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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육을 위한 일반 이론 개방된 교양과 강력한 도덕은 공존할 수 있는가? 일반교육학의 관심이다. 방법은 있는가? 사고권을 이해하고 구축하고 도야한다. 이것이 모든 교육의 처음이자 끝이다.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콘라트 게이어 판화, 19세기


인텔리겐치아 2305호, 2014년 11월 11일 발행

김영래가 옮긴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의 ≪일반교육학 천줄읽기≫

무엇이 교육자에게 중요한 것이어야 하는지 가 그에게 지도처럼, 또는 잘 건설된 도시의 -유사한 방향들이 서로 같은 모양으로 교 차하며, 사전 연습 없이도 방향을 척척 찾을 수 있는-약도처럼 주어져야 한다. 그러한 지도를 나는 여기에서-어떠한 경험들을 찾 아내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


는-미경험자들을 위해 제시하련다. -«일반교육학(Allgemeine Pädagogik aus dem Zweck der Erziehung abgeleitet)»,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 트(Johann Friedrich Herbart) 지음, 김영래 옮김, 32쪽

헤르바르트는 누구인가? 서구에서 최초로 교육학을 근대적 의미의 학문으로 정립한 사람이다. 일반교육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종류의 교육 활동에 일반적이고 공통 적인 이론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교육론이라 는 뜻이다. 그런 의도로 붙인 제목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육하는가? 임의 목적과 필연 목적이 있다. 임의 목적이 란 삶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실용 적 목적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수 용성은 교육으로만 얻을 수 있다. 다양한 흥미가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모든 능력을 조화롭게 형성해 정신이 개방 된 교양인이 될 수 있다. 변화하는 삶의 상황 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도 있다. 필연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인간다움을 최종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특성인 도덕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다양한 흥미와 강한 도덕성을 동시에 얻는 방 법이 있는가? 다양한 흥미는 수업으로, 강한 도덕성은 훈 육, 즉 도덕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수업과 훈육은 무엇이 다른가? 수업은 학생의 마음을 종합적으로 양성한 다. 훈육은 소년의 마음에 직접 영향을 주어 도덕성을 도야한다. 수업이란 어떤 것인가? 경험과 교제를 보완하는 활동이다. 보통 순 수하게 묘사하는 수업이 먼저 행해지고, 그 다음에는 분석적 수업이 행해지며, 종합적 수업이 마지막으로 행해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성된 마음을 사고권(思考圈)이라고 부른다. 사고권이 무엇인가? 개인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세계 파 악은 지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 적·정서적·의지적 요소들도 포괄해서 이 루어진다. 개인의 모든 정신활동은 연관된 전체를 이룬다. 이 전체가 사고권이다. 훈육은 어떻게 도덕성을 도야하는가? 수업을 통해 형성되는 사고권 속에 이미 도 덕성의 싹이 들어 있다. 여기에 교사와 학생 이 직접 상호작용하는 훈육이 학생의 마음 에 도덕적 신조를 형성한다. 학생은 신조에


따른 고귀한 행위를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 으로 지각하면서 도덕의식이 싹튼다. 사고권의 기능은 무엇인가? 학생의 사고와 행위는 그가 지니고 있는 사 고권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가치 있고 풍부한 사고권을 학생의 마음에 도입할 수 있을 때, 인간 교육은 성공할 수 있다. 수업과 훈육이 교육의 전부인가? 예비 교육인 관리도 있다. 관리는 교육을 받 을 수 있는 기본적인 태도와 습관을 형성하 는 활동이다.


관리의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위협과 감시, 권위와 사랑이다. 위협과 감시 는 불가피한 방책이며 부작용이 생길 수 있 다. 권위와 사랑을 위주로 관리하는 것이 좀 더 교육적이다. 이 책은 원전을 얼마나 발췌하여 옮겼는가? 핵심 내용만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 록 전체의 약 35%를 발췌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영래다.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연구 교수다.


