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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사랑과 불안 문학 이외의 어떤 것도 그의 삶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처음 만난 이 불덩어리는 문학일까, 아닐까? 카프카의 사랑과 불안이 편지에 실려 밀레나에게 전달된다.

밀레나 예센스카(1896~1944). 프라하에서 처음 만난 카프카와 밀레나는 3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인텔리겐치아 2316호, 2014년 11월 18일 발행

이인웅이 옮긴 ≪카프카의 편지: 밀레나에게≫

난 어제 그대에게 편지를 매일 쓰지 말라고 충고했지요. 오늘도 내 생각은 그러하며 그 건 우리 두 사람에게 매우 바람직한 일일 겁 니다. 오늘 한 번 더 강조해 충고하겠습니 다.-그러나 밀레나, 제발 내 충고를 따르지 말고 매일 편지를 보내 주십시오. 아주 짧아 도 좋습니다. 오늘 편지보다 더 짧아도 좋습 니다. 단 두 줄이라도, 단 한 줄이라도, 단 한 마디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한마디조차


없이는 난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인해 살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카프카의 편지: 밀레나에게(Briefe an Milena)», 프란츠 카프카, 이인웅 옮김, 167쪽.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는가? 프란츠 카프카가 연인 밀레나 예센스카에 게 보낸 편지다. 밀레나는 누구인가? 체코 명문가 출신의 칼럼니스트이자 번역 가다. 카프카보다 열세 살 연하다. 미네르바 김나지움에서 교육받고 대학에서 문학과 언론학을 전공했다. 체코공화국 최초의 페


미니스트였다. 이지적이고 정열적인 여자로 공동묘지로 야간 소풍을 가는가 하면 옷을 입은 채 몰다우 강에서 수영을 즐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카프카와 밀레나는 어떻게 만났는가? 그가 1919년 10월 잠시 프라하에 체류할 때 지인들을 통해 그녀를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인 사이로 발전 한다. 편지 왕래는 어디서 시작되었나? «화부(火夫, Der Heizer)»를 체코어로 번 역하게 해 달라는 밀레나의 편지다.


당시 밀레나의 상황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에른스 트 폴라크와 결혼했지만 그는 온 프라하가 다 아는 바람둥이였다. 정열적인 사랑은 금 방 식었다. 밀레나는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 며 돈을 벌기 위해 신문 잡지에 기고하고 번 역도 시작했다. 카프카의 형편은? 그 역시 자유의 몸은 아니었다. 첫 약혼녀와 두 번 파혼한 후 율리에 보리체크와 세 번째 로 약혼했지만 결혼에는 회의적이었다. 폐 결핵으로 육체와 정신의 고통과 불안 속에 있었다.


그는 왜 결혼을 회의했나? 문학보다 더 관심을 끄는 그 무엇이 자신에 게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 던 듯하다. 그는 평생 생활과 문학을 대립적 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문학을 위해 현실의 삶을 포기했다. 어쩌다 사랑에 빠진 것인가? 처음에는 단순히 번역에 대한 직업적인 관 심이었다. 그러나 밀레나의 정열적이고 무 조건적인 사랑 공세에 빠져든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왕래하며 밀회를 거 듭하고 수많은 서신을 교환한다.


그녀의 무엇이 그를 매혹했나? 그는 가장 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다음 과 같이 고백한다. “그녀는 아직 한 번도 만 나 본 적이 없는 살아 있는 불덩어리라네. 그러면서도 극도로 사랑스럽고 대담하고 영리하며,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다네. 아니, 희생을 통해 모든 것을 얻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였나? 점점 심해지는 폐결핵의 고통 속에서도 그 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 다. 그러나 이 사랑에도 끝이 찾아온다.


끝의 시작은 어디부터인가? 밀레나는 유부녀다. 카프카는 그녀가 남편 을 떠나길 원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밀레나에게 더 이상 편지를 보내 지 않기로 결심한다. 둘의 끝은 어디인가? 1924년 6월 3일 카프카는 폐결핵이 심해져 사망한다. 밀레나는 1944년 5월 17일 나치의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이 책에 실린 편지는 어떤 것인가? 1920년 4월 초 서른일곱 살의 카프카가 메란 여행 중 오토부르크 여관에 머물면서 밀레 나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부터 1923년 그녀


와 헤어진 후 보낸 마지막 편지까지 약 3년 간 카프카가 보낸 편지들이다. 그들이 죽은 뒤 이 책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밀레나는 카프카가 세상을 뜬 뒤에도 이 편 지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1936년 독 일군이 프라하로 진격해 오기 직전, 그녀는 이 편지들을 친구인 빌리 하아스에게 넘겼 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하아스는 카프카 의 친구 막스 브로트의 권유로 이 편지들을 편집, 정리해 1952년 미국 쇼켄 출판사에서 출간한다. 최근 판본으로는 1983년 부페르 탈대학의 프라하문학 연구소장 보른(Jürgen Born) 교수와 책임연구원 뮐러(M ichael Müller) 박사가 보완한 증보 신판도 있다.


