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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꿔는 누구인가? 백성의 소리가 이름의 뜻이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황제는 용의자를 잡아 심문한다. 그는 자신을 부정한다. 고문이 시작된다. 현대인은 바라만 본다. 폭도가 닥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중국의 장벽›, 알프레트 메슈니크 연출, 아군툼 박물관 내 극장, 2012

인텔리겐치아 2358호, 2014년 12월 15일 발행

김창화가 옮긴 막스 프리슈의 ≪중국의 장벽≫

현대인

그만하십시오, 각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나폴레옹 …유럽의 주인은 지금 누군가? 현대인

각하…!

나폴레옹 시민이여, 그대는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요? 현대인

각하…. 원자는 쪼개질 수 있습니 다.

나폴레옹 그게 무슨 소리요? 현대인

대홍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 하가 명령을 내리신다면. 다시 말 씀드리면, 이제 우리는 인간이 생 존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선택 의 갈림길에 와 있습니다. 각하, 누가 이 선택을 해야 합니까? 인간 스스로 결정해야 하나요? 아니면 당신이?

나폴레옹 당신은 민주당인가? －«중국의 장벽(Die Chinesische Mauer)», 막스 프리 슈(Max Frisch) 지음, 김창화 옮김, 21～22쪽

가상현실인가? 요즘 말로 표현하면 그렇다. 다른 시대의 역 사 인물들이 만나 다른 관점과 시각을 표현 한다. ‘경계를 넘는’ 극작술이다. 누가 등장하는가? 나폴레옹과 진시황제, 빌라도, 브루투스, 펠 리페 왕이다. 현재를 대표하는 인물은 ‘현대 인’이다.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진시황제가 만리장성 축조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이들을 초대한다. 축제가 벌어지는 한편 에선 황제를 반대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 다. 그는 무력으로 목소리를 억압하고 있다.

무력이 목소리를 막아 내는가? 유일한 반대자가 남는다. ‘백성의 목소리’라 는 뜻의 ‘민꿔(民口)’다. 그러나 그를 본 사람 은 아무도 없다. 곧 그마저 체포되었다는 소 식이 전해진다. 심문이 시작된다. ‘민꿔’는 누구인가? 정체를 밝히기 위한 어떤 질문에도 그는 대 답하지 않는다. ‘민꿔가 맞느냐’는 질문에는 세차게 고개만 젓는다. 그는 벙어리다. 공주 미란과 현대인은 그의 무죄를 알아차린다. 심문의 방향은? 끔찍한 고문이 시작된다. 현대인은 지켜만 본다. 무력하다. 미란은 현대인을 비난한다.

폭도가 궁에 들이닥친다. 그 가운데 벙어리 의 어머니가 있다. 아들이 바로 ‘민꿔’였다고 거짓말한다. 거짓말의 효과는? 벙어리는 순식간에 반역자에서 영웅이 된 다. ‘경계를 넘는 극작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러 세기에 걸친 인물을 동시에 마주치게 함으로써 희극성을 확보한다. 작가는 과거 와 현재가 만나면 뭔가 숨겨진 것, 즉 비인간 적 지배 방식이 폭로되리라 기대했다.

‘비인간적 지배 방식’이 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원자폭탄과 수 소폭탄, 곧 대량 살상 무기의 위협이다. 그것이 이 작품의 문제의식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의 시대’의 위협 성, 일인 독재 권력에서 발생되는 인류 공멸 의 위기를 지적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다. 브레히트와 뒤렌마트도 다뤘던 주제 아닌가? 그렇다.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에서, 뒤렌 마트는 ＜물리학자들＞에서 대량 살상 무기 에 의한 인류 멸망을 이야기했다.

프리슈와 그들의 차이는? 브레히트처럼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키되 뒤 렌마트가 사용한 방법, 곧 현재 사건과 인물 로 희극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기법을 취했다. 이 번역본의 원전은 1973년 파리에서 출간한 최종본인가? 그렇다. 초판본은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완성되었고 1946년 취리히에서 초연했다. 최 종본이 나오기까지 세 차례 수정을 거쳤다. 세 차례나 수정한 이유는 뭔가? 원자폭탄과 대량 살상이라는 위협 앞에서 지식인이자 시인인 ‘현대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초판

본에서는 ‘벙어리’가 지식인이었다. 그는 다 가올 ‘위협’을 알고 스스로 진실을 대변할 수 있었다. 최종본에서 현대인은 어떤 모습인가? 독재자와 민중 사이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 긴 하지만 ‘벙어리’가 부당하게 고문당하는 걸 알면서도 소극적으로 행동한다. 지식인 의 비겁함을 보여 준다. 막스 프리슈는 누구인가?

