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뿌리와 열매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애착과 증오. 거부하면서도 아까운 기억. 기대하면서도 불안한 희망. 세기말의 딜레마가 모자의 딜레마로 모습을 드러낸다.
슈니츨러는 프로이트조차 감탄할 정도로 날카롭고 심도 깊게 인간의 내면을 파헤쳤다. 1908년 그의 모습
인텔리겐치아 2366호, 2014년 12월 19일 발행
남기철이 옮긴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테레제, 어느 여인의 일대기≫ ‘넌 네 아빠처럼 나쁜 인간이 되지는 않을 거 야. 이리 와, 여기 잘 누워라. 아프지 않게 잘 덮어 줄게. 여기 베개 밑에서 잘 자거라. 편 하게 죽을 수 있을 거야. 베개를 하나 더 얹 어 줄게. 따듯할 거다…. 아가, 안녕. 우리 둘 중 하나는 깨어나지 못할 거야. 아니면 우리 둘 다 깨어나지 못할 거야. 귀여운 내 아가, 사랑한다. 난 좋은 엄마가 아니란다. 난 엄마
가 될 자격이 없어. 넌 살아나선 안 돼. 난 다 른 아이들을 돌봐야 해. 너를 돌봐 줄 시간도 없단다. 잘 자렴, 잘 자….’ -«테레제, 어느 여인의 일대기(Therese, Chronik eines Frauenlebens)»,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지음, 남기철 옮김, 175쪽
엄마가 아이를 죽이려는 것인가? 테레제가 원치 않은 아이였다. 아들이 태어나 던 날,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기를 베 개로 죽일 뻔했다. 이 일로 평생 죄책감에 시 달린다. 정신세계에 치명적 상처를 입는다. 테레제는 누구인가? 잘츠부르크에 사는 퇴역 장교의 딸이다. 아
버지가 갑작스런 정신 질환을 앓게 되고 집 안은 몰락한다. 어머니는 어려움에서 벗어 나기 위해 그녀를 늙은 백작과 혼인시키려 한다. 그녀의 대응은? 집을 나와 빈으로 간다. 가정교사를 시작한 다.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난다. 임신하지만 남 자가 떠난다. 그녀는 사생아를 낳기 싫다. 낙 태 수술을 원하지만 실패한다. 아들을 낳는 다. 아들을 키우는가? 빈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아들을 시골에 맡긴다. 열심히 일해 양육비를 댄다. 아들은
커 가면서 학교에 가지 않고 물건을 훔친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가? 집을 얻어 아들을 불러 함께 산다. 행실은 나 아지지 않고 매번 돈을 요구한다. 더는 돈을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아들은 온 집안 을 뒤진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손을 묶고 입을 틀어막는다. 테레제는 쓰러진다. 일어 나지 못한다. 죽었는가? 죽이지 않았다. 그저 폭력으로 제압해 침실 로 끌고 갔을 뿐이다. 그는 엄마가 별일 없을 것이며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죽은 체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나는가? 병원에 실려 간다. 위중한 상태다. 겨우 정신 을 차린다. 문병 온 친구에게 말한다. 아들은 자신의 과거 일에 대해 화풀이를 한 것뿐이 라고. 법정에서 아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증언해 달라고. 그러고는 숨을 거둔다. 테레제의 사인은 무엇인가? 의사들은 경미한 부상이라고 말한다. 정신 적 충격을 받아 고열 증세를 보이는 것이라 고 진단했다. 왜 죽은 것인가? 어쩌면,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도 모른다.
