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20150204 p

Page 1

새로운 극의 시대 연극은 드러나는 기분이 아니다. 전체의 숨은 기분을 나타낼 수 있어야 했다. 침묵이 지문으로 사용됐다. 침묵은 침묵 자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극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드라마 극장. 2012


인텔리겐치아 2434, 2015년 2월 4일 발행

박선진이 옮긴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게오르기 내가 그녀를 다치게 했어. 알렉세이 아니야, 형수는 괜찮아. 게오르기 두 번째 총알에 맞았단 말이다. 알렉세이 아니야, 괜찮다니까, 스쳐 갔어. 하 느님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포민, 가 서 상황을 좀 알아봐 주겠나. 포민 어디로 가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렉세이 문 쪽으로 가 보게, 그래, 그 문, 그 문 쪽으로 말이야…. 이런 젠장, 학교 친구가


처음 놀러 왔는데 이 난리라니…. 어휴, 형, 이 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물 좀 가져다줄까? 손 떠 는 것 좀 봐.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어떻게 말이야! 게오르기 일단은 날 좀 풀어 다오! 알렉세이 미안, 깜빡했군. 그런데 형, 대체 무 슨 일이야? 게오르기 네 형수가 바람을 피웠다. 알렉세이 거짓말 마! 게오르기 정말 너절하기 짝이 없어. 하느님 맙 소사, 하느님 맙소사! 오오, 알렉세이, 사랑하 는 나의 알렉세이, 세상이 도대체 왜 이 모양 인 게냐! 믿을 수 있겠니, 우리의 예카테리나 가, 우리의 순결한 예카테리나가 말이다….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Екатерина Ивановна)», 레오니트 안드레예프(Леонид Н. Андреев) 지음, 박선진 옮김, 9~10쪽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게오르기가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 총을 쏘 았다. 그녀가 아르카디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고 있다. 바람을 피웠나? 아내를 미행했다. 그녀가 아르카디와 호텔 방 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함께 있는 걸 확인했 다. 두 시간 넘도록 무슨 일이 있었나? 예카테리나가 아르카디의 따귀를 때렸다. 2년째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치근덕대고 있 었다.


의심의 결과는 뭔가? 예카테리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 난다. 게오르기는 절망에 빠진다. 진실은 언제 밝혀지는가? 반년 뒤, 게오르기가 아내를 찾아간다. 둘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다. 하지만 예카테리 나는 게오르기에게 돌아가기를 주저한다. 왜 주저하는가? 남편이 자신을 의심하자 분노한 예카테리나 는 아르카디에게 몸을 허락했다. 임신이 됐 고, 중절 수술을 받았다.


게오르기는? 용서를 구한다. 예카테리나에게 돌아와 달 라고 애원한다. 둘은 재결합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전과 같진 않다. 예카테리나 내면에서 정결한 자신을 의심했던 남편에 대한 분노와 그에 대한 사랑, 실망이 뒤얽힌 다. 스스로도 몰랐던 살로메적인 욕망이 분 출된다. 살로메의 욕망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방탕의 나락에 빠진다. 남편 친구들과 부정 을 저지르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게오르 기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다. 남편과


그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살로메로 분해 일곱 베일의 춤을 추고는 그중 한 명과 떠나 버린다. 타락의 동력은 무엇인가? 자신을 의심하고 손가락질했던 주변 사람들 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누군가는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구원해 줄 줄 알았다. 하 지만 그녀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 은 욕망을 채우고는 곧 그녀를 내팽개쳤다. 그 허무함 때문에 파멸해 간다. 안드레예프의 대표작인가? 작가 스스로 ‘자신에게서 새로운 극의 시대는 바로 이 작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왜 바로 이 작품이었나? 그에 따르면 새 시대의 연극은 ‘드러나는 기 분’을 표현한 극이 아니라 ‘숨어 있는, 전체 적인 기분’을 나타낼 수 있는 극이어야 했다. 범심론극이다. 이를 위해 그는 ‘침묵’이라는 지문을 사용했고, 이 작품은 ‘침묵’을 두드러 지게, 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희곡이다. ‘침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저항의 표현으로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일 수 도 있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뜻하 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단순히 자기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어떤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말을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