모든 교육을 위한 일반 이론 개방된 교양과 강력한 도덕은 공존할 수 있는가? 일반교육학의 관심이다. 방법은 있는가? 사고권을 이해하고 구축하고 도야한다. 이것이 모든 교육의 처음이자 끝이다.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콘라트 게이어 판화, 19세기


일반교육학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지음 김영래 옮김 2008년 4월 15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 193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Allgemeine Pädagogik aus dem Zweck der Erziehung abgeleitet 일반교육학


우리는 자신의 시야권(Gesichtskreis)1)을 사물에 가져감으 로써 사물을 파악하고 판단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자 녀를 직접 교육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의뢰하는 경우에도 자 신의 시야권을 따르게 된다. 대다수의 교육자들에게 있어서 교육에 필요한 시야권을 사전에 형성시키는 일은 거의 등한 시되고 있으며, 교육활동을 수행하면서 비로소 점차적으로 형성되는 형편이다. 루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제자[=에밀]를 단련시키고자 했다. 루소는 하나의 시야권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에 충실

1) ‘시야권(Gesichtskreis)’이라는 용어는 헤르바르트 교육학의 핵심용어 중의 하나인 ‘사고권(Gedankenkreis)’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사고권이란 한 개인이 지니고 있는 표상(관념)들의 상호 연관된 총체를 의미한다. 인간은 나 면서부터 나름대로의 관념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 관념들은 경험과 정신적 활 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재구성된다. 그런데 헤르바르트에 의하면 한 개인이 지니고 있는 관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연관 된 관념들의 권역(圈域) 안에서 개인의 정신은 활동한다. 개인이 어떠한 사고 권을 지녔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방향과 질이 결정되므로 헤르바르트에게 있 어서는 폭넓고 참되며 가치 있는 사고권을 형성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질적인 과제가 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것도 단지 있 는 그대로의 대상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권에 투영된 대상들을 보 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이미 익숙해 있고 알고 있는 것들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욕구와 관심 등에 따라 대상을 인지·해석·판단하며 의미 부 여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야의 권역(=시야권)은 우리 자신이 지니 고 있는 사고권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시야권이란 대상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의 범위가 우리 자신의 사고권과 결부되어 있으 며, 따라서 사고권에 의해 제약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해된다.


하고자 한다. 그는 [요컨대] 자연을 따른다. 인간의 모든 발 달 과정에서, 즉 출생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고 쾌 활한 성장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가 가르치고자 하는 기술은 삶[의 기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루소가 우리 의 시인(詩人)의 “삶이라는 것이 최고의 것은 아니다!”2)라 는 말에 주저 없이 동의함을 본다. 왜냐하면 그는 상상 속에 서 아이의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 교사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은 너 무 대가가 크다. …그런데 단순한 삶이 인간에게 그리도 어 려운가? 우리는 인간이란 식물의 장미와 같다고 믿었었다. 이 꽃의 여왕이 정원사에게 가장 적은 수고를 끼치듯이 [어

린] 인간은 어떠한 기후 조건 하에서도 잘 자라나며 갖가지 음식으로 자신을 스스로 부양할 뿐만 아니라 쉽게 모든 것 을 동원해서 자기를 꾸려나가는 법을 배우고 모든 것으로부 터 좋은 점을 취한다. 물론 문명화된 인간들 사이에서 자연 인을 키워내는 것은 교육자에게 많은 수고를 요할 뿐만 아 니라 그렇게 교육된 자는 훗날 매우 이질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또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로크(J. Locke)의 제자에게 가장 능숙한 일이다. 여기에서는 관습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

2) 쉴러(Friedrich Schiller)의 ≪메시나의 신부≫(Braut von Messina) 제4막 끝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로크에 의하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적응시키려는 아버지 를 위한 교육론을 쓸 필요는 없다. 이것을 시도한다면 단지 기교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세련된 예의범절을 지닌 분별 있는 사람을 교육자로 고용 하라. 참다운 교육자는 예절과 번영의 규칙들과 사람과 시 대, 그리고 처소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는 그러한 규칙의 변형들을 알고 있으면서 이와 같은 견해들에 따라 그의 학 생을 그의 나이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끌어 가는 자다”.3) 여기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철저한 현세주 의자가 자신의 아들도 또한 현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 지를 지니고 있는 경우에 이를 설득해 말리려 하는 것은 소 용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이 의지는 사실세계가 인간에게 미치는 모든 인상(印象)의 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 이다. 이러한 의지는 매순간의 새로운 인상들을 통해 확인 되고 강화되어 간다. 목회자들과 시인들, 철학자들은 모든

3)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자신의 교육에 관한 서한들을 모아 ≪교 육에 관한 고찰≫(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이라는 이름의 책자 로 간행했다. 국내에는 ≪존 로크의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임채식·강진영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위의 본문에서 인용형식을 취한 ‘세련 된 예의범절을 지닌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자다’ 부분은 로크의 말을 그대 로 인용한 것은 아니고, 로크의 견해를 헤르바르트가 나름대로 요약한 것이다. 해당되는 내용은 위의 번역본 92∼102쪽에 실려 있다.


