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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대한 도시의 채무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시는 농촌을 지배한다. 공장 물건이 가내 수공업을 밀어내면 농촌은 물건 살 돈이 필요하다. 돈을 위해 농사를 짓게 되고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면 농촌은 함몰된다. 농촌이 무너지면 도시도 무너진다. 이제 농촌에 빚을 갚을 때가 되었다.

카를 카우츠키(1854~1938)는 농촌과 도시 간 물질 순환을 이해하고 농촌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인텔리겐치아 2462, 2015년 2월 24일 발행

이승무가 옮긴 카를 카우츠키의 ≪농촌 문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보통 (여러 식민지 들 외에는) 먼저 도시에서, 그리고 공업에서 발전한다. 농업은 대개 오랫동안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미 공 업 발전은 농업 생산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성격을 부여한다. -≪농촌 문제(Die Agrarfrage)≫,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지음, 이승무 옮김, 10 쪽


공업 발전이 농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농촌의 가내수공업 해체다. 농민은 이제 필 요한 것을 돈으로 사야 하고 그 때문에 더 많 은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시장 의존도가 점 점 더 커지고 농민은 도시의 시장에서 팔기 위한 식량을 생산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농 업의 시작이다. 자본주의적 농업이란?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제도와 자본주의적 차 지농, 그리고 농업 기술 발달을 기초로 하는 농업이다. 그것은 농촌을 어떻게 바꾸는가? 농업 자본가는 단기 이익을 추구한다. 무차


별 경쟁으로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는 방식이 다. 이런 농업은 토지의 척박화를 가져오고 도시의 농촌 착취를 일으키고 건강한 노동 력을 키워 온 소농의 존립을 고통스럽게 한 다. 도시와 농촌의 물질 순환도 막는다. 소농의 존립이 고통스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인 가? 농업 생산물의 가격 하락을 막을 수 없고 팔 리지 않는 곡식을 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풍작은 예전에는 축복이었지만 이제는 저주 다. 흉작은 예전에는 단순한 해악이었지만 이제는 농민을 완전히 파멸시킨다. 농민이 돈을 벌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부족한 화폐 수입을 채우기 위해 토지를 저


당 잡히고 대출을 받는다. 그러나 대부 자본 의 착취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결국 생활 터 전인 토지를 빼앗기고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카우츠키는 소농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합리적, 과학적 방법에 따라 지도받고 최신 장비를 갖춘 대농이 소농보 다 더 많은 수확을 얻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소농은 대농이 되지 못하나? 토지라는 생산수단의 특성 때문에 불가능하 다. 소농은 발달한 농업 생산 기술을 활용할


수 없다. 그래서 생산력이 낮지만 토지에 집 착한다. 소농의 고통은 필연인가? 냉정한 역사 발전 방향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고통을 덜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카우츠키가 찾은 소농 구제 방안은 뭔가? 농촌의 사적 소유권 제한, 공유지 확장, 자치 공동체의 자율성 확대, 협동조합을 바탕으 로 한 생산과 소유 장려, 농공업 기업 설립, 농촌의 복지와 문화, 교육 수준 향상 정책 등 이다.


실현되었는가? 그가 제시한 농촌 정책은 현대에 대부분 시 행되었다. 농촌의 어린이 혹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제는 진부할 정도다. 농촌 공업에 서 물질 재활용 문제, 삼림과 하천의 국유화, 주택 문제, 국가 보험 문제는 지금 봐도 진보 적이고 현대적이다. 오늘날 세계 농촌은 어떤 모습인가? 서구 선진국의 농업과 농촌 정책은 잘되어 있다. 농촌 자치공동체의 정책 자율성이 역 사적으로 이어졌다. 농민이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린다. 우리나라는 강압적 국가권력 이 농촌 고사 정책을 추진했다.


한국 농촌의 풍경은 무엇인가? 깨진 석면슬레이트 지붕, 쓰러져 가는 빈집, 텅 비고 풀만 무성한 학교, 썰렁한 읍내 거 리, 이것이 우리나라 농촌 어디서나 흔한 풍 경이다. 우리 농촌이 깨진 이유가 뭔가? 농업의 의미를 무시했다. 지역의 자율성과 문화, 생태 가치도 무시했다. 농촌을 희생시 켜 수출 공업화를 추진한 결과다. 명확한 장 기적 사상과 이론적 기초 없이 무책임하게 펼친 국가 농업 정책과 자본의 합작품이다. 카우츠키가 오늘의 우리 농촌을 도울 수 있는 가? 그는 단순한 생산 효율 증대나 규모의 경제


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사회, 농촌과 도시 간 물질 순환의 전체 모습을 생 각했다. 이 책을 통해 농촌과 도시의 지속 가 능한 물질 순환과 인구 문제, 우리 농촌 경제 를 위한 장기 정책이 모색되길 희망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승무다. 순환경제연구소 소장이다.


농촌에 대한 도시의 채무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시는 농촌을 지배한다. 공장 물건이 가내 수공업을 밀어내면 농촌은 물건 살 돈이 필요하다. 돈을 위해 농사를 짓게 되고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면 농촌은 함몰된다. 농촌이 무너지면 도시도 무너진다. 이제 농촌에 빚을 갚을 때가 되었다.