1958년 게오르크 뷔히너상, 1986년 노이슈타 트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한 스위스 극작가 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11년 5월 취리히 부근 빌더무트에서 태어 났다. 1931년부터 3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하 면서 스위스와 독일에서 발행하는 여러 잡 지에 여행기, 문학비평, 수필을 기고했다.

1936년 다시 대학에 들어가 건축학을 전공했 다. 1959년 아내와 이혼한 뒤로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91년, 80세에 죽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창화다. 상명대학교 연극학과 교수다.

민꿔는 누구인가? 백성의 소리가 이름의 뜻이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황제는 용의자를 잡아 심문한다. 그는 자신을 부정한다. 고문이 시작된다. 현대인은 바라만 본다. 폭도가 닥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중국의 장벽›, 알프레트 메슈니크 연출, 아군툼 박물관 내 극장, 2012

중국의 장벽 막스 프리슈 지음 김창화 옮김 2014년 10월 30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 198쪽 18,000원

작품 속으로

중국의 장벽

나오는 사람들

현대인 진시황제: 중국의 황제 미란: 황제의 딸 우창: 중국의 왕자 올란: 중국의 한 어머니 벙어리: 올란의 아들 씨우: 시녀 따힝옌 1, 2, 3: 의전관 푸추: 중국의 망나니 관리 급사 환관 신문기자

가면 쓴 인물들 로미오와 줄리엣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콜럼버스

센 강의 이름 없는 소녀 본디오 빌라도 돈 후안 테노리오 브루투스 스페인의 펠리페 왕 클레오파트라 에밀 졸라 폭군 이반 앙리 뒤낭 거지 연미복을 입은 사나이 모닝코트를 입은 사나이

서극

중국 만리장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중간막 앞으로 현대인 이 등장한다.

현대인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 인류의 가장

거대한 건축물인 만리장성을 보고 계십니다. 이 성 벽의 길이는－백과사전에 따를 것 같으면－약 1만 리가 된다고 하는데, 예를 들자면 베를린과 뉴욕을 잇는 직선거리에 해당하는 길이입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건축물은 현재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 고 합니다. 즉, 이제 와서는 그 장소에 더 이상 서 있 을 효용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에 국가에서 헐어 버 릴 것이라는 거지요. 만리장성이란－중국 사람들은 거대한 성벽이라고도 부릅니다만－본래 북쪽 초원 지대의 야만족인 몽고족을 막기 위한 방벽으로, 적 들의 침략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되풀이되던 시도 중 하나였는데, 여러분께서도 아실 테지만, 오늘날 에는 그 기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는 그 성벽 때문에 시간이 멈추지는 않으니까요. 이

성이 완성된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던 진시황제 통치 때였는데, 그는 오늘 밤 직접 우리 무대에 나타날 것 입니다. 그 밖에 오늘 밤에 일어날 일에 관해서는, 그 어떤 잘못된 기대를 갖지 않으시도록, 여러분에게 이 연극의 등장인물들을 미리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종이쪽지에 적힌 것을 읽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스페인의 펠리페 왕. 중국의 한 공 주인 미란. 본디오 빌라도. 센 강의 이름 없는 소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브루투스. 돈 후안 테노리오. 클레오파트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에밀 졸라, 폭 군 이반, 로엔그린, 에이브러햄 링컨. (어머니와 아 들로 보이는 중국인 두 사람이 나타난다.) 이 밖에도 여러분은 이제 온갖 백성들이며 대신들, 관리들, 하인들, 형리들, 환관들, 그리고 신문기자 등을 보시게 될 겁니다.

(중국인 둘이 허리를 굽혀서 인사한다.)

무슨 일이시죠?

어머니 저는 중국의 어떤 농부의 아내입니다. 올란이라고

하지요. 저는 세계 역사에서 그 어떤 역할도 해 본 적 이 없는 한 어머닙니다. 현대인 [관객을 향해: 지금은 물론 이렇게 말하지만, 이제 곧

우리도 보게 되겠습니다만, 나중에 이 여자는, 분명 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인 역할 을.]1) 어머니 우리는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리시는, 언제나 정의로

우신,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에 살 고 있습니다. 저희는 차우라는 곳에서 왔어요. 1년 동안이나 걸어 왔죠. 홍수를 일곱 번이나 만났고, 군 인들에게 서른 번이나 검문 당했고, 아흔 번이나 길 을 잃었어요. 왜냐하면 길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누 구든 좋으니까 제 발을 좀 보세요! 당신은 성실한 사 람 같은데. 우리는 척 보면 다 알아요, 이렇게 말해 주실 거니까요. 우리가 이미 남경에 도착했다고… 현대인 여기가 남경입니다. 어머니 왕! 너 들었니?

