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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로 직진하는 연극 1막과 2막의 서사와 내밀성은 3막이 열리면서 사라진다. 전혀 다른 이야기, 그러나 삶의 보편성, 윤회가 시작된다. 잔혹한 삶의 세계에서 구원의 희망은? 죽음이다.

연극 ‹유령소나타›, 잉마르 베리만 연출, 스웨덴 말뫼 시티 극장, 1954


인텔리겐치아 2318호, 2014년 11월 19일 발행

조태준이 옮긴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유령소나타≫

노인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학생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학생 왜 그러시죠? 전 제 자신이 세상에 알 려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칭 찬할 게 있으면 또 당연히 못마땅한 점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요즘 보면 사람을 함부로 비하하는 기술이 하도 발달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전 보상


같은 건 바라지 않거든요. 노인 학생은 꽤 잘사는 모양이군. 학생 아니요. 정반대예요. 아주 가난합니다. 노인 그건 그렇고 학생, 내 학생 목소리를 듣자 하니 왠지 낯설지가 않군그래. 내 어렸을 적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창문’이라는 발음을 제대로 못했었지. 그래서 늘 ‘촹문’이라 발음 하곤 했었는데. 내 평생 그런 말투를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 친구 와 학생을 빼고는 말이야…. 혹시 도 매업을 하던 아르켄홀츠 씨와 무슨 관 계가 있소? 학생 제 아버님이신데요. 노인 사람 운명이란 게 참 묘하구만. 그러


니까 내가 학생을 처음 본 건 학생이 갓난아기 때였지. 학생 집안이 몹시 어 려울 때였어. 학생 맞아요. 제가 태어났을 때 저희 집 가 세가 한창 기울어 가고 있었다더군요. 노인 그랬지. 학생 저, 어르신네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 니까? 노인 난 훔멜이라고 하오. 훔멜 국장. -«유령소나타(spöksonaten)», 아우구스트 스트린드 베리(August Strindberg) 지음, 조태준 옮김, 9~10쪽


학생 아르켄홀츠에게 노인 훔멜은 어떤 사람 인가? 아르켄홀츠는 가족들이 ‘훔멜’이라는 이름 을 말할 때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것만 기 억한다. 집안의 원수를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원수지간의 사연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아르켄홀츠 부친이 고리대금업을 하던 훔 멜에게 1만 7000크라운을 빌렸다. 빚을 갚지 못한 채 파산했고 가족들은 그를 자신들의 파산의 장본인으로 여긴다. 훔멜의 입장은? 자신이 위기에 처한 아르켄홀츠의 부친을


구해 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끔찍한 증오였 다고 말한다. 이제 오랜 빚의 청산을 요구할 셈인가? 아니다. 대신 자신을 위해 오늘 오후에 있 을 <발퀴레> 공연을 보러 가 달라고 부탁 한다. 갑자기 무슨 공연인가?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에서 바라보 이는 저택 주인과 그 딸이 그 공연을 볼 것 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늘 앉는 좌석 옆 자리에 아르켄홀츠를 앉힐 생각이다. 훔멜 은 그 저택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상할 정도 로 관심을 보인다.


그 저택에 누가 사는가? 대령의 가족이 산다. 훔멜과 대령 부인은 과 거에 연인 사이였다. 대령의 딸은 사실 훔멜 의 딸이다. 공연엔 왜 가라고 하나? 훔멜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르켄홀츠 가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다며 딸과 아르켄 홀츠를 맺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가는가? 때마침 그들 앞을 지나가던 대령의 딸을 보 고 아르켄홀츠는 한눈에 반한다. 공연을 보 러 가고 대령 부녀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해 ‘유령 만찬회’에 초대받는다.


‘유령 만찬회’가 뭔가? 20년째 계속되는 모임이다. 대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모두 유령처럼 보여 이 집 하인 이 그렇게 부른다. 늘 똑같은 사람들끼리 모 여 똑같은 이야기만 나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제목이 유령소나타인가? 이 작품은 ‘유령’과 ‘소나타’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극작술을 사용한다. ‘유령’은 작품의 주제와 인물, 행동, 분위기, 더 나아가 인간 과 삶의 본질에 대한 작가 특유의 비전을 상 징한다. ‘소나타’는 무엇인가? 형식과 구조를 관통하는 상징체계다. 이 작


