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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자리 그는 줄의 맨 끝에 앉은 학생이다. 모두를 볼 수 있지만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 연극은 갈등에서 출발한다. 답을 찾는 배우처럼 관객은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작가는 맨 끝에 앉아 있다.

연극 <맨 끝줄 소년>, 코스타리카 1887 극장, 2012


인텔리겐치아 2423호, 2015년 1월 28일 발행

김재선이 옮긴 후안 마요르가의 ≪맨 끝줄 소년≫ 헤르만 (읽는다.) “토요일에 나는 테레비를 봤다. 일요일에는 피곤해서 아무것도 안 했 다.” 끝. 30분을 줬어. 두 문장이야. 열일곱 살짜리 삶에서 48시간. 토요일은 테레비, 일 요일은 아무것도 안 하기. (종이에 0점을 기 록하고 후아나에게 준다, 다른 종이를 집는 다.) 11음절로 된 찬미시를 지으라고 한 것도 아니야. 자기가 보낸 주말에 대해 이야기하 라고 했어. 문장 두 개를 연결해서 쓸 수 있


는지 보려고 말이야. 그랬더니, 모르더라고. (읽는다.) “난 일욜이 실타. 토욜은 좋다. 하 지만 이번 토욜에는 아버지가 나가지 못하 게 하고 핸드폰을 빼섰다.” (종이에 0점을 크 게 쓰고 오른쪽 더미에 놓는다.) -«맨 끝줄 소년(El chico de la última fila)», 후안 마 요르가(Juan Mayorga) 지음, 김재선 옮김, 4~5쪽

헤르만은 무엇을 읽는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제출한 작문 과제다. 그는 절망에 빠진다. 맞춤법, 구두법을 틀리 는 것은 물론, 문단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 하기 때문이다.


정말 잘 쓰는 학생이 한 명도 없는가? 클라우디오의 작문을 발견한다. 틀린 데도 없고 어휘 사용도 나쁘지 않다. 세르반테스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애들과 비교하면 훨 씬 낫다. 10점 만점에 7점을 매긴다. 무슨 얘기를 썼는가? 같은 반 친구 라파의 집을 방문한 얘기다. 오 래전부터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고 고 백한다. 라파의 수학 공부를 도와준다는 핑 계로 드디어 라파의 집을 방문한다. 그 집과 가족에 대해 은밀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클라우디아의 작문은 어떻게 끝을 맺는가? 미완이다. 라파가 수학에서 낙제하지 않으


려면 자신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말 까지 쓰고는 “계속”이라고 끝냈다. 선생님의 반응은? 클라우디오의 글에 점점 빠져든다. 작가의 길을 포기했던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와 따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그를 작가로 만들 려고 한다. 이제 이야기는 어디로 가나? 클라우디오는 라파 부자와 친해진다. 하지 만 라파 엄마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남 편에게 라파의 수학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클라우디오가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해야겠 다고 말한다. 클라우디오는 헤르만에게 도


움을 청한다.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인가? 수학 시험지를 빼돌려 달라고 한다. 그래야 라파 집에 계속해서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 다. 헤르만이 청을 들어주고 라파의 수학 성 적은 크게 오른다. 헤르만의 부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라파 집에 가야만 글이 써진다는 클라우디 오의 말 때문이다. 그는 이 글의 출판까지 생 각한다. 하지만 숨은 독자인 아내 후아나는 이런 헤르만을 못마땅해한다.


후아나는 뭐가 불만인가? 클라우디오가 라파 엄마를 대하는 태도다. 친구네 가족 사생활을 은밀히 관찰하며 이 야기를 풀어 나가는 클라우디오와 그를 지 도하는 남편 헤르만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한 다. 처음에는 강하게 비난하지만 자신도 글 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 다음 이야기를 궁 금해한다. 이야기는 어디서 끝나는가? 클라우디오는 라파 부부가 자고 있는 침실 에 숨어들기도 하고 라파 부자가 외출할 때 를 노려 라파네를 방문하기도 한다. 라파 엄 마에게 시를 전하고, 그녀와 키스한다. 라파 가 클라우디오의 시를 발견하고 그에게 경


