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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리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큰 악은 이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둘은 친구이며 적이고 초면의 관계이기도 하다. 왕궈웨이는 앎과 함의 관계를 관찰한다. 동양과 서양의 지식이 만나 근대의 문을 연다.

‹두 개의 머리›, 빅토르 브라우네르 그림, 1963


인텔리겐치아 2360호, 2014년 12월 16일 발행

류창교가 옮긴 왕궈웨이의 ≪정암 문집≫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자신 의 삶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 으로 하소연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을 구제 하고서 보답을 구하지 않는다 하자. 그를 진 실로 가까이 하고 귀중하게 대하지 않을 사 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의 행 위를 합리적이라고 하겠는가? …가령 한 악 인이 있다 하자. 그는 비열한 술책으로 부귀 를 쟁취하고, 심지어 국가를 훔쳐 소유하고,


그런 뒤에는 갖가지 기만책으로 그 이웃 나 라를 잠식하고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이루는 데 강인하고 과감하고 흉포 해 계획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자르고 없 애고 죽이고 베어 버려 돌아보지 않고, 억만 의 백성을 칼과 톱과 포승으로 몰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정의와 인애의 관념을 잃지 않아 그의 무리와 자신을 도와 준 자들에게는 두터이 보답해 인색하지 않 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최대의 목적을 달성 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거동이 완전히 이 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2. 이치에 대한 풀이(釋理)>, «정암 문집(靜庵文集)», 왕궈웨이(王國維) 지음, 류창교 옮김, 68~70쪽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理)’라는 글자에 윤리학적 의미가 있는가 를 따진다. 이 글자는 어디서 온 것인가?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이(理)는 옥(玉) 을 다듬는 것이다. 옥(玉)의 의미에 이(里)의 소리를 따랐다”고 했다. 옥을 다듬고 쪼개 듯 사물을 분석하고 유추하는 작용, 혹은 사 물 중에 이렇게 분석할 수 있는 것을 ‘이’라고 했다. 영어의 ‘Reason’이 라틴어의 ‘Ratio’, 즉 ‘사색’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다. 뜻이 무엇인가? 넓게는 ‘이유(理由)’, 좁게는 ‘이성(理性)’을


뜻한다. 이유란 무엇인가? 사물이 모두 각기 존재하는, 자기 충족 이유 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명제는 반드시 그 논거가 있”고, “모든 사물은 반드시 그 원인 이 있다”. 이는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이 다. 그것이 우리 지력의 가장 보편적 형식이 기 때문이다. 이성은 뭔가? 사람만이 가지는 특별한 논리적 사유 능력 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다.


‘이’는 윤리인가? 아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지력의 일종이다. 이성(理性)의 작용은 진위(眞僞)에만 관여한 다. 선악에 관여하지 않는다. 성리학이 ‘이(理)’를 ‘욕(欲)’의 반대 개념으로 본 이유인가? 그렇다. 고대에는 참[眞]과 선(善)을 구별하 지 못했다. 정자(程子)는 “사람의 마음에 앎 이 있지 않음이 없는데, 인욕(人欲)에 가려지 면 천리(天理)를 잃는다”고 했다. 이때 천리 는 윤리학의 가치, 즉 선(善)이란 뜻이다. 플라톤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그는 인성(人性)을 삼품(三品)


으로 나눈다. 첫째 기욕(嗜慾), 둘째 혈기(血 氣), 셋째 이성(理性)이다. 기욕과 혈기를 절 제함으로써 극기와 용맹[勇毅], 이 두 덕을 이 루는 것이 이성의 임무다. 이성이란 지식과 도덕이 귀착하는 곳이라 여겼다. 실제로 지식과 도덕이 이성에 귀착하는가? 위의 예문을 보라. 큰 악은 이성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큰 악은 이성과 동맹 해 발생된다. 루소는 «에밀»에서 이미 덕 성과 이성의 차이를 진술했다. 아리스토텔 레스도 덕성의 근원은 인성의 합리적 부분 에 존재하지 않고 그것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키케로가 이성이란 죄 악이 필요로 하는 수단이라고 한 뜻도 이것


을 말한다. 이성이 선악을 통제하지 못하는가? ‘이’가 이유라면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동기’ 가 된다. 동기가 바른지 아닌지에 따라 행위 의 선악이 결정될 뿐, 동기 자체는 빈자리이 지 고정된 이름이 아니다. 선(善)도 한 동기 이고 악(惡)도 한 동기가 된다. ‘이’를 이성으로 보면 어떤가? 마찬가지다. 선을 행하는 것도 이성으로 말 미암고, 악을 행하는 것도 이성으로 말미암 는다. 이성은 다만 행위의 형식이 될 뿐, 행 위의 표준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왕궈웨이는 누구인가? 근대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 고증학자, 국학자다.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호 는 예당(禮堂), 영관당(永觀堂), 관당(觀堂), 영관(永觀) 등이다. 1877년 태어나 한학을 공 부했고 일본 유학을 거쳐 철학, 미학, 문학, 역사, 지리, 금석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 다. 마지막 황제 푸이의 스승이 되기도 했으 나 1927년 쿤밍호에 투신, 자살했다. ≪정암 문집≫은 어떤 책인가? 왕궈웨이가 직접 편찬 교정해 출간한 첫 학 술 문집이다. 1905년 상무인서관에서 출판 했고 사후에는 «왕궈웨이 유서(王國維遺 書)»에 편입되었다.


내용은? 그가 주편을 맡고 있던 잡지 «교육 세계(敎 育世界)»에 발표한 글 12편을 모은 것이다. 주로 철학과 교육학에 대한 글들이다. 당시 공부하던 서양 철학을 바탕으로 칸트, 쇼펜 하우어, 니체의 설을 끌어와 철학, 미학, 문 학, 교육학 등에 대한 견해를 드러냈다. 이 책은 그의 연구 노정에서 어디쯤 위치하나? 초기 학술 연구의 산물이다. 국학대사이자 천재 지식인으로, 넓고 깊고 정예로운 학문 세계를 건설해 갈 그의 초기 사상이 잘 드러 난다. 이 책에서 그는 처음으로 칸트, 쇼펜하 우어, 니체의 철학 사상을 소개하고 이를 근 거로 정주이학(程朱理學)을 비판한다. 또 근


대 중국 최초로 서양 철학과 미학 그리고 문 학 관점과 방법을 운용해 중국 고전 문학을 평론했다. 그의 철학과 미학, 문학 사상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렇게 중요한 책이 왜 그동안 한국에 번역되 지 않았나? 이 문집에 실린 글은 1900년대 초기에 쓰인 것으로 완전한 백화문도 고문도 아니다. 동 서고금의 철학·미학 용어, 서양 인명과 사 건 등이 별도의 주석 없이 언급된 경우가 많 아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번역본에는 원문 의 소박함을 그대로 드러내되 자세한 주석 과 해제를 추가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누구를 만날 수 있나? 동서고금의 문화가 교차하던 근대 중국의 한 지식인 청년이다. 그의 치열한 고민과 사 유를 독자들이 함께하길 바란다. 당신은 누구인가? 류창교다. 서울대 중문학과 강사다.


틀리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큰 악은 이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둘은 친구이며 적이고 초면의 관계이기도 하다. 왕궈웨이는 앎과 함의 관계를 관찰한다. 동양과 서양의 지식이 만나 근대의 문을 연다.