가식적인 감동과 경솔함, 진지함을 산문들과 시어(詩語)들 속에 쏟아 붓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위를 한 번 돌아보는 것으로 이 모든 효과는 깨져버리고 그들[=목회자, 시인, 철 학자들] 모두가 단지 배우들이나 몽상가로 보이게 된다. 현 세적 교육이 [쉽게] 성공할 수가 있는 까닭은 세계가 현세적 인간들과 손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지는 않지만 자녀가 세상에 매몰되지 않게 하는 방 법을 알고자 한다. 그들은 또한, 자기대화(Selbstgespräch) 와 공감(Teilnahme), 그리고 자신의 취미(Geschmack)4)가 명민한 자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적절한 시점에 사회의 관습 에 적응하도록 가르치는 최선의 교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함께 놀며 싸우는 또래들 가운데 에서 인간에 관한 지혜를 배우도록 한다. …그들은 또한 자

4) ‘경험(Empirie)’, ‘사변(Spekulation)’과 함께 ‘공감(Teilnahme)’과 ‘취미 (Geschmack)’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들을 표현하는 헤르바르트의 주요 용어 들이다. 경험은 주로 지각(Wahrnehmung, perception), 즉 감각기관을 통한 대상의 파악을 말하는데, 헤르바르트에 따르면 사실적 경험들은 단편성과 우 연성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이러한 단편적이고 우연적인 경험들을 근거로 하 여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경험 연관성, 세계 연관성에 대하여 숙고하는 ‘사변’ 이 불가결하다고 본다. ‘공감’이란 자기 이외의 존재자들, 즉 다른 사람들과 생 명체들, 환경과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한 정서적 관심을 의미하며, ‘취미’는 취향, 미적인 감각, 정신적 기호 등의 의미이다.


신들의 자녀가 장래에 함께 살아가게 될 세대의 한가운데에 서 자라나는 것을 원한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입장이 좋은 교육과 일치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교사가 학생과 진지하고 계획적으로 교수활동을 해야 하는 시간인−수업 시간이 학생들의 흥미를 충족시킴으로써 다른 장난들이 그 들에게 사소한 것이 되고 그래서 [저절로] 사라져가도록 하 는 정신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작업은 감각에 가까운 것과 서적 들 사이를 임의적으로 오락가락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양자를 결합하는 곳에서 비로소 그러한 정신적 작업이 가능해진다. 이념들의 자극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 며, 아름답고 원대한 교육의 이념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 면서, 희망과 좌절, 불쾌와 기쁨의 다양한 교차에 한동안 몸 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젊은이만이 사실성의 한가운 데에서 아동을 보다 나은 존재로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 사실성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며 서술할 수 있는 사고력과 학문을 소유하 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5) 그는 그 자신이 교육자가 아니

5) 개별적인 사실들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고찰하는 것은 ‘사변(speculation)’ 의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적 사실들은 주로 감각적 경험을 통 해 주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 사실들은 하나의 전체적 연관성에 속해 있 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개개의 산, 강, 나무, 건물 등등에 대한 감 각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개개의 사실들은 세계라는 ‘전체’의 ‘부분’들


라, 인간이 이제껏 감각하고 경험하고 사고했던 모든 것의 총체적인 힘 자체[=사고권]가 학생에게 어울리는 참되고 올 바른 교사라고 볼 것이며, 자신은 단지 [이 사고권에 대한] 사려있는 해석과 품위 있는 동행을 하도록 덧붙여진 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행하여온 시도들의 모든 성과를 성장세대에게 집약적으로 제시하는 일은−그것이 교수가 되었든 훈계가 되었든−인류가 존속하는 모든 시점 에서 행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최고의 일인 것이다. 관습적인 교육[=로크의 교육]은 현존하는 해악을 연장시 키는 시도다. 자연인을 형성시킨다는 것[=루소의 교육]은 이미 극복된 모든 해악들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르침과 훈계의 범위를 [감각적으로] 가까운 것 으로 한정한다는 것은 [이를 주장하는 사람] 자신의−그 밖 의 것은 알지도 못하고 적용할 줄도 모르는−고루함의 자연 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감각적이지 않은 것은 고루한 교사 들에 의해 망쳐지며, 어린이에게 너무 어렵다는 것은 안이 한 구실에 불과하다. 전자는 바뀔 수 있으며, 후자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따라 하는 말이다. 나는 내 경험에 의거하고, 다른

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 ‘세계’란 감각 경험의 대상이 아니며, 개개의 사실들로 부터 사변적으로 환원된 전체(적 연관성)이다.


