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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할 때 보이는 것 낮의 삶은 소란하다. 투명한 영혼은 소음을 피해 사라진다. 밤하늘 별처럼 말없이 외로울 때 세계는 다시 나타난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표도르 튜체프의 초상›, 스테판 알렉산드로비치 그림, 1876


인텔리겐치아 2296호, 2014년 11월 5일 발행

러시아 문학 3. 이수연이 옮긴 표도르 튜체프의 ≪튜체프 시선≫

침묵(Silentium!) 침묵하라, 자신을 드러내지 말며 감추어 라. 자신의 감정과 꿈을 영혼 깊은 곳에서만 일어나 움직이게 하라.


아무 말 없이, 밤하늘의 별처럼 별들을 사랑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어찌 가슴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타인이 어찌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찌 그가 알 수 있겠는가? 말로 쏟아 낸 생각은 모두 거짓일 뿐이다. 샘물을 휘저어 동요하게 하지 말며, 샘물을 마셔라. 그리고 침묵하라. 오직 자신 안에서 사는 방법을 배우라. 오직 자신의 영혼 속에 완전한 세계가 있 다. 신비롭고 환상적인 사고들의 세계


외부의 소음은 그들을 마비시킨다. 낮의 삶은 그들을 쫓아내 버린다. 그들의 노래에 귀 기울여라, 그리고 침묵 하라. (1830) -«튜체프 시선(Стихотворения Ф. И. Тютчева)», 표도르 튜체프(Фёдор И. Тютчев) 지음, 이수연 옮김, 31~32쪽

‘침묵’을 외치는 이유가 뭔가? 세계의 본질, 자연과 인간을 체험하기 위해 서다. 말로 하면 안 되나? 부분적 인식만 가능하다. 자연과학이 발달


하고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세계는 합리적 이고 이성적인 판단과 분석의 대상이 되었 다. 그러나 합리적 법칙과 이성적 해석, 그리 고 그것의 표현물인 말로는 세계의 전체를 인식할 수 없다. 침묵한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 사색과 명상을 한다는 것이다. 튜체프는 논 리가 아니라 직관과 느낌으로 세계를 인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관과 느낌으로 인식한 세계는 어떤 것인가? 미지의 창조적 힘을 지닌 살아 있는 유기체 였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그의 시에서 어떤 모습으 로 나타나는가? 1833년에 쓴 <문제>를 보자. 산 위에서 굴러떨어진 바위가 평원에 누워 있다. 어떻게 떨어진 것일까? 지금까지 누구도 그 해답을 알지 못한다. 정상에서 그는 스스로 굴러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의 의지대로 떨어진 것일까?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그 문제의 해답을 알지 못 한다.


표도르 튜체프는 누구인가? 19세기 낭만주의 시인과 20세기 상징주의 시 인들의 스승이자 우상이다. 그의 무엇이 시인들을 매료했나? 그는 대상을 세밀하게 그리면서도 철학적 상징과 이미지를 뛰어나게 다루었다. 데니 시예바와의 비극적 사랑에서 얻은 희열과 고통, 그녀의 죽음이 가져온 죄의식을 담아 낸 시들은 러시아 사랑시의 정수로 꼽힌다. 어떤 사랑이었나? 데니시예바는 쿠르스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난과 어머니 의 죽음, 아버지의 재혼으로 페테르부르크


의 스몰리 기숙학교에서 자랐다. 거기에서 그녀는 스물셋 연상의 튜체프를 만나 사랑 에 빠졌다. 튜체프는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 였지만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데니시예 바는 가문에서 쫓겨났고 셋째 아이를 낳은 뒤 폐렴으로 서른일곱에 죽었다. 튜체프는 어떻게 되었나? 그녀를 향한 그리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았다. 1년간 외국에서 방황한 뒤 러시아로 돌아오자 데니시예바가 낳은 두 아이, 어머 니와 유일한 동생이 연이어 사망했다. 그리 고 3년 뒤인 1873년 70세 때 그도 세상을 떠 났다.


문학의 궤적은 어떤 것인가?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과 열정을 보였다. 시인이자 번역가였던 세묜 라이치에게 고대 문학과 고전 이탈리아 문학을 배웠고, 그의 도움으로 열두 살이 되던 해에는 그리스·로 마 시대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모방한 시를 쓰기도 했다. 모스크바 대학의 문학창작부를 졸업한 뒤 뮌헨 주재 러시아 공관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일하면 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40대에 페테르 부르크 사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는데,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시 역시 유명세를 타 기 시작했다.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고 투 르게네프의 주선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왜 우리에겐 그의 이름이 낯선가? 한국과 러시아의 체제 차이 때문이다. 러시 아 문학의 은세기라 불리는 20세기 초와 소 비에트 시대의 작가와 작품 대부분은 전공 자들의 연구 대상에만 머물러 있다. 이 책은 무엇을 어떻게 뽑아 옮겼는가? 1966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나우카 출판사에서 나온 «튜체프 시 전집»에서 82 편을 뽑아 옮겼다. 19세기 러시아 대표 시를 엮은 다양한 시 선집에 포함된 시를 우선 선 정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수연이다. 경희대학교 시간강사다.