나지 않는 등장인물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 ‘침묵’이다. ‘고요’한 상태와는 다른 것인가? 안드레예프에게 ‘고요’란 투쟁이 없는, 즉 긴 장된 지적 작업이 부재하는 상태를 뜻한다. ‘고요’가 사방이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라면 ‘침묵’은 어떤 지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 을 뜻한다. 그는 무대 위에 있는 한 ‘고요’란 있을 수 없으며,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인식 하든 아니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침묵’이 라는 지문 속에서 활발히 연기를 펼친다고 주장했다.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누구인가? 고리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작가’다. 시대 를 앞서 간 문학적 실험가였다. 어떻게 살다 갔나? 1871년 오룔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로서 신문 과 잡지 법률 담당 통신원으로 일하면서 첫 작품을 발표했다. 고리키의 눈에 띄어 문학 그룹 지식파에 가입했다. 등단 이후 개성 있 고 재능 넘치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부와 명성을 쌓았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핀란드 로 떠났다가 1919년 핀란드 한 시골 마을에 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선진이다. 계명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초 빙조교수다.


새로운 극의 시대 연극은 드러나는 기분이 아니다. 전체의 숨은 기분을 나타낼 수 있어야 했다. 침묵이 지문으로 사용됐다. 침묵은 침묵 자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극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드라마 극장. 2012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지음 박선진 엮음 2014년 10월 30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210쪽, 16,500원


작품 속으로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나오는 사람들

게오르기 스티벨료프: 저명한 정치가 예카테리나: 게오르기의 아내 베라 부인: 게오르기의 어머니 알렉세이 스티벨료프: 게오르기의 동생 타티야나 부인: 예카테리나의 어머니 엘리자베타(리자): 예카테리나의 여동생 아르카디 멘티코프 파벨 코로미슬로프: 화가 토로페츠(포마): 화가 류드비크: 화가 포민: 대학생 야코프 테플롭스키 주라: 파벨의 조카 가정교사: 스티벨료프가(家)의 가정교사 사샤: 스티벨료프가(家)의 하녀 마샤: 파벨의 하녀


제1막


새벽 1시경이다.

상류층 저택의 텅 빈 다이닝룸에는 전날 저녁에 식사한 흔 적이 남아 있다. 그곳에 놓인 식탁 위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데, 그 전구들 중 단 하나에만 불이 들어와 있기에 왠 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모두들 이미 잠자리에 든 듯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인가 말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한 다. 살짝 열려 있는 방문 사이로 강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남녀 한 쌍이 그 안에서 큰 소리로 말싸움을 하고 있다. 잠 잠해지는 듯싶다가 난데없이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고, 잠깐이지만 적막한 침묵이 흐르기도 한다. 머리끝까 지 화가 치민 것 같은 남자가 ‘거짓말 마!’ 하고 소리를 지르 기도 하고, 시계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갑자기 너무나 조용해지기도 한다. 왼쪽 벽에 붙어 있는,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다른 방문이 열린다. 말끔하게 면도한 교복 차 림의 키가 크고 목이 긴 대학생이 반쯤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양손에는 빈 찻잔 두 개가 놓인 쟁반이 들려 있다. 대 학생은 자신이 나왔던 방 쪽을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양해 를 구하는 말을 하고는 문을 살짝 닫아 놓는다. 찻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쟁반을 테이블 위 에 내려놓고는 다시 시작된 영문을 알 수 없는 심각한 말다


툼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뒤 역시나 조심스럽게 소리 없이 방으로 돌아가 문을 꼭 닫는다. 남자와 여자의 언쟁이 점점 심해져 간다.

남자

하지만 난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겠어….

여자

그러실 순 없어요, 비열해!

남자

닥쳐! 거짓말 마! 이런 창녀 같은….

여자

여보, 왜 이래요! 잠깐, 잠깐만요! 안 돼요, 안 돼….

