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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정신 상황 사람 사이에 감정의 결속은 없다. 어제는 죽었고 내일은 기대할 수 없다. 순간만이 존재하는데 연속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연극 <아나톨>, 플로리안 피들러 감독, 푸어 극장, 2013


인텔리겐치아 2311호, 2014년 11월 14일 발행

최석희가 옮긴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아나톨≫

아나 톨 추위에 떨면서! 그때 엄청난 고통이 나를 엄 습했네. 나는 지금부터 더 이상 자유로운 남 자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나의 달콤하고 멋 진 총각 생활에 영원히 아듀를 고해야만 한 다는 사실! 당신 어디에 있었어요? 하는 질 문을 받지 않고 집으로 올 수 있는 마지막 밤이라고 나는 나에게 말했다네. 자유의 마


지막 밤, 모험의 마지막 밤… 어쩌면 사랑의 마지막 밤! -<아나톨의 결혼식 날 아침>, «아나톨(Anatol)»,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지음, 최석희 옮김, 165쪽

주인공 아나톨은 어떤 인간인가? 사랑의 모험을 바라는 청년이다. 젊고, 재치 있고, 부유하지만 늘 삶을 지겨워한다. 모험을 바라는 이유는? 늘 순간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 도, 자신을 둘러싼 현실도 응집력 있는 하나 로 경험하지 못한다.


작품은 구성과도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 이 작품은 연속성 없이 7개의 에피소 드로 산산조각 나 있다. 7막 연작극이다. 아나톨은 어느 때 사람인가? 세기말이다. 1900년대 오스트리아 빈의 데 카당적인 시대 분위기다. 위에 인용한 단막극은 무슨 이야기인가? 아나톨은 총각 시절의 마지막 밤을 여배우 일로나와 함께 보내지만 계획된 작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된 뒤에도 여자 친구를 만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결혼 서약을 깨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한 뒤 결혼식을 올리러 간다.


불륜인가, 이런 내용의 단막극이 또 있는가? <단말마>에서 아나톨은 유부녀인 엘제의 연인이다. 그와 사랑의 모험을 즐긴 그녀가 부부생활을 포기하려 하지 않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자존심의 상처는 어디까지 계속되는가? <기념 보석>에서 아나톨의 연인 에밀리에 는 이전 연인들의 추억으로 보석을 간직하 는 사람이었다. 아나톨은 그녀와 결혼하려 하면서 보석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지 만 결혼 전날 그녀가 보석 두 개를 몰래 간직 한 것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아나톨 같은 인물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그는 세기 전환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문학적 인물이다. 현실 감각이 없으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인간이자, 자기만족 후에 자신의 멍 청함을 꿰뚫어 보고 다시 자신의 아이러니 를 통해 파괴당하는 인간이다. 7개 단막극이 그의 이런 성격을 묘사한다. 7개의 단막극은 어떻게 연결되나? 각 단막극은 그 자체로 완결된다. 동시에 7 개의 단막극은 등장인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에피소드의 느슨한 연결을 통해 전체로서 서사극의 구조를 보여 준다.


느슨한 연결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대사다. 작가 슈니츨러는 상투적으로 시작 되는 사소한 대화를 탁월하게 묘사하며, 불 투명하고 우발적인 데다 수수께끼 같은 공 허한 대화를 통해 장면을 갈등으로 이끈다.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가? «아나톨»은 주인공 아나톨이 친구 막스와 나누는 연애 이야기 내지는 잡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사이의 독백적 대화가 작품의

기저를 이루며, 이것은 ‘…’, ‘−’, ‘?!’ 등의 기

호를 통해 표현된다. 이런 대화는 드라마의 서사화와 관련되며 세기말 희곡의 공통 현 상이다.