고한다. 이 일로 글쓰기는 중단된다. 어떻게 든 결말을 내라고 다그치는 헤르만에게 클 라우디오는 가능한 네 가지 결말을 들려준 다. 네 가지 결말이란? 라파 부자가 클라우디오를 죽인다, 클라우 디오가 라파 부자를 죽이고 그 집에 남는다, 라파 엄마가 세 남자와 집을 불태운다, 라파 엄마가 클라우디오와 함께 떠난다. 클라우 디오는 헤르만에게 넷 중 하나를 택해 직접 결말을 쓰라고 하고 떠난다. 클라우디오의 글은 사실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상상인지 구분은 명확


하지 않다. 헤르만과 후아나도 이 글을 각자 다르게 상상하고 해석한다. 독자들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왜 “맨 끝줄 소년”인가? 클라우디오가 맨 끝줄에 앉은 학생이기 때 문이다. 헤르만에 따르면 맨 끝줄은 모두를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는 가장 좋은 자리다. 한마디로 맨 끝줄은 작가의 자리다. 작가의 메시지는? 문학이란,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학 과 예술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가


족이란? 중산층이란? 지식인이란? 우리는 무 엇을 보고, 보이는 것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 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관객이 연극을 통 해 철학하게 한다. 연극을 통한 철학인가? 후안 마요르가 극작의 특징이다. 그는 연극 이 철학처럼 갈등에서 출발하며, 철학자들 이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을 관객에게 던질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위대한 연 극, 가장 좋은 연극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다. 후안 마요르가는 누구인가?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활발히 활동 중


인 극작가다. 마드리드 왕립드라마예술학 교에서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극작은 물론 1년에 한 번씩 작품을 직접 연출해 무대에 올리고 있다. 카를로스 3세 대학에서 무대 예술 강좌를 총괄하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재선이다. 스페인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이화여대와 한국외대에 출강한다.


작가의 자리 그는 줄의 맨 끝에 앉은 학생이다. 모두를 볼 수 있지만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 연극은 갈등에서 출발한다. 답을 찾는 배우처럼 관객은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작가는 맨 끝에 앉아 있다.

연극 <맨 끝줄 소년>, 코스타리카 1887 극장, 2012


맨 끝줄 소년 후안 마요르가 지음 김재선 옮김 2014 년 11월 20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132쪽, 14,500원


작품 속으로

맨 끝줄 소년


(헤르만은 손으로 쓴 글을 한 장씩 읽고 있다. 빨간색 펜으 로 종이에 뭔가를 표시한다. 읽으면서 처음에는 웃더니 나 중에는 화를 낸다. 종이에 0점이라고 쓰고 오른쪽 종이 더 미 위에 놓고 왼쪽 종이 더미에서 다른 한 장을 집는다. 한 문장을 읽고 종이에 커다랗게 0점을 써서 오른쪽 더미 위에 놓고, 왼쪽 더미에서 다른 종이를 집는다. 후아나가 들어올 때는 다시 화가 나고 있다.)

헤르만 어때? 어땠어? 후아나 당신이 같이 가 주면 좋았잖아. 헤르만 난 열네 살 때부터 미사에 안 갔어. 후아나 이건 미사가 아니었지. 장례식이라고. 헤르만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잖아. 설마 브루노가 내 친구

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후아나 혼자 있기 싫었다고. 같이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침묵)

쌍둥이 자매를 만났어. 브루노가 얘기하던 그대로더 라. 우리 극장에 갈까? 나 옷 갈아입고 재미있는 영 화 어때?


헤르만 갈아입지 마, 당신 지금 아주 예뻐. 그런데 내가 이거

좀 끝내게 해 줄래. 당신도 한번 봐, 진짜 재밌어.

(다시 읽는다. 후아나는 오른쪽에 있는 종이 더미를 들쳐 본 다.)

후아나 0점. 3점. 0점. 맙소사, 5점! 2점. 0점…. 그렇게 형

편없어? 헤르만 (계속 읽어 나가면서) 최악이야. 내 인생에서 가장

형편없는 학년이야. 후아나 이미 작년에도 그렇게 말했거든. 그리고 그전에도.

(헤르만은 종이에 1점을 기록하고 후아나에게 준다, 그리고 다른 종이를 집어 든다.)

