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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예속된 영혼 가려 애쓰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저승. 눈을 뜨는 곳은 이승의 물 위에 박혀 있는 나룻배.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소외되고 소외하는 현대인, 카프카와 우리들.

<사냥꾼 그라쿠스>를 쓰던 1917년의 카프카


인텔리겐치아 2392호, 2015년 1월 8일 발행

겨울밤에 좋은 책 4 편영수가 옮긴 빌헬름 엠리히의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

카프카의 작품에서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 는 두 개의 세계, 즉 사냥꾼 그라쿠스와 손님, 보편적 세계 관청과 카(«소송»과 «성») 등은 카프카가 자의적으로 또는 공상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다. 이 두 세


계는 근본적으로는 유일한 세계이며 다름 아 닌 인간 세계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빌헬름 엠리히 (Wilhelm Emrich) 지음, 편영수 옮김, 59쪽

이 두 세계의 이름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 현실과 비현실, 전체성과 개별성 과 같은 이율배반의 세계다. 카프카는 이것 을 현대사회의 모습으로 인식하고 문학으로 형상했다. <사냥꾼 그라쿠스>를 놓고 카프카의 이율배 반을 설명할 수 있는가? 1917년에 쓴 미완성 단편소설이다. 이승 과 저승 사이에 있는 그라쿠스의 이야기다.


1500년 전 슈바르츠발트에서 영양을 쫓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야 하는 나룻배는 방향을 잃었다. 그 가 탄 배는 바람이 이끄는 대로 이승을 떠돈 다. 그러다 어느 날, 리바의 시장 살바토레를 만난다. 살바토레는 그에게 지금 상황과 지 나온 삶을 묻는다. 그라쿠스는 대답하는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 즐거웠던 삶, 만족스러 웠던 죽음, 이승을 맴도는 불행을 이야기한 다. 그의 이야기는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다. 곧 보편 진리다. 그러나 살바토레는 눈앞의 행복과 이익에 정신이 팔려 있어 그를 이해하지 못


한다. 보편 진리를 망각한 채 살아가기 때문 이다. 여기서 현대는 어떤 모습인가? 그라쿠스의 상황이다. 저승에 가려 애를 쓰 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눈을 뜨는 곳은 이승의 물 위에 황량하게 박혀 있는 나룻배 위일 뿐이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시에 그도 산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다. 무슨 뜻인가? 지상 세계에 완전히 예속되었고 서로에게 소 외된, 서로를 소외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엠리히는 어떻게 분석했는가? 이 작품을 카프카 작품 구조의 본보기로 제 시했으며 그라쿠스를 카프카와 비교해 설명 했다. 그라쿠스는 카프카인가? 타당한 추측이다. 그라쿠스라는 이름과 카 프카의 처지 때문이다. ‘그라쿠스(Gracchus)’ 는 라틴어로 ‘까마귀’라는 뜻인데, 체코어 ‘카 프카(kavka)’도 그렇다. 카프카는 자신을 자 주 ‘까마귀’로 부르곤 했다. 카프카는 스스로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가? 이렇게 썼다.


“나는 아주 이상한 새다. 나는 까마귀다. 한 마리 까마귀. 나는 정신없이 사람들 사 이를 뛰어다닌다. 사람들은 아주 의심스 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실제로 나 는 아주 위험한 새, 도둑 까마귀다. 그러 나 이것은 단지 겉보기에 그럴 뿐이다. 실 은 나는 빛나는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다. 나는 재처럼 거무스레하다. 돌 틈으로 사 라지기를 갈망하는 한 마리 까마귀.” 당시 카프카의 처지는? 이 작품을 쓰기 몇 해 전 이탈리아의 항구도 시 리바 델 가르다에서 휴가를 보냈다. 당시 그는 아버지와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 등 주 변인과 갈등을 겪었고 철저하게 단절되었