두 판본의 차이는? 카프카는 편지에 요일은 종종 기록했지만 날짜는 쓰지 않았다. 하아스는 밀레나의 생 일, 국경일, 편지에 붙은 번호, 기타 여러 사 건들을 참고해 편지 순서를 정리했다. 증보 신판은 이 편지들의 순서를 다시 조정하고 카프카가 편지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는 날 짜를 괄호로 표시했으며 누락된 편지들을 보완했다. 당신은 어느 판본을 택했나? 초판이다. 밀레나에게 직접 편지를 받아 편 집한 하아스의 판본이 카프카의 사랑, 삶에 대한 불안, 병과의 싸움과 죽음, 밀레나와의 관계 같은 핵심적인 문제가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 나타나는 카프카는 어떤 인간인가? 카프카는 인간 소외 문제를 깊이 분석한 작 가로 유명하다. 문학을 위해 삶을 포기한 그 가 자신이 겪은 인생과 사랑, 정신의 슬픔과 마음의 불안을 어떻게 표출하고 극복해 나 갔는지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 당신은 왜 이 책을 번역했나? 이 책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흡사하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편지를 쓰 는 사람이 괴테를 대신하는 베르테르가 아 니라, 카프카라는 작가 자신일 따름이다. 실 명으로 된 독백을 소개함으로써 소외 인간 카프카의 고뇌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싶 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인웅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교수다.


카프카의 사랑과 불안 문학 이외의 어떤 것도 그의 삶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처음 만난 이 불덩어리는 문학일까, 아닐까? 카프카의 사랑과 불안이 편지에 실려 밀레나에게 전달된다.

밀레나 예센스카(1896~1944). 프라하에서 처음 만난 카프카와 밀레나는 3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카프카의 편지: 밀레나에게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인웅 옮김 2014년 11월 10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 478쪽 22,000원


작품 속으로

카프카의 편지: 밀레나에게


메란ᐨ운터마이스1), 오토부르크 여관에서

사랑하는 밀레나 프라하에서 당신에게 카드를 보냈고 메란에서도 보냈지요. 답장은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카드는 물론 특별히 급 한 답장을 요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당신의 침묵이 비교적 잘 지낸다는 표현이라면 난 아주 만족합니다. 편지 쓰기 싫 을 때에 당신은 종종 그런 식으로 표현하곤 했지요. 그러나 -그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만-내가 카드로 당신 의 마음을 어떻게든 상하게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런 일이 있었다면 마음과는 달리 난 얼마나 서툰 필치를 지닌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훨씬 더 나쁜 일이겠지만, 당신 이 말했던 고요한 안정의 순간이 지나가 버리고 또다시 괴 로운 시간이 당신에게 닥쳐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째 경우라면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게 있을 수 없 는 일이지만 보다 가까운 다른 말을 하지요. 둘째 경우라면 충고하는 게 아니라-내 어찌 충고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찌하여 당신은 잠시나마 빈을 떠나지 않느냐고 묻고 1) 메란ᐨ운터마이스: 메란(Meran)은 이탈리아 남부 티롤 지방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는 약 3만 8000명이며 요양지로 유명하다. 운터마이스는 메 란 시(市)의 한 구역 이름이다.


싶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고향이 없는 것도 아닙 니다. 보헤미아에 가서 머물게 되면 새로운 힘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모르는 그 어떤 이유로든 당 신이 보헤미아로 가길 원치 않는다면 다른 어느 곳으로라도 한번 떠났으면 합니다. 아마 메란이라도 좋을 것입니다. 메 란을 알고 있는지요? 그러니까 난 두 가지 회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인데, 이는 “염려하지 마라.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게 아니면 몇 줄이라도 회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카프카

사실 난 당신의 얼굴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수 없다 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만 커피숍 탁자 사이로 걸어 나가던 당신의 모습, 그리고 당신의 옷, 그것을 아직도 눈앞에 그려 보고 있답니다.

사랑하는 밀레나 음울한 빈 한복판에서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부끄럽게 합니 다. 볼프2)로부터 벌써 편지를 받았을 줄 압니다. 아무튼 그 는 이미 오래전에 그 편지에 대한 글을 내게 보내왔습니다. 도서목록에 예고되었다는 <살인자>란 단편을 난 쓰지 않 았으며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단편이 가장 훌륭할 것이라고들 하니까 그 말이 옳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번과 지지난번 편지에 따르면 당신은 불안과 걱정 으로부터 결정적으로 해방된 것 같은데, 그것은 물론 당신 남편과 관계된 것이겠지요. 난 당신네 두 사람이 그렇게 잘 지내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답니다. 몇 해 전의 어느 여름날 오후가 생각나는군요. 프란츠 부두의 담벼락을 따라 어슬 렁거리다가 당신 남편을 만났는데 그 사람도 축 늘어져 거 창하게 보이지는 않더군요. 물론 우리 둘 다가 나름대로 완 전히 다른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말입니다. 우 리가 함께 나란히 걸어갔는지 그냥 스쳐 지나갔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이 두 가능성의 차이점이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지나간 일이고 그대로 과거 속에 파묻혀 있어야 되겠지요. 당신은 집에 가 있으니 좋으 신가요?