헤르만 (읽는다.) “토요일에 나는 테레비를 봤다. 일요일에

는 피곤해서 아무것도 안 했다.” 끝. 내가 30분을 줬 어. 두 문장이야. 열일곱 살짜리 삶에서 48시간. 토 요일은 테레비, 일요일은 아무것도 안 하기. (종이에 0점을 기록하고 후아나에게 준다, 다른 종이를 집는 다.) 11음절로 된 찬미시를 지으라고 한 것도 아니


야. 자기가 보낸 주말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했어. 문 장 두 개를 연결해서 쓸 수 있는지 보려고 말이야. 그 랬더니, 모르더라고. (읽는다.) “난 일욜이 실타. 토 욜은 좋다. 하지만 이번 토욜에는 아버지가 나가지 못하게 하고 핸드폰을 빼섰다.” (종이에 0점을 크게 쓰고 오른쪽 더미에 놓는다.) 난 ‘관점’의 개념에 대 해 설명해 주려고 했어. 하지만 얘들한테 관점에 대 해 이야기하는 건 침팬지한테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 기하는 거랑 같아. 난 ≪모비 딕≫ 첫 부분을 읽어 주면서 애들이 내가 뭐에 대해 말하는지 알 거라고 추측하지, 왜냐하면 애들은 이미 영화를 봤으니까. 나는 그 이야기가 어떤 뱃사람이 들려주는 거라고 설명하지. 그리고 질문하는 거야. “만약에 다른 등장 인물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 어떨까? 예를 들어서, 에이하브 선장이.” 애들은 놀라서 나를 바라보지, 마 치 내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낸 것처럼. “좋아, 지난 주말에 너희가 뭘 했는지 써서 내는 거다. 시간 은 30분.” 그랬더니 이렇게 써낸 거야. 어떤 불길한 운명이 날 이 일로 몰아간 건지? 고등학교에서 문학 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내가 이 직 업을 선택한 건 위대한 작품들과 접촉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난 두려 움과 접촉하며 살고 있을 뿐이야. 더 끔찍한 건, 하루 하루 더 지독한 무식함에 맞서야 하는 게 아니야. 더 끔찍한 건, 내일 일을 상상해 보는 거야. 이 아이들이 우리 미래라는 거. 누가 이 아이들을 만나 보고 절망 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강한 비관주의자들은 야 만인들이 침략해 올 거라고 예상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미 여기 있어. 야만인들이 여기, 우리 교 실에 이미 있다고.

(다른 종이를 집는다.)

후아나 내가 쌍둥이 자매한테 조의를 표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 막 나오려고 하는데 자매 중 하나가 나한테 다가왔어, 누군지 모르겠더라, 구분하기가 어려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러 내일 갤러리에 오 겠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러.” 내 말 듣고 있어?

(헤르만은 읽는 것에 푹 빠져 있다.)

무슨 일 있어?


(침묵)

헤르만 (읽는다.) “지난 주말, 작성자 클라우디오 가르시아.

토요일에 난 라파엘 아르톨라 집에 공부하러 갔다. 그 아이디어는 내 머리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난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번 여름 오후마다 난 공원에 가서 그 집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밤에는 그 집 앞 보도에서 그 집을 바 라보다가 라파 아버지한테 들킬 뻔했다. 금요일에 라파가 수학을 망친 것을 이용해서 나는 교환 학습 을 제안했다. “너는 나한테 철학을 도와줘, 내가 네 수학 공부를 도와줄게.” 물론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 았다. 만약 라파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공부를 그 집에서 하게 될 거라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라파가 한 번도 발을 디뎌 보지 않았을 동 네에 있기 때문이다. 난 11시에 초인종을 눌렀고 내 앞에서 그 집 문이 열렸다. 라파를 따라서 라파 방으 로 갔다. 방은 내가 상상했던 대로다. 라파가 삼각법 문제를 풀도록 해 놓고 난 코카콜라를 찾는다는 핑 계로 그 집을 둘러봤다. 이 안에 있는 내 모습을 그렇