카를 카우츠키(1854~1938)는 농촌과 도시 간 물질 순환을 이해하고 농촌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농촌 문제 카를 카우츠키 지음 이승무 옮김 2015년 2월 13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855쪽, 48,000원


작품 속으로

Die Agrarfrage 농촌 문제


머리말

이 글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프랑크푸르트 당대회에서 작성 되고 브레슬라우 당대회에서 기각된, 농촌 강령에 관해 벌어 진 토론이 계기가 되었다. 이 토론에 관해서 사람들이 어떻 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명확히 보여 준 한 가지는 독 일의 사회민주주의에서도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처럼 현 대 농업 발전의 경향에 관한 견해들이 크게 상이해 사회민주 주의의 결정적인 농촌 정책을 위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토대 가 아직 얻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레슬라우에서는 농업의 제관계에 대한 더욱 상 세한 이론적 연구가 필요하며 가능한 한 최대로 촉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만장일치로 선언되었다. 내가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는 데는 물론 이런 동기가 필 요 없었다. 이미 당 활동 초기에 그 문제는 나를 생생하게 사 로잡았다. 1878년 내가 아직 ‘지마코스(Symmachos)’라는 가 명으로 집필하던 때에 나는 이미 빈(Wien)의 ≪사회주의자 (Sozialist)≫지에 <농민과 사회주의>라는 연재 기사를 썼 으며, 그 별책판이 선동 팸플릿으로 발간될 예정이었지만, 판 전체가 압수되어 제거되었다. 1879년에 나는 “인구 증가 가 사회의 진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글을 끝냈는데, 거기 서 식량 생산 문제가 큰 역할을 한다. 1880년에는 농민들의


선동에 관해 쓴 내 기사가 ≪리히터 연감≫에 실렸으며, 1881년에는 ≪국가학 논문집≫에서 해외 식량 경쟁 문제를 설명했다. 그 밖에도 나는 <아메리카에서 온 아저씨> 등 일련의 농민 전단지를 작성했다. 그 후로 1880년대 중반에 농촌 문제가 사회주의 정당의 토론에서 전면에 등장하자, 나는 단지 옛 면식(面識)을 재생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도외시한 적이 없는 면식이다. 그 것은 세월이 가면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관심을 끌 었을 뿐이다. 우리 당의 성장과 농업 위기는 그것을 실천적 인 문제들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로 올려놓았으며 사회민주 주의는 이 문제에 몰두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마르크스주 의도 도처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토대가 되어 있었다. ≪자 본(Das Kapital)≫의 제3권은 지대(地代)에 관한 빛나는 탐 구들을 동반하면서 발간되었지만, 농업의 발전은 마르크스 이론과 조화될 수 없어 보이는 현상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농업 문제는 역시 이론적 관심의 전면에 떠올랐다. 나에게 예전부터 알려진 주제를 다루는 데서 나는 별다 른 어려움을 발견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학술적인 문 제가 아니라 크나큰 현실성을 가진 실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어서 더구나 내 작업을 가지고서 곧바로 대중 앞에 나서기를 더더욱 바랐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것을 공개할 수 있기 까지는 3년이 걸렸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 직업적 위치가 초래한 수많은 중단에 기인한다. 일상적인 업무 처리 그리고


엥겔스의 서거 후 나에게 떨어진 마르크스 유고 간행 같은 역할들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주로 최신 농업 통계 활용 결 과에 기초해 내 연구를 진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란 사정에 기인한다. 잉글랜드의 의회 농업위원회 조사 결과, 1890년 아메리칸 센서스의 농업을 다루는 제3권, 1892년의 프랑스 농업조사 그리고 1895년의 독일 농업 사업체 및 직업 통계 같은 것들인데, 이는 모두 1897년 혹은 1898년에야 발간된 출판물들이다. 그런 데다 작업의 진행 과정에서 내가 계획했던 것처럼 소책자의 틀로는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를 가장 곤란하게 하는 것은 내 짐작으로는 이미 무 수히 많아진 농업 단행본과 연구물들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 이 아니다. 이것들이 감사할 만한 것들일지라도 농업의 상황 에 관한 설명은 현재도 그다지 부족하지 않다. 지배계급의 정부, 학계, 언론은 매년 압도적인 분량의 자료를 내놓는다. 필요한 것은 이 극히 잡다한 사실의 잡동사니를 꿰는 실마리 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현상의 표면 밑에서 활동하면서 이를 정해 주는 기본 경향에 대한 탐구다. 농촌 문제의 다양 한 개별 질문들, 대경영과 소경영의 관계, 채무, 상속권, 노동 부족, 해외 경쟁 등 오늘날 보통 단독적으로 특별한 현상으 로 탐구하는 문제들을 전체 과정의 부분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제는 어려운 과제이고, 그 주제는 위력 있는 주제이