다.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으로서 프라하에 거주하는 상황에서 오는 소외 등도 작품의 중심 주제와 모티브로 활용되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어떤 책인가? 카프카의 전체 작품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 초의 연구서다. 전 세계 카프카 연구자가 빠 짐없이 인용하는 책이다. 기존 카프카 연구 의 한계를 지적하고, 신학적·정신분석학 적·사회학적 해석을 소개한다. 무엇이 한계였나? 카프카 문학의 수수께끼를 그저 경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현상들로 해명하려 한 것이 다. 그의 문학은 특정 종교 관념이나 신앙 내


용, 특정 사회 현상과 자서전적 현상의 반영 이 아니다. ‘보편성(das Universelle)’을 형상 화한 것이다. 카프카에게 ‘보편성’이란 뭘 말하나? 특정할 수 없다. 다양한 형상으로 등장하며 언제나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그 무엇이 다. 빌헬름 엠리히는 누구인가? 독일에서 영향력이 대단한 문예학자다. 1933 년 사도 바울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 를 받은 뒤 괴테와 카프카를 집중적으로 연 구했다. 괴팅겐, 쾰른, 베를린 대학교에서 독 문과 교수를 지냈다. 문헌학적 연구를 수단


으로 삼아 문학을 그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과 연결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편영수다. 전주대학교 명예교수다.


완전히 예속된 영혼 가려 애쓰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저승. 눈을 뜨는 곳은 이승의 물 위에 박혀 있는 나룻배.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소외되고 소외하는 현대인, 카프카와 우리들.

<사냥꾼 그라쿠스>를 쓰던 1917년의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빌헬름 엠리히 지음 편영수 옮김 2011년 11월 18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802쪽, 38,000원


작품 속으로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


제1장 보편적 주제

고전미와 현대미 비밀은 모든 위대한 문학의 요소다. 동시에 비밀은 위대한 문학에 인간성을 부여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비밀은 보편 성의 지배에서 개별성을 구해 낸다. 그 이유는 “개념들을 빌 리지 않고도 마음에 흡족한 것이 미(美)이기”(칸트)1) 때문 이다. 그리고 “미는 자신에 대해 명료하게 알 수 없다”(괴 테).2) 미에는 비밀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비밀은 보편적이 기 때문에 불충분한 개념들을 사용해서 문학의 미학적 매 력, 마법, 번역할 수 없는 것, 독창적인 것이나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끌어낸다. 그러나 비밀은 비인간화의 요소이기도 하다. 비밀은 접 촉과 모든 인간성의 토대를 파괴한다. 이때 비밀은 고립되 어 모습을 드러내면서 두려움을 널리 퍼뜨리고, 철저하게 모든 일반적인 이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기괴함3) 안에 들어 있는 공포와 악몽을 일깨운다. 오직 비밀로 존재하면서 매정

1) ≪판단력 비판≫[이마누엘 칸트(카를 포어랜더 편), 함부르크, 1954] 58쪽. 2) ≪문학과 윤리학에 관한 원칙과 성찰≫(괴테, 바이마르, 1907) 139쪽. 3) ≪그로테스크. 회화와 문학에서의 형상화≫(볼프강 카이저, 올덴부르크, 1957) 참조.