1) [ ]로 표시한 부분은 막스 프리슈가 서사극의 이화(異化) 효과와 마찬가지 로 관객이 연극에 몰입하는 대신 ‘거리감’을 두고 연극을 지켜보게 할 의도 로 다른 대사와 구분한 것이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왕! 우리가 드디어 남경에 왔다. 왕! (그녀는 아들을 얼싸안는다.) 현대인 그런데 왜 우세요? 어머니 1년 동안. 꼬박 1년 동안을…. 현대인 …걸어오셨다고요. 알 것 같군요. 어머니 양쯔 강을 아세요? 현대인 지도에서 봤죠, 물론. 어머니 1년 동안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돌아

보면 아주 멋진 곳이 나오죠. 기름진 곳이에요. 제 말을 믿어도 좋으실 겁니다. 일거리가 많죠. 황제를 위해 수확해야 할 것이 많았어요. 귀리, 기장, 쌀, 담 배, 대나무, 목화, 양귀비. 태풍도 자주 불었고요. 원 숭이와 꿩…. 현대인 그래 그곳에서 오셨군요. 어머니 우리는 거기서 왔어요. 현대인 여기 남경엔 왜 오셨죠? 어머니 왕! 들었니? 남경에 왜 왔냐고 물으셔. 왕! 왜 왔냐

고. 너도 들었어? (아들은 소리 없이 웃는다.) 황제를 보러 왔어요! 하늘의 아들이라 불리시는, 언제나 정

의로우신 진시황제.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이 아니라 고 하더군요. 현대인 뭐가 진실이 아니죠? 어머니 온 나라 안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요. 현대인 어떻게요? 어머니 하늘의 아들이 아니래요. 사람들이…. 얘는 내 아들

이죠. 벙어리예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녜요. 현대인 벙어리예요? 어머니 얘가 벙어리라는 게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

르죠…. 확실히, 그래요, 내 아들은 확실해요!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련한 소리를 지껄여 대는지. 그래서 뭐가 달라지 기라도 하나! 사람들은 벌써 40년 전부터, 세상이 달 라져야 한다고, 좋아져야 한다고, 올바른 세상이 돼 야 한다고 했어요. 평화가 와야 한다고…. 최근 소식 들으셨어요? 현대인 아직 남경에서 그 누구와도 얘기를 나눠 보지 못했

습니다.

(어머니는 현대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민꿔(民口)라고요? 어머니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러요. 백성의 목소리! 하지

만 아무도 그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그가 남긴 격언 들만 알고 있죠. (북소리가 울려온다.) 저들이 또 나 타났군!

(포고문 전달자가 북을 든 병사, 창을 든 병사, 포고문 전달 자가 딛고 올라설 발판을 든 병사와 함께 등장한다.)

포고문 전달자 “최초의 황제이시며, 하늘의 아들이시고, 언

제나 정의로우신 진시황제께서, 우리 제국의 유순한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한다!” (북소리가 울린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 적인 저 초원 지대의 개 같은 오랑캐 놈들을 모두 때려 부쉈다. 백 성들의 피로 만든, 커다란 구덩이 속에, 약속했던 대 로, 초원의 개 같은 오랑캐들은 누워 있다. 그래서 이 제 세상은 우리의 것이다.”

(북소리가 울린다.)

어머니 만세. 만세. 만세.

(포고문 전달자는 현대인을 지켜보면서 기다린다.)

현대인 만세….

(북소리가 울린다.)

포고문 전달자 “제국의 백성들이여! 이 나라엔 아직까지 마

지막 반역자가, 즉 백성의 소리라고 불리는, ‘민꿔’라 는 반역자가 살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 방방곡 곡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를 찾아내어, 그의 머리 통을 창끝에 매달고야 말 것이다! 누구든 그자가 퍼 트리는 말을 입에 담으면, 그자와 똑같은 일을 당하 게 될 것이다. 머리통을 창에 매달 것이다!” (북소리 가 울린다.) 언제나 정의로우신, 하늘의 아들, 최초 의 황제, 진시황제 만세! 어머니 만세. 만세. 만세.