2) 볼프: 카프카의 출판업자 쿠르트 볼프(Kurt Wolff)를 말한다.


진심의 인사를 전하며 당신의 카프카

메란ᐨ운터마이스, 오토부르크 여관에서

사랑하는 밀레나 방금 이틀 낮과 하룻밤 동안 지속되던 비가 멈추긴 했지만 그저 일시적인 듯합니다. 아무튼 이는 축하할 만한 일로서 난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 실 비가 오는 것도 견딜 만했지요. 이곳에선 비 오는 것이 낯 선 일이랍니다. 그저 약간 낯설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안하게 해 줍니다. 내가 받은 인상이 옳다면(별로 말을 하 지 않은 채 몇 번 자리를 함께한 사실은 분명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지요) 당신도 빈에서의 낯선 분위기를 즐거워 했지요? 훗날에는 여러 일상적인 사정들로 인해 침울해졌 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색적인 분위기 자체가 당신을 기쁘 게 해 주지 않았나요? (그래도 그건 나쁜 징조일지도 모르며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난 이곳에서 아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멸해 갈 육신을 이렇게 세심하게 보살핀다는 것을 견디지 못할


정도랍니다. 내 방 발코니는 정원 속에 가라앉아 있는 듯한 데 꽃이 만발한 덤불이 무성하게 둘러싸고 있지요(이곳 식 물들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프라하에서는 웅덩이가 얼어 버릴 만한 날씨인데도 여기 내 발코니 앞에는 꽃들이 서서 히 피어나고 있답니다). 게다가 따스한 햇볕까지 듬뿍 받고 있습니다(아니, 약 일주일 전부터는 짙은 구름이 낀 하늘에 내맡겨져 있었지요). 도마뱀과 새들이 어울리지 않게 짝을 지어 나를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이런 메란을 정말 당신에 게 안겨 주고 싶군요. 당신은 최근에 ‘숨도 쉴 수 없다’는 편 지를 했지요. 그 말 속에는 이미지와 의미가 아주 가깝게 나 타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약간은 부드러 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심에서 보내는 인사와 함께 당신의 카프카

그러니까 폐로군요. 난 온종일 그것만을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요. 내가 그 병에 대해 특별히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당신이 암시적으로 하는 말에 따르면-당신에겐 그 증세가 가볍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


니다. 내가 3년 전부터 앓고 있는 실제적인 폐결핵까지도 (서유럽 사람 절반이 폐에 다소간의 결함을 갖고 있지요) 내 겐 나쁜 것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가져다주었답니다. 내 병은 약 3년 전 한밤중에 객혈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새로운 일이 일어날 때면 모든 게 그러하듯 난 흥분해서 (뒷 날 알게 된 규정대로라면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하는데 그 대 신) 벌떡 일어났지요. 물론 약간은 놀라서 창가로 가서는 몸 을 밖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세면대로 갔다가는 방을 두루 돌아다니다 침대 위에 앉았지요. 피는 계속 쏟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난 전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 냐하면 피가 멈춘다는 걸 전제할 경우, 나는 거의 잠을 이루 지 못하고 지낸 지 3∼4년 만에 처음으로 깊이 잠을 잘 수 있으리란 것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피 쏟는 것을 멈췄으며(그 이후 다시 쏟지도 않았습니다) 나머 지 밤 내내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가정부가 왔지요(당시 난 쇤보른 팔라이스3)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주 착하 고 희생적이면서도 극히 사무적인 처녀였는데 피를 보고는 “박사님, 당신은 오래 사시지 못할 것 같아요”4)라고 말했지 3) 쇤보른 팔라이스: 프라하에 있는 대표적인 바로크 궁정 풍의 저택. 4) “박사님, 당신은 오래 사시지 못할 것 같아요”: 원문은 “Pane doktore, s Vámi to dlouho nepotrvá”로 체코어다.


요. 그러나 나는 여느 때보다도 더 기분이 좋았으며 사무실 에 나갔다가 오후에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다음에 어떻 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여기에선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당신의 병이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특히 내가 계속 끼어들어 알고 있으며 또 추억을 더듬어 보건대, 여러 가지 상냥한 언행에서도 당 신은 거의 시골 여인처럼 발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확신했 기 때문이지요. 그래요, 당신은 병들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경고이긴 하지만 결코 폐결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그것이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애 현상에 앞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생각이 놀라 운 것입니다. 이때에 우선 당신 편지에 쓰여 있는 다른 내용 들은 배제하겠습니다. 한 푼도 없다-홍차와 사과-매일 2 부터 8까지-이와 같은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서 아마 구두(口頭)로나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여기에서도 제쳐 두겠습니다(물론 편지에서만이요. 그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시 발병에 대한 내 경우와 또한 많은 경우에 들어맞는 설명만 말하겠 습니다. 그것은 뇌(腦)가 자신에게 부과된 고민과 고통을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뇌는 “나는 포기하 겠다. 전체를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탤 만한 누군가가 있다면