사람은 그의 경험에 의거해서 말한다. 그러나 통틀어 말한 다면, 누구나 단지 그가 시도하는 것을 경험할 뿐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아흔 살 먹은 시골학교 교사는 그의 90 년 묵은 관행을 경험으로 지니고 있다. 그는 그가 오랜 세월 토록 노력했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과나 방법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 또한 지니고 있 을까? 교육을 단지 경험 위에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경 험학문들을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기만 해도 좋으련만! 물 리학이나 화학에 있어서는 이 학문에 해당되는 경험영역에 적용 가능한 오직 하나의 정리(定理)를 확인하고자 하는 데 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면 좋으련만! 이로 부터 그들은 하나의 경험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산만한 관찰로부터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 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동일한 실험 을 스무 가지의 편차를 두어 스무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결과는 상반된 이론들에 의해 그들 의 방식대로 [서로 다르게] 해석된다. 그들은 또한 그 시도들 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엇보다 아직 검토되지 않은 사례들 을 모두 정확히 검토해 보고 정확히 측정해 보기까지는 경 험에 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교육학 적 실험들에 있어서 검토되지 않고 남은 사례들은 학생이 성


장한 후의 결함으로 남게 된다. 하나의 실험을 위해서는 최 소한 인생의 절반의 시간이 걸린다. 이래서야 언제 숙련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경험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변경이 가해진 후에 개개인들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만일 교육학이 가능한 한 철저하게 고유한 [교육적] 개념 들(einheimische Begriffe)에 대해 숙고하면서 자립적인 사 고를 키운다면 이는 참 바람직한 일이다. 이를 통해 교육학 은 연구권의 중심이 될 것이며 더 이상 [중앙에서] 멀리 떨어 진 정복된 변방으로서 타민족의 지배를 당하는 위험에 처하 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모든 학문들이 인접학문들과 동등 한 세력을 지니면서 저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활동을 할 때에만 학문들 간의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이다. 교육자에게 나는 학문과 사고력을 촉구했다. 다른 사람 에게는 학문이 안경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눈이며, 인간사 를 고찰하기 위해 인간이 지닌 가장 좋은 눈이다. …학문 없 이도 스스로를 능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견해에 있 어서 커다란 오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느끼지도 못하 며 혹은 남들까지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학문 이 없으면 인간과] 세계와의 접촉부위가 지워져버리기 때문 이다. 학문의 오류란 본래 인간의 오류, 단지 뛰어난 자들의


오류인 것이다. 교육자를 위한 첫째가는 학문−비록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지만−은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활동들의 전체적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기술하여야 할 것이다.6) 나는 이 학문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난해성도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러한 학문을 소유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경과되 어야 하며, 이러한 학문이 교육자들에게 요구될 수 있기까 지는 더 오랜 세월이 걸려야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이 학 생에 대한 관찰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은 단지 발 견되는 것이며 연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 서 아동의 [본질을] 선험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며, 지금으로서는 교육학이 받아들여서 는 안 되는 공허한 시도다. 내가 처음 말한 것, 즉 사람들이 교육을 시작하면서 스스

6) 헤르바르트는 심리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는 19세기 말 이후 분트, 쾰러 등 이 형태심리학(=게슈탈트심리학)을 발달시키기 훨씬 이전에 ≪심리학교본≫ (Lehrbuch der Psychologie, 1816), ≪학문으로서의 심리학≫(Psychologie als Wissenschaft, 1824/1825)을 비롯하여 심리학에 대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저술을 내놓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헤르바르트는 학문적 교육학의 창시 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 심리학의 창시자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헤르바르트의 심리학은 20세기에 크게 발달한 실험심리학이나 행동주의심리 학과는 다른, 주로 내성(內省)/내적 관찰(內的 觀察, Introspektion)과 이입 (移入, Einfühlen), 직관과 사유에 의지하는 사변적 심리학, 철학에 가까운 심 리학이었다.