품은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로 구성되었다. 훔멜과 아르켄홀츠가 만나는 1막이 제시부, 훔멜과 만찬회에 모인 인물들의 갈등이 드 러나는 2막이 발전부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3막이 가진 특성 때문에 이 극은 소나타 형 식으로 이해된다. 3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1막과 2막은 서사 연속성을 가지며 극적 내 밀성을 유지한다. 3막은 별개 에피소드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이 극은 차라리 2막에서 끝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을 정도다. 하 지만 이 극을 소나타 형식으로 보고 3막을 재현부로 해석하면 전막과 3막 사이의 부조 화와 파격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3막은 무엇의 재현인가? 삶과 기억의 재현이다. 3막이 재현하는 대상 은 삶의 본질을 상징한다. 제시와 발전, 그 리고 코다로 치닫는, 유전하는 모든 삶의 재 현이다. 스트린드베리는 여기서 삶의 윤회 를 보여 준다. 3막 배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불상으로 그런 심증을 굳힐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가 인식한 삶의 법칙이 무엇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은 열반이나 구원으 로 묘사된다. 죽음이 잔혹한 삶의 세계에서 희망과 동의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스트 린드베리는 이러한 모순이 삶의 본질이자 자신이 경험한 악몽의 구체적 이미지라고 여겼다.


죽음이 희망이라면 너무 잔혹한 것 아닌가? 등장 인물들은 희망을 잃은 뒤 점점 시들어 간다. 희망 없이 산다는 건 암흑 속을 헤쳐 나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스트린드베리 가 그려 내는 삶은 잔혹하기만 하다. 연극사 에서 잔혹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 은 아르토가 아니라 스트린드베리다. 스트린드베리는 누구인가? 문학사와 연극사에 기록된 위대한 극작가 다. 테네시 윌리엄스와 막심 고리키, 존 오스 본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유진 오닐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스트린드베리를 현대 극 작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말했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 다양한 분야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회화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의 표현주의 회 화는 오늘날까지 걸작으로서 남아 있다. 극 작에서는 인티마 극장 설립 후 선보인 실내 극에서 자신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 는 관객을 압도하는 스펙터클 대신 ‘글로 쓴 말을 오로지 연기자를 통해 묘사’하려 했다. 인티마 극장은 왜 만들었는가? 자기 작품만을 위한 전용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극장의 그릇된 관행과 시스템에 회의를 느꼈다. 아우구스트 팔크의 도움으 로 1907년 스톡홀름에 인티마 극장을 개관 할 수 있었다.


인티마는 뭐가 달랐는가? 극장 내 알코올 반입 금지, 일요일 공연 휴 무, 인터미션 없는 짧은 공연, 관행적인 커튼 콜 폐지, 160석 정도의 객석 규모, 프롬프터 와 오케스트라 피트 철폐, 박스오피스와 로 비에서 공연 대본 판매, 여름 시즌 공연 활성 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비정상적으로 작 은 무대와 적은 객석이 어우러져 친밀한 공 간이 만들어졌다. 스트린드베리의 말년은 어땠나? 1911년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폐렴을 앓다가 간신히 해를 넘겨 1912년 3월 14일 만 63세로 생을 마쳤다. <아버지>가 뉴욕 버클리 극 장에서 초연되어 그의 명성이 막 미국에 소


개되던 무렵이었다. 사인은 위장병으로 알 려져 있지만 전문가들은 그것이 암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조태준이다. 배재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다.


삶의 본질로 직진하는 연극 1막과 2막의 서사와 내밀성은 3막이 열리면서 사라진다. 전혀 다른 이야기, 그러나 삶의 보편성, 윤회가 시작된다. 잔혹한 삶의 세계에서 구원의 희망은? 죽음이다.

연극 ‹유령소나타›, 잉마르 베리만 연출, 스웨덴 말뫼 시티 극장, 1954


유령소나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지음 조태준 옮김 2014년 10월 1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 190쪽 16,500원


작품 속으로

유령소나타


나오는 사람들

노인, 훔멜 국장 학생, 아르켄홀츠 우유 배달 소녀, 환영 관리인의 처 망자, 영사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 망자와 관리인의 처 사이에서 난 딸 대령 미라, 대령의 처 소녀, 미라와 노인 사이에서 난 딸 기품 있는 신사, 스칸스보르그 남작,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 의 약혼자 요한손, 훔멜의 하인 뱅트손, 대령의 시종 약혼녀, 한때 훔멜과 내연 관계였으나 지금은 백발의 노파 가 되어 있다. 요리사


제1막

현대식 주택의 1층과 계단. 길가의 한쪽 모퉁이를 이루고 있는 이 집의 일부가 보인다. 1층에는 원형의 방이 있고 2층 에는 깃대가 세워진 발코니가 있다. 블라인드를 올리면 원형의 방 창문을 통해 젊은 여인의 흰 색 대리석 조상이 보이고, 이 조상을 둘러싼 종려나무가 햇 살을 받아 반짝인다. 왼쪽 창문에 화분(花盆)에 담긴 파란 색, 흰색, 분홍색 히아신스가 보인다. 2층 발코니 난간에는 푸른색 침대 커버와 흰색 베갯잇 두 장 이 널려 있다. 그 왼쪽 창문 내부로 마치 빈소에서나 볼 수 있는 흰색 천들이 둘러쳐져 있다. 일요일 아침. 날씨가 화창하다. 이 집 정면에 초록색 벤치가 하나 놓여 있다. 오른쪽 무대 전면에는 분수(噴水)가, 왼쪽엔 기둥 모양의 광고판이 있다. 무대 안쪽 왼편에 이 집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하얀 대리석 층계참이 어렴풋이 보이고, 층계참에는 마호가니와 구리로 된 난간이 있다.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보도 양편에 나무로 된 월계수 화분들이 놓여 있다.