며, 현대 사회주의 관점에서 행한 충분한 사전 작업이 내게 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자연스럽게 주로 공업 발전의 탐구에 몰두했다. 물론 엥겔스와 특히 마 르크스는 역시 농업의 상황에 관해 중요한 것을 말했지만, 오직 간헐적인 언급이거나 짧은 글에서 한 것들이다. 하나의 예외는 ≪자본≫ 제3권의 지대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는 완전히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생애 를 건 저작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완성했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지금 찾는 그 모든 설명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작 업 계획에 부합하게 그 안에서 오직 자본주의적 농업만을 다 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 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 안의 전자본주의적 그리고 비자본주 의적 농업 형태들의 역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본≫은 농업 상황에 관한 우리의 인식에 더없이 소중하다. 그 결과 때문에 소중할 뿐만 아니 라 그의 영역을 넘어서 유익하게 더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도 록 해 주는 그의 방법 때문에도 소중하고 이 측면에서 더욱 더 소중하다. 이 글에서 내가 새로운 유익한 사상을 전개하 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이에 대해 무엇보다도 나의 위대한 두 스승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를 여기서 더욱 강 조하는 것은 얼마 전부터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을 낡은 것으로 공언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시대에는 완전히 인정할 만한 것을 성취했고 오늘날에도 풍부한 자극을 제공하지만, 교조주의 에 빠지고 싶지 않은 자는 그들을 극복하고 그들을 넘어서 더 높은 견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마르크 스주의적 변증법의 관점에서도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 르면 영원한 진리는 없으며 모든 발전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 는 데서 싹튼다. 이는 매우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우리를 다음과 같은 유 명한 결론으로 데려간다. 즉, 마르크스는 옳기 때문에 이미 틀렸다는 것, 변증법은 정당하기 때문에 이미 거짓임이 분명 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결론에서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것 이 있다. 변증법의 허구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적 변증법의 허구성은 아니다. 엥겔스는 이미 ≪안티뒤링(Antidühring)≫(제2판, 133쪽) 에서 그것을 언급했는데, 폐기하는 것인 부정을 변증법적 과 정의 한 마디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이었 다. 부정을 통한 발전은 결코 모든 기존의 것의 부정을 뜻하 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발전시켜야 할 것의 존속을 전제 로 한다. 사회주의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은 인간사회 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전 단계의 특정한 측 면의 폐지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 를 그에 선행하는 사회 형태로부터 구분해 주는 모든 측면들 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유가 개인적


소유의 부정이라면 사회주의는 “부정의 부정이다. 이는 개 인적 소유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 시대 업적의 토대 위에서 복원하는 것이다”(마르크스, ≪자본≫, 2판, 793쪽). 발전은 부정하고 폐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전도 할 경우에, 망할 만한 기존의 것과 아울러 보존할 가치가 있 는 기존의 것도 발견할 경우에만 진보다. 진보는 그런 만큼, 예전 발전 단계들의 업적의 축적 속에 존재한다. 유기체의 발달은 적응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유전을 통해서도 야기된 다. 인간사회를 발전시키는 계급투쟁은 파괴와 새로운 건설 만이 아니라 기존 것의 정복, 이와 함께 보전에도 목표를 둔 다. 학문의 발전은 예전 성과의 비판 없이 불가능한 것처럼 그것의 전수 없이 불가능할 것이며, 예술의 진보는 전해 오 는 것의 모든 한계를 돌파하는 천재의 독창성만이 아니라 선 구자의 걸작품에 대한 이해에서도 나온다. 때때로 효력이 없 는 것 그리고 보전해야 할 것에 대한 인식은 오직 현실에 대 한 탐구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변증법은 이 탐구를 생략하 기 위한 획일적 방식으로 기능하기에는 절대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오직 탐구를 체계적으로 만들고 탐구자의 시각을 날 카롭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거기에 변증법의 높은 가 치가 있다. 그러나 변증법이 탐구자에게 무조건 완결된 결과 를 주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가르침 자체를 극복할 필


요성이 나온다는 가정은 이처럼 그 변증법에 대한 완전히 잘 못된 파악에 기초한다. 그것이 오류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오류인지, 어디까지가 학문의 영구적 이득(κτῆμα ἐς αἰεί)

인지는 변증법에 근거를 둔 것으로는 결정될 수 없으며 오직 사실의 탐구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지금까지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의 ‘부정’에 기여하는 것으로 결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는 망설임과 의혹이 떠오르는 것을 보지만 어디에서도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할 것이 확실 한 새로운 진리가 나온 것은 알지 못한다. 단순한 망설임과 의혹은 변증법의 의미에서 결코 부정을 이루지 않으며, 얻어 진 인식 너머로의 발전도, 그것의 극복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의혹은 의심을 받는 가르침보다는 의심하는 자 자신 에게 더 많이 근거를 두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그런 망설 임의 검증이 가져온 결과만이 아니라 내 경험으로부터도 그 런 결론을 내린다. 내가 사회주의에 대한 관여의 초기에 줄곧 공감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쪽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날 나의 교리 열광주 의를 경멸에 찬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그런 자들 중 어느 누 구라도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이고 의심에 찬 시선 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대했다. 나는 오직 저항하는 마음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도 그렇듯 당시에 나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의심을 자주 가졌어도 결국 항상 그 책임이 나에게 있었지 내 스승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 대상


에 대한 깊은 천착은 내가 그들의 관점을 정당한 것으로 인 식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처럼 모든 새로운 검증, 모든 개선의 시도는 나에게 오직 그 가르침에 대한 더 증가된 신뢰, 더 첨예화된 인정을 가져왔으며 그 가 르침의 확장과 응용은 내 필생의 과업이 되었다. 농업 발전의 사실은 ‘마르크스의 도그마’에 가장 날카로 운 의문을 불러일으켜 왔다. 그 의문이 얼마나 정당한지는 다음의 글이 보여 줄 것이다.