‹두 개의 머리›, 빅토르 브라우네르 그림, 1963


정암 문집 왕궈웨이 지음 류창교 옮김 2014년 12월 16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 396쪽 28,000원


작품 속으로

정암 문집


자서(自序)

나의 철학 연구는 신축년(辛丑年)1)과 임인년(壬寅年)2) 사 이에 시작되었다. 계묘년(癸卯年)3) 봄에야 비로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읽었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걸 괴로워하며 거의 반쯤 읽다가 그만두었다. 이어서 쇼펜하우 어의 책을 읽었는데 그것을 몹시 좋아했다. 계묘년 여름부 터 갑신년(甲辰年)4) 겨울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쇼펜하우어 의 책과 동반자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중에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쇼펜하우어의 지식론이었는데, 그것을 통해 칸 트의 설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인생 철학관은 관찰이 정예 롭고 의론이 예리해 즐겁고 개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 중에 점차 그것에 모순된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 지은 <홍루몽 평론>은 그 입론(立論)이 비록 전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입장에 있지만 제4장에서 이미 커

1) 1901년. 2) 1902년. 3) 1903년. 4) 1904년.


다란 의문을 제기했다. 쇼펜하우어의 설의 절반은 그의 주 관적 기질에서 나왔으며 객관적 지식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 의견은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及 尼采)>5)라는 글 속에서 비로소 거침없이 드러냈다. 올해

봄에 다시 되돌아가 칸트의 책을 읽었다. 지금 이후로 장차 몇 년 동안은 칸트 연구에 힘쓰려고 한다. 훗날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바가 있어 앞의 설을 취해서 그것을 읽는다면 또 한 한 즐거움일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잡문을 아울러 간행 해 요 2, 3년간 사상의 옛 자취를 남기고자 할 뿐이다.

광서 31년6) 가을 8월 하이닝(海寧) 왕궈웨이(王國維) 자서

5) 이 글에서 왕궈웨이는 <숙본화급니채(叔本華及尼采)>라고 적고 있는데, 이 제목은 해당 글에서는 <숙본화여니채(叔本華與尼采)> 라고 적고 있다. 급(及)과 여(與)는 모두 “∼와, 과”의 의미로 차이가 없다. 6) 1905년.


1. 인성을 논함(論性)7)

해제

이 글은 서양 철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 전통 철학의 주 요 개념 중 하나인 ‘성(性)’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왕궈 웨이는 칸트 철학의 지식론에 입각해 성선설과 성악설의 모순 을 비평하고 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인성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므로 인성을 논하 는 자는 공상의 영역으로 치닫지 않으면 그 형세가 어쩔 수 없이 경험에서 추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경험에서 말하는 인성 은 인성의 본연의 모습이 아니며 만약 경험에서 인성을 본성으 로 여긴다면 반드시 선악 이원론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했다. 왕궈웨이는 요순(堯舜)으로부터 공자(孔子), 고자(告子), 맹자 (孟子), 순자(荀子), 동중서(董仲舒), 북송의 주돈이(周敦頤),

7) 원문에는 인성과 관련해 ‘성(性)’, ‘인성(人性)’, ‘정(情)’이라는 세 가 지 표현이 나오는데, 이 글에서 ‘성(性)’은 우리말로 성품 혹은 타고 난 사람의 천성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맥에 따라서는 본성, 인성, 성이라는 표현이 각각 더 자연스러운 경우가 있어서 본고에서는 ‘성 (性)’을 본성, 인성, 성으로 번역했고, 독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 괄호 로 [性]이라는 표기를 병기했다. 원문의 ‘인성(人性)’은 ‘인성’으로 번 역했다. 원문의 ‘정(情)’은 그대로 ‘정’으로 번역했다.


장횡거(張橫渠), 정호(程顥), 정이(程頤), 남송의 주희(朱熹), 육구연(陸九淵) 그리고 명대의 왕양명(王陽明)에 이르기까지 그 모순점을 밝혀내고 인성에 대한 모든 논쟁을 무익한 공담이 라고 했다. 칸트의 지식론에 입각해 왕궈웨이는 인성은 알 수 없는 영역 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성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전통 인성론 에 대한 대담한 질의는 새로운 철학적 시야를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한 사물에 대해 비록 상호 반대되는 의론이지 만 모두 그것을 주장함에 이유가 있고, 그것을 말함에 일리 가 있을 수 있다면 그 사물은 절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2 더하기 2는 4다”, “두 점 사이에는 하나의 직선만 그을 수 있다”는 누구를 막론하고 아직까지 그것을 반대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인과의 변천, 질량의 불변은 어떤 사람 이든 아직까지 그것에 반대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수학과 물 리학이 가장 확실한 지식이 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 아 니겠는가? 지금 맹자가 사람의 본성[性]은 선하다고 말하고, 순자가 사람의 본성[性]은 악하다고 말하는데, 두 가지 모두 상호 반대되는 설이다. 그런데 모두 그것을 주장함에 이유 가 있고, 그것을 말함에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성


에 대해서 진실로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로다! 공자 가 인성[性]과 운명[命]에 대해서 드물게 말한 까닭은 진실로 이유가 없는 게 아니로다! 인성론 가운데 반대의 학설을 수 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학설 속에서도 자기모 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맹자가 말했다. “사람의 본성[性] 은 착하니, 그 풀어진 마음[放心]을 잡는 데 있을 뿐이다.”8) 그런데 그로 하여금 그 마음을 풀어 버리게 하는 자는 누구 인가? 순자는 말했다. “사람의 본성[性]은 악하고, 그 착한 것은 인위다.”9) 그런데 인위로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 인가? 칸트는 “도덕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최상의 명령이다” 라고 말했는데, 어째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근본이 악하다는 설이 생겨났는가?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근본은 생활의 욕 망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소위 생활의 욕망을 거절하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동서고금의 인성론은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은 것이 없다. 가령 본성[性]이라는 것이 숫자와 공간의 성질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그것을 앎이 확실하고 또한 그것을 말하는 것이 똑같다면 우리가 인성을 논할 권리가 있다고 거침없이 솔직히 말해도 괜찮다. 시험

8) “人之性善, 在求其放心而耳.” 9) “人之性惡, 其善者僞(人爲)也.”


삼아 물어보자. 우리가 과연 이런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 지금 인성을 논하는 자의 반대 모순이 이와 같다면 본성[性] 이라는 것은 진실로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하나는 선천적 지식10) 이고, 하나는 후천적 지식11)이다. 선천적 지식은 공간과 시 간의 형식 및 오성(悟性)의 범주처럼 경험할 필요 없이 생 겨나 경험이 그것을 경유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 칸트의 지식론이 나온 뒤부터 오늘날 거의 정론이 되었다. 후천적 지식은 바로 경험이 나를 가르치는 것으로 무릇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이것이다. 양자의 지식은 모두 확실성이 있는데 다만 전자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있고, 후자는 그렇 지 않다. 그러나 그 확실함은 다를 게 없다. 지금 시험 삼아 묻겠는데 본성[性]이라는 것을 과연 선천적으로 아는가? 아 니면 후천적으로 아는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지식 의 형식이며 지식의 재질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본성[性]은 진실로 지식의 한 재질이다. 만약 후천적으로 그것을 안다 면 아는 것은 또한 본성[性]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

10) 선험적 지식. 11) 경험적 지식.


