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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죽지 못하고 나는 살해당했고 선 채로 묶여 있다. 죽었지만 죽지 못하고 끝나지 않는 삶의 고통을 목격한다. 영국 속의 프랑스, 남성 속의 여성, 나는 퀘벡의 역사다.

가톨릭과 농촌의 삶이 지배해 온 퀘벡 사회에서 에베르의 시적 저항은 억눌려 있던 여성 자의식의 해방이다. 40대의 에베르


인텔리겐치아 2287호, 2014년 10월 30일 발행

시월의 새 책. 한대균이 옮긴 안 에베르의 ≪에베르 시선≫

분명 누군가 있다 날 죽이고 발끝으로 완벽한 춤을 끊임없이 추며 가 버린 누군가가 있다.


날 눕히는 걸 잊었는지 세워 둔 채로 가는 길에 완전히 묶어 놓았다, 심장은 그자의 옛 보석함에 담겨 있고 눈동자는 가장 맑은 물 이미지와 닮아 있는데 그자는 내 주변 세상의 아름다움을 잊었고 갈망하는 내 두 눈 감기는 것 잊어 그 상실된 욕망을 허용했다 -≪에베르 시선(Les poèmes choisis d’Anne Hébert)≫, 안 에베르(Anne Hébert) 지음, 한대균 옮김, 48~49쪽


이 시 속의 나는 누구인가? 프랑스어 문법으로 볼 때 여성이다. 이 시는 에베르의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고통받는 퀘벡 여성을 그렸다. ‘나’의 상황은 무엇인가? 살해당했고 선 채로 묶여 있다. 죽고 나서 뭘 하는 것인가? 계속되는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다. ‘나’의 죽음은 영원히 종결되지 않는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가 없다. 끝나지 않은 것이다. 초판에는 구두점이 있었으나 재판본부터 사라졌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자는 내 주변 세상의 아름다움을 잊었고 갈망하는 내 두 눈 감기는 것”을 잊어 “그 상 실된 욕망을 허용했다”. 절망 가운데도 희망 은 남아 있다. 누가 ‘나’를 죽였나? 여성을 탄압하고 학대해 온 퀘벡 전통 사회다. 캐나다의 퀘벡 말인가? 맞다. 캐나다 연방 퀘벡 주다. “누벨 프랑스” 라고도 한다.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계로 프 랑스어를 사용한다.


영어권 한가운데 어떻게 프랑스어 지역이 생 겼나? 원래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이후 영국에 할 양되었다. 영국계 이민자들과 프랑스계 주 민들 사이에 차별, 빈부 격차의 갈등이 계속 되었고 퀘벡 주 정부는 분리 독립을 원하고 있다. 퀘벡의 시에 퀘벡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생드니 가르노는 퀘벡의 문제를 직시함으로 써 순수시의 존재에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스통 미롱은 풍자와 언어 파괴를 통해 퀘벡 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에베르는 미롱과 무엇이 다른가? 미롱이 정치적 억압에 주목했다면 에베르는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굴종에 주목했다. 왜 여성인가? 퀘벡 여성은 가난하고 차별 받는 프랑스계 주 민 중에서도 더욱 억압받는 존재였기 때문이 다. 특히 가톨릭과 농촌 사회는 여성에게 정 숙과 순종, 희생을 강요했다. 그의 다른 시에서는 여성은 어떤 모습인가? <낚시꾼들>을 보자. 이상은 사로잡히고 삶 의 억압과 인간성에 대한 모욕만 남아 있다.


