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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낭만주의 등장 나는 매일 닳아 사라진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이성은 모른다. 감성이 대답한다. 사회에 속박되고 교육받고 타인을 의식하는 한 우리는 우리를 찾을 수 없다.

<장 자크 루소>,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 그림, 18세기


인텔리겐치아 2414호, 2015년 1월 22일 발행

서익원이 옮긴 장 자크 루소의 ≪고백 천줄읽기≫ 나는 전에 유례(類例)가 없었던 계획, 또 앞 으로 실행에 옮기려는 모방자가 없을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내 동포들에게 한 인간 을 본성의 참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 주고 싶 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바로 나일 것 이다. -«고백(Les Confessions) 천줄읽기», 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 지음, 서익원 옮김, 22쪽


루소는 뭘 보여 주겠다는 것인가? “지금 존재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을 유일한 인간상”을 보여 주겠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밝히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겠다는 것이다. 왜 고백이 필요한가? 타인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이 미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리고 가능한 한 친절하게 총체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다. 누구에게 말하는가?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18세기 ‘철학자들’이 다.


철학자들을 지목한 이유는 뭔가? ‘철학자들’의 배반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 이 후 그는 ‘철학’을 공식적으로 버린다. 1758년 발간된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반(反) 철학을 표명했다. 이 책에서 옛 친구 들인 ‘철학자들’이 의심스러운 도덕성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철학에 항거 한다. 배반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시작은 정신과 지식의 진보, 그리고 감수성 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다. 루소와 ‘철학자들’의 차이는 뭔가? 볼테르와 백과전서파는 학문, 예술 및 기술


의 발달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사회 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 만 루소는 «학문예술론»에서 문명과 진보 에서 비롯한 잘못된 결과를 비난하고 «인 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과 불의를 사회생활에서 기인하는 죄악으로 파악한다. 감수성 해석의 차이는 뭔가? 백과전서파가 활동하던 시기 감수성은 그다 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1761년 루소 의 서간체 소설 «신 엘로이즈»와 더불어 상황이 역전된다. 이 소설은 정열에 불타는 사랑과 그 사랑의 극복, 참된 행복에 대한 열 망, 고독과 몽상, 미덕에 대한 사랑, 현실 사


회에 대한 혐오, 이상적인 사회, 바람직한 교 육 등을 그렸다. 어디까지 갔는가? 결정적인 결별은 디드로가 루소를 공격하면 서부터다. 1756년 말 디드로가 루소에게 «사 생아»를 헌정했다. 루소는 이 책에서 “악인 만이 홀로 있다”라는 문장에 분개한다. 자신 을 겨냥했음에 틀림없다고 느낀 탓이다. 이 에 대해 루소와 디드로는 서로를 혹독하게 비난한다. 적의와 대립은 점증한다. 그들 대립의 맥락은 무엇인가? 18세기 초는 철학적 합리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점차 감수성과 서정성이 전면에


부상한다. 그중 «신 엘로이즈»는 유례없 는 성공을 거둔다. 낭만주의의 싹이 나타난 것이다. 볼테르와 더불어 한 시대가 끝나고, 루소와 더불어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백≫은 어떤 의미가 있는 책인가? 자아 상실이라는 현대인의 문제가 나타난 다. 루소는 자아 상실의 원인을 교육 방식, 사회생활의 속박, 타인의 시선에서 찾는다. 대답은 잃어 가는 자신의 본모습을 찾는 것 이다. 이 작품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한 인간의 성실한 질문과 대답이다. 어떤 질문인가? 어떻게 억누르지 않고 교육하는가? 어떻게


자연에 어긋나지 않게 교육하는가? 어떻게 현실 경험과 책에서 얻은 지식을 양립시키는 가? 어떻게 개인이 자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 와 타인들이 그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를 일 치시킬 것인가? 어떻게 타인과 진정한 관계 를 세울 것인가? 어떻게 사회를 개인이 억압 받는 장소가 아니라 자아실현의 장소로 만 들 것인가? ≪고백≫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총 12권이다. 1권부터 6권까지는 유년기와 형성기를, 7권부터 11권까지는 성공의 시기 를, 12권은 박해의 시기를 묘사한다.


얼마나 뽑아 옮겼나? 원전을 약 20% 발췌해 번역했다. 내용과 내 용을 이어 주기 위해 생략한 내용은 요약해 적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서익원이다. 가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다.


루소, 낭만주의 등장 나는 매일 닳아 사라진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이성은 모른다. 감성이 대답한다. 사회에 속박되고 교육받고 타인을 의식하는 한 우리는 우리를 찾을 수 없다.