험으로 아는 본성[性]은 유전과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적 지 않아서 본성[性]의 본래 면목이 아님이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본성[性]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다. 인성(人性)이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음이 이와 같아서 인 성을 논하려는 자는 공상(空想)의 영역을 달리는 게 아니라 면 형세는 어쩔 수 없이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추론한다. 경 험에서 말하는 성[性]은 진실로 성[性]의 근본이 아니다. 그 러나 만일 경험에서의 성[性]을 잡고서 본성[性]이라고 여긴 다면 반드시 먼저 선악 이원론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선악 의 상호 대립은 우리의 경험에서의 사실이며, 상반되는 사 실이지 상대적인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사실 은 예를 들면 추위와 더위, 두껍고 얇음 등이 그렇다. 크게 더우면 덥다고 하고, 조금 더우면 춥다고 한다. 크게 두꺼우 면 두껍다 하고, 약간 두꺼우면 얇다고 말한다. 선악은 그렇 지 않다. 크게 선하면 선하다고 하는데, 조금 선한 것이 악 은 아니다. 크게 악하면 악하다고 하는데 조금 악한 것은 또 한 선은 아니다. 또한 적극적인 사실이지 소극적인 사실이 아니다.12) 빛이 있으면 밝다고 하고, 빛이 없으면 어둡다고

12) 적극적 사실은 구체적인 물질 형태가 존재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한다. 있음이 있으면 있다고 하고, 있음이 없으면 없다고 말 한다. 선악은 그렇지 않다. 선함이 있으면 선하다고 말하는 데, 선함이 없어도 아직 악은 아니다. 악함이 있으면 악하다 고 말하는데, 악함이 없어도 아직 선은 아니다. 오직 그것은 반대의 사실이 되기 때문에 선악 양자는 한 설을 통해 그것 을 밝힐 수 없고, 오직 그것은 적극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들어 나머지 것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경험으 로 논점을 밝히면 선악 이원론의 사타구니 아래에서 맴돌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반드시 설명의 통일을 추구하므로 결코 이 선악 이원론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래서 성선론, 성악론 및 초월적 일원론즉, 인성은 선함도 없고 선하지 않음도 없다는 설과 선할 수도 있고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설

이 연달아 일어났다. 경험에 입각해서 인성을 말하면 논하 는 것이 진짜 본성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모순에 이르지는 않는다. 경험을 초월해서 그 통일된 설명을 구한다면 반대 되는 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하나를 주장할 수 있지만

시공간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소극적 사실은 적 극적 사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허무”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시공간 속에 자리매김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소극적 사실은 물질적 형태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감지될 수 없고 오직 사유 인식을 통한다.


자기모순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을 초월함 으로써 우리가 진실로 언론의 자유는 있지만 경험에서의 사 실을 설명하려고 할 때는 또 부득불 그 설을 앞뒤로 그럴듯 하게 둘러맞추면서 다시 이원론으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 다. 그래서 고금에 본성을 말한 자들의 자기모순은 필연적 이치다. 이제 옛사람의 인성론을 약술해 그 모순을 폭로하 니 세상 학자들은 일람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인성을 언급한 것은 오래되었다. 요임금 이 순임금에게 명했다.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오직 미묘하다.”13) 중훼(仲虺)14)가 탕(湯) 임금에 게 고했다. “오직 하늘이 백성을 낳아 욕망은 있고 주인이 없으면 곧 어지러워지고, 오직 하늘이 총명한 자를 낳아 시 대가 다스려진다.”15) <탕고(湯誥)>16)에서 말했다. “오직

13) “人心唯危, 道心唯微.” 14)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신하로 좌상(左相)을 지냈다. ≪서경(書 經)≫에 <중훼지고(仲虺之誥)> 편이 있는데, 이 고(誥)에서 탕

왕의 의도를 해석해 널리 알렸다. 15) “唯天生民, 有欲無主乃亂, 唯天生聰明時乂”(<仲虺之誥>). 16) ≪서경≫의 편명이다. 은나라 탕왕이 각 지방의 제후에게 주는 담 화문으로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전복한 이치를 밝히고 있다. 하 늘은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황음무도한 자에게는 화를 주는 것이


황제께서 아래 백성에게 참마음을 내려 주셨으니, ‘항성(恒 性)’17)이 있으면 그 계획을 안무(按撫)18)할 수 있다.”19) 뒤

의 이 두 설만이 상호 설명을 가해서 홉스20)의 설과 부절을 맞춘 듯 꼭 들어맞지만 인성이 악해서 선하게 될 수 없다면 총명한 군주라 하더라도 그들을 다스릴 길이 없다. 그리고 총명한 군주도 하늘이 낳은 바다. 선한 ‘항성(恒性)’이 있다 면 어찌 군주가 그들을 안무하고 다스리는 것을 필요로 하 겠는가? 그러니 양자는 상호 미리 짐작하지 않으면 모두 자 신의 설을 주장할 수 없다. 또한 중훼는 탕임금에 대해 진실 로 소위 보고서 그것을 안 것이므로 그 설의 모순이 이와 같 아서는 안 된다. 두 알림[二誥]21)의 설은 한 면을 들어 다른 면을 버린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 후에 사람들 중 일원론을

기본 원칙이며, 하나라가 멸망한 까닭은 완전히 하늘이 재앙을 준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17) 늘 한결같은 성질, 항상성. 18)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함. 19) “惟皇上帝, 降衷于下民. 若有恒性, 克綏厥猶.” 20)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영국의 철학자. 성악 설을 전제로 전제 군주제를 이상적인 국가 형태라고 생각했다. 21) 앞의 <중훼지고>와 <탕고>.


주장한 자가 있었다. ≪시경≫에서 말했다. “하늘이 만백 성을 낳아 만물이 있고 법칙이 있네, 백성이 타고난 천성을 지키고,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네.”22) 유강공(劉康公)23) 이 말한 “백성이 천지의 가운데24)를 받아 태어났다”도 <탕 고>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공자에 이르러 비로소 초 월적 일원론을 앞장서 주장해서 “인성은 서로 가까운데, 익 힘이 서로 멀게 한다”25)라고 말했다. 또 “오직 상급의 지혜 로운 자[上知]26)와 하급의 어리석은 자가 이것을 바꾸지 않 는다”27)고 했는데, 이는 단지 경험에서 추론해 경험에서의 사실을 설명하므로 자연 모순되는 바가 없다. 고자(告子)28)는 공자의 인성론에 근거해서 말했다. “타

22) “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彛, 好是懿德”(≪詩·大雅·烝民≫). 23) 이름은 계자(季子), 동주(東周) 제후국(諸侯國)인 유국(劉國)의 개 국 군주. 24) 天地之中. 25) “性相近也, 習相遠也.” 인성은 서로 비슷한데 습관이 서로 멀게 한 다는 뜻이다. 26) 지력이 비범한 사람으로 대개 성철(聖哲)을 가리킨다. 27) “唯上知與下愚不移”(≪論語·陽貨≫). 28) 중국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성은 고(告), 이름은 불해(不 害). 맹자(孟子, BC 372∼BC 289)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인성(人


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하며, 성은 선함도 없고 선하지 않 음도 없다.”29) 또 말했다. “성은 여울물과 같아서 동쪽으로 물길을 터 주면 동쪽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물길을 터 주 면 서쪽으로 흘러간다.”30) 이 설은 비록 맹자에 의해 반박 을 받았지만 사실은 공자의 진의다. 소위 ‘여울물’이란 “인 성이 서로 가깝다”는 설이다. “동쪽으로 물길을 터 주면 동 쪽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물길을 터 주면 서쪽으로 흘러 간다”는 것은 “익힘이 서로 멀게 한다”는 설이다. 맹자가 비 록 그것을 공격해 성선설을 주장했지만 그 설은 관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는 인성을 산의 나무에 비유해 이렇게 말 했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이것 이 어찌 산의 본성[性]이겠는가?31)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어

性)에 관해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맹자와 한 논의는 ≪맹자≫ <고자(告子)> 상편(上 篇)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고자의 존재를 알 수 있을 뿐

이다. 29) “生之謂性, 性無善無不善也.” 30) “性猶湍水.” 사람의 본성(本性)은 여울물과 같다는 뜻으로, 여울물 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듯이, 천성적으로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고자(告子)의 설.