게 많이 상상해 왔는데, 마침내 내가 이 집에 들어와 있다.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 우리 집 네 배 는 될 거 같다. 모든 게 아주 깔끔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다. “좋아,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 스스로에게 이 렇게 말하고 라파에게 돌아가려고 할 때 어떤 향기 가 내 주의를 끌었다. 혼동할 수 없는, 중산층 여자의 향기다. 그 향기에 이끌려 난 거실까지 가게 되었다. 거기서, 소파에 앉아 인테리어 잡지 페이지를 넘기 고 있는 이 집 여주인을 발견했다. 그녀가 책에서 눈 을 들 때까지 난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소파랑 같은 색이다. “안녕. 카를로스구나.” 목소리가 어쩌면…. 이런 여자들은 말하는 것을 어디에서 배우는 걸까? “클라우디오예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 답했다. “화장실 찾니?” “부엌요.” 그녀가 데려다 주 었다. “얼음 줄까?” 난 얼음을 꺼내는 그녀의 손에 주 목했다. 오른손에는 결혼반지, 왼손에는 보석이 달 린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마티니를 마셨다. “마시고 싶은 거 집어.” 그녀가 말했다. “너네 집이라 고 생각해.” 그녀는 소파로, 난 라파 방으로 돌아갔 다. 라파에게 삼각법 문제를 풀어 줬다. 이번 학기에 수학을 낙제하지 않으려면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


다. (계속)”

(침묵)

후아나 “계속”이라고 말해? 헤르만 괄호 안에.

(작문에 7점을 기록하고 다른 종이를 집는다.)

후아나 7점? 헤르만 틀린 데가 없어. 어휘 사용도 나쁘지 않고. 세르반테

스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애들과 비교하면…. 당신 이라면 몇 점 줄 건데? 후아나 나라면 그 글을 교장한테 가져가겠어. 헤르만 왜? 친구 라파의 엄마 눈이 소파랑 같은 색이기 때문

에? 후아나 이 애가 누군데? 헤르만 내 생각에 맨 끝줄에 앉는 애 같아,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 아직 애들을 잘 모르거든. 이제 2주 차야. 후아나 7점을 주고 마음이 그렇게 편해? “계속.” 헤르만 6점을 주면 괜찮겠어? 6점 이하는 못 줘.


후아나 당신을 비웃고 있는데 당신은 7점을 준다. 헤르만 날 비웃는다고? 몰랐는데. 후아나 모든 사람들을 비웃고 있잖아. 당신, 같은 반 친구라

는 라파, 라파의 엄마…. (읽는다.) “‘클라우디오예 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답했다.” 얘는 도 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 교실에서 큰 소리로 읽히고, 라파가 그 친구 뺨을 한 대 갈기는지 보지그래? 그 라파가…. (읽는다.) “라파엘 아르톨 라” 그런 애가 있기는 해? 어쩌면 가짜로 만들어 낸 건지도 몰라.

(헤르만은 왼쪽 더미를 들쳐 본다. 찾던 종이를 발견한다.)

헤르만 (읽는다.) “토요일 아침에 친구 클라우디오랑 수학

공부를 했다. 오후에는 아빠랑 농구를 하러 갔다. 아 주 치열한 경기였는데 우리가 이겨서 팀원 모두가 축하하러 갔다. 일요일에는….”

(계속해서 조용히 읽는다. 5점을 주고 오른쪽 더미 위에 놓 는다.)


후아나 5점? 착한 애 같은데. 다른 애한테는 7점을 주고 이

애한테는 5점을 주네. 헤르만 윤리 수업이 아니야, 종교 수업도 아니고. 언어와 문

학 수업이라고.

(다른 종이를 집는다.)

후아나 정말이지 걱정 안 돼? 나라면 적어도 그 애랑 얘기는

해 보겠다. 그 애랑 얘기 안 해 볼 거야? 클라우디오 저를 보자고 하셨어요? 헤르만 그래, 앉아 봐.

(클라우디오가 자리에 앉는다.)

지난 주말에 대한 작문 말이야. 걱정이 돼서. 클라우디오 구두법요? 마침표랑 쉼표가 헷갈려요. 헤르만 구두법은 아주 좋아. 클라우디오 저는 과학 계열을 더 잘해요, 하지만 올해는 언

어를 잘해 보려고요. 헤르만 내용을 얘기하는 거야. 너는 우리 반에 있는 다른 애

랑 그 가족에 대해서 말하더구나. 누군가에게는 그


게 안 좋게 보일 수 있어. 클라우디오 선생님한테요? 아니면 다른 사람요? 누가 더 읽

었나요? 헤르만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교장 선생님한테 가져가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볼 생각이야. 클라우디오 전 교장 선생님한테 쓴 게 아닌데요. 선생님한

테 쓴 거예요.