내 짐을 약간이나마 좀 덜어 가 다오. 그러면 한동안은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폐가 자진해서 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폐는 별로 많은 손해 를 볼 것도 없었지요.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뇌와 폐 사 이에 벌어진 이러한 협상은 처참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당신 을 약간이라도 보호해 준다면 그런 것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당신 을 약간이라도 보호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합 니다. 그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요. 그 렇다면 여기에 오시는 것이 하나의 구제책이 되지 않을까 요? 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요, 농담을 하 고 싶진 않습니다. 나는 조금도 즐겁지 않답니다. 당신이 생 활 방식을 새롭고 보다 건강하게 꾸몄다는 편지를 하기 전 에는 결코 명랑해지지 않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잠시나마 빈을 떠나지 않느냐는 것은 지난번 편지를 받은 후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그 마음을 잘 이해합니다만 빈 근 방의 가까운 곳에도 체류할 만한 아름다운 곳과 당신을 돌 볼 만한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는 아 무것도 쓰지 않겠습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모두 내일 쓰겠으며 나를 감동시


키고 부끄럽게 하고 슬프게 만들고 또 기쁘게 해 주는 분책 (分冊)5)에 대한 감사도 내일 하겠습니다. 아니, 오늘 한 가 지만 더 말하지요. 만일 당신이 번역 일을 하느라고 잠잘 시 간을 1분이라도 축내게 된다면 그것은 나를 저주하는 것이 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로 언젠가 심판 대 앞에 서게 된다면 사람들은 상세한 조사도 하지 않고 단 순히 번역 일이 당신의 수면을 망쳐 놓았다고 확정 지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난 그렇게 판결받을 것이며 그것은 정당 한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당신이 그런 일을 더 이상 하지 않 기를 간청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랍 니다. 당신의 프란츠 K

사랑하는 밀레나 오늘은 다른 내용의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잘 되질 않는군 요. 내가 그걸 정말 진지하게만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그

5) 분책: 밀레나가 번역해 ≪크멘≫ 지에 실린 카프카의 단편 <화부>를 말 한다.


렇게 생각한다면 다르게 편지를 쓰겠지요. 그렇지만 때때로 는 반쯤 그늘이 드리운 정원 어디에든 당신이 누울 안락의 자를 준비해 놓고,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우유를 열 잔 쯤 마련해 놓아야 하겠지요. 빈이라도 상관없고 바로 지금 여름이라도 상관없지만, 배고픔이나 불안은 없어야 할 것입 니다.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를 가능케 할 사람이 아무도 없 을까요? 그런데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 커다란 봉투에서 분책을 꺼냈을 때 난 거의 실망했습 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길 바랐지 옛날 무덤으로부터 들려 오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목소리를 원치는 않았습니다. 어 찌하여 그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것일까요? 다음 엔 이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었다는 생각이 떠올 랐습니다. 그 밖에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이렇게 어 려운 수고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조그만 문장 하나하 나까지 얼마나 충실히 번역해 냈는가 하는 것이 날 깊이 감 동시켰습니다. 그건 체코어에서 당신이 해낸 그러한 가능 성과 아름답고 자연스런 능력을 추측하지 못했던 사실에서 오는 감동입니다. 독일어와 체코어가 그렇게도 가깝단 말 인가요? 그러나 사실이 어떠하든 간에 그건 철저할 정도로 형편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밀레나, 나는 그런 사실 을 무엇보다도 쉽게 당신에게 한 줄 한 줄 입증할 수 있습니


다. 그렇게 하려면 그걸 입증하는 일보다 언짢은 감정이 약 간 더 강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그 이야기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겠지만, 그런 세 계상(世界像)은 내 마음을 약간 음울하게 해 준답니다. 이 런 이야기는 그만두지요. ≪시골 의사≫6)는 볼프에게서 받 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그렇게 편지를 했습니다. 난 물론 체코어를 압니다. 벌써 몇 번이고 당신이 왜 한 번이라도 체코어로 편지를 쓰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독일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가 아닙 니다. 당신은 놀랄 정도로 독일어도 대부분 숙달하고 있습 니다. 조금이라도 숙달하지 못했다면 독일어가 스스로 당 신 앞에 몸을 굽히게 되겠지요. 그럼 특히나 아름다울 것입 니다. 말하자면 독일인도 감히 자기 언어에 대해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독일인도 감히 그렇게 개성적으로 쓰 진 못하겠지요. 그러나 난 체코어로 쓴 당신 편지를 읽고 싶 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결국 체코어 권(圈)에 속하고 있 으며 체코어 속에서만 완전한 밀레나이기 때문입니다(번역 작품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지요). 독일어 속에서는 언제나 빈으로부터의 밀레나이거나 빈을 위해 준비하는 밀레나일

6) ≪시골 의사≫: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집.