낚시꾼들은 그들의 젖은 투망으로 새를 낚는다. … 앉은 이 여인은, 한 땀 한 땀, 세상의 모욕을 수놓는다. 안 에베르는 누구인가? 현대 퀘벡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다. 1916년 태어나 2000년에 사망했다. 알랭 그 랑부아 문학상과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어떤 작품을 썼나? 시집으로 ≪왕들의 무덤≫, ≪언어의 신비≫,


≪낮은 밤 외에 비길 만한 것이 없다≫, ≪왼 손을 위한 시편들≫이 있다. 대표작으로 꼽히 는 소설 ≪카무라스카≫와 ≪가마우지 떼≫ 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시의 특징은 무엇인가? 문체가 극단적일 만큼 간결하고 단어의 반복 으로 리듬을 추구한다. 사촌인 생드니 가르 노의 영향일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특히 랭보 시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어 자체가 아 니라 형상에 대한 연금술을 시도했다. 그녀에게 시란 무엇인가? 억압받는 존재의 고독과 소외에 대해 항거하 고 분노하는 언어이자 고통스런 내면 체험을


발로하는 표현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한대균이다. 청주대학교 불문과 교수다.


죽어도 죽지 못하고 나는 살해당했고 선 채로 묶여 있다. 죽었지만 죽지 못하고 끝나지 않는 삶의 고통을 목격한다. 영국 속의 프랑스, 남성 속의 여성, 나는 퀘벡의 역사다.

가톨릭과 농촌의 삶이 지배해 온 퀘벡 사회에서 에베르의 시적 저항은 억눌려 있던 여성 자의식의 해방이다. 40대의 에베르


에베르 시선 안 에베르 지음 한대균 옮김 퀘벡 시 2014년 9월 19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 제본, 136쪽 16,500원


작품 속으로

Les poèmes choisis d'Anne Hébert 에베르 시선


차례

≪왕들의 무덤(Le tombeau des rois)≫ 샘물가에서 깨어나·················3 빗속에서 ·····················5 커다란 샘물들 ··················7 낚시꾼들 ·····················9 손 ·······················11 작은 절망 ····················13 밤 ·······················14 새소리 ·····················16 작은 도시들 ···················18 목록 ······················21 낡은 그림 ····················24 깡마른 소녀 ···················26 축제를 대신해 ··················29 기껏해야 담장 하나 ················31 닫힌 방 ·····················34 숲 속의 방 ····················37


점차 더 좁게

··················40

그대 발길을 돌려라 ················42 어느 가련한 죽음 ·················44 정원에 우리 두 손을················46 분명 누군가 있다 ·················48 세상의 이면 ···················50 성(城)에서의 삶 ·················53 고난의 골짜기에서 구르다 ·············55 풍경 ······················57 비단 소리 ····················58 왕들의 무덤 ···················60

≪언어의 신비(Mystère de la parole)≫ 언어의 신비 ···················67 빵의 탄생 ····················71 하루의 연금술 ··················76 장미가 바람에 실려 오길··············81 나는 땅이요 물이니라 ···············83 눈[雪] ······················86 눈먼 계절 ····················87


도시의 봄 ····················89 지혜는 내 팔을 부러뜨렸다·············92 살해당한 도시 ··················95 설익은 큰 덕목들 ·················98 수태 고지 ····················99 너무도 좁은 곳에서 ···············100 이브 ······················102 사로잡힌 신들··················106

해설 ······················109 지은이에 대해··················121 옮긴이에 대해··················125


≪왕들의 무덤(Le tombeau des rois)≫ (1953)


샘물가에서 깨어나

졸음이 파고드는 밤을 떠나며 뜻밖의 꿈이 있는 어두운 숲 나는 명철한 두 눈 뜨고 일상적인 놀랄 것 없는 내 행위들 아침의 순결한 물에 처음 빛을 다시 반사시키는 시간에 내 앞에 펼쳐진 오오! 너른 여유의 시간 무구한 샘물이여.

밤은 내 옛 흔적들을 모두 지워 버렸다. 무정한 그 물 위로 미지의 어느 물 한없이 순수하고 평탄한 수면(水面)이 펼쳐진다. 3


내 손목의 뿌리 손가락에서 어깻죽지까지 팔 전체에서 창조되는 어느 몸짓의 솟구침을 느끼는데 아직도 그 깊은 매혹을 알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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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에서

아 빗줄기는 정말 계속되는구나! 힘없이 부드럽게 물러선 세상 위 느긋한 싱그러움이여.