찌 인의의 마음이 없겠는가? 그가 그 양심을 놓는 까닭은 마 치 도끼가 나무를 찍어 내는 것과 같으니 아침마다 그 양심 을 베어 낸다면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 날마다 자라는 여명의 맑은 기운이 있다 하더라도 그 좋아하고 싫 어함이 다른 사람과 가까운 것은 거의 드물고, 그래서 낮에 저지른 행위가 그 맑은 기운을 속박해 그것이 없어지게 된 다. 속박이 반복되면 그 맑은 기운은 살아남기 힘들다. …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래의 정(情)이겠는가?” 그렇다면 아 침마다 그것을 베는 것은 무엇인가? 소위 속박을 받아 없어 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 붙일 길이 없어 그것을 ‘욕 망[欲]’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래서 “마음을 기르는 데 욕심 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게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 위 욕망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만약 본성[性]에 서부터 나온다면 어째서 본성[性]과 서로 모순되는가? 맹자 는 여기에서 작은 기관[小體]과 큰 기관[大體]으로 그것을 설명해 “시각과 청각 기관은 생각을 하지 않아 사물에 가리

31) 제(齊)나라의 우산(牛山)은 원래 초목이 무성하던 아름다운 산이었 지만 대국의 교외에 있어 사람들이 도끼로 벌목을 하면서 벌거숭이 산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 산에 나무의 싹이 돋아나지 않는 것은 아 닌 것처럼 사람의 본성도 마음 속에 선한 싹이 있다고 맹자는 주장 한다.


어지며 사물이 사물과 만나면 이끌 뿐이다. 마음의 기관은 생각을 하는데,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 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라고 했다. 마음 을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만 한다면 귀와 눈, 양자는 설마 하늘이 부여한 것이 아닌가?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이 목의 욕망이 본성[性]에서 나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의 미는 바로 이와 같으므로 맹자의 인성론이 이원론임은 의심 할 여지없이 분명하다. 순자에 이르러 맹자의 설에 반대해 성악설을 앞장서 주 장해 말했다. “예의와 법도는 성인의 인위에서 생겨나며, 본 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눈이 빛 깔을 좋아하고, 귀가 소리를 좋아하며, 입이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이로움을 좋아하고, 신체와 살갗이 유쾌하고 편안 함을 좋아하니, 이 모두는 사람의 성정(性情)에서 생겨난 것이다. 느껴서 저절로 그러하니 일을 기다린 뒤에 그것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다. 느끼는데 그럴 수 없어 반드시 일 을 기다린 뒤에야 그러한 것, 그것을 일컬어 인위[僞]에서 생겼다고 하며, 이는 본성[性]과 인위[僞]가 생겨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성인이 본성을 교화해 인 위를 일으킨다.” 또 말했다. “옛날에 성인은 사람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편파적이고 비정상적이며, 바르지 않고, 미


혹되고 흐트러져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여겨서 군주의 권세 를 세워 임했고, 예의를 밝혀서 교화했으며, 법치를 일으켜 다스리고, 무거운 형벌로써 금하게 해, 천하로 하여금 모두 다스림에서 나와 선에서 합일하게 했다. 이것이 성왕의 다 스림이고 예의의 교화다. 지금 시험 삼아 임금의 권세를 없 애고, 예의의 교화를 없게 하며, 법치 정치를 없애고, 형벌 을 통한 금지를 없게 해, 천하 백성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자. 이와 같다면 저 강자가 약자를 해해서 빼앗고, 다수가 소수를 해쳐 시끄럽게 해, 천하가 미혹되고 흐트러져 서로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함이 분명하고, 그 선한 것은 인위다.”<성악편(性惡篇)> 우리가 더 나아가 그 설의 모순을 평가해 보면 가장 정도가 심한 것 이 사람과 성인을 구별해 둘로 보는 것이다. 저 성인은 사람 이 아니란 말인가? 보통 사람은 성인이 나와서 예의가 흥하 길 기다린 뒤에야 다스려지고 선에 합일한다면 저 최초의 성인은 곧 예의를 만드는 자로 또 어찌 기다리는 바이겠는 가? 그는 예가 일어나는 바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태 어나 욕망이 있는데, 욕망하나 얻지 못하면 추구함이 없을 수 없고, 추구하는 데 도량과 경계가 없다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어지럽고, 어지러우면 궁하게 된다. 선왕께서는 그 어지러움을 싫어해서 예의를 만들어 그것을 나누고 사람의


욕망을 보살펴서, 그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이것이 예가 일 어나는 바다.”<예론편(禮論篇)> 그렇다면 소위 예의라는 것 은 또한 욕망을 통해 변화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 하여 사람이 그 어지러움을 싫어해서 예의를 만들어 그것을 나누었다고 말하지 않고, 반드시 선왕이라고 말하는가? 그 는 예의 연원을 논할 때도 모순을 안고 말했다. “지금 사람 의 본성이 굶주리면 배부르고자 하고, 추우면 따뜻하고자 하며, 피로하면 쉬고자 하니, 이는 인지상정이다. 지금 사람 이 굶주린데 연장자를 보고서 감히 먼저 먹지 못하는 것은 양보하는 바가 있어서다. 피로한데도 감히 쉬려고 하지 않 는 것은 타인을 대신하는 바가 있어서다. 아들이 아버지에 게 양보하고, 동생이 형에게 양보하며, 아들이 아버지를 대 신하고, 동생이 형을 대신하니, 이 두 행위는 모두 본성에 반하고 정(情)에 위배된다.”<성악편(性惡篇)> 그런데 또 삼 년상이 정(情)에 맞는다고 여겨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 다. “무릇 천지 사이에 태어난 것 중에는 혈기의 무리가 있 어 반드시 앎이 있고, 앎이 있는 무리는 자신의 부류를 사랑 하지 않음이 없다. 지금 저 큰 짐승이 그 무리와 짝을 잃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 물길 따라 내려가다 고향을 지나면 반드시 배회하게 되고, 울부짖고 머뭇거리고, 주저 한 뒤에야 그곳을 떠날 수 있다. 미물로는 제비와 참새조차


오히려 시끄럽게 우는 순간이 있고 난 뒤에야 그곳을 떠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혈기가 있는 무리 중에 사람보다 더 아는 것은 없으며, 그래서 사람이 어버이에 대해서는 죽음에 이 르러도 다함이 없다. 그래서 말했다. ‘희열을 느끼면 얼굴빛 이 광택이 나고, 우환에 빠지면 얼굴빛이 초췌하니, 이는 길 흉과 걱정, 기쁨의 감정이 안색에 나타난 것이다….’”<예론 편(禮論篇)>32)

이는 맹자가 말한 어린아이가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름이 없어서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과 뭐가 다 른가?33) 소위 자연에서 느껴 사고를 겪지 않고도 그러한 것 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인성[性]에 반하고 감정[情]에 위 배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서 순자의 성악 일원론 은 스스로 파멸시킨 것이다. 인성론은 오직 유교 철학 속에서 융성했으며 동시대 다 른 학파에는 없다. 간략하게 말한다면 노장(老莊)34)은 성 선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자연을 숭상했고, 신불해(申不害) 와 한비자(韓非子)는 성악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형벌과 논 리를 숭상했다. 그런데 이 여러 학파 중에는 결코 그것을 쟁

32) 원문에는 이론편(理論篇)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기다. 33)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也”(≪孟子·盡心上≫). 34) 노자와 장자.


