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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왜 실패하는가? 사유재산을 철폐하면 시장이 사라진다. 시장이 없으면 가격도 없다. 가격이 없으면 낭비와 비효율을 막을 수 없다. 사회주의 운동이 승리해도 사회주의 사회질서가 유지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다.

미제스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의 선호와 선택이 시장경제를 만든다고 했다.


인텔리겐치아 2388호, 2015년 1월 6일 발행

겨울밤에 좋은 책 2 민경국, 박종운이 옮긴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인간행동≫ 사기업을 사회주의 계획화로 대체하는 일이 100년 이상 주된 정치적 쟁점이 되어 왔다. 수천수만 권의 책자들이 공산주의 계획을 옹호하거나 반대하기 위해서 출판되었다. 이 외에 다른 어떤 주제도 사적 모임에서, 간 행물에서, 공적 모임에서, 학문 사회의 회합 에서, 선거운동에서 그리고 의회에서 더 열 정적으로 논의된 바 없다. 사회주의의 대의


를 위해서 전쟁이 일어났으며, 피가 강을 이 루어 왔다. 하지만 이 여러 해 동안 본질적인 문제 제기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인간행동(Human Action)»,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지음, 민경국·박종운 옮김, 1361쪽

본질적 문제가 뭔가? 경제계산이다.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수 있 는지, 어떤 자원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것 이 좋은지, 어떤 욕구를 먼저 충족해야 할 것 인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와 사유 재산과 가격의 존재 이유다. 그것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시장경제에서는 소비자의 태도에 따라 시장


가격이 경쟁적으로 형성되고 이를 통해 다양 한 생산활동의 상대적 비용과 예상 수익을 비교할 수 있다. 생산의 방향 내지 생산자의 배치가 결정된다. 예를 들면? 진주가 비싼 이유는 진주조개를 채취하는 데 노동이 많이 들기 때문이 아니다. 소비자 가 진주에 비싼 값을 지불할 의향이 있기 때 문에 진주가 비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 은 노동을 들여서라도 진주조개를 채취하는 것이다. 계획경제의 생산 결정과는 다른가? 계획경제의 의사 결정은 자의적이고 불합리


하다. 계획경제가 왜 불합리한가?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정부가 경제를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이 인 류의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다. 그런데 사유재산을 철폐하면 시장교환 과 가격이 존재할 수 없다. 낭비와 비효율성 을 최소화하는 결정을 내릴 제도나 정보가 없다는 뜻이다. 사회주의는 비경제적인가? 사회주의의 승리는 곧 경제질서의 불합리화 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운동이 승리한다고 해도 사회주의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사회주의는 끝나지 않는가? 간섭주의 때문이다. 왜곡과 혼란을 시정해 시장과정을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통제나 규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사회주 의를 초래한다. 간섭은 어떻게 사회주의를 초래했는가? 간섭이 계속되면 큰 정부가 나타난다. 경제 전체가 국가 경영의 대상이 된다. 간섭주의 를 일관되게 적용하면 사회주의가 나타난다. 정부의 간섭이 무의미한가? 시장경제는 소비자들, 노동자나 원료 공급 자 등과 같은 자원 소유자들, 기업가들의 행 동이 국제적으로 연결된 복잡한 망이다. 이


망을 간섭하는 것은 기업가의 활동을 방해 하고 수요와 공급의 관계를 왜곡하며 소비 를 위한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방해한다.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은? 미제스는 그것이 가장 나쁜 간섭이라고 보 았다. 뭐가 나쁜가? 적자를 보충하기 위한 통화 팽창은 시장가 격을 왜곡한다. 노동을 포함한 자원의 잘못 된 배분과 잘못된 투자로 이어진다. 자본 구 조의 왜곡을 불러온다. 불황은 간섭주의와 통화 팽창의 결과다.