원형의 방 역시 원리적으로 무대 안쪽을 가로지르는 길가와 마주하고 있다. 1층 현관문 왼쪽 창문에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안에서 비 쳐 볼 수 있는 거울이 달려 있다. 막이 오르면 저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온다.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으며,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미동 도 하지 않고 계단에 서 있다. 관리인의 처가 현관 입구를 쓸고 나서 문 장식을 닦고 월계 수에 물을 준다. 광고판 근처,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다. 머 리와 수염은 하얗고 안경을 썼다. 길모퉁이에서 갑자기 우유 배달 소녀가 나타난다. 우유병 들이 담긴 철제 바구니를 들고 있다. 여름옷 차림에다, 갈색 구두에 검정 양말을 신었으며 흰색 베레모를 썼다. 모자를 벗어 분수대에 걸어 놓고 이마의 땀을 씻어 내더니, 분수대 에 걸려 있는 컵에 물을 받아 한 모금 들이킨 다음 손을 씻 고, 물을 거울 삼아 머리를 매만진다. 증기선에서 고동 소리가 들린다. 근처 교회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오르간 소리가 이따금씩 정적을 깬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우유 배달 소녀가 몸단장을 막 끝낼 즈음, 왼쪽에서 학생이 들어온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까칠하고 잠을 못 잔 행색이다. 학생이 곧장 분수대로 간다. 사이.

학생

컵 좀 주시겠어요? (우유 배달 소녀, 컵을 자기 쪽으 로 끌어당긴다.) 다 쓴 거 아니었어요?

(우유 배달 소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노인

(혼잣말로) 저 사람 도대체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야? 내 눈엔 아무도 안 보이는데. 돌았나? (크게 놀란 표 정으로 그들을 계속 주시한다.)

학생

(우유 배달 소녀에게) 왜 날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거죠? 제 몰골이 좀 험악한가요? 하긴, 간밤에 한숨 도 못 잤거든요. 물론 그쪽은 나를 어디서 밤새 실컷 놀다 온 사람으로 여기실지도 모르죠…. (소녀의 태 도에 변화가 없다.) 술을 마신 것 같아요? 술 냄새가 나나요? (소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알아요, 면도도 제대로 못했으니…. 물 좀 주시겠어요, 아가씨? 뭐 공짜로 얻어먹겠다는 건 아니에요! (침묵) 아, 설명 을 해 드려야겠구나. 지난밤에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환자들을 돌보느라 밤을 꼬박 새웠지 뭐예


요. 정말이에요, 어제저녁에 집 한 채가 무너졌거든 요…. 난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구요…. 아, 이제 이해가 가는 모양이네. (소녀, 컵을 헹궈 그에 게 물을 떠 준다.) 고마워요. (소녀는 꼼짝하지 않는 다. 학생, 천천히)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침묵) 제 얼굴 좀 보세요. 눈이 벌겋게 충혈됐죠? 그 런데 전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시체들을 나르고 상처 를 만져서 함부로 손을 댔다간 감염될지도 모르거든 요. 그러니 제 손수건을 꺼내 눈을 좀 닦아 주시겠어 요? 물에 적셔서 말이에요. 그건 깨끗하거든요. 괜찮 겠죠? 착한 사마리아 여인이 되어 주시겠어요? (소 녀,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시킨 대로 해 준다.) 고맙 습니다. (그가 지갑을 꺼내자 소녀가 거절하는 몸짓 을 한다.) 미안해요. 제가 경솔하게 굴었네요. 잠을 못 자서 그만…. 노인

(학생에게 말을 건다.) 실례지만 잠시 얘기 좀 해도 될까요? 듣자 하니 학생이 어젯밤 사고 현장에 있었 다고 한 거 같은데…. 내 방금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었거든….

학생

그게 벌써 신문에 났습니까?

노인

그럼. 죄다 났어요. 학생 사진까지 말이야. 그런데


정작 그 훌륭한 학생의 이름을 몰라 안타까워하고들 있어. 학생

(신문을 본다.) 그래요? 예, 바로 저네요! 그것참!

