성격이 불같거든요. 또 누구한 테 총을 쏜 거 같아요. 하지만 지금까지 누굴 죽인 적 은 없어요. 워낙 신경질적이라서 쐈다 하면 오발이 죠. 학자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버지가 명사수 라면 그렇게 자주 총을 쏠 수도 없었겠죠.
(무대 뒤에서 “안눈치아타!”라고 외치는 소리)
안눈치아타 (큰 소리로) 가요, 아빠. 전 가 볼게요! 아, 여기
온 이유를 깜빡하고 있었네요. 커피, 우유, 뭘 갖다
드릴까요?
(문이 활짝 열린다. 넓은 어깨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사내가 방으로 들어온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얼굴은 안눈치아 타와 닮았다. 무뚝뚝하고 사람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이 가구 딸린 호텔 방의 주인이자 안눈치아타의 아버지 피 에트로다.)
피에트로 왜 부르면 곧장 오지 않는 거냐? 어서 가서 총을 재
장전해라. 애비가 총 쏘는 소릴 들었잖아. 일일이 설 명하고 참견해야 하다니, 원. 빨리 가!
(안눈치아타가 조용히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이마에 입을 맞춘다.)
안눈치아타 갈게요, 아버지. 나리, 안녕히 계세요. (나간다.) 학자
따님은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군요, 피에트 로 씨.
피에트로 세상에, 그러게 말입니다. 딸애는 제가 마치 이 도
시에서 가장 착한 아비라도 되는 양 군답니다. 학자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닐까요?
피에트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딸애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전 남들이 내 기분이나 생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뭣도 모르는 애라니까요! 제 주변엔 늘 안 좋은 일만 일어나요. 15호실 손님이 또 방세를 못 내겠다고 버티지 뭡니까. 홧김에 14호실 손님한테 한 방 갈겼죠. 학자
14호실 손님도 방세를 안 내나요?
피에트로 그 사람이야 방세를 내죠. 하지만 보잘것없는 인
간이거든요. 우리 국무총리한테 단단히 찍혔어요. 방세를 안 내는 그 망할 놈의 15호실 손님은 우리네 추잡한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아휴, 이 망할 놈의 세상! 빌어먹을 호텔 손님들한테서 방세를 쥐 어짜 내며 살아도 도통 수지가 맞지 않는단 말입니 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부업을 안 할 수가 없다 니까요. 학자
정말 다른 곳에서도 일하세요?
피에트로 그럼요. 학자
어디서요?
피에트로 마을 전당포에서 감정평가사로 일해요.
(갑자기 음악 연주가 시작된다.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가도
가끔씩은 바로 옆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크게 들린다.)
학자
이 음악 소리가 어디서 나는 거죠? 말씀 좀 해 주세 요, 네?
피에트로 건너편에서요. 학자
거긴 누가 사는데요?
피에트로 몰라요. 무슨 공주라나 뭐라나. 학자
공주요?
피에트로 들리는 소문이 그래요. 참, 당신께 일이 있어서 왔
어요. 그 망할 놈의 15호 손님이 당신을 방문해도 되 는지 묻더군요. 빌어먹을 신문쟁이 같으니. 그 멋진 방을 공짜로 쓰려고 하다니, 도둑놈이 따로 없네. 허 락하시겠소? 학자
그럼요, 방문하신다니 기쁘군요.
피에트로 미리 기뻐하진 마쇼.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간
다.) 학자
호텔 주인장이 마을 전당포의 감정평가사라니. 그럼 식인종? 굉장한데!
(학자가 발코니 쪽으로 난 문을 연다. 건너편 집의 벽이 보 인다. 학자 방의 발코니와 건너편 집의 발코니는 거의 닿을
듯 가깝다. 학자가 문을 열자 거리의 소음이 방 안으로 밀려 온다. 웅성거리는 소음 사이로 사람들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수박이오, 수박! 조각으로도 팔아요!
물 사세요, 얼음물 사세요! 살인용 칼 팝니다! 살인용 칼 필요하신 분! 꽃 사세요, 꽃! 장미, 백합, 튤립 있어요! 비켜요, 당나귀 지나갑니다! 이봐요, 옆으로 비키세 요. 당나귀 갑니다! 불쌍한 장님한테 한 푼만 줍쇼! 독약 있어요, 독약. 순도 100퍼센트 독약이오! 학자
이 거리는 정말 북적거리는구나. 이곳이 참 마음에 들어! 이 세상이 불행한 건 내가 그 구원 방도를 찾아 내지 못했기 때문인 거 같아. 날 괴롭히는 이 끝없는 근심 걱정만 사라져도 얼마나 좋을까! 저 건너편 집 에 사는 여인이 발코니로 나와 주기만 한다면, 딱 한 가지, 정말 사소한 한 가지 일만 남을 텐데. 그러면 모든 게 명확해질 거야.
(잘 차려입은 아름답고 젊은 여자가 학자의 방으로 들어온 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방 안을 두리번거린다. 학자는
아직 그녀를 보지 못한다.)
저 산과 바다가 조화롭다면, 그리고 당신도 조화로 운 존재라면, 그건 이 세상이 좀 더 질서정연하게 만 들어졌다는 말이겠지…. 여자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학자
(고개를 돌린다.) 네?
여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이 중얼거 린 말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고요. 그게 당신의 새 로운 논문 주제인가요? 지금 당신은 어느 쪽에 있죠? 오늘 무슨 일 있었나요? 절 못 알아보시겠어요?
학자 여자
죄송합니다만, 모르겠는데요. 제가 근시라고 놀리시는 건 아니죠? 그건 점잖지 못 한 행동입니다. 당신은 거기 어디쯤 있어요?
학자
전 여기에 있습니다.
여자
좀 더 가까이 와 주세요.