아들은 어떻게 되는가? 법정에서 문병 왔던 친구의 증언은 받아들 여지지 않는다. 아들에게는 징역 12년, 그리 고 매년 사건 당일에 암실 구금과 함께 식사 를 못하게 한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작가의 메시지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비극적 사회상이다. 테레 제의 영아 살해 시도는 아들의 모친 살해로 귀 결된다. 슈니츨러는 과거가 현실에 심대한 영 향을 미치는 과정을 그린다. 딜레마에 빠진 작가 세대의 비극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 당대의 딜레마란? 당시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멸망한 합스부르
크 왕조에 대한 뿌리 깊은 애착과 증오심, 동 시에 신생 공화국에 대한 기대감와 증오심 을 나타냈다. 그들은 과거를 증오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 도 기대감과 더불어 불안감을 느꼈다. 작가의 문학 세계에서 이 작품의 위치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이다. 단편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서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누구인가? 오스트리아의 소설가다. 어두운 분위기의 세기말 오스트리아를 세련된 문체로 표현했
을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인간의 내면을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어떻게 살다 갔나? 빈의 유명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 지의 권유에 못 이겨 작가의 꿈을 접었다. 그 러나 결국 의사 직업을 버리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1년 10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남기철이다. 번역가다.
애증의 뿌리와 열매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애착과 증오. 거부하면서도 아까운 기억. 기대하면서도 불안한 희망. 세기말의 딜레마가 모자의 딜레마로 모습을 드러낸다.
슈니츨러는 프로이트조차 감탄할 정도로 날카롭고 심도 깊게 인간의 내면을 파헤쳤다. 1908년 그의 모습
테레제, 어느 여인의 일대기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2014년 12월 19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 516쪽 28,000원
작품 속으로
테레제, 어느 여인의 일대기
1 후베르트 파비아니 육군 중령이 군 생활을 마감하고 마지막 근무지인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이사했을 무렵, 테레제는 막 열여섯 살이 되었다. 군대에서 파비아니 중령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은 대부분 그라츠1)에 정착했다. 때는 봄이 었다. 그의 가족이 거처를 마련한 집에서 채광창을 통해 바 라보면 잇닿은 지붕들 너머로 바이에른의 산들이 시야에 들 어온다. 중령은 아침 식사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아 직 예순도 안 된 정정한 나이이기는 하지만 현역에서 물러 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자랑스레 떠들었다. 숨 막힐 듯 후덥지근하고 냄새나는 대도시에서 벗어나 젊은 시절부터 고대했던 자연을 마음껏 즐기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다. 그는 테레제를 데리고 자주 산책을 나갔고, 가끔 그녀 보다 세 살 많은 오빠 칼도 데리고 갔다. 테레제의 어머니는 같이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예전에 비해 부쩍 소설을 자주 읽었다. 그러면서 집안일은 소홀히 했다. 이미 코모 른2), 렘베르크3) 그리고 빈에 살 때부터 살림살이에 짜증을
1) 그라츠(Graz): 오스트리아에서 수도 빈에 이어 둘째로 큰 도시다. 2) 코모른(Komorn): 현재는 헝가리의 영토로 코마롬이라고 부른다. 제
내왔던 터였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서너 번씩은 수다스런 여자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커피를 마셨다. 그 여자들은 군 장교나 공무원의 부인과 미망인 들로, 파비아니 부인에게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나도는 화젯거리나 소문을 귀띔 해 주었다. 중령은 어쩌다 집에 있는 날에는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 했다. 그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동네 여자들과 쓸데없이 어 울리는 부인에게 대놓고 핀잔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부인 은 당신도 예전에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느냐 고 얼버무리면서 대꾸했다. 그러면 중령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가서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계단을 쿵쾅쿵쾅 밟으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은 중령이 외출하고 없 을 때면 침울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곤 했 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특히나 여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 는 불만인 듯했다. 부인은 또한 남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수다스레 늘어놓았다. 예를 들어, 자기가 최근에 읽은 책들
1차 세계대전 종결 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땅이었다. 3) 렘베르크(Lemberg):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리비우라고 부른 다. 코모른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다.