침묵할 때 보이는 것 낮의 삶은 소란하다. 투명한 영혼은 소음을 피해 사라진다. 밤하늘 별처럼 말없이 외로울 때 세계는 다시 나타난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표도르 튜체프의 초상›, 스테판 알렉산드로비치 그림, 1876


튜체프 시선 표도르 튜체프 지음 이수연 옮김 2011년 9월 20일 출간 사륙판(128*188) 무선제본 , 128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튜체프 시선


봄의 뇌우

나는 5월 초순의 우레를 좋아한다. 봄을 알리는 첫 우레는 발랄하게 장난치며, 푸른 하늘에서 마음껏 웃는다.

젊음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바로 흩뿌려지는 빗방울, 먼지가 날린다, 빗방울들이 진주알처럼 걸렸다. 태양 빛에 황금빛으로 빛난다.

계곡을 타고 해빙의 첫 봄물이 달린다, 숲에서는 새의 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숲의 술렁거림, 산의 웅성거림 모두가 즐겁게 우레에게 화답한다.

너는 말하리. 조심성 없는 헤바 여신이 제우스의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다가 뇌우가 펄펄 끓는 냄비를 하늘에서


장난삼아, 대지로 부은 것이라고. (1828 봄)


숨바꼭질(Cache-Cache)

언제나 변함없는 자리에 있는 그녀의 하프, 창가에 놓인 패랭이꽃과 장미, 마루에 꽂혀 졸고 있는 정오의 태양 빛. 약속된 시간!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오, 누가 나의 개구쟁이를 찾아 줄 수 있을까? 어디, 어디에 숨었는가, 나의 천사여? 대기에 스며 있는 축복처럼 나는 투명한 존재를 느낀다. 패랭이꽃의 새침한 시선, 오, 장미여, 그대의 잎사귀들이 더욱 붉게 타오르고, 더욱 진한 향기 뿜는 이유, 나는 꽃 속에 누가 숨어들었는지 알고 있다네.

이 선율은 너의 하프에서 흐르는 것이 아닌가? 이제 금빛 현에 숨으려는 것이구나? 너로 인해 살아나 진동하는 현, 그 떨림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정오의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같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 같은! 너의 눈동자에서 나는 그 불꽃을 보았다, 그 환희를 나는 알고 있다.

나비가 날아들었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새치름히, 그는 날갯짓을 시작했다. 오, 어지럽게 빙빙 돈다, 나의 귀한 방문객이여! 공기처럼 가벼운, 너를 어찌 몰라보겠는가?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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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저녁

벌겋게 달구어진 공, 태양은 대지의 머리에서 굴러떨어졌다. 평화로운 화염의 석양을 바다의 파도는 삼키고 있었다.

연한 빛의 별이 이미 나왔다, 우리들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의 아치는 들어 올렸다, 자신의 축축한 머리를.

대기의 강이 가득히 하늘과 대지 사이로 흐르고, 폭염에서 해방된 가슴은 가볍고 자유롭게 숨 쉰다.

달콤한 전율이 물줄기처럼 자연의 혈관을 타고 달렸다, 마치 뜨거운 다리를


차가운 옹달샘이 애무하듯이. (1829)


환상

온 우주가 침묵하는 모종의 시간, 밤, 환상과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 우주 창조의 살아 있는 마차가 천상의 세계로 힘차게 돌진한다.

물속의 심연처럼 밤은 깊어 가고, 잊힌 아틀라스, 망각이 대지를 누른다. 오직 뮤즈의 순수한 영혼만을 신들은 예언의 꿈으로 전율하게 한다. (1829)


불면

시계의 단조로운 울림 밤의 우울한 언어! 양심처럼 모두에게 동일한, 모두가 이해하는 낯선 언어!

우주의 침묵이 주는 시간의 깊은 탄식, 예언과 이별의 음성 한가운데 우리 중 누가 외롭지 않을까?

우리는 느낀다: 고독한 세계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마주했다.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하던 우리는 자연의 질서에 항복했다.

우리 앞에 드러난 삶은 환영처럼, 대지의 끝에 아른거리고, 영광과 친우들과 함께


아련히 먼 곳으로 희미해져 간다.

그사이 새로운, 젊은 세대는 태양을 향해 자라나고 우리의 시간, 친구들은 오래전 망각 속으로 사라졌구나!

오직, 깊은 한밤중, 슬픔의 의식을 거행하듯이, 금속의 장송곡이 때때로 우리를 애도한다. (1830)


산속의 아침

지난밤 뇌우로 곱게 씻고, 미소 짓는 청명한 하늘, 맑은 물을 담고 띠를 이루며 산 사이로 굽이치는 계곡.

그러나 산허리의 반을 덮은 안개, 안개에 쌓인 절벽, 사뭇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중누각의 폐허.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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