노인

조금 전엔 누구랑 얘기를 한 거요?

학생

못 보셨나요?

(침묵)

노인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학생 이름을 물어봐도 되

학생

왜 그러시죠? 전 제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별로

겠소?

좋아하지 않아요. 칭찬할 게 있으면 또 당연히 못마 땅한 점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요즘 보면 사람을 함 부로 비하하는 기술이 하도 발달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전 보상 같은 건 바라지 않거든요. 노인

학생은 꽤 잘사는 모양이군.

학생

아니요. 정반대예요. 아주 가난합니다.

노인

그건 그렇고 학생, 내 학생 목소리를 듣자 하니 왠지 낯설지가 않군그래. 내 어렸을 적 친구가 하나 있었 는데, 그 친구는 ‘창문’이라는 발음을 제대로 못했었 지. 그래서 늘 ‘촹문’이라 발음하곤 했었는데. 내 평


생 그런 말투를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1) 그 친 구와 학생을 빼고는 말이야…. 혹시 도매업을 하던 아르켄홀츠 씨와 무슨 관계가 있소? 학생

제 아버님이신데요.

노인

사람 운명이란 게 참 묘하구만. 그러니까 내가 학생 을 처음 본 건 학생이 갓난아기 때였지. 학생 집안이 몹시 어려울 때였어.

학생

맞아요. 제가 태어났을 때 저희 집 가세가 한창 기울 어 가고 있었다더군요.

노인

그랬지.

학생

저, 어르신네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노인

난 훔멜이라고 하오. 훔멜 국장.

1) 원문은 ‘som inte kunde säga fönster, utan alltid sa funster’로, 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창문을 ‘촹문’이라고 발음하던 사람이 있었다” 정도가 된다. 즉, 노인은 창문을 의미하는 ‘fönster’와 그것의 왜곡된 발음인 ‘funster’의 차이 를 빌려 학생의 특이한 말투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아다모프의 불역본에서는 역시 창문이라는 뜻의 ‘fenêtre’와 그것의 그릇된 발음인 ‘feunaitre’로 번역하고 있는데, ‘feu’(‘불’이라는 뜻)와 ‘naitre’(‘태어나 다’라는 뜻)의 의미적 파생 관계가 더해진 점이 특이하다. 한편 마이클 메이 어의 영역본에서는 원문과 거리가 먼 ‘absinthe(술의 일종)’와 그것의 말더 듬이식 표현인 ‘ab-absinthe’를 도입하고 있는데, 이보다는 월터 길버트 존 슨(Walter Gilbert Johnson)의 또 다른 영역본(Univ. of Washington Press, 1973)에 나오는 ‘window’와 ‘wendow’가 훨씬 적절해 보인다.


학생

그럼 노인장께서 바로 그…? 그러고 보니 기억이….

노인

집에서 간혹 내 이름을 들어 본 일이 있소?

학생

네.

노인

그렇다면 가족들이 내 이름을 거론할 때 모종의 증 오심을 갖고 있었겠구만, 안 그렇소? (학생, 잠자코 있다.) 그래. 상상이 가는군. 아마 내가 아버지를 파 산시킨 장본인이라고 떠들었을 거요. 그렇지? 어리 석게도 투기를 하다 망한 사람들은 모두 남을 속이 지 못해 결국 그 사람 때문에 망한 거라고 생각한단 말씀이야. (침묵) 사실은 자네 부친이 내게서 1만 7 천 크라운을 빼앗아 간 거야. 그때 그건 내 전 재산이 었지.

학생

참 이상하군요. 같은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 있죠!

노인

학생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나?

학생

그럼 제가 어느 쪽을 믿어야 합니까? 아버지는 거짓 말을 하신 적이 없어요.

노인

그야 물론이지. 거짓말을 하는 아버지는 없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아버지야…. 그리고….

학생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노인

난 학생 부친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아무 조건 없이


구해 주었소. 그런데 내게 돌아온 대가는 끔찍한 증 오심이었어. 게다가 학생의 가족들이 날 파렴치한 인간으로 취급하도록 만들었지. 학생

도움을 주시면서 아마도 불필요한 모욕감을 느끼게 하셨던 모양이죠. 그래서 은혜를 저버린 것인지도 모르구요.

노인

남의 도움이란 건 으레 굴욕적인 거요.

학생

제게 뭘 원하시죠?