미제스의 결론은? 자유시장경제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 다. 그것은 모든 구성원이 자유 속에서 평화 롭게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 원리다. 그가 생각하는 시장이란 어떤 모습인가? 시장을 역동적인 변동 과정과 상황 변동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 과정이라고 보았다. 자 유시장경제는 정부의 간섭 없이 내버려 두면 변동하는 조건에 매우 효율적으로 적응하고 기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인가? 주어진 틀 내에서 행동하는 수동적 인간이 아 닌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했다. 간섭이 아니라면 정부가 할 일이 뭔가? 국가 없이는 자유시장경제가 외부의 침탈, 내부의 폭력 사기로부터 온전할 수 없다. 폭 력 행위로 사회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소수 를 막을 힘이 국가나 정부에 부여된다. 이 책은 얼마나 중요한가? 전후 독일의 에르하르트 총리의 개혁, 마거 릿 대처 영국 수상,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 령, 그리고 뉴질랜드의 로저 더글러스 재무 장관의 자유주의 정책이 이 책의 영향에서 나왔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사상이 미국에 전해진 것도 이 책 덕분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종운이다. 이 책을 강원대학교 민경국 교 수와 함께 옮겼다.


사회주의는 왜 실패하는가? 사유재산을 철폐하면 시장이 사라진다. 시장이 없으면 가격도 없다. 가격이 없으면 낭비와 비효율을 막을 수 없다. 사회주의 운동이 승리해도 사회주의 사회질서가 유지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다.

미제스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의 선호와 선택이 시장경제를 만든다고 했다.


인간행동 루트비히 폰 미제스 지음 민경국, 박종운 옮김 2011년 10월 20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588쪽(1권), 682쪽(2권), 680쪽(3권) 25,000원(1권), 28,000원(2, 3권)


작품 속으로

Human Action 인간행동 I


제1부 인간의 행동


1장 행동하는 인간

1. 목적을 추구하는 행동과 동물적 반응 인간의 행동은 목적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혹은 다음과 같 이 말할 수도 있다. 행동은 현재 작동하고 있으면서 다른 매 개물로 변형된 의지다. 행동은 목적과 목표를 지향하는 것 이다. 행동은 자극에 대해, 그리고 환경조건에 대해 자아가 의미 있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행동은 인간의 삶을 결정 하는 세상의 조건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구들이 아마 기존의 정의를 더 분명하게 하고, 오 해의 소지를 없앨 수는 있다. 그러나 정의는 그 자체로 적절 하며, 주석을 붙여 보완할 필요는 없다. 의식적 혹은 의도적 행동은, 무의식적인 행동, 즉 육체의 세포와 신경이 어떠한 자극에 대해 반사적으로 또는 무의식 적으로 하는 반응과는 첨예하게 대비된다. 사람들은 때때로 의식적인 행위와 인간의 육체 내에서 작용하는 힘들의 무의 식적인 반응 사이의 경계가 다소 애매하다고 생각하기도 한 다. 어떤 구체적 행위가 자발적인 것인지 혹은 무의식적인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생각 이 정확하다. 그러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구별은 뚜렷하 며 어느 쪽인지 분명히 결정할 수 있다.


육체의 기관 및 세포의 무의식적인 움직임도 행동하는 자아에게는 외부 세계의 다른 어떠한 사실 못지않게 하나의 여건이다. 행동하는 인간은 날씨, 이웃의 태도 등 다른 여건 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도 감안해야 한다. 물론 목적의식적 행동이 육체적 요소의 작 용을 중화하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몸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때때로 그의 의지의 힘으로 질병을 극복하고 선천적 혹은 후천적 체질의 결함을 상쇄하며 반사적 작용들을 억누르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한, 목적의식적 행동의 범위는 넓어 진다. 만일 사람이 세포 및 신경중추의 무의식적 반응을 통 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제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행동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목적의식적이다. 우리가 다루는 과학의 영역은 인간의 행동 그 자체이지, 행동으로 귀결되는 심리적 사건이 아니다. 인간행동의 일 반 이론, 즉 인간행동학을 심리학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심리학의 주제는 일정한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혹 은 일정한 행동을 초래할 수 있는 내적 사건들이다. 인간행 동학의 주제는 행동 그 자체다. 이것은 또한 잠재의식이라 는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인간행동학의 관계를 정해 준다. 정신분석학 역시 심리학으로서, 행동을 탐구하는 것이 아 니라 일정한 행동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힘들 및 요소들을 연구한다. 정신분석학의 잠재의식은 심리학의 범주이지 인