하게 모든 이해의 사고를 거절하는 비밀은 미를 파괴한다. 비 밀은 미의 요소이지 본질은 아니다. 그 이유는 미는 ‘이념의 감각적 가상’4)이지 이념의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의 비합리적 요소에 대한 잘못된 담론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개념들을 빌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마음에 흡족한 것 이 미”라고 칸트는 완벽하게 정의하고 있다. 미는 비밀과 폭 로, 개별성과 보편성의 합성명제다. 시문학은 ‘공공연한 비 밀’(괴테)을 형상화한 것이다. 개별성 속에 보편성이, 그리 고 보편성 속에 개별성이 숨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경우에만 시문학은 인간성을 유지한다. 이 경우 에만 시문학은 화해의 가상 속에서 공허한 보편성의 강압적 지배와 고립된 개별성의 절망적인 악몽을 지양하게 된다. 미는 가상이기 때문에 이 화해는 가상이기는 하지만, 그러 한 합성명제의 가상 속에서 완전하고 구체적이며 동시에 보 편적인 인간성의 가능성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강력하게 알린다. 이러한 사상들은 고전주의의 유산이다. 이 사상들은 그 것이 폭로되거나 누설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이해 불가능이라는 공포의 가면을 쓰고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의 단절을 명시적으로 완수하는 20세기의 극단적인 예술 형태 들에서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4) ≪미학 입문≫[헤겔(글로크너 편), 12권, 슈투트가르트, 1927] 160쪽.


이 논제는 놀라운 것이어서 근거를 필요로 한다. 앞서 정 의한 고전적 의미에서 미는 20세기의 이해 불가능한 예술 작품들에도 살아 있다. 이러한 예술 형태들에서 보이는 개 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단절의 의미가 폭로될 때, 이 외견상 의 모순이 해소된다. 비정상적이며, 병적인 것으로 비난받 기도 하는, 겉보기에 극히 개별적인 이 예술 형태들이 파괴 한 보편성은 더 이상 고전주의 미학의 보편성이 아니며, 헤 겔(G. W. Fr. Hegel)의 의미에서의 이념이 아니며, 칸트와 실러(Friedrich Schiller)의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 괴 테의 의미에서의 근원 현상 혹은 낭만주의적 의미에서의 무 한성이 아니다. 보편성은 세계관, 이데올로기, 실제적이며 기술적인 행위의 원칙, 건강한 인간의 오성으로 곡해된다. 그런데 건강한 인간의 오성은 세계를 지배하고 조망하면서 지배를 구실로 자유와 인간 존엄의 이념을 악용한다. 고전 주의적 의미에서 참된 보편성은 20세기에는 사실상 ‘이해 불가능하게’ 됐다. 보편적 진실은 이해 불가능한 예술 작품 들의 내부로 물러난다. 이해 불가능한 예술 작품들은 철저 하게 이 보편성을 언어로나 옛 예술 형태들로 표현해서도 안 되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이것이 고전주의 예술과의 필연 적인 대립이다. 좀 더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이 참된 보편성 은 체험되거나, 믿기거나,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이 해 가능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나 예술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20세기에 고전주의의 아류에 속한 모방


자들이 드러내듯이, 고전주의의 언어 수단뿐 아니라 내용 도 불가피하게 곡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기 때문이다. 고전주의에 의해 정의되고 형성된 보편적 진실의 내용들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단지 역사적 의미만을 지닌 공허한 이데올로기로 타락했을 뿐 아니라, 참된 보편성은 말을 할 수 없게 됐고 실체도 없어졌다. 참된 보편성은 더 이상 ‘모 습을 드러낼’ 수 없으며 ‘생각될’ 수 없다. 참된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전주의 미학이 하 나의 망상이라면, 인간이 무상한 존재에 불과하다면, ‘비밀’ 도 ‘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개관하거나 계산해 낼 수 있는 구성물이라면, 보편성이 다름 아닌 20세기의 사 회적 보편성의 표상 세계이며 ‘공공의 의견’이라면, 모든 예 술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이런 전제가 틀린 것이라면, 20세기에 예술은 가능하다. 물론 20세기의 보편성에 맞선 완전한 수수께끼 형태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수수께끼 형태는 우리 시대의 사악한 보 편성의 지배에 맞서 개별성과 참된 보편성을 구원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 예술의 ‘비밀’은 동시에 인간화의 한 요소일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러한 비밀이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 른다는, 즉 인간의 이해에 문을 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포 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 정의에 의하면 이미 보편 적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개별성이 참된 보편성과 마찬가 지로 현대의 보편성의 언어와 표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현대의 보편성이 지닌 비밀의 폭로가 과연 가능할까? 다시 말해서 예술과 미는 정말 가능할까? 20세기 작가들 중에서 프란츠 카프카가 이 문제를 가장 철저하고 정확하게 해결해 놓았다. 그의 작품이 우리 시대 의 가장 폐쇄적인 작품인 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그의 작품 은 언젠가 하나의 문학으로 흡수됐던 전혀 알 수 없는 비밀 들을 담고 있다. 또 그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그래서 이미 ‘카프카 적’이라는 기형적인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이 단어는 인간 의 사고, 행위와 꿈뿐 아니라, 현대의 관청 기구, 제도와 노 예 시설이 지니고 있는 악몽과 같은 것, 미로 같고 섬뜩한 것과 부조리한 것을 뜻한다. 그건 그렇고 그의 작품이 20세 기 문학이 생산한 언어적 측면이나 예술적 측면에서 가장 완전한 구성물들 중의 하나인 데에도 까닭이 없지 않다. 과 연 그의 작품 안에 미가 실현되어 있는가? 그의 작품이 공포 와 부조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안에는 참된 보편성이 담겨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형 식과 언어로 담고 있을까? 그런데 이 언어는 해독 가능한가? 그의 작품의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카프카 문학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예술, 어쩌면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정신적 행로를 결정지을지도 모른다.