(포고문 전달자는 현대인을 지켜보면서 기다린다.)

현대인 만세.

(포고문 전달자와 중국인 병사 셋은 올 때와 같이 무표정하 고 의무에만 충실한 얼굴로 포고문을 선포할 다른 장소를 찾아 기계적으로 가 버린다.)

어머니 선생님도 들으셨지요? 현대인 민꿔, 백성의 목소리…. 그의 머리를 창끝에 매달 것

이다…. 권력자의 위기라는 냄새가 풍기는군. 모든 것을 정복했지만 아직 진실만은 정복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겠다. 어머니 가자, 내 아들아, 어서! 현대인 아직 물어볼 말이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 몰라요. 가자, 내 아들

아! 네가 벙어리라서 얼마나 다행이니. 신령님들께 고마워해야겠다.

(어머니와 아들은 가 버린다.)

현대인 남경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런데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이것들이 도 대체 무슨 뜻이 있어서 보여 주는 것이냐고 물으시 겠지요. 그리고 [오늘날] 남경은 어디에 있는 것이 냐? 천자라 불리고 항상 정의로운 황제란 [오늘날] 누 구를 가리키는 것이냐? 그리고 만세도 부를 수 없는 가련한 벙어리와 피 묻은 장화의 우창이란 장군은 누구를 말하는 거냐? 바라옵건대, 여러분, 화는 내지 마십시오. 거기에 대한 해답은 없을 겁니다. 일반적 으로 [맹세합니다만!] 누구나 한번쯤 사랑해 봤던 진 실이란, 양면을 지닌 칼날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징 소리)

이제 극이 시작됩니다!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바 로 이 무대입니다.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장벽을 쌓는 시대라는 설정은, 아시겠지만, 이 극이 소극이기 때문이죠.]

(두 번째 징 소리)

저도 이 연극에서 현대인 역을 맡았습니다.

(세 번째 징 소리)

극

무대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오른쪽에 중국식 옥외 계단이 있 고, 왼쪽 전경에는 현대식 팔걸이의자들이 놓여 있다. 축제 분위기의 음악과 보이지 않는 손님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에 (관객이 무대에 익숙해지면) 젊은 연인 한 쌍이 나 타난다. 그들은 모든 관객의 눈에 낯익은 의상을 입고 있다.

1장

여자

벌써 가시려고요?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어요. 지 금 막 당신의 불안한 귀에 스친 소리는, 종달새가 아 니라 밤 꾀꼬리 소리예요. 밤이면 새들은 저기 저 석 류나무에 앉아 노래하죠. 날 믿으세요, 사랑하는 사 람이여. 밤 꾀꼬리 소리였어요.

남자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 소리였어. 서두를 수밖에 없 어. 늦었다간 죽게 될지도 몰라.

여자

나를 믿으세요. 저 빛은 아침 햇살이 아니에요. 그러 니 좀 더 있으세요. 아직 가실 필요가 없어요.

남자

그대가 나를 붙잡아 줄 수만 있다면, 아, 나를 죽게 내버려 둔다면! 그대가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나 기꺼이 여기 머물리라….

여자

누가 와요! 소리가 났어요. 안녕!

남자

안녕!

여자

오, 우린 다시 또 만날 수가 있나요?

(연미복을 입은 급사가 오른쪽에서 나타난다.)

급사

실례지만, 지금 테라스에서는 폴로네즈(polonaise)2) 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급사가 퇴장한다.)

남자

우리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 리고 어떤 시대인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소름이 끼 쳐. 그들은 마치 고물 궤짝에서 뛰쳐나온 것 같아. 그래서 별의별 의상들이 다 등장하고, 그리고 곰팡 이 냄새를 피우지. 그들은 죽은 사람들 같아. 그런데 도 말은 하고, 그리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잖아. 마치 음악이 나오는 시계의 인형들처럼 돌아가고 있 어.

여자

무슨 일이죠?

남자

시간이, 시간이 서 버렸어….

여자

일어서세요, 빨리! 우리 도망가요!

남자

어디로?

(연미복을 입은 급사가 왼쪽에서 나타난다.)

2) 폴로네즈(polonaise): 4분의 3박자 느린 폴란드식 춤곡이다.

급사

실례합니다만 테라스에서는 지금 폴로네즈가 시작 되었습니다. 모두들 기다리고 계세요. (퇴장한다.)