학자
자, 여기 왔습니다. (미지의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간 다.)
여자
(그녀는 깜짝 놀란다.) 당신 누구세요?
학자
전 이방인입니다. 이 호텔 방에 머물고 있죠. 소개가 됐나요?
여자
죄송해요…. 제 눈 때문에 또 실수를 했군요. 여기 15호실 아닌가요?
학자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여자
당신 얼굴은 참 선량하고 매력적이군요! 당신은 왜 여태 우리 모임에 들어오지 않은 거죠?
학자 여자
어떤 모임 말인가요? 아, 배우와 작가, 귀족들로 구성된 모임이에요. 장관 한 분도 가끔씩 오세요. 다들 예의 바르고 편견이라 곤 없는 너그러운 분들입니다. 당신은 유명 인사인 가요?
학자 여자
아니요. 정말 유감이네요! 우린 유명 인사만 받는답니다. 하 지만…. 하지만 그 점은 제가 양해해 드릴게요. 당신 이 제 마음에 꼭 들었거든요. 화내시는 건 아니죠?
학자
그럼요, 아니고말고요!
여자
여기 잠깐 앉았다 가도 될까요?
학자
물론입니다.
여자
전 당신이 제가 평생 찾아온 바로 그분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소리나 어투만 보고 그분으 로 착각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혀 그분이 아니었죠. 물러서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
었죠. 그 사람이 너무 빨리 다가와 버렸거든요. 예쁜 여자가 근시로 사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제 말 을 듣기 싫으신가요? 학자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여자
어머, 어쩜 그렇게 단순 명쾌하고 침착하게 대답하
학자
누가요?
여자
제가 찾아온 그 사람 말이에요. 그는 지독히도 불안
실 수가 있을까! 그 사람은 제 속을 상하게만 하는데.
정한 사람이랍니다. 세상 사람 모두의 마음에 들려 고 안달이죠. 유행의 노예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볼 게요. 선탠이 유행한 적이 있죠. 그 사람은 흑인처럼 까맣게 될 때까지 몸을 태웠답니다. 그러다가 선탠 의 유행이 지나가자 복원 수술을 결심했죠. 그 사람 몸에서 하얀 부분은 팬티 안쪽뿐이었거든요. 의사들 이 그 피부를 얼굴에 이식했죠. 학자
부작용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여자
부작용은 없었어요. 단지 극도로 뻔뻔해졌을 뿐이에 요. 그 사람이 자신의 뺨을 뭐라 부르는지 아세요? ‘엉덩짝’.
학자
그러면서 당신은 왜 그 사람 호텔 방을 내왕하시는 거죠?
여자
어쨌든 그는 우리 모임의 회원이니까요. 잘나가는 사람들 모임 말이에요. 게다가 그 사람은 신문사에 서 일한다고요.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아세요?
학자
아뇨.
여자
저는 가수예요. 이름은 율리야 쥴리.
학자
당신은 이 나라에서 유명하겠군요!
율리야 그럼요. 만인이 제 노래를 알죠. <엄마, 사랑이 뭔
가요>, <아가씨들, 어서 행복을 찾아요>, <하지 만 나는 그의 애욕엔 냉정하다네>, <아아, 나는 왜 푸른 초원이 아닐까> 같은 노래를 불렀죠. 당신은 의사인가요? 학자
아니요, 전 역사학자입니다.
율리야 여기엔 휴가차 오셨나요? 학자
전 당신 나라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율리야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를요? 학자
그렇지만 그 역사만큼은 다른 나라 못지않아요. 그 점이 참 기쁘답니다.
율리야 왜요? 학자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 이 존재한다는 말이니까요. 예를 들어, 한곳에서 오 래 살면서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게 되면 세상은 아
주 단순하다고 여길지 모르죠. 하지만 바깥으로 나 가 보면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답니다. 그래서….
(문밖에서 누군가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유리 깨지는 소리)
거기 누구요?
(젊은 멋쟁이 남자가 몸을 털면서 들어온다. 그 뒤로 안눈치 아타가 당황한 표정을 하고 따라온다.)
젊은이 안녕하십니까! 저는 당신 방문 앞에 서 있었을 뿐인
데, 안눈치아타가 절 보고 놀랐나 봅니다. 정말 제가 그렇게 무섭나요? 안눈치아타 (학자에게)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 드리려고 가
져온 우유 잔을 깨뜨리고 말았어요. 젊은이 저에게는 사과하지 않으실 건가요? 안눈치아타 나리가 잘못하셨잖아요. 왜 남의 방문 앞에 숨
어서 꼼짝도 않고 있는 거죠? 젊은이 엿듣고 있었거든요. (학자에게) 제 솔직함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학자들은 모두 정직한 사람들이죠. 그
러니까 제 솔직함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렇죠? 자, 그럼 저의 솔직함이 마음에 든다고 말해 봐요. 저 는 어때요? 저도 마음에 드나요? 율리야 대답하지 마세요. 당신이 ‘네’라고 대답하면, 저 사람
은 당신을 경멸할 것이고, 만약 ‘아니요’라고 대답하 면, 당신을 증오할 거예요. 젊은이 율리야, 율리야. 이 사악한 여자! (학자에게) 제 소개
를 해도 될까요? 저는 체자리 보르지아라고 합니다.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학자
네.
체자리 그래요? 정말요?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들었나요? 학자
많은 얘기요.
체자리 절 칭찬하던가요? 아니면 험담하던가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학자
그냥 제가 오늘 신문에서 당신이 쓴 정치 비판 기사 들을 읽은 겁니다.
체자리 큰 성공을 거둔 기사들이죠.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
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욕먹고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전 완전한 성공 비법을 찾고 있답니다. 그 비법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저의 이런 솔직함이 마음에 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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