베를린ᐨ프리데나우, 1898년 12월 카를 카우츠키


제1장 서론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다. 우 리 시대를 움직이고 이 시대에 각인을 새기는 것은 자본가 계급과 임금 프롤레타리아트 간 대립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적 생산양식은 현존하는 사회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생산 형 태는 아니다. 그것과 아울러 오늘날까지 보전되어 오는 전자 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잔재도 마주칠 수 있다. 그리고 국가 및 자치공동체 경제, 협동조합의 여러 형태에서 새로운 더 높은 생산양식의 싹도 이미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가 계급과 임금 프롤레타리아트 간 대립도 우리 시대의 유일한 사회적 대립은 아니다. 이 두 계급과 아울러, 그리고 그 사이 에 수많은 다른 계급들이 존재한다. 그들 중에는 사회의 꼭 대기와 바닥이 있고, 여기는 신하들을 거느린 군주들이, 저 기는 다양한 종류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다. 이 계급들 은 일부는 전자본주의적 사회 형태의 산물이고, 또 일부는 자본주의 자체의 필요로 생겨나거나 최소한 그 성장의 촉진 을 받는다. 이 잡다한, 일부는 부상하고 일부는 몰락하는 계 급들, 그들의 수시로 변하는 이해관계, 한편으로는 자본가들 의 이해와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극히 다 채롭게 착종하고 서로 맞물리면서도 이 이해관계들 중 하나 와 한 번도 정확히 일치한 적이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


들, 이들은 우리 시대의 정치 투쟁에 아주 별난 경이로움으 로 가득한 그들의 불안정한 성격을 부여해 주는 계급들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기본 법칙을 탐구하고자 하 는 이론가는 이 현상들의 가득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그 특성, 그 고전적 형태대로 그것을 둘러싼 다른 생산 형태의 잔재와 맹아에서 완전히 벗 어나서 탐구해야 한다. 반면에 실천적인 정치인이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를 오늘날 사회에 유일하게 작용하는 요소들 로 간주하고 다른 모든 계급들은 도외시하고자 했다면 그는 크나큰 잘못을 범한 것이 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서만 다룬다. 반면에 같은 저자의 ≪브뤼메르 18일≫, ≪독 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에서는 자본가, 프롤레타리아와 아울러 군주, 룸펜 프롤레타리아, 농민, 소시민, 관료, 군인, 교수, 학생도 역할을 한다. 이 중간 계층들 중에 농민층, 한마디로 우리 나라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이 우리 세기의 민주적 그리고 혁명적 당파에 항시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다. 도시 출신들에게 농민 은 신비적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아니, 흔히 참으로 섬뜩한 존재였다. 예전에 교회, 제후 세력, 귀족 집단과 격렬히 싸운 농민은 이제 이 기구들에 극히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다른 계급들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운 것과 같은 힘으로 농민은 흔히 자기 착취자를 편든다. 자신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준


무기를 그는 너무나도 흔히 민주주의에 겨눈다. 농민은 처음에는 사회민주주의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어의에서 민주적 인민 당파가 아니며, 서로 대립할지라도 모든 인민 계급의 이해를 정당하 게 다루려고 하는 박애주의 정당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정파 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를 사회민주주의는 그 존 재 초기에 완전히 이용했다. 그리고 경제 발전이 도시에서처 럼 농촌에서도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사전 작업을 해 주기를 기대했으며, 소경영과 대경영 간 투쟁이 소경영의 축출을 가 져와서 순수한 프롤레타리아적 정파로서의 농촌 대중을 장 악하기가 쉽게 되기를 기대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아주 강력하게 성장해서 도시는 그 활동 무대로서 더 이상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사 회민주주의가 농촌으로 넘어 들어가자 곧 이미 예전의 민주 적 · 혁명적 당파들에 아주 많은 경악감을 안겨 주었던 것과 같은 비밀스러운 세력에 부닥친다. 사회민주주의는 농업에 서 소경영이 결코 급속히 사라지지 않는 것, 거대 농업 경영 이 오직 완만하게만 지반을 확보하고 곳에 따라서는 오히려 지반을 잃는 것을 보게 된다. 사회민주주의가 기초로 삼는 경제 이론은 농경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면 곧 틀린 것으로 여 겨진다. 그런데 이 이론이 농업에 정말로 들어맞지 않는다 면, 이는 지금까지의 전술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원칙 들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베르너 좀바르


트는 이 고려를 최근에 쓴 글에서 아주 예리하게 제기했다.

경제생활에서 사회화 과정에 굴복하지 않은 영역들, 그 것도 여기서 상황에 따라서 소경영 형태가 대경영 형태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더 성취 능력이 있다는 이유 때 문에 굴복하지 않은 영역들이 발견된다면, 그러면 어떻 게 되는가? 그것은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농촌 문제로 서 목전에 놓인 문제 전부다. 대경영에 기초를 둔 공동경 제적 이상, 그리고 이와 함께 또한 그로부터 형성된 프로 그램은 농민 계급 앞에서 변화를 겪어야 하는가? 그리고 농업 발전에서 대경영의 경향이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농업 생산의 영역에서 대경영은 역시 일반적으로 최고의 경영 형태는 아니라는 통찰에 도달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저 소경영적 존재를 끌어안고, 그러고 나서 우리의 강령 을 공동경제의 목표와는 거리를 두는 쪽으로 변경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성 을 유지하고 이 공동경제적 이상과 목표를 염두에 두며 저 분자들을 우리의 운동에서 배제해야 하는가? 나는 여기서 ‘만약’과 ‘그러나’로 말해야 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는 농사일에서 발전 경향이 어떤 것인지, 농업 생산에서 더 우월한 쪽이 어떤 경영 형태인 지 그리고 도대체 어떤 특정한 경영 형태인지 어떠한 확 실성을 가지고서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그 이유에서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여기서 본질적으로 마르크스 의 체계는 실패한다. 내가 아는 한, 마르크스의 정의(定 義)들은 농업 분야로는 덮어 놓고 옮겨 올 수가 없다. 그