(침묵)

헤르만 만약 네 친구 라파가 읽는다면 어떻게 느낄 거 같니?

(읽는다.) “…금요일에 라파가 수학을 망친 것을 이 용해서…. 어떤 향기가 내 주의를 끌었다. 혼동할 수 없는, 중산층 여자의 향기다….” 네가 쓴 내용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더 나쁜 건 행간에 있는 거야. 어 조 말이야. 내가 수업 시간에 너한테 이걸 읽힌다면 어떻겠니? 라파가 이걸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클라우디오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어요. 저는 라파한테 쓴

것도 아니에요. 선생님이 지난 주말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하셨잖아요. 선생님 아이디어였어요.


(침묵)

헤르만 이 상태로 두자. 네가 이걸 가지고 뭘 하려고 한 건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뭐가 됐든 넘어가자.

(클라우디오가 가려고 한다.)

클라우디오 형용사 연습지, 두고 가도 돼요? 헤르만 월요일까지라고 했는데. 클라우디오 어젯밤, 한 방에 해 버렸어요. 제가 잘 이해한 건

지는 모르겠어요. 표에 있는 형용사들을 가지고 작 문하는 거, 그거 맞죠?

(연습지를 꺼낸다.)

헤르만 너희에게 글쓰기 연습을 시키는 놀이일 뿐이야. 클라우디오 표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형용사들을 사용해야

하는 건지 순서를 바꿀 수도 있는 건지 몰랐어요. 저 는 표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했어요. 헤르만 순서는 상관없어. 그렇게 말했는데. 클라우디오 표에 나온 거 말고 다른 형용사들을 사용해도 되


는 건지도 몰랐고요. 하나는 겹칠 수밖에 없었어요. “거무스름한”을 반복해서 썼어요. 헤르만 월요일까지 제출하면 돼. 가지고 있으면서 다시 검

토해 보지 않을래? 클라우디오 지금 내고 싶어요. 이번 주말에는 수학에 집중

하려고요.

(연습지를 놓고 간다. 침묵. 헤르만이 집어서 읽어 본다. 후 아나는 어떤 설치미술 작품을 분해해서 부품들을 꾸리고 있 다. 헤르만이 다가가 가방을 놓고 도와준다.)

후아나 당신이 보기에 환자들을 위한 미술 같아? 헤르만 환자들을 위한 미술? 후아나 쌍둥이 자매에 따르면 모든 게 이걸로 좁혀진대. 물

론, 회계장부를 본 뒤에 그렇게 얘기했지. 먼저 나한 테 장부를 달라고 하더니 그다음에 그런 평을 날리 더라. 만약 팔렸다면, 환자들을 위한 미술이라고 생 각하지 않았을 거야. 브루노가 얘기한 것들로 봐서 그 여자들이 구식일 거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두 촌뜨기 여자한테는 미술 갤러리 상속받는 거나 햄 가게 상속받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지. 어떻게 이


걸 환자들을 위한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지? 헤르만 이런 설치미술 작품들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

는지 당신은 알잖아. 난 얼굴을 보는 게 필요해. 사 람들 말이야. 난 이런 거 가운데서는 끝없는 외로움 을 느끼고…. 후아나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야, 헤르만, 난 지금 일자리를

잃기 직전이라고. 당신이 현대미술에 반대하는 논리 를 나한테 풀어낼 때가 아니야. 그 여자들이 시골뜨 기 촌년들이라고 말해 주는 게 필요하다고. 헤르만 문을 닫는대? 갤러리 닫을 거래? 후아나 나한테 한 달을 줬어. 이 사업이 계속할 만한 건지 한

달 안에 보여 달라는 거야. 뭔가 팔 걸 찾기 위한 한 달이랄까. 하지만 미술 갤러리에서 파는 게, 그렇잖 아, 무슨 식료품 가게도 아니고. 만약에 찾지 못하 면? 갤러리는 넘어가고 끝나는 거지 뭐. (침묵,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 여자들이 부품들을 만져 보더라. 어떤 표정이었는지 당신이 봤어야 해. “환자들을 위 한 미술….” 당신은? 오늘 어땠어? 헤르만 특별한 거 없었어. 아, 그 애랑 얘기했어. 후아나 그래서? 헤르만 그냥 얘기를 나누었고, 그 아이가 형용사 연습지를


제출했지. 내가 매년 내주는 과제 말이야. 후아나 “다음에 나오는 형용사들을 활용하시오.” 헤르만 그래, 그거. 후아나 그래서? 헤르만 다시 그거 하러 갔어. 말하자면 나한테 제2장을 준

거지. 그렇게 알렸잖아, 기억나지? “계속.”

