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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현재의 질문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생이 거짓되고 추악하고 무료하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생을 찾아 일어섰다. 천둥과 번개가 지나갔고 모든 소리는 죽어 버렸다.

블로크는 러시아 상징주의 대표 시인이다. 27세의 블로크


인텔리겐치아 2294호, 2014년 11월 4일 발행

러시아 문학 2. 최종술이 옮긴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블로크 시선≫

러시아 황금 세기처럼 다시 닳고 닳은 세 개의 말 가슴걸이가 펄럭인 다. 채색된 바퀴살들이 헐거운 홈에 끼워져 있다….


러시아, 궁핍한 러시아. 내게 네 잿빛 이즈바*는 내게 네 바람의 노래는 첫사랑의 눈물 같구나! 나는 널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제 십자가를 소중히 나른다…. 어떤 마법사든 네 마음에 들면 약탈의 미를 내주어라! 꾀어내어 속이게 해라. 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몰락하지 않 을 것이다. 오직 근심이 네 아름다운 모습에 어둠을 드리울 뿐….

* 이즈바: 통나무를 수평으로 쌓아 올린 집이다. 시골에 서 볼 수 있다.


그래 뭐? 근심 하나로 더 아프고, 눈물 한 방울로 강은 더 소란스럽다. 하지만 넌 여전하다. 숲과 들판, 눈썹까지 두른 무늬 스카프.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 긴 길이 가볍다. 길 저 멀리 스카프 아래에서 순간적인 시선이 번뜩일 때, 마부의 황량한 노래가 감옥의 애수가 되어 울릴 때! -«블로크 시선(А. А. Блок. Избранная лирика)»,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А. Блок) 지음, 최종술 옮김, 212~213쪽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나’는 시인이고 ‘너’는 조국 러시아다. 시인에게 조국은 무엇인가? 인간적 형상의 살아 있는 존재다. 그는 가족 과 연인을 향한 내밀한 사랑으로 조국을 대 한다. 이 시에서 러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가? 환희에 찬 사랑이 끝 모를 길을 질주하는 ‘트 로이카’의 형상과 결부되며 시를 관류한다. 그에게 러시아는 순종하며 지고 가야 할 고 통과 시련의 “십자가”다.


러시아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20세기 러시아인의 비극적 실재가 전율에 찬 예언의 시구에서 연상된다. 하지만 그는 고난에 처한 변혁기의 조국에 대한 연민을 거부한다. 러시아는 “사라지지도 몰락하지 도 않을 것”이라 믿는다. 블로크는 누구인가? 러시아 상징주의 대표 시인이다. 안나 아흐 마토바는 “블로크는 20세기 첫 사분기의 위 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시대적 인간이고 가 장 선명한 시대의 대변자다”라고 평했다. 위의 시는 그의 시 세계에서 어디쯤 있는 작품 인가? 이 시는 ‘성육신의 3부작’ 중 3부에 속한다.


‘성육신의 3부작’이 무엇인가? 그는 “개별 시는 저마다 장의 형성을 위한 필 수 요인이다. 여러 장이 모여 책을 이룬다. 각 권은 3부작의 부분이다. 3부작 전체를 나 는 ‘시 소설(роман в стихах)’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체가 ‘성육신의 3부작 (трилогия вочеловечения)’이다. ‘성육신’은 성서의 의미인가? 그렇다.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해 인류를 위 해 죽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가 걸은 지상 의 길을 의미한다. 작품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성육신의 3부작’은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를


향해 가는 길이다. 이성과 학문의 이해가 아 니라, 고행과 환멸, 의심과 고통의 길이다. 그 길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나’로부터 ‘우리’를 향해 나아간다. 1부에서 그는 온전히 자기 내면에 침잠해 있다. 신비 롭고 아름다운 형상들이 시인의 영혼을 물 결치게 한다. 1부는 1898~1904년 사이에 쓴 시가 창작 연대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1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순결한 어린아이’, ‘현명한 사제’, 성스러운 존재인 연인에게 헌신하기 위해 세속적 가치 와 절연한 ‘기사도적 인간’이다.