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두서없이 말을 이어 대는 것 으로 보아 어머니가 여러 소설의 내용을 혼동하고 있음을 딸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테레제는 자신이 알아챈 것을 망 설임 없이 얼른 말해 버렸다. 딸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상한 어머니는 딸을 사납게 꾸짖었다. 그러 고는 인내심과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얘기를 경청한 아들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의 총애를 잃은 딸을 아들이 교활한 눈빛으로 건너다보았지만 그녀는 눈치도 채 지 못했다. 그러면 테레제는 다시 뜨개질을 하거나, 음도 맞 지 않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소녀는 렘베르 크에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대도시에 와서 도 수업료가 싼 여선생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는 산책은 가을이 시작되기 전에 끝이 났다. 그동안 아버지가 자주 산책을 한 진짜 이유를 테레제는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시골 생활이 그리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 하기 위해서였다. 한동안은 아이들도 덩달아 흥겨워하면서 함께 걸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화도 거의 없이 산책을 했 다. 집에 와서야 중령은 마치 퀴즈 게임이라도 하듯, 산책하 면서 있었던 일들을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아내 앞에서 즐거운 척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도 곧 끝났다. 퇴
역한 이후 중령은 관광지에서 입을 법한 화려한 옷을 줄곧 입고 나다녔지만 이젠 그 옷을 옷장에 걸어 놓고 대신 어두 운 색상의 평상복을 꺼내 입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파비아니 씨가 군복을 차려 입고 아침 식사 테이블에 와 앉았다. 그의 눈빛이 몹시 단호 하고 매정해 보여서, 아내조차 남편의 갑작스런 변화에 아 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며칠 후 빈에서 중령 앞으로 책 몇 권이 도착했다. 라이프치히에서도 책이 왔고, 잘츠부르크 고서점에서도 소포가 왔다. 그때부터 퇴역 장교는 책상 앞 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더니, 어느 날 테레제 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마치 극비 사항이라도 되 는 양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서 쓴 원 고를 딸 앞에서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가 투박하면서도 맑 은, 군인다운 명령조의 목소리로 읽고 있는 것은 근대에 있 었던 주요 전투들에 대한 비교 전략 보고서였다. 테레제는 아버지가 읽어 주는 재미도 없고 지루하면서 이해도 안 되 는 내용을 집중해서 듣는 척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자 아 버지는 그런 딸이 측은해졌고, 소녀는 더욱더 졸음을 참아 가면서 아버지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주의 깊게 듣는 척했 다. 마침내 아버지가 낭독을 마치자 소녀는 그에게 고마워
하면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흘 밤을 그렇게 하고서야 중령의 원고 낭독이 모두 끝났다. 그는 원고를 직접 들고 우 체국으로 향했다. 그 후 중령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내 음식 점이나 카페에서 보냈다. 그는 시내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났는데 퇴직했거나 일자리를 단념한 남자들로 주로 퇴임 한 공무원이나 전직 변호사 들이었다. 연극배우 출신도 한 사람 있었는데, 시내의 한 극단에서 일생을 보낸 자로, 이제 는 연극 각본 낭송법을 배우려는 학생이 하나만 나타나도 지도를 해 주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말없이 식사에만 열 중하던 파비아니 중령의 말수가 최근 들어 많아졌다. 그는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늘어놓았는데, 이는 전직 장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농담으로 해 본 소리였다는 듯이 태도가 누그러졌다. 고위급 경찰을 지낸 한 남자도 이따금 대화에 참여하면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사람들은 중령이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2 성탄 전야, 식구들이 서로에게 보낸 소박한 선물들이 크리
스마스트리 아래쪽에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중령 앞으로 보내온, 끈으로 잘 묶은 소포 하나가 축하 선물인 양 섞여 있 다. 소포는 국방 관련 잡지사에서 보내온 것으로, 소포 안에 는 중령이 보낸 원고가 채택되지 못했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그가 몇 주 전에 잡지사로 보낸 원고가 들어 있었다. 머 리끝까지 화가 치민 파비아니 중령은 아내에게 분풀이를 했 다. 분명 며칠 전에 소포가 도착했을 터인데, 남편을 웃음거 리를 만들려고 오늘에야 트리 밑에 가져다 놓았다면서 부인 이 선물한 담배 케이스를 그녀의 발 앞에다 집어던지곤 문 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는 그날 밤 페터 공동묘지 근처의 어느 평판이 좋지 않은 집에서 어 떤 여자와 밤을 보냈다. 그곳의 여편네들은 소년들이나 노 인들에게 쭈글쭈글한 몸을 파는 여자들이었다. 그 후 중령 은 여러 날 동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가족들과도 일절 대화 를 나누지 않더니, 어느 날 오후에 느닷없이 군대 사열식 때 입는 제복 차림으로 부인의 방에 들어섰다. 