(침묵)

후아나 그거 가지고 있어? 헤르만 응.

(침묵)

후아나 당신은 내가 읽어 보는 거 싫지. 헤르만 그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 후아나 내가 당신 학생들 거 읽은 지 30년 됐거든. 헤르만 하지만 이건 다르지, 안 그래?

(후아나는 다시 자기 일을 시작한다. 헤르만은 가방을 열고 연습지를 꺼내 후아나에게 건네준다. 후아나가 읽는다.)


클라우디오 다음 형용사들을 이용해 작문하시오. “만족한,

바로 그, 우리의, 정반대의, 똑같은, 거무스름한, 집 중하는, 어린, 더 나이가 많은, 환상적인.” (침묵) 월 요일에 나는 다시 라파엘 아르톨라한테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수학 선생님이 라파엘에게 삼각법 연습 문제를 잘 풀었다고 칭찬해서, 라파는 마치 노 벨상을 받은 것처럼 만족해하면서 바로 그날 오후에 시작하기를 원했다. 가는 길에, 우리 또래 남자애들 이 으레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 다. 여자애들, 공부할 것, 그런 주제들에 대해 이야 기하면서 라파 집까지 갔다. 왜 라파지? 내가 왜 라파를 택했지? 왜냐하면 라파는 나와 정반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애는 평범하 다. 반에는 나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다른 애들도 있 다. 하지만 지난 학기에 내가 라파에게 주목하게 된 뭔가가 있었다. 하교하는 길에 나는 종종 라파 부모 님이 손을 잡고 라파를 기다리는 모습을 봤다. 다른 애들 같으면 부모님이 오는 걸 부끄러워한다. 그런 상황, 또는 자기 부모님을 부끄러워한다. 라파는 안 그랬다. 라파는 괜찮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나


에게 물었다. 저 집은 어떨까? 평범한 가족의 집은 어떨까?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어떤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 다. 열다섯일 때나 쉰다섯일 때나 똑같아 보이는 얼 굴이었다. 사모님은 거실에 있었다, 한 손에는 ≪집 과 정원≫이라는 잡지를, 다른 한 손에는 줄자를 들 고. 우리 존재를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매우 집중한 상태로 벽 길이를 재고 있었기 때문이 다. “라파구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네 친구, 카 를로스니?” “클라우디오예요.” 텔레비전 위에, 중국산 작은 용 옆에, 해변에서 찍은 성 가족 사진1)이 있었다. 라파가 어렸을 때다. 아빠, 엄마, 애기 그리고 라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여 자아이. 용은 마치 모두 잡아먹을 것처럼 그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1) ‘성 가족’은 ‘거룩한 가족’이라는 뜻으로, 스페인어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다. 이는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성당 이 름이기도 하다. 클라우디오는 이 유명한 성당 이름을 인용해 라파네 가족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수학에서 최우수 점수를 받았어요.” 라파가 말했다. “최우수! 환상적이야! 간식으로 뭐 먹고 싶니?”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여자가 간식을 준비해 주었 다. 사모님은 거실에 남아 한 손에는 잡지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줄자를 들고 유령처럼 떠돌아 다녔 다. 계속. 후아나 불쾌해. 헤르만 뭐가 불쾌하다는 거야? 후아나 당신은 불쾌하지 않아? 헤르만 언제부터 도덕주의자가 돼 버린 거야? 당신은 여기

에 혐오스러운 것들을 전시했잖아. 공기 넣는 인형 들 전시회 말이야. 당신이, 열일곱 살짜리 애가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것을 문제 삼겠다고? 후아나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글로 쓰잖아. “공기 넣는 인형들

전시회”. 누가 당신 말을 들으면…. 내가 갤러리를 성인 용품 가게로 바꾼 줄 알겠어. 캐릭터 인형들이 었어. 어떤 건 스탈린 얼굴, 또 어떤 건 프랑코 얼굴 이었지…. 의미가 있었다고. 보려고 하는 사람한테 는 말이야. 당신은 교장이랑 얘기를 했어야 해. 헤르만 교장이랑 이야기한다고? 그러면 그 애한테 일주일간