따름입니다. 그러니 청컨대 체코어로 편지해 주십시오. 그 리고 당신이 쓰는 문예란 기사들도요. 그것이 하찮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그래도 하찮은 것을 통해 역사를 읽어 왔 습니다. 어디까지지요? 난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도 그럴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엔 최고의 편견 속에 파묻혀 있겠습니다. 내 약혼에 대해 물으셨지요. 나는 두 번 약혼을 했습니다 (원한다면 세 번이라고 하겠는데 같은 처녀와 두 번 약혼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세 번 다 며칠 상관으로 결혼은 하지 못했답니다. 첫 번째 처녀는 완전히 지나가 버렸고요(소문 으로 들은 바로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벌써 어린 사내아 이까지 낳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 처녀는 아직 살아 있으나 결혼할 전망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상 제대로 살고 있지 못 하다고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 비용으로 독자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서나 다른 데에서 내 가 대체적으로 인식한 바는 이럴 때 남자들이 더욱 괴로워 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혹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면 이 럴 때 남자들의 저항력이 훨씬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언제나 잘못도 없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거기엔 아무런 대처를 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가 아닙니다. 원초적 인 의미로 괴로워하는데, 그 의미는 다시금 “거기엔 아무런


대처를 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통하는 것일 겁니다. 이런 일을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지옥의 유일한 가마솥을 때려 부수려 하는 것 과 같지요. 첫째로 이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둘째로는 성 공한다 하더라도 흘러나오는 엄청난 작열(灼熱) 속에 우리 는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옥은 그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 을 것이고요. 그러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무튼 우선 정원에 드러누워서 질병으로부터, 특히 고 질적인 병이 아닌 경우에는, 달콤한 맛을 가능한 한 많이 끌 어내도록 하십시오. 그 속에는 감미로운 맛도 많이 깃들어 있답니다. 당신의 프란츠 K

사랑하는 밀레나 우선 당신이 편지를 읽고 나서 내 뜻과는 달리 뭔가를 상상 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즉, 약 2주 전부터 나는 점점 더 불면증이 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불면의 시간이 오가는 것을 나는 근본적으로 나쁘게 여기지도 않고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몇 가지 원인을 제기한다(베데커의 말에 따르면


우스꽝스럽게도 메란의 공기가 그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 요), 때때로 이런 원인이 거의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런 원 인이란 한 인간을 통나무처럼 무디게 만들어 버리고 동시에 야생동물처럼 불안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등의 추측 말입니 다. 그러나 난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고요히, 그것도 “이상하게도” 잠을 잤다니 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 신을 차리지 못할 상태”였을 텐데 아주 고요히 잠을 잤다니 까요. 나는 한밤중에 잠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갈 때면 그 행 방을 알고 그대로 받아들인답니다. 그에 반항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 겁니다. 잠이란 가장 순결한 존재이며 잠을 못 이루는 인간은 가장 죄 많은 존재이지요. 그런데 지난번 편지에서 당신은 바로 이 잠 못 이루는 인 간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사정을 알지 못하고 그 편지를 읽는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할 겁니 다. “어떠한 인간일까! 이 경우 그는 산이라도 옮겨 놓은 사 람처럼 보이는구나.” 그렇지만 그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 았어요. (글 쓰는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았으며 그저 우유와 좋은 식품으로 영양분만 취하고 있지요. (종종이긴 할지라도) 자기 앞에 있는 “홍차와 사과” 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 외의 일들은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산들도 있는 그 자리에 그냥 버려두고 있지요. 당신은 도스토옙스키7)의 최초 성공담을 아시는지요? 그 이야기는 자주 간추려 이야기되며 나도 그 위대한 이름 때문에 마음 놓고 인용하곤 하지요. 이웃이나 옆에 있는 보다 가까운 사 람의 이야기도 똑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런데 난 그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이름들까지는 더욱 모르겠고요. 도스토옙스키가 최초의 장편 소설 ≪가난한 사람들≫ 을 쓸 당시 친분이 있던 문학가 그리고리예프8)와 함께 살고 있었지요. 그 사람은 여러 달 동안 많은 글이 쓰인 종잇장들 이 책상 위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지만, 소설이 완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원고를 받았답니다. 그리고리예프는 원 고를 읽고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아무 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원고를 당시 유명한 비평가 네크라소 프에게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날 밤 3시에 도스토옙스키 집

7)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 모스크바 출생으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 장편 소설 ≪가난한 사람 들≫로 문단에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죄와 벌≫, ≪백치≫, ≪악령(惡 靈)≫ 등이 있다.

8) 그리고리예프(Аполлон А. Григорьев, 1822~1864)는 러시아의 작가이며 비평가. 모스크바대학을 마친 후, 여러 잡지의 편집에 종사하고 시·소설·희 곡 등을 썼으나 뒤에는 주로 문학 비평을 썼다.