(말소리가 끊긴다. 적막한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총소리가 두 번 차례로 울려 퍼진다. 탕! 탕! 정적은 순식간에 사라지 고, 비명과 소음, 분주히 뛰어다니는 발소리들로 사방이 뒤 덮인다. 총알이 발사되었던 방에서 반라의 여인이 기어 나 와 비명을 지르며 다이닝룸 쪽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이어 재킷을 입지 않은 키 큰 남자가 뛰어나와 그녀를 뒤쫓으며 다시 총을 쏘아 댄다. 총알에 맞아 깨진 접시 파편들이 바닥 으로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곧 누군가의 강인한 팔이 남자 의 양어깨를 붙잡는다. 그는 다른 방에서 뛰쳐나온 교복 차 림의 대학생으로, 권총을 빼앗기 위해 남자와 몸싸움을 벌 인다. 그 뒤로 이 집에 손님으로 온 듯한 프록코트 차림의 또 다른 대학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다.)


게오르기 놔! 죽여 버리겠어! 네 형수는…. 알렉세이 권총 이리 줘! 게오르기 놔, 목이 졸려 죽겠어. (권총을 떨어뜨린다.) 알렉세이 포민, 좀 집어 주게나. 그래, 권총, 권총 말일세….

이런, 제기랄! 무슨 놈의 힘이 이렇게 센 건지. 형이 이렇게 천하장사인 줄은 몰랐군. 가만히 좀 있어 봐!

(알렉세이가 게오르기를 의자에 앉힌다. 여전히 어쩔 줄 몰 라 하며 당황한 채로 서 있던 포민은 권총을 집어 들어 주머 니 속으로 감춘다.)

게오르기 내가 그녀를 다치게 했어. 알렉세이 아니야, 형수는 괜찮아. 게오르기 두 번째 총알에 맞았단 말이다. 알렉세이 아니야, 괜찮다니까, 스쳐 갔어. 하느님 맙소사, 이

게 대체 무슨 일이람! 포민, 가서 상황을 좀 알아봐 주겠나. 포민

어디로 가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렉세이 문 쪽으로 가 보게, 그래, 그 문, 그 문 쪽으로 말이


야…. 이런 젠장, 학교 친구가 처음 놀러 왔는데 이 난리라니…. 어휴, 형,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물 좀 가져다줄까? 손 떠는 것 좀 봐.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어떻게 말이야! 게오르기 일단은 날 좀 풀어 다오! 알렉세이 미안, 깜빡했군. 그런데 형, 대체 무슨 일이야? 게오르기 네 형수가 바람을 피웠다. 알렉세이 거짓말 마! 게오르기 정말 너절하기 짝이 없어.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오오, 알렉세이, 사랑하는 나의 알렉세이, 세상이 도대체 왜 이 모양인 게냐! 믿을 수 있겠니, 우리의 예카테리나가, 우리의 순결한 예카테리나가 말이다…. 너도 네 형수를 사랑했지, 그랬어, 그랬잖 아? 대답해 봐! 알렉세이 그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당

신은 뭡니까,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내실들과 연결된 문 앞에 옷을 대충 걸치고 뛰쳐나온 하녀 가 서 있다.)

하녀

저는…. 저는….


알렉세이 썩 나가세요! 별 참견들을 다 하는군! 게오르기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알렉세이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런데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게오르기 별거 아니야. 바람을 피웠다고, 알렉세이, 네 형수

가 바람을 피웠단 말이다! 알렉세이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해, 사실이야. 그래

서 믿을 수 없어, 내가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게오르기 닥쳐! 내가 말해 줬잖아…. 아니면,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쏘았다는 거야? 내가! 알렉세이 형이 그럴 주제나 되겠어! 앉아, 그냥 앉아 있으라

고, 믿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 지? 게오르기 누구를 말하는 게냐? 알렉세이 포민 말이야. 게오르기 다쳤을까? 알렉세이 아직은 모르지. 이제 포민이 오면…. 왜 그래, 물

좀 줄까? 게오르기 그래. 알렉세이 자, 마셔…. 형, 손을 많이 떨고 있어. 게오르기 생각해 봐, 애가 둘인 여자야!


알렉세이 알아, 안다고…. 아, 마침내 포민이 돌아왔군. 그

래, 상황이 어떻던가?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포민

별일 아닐세, 그만 길을 잃어버렸지 뭐겠나. 다른 방 문으로 들어갔나 보네.