2부의 길은 어떤가? ‘집 없는 곤궁한 부랑아’, ‘생의 무게에 신음 하는 소시민’, ‘한밤 선술집의 취객’이다. 2부 는 파국과 비극에 대한 예감과 파멸적인 정 열로 점철되어 있다. 2부에는 1904~1908년 사이에 창작된 시가 실려 있다. 1부와 2부 사이의 변곡점은 어디인가? 1905년 1차 혁명기의 사회상이다. 모순적인 삶의 체험이 시에 침투한다. 시인은 젊은 시 절의 추상적인 염원을 대신하는 다른 지상 의 가치를 추구한다. 3부는 어디를 향하는가? 1907~1916년에 걸쳐 창작한 3부의 작품에


서는 ‘예술가 인간(Человек-артист)’의 이상 이 등장한다. 예술가 인간은 모순과 어둠 속 에 잠재된 조화와 빛을 포착한다. 3부는 현 실에 맞서는 몸짓 속에서 미래에 대한 믿음 을 견지하는 삶의 기록이다. 3부작 이후에는 뭘 썼나? 1917년 혁명 당시 시인은 더 이상 음악을 들 을 수 없었고, 시를 쓸 수 없었다. 그러다 10 월 혁명 이후 잠시 정신적 소생을 맞이한다. 혁명에서 러시아가 영적으로 변모할 가능성 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현된 예감은 그의 가 슴에 희열이 들끓게 했다. 하지만 마지막 불 꽃은 이내 시들었다.


10월 혁명은 그에게 무엇이었나? 진정한 낭만주의자였기에 그는 혁명이 “모 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거짓되고 추악하고 무료한 우리의 생이 정의롭고 순 결하고 즐거우며 아름다운 생이 되도록 해 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위대한 뇌우가 그치고 삶이 더 잔혹하고 쓰라리게 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애수가 그를 덮쳤다. “소리 들이 죽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블로크의 삶은 어떤 궤적을 그렸는가? 188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텔리겐치아 집 안에서 태어났다. 1903년 시인이자 비평가로 등단했다. 1904년 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 에 관한 시(Стихи о Прекрасной Даме)»


가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열렬히 환 영받았다. 1921년부터 혁명정부 산하의 문화 기구에서 일하며 강연w에 몰두한다. 그러나 혁명의 이상과 전체주의적인 소비에트 관료 정권의 실상 사이에서 괴리를 인식하며 환멸 을 느낀다. 말년의 우울은 심장병을 동반한 정신착란으로 심해졌다. 1921년 영면했다. 당신은 이 책에 어떤 시를 골라 옮겼나? 서사시를 제외한 3부작 762편에서 각 장의 시적 사색과 정념의 핵심을 구현하는 서정시 73편을 선별하고, ‘3부작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 한 편을 더 골랐다. 생애 마지막 해 에 쓴 <푸시킨스키 돔에게(Пушкинскому дому)>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종술이다. 상명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 수다.


혁명, 현재의 질문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생이 거짓되고 추악하고 무료하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생을 찾아 일어섰다. 천둥과 번개가 지나갔고 모든 소리는 죽어 버렸다.

블로크는 러시아 상징주의 대표 시인이다. 27세의 블로크


블로크 시선 알렉산드르 블로크 지음 최종술 옮김 2010년 4월 15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제본 , 234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А. А. Блок. Избранная лирика 블로크 시선


РОДИНА 조국 (1907∼1916)


네가 떠나고, 난 황무지에 남아 네가 떠나고, 난 황무지에 남아 뜨거운 모래에 드러누웠네. 이제부터 혀는 오만한 말을 내뱉을 수 없네. 있었던 것을 한탄하지 않으며 나는 네 높이를 이해했네. 그래. 나 부활하지 않은 그리스도에게 너는 갈릴리 고향. 다른 이가 너를 어루만지게 하라. 난잡한 소문이 무성하게 하라. 그의 머리를 어디에 놓을지 인간의 아들은 모르네.

1907


강이 펼쳐졌다. 굼뜨게 흐르며 슬퍼한다88)

강이 펼쳐졌다. 굼뜨게 흐르며 슬퍼한다. 강변을 적신다. 노란 절벽의 빈약한 흙 위에서, 스텝에서 건초 더미들이 슬퍼한다.

오, 나의 루시! 나의 아내! 고통스럽도록 긴 여정이 우리에게 선명하다! 우리의 길은 고대의 타타르의 자유의 화살로 우리의 가슴을 꿰뚫었다.

우리의 길은 초원의 길. 우리의 길은 한없는 애수에 잠긴 길. 오, 루시! 너의 애수에 잠긴 길. 심지어 어둠도, 한밤의 국경 밖의 어둠도 나는 두렵지 않아.

밤이 오게 하라. 단숨에 달려가자. 스텝 저 멀리

88) 소 사이클 <쿨리코보 벌판에서(На поле куликовом)>의 첫 시.


모닥불을 타오르게 하자. 스텝의 연기 속에서 신성한 깃발과 칸의 검의 강철이 번뜩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전투! 평안은 오직 피와 먼지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꿈꾸어진다…. 질주한다, 스텝의 말이 질주한다. 나래새를 짓밟는다….

그리고 끝이 없다! 이정표들이 비탈들이 어른거린다…. 멈춰! 간다, 놀란 먹구름들이 간다, 피에 젖은 노을!