여자 남자

오, 하느님,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 어. 열역학함수란 무슨 소릴까? 원자란 무슨 소리야? 모두들 그런 알 수 없는 소리들을 하고 있어. 열로 인 한 이 세계의 멸망이란 무슨 뜻이지? 모두가 그런 모 를 소리들이야. 난 시간이, 시간이 멈췄다는 것밖에 는 느낄 수가 없어.

여자

매일같이, 매시간 소식을 전해 주세요! 1초가 여삼추 같아요. 아,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다간, 우 린 다시 만나 키스를 나누기도 전에 늙어 버리거나 죽어 버릴 것만 같아요.

남자

오, 줄리엣! 오늘 밤은 당신 곁에 있겠소.

여자

오, 로미오! 사랑하는 로미오!

남자

죽음이 생명을 앗아 간다 해도, 인간에게는 얼마나 많은 기쁨이 있는가! 오, 내 사랑! 나의 아내여! 이 세 상은 곧 하나의 무덤이 될 거요. 당신의 눈에, 최후의 광경을 담아 두구려! 이 팔로는 최후의 포옹을 하

고…. 그리고 이렇게 입을 맞추면서 나는 죽어 가겠 소.

(각양각색의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폴로네즈를 추며 등장 한다. 나폴레옹, 클레오파트라, 돈 후안, 오를레앙의 처녀, 프리드리히 대왕, 헬렌, 발렌슈타인, 메리 스튜어트, 로엔그 린 등)

어떤 사람 야, 여기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구나! 참 고전적인

한 쌍이지!

(로미오와 줄리엣은 쾌활한 폴로네즈 춤에 섞이며 사라진 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현대인만 남게 된다. 현대인, 나 폴레옹 앞으로 정중하게 다가선다. 나폴레옹은 하얀 조끼 에 손을 찌른 채 옆모습만을 보인다.)

현대인 각하!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각하의 명성이

150년간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주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나폴레옹 뭐라고? 현대인 별 볼일 없는 제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아직 이

땅에 살아남기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 다. 나폴레옹 150년이라고? 그렇게 말했나? 그렇다면 [보고하시

오!]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지? 현대인 보고드리겠습니다. 각하! 제가 여기 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각하는 1821년 봄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에도 각하는 일종의 총체적인 개념입니다. 각하의 인간성이며 옆모습, 그리고 외면 못지않은 내면. 전 설적인 야전에서의 승리. 그리고 하얀 조끼에 한쪽 손을 찔러 넣기를 즐겼다는 것은 교양이 있는 사람 이거나 반쯤은 교양이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비롯 해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사 람들은 각하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각하의 편지는 모든 도서관에서 읽히고, 개인적으로 복사해 가기도 하 죠. 각하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걸 양해해 주시기 바 랍니다. 각하는 우리에게 익숙하신 분입니다. 각하 의 모습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아무 튼, 우리 생각 속의 인물로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습 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프랑스의 황제 폐

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생생하게 살아 있지만 아주 위험한 인물이죠. 나폴레옹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물어보지 않았나? 프랑

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 그리고 영국, 러시아 사람들은? 그들이 패망한 것은 아닌가? 현대인 각하…. 나폴레옹 러시아는 정복할 수 있었어. 하지만 러시아로 진

격했을 때, 엄청난 추위가 몰려왔지. 현대인 다 알고 있는 얘깁니다. 나폴레옹 러시아를 반드시 정복해야만 했어! 현대인 각하…. 나폴레옹 유럽은 세계의…. 현대인 그만하십시오, 각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나폴레옹 …유럽의 주인은 지금 누군가? 현대인 각하…! 나폴레옹 시민이여, 그대는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요? 현대인 각하…. 원자는 쪼개질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그게 무슨 소리요? 현대인 대홍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하가 명령을 내리

신다면. 다시 말씀드리면, 이제 우리는 인간이 생존 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와 있습니

다. 각하, 누가 이 선택을 해야 합니까? 인간 스스로 결정해야 하나요? 아니면 당신이? 나폴레옹 당신은 민주당인가? 현대인 네. 민주당을 후원합니다. 각하, 우리는 더 이상 일