간행동학의 범주가 아니다. 하나의 행동은, 그것이 명료한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든, 혹은 깊숙한 의식의 심층에서 의 지를 지휘하는 잊혔던 기억이나 억눌렸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든 간에, 그 행동의 본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 는다. 잠재의식적 충동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건,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관찰자에게는 얼핏 무의미해 보이 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신경쇠약 환자이건, 이들은 모두 행 동한다. 즉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목적 을 지향하고 있다. 신경쇠약환자나 정신병자의 행동조차도 의미가 있음을 밝혀 준 것은 정신분석학의 업적이다. 스스 로를 정상적이고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에게는, 신경쇠약 환자나 정신병자들이 목적을 선택할 때 사용한 추론 과정이 황당무계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들이 목적의 달성과 상충되어 보인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역시 행동하고 있으며 목적을 지향하 고 있음을 밝힌 것은 정신분석학의 업적이다. 인간행동학에서 사용되는 ‘무의식적(unconscious)’이라 는 용어와, 정신분석학에서 적용되는 ‘잠재의식적(subconscious)’ 및 ‘무의식적’이라는 용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고 및 연구 체계에 속한다. 다른 학문 분야 못지않게 인간 행동학도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있다. 그럴 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인간행동학을 정신분석학으로부터 구별하는 경계선을 알아보는 것이다.


행위만이 단순히 선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물이나 사건들을 피할 수 없거나 또는 피할 수 없을 것이 라고 믿어지는 상황에서도 선호를 보인다. 그래서 사람은 비보다 햇살을 선호하며, 태양이 구름을 쫓아 버리기를 바 랄 수도 있다. 오로지 소망하고 희망하기만 하는 사람은 사 건의 진행 과정이나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능동적으 로 개입하지 못한다. 그러나 행동하는 인간은 선택하고 결정 하며,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두 가지 모두 동시에 가질 수 없을 때, 사람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 그러므로 행동은 항상 취사선택을 수 반한다. 소망과 희망을 표시하는 것, 그리고 계획된 행동을 공표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떤 일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인 한 행동의 형태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와 관 련된 행동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공표하고 권 고하고, 거부한 행동들과는 동일하지 않다. 행동이란 실물 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총체적 행위이지, 계획은 되었으 나 실천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그 사람의 말이 아니다. 다른 한편, 행동은 노동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행동이란 목 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사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용 되는 수단 중의 하나가 행동하는 인간의 노동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특별한 조건에서는, 요구되는 모든 것 은 한마디 말뿐이다. 명령하거나 금지시키는 사람은 노동 을 하지 않고도 행동할 수 있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그리고 미소를 짓거나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이 하나의 행동이 될 수 있다. 소비하고 즐기는 것은, 소비 하고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억제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행동이다. 인간행동학은 따라서 ‘능동적인’ 혹은 정력적인 사람과, ‘수동적인’ 혹은 게으른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자기의 조 건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활기찬 사람이 사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나태한 사람보다 행동을 더 하는 것 도, 덜 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가하게 있는 것 역시 하나의 행동이며, 그것 역시 사건의 진 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개입할 만한 조건이 존재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개입하든지 개입하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사람은 행동하는 것이다. 그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또 다른 결과를 얻기 위해 개입하 는 사람 못지않게 행동을 한다.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생리적 및 본능적 요소의 작동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는 사람도 역시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은 무엇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 이기도 하다. 우리는 행동이 인간의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의 지식에 무엇을 더하지는 않는다. 왜 냐하면 의지라는 용어는 다름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상황 들 중에서 선택하고, 하나를 선호하고 다른 것은 제쳐 두며,


또한 내려진 결정에 따라 선택한 상태를 지향하고 다른 것 은 버리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인간행동의 필요조건 더 이상 어떤 행동을 초래하지도 않고, 또 초래할 수도 없는 그런 인간의 상태를 우리는 유족함 또는 만족이라고 한다. 행동하는 인간은 불만족한 상태를 좀 더 만족스러운 상태로 바꾸고 싶어 한다. 그의 마음은 그에게 좀 더 적합한 상태를 상상하고, 그의 행동은 이 바람직한 상태의 실현을 지향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하는 동기는 항상 약간의 불편 이다.4) 자기가 처한 상황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변화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소망하지 도 바라지도 않을 것이며, 완벽하게 행복해할 것이다. 그는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근심걱정 없이 그저 살아가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불편함과 더 만족스러운 상태에 대한 상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세

4) 로크(Locke), ≪인간의 이해에 관한 소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Fraser 편집, Oxford, 1894), I, pp.331∼333, 라이프니 츠(Leibniz), ≪새 인간오성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Fammarion 편집), p.119.