대문 초인종이 울립니다. 그리고리예프와 네크라소프였지 요. 그들은 방으로 밀고 들어와서는 도스토옙스키를 끌어 안고 키스를 합니다. 네크라소프는 그때까지 도스토옙스키 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를 러시아의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한두 시간 동안 주로 그 소설에 관한 대화를 하지요.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갑니다. 이날 밤을 자기 일생 에서 가장 행복했던 밤이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는 창문에 기대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억제할 길 없 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 서술해 놓은 이때의 근본 감정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이 훌륭한 분들이여! 그들은 얼마나 선하고 고귀하단 말인 가! 그런데 나는 얼마나 비열한 존재인가. 그들이 내 마음속 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말한다 해도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으리라.” 그다음에 도스토옙스키가 그들을 본 받으려 했다는 것은 그저 허실일 따름이며 혈기왕성한 젊은 이가 말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말일 뿐이랍니다. 그 이상은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며 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사랑하는 밀레나, 이 이야기의 신비스러운 것, 즉 이성으 로는 꿰뚫을 수 없는 점을 알아차리셨나요? 그건 이런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바는 그리고리예프와 네크라소프가 도스토옙스키보다 고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도스토옙스키도 요구 하지 않았던 것처럼 또 하나하나의 경우 아무런 소용도 없 는 그 일반적 판단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그대로 듣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리고리예 프와 네크라소프가 사실상 훌륭했고 도스토옙스키는 불순 하고 한없이 비열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물론 멀리에서라도 그리고리예프와 네크라소프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받은 어마어마하고도 부당한 은혜 에 대해 보답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들이 멀어져 가고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바는 창문으로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이름으로 인해 이 이야 기의 의미는 말살되고 만답니다. 잠 못 이루는 심경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간 것일까요? 틀림없이 훌륭한 것으로는 생 각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당신의 프란츠 K

사랑하는 밀레나 그저 몇 마디만 적고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 오늘은 나 자신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 그저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서, 그러 니까 당신 편지에 대한 인상을 조금이나마 떨어 버리기 위 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상이 밤낮으로 나를 깔고 앉아 있을 테니까요. 밀레나, 당신은 정말 이상야 릇합니다. 그곳 빈에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 중간중간에 나 같은 다른 사람들이 잘 지내지 못 하고 어느 날 밤에는 잠을 전날보다 더욱 설치고 있다는 걸 이상히 여길 시간이 있다니 말입니다. 이곳에 사는 세 명의 내 여자 친구들이(세 자매로 제일 큰 아이가 다섯 살이지요) 그런 점에서는 보다 합리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답니다. 우 리가 강가에 있건 아니건 간에 그 아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 다 날 물속으로 떠밀어 버리려 하는데, 그건 내가 그들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건 아닙니 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위협한다면 그건 장난에 서거나 사랑에서이지요. 대략 “이제 우리 농담으로 절대 절 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보자”라는 의미지요. 그러 나 아이들은 진지해 어떤 불가능도 알지 못한답니다. 떠밀 어 버리는 일에 열 번이나 실패한다 해도 다음번에도 성공 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앞서 열 번이나 실패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답니 다. 아이들의 언어와 의도를 성인의 지식으로 가득 채운다


면 그들은 섬뜩한 존재가 되지요. 만일 네 살짜리 어린아이 가 작은 곰처럼 세차게 어떤 사람에게로 달려간다고 합시 다. 그 아이는 옛날 젖먹이 시절처럼 배가 약간 볼록하게 튀 어나와 있는데 뽀뽀하고 품에 꼭 안기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두 자매가 오른 편과 왼편에서 그 아이를 도와주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들 뒤에는 난간만이 남아 있지요. 아이들의 친절한 아버 지와 상냥하고도 아름다우며 뚱뚱한 어머니는 멀리서(넷째 아이의 유모차 옆에서) 미소만 짓고 있으면서 아무런 도움 도 주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의 끝장난 일이지요. 어떻게 구원되었는지를 서술한다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 다. 이성적이거나 예감에 가득 찬 아이들이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없이 나를 떠밀어 버리려 한다니, 그것은 아마도 내가 남아도는 인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은 당신의 편지와 내 답장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지난번 편지에 쓴 “좋게 생각해서”라는 말이 당신을 놀 라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때는 여기에 세분해 놓진 않 았지만 완전히 잠을 못 이루던 시절이었지요. 나는 그 이야 기를, 즉 자주 당신과 관련해서 생각하곤 했던 이야기를 썼 습니다만, 그것을 끝냈을 때엔 양쪽 관자놀이가 긴장되어


왜 내가 그 이야기를 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바깥 발코니의 안락의자에 누워 당신에게 이야기하 려 했던 무수한 것들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나 자신 의 근본 감정에 호소하는 길 이외엔 어찌할 바가 없었지요. 지금도 역시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작은 단편들을 모아 엮은 최근의 ≪시골 의사≫ 를 제외하고는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을 모두 가지고 있습 니다. 이 단편집은 볼프가 당신에게 보낼 것입니다. 아무튼 일주일 전에 그 때문에 그에게 편지를 했지요. 인쇄에는 아 무런 이상이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 책들과 번역에 대해 하게 될 일은 모두 올바를 것 입니다. 당신 손에 책을 넘겨주는 것이 당신에 대한 나의 신 뢰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까 봐 유감스러울 뿐입니 다. 이에 반해 당신이 바라는 <화부(火夫)>9)에 관해 몇 가지 주해(註解)를 함으로써 사실상 약간의 희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이는 우리가 인식의 눈길로 인생을 재음미해야만 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9) <화부(火夫)>: 카프카는 1912∼1914년에 미완성 장편 ≪실종자(Der Verschollene)≫를 집필했다. 그의 사후에 브로트가 ≪아메리카(Amerika)≫ 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그중 제1장이 <화부(Der Heizer)>라는 단편 소 설로 1913년에 발표되어 폰타네문학상을 받는다.