론하고 언급한 자가 없었다. 한대에 이르러 회남자(淮南子) 가 노자의 학설을 신봉해 성선설을 앞장서 주장해서 말했 다. “맑고 깨끗하고 담박하고 즐거움[淸淨恬愉]은 사람의 본성이다.”<인간훈(人閒訓)> 그래서 말했다. “배를 타고 의 심하는 자가 동서를 모르다가, 북두성과 북극성을 보면 깨 닫는다. 저 본성[性]은 또한 사람의 북두성과 북극성이다. 이로써 스스로를 드러냄이 있다면 사물의 정(情)을 잃지 않 고, 이로써 스스로 드러냄이 없다면 걸핏하면 미혹된다.”35) 또 말했다. “사람의 본성[性]은 사악함이 없는데, 오래도록 세속에 빠진다면 바뀌고, 바뀌어서 근본을 잊게 되어, 합해 져 본성처럼 된다. 그래서 해와 달은 밝고자 하지만 뜬구름 이 그것들을 덮고, 강과 물은 맑고자 하지만 모래와 돌이 그 것을 더럽히고, 인성(人性)은 곧고자 하는데 향락적인 욕구 가 그것을 해친다.”<제속훈(齊俗訓)> 그래서 회남자의 성선 론은 맹자와 마찬가지로 결국 파열되어 본성[性]과 욕망[欲] 이원론이 되었다. 동시대의 동중서(董仲舒)도 인성(人性)을 논해 말했다. “성(性)의 이름은 타고남[生]이 아닌가? 그 타고남[生]의 자

35) “夫性亦人之斗極也, 以有自見也, 則不失物之情; 無以自見. 則動 而惑營”(≪淮南子·齊俗訓≫).


연의 바탕을 성(性)이라고 한다. 성이란 바탕[質]이다. 성 (性)의 바탕을 선(善)이라는 이름으로 따져서 그것을 맞출 수 있는가? 이미 맞출 수 없는데 오히려 바탕이 선하다[質 善]고 말함은 무엇인가?” “그래서 성(性)은 벼[禾]에 비유되

고, 선(善)은 쌀[米]에 비유된다. 쌀이 벼 속에서 나왔지만 벼는 아직 온전히 쌀이 될 수는 없다. 선(善)이 성(性) 속에 서 나왔지만 성(性)은 아직 온전히 선(善)이 될 수는 없다. 선(善)과 쌀은 사람이 하늘을 이어받아 밖에서 이룬 것이지 하늘이 하는 바의 안에 있지 않다.”≪춘추번로(春秋繁露)≫ <심찰명호편(深察名號篇)>

이 논법은 완전히 순자와 닮았지

만 의미는 고자(告子)와 같다. 그러나 동중서도 이 초월적 일원론을 오랫동안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진실로 음양 이원론이다. 그가 말했다. “양(陽)은 하늘의 덕 이고, 음(陰)은 하늘의 형벌이다. 양(陽)은 항상 실제 자리 를 차지하고 성대함 속에 행해지지만, 음(陰)은 항상 공허 속에 자리해 말단에서 행해진다.”상동, <양존음비편(陽尊陰卑 篇)> 그래서 말했다.

“하늘은 음양의 작용을 겸비하고 있고

사람의 몸도 탐욕과 인자함의 본성을 겸비하고 있다.”36)

36) 원문에는 “天雨有陰陽之施, 人雨亦有貪仁之性”으로 되어 있는데, 동중서의 원문은 “天兩有陰陽之施, 身亦兩有貪仁之性”으로 되어


<심찰명호편>

이 이원론에 근거해 그는 한편으로 성악설을

주장했다. “백성[民]이란 말은 눈이 어둡다[瞑]는 뜻이다. 부 축하지 않으면 넘어지고 빠지고 미쳐 날뛰니 어찌 선할 수 있겠는가?”<심찰명호편> 동중서는 책을 써서 순자를 찬미 했다고 유향(劉向)이 말한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 말했다. “하늘이 만물을 뒤덮어 기르고, 변화시 켜 생겨나게 하고, 길러서 그것을 이루게 한다.” “하늘의 뜻 에서 살핀다면 끝없는 어짊[仁]이다. 사람이 하늘에서 목숨 을 받아 하늘에서 어짊[仁]을 취해 어질다.”<왕도통삼편(王道 通三篇)>

또 말했다. “그늘[陰]의 행위는 봄여름을 막지 못

하고, 달의 넋은 항상 햇살을 싫어한다. 온전하게 했다가 다 치게 했다가 하며 하늘이 그늘[陰]을 막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욕망[欲]을 덜어 내고, 정(情)을 멈추게 해 하늘을 따르 지 않을 수 있겠는가?”37)<심찰명호편> 저 사람이 하늘에서 명을 받고, 하늘에서 어짊[仁]을 취해, 정(情)을 버리고 욕망 [欲]을 멈추어야 하늘의 도[天道]에 합치한다면 또한 성선설 에 가깝다. 요컨대 동중서의 설은 맹자와 순자 두 학파를 조

있어 원문을 따라 고쳐 번역했다. 37) 원문은 “陰之行不得於春夏”로 되어 있는데 동중서의 원문은 “陰之 行不得干春夏”로 되어 있어 원문을 따라 고쳐 번역했다.


화시키려고 했지만 대충대충 졸속으로 마무리했다. 양웅 (揚雄)이 나와 마침내 성(性)의 선악을 섞은 이원론을 앞장 서서 주장했다. 당대(唐代) 중엽에 이르러 윤리학에서 다시 인성론의 문제를 제기했는데, 한유(韓愈)의 <성의 근원을 논함(原性)>과 이고(李翶)의 <인성 회복론(復性書)>38) 이 모두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한유는 성(性)과 정(情)을 구별해 둘로 만들었고, 이고는 비록 정(情)이 성(性)에서 나 왔다고 말했지만 또한 성은 선하고[性善], 정은 악하다[情 惡]고 여겼으니, 그 근거가 박약해 실로 말할 만한 것은 없

다. 송대의 왕안석(王安石)에 이르러 다시 고자(告子)의 설 을 계승했다. 그의 ≪성정론(性情論)≫에서 말했다. “성정 (性情)은 하나다. 일곱 가지 정[七情]이 아직 밖으로 드러나 지 않고 마음에 있는 것이 성(性)이고, 일곱 가지 정이 밖으 로 드러나는 것이 정(情)이다. 성(性)은 정(情)의 근본이고, 정(情)은 성(性)의 쓰임이다. 그러므로 성정(性情)은 하나 다.” 또 말했다. “군자가 군자가 되는 까닭은 정이 아님이 없

38) 중국 당나라의 이고(李翺)가 쓴 윤리학 논문. 사람은 정(情)을 떠나 성(性)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표현은 유교적이지만 그 근본에는 노장, 불교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송학(宋學)에 깊은 영 향을 주었다.


고, 소인이 소인이 되는 까닭은 정이 아님이 없다. 정이 이 치에 합당하면 성현(聖賢)이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소 인이다.” 동시대의 소식(蘇軾)도 한유의 설을 비평해 초월 적 일원론을 제창하고 선(善)의 정의를 내렸다. 그는 ≪양 웅론(揚雄論)≫에서 말했다. “본성[性]이란 과연 담박해서 하는 바가 없는가? 그렇다면 선악의 설이 있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만일 본성[性]에 선악이 있다면 저들이 말하는 정(情) 이 바로 내가 말하는 본성[性]이다. 사람이 태어나 배고픔과 추위의 근심과 암수의 욕망이 있는데, 지금 사람들에게 배 고파서 먹는 것과 목말라서 마시는 것 그리고 남녀 간 욕망 이 사람의 본성[性]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되겠는가? 이것은 천하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인 은 이것이 없으면 성인이 될 길이 없고, 소인은 이것이 없으 면 악을 행할 길이 없다. 성인은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이 일곱 가지39)를 가지고 그것을 부려 선 으로 가고, 소인은 이 일곱 가지를 가지고 그것을 부려 악으 로 간다. 이로 보건대 선악이란 본성[性]이 갈 수 있는 바이 지 본성[性]이 지닐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게다가 본성[性]을

39)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칠 정(七情)에 해당한다.