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아는 것은 이러한 시도[=심리학 을 발전시키고, 아동의 본질을 선험적으로 파악하려는 시 도]보다 한층 더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 구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명민한 자들은 타인의 심리에 대한 통찰의 중 요성을 알며, 그러한 만큼의 심리학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 다. 무엇이 교육자에게 중요한 것이어야 하는지가 그에게 지도처럼, 또는 잘 건설된 도시의 약도처럼−유사한 방향 들이 서로 같은 모양으로 교차하며, 사전연습 없이도 방향 을 척척 찾을 수 있는−주어져야 한다. 그러한 지도를 나는 여기에서−어떠한 경험들을 찾아내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 지를 알고자 하는−미경험자들을 위해 제시하련다. 교육학은 교육자가 자신을 위해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교육자는 또한 전달을 위한 학문도 지녀야 한다. 그 리고 나는 여기에서 수업을 하지 않는 교육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고백하며, 거꾸로 나는, 적어도 이 저서에서는, 교육하지 않는 어떠한 수업도 인정하지 않 는다. 한 젊은이[=학생]가 단지 이익을 위해 어떤 장인(匠 人)에게 어떠한 기술을 배워 숙련하든 간에 이것은 교사에

게는 옷의 색깔을 무엇으로 고르느냐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학생]의 사고권을 규정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는 교사에게는 모든 것이다. 왜냐 하면 사고에서 감정이 생겨나고, 감정으로부터 원칙들과 행


위방식들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교사는 이러한 연관관계에 따라−그가 학생에게 제시하고 그의 마음(Gemüt) 속에 넣 어줄 수 있는−모든 것을 관련성 속에서 생각하면서, 이 모 든 것을 어떻게 서로 연관 지을 것인지, 즉 어떻게 모든 것을 순서대로 정돈할 것이며, 그리고 그것들이 뒤에 따라서 일 어나는 일들에 어떻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하는 과제를 지닌다. ‘수업을 통한 교육’이라는 일반적인 구상을 보다 강조하 기 위해 우리는 이에 상반되는 상황, 즉 수업이 없는 교육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교육자는 일반적으로 가장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육자 가운데에는 완전히 무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있 으며, 또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교육적으로 이용할 줄 모 르면서도 열성적으로 교육에 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학생의 감정을 장악 한다. 이 속박 속에 학생을 잡아두면서 그의 어린 마음을 자 기 자신이 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흔들어놓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학생에게 성격이 형성될 수 있겠는가? 성 격이란 내적인 견고함이다. 그러나 학생에게 무엇인가를 믿 고 의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한 번도 자신의 의지의 확 고함을 신뢰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학생이 자기 안에 스스로 뿌리를 박을 수 있겠는가! 대개의 경우 어린 영


혼들은 당신들의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곳 한 구석을 지키고 있으면서 당신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자기 혼자서 살고, 예감하고, 희망하며,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이 계획이 처음 얻은 기회에 시도되어 성공하면 바로 그 자 리에 성격이 세워지는데, 이 자리를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의도와 성과가 일치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교육[=학생의 감 정을 장악하는 교육]이 간혹 성공하기도 하여, 그렇게 교육 받은 사람이 훗날 교육자가 되어 자신이 과거에 고통스럽게 겪어야 했던 것을 그에게 맡겨진 어린이들이 동일하게 겪도 록 하는 것이다. 수업을 통한 교육에 있어서 교사는 모든 것을 학생에게 관찰의 대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수업을 통한 교육에는 또한−학생에게 부과하는−훈육이 속한다. 훈육에 있어서 도 개별적인 나쁜 짓에 대한 직접적인 억제를−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오류의 개선’이라는 과장된 이름을 붙이지 만−통해 영향을 행사하는 것보다, 질서를 유지시키는 힘의 본보기7)를 통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단순한 억 제는 감성적 경향성 자체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더구나 상상은 그 대상을 끊임없이 미화시키는데, 이것은

7) 이것은 주로 교육자의 내적인 확고함에 의해서 행사되는 영향력을 말한다.