<장 자크 루소>,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 그림, 18세기


고백 천줄읽기 장 자크 루소 지음 서익원 옮김 2012 11월 30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240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고백


이것은 사실에 따라 그리고 진실 그대로 정확하게 그려진, 지금 존재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을 유일한 인 간상이다. 내 운명 또는 내 신뢰심으로 인하여 이 원고를 맡 게 된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내가 겪은 불행과 당신의 진심 을 고려하여, 그리고 온 인류를 고려하여, 이 유익하고도 유 례없는 작품을 없애지 말 것을 간청한다. 이 작품은 확실히 앞으로 시작해야만 하는 일, 즉 인간 연구를 위해 최초의 비 교 문헌으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내 적들에 의해 왜곡 되지 않은 내 성격의 확실하고 유일한 기념물인 이 기록을 내 사후의 명예를 위해 제거하지 말 것을 간청한다. 요컨대, 설사 당신이 그 냉혹한 적들 중 한 명일지라도, 재가 된 내 유해에 대해 냉혹해지지 말고, 당신의 잔인한 부정행위를 당신도 나도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그때까지 이어가지 말 아달라는 거다. 이는 당신이 악의에 차고 복수심에 불탈 때 에도, 비록 한 번일지라도 너그럽고 선량했었다는 고귀한 증거를 되찾을 수 있기 위해서다. 해를 입힌 적이 없거나 그 러기를 원치 않았던 한 인간에게 가해진 악행이 복수라는 미명(美名)하에 이루어질 수 있다 치더라도 말이다.


1권(1712∼1728) 나는 일찍이 유례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실행에 옮기려는 모방자가 없을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내 동포들에게 한 인간을 본성의 참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바로 나일 것이다. 오직 나 혼자일 뿐. 나는 내 마음을 느끼고 있고 또 인간 들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본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게 만들 어져 있지 않다. 외람되지만 지금 살아있는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 나는 남보다 더 낫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남과는 다르다. 자연이 나를 부어 넣어 만든 거푸집을 깨트려 버린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 는, 사람들이 내 책을 읽고 난 후라야만 판단할 수 있는 일 이다. 최후의 심판 나팔이 어느 때고 울리기를. 그때 이 책을 손에 들고 지극히 높으신 재판관 앞에 출두할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말하리라. “이것이 내가 한 일이고 내가 생각한 것이며, 과거의 내 모습입니다. 나는 선과 악을 똑같이 솔직 하게 말했습니다. 나쁜 일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 았고, 좋은 일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어떤 문식(文飾)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 기억의 결함으로 생긴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였습 니다. 나는 진실일 수 있었다고 알고 있는 것은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도, 거짓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결코 진실 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과거의 내 모습을 그대 로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경멸당할 만하고 비열할 때도 그 모습 그대로, 또 착하고 너그럽고 고상할 때도 그 모습 그대 로 말입니다. 당신이 보신 대로 내 내면을 드러내 보인 것입 니다. 영원불멸의 신이시여, 수많은 동포들을 내 주위에 불 러 모아, 그들이 내 고백을 듣고, 내 비열한 행위를 슬퍼하 며, 내 한심스러운 모습에 얼굴을 붉히도록 해주시기를. 그 리고 이번에는 그들 하나하나가 당신의 왕좌 밑에서 나와 똑같이 성실하게 자기 가슴속을 드러내 보이도록 해주시기 를. 게다가 또 그중 단 한 명이라도 감히 ‘나’는 이 사내보다 훌륭했소’라고 말하려 한다면 당신에게 말하게 해주시기를.” 나는 1712년 제네바에서, 시민 이자크 루소와, 시민 쉬 잔 베르나르 사이에 태어났다. 열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 누어주기에는 매우 빈약한 재산이어서, 받을 몫이 거의 없 었던 내 아버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로지 시계 제조 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직종에서는 정말로 솜씨 가 좋았다. 어머니는 목사 베르나르의 딸로서 좀 더 부유한 편이었고, 지혜와 미모를 겸비한 분이었다. (…) 나는 거의 죽어가는 상태로 태어났다. 생명을 유지할 가 망은 거의 없었다. 나는 가벼운 병의 싹을 지니고 태어났는 데 그것이 세월과 더불어 점차 심해졌다. 지금은 때때로 누 그러졌다가도 반드시 또 다른 식으로 더욱 호되게 날 괴롭