번째 조건이 필요하다. 즉 목적의식적 행위를 함으로써 그 것이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없애거나 최소한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가 그것이다. 이 조건이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가항력에 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행동의 일반 조건들이다. 인간은 이 러한 조건에서 사는 존재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일 뿐 아니 라 그에 못지않게 행동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태어 났으나 선천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얻은 장애로 인해 영원 히(그 용어의 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어떠한 행동에도 부적합한 사람은 사실상 인간이 아니다. 법 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으로 간주되겠지만, 그들 은 인류의 본질적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갓 태어난 아기 역 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생아는 인간의 특성이 충분히 발달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아직 지나지 않았다. 이 진화가 끝나야 신생아는 행동하는 존재가 된다.

행복에 관해

우리는 일상적 대화를 할 때 자신의 목적 달성에 성공한 사 람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의 상태를 좀 더 적합하게 표현 하려면, 그 사람이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


하는 관용어법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오해들을 피해야 한다. 인 간행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항상 행동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 족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 개인의 가치판단만이 무엇이 더 큰 만족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며, 그 이외에 다른 기준은 없다. 이 가치판단은 사람에 따라, 또는 같은 사람이라도 때 에 따라 다르다.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또는 덜 불편하 게 느끼도록 만든 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기준으로 해서 그 자신의 개인적·주관적 가치판단을 통해 그 자신이 수립한 것이다. 무엇이 동료 인간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판단해 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정립하는 것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물질주의와 이상주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무신론과 종교 등의 대립 명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로지 그 자신의 조 건을 개선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사람이 있지만, 이에 반 해 동료 인간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그에 대해 그 자신의 어 려움만큼, 혹은 그 이상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성생활, 먹고 마시는 것, 좋은 집, 기타 물질적인 것 외에는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보통 ‘더 고고한’, ‘이상적’ 이라고 불리는 만족에 더 신경을 쓴다. 사회적 협동이라는 요구조건에 자신의 행동을 맞춰 나가길 열망하는 사람이 있 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사회생활의 규율을 무시하는 다 루기 힘든 사람도 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


를 천국에서의 생활을 위한 준비에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 면, 어떠한 종교의 가르침도 믿지 않으며 전혀 종교에 영향 을 받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행동학은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다. 인간행동학이 발견해 낸 것들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 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행동에 유효하다. 인간행 동학은 수단의 과학이지 목적의 과학이 아니다. 인간행동학 은 행복이라는 용어를 순전히 형식적 의미로 사용한다. 인간 행동학에서, 인간의 유일한 목적이 행복을 얻는 것이라는 명 제는 동어반복이다. 그 명제는 인간에게 행복을 기대할 상태 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행동의 주요 동기는 항상 어떤 불편이며 그 행동의 목적은 가능한 한 그러한 불편을 없애는 것, 다시 말해 행동 하는 인간이 좀 더 행복을 느끼려는 데 있다는 생각이 행복주 의와 쾌락주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말하는 쾌락(ἀταραξία=ataraxia, 커다란 기쁨)은 모든 인간 활동이 추구하는, 그러나 아직까지 그 전체를 다 성취한 일 이 없는, 완벽한 행복과 충족의 상태다. 이러한 인식의 웅대 함 앞에서, 이 철학의 대표자들이 고통과 기쁨이라는 개념 이 가진 순수 형식 논리적 특성을 깨닫지 못했으며, 그 개념 에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육체적 의미만 부여했다고 비판 해 봤자 별 의미가 없다. 신학, 신비주의, 그리고 다양한 윤 리를 주장하는 여러 다른 학파들도, 쾌락주의가 ‘더 높고’


‘더 고상한’ 기쁨을 무시했다고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반 대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학파의 핵심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행복주의, 쾌락주의 및 공리주의의 초 창기 옹호자들의 저작들은 몇 가지 점에서 분명 오해의 소 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 특히 현대 경제학자의 언어는 너무나 정확하고 직설적이어서 오해의 여지가 없다.

본능 및 충동에 관해

본능사회학의 방법으로는 인간행동의 근본 문제에 대한 이 해를 증진할 수 없다. 본능사회학파는 인간행동의 여러 가 지 구체적 목표들을 분류하고, 분류된 각각의 목표마다 그 것의 동기로서 특정한 본능을 할당한다. 인간이 마치 여러 가지 선천적 본능과 기질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보인다. 이러한 설명이 경제학 및 공리주의적 윤리의 혐오스러운 가 르침을 한 방에 제거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포이어바 흐는 이미 모든 본능이 행복을 향한 본능이라고 정확히 관 찰했다.5) 본능심리학(instinct psychology), 본능사회학의 방법은 행동의 직접적인 목표들을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이 들 각각을 실재(實在)로 보고 있기에, 인간행동학에서는 하

5) 포이어바흐(Feuerbach), ≪전집(Sämmtliche Werke)≫(Bolin and Jodl 편집, Stuttgart, 1907), X, p.231.