오류를 계속 범하는 것에 가깝게 해로운 것이며, 이것은 [부 모와 학교로부터] 독립된 후에도 중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이 벌주는 교사의 마음속에서 도덕적인 혐오와 [저열한] 취미에 대한 불인정, 모든 비행(非行)에 대한 반대의지를 읽는다면 그는 교사의 견해에 따르게 될 것이다. 그는 교사 와 동일하게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생각은 경향 성에 저항하는 내적인 힘이 된다. 이 힘만 충분히 강화시켜 서 [경향성을] 이기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수업을 통한 교육을 위해 나는 [교사에게] 학문과 사고능 력을 요구하였다. [교사가] 가까운[=자신의 주변에서 파악 되는] 사실들을 거대한 전체의 단편으로서 바라보고 서술할 줄을 아는 그러한 학문과 그러한 사고능력을 말이다. 왜 전 체의 단편인가? 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단편인가? 가까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며,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가까운 것은 관계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관계들은 작은 부분에서, 가장 단순한 부분에서 올바르게 인식되고 판단되 지 않았다면, 큰 범위의 가장 확장된 지식에 의해서는 훨씬 부정확하게 파악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저 방대한 학식과 언어학습을 교육에 부과함으로써 신체교육과 예술적인 기 교, 붙임성 있는 쾌활성 등의 발달에 지장을 줄 것이 아닌가 하는 등등의 의문과 우려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이와 같은 단점에 대한 일리 있는 우려가 그러한 학업[=


광범위한 지식교육과 언어학습]을 거절하도록 우리를 잘못 인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학업은 다른 방법을 필요로 한 다. 그러나 이러한 학업이 확장된다고 하여 다른 분야들을 위축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학업은 결코 단순한 수단이 아니며, [교육의] 주목적에서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처음부터 지속적이고 풍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만일 이러한 방법이 불가능하다면 통상적인 라틴어 학습의 무겁고 파괴 적인 부담은 [피할 수 없는] 사태의 본질에서 유래하는 것일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학식을 한구석으로 몰아내고자 지 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치 의학적으로 드물게 사 용되는 독극물들을 약상자에 넣고 잠가두듯이 말이다. 그러 나 만일 복잡하고 까다로운 준비를 하지 않고도 학식의 영 역을 너무 오래 누비고 다니지 않고 바로 질러서 신속히 횡 단하는 수업이 참으로 가능하다면, 그래도 위에서 제기된 비난−즉 학식을 가르치느라 아동들을 가장 가까운 것으로 부터 부질없이 격리시키고 성급하게 낯선 것으로의 여행으 로 이끈다고 하는 비난−의 정당성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 가? 보다 깊고 편견 없는 숙고에도 불구하고 감각에 가까운 것이 아동에게 분명하고, 관계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관계 들에 대한 판단이 더 발전된 올바른 사고방식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견지될 수 있을 것인가? 신체적인 면은 놓 아두자! 신체는 감각적인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눈과 지성에


대해 가시적이지 않으며 이해하기 쉽게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삼각형과 수학에 대해 반복하여 언급하는 것은 피하겠다. 지금은 인간과 인간관계들이 관심사다. 여기에 서 가까움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아동과 어른 사이의 커다 란 간격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이 간격은 우리가 현재의 문화 와 타락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걸린 오랜 시간만큼이나 큰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간격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해 불가능 한 것들과 타락의 사례들이 배제된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 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교사들에게 아동에 맞게 자 신을 낮출 것과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그들의 좁은 영 역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 기에서 그로부터 초래되는 여러 가지의 새로운 부적절한 일 들이 간과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동에게 아동의 세계 를 세워주기 위해 어른인 교사가 자신을 구부려 낮추는 것 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 한 시도를 오랜 세월동안 계속한 교사들이 끝에 가서는 매 우 기형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과, 그래서 명민한 사람 들이 얼마나 이러한 시도를 꺼리는지가 또한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성공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여성적인 태도를 모방할 수도 없는데, 아동의 태도를 모방 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가! 의도적인 저술 태도만


으로 이미 아동도서들은 타락된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성인들 뿐만 아니라 아동들도 자신들이 읽은 것으 로부터 그 자신들의 것을 취하며, 자기식대로 저자와 저서 를 판단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아동들에게 나쁜 것을 욕 구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제시하면 아이들은 그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이야기가 도덕적인 설교로 중단되면 아동들은 따분한 소리 를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한 것을 단순하게 제시하 면 아동들은 그것이 단조롭다고 느낄 것이며, 기분풀이가 되는 단순한 자극을 주는 나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 다. 전적으로 교훈적인 연극을 보면서 느꼈던 자신의 감정 을 기억해 보라. 그러나 그들에게 사건들과 인간관계들, 인 물들로 가득 차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해 보라! 아동의 느낌과 통찰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아닌−바로 여기에 엄연 한 심리학적 진리가 놓여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최악의 것 이나 최선의 것을 묘사하려는 노력이 없으며, 다만 나직한, 그 자신도 아직 반쯤 졸고 있는 도덕적 감각(sittlicher Takt) 이 행위의 관심으로 하여금 저열한 것으로부터 선한 것, 공 정한 것, 정당한 것으로 쏠리도록 배려하고 있다. 당신들은 어린이의 주의력이 어떻게 거기에 뿌리를 박는지, 그들의 주의력이 어떻게 보다 깊숙이 진리의 뒤로 다가와서 사물의 모든 면을 드러나 보이게 하려고 시도하는지를 보게 될 것