노인

뒤늦게 빚을 갚으라는 건 아니오. 다만 나를 위해 몇 가지 자그마한 수고를 해 준다면 나로서는 충분히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소. 보다시피 난 불구요. 내가 이렇게 된 걸 가지고 혹자는 내 잘못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내 부모 탓이라고도 하지. 하지 만 나 개인적으로는 삶이 가져다준 결과라고 보고 싶소. 온통 함정투성이인 인생살이 말이오. 인생의 어느 한 고비를 넘기다 보면 곧바로 다른 구렁텅이 에 빠지기 마련이지. 그런 게 바로 우리네 인생 아니 겠소. 어쨌든 난 계단을 오를 수가 없어요. 대문 초 인종도 못 눌러요. 그래 내 학생한테 말하는 거요. “날 좀 도와주시오!”

학생

제가 뭘 어떻게 해 드리면 되죠?


노인

우선 이 휠체어를 밀어 주시오. 저기 있는 저 공연 안 내 포스터를 좀 봐야겠어. 오늘 저녁 극장에서 뭘 하 는지 알고 싶거든.

학생 노인

(휠체어를 밀면서) 시중드는 사람은 없습니까? 있지. 하지만 심부름을 갔어요. 곧 돌아올 거요…. 학생은 의학을 전공하오?

학생

아니요.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나중에 뭘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구요.

노인

오호! 수학은 잘하시오?

학생

예. 웬만큼요.

노인

잘됐군. 학생은 직장을 구하고 싶겠구만?

학생

물론입니다.

노인

좋아요. (광고를 읽으면서) 오늘 오후 공연엔 <발 퀴레>를 하는군. 잘됐어. 대령과 그의 딸이 어김없 이 극장에 가겠군. 언제나처럼 6열 첫 좌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을 테고 말이야. 내 학생을 그들 옆자리에 앉게 해 줘야겠군…. 자, 어서 학생은 저 공중전화로 가서 자리를 예약해요. 6열 82번으로.

학생 노인

저보고 대낮에 오페라 극장엘 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내 말대로만 해요.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 난 학생이 행복해지고 또 부자에다가 사람들에게 존


경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소. 지난밤 용감하게 나서서 소중한 목숨들을 구해 줬으니 내일이면 학생 은 유명해질 거요. 이름값도 톡톡히 하게 될 거고. 학생

(전화 있는 곳으로 가면서) 이거 참 이상한 모험이로 군!

노인

학생, 도박할 줄 아시오?

학생

네, 불행히도요.

노인

우리 그걸 행운으로 만들어 봅시다. 어서 가서 전화 해요. (노인,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검은 상복을 입 은 여인이 길가로 나와 관리인의 아내와 얘기를 나 눈다. 노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그러나 객석 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학생이 돌아온다.) 예약했소?

학생

했습니다.

노인

저 집을 눈여겨본 적 있소?

학생

예, 수도 없이요. 어제저녁에도 저 집 앞을 지나간걸 요.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쳐 아름답게 빛날 때였죠. 빛이 집 안을 지배하는 것 같았어요. 그 광경을 보고 같이 있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고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 둘, 그리고 1년에 2만 크라운 정 도의 수입을 갖고 저 집 5층에 산다는 생각을 해 보 게’라고 말이에요.


노인

학생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 나? 그래, 그래! 나도 저 집을 무척 좋아한다오.

학생

부동산에도 손을 대고 계십니까?

노인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학생이 생각하는 그 런 방식은 아니야.

학생 노인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을 잘 아시나요? 전부 다. 내 나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아이들과 그들의 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도 말이 야. 사람이란 이렇게 저렇게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 거든. 내 나이 이제 막 팔십 고개를 넘어섰소. 이쯤 되니까 날 아는 사람은 얼마 남질 않더군. 난 사람들 운명에 흥미가 많아요. (원형의 방에 블라인드가 올 라가고 그 안으로 평상복 차림의 대령이 보인다. 창 가에 걸린 온도계를 보더니 방으로 되돌아가 대리석 상 앞에 선다.) 잘 보게. 저 양반이 대령이라는 사람 이야. 이따가 학생 옆에 앉게 될 위인이지.

학생

저분이…. 대령이라구요? 전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 도 모르겠어요. 마치 무슨 동화를 듣고 있는 것 같아 요.

노인

내 인생 자체가 한 권의 동화라고 할 수 있지. 각각의 얘기가 엄연히 구별되지만 그 모두가 한 가닥 실에


꿰어져 있고 주제 또한 되풀이되는 그런 동화 말이 오. 학생

방 안에 있는 대리석상은 누구죠?

노인

그야 물론 그의 아내지.

학생

부인이 대단히 고상한 분이었나 보죠? 저렇게까지 사랑받는 걸 보면….

노인

어…. 그, 그랬지.

학생

그 얘기 좀 해 주세요.