알렉세이 도대체 자네는…. 젠장! 형수님은 괜찮으시던가? 포민

그럼, 그럼, 괜찮으시다네.

알렉세이 다행이로군.

(게오르기가 큰 소리로 웃는다.)

포민

저기 나이가 지긋하신 어떤 부인이…. 바로 이분일 세!

(키가 크고 통통한 중년 여성이 나이트가운을 대충 걸쳐 입 은 채 큰 소리로 울면서 급하게 들어온다.)

베라 부인 아들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사랑하

는 내 아들아! 총소리가 들렸단다…. 한밤중에…. 총을 쏴 댔어…. 하느님 맙소사, 내가 너무 오래 살 아서 이런 꼴을 다 보는구나! 분명히 들었단다…. 한


밤중에…. 총소리를 말이야…. 게오르기 (날이 선 말투로 쏘아붙이며) 아아, 어머니! 밤이

라서 뭐가요, 총을 쏴서 뭐가요, 그래서 어쨌다고요? 오, 어머니, 어머니는 항상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으 시는군요. 알렉세이 형, 그만해. 어머니, 울지 말고 진정하세요, 다 괜

찮아요. 베라 부인 대체 뭐가 괜찮단 말이냐. 혹시 네 형수가 다친 건

아니냐? 알렉세이 아니에요, 어머니, 빗나갔어요. 실패한 거죠! 게오르기 (소리 내어 웃는다.) 실패라니! 베라 부인 (운다.) 애들 생각도 했어야지. 애가 둘이나 되면

서. 게오르기 어머니! 베라 부인 이제 어떻게 되는 게냐? 넌 나랏일을 보는 국회의

원이 아니냔 말이다. 모두들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 워하고 있는데, 무슨 부랑자도 아니고 느닷없이 재 판이라도 받게 되면…. 알렉세이 어머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아무도 모를 테니

까요. 베라 부인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겠니. 하인들은 어쩌


고? 가서 한 번 보려무나. 부엌에서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보는 걸 두려워할 뿐 이야. 사샤는 집사를 따라서 도망가려고까지 했다니 까. 어딜 가려는 게냐고, 이런 바보, 네가 잘못 들은 거야 하면서 내가 붙잡아 놓았지. 내일 당장 네 아버 지가 계신 시골로 떠나야겠다. 내일 당장 말이다! 게 오르기, 내가 항상 말했잖니. 네 처는 형편없는 여자 라니까…. 게오르기 그만두세요, 어머니, 어떻게 그러실 수가…. 베라 부인 그럼 총을 쏘는 건 된단 말이냐? 진작 내 말을 좀

듣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일이 이 지경까진 안 됐을 게 아니냐. 알렉세이 어머니는 며느리를 모르시는군요. 그만하세요! 포민

(조용한 목소리로) 알렉세이, 난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나?

알렉세이 (큰 소리로) 그럴 필요가 뭐 있겠나. 어차피 다 봐

버린걸. 그냥 있도록 하게. 정말일세, 포민, 좀 앉아 있도록 하게나.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형, 와인을 좀 가져다줄까? 게오르기 생각 없다. 알렉세이 가서 뭐라도 좀 걸치고 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으면서. 재킷을 가져다줄까? 금방 갔다 올게. 게오르기 됐다. 그런데 네 형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더냐? 알렉세이 지금 가서 알아볼게. 게오르기 당장 떠나라고 해. 지금 당장 말이다! 알렉세이 알았어, 알았다고. 그대로 말하지. 이젠 가지 말라

고 붙잡아도 떠나려고 하겠지만 말이야. 여기들 있 도록 해요, 금방 다녀올 테니…. 게오르기 돈을 좀 주도록 해라. 알렉세이 돈은 또 왜! 게오르기 주라잖아. 그리고 즉시 떠나게 해! 알렉세이! 알렉세이 (문 앞에서 뒤돌아보며) 왜? 게오르기 지금 즉시 떠나게 하란 말이다. 알렉세이 알았어! 본인도 그러려고 할 텐데, 뭘…. 알았어,

알았다고! (나간다.) 베라 부인 앉아요, 젊은이.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포민

포민입니다. 아드님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베라 부인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군요! 앉아요. 그런데

지금 몇 시쯤 됐죠? 포민

새벽 1시 10분 전입니다. 여기 시계가 5분 늦군요.