그때 마침 동네 여자들을 불러들여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던 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여러 부인 앞에서 넉살 좋게 떠들어 대기 시작 했고, 이에 방에 있던 여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부 인의 방을 나온 중령은 어두컴컴한 옆방으로 들어가 여자들 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지껄여 댔다.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의 매너 좋은 남 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그 이후 집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 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가족들을 대했 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가 느닷없는 얘기를 꺼내 가족 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 니 말문을 열었다. 따분한 작은 도시를 떠나 다시 빈으로 돌 아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생활에 커다란 변화 가 있을 것이라고 암시적인 말을 덧붙였다. 테레제는 가슴 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제야 이곳에 오기 전에 3년 동안 살 았던 빈으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 었다. 비록 그곳에서 대도시 부자들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녀는 다 시 예전처럼 하릴없이 거리를 싸돌아다니는 일 이외에는 아 무것도 기대할 게 없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두서너 번 겪었던 일로, 시내를 쏘다니다가 길을 잃어 무척 당황스 럽기도 했지만 짜릿했던 경험이나마 다시 기대해 볼 수 있 을 것이다. 추억에 잠긴 소녀의 눈은 밝게 빛났다. 그때 문 득 앞에 앉아 있는 오빠의 불만이 가득 담긴 시선이 느껴졌 다. 오빠의 표정은 며칠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소녀는 그날, 오빠가 마침 친구 알프레트 뉠하임과 함께 수학 숙제
를 하고 있을 때 오빠의 방에 들어갔다. 소녀는 즐거운 기분 으로 오빠를 쳐다보았고, 두 눈에는 기쁨에 넘치는 빛이 나 고 있었지만, 오빠가 늘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 라보았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지금도 오빠는 며칠 전의 그 밝지 않은 얼굴빛으로 동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소녀는 심장이 오므라드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아니 1년 전만 해도 남매가 다정하게 서로 마주 보면서 장난도 치고 함께 웃곤 했다. 오빠는 왜 변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또 한 소녀가 한 번도 살갑게 대해 본 적이 없는 어머니 역시 불 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쌀쌀맞게 소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적의 에 찬 시선에 소녀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큰 목소리로 떠 들고 있는 자기 남편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아버지는 명 예를 회복할 날이 멀지 않았으며, 자신의 명성을 크게 떨치 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오늘 어머니의 눈빛은 어느 때보 다도 가시 같은 적의와 증오심이 가득 차 보였다. 남편이 너 무 일찍 전역한 것에 대해 아직도 용서 못하겠다는 표정이 었다. 오래전 슬라보니아4)의 남작 집안 규수로 태어나 원시 림처럼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드넓은 정원에서 성미 사
4) 슬라보니아: 현재 크로아티아의 북동부 지역.
나운 조랑말을 타고 놀던 시절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시계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 서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부리나케 나가 버렸다. 그는 그날 밤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어느 술집 에서 국방부와 황실에 대해 거칠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 대다가 헌병대 위병실로 끌려갔 고, 다음 날 아침에 의사의 진단에 따라 정신병원으로 보내 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을 장군으로 진 급시켜 군에 다시 복직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국방부에 제출 했다. 이에 대해 즉각 그를 감시하라는 명령이 빈에서 하달 되었다. 헌병들은 지체 없이 술집으로 출동해 별다른 소동 없이 그를 끌어내었고,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으리라.
3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자 그의 아내는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을 보러 갔다. 테레제는 몇 주 후에야 아버지를 보 게 되었다.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이고 널찍한 뜰이 있는 병 원이었다. 키가 큰 밤나무들의 그늘이 드리워진 가로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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