노인

내 말 잘 들어요, 젊은이.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이 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겠소! 내 이런 얘길 한다면 학생은 아마 날 미쳤다고 할 거요. 이를테면, 저 부인 은 남편을 버리고 도망을 갔었고, 남편은 그런 그녀 를 붙잡아 때리고 부인이 다시 그에게 돌아가 둘이 재혼했다는 사실. 게다가 지금은 그녀가 미라처럼 방 안에 들어앉아 자신의 흉상을 숭배하고 있다 는….

학생 노인

이해가 안 되는군요. 물론 그럴 거요. 자, 저기 히아신스로 장식한 창문이 보일 거요. 그 방엔 대령의 딸이 살고 있지. 지금은 말을 타러 가고 없는데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요.

학생

그럼 저기 관리인과 얘기하고 있는 저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은 누구죠? 노인

그러니까, 그게 좀 복잡하오. 저 위 흰색 시트를 쳐 놓은 방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고인(故人)과 관계 가 있지.2)

학생 노인

그건 또 누구죠? 그냥 보통 사람이지. 학생이나 나와 똑같은…. 뭐 특 이한 점이 있다면, 그건 그에게 허영심이 있었다는 거요. 학생이 만약 일요일에 태어난 주일의 아이라 면, 곧 고인이 문밖에 나와 반기(半旗)로 내걸린 영 사의 상징 깃발을 바라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는 바로 외교 영사였거든. 왕가나 귀족의 장식 모 자, 또는 새의 깃털과 사자가 그려진 문장(紋章), 그 리고 화려한 휘장 따위를 몹시도 좋아했지.

학생

방금 주일의 아이라고 하셨나요? 바로 제가 주일에 태어났는데요.

노인

아니, 학생이…! 오, 어쩐지…. 내 학생 눈빛을 보니 예사롭지 않더군…. 그렇다면 학생은 다른 사람들 이 못 보는 것도 볼 수 있겠군. 그런 사실은 알고 있

2) 스웨덴의 오랜 관습에 의하면, 아침 시간에 죽은 자가 기거하던 방 창문을 흰색 시트로 가려 놓는 일은 조기(弔旗)와 같은 애도의 의미를 지닌다.


었나? 학생

남들이 뭘 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가끔씩…. 아참, 이런 건 얘기하는 게 아닌데.

노인

난 그런 걸 믿어요! 그러니 나한테는 얘기해도 괜찮 아. 왜냐하면 난…. 충분히 이해하니까.

학생

이를테면 어제 같은 경우인데…. 전 갑자기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길에 들어섰던 거예요. 그리 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 었죠. 그때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룻바닥이 쫙쫙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죠. 그런데 하필 그때 어린애 하나가 벽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 어요. 그래서 얼른 달려가 그 아이를 낚아챘죠. 집이 내려앉은 건 그 직후였구요. 그리고 전 구조됐지요. 그런데…. 전 분명히 두 팔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품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노인

옳거니, 그랬구만…. 내가 생각한 대로야…. 어디 얘기 좀 해 주겠소. 아까 분수대 앞에서 이상한 몸짓 을 하던데, 혼자서 뭘 중얼거린 거요?

학생

우유 배달 소녀와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못 보셨나 요?


노인

(공포에 질려) 우유 배달 소녀라고?

학생

예. 맞아요. 제게 컵을 건네준 소녀 말이에요.

노인

그게 정말이오? 그랬단 말이지? 흐음, 아마 내 눈에 는 안 보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지.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창가에 앉아 창 거울을 들여다본다.) 창가에 있는 저 노파를 보게! 보이지? 저 사람은 한때 내 약혼녀였 소.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 때였으니까 지금으로부 터 60년 전 일이지. 놀라지 말아요. 저 여잔 날 알아 보지 못한다오. 매일 서로 보지만 내겐 더 이상 아무 런 느낌도 없어. 그래도 한땐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던 사이였는데, 영원히!

학생

어르신네도 참, 옛날엔 좀 순진하셨던 모양이네요. 우린 요즘 여자애들에게 절대로 그런 얘기를 하지 않거든요.

노인

용서하시오, 젊은 양반. 우린 그런 걸 몰랐어요! 학 생이 보기엔 어떻소, 저 할망구가 한창때는 젊고 아 름다웠을 거라고 생각되시오?

학생

글쎄요. 잘 보이질 않는군요. 하지만 왠지 매력이 있 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눈동자 빛깔이 보이 질 않네요.


(건물 관리인의 아내가 바구니를 들고 나와 현관문 앞에다 잘게 자른 전나무 가지들을 뿌린다.3))

노인

관리인의 처로구만…!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은 바 로 저 여자와 고인 사이에서 난 딸이에요. 그런 연유 로 저 여자 남편이 관리인 자리를 얻게 된 거고 말이 야. 상복을 입은 여인에겐 구혼자가 있어요. 그런데 그 구혼자라는 사람은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게 될 귀족이지. 현재 아내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데, 그 아내 되는 여자도 더 이상 같이 살 생각이 없는지 하 루라도 빨리 갈라서려고 돌로 지은 근사한 저택을 통째로 남편에게 넘겨준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그 귀족은 고인의 사위가 되는 셈이지. 저 위 발코니에 고인이 쓰던 침구를 널어놓은 게 보일 거요. 복잡하 지 않소?