베라 부인 이런, 날이 새려면 멀었군요. 난 또…. 게오르기,

귀여운 우리 아들, 뭐라도 좀 걸치지 그러니. 춥겠


구나. 게오르기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됐어요! 베라 부인 네가 접시를 깬 거냐? 게오르기, 불쌍한 내 아들,

이제 어쩌면 좋으냐? (운다.) 게오르기 모르겠어요, 어머니, 어떻게든 되겠죠. 베라 부인 아들아, 애들은 내주면 안 된다! 네 부인이 키웠다

간 방탕하게 자랄 게 뻔해. 게오르기 제겐 자식이 없어요. 제겐 아무도 없어요. 베라 부인 어떻게 아무도 없단 말이냐? 하느님은 어쩌고?

(게오르기가 대답 대신 소리 내어 웃는다.)

얘야, 부끄럽지도 않니! 포민

(머뭇거리며) 저는 여기서 필요 없는 사람인데, 자리 를 비켜 드릴까요? 안 그래도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게오르기 그냥 있도록 해요. (날카로운 말투로 혐오스럽다

는 듯이) 모르시겠소, 지금 필요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말이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날 지경이 군. 방금 누군가가 살해당할 뻔했고 아직도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데, 자리를 뜨겠다느니, 필요 없는 사 람이라느니 하는 말이나 지껄여 대고 있다니! 아무


일도 없었을 때는 필요한 사람이었다가, 이제 정말 로 필요해지려고 하니까, 무슨 일이 생겨 버리니 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베라 부인 아들아, 걱정하지 말거라. 이 젊은이는 남아 있어

줄 게야. 이보게, 젊은이, 우리와 함께 있어 주게나. 무서워서 그런다네. 포민

기꺼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게오르기 도망가서 숨어 버릴 생각만 하지 말고, 좀 더 주의

깊게 바라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네. 자네는 아직 젊으니 나중에 이 경험이 도움이….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니 말일세. 어머니, 그런데 이건 애들 우는 소리가 아닙니까? 베라 부인 아니, 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구나. 어쩌면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마는.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게오르기 울게 내버려 두세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밤입니

다. 아시겠어요, 밤이란 말입니다. 집도 이렇게나 훌 륭하지요. 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집입니까? 그런데 애들 우는 소리나 들려오고….


베라 부인 네 집사람이 죄를 인정하더냐? 게오르기 네, 거의요. 어머니, 어머니는 이 일에 끼어들지 마

세요. 그러니까 자네 생각으로는…. 그런데 자네는 나를 알지 않나. 포민

물론입니다! 국회에서도 선생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베라 부인 아들아, 재킷을 걸치는 게 어떻겠니. 게오르기 싫다니까요. 포민, 한번 생각해 보게나. 나 같은

사람이 권총을 손에 쥐기까지 어떤 고초를 겪어야 했을지를 말이야…. 아, 내가 방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아하, 그렇지, 밤에 대해서였지. 어디에서의 밤이지? (이마를 탁 하고 친다.) 아시겠어요, 이 집 안에서의 밤이라고요. 아니 그런데 애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때리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도 대체 참을 수가 없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게오르기의 부인 예카테리나가 모 습을 드러낸다. 뒤에서는 알렉세이가 그녀를 저지하려 애 쓰고 있다.)

예카테리나 떠나겠어요, 아시겠어요, 떠나겠다고요! 당신이

란 사람 정말로 비열하군요. 네, 그래요, 당신은 저


를 죽이려 했어요…. 게오르기 (광분하여) 이 여자를 끌어내! 그렇지 않으면….

썩 꺼져 버려! 알렉세이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 당신은 저를 죽이려 했어요! (금방이라도 쓰러

질 듯 양손으로 두 눈을 감싼 채 고개를 뒤로 젖힌 다.) 알렉세이 그래, 그래, 어휴, 알았으니까 제발 좀 나가라고,

예카테리나. 넌 제정신이 아냐! 예카테리나 (알렉세이 쪽으로 돌아보며) 알렉세이, 알렉세

이, 이이가 나를 죽이려 했어…. 그런데 하느님께 서…. 아이들을 키우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 신 거야….