는 농업 사안에 관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했지만, 대경 영의 증가, 대중의 프롤레타리아화에 기초를 두며, 이 발 전으로부터 사회주의를 필연적인 것으로 이끌어 내는 그 의 발전 이론, 이것은 공업 발전에 대해서만 명확하다. 농 업 발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며 오직 학문적 탐구만 이 아무튼 존재하는 공백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진다. [≪19세기의 사회주의와 사회운동(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 im 19. Jahrhundert)≫, 111쪽]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만, 우리가 이와 관련해서 참 으로 오래 기다려야 하리란 것이다. 큰 토지가 유리하냐 작 은 토지가 유리하냐 하는 논쟁은 한 세기 이상 전부터 경제 학자들의 논란거리이며, 논쟁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가들이 큰 토지의 이점과 작은 토지의 이점에 관해 싸우 는 동안 농업은 강력한 발전을 성취해 냈으며,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고,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발전이라는 것은 이 때 문에 방해받은 바 없다. 그러나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시각을 오로지 대경영과 소경영의 싸움에만 두어서는 안 되며, 사회 적 생산의 전체 움직임을 도외시하고 농업 하나만을 관찰해


서도 안 된다. 물론이다. 그리고 농업이 공업과 같은 틀에 따라 발전하 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처음부터 입증된 것으로 받아들이 고자 한다. 농업은 고유한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농업 발전이 공업 발전과 대립하고 그것과 화합이 불가 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둘을 고립시키지 않고 공통 과정의 공동의 마디로 간주하면 곧 그 둘이 동일 한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 생산양식의 발전을 “소경영에 의한 대경영 축출”1)이라 는 공식으로 환원해 누구든 이 공식을 암기하는 자는 전체의 현대 경제의 열쇠도 이미 손에 넣은 것일 정도로 되는 것, 단 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방법으로 농촌 문제를 연구하고자 한다면, 소경영이 농업에서 미래가 있는가 하는 문제만을 제기해서 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과정에서 농업이 겪는 모든 변화를 조사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이 농 업을 장악하고 뒤집어엎고, 생산 및 소유의 옛 형태들을 유 지할 수 없게 만들고 새로운 형태들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지,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이 문제들에 대답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마르크스의

1) (옮긴이 주) ‘대경영에 의한 소경영 축출’이 되어야 문맥에 맞는다.


이론이 농업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생산수단에서 사유 재산 지양이 모든 생산수단 중에 가장 주요한 것인 토지 앞 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우리의 과제는 이로써 명확하게 제시된다.


제2장 농민과 공업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보통 (여러 식민지들 외에는) 먼저 도시에서, 그리고 공업에서 발전한다. 농업은 대개 오랫동안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미 공업 발 전은 농업 생산에 다른 성격을 부여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중세의 농민 가정은 완전히, 혹은 거의 완전히 자급하는 경제공동체로서 자신의 식량을 생산할 뿐 아니라 자신의 집 도 스스로 짓고 가구와 집기도 스스로 만들고 대부분의 볼품 없는 작업 도구를 스스로 만들고, 직접 가죽을 무두질하고, 아마와 양모를 가공하고, 스스로 자신의 의복을 만들었다. 물론 농부가 시장에 가기는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가 생산 한 것에서 남아도는 것만을 팔았고, 철을 제외하고는 오직 없어도 되는 것만을 구입했다. 철은 가능한 한 드물게만 사 용했다. 그의 안락과 사치가 시장의 상태에 의존할 수는 있 었지만, 그의 생존은 그렇지 않았다. 이 자족적인 조합은 생명력이 끈질겼다. 일어날 수 있었 던 최악의 것은 흉작, 큰 화재, 외적의 침입이었다. 그러나 이 런 불행은 단지 지나가는 액운일 뿐, 생활의 원천을 끊어 놓 지는 않았다. 흉작에 대해서는 곡식을 쌓아 둔 거대한 창고 가 대체로 보호를 해 주었다. 가축은 젖과 고기를 제공했고, 숲과 물은 여전히 식탁에 오를 것을 내놓았다. 숲에는 또한