학생 노인

정말 복잡하군요. 그래요. 안팎으로 참 복잡한 관계야. 겉으로 보기엔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말씀이야.

3) 스웨덴 전통에 의하면 이 행위 역시 고인을 애도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

20


학생 노인

고인은 어떤 분이었죠? 그건 아까 물었잖소. 내가 대답해 줬을 텐데. 저 집 반대편으로 돌아가 보면 그가 생전에 마음 내킬 때 마다 도와주곤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거요.

학생

인정이 많았던 분인가 보죠?

노인

그래요….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

항상 그런 게 아니었구요?

노인

그럼…. 사람이란 으레 그런 거지! 자, 내 의자 좀 밀 어 주겠소. 저기 햇빛이 드는 곳으로. 꽤 춥구만. 사 람이 늙어서 움직이질 않으면 피가 굳는단 말씀이 야. 이제 죽을 날도 멀지 않은 것 같군. 그전에 할 일 을 미리 해 둬야 할 텐데. 내 손 좀 잡아 줘요. 손이 어찌나 차가운지.

학생

(손을 잡으며) 정말 차갑네요.

(학생,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선다.)

노인

가지 말아요, 젊은이. 난 지쳤어. 그리고 외로운 몸 이라오. 하지만 항상 이랬던 건 아니오. 내 지나온 삶은 한없이 길고 고달팠지…. 한없이…. 많은 사람 을 괴롭혔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날 괴롭혔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다 피장파장이겠지만. 죽기 전에 마지 막으로 학생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군…. 어차피 학생과 내 운명이라는 게 학생의 부친으로 인해…. 또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로 해서 맺어진 인연이니까. 학생

이 손은 좀 놓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 원기를 빼앗 아 가시는 것 같군요. 제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아요. 제게 뭘 바라시죠?

노인

(손을 놓아주며) 조금만 참아요. 다 알게 되고, 이해

학생

대령의 따님입니까?

노인

그래요. 그의 딸이지. 잘 보시오! 저런 걸작품을 본

학생

마치 저 방에 있는 대리석상 같습니다.

노인

물론이지. 저 아이의 어미니까.

학생

어르신네 말씀대로예요. 전 일찍이 저런 창조물을

하게 될 테니까. 저기 아가씨가 오는군….

일이 있소?

본 적이 없습니다. 저 여자와 가정을 이루게 될 남자 는 정말 행복할 거예요. 노인

학생도 여자를 볼 줄 아는구만. 그건 아무나 볼 수 있 는 게 아닌데 말씀이야.

(영국식 승마복을 입은 소녀가 무대 왼쪽에서 들어온다. 그


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 다. 문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관리인의 아내에게 두어 마디를 건네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학생, 한 손으로 눈을 가 린다.)

노인

학생, 지금 우는 건가?

학생

희망을 가질 수 없으니 남는 것은 절망뿐이겠죠.

노인

나라면 문과 마음을 다 열어 줄 수가 있지. 학생이 내 뜻을 펼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한다면 말이야. 내게 봉사를 해요. 그러면 얻을 것이오.

학생 노인

일종의 거래인가요? 저보고 영혼을 팔라는 겁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팔 필요 없어요. 이봐요, 젊은이, 난 평생 뺏기만 해 왔어. 그러나 이젠 나도 주고 싶은 거야! 주고 싶다고! 그런데 그 누구도 받으려 하질 않 는 거야. 난 부자라고. 아주 큰 부자. 한데 난 상속자 가 없어요. 그러니 난 죽을 때가 다 되어서도 아무 쓸 모 없는 인간이 되고 만 거요…. 내 아들이 되어 주 시오, 젊은이. 내 상속자가 되어 달란 말이오. 그리 고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인생을 즐기시오. 멀리서나 마 학생이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 시오.


학생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노인

우선 극장에 가서 <발퀴레>를 보는 거요.

학생

그건 이미 결정된 거구요. 그다음에는요?

노인

오늘 저녁, 저기 저 원형의 방으로 들어가는 거요.

학생

거길 어떻게 들어가죠?

노인

<발퀴레>의 덕을 보는 거지.

학생

노인장께선 왜 저를 선택하신 거죠? 전부터 절 알고 계셨나요?