(복받쳐 오르는 듯 통곡하며 나간다. 알렉세이가 그녀를 부 축해 준다.)

게오르기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꺼져 버려…! 베라 부인 (공포에 질려서) 게오르기…! 포민

저기요….

베라 부인 얘야…. 이 어미를 좀 불쌍하게 여겨 다오, 게오르


기! 난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난 지금…. 물을 좀 갖다 줘요, 물! 포민

저기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기 말입니다….

게오르기 알았네, 알았다고…. 어머니께 물이나 좀 가져다

주게나.

(베라 부인이 반 실성한 상태로 물을 받아 마신다. 알렉세이 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재빨리 처음에는 어머니를, 그 다음에는 형을 쳐다본다.)

알렉세이 이런…. 어머니는 또 왜 그러세요? 베라 부인 별거 아니다, 이젠 괜찮아졌어. 게오르기, 게오르

기…. 게오르기 예카테리나는 왜 들여보낸 거냐? 붙잡을 힘이 모

자랐던 게냐, 뭐냐? 알렉세이 (침울하게) 모자랐어. 형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단

말이야. 게오르기 애들은 왜 우는 거냐? 알렉세이 옷을 입히고 있거든. 그건 그렇고, 정말로 형편없

는 사격 솜씨야, 형…! 게오르기 흠…. 아예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게냐,


넌? 알렉세이 어쩌면 그편이 나았을는지도. 게오르기 너도 알다시피, 난 총 같은 건 쏠 줄 몰라. 내가 무

슨 사격 선수도 아니고…. 알렉세이 사격 선수도 아니고 총을 쏠 줄도 모르니, 총에는

아예 손을 대지 말았어야지. 게오르기 알렉세이…! 알렉세이 알았어, 알았어, 그렇다고 화낼 건 없잖아. 나도 제

정신은 아닌 것 같아. 여기 있다간 정신 나가기 딱 좋 지, 뭐. 게오르기 운동하는 사람다운 사고방식이구나. 미안하다만,

체조와 레슬링에 너무 시간을 쏟아부은 나머지 네 생각은 경기장이라는 틀을 못 벗어나고 있어.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말이다…. 알렉세이 맞아, 형, 형 말이 맞아. 운동에 빠져서 멍청한 소

리를 지껄여 댔던 거야. 미안해, 형, 그러니 화내지 마. 자, 우리 악수할까? 뭐, 싫다면 할 수 없고. 가서 재킷을 가져다줄게. 어디에 있지? 서재에 있어? 게오르기 그래. 하지만 가져올 필요는 없다. 알렉세이 아니, 입어야 해. 이 차림으로 뛰어다니는 건 모양

새가 좋지 않아. 어쨌든 간에, 형, 재킷을 입는 건 예


의란 말이야. 재킷을 입지 않고 다니는 사람은…. (나간다.) 게오르기 알렉세이…! 베라 부인 아들아, 쟤가 저렇게나 너를 위하는구나. 너를 진

정시키려고 일부러 농담을 하는 거란다. 그건 그렇 고 와인을 좀 마시는 게 어떻겠니? 게오르기 네, 그러도록 하죠.

(베라 부인이 와인을 꺼내기 위해 일어선다. 바로 그때 재 킷을 든 알렉세이와 교태가 흐르고 오만해 보이는 가정교 사인 파마 머리 프랑스 여자가 각기 다른 문을 통해서 들어 온다.)

가정교사 예카테리나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알렉세이 자, 형, 입어. 형수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가정교사 카탸를 위해서 게오르기 씨의 모피 코트를 가져가

겠다고 하셨습니다. 밖은 굉장히 춥거든요. 게오르기 네, 네, 그러라고 하세요. 가정교사 내일 돌려보내 주실 겁니다. 알렉세이 편한 대로 하라고 전해 주세요. 뭐 더 필요한 거라

도?


지금까지 북레터 <인텔리겐치아>를 보셨습니다. 매일 아침 커뮤니케이션북스와 지식을만드는지식 저자와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인텔리겐치아>사이트(bookletter.eeel.net)를 방문하면 모든 북레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