불타 무너진 집 대신에 새 집을 지을 목재도 있었다. 적이 오 면 가축과 동산(動産)을 가지고서 숲 속으로 피신했다가 적 이 물러가면 되돌아왔다. 적이 무엇을 망쳐 놓을 수 있었든 지 간에 경작지, 목초지, 숲 등 이 생존의 토대는 파괴할 수가 없었다. 필요한 노동력이 있고 인간과 가축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이 불행은 곧 회복되었다. 우리 세기에도 보수적인 경제학자 시스몽디(Sismondi) 는 이 자립적인 농민 계층의 안락한 상태, 그의 이상인 이 상 태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농촌의 행복,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명성이 가득한 시대 의 역사가 그 그림을 보여 주는 행복은 우리 세기에도 알 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농민의 토지 소유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나 저 유복함, 안정, 미래에 대한 신뢰, 독립성을 만날 수 있으며, 그것들은 동시에 행복과 덕성 을 보장해 준다. 자기 자녀와 함께 노동 전체를 자신의 작 은 땅에서 행하는 농민, 자기 위의 누구에게 소작료를 지 불하지도 않고 자기 밑의 누구에게 임금을 지불하지도 않는 농민, 자기 소비의 필요에 따라 생산을 조정하는, 자 기 곡식을 먹고, 자기 포도주를 마시는 농민, 스스로 키운 아마와 스스로 채취한 양털로 옷을 해 입는 농민은 시장 가격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왜냐면 그는 사거나 팔 것이 적고, 결코 상업 위기로 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


래를 염려하기는커녕 자신의 기대 속에서 스스로를 가꾼 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녀의 이익을 위해 다가오는 세 기에 매 순간을, 학년말 논문을 쓰는 데도 요구되지 않던 순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 세기 후에 강건한 나무가 될 씨앗을 땅에 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의 밭을 영구적으로 배수하는 도랑을 파고, 샘물을 끌어 오는 물길을 내는 데, 지치지 않고 반복되는 수고, 한가로 운 순간들로부터 빼내 온 수고로 그를 둘러싼 온갖 동식 물을 개량하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의 작 은 상속지는 그의 모든 작은 소득을 취하고 그의 모든 여 가 시간을 선용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진정한 저금통 이다. 항상 활동적인 자연의 힘이 그곳을 비옥하게 하고, 백배의 결실을 맺게 해 준다. 농부는 그의 소유지와 결부 된 그 행복을 극히 생생히 느낀다. [≪경제학 연구(Etudes sur l'économie politique)≫. I., 170, 171쪽]

노동의 이 행복은 당대에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 중 한 사 람이 60세가 채 안 되었을 때 극히 생생한 색채로 그릴 수 있 었다. 이 그림은 너무 장밋빛으로 그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농민층의 일반적인 상황의 그림도 아니었다. 시스몽디 는 거기서 주로 스위스와 몇몇 북이탈리아 지역을 염두에 두 었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결코 날조된 그림은 아니고 예 리한 관찰자가 그린 사생화(寫生畫)다.


이것과 오늘날의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전체의 농민층을 비교해 보라. 그러면 강력한 경제 혁명이 이 시기에 완수되 었음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 첫 단계를 이룬 것은 주로 도시 공업과 상품 교역에 의 한 농민 수공업의 해체였다. 농민 가정의 울안에서는 분업이 조금밖에 가능하지 않았 으며,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분업을 넘어서지 않았다. 도시 공업이 농촌 수공업을 곧 능가해 농민을 위해 집기와 작업 도구를 생산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들을 농민은 오 랫동안 그렇게 완벽하게 혹은 전혀 생산할 능력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업과 상업의 발달은 도시에서 새로운 필요 를 낳았으며, 이는 새로 개선된 작업 도구들이나 마찬가지로 도시와 농촌 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수록 더 급속히 그 리고 쉴 틈 없이 농촌으로 침투했다. 이는 농민적 공업이 충 족할 수 없었던 필요였다. 마의와 가죽옷 대신에 천으로 만 든 옷이 등장했고 인피 신발은 가죽 장화 때문에 내쫓겼다. 농민의 자식들을 도시로 끌어들이고 도시의 필요에 익숙하 게 해 준 군사주의는 이 발달을 비상하게 촉진했다. 담배와 화주 소비가 확산된 것은 이 덕분이다. 결국 도시 공업의 우 위성이 여러 지역들에서 아주 커져서 농촌 공업의 제품을 사 치품으로 낙인찍었고, 그 사용은 절약하는 농부에게는 감당 이 될 수 없어서 그는 그것의 생산을 포기했다. 이처럼 면화 공업의 발달은 아주 값싼 면포를 생산해 농민의 자체 사용을


위한 아마의 재배를 곳곳에서 제한했고 완전히 없앤 경우도 많았다. 농민의 자체 사용을 위해 생산하는 공업의 해체는 이미, 도시 수공업이 등장하던 중세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 이 농촌으로 몰려 들어간 것은 완만하게만 진행되었으며, 도시 주변으로 한정되었고 농민 계층의 생활 조건에 좀처 럼 두드러지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시스몽디가 농민의 행복 을 찬양하던 무렵에 이머만(Immermann)은 [≪뮌히하우젠 (Münchhausen)≫에 나오는] 호프슐첸(Hofschulzen)이란 등장인물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베스트팔렌의 대농을 나타 낼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 만들면 벌 수 있는 돈을 대장장 이에게 갖다 주는 바보.”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또한 모든 기둥, 문짝과 문턱, 집 안의 궤짝과 농을 자기 손으 로 수선하거나, 형편이 좋으면 새로 짜기도 한다. 그가 하려 고 했다면 가구공예사로도 행세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제대로 된 장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슬란드에 는 오늘날에도 이렇다 할 수공업이 없다. 농민은 거기서 아 직 자기 자신의 장인이다. 자본주의적 공업이 비로소 아주 우세해져 자기 사용을 위한 가내공업을 급속히 몰아내었으며, 철도, 우편, 신문을 가진 자본주의적 소통 체계가 비로소 도시의 관념과 생산물 을 농촌의 외진 구석까지 가져가고 그래서 도시의 변두리만 이 아니라 농촌 인구 전체를 이 과정에 놓이게 한다.