<사냥꾼 그라쿠스>의 보편성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의 일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미완성 단편소설 <사냥꾼 그라쿠스>5)에서 사냥꾼은 죽었지만 어느 정도 살아 있으면 서, 죽은 후 1500년 동안 낡은 나룻배를 타고 키가 없어 죽음 의 가장 깊은 지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채 이승의 물 위를 떠다니다가 부두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자들과 동떨어 져서 땅 위를 배회하는 한 손님의 방문을 받고 자신의 인생사 의 자초지종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우선 내게 자네의 지금 상황을 짧지만 조리 있게 말해 주게. 솔직히 말해서 난 전혀 모르고 있다네. 자네한테는 그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 또 자네는 자네 방식대로 세상사람 모두가 그 당연한 일을 알 기를 기대하고 있지. 그런데 짧은 인생에서−인생은 정말 짧 아, 그라쿠스, 이 점을 이해하려고 애써 보게−이 짧은 인생 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사실 사냥꾼 그라쿠스가 상당히 흥 미롭지만−이것은 확신이지 아부가 아냐−사람들은 그를

5) 편집자는 이 미완성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를 ≪어느 투쟁의 기록, 노 벨레, 스케치, 잠언 유고≫의 B권 ‘부록’에 수록하고(334쪽 이하) 동시에 같 은 B권에 인쇄한(99쪽 이하) 산문 소품 <사냥꾼 그라쿠스>에서 떼어 냈 다. 그러나 친필 원고의 상황은 이러한 분리가 불가능하며 두 소품이 동일 한 비중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생각하고 그에 대해 묻거나 심지어 그를 걱정할 시간이 없어. 자네들 함부르크 시민처럼 어쩌면 임종의 침상에서, 잘 모르 겠지만, 그곳에서 아마 그 부지런한 남자는 난생처음으로 몸 을 쭉 뻗을 시간을 갖게 될 테고 그때 푸른색 옷을 입은 사냥 꾼 그라쿠스는 한번쯤 여유 있는 생각을 하게 될 거야. 하지 만 그 밖에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난 자네에 대해서 전혀 아 는 것이 없어. 사업 때문에 난 여기 부두에 와 있는 거라네. 나룻배를 봤어. 발판이 준비됐지. 난 건넜어.−그런데 난 자 네에 대해 무엇인가를 전후 관계 속에서 알고 싶어.” 이에 대 해 사냥꾼 그라쿠스는 대답한다. “아! 전후 관계 속에서란 말 씀이죠. 옛날,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책들은 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그것을 칠 판에 쓰고 어머니들은 그것들에 관한 꿈을 꾸지요. 반면 가 슴에 파묻혀 어린이는 마시고 있지요. 그것은 포옹 속의 속 삭임이지요. 상인들은 그것을 고객들에게 전하고, 고객들은 상인들에게, 군인들은 행진하면서 그것을 노래 부르고, 사제 들은 교회에서 그것을 외칩니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조그 만 방 안에서 입을 벌린 채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목격하고 그것을 쉬지 않고 기록합니다. 신문에 그 사건이 인쇄되고 백성들은 그것을 손에서 손으로 건넵니다. 그것이 좀 더 빨 리 지구를 돌도록 전신기가 고안되었죠. 사람들은 그것을 퇴 락한 도시들에서 파내고 승강기는 미친 속도로 그것을 마천 루의 지붕 꼭대기까지 운반합니다. 기차 승객들은 창문에서