빗줄기 빗줄기여 유약한 안식처 같은 투명한 수면(睡眠)을 제 것으로 만들며 잠들어 있는 여인 위로 내리는 느리고 느린 빗줄기여.

빗속에 반이 가려진 거주지 고통의 몸짓들이 전율하는 순결한 물속에서 어른대는 감춰진 안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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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여인 위로 쏟아진 하루의 모든 물방울들.

너울처럼 그녀가 제 고통 위로 가져오는 하루

오로지 그 하루를 가로질러 우리는 그녀의 가슴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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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샘물들

저 깊은 숲 속에 가지 말자 깊숙한 곳에 커다란 샘물들이 잠들어 있으니.

커다란 샘물들을 깨우지 말자 벌 받은 눈꺼풀은 거짓 졸음으로 감고 있다 어떤 꿈도 바닷속 희고 진귀한 꽃을 그곳에서 만개시킬 수 없구나.

주변의 빛살과 노래하는 키 큰 나무들은 그곳에 어떤 모습도 담그지 않는구나.

이 어두운 숲의 물은 아주 순결하게 홀로 흘러 내 모습을 비추는 바다의 소명 근원의 이 흐름에 헌신한다. 7


오래된 내 인내심의 곧게 뻗은 기둥들이 밤 지새우며 그대들을 지키고 있는 이 근엄한 공간 깊은 곳 내 안에서 흐르는 오오 눈물이여 영원한 고독 물의 고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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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들

낚시꾼들은 그들의 젖은 투망으로 새를 낚는다.

전도된 이미지. 이 물 위는 아주 고요하다.

잎이 달린 나무는 이파리들 위로 부는 바람의 굳어 버린 데생 그리고 가지들 위에는 여름의 색채들.

곧게 선 나무 전체 그리고 새, 이런 종류의 9


작고 순진한 왕.

그 이후, 또한, 나무 아래 정오의 강한 햇살 속에서 바느질하는 이 여인.

앉은 이 여인은, 한 땀 한 땀, 세상의 모욕을 수놓고 있다, 불타 버린 두 손의 온화한 인내심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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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1)

그녀는 계절의 변두리에 앉아 햇살에 두 손을 비추고 있다.

그녀는 낯선 여자 세월이 채색하는 두 손을 바라보고 있다.

두 손 위의 세월들은 그녀를 점령하고 그녀를 매혹한다.

그녀는 세월들을 결코 움켜쥐지 않고 늘 팽팽하게 펼쳐 낸다.

세상의 기호들은 그 손가락들에도 새겨져 있다.

1) “손”은 안 에베르의 주요 시적 테마다. “팔”이나 “손가락들”과 함께 ≪왕들 의 무덤≫에 수없이 등장하는 “손”은 안 에베르에게 얼굴만큼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는 신체의 일부이며, 얼굴의 표정은 손의 모습이나 손짓으로 완 성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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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많은 깊은 숫자들은 잘 세공된 묵직한 반지들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모든 환대와 사랑의 장소에는 이런 냉혹한 제물이 있는 법 그녀로부터는 우리를 위해 태양으로 열린 치장된 고통의 손들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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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절망

내가 사랑했던 섬들은 강물에 휩쓸렸고 침묵의 열쇠는 상실했으며 접시꽃은 생각만큼의 향기가 없고 물은 노래하는 만큼의 비밀이 없다

내 심장은 부서졌고 순간은 이제 그것을 싣고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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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밤의 침묵이 해저의 거대한 조류처럼 나를 감싼다.

난 고요한 청록 물속에서 쉬며 등대인 듯 비추다가 다시 꺼지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소리 없는 리듬 비밀스런 코드 나는 어떤 신비도 해독하지 못한다.

빛이 비출 때마다 나는 두 눈을 감는다, 내가 잠겨 드는 침묵의 영속성 14


밤의 연속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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