힌다. 친절하고 총명하며 미혼인 고모 한 분이 어찌나 날 잘 보살펴주셨던지, 결국 그분이 나를 구해주셨다. 내가 이 글 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분은 살아 계셔서, 80세인데도 자신 보다 더 젊지만 술로 허약해진 남편을 보살피고 계신다. 사 랑하는 고모님, 당신이 저를 살려주신 것을 용서해 드리겠 습니다. 그리고 제 생애의 초기에 저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그 다정스러운 보살핌을 당신 생애의 끝에 이르러서도 보답할 수 없는 것이 몹시 서글픕니다. 나의 유모 자클린 역 시 아직 정정하고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 내가 태어날 때 내 눈을 열어준 그 손이 내가 죽을 때도 눈을 감겨주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에 앞서 느꼈다. 그것은 인류의 공통적인 운명이다. 나는 그것을 남보다 더 많이 느꼈다. 내가 대여섯 살까지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글 읽기를 배웠는지 도 모른다. 첫 독서와 그 인상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 시기 부터 그칠 사이 없이 나 자신에 대한 의식이 시작된 것 같다. 어머니가 소설책들을 남겨주셨다. 아버지와 나는 저녁식사 후에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책들을 통해 나의 독서력을 기르려고만 했는데, 곧 어찌나 흥미진 진했던지 우리는 차례로 쉴 새 없이 읽으며 밤을 새우곤 했 다. 우리는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고는 결코 그만둘 수 없 었다. 가끔은 아침에 제비 소리를 듣고서야, 아버지께서는 몹시 부끄러워하시면서, “자러 가자, 내가 너보다 더 어린애


로구나”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잠깐 사이에 이런 위험스러운 습관을 통해서 무척 이나 책을 빠르게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 라, 정열에 대해서도 내 나이 또래에는 유례없는 이해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물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나 는 벌써 모든 감정들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했는데 모든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어렴풋한 감동들을 차례 차례로 느꼈는데, 그것이 내 안에서 아직 싹트지 않은 이성 을 그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감동들은 나에게 남다른 성질의 이성을 형성해 주었고, 인생에 관한 기묘하고 공상 적인 개념들을 빚어주었는데, 그 후에 쌓은 경험과 반성도 나를 그런 개념에서 끝내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다. 소설들을 읽는 것은 1719년 여름과 더불어 끝났다. 다음 겨울은 딴판이었다. 어머니의 장서가 끝나자, 이번에는 우 리에게 굴러 들어온 외할아버지 장서 쪽에 손을 대게 되었 다. 다행히 거기에는 양서들이 있었다. 이 장서는 신교 목사 이자 사실상 학자이셨던 분에 의해 수집되었기 때문에, 그 럴 수밖에 없었다. 학자가 되는 것은 당시의 유행이었지만, 그분은 취미와 재치를 겸비한 분이기도 했다. 르 쉬외르의 ≪교회와 제국의 역사≫, 보쉬에의 ≪세계사론≫, 플루타 르코스의 ≪영웅전≫, 나니의 ≪베네치아사≫, 오비디우 스의 ≪변신≫, 라브뤼에르의 ≪성격론≫ , 퐁트넬의 ≪세 계 다수론 대화≫, ≪죽은 이들의 대화≫와 몰리에르의 희


곡집 몇 권, 이런 책들이 우리 아버지 작업실 안으로 옮겨졌 고, 나는 날마다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 그 책들을 그에게 읽 어드렸다. 나는 그러한 책들에 그 나이에는 흔하지 않고 어 쩌면 유례없을 취미를 붙였다.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영 웅전≫은 나의 애독서가 되었다. 그 책을 끊임없이 다시 읽 으면서 느끼는 기쁨으로 소설 탐독의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오롱다트, 아르타멘, 쥐바보다는 아게실 라우스, 브루투스, 아리스티데스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 러한 흥미로운 독서와, 그 독서를 계기로 아버지와 나 사이 에 오고간 대화로 인해, 나에게는 자유롭고 공화주의적인 정신, 길들일 수 없고 자부심 강하며, 속박이나 굴종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정신과 성격을 발전시 키기에 가장 부적절한 처지에 있던 나로서는 한평생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끊임없이 로마와 아테네에 골몰해서, 말하자면 그 두 도시가 낳은 위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나 자 신이 한 공화국의 시민으로, 또 조국을 더할 나위 없이 열렬 히 사랑했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본받아 조국애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전기를 읽 어본 그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를 감동시킨 의연하고도 대 담무쌍한 특질의 이야기에 내 눈은 번득이고 목소리도 힘차 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식탁에서 스카에볼라1)의 모험을 이야기하던 어느 날, 그의 행동을 재연하려고 난로 쪽으로