피에 젖은 노을! 심장에서 피가 물결쳐 흐른다! 울어라, 심장아, 울어라…. 평안은 없다! 스텝의 말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1908


러시아

황금 세기처럼 다시 닳고 닳은 세 개의 말 가슴걸이가 펄럭인다. 채색된 바퀴살들이 헐거운 홈에 끼워져 있다….

러시아, 궁핍한 러시아. 내게 네 잿빛 이즈바는 내게 네 바람의 노래는 첫사랑의 눈물 같구나!

나는 널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제 십자가를 소중히 나른다…. 어떤 마법사든 네 마음에 들면 약탈의 미를 내주어라!

꾀어내어 속이게 해라. 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근심이


네 아름다운 모습에 어둠을 드리울 뿐….

그래 뭐? 근심 하나로 더 아프고, 눈물 한 방울로 강은 더 소란스럽다. 하지만 넌 여전하다. 숲과 들판, 눈썹까지 두른 무늬 스카프.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 긴 길이 가볍다. 길 저 멀리 스카프 아래에서 순간적인 시선이 번뜩일 때, 마부의 황량한 노래가 감옥의 애수가 되어 울릴 때!

1908


가을 한낮

겸손한 내 벗, 너와 함께 그루터기 남은 밭을 따라 서두름 없이 걷는다. 어두운 시골 교회 안인 듯 영혼이 흘러넘친다.

가을 한낮은 높고 고요하다. 제 동료들을 부르는 메마른 까마귀 울음과 노인의 기침 소리만 들릴 뿐.

헛간이 낮은 연기를 퍼뜨리고 헛간 아래에서 오래도록 우리는 집요한 시선으로 학들의 비행을 좇는다….

난다, 사각으로 난다. 우두머리가 소리 내어 운다…. 무엇에 관해 말하는가, 무엇에 관해, 무엇에 관해?


가을의 울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라하고 궁핍한 마을들은 셀 수도 눈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어둑해진 대낮에 먼 초원에서 모닥불이 빛난다….

오, 궁핍한 내 나라, 너는 심장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 불쌍한 내 아내, 너는 무엇을 통곡하는가?

1909


모닥불 연기가 푸른 물결이 되어89) 떠나지 마. 내게 머물러줘. 그토록 오래전부터 널 사랑하잖아.90)

모닥불 연기가 푸른 물결이 되어 황혼 속으로, 하루의 황혼 속으로 흘러가네. 오직 붉은 벨벳이 붉은 장미가 되어 오직 노을빛이 나를 덮었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기만. 잿빛 안개가 되어 음울한 곳들의 슬픔이 기어가네. 전나무가 십자가가 되어, 진홍색 십자가가 되어 저 멀리 공중의 십자가를 놓네….

여인아. 저녁 주연에 89) 사이클 ≪조국≫의 내밀한 개인적 원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 역사 적 사건과 시인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의 상응을 구현. 그래서 시인이 쓴 모 든 시는 러시아에 관한, 조국에 관한 시인 것. 90) 유명한 로망스 <떠나지 마. 버리지 마(Не уходи, не покидай)>의 구절.


이곳에 머물러. 나와 함께 있어. 잊어, 무서운 세상은 잊어. 하늘의 깊이로 숨 쉬어.

슬픈 위안과 함께 바라봐. 노을빛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연기를. 울타리가 되어 널 지킬게. 손가락에서 뺀 반지로, 강철 반지로 널 지킬게.

울타리가 되어 널 지킬게. 살아 있는 반지로, 손가락에서 뺀 반지로. 우린 연기처럼 흘러야 해. 잿빛 안개가 되어 붉은 원 속으로 흘러가야 해.

1909


귀먹은 시절에 태어난 자들은 기피우스에게91)

귀먹은 시절에 태어난 자들은 제 갈 길을 기억 못한다. 우리는 러시아의 무서운 시절의 자식들. 그 무엇도 잊을 힘이 없다.

잿더미의 시절! 그대들 속에 깃든 것은 광기의 소식인가, 희망의 소식인가? 전쟁의 나날의, 자유의 나날의92) 핏빛 잔영이 얼굴에 비친다.

침묵이 자리한다. 우르르 하는 경종 소리가 입을 막게 했다. 91) 지나이다 기피우스(Зинаида Н. Гиппиус, 1869∼1945): 1세대 러시아 상 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블로크를 문단에 데뷔시킨 드미트리 메레즈콥스키 (Д. С. Мережковский)의 아내다.

92) 1904∼1905년의 러일전쟁과 1905∼1907년의 혁명.


한때 환희로 차올랐던 심장에는 숙명적인 공허가 자리한다.

우리의 죽음의 침상 위로 울부짖으며 까마귀 떼가 날아오르게 하라. 신이여, 신이여, 합당한 자들은 당신의 왕국을 볼지어다!93)

1914

93) 성서의 인유. <마태복음> 5장 8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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