나의 행동이 추구하는 목표가 어떤 불편을 제거하는 것이라 고 하는 반면, 본능심리학에서는 그것이 본능적인 절박성을 충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능학파의 옹호자들은 행동이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합리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선천적인 힘, 충동, 본능 및 기질과 같은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점 을 입증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합리주의의 겉핥기를 타파해 왔다고 확신하며, 경제학에 대해 “잘못된 심리학적 가정으로부터 도출된 잘못된 결론투성이”6)라고 경멸한다. 그러나 합리주의나 인간행동학 혹은 경제학은 행동의 궁극 적인 원천이나 목표가 적절한지를 다루지는 않으며, 추구하 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 채택하는 수단이 적절한지를 다룬다. 설사 충동 혹은 본능이 분출되어 나오는 그 깊은 곳에 대해 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의 만족을 위해 선 택하는 수단들은 지출 및 성공에 대한 합리적 고려를 통해 결정된다.7) 감정적 충동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역시 행동하는 것이 다. 감정적 행동이 다른 행동과 다른 점은 투입과 산출에 대 한 가치판단에 있다. 감정은 평소의 가치판단을 뒤흔들어

6) 윌리엄 맥두걸(William McDougall), ≪사회심리학 개론(An Introduction to Social Psychology)≫(14th ed., Boston, 1921), p.11. 7) 미제스(Mises), ≪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들(Epistemological Problems of Economics)≫(G. Reisman 번역, New York, 1960), p.52 이하.


버린다. 열정에 불타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차분하게 생각 할 때보다 목표에 대해서는 더 바람직하게 여기고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덜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다. 의심의 여 지 없이 사람들은 감정적인 상태에서도 수단과 목적에 대해 고려하고 있는데, 열정적 충동에 굴복할수록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런 고려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감정적 흥분 상태나 만취한 상태에서 범행한 사람을 다른 범죄자보 다 가볍게 처벌하는 것은 그런 지나친 행위를 고무하는 것 과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통제 불능인 감정에 휩싸인 사람 조차 엄격한 보복의 위협으로 제지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이 어떤 순간의 지배적 충동에 굴복한다는 가정에서 동물의 행동을 해석한다. 동물이 먹이를 구하고, 가족을 이루고, 다른 동물 혹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서 우리는 동물의 영양, 재생산 그리고 공격 본능에 대해 이 야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본능들을 선천적인 것이며 무조건 적으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사람은 만족을 아주 절박하게 추구하는 충동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될 존 재가 아니다. 사람은 그의 본능, 감정, 그리고 충동을 억제 할 수 있는 존재다. 즉 사람은 그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조절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바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불타오르 는 충동의 만족을 포기한다. 사람은 욕구의 꼭두각시가 아 니다. 사람은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모든 여성을 추행하지


는 않는다. 사람은 입맛을 당기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우지 않는다. 사람은 죽이고 싶은 모든 사람을 때려눕히지는 않 는다. 사람은 일정한 척도에 따라 그의 욕망과 욕구를 배열 하고, 선택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행동한다. 사람을 동물 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람이 심사숙고 해 그의 행동을 조절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금기(禁忌)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그의 충동과 욕구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이며, 또한 본능적인 욕구와 충동을 억제할 힘을 소유 한 존재다. 어떤 충동은 너무나 큰 나머지, 이를 충족함으로써 야 기될 어떤 불리함도 그 개인에게는 이를 충족하는 일을 막 을 만큼 커 보이지 않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이 경우도 역시 선택이다. 그 사람은 특정 충동에 굴복하길 선호하는 쪽으 로 결정한 것이다.8)

3. 궁극적 기정사실로서 인간행동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모든 존재의 이유와 모든 변

8) 이러한 경우에는 해당되는 두 개−충동에 굴복함으로서 기대되는 것, 그리 고 바람직스럽지 않은 결과를 피함으로써 기대되는 것−의 욕구 충족이 동 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환경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앞의 책, pp.479 ∼490 참조.