예감이 되며 이때에 가장 사악한 점은 공공연히 알려진 비 행(非行)에 대한 검열이 아니라 언젠가 선(善)한 것으로 간 주되었던 행위에 대한 검열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쓴다는 것은 좋은 일입 니다. 두 시간 전 당신의 편지를 들고 바깥 안락의자에 누워 있을 때보다 나는 훨씬 안정되었습니다. 내가 거기 누워 있 을 때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딱정벌레 한 마리가 뒤로 발 랑 넘어져서 절망한 채로 다시 뒤집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난 벌레를 기꺼이 돕고 싶었고 쉽사리 도울 수도 있었지요. 한 발짝만 걸어가 간단히 밀어서 틀림없이 도움을 줄 수 있 었건만 당신 편지를 보느라고 그 벌레를 잊어버리고 말았답 니다. 나는 일어설 수도 없었지요. 도마뱀 한 마리가 내 주 변의 생명에 대한 주의를 환기해 주었습니다. 도마뱀은 이 미 완전히 지쳐 고요해진 딱정벌레를 타고 넘어갔지요. 이 것은 사고(事故)가 아니라 죽음의 투쟁, 즉 자연적인 동물 의 죽음에 대한 진귀한 광경이라고 난 홀로 중얼거렸답니 다. 그러나 도마뱀이 딱정벌레 위를 타고 넘어갈 때 그는 벌 레를 다시 똑바로 뒤집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딱정 벌레는 한동안 죽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아무런 일 도 없었던 것처럼 담벼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어쩐 일인 지 그로 인해 나는 약간의 용기를 다시 얻은 듯했으며 벌떡


일어나서 우유를 마시고는 당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프란츠 K

내일 당신에게 주해(註解)를 보내겠지만 그건 아주 보잘 것없는 것으로 몇 페이지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 니다. 내가 당연한 것을 떨어 버릴 경우, 번역의 당연한 것 같은 진리란 언제나 놀랍고 오해도 거의 없습니다. 오해란 별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더욱 힘차고 단호한 이해가 생겨 날지도 모르지요. 번역을 하는 것에(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당신의 충실성을 체코 사람들이 비난하지나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느끼는 체코어에 대한 언어 감정으로는 완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만, 이는 극도로 편파적인 일입니다. 여하튼 누군가가 당신 을 비난한다면 그 모욕을 내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상받도록 하십시오.

사랑하는 밀레나 (그래요, 편지의 주소 성명이란 부담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 나 그건 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병자가 기댈 수 있는 하나의


손잡이랍니다. 병자에게 이 손잡이가 부담스러워진다고 해 서 그것이 완쾌되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답니다.) 나는 한 번도 독일 민족 틈에서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독일어가 내 모국어이며 그 때문에 자연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체 코어가 내게는 훨씬 정다우며 그 때문에 당신의 편지는 불 확실한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준답니다. 보다 분명히 나 는 당신을 바라보고 그다지도 빠르고 단호한 육체와 손의 동작을 바라보게 되지요. 바로 만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 지랍니다. 물론 그다음에 눈을 당신 얼굴에까지 들어 올리 려 하면 편지를 읽어 가는 중에-이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 가!-불꽃이 일어나게 되고 이 불꽃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 지가 않습니다. 당신이 설정하는 생활 법칙을 믿도록 유인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소위 당신이 설정하고 있는 이 법칙으로 인해 동정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법칙 을 설정한다는 것은 (돈을 내는 사람은 바로 나다10)라는) 순 전한 오만함과 자부심(自負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 법칙을 위해 겪은 시련은 물론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일 이며 그저 조용히 당신 손에 키스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10) 돈을 내는 사람은 바로 나다: 원문은 “já jsem ten, který platí”로 체코어다.