다가가 손을 얹는 나를 보고 모두가 질겁한 적도 있었다. (…) 내 눈앞에는 오직 상냥함의 본보기들만 있고, 내 주위에 는 오직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만 있는데, 어떻게 내가 심술궂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 고모, 유 모, 친척들, 친구들, 이웃들 등, 나를 에워싼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내 말에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사랑했고, 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사랑했다. 제멋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자극하는 일도, 방해하는 일도 거의 없어서, 그럴 생각이 떠 오르지 않았다. 어느 스승 밑에 예속 될 때까지 변덕이란 게 무엇인지 몰랐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버지 곁에서 책을 읽 거나 글을 쓰며 보내는 시간과, 유모에게 이끌려 산책하러 가는 시간 이외에는, 언제나 고모 곁에 앉거나 서서, 고모가 수놓는 걸 보고 노래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것으로 나는 만 족이었다. 고모의 쾌활함, 상냥함, 그 붙임성 있는 모습이 내게 어찌나 강한 인상을 남겼던지, 아직도 그 모습과 눈매 며 몸가짐이 눈앞에 선하다. 그분의 정답고 사소한 이야기 들이 생각난다. 어떤 옷차림이었고 어떤 머리를 하고 있었 는지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 당시의 유행대로 검은 머리 가 양쪽 관자놀이 위에 늘어져 있던 애교머리도 잊을 수 없 다.

1) 스카에볼라: 기원전 6세기 말 로마의 전설적인 영웅.


나의 음악에 대한 취미, 아니 오히려 음악에 대한 정열은 고모 덕에 갖게 된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그것은 오랜 세월 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훌륭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고모는 가곡과 샹송들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어서, 몹시 감 미로운 가는 목소리로 그것들을 노래하곤 했다. 그 훌륭한 미혼녀의 차분한 넋이 그녀와 그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서 망상과 슬픔을 멀리 몰아내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노래 에 대해 느끼는 매력은 그러해서, 몇몇 노래들은 내 기억 속 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을 상실한 오늘날에도 노래들이 내 가슴속에 절로 떠오를 정도다. 그 노래들은 내 유년 시절 이래로 까맣게 잊혔다가, 내가 늙어 감에 따라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다시 떠오르 는 것이다. 갖가지 근심과 고뇌로 가슴이 멍들고, 늙어 노망 든 내가, 이미 떨리는 쉰 목소리로 그 가곡들을 중얼거리며 때때로 나도 모르게 어린애처럼 눈물 흘리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 내 인생의 문턱에서 가졌던 최초의 애정들은 그러했다. 이렇게 동시에 자부심이 강하고도 다정스러운 마음과, 여 성적이지만 길들일 수 없는 성격이 내 안에 형성되거나 나 타나기 시작했다. 이 마음과 성격은 약함과 용기 사이를, 유 약함과 덕성 사이를 언제나 떠돌면서, 나를 끝까지 나 자신 과 모순되게 하고, 금욕과 향락, 쾌락과 지혜가 똑같이 내게 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


아버지가 제네바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장 자크는 외삼 촌 가브리엘 베르나르에게 맡겨진다. 그는 보세(제네바에서 수 킬로 미터 떨어져 있는 마을)에 있는 랑베르시에 목사 집에 그와 동갑인 사촌 아브라함 베르나르와 함께 기숙하게 된다.

그 마을에서 2년을 보낸 덕에 나의 로마풍의 거친 태도 는 좀 부드러워져서 어린아이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아무 것도 강요받지 않았던 제네바에서는 실기와 독서를 좋아했 었다. 그것이 거의 유일한 내 즐거움이었다. 보세에서는 수 업이 있었기 때문에 휴식을 위해 하는 놀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시골은 나에게 하도 새로워서 뛰놀기에 지칠 줄을 몰랐다. 시골에 대해 너무나 강렬한 취미를 붙여서 그 취미 는 언제까지나 꺼질 수 없었다. 거기서 보낸 행복한 나날의 추억 때문에 평생에 걸쳐 그곳에 머물 때의 생활과 즐거움 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거기로 돌아가게 될 정도 였다. 랑베르시에 씨는 매우 분별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과중한 숙제를 내는 일은 없었다. 그가 솜씨 있게 행동했다는 증거는, 구속에 대한 나 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거기서의 공부 시간을 불쾌하게 상 기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점과,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배운 것은 힘 안 들이고 배웠고, 또 그것을 조금 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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