동의 이유로서 최초의 원동자에 대해, 모든 것의 출처이자 그 자체의 원인인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과 학은 더 겸손하다. 과학은 인간정신의 한계와 지식 탐구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과학은 모든 현상을 그 원천을 찾아 추적해 올라가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이러한 노력이 넘 을 수 없는 벽에 반드시 부딪히고 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세상에는 분석될 수 없고 다른 현상으로 추적될 수 없는 현 상들이 있다. 그것들을 궁극적 기정사실(the ultimate given)이라고 한다. 과학 탐구의 진보로 인해 예전에는 궁 극적인 기정사실로 여기던 것이 이제는 이를 몇 개의 구성 요소들로 환원할 수 있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환원될 수 없고 분석될 수 없는 일부 현상, 즉 궁극적 기정 사실은 항상 남을 것이다. 일원주의(monism)는 궁극적 실재가 단 하나 있다고 하 고, 이원주의(dualism)는 두 개, 다원주의(pluralism)는 여 럿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다툴 접점은 없 다. 그런 형이상학적 토론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수준으로는 모든 사람이 만족하게 여 길 만한 답을 가지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단이 없기 때문 이다. 유물론적 일원주의는 인간의 사고와 의지가 신체 기관, 뇌세포 및 신경이 작동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생 각, 의지, 행동은 어느 날엔가 물리적·화학적 탐구 방법에


의해 완전히 설명될 수 있을 물질적 과정을 통해서만 일어 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지지자들은 그것을 흔들릴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주장도 역시 형이상학적 가설일 뿐이다. 마음과 육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다. 그 학설들은 관찰된 사실과 관계없는 추측 일 뿐이다. 확실히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과정과 생리적 과정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들이 있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연관의 본성 및 작동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 을 정도다. 구체적인 가치판단들과 일정한 인간행동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분석할 여지가 없다. 그 구체적인 가치판단과 일정 한 인간행동들은 이것들이 있게 한 원인들에 절대적으로 의 존하며, 조건이 정해진다고 우리가 가정하거나 믿어도 별 문 제가 없다. 그러나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외부의 사실들이 어 떻게 인간의 마음에 구체적 행동으로 귀결되는 일정한 생각 과 의지를 만들어 내는가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방법론적 이원주의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의 현재 지식수준에서 볼 때 실증주의·일원주의·범물리 학주의의 근본 명제들은, 어떠한 과학적 기초도 갖고 있지 않으며 과학적 탐구를 위해서는 아무 의미도 없고 또 소용 도 없는 형이상학적 가정들일 뿐이다. 이성과 경험은 우리 에게 두 가지 분리된 영역, 즉 물리학적·화학적·생리학


적 현상이라는 외적 세계와, 생각, 느낌, 평가, 목적의식적 행동이라는 내적 세계, 두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영역을 연결해 주는 다리는−현재 우리 눈앞에는− 없다. 동일한 외부 사건이 때로는 인간에게 서로 다르게 반 응하게 하고, 서로 다른 외부 사건이 때로는 인간에게 동일 하게 반응하도록 한다. 왜 그런지 우리는 모른다. 이러한 사정을 접하면 우리는 일원주의 및 유물론의 본 질적 진술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 학이 화학적 화합물의 생산을 일정한 요소 결합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설명하듯이, 언젠가는 자연과학이 일정한 사상, 가치판단, 행동에 관해서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성 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동안은 방법론적 이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행동은 변화를 야기하는 매개체 중의 하나다. 그 것은 우주의 활동과 변화의 한 요소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 은 과학적 연구의 정당한 대상이다. 인간의 행동은−적어 도 현재로서는−그 근원으로까지 추적해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것, 즉 궁극적 기정사실 로 간주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연구되어 야 한다. 인간의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가 거대한 우주의 힘 이 작동한 효과와 비교할 때 아주 미미하다는 점은 옳다. 영 원의 관점에서, 그리고 무한한 우주라는 관점에서, 사람은


하나의 아주 미미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에게 인간의 행동과 그 행동의 부침(浮沈)은 현실적인 것이 다. 행동은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핵심으로, 그의 생명을 보 존하고 그 자신을 동식물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수단이 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노력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소멸 되기 쉽고 미미할지라도, 인간과 인문과학에게 가장 중요 한 것이다.