로 말하자면 당신의 법칙을 믿고 있지요. 다만 그 법칙이 그 다지도 잔인하고 유별나게 당신 생활을 영원히 지배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런 인식이지만 그것도 과정 중에 있는 인식일 따름이며 그 과정의 길은 끝이 없답니다. 이런 건 상관하지 않더라도 이 지상에 한정된 인간의 이 성(理性)으로서는 당신이 과열된 난로 속에서 살아가는 모 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처절한 일입니다. 한 번쯤은 나에 대 한 이야기만 하고 싶군요. 전체적인 것을 한번 학교 숙제로 간주해 본다면 당신은 내 마음에 반하는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할 수 없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당신을 알고 있다는 내 행복을 망쳐 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 자신이 확인해 보 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내게 마 음의 문을 닫지 말아 주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당신은 많은 것을 침묵해 버리거나 허울 좋게 말했을 수 있으며 또 앞으 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비록 말은 하지 않더라도 난 현재 의 입장에서 그러한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그건 내 마음을 두 배나 아프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짓도 하지 말아 주기 바랍니다. 다음 세 번째 가능성으로는 약간 이나마 자신을 구해 보려 노력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당신 편지에도 그 가능성이 약간 나타나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안정과 확고함에 대한 것을, 또 때로는 다른 일들에 대해 곁 들여 말하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실제적 놀라움”11) 이라는 표현을 읽어 내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당신 이야기는 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합니 다. (내 건강 상태는 좋은 편인데, 다만 산악 지방 공기 때문 에 잠을 설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의사의 진단이 엄청 유익 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아니, 유익하지도 해가 되지도 않 습니다. 당신 태도만이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든 의사들이란 우둔하지요. 아 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보스럽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들의 요구란 우스꽝스럽지요. 여하튼 간에 의사들과 교제 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린 점점 바보스러워진다는 것을 계 산해야만 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의사가 요구하는 것이 아 주 바보스럽거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불가능한 일 이란 바로 당신이 정말로 아프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계속 불가능한 채로 있어야만 합니다. 당신이 의사를 만나 본 이 후로 당신 삶에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요?-이것이 중요 한 문제입니다. 허락해 준다면 몇 가지 질문을 곁들이고 싶습니다. 무엇

11) “실제적 놀라움”: 원문은 “reelní hrůza”로 체코어다.


때문에, 그리고 언제부터 돈이 하나도 없는 것인가요? 당신 편지에 따르면 예전엔 빈의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했다고 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는가요? 당신의 문예란 기사를 보내고 싶지 않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이 문예란 기사를 당신에 대한 이미지의 적합한 위치 에 배치할 수 있다는 걸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이로군요. 좋 습니다.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해선 당신에게 화를 내겠습니 다. 그건 불행한 일도 아니지요. 왜냐하면 마음 한구석에 당 신에 대해 약간 화가 나 있다는 것은 평형을 유지하는 데 아 주 좋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프란츠 K

금요일

밀레나, 일요일에 당신이 편지를 썼던 방은 대체 어떤 곳인 가요? 한없이 넓고 텅 비어 있나요? 당신은 홀로 있었지요?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을? 아름다운 일요일 오후에 “낯선 사람만을” 마주하고 거기 홀로 앉아 있는 것은 물론 우울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란 그저 “글이 쓰인 편지지일 뿐일” 테니까요.


이곳의 내 처지가 얼마나 더 좋은지! 내 방이 아주 작긴 하 지만 여기엔 일요일에 분명 당신에게서 빠져나와 달아났을 진짜 밀레나가 있으니까요. 믿어 주십시오. 그 여인 곁에 있 다는 건 정말 경이로운 일이랍니다. 당신은 유용성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다른 날엔 달랐고 또 다르게 될 것입니다. 문장 하나가(어떤 기회에 이 야기한 것인지요?) 당신을 놀라게 했다지만 그것은 분명한 것이며, 그와 같은 의미로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이야기했 거나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악마에게 괴롭힘을 당해 본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가까운 사람에게 복수를 하지요. 그러는 순간에 완전히 구제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 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쓸모없다고 말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괴로운 일을 바라겠습니까? 어 느 누구도 그런 일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도 못했지요. 그는 그저 “나를 따르라!”라고만 말할 수 있었 지요. 그는 그다음에 위대한 말을 했답니다(유감이지만 내 가 이 말을 잘못 인용하는 것 같군요). “내 말대로 행하라, 그러면 그대는 이것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 람들에게서 악마를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지 속되지 못했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며


그도 역시 영향력과 “목적”을 잃었기 때문이지요. 물론-한 가지 당신의 말을 인정하건대-그도 시련에 굴복하고 말았 다는 것입니다.

금요일

오늘 저녁때 처음으로 나는 혼자서 꽤 오랫동안 산책을 했 습니다. 다른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책을 가거나 대개 는 집에 누워 있답니다. 여긴 얼마나 행복한 곳이란 말인가! 하느님 맙소사, 밀레나, 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넌 생각할 능력도 없는 가련한 이성(理性)이로구나! 지금 내가 당신이 여기에 없는 걸 슬퍼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일 겁니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현혹이지요. 당신은 여기에 있으며 나와 똑같이, 그리고 보다 강하게 존재하는 것입니 다. 내가 있는 곳에 당신은 나와 함께 있으며 보다 강력하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때때로 나는 이 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 나와 함께 있는 당신이 내가 여기에 없다고 슬퍼하며 “그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메란에 있 다고 편지하지 않았던가?” 라고 묻고 있다고 말입니다. F


지금까지 북레터 <인텔리겐치아>를 보셨습니다. 매일 아침 커뮤니케이션북스와 지식을만드는지식 저자와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인텔리겐치아>사이트(bookletter.eeel.net)를 방문하면 모든 북레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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