이 과정이 진행될수록, 원생적 농민 가내공업이 해체되 어 갈수록 농민의 화폐 필요는 커져 간다. 그는 이제 없어도 되는 것이나 아예 불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필요한 것, 불가 결한 것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그는 이제 돈이 없이는 자신의 경제를 더 이상 계속 이끌어 갈 수도 없고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도 없다. 농민의 화폐 필요성과 동시에 농민을 착취하는 유력자들, 봉건 영주, 제후 그리고 그 밖의 국가권력 소유자들에게도 화폐 필요성이 생겨나고 커져 갔다. 이것이 농민의 현물 공 조를 금납조세로 전환했음은 알려져 있다. 그러나 또한 이 공조를 점점 더 높이 올리려는 노력도 낳았다. 이를 통해서 농민의 화폐 필요성은 당연히 더욱더 커지게 되었다. 농민이 돈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제품을 상품으로 만들고 그것을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판매하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가 구매자를 가장 손쉽게 발견한 제품은 후 진적인 공업 제품이 아니라 도시 공업이 생산하지 않는 제품 이었다. 그래서 농민은 결국 오늘날 농민으로 알고 있는 그 런 농민, 그냥 농사꾼(Landwirt)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되어 갈 수록, 공업과 농업이 더욱더 구분될수록 시스몽디가 여전히 곳에 따라서 자유농민에게서 발견한 농민 존재의 저 독립성, 안정성, 그리고 안락함은 사라져 갔다. 농민은 이제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고 시장은 그에게 날


씨보다 더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날 씨의 심술에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대비할 수 있었다. 배수 구를 파서 아주 비가 많은 여름의 영향을 누그러뜨릴 수 있 었고 관개 시설을 통해서 큰 가뭄에 대처할 수 있었으며, 연 기를 피워 포도밭을 봄의 서리로부터 지킨다든지 할 수 있었 다. 그러나 그는 가격의 하락을 막고, 팔리지 않는 곡식을 팔 리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에게 축복이던 것이 이제는 저주가 되었다. 풍작이 그것이다. 이는 특히 서 유럽에서 농업 생산이 이미 일반적으로 상품 생산의 성격을 띤, 그러나 교통수단이 아직 불완전하고 이곳의 과잉과 저곳 의 부족을 균등화할 능력이 없던 금세기 초에 두드러지게 드 러났다. 흉작이 가격을 상승시킨 것과 꼭 같이 풍작은 가격 을 하락시켰다. 프랑스에서 밀 수확량은 다음과 같았다.

헥타르당 평균 수확 (100리터)

100리터당 가격 (프랑)

1816

9.73

28.31

1817

-

36.16

1821

12.25

17.79

1822

-

15.49

프랑스의 농사꾼들은 1821∼1822년에 헥타르당 수확으 로 3분의 1이 증가한 소출로 겨우 200프랑, 1816∼1817년보 다 3분의 1이 적은 소득을 올렸다. 당시 프랑스 왕이 어떤 법


률도 “수확의 과잉에서 생겨난 폐해를 예방할 수 없다”고 유 감을 표현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농업 생산이 상품 생산으로 되어 갈수록 생산자와 소비 자가 직접 매매하는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기는 더 어려워 졌다. 농촌 사람이 생산물을 판매할 시장이 멀어지고 커질수 록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기는 더욱더 불가능해졌고 중개 인이 더욱더 필요해졌다. 상인이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끼 어들었다. 그는 생산자보다 시장을 훨씬 더 잘 조감하고 어 느 정도까지는 시장을 지배하며 농민을 착취하는 데 이를 활 용한다. 곡물과 가축 상인이 대부업자를 겸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들과 다른 사람인 대부업자가 곧 함께 일하게 된다. 작황 이 나쁜 해에는 농민의 화폐 수입이 그의 금전 필요를 채우 기에 충분치 않다. 그는 신용으로써 자기 토지를 저당 잡히 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속, 새로운 착취, 모든 착취 중에 가장 악한 착취가 그에게 시작된다. 이는 대부 자본의 착취 로서 그는 이를 다시 벗어던지기가 어렵다. 그것을 벗어나는 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흔히 새로운 짐이 그에게 너 무 무거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끝은 상속 재산을 공매해 그 수입으로 대부업자, 그리고 물론 세무 집 행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과거에 흉작, 화재 그리고 전란 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 곡물과 가축 시장의 위기가 달성 한다. 이 위기는 농민에게 일시적인 불운만을 가져오지 않고