4. 합리성과 비합리성: 주관주의와 인간행동학 연구의 객관성 인간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항상 합리적이다. ‘합리적 행동’이라 는 말은 따라서 동어반복이며, 그렇게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의 궁극적 목적에 적용해 볼 때 합리적, 비합리적이라는 말들은 적절치 못하고 의미가 없다. 행동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행동하는 사람의 어떤 바람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행동하는 다른 개인의 가치판단을 자신의 가치판단 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적과 의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헛된 일이다. 무엇 이 다른 사람을 보다 행복하게, 또는 덜 불만족스럽게 만들 것인가를 선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평가는 만일 그가 그의 동료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그가 지


향했을 것이라고 믿는 바를 우리에게 말하기도 한다. 즉 독 재자와 같은 거만한 태도로 자기 동료의 의지와 열망을 경솔 하게 재단하면서, 그 동료가 처한 조건이 비평하는 사람 자신 에게 더 맞았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만일 어느 행동이 ‘물질적인’ 또는 실질적인 이득을 희생 시키고 ‘이상적인’ 혹은 ‘보다 고고한’ 만족의 획득을 지향하 고 있으면, 우리는 보통 그 행동을 비합리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말하길, 예를 들어−어떤 때에는 찬성하고 또 어떤 때에는 찬성하지 않지만−어느 사람이 ‘보 다 고고한’−그가 갖고 있는 종교, 철학 및 정치적 신념에 대 한 충성, 또는 자기 민족의 자유와 번영 등과 같은−목적을 얻기 위해 그의 생명, 건강 혹은 부를 희생할 때, 비합리적 고 려에 의해 그의 동기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 다 고고한 목적의 추구는 다른 인간적 목적에 대한 추구보다 더 합리적이거나 덜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삶과 건강에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바람이 다른 재 화 또는 쾌적한 설비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자연 적이며 혹은 정당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다. 음식과 따 뜻한 안식처에 대한 취향은 인간 및 다른 포유류에 공통적 이며, 일반적으로 음식과 주거할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은 그의 노력을 이러한 절박한 욕구의 충족에 집중하며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옳다. 살려고 하는 충동,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충동, 그리고


자신의 생명력을 강화할 모든 기회를 이용하려는 충동은 살 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서 찾을 수 있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이 충동에 대한 굴복이−인간에게는− 불가피한 필연은 아니다. 모든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충동, 번 식의 충동에 무조건적으로 이끌리는 반면, 인간은 심지어 이러한 충동마저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인간은 그의 성적 욕구, 살려는 의지 모두를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은 그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조건이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느껴질 때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인간은 대의를 위해 죽을 수도 있으며, 자살을 할 수 도 있다. 산다는 것도 인간에게는 선택의 결과이자 가치판 단의 결과다. 풍족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도 마찬가지다. 고행자가 있 다는 것, 또 자신의 신조를 따르기 위해, 혹은 자신의 위엄 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이득을 단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바로 그것도, 좀 더 실질적인 쾌적한 시설들의 추구 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의 결과라는 증거다. 물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는 삶을, 그리고 가난 보다는 부를 좋아하지만. 육체의 생리적 요구를 충족하는 것만을 ‘자연적’이며 따라 서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인위적’이 며 따라서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의적이다. 인간


이 다른 모든 동물들처럼 음식, 주거지 및 함께 살기를 추구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만족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 본 성의 성격적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바람과 필요보다 더 ‘고고하다’고 부를 수 있는 인 간 특유의 바람과 필요를 가지고 있다.9) 목적의 달성을 위해 선택된 수단에 적용할 때, 합리적 혹 은 비합리적이라는 말은 사용한 절차에 대한 편의성과 적합 성 판단을 함축한다. 비평가는 문제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그것이 가장 적합한가 하는 관점에서 그 방법에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인간의 이성은 무오류가 아니며, 또 한 사람이 수단을 선택하고 적용할 때 자주 잘못을 범하는 것은 사실이다. 추구하는 목적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는 기 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목적에 반하지만, 그러나−비 록 잘못된 것이라 해도−이성적인 숙고의 산물이며, 비록 효과가 없었다고 해도−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도 라는 점에서−합리적이다. 암의 치료를 위해 현대의 의사 라면 쓰지 않을 어떠한 방법들을 사용했던 100년 전의 의사 들은−현대 병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교육을 잘못 받았