말하면서 또한 어찌 그 선악을 말하는가? 그렇지만 양웅(揚 雄)의 이론이라면 진실로 그것에 매우 가깝다. 양웅이 말했

다. ‘사람의 본성[性]은 선악이 섞여 있어 그 선을 닦으면 선 한 사람이 되고, 그 악을 닦으면 악한 사람이 된다.’ 이것이 그들이 다르게 되는 까닭이다. 다만 그는 본성[性]에 선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선악이 모두 본성[性]에 서 나온 것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아주 오랜 옛날 처음에는 본래 선악의 이론이 있지 않았고 오직 천하가 같이 편안하 게 여기는 것을 성인이 가리켜 선이라 하고, 한 사람이 혼자 즐기는 것을 악이라 이름 붙였다. 천하 사람들이 진실로 그 가 즐기는 바에 나아가 그것을 행하는데, 성인만이 한 사람 이 홀로 즐기는 것은 천하가 같이 편안한 것을 능가할 수 없 다고 여겨 이 때문에 선악의 변별이 생길 줄을 누가 알았겠 는가.”≪동파전집(東坡全集)≫ 권47 소씨와 왕씨 두 사람은 아 마도 본성[性]에 선악의 이름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 피해 초월적 일원론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상의 인성론 을 종합해 보면 동중서를 제외하고 모두 본성[性]에 대해 본 성[性]을 논했으며 형이상학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송대 철학이 일어나소씨와 왕씨 두 사람이 비록 송대 사람이지만 주돈이와 장횡거의 사상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각자 그 형이상학

으로 인성론을 세웠다. 주돈이의 말이 가장 광막한데, 그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극(無極) 이고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을 낳고, 움 직임[動]이 극에 이르면 고요하고[靜], 고요하면[靜] 음(陰) 을 낳고,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極] 다시 움직인다[動]. 한 번 움직이고[一動], 한 번 고요해[一靜], 서로 그 뿌리가 되고, 음(陰)을 나누고 양(陽)을 나누어, 두 가지 의의40)가 세워진 다. 양(陽)이 변하고 음(陰)이 합해서 수화목금토를 낳고, 다섯 기운[五氣]이 차례대로 펴져 사시(四時)가 돌아간다. 무극의 참[眞], 둘41)과 다섯42)의 정수가 미묘하게 결합하고 응집한다. 하늘의 도[乾道]가 남자를 이루고, 땅의 도[坤道] 가 여자를 이룬다. 두 기운[二氣]이 교감해 만물을 낳고, 만 물이 생기고 생겨, 변화가 끝이 없다. 오직 사람이 그 빼어 남을 얻어 가장 신령스럽다. 형태[形]가 일단 생겨나고, 정 신[神]이 생겨 알게 된다. 오성(五性)이 감동해 선악이 나뉘 고, 만물이 나온다.” 또 말했다. “순수한 마음[誠]은 무위(無 爲)인데, 기미[幾]에 선악이 있다.”≪통서(通書)≫ <성기덕장 (誠幾德章)>

기미[幾]란 움직임[動]의 낌새[微]이고, 순수한

40) 하늘과 땅[天地]을 가리킨다. 41) 음양(陰陽)을 가리킨다. 42) 오행 즉 물[水], 불[火], 나무[木], 쇠[金], 흙[土]를 가리킨다.


마음[誠]은 앞에서 말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인 뒤 에 음양이 있고, 인성이 움직인 뒤에 선악이 있다. 그것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애당초 말할 만한 선악이 없다. 소위 빼어나고 가장 신령스러운 것은 재주[才]로써 그것을 말하지 선악으로써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는 실로 초 월적 일원론으로 소씨가 말한 “선악은 본성[性]이 갈 수 있 는 바지 본성[性]이 지닐 수 있는 바가 아니다”와 다름이 없 다. 그러나 주자(周子)는 또 말했다. “순수한 마음[誠]이란 성인의 근본이고”,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것이다”.≪통 서≫ <성(誠)> 상(上)

그러나 사람의 본체가 이미 선하다면

그 움직임이야말로 어째서 선악의 구별이 있는가? 주돈이 는 일찍이 그것을 설명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성선설은 실 로 그의 낙천적 성질과 도덕을 숭배하는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논리학의 필연적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장횡거(張橫渠) 또한 자신의 형이상학에 근거해 인성론 을 연역했다. 그가 말했다. “태허(太虛)는 무형(無形)이고, 기(氣)의 본체다. 그 모임과 흩어짐은 변화의 객관 형태일 뿐이다. 지극히 고요해[至靜] 느낌이 없음[無感]은 본성[性] 의 연원(淵源)이고, 인식[識]이 있고, 지각[知]이 있음은 사 물이 주고받는 객관 느낌일 뿐이다.”≪정몽(正蒙)≫ <태화편 (太和篇)>

즉, 사람의 본성[性]은 태허(太虛)와 한 몸으로,


선악의 이름이 스스로 그것에 덧붙여지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이 장횡거의 본의다. 또 말했다. “기(氣)는 근본이 텅 비면 맑아 형태가 없고, 느껴서 생겨나면 모여서 모양[象]이 있게 된다. 모양[象]이 있으면 상대[對]가 있고, 상대는 반드 시 그 행위를 뒤집으며, 뒤집으면 원수가 있고, 원수는 반드 시 화해한다.”상동, <태화편> 이게 바로 헤겔의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正)에서 반(反)이 생기고, 반(反)에서 합(合)이 생기는 것이다. 모양[象]은 헤겔이 말하는 정(正)이고, 상대 [對]는 반(反)이며, 화해(和解)란 정반(正反)의 합(合)이다. 그래서 말했다. “태허(太虛)는 맑고[淸], 맑으면 가로막힘이 없고, 가로막힘이 없으므로 신령스럽다[神]. 맑음[淸]을 돌 이켜 탁해지고, 탁해지면 가로막히고, 가로막히면 형태를 이룬다[形].”상동, <태화편> “형태[形]를 이룬 뒤에 기질(氣 質)의 성(性)이 있게 되고, 그것을 좋게 돌이키면[善反], 천

지(天地)의 성(性)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의 성은 군 자가 본성[性]이 아니라고 하는 바가 있다.”상동, <성명편(誠 明篇)> 또 말했다.

“고요한 합일은 기(氣)의 근본이고, 공격

해 빼앗는 것은 기(氣)의 욕망이다.”상동 이로 보건대 그는 형이상학에서 태허(太虛)의 한 근원[一元]을 세우고 그것에 서 발견해 형태[形]와 정신[神]의 이원(二元)으로 나누었다. 선(善)은 정신[神]에서 나오고, 악(惡)은 형태[形]에서 나오


며, 형태[形]는 또 정신[神]에서 나와 정신[神]에서 합하니, 그래서 두 가지 중에 정신[神]이 그 본체요, 형태[形]는 그 객 관 형태다. 그래서 말했다. “한 물건에 두 몸은 기(氣)다. 하 나이므로 신(神)이고, 둘이므로 변한다[化].”상동, <삼우편(參 雨篇)> 그러나 형태[形]가 이미 정신[神]에서 나온다면 기질

의 성[氣質之性]은 어째서 천지의 성[天地之性]과 상반되는 가? 또 기질의 성은 어째서 그것을 성(性)이라고 하지 못하 는가? 이는 또한 장횡거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정명도(程明道)43)는 이렇게 말했다. “나고 나는 것을 역 (易)이라 하니,44) 이는 하늘이 도(道)가 되는 까닭이다. 하 늘은 단지 남[生]을 도(道)로 삼고, 이 생리(生理)를 이어 가 는 것은 단지 선(善)이고, 곧장 하나의 근본[元]의 의미가 있 다. 근본[元]은 선(善)의 우두머리이고, 만물이 모두 봄뜻[春

43) 송대의 유명한 유학자 정호(程顥, 1032∼1085)를 가리킨다. 명도 는 그의 호다. 아우 정이천과 함께 이정자(二程子)라고 일컫는다. 그의 철학은 기(氣) 철학에 속하며, 전통적인 음양이기(陰陽二氣) 의 철학에 새로운 해석을 덧붙였다. 성(性)에 선악의 구별을 세우지 않고, 선악을 후천적인 인자에 의한 것이라 보았다. 악으로 흐르지 않고 선에 도달하는 수양법으로서 우주의 진의(眞意)를 직각(直覺) 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44) “生生之謂易.”