아나톨과 막스는 무엇을 대화하는가? 두 사람은 만나는 동안 자기 말만 하고 자신 의 삶과 직접 연관성이 없는 주제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삶에는 참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정신 상 태 주변만을 맴돈다. 어떤 정신 상황인가? 아나톨은 ‘감정의 결속’ 없이 사는 슈니츨러 의 작품 속 등장인물의 전형적인 유형을 대 변한다. 그에게서 어제는 죽었고 내일은 기 대할 수 없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며 모든 결과는 똑같다고 믿기에 어느 것에서도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와 ‘환상’ 사이에서 존재하며, 모든 면에서 자기


결정력이 부족하다. 허무함의 불안에서 벗어 나려 하며 삶의 무의미함을 감추려 한다. 슈니츨러의 사상 배경은 무엇인가? 인간 의식을 하나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집합체로 보는 물리학자 마흐의 이 론과 니체 철학, 프로이트의 심리학이다. 따 라서 «아나톨»은 여러 문화 비판의 흐름 이 용해되어 있는 도가니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떤 작가인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가 되었지만 생의 대 부분을 작가로 활동했고, 초기에는 희곡을 많이 집필했다. 모든 작품에서 빈의 세기말


을 묘사했다. 평가절하되었다가 1960년경에 야 재평가되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석희다. 대구가톨릭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다.


세기말의 정신 상황 사람 사이에 감정의 결속은 없다. 어제는 죽었고 내일은 기대할 수 없다. 순간만이 존재하는데 연속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연극 <아나톨>, 플로리안 피들러 감독, 푸어 극장, 2013


아나톨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최석희 옮김 인문학 교양 2009년 3월 15일 출간 사륙판(128 *188) 양장본, 197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Anatol 아나톨


차례

해설 ·····················7 지은이에 대해 ················15 서문 ····················19 운명에 대한 질문 ···············25 크리스마스 쇼핑 ···············49 에피소드 ··················69 기념 보석 ··················97 이별의 만찬 단말마

················109

··················137

아나톨의 결혼식 날 아침 ···········157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189 ···············196


운명에 대한 질문


아나톨, 막스, 코라 아나톨의 방

막스: 아나톨, 난 정말 자네가 부러워…. 아나톨: (미소 짓는다.) 막스: 자, 자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군. 나는 놀랐어.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동화라고 생각했었네. 그러나 지금 내 가 본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내 눈앞에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자네가 발레리나라고 하자 그녀가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 자네가 그녀의 연인이 죽었다고 말하자 그녀가 어떻게 울었는지, 자네가 그녀를 여왕으로 만들자 그녀가 범인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었는지…. 아나톨: 그래, 그래. 막스: 내가 보기에 자네 안에는 마술가가 있네. 아나톨: 우리 모두에게도. 막스: 으스스하군. 아나톨: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삶보다 더 으스스한 것은 없어. 수백 년이 경과하면서 경험한 많은 것보다 더 으 스스한 것은 없다네. 갑자기 지구가 돈다는 것을 우리 조상 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다고 생각


되나? 막스: 글쎄…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었잖 아! 아나톨: 만약 봄을 새로이 발견했다면!… 그 봄을 믿지 않 을 거야! 푸른 나무와 피어나는 꽃, 사랑에도 불구하고. 막스: 자네는 잘못 생각하고 있네. 모든 것은 허튼소리야, 자기 치료법과 더불어…. 아나톨: 최면술…. 막스: 아니, 그것하고는 다른 거야. 나는 절대로 최면에 걸 리는 일은 하지 않겠네. 아나톨: 유치하군! 내가 자네를 조용히 누워 잠들게 한다면, 최면과 뭐가 다른가? 막스: 그래, 그다음에 자네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당신 은 굴뚝 청소부입니다”라고. 그러면 나는 굴뚝 안으로 올라 가 검게 그을리겠지!… 아나톨: 자, 그건 농담이고…. 중요한 것은 학문적으로 어

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걸세−그러나 아, 거기까지는 아직 너무 멀어. 막스: 왜…? 아나톨: 글쎄, 저 소녀를 오늘 수백 가지의 다른 세상에 옮 겨놓을 수 있는 나는 다른 세상으로 나를 어떻게 옮겨놓지?


막스: 그건 가능하지 않은가? 아나톨: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 일을 시도했다네. 나 는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몇 분 동안 주시하고 나 자신에게 생각을 불어넣었어. 아나톨! 잠들어라! 네가 깨어나면 너를 미치게 만드는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너의 마음에서 사라 져 있을 거야. 막스: 그래서, 깨어난 다음에는? 아나톨: 오, 나는 전혀 잠들지 않았어. 막스: 그 여자를… 그 여자를? 자네는 여전히 그녀를 의심 하고 있군! 아나톨: 그래… 친구여! 아직도 여전히! 나는 불행해, 미치 겠어. 막스: 아직도… 의심해? 아나톨: 아니… 의심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녀가 나를 속 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그녀가 내 입술에 매달려 있으면 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들이 즐기는 순간에도 나 를 속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막스: 미쳤군! 아나톨: 아니야! 막스: 증거가 있는가? 아나톨: 감을 잡지… 느끼지…. 그 때문에 알아!