9) 임금철칙에 함축되어 있는 실책에 관해서는 III권의 p.1168 이하(21장 6절 임금과 최저생계비 개념) 참조[인간은 임금철칙설이 이야기하는 동물적 수 준의 생존을 넘어서고 있다]. 맬서스학파 이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관해 서는 III권의 pp.1295∼1306(24장 2절 산아제한) 참조[인구 증가와 식량 간의 관계에서도 인간은 동물적 수준의 성적 발현을 넘어서 산아제한을 의 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고 따라서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사들이 비합리 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아마 도 앞으로 100년 이내에 많은 의사들이 이 질병 치료에 보 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들이 현재의 우 리 의사들보다 더 효과적이지만, 더 합리적이지는 않을 것 이다. 행동의 반대말은 비합리적 행위가 아니다. 그 반대말은 신체 기관의 한 부분을 자극한 데 대한 반사적 반응이고, 그 사람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본능들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해 인간은 어느 조건에서는 반사적 반응과 행동 같은 두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독을 마셨다면 신체 기관은 해독방어력을 갖추어 반응한다. 이에 덧붙여, 해독 제를 사용하는 식으로 행동이 개입한다. 합리적 및 비합리적이라는 두 대립 명제에 관한 문제에 서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간에 차이가 없다. 과학은 항상 합 리적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이용 가능한 모든 지 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우주현상을 정신적으로 파 악하고자 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어느 대상을 그 구성 요소로 분석하면,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만다. 인간 의 정신은 더 이상 분석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궁극적 기정 사실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종류의 지식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 지점까지 인간의 마음을 이끌고 온 과학적 방법은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더 이상 과학으로 분석될 수 없는 궁 극적 기정사실만을 비합리적 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요즈음에는 너무나 합리적이라는 점을 들어서 사회과학 을 흠집 내는 것도 유행이다. 경제학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반론은, 경제학이 삶과 현실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성을 무 시하고 무한히 다양한 현상들을 무미건조한 합리성의 틀과 냉정한 추상성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비난 도 이보다 더 황당할 수는 없다. 모든 분야의 지식과 마찬가 지로, 경제학도 합리적 방법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한도까지 갔다. 그런 연후에−적어도 현재 우리의 지식수준에서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현상, 즉 궁극적 기정사실에 직면했 다는 사실만 수립해 놓고, 경제학은 그 이상의 탐구를 멈추 었기 때문이다.10)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의 가르침은, 인간행동의 잠재적 동 기, 원인, 목표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행동에 대해 타당하다. 궁극적인 가치판단, 그리고 궁극적인 인간행동의 목적은 어 떠한 종류의 과학적 탐구에게도 궁극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분석할 여지가 없다. 인간행동학은 그러한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된 방식과 수단을 다룬다. 인간행동학의 연구 대상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10) 우리는 나중에, 경험적 사회과학들이 궁극적 기정사실을 어떻게 다루는 지를 보게 될 것이다(2장 7절 역사학의 영역과 특수한 방법론, 8절 개념과 이해, pp.99∼121).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인간행동과학의 주관 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행동과학의 주관주의 는 행동하는 인간이 선택한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여건으 로 삼고, 그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완전히 중립적이며, 어 떠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도 삼간다. 인간행동과학이 적 용하는 유일한 기준은 선택된 수단이 지향하는 목적 달성에 맞는지 여부다. 행복주의에서 행복을 말할 때, 그리고 공리 주의나 경제학이 효용을 말할 때, 행동하는 사람의 눈에 그 것이 바람직해 보였기 때문에 그가 지향하는 것처럼, 우리 는 이러한 용어들을 주관주의적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현대적 의미의 행복주의, 쾌락주의, 공리주의는 옛날의 물 질적 의미와 상반되게 되었고, 현대의 주관주의 가치 이론 도 고전파 정치경제학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은 객관주의 가 치 이론과 상반되게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형식 논리 때문 이다. 동시에, 우리 과학이 객관적인 것은 주관주의 때문이 다. 우리 과학은 주관주의적이기 때문에, 또 우리 과학은 행 동하는 사람의 가치판단을 더 이상 비판적 검토의 여지가 없는 궁극적 여건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은 당파 및 분파들 의 모든 싸움에 초연하며,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독단주의 학파들 및 윤리적 학설들의 충돌에 무관하며, 또한 평가, 미 리 주입된 사상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보편적 으로 타당하며, 절대적으로, 또 완전히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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