정학을 주든지, 퇴학시키든지, 감옥에 가두든지, 아


니면 총살시키든지 하겠지. 그래서 뭐? 후아나 아니면 당신 동료들하고, 이번 학기 다른 과목 선생

님들하고 이야기를 했어야지. 그리고 부모랑, 그래 당연히 부모랑 이야기를 했어야지. 헤르만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후아나 클라우디오, 그 작가 부모랑 말이야. 그 애는 상담사

가 필요해. 위험할 수 있어. 그 사람들한테 뭔가를 할 수 있는 애야. 뭔가 나쁜 일이 생기기 전에 당신이 막아야 해. 헤르만 열 받은 애야, 그뿐이라고. 세상에 대해 화가 난 아

이. 그럴 수 있지. 이런 식으로 자기 분노를 표출하 는 게 나아, 자동차 방화 같은 거 하지 않으면서 말이 야. 난 다른 애들이 더 무서워. 그래, 다른 애들은 정 말 위험해. 철자법이든 구문법이든 상식이든 아무것 도 존중하지 않는 애들 말이야. 클라우디오 말고 그 나마 조금 틀린 애들은 스페인에 온 지 6개월 된 중 국 여자애들이야. 최근에 아이들 데리고 극장에 갔 을 때 공연 내내 난 너무 창피했어. 당신이라도 감히 그 애들을 혼낼 생각은 못할 거야. 학생인권위원회 에서 당신을 고발할걸. 후아나 마치 모두가 똑같은 집단인 것처럼 말하네. 당신이


선입견 없이 미리 판단하지 말고 다가가야지. 헤르만 학생인권위원회한테? 후아나 당신 학생들한테. (클라우디오의 연습지를 바라본

다.) 어쩌면 문제가 있어서 당신 주의를 끌려고 하는 지도 모르지. 어떤 애인데? 헤르만 맨 끝줄에 앉아. 말이 없지. 수업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아. 다른 과목들은 잘하 지도 못하지도 않아, 수학 빼고. 후아나 그러니까 당신은 그 아이에 대해서 물어본 거네. 헤르만 수학은 잘하나 봐. 우리 나가는 거야? 아니면 뭐해? 후아나 잘 대해 줬더니 그 애는…. 뻔뻔한 놈이야. 헤르만 좀 특이한 애지. 그러니까 제대로 된 아이랄까. 후아나 당신도 맨 끝줄에 앉아 봤어? 헤르만 가장 좋은 자리야. 아무도 거기는 못 보는데 거기서

는 모두를 보지. 후아나 이 작문들이 세상에 알려진다고 생각해 봐. 어떤 면

에서는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어. 헤르만 무슨 책임? 후아나 어떤 면에서는 당신이 공범자가 되는 거야. 헤르만 무슨 공범? 후아나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마. (다른 부품을 해체한다.


그것을 바라본다.) “환자들을 위한 미술.” 헤르만 (클라우디오에게) 네 부모님하고 얘기하고 싶구나.

만나 뵙고 싶다고 내가 전화드릴까 아니면 네가 말 할래? 클라우디오 전화하고 싶으면 하세요. 엄마는 집에 없고 아

빠는 전화를 안 받아요.

(침묵. 헤르만이 클라우디오 앞에 형용사 연습지를 놓는다.)

헤르만 여기서, “같았다”는 형용사가 아니라 부사야. (읽는

다.)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어떤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열다섯일 때나 쉰다섯일 때나 똑같아 보이 는 얼굴이었다.” “똑같아”가 “보이는”을 수식하기 때 문에 부사야. 네 문체는 헤르만 헤세와 쥘 베른 사이 에서 헤매고 있어. 네 나이에는 당연해, 네 나이에는 닥치는 대로 읽으니까.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낸 다.) 도서관 책이 아니야, 내 책이야. 밑줄 치지 마. 모서리 접지 말고, 책을 펴서 엎어 놓지도 마. 클라우디오 다 읽어야 해요? 더 짧은 거 없어요? 헤르만 첫 페이지 읽어 봐. 재미없으면 돌려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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