막스: 이상한 논리군! 아나톨: 여자들이란 늘 우리에게 불성실해. 여자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지…. 그녀들은 전혀 몰라…. 내가 책을 두 권이나 세 권 동시에 읽어야 하듯 여자들은 애인을 두 명이 나 세 명 가져야만 해. 막스: 그렇지만 그녀는 자네를 사랑하잖아? 아나톨: 엄청…. 그러나 마찬가지야. 그녀는 나에게 불성 실해. 막스: 그럼 누구랑? 아나톨: 내가 그것을 알 수 있나? 길거리에서 그녀를 따라 온 영주, 어쩌면 그녀가 새벽에 지나갈 때 창문을 통해 미소 를 짓던 교외의 어느 시인이라든지! 막스: 자네는 바보군! 아나톨: 그녀가 내게 성실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나? 그녀는 모든 여자와 마찬가지로, 삶을 사랑해. 그리고 깊게 생각하

지 않아. 나 사랑해? 하고 내가 물으면−그녀는 “네”라고 대

답하지−그리고 그녀는 다른 사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진실을 말하지−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리고

바로 어느 여인이, 내 사랑, 내가 당신에게 불성실해? 하고 자네에게 대답했네. 그렇다면 어디에서 확신을 가져야만 하 는가? 그녀가 나에게 성실하다면−


막스: 그렇지만!− 아나톨: 그건 순전히 우연이야…. 오, 내 사랑하는 남자 친 구 아나톨에게 성실해야지 하고 그녀는 절대 생각하지 않 아…. 절대로…. 막스: 그러나 그녀가 자네를 사랑한다면? 아나톨: 오, 나의 순진한 친구! 그게 이유가 되겠어! 막스: 무슨 말인가? 아나톨: 그렇다면 내가 왜 그녀에게 성실하지 않단 말인 가?… 나도 분명 그녀를 사랑해! 막스: 그래! 남자들이란! 아나톨: 낡고 어리석은 상투어! 우리는 여자들이 그 점에서 우리하고 다르다고 늘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지! 그래, 많은 이들… 어머니가 감금하는 자든 열정이 없는 자든, 우리들 은 똑같아. 난 너를 사랑해, 너만을 하고 내가 한 여인에게

말한다면−그 전날 밤 내가 다른 여자의 품속에서 잠을 잤 다 해도 그건 그녀를 속이는 게 아니야. 막스: 그래… 자네는! 아나톨: 나는… 그래!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내 사 랑하는 코라도 그렇지 않을까? 오! 그 생각을 하니 미치겠 군. 내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보물, 내 사랑,−난 방금

당신의 모든 것을 용서했소−그러나 나에게 진실을 말해줘


−라고 말했다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됐겠나? 그녀는 전처

럼 거짓말을 할 거야−나는 그전과 마찬가지일 거고. 아직 어떤 여자도 내게 “맙소사! 말해봐…. 당신은 정말 내게 성 실해? 당신이 그렇지 않아도 질책의 말은 한마디도 안 할 거 예요. 그러나 진실을! 나는 그 진실을 알아야만 해요”라고 간청하지 않았네…. 그 때문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거짓말 을 했지…. 조용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장 순수 한 양심으로. 왜 너를 기분 나쁘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 어. 그리고 나는 “그래, 나의 천사여! 죽을 때까지 성실할 거 야”라고 말했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믿고 행복해했지! 막스: 그렇군! 아나톨: 하지만 나는 믿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아! 이 멍청 하고 달콤하고 증오스러운 피조물로 하여금 말하게 하거나 뭔가 다른 방법으로 진실을 알아내는 어떤 솔직한 방법이

있다면−그건 나일 거야…. 그러나 우연히 아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막스: 최면술은? 아나톨: 뭐라고? 막스: 그래, 최면술…. 자네가 그녀를 잠자게 만들고 그녀 는 자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뜻이지. 아나톨: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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