그의 생활 원천인 토지를 빼앗고 그를 결국 완전히 토지로부 터 분리할, 그를 프롤레타리아로 만들 힘을 지닌다. 자기 필 요를 위한 가내공업이 해체되고 금납조세가 자유농민에게 부과되는 곳에서 자유농민의 복지, 독립성, 안정이 해체되고 만다. 그러나 도시 공업의 발달은 또한 원생적인 농민 가정을 해체하는 싹도 틔운다. 농민 소유지에는 원래 농민 가족의 부양에,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와 아울러 지주에게 지세 를 바치는 데 필요한 만큼 많은 밭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이 시장에 종속되어 갈수록, 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할수록 그가 생산하고 판매해야 하는 식량의 양은 커 졌고 그는 변함없는 생산관계에서 자기 가족의 크기에 비해 더 많은 토지를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필요로 했다. 그러 나 한번 주어진 생산양식을 그는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없었 고, 토지 소유도 마음대로 늘릴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의 가족 이 너무 큰 경우에 가족을 줄여서 노동력의 잉여분을 자기 농장으로부터 외지의 노무자로, 머슴, 군인 혹은 도시의 프 롤레타리아로 방출하거나 아메리카로 보내서 새로운 고향 을 이루게 하는 것은 자유였다. 농민 가족은 가능한 한 최소 로 줄어들었다. 다른 사정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농업은 인간 노동 력을 항상 동일한 정도로 요구하는 활동이 아니다. 경작 시, 특히 수확 시에는 많은 노동력을 요하고 다른 때에는 거의


노동력을 요하지 않는다. 여름철에 농업노동력 수요는 겨울 보다 두 배, 세 배, 흔히는 네 배나 더 된다. 농촌 공업이 존속하던 동안에 이런 노동력 소요의 들쭉 날쭉함은 별로 대수가 아니었다. 밭에서 할 일이 없다면, 농 민 가족은 집 안에서 그리고 집 뜰에서 더 많이 일하면 되었 다. 농촌의 가내공업이 사라지자 이런 상황이 그쳤다. 거기 에 농민이 가족 수를 최소로 줄인 둘째 이유가 있다. 이로써 겨울에 놀고먹는 사람을 부양하지 않아도 되게 하려는 것이 었다. 우리는 여기서 농민 가내공업 소멸의 영향에 대해서만 말한다. 농업 생산의 변동이 그 영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예 컨대 목초지 경제로부터 더 많은 노동을 요하는 집약적 목축 으로 이행하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다른 변동은 반대로 그 것을 더 키울 수 있다. 겨울철 소일거리가 되는 가장 중요한 농업노동 중 하나는 곡식 타작이었다. 탈곡기의 도입은 그것 을 종식시키고 이로써 농촌 가족이 더 작아지는 강력한 동인 이 된다. 잔류한 사람들은 당연히 여름철에 그만큼 더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 그러나 안간힘을 써도 그들은 빠져나간 노동력 을 벌충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보조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해진다. 일이 많은 때에만 고용하고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내보낼 수 있는 임금노동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에 게 가족 구성원으로서 1년 내내 부양하는 것만큼 높은 급료


를 지불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점점 더 싸진다. 그러나 임금 을 받고 고용살이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프롤레타리 아화한 농민, 부업을 찾는 농민, 그리고 남아도는 농민의 아 들딸들이다. 한편으로 임금노동자에 대한 필요를 낳는 이런 발전은 다른 한편으로 그런 임금노동자를 창출한다. 그것은 많은 농 민을 프롤레타리아화하고, 우리가 보았듯이 농민 가족 수를 줄이고 남아도는 농민 아들딸들을 노동 시장에 내동댕이친 다. 결국 그것은 소농에게는 자신의 농업 경영 외에 부업에 대한 필요를 낳는다. 그들의 토지는 자기 가계의 필요를 넘 어서는 잉여를 생산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 그들은 시장에 가져갈 수 있는 농업 생산물을 갖지 못한다. 그들이 판매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은 그들의 노동력이니, 그것은 자신의 경제 단위에서는 오직 이따금씩만 완전히 활용된다.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된 것은 큰 농업 사업체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것이다. 17세기까지 우리는 농민에게 고용된 일용노동자, 머슴, 하녀를 오직 드물게만 발견한다. 이 시기부터 비로소 그들의 고용은 더 일반적이 된다. 그런데 가족 구성원을 임금노동자 로 대체한 것은 그들 가족의 품에 남아 있는 저 노동력의 처 지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그들도 점점 더 가장을 섬기는 임 금노동자의 수준으로 격하되는 가운데 동시에 농장, 가족 상 속지는 점점 더 가장의 배타적 재산이 된다.


오직 자력으로 자신의 토지를 경영하는 옛 농민 가족 조 합 대신에 대형 농민 경제 단위에는 고용된 노동자 무리가 들어와서 지주의 지휘 아래 그를 위해 밭을 갈고 그의 가축 을 돌보고 그의 수확을 곳간에 들인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 소유하는 자와 프롤레타리아 간 계급 대립이 마을에, 아니 농민 가계 자체에 침투해 옛 조화 와 이익공동체를 파괴한다. 이 모든 과정은 앞서 말한 바처럼 중세에 이미 길이 닦였 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비로소 그것을 아주 가속화해 서 도처에서 농촌 인구의 상황에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그 러나 그것은 아직 그 끝에 도달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진 행되어 계속 다시 새로운 지역을 장악하고 자기 필요를 위한 농민적 생산의 점점 더 넓은 영역을 상품 생산의 영역으로 바꾸며, 농민의 금전 필요를 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상승시키 며, 가족노동 대신에 임금노동을 도입하고 있다. 그와 같이 도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만으로도, 자본이 농 업 생산에 진입하고 대경영과 소경영 간 대립이 형성되는 것 없이도 이미 옛날식 농민적 생존의 토대를 완전히 뒤집어엎 을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그 작용을 공업에 국한하지 않는다. 자본 은 충분히 강화되면 곧바로 농업도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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