이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다양한 소재들이 어떻게 다양 한 판단을 유발하는지, 기분전환의 자극이 어떻게 보다 나 은 것을 선호하는 데로 귀착하는지를 관찰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아동은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작품 속의] 영웅이나 저술가보다 약간 더 높다고 느끼게 되며, 이 미 자기의 아래로 느끼는 야비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 해 자신의 판단을 확고히 고수하면서 내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잘 교육된 아동의 모든 시선은 자신 의 위로 향하고 있으며, 그가 여덟 살이 되면 그의 관심방향 은 모든 동화(童話)들의 수준을 넘어선다. 아동이 본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라. 당신은 이러한 사 람들을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문화의 영향 가운데에서 성장한 사람은 아동이 남아(男兒)로서 지녀야 할 이상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이러한 이상을 또한 당신들의 상상력 속에서도 찾 아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교육적 소망으 로 채워진 것이며, 당신의 경험들, 지식들, 개인적인 일들로 채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미래의 문학 전체에서 우리가 있는 곳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동에게 적합한 것 이 나올 것인가! 나는 기록된 소설이 구해질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을 안다: 그리스인의 고전적 유년 시대. 나는 우선적으 로 오디세이를 발견한다.


오디세이에서 나는 내 삶의 가장 즐거운 경험과 교육에 대한 애정의 큰 부분을 얻었다. 내가 이 경험을 통해 처음으 로 [교육을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 는 아홉 살짜리와 여덟 살이 채 안 된 아이 두 명을 에우트로 피우스(Eutropius)에서 손을 떼게 하고,8) 그리스문헌을, 게 다가 모든 시문선의 번다함을 통한 준비도 없이 바로 호머 (Homer)를 부과하는 것으로 나의 교사직을 시작하려는 동 기를 그 이전에 명백하게 느꼈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과오를 범했다. 즉, 나는 너무나도 종래의 학교관 행에 얽매여 있어서 정확한 문법적 분석을 요구했고, 이 시 작단계를 위해서 단지 어형변화의 확실한 주요특징들만을 가르쳤으며, 아동이 물어올 때는 물론이고, 묻지 않는 경우 에도 줄기찬 반복을 통해 보여줬다. 또한 수월한 설명을 위 해 필요한 많은 역사적, 신화적 선행지식이 부족했었다. 참 된 교육적 감각을 갖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러한 역사적·신화적 지식을 획득할 것이다. …나는 나의 이 경 험을 통해 (이에 따르면 오디세이를 읽는 데 1년 반이 소요 된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할 수 있다: 교육을 이렇게

8) 헤르바르트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가정교사로서 스위스 베른의 주지 사 K. F. 슈타이거의 두 아들 칼(Karl Steiger, 1787년생)과 루돌프(Rudolf Steiger, 1789년생) 형제를 가르쳤다. Eutropius는 서기 4세기 중엽의 로마역 사가였다. 그의 주저인 ≪Breviarium ab urbe condita≫는 고래로 빈번히 교 과서로 이용되어 왔다. (아스무스 주)


시작하는 것은 사교육에 있어서 실행이 가능하며 또한 유익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교사가 단지 문헌적인 정신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교육적인 정신을 가지고 교육을 행하 는 사람이며, 또한 몇 가지 점들을 내가 했던 것보다 좀 더 보완하고 주의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교육방법은 사교육에 있어서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는다. 그 러나 만일 내가 학교에서 교육을 하게 된다면 용기와 굳은 확신을 가지고 마찬가지의 시도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장의 성과가 없다고 하여도 라틴어 문법이나 로마 작가들의 작품들을 가르치는 통상적인 교육형태 만큼 해롭 지는 않을 것이다. 보편적인 것으로 상승해 보자! 오디세이를 학생과 교사 사이의 공동의 연결점으로 생각해 보자. 이 공유영역은 학 생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교사를 낮추지도 않는 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공유영역[안에서의 상호작용]은 학 생을 점점 더 먼 고전의 세계로 안내하며, 교사로 하여금 아 동의 모방적인 발전을 보면서 인류의 위대한 진보의 흥미진 진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것은 결국 어떤 회 상들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회상은 천재의 영원한 작품들과 결부되어서 매번 이것[=회상의 내용]으로 회귀되어 반복적 으로 일깨워지곤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9) 이처럼 친한 이들