그들이 통과하는 지역에 그것을 큰 소리로 알립니다. 그런데 예전에 기차 승객들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맹수들의 울부짖 는 소리였습니다. 별들 속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 다들은 거울처럼 그것을 비춥니다. 개울들은 산에서 그것을 실어 냅니다. 눈은 다시 그것을 산봉우리에 흩뿌리지요. 당 신 같은 사람은 여기에 앉아 내게 전후 관계를 묻지요. 당신 은 대단히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없군요.” 이에 대해 살아 있는 손님이 대답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건 모 든 젊은이의 특성이니까. 내 생각으로는 자네가 이 세계를 한번 좀 둘러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네. 그렇게 하는 것이 자네에게 희극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여기에서 나는 그렇 게 하는 것에 놀랄 뻔했어. 하지만 그것은 정말 사실이야. 사 람들이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만 자네는 화제의 대상 이 아니네. 자네는 그 가운데 끼지 못한다네. 세계는 자기 갈 길을 가고 자네는 자네의 길을 가지만 오늘까지 난 둘이 서로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네.” 이 사냥꾼 그라쿠스의 이야기는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다. 원시시대와 현대는 끊임 없이 사냥꾼 그라쿠스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한다. 우주조차 도−별들, 바다들, 산들−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라쿠 스 이야기는 우주적 의미를 지닌 보편성이다. 모든 것이 줄 곧 그 보편성을 말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그라쿠스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산


자들은 모두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산 자들 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이 너무 많다. “난 당신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어. 사업 때문에 난 여기 부두에 와 있는 거야.” 오직 죽기 바로 직전 에 푸른색 옷을 입은 사냥꾼 그라쿠스는 한번쯤 여유 있는 생각을 하고 난생처음으로 몸을 쭉 뻗을 시간을 갖는다. 일, 사업, 삶의 고단함이 현재 존재하는 것의 참된 보편성을 생 각하지 못하게 하고, 알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사냥 꾼 그라쿠스 역시 아주 바쁜 인간들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 모든 것을 알고 가장 보편성을 띤 이야기를 대표하는 바로 그 사람이 이 바쁜 세계의 사고 체 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 “그런데 탄환(부지런 한 함부르크 사람)의 사고 체계를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 아 마 자네는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지. 나는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해. (땅 위를) 배회하는 자네는 내게 설명해 줄 수 있어.” 그러나 설명은 불가능하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반대되는 말 을 한다. 한쪽이 다른 쪽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말을 남 에게 이해시킬 수 없는 두 세계, 이것이 프란츠 카프카의 단 편소설들과 장편소설들의 모형이다.6)

6) 카프카의 서사 형식의 근본 구조로서 이 모형에 대해서는 마르틴 요하네스 발저의 논문 <형식의 기록. 프란츠 카프카의 서사문학에 대한 시론>(튀 빙겐, 1952년, 타자기로 쓴 글)이 주목을 끈다. 그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상 호 지양하는 두 개의 질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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