인 독재정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지구상 어 디나 마찬가지죠. 대단히 위험하죠. 오늘날 권력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모든 인류를 손에 쥐게 됩니다. 모세로부터, 혹은 석가모니로부터 시작된 모든 인류 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와 마야문 명, 고딕 양식의 돔 건축물을 포함해서 서양의 모든 철학, 스페인과 프랑스의 미술, 독일의 음악, 셰익스 피어, 물론 젊은 한 쌍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포함해 서 모든 인류의 역사를 손에 쥐게 됩니다. 우리 아이 들과 손자들을 포함한 모든 역사를.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기분에 따라 신경 기능이 마비되거나 노이로제, 미친 증상에 따른 갑작스러운 분노, 소화 불량으로 인한 참을성 부족, 이런 것 때문에 모든 것 을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거죠. 나폴레옹 왜 사람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인트헬레

나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하는가? 현대인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각하는 다시 돌아오지 말았

어야 했습니다. 단 백일 동안도 안 됩니다. 이제 야 전군 사령관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사령관이라 하더라도.] 나폴레옹 하지만 국민들이 날 원한다면? 현대인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국민들은 살기를 원하니까

요. 나폴레옹 하지만 당신 생각이 틀렸다면? 내가 날마다 나를

부르는 국민들 소리를 들었다면?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현대인은 관객 쪽으로 몸 을 돌린다.)

현대인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려 주는 얘기를 이해하려 들지 않 는,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역사 속 이 원숭이들 과 대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잘 지켜보 셨습니다.

(가면을 쓴 새로운 한 쌍이 나타난다. 스페인 항해사처럼 보 이는 노인과 황홀한 미소를 띠고 맨발로 춤추며 나오는 아 주 어린 소녀다.)

소녀

춤을 추세요. 사람들이 추는 것을 보세요. 뛰어 보세 요, 춤을 추세요. 당신이 원하는 사람 손을 잡으세요!

노인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소녀

“춤을 추세요. 사람들이 추는 것을 보세요…!”

(노인은 고개를 젓는다.)

아저씨 축제예요. 진짜 대단한 무도회가 열렸어요. 저는 센 강의 다리 밑에서 잠 못 이룰 때 눈을 감고서, 이런 축제를 몇 천 번이나 꿈꾸었는지 몰라요. 노인

이해할 수가 없어….

소녀

아저씨, 전 이런 요란한 축제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정원, 입어 본 적 없는 비단옷,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주는 음악, 전 그 모든 게 다 좋아요. 상류사회의 생활, 저는 그걸 모두 신문 에서 보고 알았다고요.

노인

사람들은 그걸 아메리카라고 부르고 있으니….

소녀

아저씨, 우리도 서둘러요. 그러지 않았다간 폴로네 즈 춤을 놓치겠어요. 팔을 내밀어 주세요!

노인

…사람들은 그걸 아메리카라고 부른다니까, 아메리

카라고! 내가 발견했던 것이 인도가 아니라는 거야. 얘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니? 인도가 아니라는 거 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거야!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은 사라진다.)

나폴레옹 저 사람은 누구요? 현대인 콜럼버스인 것 같습니다. 노년의 콜럼버스요. 나폴레옹 노인네 말고 저 소녀 말이오. 현대인 저 소녀는 이름이 없습니다. 나폴레옹 센 강 얘기를 하던데. 현대인 아무도 저 소녀의 인생을 모릅니다. 아무도 물어보

지 않았죠. 우리는 그저 죽은 그녀의 가면만 알고 있 습니다. 고물상에 팔려고 창문에 걸어 놓았죠. 우리 는 그녀를 센 강의 이름 없는 소녀라고 부릅니다. 나폴레옹 그렇다면 그 맨발의 소녀도 손님들 중 한 사람인

가? 현대인 그런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그런데 우리를 초대한 사람이 누군지 왜 보고하지

않았지?

(채찍을 울리는 소리가 한 번 들린다. 중국인 궁정 관리가 일꾼들 한 무리를 데리고 나타난다. 그들은 옥좌를 들고 와 무대에 내려놓는다. 이 모든 것은 우향우 좌향좌와도 같은 명령에 따라 신속하고도 빈틈없이 행해진다. 그때마다 보 이지 않는 곳에서 채찍 소리가 울린다. 그러더니 그들은 사 라진다.)

나폴레옹 이 중국식 공예품은 뭐야? 현대인 옥좌입니다. 나폴레옹 저 사람들은? 현대인 알아보겠습니다.

(마스크를 쓴 남자가 등장한다.)

누구시죠?

(말이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이군요. 미국에서 살해당한 첫 번째 대통령인데, 침묵을 지키고 있군요. 아마 역사의 흐 름에 놀란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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