意]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이어 가는 것은 선(善)이고, 그

것을 이루는 것은 본성[性]이다. 오히려 다른 만물이 스스 로 그 성(性)을 이루는 것을 기다리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이정전서(二程全書)≫ 권2

또 말했다. “성(性)을 논하고 기

(氣)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지 못하고, 기(氣)를 논하고 성 (性)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치 않으니, 그것을 둘로 하면 옳 지 않다.”상동 이로 보건대, 정명도가 말하는 본성[性]은 기 (氣)를 겸해서 말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선(善)은 바로 “나 고 난다[生生]”는 뜻으로 즉 광의의 선이지, 맹자가 말하는 ‘성선(性善)’의 선(善)은 아니다. 그래서 말했다. “남[生]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이 곧 기(氣)이며, 기(氣)가 곧 성 (性)이고, 남[生]을 말함이다. 사람이 나면서[生] 기를 받고 [氣稟], 이치상 선악이 있는데, 그러나 성(性) 속의 근본[元] 에 이 두 사물이 있어 상대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 려서부터 악함이 있고, 어려서부터 선함이 있음은 기를 받 음[氣稟]이 그러함이 있다. 선(善)은 진실로 본성[性]인데, 그러나 악(惡)도 그것을 본성[性]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 다. 대개 타고남을 본성[性]이라 하는데,45) 사람이 태어나 고요하니, 하늘이 말하는 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

45) “生之謂性.”


니 본성[性]을 말할 때는 바로 이미 본성[性]이 아니다.”≪이 정전서≫ 권2

정명도는 여기에서 말뜻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

다. 대개 타고남[生]을 본성[性]이라 여기고, 본성[性] 속에 선악 두 가지가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선은 진실 로 본성[性]에서 나오고, 그리고 악도 본성[性]에서 나온다 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또 마땅히 “사람이 태어나 고요하니, 하늘이 선악을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 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악을 말하면 본성[性]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정명도는 감히 맹자에게 반대하지 못 했기 때문에 이런 애매한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진의는 바로 고자(告子)와 똑같다. 그러나 정명도는 훗날 또 광의의 선 과 협의의 선을 혼동해 성선설을 번복했다. 그러므로 정명 도의 인성론[性論]은 송대 유가 중 가장 취약한 것이다. 정이천(程伊川)46)에 이르러 정명도의 설을 바로잡아, 성(性)과 기(氣)를 나누어 둘로 만들고, 성선론을 주창해 말

46) 중국 북송 시대의 철학자이자 도학자인 정이(程頤, 1033∼1107). 이천(伊川)은 그의 호다. 형인 정호(程顥)와 함께 이정자(二程子) 라고 부른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이(理)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 는데, 이(理)와 기(氣)를 구별하고, 일사일물(一事一物)에 머무는 ‘이(理)의 추구[窮理]’를 학문의 근저에 두었다. 또한 “성즉리(性卽 理)”설에 의거해서 인간성의 순화와 향상을 주장했다.


했다. “본성[性]은 하늘에서 나오고, 자질[才]은 기(氣)에서 나온다. 기(氣)가 맑으면 자질[才]이 맑고, 기(氣)가 탁하면 자질[才]이 탁하다. 자질[才]은 선(善)함도 있고 선(善)하지 않음도 있으며, 본성[性]은 선(善)하지 않음이 없다.”≪근사 록(近思錄)≫ <도체류(道體類)>

또 말했다. “본성[性]은 선하

지 않음이 없으니, 선함이 있고 선하지 않음이 있는 것은 자 질[才]이다. 성(性)은 곧 이(理)이고, 이(理)는 요순(堯舜) 부터 길거리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다. 자질[才]은 기(氣) 에서 받는데 기(氣)에 ‘맑고 흐림[淸濁]’이 있다. 그 맑음[淸] 을 받는 자는 어질게[賢] 되고, 그 흐림[濁]을 받는 자는 어리 석게[愚] 된다.”≪이정전서≫ 권19 성선설을 주장하려면 기질 의 성이란 악으로 나아가기 쉬워 이 설의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기(氣)를 본성[性]의 밖에 두지 않으면 그 설을 주장 할 수 없다. 그래서 정이천의 설은 기(氣)를 떠나 본성[性]을 말하면 그 성선의 일원론을 주장할 수 있다. 만약 기(氣)를 본성[性] 속에 둔다면 순전히 공간적 선악 이원론이다. 주자(朱子)는 정이천의 설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이원 론을 주장했다. 그의 형이상학에 대한 견해를 보자. “천지 의 사이에 이(理)가 있고 기(氣)가 있다. 이(理)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이고, 생물의 근본이다. 기(氣)라는 것은 형이 하의 그릇이고, 생물의 설비[具]다. 이 때문에 사람과 사물


의 삶은 반드시 이 이(理)를 타고 나며, 그런 뒤에 성(性)이 있다. 반드시 이 기(氣)를 타고나, 그런 뒤에 형태[形]가 있 다.”≪학적(學的)≫ 상(上) 또 말했다. “천하는 아직 이(理) 없 는 기(氣)는 있지 않고, 또한 아직 기(氣) 없는 이(理)는 있 지 않다.”≪어류(語類)≫ 1 그런데 이 이(理)는 정이천이 이미 이렇게 말했다. “음양(陰陽)을 떠나면 도(道)가 없다. 음양 (陰陽)은 기(氣)이고, 형이하다. 도(道)는 태허(太虛)이고, 형이상이다.”≪성리회통(性理會通)≫ 권26 인성(人性)에서 정 이천이 기(氣)로 본 것을 주자(朱子)는 단지 곧장 성(性)이 라고 했다. 즉, 성(性) 가운데 이(理)에서 순수한 것은 천지 (天地)의 성(性)이라고 했고, 그중 기(氣)에서 섞인 것은 기 질의 성이라고 해서, 둘은 또한 떼어서 둘이 될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그래서 말했다. “성(性)은 기질(氣質)이 아니라 면 기탁할 곳이 없고, 기(氣)는 천성(天性)이 아니라면 이루 어질 곳이 없다.”≪어류≫ 권4 또 말했다. “천지의 성(性)을 논하면 오로지 이(理)를 주로 하고, 기질의 성(性)을 논하면 이(理)를 기(氣)와 섞어서 말한다.”≪학적≫ 상(上) 그런데 성 (性)은 물과 같고, 기(氣)는 물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말 했다. “물은 모두 맑아서 깨끗한 그릇으로 그것을 담으면 맑 고, 깨끗하지 않은 그릇으로 그것을 담으면 냄새가 나며, 진 흙 그릇으로 그것을 담으면 흐려진다.”≪어류≫ 권4 그러므