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친숙한 별자리를 보는 것은 그들이 함께 이 별자리를 바라보았던 시간들을 상기시킨다. 교육에 아주 쉽게 섞여드는 편협성/고루함은 교육을 매 우 타락시킨다. 이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가장 흔한 형태로서 사소한 것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들은 [교육 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하찮은 고안을 하고는 이것이 새로 운 교육방법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다른 또 하나의 형태 는 이보다 더 정교하고 유혹적이다. 이들은 중요한 것을 간 파하지만 일시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 한다. 단 한 번의 장난도 그들에게는 잘못이며, 한두 번의 자선적 인 감화도 그들에게는 개선의 기술이다. 그러나 [교육자가] 아동의 영혼 깊은 곳까지 격하게 동요시킨다고 하더라도 아 동이 이를 금방 지나쳐버리는 경우에, 우리는 이들과 다른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교사는 아동의 영혼 을 동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원기 왕성 한 아동에게는 종종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교사의 교육적인 영향력이 아동의 마음에 남기는] 인상들

9) 여기에서 말하는 회상(Reminiszenzen)이란 ‘인류의 이상’에 대한 회상을 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경험적 사례를 통해 (개별적 경 험에 앞서서 이미 존재하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이상을 상기하게 된다는 것이 며, 이러한 보편적인 이상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통찰하고 이를 전형적인 방 식으로 표현해내는 사람이 천재인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설의 영향을 보게 된다.


의 질[=내용]만을 생각하고 양[=강도나 빈도]을 생각하지 않 는 사람은 면밀한 숙고와 교묘한 조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유실되어 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적은 관념들만이 동시 에 의식에 현존하며, 단지 현저하게 강한 관념과 복합적으 로 연관된 관념들만이 쉽게 그리고 빈번히 영혼의 전면에 나타나는 것뿐이다. 유년시절의 긴 과정을 통해 마음이 강 하게 자극을 받는 찰나마다 매우 많은 관념들이 아주 다양 하게 생겨나는데, 이들 중 가장 강한 관념도 시간의 흐름 속 에서 증폭되거나 다른 여러 가지 방향으로 새롭게 발달되지 않는다면 이윽고 그 힘을 잃게 된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 은 아동의 마음이 교사의 인격에 반항하면서 냉각되는 것이 다. 왜냐하면 인격들은 말 한마디 하고 한 번 시선을 던지는 데 따라서 증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제때에 다시 뿌리가 뽑혀질 수가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많은 면밀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교사에 의해] 매우 작위 적으로 유발된 인상들이 쓸 데 없이 [아동의] 마음을 익숙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나 이런 경 우에 아동의 마음은 공연히 놀랐던 일에 대해 웃어버리듯이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우리가 내적인 부 분들로 서로 연관된 하나의 커다란 사고권(Gedankenkreis)


을 어린 영혼에 도입시킬 수 있을 때만이, 그리고 이 사고권 이 주변 환경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유리한 점은 자기 안에 용해시켜서 자신과 결합시킬 힘을 소유할 때만이, 교육은 우리의 수중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운 좋은 상황 하의 사교육만이 교사의 기술이 성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보증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어지는 기회들이 제대로 이용되기만 해도 좋으련만! 여기에서 주어지는 실례들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 정하려고 해도 세계는 소수에게 달려 있다. 소수의 참된 교 양인(Gebildete)만이 세계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인류는 자신이 산출한 사고권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육된 다. 이 사고권 안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허술하게 연결되 어 있으면 전체적으로 약하게 작용하며, [그 구성요소들 중 에서] 우세한 개개의 요소들이 부당하게도 불안을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한다. 사고권 안에서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서로 상충하면 무익한 다툼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모르는 사이 에 조야(粗野)한 욕망들에게 힘[=교육적 영향력]을 넘겨주 게 된다. 오직 사유하는 자들이 하나가 될 때 이성적인 것이 승리하며, 선한 자들이 하나가 될 때 선한 것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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