노인

그야 물론이지. 이미 오래전부터 학생을 눈여겨봐 왔소. 아, 저길 좀 봐요. 하녀가 영사를 기리기 위해 반기를 게양하고 있구만…. 그리고 이젠 침구를 널 어놓는군…. 저기 푸른색 이불이 보이지? 저건 원래 두 사람이 함께 덮는 건데 지금은 한 사람만 덮고 잔 다오. (옷을 갈아입은 소녀가 창문가에 나타나 히아 신스에 물을 준다.) 저기 내 귀여운 딸아이가 나왔구 만. 저 애를 좀 봐요. 어서 좀 보라고! 꽃들에게 얘기 를 하고 있어. 어때요, 저 아이 자체가 푸른 히아신스 같지 않나? 히아신스에게 물을 주고 있구만. 하긴 저 보다 순수한 물은 없지. 꽃들은 저 물을 받아 그걸 색 깔로, 향기로 바꾸어 놓거든…. 이번엔 대령이 신문 을 들고 나타나셨군. 딸애에게 어젯밤 사고 기사를


들려주고 있는 거야. 오호, 학생 얼굴을 가리키고 있 어. 저 애도 무관심하지는 않은데…. 학생에 관한 글 을 다 읽었나 보군…. 아니, 이거 갑자기 날이 어두 워지는구만. 비가 한바탕 쏟아질 모양인데, 요한손 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거 나 혼자 큰일인걸! (구 름이 잔뜩 몰려오고 컴컴해진다. 노파가 창문을 닫 는다.) 내 약혼녀가 창문을 닫는군…. 저 여자 나이 가 올해 일흔아홉이오…. 창 거울은 저 여자가 사용 하는 유일한 거울이지. 저 여잔 거울을 통해 제 얼굴 을 비춰 보는 게 아니라, 창문 안팎의 세상을 보고 있 을 뿐이라오. 그러나 세상 쪽에서 바라보는 저 여자 의 모습은 권태, 바로 그것이지. 아마 저 여잔 그런 생각조차 못할 거요…. 쯧쯧쯧, 자그마하고 예쁜 우 리 할망구.

(이때 망자가 흰색 시트를 감고서 문밖으로 나온다.)

학생

맙소사, 저게 뭐야?

노인

뭘 보고 그러시오?

학생

저기 망자가 안 보이세요? 저 문간에 말이에요.

노인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소. 자세히 얘기 좀 해 보시오. 학생

지금 막 길가로 나왔어요. (침묵) 고개를 들어 깃발 을 쳐다보는군요.

노인

그래 내 뭐랬소? 다음엔 틀림없이 돈을 세어 보고 방 문객 명함을 읽겠지…. 거기 없는 자에겐 불행이 있 을지어다.

학생

이젠 길모퉁이로 돌아가는데요.

노인

계단 주변에 모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헤아리러 가는 거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일종의 훈장 같 은 거지! ‘죽은 자여,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가나니….’ 아주 근사한 일이지. 하지만 나한테는 축 복의 인사를 받지 못할 거야. 우리끼리 얘기지만 저 영사라는 인간은 지독한 악당이었소.

학생

그러나 자비로운.

노인

그래요. 자비로운 악당이지. 자신의 성대한 장례식 만 생각하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고는 국 가를 속여 3만 크라운을 사취한 뻔뻔한 인물이오. 그 렇게 죽고 난 뒤 이제 와서 자기 딸이 가정을 파괴하 고 돈 많은 남의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니까 자신이 남긴 유언에 대해 딴생각을 하게 되는 거야…. 저 악 당은 지금 우리 얘기를 다 듣고 있어. 들을 테면 들으


라지. 아, 요한손이 오는구만. (요한손, 왼쪽에서 들 어온다.) 어떻게 됐나! (요한손, 보고를 하지만 객석 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집에 없다고? 응? 이런 멍청 한 친구를 봤나! 그럼 전보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 래서…. 오늘 저녁 6시에? 좋아! 특종기사로 말이지? 그래, 신상에 관한 부분은 모두 내는 거야. 아르켄홀 츠, 대학생, 생년월일…. 부모…. 그 정도면 됐어! 비 가 올 것 같구만…. 뭐라고? 그래, 그래. 그 친구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강제로 하는 수밖에…. 저기 귀족 나리께서 오시는구만. 요한손, 날 저쪽으로 데려가 주게. 가난한 사람들 얘기를 듣 고 싶구만. 그리고 우리 아르켄홀츠 씨, 당신은 여기 서 잠시 기다려 주시오. 알겠지? 서둘러, 어서!

(요한손, 휠체어를 밀면서 건물 모퉁이로 돌아간다. 학생, 화분의 흙을 만지고 있는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귀 족과 상복을 입은 여인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간다.)

귀족

그러니 이제 달리 어찌하면 좋겠소? 기다리는 수밖 에.

상복의 여인 전 못 기다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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