로 주자의 설에 따르면 이(理)는 선하지 않음이 없는데, 기 (氣)에 선함이 있고, 선하지 않음이 있다. 그러므로 주자의 인성론[性論]은 정이천과 마찬가지로 이원론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자는 또한 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부터 그의 이욕이원론(理欲二元論)을 연역해서 말했다. “천리(天理) 가 있으면, 인욕(人欲)이 있다. 대개 이 천리(天理)에 따라 반드시 정착하는 곳이 있다. 정착한 곳이 알맞지 않으면 바 로 인욕(人欲)이 나오게 된다.”≪성리회통≫ 권50 육상산(陸 象山)47)이 일어나 그것을 반박해 말했다. “천리(天理)와 인

욕(人欲)의 구분은 대단히 어폐가 있다. ≪예기≫에서부터 이 말이 있었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답습했다. ≪악기 (樂記)≫에서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 고요함은 하늘의 성 (性)이다. 사물에서 느껴 움직임은 성(性)의 욕망[欲]이다.’ 이와 같다면 움직임[動]도 옳고, 고요함[靜]도 옳으니, 어찌 천리(天理)와 물욕(物欲)의 구분이 있겠는가? 움직임[動]이

47)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로 본명은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이고, 상산은 그의 호다. 당시 석학이었던 주자와 대립해 학문적 세 력을 형성했고, 사상적 계보로는 모두 정호, 정이의 학문을 계승했 다.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리설(性卽理說)을 제창했 고, 상산은 치지(致知)를 주로 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제창했다.


만약 옳지 않으면 고요함[靜]도 옳지 않으니, 어찌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의 사이가 있겠는가?”≪전집(全集)≫ 35 또 인심 (人心)과 도심(道心)의 설을 반박해서 말했다. “마음은 하 나인데, 어찌 두 마음이 있을 수 있는가?”≪전집≫ 34 이것은 완전히 고자의 입장에 서 있으므로 초월적 일원론이 된다. 그러나 이는 육상산의 진의가 아니니, 육상산은 진실로 절 대적 성선론자다. 그는 학자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네 귀 는 본디 밝고, 눈은 본디 밝아, 부모를 섬김에 본디 효도할 수 있고, 형을 섬김에 본디 공손할 수 있다”.≪전집≫ 34 그래 서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 모두 선한데, 그 선하지 않은 것 은 사물로 옮겨 간다.”상동, 32 그러나 사람이 사물로 옮겨 가 는 까닭은 어째서냐고 시험 삼아 물어보면 육상산은 또한 그것을 기질로 돌려서 이렇게 말했다. “기질이 지나치게 약 하면 이목의 기관이 생각하지 않아 사물에 가려진다. 사물 이 사물과 서로 맞닿으면 그것을 끌어당길 뿐이다.”상동 그 러므로 육상산의 뜻은 정이천과 마찬가지로 기(氣)를 성 (性)과 구별해 성(性)을 선(善)이라고 여겼다. 만약 성(性) 을 기(氣)와 합해서 말한다면 또한 이원론이 된다. 왕양명 (王陽明)도 육상산의 설을 계승해서 성선을 말했는데 그러 나 물욕을 없앰으로써 양지(良知)에 이르는 것이 첫째로 큰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고금에 성선론을 주장하면서 맹자의


모순을 밟지 않는 자는 아직까지 거의 없다. 오호라! 선악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우리 경험에서의 사 실이다. 백성이 생긴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사 변화 중 어느 것이 이 선악, 두 성(性)의 투쟁이 아니겠는가? 정치와 도덕, 종교와 철학, 어느 것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 지 않는가? 그러므로 세계의 종교는 이신교(二神敎)의 색 채를 띠지 않음이 없다. 야만의 신은 그 대부분을 고찰할 수 는 없지만 두 종류를 벗어나지 않으니, 즉 사랑해서 그에게 제사 지내는 자가 있고, 두려워서 그에게 제사 지내는 자가 있으니, 바로 선한 신[善神]과 악한 신[惡神]일 뿐이다. 문명 국의 종교에 이르러서는 상제(上帝) 외에 악마를 예상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인도의 바라문교는 세계를 만든 신을 범천(梵天, Brahma)48)이라 하고, 세계를 유지하는 자 를 아이시누(Aishnu)49)라고 하며, 그것을 파괴하는 자를 시 바(Siva)50)라고 하고, 오늘날은 바로 시바가 다스리는 세상 이며, 브라흐마와 아이시누가 다스리는 세상은 이미 지나 가 버렸다고 여겼다. 그 후에 곧 삼위일체설이 있었는데 이

48) 창조의 신. 49) 유지의 신. 50) 파괴의 신.


는 마치 논리학이 이원론에서 초월적 일원론으로 바뀐 것과 같다. 인도 서쪽으로 가면 페르시아51)의 배화교52)가 오르 무즈드(Ormuzd)와 아리만(Ahriman), 두 신을 세웠다. 오 르무즈드는 선한 신[善神]이자, 광명의 신이요, 평화의 신이 고, 아리만은 악과 암흑 그리고 투쟁을 주관하는데, 유태교 의 야훼(Jehovah)와 사탄(Satan)은 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 이다. 희랍신의 용어 중에 아폴로(Apolo)와 디오니소스 (Dionysus)의 관계도 이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 이후로 기독교의 이지파(理知派)가 또한 이 사상을 계승해 세계 만 물의 형식을 신(神)이라 하고, 물질은 타락한 마귀라고 했 다. 어둡고 악한 마귀가 밝고 선한 신과 서로 대항해 각자 그 세력을 사람에게 가하고자 하니, 현재의 세계는 곧 신과 마귀의 전쟁터다. 저 소위 신이란 우리의 ‘선한 본성[善性]’ 의 그림이 아니겠는가? 소위 마귀란 우리의 악한 본성[惡性] 의 작은 그림자가 아니겠는가? 기타 유태교와 기독교 두 종 교의 타락설, 불교와 기독교의 참회설 같은 것은 모두 선악 두 성(性)의 투쟁을 보여 준다. 대개 인성(人性)이 만일 선 하다면 타락설은 거짓이 되고, 기왕 악하다면 또한 어찌 타

51) 이란. 52) 배화교(拜火敎), 조로아스터교.


락이 악이 되는 줄 알겠는가? 선하다면 악을 참회할 일이 없 고, 악하다가 참회하는 이유를 안다면 ‘선한 실마리[善端]’ 의 존재 또한 속일 수 없다. 어찌 다만 종교뿐이겠는가? 역 사가 기술한 것이나 시인의 슬픈 노래[悲歌] 역시 어느 것이 이 선악 두 성(性)의 투쟁이 아니겠는가? 다만 전자는 주로 바깥 세계의 투쟁을 기록하고, 후자는 주로 내면세계의 투 쟁을 기술하니, 이것 외에 나는 그 차이를 알지 못하겠다. 우리의 경험에서 선악(善惡) 두 성이 서로 대립함이 이와 같다. 그래서 경험에서 인성(人性)을 추론하는 것이 비록 성(性)에 과연 적합한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경험과 서 로 모순되지는 않으므로 그 설을 주장할 수 있다. 초월적 일 원론은 또한 경험에서의 사실과 서로 조화를 이루려고 애쓰 므로 현저한 모순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성선 혹 은 성악의 일원론을 주장하는 자는 성(性)에 나아가 성(性) 을 말할 때에 성(性)을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한 사물로 여 겼기 때문에 모두 그 설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 로써 경험을 설명하거나 혹은 수신(修身)하는 일에 응용하 고자 한다면 모순은 곧장 그것을 따라 일어난다. 내가 그래 서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후세 학자로 하여금 쓸데없이 이 무익한 의론을 하지 말도록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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